충치는 사람을 참 힘들게 한다. 거울을 보다 문득 보인 작은 점 같은 충치를 애써 무시해본다. 조금 걱정되면 치과에 가 보는데, 진료해주시는 의사선생님은 이 정도면 앞으로 양치만 잘 하면 굳이 치료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원하는 답을 들었기에 안심하고 치과를 나가며 다시는 치과에 오지 않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또 한 번 다짐한다. 다짐보다는 안심했던 것이 더 컸는지 어느 순간 이는 이전과 달리 욱신거리는 신호를 내게 보내는데, 내가 그걸 느끼고 치과에 갔을 때는 이미 무시무시한 소리(와 지불해야 할 치료비)가 주는 공포를 견디며 치료를 해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진다. 점 하나가 통증이 되어가는 그 중간의 시기를 어찌 잘 넘겨보고 싶은데, 그게 참 어렵다.
문득 충치치료를 받으며 교육격차가 꼭 충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이게 교육저널의 힘일까...!). 예전부터 교육격차라는 건 없을 수가 없었지만 우리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라 판단해 그저 안주해 있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COVID-19를 만나며 순식간에 커져버린 교육격차를 마주하게 되었다. 이걸 되돌리는 데에는 치과 치료비마냥 큰 경제적 부담이 뒤따를 것이고, 그 속에 놓인 아이들은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애써 위안 삼을 수 있는 점은, 이렇게라도 아이들의 교육격차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아이들을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궁극적인 방향이 무엇인지에 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는 것이다. 사람은 급하면 초인적인 힘이 생기는데, 아무래도 COVID-19가 급한 불씨를 지피지 않았나 싶다.
2. 서울시교육청의 교육후견인제
2021년 4월 6일 서울시교육청 기자간담회를 통해 서울시교육청에서 교육후견인제를 추진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정확히 언제부터 이런 제도를 구상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COVID-19가 벌려놓은 교육격차와 교육의 사각지대를 해소해보겠다는 취지로 홍보가 되었으니 아무래도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이후 6월 22일에는 교육후견인제 시범 운영 사업에 참여할 자치구와 마을기관을 대상으로 공모를 진행하였고, 같은 달 29일에 열린 서울교육정책 정책포럼에서 학교-가정-지역사회 협력 교육후견인제의 방향 및 과제에 대해 다루었다. 마침내 8월 19일에 마을 기관 20곳을 선정하여 오는 9월부터 시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실시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서울시교육청이 추진하는 교육후견인제도는 무엇이며, 이것이 현재의 교육 문제를 해결하고 교육복지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을지에 관해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교육후견인제도란 ‘교육후견인’이 그의 도움이 필요한 모든 어린이·청소년들에게 교육의 전 과정에서의 교육격차 및 교육소외 해소 및 방지를 위해 적합한 교육지원 프로그램을 연결하고 이후 지속적 만남을 통해 효과성을 점검하고 상담하는 서비스이다. 여기서 ‘교육후견인’이라는 새로운 용어가 등장한다. 서울시교육청에서 정의하고 있는 ‘교육후견인’이란 교육지원이 필요한 어린이·청소년과의 지속적 만남 및 학부모 담임 등과의 상담 및 소통으로 학습 지원, 정서심리지원, 특별 돌봄 등 아이들의 입장에서 적절한 교육지원 프로그램을 연결하고 빈틈을 메울 수 있는 건강한 이웃이자 사회적 보호자 역할을 하는 자원봉사자를 일컫는 말이다. ‘교육후견인’은 퇴임교원, 학부모, 마을활동가 등이 될 수 있으며 성범죄전력 조회 등을 거쳐 30시간 기본연수를 이수한 후 본격적인 활동에 투입된다. 이 제도의 특징은 동단위 기반의 지원체계라는 점인데, 수혜 대상 아동도 동단위 교육안전망 협의체에서 추천을 받아 선정되며, 그를 돕기 위해 학교와 동주민센터 등을 비롯한 다양한 마을기관과 자원이 활용된다.[각주:1]
3. 명명의 중요성_‘후견’이어야만 했니?
왜 하필 ‘교육후견인’이라는 명칭이어야 하는지 아쉬움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필자 또한 이 제도에서 가장 아쉬운 점을 꼽으라하면 바로 이 명칭 선정이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후견(guardianship)'이라는 용어를 접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경우는 친권자가 없는 미성년자나 발달장애인, 노인 등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 제도에서밖에 없는데, 이로 인해 아이들에게 제도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주어 서비스의 활용률 저조를 야기할 수도 있거니와, 외부로부터의 잘못된 낙인이 생겨 제도를 활용하는 아이들에게 또 한 번의 상처를 안기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개인적인 의견으로 필자는 ’교육후견인‘이라는 용어에서의 ’후견‘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는 공동체와 개인의 관계를 이해하는 관점 중 하나인 paternalism(온건적 후견주의)과 맞닿아있다고 느꼈다. 근대 동아시아 국가에서 주로 국가가 국민의 삶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가기 위해 개인의 자유를 제한했듯, 아이를 하나의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조화시키기 위하여 또 하나의 눈이 아이를 감시하게 된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성장을 위해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지만, 이를 위해 굳이 ’교육후견인‘이라는 역할이 추가되어야 하는지 그 정당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기존의 교육복지(지역아동센터에서의 멘토링, Wee 클래스 등)와도 꽤나 중복되는 부분도 많으며, 단지 차이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동단위에서 시작하기에 사각지대를 줄일 수 있다는 점과 파편화된 기존 복지제도와 달리 통합체계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인데, 왜 기존의 서비스를 통합하려하기보다는 굳이 ’교육후견인‘까지 만들며 아이들에게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는 새로운 ’시선‘을 만드는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4. 가장 무서운 눈과 입_‘시선’과 ‘소문’
‘시선’이라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인간과 다른 동물도 사람의 기분과 생각이 담긴 ‘시선’을 읽을 줄 안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더욱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다. 물론 서울시교육청에서 구상한 교육후견인제도는 서비스가 필요한 모든 아이들을 대상으로 지원한다고 하는 ‘보편 복지’를 표방하고는 있으나 결국 이 서비스를 주로 이용하게 되는 것은 ‘저소득층’의 아이들일 것이다. 아무리 어린 아이들이라고 해도 자신의 가정사나 형편이 남에게 일일이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교육후견인’이라는 명분으로 일면식도 없는 어른은 나도 모르는 나의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 정보의 격한 비대칭 속에서 받는 따가운 시선은 그리 달갑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동단위’라는 이 서비스의 특징은 양날의 검과도 같다. 아이들을 더욱 세심하게 들여다볼 수도 있지만, 온 동네가 아이의 사정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은 아이의 입장에서 끔찍할 수밖에 없다. 동네에서는 시선뿐만 아니라 ‘소문’도 무섭다. 어디서 샌지도 모르게 어느 순간 이야기는 퍼져 있다. 학교선생님만, 혹은 아동센터에서만 알아줬으면 하는 나의 비밀을 또 한 사람이 더 안다는 것은 그만큼 소문이 퍼질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일해 주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음 한 켠의 찝찝함은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교육후견인의 후보로서 학부모를 활용하는 것은 다시 한 번 고려해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학부모는 전문적인 인력도 아니거니와 로봇이 아닌 이상 객관적이고 공과 사를 구분하는 봉사자가 될 확률이 적다. 학부모들의 커뮤니티는 ‘시선’과 ‘소문’이라는 소용돌이의 온상지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학부모 교육후견인의 작은 실수가 아이에게 큰 상처를 입히게 되는 위험성이 크다.
아직은 시범 사업이기에 지적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려되는 점 하나를 더 언급하자면, 협력하는 마을기관이 적다는 점과 이로 인해 수혜를 받고 효과를 검증할 학생이 적다는 점이다. 이번 공모에서 서울시교육청이 직접 지정하는 ‘교육청 지정형’ 마을기관으로 15곳, 자치구와 마을기관이 협력하는 ‘자치구 매칭형’으로 15곳 등 총 30개 기관을 선정할 계획이었으나 총 27개 기관만 신청했다고 한다. 이중 8곳은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탈락했고, 결국 ‘교육청 지정형’ 11곳과 ‘자치구 매칭형’ 8곳만이 선정되었다. 이는 목표치 대비 63.3%였으며, 서울시교육청이 예산을 지원하겠다며 적극 홍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신청 수도 적었고, 신청한 기관마저도 제출된 사업계획서에서 교육후견인제에 대한 낮은 이해도가 드러나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각주:2] 마을기관 등 동단위의 기관협력이 이 시스템의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인데, 낮은 이해도와 참여율은 사업의 존재를 위태롭게 한다. 연쇄적으로 서비스를 받을 학생의 수조차 적어져 과연 제대로 된 효과 검증이 가능할지, 일회성 서비스에 그치는 건 아닐지 걱정이 된다.
5. 키다리아저씨와 그늘
서울시교육청이 그리는 ‘교육후견인제’의 모습은 온 마을이 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을 위해 ‘키다리아저씨’가 되어주는 모습일 것이다. 힘든 상황 속에서 ‘연대’의 정신을 잃지 않고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그들의 그림자로 아이들이 지낼 수 있는 그늘막을 만들어주는 모습은 가히 이상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교육격차와 더불어 맞벌이 가정의 증가로 인해 제대로 된 돌봄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자신만을 위한 키다리아저씨가 나타나주길 기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그 키다리아저씨가 교육후견인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지는 고민해보아야 할 부분이며, 누가 되었든 키다리아저씨로서 만들어주는 그늘막이 아이에게 헤어나올 수 없는 어둠이 되지 않게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삐뚤빼뚤하게나마 키다리아저씨의 실루엣을 그려나가고 있는 서울시교육청의 첫 발걸음은 교육복지의 새로운 패러다임의 첫 장을 쓰기 위한 의미 있는 시동은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Dichter
2021년 6월 29일 ‘서울학생의 통합적 교육안전망을 꿈꾸다’ 정책포럼 자료집 참고 [본문으로]
혹자는 여기에서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신설된 국어 교과의 ‘언어와 매체’ 과목의 존재이다. 이 과목은 이름에 ‘매체’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과 매우 밀접해 보이며, 실제로 미디어 리터러시 관련 내용을 다수 담고 있다. 이 과목은 크게 두 가지를 교육하는 것이 목적인데, 하나는 ‘언어’, 즉 올바른 언어 생활을 위한 문법 교육이고 나머지 하나는 ‘매체’, 즉 올바른 매체 활용을 위한 매체 교육(미디어 교육,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다. ‘언어와 매체’ 교과는 4개의 대단원으로 구성된다. 첫째 대단원 ‘언어와 매체’에서는 언어의 세 가지 종류인 음성 언어, 문자 언어, 매체 언어의 본질과 특성을 다룬다. 둘째 대단원은 ‘국어의 탐구와 활용’으로 음운ㆍ단어ㆍ문장ㆍ담화와 같은 국어의 구조와 시대ㆍ사회ㆍ갈래에 따라 달라지는 국어 자료의 특성을 살핀다. 셋째 대단원은 매체에 관한 단원으로, 다양한 매체의 특성과 매체 자료의 수용ㆍ생산ㆍ표현, 매체 언어가 인간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다. 마지막 대단원은 ‘언어와 매체에 관한 태도’로 언어와 매체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함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언어와 매체’ 교육과정에서 ‘매체’ 관련 주요 학습 요소와 성취 기준만을 선별하면 다음과 같다.
앞서 제시한 강진숙 외의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 6가지를 기준으로 실제 ‘언어와 매체’ 교과서를 분석해 보자. 교과서는 천재교육 출판사에서 민현식을 대표 저자로 하여 출판한 것을 대상으로 삼았다.
첫째, ‘지식’ 역량에 대하여 언어와 매체 교과서는 단지 신문과 잡지, 라디오와 텔레비전, 휴대 전화, 인터넷 등 매체 유형에 관한 개별 사실을 피상적으로 나열하고 있을 뿐이다. 뉴 미디어의 특징으로 실시간 상호 작용 가능, 상호 능동적 정보 교환, 멀티미디어적 성격, 복합 양식성 등을 제시하고 있으나 이 또한 부족하다.[각주:1] 앞서 이석영이 제시한 필터 버블, 반향실 효과, 확증편향 등 뉴 미디어가 인간의 사고에 미치는 영향을 복합적으로 살펴보는 것을 추가하는 것이 요구된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가짜 뉴스의 양산,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먼저 지녀야 할 태도이기 때문이다. 또한 매체의 정보 구성 방식에 대해서도 상식 수준에서만 설명하고 있는데, 앞서 이희심이 제시한 텔레비전 뉴스의 보도 순서, 앵글 구도 따위가 정보 전달에 미치는 영향과 같은 내용을 추가적으로 삽입하여 내용을 풍성하게 만들 필요성이 보인다.
둘째, 비평 부문에서 교과서는 ‘인공 지능’으로 검색하여 나온 기사들이 어떤 관점과 가치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을지 추측하기, 두 개의 기사문을 읽고 다양한 관점과 가치 고려하여 비평하기 등을 제시하고 있다.[각주:2] 그러나 학생의 능동적인 역할이 주어져 있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이를테면 학생이 스스로 ‘주제어 선정 ― 주제어 검색 ― 기사 분석 ― 내용 요약 ― 기사의 관점 분석 ― 자신의 입장 정리’라는 과정을 거쳐 능동적으로 비평 역량을 증진할 수 있게 학습 활동을 재구성해야 할 필요가 보인다.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이라는 ‘리터러시’의 의미 그 자체를 생각했을 때도, 학생이 스스로 자료를 검색하여 한 편의 글을 완성하게 하는 학습활동이 적어도 하나는 존재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셋째, 의사소통 역량에서는 언어 문화와 매체 문화의 발전을 위해 건전하고 건강한 매체 자료를 생산하는 문화, 매체 자료를 주체적ㆍ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문화를 기르자고 제시하고 있다.[각주:3] 그러나 학습활동 내용이 대체로 자아성찰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실질적인 효용성이 의문시된다. 의사소통 역량은 말 그대로 ‘소통’인 만큼 나와 남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관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넷째, 접근/활용 역량을 기르기 위해 교과서는 따로 분량을 할애하고 있지 않다. 이는 아마 교육의 대상이 되는 학생들이 ― 때때로는 ‘언어와 매체’ 교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보다도 ― 매체 활용 능력이 뛰어난 경우가 많기 때문이리라 생각된다. 만약 교과서가 정보화로부터 소외된 계층을 위한 평생교육 차원에서 새로 제작된다면, 그때는 이러한 내용을 보강해야 할 필요성이 보인다.
다섯째, 구성/제작 측면에서 교과서는 동음이의어, 발음의 유사성, 대구와 비유 등을 활용한 매체 언어의 창의적 표현을 제시하고 찾아보게 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매체 창작을 교육하고 있다. 아울러 학습 활동에서 직접 창의적 표현을 이용해 매체를 제작하게 하고 있는데,[각주:4] 실제 현장에서는 다양한 매체를 사용한다기 보다는 그저 말장난, 난센스를 만드는 것으로 끝날 가능성이 더 커 보인다.
여섯째, 참여 측면에서 교과서는 여론의 폭발, 가짜 뉴스의 선동, 차별ㆍ혐오 표현, 언어폭력 등이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설명하고 바람직한 언어 사용 태도를 기르자고 하고 있다.[각주:5] 그러나 학습활동으로 ‘제시된 매체 언어의 부적절성 파악’, ‘자신의 언어 습관 성찰 보고서 작성’ 등이 제시되어 있을 뿐이어서 실제 학생들에게 효과가 있을지 의문시된다.
‘언어와 매체’를 넘어서
이상에서 살펴본 문제들에 비하여 근본적인 문제는, ‘언어’와 ‘매체’를 결합한 교과 그 자체의 문제점이다. 이 교과서는 대다수의 고등학교에서 3학년 국어과 선택과목으로 학생들에게 제시되며,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 3학년은 대학수학능력시험 공부를 위하여 매진하는 것이 일반적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교과의 문제점이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이 과목이 물론 대학수학능력시험 국어과 선택과목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지식 습득이 주(主)가 되는 ‘언어’ 공부에 밀려 태도 함양이 주가 되는 ‘매체’ 영역은 학교 현장에서 배제될 가능성이 크다. 더욱이 교과서에서 언어 영역과 매체 영역이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공평하게 결합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므로[각주:6] 차라리 언어 영역과 매체 영역을 분리하여 독립적인 교과로 만드는 편이 나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될 경우, 언어 영역 교과서는 문법 지식 습득과 활용 위주로, 매체 영역 교과서는 과감하게 활동 중심으로 구성하는 편이 교육에 있어 효과적일 것이다.
‘언어’와 ‘매체’가 왜 하나의 교과목 속에 묶여 있어야 하는지도 근원적인 문제이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물론 인간의 언어를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지만, 미디어 리터러시가 매체에서의 정확한 어문규범 사용 능력을 포함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언어와 매체에서 언어 영역은 ‘언어’라고는 하지만 그 내용은 ‘국어학’의 내용, 특히 그중에서도 국어 문법 지식에 관한 것인데 과연 ‘미디어 리터러시’가 특정 국가의 국어에 종속되는 개념인지는 재고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과를 국어과에서 분리하여 새로운 교과로 독립시킬 필요성이 엿보인다.
새로운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담지자는 이제 국어 교사가 아니라 사서 교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서는 문헌정보학과 도서관학의 담당자로서, 전통적으로 미디어를 수집하고 목록을 만든 후, 미디어를 조직하여 도서관이라는 장소를 통해 대중들이 미디어와 정보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디지털화의 추세 속에서 사서들은 디지털 도서관을 구축하거나 가상 도서관 학습 공간을 활용하고, 온라인 정보 이용 교육을 담당함으로써 이용자들이 디지털 미디어 정보에 접근하는 것을 돕고 있다. 미국의 공공도서관 사서들은 미디어 리터러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미국의 공공도서관은 미국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기관’으로 인식되고 있다. 더불어 ‘가짜 뉴스’ 확인 방법 또한 미국 도서관에서 담당하고 있다.[각주:7]
캐나다의 MediaSmarts는 사서를 위한 연수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사서에게 미디어 교육 전문가 자격증을 부여하고 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의 빅토리아주 정부는 학교 사서들이 학생들의 디지털 리터러시 함양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인지하였다. 일본의 학교 도서관법과 사서 교사 강습 규정 또한 사서 교사를 미디어 및 정보 리터러시 교육에 배속하고 있다. 미국의 많은 주에서는 사서를 디지털 시민성, 인터넷 안전 및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이해 당사자이며 이와 관련된 자문 위원회에 참여해야 하는 필수 직종으로 인정하고 있다.[각주:8] 이러한 해외의 사례들은 사서의 역할이 학생의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 향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서 사서 교사가 학생을 대하는 일은 도서부 학생의 동아리 활동이나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오는 학생을 대할 때뿐이다. 때때로 도서관 이용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고 도서관 활성화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독자적인 수업을 담당하지는 않는다. 사서 교사들이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담당하게 되면 기존의 국어, 윤리와 연결 짓는 추상적이고 비실제적인 형태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아니라, 자신의 문헌정보학 지식을 활용하여 보다 실제적인 교육이 가능해질 것이다. 또한 학교 도서관이 비단 학생들의 교육 기관으로서만 기능하지 않고 지역 사회의 중심 교육 기관으로 기능한다면, 사서 교사들은 지역의 소외된 정보화 계층을 위해 미디어 리터러시를 강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미디어 리터러시 교과가 학교 현장에서 잘 적응한다면, 그 성과를 가지고 또한 평생 교육 체제로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실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때는 외국의 사례를 본받아 학교 도서관 및 지역 공공 도서관의 사서들이 각 지역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담지하는 평생 학습 기관으로도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 도서관은 지역 주민들에게 개방될 것이며, 주민들은 이전보다 더 폭넓고 좋은 환경에서 다양한 문헌 자료를 이용하고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향유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강진숙ㆍ배현순ㆍ김지연ㆍ박유신ㆍ염지홍ㆍ장은주,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과정 운영을 통한 시민역량 제고 방안 연구』, 세종: 교육부, 2019. 교육부, 『국어과 교육과정』, 교육부 고시 제2015-74호 별책 5, 세종: 교육부, 2015. 김상미, 「코로나19 관련 온라인 교육에 관한 국내 언론보도기사 분석」,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논문지』 21(6),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2020, pp.1091-1100. 민현식ㆍ신명선ㆍ오현아ㆍ이지은ㆍ안장호ㆍ조진수ㆍ박진희, 『고등학교 언어와 매체』, 서울: 천재교육, 2018. 박종임,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개선을 위한 국어과 교육과정 현황 분석」, 『청람어문교육』 81, 청람어문교육학회, 2021, pp.7-36. 박주현ㆍ강봉숙, 「미디어정보리터러시 개념과 교육내용 개발」, 『한국도서관ㆍ정보학회지』 51(3), 한국도서관ㆍ정보학회, 2020, pp.223-250. 서보영ㆍ박진희, 「2015 개정 교육과정에 따른 언어와 매체 교과서 비교 연구: 매체 언어의 구현 양상을 중심으로」, 『국어국문학』 187, 국어국문학회, 2019, pp.219-269. 오지향, 「음악교과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필요성과 역할 강화 방안」, 『미래음악교육연구』 3(1), 미래음악교육학회, 2018, pp.27-48. 원용진, 「미디어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한국언론학회 編,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서울: (주)도서출판 지금, 2018, pp.14-46. 이석영, 「도덕과 교육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개선을 통한 도덕성 발달」, 2019년 한국윤리교육학회 추계학술대회, 한국윤리교육학회, 2019, pp.116-120. 이희심, 「사회과에서의 미디어 리터러시 수업모형」, 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2013. 정현선ㆍ김아미ㆍ박유신ㆍ전경란ㆍ이지선ㆍ노자연, 「핵심역량 중심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내용 체계화 연구」, 『학습자중심교과교육연구』 16(11), 2016, pp.211-238.
정우맘 팽현숙
민현식ㆍ신명선ㆍ오현아ㆍ이지은ㆍ안장호ㆍ조진수ㆍ박진희, 『고등학교 언어와 매체』, 서울: 천재교육, 2018, pp.32-33; pp.38-39. [본문으로]
미증유(未曾有)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 유행으로 인해 세계는 팬데믹(pandemic)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2020년 한 해 전 세계는 전대미문의 비대면 시대를 보냈으며, 2021년 현재까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2020년 2월 대구ㆍ경북 지역에서의 확산세로 인해 ‘심각’ 단계에 접어들었고, 3월에는 개학을 앞두고 역사상 유례없는 개학 연기를 세 차례나 겪었다. 그리고 마침내 3월 31일에 정부는 ‘초중고특 신학기 온라인 개학 실시(코로나 19)’라는 제목으로 ‘온라인 개학’이라는 용어를 공식 발표하였다.[각주:1]
이러한 변화에서 날이 갈수록 디지털 미디어의 활용은 날로 중요해지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정보 사회에서 정보의 형평성과 정보 공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미디어와 정보에 접근하는 능력, 문자나 이미지 및 영상 등을 독해할 수 있는 능력, 정보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 정보를 다양한 상황에 이용하고 다른 사람들과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라고 한다.[각주:2]
우리나라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현재 독립된 교과목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도서관과 같은 독립된 교육기관에서 이러한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경우도 찾기 힘든 실정이다. 각급 학교에서 사서 교사는 대체로 교과 수업을 담당하지 않으며, 다만 때때로 ‘도서관 이용 교육’이나 ‘독서 교육’과 같은 명목으로 학생들을 마주친다. 그마저도 국어 교사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상황을 바탕으로 하여,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먼저 논해본 후, 현재 우리나라에서 그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고 사서 교사와의 관련성 속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향방을 살펴보겠다.
미디어 리터러시의 개념과 구성 요소
본래 ‘리터러시(literacy)’라는 단어는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하던 단어로, ‘문해력(文解力)’이라고 한역하기도 한다. 굳이 라틴어였던 이유는 전근대 유럽 세계에서 지식인의 척도가 라틴어에 대한 문해력이었기 때문이다.[각주:3] 오늘날에 리터러시는 라틴어가 아니라 각국의 언어, 나아가 정보 사회에서의 ‘정보 매체에 사용된 언어’로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개념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다양한 설명이 있다. 이에 대하여 정현선 외 5인은 미디어 리터러시를 “정보·문화 콘텐츠에 대한 적절한 접근 및 비판적 이해, 미디어를를 활용한 정보ㆍ문화 생산 및 전달 능력, 미디어를 윤리적이고 책임 있게 이용하는 태도를 포함”[각주:4]한다고 정의하였다. 박주현ㆍ강봉숙은 미디어정보 리터러시를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능동적인 민주시민이 되기 위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층위가 다양한 미디어의 도구들을 활용하여 미디어의 환경을 이해하고 미디어 속 정보에 접속하고 정보를 이해하고 감상하고 평가하고 이용하고 창작하고 공유할 수 있는 지식, 스킬, 태도가 포함된 역량”이라고 정의하였다.[각주:5] 이러한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은 다음의 6가지를 포함한다.
이 6가지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은 어느 하나만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학습 수준과 연령 정도에 따라 점진적으로 모두 추구되어야 한다. 미디어의 기술적 조작ㆍ사용법과 제작 방법에서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가 미디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부적절한 언행을 남용하고 정보 수용에 있어 확증편향을 보인다면, 그는 올바른 미디어 리터러시를 지니지 못한 것이다. 더불어 이들 영역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 어느 한쪽 역량만을 콕 찝어 늘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미디어가 실어 나르는 쟁점들에 대한 비평 능력과 이를 통한 의사소통 능력은 ‘말하기’와 ‘쓰기’의 차원일 뿐이지 사실상 거의 유사한 능력이다. 더군다가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미디어에 대한 기술적 사용법의 숙지가 선행되어야 하므로, 미디어에 대한 접근/활용 능력은 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역으로 어떤 사람이 미디어에 대해 접근/활용만 할 수 있지 그것에 대해 제대로 비평ㆍ의사소통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는 마치 ‘실질적 문맹’ 상태에 있는 것과 같아서 우리는 그가 제대로 미디어에 대해 접근한다고 부르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 6가지 역량은 우리나라 교육에서 제대로 반영되어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보다 먼저, 이들 역량을 교육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필요성
‘미디어 리터러시를 교육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다음의 두 가지로 구성된다. 첫째, 미디어 리터러시를 우리 교육에 포함해야 하는가? 둘째, 미디어 리터러시를 따로 독립된 교과목으로서 교육해야 하는가? 전자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정당성 자체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미디어 리터러시가 교육에서 차지하는 위치, 다른 교과와의 연계 방법에 관한 것이다.
미디어 리터러시를 교육에 포함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류 역사의 상당한 기간 동안 인쇄 매체는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였다. 처음에는 비단에 글을 썼고, 후에는 종이에 글을 썼다. 활판 인쇄술이 개발된 이후 정보의 전파 속도는 날로 증가하였고, 신문이 대량으로 인쇄되며 언론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매체의 발전은 정보화 이후의 매체 발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디지털 매체가 등장하면서 매체의 특성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매체가 전달하는 정보의 양과 속도는 매우 크게 증가하였고,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사건 발생 이후 즉시 파악할 수 있다. 1980년의 대한민국의 광주에서 군부는 단지 방송 송출을 막고 지역을 봉쇄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을 억제할 수 있었으나, 2011년의 튀니지에서는 혁명이 SNS의 바람을 타고 이슬람 문화권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변화에는 늘 명암이 있기 마련이다. 201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 사회에는 ‘가짜 뉴스(fake news)’라는 단어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자극적인 거짓 정보를 여기저기 나르는 뉴스를 뜻하는 이 개념은 이른바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사람들을 현혹하는 거짓은 진실이 설 자리를 잃게 하고 사람들은 잘못된 정보를 진실로 받아들인다. 과거보다 더욱 빨라진 정보의 확산 속도로 인해 이러한 거짓 정보는 SNS의 바람을 타고 전국으로, 전 세계로 손쉽게 확산된다.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이유는 자신의 주장이 정계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라면 추악한 짓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일부 비양심적인 사람들의 정치적인 이유도 한 몫 하지만, 자극적인 정보를 확산함으로써 조회수를 늘리고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언론인들의 경제적인 이유도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시민들의 확증편향은 가짜 뉴스를 더욱 부추긴다. 진실과 거짓이 한데 범람하는 ‘정보의 홍수’를 막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단연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언론 규제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 가짜 뉴스의 남발을 마기 위해 정부의 언론 규제를 허용하자는 것은 도리어 민주주의에 또 다른 위협을 불러일으키고 말 것이다. 따라서 어떤 매체가 건전하고 정확한 정보원인지 가려내는 개인의 역량 강화가 요청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접근했을 때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용진은 ‘가짜 뉴스’에 대항하는 ― 그리하여 시민들을 이로부터 ‘보호하는’ ― 프레임(frame)으로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설정하는 것의 문제점으로 다음을 제기한다. 첫째, 보호의 대상을 어린이나 청소년 등으로만 설정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결과 ― ‘미디어의 폐해를 정확히 인지하자’ 따위의 ― 를 낳을 수 있다.[각주:6] 어떤 뉴스가 ‘진짜 뉴스’이고 어떤 뉴스가 ‘가짜’ 뉴스인지는 전문가조차 판별하기 어려운 문제이며 때로는 인식론적 문제를 수반하기도 한다. 물론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정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용한 것은 아니다. 정보 사회에서 건전한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필수 조건이다. 다만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마치 언론의 모든 부정적인 면모를 단박에 일소해 주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미디어의 특성에 대해 소개하면서, 미디어가 어떻게 사람을 속일 수 있는지, 가짜 뉴스는 왜 생기고 이로 인한 문제는 왜 발생하는지 등을 추가적으로 내용 요소에 포함할 필요성이 있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시하면서 앞서 제시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단지 초등 ― 중등 ― 고등의 학교교육의 틀 안에 제한하지 말고 평생교육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미 학교를 졸업한 성인 계층의 경우, 학교교육을 중심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실시할 때 소외될 가능성이 크다. 만약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학교교육에만 한정한다면 교육받은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 사이의 갈등은 커질 것이고, 결국 부패 언론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한계를 인정하고 미디어 개혁 운동과 함께 연대해야 한다.[각주:7] 부패 언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지 시민들에게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을 길러라!’라고만 요구하는 것은 사태의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시민들에게 문제의 책임 소지를 돌리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시민들이 가짜 뉴스로부터 해방될 권리, 진실을 알 권리가 있음을 스스로 인지하고 자신의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통해 대안 미디어를 구성하고 스스로 올바른 정보를 창출ㆍ전파하며, 나아가 정확한 정보를 생산할 것을 언론에 스스로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다른 언론 대상 시민 단체들의 활동과도 함께 연대해야 할 필요성을 지닌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보호주의적 시각에서 탈피하여 시민 스스로 미디어를 선택, 수용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차원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각주:8]
물론 학교 교육 차원에서와 평생 교육 차원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모두 서술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본서는 지면의 한계상 전자에 집중하여 서술하고, 후자에 관한 것은 후속 연구로 미루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아직 학교 교육에서 제대로 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평생 교육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내용을 개발하는 것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우선 학교 도서관의 사서를 통한 학교 교육 체제에서의 미디어 리터러시에 관해 본서에서 다룬 후에, 학교 및 지역 도서관의 사서를 통한 평생 교육 체계에서의 미디어 리터러시에 관해 후서에서 다루어 보겠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과의 필요성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을 전후하여 교육학계에서 미디어 리터러시에 주목하기 시작하였으며, 다양한 교과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기르기 위한 연구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교과별로 최근의 대표적인 연구들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국어과의 박종임은 현행 국어과 교육과정에 담긴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 관련 내용들을 분석하여 현행 교육과정이 지나치게 ‘문자 언어 기반의 글 자료’를 대상으로 한정하고 있음을 밝히고 미디어 리터러시 관련 역량을 학년(군)별로 위게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각주:9] 도덕과의 이석영은 뉴 미디어 알고리즘의 부정적 측면들인 ‘필터 버블(filter bubble)’,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effect)’,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등을 제시하면서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교과에서 뉴 미디어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미디어 사용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각주:10] 사회과의 이희심은 텔레비전 뉴스를 소재로 뉴스 언어 기호 체계 알기, 기사 받아쓰기, 서사 구조 파악하기, 사실성 검토 및 의미 찾기, 카메라의 숏과 앵글 확인하기 등의 활동을 통하여 ‘게이트키핑(gatekeeping)’과 ‘프레이밍(framing)’, 뉴스에 담기는 이데올로기를 파악하는 방법을 교육하는 수업 모형을 개발하였다.[각주:11] 음악과의 오지향은 디지털 기술의 변화가 대중음악의 제작ㆍ배포 양식 및 음악 감상자들에게 미치는 역할을 분석하고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음악 교육에 접목하여 팟캐스팅, 필드 레코딩 등의 음악 제작 교육을 통해 학생이 스스로를 미디어 제작자로서 정체성 지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각주:12]
보다시피 다양한 교과목에서 많은 수의 연구자들이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현행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도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수수방관하고 있지 않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이렇듯이 교사의 역량에 따라 여러 교과목에서 다각도로 시행될 수 있는 현황이다. 그러나 나는 현행 체제를 넘어서 미디어 리터러시만을 따로 가르치는 교과목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각 교과별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각자 담당하다 보면, 학생은 통합적인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기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미디어 리터러시는 지식, 비평, 의사소통, 접근/활용, 구성/제작, 참여라는 6가지 역량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들 중 어느 하나의 역량만을 길렀다고 하여 그 사람이 참된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기른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각 과목에서 따로 따로 미디어 리터러시를 배우다 보면, 가령 도덕과에서는 윤리적인 ‘참여’ 능력만 기를 수 있고 사회과에서는 ‘비평’ 능력만 기를 수 있으며 음악과에서는 ‘접근/활용’ 능력만 기를 수 있을 것이다. 6가지 역량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미디어 리터러시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분절적 교육은 교육의 효율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혹자는 각 교과 교사가 미디어 리터러시의 6가지 역량을 한꺼번에 향상하는 교육 내용을 구성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각 교과 교사는 우선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교과의 내용 요소와 주요 역량을 교육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고, 그런 상황에서 미디어 리터러시는 뒷전으로 물릴 수밖에 없다. 예컨대 사회과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담당한다면, 사회 교사는 사회과의 내용 요소와 사회과에서 주로 기르고자 하는 학생의 역량을 제쳐두고서 미디어 리터러시의 역량을 모두 골고루 향상하기 힘들고, 그것은 또한 바람직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각 교과 교사는 일차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자신의 교과를 가르칠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미디어 리터러시를 독자 교과로 편성한다면 미디어 리터러시를 학생들에게 책임 지고 가르칠 수 있는 하나의 전문 인력이 탄생하게 되는 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역량들을 모두 다루면서 체계적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을 함양하게 하는 독립적인 ‘미디어 리터러시’ 교과가 필요하다. 물론 이는 현재 여러 교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삭제ㆍ폐기하고 모두 신설 과목으로 이관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과목에서 미디어 리터러시를 분절적으로 교육하는 현행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이를 유기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교과목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학생들의 교과목 선택과 교육과정의 다양화가 추구되고 있는데, 이를 고려하여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공통 과목들(국어, 영어, 통합사회 등)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조금씩 기른 뒤, 2∼3학년 때 독립적인 과목을 선택함으로써 학생의 리터러시 역량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2∼3학년군의 여타 일반선택/진로선택 과목들에서도 조금씩 학습활동의 영역에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계발할 수 있는 활동들을 삽입한다면, ‘미디어 리터러시’를 독립 과목으로 배우고 있는 학생은 여러 과목에서 함께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강화하여, 기존의 분절적ㆍ단편적인 지식 습득의 한계를 넘어서면서 또한 여타 과목과 융합하여 지식을 배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
정우맘 팽현숙
김상미, 「코로나19 관련 온라인 교육에 관한 국내 언론보도기사 분석」,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논문지』 21(6),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2020, p.1092. [본문으로]
서양에서 동아시아 세계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의 경우 10세기 이후 동아시아 세계에 부상하는 ‘문인(文人)’ 세력을 ‘literatus’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 이들이 지닌 리터러시(literacy)는 라틴어가 아니라 한문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을 말할 것이다. [본문으로]
정현선ㆍ김아미ㆍ박유신ㆍ전경란ㆍ이지선ㆍ노자연, 「핵심역량 중심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내용 체계화 연구」, 『학습자중심교과교육연구』 16(11), 2016, p.233. [본문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스마트폰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지는 10년이 조금 넘었고, 유튜브나 페이스북 등의 SNS가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 지는 더 짧다. 그렇지만 이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미디어가 제공하는 자극적인 정보를 판단할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정보량에 휩쓸린 사람들은 그것에 적응할 새 없이 중독되어버렸다.
애초에 사람들의 판단력이 미성숙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물론 옳은 설명일 수 있으나, 과거의 미디어와 지금의 미디어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새로운 미디어는 사용자에게 맞춤형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유튜브는 사용자를 파악하고 사용자가 보고 싶어 할 만한 콘텐츠를 내놓는다. 우리는 신문사나 방송사의 정치 성향을 파악하고 언론에서 제공하는 정보들을 판단할 수 있으나, 새로운 미디어에서는 역으로 미디어가 사용자를 판단한다. 그것도 아주 세심하게, 맞춤으로. 예전에는 보고 싶지 않은 소식들도 강제로 들어야 했다면, 이제는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본인이 애써 노력(?)해야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가끔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미흡하여 꼴 보기도 싫은 콘텐츠를 소개해줄 수도 있겠지만.
나와 다른 사람이 연결되는 것, 그것은 적당한 공통의 기반과 소통을 통해 가능하다. 공통의 기반을 발견하고 소통을 이어나가는 것은 쌍방이 노력을 해야 하고, 다들 알다시피 매우 어려운 일이다. SNS,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관계 맺음에 빠른 속도와 편리함을 주었지만, 관계 맺음의 내용에 대한 성찰은 부족하다. SNS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은 광고이고, SNS를 운영하는 기업은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되어있다. 사용자가 광고를 많이 보게 하는 것, SNS를 길게 사용하게 만드는 것만이 SNS가 잘 되는 길이므로 정보 제공도, 친구 추천도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는 SNS상에서도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고, 다른 영역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넉 달 전, 4월 24일 고(故) 손정민 군은 서울 반포한강공원에서 친구 A 씨와 술을 마시고 잠든 뒤 실종되었다. 며칠 후 그가 시신으로 나타나자 손정민 군의 아버지는 그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의혹을 제기했고, 용의자로 A 씨를 지목했다. 그러나 A 씨의 혐의점은 경찰 조사에서 밝혀지지 않았고, A 씨는 입장문을 밝힌 후 가짜뉴스와 악플에 대한 고소를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이 사건에 조사할 것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A 씨에 대한 의혹을 집요하게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1]
미리 말하지만 필자는 손정민 군의 사망은 안타까운 사고 그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판단으론, 고(故) 손정민 군의 사망을 '사건'으로 불러야 한다면 그 이름은 사망 그 자체에 붙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망 이후 몇몇 사람들의 편협한 사고가 만들어낸 마녀사냥, 악의적인 증거 날조, 선동에 붙어야 하는 이름이다. 아주 단순한 사고가 어마어마하게 몸집을 불려 대한민국의 여름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 상황이야말로 당황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아주 안타까운 일이다. 주목을 받아야 할 억울한 죽음들이 잊혔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슈를 판단하는 능력이 고작 이 정도였기 때문에, 언론과 미디어는 떠오르는 이슈에 목 빼고 동조하기 바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유튜브가 진실이 되어버린 이 상황에서, 일개 사용자인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지금부터 미디어 사용자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2. '틀딱'과 '문맹'은 기술이 결정한다.
필자와 필자의 외할아버지는 평소에 교류가 많고, 집도 가까워 5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곳에 산다. 한번은 필자가 할아버지께 전화했는데, 두 통, 세 통을 해도 전화를 받지 않아 걱정했던 일이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할아버지는 필자의 집으로 찾아왔는데, 필자가 전화한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셨다. 그래서 "전화를 왜 안 받으셨냐" 여쭤보니, 전화음이 무음이 되어있어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근데 더 놀란 것은 무엇이었냐면, 그렇게 된 지 이틀이 지났는데 무음 해제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셨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의 할아버지는, 단순한 폴더폰을 계속 사용하시다가 비교적 최근에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셨다. 작동법도 낯설고 외양이 훨씬 단순해진 스마트폰을 마주한 할아버지는 아주 기본적인 기능도 하나하나 배워서 알아야 했지만, 어디에서도 그것을 일일이 가르쳐주는 곳은 없었다. 할아버지 친구분들은 할아버지와 거의 비슷한 상황인 경우가 많았고, 가족들은 스마트폰에 익숙해진 지 한참 되어 할아버지의 불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한참을 휴대폰 없이 다니셨고, 요새는 조금 익숙해지셔서 포털 사이트를 이용해서 검색까지 하실 줄 알게 되었다.
정용찬 정보통신정책연구원 ICT통계정보연구실 데이터사이언스그룹장이 발표한 '호모 스마트포니쿠스(Homo Smartphonicus), 세대별 진화 속도' 보고서에 따르면 70대 이상 스마트폰 보유율은 2013년 3.6%에서 2018년 37.8%로 매우 증가했다.[각주:2] 그러나 스마트폰 보급률과는 별개로, 스마트폰의 기능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60세 이상 노년층의 모바일 뱅킹 이용률은 5.5%에 불과하고, 카카오뱅크와 케이뱅크에 가입한 65세 이상 가입자 비중은 2019년 1월 기준 1%를 넘지 않았다.[각주:3] 이러한 불편함의 원인으로 스마트폰 사용환경이 고령자의 신체적/인지적 특징에 맞추어지지 않았단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스마트폰 특성상 작은 화면을 손가락으로 섬세하게 조작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노인들의 경우 움직임이 둔해지고 지문이 닳아 조작이 힘들다. 여기에 노안으로 휴대폰의 글씨를 키우면 화면 안의 정보량이 적어지고, 한 번에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온라인으로만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아지는데 노인들은 그러한 환경에 적응하기가 더 힘든 것이다. 아울러 '데이터', '와이파이' 같은 신조어는 영어에 기반을 두고 있어,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자들은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위해 언어 장벽을 넘어야 한다.
복잡한 은행 업무를 비롯해 거의 모든 일을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모든 사람'이 그 혜택을 받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도구에 대한 이해와 사용 능력이 부족한 탓에, 노인들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를 판단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다양하지 않아 특정 앱, 미디어에의 의존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프린스턴 대학과 뉴욕 대학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2016년 미국 대선 기간 동안 전체 8.5%의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떠돌아다니는 가짜뉴스를 공유한 데 비해 65세 이상의 사람들은 11%가 가짜뉴스를 공유하는 데 참여했다.[각주:4]
상황이 이러한데 미디어를 사용하지 못하거나 극단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노인들에 대한 비방은 줄어들지 않는다. "집에서 편리하게 은행 업무를 다 할 수 있는데 왜 어르신들은 굳이 오프라인 은행을 찾아가냐"는 조소 섞인 비난, 나이 많은 극우 유튜버들을 보면서 틀딱이라고 비웃는 사람들. 이런 말들은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을 폄하하고 배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답답함 없이 기기를 쓰고 싶지 않을까? 기기가 이미 사용자를 다양하게 규정하지 않는데, 약자 개개인에게 시대에 뒤떨어진다며 더 배울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수많은 틀딱과 디지털 문맹을 만들어낸 것은 미디어의 진보와 발전에서 약자를 배제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개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미디어의 진보와 발전에 약자의 목소리를 포함하는 것이다.
3. 그리고 가짜뉴스는 공격하기 쉬운 대상을 찾아낸다.
앞에서 노인들의 이야기를 하긴 했으나, 사실 확증편향은 노인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노인들의 신체적/인지적 특성과 미디어 사용 환경이 잘 맞지 않아 그럴 위험이 더 크다는 것이지, SNS는 이미 그 자체로 사용자가 확증편향을 가지게 할 가능성이 크다.
생각해보자. SNS는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SNS 운영 수익은 어디에서 나올까? 누구나 아는 답이지만, SNS의 수익은 광고에서 나온다. SNS는 필연적으로 사용자가 광고를 많이 볼 수 있도록 오랜 시간 붙잡아놓아야 하고, 사용자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여 맞춤 정보, 맞춤 광고를 적절하게 띄운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다'는 식의 농담은, 다시 생각해보면 유튜브가 당신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계속 붙잡아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는 사이에 당신은 유튜브 프리미엄을 끊지 않은 이상 광고 한두 편을 더 볼 것이고, 또 다른 추천 영상에 이끌릴 것이고, 다시 광고를 보고... SNS는 이렇게 사람들을 끌어들여 쉽사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각주:5]
SNS는, 특히 유튜브의 경우 사용자의 시선을 계속 붙잡아두기 위해서 더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영상을 추천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했던 프린스턴 대학과 뉴욕 대학의 공동연구에서도, 극성 트럼프 지지자(=힐러리 극성 반대자)일 경우 가짜뉴스를 퍼 나르는 빈도가 더 높았다. 최근 한국에서도 극우파 유튜브 발 가짜 뉴스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코로나 양성 확진자를 보건 당국이 허위로 양성하고 있다"라거나, "(코로나 확진자를 격리해놓는 것이) 정치적 탄압이 아니냐"라는 자극적인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각주:6] 서두에 다루었던 고 손정민 군의 사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발언들은 마치 사실인 양 포장되어 여기저기 퍼지고, 미디어를 편향적으로 접하는 사용자들에게 특히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확증편향은 더 폭력적으로 사회의 어떤 면을 재생산한다.
어떤 가짜뉴스는 이런 확증편향을 자극하여 조회수를 늘리기 위해 사회의 구조적인 차별, 뿌리 깊은 폭력성을 답습한다. 필자는 최근 동아일보, 세계일보 등에서 퍼뜨린 가짜뉴스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이 기사 제목에서 사실인 것이 무엇일까? 사실인 것은 '3호선에서 여자 승객이 쓰러졌다'는 내용뿐이다. 이 여자 승객이 쓰러진 후 최초로 119에 신고한 신고자는 쓰러진 여자 승객이 핫팬츠 차림도 아니었고, 쓰러진 여자 승객을 도운 사람 중에는 남성도 있었다고 한다.[각주:7] 지하철에서 쓰러진 여성을 여러 시민이 도왔던 단순한 해프닝인데 언론은 성범죄 무고죄를 겨냥하면서 이것으로 성별 간 싸움을 붙인 것이다.
이 가짜뉴스는 '보배드림' 커뮤니티 내 목격자의 글을 주류 언론사가 가져다 쓰면서 유포되었다. 여성과 남성을 대치시키고, 여성의 복장이 '핫팬츠'였다는 걸 꼭 언급하는 정성스러움에서 알 수 있듯이, 기사 제목은 반(反)페미 남성들의 분노에 불을 지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기사의 댓글난은 가짜뉴스임이 밝혀지기 전까지 '여자들 자업자득이다', '도와줬다가 성추행범으로 몰릴 바엔 (...) 사회가 이렇게 된 건 남자들 탓이 아니라 여자들이 만들었다는 걸 잊지 말자' 등과 같이 여성을 향한 비난과 매도로 가득 찼다.[각주:8]
이 기사와 댓글에 성폭력 무고에 대한 두려움이 지나치게 드러나는 것 역시 확증편향이라고 볼 수 있다. 2019년 7월 19일 공개된 '검찰 사건 처리 통계로 본 성폭력 무고 사건 현황'에 따르면, 성폭력 무고죄로 고소된 사건 중 84.1%는 불기소되고, 기소된 사건 중에서도 15.5%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성폭력 무고죄로 기소된 피의자 수는 556명으로, 성폭력 사건으로 기소된 피의자 수의 0.78%에 불과하다.[각주:9] 위의 '3호선 핫팬츠녀' 기사는 성폭력 무고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을 겨냥하여 조회수를 뽑아냈고, 어떤 여성은 해명할 기회도 제때 얻지 못해 또다시 '핫팬츠녀'로 대상화되었다.
이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언론은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인 양 작성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 중 미처 몰랐던 일, 알기 어려웠던 사실들을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는데,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면 즉시 구별해낼 수 있는가? 이 사건은 가짜뉴스가 올라온 다음 정황을 파악하고 오마이뉴스에서 팩트 체크 기사가 올라오기 전까지 날개 돋친 듯 퍼지고 있었다. 개인은 관심법을 사용하는 궁예가 아닌 이상 뉴스 한 편을 보고 사실과 거짓을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뉴스를 보고 대화를 할 수 있는,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다.
4. 그래서, 미디어 교육은?
필자는 '미디어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싶지 않았다. 스마트폰, 언론, 미디어는 자본만을 좇을 경우 편향된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그 편향된 사람들을 자극하여 돈을 번다. 이런 언론과 미디어는 사람과 사람을 잇고 몇몇 사건들을 주목하여 드러내지만, 그 상세한 내용 - 누구와 누구를 잇는지, 이 사건을 발굴하는 것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 은 쉽게 간과한다. 일개 사용자인 우리는 어그로 끌려서 조회수에 기여하는 독자였다가, 기사 내용에 대해서 갑론을박을 펼칠 수 있는 비판적인 독자이기를 어쩔 수 없이 반복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스마트폰과 미디어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얻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연습'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개인의 역량 강화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구에 대한 교육과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도록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부추기는 미디어와 언론의 구조에 항의할 수 있도록 정치교육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도구 사용을 교육하는 동시에 도구 역시 바뀌어야하고,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함과 동시에 미디어와 언론을 시정해야한다.
#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지 않도록.
디지털 기기와 그 속의 사람들은 '오프라인의 내가 살던 세계 많이 다른 세계'일 것이다. 사람들의 확증 편향은 이 세계를 '다양하게' 접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문제이다. 디지털 기기 사용 방법은 여태껏 혼자서 익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심각해져만 갔다. 필자는 도구에 대한 교육과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교육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도구와 미디어를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습관을 벗어나기 위해서 도구 사용 방법을 배우고, 타인과 소통하면서 본인의 확증편향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방식으로 도구와 미디어를 배우는 것은 특히 앞서 언급했던 노인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교육 방향을 추상적으로 늘어놓았는데, 독일의 '뮌스터 벤노하우스'를 예시로 들면 구체화될 수 있을 것 같다. 뮌스터 벤노하우스는 노인들을 위한 시민 미디어센터이다. 이 기관에서는 노인층과 청년층이 함께하는 영상 프로젝트, 뉴미디어 시민TV 공동 제작 등 미디어의 생산에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각주:10] 이처럼 노인층과 같이 소외된 이들을 디지털 기기의 세계와 공론장에 동시에 끌어들이고, 시민의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돕는 활동이 있다면 노인은 더이상 가짜뉴스를 퍼나르고 선동하는 이들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 거대한 흐름에 작은 것들이 압도되지 않도록.
위에서 필자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한 교육안을 제시했지만, 이 교육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는 개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의지 있는 개인들이 쉽게 교육받을 수 있는 제도도 중요하지만, 의지 없는 개인들도 포용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필자 생각엔, 사회가 가짜뉴스로부터 개인들을 지키는 안전망이 되려면 사람들과 소통하고 본인의 의사를 정치적으로 표현할 역량을 갖춘 시민들이 필요하다.
최근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법안은 가짜뉴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징벌적 손해배상제), 가짜뉴스로 추정되는 뉴스를 노출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열람차단 청구권).[각주:11] 그러나 이 법안의 위험성과 효용성을 고민해보면 여러 의문점이 생긴다. 우선 정부가 언론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할 수 있고, 언론의 권력 고발 기능을 제한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 법안은 유튜브, 페이스북 발 가짜뉴스는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다. 필자의 글에서도 다양한 사례를 언급했는데, 유튜브발 가짜뉴스가 활개를 쳐 혼란을 일으켰던 최근의 상황들을 생각해보면 이 법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심스럽다. 다시 말해 가짜뉴스와 그로부터 비롯된 혼란은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언론중재법 개정으로는 막을 수 없고,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결국, 나날이 빠르게 변화하는 미디어와 언론, 가짜뉴스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불명확하고 불완전하지만 이미 발빠르게 형성되어있는 무언가, 시민 사회의 비판적인 판단 능력이다. 더불어 아주 사소하지만 중요한 문제, 예컨대 노인들이 디지털 미디어에서 소외되는 현상에 대해 언론과 미디어에 개선을 요구하는 것 역시 시민 사회의 정치적 역량에 달린 것이다.
이렇게 시민 사회가 미디어와 언론을 판단하고, 미디어와 언론에 대한 정치적 요구를 제기할 수 있으려면 정치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사실 이 정치교육이라 일컬은 것은 특별한 무언가는 아닐 것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꼭 학교 교육에 한정된 것만도 아니다. 정부 기관에서는 문제 제기 통로를 더 열어놓고, 자료 공개를 더 적극적으로 하고, 일반 시민들이 모여 정치를 이야기할 공간, 공론장을 확대하는 것만으로도 시민들은 정치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조회수와 광고 재생 횟수로 전락하지 않고 시민으로서 미디어를 대해보자.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도구와 미디어를 구성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럼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시민 말이다.
월영
노경조, '[손정민 사건 3개월] 사망원인 대신 방송·유튜버 고소만 남아', 아주경제, 2021.07.28.(기사입력), 2021.08.18.(인용) [본문으로]
심윤지, '고령층 스마트폰 보유율 늘지만… 실제 활용까진 높은 '문턱'', 경향신문, 2019.09.13.(기사작성), 2021.08.18.(인용) [본문으로]
금준경, '노인을 위한 디지털은 없다', 미디어 오늘, 2019.05.12.(기사입력), 2021.08.18.(인용) [본문으로]
James Devitt and B. Rose Kelly, 'Fake News Shared by Very Few, But Those Over 65 More Likely to Pass on Such Stories, New Study Finds', 2019.01.07.(기사입력), 2021.8.18.(인용) [본문으로]
코로나19가 장기화 되면서 이전과 다른 생활에 무력감을 느끼고, 지쳐갈 무렵입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19 사태는 사회 곳곳에 존재하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었고, 심화시켰습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 교육저널도 큰 정체기를 겪었습니다. 편집장이 없는 체제로 운영되어, 편집위원들이 서로 역할 분담을 하여 근근이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매주 비대면 회의를 진행하며 상황에 잘 적응해나가는 것 같았지만, 무언가 대체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번 38호 제목인 '혼란기(記)'는 혼란스러운 사회와 교육저널 상황을 잘 드러냅니다. 이번 호에는 미디어 리터러시와 교육 정책에 대한 고찰, 코로나 19 상황에서 대학교육에 대한 고민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시기 속 교육저널 구성원들의 고민이 여러분들께도 닿길 바랍니다.
그리고 비대면 상황 속에서, 교육저널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주신 편집위원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펜데믹 시에,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구성원들의 노력을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이번 호를 읽고 교육저널의 시선에 함께 해 주실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Dichter 처음에는 ‘교육’이라는 다소 막연한 글자에 꽂혀 들어오게 되었어요. 하지만 직관에 의존했던 그 충동적인 선택을 지금 돌이켜보면,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교육저널에서 한 학기 동안 구성원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저의 좁디좁았던 시선을 넓힐 수 있었어요. 다만, 거의 비대면으로 진행되고 편집장이 없는 학기라 그런지 때때로 제가 이 공동체에 제대로 안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저를 예쁜 말과 싱그러운 미소로 이끌어주신 모든 편집위원들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요. 그리고 시간 내어 제 글을 읽으실 모든 독자님들께 미리 감사의 말을 전하고,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시면 좋겠어요. 이번 기사를 구름판으로 삼아, 언젠가는 꼭 넓어진 시선과 성숙해진 생각을 더 나은 글로 공유하는 도약을 이루어보겠습니다! 한 학기 고생한 나 자신, 편집위원들, 그리고 독자님들 모두 사랑합니다♥
펭로시 안녕하세요? 펭로시입니다. 이것으로 두 번째 글도 마무리되었네요! 저번보다 더 성숙한 펭로시가 된 것일까요?:)
저는 이번 글을 쓰면서 많이 분노하고, 많이 슬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초안 때 격정적인 감정이 날것 그대로 글에 담겨 버려서 제 글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세심하게 접근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의 글은 이런 고민을 교육저널 분들과 함께 나누고 생각하며 발전시킨 것입니다. 저는 저의 고민의 흔적, 나아가 교육저널 모두의 고민의 흔적이 독자 분들에게 진실하게 전달되었으면 해요.
더 ‘세심한’ 펭로시가 되려 노력했지만, 아직 미숙한지라 표현에 있어, 내용에 있어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앞으로 누군가에게 용기와 의지를 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감히 생각하며 제 후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이번 호까지 열심히 함께한 교육저널 분들과 귀중한 시간 할애하시어 이번 호를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교육저널 짱!
러셀 안녕하세요! 러셀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UP 애니메이션이라서, 영화 속에 나오는 모험가 아이 이름으로 필명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러셀이 칼 할아버지가 매 순간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 해준 것처럼 저도 누군가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고 싶네요~ :) 벌써 교육저널을 함께 한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또 한 권의 교지가 완성되었다는 게 정말 뿌듯하네요. 사실 매주 회의를 하면서 하기 싫었던 날도 있고, 너무 어려워서 글을 그만 쓰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그치만 항상 자기 글인 것처럼 피드백해주시고 함께 고민해주신 여러분 덕분에 무사히 글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신 독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교육저널 파이팅! darling 와아 정말 길었던 교지 만들기 대장정이 드디어 마무리되었네요! 바쁜 와중에도 모두가 시간을 내어 주에 한 번씩, 짧지 않은 시간들을 꾸준히 함께 할 수 있어 이렇게 막바지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기쁜 시간들이었습니다:) 책을 마치면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어온 우리의 고민들이 책 한 권을 완성시킴으로써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넓고 깊은 생각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긴 시간 공들여 진정성 있는 글을 써나가던 것, 그 속에 자신의 생각을 보다 잘 담아내려고 애를 쓰던 것,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것 모두가 훗날 제 청춘의 기억 중 한 장면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널의 모임을 마친 어느 밤, 학교의 길을 걸으며 새카만 하늘 아래 반짝거리던 별을 보았던 기억처럼요. 소중한 기억과 멋진 교지를 함께 만든 편집위원 분들께 애정을 담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더 멋진 내일을 살아가는 교육저널이 되어봅시다! 모두 감사해요:D
a little philosopher 교육을 생각하는 것은 이상을 그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답은 없고 상상만 있는 것이 교육인 것 같습니다. 일 학년 때 교직수업을 들으면서 풀어내지 못했던 궁금증과 이야기를 교육저널에서 마음껏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앞으로 미숙한 저의 상상에 교육저널 분들의 피드백이 더해지면서 조금은 현실적인 감각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ALee 안녕하세요, 아리(ALee)입니다! 교육저널과 함께 한 1년이 이렇게 마무리가 되어가네요. 그 동안 교육저널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글을 읽으며, 좋(아지고 싶)은 글을 써왔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번 학기가 제가 교육저널과 함께 하는 마지막 학기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 동안 교육저널이라는 인간답고 따스한 공동체에 속해있을 수 있어서 진심으로 행복했습니다. 평소 글을 쓰는 게 익숙지 않았던 터라 매번 기사를 쓰기에 앞서 ‘기사를 쓰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을 다른 편집위원들에 비해 오래 가져갔었습니다. 그럼에도 어찌저찌 이렇게 교육저널에 글을 실을 수 있었던 건 교육저널의 다른 편집위원들이 차근히 기다려주시고, 또 제가 글의 갈피를 잡지 못해 헤멜 때 손을 내밀어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편집장이 없던 체제였던만큼 모든 편집위원들의 도움으로 이렇게 하나의 교지가 나올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그리고 저 역시도 한 편의 글을 실을 수 있던 것 같아서 모든 편집위원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지난 교육저널 <수면 아래>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르포 기사를 쓰고, 이번 학기에는 조금 저의 생각을 깊고 날카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물론 저의 부족한 어휘력으로는 ‘똑똑한 글을 쓰고 싶다!’정도로밖에 표현되지 않았지만요..^^) 어쨌든 이번 글을 통해 교육과 교과서, 배움과 학습, 정치와 교육 전반에 대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 같아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대학에서 4년….이 아니라 이제 5년 째네요. 어쨌든 대학에서 5년을 보내며 가장 가족같았던 공동체를 되돌아보면 아마 교육저널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적당한 선을 지키되 서로를 따스하게 보듬어주는 공동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는 전 편집장님들을 포함한 모든 편집위원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그렇기 때문에 꼭 글을 쓰는 것이 아니더라도, 교육저널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저를 성장시키는 경험이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교육저널을 나가게 되며 언제 다시 만나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는 마스크 없이! 만나서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그 날까지 저는 교육저널을 추억하며 지낼게요 :)
BDUCK 코로나가 시작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는데요, 그 말은 교육저널이 비대면 회의 체제를 도입한 지도 1년이 되었다는 말과 같겠네요.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주변에 가장 많이 들려오는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망한(?) 이야기들인 것 같습니다. 어디 학생회가 망했다… 어디 동아리가 활동 중지다 등등... 교육저널 역시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모든 회의를 비대면으로 진행해야 했고, 심지어 편집캠프조차도 집합금지 조치를 준수하기 위해 동방에 4명까지밖에 못 모였으니까요. 게다가 교육저널 창간 이래로 처음 맞는 ‘편집장 없는 체제’는 모든 이에게 낯설고 당혹스러웠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난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살아남은(?) 교육저널이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는 바꿔 말하면 이 ‘살아남음’을 위해 교육저널 구성원들이 부단히 힘을 써줬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짧은 글쓰기부터 세미나, 힘겨운 글쓰기와 피드백 시간을 거쳐 편집캠프까지 쉼없이 달려와준 모든 교육저널 편집위원께 감사하다는 말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대학생활 2년을 함께한 교육저널은 그 어떤 공동체보다 애착이 가는 공동체입니다. 때문에 편집장은 없지만 편집장 만큼이나 애정을 쏟고, 교육저널을 지키기 위해, 모든 구성원을 존중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노력을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이 공동체가 37호가 아닌 370호(너무 갔나?)를 낼 때까지 존속했으면 좋겠는 바람입니다ㅎㅎ이제 곧 3학년이 되고 더 알고 배우고 싶은 게 많은 지라 교널을 곧 떠나야하는데, 시원하면서도 섭섭하네요. 저를 누구보다 성장하게 해줬으며 저와 함께 자란 이 공동체를, 저는 아마 오래도록 추억할 것 같습니다.
채미 교육저널의 가장 좋은 점은 다양한 교육을 접하고 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교육저널 활동을 통해 민주시민교육,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교과서와 지도서를 살펴보고 저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더 깊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던 환경 교육에 대해 여러 계획안과 실제 시행되고 있는 다양한 단체의 환경 교육을 검토하고 정리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비록 교육계에게는 암울한 한해였지만 여전히 다양한 교육들이 새로 태어나고 논의되고 발전하고 있숩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새로운 교육들이 어두운 상황에서의 단순히 허황된 소리가 아닌 희망을 구체화하는 새로운 노력으로 보고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함께 더 다양한 교육을 탐구해보고 싶습니다.
고슴도치뇽 교육저널과 함께한 4학기가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이번 학기는 유난히 교육저널에 함께하는 게 버거웠던 것 같아요. 글 쓰는 게 어렵다기 보다는 구성원으로서 애정과 책임을 갖는 게 어려웠어요. 편집장이 없는 체제 속에서 매주 회의를 진행하는 시간 이외의 순간들에 교육저널이 어떤 공간인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지, 더 나은 교지를 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발화권력을 인지하지 못하고 항상 성급해하고 답답해했던 지난 시간들을 반성합니다. 그래도 편집위원들에게 함께했던 한 학기가 따뜻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교육저널과 함께했던 2년 동안 많이 웃고, 많이 배우고, 많이 성장한 것 같아요. 제가 이렇게 따뜻한 공동체를 만나서 행복할 수 있었던 만큼, 이 공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소중한 공간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교육저널이 모든 구성원을 존중하는 따뜻한 공간으로,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공간으로 유지되고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모로 힘든 시기에 끝까지 놓지 않고 열심히 참여해준 모든 편집위원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다들 정말로 수고하셨어요! 월영 안녕하세요! 월영입니다. 2020-2학기 교육저널에 들어왔는데, 금새 한 학기가 지나버렸네요. 예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교육저널을 챙겨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멋진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글을 쓸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코로나 시국에 온라인으로만 사람들을 만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지만 피곤한 와중에도 서로를 위해주는 교육저널 구성원들이 너무 따뜻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힘내서 이것 저것 해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번 교육저널을 읽을 분들도 저희와 연결될 수 있으면 좋겠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다들 너무 고마워요!
우정: 지금까지 너무 비대면 욕만 한 것 같아서(웃음), 남은 시간 동안은 비대면의 장점과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펭로시: CG를 잘 활용하면 양질의 수업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중학교 때 들었던 인강에서 선생님이 CG를 쓰셨는데 해풍, 육풍 관련한 내용을 설명하셨어요. 선생님이 실제 바닷가에 있는 것처럼 표현하시면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머리카락이 날리는 CG를 넣으며 수업하셨어요. 비대면이니까 이런 CG를 수업에 녹이면 학생들이 재밌게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정: 두 가지 사례가 생각나요. 하나는 영어 연극 수업을 제가 들었었는데 CG 얘기하니까 생각이 난 게, 제가 수녀 역할을 맡아서 뒷 배경을 성당의 고해성사실로 설정하고 목폴라에다가 검정색 반팔 뒤집어 쓰고 연기를 했었거든요! 그게 대면이었으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일단 배경화면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옷도 그렇게 하면 다 티가 났을 거예요. 비대면이었기에 창의력을 발휘해서 연극을 진행한 것이 생각이 났고요.
두 번째는 비대면이 되면서 1:1 맞춤 상담이 훨씬 자유롭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영어 수업 들었던 것 중 또 하나가 학술작문 수업이었는데, 그게 개별로 글을 쓰면 교수님이 계속 피드백을 주셔야 하는 수업이에요. 그런데 그게 만일 대면이었다면 한 명씩 앞에 나가서 피드백 받는 동안 다른 학생들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고 이런 식으로 했을 것 같은데 비대면이었기에 소회의실을 교수님께서 만들어주시고, 소회의실 내에서는 각자 서로의 글에 대해 피드백을 하고, 그동안 교수님이 피드백을 해줄 사람만 본 세션에 남아서 피드백이 이루어졌어요.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것 같아요! 또 비대면이었기 때문에 구글 클래스 룸을 이용해서 수업을 하다 보니 동영상을 올리고 댓글을 달고 이런 것도 자유자재로 가능했던 것 같아서. 수업 시간에 미처 다루지 못했던 부분은 교수님이 실시간 스트리밍 동영상을 녹화하셔서 구글 클래스룸에 올려주시고 댓글로도 피드백을 달아주시고 이런 식으로 했었거든요. 뭔가 1:1로 피드백을 받고 교수님과 소통하는 것은 오히려 비대면에서 좋아진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월영: 저같은 경우에는, 음, 이건 학과 특성이긴 한데 그림 같은 것을 많이 보거든요 슬라이드에 그림이 있고 교수님께서 설명하시는게 수업의 주된 형식인데 사실 오프라인에서 들으면 PPT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분들은 저게 대체 뭐지 하면서 흐린 눈 하고 보거나 아니면 화질이 안 좋아서 전달이 어려운 상황이 있었는데 비대면 수업으로 하니까 PPT가 바로 나한테 뜨잖아요. 심지어 그림을 자기 마음대로 확대해서 교수님께서 설명하시는 부분을 정확하게 볼 수 있고 그런 점은 좋았던 것 같아요.
러셀: 저는 미디어 활용능력이라고 해야 하나요? 기술활용능력 이런게 굉장히 능통해진 것 같은게 교수님들도 그렇지만 저희들도 동영상 촬영도 직접 해봐야 하고 좀 더 이용해봐야 하고...... 이런 기회들이 많아서 그런 것들을 더 잘 다룰 수 있게 된 것 같고 요즘 초등학생들이 코딩 수업을 듣잖아요. 제 생각에는 만약 이렇게 비대면 수업의 장점이 부각되면 초등학생들이 나중에 학교에서는 줌을 어떻게 하면 잘 사용할 수 있을지 줌으로 발표를 잘하는 방법 손들기 기능! 이런 거에 대해서도 배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고슴도치뇽: 사실 저는 마음 깊은 곳에 기술의 발전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이 있어요. 기술 발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고 물론 일정 정도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기술 발전이 필요한데 우리 사회에서 많은 경우 누군가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기술이 발전하는 게 아니라 특정 집단의 이윤 추구를 위해 기술이 발전하잖아요. 또 기술이 발달했을 때 그 기술을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삶의 질이 올라가겠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더 사회에서 소외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그럼에도 비대면이 되어 좋았다고 생각하는 점은 좋은 강의들을 특정 공간이 아닌 공간에서도 들을 수 있다는 점이에요. 서울대에서도 연구발표회나 토론회가 많이 열리는데 이제 해외에 있는 분을 초청할 수도 있고 그것을 신청하면 멀리서도 들을 수 있잖아요. 여러 활동 단체들에서 마련하는 좋은 프로그램도 이전에는 서울에서 많이 진행되다 보니까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만 주로 참여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온라인이니까 지역을 넘어서 참여할 수 있어서 그 점은 좋은 것 같아요.
우정: 저도 생각이 났는데 채팅 기능도 온라인 교육의 특징인 것 같아요. 소심한 사람은 평소에 대면 수업할 때도 손을 들고 말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리고 비대면 교육에서도 마이크를 켜고 말하기 힘든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성격적으로. 그런데 채팅 기능이 있다 보니까 비밀채팅으로 교수자님께 질문을 드릴 수도 있고 교수자님께서 뭘 물어보셨을 때 채팅을 이용해서 활발하고 간단하게 답변을 쳐서 올릴 수 있고? 그런 것들이 좀 더 내성적인 사람들에게 오히려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더 좋은 수단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 것 같아요.
고슴도치뇽: 그거 되게 좋은 것 같아요!!
월영: 비대면 교육의 좋은 점을 말하는 것이랑 조금 다를 수 있는데, 아까 고슴도치뇽님이 말씀하신 부분에 공감이 많이 되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할아버지 생각이 되게 많이 났거든요. 할아버지 가게에 가끔씩 요금표나 이런저런 안내 문구같은 게 인쇄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그런 작업을 항상 저에게 맡기셨단 말이에요. 심지어 할아버지께서 가끔씩 핸드폰을 들고 오셔서 이거 대체 뭐냐하고 물어보시면 제가 다 알려줘야 하는 거예요. 저는 한창 제 일이 바쁘다고 느껴질 때는 살짝 귀찮기도 했는데 사실 그런 식으로 기술 자체에 적응을 못 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잖아요. 너무 빠르게 변하니까. 할아버지 옆에는 제가 있으니까 제가 할아버지께 가르쳐드릴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그것을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고. 그런 것처럼 기술의 발전을 숭상하지만 말고 그것을 대체 어떻게 적용할지, 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웃음), 아니면 어떻게 사람들이 배우게 할지 이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정: 진짜 이 시간에 우리가 좋다고 이야기했던 것들을 나중에 이것을 어떻게 발전시킬지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물론 막연한 생각이긴 하지만!
# 비대면 교육, 어디로 가야하나?
러셀: 하나고에서는 온라인 교육의 가장 큰 원칙을 ‘소외된 학생이 없어야한다’라는 점을 정했어요. 또 이와 관련해서 단순히 스마트 기기나 학습기구를 지원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발언권과 참정권이 동등하게 제공될 수 있는지 이런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하고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는 학생과 교사 간의 소통을 중요시 해서 구글닥스를 이용한다든지 혹은 온라인 플랫폼같은 것을 두어서 학생과 교사 간의 소통을 진행해서 어떻게 하면 원활히 비대면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지 의견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또 다음 슬라이드에선 줌 회의의 다양한 기능을 활용하고 온라인이라는 특성을 활용해서 온라인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게임? 같은 것을 수업에 도입하여 학생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학교 생활 관리도 온라인으로 진행하여서 학생들이 비대면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주도적으로 모든 것을 하지 않고 교사가 개입하여 도움을 줄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하나고에서만 있었던 일이고 이러한 과정을 과연 모든 학교에서 실행할 수 있을지 혹은 이러한 방향이 또 오직 맞는 방향만은 아니니까 어떻게 하면 비대면 수업 과정에서 다양한 기술을 활용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우정: 이 자료는 교육부 자료집이에요. 정확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지만, 최근에 교육부에서 만든 자료집인데 원격수업의 질 향상을 위해서 대학과 정부에서 이런 차원의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되어있던 표인데요. 이걸 제가 가져온 이유는 여기 보시면, ‘질 관리체제 구축’, ‘대학의 노력’ 부분에 원격수업관리위원회 운영 학생참여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학생이 참여해서 원격수업의 질 혹은 운영이 잘 되고 있는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기구라는 것이겠죠? 우리가 이전에 코로나19 상황에서 등록금 이야기만 나오고 수업의 질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학생들이 직접 참여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문제제기했었던 것이 기억나서 가져와 봤어요. 학생참여위원회 같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봐도 좋을 것 같아요. 두 번째 부분은 “공간혁신이 필요하다”인데요, 앞으로 원격 수업이 확대된다면 대학의 건물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사범대 같은 경우에는 이번에 1층 라운지 쪽에 스마트 교육센터 같은 공간을 만든다고 이름 공모하고 그랬었거든요. 그게 아직 안 만들어진 것 같긴 한데 그런 식으로 온라인 교육을 학생들이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 공간 그런 곳이 마련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고요.
우정: 자료집의 마지막 부분에는 코로나 이후 미래교육전환을 위한 10대 과제를 제시하고 있었어요. 그 중에서 인상 깊었던 것만 몇 개 가져왔는데 과제 2같은 경우에는 새로운 교원제도 논의추진이라고 해서 교사 1인당 감당하는 학생 수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봐야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리고 과제 7부분에서 고등직업교육 내실화 이 부분에서는 마지막에 VR이나 AR 콘텐츠 등을 활용해서 비대면 실습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부분이 인상깊어서 가져왔어요. 비대면에서 새롭게 직업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 같아서 가져와 봤습니다.
펭로시: 저는 교육공학적인 기술과 원격수업이 접목된 사례를 가져와 봤는데 한양대학교에서 텔레프레전스라고 킹스맨에서 나왔듯이 홀로그램을 활용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하더라고요. 원격수업을 할 때 실제 교수님의 키와 모습을 재현해서 저와 교수님이 한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는 그런 기술을 바탕으로 수업을 진행한다고 밝히고 있었어요. 한양대에서는 텔레프레전스 기술을 통해서 원격수업을 진행하려고 했고 또 연세대학교에서는 원격조교를 도입하여 우리가 비대면 상황에서 겪을 수 있는 문제들이나 도움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합니다.
우정: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조직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기사 또한 가지고 와봤습니다. 자, 그럼 비대면 교육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할까요?
러셀: 저는 우선 우정님이 마지막에 가져온 ‘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조직 문화’ 그 부분이 굉장히 인상깊었던 게 코로나가 점점 완화되면서 대면 교육을 하게 되었는데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어요. 왜냐하면 오늘도 의논을 했지만 비대면 교육을 직접 경험하면서 다양한 장점들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당연한 듯이 비대면을 하지 않고 코로나가 완화되면 무조건 대면으로 돌아가야한다는 것이 기본 전제인 것 같아서. 혼합을 한다든지 아니면 비대면 교육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잘할 수 있을까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아예 없었던 것 같아서 저도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기술이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이러한 부분에 대한 충분한 고려나 사고같은 것이 필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펭로시: 저도 말씀을 드리자면, 확실히 러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비대면 교육은 마이너스(-)이고 따라서 우리는 코로나 시국을 극복해서 플러스(+)인 대면 상황으로 돌아가야한다는 논의가 조금 많은 것 같은데 사실 아까도 같이 논의해보았듯이 비대면 교육에서도 확실히 장점들이 많고 더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해요. CG도 그렇고 아까 고슴도치뇽님께서도 말씀해주셨듯이 지역을 넘나들 수 있는? 제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수업 시간에 일본 학교랑 교류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일본 학교 학생들이랑 같이 이야기를 하고 같이 토론을 했던 것이 인상적이었어서 이런 부분들을 함께 수업에서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까 강원도 기숙학교 다니는 친구 인터뷰했던 것도 보면 ‘풀면학, 풀자습’만 시키고 공부할 시간이 너무 많아지고 그런 부분들이 왜 생기나 하고 봤더니 제 생각엔 우리가 학교라는 공간에서 대면교육을 할 때에도 수업에 대한 고찰이나 학습에 대한 고찰이 많이 없었다고 생각을 해요. 학교 내에서 성적을 최우선적으로 여긴다든지, 내신을 따는 것을 중요시한다든지 학생과 선생님들이 내신, 혹은 생기부를 작성하는데 목매거나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비대면 교육이 더 과감하고 더 획기적인 시도로 이루어지려면 우리가 엄청 많은 시도를 해봐야하고 비대면 교육에서 다양한 기술이나 아니면 체험이나 이런 것을 도입을 해야 할 텐데 결국 학교의 시선이 내신, 성적, 학생들의 진학같은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면 비대면 교육은 정체될 수밖에 없어요. 국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이너스(-)인 비대면 교육이고 플러스(+)인 대면 교육으로 어떻게 가야할까, 그런데 이것은 또 대면 교육으로 돌아가더라도 이런 고민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냥 또다시 성적 산출이고 또 다시 줄세우기이고 약간 이런 식으로 간다고 생각을 했어요. 많은 학생들이 비대면 학교 수업을 소위 인터넷 강의? 수능을 위한 정보전달식의 수업? 정도로만 여기는 것도 이런 부분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비대면 교육이 어디로 가야하나를 논의하려면 우리가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지를 많이 고민하고 성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이번 대담을 통해서 들었던 것 같아요.
월영: 저는 하나고 관련 기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적용하려면 얼마 정도의 시간과 재화가 투자되어야 할까 하는(웃음), 엄청 암울한 생각이 들었는데 힘들 것 같은 거예요. 저희 학교에서 2018년에 미투 사건이 있었는데 사실 그 전에 어떤 상황이었냐면 취약한 건물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지어야 했어요. 이거에 관련해서 교육청에서 지원금이 나오기로 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미투가 발생한 이후에 지원금이 끊겼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학교에까지 지원금을 주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이 작동한 것 같기도 하고 이 학교는 좋지 않은 학교다? 이런 사고가 작동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실망을 되게 많이 했었거든요. 이 자료 보면서 저는 기술이 발전하면 뭐하나~ 하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어요. 어차피 지원금이 나오고 안나오고... 이런 것이 다른 것에 달려있을 수도 있는데... 그런 암울한 생각이 들었어요.
고슴도치뇽: 제 생각을 이야기해보면 저도 앞으로 비대면 상황에서 있었던 장점들을 살리는 것은 필요한 것 같아요. 지역을 넘어서 좋은 학습프로그램을 공유한다든가 아니면 수업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시각자료들을 활용한다든가 이런 것들은 앞으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데 제가 학교 다니면서 느꼈던 것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 수업에 대해서 규칙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나 생각이 나는 건 마이크랑 화면 켜는 것 등 관련해서! 수업마다 규칙이 다 다르고 학생들도 생각이 다 다르잖아요. 사실 이것에 대해서 친구랑 이야기해본 적이 있었는데요. 제가 들었던 수업에서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화면도 끄고 마이크도 끄고 있었어요. 그런데 교수님이 “우리 수업은 아무래도 방대한 범위의 지식 전달이 필요해서 교수자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하긴 하지만 강의가 교수자의 일방적인 정보 전달로만 완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이 가능하다면 화면과 마이크를 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꺼진 화면을 보는 것이 제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일상적인 소음 정도는 괜찮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거의 매 수업 시간마다 호소를 하셨어요. 근데 저는 교수님의 마음이 되게 이해가 가더라고요. 교수님이 저렇게 호소를 하시고 학생도 수업을 만들어가는 구성원이니까 학생들이 조금 더 적극성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제 친구는 다르게 생각하더라고요. 수업에 참여한다는 책임감에 대해서 각자 생각하는 범위가 다른 것 같다고 말했어요. 친구 말에도 공감이 되더라고요. 수업의 질을 위해서 그리고 수업이 단순히 교수자 한 명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확실히 더 많은 수업 참여자들이 마이크와 화면을 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또 한편으로는 수업을 구성해나가는 일원으로서 책임감의 범위라든지 화면으로 나의 사적 공간을 공유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라든지 그런 것들도 걸려있어서 항상 수업 시작하기 전에 이런 것들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가 수업에서 어디까지 협의를 할 것인지 조정을 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우정님이 보여주신 자료 관련해서도 얘기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교육부의 공간혁신이라는 말이 있었잖아요. 그 말을 경계해서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캠퍼스의 공간과 시설의 내부 구조를 원격교육에 적합하게 재구성해야 한다고 노란 줄이 쳐져 있는데, 물론 저도 이게 어떻게 바뀐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온라인 교육을 들을 수 있고 비대면 실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 이유로 원격교육에 적합하지 않은 동아리방이나 학생자치공간이나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디지털 센터로 대체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생각해서요. 이 자료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이런 맥락으로 공간 혁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 앞으로 우리 캠퍼스의 시설이 바뀔 때 그게 조금 어떻게 바뀌는지 더 예민하고 자세하게 고민을 해봐야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캠퍼스 공간과 시설이 원격교육에 적합하게 재구성될 때 오히려 학생들이 더 개인화되고 점점 공동체가 해체되는 방향으로 캠퍼스가 재구성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또 원격교육에 맞는 대학이라는 이유로 앞으로 캠퍼스 없는 대학이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우려도 조금 들고요. 그래서 대학뿐만 아니라 모든 시설이 기술혁신과 접목될 때 그게 어떻게 접목되는지 자세히 봐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답은 못 내리겠지만 대학이 원격교육에 맞는 공간이 되는 것에 대해서 조금 자세히 톺아보아야 할 것 같아요.
우정: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을 짚어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그런 것이 되려면 학생비대면교육위원회 이런 것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학생들의 의견도 반영이 되겠죠!
월영: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작년 1월에 처음 코로나 터졌을 때는 학생회나 아니면 학생자치활동 이런 것들을 해내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해보니 할 수 있는 것들이 꽤 많긴 하더라고요. 다양한 기술들을 이용하면. 그런데 그 와중에도 대면으로밖에 할 수 없는 지점에 대한 비판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비판들도 절충해나가면서 나름 잘했다고 보는 편이지만 여전히 20학번 분들이랑은 유대관계를 거의 쌓지 못한 채로... 기술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열린 마음을 갖는 것도 필요하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민을 많이 해야겠지만 무조건 무턱대고 받아들이자는 소리는 아니고 고민을 많이 하면서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을 하면서 논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대담을 마무리하며
우정: 이렇게 소중하고 다양한 의견들을 나눠보았는데, 오늘 대담이 어땠는지 각자 소감을 나눠볼게요. 우선 저는 저번 세미나에서 대학 등록금 반환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수업 질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그래서 비대면 교육을 대담 주제로 건의하게 되었는데, 해결책이 없는 문제인 만큼 명확한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고민할 때 꺼내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너무 좋았습니다.
고슴도치뇽: 저도 좋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난 1년을 잘 정리한 것 같아요!
펭로시: 저 혼자만 생각했을 때에는 막연했는데, 대담을 통해 생각이 구체적으로 정리된 것 같아요. 또, 제가 교사가 돼서 비대면 수업을 하게 될 수 있을 텐데, 여기서 나온 이야기를 직접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월영: 저는 마지막쯤 기술발전과 관련된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어요. 최근에 '지민의 탄생'이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어요. 이 책에서는 기술의 다양한 활용방안과 지식의 가치 중립성의 허상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과학이나 기술이 진입장벽을 더 높게 쌓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지식을 알기 쉽게 가공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저도 많이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직도 조금 막막하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면서 깊게 고민할 수 있어 좋았어요!
러쉘: 저도 미래의 교사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오늘 회의가 다양한 생각할 지점을 던져주는 것 같아 너무 소중하고 유익했습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19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2020학년도 2학기도 대부분 비대면 수업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에 지난 호 <특집-코로나19와 교육>의 고민 지점을 이어, 비대면 교육의 한계와 앞으로의 교육 방향을 고민하는 대담을 나누어보았습니다.
# 당신이 경험한 비대면 교육, 어떠셨나요?
우정: 처음에는 간단하게 여러분이 경험한 비대면 교육이 어땠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눠봅시다. 웃겼던 점, 힘들었던 점, 좋았던 점 등 자유롭게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주세요.
- 비대면 교육에서 있었던 ‘웃긴썰’
우정: 우선 저는 이번에 영어 연극 수업을 비대면으로 들었어요. 원래는 대면으로 2인 1팀으로 무대에서 연극을 해야 했었죠. 남자와 여자가 싸우는 장면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물을 뿌리는 장면을 Zoom에서 연기해야 했는데, 여자 역할의 분은 자신의 노트북 카메라에 물을 뿌리고 남자 역할의 분은 동시에 스스로 얼굴에 물을 뿌리셔서 리얼하게 해당 장면을 구현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러셀: 저도 Zoom 사용에 서툴러서 있었던 웃긴 경험이 있었어요. 친구들과 개별적으로 Zoom 모임을 하면서 사용자 이름을 ‘고구마 먹는 000’ 이런 식으로 바꿔두었는데, 다음 날 그대로 교양 수업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되었어요. 엄청 민망했어요. 펭로시: 저는 Zoom으로 발표를 하던 중에 서버에 튕겨서 조원들에게 미안하고 민망했던 경험이 있었어요. 와이파이 문제가 해결되고 곧바로 다시 들어가자, 교수님은 저를 애타게 찾고 있었고 저희 조 다른 분이 저 대신 발표를 하겠다고 말하고 계시더라고요. 정말 죄송했던 기억이 나네요.
고슴도치뇽: 너무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저도 작년 1학기 때 서버가 튕겼어요. 사실 저는 수업할 때 교수님의 모든 말을 다 들으려 하는 편인데, 수업을 아예 1시간 넘게 통으로 못 들어서 화가 나더라고요.
월영: 저는 일부러 실수할까봐 줌 채팅 대신 카톡을 쓰는 등 조심했어요. 그런데 딱 한 번 헤드셋으로 수업을 듣는데 벗어두어서, 수업이 시작한 줄 몰랐던 경험이 있어요. 10분 정도 수업에 늦어 섬뜩했던 기억이 있네요.
펭로시: 이 자료는 제가 저번 학기에 교육 경영 수업을 들을 때 사촌 동생을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원래 학교는 학사 일정이 정해져 있고 이에 따라 운영이 되는데, 코로나 이후에 정책이 계속 바뀌면서 일정이 누락되고 갑자기 바뀐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실제로 사촌 동생 학교에서는 코로나 19로 지정된 날짜에 체육대회를 하는 것이 불가하니까, 갑자기 문화제를 준비하라고 요구했다고 이후에 또 다시 코로나가 심해지니까 점심시간에만 축소해서 진행한다고 번복하여 학생들이 많이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대면 수업 때는 선생님이 교실에 와서 출석체크를 하고 학생들과 상호작용이 가능하지만, 원격 수업 때는 그렇지 못했다고 해요. 수업을 다 듣고 문제를 푸는 형식으로 출석체크를 대신했는데, 문제 난이도가 너무 쉬워 대부분이 학생들이 수업을 안듣고 문제만 풀어서 제출했다고 해요. 수업에 있어서도, 판서가 안 보이는 등 진행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학생들이 마이크를 켜고 말하기 주저해 바로 개선되지 않았다고 해요. 이처럼 원격 수업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정: 저는 자료의 마지막 말에 공감했어요. 기술에 익숙한 사람도 있지만. 원격 수업을 코로나 시대의 임시방편으로만 여기는 분들도 많았던 것 같아요. 임시방편이든 아니든 현재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다양한 기술을 잘 활용해야 하는데, 이를 꺼려하고 노력하지 않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교사들이 기술을 수용하려 태도를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펭로시: 저는 자료에서 비대면 수업 때 마이크를 켜는 것이 어렵다는 점에 공감했어요. 마이크를 켜는 것이 마치 대면 수업 때 강의실 한가운데에 가서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으며 말하는 것 같았어요.
고슴도치뇽: 대부분 수업에서 작은 생활 소음이 나도 ‘00님 마이크 꺼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이해가 되면서도, 온라인 강의가 되면서 모든 생활 소음이 차단되고 교수님 말만 들려야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이런 방식이 그동안 듣던 인강과 비슷해서 그런 것 같아요.
월영: 이 점이 아직 온라인 기술의 한계인 것 같아요. ZOOM에서는 동시적으로 소통할 수 없고 조금 뒤에 말이 도달해요. 예를 들어, 언어 수업에서 선생님이 말을 따라 해보라고 하면 각자의 말이 씹히고 중첩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어요. 소통이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한계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는 오직 대면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고슴도치뇽: 혹시 교수님이 조금 천천히 말할 수는 없나요?
월영: 각자 소리가 도달하는 시간이 달라서 계산하기 힘들 것 같아요.
고슴도치뇽: 아. 저도 그러한 점은 한계라고 생각해요. 근데 지난 학기에 수업 시연하는 수업을 들었는데 학생들에게 학습 목표를 읽게 하자 모두 마이크를 켜고 각자의 목소리와 속도로 따라 읽는 게 좋았어요. 한편으로는 재밌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펭로시: ZOOM에서도 음성 중첩이 되도록 한다든지, 대면 수업처럼 각자의 목소리가 적당한 크기로 동시에 들릴 수 있도록 하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월영: 이와 관련해서 조매력 유튜버가 떠올랐어요. 싱크룸을 활용해서 합주를 하는데, 줌과 다르게 완전 동시적으로 다양한 소리가 나는 게 가능했어요.
우정: ZOOM도 점점 발전하니까 마이크 중첩을 해결해달라고 건의해 봐도 좋을 것 같네요. 이 부분은 이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 봅시다.
# 비대면 교육, 실컷 욕해봅시다!
우정: 이미 앞에서 조금 이야기가 나온 것 같은데, 비대면 교육의 한계점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 비대면 교육 상황에서 심화된 불평등
러셀: 저는 비대면 수업으로 인한 다양한 문제점이 있을 텐데 그중에서도 학습 불평등과 관련된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프레시안 기사[각주:1]에 따르면 비대면 교육으로 학습 격차가 커진 이유는 학생의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 차이, 학부모의 학습 보조 여부, 학생과 교사 간 소통의 한계, 학생의 사교육 수강 여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인 중 대부분은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학습 불평등 외에도 비대면 교육으로 급식을 먹지 않게 되면서 식습관 격차가 커지는 등 학습 외 불평등도 심화되었다고 합니다.
우정: 비대면 교육으로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드니까, 남는 시간에 경제적 여건이 되는 경우 학원이나 더 좋은 교육 기관에 갈 수 있으니까 학습 불평등이 더 심화되는 것 같아요. 또, 학교의 역할을 모두 가족 내에서 부담하게 되면서, 돌봄이 가능한 가정이냐 아니냐에 따라 급식처럼 학습 외 불평등이 발생하는 것 같아요. 막연히 가족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어려운 것 같네요.
고슴도치뇽: 저는 공공기관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는 사회인지에 따라, 학습 불평등과 학습 외 불평등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우리 사회에서 공공시설이 부족하잖아요. 소수의 관리자가 많은 사람을 담당하고 돌보는 경우가 많아서 더 밀집시설이 되는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모든 사회에서 공공시설의 중요성이 똑같지 않잖아요. 어떤 사회에서는 수많은 기업이나 가게들이 문을 닫더라도 공공시설만큼은 최후의 보루로서 존재하죠. 하지만 우리 사회는 공공시설이 그 어느 시설보다 더 빨리 운영이 중단되는 것 같아요. 이런 공공시설이 사람들이 밥을 먹고, 관계를 맺고, 사회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아요. 코로나 상황에서도 많은 인력과 자원을 지원해서 혹은 어느 시설보다 빨리 칸막이를 설치해서 급식 배식이 되도록 하고 전자기기와 공간을 마련하여 집에서 학습을 할 수 없는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겠죠. 결국은 공공시설의 역할을 강화하는 게 불평등을 해소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정: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공공시설을 확대한다고 해서, 코로나 때문에 단체 이용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데, 이때는 어떻게 돌봄을 위탁할 수 있을까요?
고슴도치뇽: 직접적으로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은 어렵겠지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여러 장치를 마련할 수 있겠죠. 제 친구 중 노인 복지관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 몸이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외로움과 일상을 공유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고민하는 것 같더라고요. 사람이 오지 않는 복지관이 어떻게 운영이 되는지 영상을 제작하고 전화로 어르신들이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여쭙기도 하고요. 급식의 경우도 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 모이는 것은 안 되겠지만, 시간을 나눠 방역수칙을 지킨다면 청소년들이 공공시설에서 밥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더 많은 고민과 체계적인 운영, 금액 지원이 있다면요. 결국은 우리 사회가 어느 것에 초점을 두고 코로나 사태를 대응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공공기관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문을 닫아버리는 쉬운 선택을 하기보다, 다른 곳들은 다 문을 닫아도 공공시설만큼은 필수로 운영되는 시설로 지정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사회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월영: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모여야 한다는 사실과 공공기관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뉴스에서 실행 방침들을 살펴보면 사람들을 모이지 않게 하는 것이 주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안타깝게 느껴져요. 어쩔 수 없이 모일 수밖에 없는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대책은 따로 마련되지 않았잖아요.
펭로시: 고슴도치뇽님과 월영님 의견에 정말 동의를 합니다. 공공기관은 일단 문을 닫고 나서, 고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호에서 비행인 님이 쓴 글[각주:2] 중 코로나로 도서관이 문을 닫았는데, 학교에서는 책읽기 수업이 많아 비상이 걸렸다는 내용이 떠올랐어요. 온라인으로 읽을 수 있는 플랫폼처럼 다른 대안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공기관은 일단 문을 닫는 것 같아요. 문을 닫는 게 필수불가결할 지라도 적어도 문을 닫음으로써 발생하는 영향력에 대해서 계속 숙고하고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부 방침은 일단 문을 닫고 모이지 않으면 해결될 수 있다고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비대면 교육 상황에서 의사결정 방식의 문제점
월영: 저는 펭로시님이 조사해오신 인터뷰에서 ‘교육청에서 지침이 내려오고 학교에서 하면 학생들은 이를 따라야 한다’라는 부분에서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서로 의사소통을 하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의견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일직선으로 의견이 하달되는 것이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정: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많은 게 없어지는 기분이 들어요. 당연히 전염병 상황에선 서로 떨어져야 하고, 머리를 맞댈 수 없고, 하달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수 있지만 그 이후에 얼마든지 대안적인 방안들이 마련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줌으로 모여 앞으로 어떻게 하면 더 소통이 잘되는 학급을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단지 행정명령이 내려왔으니까 따라야지 정도에서 멈추고, 더 이상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 아쉬운 것 같아요.
펭로시: 맞아요. 이와 관련해서, 지난 호에서 비행인님이 쓴 인터뷰 중 어떤 학생이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해서 수행평가를 보지 못했는데 점수를 아예 받지 못했다는 내용이 떠올랐어요. 학교 지침을 찾아보니 이와 관련된 부분은 아예 가이드라인이 없었어요. 지침이 추상적이라서, 맥락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하나도 적용할 수 없었어요. 아까 계속 하달식 전달 이야기가 나왔는데 하달식 전달은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한 정책일 뿐 구체적인 상황에서 적용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한 가지 대안으로서, 하나의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나의 플랫폼에서, 학생 교사 그리고 다양한 일반인들이 자기의 경험을 공유하여 가이드라인을 함께 만들어가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비대면 수업이 진행된다면, 하달식이 아니라 수혜자와 공식기관이 상호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슴도치뇽: 학생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학교가 너무 별로네요. 코로나 검사를 받아서 수행평가를 못 봤더라도 충분히 대체과제를 마련해서 학습 내용을 평가할 수 있었을 텐데, 생각을 못 했거나 모종의 이유로 하지 않았다는 게 학생의 입장에서는 정말 부당하게 느껴졌을 것 같아요.
우정: 방역을 지키기 위해 받은 불이익이 하나씩 쌓이면 과연 코로나 검사를 받을 사람이 있을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코로나 방역을 위해서도 한 명 한 명의 일상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비대면 교육 상황에도 여전한 학교폭력 문제와 해결방법
우정: 이는 비대면 교육으로 학생들 간의 소통이 어렵고 서로 마주칠 기회가 없으니까 애초에 갈등할 상황이 없었다는 내용입니다. 이에 올해 학교 폭력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이버 폭력은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오프라인 학교 공간에서 일어나는 폭력사건은 비교적 교사가 상황을 파악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온라인의 경우 카톡, SNS 등으로 따돌림이 이루어지면, 교사가 어떻게 중재를 할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이런 경우에 교사는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아요.
고슴도치뇽: 너무 어려운 문제예요. 저는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학교 폭력뿐만 아니라 가정폭력이 늘었다는 기사도 봤어요. 코로나 상황에서 여러 폭력이 특수하게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는 그 이전부터 우리 사회에 계속 내재해왔던 문화, 생활양식과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학교 폭력 관련해서는, 올해 다들 일 년 동안 정신없이 새로운 환경에서 교과 수업을 진행하고 평가하기 바빠서 반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맺거나 규칙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실제로 교사 브이로그를 보면 학생들 결석하면 전화하고, 과제를 제출하지 않으면 또다시 전화하는 등 일상이 전화더라고요. 올해부터라도 개인화된 사람들이 각자 파편화된 공간에서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반이라는 공동체를 결속하기 위한 방법이나 서로를 온라인상에서도 존중하기 위한 방법 등에 대해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러셀: 고슴도치뇽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보통 대면 수업을 위해 학교에 가면 쉬는 시간이 있고 친구들과 소통할 시간이 존재하는 데, 비대면 수업에는 쉬는 시간이 없었어요. 학생들끼리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도 문제인 것 같아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생들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보다, 이미 알고 있던 친구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학급 회의를 줌으로 하는 등 학생들끼리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비대면에서도 많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정: 비대면 상황에서 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선 담임 선생님의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담임 선생님이 소회의실을 열어주는 등 다양한 기회를 마련되기 위해선 교사의 의지와 열정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월영: 저는 처음에 이 자료를 읽었을 때, 학교가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은 이러한 제 생각에 스스로 조금 실망했어요. 비대면 상황 속 폭력도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공간이 온라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건드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됐다고 다시 생각했어요. 학교는 계속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기관으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정: 서로 소통이 어려워지는 만큼 보완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구글 폼 링크를 주고 어려움을 묻거나, 조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소회의실을 열어두고 학생들끼리의 시간을 마련하고 각 소회의실에 방문하여 분위기를 살피는 등의 노력이 사이버 폭력 문제를 조금은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슴도치뇽: 저는 학교마다 상담 교사가 있고, 대학에서도 상담 기관이 존재하고 이 시스템이 잘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도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꼭 학교 폭력이 아니더라도, 비대면 상황에서 어떻게 상담이 가능하고, 정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등을 공적인 정보로 알린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이를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정: 일단 여기서 마무리 짓고, 대면만이 할 수 있는 교육의 역할이 있다면 비대면 교육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야기 나눠봐도 좋을 것 같아요.
# 대면 교육에서만 가능한 것이 있을까?
- 학교 공동체에 대한 신뢰
우정: 저는 아까 인터뷰 자료 중에서 “풀면학, 풀자습. 그래서 스트레스가 엄청 쌓여있다”라는 부분이 너무 안쓰럽고 공감이 되었어요. 제가 고등학교를 다녔을 때는 수학여행도 있고 당연히 모든 고등학교에 있겠지만(웃음) 동아리 발표회도 있고 큰 행사들이 몇 개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그게 다 취소되면서 지금 고등학생 친구들은 그것을 하나도 즐기지 못한 상태로 2년 내내 그냥 풀면학, 풀자습인 거예요. 그런 후배들이 너무 안쓰럽더라고요. 그래서 학교 대나무숲에 학교가 우리를 신경쓰기는 하는 거냐 하며 시끄러웠던 적이 있거든요. 그걸 보면서 우리는 행사들이 노는 것이라고 생각을 보통 하지만 결국은 이게 하나하나 모여서 학교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만드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즉, 학교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공부할 의지도 생기고 그러는데 그런 게 없어지는 것 같아서 학교와 학생들이 파편화되는 느낌이에요.
- 일상 속에서의 배움
고슴도치뇽: 확실히 비대면 교육으로 대체될 수 없는 만남 속에서 교육의 중요한 역할이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특히나 어린 아이들의 경우에는 젓가락질하는 법이라든지, 아니면 친구랑 싸웠을 때 갈등을 해결하는 법이라든지... 이런 건 대면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하는 공간에서, 일상 속에서 배움이 가능한데 그런 것들이 확실히 비대면에서 조금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약간 슬픈데, 사실 저는 앞으로 원격소통방식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소통 방식이 될 것 같아요. 일단 우리 일상에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잖아요. 물론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 시간을 틈틈이 쪼개면서 할 일을 만드는 것이겠지요. 가령 대면이었을 때는 학교 끝나고 하나의 일정만 잡을 수 있었는데, 비대면이 되니까 일정이 끝도 없이 늘어나더라고요! 이전에는 오후 7시~10시 정도 하나의 활동을 하고 뒷풀이를 갔다면 이제는 6시~8시 책모임, 8시~10시 세미나, 10시~12시 회의 이런 느낌이요... 시간을 틈틈이 쪼개가면서 하는게 우리를 더 피로하게 만들겠지만 그게 더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우리를 더 갈아 넣게 만들고 많은 회사에서도 주된 사용방식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아까 제가 말했듯이 더 잡담할 새가 없어지니까 회의가 빡빡하게 진행되고 원격소통 속에서 회사는 더 이상 이 사람이 업무할 공간과 자재들을 제공해줄 필요가 없잖아요. 일하는 사람이 알아서 공간을 마련하고 회의 자료를 복사해야 되겠죠. 하지만 배움이 일어나는 공간뿐만 아니라 많은 공간에서도 대면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성장에서 필수적인 것들 혹은 다른 사람과 살아가는 관계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들이 저는 대면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하는데 비대면으로 대체될 때 앞으로 더 그런 것들이 더 희미해져갈 것 같아요.
- 일상적인 여유
펭로시: 저 고슴도치뇽님의 말씀을 듣고 갑자기 생각난 건데 비대면 되면서 많이 슬펐던 게 저희가 대면일 때는 예컨대 사범대에서 수업을 듣고 2시간 붕 뜨면 제가 칵테일 만드는 동아리에 들어가 있었는데 ‘아! 칵테일 만들면서 시간 보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학교를 거닐던 기억이 가끔씩 나는 거예요. 그 당시엔 이동시간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돌이켜보면 그 비었던 두 시간 동안 내가 걸어 다닌 것이나 아니면 걸어 다니면서 봤던 가로등 하나가 엄청 예뻐서 거기에서 사진 찍고 동아리 들어가서 사람들이랑 얘기하면서 칵테일 마시고 수업 시간 다 되었을 때 다시 일어나서 다른 동으로 향하는 그 순간들이 엄청 소중했었는데 비대면으로 바뀌면서 2시간 동안 텀이 비면 일단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켜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핸드폰을 보다가 시간이 되면 ‘수업 들어야겠다!’ 하면서 다시 일어나서 제 방의 컴퓨터 앞에 앉는데 그러면 제가 대면 수업 때 느꼈던, 학교를 거닐면서 느꼈던 것을 하나도 안 느껴지고 감동이라고 해야 할까요, 비대면 수업이 되면서 대면 수업 때 느꼈던 감동이나 여유가 없어진 것 같아서 그 부분이 저는 좀 많이 슬펐어요.
- 행정 절차의 명료성
월영: 저 같은 경우에는 반에서 학생회장 투표를 해야 했거든요. 학생회칙에 명시된 투표 방식을 따라야 하는데, 오프라인으로 하면 아주 쉬워질 일들이 온라인으로 하니까 너무 어려웠어요. 결국 어째서든 하기는 했는데 비대면으로 하게 된다면 자원이나 혹은 충분한 서비스 제공, 능력?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에겐 진짜 치명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줄거리: 그레이스와 그녀의 남자친구 메이슨은 문제 청소년을 단기 위탁하는 청소년 보호기관 ‘숏 텀 12’의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그레이스는 상당수가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겪는 숏 텀 12의 아이들에게 정서적 안정감과 용기를 주려고 노력한다. 일터에서는 무한한 애정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그레이스지만, 퇴근 후에는 그녀 자신도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숏 텀 12에 매우 까다롭고 공격적인 소 소녀 제이든이 들어오고, 그레이스는 그녀가 자신과 같은 상처를 겪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의 학대로부터 제이든을 구출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그레이스는 드디어 자신의 내면과 직면할 용기를 얻고, 두 사람은 눈부신 도약을 시작한다.[각주:1]
교육저널에서 ‘청소년’은 빠질 수 없는 주제 중 하나이다. 우리는 기사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의 목소리로 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을 좀 더 깊게 이해하고 더욱 나은 글을 쓰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을 보고 느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이번 교육저널 영화제에서는 청소년 보호기관에 위탁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숏 텀 12’를 함께 감상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진영: 영화 잘 보셨죠?
일동: 네!
# 각자 인상 깊었던 장면
우정 : 가정폭력 상황에 놓인 제이든의 고충이 나오는 장면에서 ‘가정폭력을 어떻게 하면 근절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의 필요성을 좀 더 느꼈던 것 같아요. 최근 정인이 사건 등도 그렇고 너무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아리 : 저는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이 크게 두 가지가 생각나요. 하나는 그레이스가 제이든과 같이 제이든 아빠 집에 가서 차로 부시는 장면이 생각났어요. 처음에 그레이스가 제이든 아빠 집에 가는 거 보고 '저길 왜 가지? 지나치게 제이든의 상황에 몰입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둘 다 아버지로 인한 상처가 있는 건 똑같은데, 제이든이 집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그레이스가 무기를 들고 들어갔잖아요. 그럼 이건 제이든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이든 아빠에게 자기 아빠를 투영해서 보복하겠다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도 제이든을 찾기보다 아빠 앞에서 서 있었잖아요. 아이를 구한다기보다 자기한테 깊이 투영한 나머지 보복하려고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순간 제이든이 나왔어요. 제이든이 나와서 둘 다 이전에 위탁소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았을 때처럼 같이 야구 방망이로 제이든 아빠 대신 제이든 아빠가 타는 차를 부시는 걸로 신나게 마무리가 되어서, 제이든이 그레이스를 만난 게 제이든에게도 잘 된 일이지만 그레이스에게도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로가 서로를 건져주는 사이. 그게 첫 번째로 인상 깊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 바로 직전에 위탁소장인 잭과 위탁소 직원 그레이스가 말다툼하는 장면이었어요. 잭이 '나는 너 나이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아이들 봤는데 성범죄자 부모를 고발하지 못 하는 사례가 너무 많다'고 하는데 너무 화가 났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애를 데려간 게 맞는 일이냐 하면, 화가 나는 동시에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는 법이 있고 규칙이 있는데 피해 당사자인 아이가 나는 피해를 봤다고 얘기하지 않으면 못 데려가는 게 법이면 법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흘러갔던 것 같아요. 분노가 분노로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당장의 상황에도 화나지만 그런 규칙과 법의 존재에 대한 분노도 생겼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잖아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피해 당사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2차 피해도 많이 일어나고, 하, 화납니다. 분노로 끝났어요.
현도 : 그레이스가 자기 아버지가 출소한다는 걸 들은 이후 감정의 혼란을 겪었잖아요. 제이든 아빠 앞에서 야구 방망이 들고 선 장면에서 ‘정말 죽이겠구나.’ 생각했어요.
정민 : 한국영화였으면 '아악, 치지 마. 너도 감옥 가!'라는 생각을 했을 것 같아서 공감돼요. 잭이 그렇게 얘기한 다음에, 그레이스가 화나서 조명을 뽑아가요. 그러더니 밖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게 바닥에 던지는데, 놀랐어요. 처음엔 어른이라서 그런 건가 해서 생각했는데, 그 건물이라는 게, 그레이스가 엄청나게 애정을 붓는 아이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니까 밖으로 나가서 공간을 해치지 않게 조명을 던지는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남자친구와 말다툼을 하고 나서 제이든의 집으로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는데, 배경 음악이 위태롭지 않고 너무 멋져요. 너무 단단해 보이고. 싸울 때는 금방 무너질 것처럼.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런 것 같아요. 금방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다가 금방 풀리고 다시 단단해지는 장면의 연속이죠. 앞의 장면들은 아이들을 그렇게 표현했다면 그 장면에서는 보호자 어른 선생님인 그레이스를 그렇게 연출해서 좋았어요. 마치 오버랩 되는 느낌이었어요.
현도 : 정말 공감해요. 그레이스가 자전거를 타거나 잡고 서 있을 때 굉장히 굳세 보인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엄청나게 튼튼한 사람 같고, 히어로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런 걸 의도한 건가 싶었고요. 정민님이 이 부분을 말씀해주셔서 공감되네요.
진영 : 너무 신기한 게, 어떻게 하나의 영화를 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이렇게 다르죠? 한 장면이라고 하더라도 각자 기억에 남는 포인트가 다른 게 정말 신기해요.
저는 제이든이 그레이스한테 '니나 동화'를 설명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그 장면이 그레이스에 대한 신뢰가 쌓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인 것 같아서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결국,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두 번째 장면은 제이든이 그레이스한테 그렇게 신뢰를 줄 수 있었던 이유와 관련 있는데, 그레이스가 잭한테 가서 “왜 아빠에게 학대받고 있는 제이든을 부모네 집으로 보내?”하면서 화내죠. 그때 말했던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잭이 “동화 얘기를 들려줬다고 그러는 거야?”라고 하니까 “아이는 아이의 시선에서 아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다.”라고 말해요. 그레이스가 제이든의 시선에서 이해해주려고 계속 노력했기 때문에 제이든이 신뢰를 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해요.
우정님이 아까 가정폭력 근절 얘기를 했지만, 가정 폭력 상황을 파악하는 데서 피해자가 모든 사실을 일일이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게 피해로 인정되지 않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또 그 장면에서 잭의 말 중에 생각이 나는 건 “그런 건 상담사가 하는 거다. 너는 시설 관리 직원일 뿐이다.” 이 부분이에요. 상담사와 시설 관리직의 업무가 구분되는 건 필요하겠지만, 오히려 시설관리직 직원들이 아이들과 일상을 함께하고 그 안에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인데, 업무를 구분 지음과 동시에 시설 관리직 업무 외에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되는 것 같아서 되게 생각이 나요.
정민 : 2학기 말쯤에 정말 고민을 많이 했던 게 '대상화'예요. 우리가 이걸 말할 때 좋은 어조로 말하지 않죠. 말 그대로 타자를 내 인식 세계에 들여오기 위해서는 대상화가 필수적인데 이걸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진영의 말을 들으며 '마주 봄'과 '같이 봄'이 떠올랐어요. 대상화는 보통 일상에서 만나지 않는 경우가 많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밥 먹고 얘기하는 사람은 대상화를 하지 않아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서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그레이스와 같이 마주 보고 있는데, 그래서 갈등이 깊어지는 게 연출이 되다가도 화해하는 장면이 인상 깊어요. 연인으로서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행동이긴 한데, 화해하는 장면에서 힐끔 보고, 담요 벌려주고, 쏙 들어가요. 그리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눕죠.
우정 : 잭과 그레이스가 말다툼하는 장면에서,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현실에서 아이들을 잘 알고 공감해주는 사람은 그레이스였는데, 사실 잭도 그만큼의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생각을 많이 했을 테고 그 결과가 규칙을 따르는 것이었을 거예요. 잭에게도 잭의 맥락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으로는 그레이스를 응원하지만 ‘뭐가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은 들었어요. 교사가 되어서도 비슷한 일이 많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어두운 길을 혼자 걷는 학생이 있을 때 교사가 어느 정도까지 개입할 수 있을까요? 직접 발로 뛰면서 쫓아가는 게 맞을까, 교사의 바운더리 안에서 편안하면서도 지킬 건 지키는 삶이 맞을까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교사로서 마주칠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아리 : 정민님 말씀처럼 연출과 관련해서, 영화에서 전반적으로 핸드헬드가 두드러졌어요. 자연스러우면서도 흔들리면서 현장감이 느껴지는 장면이 많았어요. 이 영화의 전반적인 것과 같이 흘러가요. 화면이 조금씩 흔들리는데 이 영화에서 흔들리지 않는 인물들이 없죠. 그런데 인물들이 다 흔들리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도움이 되어 주고 위안이 되어 주면서 희망을 품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요. 연출도 이런 인물들의 상황과 감정 상태와도 같이 가는 것 같아요. 위탁소에서 탈주하는 새미를 잡으려고 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도 많이 흔들리죠. 그게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면은 여기까지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 흔들리면서도 동시에 평범한 일상을 잘 영위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 위탁소에 새로운 누군가가 들어오면 또 혼란도 있고 하겠지만 결국에는 잘 풀리고 다들 평범하게 살아가지 않을까 합니다.
진영 : 잭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는 말에 대해서는, 저도 아직 관료제적인 곳에서 일해본 적이 없어서 저는 만일 그 상황이었다면 좀 더 그레이스의 입장일 것 같아요. 관계라는 것은 어느 순간에 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서로 교류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시설관리직원'은 현장에서 아이들과 일상을 함께하며 느끼는 감각이나 생각이 있을 것인데, 그런 것들을 좀 더 존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시설의 장인 잭도 충분히 대안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그레이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같이 얘기를 해보거나 위탁소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는 등 충분히 장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면 법에 순응하고 직원의 태도에 공감을 해주지 못한 것 같아서 저는 조금 아쉬웠어요. 그레이스와 같은 위치에 있을 때 나를 위해서도, 나와 함께하는 이 공간과 아이들을 위해서도 내가 소진되면 안 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선을 두는 것은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노력을 제한하거나 힘이 풀리게 하는 그런 태도는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 위탁소라는 공간은 어떤 곳일까?
현도 : 위탁소라는 공간을 다들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해요. 저는 보면서 진짜 감옥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문을 전부 열어 두어야 하고 가위 등의 물품들도 모두 가져서는 안 되고. 뒷장면이 되게 처음 장면과 같은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이게 이렇게 희망적으로 연출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 공간 속에서 어떻게 희망을 찾아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마커스가 메이슨 옆에 앉아서 랩 하는 장면 있잖아요. 거기서 메이슨이 여기에 대해서 더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고 반응할 때 혼란스러웠어요. ‘결국,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었고, 여기서 어떻게 희망을 찾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어요. 위탁소라는 공간에 대한 다른 분들의 생각이 궁금해요.
정민 : 현도님이 언급한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는 ‘뭐라고 얘기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현도님과 엄청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위탁소 벽이 눈에 들어오는데 깨끗해 보이지 않는 느낌의 벽. 교널 동방 느낌의 벽. 그게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가, ‘그래도 괜찮지 않나?’ 하고 들었던 생각이, 시설은 좀 그럴 수 있겠지만, 그 안에서 있는 그들만의 유대 관계가 있고 그게 너무 좋아요. 처음에 울고불고 난리 치죠. 마커스가 색종이를 들고 와서 다 같이 편지 쓰고 그림을 그려서 주는 데 그것을 순순히 따르고 너의 친구 00이가, 행복한 하루 되길 바라 이런 식으로 하는 애정들이 너무 좋았어요. 위탁소라는 공간 자체가 엄청 긍정적인 공간 자체는 아닐지라도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관계는 충분히 긍정적으로 볼만한 함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진영 : 저도 정민님과 비슷해요. 처음 몇 십분 동안은 되게 무섭고, 별로고, 문제가 많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도님이 말한 것처럼 칼 같은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다 뺏기죠. 가장 싫었던 건, 문을 잠글 수 없는 공간이라는 거예요. 문을 잠그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과 맥이 일치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누군가의 자유를 박탈하는 공간이고, 더 나은 일상을 위해서 이를 개선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은 여전히 드는데 또 한편으로는 그 공간을 완전히 문제없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게 위탁소라는 공간을 낭만화하고 다가가기 어렵게 한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물론 자유를 박탈당하고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아닌데, 그것 역시 공동체이기 때문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계가 만들어졌고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관계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에서도 자기가 만든 노래나 동화를 들려주고 생일 파티도 하고 편지도 쓰는 그런 것들이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내가 공동체 안에 속해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실제 위탁소에서 그런 좋은 어른을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없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맺어지는 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부분이 있지 않을까요?
아리 : 정민님과 진영님이 얘기한 것처럼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이 공간이 그리 좋은 공간이 아닐지라도 마커스가 생일을 축하해주고, 생일이라고 컵케이크를 만들어서 나눠주고, 촛불을 부는 등 소소한 행복이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중간에 어떤 친구의 부모님이 찾아오셔서 그 아이는 위탁소에서 나갈 수 있었는데, 그 장면에서 아이가 문을 딱 여는데 밖이 너무 환했고 햇빛이 들어왔어요. 여기에서는 다들 음침한 분위기에서 TV 보고 있고, 멍 때리고 있는데, 그 친구가 부모님과 나갈 때 빛이 들어오는 게 대비되어서 햇빛 있는 밖과 격리되어서 우리끼리 고립되어서 우리의 삶을 영위해나가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뒷장면에서 메이슨도 사실은 엄청 대규모 입양 가정의 일원이었고 메이슨의 양부모는 많은 수의 아이들을 입양해서 또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는데, 이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메이슨은 양부모가 계시고 양자식들이 있어서 하나의 진짜 가족이라는 안정적인 공동체가 되었고, 그게 위탁소에서 똑같이 적용되어서 그레이스와 메이슨이라는 어른들을 중심으로 여러 명의 아이들과 함께 메이슨네 가족과 비슷한 끈끈한 유대 관계로 이어진 가족이 형성되는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또 하나는 메이슨이 여기서는 아빠지만 사실은 양아들이었던 것처럼 여기에 있는 아이들도 어떻게 보면 가정 폭력의 피해자인데, 사실 메이슨도 양아들이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 가족에서 벗어난 형태였고 그레이스도 학대를 겪은 사람이었죠. 메이슨네 가족이 어딘가 조금 결핍이 있지만 그 사람들끼리 모여서 가족이 된 것처럼, 모두가 각자의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함께 모여서 서로의 아픔을 치유해주고 보듬어주는 진짜 연대를 이루는 것이 행복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가족이라는 게 장소에만 국한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위탁소는 가족이 머무르는 곳일 뿐이지 하나의 엄청 나쁜 곳이라는 느낌까지는 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현도 : 맨 마지막 장면에서 햇살이 비치는데 그게 아리님께서 말씀하신 ‘빛’이 들어와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루이스는 어떤 사람일까
정민 : 저는 좀 궁금했던 게 루이스의 에피소드가 나올 것 같았는데 안 나오더라고요. 너무 억울할 것 같아요. 매일 오해받고, 싸우고. 그 친구를 어떤 포지션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아리 : 루이스가 진짜로 위탁소에 있는 가장 평범한 애가 아닐까 싶어요. 현실적으로 아이 한 명 한 명의 상황을 다 알지 못하는데, 당사자가 스스로 이야기 하지 않으면 그 아이에 대해서 아는 게 없고 아이가 보인 정황만으로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죠. 지금 우리가 루이스에 대해서 하고 있는 게 딱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청 극적인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극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위탁소에 있다는 것 자체가 얘도 어떤 아픔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은데, 얘가 보여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 꽤 현실적인 것 같아요.
현도 : 아리님 말씀 들으면서 생각난 것이 루이스는 매번 침대에 있잖아요. 그레이스가 물총 쏘면서 깨울 때 물총 못 쏜다고 놀리거나, 마커스가 자기 방 앞에서 자해를 했는데도 모르잖아요. 아리님이 말하신 전형성에 맞는 친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 아는 것처럼 하면서 자기 세상에 틀어박혀서 지내고자 하는 그런 친구 같아요.
# 새로운 직원, 네이트는 어떤 사람일까
우정 : 복잡한 인물, 선한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자 왔지만 아이들을 타자화하고 아이들을 시혜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 같아요. 도우려고 하지만 여전히 넘지 못하는 벽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만약 위탁소라는 곳에서 봉사활동을 한다면 나는 아마 네이트와 같은 인물이었을 것 같아요. 네이트가 복잡하면서도 안쓰럽고 그러네요.
아리 : 저는 네이트가 되게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불우한 아이들과'라고 말한 것도 인상 깊은 장면이었어요. 왜 말을 그렇게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어요. 우정님의 생각처럼 이곳에 일을 하러 왔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온 것이겠죠. 그런데 네이트가 하는 일은 수동적인 행동이었어요. 그러나 후반부에서 청소기로 소파를 청소하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주머니에 넣잖아요. 그런데 알고 보니 새미에게 인형을 주는 것이었어요. 이걸 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 걸 수도 있겠지만, 처음에는 아이들을 불우한 소년들 정도로 바라보고 시혜적으로 바라보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들을 이해하고 한 명의 인격체로 보고 아이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고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었고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가 그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아요. 진영이 이야기해준 그레이스와 제이든의 관계에서처럼 아이들의 소통방식을 이해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요?
정민 : ‘불우’에 대해 들으면서 생각난 것이, 우리는 매번 동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의 인식 속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혹은 결핍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잖아요. 동등한 위치에 있는 타자의 집에 가서 갑자기 도와드리겠다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정말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고민이 돼요. 교과서적으로 말해보자면 나와는 다른 맥락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텐데. 그런데 여기에서 고민을 그만두어도 될지는 의문이에요.
현도 : 네이트가 처음에 되게 자기 말이 많은 사람 같았어요. 본인에게 묻는 질문이 아닌데도 본인이 답을 할 만큼 자기 입장/생각을 상황에 관계없이 말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인형을 전해주는 장면에서 모든 것이 전달되었던 것 같아요. 그 장면에서 마음이 찡했어요. ‘이 사람도 되게 많이 변했구나.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치 그레이스가 제이든의 이야기를 듣는 방법을 알았던 것처럼.
제가 사실 장애를 가졌던 적이 있어요. 다리가 아파서 휠체어를 탔어요. 그때 진짜 싫었던 것이 휠체어 끌어주겠다는 사람이었어요.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긴 한데, (도움이 되었는지 여부와 상관 없이)[각주:2] 도와준답시고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 싫었거든요.
# 기타
현도 : 그레이스의 아버지가 등장할 줄 알았는데 하지 않았어요. 그레이스의 인생에서 아버지는 다신 대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고, 그냥 없어도 되는 사람이었죠. 그런 맥락이라면 영화에서 잘 넘겼다고 생각했어요.
아리 : 만약 한국 영화였으면 카페 같은 곳에서 아버지랑 만나는 등 클리셰 같은 장면이 등장했을 것 같은데, 이 영화에서는 깔끔하게 아버지가 끔찍한 사람이지만 더 이상 그레이스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으로 끝난 것이 좋았어요. 그리고 위탁소라는 장소에 대한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제가 학생 인권 연구 프로젝트할 때 탈가정 청소년에 대해서 연구했어요. 쉼터에서 머무는 청소년들과 연구를 조금 진행했는데, 위탁소나 쉼터에 있는 아이들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을 것이고 각자의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에는 불량하고 허용되지 않은 것들을 마음대로 하는 아이들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 같이 생각나기도 했었어요. 세상에는 바꾸어나가야 할 것이 정말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 마무리
진영 : 저는 사실 처음에 이 영화를 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위탁소라는 공간이 너무 멀고 어렵게 느껴져서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에요. 어떤 문제를 접하면 ‘완벽한’ 해답을 내리고 싶어 하는 좋지 못한 습관과도 약간 관련이 있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영화가 시작했는데 이 위탁소라는 공간이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그 안에서는 자유를 박탈하고, 그 안의 직원들의 약간의 폭력적인 모습(정서적으로 학대하는 모습 등)도 보면서, 처음에는 ‘아, 역시 그런 게 문제야. 뭔가 [불량] 청소년에 대한 소외적인 시선과 그들을 존중하지 않는 비청소년, 사회의 주류적인 시선과 문화가 문제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전히 그 점에 개선되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는 위탁소라는 공간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해요. 여기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간이고, 일방적으로 청소년들이 도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다른 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관계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혹은 내가 사랑 받고 있는 존재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게 필요하고 그런 관계가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현도 : 저는 이런 시간을 좋아하는 이유가 제가 못 보거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되게 많이 짚는 다는 것이에요. 이런 시간도 너무 재미있었고 이걸로 이 영화에 대해서 조금 더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다음에 만나면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리 : 저는 진영이 얘기했던 거에 공감하면서 시작할게요. 저도 약간 처음에 인상 깊은 장면 말할 때 조금 분노가 있었어요. 영화를 보면서 그 안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감정적으로 반응하면서 보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교육저널 분들과 이야기하면서 더 깊고 다양한 시각에서 위탁소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잭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좋았어요. 영화제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또 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민 : 아리님이 마지막에 말씀하셨던 게 좋았어요. 영화제 계속하면 좋을 것 같아요. 영화에서 너무 많은 얘기가 압축적으로 나와요. 중간에 그레이스가 상담하는 부분도 몇 초 나오죠. 그렇게 짧게짧게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나왔던 것이, 처음 볼 땐 그런 게 너무 많이 나오니까 ‘영화로서는 과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아까 아리님이 루이스가 위탁소에 사는 아이들의 전형이지 않을까 하는 말을 했는데, 이 영화에서 너무 많은 장면들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시 영화는 같이 봐야 한다는 게 맞는 듯해요. 다른 분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아, 이게 이런 걸 수도 있구나.’ 생각하는 게 좋아서 너무 즐거웠어요.
우정 : 저도 영화를 보면서 하나의 장면에 대해서도 깊이 얘기하고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되어 좋았어요. 위탁소라는 공간은 양육과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우리 동아리에 던져주는 문제의식이 있는 것 같아요. 다음에 추후 기사를 쓰면서 꺼내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촉법소년들의 행동은 곧잘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그때마다 사회적 공분을 사는 경우가 많다. 최근 경기 의정부 경전철 등에서 노인의 목을 조르고 폭행한 중학생도, 지난해 온라인 직거래 장터에 ‘장애인을 판다’는 글을 올린 10대 소년의 이야기도[각주:1] 우리에게 생소한 이야기가 아니다. 촉법소년은 왜 항상 우리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연령과 연령에 따른 처벌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년법 제4조에서는 비행소년을 우범소년, 촉법소년, 범죄소년으로 구분하고 있다. 우범소년이란 ‘만 10세 이상 만 19세 미만’으로서 형사법령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보호자의 정당한 지시에 따르지 않고 가까운 장래에 위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청소년, 촉법소년이란 ‘만 10세 이상 14세 미만자’로서 형사법령을 위반하였으나 형사책임이 없는 청소년, 범죄소년이란 ‘만 14세 이상 만 19세 미만자’로서 형사법령을 위반하고 형사책임도 있는 청소년을 의미한다. 즉, 쉽게 이야기해서 우범소년은 형사법령을 위반하지 않고 형사책임도 없는 소년이며, 촉법소년은 형사법령을 위반하였으나 형사책임이 없는 소년, 범죄소년은 형사법령을 위반하였으며 형사책임도 있는 소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형사법령을 위반하지 않았으니 책임도 없는 소년(우범소년)과 형사법령을 위반하였으니 형사책임이 있는 소년(범죄소년)에 대한 처분은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범죄소년과 같이 형사법령을 위반하여 범죄 자체에는 차이가 없음에도 형사책임이 없는 촉법소년은 선뜻 이해하기가 힘들다. 특히 그 책임의 기준을 ‘만 14세’로 무 자르듯 잘라 놓았고, 그 점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청소년의 사례가 언론을 통해 집중 보도 되면서 이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점차 커지게 되었다.
물론 이 기사에서 ‘악랄한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법이 제시한 일정한 기준에 자신들이 부합하는지도 계산할 줄 아는 이들의 행동을 ‘무지에서 비롯된 범죄’라고 애써 포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들을 향한 사람들의 다소 편향된 시선과 그 속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과연 촉법소년들을 떳떳하게 책망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한 제도와 건강한 관점을 가졌는지 말이다. 우리의 현실을 알고 나면 촉법소년들을 향한 무분별한 비난의 에너지는 혹 힘을 합쳐 상황을 개선해보고자 하는 의지의 에너지로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2. 도마 위의 ‘뜨거운 감자’
촉법소년들로부터 비롯된 논쟁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형사책임 연령을 만 14살보다 더 하향하자는 주장과 아예 소년법 자체를 폐지하자는 주장이다. 지금부터 각 주장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그 주장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을 짚어보자.
# 형사책임 연령 하향 문제
현행법상 ‘만 14세 미만인 자’는 형사미성년자로서 그들의 행위는 불가벌로 규정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중범죄를 저질러도 소년법에 의한 보호처분의 대상이 될 뿐 형사상 처벌 대상은 되지 않는다.
그럼 왜 하필 만 14세가 기준일까? 1912년부터 시행된 조선형사령에 따라 일본 형법이 한반도에서도 효력을 가지게 되면서 14세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하는 형사미성년의 연령이 우리 사회에도 정착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형법이 제정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형법상 형사미성년의 연령은 14세 미만으로 규정되고 있다(형법 제9조). 일본이 소년법에서 14세를 기준으로 하게 된 배경에는 러일전쟁이라는 전시상황 및 종전 직후의 증가한 소년범죄가 있었다. 다시 말해, 모든 소년범죄를 처벌할 수 없었던 현실적 사정이 형사미성년의 연령 기준을 상향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1912년부터 시행된 법이 한국전쟁 전후의 불안정한 사회적 현실과 맞물려 별다른 논의 없이 그대로 두었다.[각주:2]
그렇다면 우리나라와 일본만 그런 것일까? 우선, UN 아동인권위원회는 ‘아동의 연령과 함께 사회 복귀 및 사회에서 맡게 될 건설적 역할의 가치를 고려하는 등 아동에게 인간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의식을 높일 수 있는 방식으로 처우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UN 아동 권리협약 제 40조에 따라 형법 위반능력이 없다고 추정되는 최저연령의 설정을 촉구하였다. 또한 각 당사국에 대해 형사책임 연령을 12세 이하로 낮추지 말고, 최저 형사책임 연령을 지나치게 낮게 정하지 아니하며, 기존의 낮은 형사책임 연령은 국제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수준으로 상향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년사법 운영에 관한 유엔 최저 기준규칙 제4조 역시 “소년의 형사책임 연령이라고 하는 개념을 인정하고 있는 법 제도에 있어서 그 개시 연령은 정서적·정신적·지적 성숙에 관한 사실을 고려하여 너무 낮은 연령으로 정해져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들이 저마다 유지하고 있는 형사책임 최저연령은 각국의 역사적·문화적 기반에 따라 달리 설정되어 있고, 그 연령의 범주는 우리나라보다 낮은 7세부터 우리나라보다 높은 18세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은 국가들이 우리와 같이 만 14세(40개국)에 기준을 두고 있다는 점[각주:3]과 아동인권위원회 등의 권고에 따라 형사책임 연령 기준이 상향되는 국가들이 늘고 있다는 점은 지속해서 형사책임 연령을 낮추자는 주장이 나오는 우리나라에서 눈여겨볼 만 하다.
어떻게든 형사책임 연령을 낮추고자 하는 사람들은 UN의 권고 연령인 만 12세까지라도 낮추고자 하며, 그 이유로는 주로 소년범죄의 증가, 흉포화, 저연령화를 든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검찰청의 범죄분석[각주:4]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8년까지 소년 형법 범죄는 지속적해서 감소[각주:5](2009년 81,378명 → 2018년 54,205명)하였으며, 특히 그토록 형사책임 연령에 포함하고 싶어 하는 10세~13세의 범죄율은 전체 소년범죄의 0.1%~0.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강력범죄의 경우에도 10세~13세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소년범의 0.1%~0.5%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이들의 ‘수가 적기’ 때문에 형사책임 연령을 낮출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형사책임 연령을 낮추는 ‘법 개정’까지 하려는 측에서는 적어도 적절한 통계자료를 가지고 근거를 드는 것이 바람직한 논의의 자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소수의 충격적인 범죄만을 가지고 촉법소년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를 하여 자극적인 여론을 만드는 것은 대중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다. 특히, 그 대상이 스스로를 방어하고 변론하기 어려운 청소년이라는 것을 볼 때, 어른들의 다소 무책임한 입법은 그저 사회를 폭력과 자극의 악순환으로 내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또한, 책임능력의 유무를 정하는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생물·심리·문화적 요인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상대적으로 정해질 수 있는 등 아직도 모호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무작정 형사책임 연령을 낮추려고 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라 느껴진다. 비슷한 예로, 2007년 소년법을 개정하면서 촉법 연령이 기존의 만 12~14세에서 10~14세로 하한 연령이 낮추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개정 후 소년부 실무를 담당하는 법관으로부터 연령만 낮추었을 뿐 이들에 대한 처우와 관련하여 추가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던 것이 지적되었다.[각주:6] 이처럼 단순히 형벌권을 강화하는 방안은 이들에게 적절한 처벌도 되지 않고 교화·선도의 여지도 줄어들 수 있다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 소년법 폐지론자들의 이야기
한편 조금 더 극단적으로, 아예 소년법을 폐지하고 성인과 동등한 선에서 소년들을 심판받게 하자는 주장도 있다. 이는 UN 아동 권리위원회의 권고나 청소년에 대한 다이버전 및 회복적 정의를 실현하려는 국제적인 흐름에 반한다는 점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나 법치주의적 관점과도 다소 어긋나는 선택지이다. 호통 판사로도 유명한 부산가정법원 소년부 천종호 부장판사는 “소년법 폐지·개정을 통해 형벌에 있어서 성인과 동등한 취급을 하고자 한다면 우선 민주주의에서 핵심 권리인 참정권부터 성인과 동등하게 주어야 한다. 그런데 현행 공직선거법은 미성년자에 대해 선거권을 비롯한 참정권을 제약하기 때문에 미성년자는 법적으로 선거권을 행사하여 소년법의 폐지나 의사 형성에 참여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년법의 폐지나 개정을 강행하는 것은 민주주의나 법치주의에 위반될 소지가 크다.”라고 말하며 이 논의에 핵심 당사자인 미성년자들의 참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각주:7] 또한, 성인과는 다르게 참정권 등의 핵심적인 권리가 제약받고 있는 미성년자들에게는 소년법이 오히려 이들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뜨거운 감자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쓸모없는 장갑은 왜 탓하지 않는가?
# 감자를 잡기에는 장갑이 너무 작고 얇다 : 보호 처분의 타당성·효과에 대한 문제제기
흔히 촉법소년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이들이 아예 아무 처벌을 받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엄연히 소년재판을 받고 죄질이나 반성 여부 등에 따라 1호부터 10호까지의 보호처분 중 하나 또는 병합된 처분을 받게 된다. 소년법 제1조에 따르면 “이 법은 반사회성이 있는 소년의 환경조정과 품행 교정을 위한 보호처분 등의 필요한 조치를 하고, 형사처분에 관한 특별조치를 함으로써 소년이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이 보호처분은 과연 지금까지 그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을까?
앞서 보았듯 소년범죄가 실질적으로 증가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소년범죄의 재범죄화율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0년간 소년 전과자 비율은 32.2~42.3%나 되며, 그중 전과 6범 이상이 3.8%에서 8.7%까지 증가한 것[각주:8]은 소년범에 대한 처분과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다만, 이 통계자료의 경우 형사처벌을 받은 소년범이 포함되어 있어, 우리는 보호처분을 받은 소년범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자료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009년부터 10년간 소년 보호 관찰대상자들의 보호관찰 경력을 통계 내 본 결과, 처음 보호관찰을 받은 소년의 비율은 2009년 66.1%에서 매년 지속해서 감소하여 2015년 이후에는 50% 이하로 하락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미 1회 이상의 보호관찰을 받은 소년들이 다시 보호 관찰대상자가 되는 비율이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9] 이때의 보호관찰은 협의의 보호관찰 이외에 사회봉사명령·수강명령 대상자를 포함한 인원이다.
더불어 소년원 퇴원자의 1년 이내 재입원율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이와 같은 자료들은 결국 보호처분이 실질적으로 소년범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보호처분의 실상을 알아가다 보면 촉법소년들이 빠진 악순환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근래에 가장 이슈가 되었던 보호처분 중 하나가 바로 6호 처분이다. 이는 6호 시설인 살레시오 청소년센터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 때문이다. 아이들은 야간 생활 지도원에 의해 성추행을 당했고, ‘혐의없음’으로 결론이 났지만 가혹행위와 약물 강제투여의 의혹도 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밝혀진 6호 시설의 전반적인 환경은 소년들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해 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들에 대한 부당대우뿐만 아니라 잘 되지도 않는 국가에서의 비용지원과 인정되지 않는 학력 때문에 아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소년범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미래를 제대로 그려나갈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을 한 소년들을 안일하게 민간 기관에 위탁하는 것 그 자체로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아이들을 민간에 위탁, 아니 방임하는 것은 국가로서 그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민간이 소년원을 운영하게 하는 민영소년원이 추진되는 것은 실로 걱정부터 앞선다.)
하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운영되는 소년원의 경우에도 위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우리나라 소년원의 경우, 여자아이들이 가는 소년원 2곳을 포함해 전국에 단 10곳뿐이라 소년원 과수용 문제[각주:10]는 꾸준히 제기되어 오고 있었다.[각주:11]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여 관찰관 1명당 관리하는 소년범의 수가 123명에 달하는데, 이는 다른 OECD 국가보다 4배가 넘는 수라고 한다.[각주:12]
소년원의 교육은 어떨까? 대전소년원에서의 생활을 체험한 한 르포[각주:13]에 의하면 이곳에서 생활하는 소년들은 군대와 비슷한 관리를 받고, 여전히 그들 안에서의 서열과 그에 따른 생존기가 있었으며,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름뿐인 수업이 존재했다. 자유시간에 누울 수도 없고, 혼자만의 생각과 감정을 그리는 일기장을 의무로 쓰고 검사 맡아야 했고, 30분 정도의 체육 시간이 유일하게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시간이었으며, 정신교육의 명목으로 고사성어와 음악이 나오는 라디오를 들어야 했다. 이것이 과연 소년범의 성장과 교화를 바라는 시설이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하루일까? 이들이 살아가는 24시간 속에는 과연 진정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이들에게 갱생의 여지조차 주지 않은 채 응보적 잣대를 들이민 것은 아닐까?
4. 감자의 온도와 우리의 손에 맞는 장갑을 끼자
# 언제까지 뜨거운 감자의 탓만 할 것인가
소년법은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제정되었음에도 지금까지는 어른들의 입맛대로 굴러가는 경우뿐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른들은 소년들에게 손가락질한다. 따지고 보면, 소년법을 만든 것도, 우범소년·촉법소년·범죄소년을 구분 짓고 형사처벌여부를 정한 것도, 보호처분의 종류를 규정하고 운영한 것도 모두 어른들인데 희한하게도 모든 화살은 소년들을 향한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전에도 말했지만, 어른들은 손가락질하고 비난할 수 있어도 소년들에게는 변명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힘조차 없다. 소년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소년들이 법적·도덕적으로 지탄받을 행동을 했다고 해서 어른들이 만든 시스템의 잘못된 점이나 빈틈까지 소년들에게 책임 전가를 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태도이다. 더하여, 그 시스템은 자신들을 더 나은 환경에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아니고, 평균적인 삶을 살 수 있게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 그 모든 과정은 자신들을 ‘도우려는’ 목적보다는 어떻게든 ‘낙인찍으려’ 안달 나 있는 하이에나처럼 보일 것이다.
# 몇 가지의 대안, 그리고 아직은 그리지 못한 해결책
법학적·실무적 지식이 그다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다 할 대안을 제시하기는 참으로 힘들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사를 쓰며 떠오르는 아이디어 몇 개는 활자를 통해 공유하고자 한다. 이런 생각의 씨앗들이 모여 가까운 미래에는 아이들을 위한 좋은 법안이 탄생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우선, ‘보호처분’이라는 용어의 개정이 필요할 것이다. 소년법을 잘 모르는 대중에게는 이 처분이 단순히 촉법소년을 ‘감싼다’는 의미로 다가갈 수 있고, 자연스레 거부감이 생길 수 있다. 처분의 한 역할 중에는 소년을 보호하는 것도 물론 있겠지만, 그들의 품행을 교정하고 건전한 성장을 돕는다는 의미가 강조되는 용어의 사용이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는 방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정말 당연하겠지만, 보호처분의 내실화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특히, 민간 위탁 보호처분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고려해보는 것이 필요하며, 만약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학교에 버금가는 엄격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되기를 바란다. 소년원의 경우에도 ‘성인 교정시설’과 같이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을 ‘통제’하기보다는 ‘기숙 학교’의 모습과 가까운 형태로 아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아이들이 미래를 그리는 것을 돕는 전문인력이 확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회적 분위기 또한 중요하다. 흔히 ‘소년의 범죄가 진화했다’고 표현하는데, 사실 이들의 범죄는 대부분 어른을 보고 모방한 경우가 많다. 이들의 범죄 형태를 보고 행위자를 비난하는 일차원적 시각에서 벗어나서 그런 환경이 조성된 사회 전체를 조망하고 반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폭력을 무조건 ‘엄벌주의’라는 또 다른 폭력으로 해결하기보다는, 피해자의 회복과 가해 소년의 교화에 초점을 맞추어 모두가 바람직한 사회적 구성원으로 어울릴 수 있도록 법을 적용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논의의 과정에 청소년들이 반드시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촉법소년과 소년법 등의 문제를 모두 성인의 시각에서만 바라보았다. 또래의 입장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통찰을 줄 것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그리지 못한 해결책 중 몇몇은 이들과의 대화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미성년자를 ‘미성숙’으로 정의하고 논의의 장에서 배제한다면 결국 진짜 ‘미성숙’한 것은 그들이 아닌 우리 사회가 될 것이다.
# 봄, 그리고 꽃샘추위
인간의 나이를 계절로 환산해보자. 백세시대임을 감안하고 나이를 4개의 계절로 나누면 1~25세까지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 26~50세까지는 뜨겁고 찬란한 여름, 51~75세까지는 시원하면서도 은은한 가을, 76~100세는 춥지만 포근한 겨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논의했던 촉법소년들은 어느 계절을 걷고 있을까? 만 10세 이상 14세 미만의 이 소년들은 봄의 길을 걷고 있으며, 생각해보면 그들은 아직 한 계절도 다 지내보지 않은 어린 나이다. 해마다 계절이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듯, 다른 10대들과 함께 봄을 걷고 있어도 촉법소년들에게 봄은 유난히도 혹독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들은 꽃샘추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봄이지만 혹독한 겨울을 맛보는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수 있다. 이불 하나만 덮어주면 좋으련만, 그들에게 따뜻한 이불을 덮어주는 이는 아직 몇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