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학 만들기 프로젝트!
- 민주주의편 : 총장직선제와 그 너머의 정치학
이물
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직선제
내 삶을 내가 결정해야할까? 혹은 그럴 수 있을까? 그에 대한 한 가지 생각은 ‘민주주의’다. 인민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꿈꾸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제도이자 사상이다. 그러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정말 모두가 주인이 될 수 있을까? 민주주의는 과연 어떻게 구현가능한가? 그 한 가지 방법은 ‘대의제’다. 일종의 타협으로 몇 명의 대표를 선출하는 대의제가 민주주의와 결합하여, 역사 속에서 누구를 어떻게 뽑는지가 구체화되었다. 때문에 대표를 뽑는 과정이 곧 민주주의나 내 삶의 결정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모두의 주인됨’과 종종 배치되기도 했다.
이렇게 대의민주주의의 기이한(?) 동거를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직선’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대표를 직접 선출한다는 사실 자체가 곧 민주주의의 완수는 아니다. 몇 번의 선거 경험을 거친 우리가 잘 알고 있듯 대표를 한 번 선출한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으며, 그 과정만 남으면 인민은 통치자의 관리와 통제를 받는 대상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대표를 모두가 ‘직접’ 선출할 권한을 얻는다는 것의 의미도 분명 있다. 다양한 집단이 의사결정에 개입할 가능성을 열어주기도 하고, 그동안 개입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권력에 저항하는 상징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이처럼 ‘직선’의 의미는 복잡하다. 1987년의 성과인 대통령 직선제는 단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것은 민주화운동의 성과이기도 하고, 민주주의의 완수로 곡해되어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막연해진 계기이기도 하다. 때문에 직선제를 의미화하려면, 직선의 의미를 담보하는 두 가지 질문이 항상 있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내 삶의 결정권(민주주의)을 가질 수 있고, 그 방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직선은 그 방식 중 하나이며,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결국 우리는 삶의 총제적 정치 행위와 지향 속에서 직선이라는 방식의 의미와 효과를 평가해야 한다.
총장직선제의 역사와 의의
민주화운동과 총장직선제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이후의 경로 중 하나는 다양한 생활공간에서의 민주주의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이는 해당 공간의 민주적 의사결정제도 확립, 대표 직선제로 구체화되어 전개됐다. 대학도 다르지 않았다. 87년 6월 이후 대학은 극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학생, 교수들이 주체가 되어 대학과 정부, 사학재단을 상대로 개혁을 시작한 것이다. 대학 운영의 민주화, 권력에 대한 대학 자율화가 그 핵심이었다.
특히 각 대학에서 결성된 교수협의회는 총/학장 직선제를 대학 자율성 확립을 위한 당면과제로 내세웠다. 정권과 재단의 대리인이었던 총장을 직접 선출해 교권과 학문의 자유를 수호하자는 의미였다. 88년 계명대를 시작으로 대부분의 대학에서 총/학장 직선제를 실시하였고, 임명을 재단이 거부할 경우 이에 저항했다. 세종대, 고려대 등 일부 대학에서는 학생과 직원도 선출에 참가하게 해달라는 요구도 존재했고, 여론수렴위원회, 후보추천위원회 등의 간접적 방식으로 개입할 수 있는 경로가 만들어졌다. 1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1990년 사립학교법이 제정되고, 사립학교 재단의 교수 탄압과 대학 장악이 심해졌다. 2 김영삼 정권의 5.31 교육개혁은 대학 민주주의 없는 재단 자율화를 자극했다. 대학 재단의 권력을 강화해줌으로써 국가의 대학재정 투자 책임을 회피하고, 이를 대학 재단의 노력과 대학 간 경쟁의 영역으로 떠넘기기 위함이었다. 이에 포퓰리즘, 선거운동 과열, 보직 나눠먹기 등을 근거로 직선제를 폐지하고 재단 이사회 중심으로 학내 권력을 편중시키는 대학이 늘어났고, 98년 대교협 세미나에는 대학 총장들이 모여 총장 직선제 폐지를 결의하기에 이른다. 국립대 총장직선제 폐지는 2000년 김대중 정권의 제안에도 구성원의 저항으로 잠시 유예되었지만, 3 이명박, 박근혜 정권의 대학재정지원을 매개로 한 간선제 유도에 따라 자발적 폐지 수순을 따랐다. 그 과정에서 2015년 부산대 김현철 교수가 총장직선제 폐지와 대학 민주주의의 상실에 분노하며 투신했다.
총장직선제의 의의와 한계
총장직선제 요구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학원 민주화의 의미를 부여받았다. 그것은 대학의 운영이 국가와 재단 권력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에서, 대학이라는 학문, 생활공간을 지켜내려는 노력이었다. 거꾸로 말하면, ‘총/학장 직선제가 민주화의 상징이 된 것은 독재 정권 아래서의 끊임없는 통제와 간섭, 자율성 상실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 4이다.
故 고현철 부산대 국문학과 교수가 총장 직선제를 요구하며 투신해 숨졌고, 교수회와 총학생회의 농성 등을 거치며 부산대는 총장직선제를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사진출처 : 민중의 소리)
그러나 역사 속의 총장직선제가 가졌던 한계도 분명하다. 첫째로, 무엇보다 그간의 총장직선제는 교수 중심의 직선제였다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때문에 교수 중심의 권력관계가 공고해지고, 대학 자율성이 사회와 동떨어진 교수 중심의 상아탑을 의미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평의원회와 학내 의사결정구조에 대한 논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는 문제점이다. 둘째로, 총장직선제 요구의 구조적 한계도 있다. 총장을 아무리 완벽하게 뽑아도, 우리는 대표자 1인을 뽑았을 뿐이다. 선출된 대표자가 갖는 권력을 견제하고, 제도적 경로 내외에서 구성원의 의사를 반영할 정치가 없다면 대학은 대표자만의 것이 되고 만다. 때문에 그것이 갖는 효과에도 불구하고, 총장직선제는 권위주의적 정치와 수동적 대중이라는 한계에 갇힌 요청이 되기 쉽다.
대학 민주주의의 논의가 직선제와 교수 중심 의사결정구조로 수렴한다면, 그 끝에는 타성에 젖은 총장 선거와 정치공학적 논의만 남는다. 구성원들의 다양한 욕구는 과도하고 무리한 것으로 치부되고, 정치는 관료화될 것이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되고 있다. 교수협의회와 대학 본부의 긴장관계, 이사회의 일방적 결정 속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이나 학생회의 요구는 떼쓰는 것 정도에 그친다. 혹은 이해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것, 뭘 잘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치부된다.
그렇게 민주주의의 논의가 정체된 대학의 현주소는 어떠한가? 전문가들이 합리적으로 논의한 결과는 ‘4차산업혁명’, 국제화를 운운하며 대학의 규모만 팽창시키고 막연한 비전만 늘어놓는 것이 되고 있다. 교육적 질도 양도 제고하지 못한 채, 권위적 정치 속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 전문가들이 만들 수 있는 최선인가? 사실 최선이다. 활발한 토론이 필요한 영역을 모두 행정적 언어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총장직선제가 ‘선거 운동의 과열’이라는 지적은, 대학이 정치판이 된다는 호도를 걷어내면 일견 타당한 부분도 있었다. 견제 받지 않는 대표자 1인, 교수 권력 중심의 직선제가 내포한 한계였던 것이다.
과거의 학생들은 어느 정도 이런 한계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90년대에 대학마다 결성된 학원자주화추진위원회는 어용교수 퇴진, 학교 예결산 공개, 교수 채용과 총장 선출에 학생 참여,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대학발전위원회 구성, 재단 퇴진 운동 등을 요구했다. 5 물론 모든 요구를 현실화하지 못했겠지만, 대표를 어떻게 선출하는가를 넘어서 대학의 정치적 생태계를 완전히 바꿔놓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반영된 요구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겐 총장직선제를 넘어서는 쟁점이 필요하다
과거의 한계를 극복할 뿐 아니라, 변화한 시대적 상황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2018년 현재, 여러 대학가에서 총장직선제가 대학 민주주의의 핵심 쟁점으로 거론되고 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거치며 여전히 총장이 정권의 대리인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이화여대 학생들을 필두로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총장직선제 요구가 촉발됐다. 문재인 정권의 교육부는 대학별 총장선출을 자율에 맡기겠다고 전향적 태도를 취했으며, 대학 내 교수집단도 이에 반응하고 있다.
현재의 논의지형에서 총장 직선제는 당연한 것, 꼭 필요한 것으로 거론된다. 그러나 총장 직선제는 그 자체로 당연하지도, 꼭 필요하지도 않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수단이므로 그 목적이 밝혀져야 한다. 지금 대학이 처한 상황과 역사적 맥락에 맞는 역할이 부여되어야 한다. 과거의 총장직선제가 한계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재단의 간섭과 통제에 저항하는 의미를 가졌다면, 지금은 어떠한지 해명되어야 한다. 어떠한 맥락과 근거도 없이 민주적 수사로 제출되는 총장 직선제는 실물적 변화를 이끌어내기 힘들며, 변화한다 해도 권력을 가진 자들의 제도에 포섭되는 방식이 되기 쉽다.
총장 직선제라는 요구가 의미 있으려면, 대학에서의 정치가 왜 필요한지를 근본적으로 묻고 그 속에서 다시 고려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대학 자율성과 대학의 사회적 기능, 대학 민주주의, 대학에서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을 정치화하고 실천할 담론과 공론장, 정치적 세력화가 필요하다. 그래서 총장직선제는 그저 ‘우리가 총장 뽑자!’, 라는 요구여서는 안 된다. 대학은 누구의 것이고, 어떤 삶이 거기 있고, 누구에 의해 어떻게 다시 기획되어야 하는가? 하는 물음 속에서 다뤄야 한다.
다시 생각하는 대학의 정치
대학 자율성의 현재적 의미와 총장 직선제
총장직선제는 항상 대학 자율성을 위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대학 자율성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다. 그것은 국가로부터 ‘사학 재단’이 독립할 자율성을 이야기할 때도 있고, 대학이 하나의 법인으로 ‘수익사업’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자율성을 말할 때도 있다. 혹은 교수사회가 사회와 동떨어져서 상아탑을 지킬 수 있는 ‘고립된’ 자율성을 요청할 때도 있다.
대학 자율성은 무엇이고 대학은 왜 자율성을 가져야 하는가? 사실 완벽한 자율성이라는 것은 어디서나 허구다. 모든 사람과 공동체는 사회적 관계 속에서 상호의존적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자율성’은 필연적 의존 관계에 개입하는 권력과 지배의 속성을 의미한다. 상호의존 속에서 침해받지 않아야할 것, 보장받아야할 것은 무엇이며 이를 실현할 권력 체계는 무엇인지 가치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대학은 지식 생산기관이다. 여기서의 자율성은 구성원의 자기결정권과 지식 생산의 자유다. 그러나 이는 그것을 억압하는 권력 속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결국 대학 자율성은 사회와 동떨어진 자율성도, 본부가 수익사업을 할 자율성도 아니다. 권력에 저항하여 구성원 모두의 결정권과 지식의 자유를 담보하는 대학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자율성을 말한다.
7, 80년대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대학 자율성은 정부와 사학재단의 통제와 개입에 대한 저항 속에서 확보됐다. 대학 자율성의 정당성과 실체는 민주화운동 속에서 갖추어졌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그러한 통제와 개입은 여전하며, 오히려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더 적극적으로 정부 관료나 외부 인사의 개입을 장려하고 있다. 그러나 기업이 대학을 지배하는 새로운 주체로 등장했다. 정부와 재단은 기업의 직간접적 요구에 부응하여, 선택적 학문 지원, 노동자 통제, 학생(고객)관리와 취업률 제고. 산학협력 등 ‘대학 경영’을 수행한다. 대학이 생활공간이라는 관념이 무너졌고, 취업을 위해 거쳐 가는 교육서비스 제공의 공간이 되었다. 권력의 개입이 예전만큼 구성원들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더 이상 대학 공동체도, 주체도 없기 때문이다. 대학을 시장화 하는 속에서 정부와 재단의 전통적 권력은 더욱 힘을 얻는다. 따라서 오늘날 대학 자율성의 정당성과 실체는, 시장화에 저항하여 구성원과 지식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구상 속에서 확보된다. 여기서 우리는 대학이 어떤 공간이어야 하냐는, 대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려대학교 김예슬 씨는 2010년 3월 "자본과 대기업의 하청업체가 된 대학을 거부한다"는 대학거부선언을 남기고 학교를 떠났다. (사진출처 : 한겨례)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을 가는 대학 보편화의 시대다. 그러나 대학은 기업 친화적 노동자와 지식을 생산하는 기관이 되어가고 있다. 이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대학 공공성이 주장된다. 대학이 기업과 서비스 구매자가 아니라, 사회 전반의 이해에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대학이 지식과 노동시장, 학벌 문화 등의 영역에서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고, 애초 대학과 지식 생산이 일정한 목적을 갖고 개인과 집단이 수행하는 ‘사회적’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사회’가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고 있으니, 모두를 위한 것으로 전유해내자는 주장이다. 그러나 새롭게 기획되어야 할 ‘공공’의 내용이 무엇이고, 장소가 어디인가, 하는 답변은 비어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재정지원 확대, 대학의 사회적/공공적 기능에 대한 재정립, 대학 내 민주주의의 달성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공공’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경제적 토대, 이론적 전망과 함께 그것을 추동할 민주주의(정치적 주체와 공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멀리 돌아왔지만, 결국 총장직선제는 대학을 공공적으로 재편하는 이 프로젝트의 민주주의적 축에서, 하나의 수단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총장 직선제
때문에 총장직선제의 한계를 보완하고 의미를 살려내기 위해서는, ‘대학 공공성을 지향하는 대학 자율성’의 전략으로 제출되어야 한다. 이는 형식적으로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총장 직선제를 주장하고, 내용적으로 이를 저해하는 권력을 가시화하고 공공적 대학의 건설을 주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이사회의 승인을 거치는 사실상의 간선제도, 교수회 중심의 반쪽짜리 직선제여서도 안 된다. 학생, 비정규직 노동자 등 이제까지 총장선출 권한을 인정받지 못했던 이들까지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모든 구성원의 총장직선제는 교수 중심으로 수렴되었던 과거 직선제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실질적으로는 그간 소외된 이들이 대표 선출에나마 제한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며, 상징적으로는 이를 저해한 권력을 가시화, 공론화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비정규직 노동자가 함께하는 총장직선제를 주장할 때는, 이를 거부하는 총장-이사회의 제왕적 권력,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대학 본부의 경영 정책, 정부의 대학 비정규직 정책, 그에 비해 강력한 기업의 대학 영향력 같은 것들이 꼭 함께 다뤄져야 한다. 나아가 교육, 연구, 노동, 예산과 의사결정 등 대학 운영과 기능 전반에 대한 논점이 총장 선거를 중심으로 쟁점화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공공적 대학 건설에 대한 담론을 이끌어 내는 데에 총장직선제가 기여할 수 있다. ‘우리 총장을 우리 손으로’라는 당연한 구호보다 해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다.
때문에 지금도 각 대학의 총장직선제를 위해 싸우는 이들의 투쟁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상지대, 동국대 등에서 나타나는 사학재단의 비리와 횡포는 구성원에게 실질적인 위협과 피해를 불러일으킨다. 국공립대의 총장간선제는 정부와 보직교수들의 입김 아래 대학 운영을 병들게 하고 있다. 그동안 배제받았던 이들의 개입을 요청하는 일련의 요구는, 대학을 그 어느 때보다 민주적 갈등의 장소로 만들어 새로운 정치의 시작을 가능케 하고 있다.
대학 공공성을 향한 대학 자율성
그러나 민주화를 위한 우리의 열망을 실현시키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총장직선제가 ‘정상화’로, 혹은 민주주의 종결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때문에 총장직선제가 실현된 이후의 삶은, 총장직선제를 일단 실현하고 난 뒤가 아니라 바로 지금, 충분히 상상되어야 한다.
총장직선제의 구조적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서, 직선제는 언제나 대학의 정치(대학 공공성을 향한 대학 자율성)이라는 큰 틀에서 다루어져야 한다. 무엇보다 학내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대표 선출 외에도 구성원들이 상시적으로 대학의 의사결정에 참여할 수 있는 통로, 구성원 간 논의가 오고 갈수 있는 공론장이 마련되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대학 공공성을 담보하는 정치적 주체와 공간을 어떻게 재창출해낼 수 있는 지다. 따라서 때에 따라서는 총장직선제의 요구가 전면에서 물러날 필요도 있는 것이다.
오히려 선거 쟁점을 토론하고 선출된 권력을 견제할 정치적 경로와 공동체가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총장직선제만 형식적으로 도입된다면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한다. 투표할 권리를 줬는데도 관심이 없다는 비난이나, 투표권을 줬으니 다 된 것 아니냐는 정당화에 처하기 쉽다. 대중 스스로도 연례의 투표만 의무적으로 수행하고 탈정치화될 수 있다. 이런 문제는 구성원 간 동등한 비율의 참여가 아닐 경우 더욱 심각하게 대두될 것이다. 근본적으로, 대학 내에 정치적 주체와 공동체가 사라져있는 곳에서 직선제 요구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들릴 지도 의문이다.
이것은 총장직선제가 위험하거나 버겁기 때문에 ‘나중으로 미루자’는 말이 아니다. 총장직선제를 지금의 대학에 왜 필요한지 검토하고, 대학 민주주의의 종합적 전망과 ‘동시에’ 혹은 그 안에서 제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체적 전략은 상황과 조건에 따라 토론될 영역이겠지만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총장직선제 쟁취’ 구호를 유지해야 한다면, 단순히 이를 총력투쟁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총장직선제로 출발하는 대학 민주주의’라는 구호를 내세울 수 있다. 구호 뿐 아니라 구안에서부터 구성원들이 배제되었던 여타의 문제를 부각하고, 이를 개선할 수 있는 각 기관별 의사결정기구의 개혁과 함께 요청할 수도 있다. 한편, 대학 민주주의의 종합적 청사진을 제시하고, 그 활동의 목표중 하나로 총장직선제를 제시할 수도 있다. 나는 특히 후자의 방안과 관련해, ‘대학 민주주의의 종합적 전망’이 더욱 풍부해졌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있다. 총장직선제는 물론이거니와, 평의원회와 이사회 개혁을 넘어서 대학의 예산 결정 구조 재편, 학생회 (혹은 다른 방식의 정치적 공동체) 재건 및 활성화, 정부-대학 간 재정지원의 대안적 모델, 산학협력 등 대학 내 기업의 영향력과 비민주적 개입 검토, 대학 내 참여를 박탈하는 차별/폭력 해소와 문화 개선, 교육과정과 수업에 대한 민주적 토론과 의사결정 도모 등 다룰 수 있고 다뤄야 하는 주제는 너무나도 많다. 이 주제를 포괄하면서도, 시급하고 핵심적이라고 여겨지는 구호가 전면에 내세워져야 할 것이다. 87년 ‘직선제’의 타성에 젖어 ‘직선제’가 모든 것의 해답이자 종결인 것처럼 다뤄져서는 안 된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권위적 대표 개인과 그에 관한 절차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교육, 공동체, 경제, 문화를 아울러 전개되어야 한다.
결론
대학의 정치는 대학 구성원의 평등한 관계, 교육과 지식의 생산, 그것의 사회적 기여를 위해 필수적이다. 대학은 자신의 기능을 사회화하여 각계각층에 필요한 지식을 생산, 공유하고 토론을 촉발할 책임이 있다. 이렇게 생산된 지식은 개인과 사회의 성장 수단으로, 사회 변화의 동력으로,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존의 이데올로기를 해소하는 무기로 활용될 수 있다. 이러한 목표를 위해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는 대학 민주주의의 종합적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이 글은 말하고자 했다.
대학을 다닌 지 벌써 4년이 다 되어간다. 나는 대학생인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대학은 무엇이며, 무엇이어 하는가?’라는 고민을 붙잡고 살았다. 공부할수록 알게 된 비관적 전망은, 역사적으로 대학은 단 한 번도 권력에 의존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왕실과 종교 권력, 국가 권력을 넘어 지금의 시장 권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대학은 자신의 살 곳을 찾아왔다. 그래서 나는 대학을 사회화하고, 대학 공공성을 추구하자는 말이 너무나 자연스러우면서도 어딘가 탐탁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런 당연한 언설이 아니라, 그 가치를 실현하는 방식이다. 때문에 우리는 기존의 억압적 의존 관계를 어떻게 탈피할지, 새롭고 적절한 의존(혹은 실질적 자립)의 형태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상상해야 한다.
비관적 전망 한편에는 파편화된 낙관적 희망들도 있다. 60년대 일본 전공투의 지식의 전쟁 및 국가 동원에 대한 비판, 68혁명기 대학생들의 자주관리를 향한 열망, 한국 민주화 운동기 학생운동과 사회변혁의 노력은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다른 전망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지식과 교육의 가치, 저항 가능성, 새로운 사회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었으며, 많은 과제를 남긴 만큼 대학과 사회의 생리를 변화시켰다.
그들이 얼마나 대단해 보이든 간에, 지금 대학과 우리가 처한 시대를 겪은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언어로 지금을 해석하고, 말하며, 실천해나가야 한다. 언어는 끊임없이 생성, 재조합된다. 그 치열한 고민의 과정에 이 글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 지금도 언어를 갈고 닦고 말하고 실천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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