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 교육과 정치


교육과 정치는 분리될 수 있는가?


  교육, 특히 학교 교육과 관련해서 교육과 정치는 서로 분리된 영역으로 여겨졌다. 학생은 정치적 색깔에 물들면 안 되는 ‘순수한’ 존재여야 했고, 교사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 아래 어떠한 정치적 의견을 표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리고 교실은 ‘신성한 교육의 장(場)’이어야 하지, 정치와 같이 세속에 찌든 것들이 감히 비집고 들어올 수 없는 곳으로 여겨졌다.


  교실에서 ‘정치’란 꺼내서는 안 되는 단어였다. (그 이름을 불러선 안 돼!) 학생들이 정치적 이슈에 관해 토론할 수 있는 공론장은 사실상 부재했으며, 교사들은 정치적 이슈와 관련해서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교사들에게 ‘정치적 중립성’이란 정치와 관련된 문제에 관해서는 ‘입을 닫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일종의 ‘(교실에서의)정치 혐오’로 이어졌다.


  만 18세로 선거권이 하향된다고 했을 때, 가장 강력한 반대 논거 중 하나가 ‘교실의 정치화’에 대한 우려였다는 게 이를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 순수한 학생들이 정치에 물들 수 있고, 신성한 교육의 장이 정치에 오염될 수 있다는 논거다. 그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만 18세 선거권이 시행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이러한 우려는 여전했다. 인천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가 최근 발행한 '18세 선거권 도입에 따른 학생선거교육 방향 연구'에 수록된 조사 결과를 보면 '수업에서 사회문제를 다루게 될 때 염려되는 부분'에 관한 질문에 가장 많은 교사들이 '정치적 중립성의 부담'(평균 4.25/5점 만점)을 선택했다. 참고로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교사들이 선택한 답은 ‘학부모 민원 소지에 대한 우려(4.06)’이었다. 종합하자면, 교실은 여전히 정치화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이며. 교사들 사이에서는 만일 교실에 정치가 개입될 경우 이는 민원까지도 불러올 수 있는 일이라는 의식이 공유되고 있다.


  그런데 이 ‘교실의 정치화’라는 것이 정말 우려해야 하는 점인가? 교육과 정치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선 교육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자. 교육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교육을 하는가? 교육의 본질이나 목표 등에 대한 논의는 무궁무진해질 수 있지만, 대한민국의 교육기본법에 따르면 교육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각주:1]


  교육은 한 명의 인간의 인격과 생활 능력, 그리고 민주 시민성을 갖추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삶에서 국가, 더 나아가 인류에게 이바지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민주시민’, ‘민주국가’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민주’란 무엇인가? 민주란 ‘백성 민(民)’과 ‘주인 주(主)’, 즉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며,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 형태’다. 그렇다면 민주적인 시민을 길러내겠다는 교육의 목표는 그 자체로 굉장히 정치적인 목표이다. 정치가 특정 집단을 어떻게 이끌고 유지해 나갈지에 대한 문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국가는 국가라는 집단을 이끌고 유지하기 위해 교육을 수단으로 활용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교육은 그 본질부터 정치와 분리될 수 없으며, 국가는 교육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교과서를 발행하고 학교를 짓는다.


모든 교육은 정치적이다


  국가는 교육을 통해 국가 이데올로기나 정치 시스템을 가르친다. 따라서 교육과정은 곧 국가의 국민을 교육시키고자 하는 방향이며, 교육과정에 따른 대부분의 학교 교과는 국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교과 중 하나는 도덕과이다. 도덕과는 2015 개정 교육과정 총론에서 ‘도덕적인 인간’과 ‘정의로운 시민’이라는 중첩된 인간상을 지향점으로 삼는다고 밝히고 있다. 즉, 도덕과 교육과정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민주시민성의 함양이다. 그런데 민주시민성의 전제가 되는 민주주의는 하나의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가치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고 형성되어온 정치 체제이다. 그리고 이 정치 체제는 사회의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하며, 민주시민성 함양이라는 도덕과 교육과정의 목표는 이 이데올로기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배우는 ‘도덕’, ‘윤리’도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바뀌면 함께 바뀐다는 뜻인가? 그렇다. 실제로 도덕과는 과거 국민윤리교육에서 바뀐 바 있으며, 이는 시대의 변화를 그대로 따른 결과였다. 도덕과뿐만이 아니다. 국가 교육과정의 내용은 모두 100% 순수한 교육적 목표 아래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교육과정은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의 목표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정되고 걸러진 내용로 구성된다. 따라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바뀌면 교육과정도 바뀐다. 곧 국가의 사회적 권력이 교육에 작용하며, 국가가 원하는 형태의 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방안이 바로 교육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교과서용 정치’와 ‘정치용 교과서’로 나누어,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체제 아래 교과서를 중심으로 교육과 정치가 어떤 식으로 관련을 맺고, 교과서와 학교에서의 탈정치화 논의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교과서용 정치


  대한민국의 교육 체제 아래에서 12년 이상의 시간을 보낸, 혹은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사회과 과목 등을 통해 교실에서 정치를 배워본 적이 있을 것이다. 꼭 고등학생 때 ‘정치와 법’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중학교 ‘사회’ 과목 등에서 민주주의나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 이상씩은 다들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혹시 그때 교실에서 배운 정치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는가? 오래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무언가 ‘정치’, ‘민주주의’라는 개념어에 대한 추상적인 지식을 배웠던 기억은 어렴풋이 날 것이다. 그러나 아마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에 실시간으로 실릴만한 정치적 이슈나 비정규직 노동 문제와 같이 정치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현실의 정치를 피하고, 교과서용 정치를 가르치는 학교 현장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 중학교 교사의 칼럼을 일부 인용하자면, ‘시민혁명은 저 옛날 유럽에서 있었던 일이고, 민주주의는 저 고대 아테네의 정치이며, 여론정치, 시민참여정치는 추상적인 정치 모델 순서도의 한 칸일 뿐이다’.[각주:2]


  그렇다면 이러한 교과서용 정치가 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왜 지금도 교실 밖에서 수많은 정치적 의제들이 논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생동감을 잃고 죽어버린, 추상화된 정치만을 공부하는가?


  이는 결국 교과서가 정치적으로 중립이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교과서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정치적 중립이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 교과서 안에서 현실의 정치는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교실 밖의 생생한 정치, 예를 들어 페미니즘, 환경, 노동 등 생동하는 의제는 교과서의 논의 대상이 아니다. 왜? ‘정치적 사안’에는 얼마든지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의견’이 나올 가능성이 존재하는 사안은 교과서가 다룰 대상이 아니다. 자칫하면 교과서, 혹은 교과서가 교사나 학생들에 의해 활용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중립을 잃을, 혹은 잃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는 주제는 대체로 교육과정에서 배제되며,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없는 죽은 주제만이 교육과정에서 다루어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과서는 중립성을 획득하려 한다.


  아주 드물게, 교과서용 정치와 교실 밖 정치가 같은 사안을 다루기도 한다. 인공 임신 중절, 곧 ‘낙태’가 대표적이다. 교실 밖에서, ‘낙태죄’ 처벌 조항은 2019년 헌법재판소에서 헌법 불합치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2021년 1월 1일부터 그 효력을 잃었다. 그러나 이후 발의된 법안이 없어 낙태의 법적 공백이 지속되고 있다. 이에 낙태와 관련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으며, 낙태와 관련된 정치권의 논의 역시 시시각각 변화하며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낙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있는 정치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교실 안에서, 낙태를 다루는 ‘생활과 윤리’ 교과서는 이러한 살아있는 맥락은 모두 배제한 채 오로지 임신 중절에 대한 찬반 논거만을 나열하고 있다.[각주:3] 이는 교과서에서 ‘다른 의견’이 나오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또 살아있는 정치의 생명력을 빼앗음으로써 ‘교과서용 정치’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생활과 윤리 교과서는 단지 낙태에 대한 찬반 논거를 모두 다룬다는 사실로 인해 ‘정치적 중립’으로 포장된다.

2. 정치용 교과서


  그러나 교과서는 중립적이지 않다. 교과서는 ‘정치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 관련 논쟁은 지속되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한국사 국정 교과서 논란이다. 지난 박근혜 정권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며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고 주장하며 한국사 국정 교과서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혼이 담긴 한국사 국정 교과서는 탄핵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부에 의해 ‘독재를 미화’한다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정권이 바뀌자 이번에는 한국사 교과서가 ‘좌편향 교과서’라며, 교과서가 ‘정권 홍보 책자’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한국사 국정 교과서 논란이 좌편향 교과서 논란으로 이름만 바뀌어 이어지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뛰어난 어록. 국가가 교과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보여준다.

  교과서가 본질적으로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왜? 교과서를 누가 만드는지 생각해보자. 교육과정이 구성되고, 교과서가 만들어지고, 교육 정책이 결정되는 일은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지는가?


  교육의 주체에는 교육부와 같은 정치적인 기관도 있지만, 교사도 있고, 학생도 있고, 학부모도 있다. 그런데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에는 교육과 관련된 주체 중 극히 일부만의 생각을 담고 있다. 즉, 대다수 교사와 학생은 교육과정 구성에 참여할 수 없으며, 교육과정 및 정책은 교육부(라고 쓰고 아주 높으신 공무원분들이라고 읽는다.)나 교수들의 생각을 반영한다. 소위 말하는 사회의 ‘지배 계층’이자,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거의 완벽하게 소화하고 내재화한 이들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교육과정을 토대로 제작되는 교과서는 이 생각을 그대로 답습한다. 국가가 발행하는 국정 교과서뿐만 아니라 민간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검정 교과서 역시 국가의 심의 및 승인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학교로 간다. 따라서 국정 교과서나 검정 교과서나, 결국 국가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반영하며 만들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교과서는 국가의 시선으로 만들어진다.


  국가는 국가의 눈으로 교과서를 만든다. 교과서는 국가가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 보여주고 싶은 것 중 골라낼 것은 골라내어 철저한 체계를 만들고, 그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교과서를 통해 국민을 통제하고, 각 개인에게 국가 이데올로기를 주입함으로써 국가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길 바란다.


  대표적인 사례로 ‘저출산’을 보자. 사전적 의미로 저출산(低出産)은 사회의 합계출산율이 인구 대체수준을 밑도는 현상을 의미한다. 즉, 저출산이 계속되면 한 국가, 한 사회의 인구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교과서는 흔히 저출산을 ‘저출산 문제’라고 부르며 저출산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본다. 이를 잘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이번에는 도덕과 교과서도, 사회과 교과서도 아닌 기술가정 교과서다.[각주:4]

  위의 그림은 저출산 및 고령화가 개인이나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실업 증가 및 고용 불안, 경제 악화로 수입 감소, 국가 세입 감소로 인한 복지 혜택 감소와 같은 부정적인 영향들을 줄줄이 늘어놓고 있다. 이렇게 교과서는 저출산을 문제로 규정하며, 저출산이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만을 제시함으로써 저출산이 문제라고 인식하도록 하고, 저출산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과연 저출산이 무조건 나쁜 것인가? 위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개인이나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들도 진정 개인에게 미치는 악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까? 경제 악화로 수입 감소, 국가 세입 감소로 인한 복지 혜택 감소 등의 영향은 철저하게 국가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내용이다. 즉, 저출산 문제에 관해서 교과서는 오로지 국가의 관점으로만 이야기하고 있다.


  국가의 시선으로만 만들어진 교과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바라보지 못한다. 교과서는 저출산을 ‘문제’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저출산은 표면적인 결과일 뿐이다. 교과서는 그 이면의 저출산을 둘러싼 사회 구조에 대한 의문을 던지지는 못한다. 흔히 교과서는 저출산의 이유를 초혼 연령의 상승, 여성의 사회진출로 규정하고는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이를 적게 낳는, 아니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를 그것으로만 볼 순 없다.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혼자 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자 살기도 어려운 이유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턱없이 많은 업무 시간과 방 한 칸 마련하기도 어려운 집값, 자기 자신을 부양하기에도 부족한 임금 등…. 그리고 이들의 뒤에는 국가의 사회 구조와 (여성에게 특히 더 억압적인)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러나 국가는 권력 구조를 강화하고 기존의 억압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교육을 수단 삼아 사회 구조의 문제를 은폐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한다. 그래서 ‘결혼을 늦게 해서’ 혹은 ‘사회에 진출하기 때문에’ 저출산이라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식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이렇게 구조적인 문제를 은폐하는데 교과서가 수단으로 쓰인다.

교과서는 정치에서 자유로운가


  지금까지 살펴본바, 교과서를 ‘중립’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교과서는 중립처럼 보인다. 왜?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국정 교과서뿐 아니라, 검정 교과서도 결국 마찬가지이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정치적인 지향이 다를 수는 있어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국가 이데올로기를 정말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는 사람들의 손에서 교과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교과서는 객관적인 지식처럼 포장되어 학생들에게 전달되고, 학생들은 비판 없이 교과서에 주어진 지식을 암기하고, 시험을 본다. 즉, 국가는 국가의 시선이 가득 담긴 교과서를 중립이라고 포장하고, 정제된 지식의 형태로 학생들이 암기하도록 한다.


  그 결과, 학생들은 시의적절하고 그들의 삶에 가까운 정치적 지식과 정치적 역량을 기를 수 있는 내용보다는, 고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태동했느니 어쩌니 하는 지극히 정제된 지식을 외워서 시험을 본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 교육’으로 포장된다. 그런 정치 교육은 잘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우리 사회의 퀴어, 페미니즘 등 ‘살아있는’ 정치에 대해서는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교실에서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현실이다.


3. 나가며


교육과 학습


  ‘교육(education)’과 ‘학습(learning)’은 다르다. 교육은 교수자와 학습자의 관계가 전제되며,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학교에 가고 수업을 듣고 학위를 받고 이런 것들이 모두 교육의 영역에 포함된다. 따라서 교육은 언어의 형태로 정제된 지식을 다루며, 학습자가 지식을 주어진 대로 배우고 주어진 방식대로 사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교육은 정답이 이미 주어져 있는 상황에 유리하다. 반면, 학습은 학습자의 능동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반드시 교수자가 없더라도 언제 어느 환경에서든 가능하다. 그리고 학습자는 언어의 형태로 표현할 수 없는 정제되지 않은 지식을 습득하고, 각 학습자는 각자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자기만의 지식을 가진다. 즉, 학습은 곧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역량이나 기술을 형성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 필요하다.

정치는 학습이다


  지금까지의 우리는 ‘정치 교육’, ‘시민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정치를 교육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교육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도 찬성/반대를 나누어 정답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정치에는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는 문제에 정답을 내리려고 했기 때문에, 교육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는 학습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교육에서 학습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정치를 학습으로 바라본다면, 정치는 암기할 지식을 던져주는 방식으로 교육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과 같이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을 달달 외우는 것만으로는 실제 정치에 참여하기 위한 역량을 기를 수 없다. 따라서 학습자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한다. 어떤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는가? 자유롭게 토론하고, 비판하고, 의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사회 현상 이면의 구조를 볼 수 있는 환경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어떻게 할까?


  다시 교육 현장으로 돌아와, 우리에게는 자유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정치적 중립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정치를 터부시하지 말고, 교실의 정치화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도 더 과감하게 상상해보자. 이미 다 교육과정을 짜 놓고 교과서에 들어갈 지식을 정해둔 다음에 교육 관련 토론회에 학생 한두 명을 앉혀두고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했다’라며 끝나서는 안 된다. 교과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학생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건 어떨까? 학생도 교과서가 발행되기 전에 의견을 낼 수 있는 교육 주체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학생들이 교과서 제작 과정에 참여하는 길을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방안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도 중요하다. 첫째로, 교과서를 꼭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교과서는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지식의 총체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국가의 시선에 의해 골라진 지식이며, 교과서의 구성에는 국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 따라서 교과서를 비판하는 것도 자유로워야 한다. 또한, 교과서를 절대적인 지식의 잣대로 생각하지 말고, 교과서를 도구로 생각하여 교실의 교육 주체들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자. 즉, 교육의 목표가 꼭 교과서 안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 나아가, 교과서가 꼭 있어야 할까? 교과서는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중립적인 ‘척’하기 위해 오랜 기간 심의와 수정을 거친다. 그렇기에 교과서는 필연적으로 빠른 현실의 정치적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교육 주체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꼭 교과서만을 가지고 수업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문이나 기사를 보고 토론하는 것도 좋을 것이고,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가져와서 선정한 주제로 토론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조금 더 열려 있어 보면, 인터넷 기사 댓글, 트위터 등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핫한 주제들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주제에 관한 교과서의 서술과 SNS 등의 서술을 비교하는 활동은 교과서만 보았을 땐 결코 얻을 수 없는 통찰을 가져다줄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주제 그 자체가 아니라, 주제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이면의 구조를 인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사가 꼭 가르치는 역할이어야 할까? 아니다. 정치적 이슈는 하루가 다르게 새롭게 생겨나고, 사라지고, 바뀐다. 따라서 교사라고 해서 모든 정치적 주제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며, 교사보다 학생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교실에서 다룰 주제는 매일 변화하는데 교사도 함께 배우는 건 어떨까? 학생이 교사를 가르치고, 교사는 학생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가능하다. 교사도 학생들과 똑같은 한 명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견지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학생들이 선택한 주제에 관한 토론을 할 때 교사가 꼭 토론의 진행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 교사도 학생과 똑같은 한 명의 시민으로서 교실에서 학생의 발제를 듣고, 학생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주장을 제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학생도 교사와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교사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학생은 자유롭게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는 교실 분위기에서 교사의 말을 ‘단지 교사라는 이유로’ 곧이곧대로 수용하는 대신, 비판적인 시각으로 한 번 더 생각하는 역량을 기를 수 있다. 비판하는 연습은 곧 비판적 사고 역량으로 이어진다.


  앞으로의 교육 현장에서 정치는 교육의 대상이 아니어야 한다. 정치는 고대 아테네를 벗어나 우리 곁의 살아있는 의제로 다가가야 하며, 교실 환경은 학습자에게 정치 지식이 아닌 정치적 역량을 길러주어야 한다. 이때, 교사를 포함한 모든 교육 주체는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토론하고 이야기해야 하며, 청소년 역시 교사와 동등한 한 명의 시민으로서 주체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학습자들은 교과서용 정치, 정치용 교과서에 매몰되지 않는 비판적인 사고능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며, 자기 주변의 정치적 의제에 관심을 두고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주체적인 시민으로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정치는 학습되어야 한다.

 

 

 

 

ALee

  1. 교육기본법 제1장 제2조(교육이념) [본문으로]
  2. 권재원 풍성중학교 교사, 아이들에게 ‘교과서용 정치’만 가르칠 건가?, 프레시안, 2014.03.10. 수정, 2020.12.24. 접속, www.pressian.com/pages/articles/115033 [본문으로]
  3. 미래엔, 생활과 윤리 Ⅱ. 생명과 윤리 [본문으로]
  4. 두산동아, 중 기술가정② 교과서 3단원 01. 저출산 · 고령 사회와 일 · 가정 양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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