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후기

 

취한다

안녕하세요 취한다 에요~ 저는 최근에 너무 제 인생을 건조하게 남의 인생 대하듯 관조해 온 것 같아서 내 삶에 좀 몰입해보자라는 취지로 취한다~라고 필명을 정해봤어요. 과도하게 몰입하면 환각증상(?)에 들어갈수도 있지만 경계를 조심해볼게요..ㅎ 이번 교육저널은 지난학기에 이어 두 번째밖에 안되었는데 벌써 글쓰는 게 지겹고 재미없게 느껴지고 그랬어요. 그런데 그렇게 점차.. 지루한 상태로 글이 마무리가 될 때 즘 다른 교육저널 친구한테서 지난 교육저널 블로그 리뷰를 공유받았는데! 그 리뷰는 저의 글을 좋아해주시고 저를 찾아주시는 리뷰였어요!! 진짜 너무 감동받고 이 글을 다른 사람이 정말 읽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늦었지만 새로운 설렘을 다시 얻었어요. 그리고 어쩌다보니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네여 ㅎㅎ 그리고 편집캠프에서 지금 한 학기활동 5개월만에 교육저널 분들이 첫 오프라인 모임을 갖고 있는데 너무 좋네요~~~ 뒤풀이가서 더 친해져요 ㅎㅎㅎ

 

고슴도치뇽

교육저널 편집위원분들! 안녕하세요오옹ㅇ 고슴도치뇽이에여 새로운 분들이 많이 들어오셔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잘 할 수 있을까 약간은 무서웠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편집캠프에서 편집후기를 쓰고 있네요교육저널과 함께하는 세 번째 학기인데, 이번에는 제 글을 잘 써야지! 하는 마음보다는 비대면 상황에서 교육저널의 느낌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여러 생각들을 어떻게 좀 더 세밀하게 나눌 수 있을지에 집중했던 것 같아요! 쉽지 않은 여건 속에 서도 고민을 나눠주신 교육저널 편집위원분들, 열심히 회의를 진행해주셨던 BDUCK 편집장님 감사해요! 여러분이 있기에 교육저널이 존재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당ㅎㅎ 비록 비대면 상황이었지 만 저는 화면으로 혼자 내적 친밀감을 쌓았어요ㅎㅎ(아마도 여러분도 그러실거라구 믿어요 후후) 우리 모두가 학교에 돌아올 수 있을 때, 길가다 만나면 아는 척 해주세요>< 책 한 권이 나오는 과정이 어느덧 마무리를 향해 가고 있는데, 이번 학기 교육저널의 새로운 색을 입혀주신 여러 편집위원들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 드립니당 끝까지 잘 마무리하구, 뒷풀이 가요오오~~~

 

BDUCK

매번 편집후기를 작성할 때 가벼운 맘이었는데, 편집장으로써 편집후기를 작성하려니 감회가 새롭네요! 새 편집위원들을 볼 때마다 제가 교육저널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생각납니당. 1학년 1학기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대학 생활 전부를 교육저널과 함께 보낸 셈인데요 ㅎㅎ 대학에 들어와서 가장 잘한 일이 교육저널에 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저널을 통해 지난 1년 반 동안 교육을, 대학을, 사회를 공부하며 폭풍성장 할 수 있었거든요! 교육저널과 함께 자랄 수 있어서 행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번 호 편집장으로서 한마디 하자면, 여러모로 아쉬움과 미안함 등이 교차하는 감정입니다. 기존회원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교육저널에 애정이 있었기에 어떻게든 교육저널을 유지시켜보고자 맡은 공동편집장이라는 자리였습니다. 맡을 때부터 부족한 것을 알고 있었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편집위원들에게 미안한 점이 참 많네요ㅠㅠ 좀 더 글 피드백을 잘해줄 걸, 한 사람 한 사람의 글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일 걸 하는 후회가 남 습니다. 더해 코로나 탓에 화상으로 회의를 진행하며 편집위원들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도 너무 아쉽고, 편집장 업무에 치여 정작 글에 대한 고민은 덜한 것 같아 이것도 아쉽습니다. 이 렇게 아쉬움이 남는 걸 보면 제가 되게 욕심이 있었나봐요 ㅎㅎ 그래도 써내려가지 못한 얘기들, 부족했던 글에 대한 고민들, 부족한 편집장인 것 같아 미안했던 마음들 모두 이제는 털어내려 합니다. 아쉬움이 남는 것 또한 경험이고 제가 성장하는 발판일 테니까요. 부족한 편집장을 믿고 따라준 편집위원들, 특히 저와 함께 동아리를 이끌어오느라 너무너무 수고한 공동편집장 고슴도치뇽에게 가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저의 진심이 편집 위원들에게, 독자들에게, 사회에 닿길 바랍니다.

 

스누피우

안녕하세요. 이번에 교육저널에 처음 참여하게 된 스누피우입니다~ 필명을 계속 고민하다가 최근에 스누피 70주년 전시회에 다녀와서 스누피우라고 정했습니다...ㅎ 한 학기동안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어요! 비대면이라서 조금 아쉬웠지만 매주 많은 것을 배운 시간이었어요!! 특히 항상 따뜻한 분위기에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처음 들어와서 아는 것도 별로 없고 한 학기 내내 동아리 부원님들의 이야기에 감탄만 한 것 같은데 벌써 1학기를 마무리 한다니 시간이 정말 빠른 것 같네요ㅜㅜ 정말 교육저널에는 똑똑하고 멋진 분들만 계세요. 매주 회의를 마무리 하고 '나도 저렇게 논리정연하고 멋지게 말하고 싶다.'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ㅜㅜ 제 첫 동아리가 교육저널이라서 정말 행복합니다. :) 그리고 글 쓰는 것이 어려워서 많이 걱정했는데 편집장님들이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ㅜㅠ 교육저널 최고!

 

말하는 감자

안녕하세요 말하는 감자입니다 왜 말하는 감자냐구요? 회의할 때 보니까 다 말을 정말 잘 하시던데 저는 그냥 아무 말이나 했어서 말하는 감자 같다고 생각해서 말하는 감자가 되었습니다 !! 저랑 같이 쓴 친구는 말하는 고구마에요!! 사실 이번 학기에 코로나 때문에 너무 집에만 처박혀 있기도 했고, 새로운 집단에 들어가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교육저널에 들어왔는데 이번 학기에 너무 많은 일들을 벌려서 막상 교육저널 글 쓰기에 저의 깊은 고민이 조금 적게 들어간 것 같아서 많이 아쉬웠던 것 같아요 ㅠㅠ 게다가 천부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하는 습관 때문에도 좀 개인적으로 부족한 글을 쓴 것 같아서 많이 아쉽습니다하지만 그래도 이 글 때문에 글 쓰는 능력도 조금 기른 것 같고, 좋은 사람도 만나고 회의나 세미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것 같아 좋은 시간들이었답니다 ^_^ 특히 코로나라서 동아리들이 다 망해가는(?) 시점에 이렇게 매주 줌으로라도 회의 자리 만들어주신 편집장분들 너무 고생하셨고 제가 쓴 글로 새로운 교지가 나온다니 너무 설레고 떨리네요,,!! 빨리 제가 직접 만든 교지가 나와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모두들 글 쓰시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말하는 고구마

안녕하세요 전 말하는 고구마였습니다^^ 원래 같이 글쓰던 말하는 감자 씨가 감자 타이틀을 가져가시는 바람에 전 감자랑 같이 언급되는 고구마로 하기로 했어요 ㅎㅎㅎㅎㅎ 저도 교육저널을 처음 들어갔을 때 20학번이라 제가 생각했던 엄청 이상적인 새내기 생활이 있었는데...그랬었는데어쩌다 보니 오티+엠티+미팅(흑흑 이게 젤 슬퍼요 엉엉)도 못 가게 되었네요그래도 동아리 활동은 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ㅎㅎ 제 필명 보시면 아시겠지만 전 진짜 한낱 말하는 고구마 밖에 안 될 정도로 멍청하지만 ...ㅠㅠ 똑똑하신 다른 분들 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너무너무 좋았어요. 대면이었으면 정말 좋았겠지만 비대면으로도 매번 회의를 어떻게 진행하실지 고민하시면서 잘 이끌어주신 교육저널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하고 싶습니다 ㅎㅎ 뭔가에 대해 많이 알지도 못하고 말도 조리 있게 못하지만 부족한 글로 다른 분들도 제가 고민한 부분에 대해 한 번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한 학기동안 다들 고생 많으셨고 학교에서 만약...마주치게 된다면....사실 지금 서울이 심각해져서 제가 서울을 갈지 안 갈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얼굴 뵙게 된다면 교육저널 분들께 꼭 꼭 인사 드릴게요 ㅎㅎㅎ 다들 너무 수고 많으셨고 건강 챙기세요 여러분. 꼭 마스크 쓰고 다니 시고요!!

 

별먼지

안녕하세요, 별먼지입니다! 들어오기 전에도, 들어오고 나서도 많이 걱정했는데 편집을 마무리 해가는 지금에서는 들어오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새로운 것들을 배우고 많은 것에 대해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던 것 같아요. 여러모로 너무나 미숙하고 부족했지만, 교널 편집위원 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나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답니당. 다들 너무 좋은 분들이신 것 같아요>.<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펭로시

안녕하세요! 펭로시입니다. 펭귄을 닮아서 펭로시예요! 펭수, 펭돌이 등 다른 이름들도 많은데 왜 펭로시냐고 물으시면 제 영어이름이 도로시이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교육저널은 매 순간이 새로운 도전이었어요. 시의적인 주제로 세미나를 준비해보는 것도 처음, 기사를 써보는 것도 처음, 디자인과 편집도 처음....... 교육저널 시작부터 모두 처음 해보는 일이기에 설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두렵기도 했습니다. 편집후기를 쓰는 지금도요! 저 혼자였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겠지만 교육저널 여러분들의 격려와 조언 덕분에 의미 있는 마무리를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소시민입니다. 남들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고 자책을 많이 하는 성격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교육저널을 지원한 동기는 저도 세상을 향해 외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나아갈 길이 먼 저지만, 한 가지 마음 깊이 새긴 점이 있다면 혼자 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에요. 수면 위로 드러난 부조리, 수면 아래에 감춰져 있는 부조리 모두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세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합니다. 저는 교육저널을 통해 이런 따스함을 몸소 느꼈어요. 앞으로 남들의 시선이 아닌 제 양심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제 의견을 과감하게 말하고 세상을 바꾸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후로도 교육저널과 함께 다양한 사회적 이슈에 대해 토의하고 해결점을 모색하고 같이 고민하고 싶습니다. 시작은 모든 것이 처음이었지만 이제는 조금은 더 성숙해진 펭로시가 된 것 같아요!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쨈입니다! 저는 이번 기사를 쓰면서 스스로도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서 좋았어요. 원래 민주시민교육에 관심이 있어서 저번학기에도 관련해서 레포트를 쓰긴 했지만 이렇게 저자분들을 직접 만나고 페미니즘 교육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소중했습니다. 기사에는 정말 일부분만 실렸지만 실제로는 제가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좋은 이야기 많이 들을 수 있었어요. 너무 좋은 경험이었어서 졸논도 이쪽으로 쓰게될지도 모르겠네요 ㅎㅎ. 역사와 전통이 깊은 교육저널과 함께여서 더 많이 배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저널이 함께 만들어갈 미래도 많이 기대해주세요.

 

ALee

유난히 교육저널을 거쳐 가는 사람들이 많았던 저희 과의 특성상, 새내기 때부터 졸업하기 전에 한 번쯤은 교육저널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어쩌다 보니 새내기 때부터 했던 동아리가 늘 교육저널의 회의 시간과 겹치는 바람에(눈물줄줄) 교육저널을 하겠다는 계획이 조금씩 미뤄졌다가, 어느새 졸업을 앞둔(과연?) 학기에 와서야 교육저널과 함께 하게 되었네요. 심지어 교육저널에 지원서를 넣기 직전까지만 해도 5월에 예정되어 있었던 교생 실습 때 문에 과연 지금 이 시기에 지원하는 것이 맞는지, 내가 과연 들어가서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열심히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뭐, 다들 아시다시피 이번 한 학기는 코로나19라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판데믹이 터지며 저의 학교 생활+교널 생활도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습니다. 기존에 생각했던 일정은 전부 뒤바뀌고, 제 한 학기의 가장 중요하고 큰 부분을 차지했던 교생 실습 일정마저 계속 바뀌며 정말 정신없고 파란만장한 한 학기를 보냈어요. 그래서 교육저널 회의도 생각보다 열심히 참여하지 못 했고, 오랜 시간 공들여 다듬었어야 할 제 글에도 많은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 같네요. 교육저널 회의 때도 초반에는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많은 방황도 했었고, 기껏 글을 써가도 이게 맞는지 모르겠다, 내가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얼굴도 보지 못한(..) 편집위원들에게 찡찡대기도 많이 찡찡댔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편집위원분들이 늘 좋은 피드백을 주시며 제가 글을 더 잘 쓸 수 있도록 저의 찡찡거림을 잘 받아주신 덕분에 반쯤 울면서도 글을 끝까지 끌고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교생을 할 때 굉장히 힘들었어요, 사실. 그래서 교생 하는 당시에는 그 상황에 대해 비판적인 문제의식을 느끼기보다는 매일매일 그날의 할 일을 해치우기 바빴습니다. 그런데 교육 저널을 통해 저의 교생 생활을 다시 비판적으로 돌아보며 조금 더 날카로운 눈으로 제가 지나쳐 온 길을 돌아볼 수 있었고, 그 과정은 정말 의미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작성한 아무말 대잔치글로 교육저널이라는 한 권의 책이 나오는 데 손톱만큼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행복하네요! 정말 교육저널이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던 경험이라 생각하고, 한 학기 동안 제가 저의 시선을 더욱 예리하게 갈고 닦을 수 있도록 도와준 다른 편집위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좋은 편집위원분들과 함께 교육, 사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교육저널에서 더욱 성장하고 싶습니다 :)

 

비행

안녕하세요. 비행입니다. 먼저 비루한 글을 읽어주신 여러분께 너무나 감사합니다. 비행그저 사태를 지나가는 행인이 되지 말자, 그리고 언젠가 세상을 날아다니는 사람이 되자!’ 라는 뜻으로 정하게 된 필명입니다. 인터뷰 글에는 대학에 처음 들어간 새내기의 포부를 담았습니다. 12년간 공교육을 받아오면서, 또 과외를 하며 교육 시장에 참여하면서 우리와 가장 떨어질 수 없는 것이 교육이 아닐까 합니다. 때문에 교육저널에 참여하고자 했고요. 부족함이 많은 글이지만, 독자 여러분과 만나게 된다니 무척이나 기쁩니다. 교육저널 편집위원님들, 정말 고생이 많으셨어요. 저는 사정이 겹치고 겹쳐서 결국 편집캠프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다시 기회가 닿게 된다면 꼭 같이 하고 싶네요. 너무 아쉽습니다. 저의 무딘 생각을 날카롭고, 또 정갈하게 다듬는 시간에 들어간 수고와 노력에 함께 해주신 분들과 건강하게 교정에서 만나뵐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를 항상 지지해주는 가족과 교육저널 사람들과, 지금 코로나에 맞서 싸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행복이 있기를!

'36호 - 수면아래'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번호를 펴내며  (0) 2020.09.01

N번방 사건과 권력형 성폭력

- 성차별적 사회구조인가? -

 

BDUCK

N번방 사건, 세 개의 연서명

2018년 하반기부터 텔레그램을 통해 피해자들을 유인하고 성 착취를 자행한 N번방 사건은 올해 초 수면 위로 드러남으로써 대한민국 사회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사회 각계에서 N번방 사건을 규탄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고, 서울대 역시 32216차 연운위에서 연석회의 이름 아래 N번방 사건을 규탄하는 성명문을 발표하는 안을 가결하고 이틀 후인 324일 성명문을 내었다. 그리고 이 성명문은 곧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며 서울대 내부 구성원들 사이 분쟁의 시발점이 된다.

 

연석회의 성명문

 

연석회의 성명문은 N번방 사건이 여성혐오 문제와 직결된 것으로 성차별이 여전히 사회적으로 정당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학내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난 권력형 성폭력 사건과도 연결된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러한 성차별적 구조를 해결하기 위한 구조의 변화와 문화적 전환을 촉구하며, 정치권에 차별금지법과 같은 실효성 있는 법안을 제정하고 성차별적 사회구조를 타파하려는 노력을 할 것을 요구하였다. 연운위는 성명문 발표와 함께 서울대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N번방 사건 규탄에 동참하는 연서명을 받았다. 이것이 첫 번째 연서명이다.

해당 성명문은 발표된 직후 학내의 핫이슈로 떠올랐다. ‘에브리타임’, ‘스누라이프와 같은 대학 커뮤니티를 필두로 서울대 구성원 사이에서 성명문에 대한 부정적 반응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연석회의 성명문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은 성명문이 편향적이고 지나치게 페미니즘을 강조하여 서울대 구성원의 의견을 모두 포괄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가하였다.

이렇듯 여론이 계속해서 들끓는 가운데, 급기야 농생대 연석회의는 연운위의 성명문을 수정할 것을 요구하는 연서명과 수정제안서를 발표하며 제 18차 연운위에서 연서명 수정 제안의 건을 발의한다. 두 번째 연서명의 등장이다.

 

 

농생대 입장문

농생대 연석회의는 단과대 연석회의 성명문이 사건의 본질을 제대로 포함하지 않고 의견수렴을 제대로 거치지 않아 많은 학우들의 의문을 불러일으킨다며 326일 연서명과 함께 수정제안서를 발의하였다. 농생대 연석회의 수정제안서의 주요 의견은 다음과 같다. 먼저 26만이라는 숫자의 수치는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성명문의 신뢰도를 하락시키며, N번방 사건의 가담자가 가지고 있는 여성혐오, 성차별적 가치관이 사회에 만연하다는 것은 확대해석이라고 이야기했다. 또한 N번방 사건 가해자 규탄, 피해자 구제와 수사 촉구에 대한 내용과 아동·청소년 보호에 대한 내용을 보완할 것을 요구하며 차별금지법과 차별금지법이 왜 n번방 사건 해결에 적합한 수단인지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함을 주장하였다. 농생대 연석회의는 이러한 수정제안 요청과 더불어, 기존의 성명문은 연석회의라는 위치를 이용하여 여성혐오와 성차별을 부각하는 정치적 이용이라고 거세게 비판했다.

그러나 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농생대의 수정제안서 발표 이후 이에 맞서 농생대의 수정제안서를 철회하라는 목소리 또한 등장한 것이다. 327일 일부 학생들은 농생대의 수정제안서를 비판하며 농생대에 수정제안서를 철회하고 사과를 요구하는 연서명을 돌렸으며, 330일에 있을 18차 연운위에서 해당 내용을 담은 안을 공동발의했다. 마지막 세 번째 연서명의 등장이다.

농생대의 사과를 요구하는 이들은 농생대의 수정제안서가 주장하는 근거들을 반박하며, 농생대의 수정제안서야말로 사건의 은폐와 축소를 부추기고 논리적 연결고리를 결격한 제안서라고 거세게 비판하였다. 또한 농생대 수정제안서의 골자 의견들에 대한 비판을 넘어 농생대가 연운위 회의에 불참하였으면서 수정제안서를 발의한 것, 총학생회칙에 규정된 회원이 아닌 졸업생·대학원생에게까지 연서명을 받은 것까지 비판하며 농생대의 공식사과문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이 얼키고 설킨 분쟁은 어떻게 끝났을까? 330일 열린 18차 연운위는 이 대립하는 두 안건이 부딪히는 중요한 장이었다. 결론적으로 해당 연석회의에서 농생대의 수정제안서는 의결되지 못하였다. 연석회의가 성명문 작성을 절차대로 의결했으며, 이에 대한 피드백 또한 충분히 받아 성명문을 수정하기 어렵다는 반박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절충안으로 향후 연석회의 활동에서는 가해자 수의 출처를 분명히 밝히고, 성차별적 사회구조 및 차별금지법 입법에 대해 부가 설명하도록 하는 수정안이 채택됐다. [각주:1]

결국 기존 성명문의 기조가 유지된 채 표면적으로 분쟁은 일단락되었으나, 그럼에도 N번방 사건에 대해 각 단과대 단위로 내었던 입장문을 살펴보면 여전히 갈등이 산재함을 알 수 있다. 연석회의 이름이 아닌 각 단과대별 N번방 사건 규탄 입장문이 서로 통일되어 있지 않고 강조하는 지점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예컨대, 공대가 발표한 N번방 사건 관련한 입장문에서는 “‘n번방사태와 그 가해자들을 강력히 규탄하며 가해자들에 대한 엄벌을 촉구하고, “처벌 수위를 끌어올리고... 강력한 법안을 제정하자는 등 가해자를 엄벌하고 처벌의 수위를 높일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반면 인문대 학생회의 입장문에서는 가해자가 엄중한 처벌을 받도록 요구하는 것과 더불어 이 사건을 가능하게 한 일상 속의 성폭력을 해체할 것을 요구하고, “N번방 사건은 몇몇 개인들에 의해 갑자기 감행된 범죄가 아니라, 지금까지 성폭력을 묵인해 온 한국 사회의 연장선에서 일어난 범죄라며 N번방 사건을 일상 속의 성폭력과 연결짓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는 여전히 N번방 사건의 해석과 성명문에 대해 서울대 구성원 사이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세 개의 연서명, 한 개의 쟁점

살펴본 세 개의 연서명, 들끓는 여론들, 단과대별로 강조점이 다른 입장문은 분명히 주목할 만하다. 이 싸움은 어떠한 의미를 가질까? 흥미롭게도 이 분쟁을 잘 살펴보면, 결국 싸움의 주된 원인은 한 가지 명제를 두고 대립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 명제는 바로 ‘N번방 사건의 본질이 성차별적 사회구조에 있는가?’이다. 왜 이러한 결론이 나오는지, 농생대의 수정제안서와 이에 맞선 공동발의인들의 수정제안 철회요청서를 함께 살펴보자.

 

# N번방 사건의 본질은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아니다?

농생대의 수정제안서는 기본적으로 N번방 사건의 본질이 성차별적 사회구조에 있지 않다는 입장을 따른다. 이는 농생대가 수정을 요청한 두 번째 항목의 가해자들이 성차별적 가치관을 가질 수는 있지만 성차별적 구조가 사회적으로 만연하다는 것은 확대해석이다라는 주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입장을 따를 경우, 26만이라는 숫자의 신뢰성 문제, 사건의 사후처리 문제, 아동청소년 보호의 문제, 차별금지법에 대한 설명 부재 등의 나머지 근거들 역시 당연해진다. 먼저 26만이라는 수치는 가해자의 수를 부풀림으로써 구조적으로 성차별이 만연하다는 결론에 이를 위험이 있으므로 부당해진다. 재발방지와 여성혐오에의 집중 역시 피해자로써 여성을 과도하게 부각하게 되고 마찬가지로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만연하다는 명제로 흐를 수 있으니 사후처리와 아동청소년 보호에 대한 내용을 보완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또한 N번방 사건의 본질이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아니니 포괄적인 차별을 금지하자는 차별금지법 역시 N번방 사건의 해결과는 무관하게 된다.

결국 농생대의 수정제안서는 N번방 사건을 여성혐오 범죄가 아닌 일부 가해자들의 도덕적 타락에 의한 사건으로 해석하고, 그에 따라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사회에 만연하거나 모든 남성이 가해자는 아니라는 주장을 전달하고 싶은 것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 N번방 사건의 본질은 성차별적 사회구조이다?

반면 농생대에 맞서 수정제안 철회 요청서를 발의한 공동발의인들은 N번방 사건의 본질이 성차별적 사회구조에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을 따를 경우 26만이라는 수치의 명확성과 신뢰성은 큰 문제가 되지 않으며,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N번방 사건의 본질이 성차별적 사회구조에 있으므로 아동 청소년 보호보다 여성 보호에 집중하는 것이 맞으며, 사건의 사후처리보다 사건의 근본적 원인을 예방하는 재발 방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타당하다. 차별금지법 역시 N번방 사건의 기저에 깔린 여성혐오와 성차별적 사회구조를 타파하는 데 기여하는 수단이 된다.

결국 공동발의인들의 철회 요청서는 N번방 사건이 일부 악마적인 가해자들의 소행이 아닌 명백한 여성혐오 범죄이자 성차별적 사회구조의 산물이며, 이를 정확히 짚고 타파하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라 해석해볼 수 있다.

이처럼 연운위의 성명문의 해석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지만, 이 분쟁을 꿰뚫는 핵심에는 “N번방 사건의 본질이 성차별적 사회구조에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다. 각 단과대별로 상이한 입장문 역시 마찬가지이다. 통일되지 않고 강조점이 다른 단과대별 입장문도 결국 N번방 사건의 본질을 둘러싼 견해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다.

 

3. N번방 사건의 본질은 성차별적 사회구조인가?

그렇다면 문제는 N번방 사건의 본질이 과연 무엇이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N번방 사건에 분노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쯤되면 정말로 N번방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고 합의 지점에 이르지 않는다면 이번과 같은 갈등은 지속적으로 일어날 것이며, 끝없는 대립의 장이 펼쳐져 사건의 본질에 대한 담론은 흐릿해질 것이다. 더하여, 사건의 본질에 대한 담론의 부재는 결과적으로 디지털 성범죄의 반복을 낳을 것이다. 우리는 사건의 예방 해결, 갈등 중재 등 모든 것을 위해서라도 이제는 N번방 사건의 본질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사건에 대한 분노, 페미니즘 백래시에 대한 맥락을 최대한 배제한 채, N번방 사건이 왜, 어떻게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 피해자는 어떻게 피해자가 되었나

N번방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서 먼저 피해자가 피해자가 되기까지의 과정부터 살펴보자.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누구도 타인으로부터 성적 착취를 당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며 자신이 성적으로 착취당하는 영상을 공개하고 싶은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즉 피해자들은 원치 않게 피해자가 되었다.

그렇다면 피해자들은 도대체 왜, 어떻게 성착취물을 찍게 된 것일까?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N번방을 운영하고 성 착취를 자행한 가해자들은 피해자들의 을 담보로 피해자들을 협박했다는 것이다. 가해자들은 우선 메신저 앱을 이용해 스폰 알바 모집과 같은 게시글로 피해자들을 유인한 다음, 얼굴이 나오는 나체사진을 받아 이를 빌미로 협박해 성착취물을 찍게 하고 이를 유포하는 수법을 이용했다. 심지어 피해자를 유인한 뒤 강간한 영상을 남기고 이를 빌미로 협박하기도 했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협박은 남에게 어떤 일을 하도록 위협하는 행위로, 협박을 당하는 사람은 공포심에 자신의 의사와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즉 협박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협박을 가하는 사람은 상대방의 약점을 쥐고 이를 빌미로 상대방에게 공포감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협박이 전혀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N번방 사건의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의 협박에 넘어가 성착취물을 찍게 되었다는 것은, 곧 자신들의 약점이 가해자들의 손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의 약점은 피해자들의 나체 사진과 영상물들, 이었다.

몸을 빌미로 한 협박은 피해자들이 나의 알몸 사진/영상이 찍히고 그것이 유포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의 두려움이 크기는 그들이 성착취물을 찍게 될 정도까지 컸다. 무엇이 그렇게도 두려웠던 것인가? 그들은 누군가의 시선을 두려워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깊게 생각해보면 나의 몸을 찍고 관음하는 이때의 누군가가 단순히 불특정 다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몸이 찍히는 누군가, 이 찍힌 몸을 관음하는 누군가는 성별 특질에 따라 확연히 구분된다. 전자의 누군가는 여성이며, 후자의 누군가는 남성이다.

납득하기 어렵다면 리벤지 포르노라 흔히 일컬어지는 불법촬영물 범죄 사건에 대해 고찰해보자. 불법촬영물 범죄 사건은 반드시 피해자와 가해자가 두 성별로 양분된다. 영상물에는 분명 두 사람, 여성과 남성이 모두 나체로 등장하지만, ‘여성만이 협박을 당하고 유포를 두려워하며, 심지어 유포가 되었을 때에 극단적인 선택에 이르기까지 한다. 왜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두 성별이 같은 조건에 있음이 분명한데, 피해는 한쪽만 당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이는 그 영상물에서 대상화되는 객체와 영상물을 소비하는 주체가 명확히 구분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이 불법촬영물 범죄 사건과 N번방 사건이 같은 맥락의 범죄인 이유이다. N번방 사건 역시 불법촬영물 범죄 사건과 같은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며, 이때 피해집단과 가해집단의 성별이 뚜렷하게 구별된다. 즉 피해집단은 여성이라는 특질로 묶인, 대상화당하는 집단이며 가해집단은 남성이라는 특질로 묶인 소비하는 집단이다. N번방 사건의 피해자들이 피해자가 된 것에는, ‘여성의 성적대상화남성의 소비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다.

 

# 여성의 (성적)대상화, 남성의 소비

남성과 여성은 서로의 삶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서로가 느끼는 대상화에 대한 두려움의 정도를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두려움의 크기가 성별에 따라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사실이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훨씬 대상화를 두려워한다. 화장실이나 모텔을 갈 때 불법촬영물이 숨겨져 있을까 걱정하는 사람은 높은 확률로 여성이다. 남성들은 이 같은 걱정을 현저하게 적게, 혹은 아예 하지 않으며, 남성의 불법촬영물은 여성의 그것과 달리 여기저기에 널려있지 않다. , N번방 사건의 피해자들이 피해자가 된 것은, 피해자들이 여성이었기에, 다시 말하면 성적 대상화의 두려움이 큰 존재들이었기에 가능했다.

대상화라는 말 속에는 누구의 대상인가의 문제가 깊게 관여되어 있다. 주체와 객체가 필연적으로 상정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때의 객체, 즉 대상화되는 것은 여성이며 주체, 즉 대상화하는 이는 남성이다. 대상화의 권력 관계에서 우위에 위치한 남성들은 여성들의 외모를 품평하고, 그들의 신체를 소비함으로써 '남성성'을 획득한다.

여성이 대상화되고 남성이 이를 소비하는 예시는 수없이 많으며 일상적이다. 여성들의 신체와 외모는 쉽게 평가되고 경쟁된다. 뉴스 기사나 인터넷의 사이트에서 여성의 가슴과 엉덩이 등 신체를 강조한 만화에 대한 광고 등을 접한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인 만화 나 잡지에서 여성은 남성의 시선이 닿는 대상으로 존재로, 여성은 늘 도발적인 자세와 표정을 동반하며 그들의 신체가 부각된다. 여성들이 술자리의 야한 농담과 안줏거리, 남성들의 평가의 대상이 되기 쉽다는 사실은 많은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 커뮤니티에서 일반인 여성들의 사진들은 지인 능욕등의 이름으로 이용되고 도용된다. 여성들의 외모에 순위를 매기고 여성들을 등급으로써 평가, 성희롱하는 대학 단톡방 사건들, 남성 교수와 여성 학생 간 권력형 성폭력 사건들은 대학 내에서 매년 터진다.

여성의 대상화는 여성이 가장 극단적이고 성적으로 대상화된 포르노 산업에서 특히 극대화된다. 여성향 포르노보다 남성향 포르노 산업이 훨씬 공고하며 그 규모와 수치가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은, 포르노의 주 소비 계층이 남성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남성들은 포르노를 소비하는 것을 넘어 포르노 배우의 외모, 몸매와 연기 등을 평가하고 이같은 정보를 댓글과 커뮤니티, 채팅을 통해 공유한다. 전문 포르노 배우를 넘어 걸그룹, BJ, 모델, 심지어 일반인의 야한 사진을 사이트에 올리고 관음하기도 한다.

앞서 예시로 나온 '리벤지 포르노'라는 단어 역시 여성의 대상화가 얼마나 자연스러운지 말해준다. 끔찍한 불법촬영물 범죄 사건은 '포르노'라는 명칭으로 사회에 거듭 인용되며, ‘리벤지라는 말이 덧붙으며 마치 불법촬영물이 퍼지는 것이 타당한 원인을 가진 복수인양 보이게 한다. 심각한 범죄인 것이 자명함에도, 여성이 나체로 나온 영상은 성적 판타지와 욕구를 풀어주는 포르노가 되는 것이다. 누군가의 일상, 그것도 성생활이라는 가장 은밀한 일상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포르노라는 이름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섭기 그지없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며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성도 대상화를 당하며 여성이 소비의 주체가 될 수 있지 않느냐는 반문이다.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 숫자가 여성에 비해 모든 분야에서 현저히 적다면? 이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단순히 성별을 반전시켜 남성들도 당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남성들은 여성들과 동등한 깊이로대상이 됨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끔찍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을 옹호하는 한 남성이 있다. 우리는 그 남성에게 너의 어머니//여동생/누나가 당했다고 생각해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이는 명백히 차별적이다. 과연 이것이 제대로 된 '역지사지'인가? 제대로 된 역지사지라면 당신(남성)’이 당했다고, 피해자가 되었다고, 나체 동영상이 소비된다고 생각해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역지사지함에 있어서 그들이 아닌, 그들 주위의 여성들이 개입된다. 남성들은 피해자가 되지 않을 전제가 늘 깔려 있다.

'피해자가 되지 않을 전제'를 가진 남성들은 자연스레 성범죄 사건에 무감각하게 될 수밖에 없다. ‘체감공감은 차이가 있다. 체감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몸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공감은 노력의 영역이다. 남성들은 늘 피해자로서, 대상으로서 현존하였던, 그 가능성을 느껴보지 못했으니(혹은 현저히 적게 느꼈으니) 여성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성 대상 성범죄 사건에 분노하고 목소리를 크게 내는 성별이 항상 여성인 것은 이 문제가 그들의 체감이자,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가해자는 어떻게 가해자가 되었나

N번방 사건의 피해자는 여성이기에 피해자가 되었다면, 가해자는 어떤 과정을 거쳐 가해자가 된 것일까? 이때 주목할 것은 갓갓’, ‘박사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쩌다 범죄의 길로 빠지게 되었는지가 아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이들이 어떻게 피해자의 영상을 대가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는지, 즉 디지털 성범죄가 어떻게 산업화되었는지, 그리고 이 산업화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지이다.

디지털 성범죄의 산업화를 논하기 위해서는 앞서 이야기했던 여성의 대상화와 남성의 소비 담론을 가져와야 한다. 말했듯 우리 사회에서 대상화 당하는 계층은 여성, 이를 소비하는 계층은 남성이다. 여성 외모의 순위를 매기면서, 여성의 신체가 강조된 사진과 그림, 영상물을 소비하면서, 포르노와 포르노 배우를 소비하고 평가하면서,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들이 미디어와 매체를 통해 재생산되고 이를 감상하며 여성들의 대상화와 남성의 소비는 더욱 공고화된다. 즉 남성집단의 소비문화는 사회 전반에 만연해있으며 자연스럽게 일상에 녹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 집단의 문화와 소비는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것과 이를 통해 그들이 남성성을 획득하는 과정 자체를 무감각하게 만들고, 그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게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스럽고도 무감각한 남성집단의 소비문화가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바로 디지털 성범죄의 산업화이다.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처음 가시화된 것은 소라넷부터이다. 1996년 해외에 서버를 두어 2016년까지 생존했던 소라넷은 파일노리, 웰컴 투 비디오, 텔레그램 등으로 영상을 올릴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플랫폼만 바꾸어 생존해왔다. 이러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은 운영진 몇몇만 솜방망이 처벌을 내리고 끝나곤 했으나, 운영진 몇몇의 처벌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디지털 성범죄는 조직적으로 산업화되어 있으며, 그 자체가 수많은 사람과 업체가 유착된 거대한 수익창출구조 모델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성범죄는 하나의 거대한 산업이다.

피해자의 불법촬영물은 어떻게 해서 디지털 성범죄 산업의 수익 창출을 불러왔을까? 지난 2017SBS <그것이 알고 싶다>는 국내 웹하드 업체들이 디지털 성범죄의 가해자로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산업을 형성해온 것을 드러냈다. 영상을 올릴 수 있는 파일노리, 위디스크 등의 웹하드 플랫폼은 불법 촬영 영상을 올리는 전문 업로더에게 수익을 주며 사이트에 불법 촬영물이 유통되게 하고,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를 통해 홍보하며 고객들을 유치한다. 유통된 불법 촬영물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플랫폼의 조회수가 올라가면 플랫폼은 광고를 걸어 수익을 내거나 회원제 유료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고객들에게서 수익을 창출한다. 여기에 더해 웹하드 업체는 콘텐츠를 필터링하는 필터링 회사를 함께 운영하거나 유착관계 형성을 통해서 역시 부당한 수익을 창출한다.

가장 경악스러운 것은 이러한 디지털 성범죄 산업구조 속에 피해자의 영상을 삭제하는 장의업체도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불법촬영물이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것에 고통스러워하는 피해자들은 돈을 주면서까지 장의 업체에 영상 삭제를 요청한다. 이때 장의 업체는 피해자를 위해 영상을 삭제하려는 선량한 의도를 가진 경우도 있겠지만, 웹하드 카르텔 사건으로 인해 영상을 삭제하는 장의 업체 역시 웹하드 업체와 유착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각주:2] 이는 피해자가 고통 속에 영상을 지우려고 노력할 수밖에 없다는 점까지도 이용하여 수익을 창출하는, 명백히 피해자를 기만하는 산업구조이다.

, 디지털 성범죄는 누군가가 영상을 올리고, 영상을 소비하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사이트는 광고수익을 받고, 소비자들이 감상 후 댓글로 영상 추천과 공유 등 2차 가해를 하고, 피해자는 영상을 지워달라고 사이트에 요청하고, 이를 지워주는 업체는 피해자로부터 돈을 받고, 그러면서도 영상 제공자와 결탁해 영상이 올라가는 하나의 거대한 산업구조의 형태를 띠고 있다. 피해자가 고통받을 동안, 더 나아가 피해자의 고통을 이용해 이 산업구조 속 유착된 수많은 업체들은 수익 창출에 힘쓴다. 이러한 기이하고 기형적인 디지털 성범죄 산업구조를 살펴본다면, 단순히 N번방 사건의 가해자 몇몇에 집중하고 그들을 처벌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이러한 기형적인 디지털 성범죄 산업구조가 버젓이 존재할 수 있으며 플랫폼을 바꿔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소라넷으로부터 웹하드, 다크웹, 웰컴투비디오, 그리고 N번방 사건까지. 이들은 명백히 성범죄·성착취를 자행하고 있었으며 수십만 명의 업체와 소비자가 연관되어 있었음에도 음지에서 몇 개월, 몇 년, 심지어 몇십 년 동안 숨겨질 수 있었다. 왜일까? 이러한 거대 산업의 존재는 단순히 이들 범죄가 치밀해서, 음지에 있어서라는 이유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한국 사회가 이 같은 기형적인 산업구조를 무시, 더 나아가 조장해왔기 때문이다. 바로 여성혐오를 통해서이다.

여성혐오의 혐오는 단순한 ‘hate’의 개념이 아닌 대단히 포괄적인 의미이다. 여성을 대상화하고 소비하는 것뿐 아니라 일상 속에서 여성을 자연스레 배제하는 것, 여성의 외모를 숭배하거나 여성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 역시 여성혐오이다. 남성집단은 여자 연예인 혹은 포르노 배우의 외모와 몸매 품평하고, 품번을 추천하고, 야한 움짤(ex.은꼴짤)을 만들어 이를 공유하며, 디지털 성범죄가 일어났을 때 피해자의 영상을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는 등 2차 가해를 하기도 한다. ‘한남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전까지 김치녀라는 용어의 문제점을 누구도 인식하지 못했으며,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데이트폭력과 강간, 안전이별을 걱정한다. 남성에 비해 여성들이 세심하고 감정적이며, 수동적이고 의존적이고 질투가 많다는 특징이 여성성혹은 여성적이다라는 단어로 표현, 공유된다. 유명 걸그룹은 여자가 쉽게 맘을 주면 안돼라는 가사의 노래를 부른다. 이러한 무수히 많은 예시가 모두 여성혐오에 해당된다. 즉 여성혐오는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일상적인 여성혐오는 매우 자연스럽고 은밀하여 이 같은 예시들이 여성혐오라는 것에도 무감각하게 만든다.

일상적인 여성의 배제와 편견, 차별과 여성혐오는 남성집단뿐 아니라 여성들 사이에서도 공유되고, 이러한 여성혐오 문화는 성차별적 사회구조에 일조한다. 이성적, 주체적, 능동적 등 남성적인 특질에 우월한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권력의 차등이 생기며(이른바 젠더권력’), 여성혐오적 표현들과 이미지들로 인해 여성들의 발언권은 축소된다. 여성들을 대상화하고 소비하면서도 여성들에게 순수할 것을 요구함으로써, 그리고 여성들의 발언권을 약화시키고 침묵시킴으로써 여성들은 성범죄의 피해자가 되기 쉬우면서도 자신이 피해자인 것을 드러내지 못하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자연스레 남성집단과 한국 사회는 성범죄에 무감각해지면서 성범죄를 방조하게 된다.

 

# N번방 사건의 본질은 성차별적 사회구조

종합해보자면, N번방 사건의 본질은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원인이 맞다. 성차별적 사회구조는 명시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은밀하다. 우리의 삶과 사고방식에 깊게 침투되어 있어 진지하게 고찰하지 않으면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부정하게 되기 쉽다. 실제로 N번방 사건 이후에도 이러한 경향이 짙게 보였으며 이로 인해 사건의 본질은 다양한 방식으로 흐려진다.

N번방 사건의 실체가 드러나고 일부 언론들은 조주빈을 비롯한 가해자 개인의 삶에 포커스를 맞추곤 했다. 그러나 이처럼 몇몇 가해자에 집중하고 이들을 악마화, 심지어 동정하기까지 하는 것은 여성의 대상화와 성범죄가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써 존재한다는 점을 탈각시킨다. N번방 사건과 같은 무수히 많은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단순히 몇몇 개인의 도덕적 타락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아동청소년에의 집중 또한 사건의 본질을 흐린다. 피해자들은 아동·청소년이기 때문에 대상화가 된 것이 아닌, ‘여성이기에 대상화된 것이다. 피해자들 중 아동·청소년이 많았던 것은 그들의 물리적, 정신적 힘이 성인보다 약하기 때문에 범죄의 대상이 되기 쉬워서였을 뿐이다. 이는 사건의 심각성을 더해주는 부가적인 요소일 뿐, 여전히 사건의 핵심은 여성의 대상화이다. 이를 무시한 채 아동청소년을 부각하는 것은 마찬가지로 성차별적 사회구조와 디지털 성범죄 산업의 맥락을 탈각시킨다.

같은 맥락에서 사건의 사전예방보다 사후처리에 집중하는 것 역시 본질을 흐린다. N번방 사건은 지속적으로 터지는 (디지털) 성범죄의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분명하기에, 이제 사후처리보다 사전예방에 집중해야 할 때이다. 구조적 문제를 직시하지 못한 채 몇몇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구제를 외치는 것은 당장의 미봉책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구조 분석을 통해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피해자는 또다시 발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젠더갈등이라는 용어와 페미니즘 백래시 역시 N번방 사건의 본질을 흐린다. 몇몇 사람들은 N번방 사건 속 페미니즘의 맥락을 탈각시키며, ‘모든 남성이 그런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반복한다. 또한 N번방 사건에 관한 논란을 젠더갈등이라는 용어를 통해 성별 대립의 장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N번방 사건을 통해 여성계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모든 남성이 잠재적 범죄자라는 것이 아니다. 젠더권력과 여성혐오,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사회 깊숙이 내재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노력을 가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을 모두 탈각한 채 모든 남성의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무책임한 것이다. ‘일상적으로 대상화와 범죄에 당할 위협에 시달리는 것자신이 가해자로 몰리지 않길 바라는 것은 염연히 양자간 경중이 다르기 때문이다. 남성들은 페미니즘 백래시로 사건의 본질을 보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채, 그저 스스로에게 올 손해를 모면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는 일을 더이상 그만두어야 할 것이다.

본질을 흐리려는 시도를 그치고 N번방 사건의 본질이 성차별적 사회구조에 있음을 인정하면, 지금까지 플랫폼만 바꾼 채 끊임없이 존재해 온 디지털 성범죄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 또한 더 나아가 디지털 성범죄뿐 아니라 미투운동이 왜 거국적으로 일어나는지, 왜 매년 단톡방 성폭력 사건과 교수의 권력형 성폭력 사건이 터지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이 모든 성범죄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성차별적 사회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성범죄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는 것은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으며, 아직도 개선되거나 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때문에 성범죄 사건에서 페미니즘과 여성혐오, 성차별적 사회구조의 맥락은 절대 탈각될 수 없다.

 

4. 성차별적 사회구조와 서울대

다시 서울대 내에 있었던 분쟁 사건으로 돌아오면, N번방 사건의 본질은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맞기 때문에 연운위의 성명문은 이를 잘 지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성명문으로 인해 서울대 내부의 갈등이 발생한 것은, 곧 구성원들 사이에 잠재되어 있던 젠더 갈등과 페미니즘 백래시가 겉으로 확연히 드러남을 보여줌과 동시에 사건의 본질을 흐리고 오독하려는 움직임이 서울대 내부에도 존재함을 보여준다.

N번방 사건의 본질을 오독하는 이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N번방 사건의 본질이 성차별적 사회구조에 있으며 사회적으로 이것이 만연하고 정당화되고 있다는 것은 더이상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N번방 사건뿐 아니라 그동안 있어 왔던 소라넷, 다크웹하드, 웰컴 투 비디오와 같은 디지털 성범죄 사건, 미투 운동, 사회의 수많은 성폭력 사건들이 가리키는 종착점은 곧 성차별적 구조가 사회적으로 만연하다는 명제이다.

만연한 성차별적 사회구조는 대학 역시 피해가지 않는다. 연운위의 성명문에서도 지적했듯, 교수 학생간 권력형 성범죄는 서울대에 수없이 많이 있어 왔다. 사회대 H교수, 인문대 A교수, 음대 B교수 등 매년 터지는 권력형 성폭력 사건들과 알파벳만 바뀌는 교수들은 성차별적 사회구조와 N번방 사건이 어느 외딴 섬 이야기라거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괴리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어쩌면 필자가 글을 쓰는 지금, 당신이 글을 읽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학 내부에서 성범죄가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터지는 학내 권력형 성폭력 사건에 대해, 이제까지 해왔듯이 단순히 피해자 구제와 가해자 처벌에 집중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서울대 역시 변화가 필요하다. TF를 구성하고 피해자 보호와 교수 파면을 외치는 목소리도 중요하지만, 사건의 예방과 재발 방지에 힘쓰지 않는다면 알파벳만 바뀌는 교수들은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대학은 사건의 구조와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번 N번방 사건에서의 연운위 성명문과 같이, 학내 권력형 성폭력 사건을 다룸에도 있어서 대학이 반드시 성차별적 사회구조를 원인으로 짚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학이 권력형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려 할 때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원인이라는 것을 명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그동안 고민했던, 나아가 꺼려왔던 지점일지도 모른다. 젠더갈등을 일으킬 우려가 있고 교수 학생 간 권력 격차에 비해 학생들이 모두 체감할 수 없어 의견이 합의되지 않은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내의 끊임없는 권력형 성폭력 사건 역시 N번방 사건처럼 피해자는 항상 여성으로, 가해자는 항상 남성으로 대변된다. 교수 학생 간 권력형 성폭력 사건은 교수와 학생의 위계관계, 권력 격차도 주요한 요인이지만, 젠더권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주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를 인정하고 짚을 때이다. 진정으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 더 나은 대학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앞으로 학내에서 터질 수많은 권력형 성폭력 사건들에 대해 서울대는 성차별적 사회구조가 원인임을 명시적으로 짚어야 할 것이다.

  1. 이현지, <‘n번방 사건학내 여론 제각기 터져 나와>, 서울대 대학신문, 2019.04.09 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44   [본문으로]
  2. 황춘화, <양진호 1000억대 돈줄 뒤엔병 주고 약 파는 음란물 카르텔’>, 한겨레, 2018.11.01.,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68412.html [본문으로]

N번방 이후의 페미니즘 교육

 

 

한 해를 떠들썩하게 만든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N번방 사건에 대해 누군가는 박사, 갓갓과 같은 악마들의 문제라고, 누군가는 처벌만 제대로 하면 해결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소라넷을 폐쇄해도 텔레그램처럼 방법만 바뀐 같은 사건이 반복되는 것을 보며 우리는 그 바탕에 더 근본적인 문제가 숨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을 상품으로 생각하고 여성들의 일상을 포르노로 소비할 수 있는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을 낳은 병리적 문화는 개인 이전에 사회 전반, 학교에도 실재합니다.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차별적·병리적 문화를 해소하고 평등한 문화를 확산시킬 교육이 필요합니다. 바람직한 미래의 페미니즘 교육을 함께 상상해보고자 <선생님, 페미니즘이 뭐예요?><선생님, 민주시민교육이 뭐예요?>의 저자이자 <더불어 사는 민주시민> 중학교 교과서의 공저자이신 염경미 선생님과 초등성평등연구회의 오수연 선생님을 초대했습니다.

 

 

1. 텔레그램 성착취와 학교

 

: 염경미 선생님, 오수연 선생님 안녕하세요. 민주시민교육, 초등 성평등이라는 서로 다른 자리에서 페미니즘 교육을 위해 애쓰고 계신 것으로 아는데, 오늘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 이후의 페미니즘 교육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많이 나눠요.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에 대해 여러 청소년이 학교와 교실에 이미 그 뿌리가 있는 문제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직접 학교 현장 학생들의 성차별적 행동들을 볼 수 있나요?

 

오수연 쌤 : 초등학생들도 사회와 학교에 이미 존재하는 성차별적 분위기에 물드는 모습을 자주 보여 줘요.

 

염경미 쌤 : 기존의 사회문화가 가부장제 질서를 재생시키는 대중매체로 가득하니까 학생들이 영향을 많이 받아요. 영화, 드라마, 예능프로그램, 대중가요, 광고를 통해 남자의 지배질서가 재탄생하기에 여학생은 외모 중시, 여성스러움, 사랑스러움, 나서지 않는 조신함을 미덕으로 삼고 자신을 훈련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에 제재를 받아요. 학교 내에서도 여자가 어디 나서느냐? 센 여자, 똑똑한 여자 좋아하는 남자 없다, 여자는 미모, 남자는 권력()’ 이런 식의 말이 자연스럽게 들려요.

 

 

: 선생님들은 그러면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과 학교 현장에서 볼 수 있는 학생들의 성차별적 인식과 행동이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오수연 쌤 : .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과 관련하여 여성 청소년에게 성은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이지만 남성 청소년은 성을 과시해야 한다는 성차별적 인식이 있어요. 여성 아동, 청소년은 건전해야 한다는 기존의 성에 대한 남녀 차별적인 인식 때문에 텔레그램 가해자들의 협박이 여성 청소년, 아동에게 유효할 수 있었어요. 남성 아동·청소년의 일탈에는 협박이 가해지는 일이 적고, 신상이 드러나더라도 오히려 당당한 모습인 경우가 많은 것과 대비되죠.

 

염경미 쌤 : 2020<디지털 원주민 세대로서 중학생의 생활과 문화>라는 주제로 연구하기 위해 만난 여학생 5, 남학생 5명과의 면담 과정에서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이 여학생과 남학생에게 다르게 다가왔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먼저 여학생의 경우, 여성 특히 미성년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여 음란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점에 대하여 두려움과 분노를 동시에 드러냈어요. 지금 10대의 학생들은 디지털 원주민으로서 SNS를 통해 자연스럽게 채팅을 하고, 이를 계기로 오프라인에서 대면 관계로 이어지기도 하므로 피해자가 바로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디지털 범죄를 뿌리 뽑게 되기를 희망해요.

 

남학생의 경우는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을 바라보는 지점이 성차별적 시선을 드러냈어요.

예를 들어 남자의 성욕은 너무나 당연한 것인데 이를 너무 법으로 막는다. 예를 들면 성매매 금지법으로 막다 보니 디지털 성범죄가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 “여성가족부 등도 문제다. 남성들을 차별하기 위해 존재하는 부서다. 폭파 시키고 싶다.”, “우리도 당연히 야동을 본다. 일상이다. 죄의식 가지지 않는다. 누구나 보는 거다.”, “유튜브를 많이 보는데 주로 여성 비하적 발언, 성적 발언을 세게 하는 남성 유튜버가 인기다.”, “실제로 여친 사귀고 싶다. 그런데 그게 잘 안되니까 사이버상에서 논다.”, “미투라고 하는 여자들 모두 문제다. 연애하다 헤어지면 미투해서 남자 인생 망치게 한다.”와 같은 말들을 했어요.

 

학교의 문화 자체가 남자에게는 관대해요. 심지어 성희롱, 여성 혐오적 발언을 하여도 그들(남자들) 사이에서는 영웅이 돼요. 페미니스트 여학생은 공격당할까 봐 자신이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하지 못해요. 이런 것은 모두 우리 사회의 모습이 그대로 학교에서 재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어요. 성폭력에 대해서도 남학생들은 매우 관대해요. 심지어 모든 남성을 잠재적 성폭력자로 만든다.”라고 분노를 표출하죠. 문제를 성폭력 가해자에게 찾지 않고 피해자에게 돌림으로써 정당화시키려 할 정도예요. 인터넷에서 일파만파로 억지 논리가 중학생 남학생에게는 상당히 잘 먹히고 있어요.

 

 

2. 성차별을 부추기는 기존의 교육

 

: 학생들이 가진 이런 성차별 문화의 형성에 대중매체나 사회가 아닌 기존의 교육도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기존 교육의 어떤 부분이 문제라고 생각하세요?

 

염경미 쌤 : 학교에 애초에 성 평등 교육이 없는 게 문제에요. 성폭력 예방교육과 양성평등교육이 있을 뿐이죠. 이마저도 매우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어요.

 

오수연 쌤 : 맞아요. 넓은 의미의 성교육이 연간 15시간 이상인데 이 시간을 성교육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안전교육 등과 합쳐져서 흐지부지되기 일상이에요. 문서에 기록은 되어 있고 기록된 체계는 있지만 창의 체험 시간에 할 것인지 보건교사가 할 것인지 체육 교사가 할 것인지 성교육의 주체도 명확하지 않고, 주지주의적 교육, 입시 위주 교육에 밀려서 학기당 1회 정도 외부 강사가 와서 하는 게 전부이고 중고등학교일 경우에는 자습시간으로 활용되기도 해요.

 

교육부 차원에서 이미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해서 성교육에도 문제가 많아요. 성교육에서 여성의 성을 임신 출산에 가두고 전체적으로 터부시하는데 반대로 남성에게는 성적 욕구가 정당한 권리로 느껴져요. 성폭력 예방 교육은 가해자 예방 중심이기보다 피해자 예방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때문에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드러내기 어렵고, 가해가 일어난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는 경우가 생겨요. 이 내용을 중심으로 2차 가해가 일어나기도 하고요. 성교육 표준안도 논란이 많은데 교사용 지도안에 성폭력 예방 방법으로 여아 부분에만 짧은 치마를 입지 않기, 밤에는 돌아다니지 않는다는 것이 들어가고 지하철에서 누가 나를 만지는 것 같으면 가방끈을 길게 내린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었어요. 논란이 되었던 성교육 관련 교사용 자료가 게시판에서 모두 삭제되고, 2017년 수정된 자료가 나왔지만, 여전히 문제로 지적되는 부분이 많아 다시 개편작업에 들어갔어요. 하지만 그마저도 세 차례 발주한 정책연구과제가 모두 유찰되었다는 이유로 20192월 이후 작업이 중단된 상태입니다. 전반적으로 욕망과 욕구를 억누르는 분위기 자체가 문제가 된다고 생각해요.

 

교육 현장에 차별적인 문화가 있는 것도 문제예요. 성별을 학생들을 관리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두 줄 설 때 남자 한 줄 여자 한 줄 세운다거나 운동회가 끝나고 공책을 나눠줄 때도 보통 파란색인 남아용, 분홍색인 여아용으로 준비되는 경우가 많아요. 아이들도 성별에 따라 나누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성 고정관념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는 색깔에 상관없이 공책을 무작위로 나눠줘도 아이들끼리 자연스럽게 성별에 맞춰 바꾸더라고요.

 

 

: 기존 교육의 이러한 문제점만 해결된다면 성 평등 문화가 확산과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오수연 쌤 : 공교육 상의 변화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해요. 초등학생들의 경우는 교육을 받고 난 이후에는 오히려 성인들보다 엄격하게 이건 이렇게 해야 한다는 비판적인 인식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초등학생들이 학교를 올 때는 이미 백지상태가 아니에요. 아이들이 학교 안에서만 사는 존재가 아니어서 고학년이면 뉴스도 보고 이미 미디어를 통해 오염되어 오기 때문에 교실 밖의 교육이 추가로 필요해요. 아이들은 흡수가 빨라서 학교 밖과 연계되지 않으면 교실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교육은 소용이 없어요.

 

염경미 쌤 : 교실 밖의 변화 없이는 학교 내 교육, 학교 내 성 평등 문화의 확산이 어려워요. ‘페미니즘이라는 말만 들어도 저항을 하는 남학생들이 있으며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많고요. 교사가 용기를 내어 성차별문화와 인식이 결국은 성폭력을 가져온다는 수업을 진행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어요. 이에 대하여 거부감을 가진 학생이 민원을 넣거나 그 부모가 항의성 민원을 제기하여 위축시키거든요.

 

오수연 쌤 : 맞아요. 마중물 선생님 사례처럼 실제로 민원 제기로 교육과정이 위축되고 소송까지 가게 되는 사례들이 있어요. 선생님들이 수업을 진행할 때 민원 제기에 대한 두려움을 계속 가지게 돼요. 민원에 아무리 개인적으로 대항한다고 해도 민원이 많아지면 학교 차원에서의 압박도 강하고요.

 

 

: 성교육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교사 개인이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벽이 많네요. 텔레그램 성 착취와 같은 사건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고 성 평등 문화가 자리 잡기 위해 교육은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요?

 

염경미 쌤 : 공교육은 궁극적으로 민주시민을 육성하기 위해서 존재하는데 진정한 의미의 민주주의 사회는 그야말로 성 평등한 사회가 될 때, 가능해요. 왜냐면 어느 한 성(남성)이 다른 한 성을 억압하거나 무시하고 그들을 대상으로 성 노예화하는 문화와 의식을 가진다면 그것은 반인권적 상황으로 민주사회다 할 수 없죠.

 

교사 역량 강화를 위한 페미니즘 연수를 매년 10시간 이상 이수하게 하여 성적 불평등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것도 중요해요. 아직도 성 평등이라는 말 자체를 가지고 동성애자 옹호라고 하면서 양성평등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교사들 대부분도 성 평등 교육을 받은 적이 없고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성폭력이 존재한다는 걸 전제하여 예방 교육을 하고 있어요. 일단 인식이 되어야 문제를 바르게 보고 고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되지요.

 

오수연 쌤 : 페미니즘 교육이 정의만 가르치는 주지주의적인 교육에서 벗어나 교사와 학생의 평등한 관계를 기반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페다고지, 교육 실천의 측면에서 필요하기 때문에 교사 역량 강화가 중요해요. 전체 교사의 성평등 인식 수준도 걱정스러운 상황에서 교사 지도서도 문제가 있고 연수 자료도 문제가 많아요. 성 평등 연수 이수 시간이 정해져 있어도 시간 때우기로 흐지부지되기가 십상이고요. 연수과정 이외에도 교대, 사범대와 같은 교사 양성 기관에서 커리큘럼을 점검하는 것이 필요해요. 모든 교과목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교사용 지도서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고요. 학교생활 전반의 페미니즘 교육 생활화를 위해 노력해야 해요.

 

염경미 쌤 : 그런 다음에 각 교과서나 아이들이 좋아하는 도서, 대중문화에서 성 차별적인 요소를 찾아내어 수정하는 작업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져야 해요.

 

오수연 쌤 : 교과서도 삽화, 국어 지문 활용에서 다양한 성별, 인종이 등장하는지 어떻게 표현되는지 검토하는 것이 필요해요.

 

염경미 쌤 : 또 학교나 가정, 사회에서 무심코 하는 성 차별적인 대화나 언어에 대하여 당신은 지금 성 차별적인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지적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해요. 정치하는 사람들, 교사들은 모두 공적인 일을 하는 사람으로 그들의 사고방식이나 언어의 사용은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줘요. 그들이 공적인 업무를 맡기 전, 또는 시작하기 전에 철저하게 성차별 감수성에 대하여 사전 조사가 필요해요.

 

오수연 쌤 : 체계가 필요해요. 누가 어떤 내용을, 어떤 관점에서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체계가 필요하고 포괄적 성교육을 도입해야 해요. 성폭력 사안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도 가해 학생을 그냥 전학 보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교육할 것인지 가해자가 교원일 때 조치는 어떻게 할지 피해 학생은 제대로 보호되는지 신고할 수 있는 분위기는 조성되어 있는지 체계를 정해두어야 해요.

 

디지털 성폭력도 학교에서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있는 부분인데 세대 차이 때문에 보호자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디지털 성폭력에 대한 인지가 없어서 교사도 따라가기 힘들고요. 학교폭력실태조사처럼 주기적으로 실태조사를 한다든지 법과 함께 교육할 방법이 필요해요.

 

염경미 쌤 : 페미니즘(성차별에 저항하고 잘못된 제도나 문화를 바로 잡으려는 운동) 교육으로 민원에 시달리게 되면 교사의 교육활동이 위축돼요. 민주주의가 좋은 제도라는 것은 누구나 인지하듯이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와 편견을 깨는 대국민 광고(공익광고 포함)가 지속적으로 사방 곳곳에서 이루어졌으면 해요. 학교 안에서만 한다면 잘 안 되어요. 왜냐면 아이들은 이미 인터넷을 이용하여 학교 밖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거든요.

 

오수연 쌤 : 페미니즘 교육이 정책적으로 내려오기 힘들지만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지금의 교육과정 내에서는 다룰 수 있는 내용에 한계가 있어서 교사가 시행한 교육의 법적 근거가 어디 있냐고 민원이 많이 들어오거든요. 예를 들어 성교육 표준안 자체에 성 소수자가 아예 빠져있어서 수업 중에 동성애를 다룰 법적·정책적 근거가 없어요. 민원을 방지하기 위한 법적·정책적 근거를 제시해주고 일반 시민을 상대로 공익광고와 같이 사회적 차원의 교육을 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요.

 

 

3. 페미니즘 교육이란?

 

: 페미니즘 교육 혹은 민주시민교육 의무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람의 수만큼의 다양한 페미니즘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의무화를 한다면 페미니즘 교육을 위한 교사 지도서나 페미니즘 교과서를 만드는 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나요?

 

오수연 쌤 : 다양하더라도 경향성은 있기에 교사용 지도서가 가능해요. 교사가 일반적으로 학생에게 전달하기보다는 협력적인 관계를 조성하고. 대화를 많이 하고. 참여를 중요시하는 이러한 태도가 중요하거든요. 구체적인 교육내용이 아니라 교육내용에 접근할 때의 태도를 이야기하는 지도서요.

교사도 학생들의 위치성은 깨닫기 전에는 인식할 수 없어요. 아동이기 때문만 아니라 성별, 경제, 지역 등의 교차성에 있다는 것을 알고 다양한 관점을 교사가 가지게 하는 데에는, 각자의 위치가 변화한다는 인식을 갖게 하는 경향성의 지도서가 필요해요. , 각 선생님의 교육방식, 페미니즘을 공유하고 나누는 장에서 실천이 이론화되고 다시 연수내용으로 전달되며 교사 지도도 끊임없이 변화해야 해요.

 

염경미 쌤 : 교사용 지도서도 당연히 필요하지만 요즘 여성혐오 문제, 디지털 성범죄가 심각하니 페미니즘 교육의 특화가 필요해요. 민주시민교육을 의무화 또는 전문화하고 그 안에 페미니즘 교육이 자리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요. 페미니즘 교육을 특화해서 한다면 교과서, 지도서 만드는 일은 가능합니다. 민주주의를 외치던 사람조차도 권력을 잡으면 여성을 성적대상으로 보고 성폭력을 행사하는 일을 수 차례 보면 더 절실히 요구해야 합니다.

 

 

: 이때 선생님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페미니즘 교육이란 무엇인가요?

 

염경미 쌤 : 페미니즘이란 간접적인 성폭력이라고 할 수 있는 성차별적인 환경, 제도, 문화, 구조, 의식을 고쳐서 성 평등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사회적 운동으로 페미니즘 교육이 곧 민주시민교육의 기본이에요. 민주주의 사회란 모름지기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을 그 이념으로 하죠. 성차별은 이미 여성의 존엄성과 자유, 평등을 훼손하는 행위에요. 그래서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가 되면 모든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되어 있을 것이라는 말에 공감해요. 더 나은 민주주의, 실질적인 평등사회를 이루려면 페미니즘 교육은 기본으로 이루어져야 해요. 따라서 페미니즘 교육은 모든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여 진정한 의미의 질 높은 민주사회를 지향합니다.

 

오수연 쌤 : 페미니즘은 다양함을 추구해야 해요. 페미니즘도 다양하고 페미니스트 페다고지는 다양한 페미니즘 철학과 사상에 기반한, 다양한 교육 실천이 모인 것이니 더 다양한 모습을 가졌죠. 고정되지 않고 권위에 빠지지 않고 계속 변화하고 비판받아 진화하는 다양성과 아래를 향하는 시선이 페미니즘 교육이에요.

 

 

4. 교실 내 페미니즘 교육

 

: 학생들에게 학교 내에서의 교육으로 페미니즘에 대한 흥미를 끌어내는 것이 가능할까요? 오히려 학생들이 페미니즘을 더 싫어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는 않을까요?

 

오수연 쌤 : 초등학생들이 페미니즘을 학교에서 접하면서 더 싫어하게 되거나 강한 거부반응을 보이는 건 본 적이 없어요. 거부반응 자체가 실제로는 다양한 소수자성을 포괄하지만, 여성 인권만을 위한다는 페미니즘에 대한 오해에서 와요

 

아이들이 이미 세상을 경험해오고 있고 아동이기에 적어도 나이의 측면에서 사회적 약자로서의 경험이 있어요. 억압의 경험에 문제를 제기하는 게 자기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니 흥미를 끌어내는 것이 자연스러워요. 페미니즘 교육은 보다 유연하게 사고하는 것을 중요시하기에 다양하게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나 연대하는 방식이 오해도 해소할 수 있어요.

 

염경미 쌤 : 성에 따라 페미니즘에 대한 요구가 완전히 달라요. 여학생은 존재 자체가 여성이면서 당한 성차별이 많고 도서도 많이 읽어서인지 페미니스트라고 자신을 밝히며 학교에서 페미니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해요. 그런데 남학생의 반발을 사거나 빈정거림을 당하다 보니 분반하여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고 말해요. 반면에 남학생 중에서 여성혐오를 드러내며 성폭력 피해자에게 오히려 2차 가해를 하거나 꽃뱀 프레임을 씌우는 등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과격 발언을 하기도 하여 문제가 많아요.

 

이러한 남학생을 교육하는 데는 페미니즘으로 무장한 남교사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가부장적 권위를 탈피한 친여성적 인권에 대한 인식과 행동을 하는 그런 남교사가 있어서 남학생 지도를 몇 번 한다면 수월할 듯해요. 그런데 여교사가 페미니즘 교육이라고 시작을 하면 거부감을 드러내며 역차별이라고 난리를 치는 아이도 있으니 어려워요. 남학생들이 이미 가부장적 사고와 행동을 하므로 남교사에게는 말도 못 하고 대들지 못하는데 여교사는 우습게 알고 여성 우월주의자, 편향된 교육 운운하면서 힘들게 해요.

 

 

: 마지막으로 페미니즘 교육이 공교육 내에서 이루어졌을 때 기대하는 효과는 무엇이고, 한계는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오수연 쌤 : 효과는 사회적인 합의점을 새로 만드는 데에 있는 것 같아요. 의무교육 내에서 페미니즘 교육이 이루어지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는 감수성을 공유하기 수월해지고 전반적인 인식 개선에 도움이 될 거에요.

한계는 아무래도 페미니즘 교육은 다른 교과와 다르게 계속 변화하고 진화해야 하니까 고정된 교육이 될 수 없다는 데에 있어요. 학교, 학급 사정에 따라서 교사의 관심 정도에 따라서 페미니즘 교육의 양과 질이 달라질 수 있어요. 페미니즘 교육의 형태는 정말 다양하기에 어려운 부분을 공유할 수 있는 자리가 있으면 한계를 조금은 극복할 수 있을 거예요.

 

염경미 쌤 : 기대효과 7가지와 한계 3가지를 생각해봤어요. 1) 성차별 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재생산 구조를 갖지 못할 것이고 2) 여자라고 우습게 여겨서 비하하거나 폭력적으로 몰고 가는 일이 줄어들 것이며 3) 성폭력이나 디지털 성범죄에 대하여 범죄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줄어들 것이라는 점 4) 더불어 행복한 가정, 직장, 조직 문화를 만들고 5) 포괄적 차별금지법안에 넣고 이를 어길 경우 엄히 다스리며 6) 여성혐오적 발언, 인터넷에서 회자되는 여성혐오적 댓글이 줄어들고 7)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 3차 가해가 줄어들 것이라는 7가지 부분에서 페미니즘 교육이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 것으로 기대해요.

 

하지만 1) 사회적인 문제나 구조의 문제를 바르게 보지 못할 경우, 성 대결적 양상을 띠며 여성혐오, 남성 혐오가 교실에 팽팽하게 되는 점 2) 책이나 토론을 통해 학습하지 않고 오직 인터넷의 댓글이나 SNS로 번지는 글을 통해 페미니즘을 접하게 되어 자신이 아는 지식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여 우기기 문화가 확대되면 토론 불가 상황이 도래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과 3) 지금 우리 사회가 디지털 성범죄를 남성 청소년기에 가지는 호기심 정도로 여기는 관대함 때문에 페미니즘 교육이 공교육 내로 들어오더라도 여전히 가지는 한계가 있어요.

 

 

5. 민주시민과 초등학교의 페미니즘

 

: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두 선생님의 이야기 너무 잘 들었습니다. 이제 선생님 각각의 민주시민교육 교과서의 공저자로서 또 초등성평등연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의견을 들어보고 싶어요.

먼저 염경미 선생님은 페미니즘이 민주주의의 완성이라고 책에서 이야기하셨는데 민주주의, 민주시민교육은 무엇이고 왜 페미니즘과 민주시민교육이 함께 필요한지 알려주세요.

 

염경미 쌤 : 도덕이나 윤리는 개인적인 문제 해결이나 의지를 말한다면 민주시민이란 공동체에 속한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더 생각해요. 우리가 사는 일상생활에서의 민주적인 문제 해결 능력, 민주적인 소통과정, 경청과 토론, 양보와 타협의 과정들, 내 생각에 대한 유연한 태도로 타인의 생각을 수용할 수 있는 개방성 등을 배우지 않고는 습득할 수 없어요. 19876월 항쟁으로 형식적 민주주의를 얻었지만, 국회 등 정치판은 물론이고 우리의 일상을 보면 비민주적인 생활방식이 많습니다. 이를 성찰하고 바로 잡으려는 노력을 학교교육과정에서 배워야 건강하고 민주적인 시민으로 자랄 수 있어요.

 

현재 학교교육과정에는 공식적으로 페미니즘 교육이 없어요. 그러다 보니 마치 민주주의는 좋은 제도이고 민주시민은 민주공화국의 주인으로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페미니스트는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곤 하죠. ‘페미니즘이라는 말만 들어도 저항을 하는 남학생들이 있으며 잘못 이해하는 경우도 많아요. 보편적 인권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리한 인권만 생각한다면 그는 민주시민이 아니에요. 민주시민교육에는 인권, 존중, 평등, 연대, 평화 등의 인류 보편적 가치에 대한 바른 태도, 이해, 실천적인 삶을 배우죠. 민주시민교육을 바르게 한다면 성 평등 문화 확산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어요.

 

 

: 결국 다양성을 이야기하고 인류의 보편적인 권리를 이야기하는 페미니즘과 민주시민교육은 같은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이군요.

이렇게 필요성은 확실한 페미니즘 교육이지만 보통 비판적 사고능력은 중학교 이후에 형성된다고 생각하기에 초등학교 시기의 페미니즘 교육은 학생의 사고를 이끌어 내기 보다는 교사의 일방적인 지식전달로 진행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는데 초등학교 시기에 페미니즘 교육이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오수연 선생님의 의견이 궁금해요.

 

오수연 쌤 : 초등학생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페미니즘 교육이 오히려 나쁜 것에 물들게 한다는 말 자체가 교사와 학생, 어른과 아이를 위계 짓는 관점이고 학생들의 경험 세계를 무시하는 관점이에요. 아이들은 이미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존재여서 ‘N 번 방 사건이나 연예인 자살 소식을 스스로 먼저 이야기하기도 해요. 이미 초등학생들은 기존의 성차별적 인식을 습득한 상태에요. 이미 여자애 같다가 상대를 비하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거나, 남자 연예인이 여장을 하면 우스꽝스러운데 여자 연예인이 남장을 하면 멋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기도 해요. 반면 여자아이라고 마음껏 소리 내어 웃거나 편한 자세로 앉지 못하는 것, 남자아이라고 말수가 적거나 섬세한 일을 잘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되어지는 것에 부당함을 표현하기도 하죠. 페미니즘 교육은 아이들이 이러한 자신의 경험을 해석할 관점을 알게 하는 거예요. 지구의 자전이라는 개념을 몰라도 낮과 밤은 경험적으로 알지만, 자전이라는 개념을 알면 현상을 더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아요. 페미니즘 교육이 학생들이 자신의 경험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주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가능성을 열어주는 계기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페미니즘 교육의 내용이 연령층에 따라 다를 필요도 없어요. 성교육의 경우 다루는 내용 범위나 수준이 조금 다를 거예요. 초등학교에서의 관계 맺기가 나와 상대방의 경계를 인식하는 수준이라면 고등학교에서는 성적인 관계와 같이 더 심화된 교육이 가능하죠. 페미니즘 교육은 큰 차이가 날 필요가 없어요. 페미니즘은 기존의 주어진 것을 새로운 관점에서 해석하고 타인의 입장에서 불편하지 않고 긍정적인 사실일지 계속 질문을 던지는 차원이기에 평생교육의 문제에요. 초등학교 단계의 인격적인 존재로 타인을 대우하자는 명제가 성인 수준에서는 더 다양하고 실질적인 문제로 다가오는 것과 같이 심화 정도나 복합적인 정도에서 차이가 날 뿐이에요.

 

 

6. 페미니즘 교육의 미래

 

: 페미니즘 교육은 나이와 환경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비슷하게 진행될 수 있는 보편적인 교육이군요. 민주시민교육과 초등학교에서의 페미니즘 교육에 관한 이야기까지 잘 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선생님들이 생각하시는 페미니즘 교육의 바람직한 미래에 관해 이야기 나누면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염경미 쌤 : 성차별적 문화를 학습한 학생들에게 유의미한 변화를 끌어내려면 민주시민교육의 방법이 학습자 중심으로 생활 주변에서 그 사례를 가지고 와서 기존의 생각이 어디에서 영향을 받고 만들어졌는지를 성찰하기, 토론, 주장, 경청, 공감, 다시 쓰기 등을 통하여 생각의 변화를 재구성하고 자신의 언어로 발표하는 등의 지난한 노력이 필요해요. 성 평등이나 페미니즘을 직접적으로 목표하는 교육이 추가적으로 필요하고요. 학교 수업시수는 한정되어 있고 필요한 교육은 너무나 많아지고 있어요. 그러나 민주주의 완성은 마지막 계급인 여성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제도와 문화가 이루어질 때, 비로소 더 나은 민주주의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민주시민교육 안에 페미니즘 교육이 자리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요.

 

'우리 교육의 이념은 민주시민육성이에요. 민주공화국에 필요한 시민은 이기적 개인이 아닌 민주시민입니다. 우리 사회가 마주한 성폭력적인 상황은 사실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었으나 이제야 드러난 것이죠. 말하는 자는 듣는 사람을 필요로 해요. 이제야 비로소 성폭력 피해자가, 많은 차별받은 경험을 가진 여성이 말하기 시작했는데, 듣기조차 거부하며 여성 혐오 발언을 쏟아내고 2, 3차 가해를 하고 있어요. 얼마나 우리 사회가 성폭력 피해자에게 폭력적이고 야만적인가가 여기서 드러나죠. 남성 권력자의 편을 드는 일은 쉬워요. 그러나 페미니즘 교육은 사회적 약자와 연대하고 그들의 인간다운 삶,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존중하는 인권교육이며 연대입니다. '살림' 교육이에요. 다 같이 살자는 교육입니다. 더 나은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소수가 가졌던 권력을 다수에게 이양하는 일은 역사적 진보에요. 페미니즘은 사회발달에 따라 그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자기 발전을 거듭할 것이라는 면에서 민주시민교육이기도 해요.

 

오수연 쌤 : 페미니즘은 기본적으로 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이에요. 시작은 성별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페미니즘 교육이 더 많은 소수자성을 바라보게 하고 더 많은 대상과 연결이 되는 것이 바람직한 미래라고 생각해요. 페미니즘을 만난 후 비건, 에코 페미니즘으로 확장되는 경우가 많은데 나를 존중하니 남을 존중하게 되고 동식물도 존중하는 거죠. 계속 변화하고 진화하는 모습, 내가 보지 못했던 다양성을 보게 해주는 교육이 페미니즘 교육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대화를 통해 페미니즘이 성인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살아가는 모든 연령층의 시민에게 중요하다는 것과 페미니즘 교육을 위해서는 흔히 생각하는 부족한 성교육뿐 아니라 학교 밖의 영향, 민원, 교사역량 강화와 같이 다양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하루빨리 페미니즘 교육을 위한 법적 근거도 만들어지고 교육과정에도 변화가 생겨 텔레그램 성 착취 사건을 반복하지 않는 미래를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번 호 기획 [청소년 섹슈얼리티와 성교육]의 고민을 이어, 이번 호에서는 후속보도로 학교 안에서 성평등한 문화를 만드려 노력하는 선생님 두 분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N번방 사건과 현재 교육, 학교 내 문화는 어떤 연관관계를 가지는지, 페미니즘이 교육될 수 있는지, 페미니즘 교육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고민을 나누어보려 합니다. 한편 올해 서울대에서는 N번방 사건의 본질이 무엇이냐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있었습니다. 교육저널은 [대학현안]에서 이 뜨거운 논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N번방 사건의 기저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N번방 사건과 반복되는 대학 내 권력형 성폭력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소년법과 청소년 참정권, 그리고 청소년 혐오

 

고슴도치뇽, BDUCK, 취한다

 

흔히 청소년 참정권과 소년법은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그려진다. 청소년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청소년 참정권 논의와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소년법 논의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두 가지는 모순되는 것일까, 혹은 별개의 문제일까? 청소년은 과연 둘 사이 어디쯤에 위치하는 존재일까? 교육저널 역시 이번 호를 발간하기 위한 세미나 과정에서 같은 의문점에 부딪혔다. 때문에 청소년인권운동연대 활동가 난다님이 쓰신 글 [각주:1] 을 읽고 교육저널의 시선으로 소년법과 청소년 참정권 문제를 정리하는 대담을 나누어보았다.

 

'미성년자'는 처벌을 안 받는다?

 

 

“'요즘 청소년들의 범죄가 심각해지고 있는데 그에 비해 처벌은 받지 않는다'라는 게 사회의 인식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청소년은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을 받지 않을까?”

 

사건에서 피의자가 14세 이상 19세 미만일 경우, '소년법'의 절차가 적용되는지 일반 형사 절차가 적용되는지는 검찰, 법원 등 수사 및 재판 기관이 판단한다. 실제로 20186월 일어나 주목을 받았던 '관악산 집단 폭행 사건'의 가해자들도 일반 형사 절차를 적용받고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 보호 관찰 처분이나 보호 시설 감호의 경우에도 보호 관찰소에 출석해야 하거나 교육 등을 이수해야 한다는 점 또는 거주의 자유나 생활에 통제를 받는단 점에서 강제성을 띠고 있다. () 10세 이상이면 역시 '소년법'상 보호 처분 등 징벌적 성격의 처벌을 받는다.”

 

어떤 언론 기사에서도 '무서운 40', '점점 흉포해지는 40대 범죄'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청소년 중 누군가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마치 청소년 집단 전체의 속성인 것처럼 환원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청소년 범죄를 더 과장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 청소년의 범죄/일탈 행위가 특히 문제시되는 까닭은 "청소년은 순수/순진해야 하는데, 청소년은 어떠어떠해야 하는데" 같은 청소년에 대한 고정관념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처럼 왜곡된 인식은, "애들이라고 봐주고 있다, 처벌도 제대로 안 받는다"라며 청소년 집단을 혐오하는 또 다른 왜곡을 낳는다.”

 

 

고슴도치뇽 : 우리가 이번에 청소년의 정치참여에 관한 글을 썼는데, 대담으로는 소년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봤으면 해. 요새 청소년의 범죄가 많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에 비해 처벌 수위가 너무 낮다는 얘기가 나오고, 소년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올라오고 있잖아. 이 글을 보면 미성년자가 결코 처벌을 안 받는 게 아니라는 내용이 나와 있어. 실제로 청소년들의 폭행 사건에서 가해자들이 일반 형사 절차를 적용받고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례도 등장하고. 그리고 누군가는 소년원이나 보호관찰처분이 주어지는 것이 청소년이기 때문에 약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신체의 자유와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법적 형식적 절차가 다른 것이며, 더 낮은 수위의 처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있어. 또 청소년 범죄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보도들이 일종의 청소년 혐오, 낙인찍기를 반영한다는 내용이 있어. 사실 연령대별 범죄율을 살펴봤을 때 범죄율이 가장 높은 것이 10대가 아님에도 언론에서는 강력범죄를 많이 하는 청소년이라고 보도를 하잖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BDUCK : 난 이 마지막 문단에 너무 공감하는 게, 결국 사회든 언론이든 소년법 논의를 이끌어가면서 청소년들은 이런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면서 처벌도 안 받는다~’ 이런 식으로 말하잖아. 사실 이런 말의 기저에는 청소년 혐오가 깔려 있는데 마지막 문단에서 이를 잘 지적하고 있어서 좋았어. ‘청소년 혐오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한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이때 혐오여성혐오혐오처럼 단순히 hate의 개념이 아니잖아. 청소년을 급식충이라고 비하하는 것뿐 아니라 청소년을 순수하고 순진한, ‘어른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런 청소년의 이미지를 숭배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청소년은 어린애답지 않고 문란하다고 낙인찍는 것 등등 이런 게 다 청소년 혐오거든. 그러니까 언론에서 감히 어떻게’, ‘어린애들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느냐는 식으로 보도하는 이유도 결국 그 기저에 깔린 청소년 혐오를 보여주는 것이지. 그래서 소년법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갈 때 사회 기저에 깔린 청소년 혐오에 대한 관점을 지우지 않으면 결코 생산적인 논의를 할 수 없고, 진정으로 청소년을 위한 논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취한다 : 이 글에서 청소년에 범죄에 대해서 잔인한 십대’, ‘무서운 십대라는 말이 등장할 수 있는 이유를 우리 사회에 청소년은 순진해야 한다.’와 같은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머리를 한 대 맞는 기분이었어. ‘소름끼치는 십대의 잔혹함등의 문구를 사용하고 있는 기사의 제목에서 우리 사회에서 십대를 바라보고 있는 관점을 이해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뭔가 생각의 전환을 하게 되는 계기였어.

 

BDUCK : 생각의 전환이라고 했는데, 진짜 맞아. 진짜 소년법에 대해서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가야 하는, 전문가들이 토론하는 과정에서조차도 기저에 깔린 청소년은 순진하고, 미성숙하다는 사고방식이 투영되어 있거든. 유튜브 같은 데서 소년법 토론 영상을 보거나 소년법을 다룬 글만 봐도 그게 보여. 예를 들어 처벌수위에 관련해서 소년법 폐지 반대를 말하는 쪽은 요즘 애들이 아직 미성숙해서 그렇지 폐지하면 안 된다고 하는 반면, 소년법 폐지를 찬성하는 쪽은 소년범죄 사례들을 말하면서 이것은 성인의 행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잔인한 범죄라고 주장하잖아. 그런데 양쪽의 주장 모두 결국엔 청소년 혐오가 깔려 있는 거지. 청소년은 미성숙하고 순수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논의에도 사회의 청소년 혐오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소년법 논의는 결국 청소년이 소외되는 거지. 누구보다 청소년이 중심이 되어야 할 문제에서 막상 청소년이 배제되어 있는 거야.

 

고슴도치뇽 : 전문가들이 토론하는 영상은 많이 보이는데 정작 청소년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없었던 것 같아. 이런 점이 전문가들이 어떻게 청소년들이 범죄에 연루되지 않게 할 것인가,’ 그러기 위한 효과적인 방안을 고민하는 데에 그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청소년 논의에 한정되는 부분과 범죄라는 넓은 부분의 논의가 있을 텐데, 애초에 범죄가 왜 발생했을까에 대한 고민도 부족한 것 같아. 꼭 청소년에 한정된 얘기는 아닐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면서 범죄적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범죄의 책임을 청소년 개인에게 돌리고 단순히 청소년들이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방식의 논의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리고 대부분의 기존 영상에서 청소년의 흉악한 범죄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혹은 청소년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아직 교화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이분법적 논의만 진행되고 있잖아. 이런 이분법적 논의 기저에 깔린 것이 청소년들은 순수해야 하는데 너무 많이 흉악한 범죄에 노출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교화를 받아야 되는데 그것이 강한 처벌로 가능할 것이냐 체계적인 교육으로 가능할 것이냐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아.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지, 청소년 혐오가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고.

 

BDUCK : 맞아. 성인들을 수감하는 교도소를 포함해서 모든 교도소는 결국 교화의 기능을 갖고 있는데, 유독 청소년만 교화를 엄청나게 강조하잖아. 결국, 사회가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지.

 

참정권을 바라면 소년법 폐지하라고?

 

이는 마치 여성 인권 보장을 요구했더니 '그럴 거면 여자도 군대 가라'라고

하는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참정권 등 인권이 무언가 대가를 치러야만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타당하지 않다. () ”권리에는 의무가 따른다. 그러므로 일단 의무를 다하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인권을 억압하는 논리로 활용되어 왔다. () 청소년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며, 청소년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여러 사회 문제 및 정책에 영향을 받는 당사자로서, 이 사회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낼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청소년 참정권 보장의 핵심이다.“

 

한편 '소년법' 등을 비롯하여 청소년 범죄에 대한 대응 문제는 어떻게 사회 전체의 범죄를 줄이고 범죄의 재발을 방지할 것인가 하는 논의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소년법'에 대한 논의를 할 때에는 소년범을 어떻게 대하고 청소년들이 일으키는 범죄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 대가로 권리를 부여할 수 있다, 아니다 하는 식의 이야기로 접근할 일은 더욱 아니다. 그렇기에 청소년 참정권을 보장하려면 소년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말이 되지 않는다.”

 

BDUCK : 두 번째, ‘참정권을 바라면 소년법 폐지하라고?’ 이 문단에서는 크게 말하면 권리와 의무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어. 이 글의 도입부에서 청소년 인권을 주장하면 소년법도 폐지하라는 주장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잖아. 여기서 이 주장이 왜 말이 안 되는지 본격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참정권은 권리, 인권의 영역이고, 소년법은 범죄에 대한 대응 논리인데, 이 둘을 연관 짓는 것은 여성의 인권보장을 요구했더니 그럼 여자도 군대 가라라는 방식의 논리랑 비슷하다고 얘기하고 있어. 참정권은 어떤 행동을 해야지만 획득하는 권리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천부인권인데, 소년법을 폐지해야지 참정권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마치 인권이 책임과 의무의 대가인 것처럼 얘기하는 게 문제라는 거지. 글쓴이는 이때 참정권과 소년법은 별개의 논의라고 주장하고 있어. 참정권은 결국 천부인권의 영역이고, 소년법은 사회 전체의 범죄를 예방하고,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에 인권문제와 결부될 게 아니라는 거지. 별개의 논의인 참정권과 소년법 두 개를 엮으면서, 그리고 기저에 청소년 혐오가 존재하면서 참정권을 얻었으면 소년법을 폐지하라는 논의로 이어지는 것이 얼마나 문제인지 얘기하는 거지.

 

취한다 : 나도 이번에 촉법소년이라는 개념도 처음 들었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참정권 연령이 낮아지면서 분명히 이런 얘기가 나왔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 맥락에서 중학교 때 경험한 것이 생각나는데, 교복 규정이나 머리 규정으로 선생님이랑 학생들 간의 마찰이 엄청 심했는데 그때 어떤 부장 선생님이 권리에는 의무가 항상 따른다. 너희들이 권리를 말하려면 학생으로서 의무를 먼저 잘 지켜야지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났어. 그 때는 그런가?’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인권으로서 주어지는 권리들에도 의무가 따라와야 한다는 것은 인권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데 그런 생각들이 아직까지도 발목을 잡고 있는 게 많다고 생각했어. 참정권을 얘기했더니 소년법 얘기가 따라오면서 사실 소년법 논의에서 중요한 것들을 오히려 흐리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아.

 

고슴도치뇽 : 나는 어떤 사회를 살아가는 한 개인이면 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모두 있다고 생각해. 참정권은 비단 권리일 뿐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고. 왜냐하면 참정권이 자신의 의견을 사회에 피력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의견을 개진하고, 그것이 반영되고 그런 정치적인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권리잖아. 그거는 권리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그 권한을 타인에게 위임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의 권리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고민하고, 공동체 내에서 차별과 혐오가 존재하지 않는지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공동체 안에 속해 있는 개인들의 의무라는 생각도 들어.

그리고 이런 권리와 의무를 누가 규정하는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몇 달 전에 인국공 정규직화 논란이 있었잖아. 그거 보면서 든 생각인데, 우리는 기나긴 교과 중심의 교육과정 입시를 거쳐서 더 높은 대학에 가고 사람들은 정규직으로 일하기 위해서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말하잖아. 그 노력의 방식과 정도를 결코 청소년들이 규정한 것이 아닌데. 경쟁에서 이기고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으면 이제 더 이상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없는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그걸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 같아서. 이제까지는 우리 공동체 안에서 청소년들이 어떠한 권리를 가져야 하고, 우리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어떤 의무를 다해야 하는지를 논의할 자리가 적었고, 그러한 목소리들이 잘 반영이 안 됐던 것 같아. 단순히 비청소년의 시선에서 청소년의 권리와 의무를 재단해버리고.

 

청소년 참정권 보장되니까 소년법 폐지하라는 주장이 있잖아. 그런데 솔직히 나는 청소년 참정권이 보장된 거라고 생각을 안 해ㅎㅎ 원래 만19세 이상만 투표를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만18세로 내려간 건 맞는데. 그 과정에서 물론 청소년의 주체성을 이야기하면서 논의가 진행된 것도 있지만 성인 중에서 아직 투표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모든 성인이 투표를 하기 위해서 연령을 조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낮춰진 것도 있잖아. 사실 여전히 사회에서 이야기되는 청소년에 대한 혐오가 존재하고. 투표권만 일부 청소년에게 보장이 된 것이지, 청소년이 정당에 가입해서 활동하거나, 선거 운동을 하는 것, 후보에 나가는 것 등 제도정치에서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막혀있을 뿐만 아니라, 제도정치 말고도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청소년이 정치할 권리는 여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것 같아.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통제당하거나 입시 때문에 교과 과정 외에 다른 부분에 관심을 쏟을 기회가 적다거나. 그래서 18세 투표권이 주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소년법 폐지 논의를 끌고 가는 게 너무 한계적이고.

한편으로는 소년법 폐지라는 게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이냐에 따라서 무게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해. 정말로 청소년들이 비청소년들과 차이 없이 제도정치에 개입할 수 있고, 일상의 순간들에서 목소리를 내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변화를 만들 수 있고, 비청소년과 동등한 주체로서 대우받는다면 소년법이 있을 이유가 크게 없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물론 아직 그 사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하기 어렵지만ㅎㅎ 지금은 청소년 혐오도 심하고 청소년들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데 겨우 18세 투표권을 부여받았다는 이유로 갑자기 청소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에 있어서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취한다 : 맞아. 나도 너 말을 들으니까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어. 너가 말해준 부분뿐만 아니라 이번에 참정권 연령을 낮출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OECD 국가 중에 우리나라가 참정권 제한연령이 가장 높고,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는 비율이 가장 높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사실 이 또한 선진국의 성인 연령의 기준을 따라간 것이잖아. 그리고 소년법이라는 것이 처음 등장한 이유를 생각해보아도 청소년들이 우리 사회에서 책임을 스스로 질 수 없도록 억압하고 있는 부분이 엄청 많잖아. 예를 들어, 정말 많은 시간을 학교라는 공간에서 보내고 있고, 머리도 옷도 자기가 선택을 하지 못하는데, 청소년들이 악의적이든 우발적이든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해서 청소년의 책임을 어느 정도로 할 수 있겠는지에 대한 질문이 소년법의 필요성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사실 이런 부분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잖아. 이번 참정권 연령 하향이 청소년의 권한을 어마무시하게 확대한 것이 아닌데, 이런 식으로 논의가 넘어가는 게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BDUCK : ‘참정권 얻을 거면 소년법 폐지하라? 근데 이 말을 가만 살펴보면 웃긴 게, 그렇게 말할 거면 이 말을 뒤집어서 '소년법 폐지하려면 청소년 인권 보장부터 해라'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 여기서는 참정권으로 대표되지만 소년법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 중에, 청소년이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권리를 제한당하고 있는지를 진정으로 생각해 본 사람이 있는지 정말 궁금해. 참정권을 비롯해서 청소년들이 많은 부분에서 권리가 제약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잖아. 그런 것들을 해결하고 청소년 문제를 담론하면서 청소년 혐오가 해체된 사회에서나 소년법 폐지를 진정으로 논의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소년법', 문제는 있지만

 

만약 '소년법'을 개정해야 한다면, 주목받지 않는 현행 '소년법'의 다른 문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소년법'에서는 소년보호사건의 대상자가 되는 '우범소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집단적으로 몰려다니며 주위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성벽이 있는 자, 정당한 이유 없이 가출하는 자 등". 남에게 해를 입히거나 형사적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닌 청소년조차도 '보호 처분'이란 이름으로 사실상의 처벌을 받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을 받지 않으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다양한 오해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권리를 누리고 주장할 자격이 없다는 인식까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특권을 누리는데 거기다 인권 보장까지 요구하는 '특권층 청소년' 같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취한다 : 이제 드디어 마지막 문단이야. 마지막에는 소년법에 대해 논의하는 방식이 참정권을 이야기하다가 소년법으로 온다는 것이 실제로 소년법에서 개정이 필요한 부분들, 중요한 논의들을 보이지 않게 하고, 소년법 논의를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오히려 소년법에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은 실제로 소년법에 보호처분이 효과가 있는지, 재범방지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등 개선이 필요한 부분들에 대한 논의가 있고 또 지나치게 비합리적인 조항들도 있는 게 그런 조항에 대한 폐지는 논쟁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어. 그런 부분으로 예를 들어 우범소년과 관련된 조항이 있는데 이는 남에게 해를 가하지 않아도 집단적으로 몰려다녀서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거나 정당한 이유 없이 가출한 자는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조항이야.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어.

 

고슴도치뇽 : 이 글을 읽으면서 조항이 너무 모호하다는 생각을 했어.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느낌. 정당한 이유 없이 가출한다는 것이 예를 들어 그 집에서 사는 청소년이 가족이라는 친밀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방식의 폭력에 노출되고 그것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가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법적으로 봤을 때 양육자가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가출이 정당한 이유로 취급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우범소년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잖아. 조항이 너무 모호해. 그리고 이런 조항의 뒷면에는 청소년의 삶의 맥락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고.

청소년 범죄뿐만 아니라 모든 범죄를 다룰 때에 있어서 범죄가 일어나는 사회적 맥락을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예로 청소년 사이에서 성폭력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 기저에는 청소년들이 일상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내는데 학교에서는 어떤 성폭력들이 발생하고 있는지, 왜 발생하는지, 청소년들이 유튜브를 많이 본다면 그 유튜브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있는지 등 범죄가 발생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고, 그것과 함께 소년법 문제가 얘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다시 정리하면 소년법에 대한 개정이 물론 필요하고. 학교 안에서 학교폭력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사회에서 성차별이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고려와 같이 가야 한다는 생각이야.

 

취한다 : .. 조금 확대해서 이야기해보자면, 나는 개인적으로 청소년들이 지금 성장하고 있는 교육환경 자체가 이미 폭력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해. 예를 들어, 서열화, 경쟁 등이 학교교육의 주를 이루고 있잖아. 그러니까 청소년들이 문화를 형성하는 환경 자체가 폭력적이고, 서열화 되어 있고, 경쟁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문화를 만들어가는 방식에서 폭력이 등장한다면 이것을 반드시 청소년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을까? 그래서 청소년을 교화하면 그러면 문제가 해소될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교육환경이 바뀌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다음 세대의 청소년들이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문화를 만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청소년 범죄를 이야기할 때 청소년들이 자라고 있는 환경을 본질적으로 검토해봐야 한다고 생각해.

 

고슴도치뇽 : 기사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나누어봤는데 추가적으로 쟁점이 되는 부분이나 이야기해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

 

BDUCK : 권리와 의무의 관계 부분에서, 글쓴이는 별개의 문제라고 하지만 우리가 얘기할 때 결국에는 참정권이라는 인권의 문제와 소년법이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참정권을 보장하는 것은 청소년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쪽이고, 소년법은 그래도 청소년을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보니까 둘은 상충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지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러니까 둘이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아닌지가 궁금해.

 

취한다 : 약간 대응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청소년이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범죄에 있어서도 동일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대응되지는 않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비슷한 방향으로 두 가지가 변화하고 역행하고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해. 청소년이라는 개념이 예를 들어 교육에서만 학생으로서 구분되고, 다른 사회적 조건에서는 비 청소년과의 구분이 없다면 범죄에 대한 처벌에 있어서도 비청소년과 구분될 것이 없고, 정치적 권리에서도 비 청소년과 구분될 것이 없어지지 않을까.

 

BDUCK : 실제로 두 개가 별개의 문제인지, 아니면 엮인 문제인가는 잘 모르겠는데, 두 개를 꿰뚫는 것은 결국 청소년이 미성숙하다는 전제라고 생각해. 참정권 논의에서 청소년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정치할 능력이 안 된다라고 얘기하는 것이나, 소년법 논의에서 청소년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을 때 비청소년과 동일하게 처벌할 수는 없고, 교화에 더 힘을 쏟고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하는 것, 결국 두 가지의 전제는 청소년의 미성숙함이잖아. 이렇게 생각하면 참정권과 소년법 두 논의가 연결된다면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한데, 아직 명확한 해답은 못 내리겠어. 그런데 확실한 건 청소년이 미성숙하다고 단정 짓고 이를 전제로 까는 건 정말 문제라고 생각해.

 

고슴도치뇽 : 나는 크게 두 가지 생각이 들었어. 하나는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이냐가 중요한 것 같아. 청소년의 주체성과 보호를 말할 때 있어서, 청소년이 왜 보호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소년법이 존재하는 이유도, 만약 우리 사회가 청소년 혐오가 심하지 않고, 청소년과 비청소년에게 동등한 권리와 책임이 주어진다면 소년법이 지금과 같은 무게를 같지 않을 것 같아. 그리고 소년법뿐만 아니라 n번방 사건 이후에 의제강간연령 상향하면서도 뭔가 여러 고민이 있었는데, 그 때 의제강간연령을 상향해야 한다고 말하는 페미니스트들과 그것을 조심스럽게 바라봐야 한다는 페미니스트 간의 입장이 둘 다 이해가 되었거든. 왜냐하면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해야 한다고 얘기했던 비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이것이 보호의 테두리라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 결국, 청소년들이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 사회에서 나이로 인한 차별과 강간문화가 심각하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보호를 받아야 하는 환경에 놓이는 것이잖아. 비슷한 맥락으로 청소년 참정권 얘기가 나올 때마다 청소년에게 정치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는데, 나는 그 말도 잘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게 청소년이 미성숙하기 때문에 정치교육이 필요하기보다는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의 정치활동을 억압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서 정치를 경험할 기회가 없었고, 권리를 더 잘 실현하기 위해서 정치교육이 일부 필요하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정치교육을 함에 있어서 일상의 정치화가 동반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래서 나는 그 사회에서 청소년 보호가 논의되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에 이미 너무 강한 청소년 혐오가 존재하고 청소년들이 의견을 당당하게 피력할 수 없어서 라는 생각이 들었어.

 

두 번째는 보호라는 것을 청소년에만 한정짓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냥 우리 모두는 주체적인 존재이지만 사회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잖아. 그래서 생각난 것 중에 하나가 예전에 어느 수업에서 특성화고 실습생들의 문제를 다루면서 어떤 학생이 자신의 동생이 특성화고에 가는 것이 너무 무서울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 이유로는 실습에서 노동환경이 안전하지 않고, 노동권이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었는데 그 말에 공감이 되면서도 그 문제가 비단 특성화고 실습생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 사회에서 누구도, 어떤 노동자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심한 노동 강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론은 청소년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는 그 사회를 살아가는 그 누구도 잘 보호하지 못할 것 같다는 거야. 우리 모두가 주체성을 가진 존재이면서도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인 만큼 주체성과 보호가 결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럼 후기를 나눠볼까?

 

고슴도치뇽 : 사실 나 지금 계속 말을 하면서도 긴가민가하면서 말을 했는데 이렇게라도 말을 하면서 생각이 정리가 된 것 같아.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의 주체성과 소년법 문제를 다룰 때에 있어서 좀 더 넓은 논의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BDUCK : 나도 비슷한 의견인데, 내가 이번 대담을 준비하고 자료조사 하면서 청소년의 주체성관점이 들어간 소년법 논의 자체가 별로 없어서 힘들었거든. 대담하면서도 계속 말했지만, 이렇게 자료가 부재한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청소년 문제와 청소년의 지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해. 아직 비청소년과 청소년이 똑같은 권리를 가진 사회가 오지는 않았잖아. 그래서 그 사회가 오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청소년이 비청소년과 동등한 지위에 서는 쪽으로 사회의 방향이 향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소년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이야.

 

취한다 : 나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모든 범죄와 처벌 방법에 있어서 처벌은 정확하고 정당하게 받아야 하지만, 또 중요한 것이 무기징역이 아닌 이상 사회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된 사람들은 다시 사회에 돌아와서 사회에 올바른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과정이 처벌의 전체 과정에 꼭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청소년만이 처벌에 있어서 교화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최근에 뉴스에서 잔혹한 청소년 범죄 사건들이 터졌을 때 나도 이거는 마땅하게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항상 그런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촉법소년 연령 때문에 범죄 형량이 약화될 수 있다여서 그건 정말 문제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 기사를 읽으면서 그런 부분에 대한 오해가 풀릴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청소년에 대한 편견과 청소년 범죄에 대한 오해들이 청소년권리에 대한 논의들과 청소년 범죄에 대한 궁극적 문제 해결 등을 왜곡시키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여러모로 몰랐던 것들도 알게 되고 많은 부분에서 인식의 전환을 얻게 해준 기사였던 것 같아.

 

이상 청소년 참정권과 소년법의 관계와 둘의 한계, 그 기저에 깔린 사회의 청소년 혐오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교육저널의 시선으로 대담을 나누어봤다. 입시 위주 교육의 한계, 분절적 나이 설정의 한계, 청소년 개개인의 맥락적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 등, 소년법도 청소년 참정권도 모두 불완전하고 보완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년법과 청소년 참정권 자체의 한계도 있지만, 더욱이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청소년 혐오가 존재하고 이것이 청소년 참정권과 소년법 논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기저에 깔린 청소년 혐오와 나이주의 권력으로 인해 청소년 관련 논의들은 그 본질이 흐려지고, 소년법과 청소년 참정권 논의 역시 방향이 한정되게 흘러왔다. 이제 청소년 혐오의 한계를 넘어선 담론이 필요하다. 청소년 또한 분명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주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청소년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이에 따라 청소년들과 함께 새로운 방향으로 소년법과 청소년 참정권 논의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훗날 청소년이 비청소년과 동등한 지위로 서는 때엔 소년법과 청소년 참정권 논의가 전혀 다른 방향과 관계로 흘러갈 것이다. 그러한 날이 오길 바라며 이번 대담을 마친다.

 

  1. 난다 청소년인권운동연대 활동가, <청소년이라 '처벌 안 받는다'는 오해>, 프레시안, 2019.02.15.,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28837?no=228837&utm_source=naver&utm_medium=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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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선거권, 그 이후를 꿈꾸다

 

고슴도치뇽

 

20191227일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선거연령이 만 19세에서 만 18세로 하향되었다. ‘18세 선거권도입으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전보다 많은 청소년들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선거연령 하향은 200519세 선거권이 도입된 이후, 15년 만의 변화다. 이 글에서는 ‘18세 선거권이 어떻게 도입될 수 있었는지, ‘18세 선거권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18세 선거권을 청소년 참정권 보장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지, 청소년 참정권 보장을 위하여 ‘18세 선거권이후 남아있는 과제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고민들을 풀어나가려 한다.

 

청소년들의 꾸준한 외침이 얻어낸 결실

 

18세 선거권은 그냥 도입된 것이 아니다. 도입 마련까지 청소년들이 스스로 참정권을 요구해온 역사가 있었다. 2002, 청소년모임 낮추자18세 선거권을 주장하며 모의투표 캠페인을 진행했다. 명동 거리에서 시작했으나, 이는 곧 전국 단위로 확대되었으며 여러 교육·시민사회 단체들이 참여했다. 이러한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정치권에서도 선거연령을 하향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 정치개혁추진위원회가 마련한 선거법 개정안에 선거권 연령 18세 하향과 관련한 내용이 있었고, 민주노동당에서는 ‘18세 정치적 성년선포식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연령을 내려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만 20세 이상의 국민만 투표권을 부여받았다. 이후 선거연령을 19세로 하향할 것이냐, 18세로 하향할 것이냐와 같은 이분법적 논쟁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청소년들은 만 19세 이상만 투표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는 19세 이상의 국민만 성숙한 시민이며 성숙한 시민만이 투표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공고히 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18세 선거권을 지지하면서도 청소년의 참정권을 몇 살부터 선거권을 부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로 한정지어서는 안 될 것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하지만 결국 2005년에 선거연령은 만 20세에서 만 19세로 하향되었다.

청소년들은 그 이후에도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왔다. 2008년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는 기호 0번 청소년 교육감 후보 운동등의 활동을 전개하며 청소년의 참정권을 주장함과 동시에 청소년이 교육의 주체임을 강조했다. 2012,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에 대한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청소년들은 학생들이 대상이 되는 사안에서조차 의사표시가 불가능했다. 2012년 제정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 발의가 있었을 때도 청소년들은 서명을 할 수 없었다. 또한 청소년의 제한된 권리를 문제제기할 때에도 장벽이 있었다. 헌법 소원을 청구할 때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의 권리 주장은 지속되었으나, 헌법소원을 제기한 지 1년이 지나도 재판과정에는 진전이 없었다. 청소년들은 2012년 총선에서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다 2013, 국가인권위원회가 선거권 연령을 하향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하지만 2014, 헌법재판소가 선거 연령과 관련된 법률에 대하여 합헌 결정을 내리며 18세 선거권은 또 한 번 좌절되었다. 헌법재판소는 우리의 현실상 19세 미만의 미성년자의 경우 아직 정치적·사회적 시각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거나 독자적인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신체적 자율성을 충분히 갖췄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각주:1]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 참사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회와 청소년에 순종을 요구하는 교육에 대한 청소년들의 불신은 더욱 커져갔다. 청소년들은 ‘1618 선거권을 위한 시민연대등을 꾸려 지방선거 청소년 모의투표를 진행하며 꾸준히 청소년의 참정권을 외쳤다. 2016,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연령을 낮추는 개정의견을 국회에 제출했다.

청소년의 참정권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청소년들은 계속해서 목소리를 냈다. 여러 청소년 운동 단체들은 모여서 <청소년 참정권 집중 활동 기획을 위한 간담회>를 진행하였다. 2017촛불시국에는 청소년들이 광장에 나와 18세 선거권을 외쳤다. 청소년 역시 정치 사안에 개입할 주체이며, 더욱 주체적으로 행동하기 위하여 18세 선거권을 비롯한 청소년의 정치할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세 선거권 그 이상을 논하다 : 청소년 참정권 보장을 위한 입법과제 토론회> 등의 국회 토론회를 열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청소년 참정권 확보를 목표로 하는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를 설립했다. 2018년에는 18세 선거권을 위한 국회 앞 천막농성을 진행했다. 청소년들의 지난한 외침 끝에, 2019년 비로소 18세 선거권이 현실화되었다.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고 싶다는 청소년들의 외침에 사회가 응답한 것이다. 이후 여러 청소년단체들은 <18세 선거권, 끝이 아닌 시작이다! - 보다 완전한 청소년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는 청소년단체 기자회견>을 진행하며, 청소년의 참정권 보장을 위한 여러 과제들이 남아있고 그것을 위해 계속해서 목소리 낼 것을 약속했다.

 

18세 선거권으로 투표할 수 있게 된 이들의 목소리

 

청소년들은 정치에 관심 없다.” “투표를 하기에 청소년들은 미성숙하다.” 청소년의 참정권 획득에 발목을 잡는 주장들이었다. 이러한 주장들이 정말 사실일지, 이런 주장에 대해 청소년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기 위해서 선거연령 하향으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던 청소년 두 명을 만나보았다.

 

현예준 님은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그는 투표하기 전,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에게 투표하기 위하여 후보들의 공약집을 읽고 유세 현장에도 들러봤다. 투표를 처음 해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는 질문에 그는 투표가 정말 체계적인 절차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절감했던 것 같다.”고 답했다. 그는 특히나 이번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철저히 관리 감독이 진행된 점을 언급했다. 사람들 간의 거리를 유지하고, 비닐장갑을 끼고 투표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그는 선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효능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답했다. “제 한 표 한 표로 인해서 후보자가 당선되고 낙선된다는 것 자체가 저 개인이나 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힘을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는 제 투표가 부족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정치에 대한 교육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교에서 법과 정치라는 사회 과목 이외에 정치 선거나 투표 절차 등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18세 선거권 이후, 청소년의 참정권을 위하여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국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고, 어떤 법안들이 의결되고 있고, 정부가 어떤 정책을 시행하려고 하는지, 어떤 행정 명령을 하려고 하며 그런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조금 더 체계적으로 현안을 논의하는 시간이 학교에 부여가 된다면 학생 개인의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고쳐지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기대합니다.”라고 답했다.

 

변현준 님 역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그는 두 달 동안 거의 매일 선거와 관련된 기사를 보았지만, 후보자들의 공약집을 읽지 않았다. 지역구 선거에는 지지하는 정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체적으로 정치할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올해 정당에 들어갔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선거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는데, 선거운동을 하면서 드디어 내가 정치적 주체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반면, 투표 행위에서는 비교적 정치적 효능감을 느끼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청소년의 참정권에 대해서 그는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은 삶의 주체가 아니라 유예된 존재로 간주된다는 생각을 되게 많이 합니다. 지금 내가 내 삶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나중에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지금 당장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많이 박탈당하는 것 같은데요. 그런 삶의 권리에는 정말 많은 것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에 참정권이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18세 선거권 이후 남아있는 과제에 대해서는 선거연령 하향, 정당 가입 연령 제한 폐지 등이 더 필요하며, 뿐만 아니라 참정권이 결코 좁은 의미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에만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삶의 현장에서 정치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여건이 갖춰지고, 청소년들의 삶 자체가 경쟁의 강박에만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되고, 그를 위한 교육들이 병행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물론 두 명의 청소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모든 청소년의 의견을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청소년 역시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피력할 수 있고, 정치적 주체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청소년들은 저마다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들을 고민했다. 그러한 방안들은 투표를 했을 때 느꼈던 감정, 일상을 보내는 학교에서의 경험, 청소년의 참정권에 대한 생각 등을 통하여 도출되었다. 청소년 역시 비청소년과 다르지 않은 사고하는 시민임을 보여준다.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투표 X, 선거운동 X, 정당 활동 X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18세 이상 청소년에게 보장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한계적이다. 그렇다면 18세 미만의 청소년은 투표권을 보장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여전히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인가? 선거연령이 하향되면서 선거운동 연령도 하향되었다. 하지만 가능한 선거운동의 범위는 매우 좁으며, 여전히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없다. 올해 2,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연령 확대로 인한 학교의 정치화와 교육 현장이 우려된다며 국회에 입법 보완을 요구했다. 현재 학교에서 가능한 선거운동의 범위는 학생 사이의 단순한 의견 교환, sns 활용 선거운동, 정당 가입, 정치자금 기부 등이다. 선거운동 목적의 모임이나 집회 개최, 단체 차원의지지 선언, 후보자 등을 초청하여 토론회를 진행하는 것 등이 금지된다. 이는 학교의 정치화를 최소화하려는 법 조항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청소년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를 알리는 것은 당연히 인정되어야 한다. 그 사람을 지지하고 말고는 다른 학우들의 몫이다. 오히려 선거와 관련한 여러 집회가 열리는 것은 청소년들이 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정치할 권리를 성실히 실현시킨다는 증거일 것이다. 토론회를 진행하기 위해 친구들과 모여 후보자의 공약을 알아보고 공약의 의미, 효과, 한계 등에 대해 질의하고 학생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다름 아닌 시민교육에 참여하는 하나의 형태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여전히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없다. 최근, 정당 비례대표 선거운동에 청소년이 참여했다는 이유로 정당의 위원장이 검찰에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청소년 활동가들은 이에 대한 탄원서를 작성하며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정치 활동을 억압받는 현실에 저항했다. 선거운동에 참여한 청소년 활동가는 자신의 선거운동이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비청소년에 의한 강요나 강압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비청소년과 청소년의 권력 관계를 해소시키기 위한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 청소년의 정치적 자유를 금지하는 형태로 대응이 진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정당 활동의 자유도 보장받지 못한다. 정당법 제22조 제1항 본문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권이 있는 자는 공무원 그 밖에 그 신분을 이유로 정당가입이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다른 법령의 규정에 불구하고 누구든지 정당의 발기인 및 당원이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말은, 선거권이 없는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정당가입 및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 1, 정의당에서는 위 조항이 위헌이라고 문제를 제기하며 헌법소원심판청구서를 제출했다. 기자회견에서 심상정 대표는 스웨덴·독일·프랑스·영국 등 민주주의와 복지가 잘 실현된 유럽 선진국들의 경우 정당가입 연령을 국가가 금지하지 않고 정당이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해 청소년의 정당 활동을 적극 보장하고 있다핀란드의 경우는 만 13세부터 18세까지 청소년의회를 법적기구로 두고 있다. 독일의 고등학교는 직접 자신이 원하는 정당의 강령을 만드는 교육과정도 있다고 말했다. [각주:2] 청소년의 정당 활동을 보장하는 것은 청소년의 정치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교육적 차원에서도 정치란 무엇인지, 자신이 원하는 사회의 모습은 무엇인지, 그러한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등에 대한 고민을 확장할 수 있는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을 실현하는 것이다.

 

청소년을 말하는 정치 X, 청소년이 말하는 정치 O

 

청소년은 선거운동, 정당가입 및 활동의 자유를 넘어 적극적으로 제도정치에 개입할 권리를 부정 당한다. 현재 공직선거법상 ‘25세 이상의 국민만이 국회의원, 지방의회의원, 지자체장에 출마할 수 있다. [각주:3] 청소년의 정치 참여가 금지되어있는 현실 속에서 청소년 인권에 대하여 발화하는 정치인은 극히 일부다. 발화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은 비청소년의 시선에서 한계적으로만 발화된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청소년 혐오[각주:4] 를 담고 있거나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청소년 혐오를 강화시킨다. 혹은 다른 중요한 사안들이 우선되어야하기 때문에 청소년 인권에 관련한 문제는 뒤로 밀려난다. 청소년들은 청소년을 말하는 정치가 아니라, 청소년이 말하는 정치를 원한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인권을 발화하고 자신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시키는 것 말이다. 사회에서 청소년을 수동적인 객체로 상정하고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서 정치사회적 사안에 목소리를 내는 것 말이다. 노동현장에서 발생하는 청소년 인권침해 사안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입시교육에 대한 대안과 대학을 진학하지 않은 이들의 삶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 청소년이 대상이 되는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말하는 것은 청소년들의 몫이다. 그렇기에 청소년들은 끊임없이 발화해왔다.

21대 총선을 맞아, 특성화고생 권리 연합회는 주요정당 10곳에 정책협약 제안서를 보냈다. 고졸노동자를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고졸청년특별법, 고졸학력을 이유로 임금과 진급 차별을 금지하는 고졸차별금지법, 특성화고 학생이 참여하는 직업교육정책 개혁 추진 기구를 만드는데 노력할 것을 10개 정당에 제안했다. 그러한 협약을 얼마나 잘 지킬 수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각 정당은 청소년들의 이러한 목소리에 대한 대답을 주어야 했다. 시민들을 대신해서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이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0개의 메일에 대해서 단지 3개 정당에서만 답이 왔다. 특성화고생들의 권리를 책임지라는 청소년들의 꾸준한 외침에 대해서는 교육청도, 노동부도, 정치권도 저마다의 이유를 말하며 책임을 회피해왔다.

작년 조국 사태 이후에는 공정성이라는 키워드가 한국 사회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다. 당시 기회의 차별을 문제 삼으며 공정하게 경쟁할 권리를 이야기하는 일부 청년들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많은 청소년들이 교육의 의미는 무엇일까’, ‘교육이 왜 경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까의문을 제기했다. 청소년들은 교사, 학부모 단체와 함께 공정한 입시제도란 가능한가? 우리는 교육에서 차별과 경쟁이 사라지길 바란다!’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언론에서 공정성을 요구하는 일부 대학생들의 모습만을 보도하고, 기존 교육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대학을 거부하는 청소년들의 외침은 주목하지 않았다. 교육부는 청년들의 외침에 응답이라도 하듯, ‘서울 16개 대학 정시 비율 40% 이상을 권고했다. 많은 청소년들의 요구를 왜곡시켜 해석한 것이다. 물론 청소년 역시 단일한 존재가 아니며, 각자 삶의 맥락과 위치에 따라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교육부의 이러한 권고안은 교육부를 비롯한 정치권과 기존 언론이 청소년 중에서도 일부 명망 있는청년들의 외침에만 주목하고, 다른 청소년들의 외침을 소외시키고 그것에 귀 기울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n번방 사건 이후, 아동·청소년이 성착취 사건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법무부는 의제강간연령을 13세에서 16세로 상향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많은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이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이 법안은 16세 이하의 미성년자와 성인이 성관계를 했을 경우,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해당 성인을 처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동·청소년이 계속해서 성착취 사건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법무부의 고민, 관련 부처들과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고민이 있었겠지만,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은 비청소년과 청소년의 성적 관계를 일괄적으로 차단하는 법 개정이 오히려 청소년의 성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청소년의 권리를 제한할 것이 아니라, 청소년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보장하고, 재판 과정에서 청소년과 비청소년 사이의 권력관계가 반영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 있는 재판부를 배당하는 시스템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확실히 아쉬웠던 점은, n번방 이후의 과제를 이야기하는 많은 토론회가 있었지만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의견을 발화할 기회는 상대적으로 없었다는 점이다.

참 어려운 일이다. 청소년이 말하는 정치가 꼭 모든 청소년의 인권을 보장하는 정치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짚어둘 점은 이제까지 청소년들의 현실은 비청소년의 입장에서 해석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청소년들의 권리와 자유를 축소시켰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청소년들이 더 자유로이 의견을 말하고, 정치적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사회로 향해야 한다.

 

미성숙한 청소년

 

청소년들의 정치할 권리를 억압하는 사고방식 아래에는 뿌리 깊은 나이주의가 깔려있다. 나이가 어리면 미성숙하다는 편견 말이다. 애초에 몇 살부터 선거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논의가 왜 중요한 것인가. 이러한 논의 자체가 청소년이 정치적 주체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논의이다. 비청소년에 의해 정치적 영향을 받기 쉽기 때문에 청소년의 참정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모두는 일상을 살아가며 누군가에게 정치적 영향을 받는다. 직접적으로 가족이나 친구에 의해서 받기도 하고, 대중매체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러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고 능력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을지, 타인과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어떠한 긍정적인 작동이 가능할지를 논의해야 한다. 그것은 청소년의 참정권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청소년의 정치활동을 활성화할 때, 나이로 인한 차별을 무너뜨릴 때 가능하다.

청소년의 참정권 보장 논의가 있을 때 항상 나오는 이야기가 정치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국가는 어떻게 운영되고, 우리의 의견은 어떤 통로를 통하여 반영되고, 매일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지하는 것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함정이 존재한다. 청소년의 참정권 보장 논의에서 나오는 정치교육의 맥락은 결국 정치교육을 통해 정치를 잘 아는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선거권 획득이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청소년이 미성숙하기 때문에 정치교육이 필요하다고 논할 것이 아니라, 청소년 역시 비청소년과 같은 정치적 주체이기 때문에 일상에서 정치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일상에서 경험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바탕으로,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지 고민하고 대안을 상상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몇 살부터 선거권을 부여해야 하는가논의는 미성숙함과 성숙함을 구분 지으면서 성숙한 사람만이 권리를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능력주의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권리가 개인적인 노력을 통하여 획득되어야 하는 것인가. 정치를 모르는 이들은 투표조차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정치를 모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투표권을 얻을 수 있는 성숙함의 정도는 누가 규정하는 것인가. 권리는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숙함과 노력의 정도를 정하고 그것에 알맞은 사람에게 권리를 부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이 권리를 어떻게 더 잘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성숙하다는 것은 어른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숙함의 사전적 의미 역시 몸과 마음이 자라서 어른스럽게 되다이다. 애초에 누군가를 미성숙하다고 규정해버리는 것 자체가 결국 우리 모두는 성숙해져야 한다는 편견을 반영한다. 성숙함과 어른스러움이 같은 의미인 사회에서, 비청소년은 성숙함과 미성숙함의 기준을 자의적으로 결정하고, 최종 목표인 성숙함을 위하여 여러 방식으로 청소년을 통제한다. 규칙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겠다. 우리 사회에서 성숙함이란 철이 드는 것이다. 철이 드는 것은 자신이 속한 공간의 부당함이나 자신의 권리 침해에 아무 말 하지 말고, 이 사회에 잘 적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규칙에 순응해야 한다. 성숙해지기 위해서.

 

청소년의 정치 참여, 그리고 공부

 

청소년 참정권을 억압하는 요인인 청소년에 대한 편견과 관련하여 조금 더 언급해보려 한다.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규정해버리는 편견 이외에도 흥미로운 점은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공부와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은 학생으로 한정되며, 청소년의 정치 참여는 공부와 연관 지어 설명된다.

 

학생이 공부해야지 왜 집회를 나오냐

 

학생의 본분은 공부일까. 공부라면 그 공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교과 교육을 성실히 이수하여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하는 것? 그 공부에서 나의 삶을 고민하고 사회에 의견을 피력할 권리는 사라진다. 청소년은 의견을 낼 수 없다. 의견은 성인이 되어서도 낼 수 있으니, 지금은 공부를 해야 한다. 청소년은 유예된 존재일 뿐이다. 지금 당장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지금의 권리를 박탈당해야 한다.

또한, 교육은 일상에서의 정치적 경험과 분리된다. 교육과 정치를 분리시키는 것은 교육이 고정된 교과서로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내포한다. 하지만 정치교육이라는 것이 별건가. 일상에서 나의 현실과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고민하고, 그것에 의견을 내고, 대안을 상상하는 것이 일상에서 정치교육을 실현하는 것이다. 오히려 집회에 나오는 청소년들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너는 공부도 잘하는 애가 왜 그런 걸 하니?” vs “너는 공부도 못하면서 왜 그런 걸 하니

 

청소년이 정치에 참여하면 그저 참여하는 것인데, 그것을 공부를 얼마나 잘하느냐와 연결 짓는다. 그리고 그 청소년이 우리 사회에서 요구하는 공부를 얼마만큼 잘하느냐에 따라 맞는 이유를 붙여 청소년의 정치활동을 비판한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공부를 못 하는 아이도 정치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공부를 잘하면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하여 공부에 집중해야 하고, 공부를 못 하면 대학이라도 가기 위하여 공부를 해야 한다. 정치활동은 공부에 걸림돌이 되는, 쓸모없는 일이다.

 

학생들이 거리에 나왔다!!!”

 

청소년들의 집회 참여를 옹호하는 여러 언론이 있지만, 그것을 보도하는 시각에서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상정하기도 한다. 페미니즘, 노동, 환경 등 여러 의제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는 다른 비청소년들의 집회와 달리, 청소년들의 집회를 더욱 강조하며 공부해야 하는데 사회에 참여하는 대견하고 기특한 존재로 표상하는 것이다. 이는 청소년을 동등한 정치적 주체로 사고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학생들은 입시에 관련된 문제에만 목소리를 낸다.”

 

입시와 관련하여 의견을 피력하는 청소년들을 이기적이라고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또한 입시를 넘어서 더 폭넓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훈수를 놓는 어른들이 있다. 하지만 입시에 관심을 갖는 게 뭐 어때서? 우리 사회에서 입시는 청소년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이 바람직하냐에 대한 판단과 별개로, 입시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청소년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민주시민교육의 기본 목표가 아닌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인지하고, 자신의 행복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이바지하는 사람 말이다. 또한 입시와 관련하여 청소년들의 의견은 존중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작년 조국 사태 이후 더 나은 교육을 요구하는 청소년들의 외침이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고작 서울 몇 개 대학에 대하여 정시 비중 확대를 권고하는 수준에서 많은 청소년들의 외침을 무마시켰다. 이는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이다.

또한 청소년들은 입시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 의제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작년에는 청소년들의 기후위기행동이 있었다. 기후위기에 대한 청소년들의 행동은 인간과 환경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교육방식을 창조해내는 하나의 실천이다. 이들은 과도한 이산화탄소 배출의 원인이 되는 공장식 축산업에 문제를 제기했다. 기후 변화를 막고 비인간동물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채식을 실천했다. 직접 문제를 정의하고 일상 속에서 실천할 때 배움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전국 각지에서 청소년 페미니즘 동아리,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들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대구 청소년 페미니스트 모임 어린보라에서는 [을들의 당나귀 귀: 페미니스트를 위한 대중문화 실전 가이드] 등 여러 페미니즘 서적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썼고,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는 작년 콘돔 전시회를 열며 청소년의 성적 권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청소년들은 자신의 관계 속에서 여러 의제들에 대해 고민했다. 교사의 개입 없이도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미성숙하고 어리숙하며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표상되고, 보호는 그들을 통제하며 이루어졌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이러한 편견을 완전히 부수고, 스스로 행동하고 참여하는 배움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용기를, 상상을, 실천을 배워야 한다.

 

한 표를 보장받는 것의 의미는? 그것이 참정권을 보장받는 것인가?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었다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제도 정치 자체의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제도 정치는 국민의 의견이 수렴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나의 의견이 후보자를 통하여 피력되는 것이 아니라, 후보자 중 나의 의견과 그나마 일치하는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내가 투표한 후보자가 나의 모든 의견을 반영하지 않는다. 어떤 의제에 대해서 동의해도, 어떤 의제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후보자들이 너무 최악이기 때문에 차악을 택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우리 정치에서는? 내가 이 후보자를 완전히 지지하든, 후보자의 일부 정책만 지지하든, 후보자를 지지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어서 투표를 했든, 모두 후보자에 대한 한 표로만 나타난다.

게다가 거대 양당의 독점 속에서 그들이 대변하지 못하는 자들의 의견은 모두 소외될 뿐이다. 거대 양당을 지지하지 않았던 소수는 투표권을 부여받았다고 해도 의견이 반영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후보자의 공약을 지지하여 투표했는데, 공약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태반이다. 문재인 대통령만 봐도 그렇다. ILO 핵심협약 비준이 공약이었으나, 취임 이후에는 노사정 사회적 합의를 통해 비준하겠다고 교묘하게 말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ILO 핵심협약을 비준한다는 이유로, 경영계와 합의하기 위한 얼마나 많은 악법들이 통과되겠는가. 탄력근로제 확대를 비롯하여 ILO 핵심협약 비준을 무력화시키는 수많은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다. 대통령 선거 때 화제가 되었던 공약 - 2020 최저임금 1만원은 이미 오래전에 폐기되었으며, 내년에는 최저임금 130원 인상이라는 역대 최저 인상률이 확정되었다.

제도 정치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제도 정치로는 우리의 의견을 완벽히 개진할 수 없다. 그것을 넘어서 청소년을 비롯한 시민들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될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18세 선거권, 그 이후를 꿈꾸다

 

참정권의 의미 확장이 필요하다. 단순히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넘어서 제도 정치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권리, 사회에 의견을 피력하고 일상 속 정치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을 권리, 사회 구성원으로서 동등하게 대우받을 권리가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 청소년들이 일상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부터 정치 참여는 소외된다. 청소년들은 학교 운영에 개입할 수 없다. 일상에서 정치를 경험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입시 하에서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린다. 학생들이 내 삶의 불편함을 말하고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토론할 수 있는 학급회의, 대의원회의, 운영위원회 등이 운영되지만, 그것의 의미와 필요성이 논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 채우기 용으로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며, 다루는 의제들도 제한적이다. 마지막으로 18세 선거권 이후 우리에게 남은 과제를 고민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청소년 참정권 운동은 청소년들의 꾸준한 외침을 통하여 진행되어왔다. 청소년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지금의 권리를 주장한 그들이야말로 일상에서 교육을 실현하는 모습과 청소년의 정치적 주체성을 보여준다. 청소년들은 18세 선거권 너머를 요구한다. 한계적인 투표권 보장을 넘어서, 청소년의 정치적 주체성 실현을 위하여 교실의 정치화, 일상의 정치화를 요구한다. 교실의 정치화를 시작으로, 청소년의 정치 활동을 확대해나가자. 학급 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일상의 불편함을 인지하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시간을 갖자.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를 어떻게 맺을 수 있는지 이야기하자.

학교 내에서는 학생회가 실용적 업무를 하는 기관을 넘어 정치조직으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 운영, 재정 운용, 교육 과정 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회장만이 형식적으로 참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사회 내의 담론이 형성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학급회의가 잘 진행된다면 그것이 하나의 창구가 될 수 있겠다. 학생들은 학급회의를 통해서 두발규제, 교육권 침해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교과과정의 변화 역시 필요하다. 일방적인 정보 전달 교육을 넘어서 사회의 여러 현상들에 대해 주체적으로 탐구하는 교육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과정은 더욱 정치적이어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라는 추상적인 말로 포장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배제와 차별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위해서 어떠한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져야 할지를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정치는 단순히 교과 시간을 통해서 교육될 수 없다. 일상 속에서 정치가 가능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정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나 역시도 그랬다. 강의실 안에서 구조화된 지식을 접했을 때가 아니라, 일상 속의 경험을 통해 지식을 나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 배움을 느꼈다. 사회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공부할 때,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직접 문제를 정의하고 서로의 질문에 답해줄 때,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할 때, 나의 의견을 사회에 피력하기 위해 거리로 나갔을 때, 공부했던 내용들이 나에게로 가깝게 다가왔다. 일상의 정치화를 긍정한다. 일상에서, 나의 삶에서, 내가 속한 공간에서 나의 권리와 의무를 실천할 때, 교사는 권리와 의무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는 고민하고 경험함으로써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 느꼈기 때문이다. 교사의 옳은가르침을 받지 않더라도, 교과서에 나오는 멋진 말들을 나 스스로 의미화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정치활동을 긍정한다. 더 많은 청소년들이 투표권을 부여받고, 정당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선거운동을 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후보로 출마할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교육에 개입할 수 있는 결정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가령, 수업 일수, 교육 내용, 교육 방식, 방학 기간 등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집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내 삶의 주체로서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매일매일 발생하는 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하여 청소년들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하며, 우리는 동등한 주체로서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학교를 넘어서는 교육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일상의 대부분을 통제당하며,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부정당하고, 경쟁을 통해 평가받는다. 학습 시간은 수면 시간을 줄일 정도로 과도하고, 학생들의 쉴 권리는 보장되지 않는다. 학생들은 공부하기 위해 외적, 내적 가꿈을 포기해야 하며,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 이러한 통제와 억압, 경쟁과 차별은 교육의 의미를 희미하게 한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배움과 가르침이 존재하는데, 교육의 결과를 통해 인간의 자격을 나누고 그 자격 조건 안에 들게 하기 위해 인간다운 대접을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의 목적을 전도시킬 뿐만 아니라, 청소년 혐오를 강화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각주:5] 학생들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보호받아야 하고, 학생들은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정치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편견 말이다.

이는 비단 교육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논리이기도 하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동하지만, 어떤 노동을 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자격을 나눈다. 인간답게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기고 누군가를 차별하며 인간다움을 포기해야 한다. 청소년 참정권 논의는 입시교육, 대학서열화와 대학이 당연한 사회, 얼마나 공부를 잘하는 지가 곧 개인의 등급이 되는 사회, 모두가 노력하지만 성공한 사람의 노력만이 인정되는 사회, 아무런 승자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 등 사회 전반에 대한 고민과 연결된다. 인간의 자격을 구분하며 권리를 부정하는 사회가 아닌, 권리가 모든 이에게 사회적으로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다. 이제는 그들의 정치적 주체성을 인정해야 한다. 교실의 정치화, 일상의 정치화는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부터 의견을 피력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일 것이다. 또한, 일상의 정치화를 통해서 청소년과 비청소년의 권력 관계를 해소시킬 수 있다. 청소년을 유예된 존재가 아니라 이 사회를 살아가는, 비청소년과 다르지 않은 시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성인 중에 투표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기에 모든 성인이 투표할 수 있도록 18세 선거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담론을 넘어서, 청소년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더 나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18세 선거권, 그 이후를 꿈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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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리, <우리 사회의 청소년혐오>, 미디어스, 2016.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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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7년도 청소년 참정권 집중 활동 기획을 위한 간담회 토론자료(교육공동체 나다, 노원지역청소년인권동아리 화야,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어린이책시민연대, 인권교육센터 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페이스북 페이지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페이스북 페이지

특성화고 권리 연합회 페이스북 페이지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페이스북 페이지

어린보라: 대구 청소년 페미니스트 모임 페이스북 페이지

위티 WeTee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페이스북 페이지

  1. 장은교, <헌재 “18세는 정치적 판단능력 미약해선거권 제한 합헌>, 경향신문, 2014.04.2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4291341481&code=940301. [본문으로]
  2. 신진호, <정의당 18세 미만 미성년자 정당 가입 금지 부당헌법소원 청구>, 서울신문, 2020.01.09.,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109500121&wlog_tag3=naver.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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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청소년 혐오란 청소년을 비하, 경멸하고 공포스러운 타자로 간주하는 문화를 말한다. 청소년 혐오는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하며, 거대 미디어가 아동과 청소년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을 통해 강화된다. 급식충, 등골브레이커, 2병 등 청소년 혐오어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며,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에는 유독 나이를 강조한다. 필자는 청소년 혐오를 포괄적으로 해석했다. 청소년을 미성숙한, 순수한 존재로 상정하는 것 역시 청소년 혐오에 해당된다쥬리/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 <우리 사회의 청소년혐오>, 미디어스, 2016.07.02.,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093. [본문으로]
  5. 조영선, [학생인권의 눈으로 본 학교의 풍경], 교육공동체벗, 2020, 11.  [본문으로]

교육현장과 정치적 중립성의 민낯. ‘미성숙성숙사이의 저울질

 

말하는 감자, 말하는 고구마

 

 

바뀐 법과 정체된 교육

 

2020,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선거권이 만 18세에게까지 확장되었다. 지금까지 논의만 되었던 선거 연령 하향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청소년은 성인들의 보호만 받으며 일정 기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닌, 사회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주체가 된 것이다. 하지만 현재 교육현장을 둘러봐도 대외적으로 바뀐 부분은 명시된 법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 투표하는 주체가 늘어났고 그중에는 416일 이전 출생자인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도 있으나 그들을 위한 별도의 교육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선거법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육기본법에서 명시된 정치적 중립성의 개념이 지켜진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교육기본법 제16조에서는 교육은 교육 본래의 목적에 따라 그 기능을 다하도록 운영되어야 하며, 정치적ㆍ파당적 또는 개인적 편견을 전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서는 아니 된다.’[각주:1]라는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는 선거 연령이 하향되었으나 여전히 학교 내의 정치적 의견표출이 제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선거 연령이 하향됐으나 이를 둘러싼 정치적 중립성의 개념은 여전한 것일까? 청소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그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학교에서 변화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정치적 중립성은 교사들의 정치적 권리까지 침해하고 있지 않은가? 왜 학교는 교사의 정치적 권리의 침해 가능성을 두고도 정치적 중립성을 엄격하게 지키라고 하는가?

 

정치적 중립의 모순

 

위 질문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선 우선 정치적 중립성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를 알아봐야 한다. 교육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인간을 목적에 맞도록 개조할 수 있는 교육과정의 형성을 막기 위해 생겨났다. 배소연(2020)헌법상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에 관한 연구에서 본래 헌법이 보장하는 교육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이 자본주의 산업화로 인해 표준화된 대량 인력 양성을 중심으로 하던 시대에 국가의 교육권이 무제한 강화되며 교육이 국가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인간 또한 도구화되는 부작용에 대한 반성을 통해 나타났다고 한다. 국가 권력이 교육 영역에서 부당하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나타난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보았을 때,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이 생긴 데에 정치적 영향력의 제한이라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는지 그 실효성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과연, 교육에서의 정치적 중립성개념은 교육 영역에서 국가 권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줄이는 데에 일조하는가?

교육에서의 국가 정치 권력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교과서이다. 하지만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교육에서 가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교과서에서도 특정한 정치적 견해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교과서의 정치적 견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이슈가 되었던 사건은 바로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국정 교과서 사태였다.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는 국정 교과서가 아닌 검정 교과서 제도이다. 검정 교과서 제도는 일반 출판사에서 연구하고 개발한 교과용 도서의 교과서 적합 여부를 검정하여 심사하는 제도이다. 현재 한국사 검정 교과서 제도에 따라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은 한 권이 아닌 다양한 교과서로 검정 교과서 제도 아래의 학생들은 학교마다 다른 교과서로 수업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비해, 국정 교과서 제도는 정부 자체에서 교과서를 만드는 TF를 결성하여 교과서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제도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이와 같은 국정 교과서를 새롭게 도입하고자 했던 시도는 큰 국가적 논란으로 연결되었다. 박근혜 정부를 포함하여 국정 교과서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대부분 박정희의 독재 정부를 포함하여 국정 교과서를 통해 특정 당파의 의견을 편파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문제였다. 당시 박근혜 정부에서는 국정 교과서에 대해 역사를 올바르게 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역사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정부의 발언은 역설적으로 얼마나 국정화 교과서가 정치적인 전략인지를 알 수 있게끔 한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화 교과서를 주장하기 10여 년 전 참여정부 대에는 역사를 정권이 재단해서는 안 되며 국민과 역사학자가 판단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 국정화 교과서의 제작자 입장의 역사는 올바른 역사이지만, 직접 국정화 교과서를 제작하지 않는 입장에서 국정화는 정권의 재단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국정 교과서 사태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3일 만에 종결되었다, 이러한 국정 교과서 사태는 이것이 얼마나 정치적인 요소인지, 더 나아가 국가에서 교육을 단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정치적인 행위인지를 알 수 있게끔 한다.

그렇다면, 국정화 교과서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국정화 교과서는 교육에서 정부가 개입하는 행위가 다분히 정치적임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정부에서 독점하여 교과서를 제작하는 행위만으로 큰 논란이 발생하며, 다분히 정치적인 행위라고 보여질 수 있는 사안이라면 하물며 정부에서 만들어내는 교육과정은 과연 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아무리 정치적 중립성을 염두에 둔다 한들, 결국 교육과정마저도 정부의 부처 기관인 교육부 아래에서 만들어지는 요소이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부분이 결정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비롯한 각종 시험에서 무조건 나올 수 있는 부분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처럼 무엇이 중요한가?’를 지정하는 과정, 더 나아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를 지정하는 과정은 결국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편향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정권에서는 대북 정책에 대하여 북한과의 갈등을 더욱 강조하여 가르치고 이를 시험에 출제할 수도 있지만, 어떤 정권에서는 이에 대해 북한과의 협력과정을 강조하여 시험에 출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과정의 수립 과정에서, 결국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은 허상에 가깝다. 그리고 교육과정이 처음부터 중립성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교사의 중립성 또한 현실적으로 허무맹랑한 개념이 되고 만다. 교육과정과 교과서가 편향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교육과정을 대변하고 근거를 들어 설명해야 하는 교사는 특정 사안에 대해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의견을 드러낼 수 없다. 결국, 교사가 편향적인 교육과정을 성실하게 대변해야 하며, 편향적인 교육과정을 거부할 때 헌법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을 어기게 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때에 교사가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고자 하는 태도는 진정한 정치적 중립이 아닌 편향적인 교육과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단순한 기계적 중립에 불과하며 결국 어떤 입장을 강화하고 견지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 학생과 교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학교에서 생활하는 학생들과 교사들은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을까. 학생들은 법에서 명시한 정치적 중립성이 지켜지는 걸 반대할지, 교사들도 정치적 중립성의 개념을 교사의 자율성 침해로 여기는지를 알아보고자 인터뷰를 진행해 봤다. 인터뷰는 같은 학교 소속인 학생 두 명과 교사 두 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질문의 내용과 그에 따른 답변을 교사와 학생으로 분류해 간략히 정리해봤다.

 

1. 교육기본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정치적 중립성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한 논의인가? 어째서 교사가 정치적 의견을 표출하면 안 되는 걸까?

 

학생: ‘정치적 중립성은 국가 권력의 교육 지배가 문제되면서 교육의 자주성 실현을 위해 논의된 문제임. 애초에 정치와 교육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데 특정 관점에 편중된 의견이 학생들에게 노출되면 미성숙한학생들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위험성이 커서 정치적 중립성 개념이 도입된 듯함.

교사: 일반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교육이 사회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편향된 교육이 피교육자의 정치적 지향성을 결정하는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다분함. 특히 학생들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주체가 교사이기에 교사가 정치적 편향성을 내비치지 않도록 국가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함.

-> 학생과 교사 모두 학생의 배움 과정에 있어 교사의 역할을 강조했다. 특히 다방면의 사고 성장과 균형감 있는 시각이 필요로 하는 청소년 시기에 교사에게서 받는 가치관 형성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이를 정치적 중립성이 발생한 근본으로 고려하고 있다. 이는 청소년이 미성숙하다는 전제와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2. 교사의 완전한 정치적인 중립이 가능한 것인가?

 

학생: (두 학생의 의견이 달랐는데 정치적 중립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학생은 정치적 중립이 무조건적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개념으로 생각한 거 같다.)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개인마다 다르게 정의내릴 수 있어 어렵다고 생각한다. / 학교에서 객관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학생들이 주관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그 맥락에서 정치적 중립성이 지켜지는 거 아닐까?

교사: 교사가 정치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명시적으로 표출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사도 인간이고 학생들과의 상호작용이 기계적일 수 없기에 '완전한' 중립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사도 자신이 피교육자로서 자라온 과정이 있고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주체이기에 표면적으로 중립으로 보일지라도 잠재적 교육과정 측면에서 교사가 중립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의견이 조금씩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교사라는 직책이 어느 정도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직업이라 본 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물론 교사도 정치라는 분야에 대한 개인의 의견과 가치관을 가질 순 있지만 그래도 1번 질문에서 나온 답과 비슷하게 학생에게 영향을 직접적으로 주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볼 땐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이는 현재 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정치적 중립성과 같다.)

 

3. 정치적 중립성은 현대 교육현장에서 어떻게 이용되는 개념인가? 대부분 어느 정도를 정치적 중립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학생: 자신의 정치적 입장만을 강조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정치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선에서 정치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교사에게 요구되는 정치적 중립성은 학생들에게 특정 정당을 비판하고 배제하는 것을 금한다기보다는 정치적 교육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데에 의의를 두는 거 같다.

교사: 가장 쉽게 생각하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선에서 교육현장의 정치적 중립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만약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등의 SNS에서 대통령의 페이지를 팔로우한다면 정치적 중립을 어긴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인가? 혹은 어떤 정부 정책에 관한 내 비판적인 생각을 내 SNS에 올렸다면 정치적 중립을 위배했다고 볼 것인가? 결국 교실 내에서 좌우 혹은 찬반이 갈리는 사안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으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학생들의 가치관 확립과 더 넓은 식견을 기르기 위해서는 아예 특정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보다는 균형감 있게 사건에 대해서 다양한 방면을 언급하며 서로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정치적 질문에 대해서 답변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답변에 대해서 아이들의 궁금증에 대해서 다양한 방면의 의견을 근거를 들어 설명해주는 것이 균형감 있는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 본 질문에서는 답변에서의 학생과 교사의 차이를 띠었다. 학생은 현대 교육현장에서 정치적 중립성이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이나 정치적 개념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간단하게 대답한 한편, 교사들은 현재 교육현장에서 활용되는 정치적 중립성과 실제로 실행되었으면 하는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개념도 제시했다. 만약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이루고 싶다면 정치적 개념에 침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해당 정치적 사안에 대해 학생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학생들이 뭔가를 제대로 알고 자신의 의견이나 가치관 확립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 현재 교육현장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이나 개념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 기계적 중립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교사들 또한 이 개념이 과연 교육현장에서 올바른 개념인가 하는 의문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4. 정치적 중립성과 청소년의 미성숙담론은 어떤 관계 아래에 있는가?

 

학생: 정치적 중립성과 청소년의 미성숙담론은 유기적 연대 관계 아래에 있다고 본다. ‘나이가 어리기때문에, 또는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보호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 미성숙담론에 근거하여 정치적 중립성이 제기된다고 본다.

교사: 대학교수와 교사 간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차이나는 점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될 듯하다.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는 교수는 스무살 넘은 성인을 교육하는 것이고 정치적 중립이 요구되는 교사는 청소년을 교육하는 것이니까. 청소년은 아직 정체성 확립 단계이고 '미성숙' 하기에 국가나 사회가 교육을 주입시켜 청소년들이 치우친 가치판단을 하지 않도록 하려는 듯하다. 근데 이때 미성숙하다는 것은 생각도 없고 뛰어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며, 학생들을 내부의 능력을 스스로 발현시킬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결론은 학생들이 정치적인 생각이 없거나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아이들은 표현의 어색함이나 아직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기에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하는 개념으로 국가에서 지정한 거 같다.

-> 본 질문에서 내리고 있는 교사와 학생이 내린 미성숙의 정의는 차이를 보였다. 예상과 다르게 오히려 학생은 청소년이 나이가 어리다는 점에서 미성숙을 강조했고, 교사는 미성숙을 자신의 의견을 확립하거나 표출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단계라고 정의했다는 점에서 학생들 본인보다 더 청소년의 역량을 높이 평가한 것 같았다. 이러한 상황은 학생들은 사실 그들 사이에서 정치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학생들이 적극적인 논의나 자신의 의견을 확립할 충분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미성숙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학생들 자신은 그저 그것이 나이가 어리기때문이라고 치부한 것으로 보인다. 충분한 정보나 교육 없이 이루어지는 논의는 얕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5. 교사의 정치적 자유가 허용된다면, 어떤 선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

 

학생: 가장 중요하게도 교사의 말을 듣고 가치관에 변화를 끼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그들의 주관적 개입이 드러나지 않는 사실을 말하거나, 학생들이 스스로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입장을 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학생들과 함께 있는 공간이 아닌 학교 밖에선 정치적 활동이나 시국선언을 할 수 있는 자유 정도는 보장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교사: 과도한 정치적 의견 표출은 교육현장에서 지양되어야 한다 생각한다. 교실 내, 수업 시간 속에서는 어쨌든 수업 목표가 분명해야 하니까 그 점에 집중하는 것이 서로에게 가장 좋을 듯. 다만 정치적인 가치 판단을 앞서는 인본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사안이라면 교육현장에서 함께 논의해도 좋지 않을까? 교사가 특정 정치 성향을 표출하는 차원이 아닌 학생들에게 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 능력을 길러줄 수 있는 차원에서 정치적 논의의 자유가 허용된다면 좋겠다.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다가 아니라 이런 생각도 내 개인적인 견해에서는 해봤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다또한 이 관점은 맞고 틀리고의 관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등의 언급이 필요할 거 같다.

-> 학생과 교사 모두 어느 정도 정치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입장에 동의했다. 과도한 정치적 의견 표출이나 아니면 편향성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학생과 교사가 타협을 보고 논의하는 것도 교육적으로 오히려 좋다는 게 양측의 생각인데 이는 현재 법에서 명시한 암묵적 중립성과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6. 학생의 정치 교육을 위해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은 지켜져야 하는 개념인가?

 

학생: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사고방식은 아직 미성숙한 단계이며 대부분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학교라는 제한된 공동체 안에서 교사들이 제공하는 정보의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어렵고, 이는 곧 그들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사라는 직위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직위와 사회적 파장을 고려했을 때, 교사의 정치적인 발언은 일반 시민보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사: 우선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교사가 노력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교육이라는 것이 광범위하게는 삶의 과정이고 연속선상이므로 정치를 배제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겠지만 학생들에게 스스로의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합리적인 판단 능력을 기르게 해 주는 게 정치 교육의 목적이라면 교사에게 중립성은 요구된다 생각한다. 물론 이때 정치적 중립성은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생각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그리고 다른 관점도 언급한다는 의미에서의 중립성이다. 교육에서 중요한 점은 미성숙한 학생들을 성장시킨다는 것보단, 이미 무엇인가 이룬 큰 꿈을 갖고 있는 학생들의 내면을 겉으로 서로 협력하여 이끌어 낸다는 관점, 즉 발현시켜 준다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정치적 문제든 어떤 교육의 문제든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 , 학생과 교사 모두 답변에서 명시한 중립성은 현재 교육현장에서 지켜지는 중립성과 달리 침묵이 아닌 단순한 자신의 편향적이고 과도한 의견표출의 지양일 뿐이었다. 현재 학교에서는 정치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사안을 일절 언급하지 않도록 하는 기계적 중립에서 벗어나 학생들에게 여러 관점과 사태 자체를 명확하게 알려 주는 게 더 좋은 해결의 창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 결과 답변들에서 반복되는 두 가지 점을 발견했다.

 

1) 학생들은 미성숙하기 때문에(미성숙은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일 수도 있지만, 교육과정에 의해 많은 정치적 경험이 존재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교사의 의견에 영향을 너무 많이 받을 수 있다. 그러니 학생들 앞에서 명시적, 편향적 정치적 의견표출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2) 그래도 완전한 암묵이 아니라 정치적 사안과 논란 등에 대한 정보를 학생들에게 제공해줘 보다 더 넓은 식견과 가치관을 가지는 걸 도와야 한다.

 

첫 번째에서 논의된 미성숙은 4번에서 제시했듯이 학생과 교사가 정의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학생과 교사 둘 다 청소년들의 미성숙함을 강조하며 교사가 학생들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 미성숙개념이 어떤 범위 내에서 해석될지는 다를 수 있다. 학생들의 의견대로 나이 개념을 적용해 성인과 차별성을 둔다는 점에서 청소년들이 미성숙하다라고 정의하면 이는 청소년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나이라는 기준에만 의거한 제한적 정의일 뿐이다.

사실 미성숙하다라는 단어를 누구에게 붙일 것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될 수 있다. ‘청소년이 미성숙하다.’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나이가 어려도 많은 경험을 통해 성숙하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나이가 많아도 미성숙한 사람이 있기에 어떤 사람이 성숙했는지의 기준을 세우기 어려워 나이라는 하나의 인위적인 지표를 만들고 이에 따라 구분짓기가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때 미성숙의 정의를 4번에 나왔듯 생각도 없고 뛰어나지 않다는 게 아닌 스스로 내부의 능력을 발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대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에게는 많은 경험이 허용되지 않으며 일방적인 교육과정이 지정되어 있는데, 이는 청소년이 상대적으로 성숙하기에는 너무나도 미흡하거나 부족한 과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정한 교육과정을 통해 성숙한 학생문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학생들을 제대로 교육하고, 이를 위한 정치 교육의 기본적 환경을 마련하여 학생들이 성인 못지 않은 성숙함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제대로 된 정치 교육 없이 학생들을 미성숙하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제대로 된 정치 교육이나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실제 교육현장에서 적용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조치가 필요하다.

또한, 인터뷰에서 제시된 정치적 중립성 개념은 현실에 적용되는 것과 정작 학생과 교사가 원하는 것의 내용이 다르다. 학생과 교사 모두 교사가 직접적으로 표출하진 않더라도 논란이 될 만한 사안 혹은 정치에 대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게 교육적으로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직접 교육현장에 있는 당사자들이 원하는 것과 법적으로 명시한 정치적 중립성의 개념은 서로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올해 법 개정으로 인해 선거에 참여하게 된 몇몇 학생들도 제대로 된 정치 교육이나 선거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투표하게 되어 학생들이 불만을 표했고, 법 개정이 최근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학생들에게 무조건적 침묵으로 대응하기보단 제대로 된 실질적 교육을 해 주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뭔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논란을 회피하거나 침묵으로 대응하기보단 오히려 맞서서 알려주는 게 제대로 된 교육을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인터뷰의 결과와 학교에서의 맥락으로 보건대, 교육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을 견지하는 내용은 청소년의 미성숙함이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 미성숙함에 따라 어떤 기준으로 아이들을 교육해야 하는지, 그리고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교육과정의 일방적 전달과 기계적 중립으로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에 대한 재고도 존재하지 않은 채 하나의 통일된 기준도 없이 저마다의 생각이 난립하는 정치적 중립성개념의 모순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교사들은 저마다 교육과정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통일되지 않은 생각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교육과정에 대한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교사가 있는 반면, 적당히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교육과정 밖의 내용을 설명하고 아이들과 소통함으로써 새로운 교육과정의 지평을 만들어내는 교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정치적 중립성에서 거리가 먼 교사들의 행위라고 할 수 있으나, 정치적 중립성 개념의 모순을 생각한다면 어떤 교사도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 안에서 행동할 수 없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가치를 제공하는 새로운 교육과정의 지평은 결국 헌법에서의 정치적 중립성개념에 의해 제한되고 마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교육현장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그 자체로 모순된 개념인 데에 더하여 아이들의 새로운 교육과정으로써의 경험마저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교육 현장에서의 정치적 중립성개념은 학생들의 넓은 교육과정 경험을 막는 역할로 작용하고 있다. 2017년 실제로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의 수업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퀴어퍼레이드의 시민 행진 영상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전학연(전국학부모교육시미단체연합)에서는 교사의 행위를 비난하고 파면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실제 본 교사가 근무하던 학교 앞에서는 교육현장이 동성애 교육장이 되었다.’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배포했으며, 본 교사를 동성애를 옹호하고 남성혐오를 가르치는 수준 이하의 교사라고 맹비난했다고 한다. 이러한 학부모들의 행태로 교사는 학부모들을 고소하기에 이르렀으며, 결국 법원은 학부모 측에 3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교사에게도 성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초등학생에게 퀴어문화 축제 영상을 보여주는 것은 학부모들에게 큰 걱정을 끼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결국 법원에서 공식적으로 퀴어 문화를 보여주는 것 자체만으로 교육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정치적 중립성은 결국 교육과정 외의 내용을 교사에게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기제로써 작용한다. 이는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교육에서의 언급을 아예 금지하게 된다. 교육과정은 아무리 전문가들이 교육내용을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지 않은 내용이라면 교육하지 않아야 한다는, 부단히도 보수적인 구성방침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교육의 방침은 현재 논란이 되는 성교육 표준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김대유(2010)은 성교육 표준안에서는 사회적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여 사회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성교육 표준안에서 양성평등, 성 소수자, 성행위, 자위행위와 같은 내용 체계를 모조리 삭제하였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결국 기계적 중립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회적으로 충돌을 빚을 내용을 모조리 삭제함으로써 대한민국 내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를 교육과정으로 편입하고 그들의 편을 드는, 전혀 중립적이지 않은 결과를 낫게 되었다. 과연 교육에서의 중립성은 어떤 개념이며, 과연 이러한 허울뿐인 중립 속에서 교육에서 과연 중립을 주장하는 것이 합당한 논의인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결론: 학생들을 위한 교육은 무엇인가?

 

결국, 헌법상으로 명시된 것처럼 보이는 교육 내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볼 때 사실상 허구적이라고 볼 수 있다. 법적으로 정치와 교육이 상호 연관되어 영향을 미친다는 점과 학생들이 교사의 정치적 의견에 휩쓸릴 수 있음을 근거로 들어 정치적 사안을 언급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는 완전한 중립이라기보다는 기계적 중립이요 의견묵살에 가깝다. 사회가 정치와 이미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는 점과 완전한 중립은 불가능하다는 특징을 고려할 때 교육체제 내의 정치적 중립은 본인들의 편의와 자의에 의한 조정으로 보인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근거로 가장 많이 언급된 청소년의 미성숙함 또한 학교 내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기 위한 근거로 들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청소년은 해당 글 본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러 경험과 배운 내용을 토대로 사고력을 스스로 확장할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이고, 이때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가치관이 청소년에게 어느 정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회와 밀접하게 붙어서 작용하는 게 정치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거나 현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을 함께 다루면서 다양한 의견들을 접하는 과정이 오히려 사고 확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경험을 쌓기 힘든 교육과정을 비판하고 청소년들에게 그 정치의 영역을 확장하는 논의를 진행하기는커녕, 청소년들이 미성숙하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교육현장에서 정치성을 제거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정치적 영역의 능력까지 의심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헌법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기계적인 차원에 머물게 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정치와 교육의 자연스러운 맞물림을 억제하는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차라리 교육 측면과 정치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맞물린 교육을 활용해 청소년들이 주체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정치 분야에서도 활용할 수 있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교사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앞 인터뷰에서 교사는 청소년들이 미성숙하고 영향을 쉽게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청소년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사고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주체라는 점을 교사가 인지해야 한다. 또한 교사가 청소년이 미성숙하다고 생각해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려고 한다 하더라도 결국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성을 띄고 있기에 교사의 의견이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될 수밖에 없다. 이에 교사는 청소년들에게 정치적 사안을 가르칠 때 교사의 강압이 느껴지지 않게 청소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이때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입장을 전혀 공개하지 않으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중립이 아닌, 청소년이 자신의 주체적 사고와 정치 의견을 표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게 정치적 사안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며 꾸준히 질문을 하는 역할을 지켜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교사도 청소년들을 위한 실질적 교육을 가르칠 수 있고, 학생들 또한 정치 분야에 대해 원하는 논의와 토론을 진행시킬 수 있다. 현재 교육은 정치적 중립성이란 개념의 허구성을 깨닫고 이를 무리하게 지키기보단 교육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지를 논의해야 한다.

  1. 교육기본법 제16  [본문으로]

정치하는 청소년을 위하여

 

펭로시

헌법재판소가 올해 2020년 4월 23일 재판관 6:3의 의견으로, 초중등학교의 교육공무원이 정치 단체의 결성에 관여하거나 이에 가입하는 행위를 금지한 국가공무원법과 초중등교육법이 헌법을 위반했다는 결정을 선고했다. 2014년 헌법재판소가 국가공무원법 제65조 제1항 중, “국가공무원법 제2조 제2항 제2호의 교육공무원 가운데 초중등교육법 제19조 제1항 교원은 그 밖의 정치단체 결성에 관여하거나 이에 가입할 수 없다.” 라는 조항을 합헌 결정한 것과는 확실히 달라진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2014년과 2020년에 걸쳐 헌법재판소가 태도를 변경한 근간에는 ‘교사의 정치적 중립’, 나아가 ‘공무원의 정치참여’에 대한 여론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009년 6월 1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1만 6172명이 ‘6월 민주 항쟁의 소중한 가치가 더 이상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제1차 시국 선언을 발표한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교사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공식적으로 혹은 비공식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일례로 올해 헌법재판소에서 국가공무원법 65조 1항 등이 위헌 결정되었지만, 공무원과 초중등 교원 등은 정당의 발기인이나 당원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는 정당법은 합헌 결정 [각주:1] 되었는데, 이에 한 쪽은 아직까지 교사의 완전한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지 못했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 쪽은 헌법재판소의 국가공무원법 65조 1항 등의 위헌 결정 그 자체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은 올해부터 실시되는 만 18세 선거권과 맞물려 그 논의가 더욱 과열되고 있는 추세이다. 교사와 학생의 정치 참여는 지금까지 학교 내에서의 ‘정치’를 배제해왔던 학교와 사회 입장에선 놀랍고도 당황스러운 일일 것이다. 필자는 <정치하는 청소년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이후 이어질 교사의 정치적 중립에 관한 인터뷰와 만 18세 선거권 논평을 보다 독자가 관심을 갖고 읽을 수 있도록 미국, 일본, 한국의 법제 비교를 토대로 ‘정치적 중립’에 관해 논의해보려고 한다.

 

우리나라 국가공무원법은 광복 후 일본공무원법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일본공무원법은 미국 해치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해치법(The Hatch Act)은 1938년 민주당이 고용촉진부(Work Progress Administration) 공무원을 중간선거(midterms) 때 동원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뉴멕시코를 대표하는 민주당 보수파 칼 해치 상원의원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강제하는 법안을 발의하여 FDR에서 1939년 조인된 것으로, 대통령이나 부통령처럼 명시적으로 정치적 역할을 하지 않는 연방정부 구성원들이 정치적 활동에 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각주:2] 이와 같이 엽관주의 [각주:3] 를 배제하려는 해치법의 의도는 일본공무원법에 고스란히 녹아들게 되었고, 일본공무원법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국가공무원법도 해치법의 기본 의도를 따르게 되었다. 이렇듯 한국, 미국, 일본의 국가공무원법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미국과 일본의 국가공무원법을 둘러싼 논의와 방향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정치사회가 현재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1) 교사의 정치적 중립과 그 방향

 

미국에서 공무원은 시민으로서 수정헌법 제1조에 규정된 ‘종교, 언론, 출판, 평화적 집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 제한은 고용인인 정부에 대해 피고용인으로서의 관계에 의해 규율된다. 따라서 교원의 표현은 형사 처분이 아닌 교육위원회에 의한 징계 처분으로 제한될 수 있다. 이때의 제한은 일반적으로 정부의 공공서비스 수행이라는 이익과 공무원의 표현의 자유의 이익을 비교형량하여 정부 이익이 더 클 때 정당화된다. (●●●) 1993년 개정 해치법에서는 제한되는 일부활동 [각주:4] 을 제외하고, 정치적 활동이나 선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있음을 규정하였다. (●●●) 미국에서 교원의 학교 안에서의 표현을 직접적으로 보장하기 시작한 판례는 Tinker v. Des Moines Independent Community School District(1969년)판결이다.

 

수정헌법 제1조의 권리는 학교라는 환경에서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적용되는 특성을 갖는다. 학생과 교사 모두의 언론과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는 교문을 들어서면서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표현에 대한 주의 금지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소수의 관점을 대했을 때의 불편함과 불쾌감 이상의 조건이 필요하다. 검은 완장 착용은 학교 운영을 방해하거나 다른 사람의 학업을 방해하지 않았다. [각주:5] [각주:6]


해당 판결은 정치적 의견을 나타내는 상징을 부착한 학생이 정학당한 사건에 대한 판결로, 미국 연방대법원은 학교 안이라고 해서 학생의 헌법상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표현을 제한할 때에는 불편함과 불쾌감 이상의 조건이 필요하며, 물리적으로 학교운영을 방해하거나 다른 사람의 권리와 충돌하는 경우 등이 그 조건에 해당한다. 또한 학교에서 표현의 자유는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적용됨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학교 안에서 교원의 정치적 표현은 시민의 헌법상 권리로 보장되며, 그에 대한 제한은 학생 교육이라는 공교육의 목적을 수행하는데 직접적으로 방해가 되는 경우에 한해서 가능하다. [각주:7]

 

 

[각주:8] ">
 [The Hatch Act-Permitted and Prohibited Activities for Most Federal Employees] [각주:9]

                 


위의 표는 개정 해치법의 허용과 금지조항의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이처럼 미국은 공무원이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여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금지하지만 개인의 정치적 표현에 대해서는 관대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한국은 헌법 제7조의 제1항,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와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에 의거하여 공무원의 직무에 초점을 맞춰 정치적 표현과 행위에 있어서 포괄적으로 규제한다. 홍정림(2015)는 이와 같은 차이가 미국은 시민의 권리로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한국은 교원의 표현의 자유가 헌법상 시민의 권리로 보장되기보다 교원의 지위에 있다는 이유로 제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공무원의 의무를 직무의 내•외를 불문하고 공무원이라는 신분을 보유하는 한 당연히 부담해야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교원의 표현에 대해 직무 내•외를 구분하여 제한의 범위를 달리 적용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각주:10]


물론 우리나라의 국가공무원법이 미국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이 둘의 명시적 표기가 유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직무행위 중에는 정치적 활동에 관여할 수 없다.’는 미국의 개정 해치법 내용은 우리나라에도 해당되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정치적 주제에 관해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맥락을 달리한다. 이와 같은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미국의 국가공무원법이 정치적 행동에 있어 공무원의 지위 남용에 경각심을 갖고 시민의 권리를 일부 제한하는 것이라면 한국의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이라는 직책의 중함을 인지하고 그 사회적 파급력을 우려하여 포괄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적 표현에 대해서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다. 홍정림(2015)이 제시한 세월호 관련 교사선언에 관해서도, 미국은 이를 인터넷 매체를 통해 각자의 의사를 표현한 개인적 의사표현이 집합적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보겠지만, 한국은 사회적 파급력을 고려하여 더 엄중히 사안을 고려할 것이다. [각주:11]

위에서도 강조했듯이 우리나라의 국가공무원법은 ‘포괄적’으로 제한하기 때문에 교사의 정치적 표현이 과도하게 제한되는 측면이 있다. 필자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교사와 정치적 논의를 할 수 없었다. 교사와 정치적 논의를 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고’, ‘예외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교사는 학생에게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말할 수 없었고 학생 또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없었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교사가 학교 안에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시 학생들의 정치적 성향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그러나 과연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것만으로 학생들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필자가 우려하는 점은 학교에서 ‘정치’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마치 이상하고 예외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면서 학생들을 정치와 유리시키는 것이다.

서울 영등포여고 교사인 조영선(2020)은 ‘교사가 무조건 찍으라고 해서 투표하는 18세가 얼마나 있을까? 학생들은 교사뿐 아니라 친구 등 누구의 말도 참고할 권리가 있다.’ [각주:12] 고 밝히며 학생들은 교사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존재가 아님을 강조한다. 아주 어린 아이도 자신의 호오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때 교사의 발언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학생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또한 ‘교사의 선거 개입’이 걱정된다면, 오히려 학생들에게 교사 의견을 눈앞에서 되받아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각주:13]
교사의 정치적 중립을 옹호하는 측면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교사의 정치적 표현을 보장하는 것이 학생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강요하는 것으로 이행된다면 그것은 큰 문제일 테지만, 조영선(2020)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사의 발언에 비판할 수 있는 학교 환경이 조성된다면 충분히 해결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결국 교사의 정치적 중립만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민주시민교육이 달성되기 어렵고 교사의 정치적 중립을 넘어서 교실의 정치화까지 실현되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2) 교실의 정치화를 통한 민주시민교육

 

우리는 앞서 미국의 국가공무원법과 한국의 국가공무원법을 비교하여 ‘교사의 정치적 중립’에 관해 숙고해보았다. 그리고 민주시민교육을 위해선 교사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교실의 정치화까지 바라보아야 함을 파악했다. 필자는 교실의 정치화를 능동적으로 주도한 일본의 사례를 소개하기에 앞서, 미국 해치법의 영향을 받은 일본 국가공무원법에 관해 일본 내에서 어떠한 비평이 있었는지 제시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일본의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앞으로 한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국가공무원법은 미국의 점령정치 때, GHQ [각주:14] 의 압력으로 법령이 생성되었다. GHQ의 압력에 인사원은 저항을 통해 GHQ의 최초 요구에서 한 걸음 물러나게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현재의 현행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GHQ의 압력으로 인해 제정된 법은 헌법 21조에 따른 표현의 자유 보장의 중대한 위반과 본래 법률에 규정되어야 할 처벌을 행정입법인 인사원 규칙에 맡긴다고 하는 헌법 31조의 위반을 더불어 공무원의 인권 제한을 법률이 아닌 인사원 규칙에 포괄적으로 맡긴다는 헌법 31조의 위반(백지위임)의 이중 삼중의 위헌 소지가 크다 [각주:15]
고 센슈대학교수인 하레야마 카즈호(2013)는 역설한다. 즉, 미국에서 일본의 국가공무원법에 영향을 끼친 해치법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1993년 개정 해치법을 시행한 것처럼 일본에서도 국가공무원법에 대해 꾸준히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에 관하여 일본 법률은 <행정의 중립적 운영 확보와 이와 관련한 국민의 신뢰 유지>를 명시하여 정치적 행위금지의 목적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직결시켜 그 결과로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논리로 되어있다. 즉, 공무원의 정치활동 자유를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이 상실되어 <행정의 중립적 운영 확보와 이와 관련한 국민의 신뢰 유지>가 근본부터 흔들린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그 자체의 유지를 정치적 행위의 금지 목적으로 하는 한 금지되는 정치적 행위는 가능한 한 광범위한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된다. [각주:16]


하레야마 카즈호(2013)는 표현의 자유로서 보장되어야 할 정치적 행위와는 별개로 법에 의해 금지•제한되어야할 공무원의 정치적 행위에 있어선 어떤 부분을 생각할 수 있는지, 또 그 행위는 어떤 이유에 근거하여 어느 정도의 제약을 받아야하는 것인지가 남겨진 문제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 공무원의 정치적 활동이 금지•제한되어야 할 행위는, <행정의 중립적 운영의 확보>를 실질적으로 해친다고 인정되는 행위, 구체적으로 직무상의 지위나 권한을 이용하여 행하는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에 대해선 징계처분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형벌의 대상이 되는 것(가령, 국가공무원법•지방공무원법상의 제한은 아니지만, 공무원의 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에 대한 처벌을 정한 공직선거법 239조의 2 제2항) 등을 지적한다. 최종적으로 그는 금지되고 제한되어야 할 정치적 행위의 유형과 이에 대한 제약의 내용 및 정도를 구체적으로 채워 나가는 것이 과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히며, 공무원이 시민으로서 행하는 정치적 행위는 표현의 자유로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고 마무리한다. [각주:17]

이처럼 일본 내에서 국가공무원법에 의거한 정치적 중립에 대해 비판적 의견이 제시되는 가운데, 2015년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에서 우려하는 교실의 정치화를 실현한다. 

 

이번 법 개정으로 고등학생도 유권자 자격을 갖게 됩니다. 실제 선거와 동일한 시기에 실제와 비슷한 투표용지를 사용해 투표해봅시다. 대표자를 뽑는 활동을 통해, 민주 정치가 우리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위의 내용은 2015년 일본 정부가 만들어 전국 고등학교에 보낸 선거교육 부교재에 나온 ‘모의선거’ 관련 내용이다. [각주:18]


우리나라에 입장에서 바라보면, 학교에서 ‘선거교육’을 한다는 것은 그 단어 자체로 생소할 것이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 ‘만 18세 선거권’, 이 모두를 통괄하는 하나의 주제는 바로 ‘교실의 정치화’와 관련된 것인데, 학교에서 ‘선거교육’을 하는 것은 정치를 교실 속으로 끌고 들어오겠다는 말과 다름없으며, 이는 교실의 정치화를 실현하겠다는 입장으로 비춰질 수 있다. 교실의 정치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교사의 특정 정치적 사상이 학생들에게 주입될 수 있고 나아가 교실 정치장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들에게 정치화된 교실은 하나의 싸움터이며 이념의 대립으로 교육의 원활한 진행에 방해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고선규 와세다 대학 시스템경쟁연구소 연구위원(53, 전 도호쿠대 교수)은 현시대의 학생들은 가치판단이 명확하고 가치 기준 또한 충분히 형성되어 있으며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이 어른들보다 낫기 때문에 교사의 사상 주입에 휘둘리는 사태는 거의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강조한다. [각주:19]

 

[일본 정부가 만든 선거교육 교재 표지] “우리가 열어가는 일본의 미래: 유권자로서 필요한 능력을 기르기 위하여”


일본에서 진행하고 있는 모의선거는 현실의 정치를 반영한다. 실제 정책과 정당을 모의선거에서 활용하여 선거 토론회를 진행한다. 학생들은 선거 포스터를 만들고 정견발표도 하며 정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한다. 심지어 오이타현 교육청 안내문을 보면 정치인을 부를 수도 있다. [각주:20]
일본에서 모의선거를 진행하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교실의 정치화를 우려하는 것처럼 편파적인 정치적 사고를 가진 학생들을 양성하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계기는 학생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주권자로서의 인식을 공고히 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고자 함이다.

서울휘봉초등학교 수석교사인 설진성(2019)은 교사가 정치적 기본권을 가진다면 민주시민 육성이라는 자신의 본분을 보다 충실히 이행할 수 있다고 본다. 정치문화 안에서 이방인처럼 그 존재가 사라진 교사는 민주시민교육이 요구하는 사회민감성과 민주적 의사결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각주:21]
교사는 시의적인 정치적 논쟁들을 수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학생들이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상호적 논의가 가능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러한 환경이 조성되면 학생은 민주시민으로서 정치참여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양한 정치적 의견을 접하면서 사고의 폭을 넓혀 정치 사안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함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교사와 학생의 자유로운 정치적 발언을 보장한 교실의 정치화가 실현될 때, 우리는 진정한 민주시민교육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3) 마치며

 

교사의 정치적 중립은 가능한가? 나아가, 교실의 정치적 중립은 가능한가? 정영태(2010)는 정치적 자유권을 제한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가에 대한 원초적인 의문을 제시하며, 조국(2012)은 오히려 교원들의 정치적 성향을 허용하여 능동적인 시민성을 발휘하게 할 때, 비로소 그때 교육의 정치적 중립도 유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노순일(2013)은 ‘학생 미성숙론’을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학생의 존엄과 가치를 부정하는 순종적인 신민을 양성하는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역설했다. [각주:22]
교실 안에서 교사와 학생의 정치적 표현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해야 할지를 차치하고 교실이, 학교가 정치와 유리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학생 미성숙론’과 ‘학생의 정치도구화’를 내세워 교실의 정치화를 우려할 수 있지만 사실 완전한 ‘정치적 중립’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정영태(2010)가 정치적 자유권을 제한하는 데 의문을 표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일례로. 한국사 시간에 다룬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학생이 숙고하고 ‘마리몬드’ 회사를 알게 되어 위안부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SNS에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고 운동하는 사례를 들 수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학생의 정치도구화가 발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교실의 정치화가 교실을 각축장으로 만들 것이라는 우려에 필자는 미지근한 입장을 취한다. 이는 곧 정치가 아무 의미 없는 싸움이라고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가 교육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개인의 지적수준을 높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민주시민을 양성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정치가 더러운 것이고 서로 헐뜯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국민을 속이는 집단이 주도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더라도 결국 사회에 살고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정치적이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 양성하고 싶은 국민은 사회의 부조리에 순응하는 국민이 아닌, 민주적인 토론을 바탕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하려하는 국민일 것이다. 필자는 오히려 학생들과 교사에게 어떠한 정치적 표현도 허용하지 않는 것은 결국 정치는 더러운 것이니 가까이 가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국민으로서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줄 알아야 하며 정치를 더러운 것이 아닌 민주주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우리 삶 그 자체로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붕당 정치의 폐해처럼 자신의 집단적 이익만을 주장하는 상황은 오히려 사람들이 다양한 정치적 발언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매체에서 주어지는 자료만 받아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학교에서 정당연설회를 개최해보자는 한 교사의 발언 [각주:23] 은 눈여겨볼만 하다.

 


<참고자료>

1. 서강영, 『SNS를 통한 교사의 정치참활동에 대한 탐색적 연구』, 한국교원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9.

2. 설진성, 『민주시민교육과 교사의 태도』, 「교과교육235호」,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 2019;
http://webzine-serii.re.kr/민주시민교육과-교사의-태도/

3. 임수정 기자, <헌법재판소 “교원 정치단체 결성, 가입 금지 조항은 위헌”>, 2020-04-23;
https://www.yna.co.kr/view/AKR20200423131600004?input=1195m

4. 윤근혁 기자, <일본 문부성도 하는 ‘학생 모의선거’ 반대? 어이없다“>, 2020-01-13.;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252966

5. 조영선, <교실의 정치화가 걱정되신다고요?>, 2020-03-0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371

6. 홍정림, 『교원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과 그 한계-미국과 한국의 법제 비교 연구-』, 한국교원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5.

7. Jaime Fuller, , 2014-07-18;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the-fix/wp/2014/07/17/do-you-work-in-government-have-you-violated-the-hatch-act-lets-investigate/

8. [The Hatch Act_Permitted and Prohibited Activities for Most Federal Employees];
https://osc.gov/Documents/Outreach%20and%20Training/Posters/The%20Hatch%20Act%20and%20Most%20Federal%20Employees%20Poster.pdf

9.晴山一穂,『公務員の政治的行為の制限―国公法違反事件最高裁二判決の考察―』,自治総研通巻416号, 2013.

 

 

  1. 임수정 기자, <헌법재판소 “교원 정치단체 결성, 가입 금지 조항은 위헌”>, 2020-04-23; https://www.yna.co.kr/view/AKR20200423131600004?input=1195m [본문으로]
  2. Jaime Fuller, , 2014-07-18;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the-fix/wp/2014/07/17/do-you-work-in-government-have-you-violated-the-hatch-act-lets-investigate/ [본문으로]
  3.  [네이버 국어사전] 선거에 의하여 정권을 잡은 사람이나 정당이 선거에서 공을 세운 사람을 관직에 임명하는 정치적 방침; https://ko.dict.naver.com/#/entry/koko/d2025e7f0a694b809513fc010c25e423 [본문으로]
  4. ① 선거에 개입할 목적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자신의 권한 또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② 정치현금을 권유 또는 수령하는 것, ③ 정당을 대표하여 공직후보에 입후보하는 것 등. [본문으로]
  5. Tinker v. Des Moines Independent Community School District, 393 U.S, 503. [본문으로]
  6. 홍정림, 『교원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과 그 한계-미국과 한국의 법제 비교 연구-』, 한국교원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5, pp.97-104. [본문으로]
  7. Loc.cit. [본문으로]
  8. &amp;nbsp;더 자세한 정보는 다음 문서를 참조.&amp;nbsp;;https://osc.gov/Documents/Outreach%20and%20Training/Posters/The%20Hatch%20Act%20and%20Most%20Federal%20Employees%20Poster.pdf&amp;nbsp; [본문으로]
  9.  더 자세한 정보는 다음 문서를 참조. ;https://osc.gov/Documents/Outreach%20and%20Training/Posters/The%20Hatch%20Act%20and%20Most%20Federal%20Employees%20Poster.pdf  [본문으로]
  10. 홍정림, ibid., p.109. [본문으로]
  11.  홍정림, idid., p.110. [본문으로]
  12. 조영선, <교실의 정치화가 걱정되신다고요?>, 2020-03-0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371 [본문으로]
  13. Loc.cit. [본문으로]
  14.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 [본문으로]
  15. 晴山一穂,『公務員の政治的行為の制限―国公法違反事件最高裁二判決の考察―』,自治総研通巻416号, 2013, p.4. [본문으로]
  16. ibid., pp.7-8. [본문으로]
  17. ibid., pp.23-24. [본문으로]
  18. 윤근혁 기자, <일본 문부성도 하는 ‘학생 모의선거’ 반대? 어이없다“>, 2020-01-13.;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252966 [본문으로]
  19. 위 기사. [본문으로]
  20. 위 기사. [본문으로]
  21. 설진성, 『민주시민교육과 교사의 태도』, 「교과교육235호」,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 2019; http://webzine-serii.re.kr/민주시민교육과-교사의-태도/ [본문으로]
  22. 서강영, 『SNS를 통한 교사의 정치참활동에 대한 탐색적 연구』, 한국교원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9, pp.20-21. [본문으로]
  23. 조영선, 위 기사. [본문으로]

작년 말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선거연령이 만 18세로 하향되었습니다. 18세 선거권 도입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선거권을 갖기에 청소년은 미성숙하다.', '정치교육을 통하여 청소년의 사고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 정치적 중립성이 지켜져야 한다.' 등 청소년의 정치적 주체성과 관련된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호에서 이러한 주장들이 청소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의 정치할 권리가 얼마나 보장되고 있는지 이야기하려 합니다.

 

코로나19 교육 상황에서 교사와 학생 그 사이 교생의 입장은

ALee

 

 

#들어가며 코로나19와 학교

 

@ 사범대의 꽃, 교생실습

학교현장실습, 교생 실습 등으로 불리는 교육 실습은 사범대생들이 전공과목인 교과 지식과 교직 과정에서 배운 교육이론 및 교수학습방법을 현장교육에 직접 적용하여 평가해보고, 교과 수업 및 학급 경영에 관한 실무적인 경험을 통하여 교사의 역할을 익히며, 교직에 대한 적성과 능력을 검증해 봄으로써 교육에 대한 열망과 자아정체감을 갖게 하여, 교육 이념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는 자질과 인격을 함양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교생 실습은 4주간의 중, 고등학교 실습과 1주간의 초등학교 실습으로 이루어지며, 사범대생들은 그동안 수업을 참관하고 진행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과 직접 만나고 교감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쌓아나간다. 그런 점에서 교생 실습은 사범대의 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 코로나19와 학교

사상 초유의 판데믹, 코로나19로 인해 사회는 교육을 포함한 다방면에서 지금까지는 겪지 못했던 큰 변화와 마주하게 되었다. 교육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는 지금까지의 우리가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의 배움을 열었다(開學).

그러한 변화의 중심에 서 있는 교사와 학생들은 교사들은 교사 나름대로, 학생들은 학생 나름대로의 혼란에 빠져있었다. 교사는 지금까지의 업무와 생판 다른 업무와 지금까지는 상상도 해보지 못한 온라인 개학을 위한 준비에 바빴고, 하루하루 바뀌는 교육 정책은 교사들에게 전달되기도 전에 인터넷 뉴스를 통해 일반 대중에게 보도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빠르고 급진적인 변화 속에서 현직 교사들 사이에서는 X버 공문이라는 은어까지 생겼다. 또한, 본격적인 온라인 개학이 시작되며 교사들은 교재 연구와 수업을 비롯한 기존의 업무에서 벗어난 새로운 형태의 업무와 맞닥뜨리게 되었다.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학교 현장에 대해 많은 이들은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교육 체계에 많은 관심과 우려를 표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교사로서의 혼란과 학생으로서의 혼란 사이 그 어딘가에서 불투명한 일정을 붙잡고 불안에 떨던 이들이 있었다. 바로 교생이다.

 

 

#코로나19와 교생

 

1. 학교현장실습 이전

@ 불투명한 실습 일정

몇 차례에 걸친 개학 연기로 불안한 것은 교사와 학생, 학부모만이 아니었다. 온라인 수업이 시작됨에 따라, 학교 현장에서 직접 실습을 해야 하는 교생들의 불안감은 갈수록 높아졌다. 특히 나를 비롯한 많은 교생 실습생들은 교생 실습을 위해 동아리, 학회, 인턴십, 교환 학생 등을 포기하거나 연기한 경우가 많았고, 교생을 나가지 못하는 것은 곧 졸업하지 못한다는 말과 같았으므로, ‘만일 이번 학기에 교생 실습을 나가지 못하면 어쩌지?’라는 불안감과 걱정이 가득했다. 또한, 교생 실습생들은 교생 학기를 준비하며 5월 일정은 통째로 비워두고, 학회, 동아리를 비롯한 기타 일정은 6월부터 준비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교생 실습 일정이 미뤄지는 것 역시 걱정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교생 실습생들의 이런 불안감을 모른척하듯, 코로나19는 끊임없이 신규 확진자를 발생시켰고 결국 2020317, 교육부는 전국 모든 학교의 개학을 2주간 추가 연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326, 나는 과 조교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공지를 받았다.

 

그러나 그 후에도 코로나19의 여파는 가실 생각이 없었다. 결국, 331, 교육부는 처음으로 초중고특 신학기 온라인 개학 실시라는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바로 다음 날인 41, 나는 과 학생회 공지방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전달받았다.

 

 

지금까지 4주간의 현장실습이 당연했던 교생 실습은 이제 2주로 조정되었고, 5월 한 달간 진행되었던 교생 실습은 5월 말부터 6월 초에 걸쳐 진행하게 되었다는 것은 내게 새로운 충격으로 다가왔다. 또한, 일주일간 진행되던 초등교육실습은 올해에 한해 실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약간 아쉬웠다. (사실 초등교육실습이 어떤지 애초에 해볼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크게 아쉬운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간접실습이었다. 교생 실습으로 받을 수 있는 2학점 중에 무려 1학점이나 간접 실습으로 돌렸으면서, 간접 실습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무엇이 간접 실습인지 전혀 알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학생들이 온라인 개학을 하면 온라인 개학 수업을 참관하는 것인지, 아니면 따로 교수학습과정안과 같은 과제를 준비해서 제출해야 하는지 전혀 알 방도가 없었고, 모든 설명은 부설학교와 협의하여 진행이 전부였다. 그런데 뭐,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부설학교(사대부중, 사대부고) 중 어느 학교로 가게 될지도 모르던 상태였기 때문에 답답함은 뒤로 하고 일단은 그냥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러나 약 3주간 교생 관련 소식은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리고 코로나19는 전혀 종식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나의 교생을 과연 나갈 수 있을지하는 불안감과 이번 학기에 교생을 꼭 하고 졸업을 하고 싶다라는 열망은 점점 커져만 갔다. 그러던 중 422, 갑자기 과 조교님에 의해 교생 실습 예정자들을 대상으로 한 카카오톡 톡방이 생겼다. 조교님께서는 톡방을 만들자마자, ‘2020학년도 교육실습 실시계획이라는 파일을 올려주셨다. 나는 , 교생 실습 어쨌거나 갈 수 있는 건가(두근)’하는 마음으로 재빨리 열어보았고,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의 그 어떤 공지보다 구체적인 안내들을 받아볼 수 있었다.

 

<2020 교육실습 실시계획> 중 일부

지금까지의 모든 공지 중 가장 구체적이었다는 점에서 해당 서류는 내게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었지만, 서류의 내용 중 간접실습(15시간) 운영 계획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일단, 사전에 전혀 안내되지 않았던 실습 학생 대상 사전 교육이 있었다. 사전 교육은 실습생 필참, 참석여부 근무일반성적에 반영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사전 교육 날짜는 5/18일이었는데, 해당 공지를 처음 전달받은 날짜가 422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갑자기 필수 참석 일정이 하나 새롭게 생겨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당연히 급변하는 교생 일정에 나는 5월 일정을 풀로 비워놓았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지만, 얼마나 교생 실습 일정이 급하게 변화하며 굴러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지점이었다.

그리고 공지를 받은 당일, 조교님께서 교생 학교 배정은 ‘(카카오톡 톡방에) 투표 올리면 희망학교를 선택하고, 배정 인원보다 많은 경우는 사다리를 타는 것으로 정해진다고 말씀해주셨고, 그다음 날 오전 11시를 살짝 넘은 시각, 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로 교생 실습을 나가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518일까지 궁금증만 한가득 안고 사전 교육 때까지 기다리는 일밖에 없었다.

그리고 교생 사전 교육이 1주일도 남지 않았던 514, 교생 사전 교육이 갑자기 18일에서 20일로 연기되었다는 공지를 받았다. (솔직히 이쯤 되니 일정이 갑자기 생기고 미뤄지고 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그래도 근무일반성적에 반영되는 필수 참여 일정을 4일 전에 미루는 학교의 모습을 보며, 이번 교생 일정 참 어지간히 정신없다는 생각을 했다.

같은 날인 514, eTL ‘학교현장실습(001)’에는 사전 교육 관련 영상들이 올라와 있었다. 기존에 받았던 ‘2020학년도 교육실습 실시계획에 나와 있던 간접실습 관련 영상인 것 같아서 일단 시청을 했다. 그리고 20일 사전 교육 바로 전날인 19, 아래와 같은 공지가 올라왔다.

 

<ETL  캡처 >  이대로 괜찮은 걸까 교생 실습

어쩐지 학습진도현황에 들어가도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더랬다. 현장실습은 아직 시작조차 안 했는데, 저 공지사항을 읽으며 선생님께서 당황스러워하시는 모습이 화면 건너로 얼핏 비쳐 보이는 것만 같았다. 어쨌든 나는 사전교육 영상을 모두 이수하고, 첨부 자료까지 다운 받아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별 상관은 없었다. 물론 그래도 혹시 몰라서 저 공지를 읽고 괜히 첨부 자료를 한 번 더 다운 받아보기는 했다. 옛말에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으니까.

그리고 아무래도 교생 실습 학교를 처음으로 방문하고, 다른 교생들도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다 보니 다음과 같은 공지도 함께 올라왔다.

 

<ETL캡처> 이런 공지

 

영상은 학교에서 학생들이 생활하면서 코로나19 방역 수칙을 준수하기 위해 해야 하는 행동을 안내하고 있었다. 마스크 벗지 말기, 급식 때 얘기하며 먹지 않기 등? 그런데 한 가지 인상 깊었던 점은 영상 촬영부터 편집까지 모두 학교 선생님들이 하셨다는 점이었다. 가뜩이나 학교 일로 정신없으셨을 텐데 그 와중에도 학생들을 위해 직접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며 영상을 찍고 편집하셨을 선생님들의 노력이 정말 대단해 보였고,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심지어 곳곳에 학생들의 관심을 환기하고 재미를 가미하기 위한 선생님들의 드립을 향한 열망이 보여서 보는 재미도 꽤 쏠쏠했다. (사실 캡처해서 보여주고 싶지만, 일단은 사대부고 선생님들의 초상권 보호를 위해 참는다.)

 

@ 학교현장실습 사전 교육(5/20)

 

<사대부고 전경> 멋진 풍경에는 하늘(과 사대부고 외관)이 한몫했다 .

 

사전 교육을 받으러 처음으로 서울대학교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를 방문했다. 그날은 유난히 날씨가 좋았는데, 멀리서 보아도 나는 시설이 좋은 학교다!’를 외치고 있는 사대부고의 외관과 합쳐지니 정말 멋진 풍경이 되었다. 사실 태어나서 사대부고만큼 시설이 좋은 학교를 본 적이 없었기에, 교생 실습에 대한 기대가 수직으로 상승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으로 현장실습기간이 절반으로 줄어든 아쉬움이 진하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사대부고 정문> 정문도 멋있다 … .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만난 친절한 안내판

학교 감상 후 사전 교육을 받기 위해 학교 내부로 들어갔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날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선생님도 학생도 아닌 열화상 카메라였다. 다행히 열은 나지 않아 무사히 첫 번째 관문을 지나 선농홀로 들어가려는데, 선농홀로 들어가기 전에는 손 세정제라는 두 번째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 세정제로 손을 닦으며 선농홀로 들어가니, 이번에는 교생 실습생들이 한 칸씩 건너 앉을 수 있도록 각자의 자리에 실습생 번호_실습생 과목_실습생 이름으로 된 스티커가 붙여져 있었다. 이렇게 철저한 준비를 통해 학교 선생님들이 코로나19 방역에 정말 세심하게 신경 쓰고 계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다.

본격적인 사전 교육이 시작되자, 연구지원부장 선생님께서 나오셔서 간단한 인사와 함께 학교실무전체교육을 해주셨는데, 생각보다 교생이 할 일이 정말 많다는 사실과 코로나19로 인해 과제 방식 등 학교의 많은 부분이 변화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사전 교육을 듣다 보니 왠지 교생 과제에 관한 이야기만 잔뜩 듣고, 정작 나를 비롯한 다른 교생들이 가장 궁금해 할 만 한 학생과 만나는 일(만남이라고 하기도 민망하고 접촉에 조금 더 가까울 것 같다)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순간 선생님께서 참관 및 교과수업/학급경영 실습 가이드라인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셨다.

 

<교과수업 관련 안내> ‘ 학생 미등교 ’,  즉 학생이 없다 .  교생은 있는데 학생은 없는 기현상
<학급경영 관련 안내> 학생들과 체육대회는커녕 온라인으로라도 만나면 다행인 수준이다.

쉽게 말해, 사전 교육을 실시한 날인 520일부터는 고3 학생들은 매일 등교하지만, 1, 2 학생들은 정부 지침으로 인해 격주 등교를 하게 되어 실습 첫째 주까지는 고1, 2 학생들은 등교하지 않고, 실습 둘째 주는 고2가 등교하고, 실습 셋째 주는 고2가 등교하지 않는 대신 고1이 등교하는 매커니즘인 것이다. 그런데 교생이 고3을 맡을 수는 없는 일이니, 2를 맡은 교생들은 현장실습 2주 중 1, 그리고 고1을 맡은 교생들은 현장실습 2주 중 단 한 주도 학생들을 직접 만날 수 없음을 의미했다. 한 마디로 학교에 학생은 없는데 교생은 있는 그런 이상한 모양새가 될 것이라는 안내였다.

다음으로는 각 교과별로 이동하여 학과/교과 차원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내가 소속된 교과는 2층의 카페에서 교육을 진행했다. 본관 2층에 위치한 교내 카페는 시설이 굉장히 좋았는데, 적당히 고급스러운 의자와 탁자, 벽에 걸려있는 알 수 없는 그림들, 웜톤으로 공간을 은은하게 비춰주는 조명까지 마치 유명 카페 체인점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카페에 들어오자마자 학교라고는 믿기 어려운 공간에 감탄하고 있는 교생들을 보신 듯, 선생님께서도 해당 공간에 대해 설명해주셨다. 해당 공간은 학교가 학생들을 위해 XX’같은 느낌의 카페처럼 만들려고 2월에 리모델링을 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학생들이 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코로나19 때문에 학교가 야심차게 준비한 최신 시설을 학교의 주인인 학생들보다 학교에 2주간 머물다 가는 교생들이 먼저 맛보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얼굴도 모르는 학생들에게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쨌든 교과 차원의 교육도 친절한 선생님의 설명과 함께 무사히 마무리되었고, 이렇게 520일의 현장 사전 교육이 마무리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실제 학교에서의 현장실습이었다.

 

[타임라인]

2020.03.03. 중등 실습: 5/6~6/1, 초등 실습: 4/27~29, 6/3~6/5

2020.03.26. ‘이번학기 교생은 5월 말로 연기 됐고, 정확한 일정은 추후 공지 예정

2020.04.01. 직접 실습: 5/25~6/5, 간접 실습: 부설학교와 협의하여 진행

2020.04.22. ‘첨부된 교생 계획 확인하세요’ - 5/18 사전 교육 예정

2020.04.23. 실습할 학교 확정(윤리과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사다리 탔어요ㅎ)

2020.05.14. 5/18 사전 교육이 5/20으로 연기(코로나19)

2020.05.20. 부설학교에서 현장 사전 교육 진행

 

2. 학교현장실습과 그 이후

 

@현장실습 첫날(5/25)

525일 학교현장실습 첫 출근 날. 나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학교에서 제공하는 교생 셔틀을 이용하기 위해 오전 615분쯤 낙성대 입구 CU 앞에 도착했다. CU 앞에는 나 말고도 다른 교생들이 핸드폰을 보거나, CU 앞 테이블에 앉아 셔틀을 기다리고 있었다. 교생을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했다. 꼭두새벽부터 정장이나 단정한 옷을 차려입고 파란 덴탈 마스크를 쓰고 있는 사람. 물론 나도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윽고 교생 셔틀이 오자, 차례차례 버스에 탑승했다. 버스 안의 모든 사람이 마스크를 끼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아는 사람 같은데도 인사하기가 뭔가 꺼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실 이른 시간이라 비몽사몽 해서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한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한강도 건너고 서울 곳곳을 지나자 어느덧 사대부고 앞에 도착했다. 원래는 실습생실이 있는 구 본관으로 출근했어야 하나, 출근 첫날 1교시에는 교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 학교 전체 실무 연수가 있어 본관으로 바로 들어갔다. 20일 사전교육에서 뵈었던 연구부장 선생님께서 현장실습 기간의 과제와 식사 장소, 그리고 실습생실 위치 등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이때 식사는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안 쓰는 교실을 활용하여 학생들과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라 하셨다. 또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자리는 소위 말하는 시험 대형으로 마련될 예정이며, 식사 중 대화는 절대 금지라고 하셨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인생의 소소한 낙인 나는 급식을 먹으며 친구들과 이야기했던 추억이 떠올랐지만, 이 코로나19 시대의 학생들은 그러한 재미를 충분히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 조금 안타까웠다.

연수가 끝난 후, 각자 실습생실로 이동하여 자기 자리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실습생실은 구 본관의 안 쓰는 교실을 활용하여, 각 실습생들이 책상 하나 이상의 간격을 두고 띄어 앉을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었다. 실습생실 앞 편에는 손 소독제, 희석 락스 등이 준비되어 있었으며, 책상 위에는 꽤 넓은 간격을 두고 두루마리 휴지가 올려져있었다. 실습생들은 두루마리 휴지가 올려진 자리에 가서 앉으면 되었다. 교생들은 혹시 모를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예방을 위해 자기 자리에 짐을 풀기에 앞서, 희석 락스를 이용하여 각자의 자리를 닦았다. 나 역시 내 자리에 올려져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뜯어 희석 락스를 묻혀 내 자리의 책상과 의자를 구석구석 꼼꼼히 닦았다.

 

<급식표> 가장 설레는 시간

실습생실 이동 및 정리까지 끝난 후에는 점심 급식을 먹었다. 교생들의 점심 급식은 학생들이 아직 등교하지 않은 1학년 교실에서 이루어졌다. 작년과 같았으면 식당에서 학생들과 함께 점심 급식을 먹었겠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밥을 먹는 순간마저도 학생들과 만날 일이 없었다. 심지어 학생들이 급식을 먹는 것도 2, 교생들이 급식을 먹는 것도 2층이었는데, 2층에서 학생들과 마주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교생들은 중앙 계단을 통해 내려왔다가 다른 쪽 계단으로 다시 올라가 배식을 받아야 했다. 정말 불편했다.

급식을 받기 위해 줄을 설 때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사실상 불가능하여 대화를 최소화해야 했다. (하지만 대부분 그다지 잘 지켜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식기를 집기 전에 반드시 손 소독제로 손을 먼저 닦을 수 있도록 식기 앞에 키 큰 책상과 손 소독제가 놓여 있었다. 그렇게 배식을 받고 나서는 학교 선생님의 안내를 받아 시험 대형으로 책상이 놓여 있는 1학년 교실에 들어가 빈자리에 앉아 밥을 먹었다. 서로 떨어져 앉아 앞만 보고 밥을 먹으니 화기애애한 대화 소리가 들릴 리는 만무했고, 식기 부딪히는 소리와 씹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시험 대형으로 놓인 책상에서 그렇게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니 괜히 시험 보는 분위기 속에서 밥을 먹는 기분도 들었다.

7교시에는 학급경영 협의회에 참가하기 위해 각 교생의 담당 학급으로 이동했다. 교실에 도착하니 다양한 교과에서 온 교생들과 내가 담당하는 2학년 7반의 담임 선생님이 계셨다. 도착하자마자 선생님께서는 ‘2학년 7반 학교현장실습생 지도 자료를 나누어주셨고, 학급에 대한 간단한 설명과 앞으로의 일정에 관해 설명해주셨다.

한편, 학급 교생이 학급 학생들을 만날 기회는 사실상 0에 수렴했다. 현장실습 1주차에는 물론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으니 그렇다고 쳐도, 학생들이 등교하는 2주차에도 교생이 할 수 있는 것은 아침 조례 참관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마저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3명씩 나누어 참관에 들어갔다. 아침 조례 및 종례 진행, 학생 상담, 학급 경영 등은 결코 경험해볼 수 없는 일정이었다. 학급의 학생들과 만나고, 소통하고, 함께 유대감을 쌓을 수 있는 모든 기회가 코로나19로 인해 모두 사라진 것 같아서 매우 아쉬웠다.

한편, 학생들이 등교하지 않는 현장실습 1주차에는 간접실습 1주차에 과제로 제출했던 학급지도자료(3~5분 가량의 영상)를 학생들이 있는 카톡방에 업로드함으로써 아침 조회를 대체한다고 하셨다. 학급 학생들과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 카톡방을 통해 영상이 공유되는 것이라는 사실이 현장실습에 참여하기 이전에는 상상해보지 못했던 방식이라 조금 당혹스러웠다. 또한, 오프라인이 아닌 온라인 공간에서 라는 사람을 처음 만나게 되는 학생들에게 자기소개는커녕 다짜고짜 교육적인 내용의 영상을 전달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도 들었다. 해당 과제는 사전에 ‘EBS 다큐멘터리를 보고 학생들에게 전달할만한 교육적 내용을 자율 양식으로 만드는 것이었는데, 이미 제출한 해당 과제가 실제 학생들에게 바로 전달된다는 사실은 안내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미리 알았다면 단지 다큐멘터리의 내용뿐만 아니라 학생들과의 첫 만남이므로 간단한 자기소개와 전반적으로 학생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 등을 종합적으로 구성하여 더 좋은 자료를 만들었을 수 있었으리라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학급 지도 선생님께서는 현재 담임 선생님으로서 간단한 학급에 대한 소개와 자신이 학생들을 어떻게 관리하고 있는지도 설명해주셨다. 먼저 선생님께서 학급 구성원의 특징을 설명해주시면서 저도 아직 아이들을 직접 만나본 것은 아니고, EBS 영상 잘 봤는지 확인 전화로만 만나봤어요라고 말을 덧붙이셨는데, 얼굴도 보지 못한 학생들로 이루어진 학급의 특징을 설명해주시는 이 상황이 뭔가 아이러니했다. 그렇지만 현재 코로나-19로 온라인 수업이 장기화되며 아직 학생들을 직접 만나지 못한 상황에서, 선생님께서 온라인 너머로 정말 최선을 다해 애정을 가지고 학생들을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특히 온라인으로만 소통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학생들 한명 한명이 낙오되지 않도록 관리하고, 매일매일 전화하며 어떻게든 모든 학생을 이끌어 가려고 하시는 모습은 웬만한 사명감 없으면 쉬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지금 학급 지도 선생님의 자리였다면 온라인을 통해 학생들 한 명 한 명 챙겨가며 함께 나아가려고 노력할 수 있었을까. 그만큼 학급 지도 선생님이 매우 존경스러웠고, 비록 과거보다 기회가 많이 줄었지만 주어진 기회들을 최대한 활용해서 학급경영, 통솔력, 학생들에 대한 애정 등을 최대한 많이 배워가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쨌든 이렇게 새로운 환경의 학교에서의 교생 첫 출근 날이 저물었다.

 

@첫째 주(5/26~5/29)

526일부터 학교 안으로 들어갈 때는 정문이 아닌 쪽문 쪽으로 들어가 실습생실이 있는 구 본관으로 이동했다. 구 본관 안으로 들어서며 1층 로비에서 출근 체크를 위해 알밤 어플리케이션을 열어 출근버튼을 누르자, ‘출근 성공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출근 시간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실습생실로 발길을 옮기기 전, 로비에 비치되어 있는 손소독제로 손을 소독한 함께 비치된 비접촉 체온계로 체온을 쟀다. (그런데 아무래도 비접촉 체온계다보니 너무 멀리서 재면 가끔 34도와 같이 지나치게 낮은 온도가 나오기도 했다.) 어쨌든 체온까지 잰 후에야 비로소 도착한 실습생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사용한 실습생실은 두 개 교과에서 함께 사용했는데, 마스크로 인해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지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또한, 서로 얼굴도 모른 채 각자의 할 일(교수학습 과정안 작성, 각종 과제물 준비 등)에 몰두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실습생실의 고요한 분위기는 마치 독서실을 연상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이렇게 삭막해지기 쉬운 실습생실의 환경 속에서도, 교생들 사이의 인간적인 정이 오고 가는 일도 있었다. 다들 바쁘고 피곤한 상황에서 한 교과의 한 교생이 밀크티와 커피 티백을 가져와 실습생실 앞 칠판 위에 둔 것이 시작이었다. ‘밀크티&커피 필요하신 분 가져가세요^0^’라는 귀여운 메모와 함께. 그러자 다른 교과에서도 작은 간식을 들고 와 초콜릿 드세요!!’라는 메모와 함께 밀크티와 커피 옆에 나란히 두었다. 정말 사소한 일이었지만, 이렇게 사람 사이의 정이 가득 담긴 간식들은 삭막한 실습생실 환경 속 오아시스,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였고, 학생들과 잘 만나지 못하고 각자 온종일 온갖 문서와 씨름하는 교생들에게 이러한 광경은 꽤 감동적인 풍경이었다.

 

<실습생실 앞> 오고 가는 간식 속에 피어나는 교생들의 따뜻한 정(전우애에 가까운 것 같다)

 

@ 수업 참관

현장실습 첫째 주는 학생이 없는 채로 이루어졌다. 유일하게 등교하는 학생들은 고3 학생들로, 1, 2를 담당하는 교생들은 학생들을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운이 좋게도 내가 속한 교과의 고3을 담당하시는 선생님께서 교생들을 배려해주신 덕분에 고3 수업을 참관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주셨다. 다만,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모든 교생이 한 번에 모두 참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실습생 번호 순서대로 두 팀으로 나누어 참관에 들어갔다. 나는 화요일 5교시, 점심을 먹고 참관을 하러 수업이 이루어지는 3학년 2반 교실에 도착하여 교실 뒤편의 교생 자리에 앉았다.

교실 뒤에서 보는 교실의 풍경은 코로나19 이전의 교실과 사뭇 달랐다. 먼저 교탁 위에는 커다란 손 소독제가 비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선생님, 학생, 교생 모두 마스크를 끼고 수업을 진행했고, 아직 서로를 직접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학생들은 5월임이 믿기 힘들 정도로 서먹서먹했다. 한편, 수업이 시작한 후에도 선생님께서는 끝까지 마스크를 단 한 번도 벗지 않으셨지만, 끊임없이 말을 계속하시느라 조금씩 숨차 하시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러한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수업을 진행하시고 학생들과의 상호작용을 시도하시며 학생들을 수업에 집중시키고자 노력하는 선생님의 열정은 진심으로 존경스러웠다.

 

@학생 없는 첫 주. 교생들은 무엇을 했는가?

아마 많은 이들이 학생들이 등교할 수 없는 상황에서 교생들은 어떤 일을 하는지 궁금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생들은 학생 없는 학교에서도 나름대로 학교현장실습의 목적, 즉 전공과목인 교과 지식과 교직 과정에서 배운 교육이론 및 교수학습 방법을 직접 적용하고 평가하는 데 충실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시도했다. 이에 교생들은 교과 선생님 및 학급 선생님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내고 발표하기를 반복했다.

특히 우리 교과의 경우 현장실습 2주차부터 학생들이 등교하며, 학생들이 등교하자마자 월요일부터 바로 교생들이 실전 수업에 투입되기 때문에 1주차는 그를 위한 준비 기간으로 보냈다. 교생들은 실제 학생들 앞에서 수업하기 전 다른 동료 교생들에게 자신이 준비한 수업을 20분 정도로 짧게 시연하고, 학급 협의회 시간을 활용하여 각자의 수업에 대한 다방면의 평가(수업 내용, 발문, 목소리 톤, 억양 등)를 주고받았다. 이때, 비록 교생 선생님들 앞에서 시연하는 것이었음에도, 각종 PPT, 학습지 등 실제 수업과 전혀 다른 바 없는 학습 자료를 준비하고 피드백을 받았다. 그리고 퇴근 후에는 동료들의 피드백을 반영하여 교수학습 과정안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교수학습 과정안을 구성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다음 주에 실제로 만날 학생들 앞에서는 수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록 학생보다 교생이 더 많은 학교였지만, 교생들은 교수학습 과정안을 구성하고, 수업 PPT를 만들고, 학습지를 비롯한 학습 자료를 제작하고, 다른 교생들의 수업을 참관하고, 교과 협의회에 참가하며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둘째 주(6/1~6/5)

둘째 주부터 고2 학생들이 등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교생들은 본격적으로 실제 수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학생들의 직접적인 만남이 이루어지는 5일 중 각 교생에게 배정된 시간은 2시간이었다. , 약 한 달여간의 교생 실습 기간 중 학생들과 실제로 수업을 해볼 수 있는 것은 단 2시간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마저도 각각 다른 교실에서 한 시간씩 수업을 하는 거라, 학생들과 친해질 기회는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한편, 각 교생은 매일 3시간 이상 자신이 직접 수업을 진행하거나, 혹은 다른 교생의 수업을 참관해야 했다. 그러나 이때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같은 교과의 교생들은 사전에 수업 참관 조를 구성하여, 한 시간에 5명 이상이 참관하러 교실에 들어갈 수 없도록 했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 코로나19 상황 속 학생들과의 수업을 전제로 한 새로운 교수학습 과정안을 작성했다. 코로나19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상호작용이 이루어지는 교실이라는 공간을 송두리째 바꿔놓았기 때문에 이에 맞춘 새로운 교수학습 과정안이 필요했다. 예를 들어, 코로나19 상황 속 교사와 학생은 모두 수업시간 내내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기존에는 수업 구성에 있어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아니 사실상 필수로 여겨졌던 학생들의 (적극적인)수업 참여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리하여 발표 및 모둠 활동과 같이 학생들의 참여가 필요한 활동은 전부 인터넷을 활용한 새로운 스마트 도구인 멘티미터’, ‘패들렛으로 대체해야 했다.

처음에는 교생들 역시 멘티미터, 패들렛 등 비대면 시대의 스마트 도구에 익숙하지 않았다. 당연하겠지만 학창 시절에 이러한 스마트 도구를 사용해본 적도 없고, 교직 과정에서도 이러한 스마트 도구의 활용법은커녕 존재 여부까지도 한 번도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에 단 한 번뿐인 현장실습에서 학생들의 참여 없이 강의식으로만 수업을 진행하는 것은 나를 비롯한 그 어떤 교생도 원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번도 사용해보지 못했지만 단 일주일, 그중에서도 단 두 시간의 수업을 위해 멘티미터와 패들렛의 사용법을 배우고 이를 교수학습 과정안에 반영하였다. 이렇게 교생들은 낯선 상황에서도 대학에서 배운 교수학습의 방법들을 실제로 적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준비하여 수업에 임했다.

 

@ 조회 참관(6/4)

학교현장실습에 참여한 교생들은 각자의 전공에 따른 교과를 맡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학급을 담당하여 해당 학급의 조례 및 종례를 참관하고 진행한다. 하나의 학급에는 약 10명 내외의 다양한 과에서 온 교생들이 섞여 있고, 약 한 달간 하나의 학급에서 동고동락하며 학생들의 생활 지도를 담당한다. 그러나 올해의 경우, 코로나19로 인해 학생들과 대화조차 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고, 담당 학급의 학생들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은 단 한 번의 학급 조회 참관이 전부였다.

6/4일 목요일, 나는 학급 조회를 참관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2학년 7반 교실에 들어갔다. 나와 함께 오늘 학급 조회를 참관하는 교생은 나포함 3명으로, 각자 교실 뒤편의 왼쪽, 가운데, 오른쪽에 서로 2m가량의 거리를 두고 띄어 앉았다. 이윽고 학생들이 하나둘씩 도착했지만, 여전히 군데군데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학급 담임 선생님께서는 먼저 아이들의 출석체크와 함께 코로나-19의 상황을 반영하여 학생들이 자가 검진을 모두 완료했는지, 하지 못했다면 하고 올 수 있도록 안내해주셨다. 담임 선생님께서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세심히 챙기려고 하시는 모습이 정말 인상 깊었고, 지금까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12년간 학교에 다니고 수백 번의 조회를 경험했지만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코로나19 시대의 새로운 조회풍경이 낯설고 새로웠다.

그러는 한편, 교생의 입장이 되어 조회를 참관하니 아침 조회란 담임 선생님으로서 매우 힘든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요즘과 같은 시국에 생각보다 많은 학생이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키지 않고 마스크를 입까지 내리고 떠들거나, 등교 전 자가 검진 시 메스꺼움등에 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등교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담임 선생님께서 아이들에게 일일이 주의하라고 경고하여야 하셨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각하는 학생들, 자가 검진을 하지 않은 학생들, 마스크를 끼지 않고 떠드는 학생들 하나하나를 전부 신경 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예전 학급 협의회 때 선생님께서 '아이를 육아하는 기분'이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서 조금 마음 아프면서도 담임교사의 무게를 조금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조회 중 잠깐 학생들과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학생들과 만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괜스레 긴장되기도 했지만, 학생들과 만나는 이 찰나의 시간을 나의 마음속에 소중히 담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선 다른 교생 선생님들과 마찬가지로 간단한 자기소개와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그 시간이 너무나도 짧게 느껴져 정말 아쉬웠다. 예년과 같았다면 이 학생들과 많이 친해질 수 있었으리라는 안타까움도 들고,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할 거라는 마음에 미안한 마음도 생겼다. 교생의 관점에서 학급 조회를 직접 참관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정말 좋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움도 많이 남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학생들과 만나는 마지막 시간이 마무리되었고, 교생 실습도 어느덧 막바지로 달려가고 있었다.

 

@ 현장실습 이후

눈코 뜰 새 없이 지나간 2주간의 현장실습 이후에는 또다시 약 1주일의 간접실습 기간이 있었다. 간접실습 기간에는 현장실습 동안 새롭게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평가문학 작성, 교수학습 과정안 세안 작성/동영상 제작 등의 과제가 있었으며, 이러한 과제를 모두 제출하고 실습 동안 거의 매일같이 작성했던 학교현장실습록도 pdf로 변환하여 온라인으로 제출한 후에야 비로소 교생 실습이 완전히 종료되었다.

 

@ (심심해서 만든) 교생 하루 일과표

 

 

[타임라인]

2020.05.18.~2020.05.22. 간접 실습 1

2020.05.25.~2020.05.29. 학생 없는 학교에서 교생 실습 진행

2020.06.01.~2020.06.05. 2 학생 등교 격주 등교

2020.06.08.~2020.06.12. 간접 실습 2

 

 

#나가며

 

@ 코로나19와 학교현장실습의 목적

코로나19는 우리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고,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 밀집되어 생활하는 학교의 특성상, 효과적인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서는 개학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단순한 개학 연기는 학생들의 학습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었고, 이에 각 학교는 EBS 등을 활용한 온라인 개학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온라인 개학으로 인해 학교에 와서 친구들과 함께 수업을 듣는 대신 매일같이 EBS 온라인 클래스를 활용하여 수업을 들어야 했으며, 교사는 학생들이 뒤처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매일 아침 얼굴도 보지 못한 학생들의 잠을 깨웠다. 학교가 문을 열고, 학생들이 하나둘씩 등교하며 교사들은 기존의 수업 준비와 같은 업무에 학생들의 자가진단 여부 확인을 비롯하여 코로나19 시대에 맞춘 새로운 방식의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격주 등교라는 난생 처음의 등교 방식에 적응해야 했으며,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꾸준한 학습을 통해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사회는 이러한 학교 현장에 대해 꾸준히 관심을 가지며 코로나19 이후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 등 코로나19가 교육에 던진 수많은 화두에 대해 활발히 토론했다.

그러나 학교를 잠깐 들렀다 가는 존재인 교생에 대해서는 누구도 큰 관심을 주지 않았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학교 상황 속에서, 나를 비롯한 4학년 1학기에 재학 중인 사범대생들은 졸업을 위해 교생 실습을 나가야 하는 상황에 부딪혔다. 코로나19로 인해 교생 실습의 기간부터 방식까지 전부 송두리째 뒤바뀌어 버렸기 때문에 교생 생활에 대한 온갖 기대는 모두 빗나가 버렸고, 학생 상담을 비롯하여 사범대생이라면 누구나 경험해봐야 할 교생 실습의 당연한 과정들을 대부분 경험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교생들은 학교가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교생들에게 최대한의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학교 현장실습의 목표> 6번을 보시라. 망했다.

 

여기서 우리는 학교 현장실습이 어떤 활동인지 다시 한 번 살펴야 한다. 학교 현장실습은 학생들이 대학에서 배운 이론을 현장교육에 직접 적용하여 평가하고, 교과 수업 및 학급경영에 관한 실무적인 경험을 통하여 교사의 역할을 익히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그리고 교직 관련 능력을 함양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학생들과 교감하는 경험을 통해 학생을 이해하는 기회를 갖는 것 역시 학교 현장실습의 목적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상황 속에서 이러한 현장실습의 목적이 적절히 달성될 수 있었는가? 글쎄, 솔직히 말해 그렇지 않다고 답할 수밖에 없다. 교생들은 실습 일수가 감소했을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수업 시수 역시 감소함으로써 현장 수업을 경험할 기회가 크게 줄어들었다. 또한, 학교 현장실습의 목표 중 하나인 학급경영에 참여할 기회는 아예 사라졌고, 학생을 개별적·집단적으로 이해하는 경험은커녕 학생들과 말 한마디 나눌 기회도 없었다. 이렇게 교생들은 학교 현장실습에서 응당 경험했어야 할 다양한 기회를 코로나19로 인해 대부분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이러한 실습 기회의 감소는 단순한 교생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졸업을 앞둔 사범대생들이 누렸어야 하는 수업권을 방해하고 그에 따라 교직에 대한 자신의 적성을 살피는 것을 어렵게 했다. 또한, 학급경영 참여의 기회는 아예 사라짐으로써 예비 교사들이 졸업 후 학생들과 대면하기 전 학급경영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했다. 이는 예비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 현장실습의 목표가 훼손된 것과 마찬가지다.

(살짝 덧붙이자면, 나는 어쨌거나 교과와 학급 모두 고등학교 2학년을 대상으로 하여 학생들의 실물을 직접 보긴 봤다는 점에서 상당히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학교는 학내 밀집도를 완화하기 위해 학년별로 나누어 고1과 고2의 격주 등교를 시행했는데, 현장실습 첫 주에는 고3이 등교를 시작하고, 현장실습 2주차에는 고2가 등교를 시작했다. 그리고 고1은 현장실습이 다 끝난 후인 실습 4주차부터 학교로 왔다. , 1을 담당하는 교생의 경우 학생들을 실제로 만나는 현장 수업 자체를 할 수 없었으며, 조회 역시 참관할 수 없었다.)

 

@ 교육 주체로서의 교생

학교현장실습은 사범대생이 예비 교사로서 수업을 포함한 교사의 다양한 업무를 체험하게 함으로써 실습 참여자가 자신의 적성을 파악하게 하고, 실전에 투입되어 학생들을 대면하기에 앞서 학교 업무를 경험하게 함으로써 학교 현장에 적합한 인재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교생은 실습 이전까지 책과 논문 속에서만 존재했던 온갖 이론들을 실습기간 동안 실제 학생들과의 상호작용 속에 적용함으로써 살아있는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다. 그러나 코로나19는 이러한 학교현장실습을 축소 운영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일부의 경우는 학생들과 대면하는 기회 자체를 얻지 못하게 했다. 이는 분명 기존의 학교현장실습이 갖는 의의와 목표를 훼손하는 것이며, 교생의 수업권 및 학습권을 침해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다른 관점에서 살펴보자. 코로나19 시대의 교생은 분명 무엇인가를 배워갔다. 비록 그것이 코로나19 이전의 실습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이번 학교현장실습을 통해 대학 입학 후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영상을 편집하고, 가장 고퀄리티의 PPT를 제작했다. 이는 학생들과 면대면으로 만나 수업을 진행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내 나름의 보완책을 갈구한 결과였다. 이렇게 영상 편집, PPT 제작 등 비대면 수업에서 그 필요성이 강화되는 디지털 역량은 이 시국에 교생을 나갔기에 더욱 그 소중함을 깨닫고 나 스스로 신경을 써서 기를 수 있던 역량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역량은 기존 교직 과정에서는 크게 요구되지 않던 역량이었고, 새로운 역량을 기르는 모든 과정은 온전히 교생들에게만 맡겨졌다. 그 누구도 기존 교직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영상 편집이나 PPT를 가르치지 않았지만, 새로운 교육 환경에 내던져진 교생들은 그 역량을 갖추어야만 했다. 그리고 앞서 말했던 것처럼, 교생들과 학생들의 첫 대면은 교생들이 사전 과제로 만든 영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곧 비대면 교실 상황 속 학생들과의 첫 만남이라는 중대한 사건이, 온전히 교생들의 책임으로 남아있었음을 의미하며, 그 과정에서의 모든 고민 역시 교생의 몫으로 남겨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코로나19 속 교생들은 교육권을 침해당했을 뿐만 아니라, 디지털 역량 등 예상치 못한 역량을 요구받았으며, 각종 교육적 고민에 대한 책임을 전가 당했다.

교생에 대해서는 아직 사회적 관심이 많이 부족하다. 코로나19와 교육에 관련된 대부분의 논의에는 교생이라는 글자가 등장하지 않으며, 코로나19 상황 속 실습을 나가야 하는 교생들에 대한 통계자료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교생은 학교에 머무는 시간이 교사와 학생보다 현저히 짧으며, 일부 사범대생과 교대생에게만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생은 일반적으로 교육의 주체로 여겨지지 않고, 교육에 대한 여러 담론에서 소외된다. 교생 실습에 대한 논의는 일방적으로 이루어져 교생들에게 통보되었을 뿐만 아니라, 코로나19로 인해 학교 수업이 현장에서 온라인으로 옮겨가는 상황 속에서도 교생은 단지 수업 참관만 하면 되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교생들이 새로운 환경에서 기르는 새로운 역량과 교생의 주체성에는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는 교생을 주체성을 가진 예비 교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학교의 지시를 따라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로 바라보고, 학교현장실습 역시 교사로 성장하기 위한 중요한 시기보다는 졸업을 위한 부수적인 활동으로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반영된 것이다. 이렇게 교생에 대한 패러다임은 실제로 교생들이 학교 현장에서도 기존과는 다른 새로운 경험을 끊임없이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교생 실습은 예비 교사가 진정한 교사로 거듭나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관문이자 성장의 기회이고, 교생은 교사와 학생 사이에 있는 교육의 한 주체이다. 이에 교생 역시 하나의 교육 주체로 인정하고, 코로나19로 인한 교육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교생의 패러다임 역시 함께 변화해야 한다. 물론 코로나19 상황에서 교육의 패러다임은 지금도 끊임없이 바뀌고 있고, 학교 현장은 여전히 혼란스럽기 때문에 변화의 바람직한 방향이 무엇인지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코로나19라는 전례 없는 상황 속에서도 교사와 학생, 그리고 그사이에 있는 교생은 모두 교육의 주체로서 변화하는 교육 환경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특히 학교현장실습과같은 교생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활동에서는 교생이 주체적으로 변화를 주도할 수 있어야 하며, 단순히 코로나19로 변화한 학교 환경에 대한 적응을 넘어선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교생을 포함한 모든 교육의 주체는 교육 주체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충분히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특히 교생은 학교현장실습의 의의와 목표에 따라, 교직에 대해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교사로서 성장할 기회를 제공받아야 한다. , 예비 교사로서 교생이 수업을 참관하고 학생들을 직접 가르칠 기회가 충분히 확보되어야 하며, 더 나아가 단지 수업의 영역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원격으로라도 학급경영에 참여하고 학생들을 만나 소통할 기회가 제공되어야 한다.

한편, 교생들은 전례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들이 무엇을 배워갈 수 있을지, 변화한 교생 실습을 통해 길러야 할 역량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신들의 교육권에 무엇이 포함되어야 하는지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교생들은 자신의 교육권을 보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야하며, 학교 현장과 교생 실습을 담당하는 교원양성센터는 이러한 교생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충분한 통로를 마련해야 한다. 또한, 교생은 변화하는 학교 현장을 주도하는 주체로서 학생들과 어떻게 인격적 관계를 형성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살아있는 교육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육부, 교사, 학부모 등을 포함한 교육의 주체들은 코로나19가 장기화된다면, 혹은 이와 유사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교생 실습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교생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야 한다. 교생은 미래 교육을 이끌어나갈 주역이자 지금 이 순간도 교육의 한 주체이며, 교생 실습은 단지 교생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육의 지속가능성과 양질의 교육을 위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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