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태치먼트(Detachment, 2011)

 

그래놀라

 

326일 교육 저널에서는 영화 상영회 및 집담회를 열었다. 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특히 교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디태치먼트(Detachment)’라는 영화를 보고 감상과 교육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필자는 이 집담회에 참여한 후 교육 저널에 함께하게 되었다. 그만큼 특별한 경험이었고 학교 생활에 큰 영향을 준 영화였던 만큼 이에 대한 간단한 비평을 적어 이를 남기고자 한다.

애드리언 브로디’. 그는 내가 킹콩이란 영화에서 처음 본 배우였다. 길쭉한 코에 길쭉한 눈썹 그리고 길쭉한 얼굴까지 어딘가 사람을 빨아들이는 외모를 가진 그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도 매우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나른하면서도 슬퍼 보이는 눈이 인상 깊었다(오빠 김 묻었어요. 잘생김.). 그러나 금방 그를 잊어버렸고 대학에 들어와서야 디태치먼트라는 영화를 통해서 그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여전히 그는 얼굴이 길쭉하고 코도 눈썹도 길쭉하고 매력적이었다.


디태치먼트는 미국의 한 공립학교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헨리는 기간제교사로 새로운 학교에 부임하게 된다. 유난히 문제 학생들이 모인 학교에서 헨리의 적응은 쉽지만은 않지만, 그는 담담하게 그리고 익숙하다는 듯 학생들의 골탕에도 개의치 않아하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낸다. 하지만 학생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그건 학교의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비행이 일상이 되어버린 학생들 그리고 아이들의 문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무관심한 학부모들, 지쳐버린 교사들. 이 학교는 누구를 위한 학교인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내려 버렸다. 불안정한 삶을 이어나가던 중 헨리는 우연히 에리카라는 소녀를 만난다. 교사로서의 사명심인지 단순히 불행한 상황의 어린 학생에 대한 동정심인지, 헨리는 보호가 필요한 상황인 에리카를 보살핀다. 학교 내에서도 그는 메레디스라는 특별한 학생과 조우한다.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꽃피우지 못하고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메레디스에게 헨리는 격려를 건넨다. 그럼에도 그가 막을 수 없는 일들은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영화는 헨리의 인터뷰 독백으로 마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동안 우울감에 침체되어 있었다. 교육에 대한 회의, 교사라는 직업의 무게감, 그리고 내가 과연 교사를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 복잡한 생각들이 떠오른 것은 무겁고 담담한 우울감 후에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그 우울감이 좋아서 한 번 더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 거리 두기, 무관심

어떤 학생이라도 헨리는 부드럽지만 따뜻하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그건 그의 어린 시절 경험으로 얻은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언제나 이별을 할 수 있도록 미리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제목의 의미를 유추해보았다. Detachment란 격리, 거리를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헨리가 학생들과 그리고 흐릿하게 기억하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과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하는 모습을 영화에서 볼 수 있었다.

Detachment는 무관심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학부모 회의에 누구도 오지 않은 텅 빈 교실 장면이 떠올랐다. 자녀들이 어떤 환경에서 교육받는지 가르치는 책임자는 누군지 전혀 궁금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듯 아무도 오지 않은 텅 빈 교실을 꾸며 놓고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교사들의 모습이 쓸쓸했다. 가정은 교육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자 아이들이 세상이 안전한지 결정하는 태도, 즉 애착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가정과 부모와의 관계에서 안정과 사랑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이 매우 위험하고 불안정한 곳이라고 느끼며 적응적인 관계 맺기가 힘들어진다. 학교라는 곳 또한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보살핌과 안정,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서 기능해야 하지만 어떠한 관심도 지지도 없는 상황인 아이들에게는 이마저도 가시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문제는 학생뿐만 아니라 학생을 돌보아야 할 교사들의 상황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교사, 완벽한 척은 하지만 부부간 불화를 겪는 교장, 그리고 가정이 아주 오래전에 파괴된 헨리. 소외된 자들은 누구에게도 자신들끼리도 뭉치지 못하고 그저 서로를 무관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외롭고 소외된 자들이 모인 학교에서 서로 어울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과연 교사와 학생 사이의 거리는 좁을수록 좋은 것일까. 교사와 학생 사이 적절한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영원히 풀리지 않은 고민 같지만 언젠가는 교육에 몸담고 있거나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면 해야 할 고민이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헨리가 거리를 두려고 한 이유는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교사로서 모든 학생을 제대로 보고, 또 자신을 의지하려고 하는 학생들에게서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학생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 우리 교육 현장의 Detachment

디태치먼트에서는 행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학교의 모든 면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으며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교사들은 절망하며 결국 학생들을 향해 절규하고 울음을 쏟아냈다. 에리카와 메레디스 또한 자신에게 관심을 주고 보살핌을 준 어른인 헨리의 관심에 잠깐은 행복했지만 결국은 끝이 어떻게 되든 각자의 길을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영화 속 교사들도 불행한 가정, 학교의 위기, 학생과 학부모와의 갈등 등으로 바람 잘 날 없었고 주인공인 헨리는 늘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결말이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없었고 누구 하나 상황이 더 좋아진 사람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고 그런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영화 속 교육 현장은 우리나라 교육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형태긴 했지만 크게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자녀 교육에 대한 것이라면 전국 방방곡곡을 돌고 한약을 지어 먹이며 학원을 태워가고 오기도 하지만 정작 아이가 어떤 것을 제일 좋아하는지 꿈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부모님들, 어떤 문제와 단원이 가장 많이 출제되는지 분석하고 어떤 대학이 가능한지 사람이 아니라 숫자를 다루는 교사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부유하는 학생들. 어느 한 사람도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는 우리나라 교육 상황도 서로가 격리되어 무관심하고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상태다. 그 이유는 현 교육 실태가 바람직한 인간 양성보다는 기능적인 인간의 생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교육에서 학생들은 교육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입시와 성공의 수단으로서 존재하게 되고 Detachment 즉 무관심 속에 방치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학생에게 깊게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꿰뚫어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교사의 능력과 개인의 인생을 바꾸어버릴 수 있는 교육의 무게를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였다. 많은 사람들은 관계로 인해 아파하고 삶을 망친다. 그 이유로 적절한 거리 두기가 지켜지지 않아서 그런 경우가 꽤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가까이 있어도 외롭다고 느끼며 더 가까이 가려고하고 오히려 더 멀어지려고 한다. 정현종 시인은 이런 사람들의 관계를 섬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교사로서 그리고 그 이전에 인간으로서 사람들의 섬 속에서도 외롭지 않다고 느끼고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는 적절한 거리 두기와 무관심을 조절할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교육권리운동’ - 대학과 교육의 정치

 

이물

 

0. 푸념

 

사실 내가 교육 문제에 관심 갖게 된 계기는 시흥캠퍼스였다. 교육이 일방적 가르침을 넘어 사회를 바꾸는 힘이자, 공동체의 윤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교육을 차별과 경쟁의 장으로 만들려는 힘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시흥캠퍼스를 산업 수요 대학 정책에 부합하는 기업친화적 연구/수익의 공간, 그 과정에 구성원과 교육이 배제되는 공간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내부적으로 두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다. 하나는 본부와의 소통문제로 국한하려는 것이었고, 하나는 대학의 기업적 혁신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정치적 타협을 설득할 근거와, 기업적 대학을 비판할 대안을 명확히 갖지 못했고 헤맸다.

물론 시흥캠퍼스 투쟁이 내부적 어려움만으로 무너진 것은 아니다. 본부라는 실물적 위협과 통제가 어쩌면 핵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흥캠퍼스를 평가하고, 다시 교육 투쟁을 상상할 때,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각 대학에서는 교육 문제를 사고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수도권 각 대학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육권리운동을 조명하고자 한다. 각 대학 학생회에서 드러나는 요구안이 주장하는 바와 그 함의를 바탕으로 운동의 지향과 그 한계를 분석해볼 것이다. 다만 능력의 부족으로 운동 주체들의 전략이나 학생들이 이를 수용하는 역동적인 과정은 제한적으로 다룬다.

어쩌면 입만 살아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실천에 있어 어떤 가치를 왜실천하느냐를 항상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무책임한 글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우리의 가치를 상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1. ‘교육권리운동’, 교육투쟁의 그림자

 

교육투쟁이라는 것이 있었다’. 과거형으로 써야 할 만큼 지금은 대부분의 대학에서 힘을 잃었거나 자취를 감추었지만 말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대학생들은 세계화와 IMF 금융위기, 대학 등록금의 인상과 경쟁, 취업 위주 교육 과정에 맞닥뜨렸다. 이에 대학생들은 신자유주의교육 정책과 대학 상업/기업화 비판을 핵심으로 대학에서 본인들이 직접 경험하는 문제에 대해 주목하고 문제제기 하기 시작했다. 곧 교육투쟁은 민주적 대의를 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학생이 대학에서 겪는 경험과 계급적 조건을 바탕으로 투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육투쟁은 점차 정체되었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경제위기의 심화와 취업난,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대학 정책, 학생운동의 쇠퇴 속에서 매년 초 등록금 산정에 대응하며 연례행사처럼 이뤄지던 교육투쟁은 개나리투쟁으로 불렸고, 이내 그 이름마저 잊혀졌다.

마지막 반등은 2011년 반값등록금 투쟁에서 나타났다. 등록금 문제가 갖는 보편성과 반값을 무조건적으로 요구하는 정치적 요청이 결합되었다. 학생들의 목소리는 대학을 넘어 광장으로 진출했고, 학생 단체는 물론이고 많은 시민단체와 정당의 호응을 받으며 사회문제로 확산됐다. 하지만 요구들은 기성정치의 복지와 인권으로 수렴되었고, 대학에서 정치적 의제가 지속하는 데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후 대학생운동은 거시적 대학 비판이나 체제 비판보다 일상적인 불편,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는 거듭되는 교육투쟁의 실패에 대한 고민과 전략 변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학생들이 관심 갖지 않거나 꺼려할만한 정치적 구호를 접어두고, 학생들의 불편과 이익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요구안들을 찾자는 목소리가 생겨났고 그나마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이 요구들을 지탱하는 근거로서 다소 의미가 추상적인 교육권이 제출되었다. 물론 이전부터 자본과 국가에 의해 교육권이 침해받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이제는 권리 자체가 요구의 전면으로 가시화된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교육투쟁의 그림자인 교육권리운동의 현황을 분석한다. 정치적 기조가 후퇴했다고도 볼 수 있는 교육권리운동은 실제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교육권 개념의 현황, 학생들이 이를 극복하고 만들어내려는 가능성, 전반적 한계와 대안은 무엇인지 고민해볼 것이다.

 

 

2. 교육권리운동의 현황 : 각 대학 학생회 요구안 분석

(2016년 서울대 총학생회, 2018년 서울대 사회대 학생회, 2017 성공회대 비상대책위원회, 2017 고려대 사범대 학생회, 2018년 고려대 총학생회)

 

1) 2016년 제58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교육권리운동

 

- 방식 : 2016520일 총학생회 및 단대 학생회가 참여한 교육권리운동본부 출범

- 문제의식 : ‘교육 공공성요청

 

부당해고 음대 강사 전원 복직 및 비정규교수 대책 논의기구 설치 (노동권)

법인화 전면 평가 및 국립대로서의 정체성 확보 (대학지배구조/의사결정구조)

코어 사업 등 교육부의 재정지원사업에 대한 구성원 의견 수렴반영 (대학재정지원사업/의사결정구조)

시흥캠퍼스 실시협약 중단 및 구성원과 전면 재논의 (캠퍼스/의사결정구조)

학생 의결권 확보 위한 평의원회 민주적 구성 및 총장직선제 실시 (의사결정구조)

학생들의 일상과 직결되는 교육환경 개선 (교육환경개선)

 

> 다른 교육권리운동에 비해 교육투쟁적 성격이 다분하다. 교육환경개선은 한 항목이며, 그 외 학내 노동권, 정부교육정책, 대학지배구조에 대한 요구를 담고 있다. 그러나 노동문제를 제외하고는 의사결정구조로 그 문제의식과 방법론이 제한되어 있다.

 

2) 2018년 제36대 서울대학교 사회대 학생회 교육권리운동

 

- 방식 : 사회대 학생회 주도, 기존의 교육환경개선협의회의 한계를 지적하며 교육권리운동출범. 510일 학생총회. (성사, 1번 안건으로 통과된 후 동맹휴업.)

- 문제의식 : ‘학생이 주인 되는 대학’, 법인화 지적 (민주주의), 공공성.

 

1624시간 개방 (교육환경개선 - 공간)

학생 자치공간 확보 (교육환경개선 - 공간)

수업 추가 개설 (교육환경개선 강의 개설)

차등등록금 문제 해결 (등록금)

갑질교수 H교수 파면 (인권)

 

> 핵심 요구안 몇 가지를 중심으로 학우들이 가장 핵심적으로 생각할만한 교육환경개선, 등록금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교육권에 대한 문제의식은 민주주의, 공공성으로 외화되고 있으나 다소 막연하며, 요구안은 단대 공동체 문제, 생활 밀착형으로 제시되고 있다. 다만 인권 문제로 제기된 갑질교수 H교수 파면이 눈에 띈다.

 

3) 2018년 제33대 성공회대학교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 교육권리운동 SKUCHANGE

 

- 방식 : 비대위 산하 스쿠체인지 기획단 중심. 326일 전체학생총회. (총회 정족수 미달로 무산. 2080명의 1/5416명 중 262명 출석.)

- 문제의식 : ‘학교의 주인은 학생

 

교육권 - 강의 의견수렴제, 성적산출근거시스템, 예체능 수업 및 교양의 다양화, 상대평가 폐지, 여성학연계전공, 재수강 학점 변경 (학사관리, 교육환경개선 강의개설)

학생복지시설 - 학생복지공간 확충, 학생식당 의견수렴제도, 생리공결제 증가, 학생회관 24시간 개방과 난방시설공사, 체육시설 확충, 학생참여예산 증액(교육환경개선 공간, 복지)

학내 거버넌스 - 총장직선제, 등심위 학생위원 확대, 평의원회 학생의원 확대, 학교 주요 회의록 속기요구, 실습비운영위원회 (의사결정구조)

학부별 요구안 (교육환경개선)

 

> 학부 요구안 수합, 교육환경개선 위주의 나열식 요구의 형태를 갖고 있다. 학내 거버넌스는 교육환경개선의 영역을 벗어난 요구지만, 역시 공동체적 권리 하에 국한되어 있다. 다만 학생참여예산, 등심위와 평의원회 학생위원이 눈에 띈다. 거버넌스 요구가 제도화 된 이후, 교육환경개선 요구안으로 포함되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2018년 제50대 고려대학교 총학생회 교육권리찾기 운동 KUESTION

 

- 방식 : 총학생회 주도, 36일 시작. (고대는 매해 3월 교육권리찾기 운동을 진행함.) 2018년에는 월별 의제 제시, 동시다발적 운동. 단과대 및 독립학부 학생회 교육국 연석회의체 구성.

- 문제의식 : 교육환경 관련 불만과 피해사례 바탕 문제제기’. ‘교육권’,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바꾸는 학교 요구.

 

3: 2014년 폐지된 드롭제도 부활. (학사관리) -> 서명운동 4243

4: 총장직선제 이만 총총’ (의사결정구조) -> 총추위 시스템 자체보다 학생 전원 참여를 요청.

5: 학점이월제도 (학사관리)

그 외 학부별 요구안은 강의 개설, 공간문제 개선, 수업비 지원 등을 대체적으로 공유함.

 

> 교육권을 교육환경 관련 학생들의 불만과 피해, 그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해하고 있다. 다만 총장직선제는 학내 거버넌스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학사관리 개선 요구는 불만 개선보다 제도에 문제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특기할 만하다.

 

5) 2017년 제47대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학생회 교육권리찾기 운동 우산 프로젝트

 

- 방식 : 사범대 주도, 9월 시작. 과별 교육권 운동 주체 모집 - 교육권 의미화와 과거 사례 검토. 법률 규정과 현황 분석, 요구안 정리, 서명운동. 발언대 운영, 권리선언 기자회견.

- 문제의식 : ‘학문기관의 대학과 교육 받을 권리, 자유로운 지식접근권, 생활권으로서의 안전할 권리, 차별과 소외받지 않을 권리.

 

공간문제 : 자치공간 개선, 배리어프리, 체육생활관 보수 (교육환경개선 - 공간)

등록금 : 차등 등록금 개선

강의 개설 : 강의계획서 의무화, 학교현장실습생 통제 완화, 답사 문제 해결, 이중전공 문제 해결, 전임교원 확충 (교육환경개선)

차별과 혐오 문제 : 교원의 차별 혐오 발언 금지 및 규제 (인권)

 

> 다른 학생회들에 비해 교육권을 꽤 공들여 정의하고 있다. 학문기관으로서의 대학 속 지식권과 공동체 구성원의 생활권이 그것이다. 그러나 요구안은 교육환경 개선, 등록금 문제 등 여타 교육권리 운동과 유사하다.

 

- 요구안 분석

 

첫째로 대부분 교육권에 대한 문제의식의 부재와 정체 현상이 나타난다. 각 학생회들은 교육권이라는 단어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그 정의는 모호하거나 조금씩 다르며, 과거 교육투쟁의 그것보다 훨씬 더 교육환경개선의 영역에 치우쳐 있다.

대학이 어떤 학문기관인지, 교육이 왜 권리로서 제출될 수 있으며 중요한지, 대학에게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때문에 교육권리는 정치적 정당성이 아니라 학생의 이익이라는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기존 사회에 전제된 교육 수요자와 서비스 제공 관계에서, 또 헌법적 교육권의 제한된 범위에서 교육권이 제기되는 것이다.

 

둘째로 문제의식이 존재하더라도, 요구안과의 괴리가 나타난다. 2016-서울대나 2018-서울대 사회대의 경우 대학지배구조, 재정정책 등의 문제의식이 의사결정구조를 개선하는 방식으로 축소되거나 교육환경개선 요구로 집약되고 있다. 2018-고려대 사범는 지식접근권이라는 문제의식이 요구안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지 않았다. 또한 전반적으로 학생이 교육의 능동적 주체라고 천명되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요구안은 교육 서비스의 요구(공간, 수업비, 강의개설 등)에 국한되고 제공자-요청자 구도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 제한적이나마 문제의식과 요구안에서 정치적 가능성이 존재한다. 우선 모든 학생회가 직간접적으로 비민주적 대학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총장 직선제키워드가 가장 많이 발견되며, 평의원회 구성 등이 추가적으로 눈에 띈다. 최근에는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과 같이 총장 직선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대학 간 네트워크가 구축되는 학원 민주화가 사회적 의제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민주화라기보다 간선제 내 지분율 향상이나 위원회의 위원 증대 등 제한적인 범위에서 이뤄지고 있고, 다양한 교육 투쟁 의제가 총장 선거, 거버넌스와 소통의 문제로 환원, 흡수되는 경향이 발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최근 교육권의 영역에 인권 사안도 포함되고 있다. 인권은 교육 공간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로 요청되며, 권력형 성폭력이나 남성중심적 문화의 문제로 확장하려는 양상을 갖는다. 2018-서울대 사회대의 H교수 파면과 2017-고려대 사범대의 교원 차별 금지 요구가 그것이다.

 

 

3. 문제제기 : 운동에서 교육권제출의 한계와 가능성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 교육권은 교육투쟁이 밀려난 지점에서 당위적 호소력을 가진 근거로 제시되었다. 주체들은 문제제기의 정당성을 체제 분석보다 권리에서 찾았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는 교육권리운동의 양상을 살펴보면, 그마저도 권리라기보다 불만 해소 요청에 가깝게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대학 내에서 교육권 개념이 명확하지 않고 더 이상 토론되지 않는 상황은, 의도치 않게 교육권의 법적 직관에 호소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헌법에서 보장하는 학생을 피교육자로 대상화하며, 교육권이 경제적 조건과 충돌할 경우 후순위로 밀려날 수 있음을 전제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또한 문제의식이 결여된 채 나열된 요구안은 동일한 문제에 직면한다. ‘어느 정도가 교육권에 합당한 요구인가? 대학의 경영 사정을 고려해보았을 때 좀 양보해야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교육권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불편해 보이는 모든 문제를 요청할 수 있는가? 경제 상황에 밀려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임을 주장하기 위해선 대학과 교육이 겪고 있는 문제를 분석하고 비판하며, 이를 넘어선 교육이 왜 필요한지 설득해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재 교육권리운동의 양상처럼 나열된 요구안은 당장의 민원, 복지 서비스 정도의 차이에 가까운 것이 많으며, 그 문제를 발생시키는 근간을 분석하지 않는다. 엄연히 말해 이것을 운동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정치적 구호가 필요하다. 교육권 개념은 더욱 구체적 분석과 대안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탈정치적인 것은 그 자체로 기존 사회를 답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에서 이는 교육 수요자와 공급자의 서비스 관계, 고등교육이 내포한 특권과 불평등에 해당한다. 결국 거칠게 보면 지금의 교육권리운동은 등록금을 낸 학생, 입시에서 승리해 대학에 온 학생, 학위를 따기 위해 더 치열하게 경쟁하려는 학생으로서의 이익을 요청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밥그릇 챙기기는 타 집단과의 연대를 저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결국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경쟁적 사회를 더욱 재생산하는 데 일조할 뿐이다.

나아가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도, 정치적 구호만이 담보할 수 있다. 대학 본부와의 소통, 타협 자체에서만 의미를 찾는다면 당장 각종 복지의 영역에서 소기의 성과를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는 무언가 되고 있다는 착각을 주기 쉽다. 그러나 정작 최종 결정권이나 통제권은 없는 상태에서, 교육에 대한 비판의 기준이 와해된다면 학생들은 대학이나 교육에 점차 무비판적으로 대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교육권 논의가 정치적으로 확장되고 사회화될 가능성도 보인다. 교육권리운동을 수행하는 학생들이 어떤 목적과 전략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제한적 가능성들이 발견된다. 협소해 보이는 요구안 속에 어떻게 정치적 관점을 담을지 능동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다만 의지적으로 운동의 주체들이 노력한다고 해서 가능성이 바로 운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제한적 가능성들을 어떻게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조건들을 바꾸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4. 2018-사회대 학생회의 사례

 

좀 더 생생한 목소리로 지금 학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육권리운동의 현황과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앞서 살펴본 교육권리운동의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어떤 성과와 가능성이 남아있는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인터뷰 당시 사회대 학생회는 학장단과의 최종 교섭을 앞두고 있었고, 517일 최종 교섭 결과 161,2층의 24시간 개방, 우석경제관 학생자치공간을 위한 협의체 설치, 전공교과목 추가개설 논의 약속을 이끌어냈다.

 

Q. 사회대 학생회는 '교육권'을 어떤 개념으로 정의하고, 또 주장하고 있는가?

 

수환 : 학교에서 학생이 학생으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리의 총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학생이) 왜 충분한 자치공간을 배정받지 못하고, 전공강의를 갖지 못했는지 (...) 대학사회와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빼놓을 수 없다. 교육 공공성보다는 대학의 이윤논리, 시장화가 중심적으로 여겨지는 사회 권리 속에서 학생의 권리가 후퇴해왔고, 서울대의 경우 법인화 이후에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정 : (대학은) 교육이라는 공공재가 유통되는 곳이고 그것을 함께 형성하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교육권을 생각할 수 잇다. (...) 한줄로 요약하면 교육상품의 소비자로서의 학생이 아니라 교육의 주체로서의 학생을 세우는 것이 교육권이라고 생각한다.

 

Q. 현재 제시하고 있는 요구안과 이에 담으려는 교육권의 의미는 무엇인가?

 

수환 : 학교가 학생들의 필요가 아닌 이윤논리에 따라 운영되고, 그에 따라 학생은 사소하게는 전공강의 수강부터, 크게는 공간배정의 문제에 있어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거든요. 그래서 어떤 그런 부분에 대한 (...) 이윤논리 탓에 박탈되어온 학생들의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생각한다.

(요구안의 정치적 관점들은 잘 전달이 된 것 같은가?)

수환 : 이 시점에 실패, 성공을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어떤 정치적 요구든 즉자적 필요와 경제투쟁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을 의미화하는 과정이 필요한 하다. 그런 과정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민정 : 더 중요한 작업은 그만큼 평가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첫발을 뗀 것인데, 학장단이랑 뭔가를 해서 얻어낸다고 했을 때 그것을 우리 공동체가 어떻게 지켜나가느냐가 중요하다.

 

Q. 어려운 점이나 한계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민정 : 제일 뼈저리게 느낀 한계는 구조적 부분이랑 연결된 지점일수록 더 큰 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비해 실제로 할 수 있는 투쟁의 귀결이 단과대 범위는 작을 수밖에 없다. 서울대학생들, 전체대학생들이 어떤 정치화된 요구를 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하면 전 서울대, 전국의 대학생으로 확대시켜나갈 수 있을 지가 고민될 거 같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운동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게 쉬운 과정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어떤 공론화 노력을 거쳤는가?)

수환 : 왜 총회 투쟁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데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사실 이번 총회에서 다룬 안건들이 그리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등록금 문제 해결이라든가 전공강의 확충이라든가. 사실 이런 요구안을 학생회 상층부만 요구할 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걸 수년간 확인했다. 이번에는 몇몇 간부들만 관심 갖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대 전체 학우들의 문제로 확산시키고 스스로 행동방안 결정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Q. 사회대 교육권리운동의 성과, 다짐과 전망은?

 

수환 : (자주 반복되던) 후퇴를 막아내는 투쟁에서 나아가서, (이번 교육권리운동은)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나가는, 학생사회의 가능성을 확인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에 대해 정치적 질문을 던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공수업과 반방에 대해 불만만 가질 것이 아니라 왜 권리가 박탈되어왔는지 묻고 토론하는 것이 일상적으로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들이 실질적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도록 학생회가 해나가야 할 역할이 많은 것 같다.

민정 : 오늘날의 학생회가 현실에 찌눌려있는 상황인거 같다. 계속 대안을 상상했으면 좋겠다. 불가능은 없다는 생각으로 계속 대안을, 우리의 대안을 상상하고 만들어 갔으면 하는 생각이다.

 

 

5. 제언 : 다시 교육투쟁으로 돌아가면 되는 건가?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교육투쟁에서 교육권리운동으로의 변화에는 일련의 탈정치화와 학생운동의 쇠퇴라는 배경이 있는데, 이런 조건을 무시하고 좋은 말만 하는 건 안일하고 무책임한 생각이다. 때문에 왜 교육투쟁이 쇠퇴했고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짧은 고민이라도 해보아야 한다.

나는 운동이 쇠퇴하는 주요한 원인에 이론의 설명력 약화, 이를 반영하는 요구안의 상실, 운동을 지탱하는 인적 네트워크나 자치기구의 약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문제는 학생자치단위 중심의 노력이 필요하겠으나 이 글에서 직접적으로 다룰 영역은 아니라 생략하고, 이론과 요구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첫째로 이론과 문제의식이 개선되어야 한다. 어긋난 문제의식과 대안의 부재는 호소력을 갖기 힘들기 때문이다. 고등교육기관이 팽창하면서 현실적으로 고등교육재정을 정부가 모두 담당하기 힘들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자체적 생산기관이 아닌 대학의 재정의존은 역사적으로도 다소 필연적이다. 또 대학은 단순히 연구기관이 아니라 노동력을 위계화하고 노동시장에 공급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저항세력은 교육이 공공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구호를 넘어 교육과 노동의 관계, 대학재정운영, 대학 내 지배구조, 연구 관행과 문화, 기업 및 지역사회와의 연계 방식에 대한 종합적 대안을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저항세력의 대학 비판은 일종의 정체를 겪어왔다. 과거 민주노동당에서부터 논의되어오던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같은 대학 운영방식이나,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안 제정 노력 등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대안이 제출되지 않고 있으며, 막연한 국가의 책임이나 대학 본부의 책임이 반복해서 요청되고 있다. 물론 노동자 해고, 등록금 인상과 같은 대학기업화의 현실적인 단면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때로는 막아낼 수 있겠지만, 근본적 전망이 불투명한 이론은 대학 구조를 바꾸기에는 한계를 갖는다.

대학은 기존 사회에서 벗어난 도피처나 상아탑으로 요청될 수 없으며, 이런 생각은 현실을 가리고 대학의 본질을 왜곡하는 오류를 가져온다. 또한 대학 공동체 내에서만 교육 문제를 방어하며, 각자의 처지에서 각개 전투하는 양상으로 이어진다. 오히려 우리는 적극적으로 의존의 문제를 직시하면서 어떻게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학이 사회와 연관하고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둘째로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요구안이 제출되어야 한다. 물론 요구안을 공동체가 어떻게 사유하느냐, 얻어낸 성과를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정치적 잠재력을 갖는다. 하지만 협소한 요구안에 의지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만 해서는 잠재력을 확장시킬 수 없다.

요구안은 당장의 환경개선이 아니라 그것의 구조를 지적해야 하며,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동시에 이것이 공허한 지향이 되지 않으려면 현재 학생들의 상황을 명확히 대학 구조와 연결하고 가시화해내는, 계기적 사건을 마련해야 한다. 당장은 등록금 산정 체계(등록금), 서울대 내 연구비 산정 방식이나 고용체계(연구/노동), 학사관리제도(졸업요건, 평가방식) 등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환경개선의 요구안이 요청되더라도 그 실천과정이나 후속조치가 이 같은 구조적 문제제기를 향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당장의 공감을 얻어내면서도 대학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물론 대안은 요원하며, 계기가 될 만한 사건이 쉽게 찾아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대학을 다시 사고하고, 우리의 것으로 전용, 활용할 것을 상상해야 한다. 이런 막막함에 직면할 때 항상 그런 생각을 한다. 전쟁기의 국가가 대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현대 사회의 자본이 대학의 지식 생산을 독점하는데, 왜 우리라고 그러지 못할까? 터무니없는 자신감이겠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어떻게가 문제지만.


많은 이들이 교육이 독자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 질문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교육이 제도나 교육 내용 그 자체라면 이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와 교육내용, 나아가 교육현장을 바꾸려는 사람들의 정치는 그 자체로 변화의 시작이다. 교육은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것이다. 때문에 다시, 그런 사람들의 정치가 존재하는 자치기구와 공동체가 항상 요청된다.

취재 차 찾아갔던 사회대 총회는 모든 안건의 가결 이후 폭죽을 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단단해 보이기만 하던 사회대 건물은 폭죽이 터지는 소음과 불빛에 흔들렸다. 그 아래 한껏 파장 분위기를 즐기는 사회대 학우들의 흥겨움에서 역동적 공동체의 실마리가 아직 존재함을 볼 수 있었다. 과장해서는 안 되겠지만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힘과 잠재력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지점으로 결말을 맺는 우스운 상황이 됐지만, 사람들의 고민이 지치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 과정에서 이 글이 작은 도움이나마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참고문헌


- 서울대저널, “서울대학교 교육권리운동 기자회견 열려”, 2016.5.25.

(http://www.snujn.com/news/23400)

- 고려대학교 교육방송국, “다시 시작된 교육권리찾기운동변화된 점은?”, 2016.4.1.

(http://kubs.ac.kr/20122)

- 고려대학교 교육방송국, “사범대학 교육권리 찾기 위한 노력 우산 프로젝트기자회견 열려” 2017.11.7.

(http://kubs.ac.kr/19429)

- 나달숙, 교육권을 둘러싼 법적 논의와 한계성에 관한 연구, 법과인권교육연구6(2), 2013.


 

더 읽어보면 좋을 것들

 

- 고부응, 대학 자본주의와 대학 공공성의 소멸, 비평과 이론21(1), 2016.

- 김정인, 대학과 권력 : 한국 대학 100년의 역사, 휴머니스트, 2018.

 

 

청소년 참정권, 외않됀데?

딸기맥주

 

 청소년 참정권, 보다 구체적으로는 만18세 선거 연령 하향 조정에 대한 뉴스에는 늘 댓망진창이 벌어진다. 이 글에서는 실제 뉴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편집해서 이를 반박하는 형식으로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의견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Q1.

dfjd***

애들은 아직 어려서 논리고 뭐고 없는데, 사고도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애들한테 어떻게 한 나라의 정치를 맡기냐? 하여간 이 나라 미래가 어떻게 되려고 ㅉㅉ


A1.

edujournal

세 가지를 논리적으로 반박해보고자 한다. 첫째, “나이가 어리다 = 논리 체계가 없다고 말하는 당신의 논리 체계가 빈약하다. 청소년은 당신의 주장을 비판할 수 있을 만큼 사고력을 지니고 있고 자신의 논리 체계 하에서 판단하고 행동한다. 둘째, 놀랍게도 논리 체계와 사고라는 것은 나이가 든다고 알아서 발달되는 것이 아니며, 논리 체계가 완성된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논리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는 지능과 능력을 충족해야만 권리를 주는 시스템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삶을 위해 구성해나가는 것이다. 다양한 환경에 놓여있는, 다양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나은 삶을 위해 분투해가는 과정이 민주주의 정치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에서 차별 금지라는 것이 원칙으로서 도출되고 합의되어 온 것이다. 만약 IQ150이 넘는 사람만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고 하면, 그것을 아무도 민주주의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 미래가 어떻게 되려고 그러냐고 물으신다면 민주주의에 더 가까워지겠죠.”라고 대답할 밖에.

 

Q2.

kdg5****

본인 판단 없이 타인 영향으로 투표할 듯? 부모가 하라는 대로 찍던가 선생님이 말하는 거 따라가겠지. 내 맘대로 인물 보고 관상보고 찍겠지.


A2.

edujournal

자 먼저 청소년이 모두 관상을 볼 줄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부터 밝혀둔다. 청소년들이 타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근거로 청소년 참정권을 반대하고 있는데, 인간의 정치적 입장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인간의 삶은 정치의 연속이고, 정치는 곧 상호 설득과 투쟁의 과정이다. 그렇기에 개인은 언제나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한편, 자신도 설득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따라서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의 판단이 확고한 사람이라기 보단 고집이 센 사람일 확률이 높다.

 

물론 청소년에게 있어서 부모와 교사는 많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결국 결정은 청소년 개개인의 몫이다. 선생님이나 부모의 말이 설득력이 있으면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의견을 구성해가는 참고사항으로 삼을 것이다. 청소년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판단 기준에 따라서 자신들이 옳다고 판단하는 방향,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는 정책에 투표할 것이다.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차피 남편 따라서 투표한다, 감정적으로 판단한다.” 등의 말들. 언제나 박탈당한 이들이 권리를 찾으려 할 때, 이미 권리를 가진 자들은 그들을 평가절하하고, 절대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지 않지만 그것은 대체로 사실과 거리가 멀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교사, 부모 청소년 사이에 권력관계가 작동하기도 하며, 이 사회에서 청소년이 순응하며 살아오도록 통제 당해왔기 때문에 학교와 가정에서의 변화 역시 필요하다. 자식이라는, 제자라는 이유로 청소년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정견을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이 변화는 청소년이 동등한 시민으로서 참정권을 지니게 될 때 더 의식적으로 촉진될 것임은 명백하다.

 

Q3.

holo****

야 청소년에게 선거권을 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 거 같냐? 막 시험 없애자고 하는 거 아님? 교육내용을 지들 맘대로 하자고 하면 어떡함?


A3.

edujournal

시험 없어진다니 개꿀. 교육감 등의 선거에서 청소년 참정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청소년은 교육의 소비자도, ‘피교육자도 아니다. 교육과정의 가장 중요한 참여자로서, 자신의 일상에 해당하는 교육 제도, 교육 내용 등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은 그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단언컨대, ‘교육전문가들의 진단과 대안보다 청소년들의 시각과 목소리가 훨씬 정확할 것이다. 교육을 향유하고 교육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존재로서, 그들은 누구보다 현재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고 누구보다 변화의 방향을 잘 제시할 수 있다.

 

시험을 없애자고 하지 않을까?”라는 우려들이 있는데, 왜 이러한 논의를 꺼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현재의 교육체제만이 정답이라는 시각 또한 편협한 비청소년의 생각일지 모른다. 더 나은 교육현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청소년들이 모든 것에 대해 열어놓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이 열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참정권의 핵심이다. 참정권은 단지 투표할 권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2등시민이라는 취급, ‘어리고 모자라며 완성되지 못한 존재로서의 낙인을 뛰어넘어 말하고, 토론하고, 요구할 권리를 포함한다. 청소년은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12년을 복무해야 하는 죄수가 아니라 감옥을 부수고 배움터를 세워내는 능동적 존재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청소년의 목소리를 헛소리취급하지 않고 청소년을 그들 삶의 현장에서의 전문가로서 인정하는 일이다.

 

Q4.

illu****

청소년한테 참정권 주면 지들이 어른하고 똑같은 줄 알고 기어오를 걸? 난 그 꼴은 못 본다~ 청소년 인권이다 뭐다 하면서 체벌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어이없는데 투표권까지 줘봐. 학교도 가정도 난리난다~~

 

A4.

edujournal

청소년은 맞아야 안 기어오른다고 말하는 당신은 노예는 때려야 주인한테 안 대든다”, “여자는 삼일에 한 번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말에도 동의할 것이라는 건 잘 알겠다. 바로 당신같은 인간들로부터 사람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 그리고 당신같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청소년 참정권이 필요한 것이다.

 

청소년 참정권을 외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구호가 있다. “청소년 참정권은 인권이다.”, “청소년 참정권은 생존권이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청소년들은 이 구호를 외치며, 지속적으로 체벌, ‘용모단속, 언어적 폭력, 어른들의 갑질’, 청소년 노동 임금체불 등으로 인해 억압받아왔던 자신들의 경험을 드러내왔다. 인간이 억압된 상황에 지속해서 놓여있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발화할 권리이며, 그 발화가 공동체에 균열을 내고 공동체의 질서를 바꿀 권리이다. 그것이 바로 참정권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기본적인 권리마저 부정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소년들은 인간으로 살기 위해우리에게도 참정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삭발을 하고, 천막 농성을 하고, 시위를 하다가 끌려가면서, 그들은 외친다. 폭력을 감내하지 않아도 되는, 외모가 학생답지않아도 되는, 당당하게 노동하는, 평등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

 

Q5.

dofo****

선거연령 18세는 좀 그렇다 고등학생 신분에 정치참여는 찬성할 수 없다. 눈 앞에 대학 입시가 안보이는가?

 

A5.

edujournal

당신 눈 앞의 청소년들은 입시 공부 기계인가? 청소년들은 기계도, A-B-C 등급이 매겨져야 하는 고깃덩어리도 아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이다. 입시가 코 앞인데 무슨 정치냐고 말하는 것은, 너를 인간으로서 취급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또한 입시제도로 인해, 성적을 비관하며 자살하는 청소년들이 매년 증가하는 이 곳에서 너희는 공부만 해야 하니 귀 막고 입 닫고 있어.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청소년의 삶을 절망과 죽음으로 계속해서 내모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죽고 싶지 않아서, 살고 싶어서 정치 참여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Q6.

uihh****

어느정도는 동의해. 근데 우리나라 교육이 주입식인 건 사실이잖아. 그런 주입식 교육에 12년 동안 익숙해져 온 청소년들이 어떻게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겠어?


A6.

edujournal

주입식 교육에 대한 비판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논리라면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주입식 교육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청소년과 비청소년이 모두 주입식 교육을 당해왔다는 것, 이로 인해 주체적인 판단이 방해받아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 순응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판을 깨뜨리고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도 진실이다. 6월 혁명의 주체였던 청소년을, 그리고 작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던 청소년들을 생각해보면 명료하다.

어른들은 청소년과 자신을 매우 엄격하게 구분하는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별로 다르지 않다. ‘어른들은 청소년만큼이나 잘 속고, 거짓과 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루머와 가십을 사실이라고 믿기도 한다. 나이 몇 살 더 먹었다고 해서 청소년에 비해 자신들이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라고 주장할 수 있는 하등의 근거가 없다. 청소년들은 말한다. “우리도 생각이 있고 우리도 판단력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많이 서로를 선동하고 또 선동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정치의 핵심이다. 선동 당할테니 정치참여권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정치에 대한 무지일 뿐이다.

 

Q7.

giga****

아니 의무를 지켜야 권리를 주지? 군대도 안 가고 세금도 안내면서 하라는 것만 많아. 하라는 공부나 해라 지 밥벌이도 못하는 것들이.


A7.

edujournal

사실부터 정정하자면 만 18세는 납세의 의무도 진다. “사회시간에 공부 제대로 안 하셨군요.” 그리고 가장 왜곡되어 있는 개념이 의무를 지켜야 권리가 성립한다는 것인데 권리는 조건부가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 권리이다.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행복추구권을 떠올려보면, 어떤 의무를 지켜야만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국방의 의무를, 납세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권리가 제한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Q8.

goun****

아니 근데 열여덟살이 시간이 어딨어. 신문이나 뉴스 볼 시간도 없을텐데. 어차피 입시공부 때문에 바빠서 선거 때 관심도 없다가 아무나 찍지 않을까?


A8.

edujournal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싶다. ‘성인들은 일상 때문에 바빠서 어떻게 선거 때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가? 아침 9시까지 출근해서 퇴근도 못하고 야근도 특근도 하는 일상을 사는 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임을 알고 있다. 비청소년도 똑같이 아무나 찍으면서 말이 많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도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아야 한다고 모두가 말하는 이유는, 정치는 일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난하고 모순적인 일상을 바꾸고자 시도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며, 정치의 일부인 선거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숨가쁜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더 나은 삶을, 더 나은 매일 매일을 위해서 정치에 참여한다. 그러나 청소년과 비청소년 모두 매일의 일상을 살아감에도, 19세 이상에게만 제한적으로 그 일상을 바꿀 권리가 더 주어져있다는 것은 차별적인 일 아닌가?

 

Q9.

jijj****

고딩들한테 투표권 준다고? 학교가 정치판이 되면 어떡함?


A9.

edujournal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보다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 교육공간은 정치가 배제된 공간을 말하는가? 그런 공간일 때만 교육이 가능한가? 교육이란 대체 무엇인가? 브라질의 교육자 파울루 프레이리는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은행 저금식교육을 비판하면서 학생과 교사가 대화와 탐구를 통해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는 문제제기식교육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지식에서 그치지 않고 삶과 현실을 바꿔내는 프락시스’,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교육이라는 것은 학생에게 지적 만족을 주는 것을 넘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돕고 자신의 삶의 문제를 바꿔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볼 것인지, 무엇이 문제라고 제기할 것인지, 무엇이 필요하다고 요구할 것인지. 선택할 힘을 기르는 것, 그리고 가능한 그 선택이 진실에 가깝도록 하는 일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교육은 정치다. 끊임없이 어느 편에 설 것인지 고민하게 하는 것,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기르는 것이 교육이고 그것은 정치와 다르지 않다. 학교가 교육공간이 되고자 한다면, 그곳은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학교는 더더욱 정치판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학교는 침묵과 통제의 공간이었다. 수많은 반교육적 행위들이 교육으로 둔갑했다. 이 속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불만을 표현하는 학생들의 외침은 정치적이라는 프레임으로 억압당해왔다. 두발 규제, 복장 단속 등이 인권침해라고 1인 시위를 하고 자보를 적으면 학교에서 정치적인 행위를 한다며, 다른 학생들을 선동한다며 문제학생으로 낙인찍혔다. 실제로 많은 고등학교들에서 학생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제한 규정을 가지고 있다. 울산 지역의 한 일반계 공립고등학교의 생활규정에는 정치에 관여하여 행동을 한 학생은 퇴학까지 가능하다는 내용마저 있다고 한다.

 

청소년 참정권은 이 침묵의 학교에 균열을 내는 시작이 될 것이다. 청소년은 정치의 주체라는 말이 힘을 가지게 될 때, 학교에서는 어떤 학생도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게 될 것이다. 학생회의 공약은 학부모와 교사의 감시를 받지 않을 것이고,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 참정권 실현은 교육기관을 무너뜨리는 공격이 아니라 학교를 비로소 교육의 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발걸음이 될 것이다.

 

 

 

선거연령 하향을 위한 국회 앞 농성 참여자 인터뷰

 

인터뷰어: 당근

인터뷰이: 상헌

 


지난 달, 청소년 참정권 쟁취를 위해 국회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이어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담아보고자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1 천막 농성을 하며

 

Q. 천막 농성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지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부패한 박근혜정권의 퇴진과 세상의 교체를 위해서 청소년들도 광장에 서있었지만, 학교의 선생님들이 역설하는 학업에 지장이 있을 것이다라는 주장은 이미 그렇지 않음이 드러났지만, 아직도 많은 청소년들이 교복화장두발규제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촛불의 열기와 적폐청산으로 대표되는 요구 또한 학교의 담장을 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그렇기 때문에 국회 앞 천막농성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Q. 천막 농성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었나요?

A. 천막에 있다 보면 종종 지나가는 비청소년들이 어린것들이 뭘 알면서 이러냐는 말을 하는 걸 듣곤 합니다. 악의를 가진 사람들이 내뱉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의 상처로 남는다는 점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Q. 그 중 가장 기분이 나빴거나 어이없었던 말이 있나요?

A. ‘저것들은 전교조한테 선동당한 것들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가장 흔하게 듣기도 한 전형적인 색깔론, 배후세력 프레임을 씌우려는 말이잖아요, 당장 제가 다니는 학교에는 전교조에 소속된 선생님들이 한분도 안 계시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황당했었습니다.

 

Q. 자유한국당을 대상으로 기습 퍼포먼스을 계획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A. 선거연령 하향 과정에서 가장 크게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자유한국당입니다. 국회 방문 시 선거연령 하향에 동의한 자유한국당 의원들도 일부 있었지만, 아직 홍준표를 위시한 많은 의원들이 어린 게 뭘 아냐면서 반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판식 당일의 기습시위는 자유한국당의 태도를 고발하며 선거연령 하향이슈를 다시금 환기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2 참정권 확대를 위하여

 

Q. 만약 선거연령을 하향 관련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킨다면, 그 이후의 참정권 확대를 위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일단 18세로 선거연령이 하향된다고 해도, 앞으로도 계속적인 선거연령 하향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적 성숙함은 결코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디까지 내릴지는 충분한 고민과 토론이 있어야겠지만요. 그리고 단지 선거날 청소년도 투표소에서 도장 찍는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투표참여와 더불어 청소년이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단을 찾아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참정권 확대를 위한 움직임에서 연대할 수 있는 다른 주체들이 있다면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A.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고, 저는 모든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고,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만이 아니라 비청소년들이 청소년의 정치참여를 보장하라는 요구에 함께할 수도 있듯이 가능한 한 많은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대가 있어야 운동의 힘을 얻으니까요.

 

#3 청소년이 주체로 서기 위하여

 

Q. 청소년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 혹은 편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에 대해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A.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들을 오로지 뭘 모르는 어린애들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농성을 진행하면서도 인터넷상에서 많이 들은 말인데요, 이것이 바로 편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청소년들은 결코 뭘 모르는 어린애들이 아니라 동등한 시민이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Q. 청소년이 이 사회에서 주체로 서기 위해서, 참정권 획득 이외에도 어떤 과제가 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A. 단지 참정권의 보장범위 확대로 그치지 않고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것들이 뭘 아냐는 식으로 청소년들을 자신들보다 무지하고, ‘더러운 어른들 정치판에 왜 끼어드려 하느냐는 말처럼 청소년들은 순결해야 한다는 시선으로 청소년들을 바라본다면 청소년들에게 참정권이 있어도 과연 그 권리들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까요?

 

#4 개인적인 질문

 

Q. 청소년 운동 혹은 청소년 참정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요?

A. 청소년 참정권에 관한 요구들은 예전부터 들어왔던 요구들이지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난 5월 대선에 즈음이었습니다. 광장의 힘으로 만들어낸 대선이었지만 그 광장에 있던 청소년들은 빠진 채로 대선이 치뤄지는 것을 보고서 본격적으로 청소년 참정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Q. 농성 때문에 가족이나 교사 등과 갈등을 겪었던 적은 없나요?

A. 농성과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집에서는 제가 (청소년운동을 포함한)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눈치를 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일정들을 적어두는 다이어리를 카메라로 몰래 찍거나 집회소식을 보도하는 기사에서 제가 나온 것들을 찾아보거나, 제가 주로 이용하는 페이스북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기위해 집에서 페이스북 가계정을 생성한 뒤 저를 검색하는 행동들을 한 것들을 들 수 있겠는데, 이것도 제가 모르게 몰래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정보를 흘려가면서 저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게 만드는 식으로 제 활동에 대해서 압박을 넣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많이 부모님과의 갈등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고, 현재에는 무엇을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무슨 제약을 느끼고 있나요? 어려움이 있다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나요?

A. 앞으로도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보장과 청소년들을 향한 혐오의 시선들을 타파하고 싶고, 청소년운동 뿐만이 아닌 모든 의제에서 제 나름대로의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사실 청소년들의 삶이 학교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교육현장만이 아닌 노동현장, 일상에 모두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맞닥뜨리는 어려움은 머리 속에서 제가 원하는 이상에 대해서 그림이 안 그려지고 그것을 말로도 풀어낼 언어가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계속 운동 현장에서 주변 사람들과 고민하고 대화하면서 지식을 쌓아가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렇게 지식이 쌓여가다 보면 제가 나아가고 싶은 방향도 명확해지고 목적의식 또한 선명해지지 않을까요?

청소년 참정권 논쟁 - 잠깐 발 담갔다 빼보기

뚱인데요



1. 보편적 인식

입법자는 우리의 현실상 19세 미만의 미성년자의 경우, 아직 정치적·사회적 시각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거나,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현실적으로 부모나 교사 등 보호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독자적인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신체적 자율성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고, 선거권 연령을 19세 이상으로 정한 것이다.’

중등교육을 마치는 연령인 18세부터 19세의 사람은 취업문제나 교육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정보통신, 특히 인터넷의 발달에 가장 친숙한 세대로서 정치적·사회적 판단능력이 크게 성숙하게 되므로 독자적인 정치적 판단능력을 갖추었다고 보아야 한다. (중략) 병역법이나 근로기준법 등 다른 법령들에서도 18세 이상의 국민은 국가와 사회의 형성에 참여할 수 있는 정신적육체적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인정하고 있고, 18세를 기준으로 선거권 연령을 정하고 있는 다른 많은 국가들을 살펴보아도 우리나라의 18세 국민이 다른 국가의 같은 연령에 비하여 정치적 판단능력이 미흡하다고 볼 수는 없다.’

 

판결문의 결정요지에서 알 수 있듯이, 헌재가 대변하는 대한민국의 보편적 인식은 '19세 미만은 정치활동을 하기엔 미성숙한 세대'이다. 물론 이를 증명하는 실물 증거는 미약하나, 이는 반대 의견에도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이므로 까놓고 말해서 특정 세대의 정치적 성숙함을 판단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뇌피셜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이런 상반된 인식이 한 판결문 안에 실릴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한 번 생각해보자. 한 사람의 생애에서 '겨우 한 살을 더 먹었다고' 의식이 확 성장하는 경우는 얼마나 존재할까? 물론 대부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정치의식의 성장을 담보해주진 않는다. 오히려 바쁜 세상에 치여 정치에 관심을 쏟을 틈마저 사라지기도 하거니와 개인의 생애주기에 있어 늘 발전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런 개인간의 차이가 참정권에서 반영되진 않는다. 아니, 반영되어서도 안된다. 하지만 부정확한 기준에 의거해 시민에게 가장 중요한 권리 중 하나인 참정권의 부여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 할 수밖에 없다.

 

한편 선거 가능 연령과 관련된 주제가 뜰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19세도 낮다. 더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한민국의 시민의식이 20대조차 제대로 된 정치판단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관심도 없는 주제에 자극적인 기사 하나만 뜨면 바로 선동되는 사람들한테 어떻게 맡기냐.’ ‘저런 사람과 내가 같은 한 표라니 좀 그렇네.’ 대충 뭐 이런 반응들인데, 물론 대한민국의 시민의식이 선진국보다 훨씬 딸린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는 사실이나, 윗세대라고 해서 20대보다 더 이성적으로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가? 글쎄다. 그럼 전부 의식수준이 낮으니 역시 대한민국은 아직 민주주의를 하기엔 부족하니 과거의 현명한 지도자들을 본받아 엘리트주의로 회귀해야 하는 걸까? 당연히 아니다. 저렇게 말하면서 선민사상 내뿜는 사람들도 막상 따지고 들어가면 알맹이 없는 건 매한가지일 확률이 크다는 건 잠깐 무시하더라도 유독 그런 비난이 ‘20대 초반에게만 집중된다는 건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리고 보통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갓 20대 초반을 넘겼거나 비슷한 연배라는 것 또한 그렇다. 원래 사람은 1년 전의 자신을 가장 부끄러워한다고 했었나...

  

2. 참정권이 왜 필요한데?

이런 논의를 하기 전에 우선 이 질문부터 던지고 시작해보자. '참정권을 왜 줘야 하는 건데?'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답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제도가 당연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우선 시민이 직접 자신들의 지도자를 뽑는 제도가 정착된 것이 - 특히 한국은 - 인류사에 비하면 그렇게 깊은 역사도 아니거니와, 초창기엔 이 시민마저 부유층, 백인, 남성등으로 한정되었었다. 당장 민주정의 가장 오래된 형태라 하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미성년자, 외국인, 노예, 여성이 아닌 성인 남성에게만 참정권을 보장했으며, 근대로 넘어와서 이를 타파하는 운동은 서프러제트처럼 큰 사회적 변혁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백래시 논리는 늘 하나의 지점으로 귀결되었다. ‘그런 의식수준의 계층에게 어떻게 정치를 맡기느냐.’ 결국은 또 의식수준이다. 앞서 잠시 주석으로 언급했던 시험으로 참정권을 갈라야 한다.’는 주장도 결국은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정치는 똑똑한 사람만 하는 거였나?

 

근본적으로 '의식수준에 따라 정치활동을 제약한다.‘는 발상에 의구심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정치는 개인의 지적 우월함을 뽐내는 무대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를 요구하는 광장이다. 비정규직은 참정권이 있기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정규직화 및 정규직에 상응하는 대우를 요구할 수 있고, 청년들은 참정권이 있기에 청년 정책을, 노인들도 참정권이 있기에 노인 복지를 요구할 수 있다. 이는 참정권이 인권의 영역에 있기 때문인데, 실제로 참정권 운동은 항상 근본적인 인권 향상 운동과 연계되어오지 않았는가? 결국 참정권 그 자체가 인권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완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이제야 보편타당해졌다. 적어도 말로는 그렇다. 참정권은 이를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도구 중 하나라는 점에서, 결국 참정권은 그깟 의식수준 따위가 아닌 절실한 필요에 의해 부여되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따져야 하는 건 참정권의 부여가 그들의 필요를 해결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느냐.’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모두를 위해 가장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민주주의의 이상향은 어디인가이다.

 

3. 청소년 참정권 그 자체의 의미

실제 판단력이 어떻든 간에, 대한민국 법은 특정 연령이상의 국민을 정치 참여의 주체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국민은 정치 참여의 주체로 인정받기 시작함으로써 정치 참여의 자격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낙인효과에 대해 아마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회가 누군가를 일탈자로 인식함으로써 그 사람은 실제로 일탈자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말썽꾸러기로, 거짓말쟁이로, 전과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그 틀 안에서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정치를 하기엔 미숙한 존재로 낙인찍힌 학생들은 그 틀에 맞춰서 성장할 가능성 역시 크다. 그러니까 그 틀을 완전히 뒤집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아예 없애는 것도 괜찮겠다.

 

이는 학교 현장에서 더 건전한 토론이 활성화되는 것도 기대해볼 수 있다. 정치가 터부시된 교실에서 온라인 커뮤니티의 사상이 일부 학생들을 중심으로 알음알음 퍼지던 게 그동안의 교실 현장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교실 안에서부터 시작하는 정치를 만들어보자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교실은 더욱 정치적이어야 한다 이 말이다. 정치적 발언이 터부시되거나 혹은 교사 한 명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교실이 아니라, 모두가 매 시간마다 끊임없이 고민하는 교실을 만들어 놓아야 맨날 서로 그렇게 까기만 하는 입시 위주 교육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해결될 기미가 보일 거 아닌가.

 

4. 마무리하며

대학교에서 새내기 맞이를 준비하면서 끊임없이 되뇌이는 원칙이 하나 있다. '새내기의 주체성을 무시하지 말자.' 즉 새내기를 어린 존재, 단순히 고등학교라는 좁은 세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대해 배워야 할 맑은 영혼정도로 간주해선 절대 안되며 오히려 동등한 주체로 대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자리로 새맞이를 구성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는 선후배간 위계질서를 타파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원래 그렇게 생각하던 새내기가 있었다면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혹여 늘 배우는 존재로만 머물러 있었던 몇몇 새내기가 있었다면 거기서 깨어나라고 외치기 위함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뭘 배운다고 정치를 한다고 그러냐.’고 묻는 사람들은 그 손가락을 학생이 아닌 학교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딱 봐도 학교가 애들에게 가르치는 게 없어 보이면 학교를 바꿔야지 왜 학생을 그 틀에 맞추려고 하는가. 교육이 발전할 때까지 학생들 보고 기다리라고 할 수도 없는 법이다. 오히려 교육을 가장 필요로 하는학생이 교육을 바꿀 수 있는 학교를 만들어보자. 그게 더 효율적인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문화비평즐거운 나의 집”(공지영)

말차라떼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관념 중에 하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이다. 정상가족이라는 말이 존재한다는 것은 비정상가족에 대한 관념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것이 정상가족이고 어떤 것이 비정상가족인가? 흔히 엄마와 아빠, 자녀가 기본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정상가족이라고 한다. ··고등학교에서는 새 학기 첫 날에 항상 적어서 내는 나를 소개합니다종이가 있다. 여기에는 부모님의 직업은 무엇인지, 가족 구성원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 등이 적혀져 있다. 이 종이를 바탕으로 담임교사는 학생과 상담을 진행하게 된다. 한부모 가족, 이혼 가족, 재혼 가족, 조손 가족, 심지어는 다문화 가족까지 결손가족혹은 비정상가족으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결손가족으로 분류된 이들은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은 정상가족의 틀에서 벗어난 이들에 대한 차별의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손 가족의 학생이 문제를 일으키거나 저조한 성적을 보일 경우 엄마(또는 아빠)가 없어서 그래”, “가정교육이 문제여서 그렇지라고 단정 짓기 태반이며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기 일쑤다. 비정상가족은 덜 행복할 것이며, 불행을 겪기 쉽고, 어딘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과 편견은 너무나도 비일비재하다. 본인의 가족을 비정상가족이라고 지칭하는 사회적 시선 속에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

즐거운 나의 집에서 위녕의 가족은 평범하지 않다. 위녕은 엄마와 두 명의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데 세 남매의 성은 모두 각각 다르다. 위녕의 어머니는 두 번 재혼 하고 세 번 이혼을 해서 홀로 세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이 가족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공중파 드라마의 전형적인 클리셰는 이복형제 사이의 다툼, 새엄마 혹은 새아빠와 자녀의 갈등이다. 재혼 가정에서 부모나 자녀 중 한명은 소외되어 있으며 괴롭힘을 당하고, 이복형제끼리는 항상 서로를 시기, 질투하며 계략에 빠뜨리려고 하는 내용들은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현실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위녕의 가족은 이런 클리셰를 타파한다. 성이 다른 세 남매는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위녕과 동생들은 서로를 챙기고 따르며 잘 지내지만 시시껄렁한 일로 다투기도 한다. 위녕의 어머니는 어느 누구를 편애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며 항상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말을 해준다.

행복하고 문제없는 이 가정의 가장 큰 문제는 남들의 시선이다. 작가인 위녕의 어머니에게 늘 붙어 다니는 이혼녀 꼬리표, 남들의 불편한 시선, 수군수군대는 소리... 위녕의 어머니가 남에게 밉보일 때 항상 듣는 소리는 왜 이혼을 세 번씩이나 했는지 알 것 같다이다. 심하게는 위녕의 어머니같은 사람 때문에 우리 사회가 가정이 파괴되고 아이들이 잘못된다고까지 한다. 위녕과 세 아이들은 불쌍한 아이들이라며 동정을 받는다. 과연 누가 문제인가? 평범하지 않은 것이 마치 잘못인 것처럼 말하며 비난하는 사람들, 당사자의 상황을 알지도 못한 채 남발하는 동정인 척하는 위선은 안타깝게도 현실이다.

위녕의 어머니가 두 번씩이나 재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위녕 어머니의 첫 번째 남편이자 위녕의 아버지는 작가인 위녕 어머니에게 직장을 때려치고 육아와 살림에 전념하기를 강요했다. 두 번째 남편은 위녕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정상가족을 유지하려면 이 모든 고통과 상처를 감내해야 하는 것인가? 이렇게 유지되는 가정이 어떻게 정상일 수 있는가? 지금도 누군가는 자신의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갈등과 폭력을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족제도의 유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은 계속해서 묵인되어 왔고 가족제도를 해체시키는 이혼제도는 사회에서 부적절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낙인찍혀왔다. 이혼율이 증가하는 현상을 마치 우리 사회가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로 여기지만 정작 비정상가족에게 찍히는 낙인과 차별, 배제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남들의 시선을 잘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 의해 살아가는, 한 마디로 쿨한 성격을 지닌 위녕의 엄마조차도 성씨가 다른 세 아이를 키우면서 스스로에 대한 주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야말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저자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누군가 새로운 의미의 가족에 대해 작가 본인과 작가의 아이들의 이야기를 수필로 써달라고 요청한 것이 시작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가족의 의미도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저자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날 가족의 형태는 확실히 예전과는 다르게 다양해지고 있다. , 더 이상 이 다양한 가족들을 어떤 하나의 틀로 묶을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이를 하나의 틀로 억지로 맞추고 재단하려고 하다 보면 당연히 삐그덕거릴 수밖에 없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 가족이 남들의 기준으로 보면 뒤틀리고 부서진 것이라 해도, 설사 우리가 성이 모두 다르다 해도, 설사 우리가 어쩌면 피마저 다 다르다 해도, 나아가 우리가 피부색과 인종이 다르다 해도, 우리가 현재 서로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해도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가족이니까,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명사는 바로 사랑이니까 가족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야만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 구성원들을 연결하는 끈의 정체를 저자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랑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집필진 후기>

 

당근

교육저널에서 기자로 활동한 첫 학기인데, 처음에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어서 욕심을 많이 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저는 글을 많이 쓴 것도 아닌데) 쉽지가 않더라구요. 또 시간도 품도 꽤나 많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글도 처음에 고민했던 것만큼 잘 나온 것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조금은 확신이 없습니다. 페미니즘 교육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고 현장에 힘이 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막상 쓰면서는 제가 포착한 경향이 현장의 것인지, 현장 외부에서 논의를 하는 사람들의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힘든 현장에서 나름의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고 계신분들께 실례가 되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대학(이론)과 현장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니까 말이에요. 글이 나와서 평가를 받게되면 더 고민해볼 여지가 있겠지요.ㅎㅎ 개인적으로는 여러 피드백을 받고 저의 관점과 평가를 설득하며 고민을 키워나갔던 것이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남아있는 것이 기쁩니다! 이번 학기 제가 벌려 놓은 여러가지 일 중에 유일하게 남은 가시적 성과가 아닐까요...ㅎㅎ 방학동안 책도 읽고 충분히 쉬고, 다음호에서는 조금 더 성장한 고민과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이물

2주 동안 붙잡고 있던 내용을 다 지워버리기도 했고, 한 문장을 못 써서 다시 2주를 질질 끌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벼락치기처럼 써내버린 글들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여주고 그 관점을 제안하는 정도면 되지 않을까하여 자족하고 있네요. 또 어쩌면 당연한 소리를 했지만, 제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을 써내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고, 몇 년 만 지나도 그 직관이 역사적인 것, 쓰지 않았다면 사라질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힘을 냈습니다.

교육을 둘러싼 우리의 고민과 움직임이 죽었다고들 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치열함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언제쯤 제가 가진 교육에 대한 질문들에 답을 얼추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꾸준히 이어나가보려 합니다.

 

그래놀라

저는 이전까지 하던 동아리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끼면서 새로운 동아리를 해보자!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교육저널에 함께 하게되었습니다. 사실 글 쓰는 것에 별로 자신도 없었고 아는 것도 없었는데 교널 활동하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던것같아요!!(물론 여전히 부족하지만) 사람들도 전부 좋은 사람들이었고 또 인지하지 못했던 중요한 사실들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또 교육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진로 면에서도 더 생각할 폭도 넓어진것같습니다.

이번 학기에 교널에 들어간 것은 정말 운명이 아니었나 싶네용ㅎㅅㅎ 좋은 추억과 기회 주셔서 참 감사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울바

-(울트라바이올렛이라는 뜻)! 안녕하세요, 이번에 처음으로 교육저널과 함께하게 된 저는 울바입니다:) 진부한 말인지는 몰라도, 글 쓰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아는 것도 별로 없어서 남에게 보여줄 글은 더더욱 못쓴다고 스스로 생각하던 저였지만 한 학기 동안 글을 위해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조사하고, 글을 쓰고, 서로의 글을 읽고, 여러 번 글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걸 느끼고 생각하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하게 된 교육저널이지만 점점 중요한 부분이 되어갔고 이젠 제 생활에서 교널을 빼면 너무 허전한 지경이 되어버렸네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교육저널과 동료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저희 저널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도 제 사랑을 드립니다~!!

 

말차라떼

저에겐 이번 호가 2번째 교지인데 첫 번째에 쓴 글과 비교해보면 살짝 더 나아진 느낌이 들어서 뿌듯합니다. 이번 호의 글들은 평소 제가 관심이 있었고, 한 번쯤은 글로 남겨보고 싶었던 주제라서 다 쓰고 나니 보람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글쓰기는 항상 어렵습니다ㅠㅠ) 특히 이번 학기에 새로운 교육저널 멤버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교널 멤버들 앞에서는 비록 말 못했지만 다들 너무 좋아! 좋다구! 앞으로도 함께 모여서 회의하고 좋은 시간 가졌으면 좋겠는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교지를 한 번 펼쳐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는 마음을 전하며 이만 줄입니다~ :-)

 

뚱인데요

어쩌다 보니 세 학기나 함께하게 된 교널! 허나 내놓은 작품은 이번이 가장 초라한 거 같네요...패기롭던 새내기의 체력은 어디 가고 이젠 수업 한 번 출석하는 것도 벅찬 대2병 걸린 정든내기가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아 이것저것 다 손대다가 결국 제대로 남은 게 없는 학기지만, 그래도 함께하는 그 자체로 교널은 즐겁습니다 꺄아 :) (글쓸 때만 빼고 ㅠㅠ) 아무튼 이번엔 야심차게 준비했던 건 다 날라가버리고 조촐한 글 하나밖에 싣지 못했지만 다른 글들의 퀄리티 + 여러분의 아량을 믿고 저는 버스에 탑승...하겠습니다...여기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학 내 페미니즘의 오늘 페미니즘 생태계를 꿈꾸며

 

이물

 

1. 대학, 교육, 페미니즘

 

 ‘페미니즘 교육은 무엇인가? 그 목표는 정해진 페미니즘으로 학생을 훈육하고 계몽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현장에서의 페미니즘 윤리, 혹은 사회비판적 교육이라는 의미의 페미니즘 지식을 만들어가는 정치가 필요하다.

초중등교육에서의 페미니즘을 일방적 훈육으로만 사고할 때, 학생운동과 여성운동으로 상징되는 대학 내 페미니즘과는 그 괴리가 커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페미니즘 교육을 위한 페미니즘 정치를 사고할 때, 대학에서의 여성운동은 오히려 이것을 이미 상당부분 수행해왔다고 보아야한다.

 

교육은 기존 사회의 규범에 맞게 개인을 사회화하는 기능을 갖지만, 동시에 기존 사회를 비판하는 힘을 갖게도 한다. 사회 비판적 지식을 생산하려는 교육은, 사회 비판적 운동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그 자체로 운동이다. 야학과 노동운동의 관계, 대학과 학생운동의 관계가 이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 대학생들의 운동은 피교육자가 교육의 주체가 되는 경험이었다. 초중등교육의 교육할 내용, 교육하는 사람, 교육받는 사람은 교과서, 학교와 교사, 학생이다. 대학의 경우 교육 내용은 교과서에 비해 다양한 조건에 의해 정해진다. 한편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구분을 넘어 학생들은 학회를 꾸려 스스로 교육공동체를 만들고, 학생자치를 실현해왔다. 이처럼 대학에서는 교육되는 지식에 대해 많은 주체들이 경합하고 있다. 경합의 장은 사회 비판적 교육의 기능이 발현되는 데에 유리한 조건이 된다.

이런 조건 위에서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은 공동체의 페미니즘 윤리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여성주의 학회들과 여성학 강사와 조직들은 페미니즘 지식을 생산해왔다. 대학은 이미 페미니즘 교육의 정치를 수행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초중등교육에서 제기되는 페미니즘 교육 담론은 제도화나 교육과정 편성, 교사 중심 논의에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서 이루어졌던 지식에 대한 경합을 살펴보는 것이, 그러한 한계점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과정이 초중등교육에 아예 부재했던 것도 아니다. 이미 십대 청소년 활동가들과 정치조직이 존재하며, 역사적으로는 학생자치기구를 기반으로 한 고운(고등학교운동)’이 존재하기도 했다.

결국 일방적 교육을 넘어서는 페미니즘 교육의 정치를 지금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는 현재 대학의 페미니즘 정치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 와해된 대학 여성운동을 다시 생각하고, 초중등교육의 페미니즘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서울대의 페미니즘 학생 단체를 중심으로 이를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페미니즘 교육을 넘어, 사회 전반을 바꿔내려는 페미니즘의 흐름에서 대학의 의미를 다시 고민해보았으면 좋겠다.


 

2. 대학 내 페미니즘의 현황 서울대 학생 단체를 중심으로


1) 2016년 메갈리아와 강남역 살인사건을 전후하여

 

 ‘페미니즘 리부트’, ‘영영페미니스트, ‘뉴페미니스트’... 2016년 이후의 페미니즘을 일컬을 때 자주 언급되는 단어들이다. 지금의 페미니즘과 2010년대까지의 페미니즘에서 일종의 단절성과 차별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단절성이 객관적인지, 주체들이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인지는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그간 위기 담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이 2018년인 지금, 가장 뜨거운 화두로 변모한 것은 사실이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은폐되어 있던 여성억압을 폭발적으로 가시화했고, 강남역 살인사건은 사람들이 이를 실물화된 위협으로 느끼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역차별 논쟁과 페미니즘에 대한 낙인찍기도 심각해졌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쇠퇴기를 상징하는 신자유주의16년 이후의 여성혐오가 겹쳐있는 곳에 서 있다.

대학에서도 이런 양상이 펼쳐진다. 높아만 지는 취업에 의한 부담, 학생회 재선거와 무산 속에 반복되던 학생운동의 위기담론은 대학 내 여성운동에도 적용되었다. 이 위기가 정확히 왜 촉발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은 다양했지만, 실체 없이 담론만 반복되는 거 아니냐는 자조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현실이 됐다. 그러나 16년 이후 페미니즘은 주요 화두가 되고, 다양한 페미니즘 학회와 소모임, 관련한 단체 및 산하기구가 생겨나고 있다.

서울대의 경우, 주요 단체 중 16년 이전부터 존재한 단체에는 여성주의 학회 달’ (2013년에 지금과 같은 형태 갖춤) ‘학생 소수자 인권위원회’(2015년 설치)가 있다. 한편 16년 이후 지금, 여기 : 관악의 페미들’(20162학기), ‘경영대 여성주의 학회 여파’, ‘공과대학 페미니즘 동아리 공해’(20181학기) 등 단체, 소모임들이 생겨났다.

각 학생회 단위는 매년 새맞이나 선거 기조에서 페미니즘을 천명하고 공약을 제출해왔다. 올해 제36대 사회대 학생회는 학내 페미니즘 단체들과 3.8 여성의 날 행사를 공동주최했으며, 대학생 공동행동에 결합했다. 2017년 제38대 사범대 학생회는 학소위와 인권침해사안을 해결하고 강연회를 여는 등 자치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2016년 제33대 인문대 학생회 역시 X반 단체 카톡방 성폭력 사건을 총학생회, 학소위와 공동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생회들이 페미니즘 의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선도하는 입장이라기보다, 복지 사업 정도로 진행하거나 학소위를 보조하는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명확한 정치적 계보가 부재하고 해마다 지형이 바뀌는 최근의 학생회들을 학교 전체 단위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료와 섬세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는 페미니즘(혹은 젠더 문제)를 뚜렷하게 지적하고 있는 상설 단체들만을 다루려 한다.

  

2) 분석

 

- 다양한 형성배경과 위치

 

 총학생회 산하기구인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2015년 수리과학부 K교수 성폭력 사건 등을 계기로, 학생사회에서 인권 사안을 다룰 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총학생회 산하기구로 결성됐다. 그러나 15, 6년에는 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2대 학소위장의 한남논란과 사퇴로 그 힘을 잃기도 했다. 감사와 재정비를 거쳐 162학기부터 활동을 재개했고, 현재는 학내 인권 사안 해결을 주도하고 인권 강연을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6년 이전부터 활동했고, 뚜렷하게 이전 여성운동을 계승하려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이 유일하다. 달의 원형은 사회대 중심의 여성주의 교류 모임이었는데, 2012-13 ‘성폭력 대책위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학생사회 내의 페미니즘에 대한 이견이 표면화되자, 이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지금과 같이 학회의 형태를 구축하게 됐다.

페미니즘 모임인 지금, 여기 : 관악의 페미들의 경우, 20162학기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인권주간 부스에서 시작했다. 부스의 반응이 좋았고, 당시 페미니스트에 대한 낙인에 맞서 심리적 지지를 보낼 관계가 필요해 만들게 됐다고 한다.

단대 학생회를 중심으로, 최근 공과대학 페미니즘 동아리 공해경영대 여성주의 학회 여파가 형성됐다. 두 모임 모두 해당 단대에서 여성(및 인권)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이 크게 작용했다. 직접적으로는 공해의 경우 달에서 활동하던 학우가 주도해서 동아리를 만들었고, 여파의 경우 몇몇 학우가 진행하던 여성주의 스터디가 오픈 세미나 이후 확장되어 학회가 됐다.

 

- 공통된 분노, 다른 문제의식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각 단체들이 다른 조직적,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학소위를 제외하고 모든 단체들은 비공식적인 학회/소모임의 형태를 띠고 있다. 공해, 여파는 기존의 학생회 단위를 중심으로 여성주의 이론을 학습하고, 실천으로 이어가려는 목적을 갖는다. ‘은 명확히 학생회 단위에 구속되지는 않지만 체계화된 학회 운영을 지향하고 있으며,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넘어서 상호교차성,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등을 고민하는 정치적 관점을 갖고 있다. 여파와 공해 역시 신생 학회의 어려움을 고려하면서도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공해의 경우 과학기술의 객관성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에 관심이 있다.

반면 관악의 페미들의 경우 학회나 동아리의 정체성은 부재하며, 때문에 정치적 관점이 단일하지 않고 구성원별로 원하는 것이 각자 다르다. 기존 학생회 단위를 벗어나 전 관악을 대상으로 느슨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활동은 카톡방을 중심으로 사안별로 가능한 사람끼리 모이거나, 원하는 책이나 사업을 제안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관악의 페미들은 16년 이후 영영페미니즘들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존 제도(학생회 기구)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낮게 인식하고, 정치적 입장의 단일성보다는 유동적이고 느슨한 네트워크 기반 사안 중심의 활동이 그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는 이미 90년대 영페미니즘의 조직 방식이기도 했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는 각 대학과 기층 단위가 존재하고, 이 단위 간의 느슨한 연대체가 구성된 것이었던 반면, 최근의 경향은 가장 기본적인 단위조차 네트워크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반성폭력 운동이라는 고정적인 의제가 있었던 90년대에 비해 단체들이 직접 주도하는 주요 의제는 찾기 힘들다.

 

그런데 이때, ‘어떤페미니즘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 불과 2~3년 전에 비해 훨씬 많은 학우들이 페미니즘을 접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있다는 건 여성운동의 엄청난 성과이고, 다른 사람들이나 단체들만큼이나 달 역시 지금까지 여성억압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해온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이후를 물어야 합니다. 미투 운동의 엄청난 사회적 동력이 어디로 향해야 정말로 보편적인 여성해방을 성취할 수 있을지,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기존 급진 페미니즘의 실수는 물론이고 가면을 바꿔 쓰고 또 다시 나타날 똑같은 백래시를 피하면서 더 진보할 수 있을지, 이런 질문들을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각자가 원하는 바가 달라요. 학회나 이런 건 목적이 뚜렷하잖아요. (...) 관페는 목적성 있는 단체가 아니다 보니,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존재하고, 연대활동을 할때에 하는 사람만 하는? 그런 게 있어요. (...) 동아리는 구성원이니 행사에 참여해라 이렇게 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반면 이거는 아닌 거죠. 활동을 하고자 하는데 도와줄 사람은 도와 달라. 그게 어려움이 좀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 관악의 페미들

  

- 제도화와 정치성의 탈색

 

 그간 진행됐던 반성폭력 운동은, 각 대학들의 반성폭력 학칙이나 내규를 통해 제도화되었다, 서울대에서도 인권센터, 학소위가 그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162학기 이후 학소위 활동이 정상화되고부터는, 학내 인권침해사안의 해결은 거의 모두 학소위의 손을 거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여성운동의 정치적 관점을 확장하는 한계선을 긋기도 한다.

특히 반성폭력의 흐름에서, 제도화 이후 사건 해결 자체만 반복해서 진행되고,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고 공동체적으로 해결할 것인지의 논의는 축소되었다. 이는 성폭력의 개념을 정치적으로 재구성하고, 사건 해결 과정의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피해의 개념을 제시한 이전의 여성운동과는 대비되는 지점이다.

 

학소위는 지금 반성폭력 학칙 같은 뚜렷한 의제를 내지는 않지만, 성폭력 사건 접수를 해왔고, 공동체적 해결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온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학소위 2기에서 그런 일(2기 학소위장의 사퇴)이 벌어졌고, (...) 3기에서는 (여성 인권 문제제기를) 뚜렷하게 하지 못했죠. 반성지점이라고 생각하고, 4기에서 시도해보자 하고 있는데 (아직)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 학소위

 

학생회 기구로서의 역할과 학내 모임으로서의 역할은 다르고, 학생회 기구는 제도적인 것, 사건 접수, 학교 제도 차원에서의 접근이 진행된다면 모임은 문화적 변화를 촉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학소위

다른 사회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것을 인정해주는 사회가 있었고, 인정해주는 문화가 있어왔고. (...) 대학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관습을 갖고 이행해왔는지에 대해 잘못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발생한거다, 라고 원인을 밝히는 작업들을 같이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공대라는 단과대에서 이런 일들을 마주했을 때, 개별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어 사건처리만이 아니라 더 넓은 것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공해

 

학소위 인터뷰에서 언급된 것처럼 제도화된 기구가 사건해결을 맞는다면, 이에 대한 정치적 담론을 확장하는 것은 페미니즘 모임들의 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지금은 이러한 상호작용이 잘 수행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인권 침해 사안에 대한 문제제기는 반복되고 있지만, 학소위의 정제된 진상조사보고서 이후 이를 적극적으로 공론화하고 공동체적 페미니즘 윤리를 재구성하려는 학회/학생회 단위의 노력은 뚜렷하지 않다.

 

한편 페미니즘 지식을 생산하는 역할 역시 정체되어 있다. 언급했듯 관악의 페미들은 뚜렷한 정치적 지향이 있지 않다. 신생 단체인 공해와 여파는 물론이고, 달 역시 다양한 페미니즘 논의에서 이론을 어떻게 정립하고, 현실과 연결할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학소위의 경우 사건 해결만 해도 많은 공력이 들고, 산하기구로서의 정치적 부담 등으로 인해 여성 의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뭐가 될진 몰라도 모두가 같은 입장을 가질 수 없는 사안에 대해 여파가 입장을 취해야 할 때가 있을 거고, 그럼 밖에서 볼 때 우리가 정치적으로 어떤 위치에 서서 어떤 페미니즘을 지향하는지 알 수 있겠죠. 그러면 여파가 초기에 생각했던 것처럼 모두에게 열려 있는 대안적 공간으로 남기 힘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단순히 지적 만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참여와 실천의 학문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 여파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보편적으로 확고하게 정립되어있지 않다는 점은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합니다. (...) “여성주의를 공부하자고 하는 단체인데, 사실 여성주의를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어느 선 이상으로 넘어가면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되어버려요. (...) 일정 수준 페미니즘의 담론에 친숙해지는 과정은 필요하지만, 그 공부를 통해서 세미나 참여자들이 현실의 여성들과 연대하면서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면 머리 아픈 이론적인 학습 과정을 어느 정도는 우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 만성적 참여 부족과 사회적 낙인

 

 무엇보다, 모든 페미니즘 단체들은 만성적인 참여 부족을 어려움으로 꼽는다. 학소위의 경우 2주에 한 번 열리는 정기회의가 4, 5시간에 육박할 정도로 업무량이 많고, 진상조사 참여는 감정소모가 심한 일이기 때문에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지속가능성이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신생 단체인 여파, 공해는 물론 달도 새로운 학회원을 모집하는 것, 나아가 학회장이나 간사 등 중심 역할을 할 사람을 재생산하는 것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관악의 페미들 역시 느슨한 연대체의 형태가 갖는 재생산에서의 한계를 걱정하고 있다.

한편 소위 백래시(backlash)’라고 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 낙인도 만만치 않다. 특히 학소위는 2기 학소위장이 한남발언이 논란이 되어 사퇴했고, 당시 총학생회 디테일은 메테일’ (메갈리아+디테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관악의 페미들의 경우 동아리 가등록을 고민해보기도 했지만, 동아리 등록 시 메갈’, ‘워마드에 대한 사상검증을 요구받고 동아리 등록이 부결된 경험(국민대), 본부의 개입이나(한동대) 학생들의 반대로(서강대) 페미니즘 강연이 취소되는 등의 사례를 들며 걱정을 표했다. 서울대 커뮤니티의 역할을 하는 페이스북 대나무숲과 스누라이프에도 계속해서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글이 올라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 과정에서 현실적인 권한과 영향력을 고민하는 단위도 있다. 학소위는 타 대학의 총여학생회나 단대 학생회와 같은 선출 단위의 경우 학우들에 대한 정당성이나 예산 집행의 가능성이 있지만 학소위는 그에 제약이 있는 것이 고민지점이라고 말했다. 한편 관악의 페미들은 애초 뚜렷한 단위 기반이 없기 때문에 학우들에 대한 영향력과 권한이 부재한 것을 어려움으로 들었다.

 

이런 부담 속에서 명확한 정치적 관점을 견지하고, 체계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물리적,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앞서 언급한 정치성의 탈색이나 조직적 느슨함과 같은 상황의 원인이 이러한 어려움들에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 생각들이 만연해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별로야, 하고 인상비평으로 부정적인 의견을 표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단 말이죠. 수업시작하기 전이나, 관악 02 버스타고 올라가는 데 그런 느낌의 말을 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권유를 할 때, 페미니즘을 입에 담지 않고 그거’ ‘그 사람들이라고 칭하기도 했다더라고요. (...) 그럼 어떻게 인식을 바꿀 수 있을까. 페미니즘의 의미를 우리 것으로 되찾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하는 고민들이 있어요. (...) 불리한 전제를 그냥 놔두고 힘겹게 이어가는 게 아니라 그런 전제를 뒤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의 당위를 이야기하고 요구를 이야기하고 이런 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고민이 있습니다.“ - 공해

 

3) 종합

 

 지금의 대학 내 페미니즘은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90년대 영페미니즘의 유산인 반성폭력 운동의 정치적 힘은 제도화되고 정체되었다. 사회적 비난은 가중되고 있으며, 지향하는 조직형태가 체계적이든 느슨한 것이든, 지속가능한 조직 구성에 애를 먹고 있다. 또한 뚜렷한 문제의식과 이를 반영한 실천의제가 제출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자주 추상적 인권에 페미니즘이 편입될 것을 요구하는 비판에 직면한다.

그러나 분명히 달라진 것은, 적어도 16년 이후 이러한 어려움을 호소할 단체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 정도는 다르지만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페미니즘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한다. 경영대와 공과대학에서는 자신이 속한 단위에 대한 성찰이 생성 계기가 됐고, 달은 꾸준히 페미니즘 이론을 발굴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관악의 페미들은 척박한관악에도 페미니스트가 있다는 확인을 위해 만들어졌다. 학소위원들은 인권 사안의 해결을 위해 넘치는 업무를 감당하며, 3, 4기를 거치며 그 숫자는 늘어났다.

어쩌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지금, 그 문제의식을 담아낼 조직과 방향이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 대두됐다고 볼 수 있다.

  

3. 함께, 더 넓게 대안을 상상하기

 

 대안은 어디에 있는가? 인터뷰를 진행하며 느낀 것은 무엇보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여성운동가들 자신이 이미 그 실마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관악의 페미들은 조직의 중앙집권적 면모가 부족함에도, 기존의 학생회, 여성운동 단위를 완전히 벗어나 평범한사람들도 새로운 형태로 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학소위는 반성폭력, 페미니즘 담론을 확장하기 위한 내부세미나를 진행하고 인권 강연을 개최하는 노력을 하고 있고, 학소위가 넓은 범위의 인권을 담당하는 점이 오히려 다양한 억압들의 교차성을 다룰 가능성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달은 현실 여성들과의 연대가 이론적 난항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고, 여파는 공동체 내에서 존재감을 키워가고 더 크게 떠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공해는 신생 동아리인만큼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문화 비평 등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있다.

존재감 키우기, 새로운 사람들을 위한 진입장벽 낮추기, 다양한 억압을 함께 사고하기, 현실과 연대하기는 그 자체로 모두 옳은 지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처럼 분산된 고민들을 한 데 모으는 것이 이 글의 의무라면,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로 조직과 지향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한, 지속가능한 페미니즘 생태계를 상상해보고 싶다. 나는 적어도 페미니즘 단체의 기본 단위의 지향과 정체성은 체계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바탕으로 상시적이고 느슨한 전체 학교 단위의 페미니즘 단체 간 교류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 이는 상시적인 공동 업무 수행의 부담과 마찰을 피하면서도, 단체들 간의 논의를 자극해 그동안 약화되어 온 페미니즘들 간의 경합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학내에서 페미니즘의 존재감과 영향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는 90년대 영페미니스트들이 이미 시도한 방식이며, 서울대에도 관악여성주의자모임(관악여모)가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학소위라는 확실한 제도기구가 존재하며, 이는 얼마든지 유리한 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 생태계가 안정화되면 사회적 비난과 낙인에 대응하며 페미니즘을 생산적으로 성찰하는 심리적, 정치적 자원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회 단위와의 적극적 연대도 상상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내가 인터뷰를 진행한 주체들이 함께 이 이야기를 하면 훨씬 좋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이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둘째로 조금 벗어난 말일 수 있지만 페미니즘 교육이나 대학을 넘어서는 상상이 필요하다. 현재 대학 내 페미니즘의 실천은 대학이라는 공동체에 국한되는 성폭력 문제 해결과 복지, 혹은 실천과 괴리된 지식 생산에 머무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과거에는 사회적 반성폭력 운동으로의 확장이라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제도화된 이후 그 역할은 희미해졌다. 이는 대학 여성운동이 확장된 페미니즘적 관심을 수용하기보다 유리된 공간으로 분리, 축소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대학은 사회와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 집회에 참가하거나 지지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의제를 대학 내에서 발굴할 필요가 있다. 대학 구성원이 처한 성차별, 여성/성소수자 노동, 낙태, 학문의 젠더편향 등을 지적해나가야 한다. 이처럼 사회와 연관하는 과정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주체들의 자각과 확신, 지지의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며, 현실을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지식을 구성하고, 그 지식이 다시 힘 있는 페미니즘 운동을 조성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주제넘은 이야기였을까 걱정이 되고, 머리로는 알아도 이를 실현하는 것은 힘들고 지난한 과정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과 단체가 있으며, 또 늘어나고 있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이 대학에서 어려운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고, 당장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고, 바꾸어낼 실천 의제를 찾고, 함께할 사람을 조직하는 것은 분명 우리의 몫이다.

끝으로 인터뷰한 모든 단체가 입을 모아 했던 마지막 말을 남기려 한다.

세미나 많이 와주세요.” “더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항상 열려있습니다,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문헌

 

- 김보명, 1990년대 대학 반성폭력 운동의 여성주의 정치학, 페미니즘 연구8, 한국여성연구소, 2008.

 

더 읽어보면 좋은 것들

 

- 김영선, 한국 여성학 제도화의 궤적과 과제, 현상과 인식34(3), 2010.

- 이나영, 한국 여성학의 위치성 : 미완의 제도화와 기회구조의 변화, 한국여성학27(4), 2011.

- 이다혜, 대학 내 여성주의 운동과 정체성 형성 : 2010년대 대학생 활동가의 경험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여성학 전공, 2012.

- 한종태, 2000년대 중반 이후의 대학 내 여성주의 운동 연구 : 활동가들의 위기경험 분석을 중심으로,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2014.

 

 

교육의 울타리를 넘어, 학교와 세상을 바꾸는 페미니즘으로 나아가자

당근

 

들어가며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한국 사회에는 90년대 이후 다시 페미니즘이 부흥하고 있다. 그 이후로 여러 가지 논쟁과 토론이 있어왔지만, ‘페미니즘 교육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처음 페미니즘 교육이 화제가 된 것은 닷 페이스에서 진행한 최현희 교사의 인터뷰에서 부터였다. 최현희 교사는 인터뷰에서 운동장이 남자 아이들의 전유물이 되는 것, 성차별적인 성적 사회화 과정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성차별적 동화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페미니즘 교육이 학생들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언급한다. 그리고 인터뷰 이후, 최 교사는 메갈 교사라고 낙인찍혀 온갖 인신공격과 SNS 사찰, ‘아동학대라는 고발 등으로 뭇매를 받고 휴직까지 하게 된다. 그가 재직 중인 학교에 메갈 교사를 처벌해달라’ ‘교사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라는 민원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교사를 지지하고 보호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교사가 필요하다는 해쉬태그 운동이 SNS에서 벌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페미니즘 교육이 여성운동 진영에서 주요 화두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올해 초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고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올라왔다. 유투브나 SNS를 통해서 배운 여성혐오적 어휘나 욕설을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으로부터의 문제의식에서, 학생과 선생님 모두를 대상으로 한 페미니즘 교육이도입 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청원은, 20만 명을 넘겨 청와대의 공식적인 답변까지 얻어낸다.

이렇게 페미니즘 교육이 교육계와 여성운동 진영에서 화두가 되어, 그 필요성은 여러모로 충분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주목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필요성을 넘어, 페미니즘 교육이 무엇인지, 페미니즘 교육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페미니즘 교육은 학교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검토하고 논의할 시점이다. 그를 통해서만 이 의제가 더 발전하여, 사회와 학교에서의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교육?

 

사실 이 글을 쓰는 본인은 페미니스트임에도, 본인에게 페미니즘 교육이라는 의제는 다소 어색하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본인이 대학생이라 학교 현장에서의 페미니즘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으나, 현재에는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페미니즘이 현재의 학교에서 교육될 수 있는가?

 첫 번째 문제의식은 가부장적이고 여성억압적인 사회의 일부이며 그 사회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학교가, 페미니즘 교육 실시를 강제 받는다고 해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비슷한 예를 들어 설명 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권을 학교에서 교육하게 되었을 때에도, 노동권은 정말로 노동자의 입장에서 교육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는 대폭 축소되고 보수적으로 해석되며, 노동자들이 투쟁하여 세상을 바꿔온 역사는 지워진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와 운동은 이기적인 주장으로 그려지며, 노동자들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사회를 비판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 기존 사회의 제도권 안으로 들어올 때, 저항과 변혁을 고민하는 주체들의 목소리는 지워지고, 그 개념의 급진성은 은폐된다. 또한 제도는 그 개념과 사상의 사회적·구조적 맥락을 지운다. 페미니즘과 이퀄리즘이 언어의 의미상에서는 다르지 않음에도 큰 차이인 것은, 이퀄리즘은 여성들이 기원전부터 구조적으로 억압받고 통제되며 굴복되었던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지우기 때문이다. 정부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양성평등’(이퀄리즘과 동의어인)은 등장하나, 여성주의가 등장하지 않는 것에서도 이것이 잘 드러난다. 이 사회 제도권의 대표격인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질 것이다.

쉽게 말하면, 페미니즘을 학교에서 교육한다면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힘든 현실에서 출발하여 사회를 진보시키려는 운동이다, 그러나 여성들만의 특수한 요구를 모두 들어주는 것은 어렵고 역차별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양성평등이 필요하다이상의 논의가 어려워질 것 같다는 것이다.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에 대한 청와대의 답변이 포괄적인 인권교육을 실시하겠다는 것임은 이것이 단순한 우려 이상임을 보여준다.

 

2) 페미니즘은 교육될 수 있는 것인가?

 두 번째 의문은 페미니즘을 가르친다고 해서 학생들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하나의 인식틀과 가치관이고, 그를 바탕으로 한 입장의 문제이다. 결국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은 여성 억압적인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느냐, 그를 거부하고 새로운 흐름을 만드느냐 사이의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성폭력을 예로 들어 설명해볼 수 있다. 기존 사회에서 성폭력은 피해자의 잘못이나 돌리거나 가해자 개인의 일탈적 행동으로 설명되었다. 반성폭력운동과 페미니즘은 이를 뒤집어, 성폭력을 피해자가 아닌, 성차별적인 문화와 사회 구조의 문제로 설명해 냈다. 이때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설명 가운데 후자가 더 정합적이며 실제로 옳다(right)는 선택을 내리는 것이고, 그로부터 변화하겠다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는 어떻게 세상을 설명할 것인지의 문제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 설명과 관점을 뒷받침하는 사회의 분위기, 실제 사회가 굴러가는 방식, 그로부터 개인이 수혜자가 되거나 경쟁에서 탈락하는 메커니즘 등이 존재한다. 여성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관점, 그를 채택하는 개인과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단순히 학교나 미디어에서 그를 가르치고 세뇌시키기 때문을 넘어 그 관점대로 굴러가는 사회구조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을 수업하는 것만으로 학생이 그 입장을 채택할 것이라는 것은, 교육에 대한 과도한 기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페미니즘 교육을 요구하는 목소리에는 과대평가된 교육의 가능성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는 페미니즘을 교육해야 한다는 입장은, 문제점들에 있어 인식 개선 캠페인’, ‘인식 교육이라는 해결책이 가장 흔히 제안되는 것과 닿아있다. 현실을 바꾸는 운동이나 제도나 구조 자체에 대한 변혁이 요청되는 때에, 현실과 구조의 반영물인 개인들의 인식과 태도를 바꾸고자 하는 것은 많은 경우 문제의 핵심을 우회하며 근본적인 해결은 놓치게 만든다.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많은 경우 고집이나 편견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현실에서 근거한 추론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친다고 학생들이 페미니즘을 인정하고 지지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와 그들의 현실에서 페미니즘적 변화가 있을 때 페미니즘에 설득되기 마련이다.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의 합리적 핵심

 앞에서의 논의는 결국 교육을 넘어서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이 학교에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페미니즘 교육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의 내용이 비어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어린 학생들이 문제의식 없이 여성 혐오적 비속어를 쓰는 것을 보고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며 청원 요지를 작성했다. 이 사회에서 서로를 혐오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대안적 설명과 교육으로써 페미니즘이 너무나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교육의 내용보다, 페미니즘의 필요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은 스쿨 미투와 고발 운동에도 꿈쩍하지 않는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학교에 대한 변화를 요청한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이는 반드시 국가와 학교에서 승인되는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필요도 없고, 애초에 그럴 수도 없다. 학교에서의 페미니즘적 변화는 반드시 가르쳐지는교육일 필요도 없고,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구조적 맥락이 사라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온건한 내용일 필요도 없다.

이것은 무조건 수업의 바깥에서만 페미니즘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이 교육이라는 강박이나 울타리에 갇히지 말자는 것이며 교육의 의미를 페미니즘을 통해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학교의 성별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생활지도에 저항하는 퍼포먼스, 도덕과 교과 시간에 조별 토론에서의 하나의 논점, 권위적인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도전 모두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페미니즘 교육은 이 사회에서 교육이 정말 객관적이고 합리적인지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무엇이 학교에서 가르쳐질 것으로 인정받는지를 분석하고 비판하며, 교육의 내용 자체에 대한 성찰과 토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혹은 기존의 교육이 배제하는 존재와 은폐하는 영역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더 많은 페미니즘적 실천을 해보자! - 실천과 방법론

 이미 현장에서 선생님들이, 또 청소년 활동가들이 열심히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을 알기에, 아래의 내용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닐 것이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문제의식들이 어떤 식으로 현장에서 실천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고 싶어 적어본다.

 

1) 수업을 활용하기

교사에게는 수업이 페미니즘을 고민하고 말하게 하는 가장 좋은 시간일 것이다. 수업은 많은 페미니스트 선생님들이 이미 많이 실천해온 영역이다.

계속 언급했듯이 페미니즘 교육의 제도화를 경계하는 것은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교과서 속으로의 박제와, 수업시간과 교실로의 한정을 우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업을 활용하는 것은 지식의 교수를 넘어, 페미니즘을 학생의 삶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생활교육이 될 필요가 있다. 수업에서 고민하고 토론된 것이 학생이 소속된 공동체와 학교 밖의 생활과 매개될 수 있어야 한다.

또 수업의 형식이나 내용과 더불어 주의할 지점은 페미니즘 수업 한 번으로 학생들의 삶이 바뀔 거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페미니즘 수업은 학생이 지금껏 경험해온 세계에 대한 다른 설명,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입장을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에 불과하다. 언급했듯 결국 페미니즘은 이 세계에서 어떤 입장을 선택할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성 억압적 사회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던 학생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과도한 기대는 비현실적이고, 교사 스스로를 지치게 만드는 일일 수 있다.

 

2) 교사와 학생의 공동의 실천

학교에서 페미니즘적 실천은 크고 작게 계속되고 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운동만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학교 안에서 페미니즘이 여전히 왜소하고 학교의 여러 압박으로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교사와 학생이 힘을 모았을 때 비로소 유의미한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고 모두가 주체가 되는 운동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페미니스트 교사가 필요하다는 해쉬태그 운동에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스트 동료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 그를 잘 보여준다. 운동진영 내부에서도 주체로 서기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구원해줄 선생님이 아니라, 운동을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갈 동료와 길잡이인 것이다. 학교 동아리와 같은 공동체를 통해서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3) 학교의 현실로부터 시작하기

언급했듯 페미니즘을 자신의 인식틀과 가치관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은, 페미니즘이 자신의 현실을 설명하고 바꾸는 것일 때 시작된다. 그렇기에 학교의 당면한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그를 바꿔낼 때, 학교의 구성원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학교의 당면한 현실은 성폭력과의 싸움이다. 미투를 통해서 고발이 계속되고, 사회적 관심과 지지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학교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대부분의 사건과 피해자들은 은폐되며, 관심이 집중되는 사건에 한정하여 처벌만이 이루어진다. 공동체 내부의 반성적 평가, 피해자의 회복과 복귀에는 관심이 없다. 이로부터 학교의 성폭력 해결 처리과정을 바꿔내어 처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사건을 통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지금 학교에 가장 필요한 페미니즘적 실천일 것이다.

 

4) 학교로부터, 원인인 사회와 구조를 향하는 운동

한편으로는 학교 안에 갇히지 않고, 사회를 향한 고민과 실천도 필요하다. 성차별과 불평등한 구조의 원인은 학교를 넘어 사회 전체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별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생활지도에 문제제기하는 것과 더불어, 성별고정관념이 단순히 편견이나 선입견이라는 입장을 넘어, 그를 지탱하는 구조, 혹은 그를 반영하는 사회문제 성별 임금격차나 가사노동의 문제 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교육이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재정립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것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성차별적 내용에 반대하며, 대안적 설명을 제안하고 논쟁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교육에 대한 객관성, 합리성을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 학교에서의 운동과 동시에 필요한 것이다. 이 작업이 성과가 있으려면 학교 현장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이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운동이 서로 힘을 주고받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가며

 글을 쓰는 내내 현장의 실제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낙인찍히고 해고되기 일쑤인 상황에서, 페미니즘을 교육하는 것을 넘어 운동의 새로운 틀을 고민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앞서나간 이야기라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페미니즘의 이라도 수업시간에 한 번 꺼낼 수 있는 게 다행이기 때문이다. 혹은 이미 현장에서 나름대로 고민하고 실천해온 것들이 있는데,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질책하는 것으로 여겨질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던 것은 교육과 페미니즘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때, 논의의 발전이 가능하고 학교에서의 운동이 전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이 글은 앞으로 학교에서 페미니즘적 실천을 하고 싶은 예비교사로서의 고민이기도 했다.

앞으로 페미니즘 교육과 학교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더 많은 논의와 고민이 있었으면 한다. 더 많은 주체들과의 토론과 성찰에서 시작하여, 학교와 세상에 더 많은 변화를 만들어 나가보자!

지금, 여기서 학교를 바꾸는 사람들

 

울트라 바이올렛, 말차라떼

 

1. 학생들이 이해하는 페미니즘

 

1.1. 교육현장에서 성차별 실태, 청소년의 여성 혐오 실태

 

 학교는 청소년들이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장소이다. 학교에서 선생님께 배우고 또래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학생들은 가치관을 형성해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학교는 학생들에게 절대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시점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학교현장에 성차별과 여성혐오가 만연하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성차별적 언행, 젠더폭력, 특정 성 혐오는 초고등학교 학교 급을 가리지 않고 심각한 수준이다. 특히 일상어가 되어버린 욕설과 성적 표현은 학교의 쉬는 시간만 되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그 중에서는 김치녀’, ‘꼴페미등의 여성 비하 표현, ‘니 애미등의 패드립(부모님을 욕하는 등의 패륜적 놀림말), ‘네 얼굴 실화냐’, ‘저게 여자애 허벅지냐등의 외모 비하 표현, ‘앙 기모띠’, ‘야마떼등의 일본어가 대표적이다. ‘기모띠(이이)’기분(좋아)’, ‘야마떼그만이라는 평범한 뜻을 가진 일본어이지만, 단어의 발원지가 일본 포르노라는 점 때문에 성적 맥락으로 통용된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또한 학생들 사이에서 미친놈은 친구끼리 정겨운 대상에게 쓰는 친근함의 표현, ‘미친년은 매우 싫어하는 상대에게 하는 경멸의 말로 통하는데, 이는 특정 성에 대한 혐오가 담긴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청소년들이 사용하는 언어표현에는 여성혐오와 성차별적 요소가 짙게 베여있다. 인터넷을 통해 BJ와 같은 어른들이 쓰는 여성혐오 표현과 성적 표현을 배운 학생들은 이러한 단어들의 의미를 알든 모르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습관처럼 사용한다. 그리고 학교는 이러한 인식이 확산되는 장소를 제공해주는 꼴이 되었다.

한편 여교사를 상대로 하는 젠더폭력도 심각한 수준이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여성위원회는 지난해 7월 유치원과 초··고등학교 교사 636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진행하였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유치원과 초··고등학교 교사 10명 가운데 6명가량은 학교에서 여성혐오표현을 듣거나 접해보았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여성혐오 표현을 한 사람(복수응답)으로는 남교사(194·48.5%)가 가장 많이 꼽혔으며, 남학생(18045.0%)은 그 뒤를 이었다. 그 내용으로는 외모나 몸매에 대한 품평을 직접 경험했거나 목격 또는 전해들은 경우, 음담패설과 성적욕설·농담을 직접 경험했거나 목격 또는 전해들은 경우, 회식 때 술을 따르거나 옆자리에 앉도록 강요받은 경우, 포옹·손잡기 등 신체접촉을 억지로 당한 경우 등이 있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학교에서의 성차별과 젠더폭력 피해 범위는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사에게까지 확대된다. 가해의 범위도 성인인 동료 교사뿐만 아니라 유치원, ··고등학교 학생들까지로 확대됨을 알 수 있다.

학교현장에서 청소년들의 여성혐오가 확산되고 성차별적 언행이 만연한 것에는 문화적 요인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청소년들의 스마트폰과 인터넷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학생들은 이전보다 더 쉽게 인터넷에서 정제되지 않은 부적절한 표현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학생들이 자주 접하는 유튜브나 아프리카TV 등의 인터넷 방송에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여성 혐오, 성적 표현, 욕설 등을 사용하곤 한다. 또한, 이러한 인터넷 상의 유해 콘텐츠는 감시나 통제가 어렵다는 문제점도 존재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점은 다름 아닌 학교에서 이러한 인식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 인식과 감수성이 정립될 청소년기에 은연 중 흡수하는 성차별 경험은 여성혐오로 자랄지 모를 씨앗이 될 수 있다. 학교에서의 성평등 교육 확대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1.2. 학생들 인터뷰

 

앞서 우리 청소년들이 성차별과 여성혐오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청소년들은 페미니즘(feminism)’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들을 가지고 있을까? 생생한 답변을 얻기 위해 고등학교 2학년생인 서울 동대문구에 사는 A군과 인천에 사는 B양을 인터뷰해보았다.

우선 학생들에게 페미니즘을 무엇으로 알고 있는지 물었다. A군은 양성평등을 이루기 위해 하는 운동이라고 답했다. B양도 양성평등을 지향하고 그를 위해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또한 이는 또래 친구들 사이에 통용되고 있는 인식이라는 점도 덧붙였다. 페미니즘을 접하게 된 계기로는 두 명 모두 공통적으로 인터넷을 꼽았다. 특히 A군은 인터넷으로 엠마 왓슨의 연설에 대한 뉴스를 보고 페미니즘에 대한 단어를 처음 알게 되었다고 한다. (A군이 언급한 엠마 왓슨의 연설은 현재 UN Goodwill 홍보대사로 활동 중인 엠마 왓슨이 UN 양성평등 캠페인 “HeForShe”에서 페미니즘에 대해 언급한 연설을 말한다.)

다음으로는 학교에서 직접 겪는, 혹은 목격하는 성차별에는 어떠한 것들이 있었는지 물었다. B양은 당연하게 여성 또는 남성에게 요구되는 사상들이 있다며, “여자는 혹은 남자는 이래야 한다.”로 시작하는 모든 문장들에서 성차별을 경험한다고 답했다. 또한 교사로부터 받는 성차별의 예시로 과도한 복장규제를 언급했다. 아직도 일부학교에서는 야하다는 이유로 교복 안에 입는 티셔츠 색깔에 관여하거나 머리 묶는 모양에까지 관여해 지적하곤 하는데, 이는 옛날의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반면에 A군은 학교에서 겪는 성차별은 딱히 없는 것 같다고 답했다. 앞서 살펴본 성차별적 언행이 만연한 학교 분위기와는 상반되는 답변이다.

다음으로, 각자 재학 중인 학교에 페미니즘 동아리나 페미니즘 관련 활동이 있는지 물었다. 두 학생 모두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또한, 그런 활동에 참여하고 싶은지 물은 질문에도 딱히 활동하고 싶지 않다는 의견은 공통적이었다. 그 이유로는 다른 일로도 충분히 바쁘다는 점과, 그런 활동을 하는 것 자체가 또래 사이에서 일반적이 않다는 점을 꼽았다.

마지막으로, 학교 안에서든 밖에서든 평소에 성차별이나 페미니즘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가 있는지 물었다. 여기서도 두 학생은 공통된 답변을 했다. 인터넷 뉴스나 유튜브 등에서 관련된 내용을 볼 때가 아니면 딱히 생각할 기회는 없는 것 같다는 의견이었다.

이 짧은 인터뷰를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학생들은 페미니즘을 성평등 운동으로 인식하고 있으나 학교에서 일어나는 성차별을 모두가 인식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과,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다루어 그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가 적음과 더불어, 학교에서 페미니즘 관련 활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학교에서의 페미니즘 교육 확대 필요성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덧붙여, 최근 양성평등이라는 단어 사용에 대하여, 젠더에는 남성, 여성의 두 가지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양성라는 표현 사용을 지양하고 성평등으로 부르자는 논의가 전개되고 있는데 두 학생 모두 이러한 논의는 접해보지 못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학교현장에서 성고정관념과 성평등에 대해 이야기해볼 기회를 보다 더 확대하고, 학교에서 페미니즘 이념에 관한 논의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때, 학생들은 비로소 자신이 겪고 있는, 또는 은연중에 가하고 있는 폭력을 마주해 인식하고 멈출 수 있을 것이다.

 

2. 청소년 페미니즘 운동

 

청소년들은 여성혐오에 노출되어 있으며 청소년 스스로도 여성혐오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을 앞에서 살펴보았다. 동시에 청소년들에게 페미니즘은 전혀 동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었거나 겪고 있는 성차별을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이 잘못되었고,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청소년들의 이러한 인식은 페미니즘 운동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여기서는 청소년 페미니즘 운동으로 스쿨미투운동과 교내 페미니즘 동아리 활동을 살펴볼 것이다.

 

2.1. 스쿨미투운동

 

미투운동의 확산과 더불어 학교현장에서는 학생들의 스쿨미투가 진행되고 있다. 스쿨미투란 초··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성폭력 고발 운동이다. 주로 SNS를 통해 이루어지며, 현재 재학생뿐만 아니라 졸업생, 교사들의 폭로도 계속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서울 관악구 소재 사립 중학교인 M 학교 교사들이 학생들을 상대로 성폭력을 가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2010, 34살 유부남이었던 생물 교사 A 씨는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피해자 이 씨에게 지속적으로 성폭력을 가했다. 자신의 차 조수석에 태워 몸을 더듬거나 자취방으로 불러 자신의 성기를 만지게 했고, 카톡으로 알몸 사진을 보내달라’, ‘어디까지 허락해 줄 거냐라는 식의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졸업생들에 따르면 그는 학생들에게 처녀는 흰색 속옷을 입어야 첫날밤이 황홀하다거나 생물 수업 중 생리 중 관계를 맺으면 임신을 하지 않으니 해도 된다등의 성희롱 발언을 한 것으로 밝혀졌다. A 씨는 체벌로도 악명이 높았다. M 중학교로 오게 된 이유도 전에 재직 중이던 고등학교에서 학생을 폭행해 머리가 찢어져 전근한 것이었다.

이후 이 씨는 20183A 교사에게 당시 자신이 성추행을 당한 것에 대해 공개사과와 자수를 요구했다. A 교사가 자수하지 않자 이 씨는 본인 사진과 함께 실명으로 페이스북에 해당 사실을 폭로했다.

A 교사는 사직서를 제출했고 현재 출근정지 조치가 내려진 상태다. A 교사에 대한 고발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트위터에는 ‘M 중학교 성폭행 공론화라는 계정이 생겨 추가 피해자들의 진술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다. 더불어 언론 보도가 이어지자 교육청은 312M 중학교에 대해 성폭력 피해 전수조사에 나섰고, 가해 교사의 직위해제를 요청했다. 교사의 직위해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언제든지 다시 교편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A 교사는 사직서를 쓴 상태지만, M 중학교는 학교 홈페이지 한 구석에 사과문 한 장만 올려놓았을 뿐 A 교사의 직위해제는 힘들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피해자의 고소, 고발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에 대해 피해자는 고소장을 쓰기 위해서는 그 고통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아주 침착하게 써야 하는 상황인데 학교가 또 피해자 탓을 한다며 울분을 토했다.

지난해 4월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도 정교사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문제 제기를 했지만 아무런 처벌이 없었다. 검찰이 기소했지만 가해자는 아직 교편을 잡고 있는 건 물론이고 한 학급의 담임까지 맡고 있다.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진 아무런 조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이 학교 측의 입장이다.

서울시 노원구 소재의 Y 고등학교 졸업생들은 재학시절 남교사들로부터 상습적으로 성희롱과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이를 알게 된 재학생들은 쉬는 시간에 포스트잇을 이어 ‘#ME TOO’ ‘#WITH YOU’, ‘We can do anything’ 등의 문구를 만들어 학교 창문에 붙여 화제가 됐다. 재학생들은 교내 곳곳에 어린 여자아이들은 영원히 어리지 않다. 강력한 여성으로 변해 당신의 세계를 박살내러 돌아온다’, ‘해방 00’, ‘NEVER FORGET’ 등 교사의 성폭력 행위에 대한 분노와 이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바라는 글을 포스트잇에 써 붙였다. 재학생들의 이 같은 행동에 학교 측은 교내 방송을 통해 포스트잇을 떼라고 지시하는 등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일부 교사는 학생들에게 밥 같이 먹는 한 가족끼리 왜 그러냐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학생들은 SNS를 통해 지금껏 교사들의 성추행에 대해 학생과 학부모가 항의하고 신고해도 학교 측이 은폐하고 모른 척 해왔다면서 학교 측은 어떻게든 덮으려고만 하고, 피해를 본 학생들은 대학 입시에 지장이 갈까봐 결국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올해 3월 서울시 양천구 소재 J 고등학교에서 근무했던 기간제 교사는 남교사의 성추행을 고발하는 글을 올렸고, 이 글이 알려지자 문제의 K 교사로부터 비슷한 피해를 입었다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자체 파악한 재학생 피해자만 50여명에 이르렀다. 8년 전에도 교사와 학생들이 K 교사에게 비슷한 일을 당해 교육청에 민원을 제기했지만 징계는 없었다. 현재 학교 측은 해당 교사를 수업에서 배제했고 서울시 교육청은 해당 학교에 대한 특별감사에 착수했다. 8년 전에는 묵인됐던 일이 학생들의 고발이 잇달아 나오고 공론화가 되자 이제야 조치가 취해지기 시작했다.

S 고등학교에서도 교감 및 교사들이 학생들을 성희롱하고 성차별 발언을 했다는 미투 폭로가 나왔다. 2018324SNS에 고발이 잇따라 올라왔고 재학생뿐만 아니라 졸업생들도 미투운동에 가세해 학교와 교육청이 진상조사에 나섰고 경찰도 수사에 착수했다.

페이스북에는 스쿨미투라는 페이지가 개설되어 여러 학생과 교사들의 고발의 장을 형성하고 있다. 올해 2월에 개설되었지만 벌써 3000명이 넘는 팔로워가 생겼고 90여개의 글들이 게시되었다. 교육부 성폭력신고센터에는 접수되지 않았던 사건들이 물밀듯이 폭로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글들이 익명의 소리이다.

스쿨미투는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지만 학교의 상황은 쉽게 변화하지 않고 있다. 가해 교사에 대한 처벌, 피해자에 대한 사과 등의 신속한 대응과 교사 대상 성교육, 성폭력 예방책 등의 대책 마련을 확실하게 하는 학교는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남성과 여성의 불균형한 권력 관계뿐만 아니라 교사와 학생이라는 위계질서가 분명한 상황에서 애초에 학생과 교사는 평등하지 못하다. 때문에 학생들은 피해를 입고도 신고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교육부 홈페이지 성폭력신고센터에 접수된 건수는 20152, 지난해에는 단 7건에 불과하다. 많은 교사들은 애초에 학생들을 자신과 동등하게 보지 않는다. 때문에 학생들을 폭언을 해도 되는 대상으로 보고, 성폭력을 가하고, 이에 대해 학생들이 문제제기를 해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다. 학생들도 무의식중에 그것을 알고 있었다. 교사의 문제 행동에 대해 대자보를 쓰거나 공론화 시키는 것이 싫어서가 아니라 두려워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주춤할 수밖에 없다.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매우 수직적이다. 학생들은 교사에게 평가를 받아야 하며, 교사는 학생들의 대학 입시와 진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교사에게 잘 보여야 한다. 교사에게 잘못보이면 수행평가 점수를 잘 못 받는다거나, 추천서를 써주지 않는다거나, 생활기록부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므로 학생들은 항상 신경 써야 하는 위치에 있다. 이렇게 교사와 학생간의 관계가 뚜렷하기에 교사에 의한 성폭력은 더욱 일어나기 쉽고, 학생들은 교사에게 문제제기하거나 대항하는데 망설임을 느끼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Y 고등학교의 교사들의 학생들의 미투 운동을 방해하고 방임하는 행동들이 학생들로 하여금 위축되게 만들 듯이 말이다.

따라서 학생들에게는 스쿨미투가 필요하다. 교사 성폭력 문제를 학생 개인에게 떠맡길 수는 없다. 피해 학생들을 혼자 고립되게 놔두어서는 안 되며 다수가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 Y 고등학교 재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여태까지 계속되어온 잘못을 해결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앞으로 이 학교를 다닐, 계속 다닐 친구들과 후배들을 위해 미투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학생들의 스쿨미투 운동은 억압된 상황에서 잊혀진 피해자를 다시금 기억하게 만들고, 교사와 학생 간의 권력관계에 균열을 내고 있다. 많은 학생들의 목소리와 관심과 연대가 학교 성폭력 사건을 주목하게 하고 가해자를 처벌할 가능성을 만든다.

학생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학교는 더 이상 안전하지 못하다. 안전하지 못한 학교이기 때문에 스쿨미투는 계속해서 확산되어야 하고 사람들은 교사와 학생 간의 성폭력은 일부 교사들의 문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나아가 교사와 학생간의 동등하지 못한 관계를 동등하게 만들고, 위계적인 학교의 구조와 문화를 개선하고, 학생 인권을 되찾아 학교 성폭력 문제를 해결할 제대로 된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2.2 청소년 페미니즘 동아리

 

청소년들은 또한 자율적으로 페미니즘 동아리를 만들어서 활동을 하고 있다. 평택여자고등학교의 ‘MeForYou’, 충주예성여자중학교의 외침’, 고양외국어고등학교의 다움등이 그것이다.


<MeForYou> 평택여고의 페미니즘 자율동아리인 “MeForYou”는 다양한 사회문제에 관심과 함께 실천적 활동을 목표로 한다. 여성주의를 바탕으로 사회를 바라보고 행동한다는 구호를 외치고, 페미니즘 활동뿐만 아니라 청소년 인권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MeForYou’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라는 전국의 청소년·인권·교육·시민단체들이 함께하는 연대체에 함께하여 청소년 참정권 보장, 아동청소년인권법 제정, 학생인권법 제정을 위해 힘쓰고 있다.

작년 11월에는 평택 청소년 연합축제 청룡제에서 촛불청소년인권법 캠페인 활동을 진행했다. 또한 국회톡톡에 학생 인권법을 제안했는데 그 내용은 이러하다. “1. 학생들의 개성을 표현할 자유,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 성적지향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을 권리 등을 보장해주세요. 2. 사립학교 내 인권침해가 발생했을 때 신고자를 보호하고 신속히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해주세요.” 이외에도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페미니즘 에코백과 엽서텀블벅 프로젝트와 세월호 뱃지 프로젝트, SNS를 통한 성차별, 페미니즘 이슈 공유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외침> 충주예성여자중학교 페미니즘 동아리 외침은 작년 새 학기가 시작되면서 만들어진 동아리이다.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은 부원들과 지도교사 Y 선생님으로 이루어져있다. 여성인권에 대한 포스터 그리기, 여성혐오 단어 목록 만들기 등의 활동을 통해 여성과 남성이 함께 살기 좋은 사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함께 고민한다. ‘외침이라는 동아리 이름은 여성을 포함한 다양한 소수자, 약자들의 외침을 듣고, 같이 외쳐주겠다는 의미이다. 부원들 모두가 감명 깊게 보았던 비정규직 노동 문제를 다룬 영화 <카트>OST ‘외침의 영향도 있다.

중학생들이 학교에서 진행할 페미니즘 활동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외침이 개설된 후 초반에는 할 활동이 없어서 헤매기도 했다. 그러던 중 부원들끼리라도 실천할 작은 운동을 떠올리다가 자신들의 학교 이름인 예성여자중학교예성중학교로 부르자는 의견이 나왔다. 학교 이름에는 보통 여학교에만 여자라는 말이 붙는다. 부원들 사이에서는 왜 여학생들만 성별을 표시해야 하는 걸까?’, ‘왜 남자학교라는 이름의 학교는 없을까?’, ‘모두가 같은 학생인데 성별이 중요할까?’, ‘성별에 관계없이 학교 이름을 지을 수는 없을까?’, ‘여학생은 평범한 학생이 아니기에 따로 분류해야 하는 걸까?’라는 질문들이 오갔다. ‘외침의 부원들은 자신들부터 학교 이름을 예성중학교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소수의 작은 노력이 학교 전체에 변화를 가져다주기를 외침의 부원들은 바라고 있다.

외침은 또한 방학 때마다 나눠주는 책 추천 유인물에 페미니즘 도서를 추가하고, ‘외침전용 SNS 계정을 만들어 부원들과 페미니즘 도서를 읽고 토론한 결과나 교내에 부착할 포스터들을 게시할 예정이라고 한다.

외침의 부장인 충주예성중학교 3학년 이다은 학생은 청소년이 직접 만드는 건강한 언론, 월간 밥매거진에서 진행한 자문자답 인터뷰를 했는데, 그에 의하면 이다은 학생이 동아리를 만들면서 제일 걱정했던 부분은 여학생들만 있는 학교에서 남자 선생님들의 반응이었다. 성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을 여성우월주의, 남성이 싫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남자 선생님들이 외침부원들을 싫어하거나 활동하는 모습을 좋지 않게 볼까봐 걱정이 많았지만 다행히 그런 시선들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페미니즘을 배우면서 생긴 변화로는 주변 환경에 더 예민해졌다고 말한다. 다들 웃고 넘어가는 성차별적인 유머에 함께 웃지 못하고, 남동생과 다른 대우를 받을 때마다 부당함을 표시하게 되었다. 남들이 그를 바라볼 때 피곤하게 산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자신은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던 예전보다 지금이 더 낫다고 말한다. 성별을 떠나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받길 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치며 이다은 학생은 외침이 모두에게 하고픈 말을 전했다. “아직도 사람들이 모르는 일상 속 여성 혐오들은 수없이 많다. ‘여성스럽지 않다’, ‘여자애가 그러고도 부끄럽지도 않냐’, ‘네가 옷을 잘못 입어서 성폭력을 당한 것 아니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등의 흔히 쓰고 듣는 이 말들이 성차별적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이런 말의 사용을 줄이고, 가치관과 생각에 변화를 가져와야한다. 한마디의 변화가 특정 단체와 집단에 언젠가 큰 파급력을 줄 것이라 우리는 믿는다. 그 전 시간들이 그랬듯이 쉽게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동아리 이름답게 우리는 꾸준히 외칠 것이다.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 페미니스트란 단어가 필요하지 않을 그 날까지.”


<다움> 마지막으로 소개할 고양외고 동아리 다움에 대해서는 청소년 신문 요즘것들에서 진행한 인터뷰를 참고하였다. ‘나다운 너다운 페미니즘을 하고 싶다는 고양외고 페미니즘 동아리 다움은 현재는 졸업한 3학년 학생이 페미니즘 관련 주제로 강연을 한 것에 감명을 받은 현 부장에 의해 20168월에 개설되었다. ‘다움은 청소년인 페미니스트는 혼자서 목소리 내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학교에 흩어져있는 학생들의 목소리를 모아 연대하여 페미니즘을 하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또한 교내의 다른 친구들에게 페미니즘을 알리기 위해서, 페미니즘 인식 개선을 위해서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활동으로는 각자 페미니즘 도서를 읽고 의견 나누기, 페이스북에 카드뉴스를 만들어 올려서 동아리 홍보하기, ‘초심자를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주제의 강연회와 부스 활동 등이 있었다.

페미니즘 동아리 활동에 대한 주변 학생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아예 아무것도 모르던 친구가 다움이 활동하는 것을 보고 페미니즘에 관심을 가져 같이 스태프로 활동하기도 하고, 다른 학우들이 감명을 받았다며 말해주기도 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반감을 가진 부류 역시 있었다. 예를 들어 포스터를 붙이고 있으면 근처에서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면서 웃고, “페미니스트들 예민하지 않나하고 들리게끔 말하고 지나가기도 한다. 그래도 긍정적인 반응을 해주는 분들이 더 많아서 대부분 좋은 반응을 얻는다고 한다.

다움이 학교 동아리이기 때문에 좋은 점으로는 학교라는 장소의 특성상 학생들과 만나기가 쉽다는 점을 들었다. 감독하는 교사들의 눈을 피해서 점심시간이나 야간 자율시간에 짬을 내서 만날 수 있고, 친구들 간의 친분으로 페미니즘을 몰랐던 친구에게도 홍보가 용이하다고 한다. 반면에 학교 동아리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이나 제약 또한 존재한다. ‘다움동아리는 학교 소속이다 보니 학교의 규정과 틀에 얽매여있을 때가 많았다. 동아리 모임을 가지려고 할 때 학교 행사에 따라서 날짜가 불확실하게 바뀔 때가 있다. 또한 남학생들의 단톡방에서 다움에 대한 험담이 오고 간 적이 있었고 그로 인해 안 좋은 소문이 난 적이 있었는데 그런 부정적인 소문은 교내에서 매우 빨리 퍼지기 때문에 곤란함을 겪었다.

다움의 부원인 이서은 학생은 청소년 페미니스트로서 겪은 어려움에 대해 토로했다. ‘어린 네가 뭘 안다고 그런 걸 해?’, ‘너희는 아직 학생이니까 페미니즘을 하더라도 이런 건 건드리면 안 돼와 같은 직접적인 말이나 그런 뉘앙스가 담긴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동아리 활동을 하는 데 있어서 교사들이 가끔 어떤 주제에 대해서는 다루지 말라고 한 적도 있었지만 청소년(학생)의 입장에서 교사의 그런 발언에 대해 대응하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입시나 진학문제에 있어서 교사의 영향력이 크므로 학생들은 교사들에게 잘 보여야 하는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학생들은 어른들이 자기 입맛대로 재단하는 것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안 그래도 어린취급을 받는 청소년의 위치에 있는데, 남성과 여성의 이분법적 구조에서 주목받지 못하는여성의 위치에 있기까지 하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이건 안 된다’, ‘저건 위험하다는 식으로 제한 받는 것이 있다고 밝혔다.

청소년의 페미니즘 활동은 각자 저마다의 자리에서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페미니즘이 단지 특정 세대의 것만이 아니며, 청소년 역시 페미니즘 담론을 형성하고, 자신들만의 페미니즘 운동을 이끌어내는 주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청소년이 무지하고, 미숙하고, 비성숙한 존재로서 간주되는 것은 굉장히 단편적인 시각이며 단지 그렇게 믿고 싶어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오히려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청소년들은 멋모르는 어린아이들이 아닌, 연대의 대상, 함께해야 할 존재이다.

 

3. 교사들의 페미니즘 운동

 

앞서 살펴본 것은 스쿨미투운동과 페미니즘 동아리 활동을 통해 페미니즘 운동을 전개하고 있는 학생들의 모습이었다. 이번에는 학교의 또 다른 주체인 교사들의 입장에서 페미니즘 운동을 살펴보려고 한다. 교사들의 페미니즘 운동은 어떤 모습일까? 여기서는 초등성평등연구회의 활동과 실제 고등학교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페미니즘 교육을 실시하고 계시는 최승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한다.

 

3.1. 초등성평등연구회

 

교사들의 어떤 집단적인 페미니즘 운동은 아직 그다지 세력이 넓지 않다. 따라서 초등성평등연구회는 이 분야의 좋은 선례라고 할 수 있다. 초등성평등연구회는 지난 20165월에 발생한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단체이다. 사건 직후 초등교사 커뮤니티에서 여성혐오 현상에 관한 논쟁이 활발해졌고, 초등학생들의 성역할에 대한 편견이 심각한 가운데 학교교육에서는 오히려 이를 확대재생산한다는 문제의식이 많은 공감을 받았다. 이에 서한솔 선생님 등 10여명의 초등교사는 그해 6초등성평등연구회를 결성하였고 현재까지 정기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초등성평등연구회에서는 성별 이분법과 성차별을 강화하는 학교의 다양한 관행과 제도를 비판한다. 연구회에서는 남학생은 출석번호 1, 여학생은 출석번호 51번부터 시작하는 학교의 관행이나, 줄을 설 때 남녀가 한 줄로 각각 나누어 서는 관행, 학교에서 준비물이나 기념품을 제공할 때 남학생은 파란색, 여학생은 분홍색 물품을 주는 경우 등에서 학교에서 발생하는 성차별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학생 등굣길 안전을 위한 봉사활동이 녹색어머니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보호자 연락이 필요할 때 어머니에게만 연락하는 것도 마치 양육과 돌봄의 책임이 여성에게만 있다는 듯이 여기게 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현재 초등학교 교과서의 삽화에서는 국회의원, 기업가, 농부 등은 남성으로, 미용사, 계산원, 가정주부 등은 여성으로 묘사함으로써 성역할 고정관념을 강화하고 있고, 존경할만한 위인들 중 여성은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다는 문제점도 있다. 이외에도 정상가족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지문과 삽화는 셀 수 없이 많다고 한다.

초등성평등연구회 교사들이 바라본 학교의 현행 성평등 교육은 어떤 모습일까? 여기에서도 많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초등 4학년 2학기 사회 2단원 사회 변화와 우리 생활 단원에서 성평등을 다루고 있으나 양적, 질적으로 매우 미흡한 상황이다. 성차별의 구조적인 차원을 다루지 못하고 개인적인 차원에 한정하여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교사 양성 및 연수 과정에 성평등 교육이 전혀 없다는 것도 문제로 제시되었다. 교육대학교 교육과정에 성평등 교육, 여성학 관련 강의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회의 교사들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정기모임에서는 수업시간에 사용할 수 있는 교재를 개발하였다. 정해진 학습목표에 맞춰 보조 교재로 성인지적 관점을 담은 글 등의 활용방안을 고민하는 식이다. 예를 들어 보조 교재에는 그동안 다뤄지지 않았던 여러 여성 위인들이 등장한다. 이밖에도 교사들은 국어 과목의 주장하는 글쓰기시간에는 뽀롱 뽀롱 뽀로로등의 캐릭터 소개를 분석해 학생들이 어린이 프로그램의 성차별을 인식하도록 했다. 또 경제를 배운 고학년을 대상으로 고용 게임을 만들어 여성이 취업시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경험해보고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했고, ‘우리말 고운말단원에서는 학생들이 온라인 게임을 하며 많이 쓰는 여성 멸시적 욕설의 의미를 배우고 유튜브 영상 댓글에 달린 욕설들을 신고하는 활동을 진행하였다.



선생님들의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교실 분위기도 차차 바뀌고 있다. “여자가 이걸 어떻게 해요라며 한 발 물러서던 여학생들도 체육시간에 남학생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발야구 게임을 한다. ‘체육은 여학생이 당연히 남학생보다 못한다’, ‘여학생들은 체육시간에 앉아서 쉰다등 체육수업에 반영되는 성편견에 대해 공부해보고 계속 발야구 연습을 하다 보니 자신감이 생긴 결과이다. 남학생들은 여성 혐오적 욕설에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다. ‘여자는, 남자는, 자고로등의 성편견을 담은 언어 사용이 많이 줄어든 것은 물론, 유튜브 혐오 댓글 신고하기를 배운 한 학생은 ‘(온라인에서)욕을 하고 싶었지만 누가 신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참았다는 내용의 일기를 쓰기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초등성평등연구회의 연구활동은 초등학교 학생들의 사고와 행동을 개선하는 좋은 길잡이가 되고 있다.

 

3.2. 페미니스트 교사로 사는 것

 

교사들 중에는 아이들에게 페미니즘 교육, 젠더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분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강원도 강릉시 명륜고등학교에 재직 중이신 최승범 선생님이 있다. 최승범 선생님은 스스로를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있는 페미니스트 앨라이(지지자·협력자)라고 표현한다. 최 선생님에게는 고등학생 때 마초 문화에 젖어 경쟁적으로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비하했던 전력이 있었다. 20대에 소속 학과에서 성추행 사건이 일어나 교수가 파면당하고, 여성주의 학회에서 열렬히 활동하는 남자 후배를 만나고, 중학생 때부터 페미니즘 영화평론가의 팬이었던 후배와 친해지는 경험을 통해 페미니즘을 알게 되었고 지난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할 수 있었다. 최 선생님은 자신처럼 특수한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도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과 자신이 좀 더 어렸을 때 이런 얘기를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여러 차례 했다. 교사가 되고,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작년부터 남학생들의 젠더 감수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 선생님은 학급문고 한 칸을 페미니즘 책으로 채웠다. 이기적 섹스(은하선), 10대의 섹스, 유쾌한 섹슈얼리티(변혜정 엮음, 유쾌한섹슈얼리티인권센터), 연애와 사랑에 대한 십대들의 이야기(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우리가 성에 관해 알고 싶은 것(김성애), 악어 프로젝트(맹슬기 옮김, 권김현영·이렌 자이링거·-샤를로트 위송·길거리 성폭력 중단 단체·로랑 플륌 해제) 등의 책들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책들이다. 특히 마지막 책은 일상생활에서 여성들이 겪는 성희롱, 성폭력과 그에 따른 불쾌감, 공포감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다. 또한 <여성신문>을 교실에 비치하고 있다. 최 선생님은 여성신문을 읽고 학생들 사이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 이유와 해결책에 대해 유의미한 대화가 오가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한 학기에 한두 시간 정도는 교과서에서 소재를 찾아 성평등 수업을 진행하신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허 생원의 과거 회상 장면을 성폭력으로 볼 수 있는지, <춘향전>의 변사또를 어떤 죄목으로 처벌할 수 있을지 토론하는 수업을 가지기도 했고, <사씨남정기>에서 가부장제가 사 씨와 교 씨의 삶에 미친 영향을 적어보는 글쓰기수업을 했다. ‘독서와 문법에서는 여성, 청소년, 노인, 이주노동자 등 소수자를 혐오하는 표현을 찾는 수업 계획이 있다고 하셨다.

최 선생님은 체육대회, 소풍, 현장체험 학습 등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마다 페미니즘 티셔츠를 입고 다니신다. 낯선 사람이 많은 공간에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꼈고, 페미니즘을 말하는 것이 터부시 될수록 공공연한 발화가 어려울수록 비가시화된 존재들의 가시화는 요원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최 선생님이 이런 것들을 시도한다고 해서 학생들의 생각이 금방 바뀌지는 않는다. 유의미한 변화 가능성이 보이는 것은 한 반에 많아야 두세 명 정도다. 유튜브를 비롯한 수많은 매체와 온라인 남초 커뮤니티가 학생들의 의식을 점령했고 많은 아이들은 선생님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 선생님은 학생들과 각을 세워 논쟁을 하려하거나, 그건 잘못된 생각이라며 훈계를 하거나, 권위를 발휘해 특정 입장을 비호하거나 비판한다면 강한 거부감이 형성될 것이라고 말한다. 최 선생님에 의하면, 학생들이 성차별적인 주장이나 견해를 접했을 때 한 번 멈칫할 수 있을 정도, 즉 다른 시각을 제시하고 기존의 생각에 작은 균열을 내는 것까지가 교사의 몫인 것이다.

눈에 띄는 변화를 보이는 학생들도 있었다. 페미니즘 도서를 읽고 독서 감상문을 올린 학생이 10명 넘게 있었는데, 책을 읽은 후 자신들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내용이 꽤 많았다고 한다. 또한 처음 페미니즘 교육을 했을 때 이게 뭐야하는 분위기와 달리 다섯 달이 지나고 페미니즘 관련 글을 보여주었더니 다들 재미있게 읽으면서 남자들 욕도 하는 등의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최 선생님 교육 방식에 대해 반발도 존재한다. 어떤 학생은 최 선생님에 대해 교원평가에서 여자편 많이 들어 기분 나쁨이라고 기재했다. 또한 동료 교사들은 그를 되바라지고 제멋대로이며, 말 안 통하는사람으로 보기도 한다. 최 선생님에 대해 강원도교육청·강릉교육지원청에는 지위를 남용해 학생들에게 편향된 사상을 강요한다는 민원이 여러 차례 들어왔다. 최 선생님은 작년 강원도교육청에 제출한 소명서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저와 함께 공부하는 남학생들이 자신이 경험하기 어려운 삶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해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안목이 넓어지기를 원합니다. 여성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먼저 살다 간 조상들, 다른 인종·장애인·성소수자·비인간 동물의 삶 또한 열린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관용과 다양성을 갖춘 너그럽고 자애로운 성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수업에 페미니즘 이슈를 종종 녹여내는 이유는 단지 이것뿐입니다.”

최 선생님은 세상이 바뀌려면 더 많이 가진 쪽이 더 불편해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을 빌리면, 성별 권력 구도에서 여전히 기득권을 가진 쪽은 남성이다. 불편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금 쥐고 있는 것들을 좀 더 내려놓아야 한다. 10대는 성인에 비해 공감 능력이 탁월하고 편견이 적으며, 정의감이 강하다. 변화 가능성이 큰 만큼 개선의 여지가 많다. 교사가 새로운 시각, 다른 목소리를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학생 스스로 깨쳐 길을 터나가는 경우가 많다. 최 선생님은 자신과 함께 공부하는 남학생들이 깨어 있는 남성, 따뜻하고 성숙한 성인으로 성장하기를 원한다. 적어도 어디 가서 꼰대개저씨소리는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최 선생님이 메갈쌤으로 불려도 아이들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참고>

박상준 기자, 초등교실에서 싹트는 여성혐오, 한국일보, 2017722일자.

이재영 기자, 선생님, 김치녀세요?” 교사 60% '여성혐오 표현' 경험, 연합뉴스, 2017710일자.

평택여고의 페미니즘 자율동아리인 “MeForYou” 페이스북 페이지.

충주예성여자중학교 3학년 이다은 수습기자, <이달의 동아리> 충주예성여자중학교 페미니즘 동아리 외침, 청소년이 직접 만드는 건강한 언론, 월간 밥매거진, 2017710일자.

고양외고 페미니즘 동아리 다움인터뷰, 청소년신문 요즘것들, 2017427일자.

초등성평등연구회 블로그 자료실.

박소영 기자, 성평등 교육하니 자신감 늘고, 여혐 발언 줄었어요, 한국일보, 2017329일자.

최미랑·심윤지 기자, 애들이 괜찮은 남성으로 자라줬으면”···페미니즘 가르치는 남자 교사 최승범씨, 경향신문, 2017710일자.

'메갈쌤'을 자처하는 이유 [격월간 민들레] 남학교에서 펼치는 남교사의 젠더 교육, 프레시안, 20171118일자.

박현정 기자, 페미 싫은 남학생님들, 밤길 무서워 봤나요?”, 한겨레, 20185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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