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쓰백#아동폭력#한국여성진흥원
노누
지난 11월 언제 신청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영화 토크쇼에 초대되었다. 예고편을 보고 누군가의 짧은 감상평을 읽은 후 이 영화를 꼭 보겠다고 다짐했지만, 상영관이 별로 없었다는 변명과 함께 일상에 치여서 금방 잊어버리고 결국 상영 기간을 놓치고 말았다. 아쉬운 마음에 인터넷을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여성 진흥원에서 마련한 영화 상영회 겸 토크쇼를 신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생각했지만, 문자가 오고 나서야 ‘그런걸 신청했었지’ 하고 생각이 났다. 영화가 끝나고 느낀 점은 이 영화가 결코 편하게 볼 수 있는 작품은 아니었지만 본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을 엄마에게 학대당하고 버려져 자란 ‘백상아’는 자신을 강간하려던 사람에게 상해를 입혀 전과자라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세차, 마사지 샵 등 일용직을 전전하면서 세상과 동떨어져 경찰관인 ‘장섭’과 살고 있던 어느 날 작고 마른 ‘지은’이 추운 겨울 길바닥에 덩그러니 서 있는 것을 보고 단번에 상아는 그녀의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알았다. 어떻게 할 방법이 없으니 그저 외면하려고 하지만 결국 지은을 지키기를 선택한다. 피로 맺어진 가족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설사 자신이 피를 보더라도.
이제까지 남성 중심적인 영화가 흥행의 한 패러다임으로 자리 잡고 있던 와중에 《미쓰백》의 등장은 여성 영화계의 반가운 소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상영조차 쉽지 않았고 초기 상영관 수도 매우 적었기에 조기 퇴장을 할 위기도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팬들은 스스로를 ‘쓰백러’라고 칭하며 적극적으로 영화를 홍보했고 한지민의 모교인 서울여대 학생들은 단체 관람을 하기도 했다. 스크린 수 유지를 위해 팬들이 모은 노력에 미쓰백은 손익분기점을 넘고 거기다가 상영 연장까지 이루어냈다.
특별한 다른게 없고 사람을 끌어들이는 작품성이 이 영화가 가진 가치가 아닐까. 미쓰백의 상영은 그 자체를 영화로 볼 수 있을 정도로 눈물겨웠다. 미쓰백을 두고 한지민 판 아저씨, 아저씨의 여자 버전이라고 보기도 한다. 《아저씨》는 청소년 관람 불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육백만을 돌파했다는 것이 놀라울 성과다. 그러나 미쓰백과 아저씨는 비슷한 내용과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저 아저씨가 여성으로 바뀌고 자극적인 요소가 없을 뿐인데도 결과가 천지 차이인 것이 찜찜했다. 한국 여성 영화의 여전히 멀었지만 미쓰백을 포함한《헐스토리》, 《소공녀》등 훌륭한 작품들을 발판으로 앞으로 시작일 것이다.
미쓰백을 보고 가장 좋았다고 생각되는 점은 상아가 지은이의 엄마가 아니라는 것이다. 당연히 누군가를 보호하는 여성은 어머니라는 공식이 이 영화에는 없었다. 심지어 지은이의 엄마가 등장하지도 않는다. 여태껏 영화에서 전형적으로 등장하던 배우자, 파트너, 어머니로서 여성이 아니라 미쓰백은 그저 ‘미쓰백’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지은이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도 스스로 자신을 ‘미쓰백’이라고 명명했다. 어떤 약자와 보호자의 구도도 아닌 자기 자신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고 그 과정에서 관계하고 연대하는 모습을 응원하게 된다.
“아줌마 아니다. 미쓰백. 그렇게 부르라고...”
이지은 감독은 실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전에 살던 아파트의 옆집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 집의 아이를 복도에서 마주쳤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결국 어떤 조치도 하지 못한 상태로, 그 집은 이사를 가버렸고 이지은 감독은 아이의 눈빛을 잊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미쓰백을 제작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영화는 실제 있었던 아동 학대 사건을 모티프로 하고 있다. 2015년 있었던 맨발로 배관을 타고 세탁실에서 탈출한 아이가 슈퍼에서 과자를 훔쳐 먹다가 주인이 신고하면서 밝혀져 많은 사람을 분노하게 한 그 사건이 영화에 담겨있다. 상아가 지은이를 만나는 장소가 슈퍼 앞이라는 것도 이 실화를 일부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연 나라면 지은이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가 있었을까. 상아가 차마 지은이를 외면하지 못한 것처럼 다가갈 수 있을까. 개인의 서사를 떠나서 그저 인간 대 인간으로 그런 사람들을 내가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을지 결정하기 힘들 것 같긴 했다.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많은 간절한 손길을 알게 모르게 외면해 왔을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 무슨 참견이냐고, 끝까지 책임질거냐고 묻는다면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더욱 망설인다. 이 영화는 비단 가정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렇게 무기력하게 으스러져가는 사람들을 도울 손길을 망설이는 나와 같은 사람들은 위한 영화가 아닐까. 현재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위한 국가와 사회 제도의 미진한 점과 더불어 확충해야 할 필요성은 당연한 것이고 개인과 개인의 연대, 누군가를 살릴 수 있는 말 한마디. 미쓰백은 누구나 망설일 수 있는 상황에서 관객에게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 묻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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