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학내에 인권헌장 바람이 불고 있다.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 오랜만에 찾은 학교에는 곳곳에 인권헌장과 관련된 대자보들이 어지러이 게재되어 있었다. ‘탈동성애자의 발언을 차별 행위, 혐오 표현으로 규정해 자유를 박탈하는 서울대 인권 헌장에 반대한다.’, ‘지극히 불명확한 개념, ‘성적지향’이 차별금지사유에 포함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등, 중앙도서관을 거쳐 사범대를 향하는 동안 여러 대자보를 보며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다 사범대 앞에서 이질적이게도 반듯하게 붙어있는, ‘인권헌장의 제정이 성도착증을 허용할 것이라는’ 1 대자보를 보고 말았다. 그리고 슬프게도 맘카페에서 동성애가 에이즈 발병의 원인이라고 말하던 한 사람이 생각났다. “당신의 아이가 동성애자면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신의 아이가 에이즈를 퍼뜨리고 있어요!”. 공포와 두려움으로 무장했던 그 발언들이 지금 내 눈앞에, ‘교육’을 이야기하는 사범대학 근처 게시판에 큼지막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너무나도 모순적인 상황이다. 나는 사회에 만연해있는 부조리와 차별을 함께 이야기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대학교에서 현실에 안주하는 방법이 아닌 현실에 부딪치는 용기를 얻고 싶었다. 그러나 이렇게나 많은 혐오가 자유와 이성과 진리라는 이름으로 대학교 게시판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10월 16일에 열린 ‘서울대 인권 헌장 및 대학원생 인권 지침 제정 공청회’에는 공격적인 댓글들이 달렸고 성 소수자 동아리 대표는 아웃팅 등 다양한 위험에 노출될 것을 고려해 전체동아리대표자협의회에 참가하지 못했다. 2 학내의 혐오는 대자보에서 그치지 않고 혐오 행동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나는 손발이 차가워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대자보를 몇 번이고 읽었다. 서울대학교에는 내 손발을 얼린 겨울바람보다 더 싸늘한 혐오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3
2. 인권헌장 반대 성명문은 혐오 표현이다.
“서울대학교는 인권헌장 제정 추진을 즉각 중단하라!” 2020년 10월 15일, 서울대학교기독교총동문회, 동성애합법화반대전국교수연합, 진정한평등을바라며나쁜차별금지법을반대하는전국연합, 복음법률가회는 인권헌장 반대 성명문을 발표했다. 이 성명문은 인권헌장 제3조 차별금지와 평등권을 문제 삼고 있으며 이 안에서도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성명문의 두 번째 주장인 ‘인권헌장은 서울대학교에 동성애/젠더 이데올로기 독재를 가져온다’는 부분은 법적/과학적인(논리적으로 보일 뿐이지만) 근거가 바탕이 되었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정당한 혐오’, ‘혐오할 자유’를 논하고 있다. 이 부분을 요약하자면, 크게 세 가지로 주장으로 나눌 수 있다. 1) 우리나라 최고법원인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동성 간 성행위는 비정상적인 성적 교섭행위로서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에 반하는 성적 만족 행위’로 판단해 왔기에 동성간 성행위는 부도덕하다. 2) 동성애 유전자가 없다는 연구 논문들이 있기에 동성애는 바꿀 수 없는 존재 내지 상태가 아니므로 바꿔야 하는 것이 맞다. 3) 우리는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지 동성애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4
나는 반대 성명문을 읽으며 이 세 가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1)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에 반하는 동성애는 무슨 의미일까? 2) 동성애 유전자가 없다는 것이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하는가. 3) 과연 동성애가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인가?
1) ‘선량함’을 내세워 혐오를 말하다.
우선, 나는 이 성명문을 읽으며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내용이 군형법, 그리고 추행과 관련이 높다는 논의를 차치하고서도 결국 반대 성명문이 동성애를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과 반대되는 악랄한 무언가로 바라보고 있음이 분명하기에 나는 그렇다면 선량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보고자 한다. ‘이성애’는 선량한가? 맞다, 아니다를 대답하기 전에 우리는 이 질문이 매우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컨대, 남성과 여성이 성행위를 하는 사실을 우리는 선량하다고 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성애라는 사랑의 형태를 선함과 악함이라는 가치판단으로 바라보는 것이 괴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이 성행위를 할 때, 여성이 원치 않음에도 남성이 강제로 성행위를 이어갈 경우, 이것은 선하지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성애 또한 악함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우리는 이성애가 선이고 동성애가 악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선악의 판단은 그 하위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 내용은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추행을 막기 위한 법의 내용이나 그러한 맥락을 차치하고서라도, 동성애는 선량하지 못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문장은 성립될 수 없다. 그들은 동성애를 ‘악하고 음란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핵심은 모든 이성애가 성행위로 이어지지 않듯이 모든 동성애도 성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며 결국 이성애든 동성애든 모두 서로 합의 가능한 성인이 ‘친밀한 관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 강조하건대, 동성애를 단순히 성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행위로 바라보는 그들의 혐오는 근절되어야 할 것이다. 5
동성 간 성행위가 일반인들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한다는 이야기 또한 사실 여부를 떠나 동성애가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에 반한다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다수가 흑인을 혐오한다고 흑인을 혐오하는 행위를 정상적인 행위로 보지 않듯, 혐오감이 곧 악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혐오를 고찰하는 태도이다. 성명문에도 드러나듯 이러한 혐오감을 내세워서 자신의 차별적 시선을 정당화하고 선량한 것이라고 치부하려는 태도가 인권헌장이 필요한 이유를 방증하는 것이다.
2) ‘동성애 유전자’를 내세워 비정상으로 낙인찍다.
두 번째로 동성애 유전자가 없다는 것이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하는지 의문이다. 그들은 왜 동성애를 말할 때 동성애 유전자와 함께 말하는가? 우선 동성애 유전자, 이성애 유전자 등. ‘~에 대한 유전자’를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다. 성향 및 행동은 하나의 특질을 가진 유전자만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닌 환경적, 유전적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여 도출된다. 단순히 동성애 유전자가 있다 혹은 없다의 차원으로 국한해 논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논의는 불필요한 논의이다. “어째서 이러한 유전학적 내용과 동성애를 결부시키는가?”의 문제부터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성애를 말할 때, 이성애 유전자의 유무 등 ‘부연설명’을 하지 않는다. 예컨대,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사랑할 때 “나는 내 유전학적 정보에 의거하여 여자인 너를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필연적이야.” 라고 말하며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내면 혹은 외면 그 밖의 여러 요인들, 그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세계를 보며 사랑에 빠진다. 다른 것은 ‘성별’뿐인데 이곳에 ‘유전자’의 논의를 결부시키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혹여 동성애 유전자가 없다는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동성애가 비정상적임을 함축하지 않는다.
이 주장의 핵심은 결국 과학적으로 보이는 근거를 가져와 동성애가 비정상임을 밝히는 것에 있다. 한 인간의 성향을 결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가 동성애에 대해 다루고 있지 않다고 말하며 동성애를 혐오하는 행위가 정당함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나아가 탈동성애라는 용어를 통해서 동성애에서 벗어날 수 있고 벗어나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를 주도했던 가나 박사 또한 “다른 많은 행동과 마찬가지로 동성 간 성적 행동은 유전적 혹은 비유전적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동성애 성향이 유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할 수도 없고, 비유전적 요소, 즉 사회적·환경적 요인에 영향을 받아 결정된다고만 볼 수도 없다.”고 밝혔다. 그 누구도 성 정체성을 강요하고 벗어나라고 말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이 주장이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 기저에 존재하는 혐오를 마치 이성처럼 보이는 가면을 써 감추려는 시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6
3) 동성애는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세 번째는 “‘행위 비난’을 ‘행위자 비난’과 동일시하는 서울대학교 인권헌장은 보편적 헌법 이론과 부합하지 않으며, 동성애/젠더 이데올로기의 전체주의적 독재를 초래한다.”는 주장과 관련한 의문이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행위자 비난은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흔히 게이라는 말을 비속어처럼 사용하고 동성애자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고 있는 현 상황을 행위자가 아닌 행위만을 비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나아가 우리는 동성애를 비난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며 논지를 전개하는 것도 동의하지 않는다. ‘행위 비난’과 ‘행위자 비난’을 구분하라고 하지만, 엄연히 ‘동성애 비난’과 ‘동성애자 비난’ 모두 혐오 표출이며 근절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즉, 행위와 행위자 비난을 구분하라는 이 내용 속에 숨겨진 것은 ‘특정인을 비난하지 않을테니 나는 자유롭게 혐오하겠다’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동성애가 비정상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규탄하는 이유는 발언에 깔린 폭력적이고 혐오적인 시선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행위 비난과 행위자 비난을 분리하는 차원으로 국한시킬 수 없다. 행위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에 7 정당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차별적 시선을 정당화하려는 발언이기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8
한편, 절대적인 잣대로 동성애를 비판하는 표현을 강제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인권헌장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며, 그들이 하는 것은 비판이라기보다 비난이며 혐오이다. 그들이 존재를 부정하는 혐오를 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러한 혐오를 규탄하고 근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사상이나 견해가 옳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자유민주체제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하며, 따라서 동성애를 혐오하는 자신들의 발언도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절대적인 잣대가 없다는 것이 가치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절대적인 옳음이든 사회에서 구성된 옳음이든 옳음과 가치를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즉, 상황과 맥락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차원을 넘어 우리는 사회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며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는 행동, 남을 배려하는 행동 등, 우리는 내가 속한 이 공동체 내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옳음과 가치에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단순히 절대적인 잣대를 말할 수 없으니 옳음과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는 행위는 우리가 더이상 사회의 방향에 대해, 사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뜻과 같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상처받고 상처 주는 사회를 허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들의 혐오 표현을 나아가 그 혐오를 표출하는 행동을 묵인하는 학교를 마땅하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소위 <팩트체크> 기사로 그들의 비논리를 드러내고 퀴어문화축제에서 폭언과 난동을 일삼는 행위를 규탄해도 여전히 우리는 사회에서 당당히 우리의 성 정체성을 말하기 어렵고 누군가는 폭력적인 시선과 억압에 몸부림치고 있다. 그 사회의 일원인 서울대학교 또한 굵은 글씨로 혐오 표현이 쓰여 있는 것을 버젓이 이성적인 성명문이라고 게시하고, 그것을 통해 누군가가 받을 상처는 고려하지 않으며, ‘비정상’으로 아무렇지 않게 낙인찍고, 그것을 스스로 정당하다고 말하기 위해 논리 아닌 논리를 만들고 있다. 절대적인 잣대이든 상대적인 잣대이든, 핵심은 그들의 혐오 표현이 근절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우리는 더이상 학교 안에서 혐오적 시선이 표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표현에 책임을 진다는 것
부당한 일에 왜 분노하는가. 혐오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 입어도 그 행위를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인가. 표현의 자유가 혐오의 자유를 함축한다고 말할 수 없다. 즉, 표현의 자유란 어떤 발언이나 어떤 행동 등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 모든 표현이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우리의 표현에 책임을 져야 한다. 동성애와 성전환이 옳으며 가치 있다는 것을 강요하고 있다는 발언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동성애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동성애 혐오를 강요하고 싶기에 차별과 혐오를 멈춰달라는 목소리를 하나의 강요로써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성적지향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우리는 이런 혐오를 근절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학내에선 지속적으로 이러한 혐오 표현이 표출되었다. 위 세 가지 주장은 형태만 바뀌었을 뿐, 동성애가 에이즈를 발병시킨다거나 성도착증이라거나 정상적인 가족 정의에 맞지 않다는 등의 주장과 그 결을 같이 한다. 핵심은 이 모든 주장과 근거가 결국 보다 수월하게 혐오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나아가 그 어떤 주장과 근거도 혐오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체성’을 부정하고 비정상으로 낙인찍고 혐오를 조장하는 이 모든 행위에 대해 우리는 규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연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9
인권헌장 반대 성명문이 하나의 혐오 표현임은 명백하다. 정당한 혐오와 정당한 차별을 시도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공포에 호소하며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혐오의 목소리가 학내에 마치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인권헌장이 필요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한편, 인권헌장이 비단 성적지향 및 성별 정체성만을 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특정 단체의 혐오로 인해 논의의 장이 축소되어 버렸다. 그렇기에 우리는 논의의 장을 확장하여 인권헌장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학내에 인권헌장 제정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권헌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3. 인권헌장을 향한 학내의 목소리
인권헌장을 향한 목소리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동성애 혐오뿐만 아니라 학내에선 무수히 많은 인권침해상황이 발생해 왔다.
H교수 사태는 우리의 공동체가 얼마나 인권침해에 취약한지 보여주고 있다. H교수는 성희롱을 자행하고 자택의 곰팡이 제거와 양복 수선을 지시하며, 학생의 인건비를 갈취하기도 했다. 2016년 11월 사회학과 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이 ‘대책위원회’를 결성한 이후 많은 학생들이 H교수 운동에 동참했고 모든 사실관계가 인정되었으나 돌아온 것은 ‘해임’이 아닌 ‘정직 3개월’이었다. 2018년 7월 20일 <H교수 사건 대응을 위한 학생모임> 페이스북에는 비록 징계위가 ‘정직 3개월’을 선고하였지만 H교수 사건을 예방할 수 있는 구조적인 개선을 만들어나가게 되었음을 발표했다. 10
우리의 학교는 안전하지 않았다. 인권침해의 사실관계가 밝혀진 교수는 당당히 학교에 들어와서 연구를 할 수 있고 피해자는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학교에 내던져진 것이나 다름없다. H교수뿐만이 아니다. 이 끔찍한 일은 또다시 발생한다. H에서 A로 알파벳이 바뀐 것뿐이었다. 서어서문학과의 A교수는 피해자에게 원치 않는 접촉을 시도했고 졸업을 빌미 삼아 협박했다. 이런 악질적인 행위에도 인권센터는 3개월의 정직 처분을 결정했다. H교수 때와 마찬가지의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2019년 8월 31일, 마침내 교원징계위원회에서 A교수의 해임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파면이 아니라 해임이었지만 우리는 H교수와 A교수 사건을 겪으며 학내가 인권무법지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인권수호를 위한 바탕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H교수와 A교수 이후 우리 학내는 안전해졌는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음대 B교수, C교수의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B교수는 피해 학생의 숙소에 강제 침입하였고 수차례의 원치 않는 신체접촉 등의 가해를 저질렀으며 C교수는 피해자를 데려다준다며, 차에 태운 후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수차례 신체를 접촉하는 성폭력 가해를 저질렀다. 심지어 절망적이게도 학교는 C교수의 징계위를 피해자 몰래 시도하다 적발되었다. A교수 사건 당시 서울대학교 당국은 학생들이 A교수 연구실 학생공간 전환을 해제하는 조건으로 “앞으로 피해자에게 징계위에서 가질 수 있는 권한에 대한 공문을 발송하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피해자를 배제하고 가해자의 의견만을 참고하려고 했던 징계위의 시도는 약속을 이행하는 태도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학생들은 다시 연대했다. 2020년 11월 11일 보라색 우산 집회는 학내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권력형 성폭력 사건을 규탄하고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한 학생들의 노력이었다. H교수와 A교수의 파면을 외친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참담한 심정으로 이번엔 보라색 우산을 높이 든 것이다. 11
비단 권력형 성폭력 사건뿐만 아니다. 2019년 8월 9일 청소노동자 A씨가 휴게실에서 사망했다. 그 휴게실은 교도소 독방 1.9평보다 작은 1.06평밖에 되지 않았고, 그 방에는 에어컨도, 창문도 없었다. 휴게실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리만큼 비참했던 이 공간에서 A씨는 사망했다. “지병이 있었다더라.”, “환경 때문이 아니다.” 등 무수한 말들이 이 사건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지만 서울대학교 노동자는 안전한 환경을 보장받았는가, 적절한 휴게시간을 받았는가의 질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학교는 노동자에게 또한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인간이 반드시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를 인권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학내에선 인권은 보장되고 있는가. 우리의 대학에선 건조한 언어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12
이 건조한 언어들, 진실로 보호받지 못하는 우리의 인권을 향해 학생들은 연대하고 더욱더 목소리를 높였다. 2020년 9월 28일 서울대학교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 페이스북에는 인권헌장 제정을 촉구하는 카드뉴스가 게시되었고 인권헌장 릴레이 홍보사업 ‘인권열차’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동아리와 단과대, 학생들이 연대해가는 과정 속에서도 혐오세력은 ‘진정한 인권’이라는 혐오를 이야기하였고 그럴수록 우리의 연대는 더욱 단단해지고 인권헌장에 대한 열망은 깊어져 갔다. 학생들은 “서울대에 평등을 허하라!”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연대하며 혐오 표현에 대해 규탄했다. 학내 892개, 외부연대 94개의 연대가 인권열차의 길을 만들며 서울대학교가 더이상 혐오와 배제를 당연히 여기지 않기를 촉구했다. 알파벳 교수들, 아니 훨씬 더 오래전부터 발생해왔고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인권침해에 대해 우리는 이제 눈을 감지 않으려고 한다. 2020년 12월 27일, <그저 혐오하겠다는, 부끄러운 선언을>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대자보에서 우리는 더 나은 공동체를 말한다.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소명적 지성과 뜨거운 양심의 소리가 밝혀낼 시대를 들여다보자. 분명 그 시대의 교정은 누구도 자신됨으로 가해받지 않는, 평등하고 안전하기에 자유롭고 발전하는 공동체 모습을 띄고 있으리라.” 13
수많은 집회와 투쟁과 눈물과 상처는 언제쯤 그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H와 A와 B와 C를 보며 다음은 어떤 알파벳이 우리의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지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봐야만 하는 것인가. 모든 알파벳이 채워질 때 비로소 변화가 찾아올 것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와 약속이다. 더이상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와 우리 공동체 내 인권을 존중하는 문화를 위한 약속이다.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인권헌장이다. 인권헌장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평등을 당연히 말할 수 있는 학교가 될 수 있도록, 서울대가 평등을 허할 수 있도록, 인권헌장에 대한 우리들의 연대는 지금까지 그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4. 인권헌장 제정을 촉구하며
인권헌장의 조항을 읽다 보면 문득 하나둘씩 학내에서 일어났던 아픔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것은 내 친구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일면식 없는 먼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는 인권헌장 제9조 2항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학업·연구 및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언행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가진다.”, 제10조 성적자기결정권,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동의하지 않은 성적 언행으로 인하여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를 보고 권력형 성폭력 사건들이 생각났으며, 제8조 1항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안전하고 건강한 대학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가 있다.”, 2항 “서울대학교는 구성원이 대학생활 전반을 안전하고 건강하게 영위할 수 있는 대학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를 보고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서 끝끝내 일하셨던 서울대학교 노동자가 떠올랐다. 인권헌장에는 우리의 아픔이 새겨져 있다. 이 조항들이 만들어지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아파하고 슬퍼하였는가. 우리의 상처가 문서화될 때까지 우리는 얼마나 고통받았는가. 또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상처받고 분노하였는가.
학내의 많은 구성원들이 인권이 존중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싸워왔지만, 우리의 공동체는 아직 인권침해상황에 매우 취약하다. 기존의 인권가이드라인이 실효성 측면에서 부재한 것도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스스로가 인권을 위한 책임에 대해 소홀히 한 경향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마땅히 지켜져야 하는 인권이란 아무런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학내의 우리 모두가 인권을 수호하려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인권의 존중이 이루어지는 안전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권헌장의 제1조 (목적)에서는 서울대학교와 그 구성원의 인권 책무를 확립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즉, 인권헌장은 인권가이드라인의 실효성 측면을 보완하여 학내의 인권침해사례에 보다 책임을 갖고 접근하겠다는 의지의 선포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다시 목청 높여 인권헌장을 부르짖어야 할 때다. 누군가의 상처를 당연시하고 방기하는 언행에 책임을 이야기할 때다. 인권헌장은 과거 우리 공동체가 경험했던 아픔을 기록함과 더불어 우리가 만들어나갈 공동체에 대해서도 표명한다. 우리가 원하는 학교는 혐오가 만연한 학교인가. 성적자기결정권이 침해받는 학교인가. 안전한 환경을 보장받지 못하는 학교인가. 우리가 지향하는 공동체는 누군가의 상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서로가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줄 수 있는, 각자가 자유와 권리의 가치를 알기에 책임에서 회피하지 않는, 사랑으로 가득 찬 공동체일 것이다. 우리의 공동체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인권헌장에서 뒷걸음질 치기에는 우리는 더이상 발 디딜 틈조차 남아있지 않다.
펭로시
- 더 자세한 내용은 이은혜 기자, <반동성애 진영, 이제는 서울대 인권 헌장도 반대…좌표 찍고 온라인 공청회 난입해 댓글 테러>, 뉴스앤조이, 2020-10-20, 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1605 [본문으로]
- [국가 인권위원회] 성적지향을 인정하면 성도착증을 인정하게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 자료를 참조; humanrights.go.kr/site/program/board/basicboard/view?currentpage=1&menuid=001002002001&pagesize=10&boardtypeid=13&boardid=7604898 [본문으로]
- 이은혜 기자, 위 기사. [본문으로]
- [동성애, 동성혼 반대 국민연합] blog.naver.com/nahs114/222117089208 [본문으로]
- [국가인권위원회] 성도착증과 성적지향의 차이점: humanrights.go.kr/site/program/board/basicboard/view?currentpage=1&menuid=001002002001&pagesize=10&boardtypeid=13&boardid=7604898 [본문으로]
- 이은혜, 위 기사. [본문으로]
- 과연 그런가? [본문으로]
- 즉, 행위의 실천자인 행위자(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를 배제한 행위만을 비난하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본문으로]
- 넓게는 사회. [본문으로]
- 김일환, <‘H교수 운동’,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서울대저널, 2018-06-07; www.snujn.com/index.php?mid=news&category=117&document_srl=38586 [본문으로]
- 음대 교수 사건 대응을 위한 특별위원회 11.11 보라색 우산 집회 홍보 카드뉴스 [본문으로]
- 중앙집행위원회 인권연대국 정기인권 카드뉴스 04 [서울대학교 학내 노동권] [본문으로]
- [Facebook] 서울대학교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 참고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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