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참정권, 외않됀데?
딸기맥주
청소년 참정권, 보다 구체적으로는 만18세 선거 연령 하향 조정에 대한 뉴스에는 늘 ‘댓망진창’이 벌어진다. 이 글에서는 실제 뉴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편집해서 이를 반박하는 형식으로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의견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Q1.
dfjd***
ㄴ“애들은 아직 어려서 논리고 뭐고 없는데, 사고도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애들한테 어떻게 한 나라의 정치를 맡기냐? 하여간 이 나라 미래가 어떻게 되려고 ㅉㅉ”
A1.
edujournal
ㄴ 세 가지를 ‘논리적’으로 반박해보고자 한다. 첫째, “나이가 어리다 = 논리 체계가 없다”고 말하는 당신의 논리 체계가 빈약하다. 청소년은 당신의 주장을 비판할 수 있을 만큼 사고력을 지니고 있고 자신의 논리 체계 하에서 판단하고 행동한다. 둘째, 놀랍게도 논리 체계와 사고라는 것은 나이가 든다고 알아서 발달되는 것이 아니며, 논리 체계가 ‘완성된’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논리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는 지능과 능력을 충족해야만 권리를 주는 시스템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삶을 위해 구성해나가는 것이다. 다양한 환경에 놓여있는, 다양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나은 삶을 위해 분투해가는 과정이 민주주의 정치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에서 ‘차별 금지’라는 것이 원칙으로서 도출되고 합의되어 온 것이다. 만약 IQ가 150이 넘는 사람만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고 하면, 그것을 아무도 ‘민주주의’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 미래가 어떻게 되려고 그러냐”고 물으신다면 “민주주의에 더 가까워지겠죠.”라고 대답할 밖에.
Q2.
kdg5****
ㄴ 본인 판단 없이 타인 영향으로 투표할 듯? 부모가 하라는 대로 찍던가 선생님이 말하는 거 따라가겠지. 내 맘대로 인물 보고 관상보고 찍겠지. ㅋ
A2.
edujournal
ㄴ 자 먼저 청소년이 모두 관상을 볼 줄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부터 밝혀둔다. 청소년들이 타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근거로 청소년 참정권을 반대하고 있는데, 인간의 정치적 입장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인간의 삶은 정치의 연속이고, 정치는 곧 상호 설득과 투쟁의 과정이다. 그렇기에 개인은 언제나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한편, 자신도 설득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따라서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의 판단이 확고한 사람이라기 보단 고집이 센 사람일 확률이 높다.
물론 청소년에게 있어서 부모와 교사는 많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결국 결정은 청소년 개개인의 몫이다. 선생님이나 부모의 말이 설득력이 있으면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의견을 구성해가는 참고사항으로 삼을 것이다. 청소년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판단 기준에 따라서 자신들이 옳다고 판단하는 방향,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는 정책에 투표할 것이다.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차피 “남편 따라서 투표한다, 감정적으로 판단한다.” 등의 말들. 언제나 박탈당한 이들이 권리를 찾으려 할 때, 이미 권리를 가진 자들은 그들을 평가절하하고, 절대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지 않지만 그것은 대체로 사실과 거리가 멀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교사, 부모 – 청소년 사이에 권력관계가 작동하기도 하며, 이 사회에서 청소년이 ‘순응’하며 살아오도록 통제 당해왔기 때문에 학교와 가정에서의 변화 역시 필요하다. 자식이라는, 제자라는 이유로 청소년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정견을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이 변화는 청소년이 동등한 시민으로서 참정권을 지니게 될 때 더 의식적으로 촉진될 것임은 명백하다.
Q3.
holo****
ㄴ 야 청소년에게 선거권을 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 거 같냐? 막 시험 없애자고 하는 거 아님? 교육내용을 지들 맘대로 하자고 하면 어떡함?
A3.
edujournal
ㄴ 시험 없어진다니 개꿀. 교육감 등의 선거에서 청소년 참정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청소년은 교육의 소비자도, ‘피교육자’도 아니다. 교육과정의 가장 중요한 참여자로서, 자신의 일상에 해당하는 교육 제도, 교육 내용 등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은 그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단언컨대, ‘교육전문가’들의 진단과 대안보다 청소년들의 시각과 목소리가 훨씬 정확할 것이다. 교육을 향유하고 교육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존재로서, 그들은 누구보다 현재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고 누구보다 변화의 방향을 잘 제시할 수 있다.
“시험을 없애자고 하지 않을까?”라는 우려들이 있는데, 왜 이러한 논의를 꺼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현재의 교육체제만이 정답이라는 시각 또한 편협한 비청소년의 생각일지 모른다. 더 나은 교육현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청소년들이 모든 것에 대해 열어놓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이 열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참정권의 핵심이다. 참정권은 단지 투표할 권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2등시민이라는 취급, ‘어리고 모자라며 완성되지 못한 존재’로서의 낙인을 뛰어넘어 말하고, 토론하고, 요구할 권리를 포함한다. 청소년은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12년을 복무해야 하는 죄수가 아니라 감옥을 부수고 배움터를 세워내는 능동적 존재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청소년의 목소리를 ‘헛소리’ 취급하지 않고 청소년을 그들 삶의 현장에서의 전문가로서 인정하는 일이다.
Q4.
illu****
ㄴ 청소년한테 참정권 주면 지들이 어른하고 똑같은 줄 알고 기어오를 걸? 난 그 꼴은 못 본다~ 청소년 인권이다 뭐다 하면서 체벌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어이없는데 투표권까지 줘봐. 학교도 가정도 난리난다~~
A4.
edujournal
ㄴ “청소년은 맞아야 안 기어오른다”고 말하는 당신은 “노예는 때려야 주인한테 안 대든다”, “여자는 삼일에 한 번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말에도 동의할 것이라는 건 잘 알겠다. 바로 당신같은 인간들로부터 사람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 그리고 당신같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청소년 참정권이 필요한 것이다.
청소년 참정권을 외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구호가 있다. “청소년 참정권은 인권이다.”, “청소년 참정권은 생존권이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청소년들은 이 구호를 외치며, 지속적으로 체벌, ‘용모’단속, 언어적 폭력, 어른들의 ‘갑질’, 청소년 노동 임금체불 등으로 인해 억압받아왔던 자신들의 경험을 드러내왔다. 인간이 억압된 상황에 지속해서 놓여있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발화할 권리이며, 그 발화가 공동체에 균열을 내고 공동체의 질서를 바꿀 권리이다. 그것이 바로 참정권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기본적인 권리마저 부정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소년들은 “인간으로 살기 위해” 우리에게도 참정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삭발을 하고, 천막 농성을 하고, 시위를 하다가 끌려가면서, 그들은 외친다. 폭력을 감내하지 않아도 되는, 외모가 ‘학생답지’ 않아도 되는, 당당하게 노동하는, 평등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고.
Q5.
dofo****
ㄴ 선거연령 18세는 좀 그렇다 고등학생 신분에 정치참여는 찬성할 수 없다. 눈 앞에 대학 입시가 안보이는가?
A5.
edujournal
ㄴ 당신 눈 앞의 청소년들은 입시 공부 기계인가? 청소년들은 기계도, A-B-C 등급이 매겨져야 하는 고깃덩어리도 아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이다. 입시가 코 앞인데 무슨 정치냐고 말하는 것은, 너를 인간으로서 취급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또한 입시제도로 인해, 성적을 비관하며 자살하는 청소년들이 매년 증가하는 이 곳에서 “너희는 공부만 해야 하니 귀 막고 입 닫고 있어.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청소년의 삶을 절망과 죽음으로 계속해서 내모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죽고 싶지 않아서, 살고 싶어서 정치 참여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Q6.
uihh****
ㄴ 어느정도는 동의해. 근데 우리나라 교육이 주입식인 건 사실이잖아. 그런 주입식 교육에 12년 동안 익숙해져 온 청소년들이 어떻게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겠어?
A6.
edujournal
ㄴ 주입식 교육에 대한 비판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논리라면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주입식 교육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청소년과 비청소년이 모두 주입식 교육을 당해왔다는 것, 이로 인해 주체적인 판단이 방해받아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 순응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판을 깨뜨리고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도 진실이다. 6월 혁명의 주체였던 청소년을, 그리고 작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던 청소년들을 생각해보면 명료하다.
ㄴ ‘어른들’은 청소년과 자신을 매우 엄격하게 구분하는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별로 다르지 않다. ‘어른들’은 청소년만큼이나 잘 속고, 거짓과 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루머와 가십을 사실이라고 믿기도 한다. 나이 몇 살 더 먹었다고 해서 청소년에 비해 자신들이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라고 주장할 수 있는 하등의 근거가 없다. 청소년들은 말한다. “우리도 생각이 있고 우리도 판단력이 있다”고.
그리고 우리는 더 많이 서로를 ‘선동’하고 또 ‘선동’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정치의 핵심이다. 선동 당할테니 정치참여권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정치에 대한 무지일 뿐이다.
Q7.
giga****
ㄴ 아니 의무를 지켜야 권리를 주지? 군대도 안 가고 세금도 안내면서 하라는 것만 많아. 하라는 공부나 해라 지 밥벌이도 못하는 것들이.
A7.
edujournal
ㄴ 사실부터 정정하자면 만 18세는 납세의 의무도 진다. “사회시간에 공부 제대로 안 하셨군요.” 그리고 가장 왜곡되어 있는 개념이 의무를 지켜야 권리가 성립한다는 것인데 권리는 조건부가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 권리이다.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행복추구권’을 떠올려보면, 어떤 의무를 지켜야만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국방의 의무를, 납세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권리가 제한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Q8.
goun****
ㄴ 아니 근데 열여덟살이 시간이 어딨어. 신문이나 뉴스 볼 시간도 없을텐데. 어차피 입시공부 때문에 바빠서 선거 때 관심도 없다가 아무나 찍지 않을까?
A8.
edujournal
ㄴ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싶다. ‘성인들’은 일상 때문에 바빠서 어떻게 선거 때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가? 아침 9시까지 출근해서 퇴근도 못하고 야근도 특근도 하는 일상을 사는 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임을 알고 있다. 비청소년도 똑같이 아무나 찍으면서 말이 많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도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아야 한다고 모두가 말하는 이유는, 정치는 일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난하고 모순적인 일상을 바꾸고자 시도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며, 정치의 일부인 선거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숨가쁜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더 나은 삶을, 더 나은 매일 매일을 위해서 정치에 참여한다. 그러나 청소년과 비청소년 모두 매일의 일상을 살아감에도, 만 19세 이상에게만 제한적으로 그 일상을 바꿀 권리가 더 주어져있다는 것은 차별적인 일 아닌가?
Q9.
jijj****
ㄴ 고딩들한테 투표권 준다고? 학교가 정치판이 되면 어떡함?
A9.
edujournal
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보다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 교육공간은 정치가 배제된 공간을 말하는가? 그런 공간일 때만 ‘교육’이 가능한가? 교육이란 대체 무엇인가? 브라질의 교육자 파울루 프레이리는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은행 저금식’ 교육을 비판하면서 학생과 교사가 대화와 탐구를 통해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는 ‘문제제기식’ 교육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지식에서 그치지 않고 삶과 현실을 바꿔내는 ‘프락시스’,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교육이라는 것은 학생에게 지적 만족을 주는 것을 넘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돕고 자신의 삶의 문제를 바꿔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볼 것인지, 무엇이 문제라고 제기할 것인지, 무엇이 필요하다고 요구할 것인지. 선택할 힘을 기르는 것, 그리고 가능한 그 선택이 진실에 가깝도록 하는 일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교육은 정치다. 끊임없이 어느 편에 설 것인지 고민하게 하는 것,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기르는 것이 교육이고 그것은 정치와 다르지 않다. 학교가 교육공간이 되고자 한다면, 그곳은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학교는 더더욱 ‘정치판’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학교는 침묵과 통제의 공간이었다. 수많은 반교육적 행위들이 교육으로 둔갑했다. 이 속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불만을 표현하는 학생들의 외침은 ‘정치적’이라는 프레임으로 억압당해왔다. 두발 규제, 복장 단속 등이 인권침해라고 1인 시위를 하고 자보를 적으면 학교에서 정치적인 행위를 한다며, 다른 학생들을 선동한다며 ‘문제학생’으로 낙인찍혔다. 실제로 많은 고등학교들에서 ‘학생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제한 규정을 가지고 있다. 울산 지역의 한 일반계 공립고등학교의 생활규정에는 “정치에 관여하여 행동을 한 학생은 퇴학까지 가능하다”는 내용마저 있다고 한다.
청소년 참정권은 이 침묵의 학교에 균열을 내는 시작이 될 것이다. 청소년은 정치의 주체라는 말이 힘을 가지게 될 때, 학교에서는 어떤 학생도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게 될 것이다. 학생회의 공약은 학부모와 교사의 감시를 받지 않을 것이고,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 참정권 실현은 교육기관을 무너뜨리는 공격이 아니라 학교를 비로소 교육의 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발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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