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의 울타리를 넘어, 학교와 세상을 바꾸는 페미니즘으로 나아가자
당근
들어가며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한국 사회에는 90년대 이후 다시 페미니즘이 부흥하고 있다. 그 이후로 여러 가지 논쟁과 토론이 있어왔지만, ‘페미니즘 교육’이라는 말이 등장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처음 페미니즘 교육이 화제가 된 것은 닷 페이스에서 진행한 최현희 교사의 인터뷰에서 부터였다. 최현희 교사는 인터뷰에서 운동장이 남자 아이들의 전유물이 되는 것, 성차별적인 성적 사회화 과정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성차별적 동화 등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페미니즘 교육이 학생들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점을 언급한다. 그리고 인터뷰 이후, 최 교사는 ‘메갈 교사’라고 낙인찍혀 온갖 인신공격과 SNS 사찰, ‘아동학대’라는 고발 등으로 뭇매를 받고 휴직까지 하게 된다. 그가 재직 중인 학교에 ‘메갈 교사를 처벌해달라’ ‘교사 자격을 박탈해야 한다’라는 민원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교사를 지지하고 보호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페미니스트 교사가 필요하다’는 해쉬태그 운동이 SNS에서 벌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페미니즘 교육’이 여성운동 진영에서 주요 화두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올해 초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초.중.고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를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올라왔다. 유투브나 SNS를 통해서 배운 여성혐오적 어휘나 욕설을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사용하는 것으로부터의 문제의식에서, 학생과 선생님 모두를 대상으로 한 페미니즘 교육이도입 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청원은, 20만 명을 넘겨 청와대의 공식적인 답변까지 얻어낸다.
이렇게 페미니즘 교육이 교육계와 여성운동 진영에서 화두가 되어, 그 필요성은 여러모로 충분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주목받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는 필요성을 넘어, 페미니즘 교육이 무엇인지, 페미니즘 교육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페미니즘 교육은 학교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검토하고 논의할 시점이다. 그를 통해서만 이 의제가 더 발전하여, 사회와 학교에서의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교육?
사실 이 글을 쓰는 본인은 페미니스트임에도, 본인에게 ‘페미니즘 교육’이라는 의제는 다소 어색하게 다가왔다. 처음에는 본인이 대학생이라 학교 현장에서의 페미니즘에 대한 고민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으나, 현재에는 꼭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페미니즘이 현재의 학교에서 ‘교육’될 수 있는가?
첫 번째 문제의식은 가부장적이고 여성억압적인 사회의 일부이며 그 사회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학교가, 페미니즘 교육 실시를 강제 받는다고 해서 제대로 된 교육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비슷한 예를 들어 설명 하자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권을 학교에서 교육하게 되었을 때에도, 노동권은 정말로 노동자의 입장에서 교육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는 대폭 축소되고 보수적으로 해석되며, 노동자들이 투쟁하여 세상을 바꿔온 역사는 지워진다. 노동자들의 정당한 요구와 운동은 이기적인 주장으로 그려지며, 노동자들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체 사회에 도움이 되는 운동을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처럼 사회를 비판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도입된 개념이 기존 사회의 제도권 안으로 들어올 때, 저항과 변혁을 고민하는 주체들의 목소리는 지워지고, 그 개념의 급진성은 은폐된다. 또한 제도는 그 개념과 사상의 사회적·구조적 맥락을 지운다. 페미니즘과 ‘이퀄리즘’이 언어의 의미상에서는 다르지 않음에도 큰 차이인 것은, 이퀄리즘은 여성들이 기원전부터 구조적으로 억압받고 통제되며 굴복되었던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지우기 때문이다. 정부가 사용하는 언어에서 ‘양성평등’(이퀄리즘과 동의어인)은 등장하나, 여성주의가 등장하지 않는 것에서도 이것이 잘 드러난다. 이 사회 제도권의 대표격인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질 것이다.
쉽게 말하면, 페미니즘을 학교에서 교육한다면 ‘페미니즘은 여성들의 힘든 현실에서 출발하여 사회를 진보시키려는 운동이다, 그러나 여성들만의 특수한 요구를 모두 들어주는 것은 어렵고 역차별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니까 양성평등이 필요하다’이상의 논의가 어려워질 것 같다는 것이다.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에 대한 청와대의 답변이 포괄적인 인권교육을 실시하겠다는 것임은 이것이 단순한 우려 이상임을 보여준다.
2) 페미니즘은 ‘교육’될 수 있는 것인가?
두 번째 의문은 페미니즘을 가르친다고 해서 학생들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하나의 인식틀과 가치관이고, 그를 바탕으로 한 입장의 문제이다. 결국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은 여성 억압적인 세상의 흐름에 편승하느냐, 그를 거부하고 새로운 흐름을 만드느냐 사이의 선택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를 성폭력을 예로 들어 설명해볼 수 있다. 기존 사회에서 성폭력은 피해자의 잘못이나 돌리거나 가해자 개인의 일탈적 행동으로 설명되었다. 반성폭력운동과 페미니즘은 이를 뒤집어, 성폭력을 피해자가 아닌, 성차별적인 문화와 사회 구조의 문제로 설명해 냈다. 이때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것은 이 두 가지 설명 가운데 후자가 더 정합적이며 실제로 옳다(right)는 선택을 내리는 것이고, 그로부터 변화하겠다는 결단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선택을 할 것이냐는 어떻게 세상을 설명할 것인지의 문제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 설명과 관점을 뒷받침하는 사회의 분위기, 실제 사회가 굴러가는 방식, 그로부터 개인이 수혜자가 되거나 경쟁에서 탈락하는 메커니즘 등이 존재한다. 여성 억압적이고 가부장적인 관점, 그를 채택하는 개인과 사회가 유지되는 것은 단순히 학교나 미디어에서 그를 가르치고 ‘세뇌’시키기 때문을 넘어 그 관점대로 굴러가는 사회구조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을 수업하는 것만으로 학생이 그 입장을 채택할 것이라는 것은, 교육에 대한 과도한 기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페미니즘 교육을 요구하는 목소리에는 과대평가된 교육의 가능성이 스며들어 있다는 점도 지적하고 싶다. 어떤 의미에서는 페미니즘을 교육해야 한다는 입장은, 문제점들에 있어 ‘인식 개선 캠페인’, ‘인식 교육’이라는 해결책이 가장 흔히 제안되는 것과 닿아있다. 현실을 바꾸는 운동이나 제도나 구조 자체에 대한 변혁이 요청되는 때에, 현실과 구조의 반영물인 개인들의 인식과 태도를 바꾸고자 하는 것은 많은 경우 문제의 핵심을 우회하며 근본적인 해결은 놓치게 만든다.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서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많은 경우 고집이나 편견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현실에서 근거한 추론이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학교에서 페미니즘을 가르친다고 학생들이 페미니즘을 인정하고 지지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학교와 그들의 현실에서 페미니즘적 변화가 있을 때 페미니즘에 설득되기 마련이다.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는 말의 합리적 핵심
앞에서의 논의는 결국 교육을 넘어서 페미니즘이라는 ‘운동’이 학교에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페미니즘 교육을 요구하면서도, 그것의 내용이 비어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페미니즘 교육 의무화 청원을 처음 시작한 사람은 어린 학생들이 문제의식 없이 여성 혐오적 비속어를 쓰는 것을 보고 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며 청원 요지를 작성했다. 이 사회에서 서로를 혐오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대안적 설명과 교육으로써 페미니즘이 너무나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교육의 내용보다, 페미니즘의 필요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은 스쿨 미투와 고발 운동에도 꿈쩍하지 않는 보수적이고 억압적인 학교에 대한 변화를 요청한다는 것과 다름 아니다. 이는 반드시 국가와 학교에서 ‘승인’ 되는 교육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필요도 없고, 애초에 그럴 수도 없다. 학교에서의 페미니즘적 변화는 반드시 ‘가르쳐지는’ 교육일 필요도 없고,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구조적 맥락이 사라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온건한 내용일 필요도 없다.
이것은 무조건 수업의 바깥에서만 페미니즘이 가능하다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이 ‘교육’이라는 강박이나 울타리에 갇히지 말자는 것이며 교육의 의미를 페미니즘을 통해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학교의 성별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생활지도에 저항하는 퍼포먼스, 도덕과 교과 시간에 조별 토론에서의 하나의 논점, 권위적인 의사결정 구조에 대한 도전 모두 가능하다는 것이다.
동시에 페미니즘 교육은 이 사회에서 교육이 정말 객관적이고 합리적인지에 대한 의문이기도 하다. 무엇이 학교에서 가르쳐질 것으로 인정받는지를 분석하고 비판하며, 교육의 내용 자체에 대한 성찰과 토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혹은 기존의 교육이 배제하는 존재와 은폐하는 영역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더 많은 페미니즘적 실천을 해보자! - 실천과 방법론
이미 현장에서 선생님들이, 또 청소년 활동가들이 열심히 고민하고 실천하고 있는 것을 알기에, 아래의 내용은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닐 것이다. 다만 위에서 언급한 문제의식들이 어떤 식으로 현장에서 실천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고 싶어 적어본다.
1) 수업을 활용하기
교사에게는 수업이 페미니즘을 고민하고 말하게 하는 가장 좋은 시간일 것이다. 수업은 많은 페미니스트 선생님들이 이미 많이 실천해온 영역이다.
계속 언급했듯이 페미니즘 교육의 제도화를 경계하는 것은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다. 교과서 속으로의 박제와, 수업시간과 교실로의 한정을 우려하는 것이다. 따라서 수업을 활용하는 것은 지식의 교수를 넘어, 페미니즘을 학생의 삶의 맥락 속에서 이해하는 생활교육이 될 필요가 있다. 수업에서 고민하고 토론된 것이 학생이 소속된 공동체와 학교 밖의 생활과 매개될 수 있어야 한다.
또 수업의 형식이나 내용과 더불어 주의할 지점은 페미니즘 수업 한 번으로 학생들의 삶이 바뀔 거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페미니즘 수업은 학생이 지금껏 경험해온 세계에 대한 다른 설명, 그를 바탕으로 새로운 입장을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것에 불과하다. 언급했듯 결국 페미니즘은 이 세계에서 어떤 입장을 선택할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여성 억압적 사회의 흐름에 편승하는 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던 학생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문을 보여주는 것 이상의 과도한 기대는 비현실적이고, 교사 스스로를 지치게 만드는 일일 수 있다.
2) 교사와 학생의 공동의 실천
학교에서 페미니즘적 실천은 크고 작게 계속되고 있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운동만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학교 안에서 페미니즘이 여전히 왜소하고 학교의 여러 압박으로 자유롭지 않은 상황에서, 교사와 학생이 힘을 모았을 때 비로소 유의미한 변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누군가를 배제하지 않고 모두가 주체가 되는 운동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해야 한다. 페미니스트 교사가 필요하다는 해쉬태그 운동에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스트 동료’가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 그를 잘 보여준다. 운동진영 내부에서도 주체로 서기 어려운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을 구원해줄 선생님이 아니라, 운동을 함께 고민하고 만들어갈 동료와 길잡이인 것이다. 학교 동아리와 같은 공동체를 통해서 시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3) 학교의 현실로부터 시작하기
언급했듯 페미니즘을 자신의 인식틀과 가치관으로 선택하게 되는 것은, 페미니즘이 자신의 현실을 설명하고 바꾸는 것일 때 시작된다. 그렇기에 학교의 당면한 현실로부터 출발하여 그를 바꿔낼 때, 학교의 구성원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학교의 당면한 현실은 성폭력과의 싸움이다. 미투를 통해서 고발이 계속되고, 사회적 관심과 지지가 쏟아지고 있는데도 학교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대부분의 사건과 피해자들은 은폐되며, 관심이 집중되는 사건에 한정하여 처벌만이 이루어진다. 공동체 내부의 반성적 평가, 피해자의 회복과 복귀에는 관심이 없다. 이로부터 학교의 성폭력 해결 처리과정을 바꿔내어 처벌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가 사건을 통해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 지금 학교에 가장 필요한 페미니즘적 실천일 것이다.
4) 학교로부터, 원인인 사회와 구조를 향하는 운동
한편으로는 학교 안에 갇히지 않고, 사회를 향한 고민과 실천도 필요하다. 성차별과 불평등한 구조의 원인은 학교를 넘어 사회 전체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성별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생활지도에 문제제기하는 것과 더불어, 성별고정관념이 단순히 편견이나 선입견이라는 입장을 넘어, 그를 지탱하는 구조, 혹은 그를 반영하는 사회문제 – 성별 임금격차나 가사노동의 문제 –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페미니즘 교육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교육이 비판적으로 검토되고 재정립될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것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성차별적 내용에 반대하며, 대안적 설명을 제안하고 논쟁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교육에 대한 객관성, 합리성을 분석하고 재구성하는 작업이 학교에서의 운동과 동시에 필요한 것이다. 이 작업이 성과가 있으려면 학교 현장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이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운동이 서로 힘을 주고받으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나가며
글을 쓰는 내내 현장의 실제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낙인찍히고 해고되기 일쑤인 상황에서, 페미니즘을 ‘교육’하는 것을 넘어 운동의 새로운 틀을 고민하라고 하는 것은 너무 앞서나간 이야기라는 것을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페미니즘의 ㅍ이라도 수업시간에 한 번 꺼낼 수 있는 게 다행이기 때문이다. 혹은 이미 현장에서 나름대로 고민하고 실천해온 것들이 있는데, 같은 말을 되풀이하며 질책하는 것으로 여겨질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굳이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던 것은 교육과 페미니즘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때, 논의의 발전이 가능하고 학교에서의 운동이 전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로 이 글은 앞으로 학교에서 페미니즘적 실천을 하고 싶은 예비교사로서의 고민이기도 했다.
앞으로 ’페미니즘 교육’과 학교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에 대한 더 많은 논의와 고민이 있었으면 한다. 더 많은 주체들과의 토론과 성찰에서 시작하여, 학교와 세상에 더 많은 변화를 만들어 나가보자!
'32호 - '위아래' 없는 학교를 위하여 (2018 여름호) > 기획 - 학교와 페미니즘'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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