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 후기

- 집필진들의 봄 인사


노누

같이 대화를 하면서 배우고 느끼는게 많았습니다. 말로 배운다는게 이런거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교육저널 사람들께 고맙다는말 전하고 싶었고요 글로 보답하고 싶었지만 역시나 늘 그렇듯이 문제의식을 던지고 누군가에게 변화를 이끌어내는 글을 쓰기란 쉽지않네요 ㅠㅠ 앞으로 배워나가야할게 많다는걸 새삼 깨닫고 또 행동으로 이어져야한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이 글이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누군가에게 작은 파동을 일으킬수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람을 담아봅니다.

 

 

당근

이번호에서는 저의 생각을 무작정 풀어내기보다는 현장과 사람들의 고민을 전달해보고 싶었습니다. 그에 대한 유의미한 해석까지 해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다음호에서는 현장의 모습과 함께 보다 나아진 고민을 담을 수 있기를! 또 이번에는 표지 디자인을 담당하였는데, 이번호의 얼굴을 담당한다는 괜한 부담감도 있지만 꽤나 즐거운 작업을 해나가고 있습니다.ㅎㅎ 글을 쓰기 시작했던건 가을인데, 요즘은 따스하니 봄이 다가온 것이 한눈에 보입니다. 가을에 필진이 시의적이라 생각해서 고른 주제와 다듬은 글들이 지금은 지나가버린 이야기가 되지는 않았을까 조금은 걱정스럽지만, 논쟁의 소용돌이에서 약간은 거리를 두고 새로운 시각에서 다시 고민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거라 기대해봅니다. 모두에게 따뜻한 봄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다음호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붕어빵

2019년 봄호 교육저널이 드디어 발간되었습니다! 이번 호를 펴내기 위해 함께 주제를 고민하고 방향을 고민하고 의견을 나누던 시간들이 떠오르네요. 몇 달 간의 집필 기간 동안 교육저널 사람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과정에서 그동안 몰랐던 것들, 혹은 가볍게 생각하던 것들을 더 깊게 받아들이고 알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담아낸 이 고민들이 여러분들께는 어떻게 다가올지 무척 궁금해지네요 ㅎㅎ 항상 많은 것들 배우게 해주는 우리 교육저널 사람들 정말 고맙고 수고 많았다는 말 꼭 하고 싶어요. 그리고 독자 여러분! 새로운 학기 의미 있는 시작을 저희 교육저널과 함께 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뚱인데요

전 교육저널에서의 2년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ㅠㅠ 분명 교널과 처음 함께할 땐 파릇파릇한(?) 새내기였는데 왜 지금은 이런 이상한 고학번이 된 건지...제가 고학번 취급받는 세상이 왔네요 세상에 하와와 이게 말이 되니. 사실 교널, 그리고 이 학교에 처음 들어올 때는 2년 정도 지나면 뭔가 더 나은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면 과연 그랬나 싶네요. 글 마감은 갈수록 못지키다가 이번 호엔 기어코 새터보다 글이 늦게 나왔지, 2년 동안 다니면서 학생회 같은 이상한 데에서 맨날 구르며 얻은 거라곤 '그 짱구'라는 별명과 정신적인 피로와 학고 한 번에 휴학 한 번? (이제 복학해야해 ㅠㅠㅠ) 그래도 마냥 헛되진 않았는지 새터 때 얻은 과장 완장이 자랑이라면 자랑일까요...?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교널에 올 때마다 -분명 우리는 각박한 세상 얘기를 하는데- 각박한 세상에서 벗어나 빛나는 사람들과 추억을 쌓을 수 있었고 얻어가는 거도 많은 거 같아요. 말은 이렇게 해도 나름대로 변한 구석도 많은 거 같고요. 이게 좋은 변화인지 나쁜 변화인지는 좀 더 살아봐야 알겠죠? 아무튼 정말 사랑해 마지 않는 교널이지만 이제는 아마 이별을 말해야 할 거 같습니다. 이렇게 말해놓고 다음 호에 또 이름을 올릴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결심은 그렇네요! 고마웠어요 교널! 그리고 혹시 뚱인데요로 저를 기억할지도 모르는 소중한 독자분들! 마지막으로 카타르시스 하나 정도는 남기고 싶었지만 그러진 못해서 편집후기나 이렇게 주절주절 남기고 갑니다 :) 마지막 글은 마감에 쫓겨 쓴지라 별로더라도 관심있게 읽어주세요. 모두 감사하고 행복한 봄 보내세요!!!

 

이물

이번 호는 유난히도 마감이 길어졌습니다. 어려운 주제를 생각 없이 덥석 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문제의식들을 실제 삶에서 풀어내고 실천할 계기와 방식이 저 스스로에게 잘 안 보였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내 삶에서 선명하지 않은 것이 글에서만 빛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래서 글쓰는 것이 많이 무섭기도 했고, 멀리 도망쳐버렸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모로 아쉬운 글이었지만, 이를 자양분 삼아 앞으로 저의 지속가능한 삶과 그 조건에 대해 더 치열하게 고민해야겠습니다. 그럼 다들 따뜻한 새해가 되시길 바라요.

 

익명이

많은 사람들의 문제이자 나의 문제이기도 한 주제로 글을 써내려가는 과정에서 많은 고민과 걱정이 있었습니다. 처음 한 글자도 떼기가 쉽지 않았지만 옆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배우면서 방향을 서서히 잡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글을 읽은 누군가에게 이 글이 어떻게 다가갈지 궁금하고 무척 두근거리네요!

이번 호는 교육저널이 대행을 거치지 않고 자체 발간하기 때문에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취재하고 인터뷰하고 글 완성하느라 교널 멤버들 너무 고생많았어요

따뜻한 봄이 올 때 우리의 호도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나가기를~




미쓰백#아동폭력#한국여성진흥원

노누

 

 

지난 11월 언제 신청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영화 토크쇼에 초대되었다. 예고편을 보고 누군가의 짧은 감상평을 읽은 후 이 영화를 꼭 보겠다고 다짐했지만, 상영관이 별로 없었다는 변명과 함께 일상에 치여서 금방 잊어버리고 결국 상영 기간을 놓치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에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여성 진흥원에서 마련한 영화 상영회 겸 토크쇼를 신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생각했지만, 문자가 오고 나서야 그런걸 신청했었지하고 생각이 났다. 영화가 끝나고 느낀 점은 이 영화가 결코 편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본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을 엄마에게 학대당하고 버려져 자란 백상아는 자신을 강간하려던 사람에게 상해를 입혀 전과자라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세차, 마사지 샵 등 일용직을 전전하면서 세상과 동떨어져 경찰관인 장섭과 살고 있던 어느 날 작고 마른 지은이 추운 겨울 길바닥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것을 보고 단번에 상아는 그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았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외면하려고 하지만 결국 지은을 지키기를 선택한다. 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설사 자신이 피를 보더라도.

이제까지 남성 중심적인 영화가 흥행의 한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고 있던 와중에 미쓰백의 등장은 여성 영화계의 반가운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상영조차 쉽지 않았고 초기 상영관 수도 매우 적었기에 조기 퇴장을 할 위기도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팬들은 스스로를 쓰백러라고 칭하며 적극적으로 영화를 홍보했고 한지민의 모교인 서울여대 학생들은 단체 관람을 하기도 했다. 스크린 수 유지를 위해 팬들이 모은 노력에 미쓰백은 손익분기점을 넘고 거기다가 상영 연장까지 이루어냈다.

특별한 다른게 없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작품성이 이 영화가 가진 가치가 아닐까. 미쓰백의 상영은 그 자체를 영화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눈물겨웠다. 미쓰백을 두고 한지민 판 아저씨, 아저씨의 여자 버전이라고 보기도 한다. 아저씨는 청소년 관람 불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육백만을 돌파했다는 것이 놀라울 성과다. 그러나 미쓰백과 아저씨는 비슷한 내용과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저 아저씨가 여성으로 바뀌고 자극적인 요소가 없을 뿐인데도 결과가 천지 차이인 것이 찜찜했다. 한국 여성 영화의 여전히 멀었지만 미쓰백을 포함한헐스토리, 소공녀등 훌륭한 작품들을 발판으로 앞으로 시작일 것이다.

미쓰백을 보고 가장 좋았다고 생각되는 점은 상아가 지은이의 엄마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누군가를 보호하는 여성은 어머니라는 공식이 이 영화에는 없었다. 심지어 지은이의 엄마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여태껏 영화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던 배우자, 파트너, 어머니로서 여성이 아니라 미쓰백은 그저 미쓰백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지은이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도 스스로 자신을 미쓰백이라고 명명했다. 어떤 약자와 보호자의 구도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관계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응원하게 된다.

 

아줌마 아니다. 미쓰백. 그렇게 부르라고...”

 

이지은 감독은 실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전에 살던 아파트의 옆집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 집의 아이를 복도에서 마주쳤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어떤 조치도 하지 못한 상태로, 그 집은 이사를 가버렸고 이지은 감독은 아이의 눈빛을 잊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미쓰백을 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실제 있었던 아동 학대 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2015년 있었던 맨발로 배관을 타고 세탁실에서 탈출한 아이가 슈퍼에서 과자를 훔쳐 먹다가 주인이 신고하면서 밝혀져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한 그 사건이 영화에 담겨있다. 상아가 지은이를 만나는 장소가 슈퍼 앞이라는 것도 이 실화를 일부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연 나라면 지은이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가 있었을까. 상아가 차마 지은이를 외면하지 못한 것처럼 다가갈 수 있을까. 개인의 서사를 떠나서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그런 사람들을 내가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을지 결정하기 힘들 것 같긴 했다.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간절한 손길을 알게 모르게 외면해 왔을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 무슨 참견이냐고, 끝까지 책임질거냐고 묻는다면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망설인다. 이 영화는 비단 가정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렇게 무기력하게 으스러져가는 사람들을 도울 손길을 망설이는 나와 같은 사람들은 위한 영화가 아닐까. 현재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국가와 사회 제도의 미진한 점과 더불어 확충해야 할 필요성은 당연한 것이고 개인과 개인의 연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말 한마디. 미쓰백은 누구나 망설일 수 있는 상황에서 관객에게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 묻는 것 같았다.

 


새로운 대학 만들기 프로젝트!

- 민주주의편 : 총장직선제와 그 너머의 정치학

이물

 

 

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직선제

 

내 삶을 내가 결정해야할까? 혹은 그럴 수 있을까? 그에 대한 한 가지 생각은 민주주의. 인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꿈꾸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제도이자 사상이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정말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 과연 어떻게 구현가능한가? 그 한 가지 방법은 대의제. 일종의 타협으로 몇 명의 대표를 선출하는 대의제가 민주주의와 결합하여, 역사 속에서 누구를 어떻게 뽑는지가 구체화되었다. 때문에 대표를 뽑는 과정이 곧 민주주의나 내 삶의 결정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모두의 주인됨과 종종 배치되기도 했다.

이렇게 대의민주주의의 기이한(?) 동거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직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대표를 직접 선출한다는 사실 자체가 곧 민주주의의 완수는 아니다. 몇 번의 선거 경험을 거친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대표를 한 번 선출한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으며, 그 과정만 남으면 인민은 통치자의 관리와 통제를 받는 대상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대표를 모두가 직접선출할 권한을 얻는다는 것의 의미도 분명 있다. 다양한 집단이 의사결정에 개입할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하고, 그동안 개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권력에 저항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처럼 직선의 의미는 복잡하다. 1987년의 성과인 대통령 직선제는 단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의 성과이기도 하고, 민주주의의 완수로 곡해되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막연해진 계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직선제를 의미화하려면, 직선의 의미를 담보하는 두 가지 질문이 항상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내 삶의 결정권(민주주의)을 가질 수 있고, 그 방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직선은 그 방식 중 하나이며,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결국 우리는 삶의 총제적 정치 행위와 지향 속에서 직선이라는 방식의 의미와 효과를 평가해야 한다.

 

총장직선제의 역사와 의의

 

민주화운동과 총장직선제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의 경로 중 하나는 다양한 생활공간에서의 민주주의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는 해당 공간의 민주적 의사결정제도 확립, 대표 직선제로 구체화되어 전개됐다. 대학도 다르지 않았다. 876월 이후 대학은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학생, 교수들이 주체가 되어 대학과 정부, 사학재단을 상대로 개혁을 시작한 것이다. 대학 운영의 민주화, 권력에 대한 대학 자율화가 그 핵심이었다.

특히 각 대학에서 결성된 교수협의회는 총/학장 직선제를 대학 자율성 확립을 위한 당면과제로 내세웠다. 정권과 재단의 대리인이었던 총장을 직접 선출해 교권과 학문의 자유를 수호하자는 의미였다. 88년 계명대를 시작으로 대부분의 대학에서 총/학장 직선제를 실시하였고, 임명을 재단이 거부할 경우 이에 저항했다. 세종대, 고려대 등 일부 대학에서는 학생과 직원도 선출에 참가하게 해달라는 요구도 존재했고, 여론수렴위원회, 후보추천위원회 등의 간접적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경로가 만들어졌다.[각주:1]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1990년 사립학교법이 제정되고, 사립학교 재단의 교수 탄압과 대학 장악이 심해졌다.[각주:2] 김영삼 정권의 5.31 교육개혁은 대학 민주주의 없는 재단 자율화를 자극했다. 대학 재단의 권력을 강화해줌으로써 국가의 대학재정 투자 책임을 회피하고, 이를 대학 재단의 노력과 대학 간 경쟁의 영역으로 떠넘기기 위함이었다. 이에 포퓰리즘, 선거운동 과열, 보직 나눠먹기 등을 근거로 직선제를 폐지하고 재단 이사회 중심으로 학내 권력을 편중시키는 대학이 늘어났고, 98년 대교협 세미나에는 대학 총장들이 모여 총장 직선제 폐지를 결의하기에 이른다. 국립대 총장직선제 폐지는 2000년 김대중 정권의 제안에도 구성원의 저항으로 잠시 유예되었지만,[각주:3]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대학재정지원을 매개로 한 간선제 유도에 따라 자발적 폐지 수순을 따랐다. 그 과정에서 2015년 부산대 김현철 교수가 총장직선제 폐지와 대학 민주주의의 상실에 분노하며 투신했다.

 

총장직선제의 의의와 한계

총장직선제 요구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학원 민주화의 의미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대학의 운영이 국가와 재단 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에서, 대학이라는 학문, 생활공간을 지켜내려는 노력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학장 직선제가 민주화의 상징이 된 것은 독재 정권 아래서의 끊임없는 통제와 간섭, 자율성 상실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각주:4]이다.

 

故 고현철 부산대 국문학과 교수가 총장 직선제를 요구하며 투신해 숨졌고, 교수회와 총학생회의 농성 등을 거치며 부산대는 총장직선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사진출처 : 민중의 소리)



그러나 역사 속의 총장직선제가 가졌던 한계도 분명하다. 첫째로, 무엇보다 그간의 총장직선제는 교수 중심의 직선제였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때문에 교수 중심의 권력관계가 공고해지고, 대학 자율성이 사회와 동떨어진 교수 중심의 상아탑을 의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평의원회와 학내 의사결정구조에 대한 논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문제점이다. 둘째로, 총장직선제 요구의 구조적 한계도 있다. 총장을 아무리 완벽하게 뽑아도, 우리는 대표자 1인을 뽑았을 뿐이다. 선출된 대표자가 갖는 권력을 견제하고, 제도적 경로 내외에서 구성원의 의사를 반영할 정치가 없다면 대학은 대표자만의 것이 되고 만다. 때문에 그것이 갖는 효과에도 불구하고, 총장직선제는 권위주의적 정치와 수동적 대중이라는 한계에 갇힌 요청이 되기 쉽다.

 

대학 민주주의의 논의가 직선제와 교수 중심 의사결정구조로 수렴한다면, 그 끝에는 타성에 젖은 총장 선거와 정치공학적 논의만 남는다. 구성원들의 다양한 욕구는 과도하고 무리한 것으로 치부되고, 정치는 관료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 교수협의회와 대학 본부의 긴장관계, 이사회의 일방적 결정 속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이나 학생회의 요구는 떼쓰는 것 정도에 그친다. 혹은 이해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것, 뭘 잘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치부된다.

 

그렇게 민주주의의 논의가 정체된 대학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전문가들이 합리적으로 논의한 결과는 ‘4차산업혁명’, 국제화를 운운하며 대학의 규모만 팽창시키고 막연한 비전만 늘어놓는 것이 되고 있다. 교육적 질도 양도 제고하지 못한 채, 권위적 정치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전문가들이 만들 수 있는 최선인가? 사실 최선이다. 활발한 토론이 필요한 영역을 모두 행정적 언어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장직선제가 선거 운동의 과열이라는 지적은, 대학이 정치판이 된다는 호도를 걷어내면 일견 타당한 부분도 있었다. 견제 받지 않는 대표자 1, 교수 권력 중심의 직선제가 내포한 한계였던 것이다.

과거의 학생들은 어느 정도 이런 한계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90년대에 대학마다 결성된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는 어용교수 퇴진, 학교 예결산 공개, 교수 채용과 총장 선출에 학생 참여,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대학발전위원회 구성, 재단 퇴진 운동 등을 요구했다.[각주:5] 물론 모든 요구를 현실화하지 못했겠지만, 대표를 어떻게 선출하는가를 넘어서 대학의 정치적 생태계를 완전히 바꿔놓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반영된 요구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겐 총장직선제를 넘어서는 쟁점이 필요하다

과거의 한계를 극복할 뿐 아니라, 변화한 시대적 상황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2018년 현재, 여러 대학가에서 총장직선제가 대학 민주주의의 핵심 쟁점으로 거론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거치며 여전히 총장이 정권의 대리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화여대 학생들을 필두로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총장직선제 요구가 촉발됐다. 문재인 정권의 교육부는 대학별 총장선출을 자율에 맡기겠다고 전향적 태도를 취했으며, 대학 내 교수집단도 이에 반응하고 있다.

현재의 논의지형에서 총장 직선제는 당연한 것, 꼭 필요한 것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총장 직선제는 그 자체로 당연하지도, 꼭 필요하지도 않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수단이므로 그 목적이 밝혀져야 한다. 지금 대학이 처한 상황과 역사적 맥락에 맞는 역할이 부여되어야 한다. 과거의 총장직선제가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재단의 간섭과 통제에 저항하는 의미를 가졌다면, 지금은 어떠한지 해명되어야 한다. 어떠한 맥락과 근거도 없이 민주적 수사로 제출되는 총장 직선제는 실물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힘들며, 변화한다 해도 권력을 가진 자들의 제도에 포섭되는 방식이 되기 쉽다.

총장 직선제라는 요구가 의미 있으려면, 대학에서의 정치가 왜 필요한지를 근본적으로 묻고 그 속에서 다시 고려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대학 자율성과 대학의 사회적 기능, 대학 민주주의, 대학에서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정치화하고 실천할 담론과 공론장, 정치적 세력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총장직선제는 그저 우리가 총장 뽑자!’, 라는 요구여서는 안 된다. 대학은 누구의 것이고, 어떤 삶이 거기 있고, 누구에 의해 어떻게 다시 기획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 속에서 다뤄야 한다.


 

다시 생각하는 대학의 정치

 

대학 자율성의 현재적 의미와 총장 직선제

총장직선제는 항상 대학 자율성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대학 자율성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그것은 국가로부터 사학 재단이 독립할 자율성을 이야기할 때도 있고, 대학이 하나의 법인으로 수익사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자율성을 말할 때도 있다. 혹은 교수사회가 사회와 동떨어져서 상아탑을 지킬 수 있는 고립된자율성을 요청할 때도 있다.

대학 자율성은 무엇이고 대학은 왜 자율성을 가져야 하는가? 사실 완벽한 자율성이라는 것은 어디서나 허구다. 모든 사람과 공동체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율성은 필연적 의존 관계에 개입하는 권력과 지배의 속성을 의미한다. 상호의존 속에서 침해받지 않아야할 것, 보장받아야할 것은 무엇이며 이를 실현할 권력 체계는 무엇인지 가치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대학은 지식 생산기관이다. 여기서의 자율성은 구성원의 자기결정권과 지식 생산의 자유다. 그러나 이는 그것을 억압하는 권력 속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결국 대학 자율성은 사회와 동떨어진 자율성도, 본부가 수익사업을 할 자율성도 아니다. 권력에 저항하여 구성원 모두의 결정권과 지식의 자유를 담보하는 대학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자율성을 말한다.

7, 80년대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대학 자율성은 정부와 사학재단의 통제와 개입에 대한 저항 속에서 확보됐다. 대학 자율성의 정당성과 실체는 민주화운동 속에서 갖추어졌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통제와 개입은 여전하며, 오히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더 적극적으로 정부 관료나 외부 인사의 개입을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이 대학을 지배하는 새로운 주체로 등장했다. 정부와 재단은 기업의 직간접적 요구에 부응하여, 선택적 학문 지원, 노동자 통제, 학생(고객)관리와 취업률 제고. 산학협력 등 대학 경영을 수행한다. 대학이 생활공간이라는 관념이 무너졌고, 취업을 위해 거쳐 가는 교육서비스 제공의 공간이 되었다. 권력의 개입이 예전만큼 구성원들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더 이상 대학 공동체도, 주체도 없기 때문이다. 대학을 시장화 하는 속에서 정부와 재단의 전통적 권력은 더욱 힘을 얻는다. 따라서 오늘날 대학 자율성의 정당성과 실체는, 시장화에 저항하여 구성원과 지식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구상 속에서 확보된다. 여기서 우리는 대학이 어떤 공간이어야 하냐는, 대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려대학교 김예슬 씨는 2010년 3월 "자본과 대기업의 하청업체가 된 대학을 거부한다"는 대학거부선언을 남기고 학교를 떠났다. (사진출처 : 한겨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가는 대학 보편화의 시대다. 그러나 대학은 기업 친화적 노동자와 지식을 생산하는 기관이 되어가고 있다. 이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대학 공공성이 주장된다. 대학이 기업과 서비스 구매자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이해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대학이 지식과 노동시장, 학벌 문화 등의 영역에서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고, 애초 대학과 지식 생산이 일정한 목적을 갖고 개인과 집단이 수행하는 사회적과정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고 있으니, 모두를 위한 것으로 전유해내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새롭게 기획되어야 할 공공의 내용이 무엇이고,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답변은 비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재정지원 확대, 대학의 사회적/공공적 기능에 대한 재정립, 대학 내 민주주의의 달성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공공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경제적 토대, 이론적 전망과 함께 그것을 추동할 민주주의(정치적 주체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 총장직선제는 대학을 공공적으로 재편하는 이 프로젝트의 민주주의적 축에서, 하나의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총장 직선제

때문에 총장직선제의 한계를 보완하고 의미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대학 공공성을 지향하는 대학 자율성의 전략으로 제출되어야 한다. 이는 형식적으로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총장 직선제를 주장하고, 내용적으로 이를 저해하는 권력을 가시화하고 공공적 대학의 건설을 주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이사회의 승인을 거치는 사실상의 간선제도, 교수회 중심의 반쪽짜리 직선제여서도 안 된다. 학생, 비정규직 노동자 등 이제까지 총장선출 권한을 인정받지 못했던 이들까지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든 구성원의 총장직선제는 교수 중심으로 수렴되었던 과거 직선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실질적으로는 그간 소외된 이들이 대표 선출에나마 제한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상징적으로는 이를 저해한 권력을 가시화, 공론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함께하는 총장직선제를 주장할 때는, 이를 거부하는 총장-이사회의 제왕적 권력,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대학 본부의 경영 정책, 정부의 대학 비정규직 정책, 그에 비해 강력한 기업의 대학 영향력 같은 것들이 꼭 함께 다뤄져야 한다. 나아가 교육, 연구, 노동, 예산과 의사결정 등 대학 운영과 기능 전반에 대한 논점이 총장 선거를 중심으로 쟁점화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공공적 대학 건설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 내는 데에 총장직선제가 기여할 수 있다. ‘우리 총장을 우리 손으로라는 당연한 구호보다 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다.

때문에 지금도 각 대학의 총장직선제를 위해 싸우는 이들의 투쟁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상지대, 동국대 등에서 나타나는 사학재단의 비리와 횡포는 구성원에게 실질적인 위협과 피해를 불러일으킨다. 국공립대의 총장간선제는 정부와 보직교수들의 입김 아래 대학 운영을 병들게 하고 있다. 그동안 배제받았던 이들의 개입을 요청하는 일련의 요구는, 대학을 그 어느 때보다 민주적 갈등의 장소로 만들어 새로운 정치의 시작을 가능케 하고 있다.


 

대학 공공성을 향한 대학 자율성

그러나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총장직선제가 정상화, 혹은 민주주의 종결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총장직선제가 실현된 이후의 삶은, 총장직선제를 일단 실현하고 난 뒤가 아니라 바로 지금, 충분히 상상되어야 한다.

총장직선제의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직선제는 언제나 대학의 정치(대학 공공성을 향한 대학 자율성)이라는 큰 틀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학내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대표 선출 외에도 구성원들이 상시적으로 대학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 구성원 간 논의가 오고 갈수 있는 공론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대학 공공성을 담보하는 정치적 주체와 공간을 어떻게 재창출해낼 수 있는 지다. 따라서 때에 따라서는 총장직선제의 요구가 전면에서 물러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오히려 선거 쟁점을 토론하고 선출된 권력을 견제할 정치적 경로와 공동체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총장직선제만 형식적으로 도입된다면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투표할 권리를 줬는데도 관심이 없다는 비난이나, 투표권을 줬으니 다 된 것 아니냐는 정당화에 처하기 쉽다. 대중 스스로도 연례의 투표만 의무적으로 수행하고 탈정치화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구성원 간 동등한 비율의 참여가 아닐 경우 더욱 심각하게 대두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대학 내에 정치적 주체와 공동체가 사라져있는 곳에서 직선제 요구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들릴 지도 의문이다.

이것은 총장직선제가 위험하거나 버겁기 때문에 나중으로 미루자는 말이 아니다. 총장직선제를 지금의 대학에 왜 필요한지 검토하고, 대학 민주주의의 종합적 전망과 동시에혹은 그 안에서 제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 전략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토론될 영역이겠지만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총장직선제 쟁취구호를 유지해야 한다면, 단순히 이를 총력투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총장직선제로 출발하는 대학 민주주의라는 구호를 내세울 수 있다. 구호 뿐 아니라 구안에서부터 구성원들이 배제되었던 여타의 문제를 부각하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각 기관별 의사결정기구의 개혁과 함께 요청할 수도 있다. 한편, 대학 민주주의의 종합적 청사진을 제시하고, 그 활동의 목표중 하나로 총장직선제를 제시할 수도 있다. 나는 특히 후자의 방안과 관련해, ‘대학 민주주의의 종합적 전망이 더욱 풍부해졌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다. 총장직선제는 물론이거니와, 평의원회와 이사회 개혁을 넘어서 대학의 예산 결정 구조 재편, 학생회 (혹은 다른 방식의 정치적 공동체) 재건 및 활성화, 정부-대학 간 재정지원의 대안적 모델, 산학협력 등 대학 내 기업의 영향력과 비민주적 개입 검토, 대학 내 참여를 박탈하는 차별/폭력 해소와 문화 개선, 교육과정과 수업에 대한 민주적 토론과 의사결정 도모 등 다룰 수 있고 다뤄야 하는 주제는 너무나도 많다. 이 주제를 포괄하면서도, 시급하고 핵심적이라고 여겨지는 구호가 전면에 내세워져야 할 것이다. 87직선제의 타성에 젖어 직선제가 모든 것의 해답이자 종결인 것처럼 다뤄져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권위적 대표 개인과 그에 관한 절차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교육, 공동체, 경제, 문화를 아울러 전개되어야 한다.


  

결론

 

대학의 정치는 대학 구성원의 평등한 관계, 교육과 지식의 생산, 그것의 사회적 기여를 위해 필수적이다. 대학은 자신의 기능을 사회화하여 각계각층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 공유하고 토론을 촉발할 책임이 있다. 이렇게 생산된 지식은 개인과 사회의 성장 수단으로, 사회 변화의 동력으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해소하는 무기로 활용될 수 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대학 민주주의의 종합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이 글은 말하고자 했다.

 

대학을 다닌 지 벌써 4년이 다 되어간다. 나는 대학생인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대학은 무엇이며, 무엇이어 하는가?’라는 고민을 붙잡고 살았다. 공부할수록 알게 된 비관적 전망은, 역사적으로 대학은 단 한 번도 권력에 의존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왕실과 종교 권력, 국가 권력을 넘어 지금의 시장 권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대학은 자신의 살 곳을 찾아왔다. 그래서 나는 대학을 사회화하고, 대학 공공성을 추구하자는 말이 너무나 자연스러우면서도 어딘가 탐탁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런 당연한 언설이 아니라, 그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우리는 기존의 억압적 의존 관계를 어떻게 탈피할지, 새롭고 적절한 의존(혹은 실질적 자립)의 형태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상상해야 한다.

비관적 전망 한편에는 파편화된 낙관적 희망들도 있다. 60년대 일본 전공투의 지식의 전쟁 및 국가 동원에 대한 비판, 68혁명기 대학생들의 자주관리를 향한 열망, 한국 민주화 운동기 학생운동과 사회변혁의 노력은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다른 전망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지식과 교육의 가치, 저항 가능성,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으며, 많은 과제를 남긴 만큼 대학과 사회의 생리를 변화시켰다.

그들이 얼마나 대단해 보이든 간에, 지금 대학과 우리가 처한 시대를 겪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지금을 해석하고, 말하며, 실천해나가야 한다. 언어는 끊임없이 생성, 재조합된다. 그 치열한 고민의 과정에 이 글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지금도 언어를 갈고 닦고 말하고 실천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글을 마친다.

 

  1. 김정인, 『대학과 권력』, 휴머니스트, 2018, p.267 [본문으로]
  2. 위의 책, pp.261-268 [본문으로]
  3. 위의 책, pp.290-291 [본문으로]
  4. 위의 책, p.262 [본문으로]
  5. 위의 책, p.263 [본문으로]


총장직선제, 어디까지 왔나?

사진과 사례로 보는 총장직선제 현황

 

뚱인데요

 

(양해의 말씀 :  '사진'과 사례로 보는 현황이나, 블로그 담당자의 미숙으로 사진을 아직 업로드하지 못 하였습니다ㅠㅠ 곧 업로드 될 예정이니, 조금만 기다려주시고, 궁금하신 분들은 일단 교지 33호를 12동 1층, 학관 1층, 중도, 인문대 등지에서 만나보시길 추천드립니다!)


학생에게 투표권을!’ ‘학생도 학교의 주인이다!’

 

작년 한 해 동안 서울대를 포함한 수도권 대학가에서 가장 시끄러웠던 이슈를 꼽으라 하면 단연 총장직선제일 것이다. 2017년의 이화여대를 시작으로 대학가에선 민주주의를 원한다는 목소리와 함께 동시다발적으로 다가오는 총장 선거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각 학교의 학생사회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학생의 투표권을 쟁취하고자 노력하였다. 현 상황을 이끌어낸 현상을 진단하는 것도 중요하나 그건 다른 글에서 다른 필자가 다뤄줄 테니 이번 글에서는 각 학교와 서울대의 총장직선제 운동 흐름을 비교하고 이를 얕게나마 분석하고자 한다.

 



서울대 밖의 사례


서울대를 제외한 여러 학교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총장직선제를 요구하는 투쟁이 있었으나 그 결과는 학교마다 다르다.

우선 성공적인 사례로는 이화여대와 성신여대, 그리고 상지대가 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이화여대는 박근혜-최순실 스캔들에 연루된 전 총장 최경희를 퇴진시켰고, 이후 개교 131년만에 교내 구성원이 모두 참여(교수 77.5%, 직원 12.2%, 학생 8.5%, 동문 2%)하는 총장직선제를 도입해 20175월에 총장선거에서 김혜숙 교수가 총장으로 당선되었다. 다음 사례인 성신여대는 3차례 연임하며 10년 남짓 재임한 심화진 전 총장이 교비를 사적으로 유용한 혐의로 20176월 총장직에서 물러나고 같은 해 7월 징역 1년을 선고받은 후 취임한 김호성 전 총장이 총장직선제 도입을 위해 노력하는 등 학내 여러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20185월 제11대 총장선거에서 처음으로 학내 구성원들이 모두 참여(교수 76%, 직원 10%, 학생 9%, 동문 5%)하는 방식의 총장직선제가 시행되었고 그 결과 지리학과 양보경 교수가 당선되었다. 11대 총장에 당선되었다. 상지대 역시 사학비리 등으로 분규를 겪다 201810월 개교 이래 처음으로 학내 구성원들이 참여(교수 70%, 학생 22%, 직원 8%)하는 직선제로 총장을 선출하였고 그 결과 사학비리에 맞서 상지대 정상화 투쟁을 주도하고 2017년부터 총장 직무대행도 맡아왔던 정대화 교양학과 교수가 제7대 총장으로 당선되었다.




고려대2018년 총학생회장이 총장직선제를 요구하는 노숙단식 투쟁까지 하였으나 최종적으론 직선제 도입이 무산되었고, 대신 총장추천위원회에 서울캠퍼스 총학생회장, 일반대학원 총학생회장, 세종캠퍼스 총학생회장 3명이 학생위원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교수의회의 투표에서 5% 이상의 표를 얻은 6명이 총장추천위원회로 올라가고, 교수 15, 교우회 5, 법인 4, 교직원 3, 학생 3명으로 구성된 총장추천위원회에서 1명당 3표씩을 행사하여 최종후보 3명을 선출해 이사회에서 최종후보자 1인을 선정한다. 이 과정에서 서울캠퍼스 총학생회는 자체적으로 학생투표를 실시해 학생투표에서 1,2,3위를 한 후보에서 서울캠퍼스 총학생회장이 표를 행사하였다. 이후 이사회에서 총추위 투표에서 공동 2위를 한 정진택 기계공학과 교수가 총장으로 당선되었다. 정진택 당선인은 교수의회 투표에서는 5, 서울캠퍼스 학생투표에서는 3위를 하였다.

 

동국대2018년 전 총학생회장이 총장직선제와 한태식(보광스님) 당시 총장의 연임반대를 요구하는 고공농성을 하는 등 총장직선제를 위한 학내구성원들의 노력이 있었으나 1218일 최종합의가 결렬되며 고려대처럼 기존의 총장추천위원회 이사회 방식으로 총장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고공농성의 다른 요구사항이었던 한태식 전 총장의 연임반대는 한태식 전 총장이 총장선거에 불출마하며 이뤄졌고, 새로 총장으로 당선된 윤성이 식품산업관리학과 교수는 한태식 총장 체제에서 보직교수를 지내지 않은 인물이다. 동국대 사학재단의 문제는 여전히 산적해있으나 분명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중이라 볼 수 있겠다.

이외에도 많은 대학에서 총장직선제 실현을 위한 노력이 있었고 지금도 있으나, 아직 많은 대학-특히 재단과 이사회에게 절대적인 권한이 있는 대부분의 사립대학-에서는 총장추천위원회와 이사회 위주의 간선제 시스템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

 

총장직선제와 한태식 총장의 연임반대를 요구하는 고공농성 36일차에 돌입한 안드레 전 동국대학교 총학생회장. 고공농성은 37일차인 2018년 12월 19일에 해제되었다. (사진출처 : 안드레님 페이스북)



서울대의 사례 


서울대학교 역시 총장직선제 쟁취를 위해 학내 구성원들이 수많은 노력을 해왔다. 총장직선제 의제가 처음 학생사회에서 대내외적으로 제시된 것은 2017년 말 무렵으로, 59대 총학생회 말미엔 행정관 앞에서 총장직선제 실현, 부당징계 철회를 위한 서울대 긴급행동등의 노력이 있었으나 학생들의 참여는 저조한 편이었다.

이후 60대 총학생회에서 처음으로 정책평가에 학생들 전원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총장선거에선 총장추천위원회의 평가가 30%, 정책평가가 70% 반영되었고 정책평가에서도 학생의 반영비가 가장 적어 전체로 따지면 학생의 투표권은 7.9%에 불과했다. 정책평가가 선호하는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아니라 각 후보의 정책에 점수를 매기는 시스템으로 진행되었다는 점, 여기서 선발된 3명의 후보 중에서 이사회가 임의로 최종후보자 1명을 선정할 권한이 있었다는 점에서 완전한 직선제가 실천되었다고 보기 어렵고, 평가방식이 직관적이지 못해 학생들의 실질적인 권한은 더욱 미미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러한 문제점으로 인해 60대 총학생회는 초반에 이를 지적하는 학우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하지만 적어도 학생은 총장선거 과정 중 어디에도 참여할 수 없었고 그마저도 이사회에서 3명의 후보 중 공동 2위였던 성낙인 전 총장을 선정해 교수협의회에서도 유감성명을 내었던 지난 선거에 비해선 그나마 민주적인 시스템으로 총장선거가 진행되었다는 것은 발전한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총장추천위원회의 후보자 검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음이 강대희 최종후보자의 사퇴로 인해 드러났는데, 강대희 의과대학 교수는 20186월 총장선거에서 1위의 성적을 거두고 이사회에서도 최종후보자 1인으로 선출되었으나 뒤늦게 과거의 연구비리와 성폭력 고발이 터져 중도사퇴하였다. 의과대학 학장으로 재임할 당시에 이미 성추행 논란이 터져 사퇴한 바 있고 총장선거 초반에도 총장추천위원회에 이런 의혹이 접수되었으나 제대로 검토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총장선거 전반의 후보 검증시스템에 문제가 있었다 할 수 있겠다.

재선거 전까지 학생사회에서는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며 다시 총장직선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일어났으나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고, 11월 재선거에서는 오세정 명예교수가 1위를 해 201921일자로 총장이 되었다. 오세정 총장은 과거 2014년 총장선거에서도 1위를 거두었으나 이사회에서 성낙인 교수를 최종후보자로 선정해 밀려난 바 있다. 이 선거에선 정근식 교수가 교수·직원 평가에선 4위를 했으나 학생 평가에서 1위를 거둔 효과로 3위가 되어 3인의 총장후보자에 처음으로 선정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비교, 분석

 

앞서 말했듯이 총장직선제를 위해 수많은 학교의 학생사회 구성원들이 노력했으나 모든 이들이 직선제라는 성과를 쟁취한 것은 아니었고, 직선제를 도입한 학교들 사이에서도 학생의 반영비율은 천차만별이었다. 어떤 차이가 이런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낸 걸까?

먼저 과정을 보면, 마침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의 영향으로 탄력을 받은 경우(이화여대)와 순수하게 학생들의 요구로 총장직선제 논의가 시작된 학교(고려대, 서울대)의 사례가 비교된다. 비교적 좋은 성과를 거둔 상지대와 성신여대 역시 지속적으로 문제시된 사학비리나 전임 총장의 문제로 인해 총장선거 당시 사회적인 압박과 힘입어 학생들의 요구사항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순수하게 학생들의 요구로 총장직선제 의제가 시작된 학교는 이전에 있었던 사건이나 학교의 사회적 인지도로 인해 사회적으로 이슈를 만들기 좋은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도움을 받기가 힘들었고, 학생의 권력이 미미한 것을 알고 있는 학교 측에선 굳이 학생의 힘을 키워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학생들이 반응과 참여, 그리고 학생사회의 전략도 비교할 만한데 서울대의 총장직선제 투쟁은 상대적으로 학생들의 관심이 적었던 편이다. 이는 총장직선제 사안을 공론화할 시간의 문제나 당시 총학생회의 역량에서 원인을 찾을 수도 있고, 나아가서 시흥캠퍼스 투쟁과 H교수 파면 요구 투쟁 등에 집중된 학생사회의 역량과 이로 인해 누적된 피로가 영향을 주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대나 동국대처럼 강경한 투쟁방식을 사용하였고 학생들의 관심도도 미미하였다고는 볼 수 없는 학교에서도 좋은 결과를 얻기는 힘들었음을 봤을 때, 총장직선제 투쟁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강한 재단·법인 이사회와 보직교수의 권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 2014년 서울대와 2018년 고려대의 사례처럼 선거로 정해진 순위를 이사회에서 뒤집을 수 있는 시스템이 유지된다면 학내 구성원 내에서 참여비율이 어떻게 조정된다고 할지라도 진정한 직선제 선거라고 볼 수는 없는 법이다. 일부 구성원으로 구성된 총장추천위원회에 과도한 권한이 치중된 점 역시 비판의 여지가 있다.

 

대학의 주인은 학생이라는 슬로건은 이제 어느 정도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학생이 주인으로서의 권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총장선거에선 여전히 대부분의 학교가 학생을 비롯한 학내 구성원들에게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지 않고 있으며, 서울대 같은 경우는 오히려 2010년대 초반 법인화로 인해 총장선거에서의 학내 구성원의 권한이 후퇴할 뻔하기도 하였다. 이는 학생사회 내에서 학생이 어떻게 대학의 주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공론화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감히 진단한다. 이사회나 일부 보직교수들에게 권한이 집중된 체제는 대부분 학내 구성원-학생, 직원, 심지어는 교수까지-의 권리 후퇴로 이어지곤 했다. 단기간에 큰 변화를 얻기엔 힘든 법이겠으나, 그래도 여러 학교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변화는 점점 일어나고 있고 대학의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우리들도 이에 맞춰 총장선거와 이를 넘어선 대학가의 민주주의 실현에 관심을 많이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스쿨미투, 그 이후

- <페미니즘 교육> 후속 기사

당근


지난 봄·여름호의 ‘학교와 페미니즘특집에서 용화여고를 비롯한 스쿨미투와 학생들이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실천하고 만들어나가는 움직임을 다뤘다. 그 이후에도 스쿨미투는 계속되었고, 특시 9월 한 달 SNS를 중심으로 다시 스쿨미투 고발과 제보가 집중적으로 이어져, 11월 초까지 전국 68개 학교에서 학교에서 스쿨미투 고발이 있었다.

 

스쿨미투 이후, 학교는 달라졌을까?

 

조사, 처벌 및 학교 대응

11월 초까지 스쿨미투 고발 성폭력 사안 중 교육청 등에 신고조치가 된 사안은 36건이다. 이 중 교사에게 경징계가 내려진 경우는 6, 파면, 해임, 직위해제 등의 중징계가 내려진 경우는 23건이다. 중징계 비율이 높아, 사건 해결이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많은 학교에서는 일단 고발이 이루어지면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시간을 끌다가, 교육청 조사 결과 문제가 확인되면 가해교사를 잘라내고 문제 해결을 선언하는 식이다. 또한 교육청이나 학교가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있어, 여전히 가해 교사의 40%가 교단에 있다. 인천의 한 학교에서는 스쿨미투 고발 이후 학교가 교장의 사과 이외의 대책을 내놓지 않자 학부모들이 직접 나서서 피해실태 전수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학부모 조사 이후에야 교육청에서는 장학사를 파견했고, 학생들을 조사한 지 한 달 만에 경찰에 고발하며 교육청은 책임을 덜었다. 이러한 학교의 대처 과정에서 고발 학생 보호나 재발방지 대책은 없는 경우가 많으며, 학교나 교육청 자체적인 성폭력 대응 매뉴얼 같은 체계화된 대응 방안은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2차 가해

용화여고의 경우 교사 중징계 이후 교사들이 '어떻게 선생님에게 이럴 수 있느냐며 학생들에게 위협을 하거나 2차가해를 일삼았다. 일부 학교는 학교가 나서 고발 SNS 계정주를 색출하려는 시도를 하거나, 학교의 대응보고서에 제보 학생의 실명을 올리기도 했다.

특히 9월 이후에 이루어진 스쿨미투 고발 학교에서는 학생들에 의한 2차가해도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SNS 상에서 ‘#청소년페미가_겪는_학교폭력이라는 해쉬태그를 통해 제보되기도 하였는데, 성폭력 피해 사실을 폭로한 대자보에 '꺼져. 이름 까라' 혹은 '피해망상증이다'와 같은 언어폭력적 낙서를 하거나, 고발 포스트잇을 훼손하는 일이 있었다. 또한 어떤 학교에서는 스쿨미투 제보 학생에게 쉬는시간마다 찾아와 언어폭력을 저지르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스쿨미투 이후의 인식 변화

스쿨미투 이후에 학교 구성원들의 성폭력, 성차별 등에 대한 인식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아하 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에서 전국 13~18세 청소년 333명을 대상으로 올해 9월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투 운동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여성 청소년의 92%가 지지의사를 남성 청소년의 60%가 지지의사를 밝혔다. 또한 미투 운동이 어떤 사회적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질문에 여성 청소년의 60.8%페미니즘과 성 평등에 관심이 생겼다고 답한 반면 남성 청소년의 39.5%관심이 없어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리고 미투운동이 모든 남성을 가해자로 보는 것 같냐는 질문에 여성 청소년의 18.1%그렇다고 답한 반면, 남성 청소년은 49.2%그렇다고 답했다.

이에 대해 지난 1129일 서울시교육청과 아하 서울시립청소년성문화센터가 함께 주최한 미투시대, 백래시에 휩싸인 남자청소년을 위한 성교육 대안 모색세미나에서는 미투 운동과 스쿨미투 이후에 남녀 청소년 건 성 인식격차가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여성 청소년들이 성폭력과 성차별 부당함을 고발하는 가운데, 남성청소년은 이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모든 남성을 가해자로 몰고 있다와 같은 인식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새로이 남성 청소년들의 놀이문화로 등장한 유투브나 게임방송, BJ 등의 또래문화도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교사들은 어떨까? 교사의 인식에 대한 통계자료가 따로 있지는 않아 보인다. 다만 교사에 의해서 2차가해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거나, 심지어 최근 부산에서는 스쿨미투 가해자로 지목된 교사가 고발 학생 세 명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는 일이 있다는 것은 교사들의 인식변화가 혁신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판단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다만 113일 스쿨미투 집회에서 만난 전교조 여성위원회 소속 교사는 스쿨미투 이후, 소속 학교의 교사들의 인식변화가 있었냐는 질문에 스쿨미투에 대해서 저희 학교에 계시는 선생님들의 경우에는 굉장히 문제의식이 긍정정이라고 생각을 하신다.’ ‘스쿨미투 이전에는 외모 지적이나 아니면 여학생이‘ ’남학생이이런 것에 대해서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말씀을 하셨다면, 이후 (교사들끼리) 성인지감수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에 대해서 성차별적인 언어를 쓰면 안 된다고 말을 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자신의 언어를 자체 검열하고 말씀을 하시는 경향으로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 같다.’는 답변을 했다. 이는 학교 공동체의 문화나, 교사 네트워크의 상호작용에 따라서 교사에게도 인식 변화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스쿨미투 집회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이 가운데 113, 학생의 날을 맞이하여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을 비롯한 단체들이 교육부 등의 미온적인 대응을 비판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집회가 열렸다. 이날 집회는 학내 구성원 모두에게 정기적인 페미니즘 교육 시행’ ‘2차가해 중단’ ‘학내 성폭력 전국 실태조사를 이행 및 규제와 처벌 강화’ ‘성별이분법에 따른 학생 구분 및 차별 중단’ ‘사립학교법 개정, 학생인권법 제정으로 수평적이고 민주적으로 학교 재구조화의 다섯 가지 요구안을 걸고 진행되었으며, 주최 측 추산 300명이 모였다. 서울파이낸스센터 앞에서 서울시교육청 앞으로 행진하여, 서울시 교육청 앞에 ‘with you’ 현수막을 걸고 마무리 되었다.

집회에서는 다음의 발언들에서 드러나듯 주로 학교의 위계질서와 불평등 자체를 뿌리 뽑고, 사회 구조를 바꿔야 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당일 발언(1) : 용화여고 성폭력 뿌리 뽑기 위원회

“(학교에서 성폭력 문제가 곪아 터질 지경에 이른 이유는) 그들이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가도록 사회가 용인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생을 비롯한 기간제 젊은 교사들도 학생과 다를 바 없는 대우를 받기 십상입니다. 교내 위계관계에 따른 부조리는 비단 선생과 학생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생과 선생 사이에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립학교의 경우에는 그러한 위계관계가 선생과 이사장 사이에도 존재하며 그들의 잘못된 지시와 문화가 학생들에게도 내려오는 문제로서, 즉 미시적 수준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사들도 학생들에게 일어나는 문제가 잘못된 것인지 모르거나 알게 되어도 현실에 부딪혀서 암묵적으로 수긍하게 되는 현실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학교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구조를 바꾸기로 했습니다. 눈앞의 선생과 사람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 역시 구조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임을 인식하고 진정한 문제의 원인을 뿌리 뽑기를 원합니다.”


당일발언(2) : 충북여중 교내 성폭력 공론화 운영자

“(113일에 스쿨미투 7주차가 되었는데) 그 동안 해당 교사에 대한 직위해제가 내려졌습니다. 의견 수렴함을 교내에 설치하고 교사들의 개선 의지를 약속받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뿐입니다. 여전히 학교는 교사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고 학생과 교사 간 위계질서, 학생의 발언권 침해, 여성에 대한 성적대상화 등 근본적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은 모색되지도, 필요성이 언급되지도 않고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이단처럼 취급되고 성소수자가 이상하고 신기한 사람들인 학교는) 혐오표현이 넘쳐나는 혐오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운동은 모든 학교에서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함 발돋움 입니다.”[각주:1]

 

 

위와 같이 각 발언들은 모두 가해 교사 한 명을 처벌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었다. 학교가 불평등한 구조와 위계관계가 변화하지 않으면 문제가 반복되며, 성폭력이 단순 일탈로 받아들여지고 페미니즘이 이해될 수 없는 혐오와 성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취지의 발언들이 여럿 있었다. 이들은 성폭력 처벌 강화 및 2차 가해 중단과 같은 당면한 해결책을 넘어 사립학교법 개정 및 학생인권법 제정’ ‘페미니즘 교육 시행과 같은 근본적인 대안에 대한 문제의식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와 더불어 집회에 참여한 비학생-주체들에게서도 각각의 위치에 따른 고민과 문제의식을 들어볼 수 있었다.

 

교사 (전교조 여성위원회 소속)

 

Q. 교사에 의한 성폭력이 이렇게 만연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일단은 교사들의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한 부분이 있어요. 교사 공동체 자체가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하다 보면, 무엇이 잘못인지 모르시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 것 같더라구요. (또 교사를 대상으로 하는 성폭력 예방 교육 등이) 전문적인 강사를 초빙해서 강의를 하는게 아니라 형식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서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해지는)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Q. 학교에 가장 시급한 변화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교육과정 안에 페미니즘 교육을 넣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범대에서도 예비교사들에게도 성인지 감수성을 가질 수 있는 교육과정이 개설되고, 적합한 강사가 와서 강의를 해서 형식적이지 않고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예비교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주최 양지혜 (청소년 페미니즘 모임)

 

Q. 오늘 이 집회를 기획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A. 스쿨미투가 200여일 넘게 지속되고 있는데 정부나 교육청 등은 이제야 장관이 피해학생을 만나는 등 소극적인 대처를 하고 있습니다. 9월에 수십 개 학교에서 고발이 이어졌는데, 이후 학교에서 돌아온 건 2차 가해나 징계협박이었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학교에서 개별적으로 싸우고 고립되어 (스쿨미투가) 피해사실로만 남고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렵게 터져나온 고발이 우리가 함께 모여 평등한 학교로 나아가는 첫 발걸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학생의 날을 맞아서, 특히 스쿨미투의 경우에는 학생인권과 긴밀한 연관이 있기도 하기에, 여성인권과 학생인권이 없는 학교현장을 비판하는 취지에서 오늘 이 집회를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Q. 오늘의 집회가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 혹은 주고 싶은 메시지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A. 스쿨미투 고발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이 흐름이 단순히 일부 가해자 징계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성폭력의 구조와 학생인권이 부재한 현실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하는 문제라는 걸 말하고 싶어요. 그래서 우리가 안쓰럽고 무력한 피해자들이 아니라 당신과 이 학교에서 동등하게 숨 쉬면서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것, 그리고 여학생들의 말할 수 없는 현실이 고발되었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여학생이 말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이라는 것을 전달하고 싶습니다. 유은혜 장관 등이 스쿨미투 해결 하겠다고 말하지만 사실 학교 현장에서는 학내 성폭력 실태조사조차도 못 받아들이고 있는데, 대체 뭘 할 수 있냐는 생각을 많이 했었고, 더 과감하고 근본을 꿰뚫는 변화가 더 많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Q. 요구안 중 하나에 대해서 성폭력의 원인은 학교에 공기처럼 존재하는 성차별이다이런 설명이 있었는데, 학교에 성별이분법이 어떻게 존재하고 그게 성폭력과 어떤 연관을 맺는다고 생각하시나요?

A. 여학생들은 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같은 학생이 아닌 여성으로 인식되는 경험을 계속 겪는다고 해요. 그게 번호나 짝도 남녀로 구분되는 것 등에 따라서 교육도 매우 편향적으로 이루어지고, 2016년에 있었던 사건인데 운동장에서 여자가 축구를 하려고 하면 그게 학교의 반대에 부딪히기도 하는 일들이 이루어집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가능성을 계속 박탈하고, 여성이기 때문에 조신해야 한다, 남성의 부수역할을 해야 한다, 인간이 아닌 여성이다 고 말하는 이런 교육 자체가 여성을 인간답게 대할 수 없고,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을 없앨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Q. 마지막 요구안이 사립학교법을 개정하고 학생인권법을 제정해서 평등하고 민주적인 학교를 만들라는 것인데요, 근본적인 해결책에 관련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요구안을 내걸게 된 배경이 있나요?

A. 스쿨미투 고발된 학교 중 80%가 사립학교입니다. 그런데 이 학교들은 진짜 이사장이 주인인 학교인거에요. 그래서 성폭력을 저지른 사람이 이사장이 되어 성폭력을 저지른 교감을 감싸주고 앉아있거나, 가족들이 경영하고 있고 하다 보니 이런 현실들이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몇몇 가해교사 자른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고, 근본적으로 학교의 운영 구조가 더 투명하고 수평적으로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사립학교법 개정을 요구하는 것인데 지금에 존재하는 공영이사제도 심각한 사학비리가 있어야만 몇 년 동안 단기적으로 파견하는 수준입니다. 그래서 사립학교법 개정과 더 강력한 투명성을 보장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죠.

또 학생인권법 제정은 저희 집회에서 내놨던 거의 제일 주요한 구호 중에 하나라고 생각을 해요.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라는 제목으로 집회이름을 지은 이유기도 한데요. 교사가 생기부에 세부 특기사항을 얼마나 써주느냐가 학생의 진로나 미래를 결정하는 입시위주의 교육 자체도 문제이지만, 학교 안에서 교사가 발언할 창구는 많은데 학생은 자신의 부당함을 고발할 접수처조차도 없는 상황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학생인권조례가 있으면 교육청 안에 담당부처가 생기는데, 조례가 없는 지역에서는 전담처조차도 없습니다. 그래서 교육청, 교육부에서 최소한의 접수처도 만들어 놓지 않고 어떻게 학생을 위한 교육을 한다고 말할 수 있냐는 생각이 들어서 학생인권법을 이제는 제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교사와 양지혜 씨는 각각 스쿨미투의 원인을 교사와 교사 공동체의 낮은 감수성과 입시위주의 교육 및 사립학교의 폐쇄성으로 지적했다. 스쿨미투를 해결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교사들에 대한 성인지 감수성 교육과 학교의 비민주성 개선이라고 각각 밝혔다.

 



 

서울시 교육청의 답변


집회 다음 월요일,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스쿨 미투는 촛불 이후 달라진 다양한 주체들의 투명성, 공공성, 관계의 평등성의 요구라며, ’학교가 앞장서서 변화해야하며, 사회 전반의 공기를 다른 세대의 학생들에게 발맞추어 함께 바꾸어 나가며 요구안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서울시교육청은 11월 보도자료를 통해 다음과 같은 대책을 발표했다.


성인권 시민조사관 20명 위촉

- 성인지 교육 이수, 관련 경력 5년 넘은 전문가 집단으로 위촉

- 학교 내 성폭력 발생할 시, 담당 장학사와 시민 조사관이 참여하여 조사, 3개월 이후 학교의 재발방지 계획 모니터링

성폭력 전수조사 무기명으로 실시 이전처럼 무기명으로, 희망자에 한해 실명으로 교육감/여성단체 공동 운영하는 핫라인으로 신고

성폭력 사건 조사의 모든 과정을 가정통신문, 문자메시지로 공지

교육청에서 교직원 성폭력 직접 조사, 최대 파면 할 수 있도록 징계 강화, 교직원 대상 성평등 교육 실시

피해학생에 대한 심리치유와 법률상담

내년부터 교육청 안에 학교 성평등 전담팀 조직[각주:2]

 

  

스쿨미투가 필요 없는 학교를 위하여

 

스쿨미투가 학교와 교육에 남긴 과제는 무엇일까?

 

학교 운영 구조의 민주화

집회 발언과 집회 참여자들에 의해서 공통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부분은 성폭력이 학교에서 발생하는 일탈로는 치부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지적은 성폭력이 만연하다는 사실과 더불어 교사와 학생 간 권력의 문제를 성찰하고 질문하게 한다.

스쿨미투는 학교라는 공간 자체가 불평등한 권력관계가 존재하며, 운영 및 의사결정 구조가 성차별적으로 구조화 되어있다는 것을 폭로했다. 이는 학생뿐만 아니라 교생이나 기간제 교사, 젊은 여성 교사 또한 불평등한 학교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되기 쉽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스쿨미투는 단순히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는 교사 몇의 문제를 넘어, 불평등하고 비민주적인 학교의 문제가 성폭력으로 터져 나오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 스쿨미투는 학교 민주주의의 문제와 학생 권리를 포함하는 교사-학생 관계의 문제로 다루어져야한다.

학교의 운영구조가 수많은 피해자를 양산 했다는 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이상, 학교 자체를 민주적으로 재구조화하려는 노력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교장 공모제를 도입하고 교무회의 의결기구화를 추진하여 교사공동체를 평등하게 만드는 것과 동시에, 학생들을 학교의 운영에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고 권리를 부여해야 한다.

 

입시교육 넘어서기

불평등한 구조와 더불어 제기된 또 하나의 문제의식은 현재의 교육의 내용 자체가 학교의 불평등을 용인하고 재생산해왔다는 것이다. 입학사정관제도 도입 이후 학생 생활기록부가 중요해졌고, 그로 인해 교사의 자율권이 확대되었다는 것이 학생들의 말 할 권리를 박탈했다는 것이 폭로되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입시 위주의 교육, 다시 말해 평가가 중심이 되는 교육 에서 교수-학습관계는 교사의 일방적인 강의식 수업, 반복, 암기, 평가로 이어지는 보수적인 학습의 과정을 유지시킨다. 이 가운데 교사의 말은 절대적이고 이에 대한 학생의 비평과 비판은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이런 교실에서 학생의 발언권은 박탈되고 교사와 학생 간의 수직적인 관계는 심화되고 재생산된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교실을 토론이 가능한 공간으로 만드는 일이다. 서로에게 질문할 수 있고 문제제기와 비판이 가능한 교육을 의도하고 기획해야 불평등에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학생들은 이미 토론을 걸어오고 있다. 이에 응답할 수 있는 교육을 이제는 만들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말할 수 있는 페미니즘 교육

한편으로 학교에 다양한 문제제기와 변화를 일으키는 미투 이후에 남녀 청소년의 인식 격차가 확대되었다는 것은 페미니즘의 교육을 좀 더 세심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 페미니즘 교육이 기존의 교육과는 다른 대안적 관점을 제시하고, 다른 종류의 관계와 삶의 방식을 설득하고 있은 것이라면, 조금 더 유연하고 폭넓게 의제를 다루어야 할 것이다.

남성청소년이 미투운동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앞서 언급했듯 또래문화의 영향이 크다. 그렇다면 또래 문화 자체를 객관화하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일은 페미니즘 교육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평가와 훈계를 넘어, 이해와 공감의 언어를 만들 수 있다면, 페미니즘 교육은 모두가 참여하고 주체가 될 수 있는 공간으로의 변화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나가며

 

스쿨미투와 그에 응답하기 위한 일련의 움직임들은 학교와 교육의 변화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 가능성은 지난호 페미니즘과 교육에서 다뤘던 학교에서의 교육과 운동의 연장선상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움직임들은 한 차원 더 나아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스쿨미투는 교육에 페미니즘을 덧붙이는 것을 넘어, 학교를 더욱 투명하고 민주적인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것과 교육의 내용 자체를 재구조화 하는 하는 것이 페미니즘을 통해 가능하고,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설득해나가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학생의 목소리로부터 출발하는 스쿨미투는 그래서 학교와 교육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출발이다.

 

  1. 발언 : 한겨례TV 유튜브 채널, ‘#스쿨미투 집회 '여학생을 위한 학교는 없다'’ 발언 모음 [본문으로]
  2. 박다해 양선아 기자, '서울시교육청, '스쿨미투' 대응 위해 시민조사관 20명 위촉',한겨례, 18.11.09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869559.html [본문으로]


대학과 다문화교육

- 다문화주의가 대학 담장을 넘어서기 위하여

 

당근

 

들어가며

 

다문화주의 담론과 다문화교육의 아이디어의 중심지는 어디일까? 제주 예멘 난민 문제를 기점으로 온라인 상에서 논쟁이 벌어지고 여러 언론에서도 중점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지만,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 전부터 다문화주의의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있었던 공간은 다름 아닌 대학이다.

한국 다문화주의 담론은 미국에서 수입되었다. 미국에서는 흑인 민권운동과 68운동의 영향으로 대학에서 민족학(ethnic studies) 연구가 활성화되었고, 이 영향으로 교육계에서 다민족 교육(multiethnic education)이 일시적으로 등장했다. 다양한 민족과 인종 집단의 교육평등 문제에 초점을 두던 이러한 움직임이 계층, , 언어 등 보다 광범위한 교육적 문제를 다루면서 다문화교육(multicultural education)으로 발전하게 되었고, 여기서 비롯된 이론들이 한국 대학으로 흡수되어 현재의 대학 다문화주의 담론의 중심이 되었다.

그런데 한국 대학 내에서 다문화주의/교육은 주류적 담론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현재 다문화교육 학부 전공은 없고, 대학원 전공은 한양대, 경기대를 비롯한 일부 대학에만 있는 수준이다. 관련 강좌의 경우에는 다문화교육 대학원 전공이 잇는 대학에서는 학부 강좌 수가 많지만, 서울대를 포함하여 관련 전공이 없는 경우에는 학부 강좌가 2~3개만 열리는 실정이다.

연구자의 규모는 다문화교육 관련 국내 최대 연구단체인 한국다문화교육학회’(www.kame.or.kr)를 중심으로 고려해보면 1,400명 정도의 연구자가 있다고 볼 수 있다. 2018년 학술대회의 경우 16개국에서 80명의 논문 발표자가 참여하였고, 국내외에서 저명도가 상당히 높은 학회이다. (모경환 교수님 인터뷰 참고)

현황과 더불어, 대학에서의 다문화교육과 관련한 문제의식과 고민은 무엇인지 서울대학교 사회교육과 모경환 교수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았다.

 

인터뷰 : 서울대 사회교육과 모경환 교수님


모경환 교수님 (사진출처 : 네이버 프로필)



교수님에 대한 소개

 

Q. 어떤 전공을 하셨고, 어떤 연구를 해오셨나요?

A. 원래 사회과교육 전공인데, 다문화교육이 교과 중에서 사회과와 특히 밀접한 연관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다문화교육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다양한 민족/민족별 학업 성취와 시민성 발달에 대해 연구를 했고, 한국에 와서는 주로 다문화 교사교육에 대해서 연구를 해왔습니다.

 

Q. 최근에 하시는 연구는 무엇인지 간략하게 소개해주실 수 있나요?

A. 올해 다문화 교사교육에 대해 논문 2편을 출판하였는데, 교사들의 전문성 개발 활동 유형에 대한 연구와 국내에서 시행되고 있는 다문화 교사연수 내용 분석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과거에는 교사들이 전문성 계발을 위해서 국가가 제공하는 공식적 연수 참여나 개인적 노력을 주로 하였는데, 최근 교사들이 자발적으로 학습공동체를 구성하여 서로 경험을 공유하고 전문성 신장에 도움을 주는 형태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 바람직한 변화입니다. 또한 교사 연수의 경우에는 개론 수준의 이해를 넘어서 각 교과에서 다문화교육을 시행할 수 있는 역량 육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봅니다.

 

Q. 다문화교육 연구자로서, 교수자로서 다문화교육에 대해 최근 가지고 계신 고민이 있으신가요?

A. 우리나라에 다문화교육에 대한 몇 가지 오개념이 팽배해 있습니다. 다문화정책 시행 초기에 국가 주도의 다문화교육이 시행되면서 다문화교육은 이른바 다문화가정이라 불리는 국제결혼가정, 외국인노동자 가정 구성원을 지원하는 복지정책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요. 그러다보니 다문화라는 용어가 부정적이라거나 역차별을 만들어낸다는 등 오개념들이 유포되었습니다. 다문화교육은 모든 종류의 교육 불평등을 해소하고, 무엇보다도 모든 학생의 인식을 개선하여 다문화, 글로벌 시대의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교육이라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문화 교육과 학교

 

Q. 다문화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 꼽자면 무엇일까요?

A. 모든 학생의 다문화 인식 개선을 들고 싶습니다. 이것은 다문화교육이 다문화가정 자녀들의 학업 보조라는 편협한 개념을 탈피하는데도 중요합니다. 다문화시대의 시민으로 살아가는데 필요한 시민적 자질 함양이 다문화교육의 목표이고, 그 중에서도 현 시점에서 우리사회에 가장 중요한 것을 꼽자면 다문화 인식 개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히 사회 정의를 상위 목표로 하며 인권 교육의 핵심적 내용입니다.

 

Q. 대학에서도 다문화교육이 필요할까요? 혹은 가능할까요?

A. 대학에서의 다문화교육도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나라 대학도 국제화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으며, 우리 사회 자체가 빠른 속도로 다문화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대학생들이 졸업 후에 만나게 되는 사회는 다문화, 글로벌 사회로 진척이 상당히 이루어진 사회이기 때문에 대학에서 다문화적 시민성을 충분히 함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학과 현장과의 관계

 

Q. 다문화정책학교 방문 혹은 현장 다문화교육 수업 참관의 경험, 교사연수나 자문의 경험이 있으신가요? 기억에 남는 경험을 간단히 말씀해주세요.

A. 교사들이 겪는 어려움 중에 대표적인 것 하나를 들자면 교사 자신의 인식 개선의 필요성입니다. 교사가 되기 전에 예비교사 양성 과정에서 다문화교육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학교 현장에 나왔기 때문에 다문화교육을 실시하기에는 준비가 부족한 상태이고요. 연수나 대학원 과정을 통하여 배워나가고 있지만 오랫동안 형성해온 자신의 인식을 개선하는 게 주요 과제라고 말씀들을 많이 하십니다.

 

 

Q. 현장 교사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은 무엇이고,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A. 일반적인 어려움은 이주민 자녀들이 언어 습득, 학업 성취, 학부모 참여 등에서 어려움이 있고요. 무엇보다도 정주민 자녀들의 편견과 오해, 감수성 부족 등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해결이 숙제라고 생각합니다.

 

 

다문화교육에서 대학과 학교 현장의 관계를 고민하기

 

모경환 교수는 다문화 교사교육과 관련한 연구를 중심으로 교사들의 인식 개선과 교원양성과정에서의 다문화교육 학습 등을 주요한 문제로 지적했다. 공감되는 지점은 사범대학 교육과정에 다문화교육을 다루는 강좌나 내용이 아주 적다는 것이다. 다문화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은 점차 늘어나고, 난민 문제 등이 한국의 당면 과제로 떠오른 가운데 당장 교사로서 학교에 나가면 겪게 될 다문화적 갈등은 많다. 그러나 기자 본인이 관심을 가지고 다문화교육 학부 강좌를 찾아 들으려고 했음에도 윤리교육과와 사회교육과에서 개설한 두 강좌 이외의 학부강좌는 찾기 어려웠다. 교원양성과정과 교원연수에서 다문화교육의 비중과 연구규모 등이 절대적으로 늘어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다만 양적 확대를 넘어서 기자가 들었던 다문화교육을 다루는 두 강좌를 들으며 느꼈던 바를 바탕으로 그 내용에 대한 고민 지점을 마련해보고 싶다. 본인이 들었던 강좌는 윤리교육과에서 개설된 전공강좌 다문화와 국제윤리와 사회교육과에서 개설된 교직강좌 다문화교육의 이해. 두 강좌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다소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공통적으로 다문화교육은 학교와 그를 둘러싼 사회를 재구조화하는 변혁운동이라는 지점을 다루고 있었다.

학교와 사회를 재구조화하는 교육운동이라는 다문화교육의 정의는, 흥미롭게도 이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경쟁에 대한 논의, 지식사회학이나 인식론에서의 변혁과 같은 논의를 다양하게 포괄하고 있었다. 이 논의는 주어진교육과정과 교과서를 접하는 교사의 역할이나 교수-학습과정에서의 교사-학생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포함하고 있었고, 근본적으로 교육이 무엇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던지고 있었다.

이러한 논의가 강좌를 수강하는 동안 본인에게는 훌륭한 지적 자극이 되어 주었으나, 한편으로 이 논의들이 현장의 문제를 어떻게 적절하게 설명하고 도움을 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가령 다문화교육은 교육과정 내의 주류사회의 관점을 성찰하고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시도가 현장에서 다른 교사나 학부모, 학생들의 편견에 부딪혀 묵살되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이전에 교실을 토론의 공간으로 만들 수 있는가? 또 토론 이전에 다문화학생에 대한 학교폭력과 차별적 또래문화에 대해서는 어떤 접근이 가능한가? 이런 질문들은 여전히 교사 개인의 몫으로, 혹은 응답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학교 현장에서는 당장의 갈등을 해결하느라 급급한데, 대학은 지식권력의 성찰과 학교구조의 변혁을 논의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담론의 급진성과 변혁성은 퇴색된다. 현실의 전략과 이론이 되지 못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대학에게는 자신의 역할이 있고 언제나 더 진보한 담론을 만들어나갈 필요가 있지만, 현장과의 거리감을 좁혀가는 것이 지금 대학이 다문화교육에 있어서 할 수 있는 중요한 역할로 보인다. 수입된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을 넘어 현장의 의제를 중심으로 연구 문제를 설정해야 한다. 교사가 직접 교육과정과 모델을 연구할 수도 있다. 구체적으로는 학교 현장에서의 갈등과 폭력의 문제를 중심으로 다문화주의를 다룰 수도 있다.

 

나가며

 

난민과 결혼이주여성, 외국인 노동자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인식되고 자리매김하고 있는 가운데, 이들에 대한 혐오또한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가운데 대학의 다문화주의 담론은 지금까지처럼 그저 괜찮은, 세련된 하나의 담론으로 받아들여지기보다는 공격받을 가능성이 높다. 다문화주의 담론에서 지적하는 문제가 정말로 현실화 되었고, 많은 사람들에게 그 변화가 공격과 위협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20년 전 대선토론에서는 동성애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말할 수 있으면서도, 최근의 대선 토론에서는 후보자가 동성애를 반대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과 같다.

그래서 대학은 더 긴장하고 면밀하게 상황을 관찰할 필요가 있다.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이론들을 도입하고 적용하는 것을 넘어, 한국의 상황에서 출발하여 그 이론과 담론들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입장을 설명하고 대안을 내걸 수 있는 다문화주의, 다문화교육 담론을 대학이 제안할 수 있을 때 다문화주의 담론은 평등한 세상을 위한 변혁운동이라는 사회적 의미를 확보할 수 있다.

 


난민과 함께 살아가기

- ''중학교 난민 지위 인정 청원운동을 기억하며

딸기맥주

 

 

과연 대한민국이 난민을 받아줘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자국민의 치안과 안전, 불법체류 외 다른 사회문제를 먼저 챙겨주시기를 부탁드리고, 난민 입국 허가에 대한 재고와 심사기준에 대한 전반적인 제도에 해서 폐지 또는 개헌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난민 신청 허가를 폐지하자는 청와대 국민 청원의 일부

 

정의가 있다면, 우리 국민 마음속에 정의가 남아있다면 제 친구를 굽어 살펴줄 것이라 믿습니다. 부디 제 친구가 난민이 되어 이란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제 친구의 안전을 지켜주십시오. 간절히 호소합니다.”

- 동급생인 이란 난민의 공정한 난민 재심사를 요구하는 청원의 일부

 

(사진출처 : 청와대 국민 청원)

 

 

지난 2018년 여름,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두 개의 청원이 올라왔다. 한 청원은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난민을 비롯한 난민들이 계속 한국에 있어서는 안된다며, 난민법을 폐지하자는 청원이었고 이 청원은 금세 7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의를 표했다. 이후에 줄줄이 “‘불법’, ‘가짜’, ‘예비범죄자난민을 즉각 추방하라”, “다문화는 실패했다 자국민을 먼저 생각하라등등의 글이 줄줄이 이어졌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다른 한 청원은 자신의 친구가 난민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공정한 재심사가 필요하다는 한 중학생의 글이었다. 이 청원은 SNS로 확산되면서 앞선 청원과 상반되는 논조로 눈길을 끌었다. 난민과 다문화에 반대한다며 70만 명이 청원하는, 난민 추방이 해답이라고 다수가 언성을 높이는 이 나라에서 청소년들이 직접 자신의 난민 친구를 위해 국민 청원을 올리고, 피켓을 만들어 집회를 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이 친구를 돕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일은 이례적이기에 많은 이들로 하여금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를 궁금하게 여기도록 했다.

 

최근 한 다문화 가정의 학생이 피부색이 다르고 얼굴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집단 따돌림을 당했고, 결국 중학생들의 집단 폭행으로 인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난민, 타문화에 대한 차별과 배제, 부재하고 부족한 다문화 교육으로 인해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건들 중 일부일 뿐이다. 실제로 오인수 이화여대 교수의 다문화가정 학생의 학교 괴롭힘 피해 경험과 심리문제의 관계논문에 따르면 당시 설문에 참가했던 760명의 다문화가정 학생 중 34.6%가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고, 왕따 등 관계적 괴롭힘을 경험한 비중은 18%로 일반 학생들의 응답보다 훨씬 높았다.

그렇기에, 난민 인정 재심사 청원을 한 중학교 학생들이 이 폐허 위에서 어떻게 혐오와 차별이 아니라, 우정과 정의를 애기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품 안에 들어온 생명은 함부로 버리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마음에 품고, 어떻게 다르게 생겼든 어떤 종교를 믿든 함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는지, 그런 교육이 가능한지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고 싶었다.

 

겨울 방학 직전 즈음해서 찾아간 중학교 3학년 층의 복도에는 명랑한 웃음소리와 소란이 가득했다. 어떤 교실에서는 트와이스의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중학교 생활이 끝나가고 긴장이 풀린 채 편안히 쉬거나,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복도를 걸어 도착한 교무실에서는 학생들의 졸업을 위한 마무리 작업에 한창인 선생님들을 볼 수 있었다. 그 곳에서, 학생들과 난민 재심사 청원운동을 함께 벌인 오현록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금방 회의가 있으시다며 당사자인 A를 만날 수 있게 해주셨고, A와의 대화를 먼저 나누게 되었다.

A는 여러 번의 인터뷰 경험 때문인지 능숙하게 나를 맞아주었고, 오히려 초보 인터뷰어인 나와의 대화를 이끌어주었다. 딱딱한 인터뷰가 아니라 일종의 편한 대화를 나누자는 제안을 했고,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 꽤 긴 시간 동안 기대보다 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함께 살기 위해서, 함께 만들어낸 변화

 

재심사 청원 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의 과정을 먼저 듣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A가 난민 지위 인정에 대한 고민을 안고 지냈던 게 2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학교 들어오면서부터 내내 있던 문제였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도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에는 혼자서만 계속 생각하고, 불안해했다고 말했다. 난민 지위 인정 이후, A친구들에게 살기가 없어졌다는 말을 듣는다고 전했다. 그 전에는 너무 불안하고, 무서워서 자기도 모르게 눈에 살기가 생겼었다고, 그래서 친구들이 자신을 좀 무서워하기도 했다는 A의 말을 들으며 난민 지위 인정이 얼마나 절박하고 또 필요한 일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ㅇ' 중학교 학생들이 동급생인 이란 난민 청소년의 난민 지위 인정을 요구하며 서울남부출입국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날, A는 재심사 요청서를 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출국기일이 다가왔고, 용기를 내서 오현록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게 되었다고 했다. 선생님이 각 반을 돌아다니시면서 A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고, 함께 할 사람들은 교무실로 오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기대가 없었다고 말했다. “애들이 선생님이 설명할 때 듣는둥 마는둥 하는 것 같고, 뭘 종이에 쓰는데 문제 풀고 숙제하나보다 했죠. 실망하지도 않았고, 그치 그냥 도와줄 수가 없는 문제인 거지 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날 교무실에는 80-90명 정도의 친구들이 오가면서 이렇게 하면 어떠냐, 이런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뭐라도 같이 하겠다는 이야기를 선생님께 전했고, 어떤 친구는 어쩌면 좋냐고 펑펑 울면서 찾아오기도 했다. A는 아직까지도 그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제가 그만큼 잘 살았는지 반성도 했고, 제가 뭐라고.” 이야기하면 도움을 줄 사람들이 있고, 함께하면 뭔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전했다.

청원 과정에서 학교 내에서 상처받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없었냐는 질문에, A는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다. 자기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전혀 없었다고. 다만 댓글들이 조금 신경 쓰였다고 했다. 난민 재심사 청원 관련 기사 댓글에 “(난민이) 그렇게 좋으면 너네가 데리고 살든가같은 말들이 달렸다고. 놀라웠던 것은 그 이후에 친구들의 대응이었는데, 다른 학교 친구들까지 연합해서 일종의 선플부대카톡방을 만들고, A가 그런 댓글을 접하지 않을 수 있도록 기사가 올라가자마자 제일 먼저 댓글을 달고, 공감버튼을 눌러 상단에 선플이 먼저 뜨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너무 유쾌하고 멋진 대응이라서 필자는 한참을 웃었다. A는 친구들에게 표창장을 주고 싶어요라고 했다. 학생들이 A와 함께하고, 돕겠다는 마음 하나로 얼마나 자발적으로 나섰는지, 얼마나 일상적으로 고민하고 행동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어려움 : 아버지의 난민 지위 불인정

 

한편, 안 좋은 소식도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A는 아버지가 최근 난민 인정 심사에서 탈락한 것이 지금의 가장 힘든 일이라고 전했다. “재심사 기회가 한 번 남아있는데, 그것 때문에 많이 우울하고 불안하고 그래요.” 아버지가 자신보다도 더 한국에 많이 오갔고, 충분히 인정될 만한 상황인데도 탈락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내내 밝던 A의 얼굴이 바로 어두워졌다. A와 그의 아버지는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한국에 온 난민으로, 이란에 돌아가면 최악의 경우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이 충격적인 소식은 다시 한 번 한국이 얼마나 난민에게 가혹한 나라인지, 살고자 하는 사람을 사지로 내모는 난민정책을 펼치고 있는지를 알게 했다. 실제로 최근에는 제주 예멘 난민 신청자 480여명 가운데 단 2명만 인정을 받았다. 인정률이 0.4%인 것이다. 이러한 난민 정책은 다시 가짜난민, ‘불법난민 등 난민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고,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낙인찍는 악순환을 만들게 된다. 다시 알지 못하는 타자를 차별하고, 혐오하고, 자국민중심주의를 강화하며 이 땅에 함께 사는,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배제하게 만든다. 현재 나타나는 다문화 가정 출신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처럼, 결국 나쁜 정책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적 분위기는 교육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또한 교육이 이에 대한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오히려 부정적 사회구조는 교육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기도 한다. 학교 밖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국가 정책의 문제가, 전혀 밖의 일일 수 없으며 학교 교육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고리인 것이다.

A는 그래도, 이 학교에서의 마지막 1년을 통해 혼자가 아니라 함께일 때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되었다고 말했다. 곧 진학할 고등학교에 대한 걱정이 많지만, 이 학교에서의 날들이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고 웃었다. A는 인터뷰를 마친 후 모델 학원에 간다고 했다. A는 이미 데뷔한 모델로, “가끔 다른 학교 친구들이 모델 걔 아니야?“하면서 알아보기도 해요.”라며 장난스럽게 인기를 자랑하기도 했다.

A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모델 한현민 씨와 같은 무대에 서는 게 꿈이라고 말한 바도 있다. 그가 이 땅에서 꿈을 꿀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그가 그의 친구들과, 우리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쪽에서는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 이 나라에서, 더욱이 눈 색깔이 다르고 얼굴 색깔이 다른 사람들에게 더 차별적이고 가혹한 이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이 한 번의 마법같은 일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아야만 하겠다고,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서 만들어낼 수 있었던 변화가 앞으로도 계속, , 이어져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A에게 응원한다고 말하며,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 자리에서 언제나 함께하겠다고 덧붙이며 인터뷰를 마쳤다.

 

학생들을 믿고 맡기기 :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


'ㅇ'중학교 오현록 선생님



A와 인사를 나눈 후, 막 회의가 끝난 교무실에서 오현록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A에게 오현록 선생님이 평소에 어떠신지 여쭤봤을 때 A는 수업 할 땐 정말 잘 가르쳐주시고 평소에는 웃기고 재미있는 선생님이라고 했다. “제가 말을 잘 못해서.”라고 말씀하시면서도, 학생들 이야기가 나올 때는 정말 열심히, 자랑스럽게 이것저것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며 영락없는 선생님이시구나, 싶었다.

첫 질문으로 A의 난민 재심사 청원 및 인정 이후 달라진 것이 있는지 여쭤보았다. 선생님은 그 이후로 3학년 진학지도로 인해 너무 바빠서 자신은 달라진 게 없고, 달라진 게 있다면 재심사 청원 과정에 함께했던 학생들이라고 답하셨다. 과정을 겪으면서 나중에 인권단체에 들어가서 일을 하겠다는 학생, 언론 쪽으로 가고 싶다는 학생이 생겼다면서, 이 시간들을 통해서 학생들의 인식이 좀 더 깨이게 된 것이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이라고. “아무래도 제가 교사다보니 이 학생들을 잘 다듬어서 좋은 사람들이 될 수 있게끔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통해 제자들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A와의 인터뷰에서 A는 자신보다 자신을 도와주고 함께했던 학생회 친구들이 더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랬다. 학생들은 인권강연에 강사로 참여하기도 하고, 기독교 단체의 총회에 참석해 10분여간 기독교인들의 난민혐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한편에는 학생들이 이런 저런 활동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선생님의 노력도 함께했다. 난민환영행사가 열렸던 날, 1시간 전에 미리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님께 부탁해서 학생들과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 정우성씨를 만나고, 난민 정책까지 심도 있게 살펴보는 공부도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봤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학생들이 장차 커서인권 단체같은 데서는 저보고도 해달라 그러는데 제가 누차 하는 얘기가 저는 교사입니다, 이렇게 하고 마는데 그 정도가 이제 (제가 학생들과 함께 준비하고 노력했던 것들 아닐까)” 결국 학생들이 성장하고, 미래에 자신의 역할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결심하기까지는 함께하신 선생님의 노력도 한몫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필자의 머릿속에는 사실 난민 재심사 청원을 하기 이전의 과정과 청원 과정에서의 피케팅, 집회 등의 활동 정도만 있었다. 이후에 어떤 후속조치가 있었으리라고는 딱히 상상도 해보지 못했고, 관심도 갖지 않았는데 오히려 선생님과 학생들이 이후의 활동들을 고민하고, 준비한 것이 학생들의 성장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학생들은 이 과정들을 통해서 A라는 자신의 친구를 지키고 싶은 절박한 마음에서 나아가, 한국의 난민 정책에 대해 공부하고 비판하며 전체 난민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더 나아가 난민 뿐 아니라 소수자와 약자의 위치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은 학생들과 일을 나누는 것이구나, 싶었다. 교사가 전면에 나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동료로서의 학생들을 믿고, 그들이 경험 속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오히려 가장 어렵고, 그래서 가장 교육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박한 전략의 승리

 

이후에는 많은 이들이 궁금해 했던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난민 재심사 청원 운동이 벌어지고 언론에 알려지면서, 내 주변의 사람들은 다들 학교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놀라워했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대체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주체로 여겨지지 않고, 때때로 교사나 학교 역시 학생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독려하기 보다는 막아서는 데에 바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런 악조건과 상황에서 드물게 빛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께 이 전반적인 운동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를 질문했다.

처음에 패소하고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방법이 없는 줄 알았어요. 처음에는 로펌을 생각했는데 대법원에서 끝났으면 끝이 아니냐고 했죠. 이후에 인권센터 쪽을 알아봤는데, 재신청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고 해서 A와 함께 찾아갔습니다.” 재심사 제도를 알고 난 이후에는 시험기간이라 학생들과 바로 함께할 수는 없었고, 나름의 계획만 혼자서 짜고 시험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고 하셨다. 이후에는 학부모 총회처럼, A의 반 학부모들, 학교 운영위원, 학부모회 임원들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현실적으로 학부모들이 반대하면 학생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다행히 학부모님들도 뜻에 함께해주셨고, 반대 목소리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어요.”

이후에는 국민 청원 준비에 들어갔다. “시험 끝난 날 1반에 제일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소송자료를 읽어서 올 수 있냐고 했죠. 2000페이지가 넘거든요 그게, 그 전날까지 2-3시간 잔 애가 못 놀러가고 그걸 읽고 왔어요. 그러면 한 번 써가지고 와 볼 수 있냐, 해서 제가 손을 조금 보고 청원을 올렸습니다.” 청원을 올리기 전에 기자들에게 보도자료를 보내고, 공론화 작업을 하는 것은 선생님의 몫이었다. 이렇게 학생들과 선생님의 합작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난민 심사의 불공정함이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국민청원을 올린 이후에도 이 합작은 계속되었다. 선생님들은 교실을 돌며 A의 상황과 난민 심사의 불공정함을 학생들이 알 수 있도록 설명했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았다. 돌아다니며 이야기할 때 특별히 신경 쓰신 지점이 있는지 물었을 때, 심사 판결의 부당성과 반난민 논리의 비판에 초점을 두었다고 했다. “초반에는 난민 반대논리에 대해 얘기하면서, 인간의 도덕적 책무라고 해야 할까, 롤즈의 정의론 같은 것도 얘기하면서 닥치는 대로 얘기를 했죠.” 이러한 방식으로 학생들은 난민 심사가 어떤 지점에서 구체적으로 잘못되었는지, 왜 어떤 사람들은 난민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한편, 학생회장은 학생회 회의를 소집해서 논의를 이어갔고, 학생회 임원들이 앞장서서 활동에 함께했다. 학생들과 선생님은 언론 작업을 하면서 시위 준비를 하는 바쁜 나날들이 이어졌다. “맨날 짜장면 먹고 교무실에서 쓰러지고 저녁 늦게서야 퇴근했어요.”

그렇게 지내다가 방학식날 학생들과, 학부모들과 함께 서울남부출입국 외국인 사무소로 피켓시위를 갔다. 이 날 학생들이 든 피켓의 문구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제 친구와 함께 공부하고 싶어요”, “이란에서 온 제 친구를 도와주세요”, “친구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편견에 가려진 진실을 봐주세요등의 피켓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진행했다. 시위가 끝나고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건넸다던, "오늘 우리가 한 일은 한국 인권역사에 작은 디딤돌이 될 것이라는 말처럼 많은 이들의 기억에 오래 남을 장면이었다. 그렇지만 시위 이후 보도는 계속되었지만 청원의 숫자는 올라가지 않았다. 난민 반대 청원은 70만이 넘었는데, 재심사 청원은 3만이었다. “결과적으로는 370이 된 거죠.”

여러 모로 악조건은 존재했다. 학교나 교육청의 압박이나 침묵 역시 영향을 미쳤다. 초반에는 학교가 크게 신경쓰지 않은 채 선생님에게 일임했다가, 나중에 청원이 올라가고 언론의 취재가 이어지자 학교차원에서 막았다. 이 때문에 여론화가 가장 필요할 때 언론 취재는 딱 이틀밖에 하지 못했다고 선생님은 아쉬워하셨다. 이런 학교분위기가 있다보니 선생님들도 영향을 받아 학생들에게 위험하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었고, 학생들도 흔들리고 위축되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한편으로 교육청은 초반에는 굉장히 우호적이었지만, 반대 측에서 교육청이 중립을 지켜야지 그러면 되느냐식의 민원을 넣은 후 교육감 면담 등이 계속해서 늦어졌다고 했다.

방학 이후에는 사회적인 압박을 넣어야 한다는 판단을 했고, 염수환 추기경의 도움으로 국가인권위원회, 국무총리, 법무부 장관, 유엔난민기구 등에 서한을 보냈다. 서한을 보낸 후에는 2차 시위 계획을 세우며 방학을 보냈다. 마지막 시위라는 판단에 날짜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법무부에서 심사를 당긴다고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많지 않은 인원이지만, 개천절에 청와대로 가서 기자회견을 하고 릴레이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청와대에 서한을 전달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심사가 이뤄지고 인정 결정이 났다.

"귀한 목숨이 심사관의 손에 달려 있다. 부끄럽지 않은 결정으로 아시아 최초 난민법 제정 국가라는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켜 달라. 인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국가가 되게 해 달라"는 학생들의 바람이 일궈낸 결과였다.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하다는 것

 

여전히 이 치열한 과정을 들으면서도 궁금했던 건, “왜 다를까? 무엇이 다르게 만들었을까?”였다.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청소년들에게는 유튜브에서 쏟아내는 난민에 대한 가짜 뉴스가, 난민 혐오가 더 내면화하기 쉬웠을텐데, 이 운동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나는 인터뷰 과정에서 어쩌면 이 학교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알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 질문을 드렸을 때, 선생님은 허허 웃으며 우리 애들도 똑같은 애들이에요.”라고 답했다. “운이 좋았던 건, A가 초등학교 때부터 애들과 친구죠. 그러니까 애들은 그런 친구를 보낸다는 것에 대해서 견딜 수 없어 했던 거구요. 두 번째로는 판결 심사 과정의 부당성에 대해서 함께 느끼고, 일단 그게 컸죠 초반의 동력에. 그 외에 남들 학교와 얼마나 뭐 (다를까요)”라는 대답은 처음에는 필자를 좀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곱씹을수록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옆에서 함께 웃고, 떠들고, 장난치던 사람을 지켜내겠다는 마음, ‘친구를 돕겠다는 특별할 것 없는 우정이 실은 가장 특별한 힘을 지닌 것이라고.

이를 선생님은 경험의 차이라고 다른 기고문에서 밝힌 바 있는데, 그 글을 인용해보고자 한다. “경험의 차이다. 아이라서 특별히 순진해서 혹은 아이라서 특별히 무지해서가 아니고 함께 생활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 중학교 3, 9년을 겪으면서 아이들은 그 중동에서 온 이란인 아이를 친구로 받아들였다. 함께 장난치고 먹고 때론 싸우기도 하면서 그 아이를 자신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사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기에 아이들은 친구의 아픔에 공분했고 친구에게 찍힌 낙인을 지우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싸우고 있는 것이다. 몸이 부서져라 학교를 돌며 잠을 자지 않고 악플들과 전쟁을 치르며.”

필자는 이 특별하지 않음에서 의외로 용기를 얻었다. 언제나 특별하고 빛나는 일을 하는 것은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그렇다면 언제든 어디서든 이런 일들은 계속해서 만들어질 거라는 희망을 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고민도 생겼다.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 속에서도 누군가는 소외되고, 누군가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차이를 넘고 편견을 넘어 친구로 만나기 위해서, 서로를 환대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학교의 안과 밖, 그 경계를 부수기

 

좀 더 나아가, 선생님께 결국 이 다름에 대한 차별을 학교에서 어떻게 없애갈 수 있을지 조언을 구해보고자 했다. 결국 난민 혐오의 논리는 다양성에 대한 거부, ‘타자로 상정되는 이들에 대한 배제와 편견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이에 맞서 싸운 이번 사건의 성과는 기억되고, 확장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다문화 교육의 측면에 있어서 어떤 시사점이 있을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이번의 일이 그저 기적이나 특별함으로 기억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지, 특히 다문화 가정 학생들에 대한 차별이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현재의 학교는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를 질문해보았다.

선생님은 포괄적인 필자의 질문에 다소 당황하시면서도, 학교 안에서만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지점을 분명히 하셨다. “난민뿐 아니라 다문화 역시 근본적으로는 주변부를 쉽게 배제하고, 계층 간의 차이가 심각한 경제적인 구조와 문화풍토 속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극복되는 것이 다문화를 포함하여 난민문제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회적인 갈등이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토양이 되는 길이라고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학교 내의 차별은 분명 심각하게 고려되고,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은 현상이라는 지점을 지적하셨다고 필자는 판단했다.

학교에서 할 수 있는 노력도 있겠지만, 학교 밖의 문제가 영향을 많이 미치고, 사회 바깥의 차별·배제 권력구조가 해소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학교 내 프로그램 교육으로 가능한지, 이미 그런 게 인성, 정체성, 사고구조에 다 스며들어있는데 우리 교사, 학교 이런 존재들이 뭘 할 수 있나 싶습니다.”

결국 차별이라는 현상이 어디에서나 비슷한 양태로 존재하고, 되풀이되는 이유는 근본적인 원인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백인은 언제나 환영받지만 난민과 가난하고,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난민, 이주 노동자 등을 비난하고 배제하는 논리 역시 경제논리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들은 “‘자국민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자국민에게 돌아갈 세금을 빼앗아가는 존재라고 여겨진다. 누구도 제대로 된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는 더더욱 자라나기 마련이며, 인식의 변화를 넘어서 삶의 토대의 변화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인터뷰를 통해서, 필자가 인터뷰를 기획할 때 다소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학교 안의 프로그램, 학교 안의 다른 시도가 어떻게 가능할지만 관심을 가졌는데, 오히려 경계를 부수는 것이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건이 기적이나, 특별함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학교 안의 변화만큼, 혹은 그보다 더 전체 사회의 구조 및 문화의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권리 보장,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의 요구는 실질적으로 인식을 바꿔놓을 것이고, 학교 안의 차별을 완화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할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학교 밖의 변화는 분명 학교 안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통해 학교 안에서 변화의 씨앗은 만들어질 수 있고, 학생들과 교사들이 동료로서 학교를 바꿀 때, 세상도 바뀔 수 있다. 그래서 학교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는 이번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이름은 잊혀지고 사건은 기억되어야 합니다

 

글을 마치며, 다른 말을 덧붙이기보다는 난민 인정 이후 중학교 학생회에서 낸 입장문을 인용하고자 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배웠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친구가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고 일상으로 돌아가 편안한 삶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이란 친구뿐 아니라 그를 돕는 우리 학생들 모두 같은 이유로 잊혀지기를 원합니다. 다만, 여전히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많은 사람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이번 일련의 과정은 기억되어야 합니다. 이제 시작인 난민 인권운동의 작은 이정표인 탓에, 팍팍하고 각박한 우리 사회에 던지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위대한 첫 발자국인 탓에, 여전히 세상의 어둠 속에서 빛을 찾고 있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의지할 희망의 한 사례가 되는 탓에.”

 

(* 인터뷰를 함께해주신 A 학생과 오현록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나가며

- 외롭지 않게, 아프지 않게

딸기맥주

 

 

얼마 전, 스물네 살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일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는 나와 같은 나이였다. 그는 석탄운송설비 컨베이어벨트 사이에 말려 들어가 몸이 잘렸다고, 여섯 시간 동안 그 상태로 방치되어 있어야 했다고 했다. 1년 전에는 제주도에서 특성화고 현장실습을 하던 청소년 노동자도 음료공장의 컨베이어벨트에 목이 끼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2년 전에는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죽음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슬퍼하고, 아파하고, 추모한다. 그러다가 또 다시,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댓글에는 그런 글들이 달린다. “학창시절에 공부를 안 해놓고, 노력도 안했으면서” “노력해서 좋은 대학 나온 내가 똑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냐는 말들은 순식간에 많은 공감과 추천을 받고, ‘가장 인기 많은 댓글이 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이런 죽음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안타까워한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면, 정규직 되기에 실패하면 그것은 곧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이 되고, 제발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 외치면, “경쟁에서 승리한 나와 패배한 너는 같은 사람일 수 없다는 말이 돌아오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썩은 동아줄을 받아 안고 오늘 떨어질지 내일 떨어질지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럴 만 하지’, ‘그래도 돼라고 말하는 역할을 대학 입시가,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이 담당하고 있다. 경쟁과 평가, 서열화의 결과가 죽음과 생존을 가르는 시대가 되었다.

학교교육으로 인해 악순환의 고리는 점점 강화된다. 이 시대의 학교는 진실을 위해 복무하지 못한다. 차별을 정당화하고, 죽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하라고 채찍질하며, 경쟁에서의 승리가 앞으로의 인생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강조한다. 교사들은 모든 학생들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면서, 누군가가 위로 올라가면 누군가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알면서도 하면 된다”, “더 노력해라라는 말만 반복할 수밖엔 없다. 교육과 성장은 없고, 평가 그리고 높은 평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내뱉는 주술만이 존재할 뿐이다.

경쟁에서 승리한이들은 그러면, 잘 살아가고 있는가? 살아남은 이들은 행복한가? 살아남은 이들 앞에 놓여있는 것은 그냥 조금 덜 썩은 동아줄일 뿐이다. 끝이 어딘지 모르는 동아줄을 부둥켜안고 버티다가, 실패하면 떨어지는 삶, 너무 힘들어서 그냥 놓아버리는 삶이 우리 앞에 있다. ‘꿈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대기업 사원들이나, 공무원들의 과로사나 자살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숱한 평가의 문들을 운 좋게 통과해 온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위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잡아야만 하는 동아줄뿐이다. 그래도 썩은 동아줄보다는 낫지 않냐고, 내가 노력해서 이 정도 동아줄을 잡은 것이라고 위안해야 겨우 버틸 수 있는 삶만이 놓여있다.

그러니까 묻고 싶은 것이다. 이 죽음의 시대에 우리가 겪고 있는 경쟁이라는 것은, 평가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죽음에 눈 감고, 그러다가 다시 어떤 식으로든 비참한 죽음을 맞는 존재인가? 아리스토텔레스 삼단 논법식의,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외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말은 그래서 틀렸다. 경쟁에 내맡겨지는 사람들 중,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결론은, 그래서 어차피 인생은 고통이니 받아들이자는 체념이 아니라, 인간은 고통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항변이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없앨 수 없는 숙명이 아니고, 모두가 겪고 있는 이 만들어진 고통의 원인을 함께 걷어내자는 저항이다. 죽음의 행렬을 멈추고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을 만들자는, 아직 구현되지 않아 결코 진부할 수 없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려면, 이 동아줄의 끝이 어디인지, 이 동아줄의 끝을 잡고 우리를 가지고 노는 이들은 누구인지 직시해야 한다. 줄을 끌어내리고, 모두가 안간힘을 써서 올라가지 않고도 이 땅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살아남는 것을 넘어 잘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 시작은 경쟁과 평가, 서열화와 차별에 대한 반대일 것이다. 학교에서의 경쟁 완화, 대학 구조조정 반대와 대학 서열화와 입시경쟁의 폐기, 비정규직을 없애는 것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우리의 과제이다. 이 과정 속에서 비로소 우리가 이 지면을 빌어 말하고자 하는 교육이라는 것도,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스물네 살 청년노동자 김용균과 이 글을 쓰는 스물네 살의 대학생 나는 다르지만, 그래서 감히 나는 너다라고 말하는 것이 죄스럽지만, “외롭지 않게, 아프지 않게, 함께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을 외롭지 않게, 아프지 않게 하는 일은 나를, 그리고 수많은 너를, 우리를 외롭지 않게, 아프지 않게 하는 길임을 안다.



평가 대상으로서의 교사

- 교원성과급제와 교원평가제를 중심으로

익명이

 

 

들어가며

 

학교 내의, 학교 간의 경쟁을 교사는 피해갈 수 있는가? 교원성과급제, 교원평가제와 같은 제도들은 교사를 평가의 대상으로 세우고 임금 격차를 늘리며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기간제 교사와 정규직 교사의 갈등, 기간제 교사의 처우 문제 역시 무한경쟁장인 학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학교는 어떻게 경쟁의 장이 되었으며 왜 교사들은 평가와 경쟁에 속박되어있는가?

90년대 말 우리나라는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경제구조의 변화를 겪게 된다. IMF 금융위기로 인해 고용시장을 개방하라는 서구의 압력을 받고 우리나라에는 신자유주의가 도입되었다. 서구 중심의 세계질서에 비자발적으로 편입되면서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화가 이루어지고 현재 노동시장, 경제 분야, 교육, 공공영역 등 다양한 영역에 시장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경쟁을 통해 소비자의 선택을 받은 대상만 살아남게 하며, 소비자의 선택의 폭을 넓혀 끊임없는 경쟁을 유도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흐름에 따라 우리나라의 교육도 시장화가 되고 있다. 전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외고, 마이스터고, 자사고 등 학교의 다양화 정책을 추진한 것은 바로 이 흐름에 따른 것이다. 학교를 다양화함으로써 교육에서의 소비자인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의 폭을 넓혀 교육의 질을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이 정책의 전제는 학교에 자율성을 부여하고 알아서 경쟁하게 만들 때 교육의 서비스가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더 이상 교육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지만, 일정한 표준을 정해서 표준에 미치지 못하면 불이익을 주는 주체로 행위 한다.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를 실시하여 학교의 학업성취도 수준에 미치지 못한 학교에 불이익을 주는 것이 그 예시이다.

 

 

 

 

교원 성과급제

 

교원성과급제에서도 이것이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나라의 교원성과급제는 20011월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교원성과급은 교사 개인이 수행한 업무수행 결과, 성과 등 산출차원 요소에 기초한 보수이다. 성과급 도입이 발표되자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의 교원단체들은 성과급이 교직의 특수성에 비추어볼 때 적합하지 않다는 점,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체계가 미비하다는 점, 교직사회의 갈등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 등의 이유로 교원성과급도입을 전면적으로 거부하였다. 교육부는 교직단체, 시도교육청, 중앙인사위원회와 수차례의 협의를 거쳤으나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다가 8개월이 지난 20019월 성과급을 교원복지차원에서 시행하기로 함에 따라 외형적으로 마무리되었다.[각주:1]

그러나 초기의 협상결과와는 달리 교육부는 차등지급 비율을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해왔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성과급은 2001년의 지급방식에 따라 90%를 균등지급하고 나머지 10%를 차등지급하는 형태를 유지하였지만 이후 차등지급 비율을 200620%, 200830%, 200930%~50%, 201050%~100%로 확대되었다. 2010년부터 개인단위 성과급이 학교 내 교사 간 협력을 저해하는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이것마저 폐지되어 개인성과급으로 단일화되었다. 이에 따라 S 등급을 받은 교사와 B 등급을 받은 교사 보수의 차액이 168~240만에 이른다.[각주:2]

 

B등급 교사들이 겪는 상처와 좌절은 막대하다. 자기 비하가 조직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지면서 불신의 벽을 쌓게 되고, 업무에 대한 기획, 도전, 헌신을 꺼리게 된다. 하위 등급을 받은 교사는 계속 같은 등급을 받는 경우가 많아 정신적 공황 상태로 이어지고, S등급을 받은 교사도 괜히 움츠러든다.

교원성과급 차등 지급의 기준 또한 논쟁거리이다. 학교마다 평가 기준은 다르지만 대부분 정량적 기준을 적용하므로 교사 개인별 수업시간, 수상실적, 연수시간, 담당 업무 등의 비율을 우선하여 좋은 평가 등급이 매겨진다. 학생들이 고민하는 대인관계 지도나 인성 지도, 교육활동의 결과인 학생들의 교육적 성취나 발달 수준 등은 교육의 특성상 측정이 불가해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신경 써주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교사들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평가 기준은 교사의 역량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으로서의 신뢰도와 타당성이 떨어진다. 좋은 교사의 기준이 좋은 성과, 좋은 입시 결과를 내는 것이라면 결국 교원성과급제는 좋은 학교와 교사, 학생들을 줄 세우는 과열 경쟁의 장에 기름을 붓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또한 애초에 교원성과급제가 도입된 취지를 보면 사교육에 짓눌린 공교육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교사들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고, 그 추진 동력으로 보상을 전제로 한 상대평가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공교육의 위기를 교사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전제부터 재고할 필요가 있다.

 

교원평가제

 

교원성과급제와 더불어 교사의 수업 및 생활지도 능력을 신장하기 위해 2005년부터 시범 교원능력개발평가 제도(교원평가제)가 혁신적 정책으로 도입되었다. 교원평가제의 핵심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교원평가제 실시 목적은 학업성취도 향상을 위한 교사의 수업 전문성 신장이다. 둘째,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교장, 교감, 동료교사, 학부모, 학생 등이 모두 참여하는 다면평가 형식이다. 교장, 교감도 평가 대상에 포함된다. 셋째, 평가 결과 우수교원에게는 해외연수 등 인센티브를 주고 능력개발 희망 교원(지도력부족 교원)의 경우는 능력향상 연수과정’(나머지 공부)를 실시한다.

교원평가제는 학생과 학부모의 의견 창구가 생겼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교원평가제는 교원성과급제와 마찬가지로 교육에 대한 투자 대신 경쟁 체제를 도입해 교원 통제를 강화하려는 것이며 그 실효성 역시 신뢰하기 힘들다. 교육 활동은 일반 기업의 업무와 같이 단기적으로 그 효과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어떤 방법, 어떤 항목으로 평가를 하더라도 극히 부분적일 뿐 총체적이고 합리적인 평가는 불가능하다. 수업에 대한 평가를 무엇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평가할 것인지는 합의되기 어렵다. 또 일반 기업의 업무 성과와 달리 교육적 성과는 단기간에 평가하기도 어렵다. 이처럼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연 1회 공개 수업으로 적격, 부적격 교원을 가려낸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교사의 자질을 학원처럼 교수-학습 방법에서만 찾는 것 역시 합리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교원평가제를 실시하려는 의도와 배경을 살펴보면 교육정책의 실패를 교원들에게 전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원평가제 도입의 근거는 실추된 공교육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생님들이 스스로 신뢰를 지키는 일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공교육이 위기에 이르게 된 데 있어서 교사 개인에게 그 책임을 온전히 돌릴 수 있는가? 학벌숭상주의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하여 과열 입시경쟁 체제를 공고히 하고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을 조장하는 데 정부가 그 역할을 해오지는 않았는가? 교육에 효율과 성과 등 계량화된 경쟁 기제를 도입해서 질적 제고를 꾀하겠다는 발상은 교육을 시장화하고 기업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작년 11월 전교조 경남지부에서는 현장 교사들 1321명이 동료 교원 평가 불참 선언에 참여했다. 이들은 교사들끼리 동료에게 점수를 매기며, 서로 눈치보고 갈등하게 하는 것은 누구를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인가?”, “학생도 학부모도 교사도 모두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단지 그것은 관료들에게 유용한 통제의 도구이자 권력으로 작동할 뿐이었다는 말을 전했다. 또한 점수를 매겨 개개인을 고립시키는 평가가 아니라, 학교 공동체가 공동사고를 통해 집단적으로 성찰하는 피드백을 통해 학교 교육의 질은 높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지금껏 교원의 지도능력 및 전문성 강화를 통한 학교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실시하는 교원성과급제 및 교원평가제는 그 목적을 상실한 채 교사와 교사,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 사이 위화감을 조성해왔다. 뿐만 아니라 동료를 경쟁자로 만들고 국가정책과 교육현장 관리자에 순종을 강요하는 도구로만 기능하고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교사 평가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우선 학교는 소통협력 공동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교원에 대한 평가는 학교가 교육공동체로서 기능할 때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학교 공동체가 공동체적 사고를 통해 집단적으로 성찰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을 때 학교 교육의 질이 높아지고 교사의 전문성이 신장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교원평가의 문항을 현실에 맞게 개선할 필요가 있으며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 가령, 교실환경을 개선하고, 교사의 처우를 개선하며, 학부모와의 교육 여건 및 상호작용 통로를 확충하는 등의 노력이 요구된다.

교사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교원에 대한 평가가 동료를 경쟁자로 만들고 경쟁적인 분위기를 유도했다면, 앞으로의 교원평가는 교사 간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동료의 수업을 모니터링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평가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상호평가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나가며

 

현 정부는 공직 사회에 강요됐던 성과 중심 정책을 폐기하겠다고 약속한바 있다. 그러나 정부는 성과급을 유지하고 차등지급률만 축소했다. 지급률 축소도 딱 이명박 정부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다. 게다가 박근혜 정부가 교사 통제를 위해 핵심으로 추진했던 교원업적평가도 유지했다. 실망스러운 현 정부의 태도에 대응하여 전교조 지도부는 성과급제 폐지 청와대 청원 운동을 벌이고, 성과급 균등분배를 확대할 계획이다.

정부가 계속해서 교원성과급제를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교원성과급제를 통해 정부가 교사를 경쟁시키고 통제하며 전교조를 약화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교사에 대한 경쟁적인 조건은 입시를 부추기기도 하고 입시가 바뀌지 않는 한 교사의 지위도 바뀌지 않는다. 이러한 악순환과 딜레마가 계속 되면서 학생과 교사들은 그 굴레 안에서 착취당하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학교라는 공간은 어떻게 황폐화되어가고 있는가? 학교의 주인이라고 간주된(?) 학생과 교사들은 사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승리하기 위해 객체화된다. 학생들이 처음 사회와 관계 맺는 공간은 학교이고, 몇 십 년 동안의 교사의 직장으로서의 공간, 생활공간 역시 학교이다. 그러나 학교라는 공간은 이들에게 경쟁의 기억을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학생과 교사 모두 학교에서 사회화하고 잘 살아남으려면 경쟁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회가 이들에게 원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 틀에 맞춰서 정형화되고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런 암담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투쟁하는 사람들은 남아있다. 많은 교사들이 균등분배와 명단 공개에 참가해 성과급 차등지급을 무력화하고 성과급제 폐지를 정부에 주창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교조가 실시한 설문 조사(33132)에 따르면, 90.9퍼센트가 전교조가 추진하는 차등성과급 균등분배에 참가하겠다고 응답했다. 이는 성과급에 대한 교사들의 불만이 매우 광범위함을 보여준다. 지난해에도 성과급 균등분배에 전년보다 많은 87085명이 참가했다. 정부가 징계와 금전적 불이익을 들이대며 협박하는 상황에서 많은 교사들이 이에 굴하지 않고 균등분배에 참가한 것은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우리를 고무적으로 만든다.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 쪽일 것이다. 경쟁을 완화시키고 착취를 반대하고 학교를 학교답게 만들자는 목소리를 함께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 결국 우리의 몫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곽경련, 이쌍철, 「교원 성과상여금 평가 특징 분석」, 한국교원교육연구 제 31권, 2014, pp.274-275. [본문으로]
  2. 위의 글. [본문으로]






A학점이 받고 싶지만 자퇴는 하고 싶어

- 학사관리엄정화와 대학의 평가

이물

 

먼 훗날 우리는 우리의 대학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까? 동아리, 학생회, 대외활동처럼 의미 있는경험 속에 대학의 낭만을 투사할 테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받아든 성적표를 무시하지는 못할 거 같다. 신입생 때 들었던 글쓰기 교양에서 받은 낮은 성적이 실없는 농담거리로 활용되긴 해도, 숱한 강의를 들어가며 쌓아온 학점을 보면 복잡한 감정이 든다. A를 받았을 때 남몰래 느꼈던 만족감과 왠지 모를 으쓱함, BC로 범벅된 성적표가 나의 부족함과 불성실함을 보여주는 것 같은 머쓱함이 그것이다. 학점에 신경 쓰지 말자며 자신을 다독이면서도,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며 작아지고, 졸업 후의 막연한 미래에 시달리기를 반복한다.

우리는 평가 받기를 계속해 왔다. 벚꽃 피는 계절과 낙엽 지는 계절에는 항상 시험이 뒤따라왔다. 어쩌면 학생다움은 공부하는 행위보다 평가받는 처지에 묶여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취업 과정에서, 현장에서 끊임없이 평가를 요구받는 모든 이들이 평생 학생인 것인지도. 우린 이미 바람직한 평생교육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대학에서의 평가는 학점’, 더 광범위하게는 졸업요건, 수강신청조건 등을 포함하는 학사관리라는 말로 압축된다. 수학능력에 대한 평가를 넘어, 졸업이라는 인증(평가)를 위해 수행해야 하는 의무와 규칙이 규정된다. 강의실 안팎에서 겪는 우리의 경험은 수치화되고 관리된다. 입학에서 졸업까지, 성적 장학금에서 학사 경고까지 길이와 높이를 갖고 유동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 그렇지만 성적이 좋으면 선택권이 늘어난다는 말은 참 익숙하다. 그래서 평가는 좋다는 걸까, 나쁘다는 걸까? 무슨 말을 들어도 미심쩍은 상황에서 졸업과 취업은 다가온다. 그렇게 삶은 계속되므로, 열심히 평가받을 수밖에.

 

 

학사관리는 무엇인가?

 

학사는 말 그대로 대학의 일이겠지만, 주로 대학의 교육과 관련된 업무 일체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서울대학교 학사과 담당업무를 보면, ‘학적관리, 수업 및 성적관리, 수강신청 관리, 증명발급, 학력조회, 졸업 및 학위수여 관리가 있다. 대학은 행정을 통한 학생 관리, 학생들은 이 조건에 맞는 자기-관리를 수행해야 한다.

대학의 학사관리는 사실상 광의의 평가/인증제 역할이다. 학생의 의무와 조건을 규정하고, 평가를 거쳐서, 졸업이라는 인증을 향해 가는 과정을 조절하는 것이다. 그 방식은 다양하다. 학사경고, 학생징계와 퇴학은 배제의 논리로, 학점 취득 기준과 전공 의무 규정은 승인의 논리로, 성적 평가와 차등적 복지는 능력주의의 논리로 학생을 관리한다.

이 중에서도 성적 평가는 핵심적이다. 대학은 매 강의의 성취도를 구분된 등급으로 평가받고, 그에 따른 차등적 기회 (장학, 교환학생, 취업, 대학원/유학 등)를 부여한다. 성적 평가는 다른 학사관리와 달리 매 강의, 매 학기마다 이루어지기에 상시적 주의와 노력을 요한다. 또한 학교 기능의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교육에 대한 학생의 자격을 평가하는 상징성을 갖는다.

 



학사관리의 기능은 대학 교육의 기능에 대응한다. 대학은 교육/지식기관으로서 지식을 공유하고 학습하는 장이다. 때문에 학사관리는 명목상 학생이 대학을 거치며 학문을 성공적으로 습득할 수 있도록 의무를 부여하고, 행위를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 대학은 노동시장의 인력 수급 역할도 하는데, 이 경우 학사관리는 학생 구분과 변별을 담당한다.

대학의 보편화와 기업화 과정을 거치며, 현대 사회의 대학에서는 인력 수급의 기능이 지배적 자리를 차지하고 지식의 공유화 학습은 예외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 전자가 구조적이라면 후자는 학생이나 교수자의 의지에 의해 규정되는 실정이다. 그에 따라 학사관리(평가)의 기능 역시 학생을 변별하고 노동시장에 인증하는 것이 지배적이며, 예외적/의지적으로 학습을 자극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때 변별으로서의 평가는 학생의 역량을 파악하여 사회의 각 부문에 적절히 배치하고, 정해진 자원을 차등적으로 분배하기 위해 사용된다고 정당화된다. 그리고 경쟁과 공정성이 강조된다.

지식의 습득을 자극하는 평가와 노동시장 변별의 평가는 분리되는가? 때론 그렇지만 때론 그렇지 않다. 변화하는 노동시장의 요구와 학문 기관인 대학에서의 역량 강화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위적으로든 우연적으로든 일치하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지식의 공유화 학습은 대학 본연의 선한 기능이고, 노동시장 인력 수급의 기능은 변질된 나쁜 기능이기만 한가? 그렇지 않다. 지식은 그것의 실천방식, 노동과정과 꾸준히 상호작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학과 대학의 평가 기능이 갖는 문제를 말하자면, 첫째로 두 분야의 균형을 잃고 지식의 공유/학습에서의 기능을 사실상 완전히 소멸해가고 있으며, 둘째로 인력 수급 기능이 현실 노동시장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노동시장과 자본의 경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재생산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진리의 상아탑을 건설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노동의 균형적 상호관계를 확립해 나갈 수 있는 대학과 대학의 평가를 상상해야 한다.

 

학사관리엄정화의 역사와 배경

 

학사관리엄정화는 말 그대로 학사관리를 엄정하게, 더 까다롭게 한다는 의미다. 명분상 학생들의 학업 태도를 갖추고 성취를 늘리기 위해서, 혹은 평가에서의 엄밀성과 공정성을 도모하기 위해서라고 주장된다. 그 결과 학생들은 더 많은 의무, 경쟁에 노출된다.

신군부 정권에서 도입된 졸업정원제는 신입생을 졸업정원보다 30퍼센트 더 뽑는 제도였다. 그러나 교육의 양적, 질적 향상을 위한 국가 지원이 결여된 정원제는 학생의 단순 팽창만을 의미했고, 학생 간 경쟁의 과열과 수많은 낙오자(중도수료자)를 낳았다. 한편 군사정권 기간 동안 학사관리 엄정화는 학원 안정화의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는데, 노태우 정부 하 대교협이 199196일 발표한 학원 안정화 대책[각주:1]에는 학사제적제 부활, 학사유급제 부활, 학생회 등의 건전화를 위한 학칙 제정이 학사 관리 엄정의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다. 과장을 덧붙여 말하면, 데모 대신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의미였다. 국가는 학생들을 경쟁과 엄정한 학칙 속으로 몰아넣고, 그들을 저항의 주체가 아닌 평가의 대상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이후 5.31 교육개혁과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 속에서 학사관리 엄정화는 대학 간 경쟁을 떠받치는 한 축이자, 취업을 위해 경쟁하는 학생을 만들어내는 도구가 되었다. 1994년부터 대학종합평가인정제가 시행되고, 이것이 국가의 선택적 대학재정지원과 연계되었다. 평가 항목 중 핵심을 차지하는 교육의 가치는 수월성, 효율성 등이었다.[각주:2]

결국 학생들이 수월한성과를 내세우는 것이 대학 간 경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중요한 자원이 된 것이다. 이에 더해, 대학이 본격적으로 기업화, 시장화되고 대학 간 경쟁과 기업의 지원이 절실해진 이후로는 취업률이 대학 평가 지표의 핵심이 되었다. 이에 대학들은 수월성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더 까다롭고 경쟁적인 교육 환경을 조성해 나갔고, 기업의 요구와 인재상에 따라 교과과정과 교육 내용을 혁신하는 데에 주력했다. 이제 학사관리는 힘들더라도 열심히 수행해야 하는 의무이자 덕목이 되었다. 심해지는 취업난, 대학 교육의 상품화 속에 대학 교육은 개인의 취업을 위한 투자로 이해된다. 국가, 기업의 재정지원을 바라는 대학이 이를 적극적으로 조장할 뿐 아니라, 취업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나서서 해야 하는 처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높은 졸업 요건, 학사경고/유급제 강화, 학점 경쟁과 차등적 복지지원, 출결 시스템 강화, 학생회 약화와 담임교수제, 각종 취업과 인턴십 프로그램의 남발 등이 놓여있다. 이에 대항하는 학생들의 흐름도 존재했다. 상대평가를 비롯한 여러 학사관리 엄정화 정책을 철폐하라는 요구가 산발적으로 일어나 때로는 성공했다가깝게는 일방적 학과제 전환 대응(2012년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총회 요구안)으로 기존의 반 체제를 유지한 사례 역시 일방적 학사관리와 공동체 파괴에 대한 저항으로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일련의 노력은 단기적 성과를 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학사관리와 평가의 다른 방식을 제안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평가의 구성과 구성 권력

 

앞에서 언급했듯, 역사 속의 학사관리 엄정화는 학생들을 피교육자에 정박시키고, 한편으로는 산업시장이 요구하는 역할로 길러내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평가자체의 특성이라기보다, 평가를 구성한 대학, 혹은 대학 교육에 영향을 주는 대학-자본-국가의 산물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평가의 구성방식이 적절한지,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논의해야 한다.

지금의 평가 방식은 노동시장 인력 수급이라는 목적을 위해, 학생들을 선별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특징을 갖는다. 또한, 평가 방식의 결정권이 독점되고 있다. 직접적 결정권은 교수자에게 있고, 실질적 결정권은 대학 교육의 흐름을 주도하는 대학, 자본, 국가에 있다.

 

1) 공정성 신화와 순응적 객체 생성

첫째로 학사관리, 혹은 평가는 절대로 완벽하게 공정할 수 없다. 오히려 앞에서 살펴보았듯 모든 평가는 명확한 의도 아래 만들어진다. 평가 기준은 넓게는 국가의 학원 안정화와 자본의 인력 수급, 대학의 생존 경쟁 속에서 형성되며, 작게는 강의실 내 교수의 판단과 관점에 따라 정해진다. 곧 평가는 목적에 맞게 구성되는 것이고, 우리는 평가 기준 자체, 다시 말해 평가 목적의 타당성,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의 적합성을 따져야 한다. 전공강의의 학점을 잘 받은 학생은 해당 전공의 이해 능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 해당 강의가 전공과 관련해 추구하는 목적, 요구하는 능력을 더욱 잘 수행한 것이다. 더 넓게는 대학이 조성한 경쟁적 환경에 잘 적응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이 맥락을 누락한다.

평가 방식을 독점한 결정권자들, 학사관리를 엄정화 하려는 이들은 이러한 누락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평가 기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평가의 결과가 곧 정당하고 공정한 우열을 의미해야 평가(학원 안정화, 학생 간 변별)의 목적이 잘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평가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순응적 객체가 되어간다. 이에 의문을 던지기 위해서 우리는 평가의 기준을 평가해야 한다.

 

2) 교육 의미의 제한, 역량과 평가 지표의 괴리

둘째로 학사관리가 노동시장 인력 수급의 기능에 국한되면서, 교육의 의미가 경쟁의 우위에 서는 것으로 제한된다. 기실 대다수 대학생의 수강 이유는 높은(혹은 적절한) 학점을 얻고 졸업해서 취업의 경로로 진행하기 위해서다. 혹은 적어도 그 경로에서 낙오되지는 않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학사관리가 학생을 적극적으로 취업을 위한 경쟁의 영역으로 내몰기도 하고 (상대 평가 강화, 취업 교육 강제 등), 학생이 이를 체화해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교육을 도외시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강의실의 교육은 쪼그라드는데, 강의 내용보다 학점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 때 평가는 피드백을 통해 재학습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종료와 인증의 기능만 수행한다. 나아가 그렇게 받은 점수가 곧 자신의 성취 지표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교육 내용에 집중할 수 없고, 재학습을 자극하지 않는 평가구조는 개인의 실제 역량과 평가 지표가 괴리될 우려를 낳으며, 결과적으로 오히려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 쉽다. 애초 학점을 받기 어려워 보이는 수업은 기피하여 교육 기회를 사전에 차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3) 노동시장의 불평등 재생산

셋째로 학사관리 엄정화는 노동시장의 불평등을 적극 재생산, 강화한다. 사회의 일자리나 학습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있지 않으며, 차별과 불평등이 산재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쟁 속에서 소수에게만 양질의 일자리를 허용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주장에 자주 직면한다. 그리고 그 주장을 정당화하는 제1원리가 교육이다. 각자의 교육과정 속에서 우수한 능력을 인증 받은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대우를 해주는 것은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학사관리가 엄정해질수록, ‘승리자를 차등적으로 승인할 근거는 강력해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애초 그 평가 기준이 불평등한 노동시장의 원리(와 조응하는 대학서열체제, 대학/학과 선별적 재정지원, 기업친화적 학습 내용, 경쟁적 학습문화)하에 구성되었다는 것, 그조차도 역량과 지표의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 괴리가 해소되더라도 각 평가지표들이 개인 역량의 절대적 판단 기준이 아니라는 것은 무시된다. 나아가서는 노동시장 자체에 대한 비판 능력도 상실하기 쉽다. 우리는 언제나 평가받는 대상일 따름이며, 평가받는 학생은 평가자의 오류를 지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학구조개혁평가는 대학이라는 기관을 매개로 교육의 기능을 통제하는 것이라면, 학사관리는 이와 조응해 대학 내 구성원의 삶과 가치관을 매개로 통제를 수행하고 있다.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소속 13명이 수능 당일 대학잆기거부를 선언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무의미한 경쟁을 멈추자고 외쳤다.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적절히 구성된 평가 상상하기

 

1) 평가의 목적지향 교육의 시작점이 되는 평가

애초에 학사관리를 단순히 엄정화하는 방식이 학생의 성취를 높여준다는 주장은 이상해 보인다. 처음 한 게임에서 엄청난 실력자를 만나, 기를 펴보지도 못하고 거듭해서 지면 영 흥미를 붙이지 못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학습에 있어서도 경쟁적으로 부담을 늘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적절한 성취 과제와 자신의 역량 성장에 대한 효용이 필요할 것이다. 레포트는 마감 기한 직전에 가장 잘 써진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 말은 마감 직전의 극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학습에 영 흥미를 붙이지 못하는 현상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육은 자기 성장만을 위한 것도, 취업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교육은 지식 습득을 통해 한 개인이 자아실현과 노동 수행을 동시에실현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는 것을 도모한다. 사회를 이해하고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성장시키고, 그것의 실천방식인 노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평가가 교육의 도구라면, 어디까지나 이러한 교육의 목적을 자극해야 한다. 때문에 성취지표를 넘어, 학습 과정에서의 변화와 성취를 구체적으로 피드백 받고 재학습할 수 있도록 독려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 성장) 한편으로 현실 노동과 연결할 수 있는 역량을 동일한 잣대가 아닌, 다양한 관점에서 제안해줄 수 있어야 한다. (노동과의 연계)

무엇보다, 평가는 교육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어야 한다. 지식의 습득, 노동 역량의 계발을 위한 조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평가 방식만 개선된다면 밑 빠진 독이 될 수밖에 없다. 평가는 교육을 위한 충분한 조건이 갖춰진 위에서, 또 다른 교육의 길을 가리키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평가의 구성 주체와 방식 - 평가 구성의 민주화

평가의 가치지향만큼 중요한 것은, 평가를 누가’, ‘어떻게구성하는지다. 평가의 목적과 그것이 낳는 효과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이를 지적해야한다.

애당초 왜 차등적 학점을 부여하는가? 교육적 목적으로만 놓고 보면 해당 강의를 수강한 학생 각각에게 장문의 평가서를 첨부하면 될 것이다. 물론 성취의 지표화 자체는 필수적이기도 하다. 학습 내용과 성취를 다른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평가지표는 소통을 위한 언어 이상이다. 일률적이고, 차등적인 지표들은 취업시장의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최근 들어 강의평가 방식을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전환하는 대학이 늘고 있다. 학생들에게는 학업의 부담을 덜 수 있는 좋은 일일 것이다. 때문에 이를 지나친 차등적 평가와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읽어내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절대평가 전환과 관련한 총장의 인터뷰를 보면,[각주:3] 취업 경쟁에서 이미 학점이 변별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내리는 결정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나쁘게 말하면 이제 취업 경쟁을 위해서는 학점만으로는 부족하고, 훨씬 많은 평가지표에서의 우위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결국 그 사람의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는 종합적 평가가 될지, 전방위적인 생존 경쟁을 요청하는 평가가 될지는 교육을 조건 짓는 사회적 배경, 이와 조응하는 평가 구성의 목적과 권력에 의해 결정된다. 누가 절대평가로의 전환을 결정했는가? 취업 경쟁을 고려한 대학 본부와 총장이다. 때문에 이는 취업 시장의 상황이 바뀐다면 학생들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언제든 갈아치워질 수 있는 결정이기도 하다.

 

평가를 시장에서의 경쟁적 자원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으로 요청된다. 불안정하고 위계적인 노동시장,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 취업 중심의 기업화된 대학이 변화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평가의 범위를 넘어선다. 대신 이 글은 평가의 범위 내에서 평가 구성의 민주화를 요청한다.

평가 구성의 민주화는, 가장 기본적으로 평가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 교육과정에 관여하는 모두가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평가 내용, 평가 방식과 기준 등을 교수와 학생이 함께 토론하여 결정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물론 교수자 고유의 권한인 평가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평가의 구성은 함께 하되, 평가의 부여는 교수의 권한으로 남겨놓기 때문이다. (물론 평가의 구성 과정에서, 평가의 일방적 부여 역시 자기비평 등의 방식으로 보완, 대체 하자는 논의도 가능할 것이다.) 교수자와 학습자가 함께 학습의 목표와 경로를 설정하고, 교수자는 충실하게 수업을 준비/관리하고, 학습자는 평가 결과에 따라 다음 학습을 준비하는 생태계가 필요하다.

넓게는 대학의 학사관리 규칙 전반을 대학 구성원이 함께 결정하는 것, 작게는 각 단과대학의 구성원이 졸업요건과 학과별 학사관리를 함께 결정하는 것, 더 작게는 학과별 강의 평가 기준을 구성하는 정기적 공론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 그 실천태가 될 수 있다.

 

 

3) 저항 가능성 교육 공동체와 교육 주체의 형성

평가 구성의 민주화는 기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물론 그것이 실현된다고 해도, 완전히 자율적으로 평가 구성을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현실적으로 취업이 필수적인 사회에서, 노동시장이나 기업이 원하는 능력이 아닌 영역을 무작정 평가에 포함시킨다면 구성원의 직접적인 피해와 고립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평가 구성이 민주화된다면 적어도 기존의 시장 중심적 평가를 그대로 재생산, 강화하지 않고 긴장관계를 형성할 여지가 있다.

긴장관계의 공동체와 주체의 형성에서 온다. 평가 구성에 구성원이 함께 개입할 수 있다면, 평가를 구성하는 권력은 대학 본부나 소수 교수가 아니라 대학/학과 공동체가 된다. 그동안 평가 권력은 대학이 시장과 산업의 수요, 정부의 대학재정지원, 위계적 교수 집단에 종속된 공동체로 기능하는 것을 강화하는 일종의 도구였다. 그러나 교육에 참여하는 구성원이 직접 평가를 구성하겠다고 나설 때에, 교육 공동체의 역할을 스스로 되묻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동시에, 학생이 평가를 받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교육의 주체로 호명될 수 있게 된다. 좋은 평가를 위해 자신의 모습을 맞춰나가는 것에만 익숙했던, 나아가 시장의 경쟁적 자원을 얻고 우위에 서는 데에만 익숙했던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교육 방향을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서로를 평가의 대상으로 타자화하지 않고, 더 나은 학습을 위해 노력하는 존재로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교육 공동체와 교육 주체가 형성된다면, 대학이라는 교육 공동체가 사회와 구축할 수 있는 긴장관계는 무엇이며, 바람직한 평가와 교육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지난한 과정이 되겠지만 말이다.

 

 

결론

 

대학 생활을 하다보면, 우리가 갖는 평가의 상상력이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멈춰있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시험을 치르고 나면 그 시험이 얼마나 공정했는지, 시험 문제 자체에 오류는 없었는지 따지는 것을 자주 본다. 그리고 표준점수와 등급을 따지듯 학점을 비교해가며 (진심이든 농담이든) 주요 이야깃거리고 활용하고는 한다. 그러나 평가 기준이나, 우리가 평가를 받아야하는 상황 자체가 적절했는지, 그 평가는 교육을 자극하고 돕는지를 고민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현행의 평가제도가 학업 성취를 어느 정도 적절히 평가하고 있다는 의심쩍은 미련도 남을 것이다. 빈둥대는 학생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은 분명히 다르고, 학점은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당신이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면, 대개는 그 평가의 구성주체가 시키는 대로 잘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구성 주체가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기준에 따라 (교수자를 매개로, 혹은 정말 스스로, 대안 공동체에서) 스스로를 평가하고, 다양한 평가 기준을 바탕으로 나라는 사람의 노동역량을 계발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결국 학사관리는 학사자주관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불안정노동과 취업 경쟁의 시대, 학점을 차등적으로 매기고 스펙을 쌓고 졸업장을 따야하는 이 굴레를 쉬이 벗어날 수는 없다. 창의적 평가방식이랍시고 하는 결정들도 결국에 어떤 방식으로든 경쟁 속에 편입되는 것을, 우리는 대학 입시 제도의 무수한 변화 속에서 이미 보아 왔다. 그렇기에 더더욱 형식을 벗어나 형식을 결정하는 권력과 사회적 배경에 집중할 것을 제안한다. 만족스럽지 않은 학점이 나왔을 때, 나의 게으름을 탓하거나, 교수자의 잘못된 결정에 컴플레인을 넣는 두 가지 선택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 누가 나에게 학점을 주게 했는지 상상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누군가 일방적으로 부여한 옆 친구의 학점을 우연히 전해 듣고 묘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기보다, 그 사람이 보여준 삶의 맥락을 파악하고 더 나은 노력을 자극하는 조언을 주고받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교육일 것이라 믿는다.

 

  1. 김정인, 『대학과 권력』, 휴머니스트, 2018, p.272. [본문으로]
  2. 위의 책, p.301. [본문으로]
  3. 안석배·김연주, “올해부터 出席체크, 학점 상대평가 없다”, 조선일보, 2015.3.16.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16/2015031600123.html?Dep0=twitter&d=2015031600123)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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