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년들은 어쩌다 도마 위에 올랐나?


# 촉법소년은 누구인가?


  촉법소년들의 행동은 곧잘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그때마다 사회적 공분을 사는 경우가 많다. 최근 경기 의정부 경전철 등에서 노인의 목을 조르고 폭행한 중학생도, 지난해 온라인 직거래 장터에 ‘장애인을 판다’는 글을 올린 10대 소년의 이야기도[각주:1] 우리에게 생소한 이야기가 아니다. 촉법소년은 왜 항상 우리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연령과 연령에 따른 처벌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년법 제4조에서는 비행소년을 우범소년, 촉법소년, 범죄소년으로 구분하고 있다. 우범소년이란 ‘만 10세 이상 만 19세 미만’으로서 형사법령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보호자의 정당한 지시에 따르지 않고 가까운 장래에 위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청소년, 촉법소년이란 ‘만 10세 이상 14세 미만자’로서 형사법령을 위반하였으나 형사책임이 없는 청소년, 범죄소년이란 ‘만 14세 이상 만 19세 미만자’로서 형사법령을 위반하고 형사책임도 있는 청소년을 의미한다. 즉, 쉽게 이야기해서 우범소년은 형사법령을 위반하지 않고 형사책임도 없는 소년이며, 촉법소년은 형사법령을 위반하였으나 형사책임이 없는 소년, 범죄소년은 형사법령을 위반하였으며 형사책임도 있는 소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형사법령을 위반하지 않았으니 책임도 없는 소년(우범소년)과 형사법령을 위반하였으니 형사책임이 있는 소년(범죄소년)에 대한 처분은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범죄소년과 같이 형사법령을 위반하여 범죄 자체에는 차이가 없음에도 형사책임이 없는 촉법소년은 선뜻 이해하기가 힘들다. 특히 그 책임의 기준을 ‘만 14세’로 무 자르듯 잘라 놓았고, 그 점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청소년의 사례가 언론을 통해 집중 보도 되면서 이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점차 커지게 되었다.

  물론 이 기사에서 ‘악랄한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법이 제시한 일정한 기준에 자신들이 부합하는지도 계산할 줄 아는 이들의 행동을 ‘무지에서 비롯된 범죄’라고 애써 포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들을 향한 사람들의 다소 편향된 시선과 그 속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과연 촉법소년들을 떳떳하게 책망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한 제도와 건강한 관점을 가졌는지 말이다. 우리의 현실을 알고 나면 촉법소년들을 향한 무분별한 비난의 에너지는 혹 힘을 합쳐 상황을 개선해보고자 하는 의지의 에너지로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2. 도마 위의 ‘뜨거운 감자’


  촉법소년들로부터 비롯된 논쟁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형사책임 연령을 만 14살보다 더 하향하자는 주장과 아예 소년법 자체를 폐지하자는 주장이다. 지금부터 각 주장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그 주장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을 짚어보자.


# 형사책임 연령 하향 문제


  현행법상 ‘만 14세 미만인 자’는 형사미성년자로서 그들의 행위는 불가벌로 규정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중범죄를 저질러도 소년법에 의한 보호처분의 대상이 될 뿐 형사상 처벌 대상은 되지 않는다.


  그럼 왜 하필 만 14세가 기준일까? 1912년부터 시행된 조선형사령에 따라 일본 형법이 한반도에서도 효력을 가지게 되면서 14세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하는 형사미성년의 연령이 우리 사회에도 정착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형법이 제정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형법상 형사미성년의 연령은 14세 미만으로 규정되고 있다(형법 제9조). 일본이 소년법에서 14세를 기준으로 하게 된 배경에는 러일전쟁이라는 전시상황 및 종전 직후의 증가한 소년범죄가 있었다. 다시 말해, 모든 소년범죄를 처벌할 수 없었던 현실적 사정이 형사미성년의 연령 기준을 상향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1912년부터 시행된 법이 한국전쟁 전후의 불안정한 사회적 현실과 맞물려 별다른 논의 없이 그대로 두었다.[각주:2]


  그렇다면 우리나라와 일본만 그런 것일까? 우선, UN 아동인권위원회는 ‘아동의 연령과 함께 사회 복귀 및 사회에서 맡게 될 건설적 역할의 가치를 고려하는 등 아동에게 인간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의식을 높일 수 있는 방식으로 처우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UN 아동 권리협약 제 40조에 따라 형법 위반능력이 없다고 추정되는 최저연령의 설정을 촉구하였다. 또한 각 당사국에 대해 형사책임 연령을 12세 이하로 낮추지 말고, 최저 형사책임 연령을 지나치게 낮게 정하지 아니하며, 기존의 낮은 형사책임 연령은 국제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수준으로 상향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년사법 운영에 관한 유엔 최저 기준규칙 제4조 역시 “소년의 형사책임 연령이라고 하는 개념을 인정하고 있는 법 제도에 있어서 그 개시 연령은 정서적·정신적·지적 성숙에 관한 사실을 고려하여 너무 낮은 연령으로 정해져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들이 저마다 유지하고 있는 형사책임 최저연령은 각국의 역사적·문화적 기반에 따라 달리 설정되어 있고, 그 연령의 범주는 우리나라보다 낮은 7세부터 우리나라보다 높은 18세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은 국가들이 우리와 같이 만 14세(40개국)에 기준을 두고 있다는 점[각주:3]과 아동인권위원회 등의 권고에 따라 형사책임 연령 기준이 상향되는 국가들이 늘고 있다는 점은 지속해서 형사책임 연령을 낮추자는 주장이 나오는 우리나라에서 눈여겨볼 만 하다.


  어떻게든 형사책임 연령을 낮추고자 하는 사람들은 UN의 권고 연령인 만 12세까지라도 낮추고자 하며, 그 이유로는 주로 소년범죄의 증가, 흉포화, 저연령화를 든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검찰청의 범죄분석[각주:4]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8년까지 소년 형법 범죄는 지속적해서 감소[각주:5](2009년 81,378명 → 2018년 54,205명)하였으며, 특히 그토록 형사책임 연령에 포함하고 싶어 하는 10세~13세의 범죄율은 전체 소년범죄의 0.1%~0.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강력범죄의 경우에도 10세~13세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소년범의 0.1%~0.5%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이들의 ‘수가 적기’ 때문에 형사책임 연령을 낮출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형사책임 연령을 낮추는 ‘법 개정’까지 하려는 측에서는 적어도 적절한 통계자료를 가지고 근거를 드는 것이 바람직한 논의의 자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소수의 충격적인 범죄만을 가지고 촉법소년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를 하여 자극적인 여론을 만드는 것은 대중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다. 특히, 그 대상이 스스로를 방어하고 변론하기 어려운 청소년이라는 것을 볼 때, 어른들의 다소 무책임한 입법은 그저 사회를 폭력과 자극의 악순환으로 내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또한, 책임능력의 유무를 정하는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생물·심리·문화적 요인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상대적으로 정해질 수 있는 등 아직도 모호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무작정 형사책임 연령을 낮추려고 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라 느껴진다. 비슷한 예로, 2007년 소년법을 개정하면서 촉법 연령이 기존의 만 12~14세에서 10~14세로 하한 연령이 낮추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개정 후 소년부 실무를 담당하는 법관으로부터 연령만 낮추었을 뿐 이들에 대한 처우와 관련하여 추가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던 것이 지적되었다.[각주:6] 이처럼 단순히 형벌권을 강화하는 방안은 이들에게 적절한 처벌도 되지 않고 교화·선도의 여지도 줄어들 수 있다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 소년법 폐지론자들의 이야기


  한편 조금 더 극단적으로, 아예 소년법을 폐지하고 성인과 동등한 선에서 소년들을 심판받게 하자는 주장도 있다. 이는 UN 아동 권리위원회의 권고나 청소년에 대한 다이버전 및 회복적 정의를 실현하려는 국제적인 흐름에 반한다는 점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나 법치주의적 관점과도 다소 어긋나는 선택지이다. 호통 판사로도 유명한 부산가정법원 소년부 천종호 부장판사는 “소년법 폐지·개정을 통해 형벌에 있어서 성인과 동등한 취급을 하고자 한다면 우선 민주주의에서 핵심 권리인 참정권부터 성인과 동등하게 주어야 한다. 그런데 현행 공직선거법은 미성년자에 대해 선거권을 비롯한 참정권을 제약하기 때문에 미성년자는 법적으로 선거권을 행사하여 소년법의 폐지나 의사 형성에 참여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년법의 폐지나 개정을 강행하는 것은 민주주의나 법치주의에 위반될 소지가 크다.”라고 말하며 이 논의에 핵심 당사자인 미성년자들의 참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각주:7] 또한, 성인과는 다르게 참정권 등의 핵심적인 권리가 제약받고 있는 미성년자들에게는 소년법이 오히려 이들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뜨거운 감자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쓸모없는 장갑은 왜 탓하지 않는가?


# 감자를 잡기에는 장갑이 너무 작고 얇다 : 보호 처분의 타당성·효과에 대한 문제제기


  흔히 촉법소년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이들이 아예 아무 처벌을 받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엄연히 소년재판을 받고 죄질이나 반성 여부 등에 따라 1호부터 10호까지의 보호처분 중 하나 또는 병합된 처분을 받게 된다. 소년법 제1조에 따르면 “이 법은 반사회성이 있는 소년의 환경조정과 품행 교정을 위한 보호처분 등의 필요한 조치를 하고, 형사처분에 관한 특별조치를 함으로써 소년이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이 보호처분은 과연 지금까지 그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을까?

 

<표 : 소년법 제 32조에 따른 보호처분 종류>

  앞서 보았듯 소년범죄가 실질적으로 증가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소년범죄의 재범죄화율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0년간 소년 전과자 비율은 32.2~42.3%나 되며, 그중 전과 6범 이상이 3.8%에서 8.7%까지 증가한 것[각주:8]은 소년범에 대한 처분과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다만, 이 통계자료의 경우 형사처벌을 받은 소년범이 포함되어 있어, 우리는 보호처분을 받은 소년범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자료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009년부터 10년간 소년 보호 관찰대상자들의 보호관찰 경력을 통계 내 본 결과, 처음 보호관찰을 받은 소년의 비율은 2009년 66.1%에서 매년 지속해서 감소하여 2015년 이후에는 50% 이하로 하락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미 1회 이상의 보호관찰을 받은 소년들이 다시 보호 관찰대상자가 되는 비율이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9] 이때의 보호관찰은 협의의 보호관찰 이외에 사회봉사명령·수강명령 대상자를 포함한 인원이다.


  더불어 소년원 퇴원자의 1년 이내 재입원율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이와 같은 자료들은 결국 보호처분이 실질적으로 소년범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보호처분의 실상을 알아가다 보면 촉법소년들이 빠진 악순환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근래에 가장 이슈가 되었던 보호처분 중 하나가 바로 6호 처분이다. 이는 6호 시설인 살레시오 청소년센터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 때문이다. 아이들은 야간 생활 지도원에 의해 성추행을 당했고, ‘혐의없음’으로 결론이 났지만 가혹행위와 약물 강제투여의 의혹도 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밝혀진 6호 시설의 전반적인 환경은 소년들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해 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들에 대한 부당대우뿐만 아니라 잘 되지도 않는 국가에서의 비용지원과 인정되지 않는 학력 때문에 아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소년범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미래를 제대로 그려나갈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을 한 소년들을 안일하게 민간 기관에 위탁하는 것 그 자체로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아이들을 민간에 위탁, 아니 방임하는 것은 국가로서 그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민간이 소년원을 운영하게 하는 민영소년원이 추진되는 것은 실로 걱정부터 앞선다.)


  하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운영되는 소년원의 경우에도 위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우리나라 소년원의 경우, 여자아이들이 가는 소년원 2곳을 포함해 전국에 단 10곳뿐이라 소년원 과수용 문제[각주:10]는 꾸준히 제기되어 오고 있었다.[각주:11]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여 관찰관 1명당 관리하는 소년범의 수가 123명에 달하는데, 이는 다른 OECD 국가보다 4배가 넘는 수라고 한다.[각주:12]


  소년원의 교육은 어떨까? 대전소년원에서의 생활을 체험한 한 르포[각주:13]에 의하면 이곳에서 생활하는 소년들은 군대와 비슷한 관리를 받고, 여전히 그들 안에서의 서열과 그에 따른 생존기가 있었으며,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름뿐인 수업이 존재했다. 자유시간에 누울 수도 없고, 혼자만의 생각과 감정을 그리는 일기장을 의무로 쓰고 검사 맡아야 했고, 30분 정도의 체육 시간이 유일하게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시간이었으며, 정신교육의 명목으로 고사성어와 음악이 나오는 라디오를 들어야 했다. 이것이 과연 소년범의 성장과 교화를 바라는 시설이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하루일까? 이들이 살아가는 24시간 속에는 과연 진정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이들에게 갱생의 여지조차 주지 않은 채 응보적 잣대를 들이민 것은 아닐까?

4. 감자의 온도와 우리의 손에 맞는 장갑을 끼자


# 언제까지 뜨거운 감자의 탓만 할 것인가


  소년법은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제정되었음에도 지금까지는 어른들의 입맛대로 굴러가는 경우뿐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른들은 소년들에게 손가락질한다. 따지고 보면, 소년법을 만든 것도, 우범소년·촉법소년·범죄소년을 구분 짓고 형사처벌여부를 정한 것도, 보호처분의 종류를 규정하고 운영한 것도 모두 어른들인데 희한하게도 모든 화살은 소년들을 향한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전에도 말했지만, 어른들은 손가락질하고 비난할 수 있어도 소년들에게는 변명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힘조차 없다. 소년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소년들이 법적·도덕적으로 지탄받을 행동을 했다고 해서 어른들이 만든 시스템의 잘못된 점이나 빈틈까지 소년들에게 책임 전가를 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태도이다. 더하여, 그 시스템은 자신들을 더 나은 환경에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아니고, 평균적인 삶을 살 수 있게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 그 모든 과정은 자신들을 ‘도우려는’ 목적보다는 어떻게든 ‘낙인찍으려’ 안달 나 있는 하이에나처럼 보일 것이다.

# 몇 가지의 대안, 그리고 아직은 그리지 못한 해결책


  법학적·실무적 지식이 그다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다 할 대안을 제시하기는 참으로 힘들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사를 쓰며 떠오르는 아이디어 몇 개는 활자를 통해 공유하고자 한다. 이런 생각의 씨앗들이 모여 가까운 미래에는 아이들을 위한 좋은 법안이 탄생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우선, ‘보호처분’이라는 용어의 개정이 필요할 것이다. 소년법을 잘 모르는 대중에게는 이 처분이 단순히 촉법소년을 ‘감싼다’는 의미로 다가갈 수 있고, 자연스레 거부감이 생길 수 있다. 처분의 한 역할 중에는 소년을 보호하는 것도 물론 있겠지만, 그들의 품행을 교정하고 건전한 성장을 돕는다는 의미가 강조되는 용어의 사용이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는 방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정말 당연하겠지만, 보호처분의 내실화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특히, 민간 위탁 보호처분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고려해보는 것이 필요하며, 만약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학교에 버금가는 엄격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되기를 바란다. 소년원의 경우에도 ‘성인 교정시설’과 같이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을 ‘통제’하기보다는 ‘기숙 학교’의 모습과 가까운 형태로 아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아이들이 미래를 그리는 것을 돕는 전문인력이 확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회적 분위기 또한 중요하다. 흔히 ‘소년의 범죄가 진화했다’고 표현하는데, 사실 이들의 범죄는 대부분 어른을 보고 모방한 경우가 많다. 이들의 범죄 형태를 보고 행위자를 비난하는 일차원적 시각에서 벗어나서 그런 환경이 조성된 사회 전체를 조망하고 반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폭력을 무조건 ‘엄벌주의’라는 또 다른 폭력으로 해결하기보다는, 피해자의 회복과 가해 소년의 교화에 초점을 맞추어 모두가 바람직한 사회적 구성원으로 어울릴 수 있도록 법을 적용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논의의 과정에 청소년들이 반드시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촉법소년과 소년법 등의 문제를 모두 성인의 시각에서만 바라보았다. 또래의 입장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통찰을 줄 것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그리지 못한 해결책 중 몇몇은 이들과의 대화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미성년자를 ‘미성숙’으로 정의하고 논의의 장에서 배제한다면 결국 진짜 ‘미성숙’한 것은 그들이 아닌 우리 사회가 될 것이다.


# 봄, 그리고 꽃샘추위


  인간의 나이를 계절로 환산해보자. 백세시대임을 감안하고 나이를 4개의 계절로 나누면 1~25세까지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 26~50세까지는 뜨겁고 찬란한 여름, 51~75세까지는 시원하면서도 은은한 가을, 76~100세는 춥지만 포근한 겨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논의했던 촉법소년들은 어느 계절을 걷고 있을까? 만 10세 이상 14세 미만의 이 소년들은 봄의 길을 걷고 있으며, 생각해보면 그들은 아직 한 계절도 다 지내보지 않은 어린 나이다. 해마다 계절이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듯, 다른 10대들과 함께 봄을 걷고 있어도 촉법소년들에게 봄은 유난히도 혹독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들은 꽃샘추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봄이지만 혹독한 겨울을 맛보는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수 있다. 이불 하나만 덮어주면 좋으련만, 그들에게 따뜻한 이불을 덮어주는 이는 아직 몇 없어 보인다.

 

 

 

 

Dichter

  1. 노인 목 조른 중학생 처벌 불가···분노 부른 '촉법소년' 면죄부, (news.joins.com/article/23977206) [본문으로]
  2. 이덕인(2012), “형사책임연령 하향에 대한 비판적 고찰: 형사미성년과 촉법소년을 중심으로”, 형사정책연구, 한국형사정책연구원, 17면. [본문으로]
  3. 이덕인(2012), “형사책임연령 하향에 대한 비판적 고찰: 형사미성년과 촉법소년을 중심으로”, 형사정책연구 제23권 제1호, 한국형사정책연구원, 25-26면. [본문으로]
  4. 법무연수원(2020), 2019 범죄백서, 540면. [본문으로]
  5. 다만, 2018년의 경우 소년범죄자 집계 시 14세 미만 피의자를 제외하고 작성되었다. 하지만 2018년의 자료를 제외하고 보면, 2012년과 2013년을 빼고는 2017년까지 해마다 소년범죄자가 4000~10,000명씩 감소하였다. [본문으로]
  6. 한숙희(2009), “촉법소년 연령인하에 따른 가정법원의 역할과 과제”, 형사정책연구 제19권 제2호, 67면. [본문으로]
  7. “소년법 폐지 논란과 관련하여”, (brunch.co.kr/@seungkivincent/2) [본문으로]
  8. 법무연수원(2020), 2019 범죄백서, 505면. [본문으로]
  9. 법무연수원(2020), 2019 범죄백서, 592면. [본문으로]
  10. 2017년 기준, 정원이 1250명이지만 평균 1612명이 수용되어 수용률이 129%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성인 교정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이 115.4% 과밀수용된 것과 비교했을 때 소년원이 훨씬 열악한 환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11. 소년원 과밀수용 '심각'… "민영소년원이 대안될 수도" (n.news.naver.com/article/022/0003307428) [본문으로]
  12. [소년법 동상이몽②] 소년원 처분 충분할까?…이수정·천종호에 묻다 (news.kbs.co.kr/news/view.do?ncd=4447772) [본문으로]
  13. 소년원 직접 체험한 기자, 바닥에 누웠다가...(mnews.joins.com/article/7744033#hom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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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며 – 교육과 정치


교육과 정치는 분리될 수 있는가?


  교육, 특히 학교 교육과 관련해서 교육과 정치는 서로 분리된 영역으로 여겨졌다. 학생은 정치적 색깔에 물들면 안 되는 ‘순수한’ 존재여야 했고, 교사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 아래 어떠한 정치적 의견을 표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리고 교실은 ‘신성한 교육의 장(場)’이어야 하지, 정치와 같이 세속에 찌든 것들이 감히 비집고 들어올 수 없는 곳으로 여겨졌다.


  교실에서 ‘정치’란 꺼내서는 안 되는 단어였다. (그 이름을 불러선 안 돼!) 학생들이 정치적 이슈에 관해 토론할 수 있는 공론장은 사실상 부재했으며, 교사들은 정치적 이슈와 관련해서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교사들에게 ‘정치적 중립성’이란 정치와 관련된 문제에 관해서는 ‘입을 닫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일종의 ‘(교실에서의)정치 혐오’로 이어졌다.


  만 18세로 선거권이 하향된다고 했을 때, 가장 강력한 반대 논거 중 하나가 ‘교실의 정치화’에 대한 우려였다는 게 이를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 순수한 학생들이 정치에 물들 수 있고, 신성한 교육의 장이 정치에 오염될 수 있다는 논거다. 그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만 18세 선거권이 시행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이러한 우려는 여전했다. 인천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가 최근 발행한 '18세 선거권 도입에 따른 학생선거교육 방향 연구'에 수록된 조사 결과를 보면 '수업에서 사회문제를 다루게 될 때 염려되는 부분'에 관한 질문에 가장 많은 교사들이 '정치적 중립성의 부담'(평균 4.25/5점 만점)을 선택했다. 참고로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교사들이 선택한 답은 ‘학부모 민원 소지에 대한 우려(4.06)’이었다. 종합하자면, 교실은 여전히 정치화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이며. 교사들 사이에서는 만일 교실에 정치가 개입될 경우 이는 민원까지도 불러올 수 있는 일이라는 의식이 공유되고 있다.


  그런데 이 ‘교실의 정치화’라는 것이 정말 우려해야 하는 점인가? 교육과 정치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선 교육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자. 교육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교육을 하는가? 교육의 본질이나 목표 등에 대한 논의는 무궁무진해질 수 있지만, 대한민국의 교육기본법에 따르면 교육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각주:1]


  교육은 한 명의 인간의 인격과 생활 능력, 그리고 민주 시민성을 갖추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삶에서 국가, 더 나아가 인류에게 이바지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민주시민’, ‘민주국가’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민주’란 무엇인가? 민주란 ‘백성 민(民)’과 ‘주인 주(主)’, 즉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며,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 형태’다. 그렇다면 민주적인 시민을 길러내겠다는 교육의 목표는 그 자체로 굉장히 정치적인 목표이다. 정치가 특정 집단을 어떻게 이끌고 유지해 나갈지에 대한 문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국가는 국가라는 집단을 이끌고 유지하기 위해 교육을 수단으로 활용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교육은 그 본질부터 정치와 분리될 수 없으며, 국가는 교육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교과서를 발행하고 학교를 짓는다.


모든 교육은 정치적이다


  국가는 교육을 통해 국가 이데올로기나 정치 시스템을 가르친다. 따라서 교육과정은 곧 국가의 국민을 교육시키고자 하는 방향이며, 교육과정에 따른 대부분의 학교 교과는 국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교과 중 하나는 도덕과이다. 도덕과는 2015 개정 교육과정 총론에서 ‘도덕적인 인간’과 ‘정의로운 시민’이라는 중첩된 인간상을 지향점으로 삼는다고 밝히고 있다. 즉, 도덕과 교육과정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민주시민성의 함양이다. 그런데 민주시민성의 전제가 되는 민주주의는 하나의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가치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고 형성되어온 정치 체제이다. 그리고 이 정치 체제는 사회의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하며, 민주시민성 함양이라는 도덕과 교육과정의 목표는 이 이데올로기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배우는 ‘도덕’, ‘윤리’도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바뀌면 함께 바뀐다는 뜻인가? 그렇다. 실제로 도덕과는 과거 국민윤리교육에서 바뀐 바 있으며, 이는 시대의 변화를 그대로 따른 결과였다. 도덕과뿐만이 아니다. 국가 교육과정의 내용은 모두 100% 순수한 교육적 목표 아래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교육과정은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의 목표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정되고 걸러진 내용로 구성된다. 따라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바뀌면 교육과정도 바뀐다. 곧 국가의 사회적 권력이 교육에 작용하며, 국가가 원하는 형태의 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방안이 바로 교육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교과서용 정치’와 ‘정치용 교과서’로 나누어,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체제 아래 교과서를 중심으로 교육과 정치가 어떤 식으로 관련을 맺고, 교과서와 학교에서의 탈정치화 논의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교과서용 정치


  대한민국의 교육 체제 아래에서 12년 이상의 시간을 보낸, 혹은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사회과 과목 등을 통해 교실에서 정치를 배워본 적이 있을 것이다. 꼭 고등학생 때 ‘정치와 법’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중학교 ‘사회’ 과목 등에서 민주주의나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 이상씩은 다들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혹시 그때 교실에서 배운 정치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는가? 오래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무언가 ‘정치’, ‘민주주의’라는 개념어에 대한 추상적인 지식을 배웠던 기억은 어렴풋이 날 것이다. 그러나 아마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에 실시간으로 실릴만한 정치적 이슈나 비정규직 노동 문제와 같이 정치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현실의 정치를 피하고, 교과서용 정치를 가르치는 학교 현장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 중학교 교사의 칼럼을 일부 인용하자면, ‘시민혁명은 저 옛날 유럽에서 있었던 일이고, 민주주의는 저 고대 아테네의 정치이며, 여론정치, 시민참여정치는 추상적인 정치 모델 순서도의 한 칸일 뿐이다’.[각주:2]


  그렇다면 이러한 교과서용 정치가 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왜 지금도 교실 밖에서 수많은 정치적 의제들이 논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생동감을 잃고 죽어버린, 추상화된 정치만을 공부하는가?


  이는 결국 교과서가 정치적으로 중립이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교과서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정치적 중립이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 교과서 안에서 현실의 정치는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교실 밖의 생생한 정치, 예를 들어 페미니즘, 환경, 노동 등 생동하는 의제는 교과서의 논의 대상이 아니다. 왜? ‘정치적 사안’에는 얼마든지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의견’이 나올 가능성이 존재하는 사안은 교과서가 다룰 대상이 아니다. 자칫하면 교과서, 혹은 교과서가 교사나 학생들에 의해 활용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중립을 잃을, 혹은 잃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는 주제는 대체로 교육과정에서 배제되며,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없는 죽은 주제만이 교육과정에서 다루어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과서는 중립성을 획득하려 한다.


  아주 드물게, 교과서용 정치와 교실 밖 정치가 같은 사안을 다루기도 한다. 인공 임신 중절, 곧 ‘낙태’가 대표적이다. 교실 밖에서, ‘낙태죄’ 처벌 조항은 2019년 헌법재판소에서 헌법 불합치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2021년 1월 1일부터 그 효력을 잃었다. 그러나 이후 발의된 법안이 없어 낙태의 법적 공백이 지속되고 있다. 이에 낙태와 관련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으며, 낙태와 관련된 정치권의 논의 역시 시시각각 변화하며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낙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있는 정치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교실 안에서, 낙태를 다루는 ‘생활과 윤리’ 교과서는 이러한 살아있는 맥락은 모두 배제한 채 오로지 임신 중절에 대한 찬반 논거만을 나열하고 있다.[각주:3] 이는 교과서에서 ‘다른 의견’이 나오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또 살아있는 정치의 생명력을 빼앗음으로써 ‘교과서용 정치’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생활과 윤리 교과서는 단지 낙태에 대한 찬반 논거를 모두 다룬다는 사실로 인해 ‘정치적 중립’으로 포장된다.

2. 정치용 교과서


  그러나 교과서는 중립적이지 않다. 교과서는 ‘정치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 관련 논쟁은 지속되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한국사 국정 교과서 논란이다. 지난 박근혜 정권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며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고 주장하며 한국사 국정 교과서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혼이 담긴 한국사 국정 교과서는 탄핵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부에 의해 ‘독재를 미화’한다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정권이 바뀌자 이번에는 한국사 교과서가 ‘좌편향 교과서’라며, 교과서가 ‘정권 홍보 책자’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한국사 국정 교과서 논란이 좌편향 교과서 논란으로 이름만 바뀌어 이어지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뛰어난 어록. 국가가 교과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보여준다.

  교과서가 본질적으로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왜? 교과서를 누가 만드는지 생각해보자. 교육과정이 구성되고, 교과서가 만들어지고, 교육 정책이 결정되는 일은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지는가?


  교육의 주체에는 교육부와 같은 정치적인 기관도 있지만, 교사도 있고, 학생도 있고, 학부모도 있다. 그런데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에는 교육과 관련된 주체 중 극히 일부만의 생각을 담고 있다. 즉, 대다수 교사와 학생은 교육과정 구성에 참여할 수 없으며, 교육과정 및 정책은 교육부(라고 쓰고 아주 높으신 공무원분들이라고 읽는다.)나 교수들의 생각을 반영한다. 소위 말하는 사회의 ‘지배 계층’이자,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거의 완벽하게 소화하고 내재화한 이들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교육과정을 토대로 제작되는 교과서는 이 생각을 그대로 답습한다. 국가가 발행하는 국정 교과서뿐만 아니라 민간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검정 교과서 역시 국가의 심의 및 승인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학교로 간다. 따라서 국정 교과서나 검정 교과서나, 결국 국가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반영하며 만들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교과서는 국가의 시선으로 만들어진다.


  국가는 국가의 눈으로 교과서를 만든다. 교과서는 국가가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 보여주고 싶은 것 중 골라낼 것은 골라내어 철저한 체계를 만들고, 그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교과서를 통해 국민을 통제하고, 각 개인에게 국가 이데올로기를 주입함으로써 국가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길 바란다.


  대표적인 사례로 ‘저출산’을 보자. 사전적 의미로 저출산(低出産)은 사회의 합계출산율이 인구 대체수준을 밑도는 현상을 의미한다. 즉, 저출산이 계속되면 한 국가, 한 사회의 인구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교과서는 흔히 저출산을 ‘저출산 문제’라고 부르며 저출산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본다. 이를 잘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이번에는 도덕과 교과서도, 사회과 교과서도 아닌 기술가정 교과서다.[각주:4]

  위의 그림은 저출산 및 고령화가 개인이나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실업 증가 및 고용 불안, 경제 악화로 수입 감소, 국가 세입 감소로 인한 복지 혜택 감소와 같은 부정적인 영향들을 줄줄이 늘어놓고 있다. 이렇게 교과서는 저출산을 문제로 규정하며, 저출산이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만을 제시함으로써 저출산이 문제라고 인식하도록 하고, 저출산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과연 저출산이 무조건 나쁜 것인가? 위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개인이나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들도 진정 개인에게 미치는 악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까? 경제 악화로 수입 감소, 국가 세입 감소로 인한 복지 혜택 감소 등의 영향은 철저하게 국가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내용이다. 즉, 저출산 문제에 관해서 교과서는 오로지 국가의 관점으로만 이야기하고 있다.


  국가의 시선으로만 만들어진 교과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바라보지 못한다. 교과서는 저출산을 ‘문제’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저출산은 표면적인 결과일 뿐이다. 교과서는 그 이면의 저출산을 둘러싼 사회 구조에 대한 의문을 던지지는 못한다. 흔히 교과서는 저출산의 이유를 초혼 연령의 상승, 여성의 사회진출로 규정하고는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이를 적게 낳는, 아니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를 그것으로만 볼 순 없다.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혼자 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자 살기도 어려운 이유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턱없이 많은 업무 시간과 방 한 칸 마련하기도 어려운 집값, 자기 자신을 부양하기에도 부족한 임금 등…. 그리고 이들의 뒤에는 국가의 사회 구조와 (여성에게 특히 더 억압적인)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러나 국가는 권력 구조를 강화하고 기존의 억압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교육을 수단 삼아 사회 구조의 문제를 은폐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한다. 그래서 ‘결혼을 늦게 해서’ 혹은 ‘사회에 진출하기 때문에’ 저출산이라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식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이렇게 구조적인 문제를 은폐하는데 교과서가 수단으로 쓰인다.

교과서는 정치에서 자유로운가


  지금까지 살펴본바, 교과서를 ‘중립’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교과서는 중립처럼 보인다. 왜?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국정 교과서뿐 아니라, 검정 교과서도 결국 마찬가지이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정치적인 지향이 다를 수는 있어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국가 이데올로기를 정말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는 사람들의 손에서 교과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교과서는 객관적인 지식처럼 포장되어 학생들에게 전달되고, 학생들은 비판 없이 교과서에 주어진 지식을 암기하고, 시험을 본다. 즉, 국가는 국가의 시선이 가득 담긴 교과서를 중립이라고 포장하고, 정제된 지식의 형태로 학생들이 암기하도록 한다.


  그 결과, 학생들은 시의적절하고 그들의 삶에 가까운 정치적 지식과 정치적 역량을 기를 수 있는 내용보다는, 고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태동했느니 어쩌니 하는 지극히 정제된 지식을 외워서 시험을 본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 교육’으로 포장된다. 그런 정치 교육은 잘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우리 사회의 퀴어, 페미니즘 등 ‘살아있는’ 정치에 대해서는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교실에서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현실이다.


3. 나가며


교육과 학습


  ‘교육(education)’과 ‘학습(learning)’은 다르다. 교육은 교수자와 학습자의 관계가 전제되며,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학교에 가고 수업을 듣고 학위를 받고 이런 것들이 모두 교육의 영역에 포함된다. 따라서 교육은 언어의 형태로 정제된 지식을 다루며, 학습자가 지식을 주어진 대로 배우고 주어진 방식대로 사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교육은 정답이 이미 주어져 있는 상황에 유리하다. 반면, 학습은 학습자의 능동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반드시 교수자가 없더라도 언제 어느 환경에서든 가능하다. 그리고 학습자는 언어의 형태로 표현할 수 없는 정제되지 않은 지식을 습득하고, 각 학습자는 각자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자기만의 지식을 가진다. 즉, 학습은 곧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역량이나 기술을 형성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 필요하다.

정치는 학습이다


  지금까지의 우리는 ‘정치 교육’, ‘시민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정치를 교육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교육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도 찬성/반대를 나누어 정답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정치에는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는 문제에 정답을 내리려고 했기 때문에, 교육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는 학습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교육에서 학습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정치를 학습으로 바라본다면, 정치는 암기할 지식을 던져주는 방식으로 교육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과 같이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을 달달 외우는 것만으로는 실제 정치에 참여하기 위한 역량을 기를 수 없다. 따라서 학습자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한다. 어떤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는가? 자유롭게 토론하고, 비판하고, 의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사회 현상 이면의 구조를 볼 수 있는 환경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어떻게 할까?


  다시 교육 현장으로 돌아와, 우리에게는 자유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정치적 중립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정치를 터부시하지 말고, 교실의 정치화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도 더 과감하게 상상해보자. 이미 다 교육과정을 짜 놓고 교과서에 들어갈 지식을 정해둔 다음에 교육 관련 토론회에 학생 한두 명을 앉혀두고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했다’라며 끝나서는 안 된다. 교과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학생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건 어떨까? 학생도 교과서가 발행되기 전에 의견을 낼 수 있는 교육 주체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학생들이 교과서 제작 과정에 참여하는 길을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방안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도 중요하다. 첫째로, 교과서를 꼭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교과서는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지식의 총체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국가의 시선에 의해 골라진 지식이며, 교과서의 구성에는 국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 따라서 교과서를 비판하는 것도 자유로워야 한다. 또한, 교과서를 절대적인 지식의 잣대로 생각하지 말고, 교과서를 도구로 생각하여 교실의 교육 주체들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자. 즉, 교육의 목표가 꼭 교과서 안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 나아가, 교과서가 꼭 있어야 할까? 교과서는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중립적인 ‘척’하기 위해 오랜 기간 심의와 수정을 거친다. 그렇기에 교과서는 필연적으로 빠른 현실의 정치적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교육 주체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꼭 교과서만을 가지고 수업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문이나 기사를 보고 토론하는 것도 좋을 것이고,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가져와서 선정한 주제로 토론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조금 더 열려 있어 보면, 인터넷 기사 댓글, 트위터 등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핫한 주제들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주제에 관한 교과서의 서술과 SNS 등의 서술을 비교하는 활동은 교과서만 보았을 땐 결코 얻을 수 없는 통찰을 가져다줄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주제 그 자체가 아니라, 주제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이면의 구조를 인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사가 꼭 가르치는 역할이어야 할까? 아니다. 정치적 이슈는 하루가 다르게 새롭게 생겨나고, 사라지고, 바뀐다. 따라서 교사라고 해서 모든 정치적 주제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며, 교사보다 학생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교실에서 다룰 주제는 매일 변화하는데 교사도 함께 배우는 건 어떨까? 학생이 교사를 가르치고, 교사는 학생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가능하다. 교사도 학생들과 똑같은 한 명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견지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학생들이 선택한 주제에 관한 토론을 할 때 교사가 꼭 토론의 진행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 교사도 학생과 똑같은 한 명의 시민으로서 교실에서 학생의 발제를 듣고, 학생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주장을 제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학생도 교사와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교사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학생은 자유롭게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는 교실 분위기에서 교사의 말을 ‘단지 교사라는 이유로’ 곧이곧대로 수용하는 대신, 비판적인 시각으로 한 번 더 생각하는 역량을 기를 수 있다. 비판하는 연습은 곧 비판적 사고 역량으로 이어진다.


  앞으로의 교육 현장에서 정치는 교육의 대상이 아니어야 한다. 정치는 고대 아테네를 벗어나 우리 곁의 살아있는 의제로 다가가야 하며, 교실 환경은 학습자에게 정치 지식이 아닌 정치적 역량을 길러주어야 한다. 이때, 교사를 포함한 모든 교육 주체는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토론하고 이야기해야 하며, 청소년 역시 교사와 동등한 한 명의 시민으로서 주체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학습자들은 교과서용 정치, 정치용 교과서에 매몰되지 않는 비판적인 사고능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며, 자기 주변의 정치적 의제에 관심을 두고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주체적인 시민으로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정치는 학습되어야 한다.

 

 

 

 

ALee

  1. 교육기본법 제1장 제2조(교육이념) [본문으로]
  2. 권재원 풍성중학교 교사, 아이들에게 ‘교과서용 정치’만 가르칠 건가?, 프레시안, 2014.03.10. 수정, 2020.12.24. 접속, www.pressian.com/pages/articles/115033 [본문으로]
  3. 미래엔, 생활과 윤리 Ⅱ. 생명과 윤리 [본문으로]
  4. 두산동아, 중 기술가정② 교과서 3단원 01. 저출산 · 고령 사회와 일 · 가정 양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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