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태치먼트(Detachment, 2011)
그래놀라
3월 26일 교육 저널에서는 영화 상영회 및 집담회를 열었다. 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특히 교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디태치먼트(Detachment)’라는 영화를 보고 감상과 교육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필자는 이 집담회에 참여한 후 교육 저널에 함께하게 되었다. 그만큼 특별한 경험이었고 학교 생활에 큰 영향을 준 영화였던 만큼 이에 대한 간단한 비평을 적어 이를 남기고자 한다.
‘애드리언 브로디’. 그는 내가 ‘킹콩’이란 영화에서 처음 본 배우였다. 길쭉한 코에 길쭉한 눈썹 그리고 길쭉한 얼굴까지 어딘가 사람을 빨아들이는 외모를 가진 그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도 매우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나른하면서도 슬퍼 보이는 눈이 인상 깊었다(오빠 김 묻었어요. 잘생김.). 그러나 금방 그를 잊어버렸고 대학에 들어와서야 ‘디태치먼트’라는 영화를 통해서 그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여전히 그는 얼굴이 길쭉하고 코도 눈썹도 길쭉하고 매력적이었다.
디태치먼트는 미국의 한 공립학교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헨리’는 기간제교사로 새로운 학교에 부임하게 된다. 유난히 문제 학생들이 모인 학교에서 ‘헨리’의 적응은 쉽지만은 않지만, 그는 담담하게 그리고 익숙하다는 듯 학생들의 골탕에도 개의치 않아하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낸다. 하지만 학생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그건 학교의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비행이 일상이 되어버린 학생들 그리고 아이들의 문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무관심한 학부모들, 지쳐버린 교사들. 이 학교는 누구를 위한 학교인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내려 버렸다. 불안정한 삶을 이어나가던 중 헨리는 우연히 에리카라는 소녀를 만난다. 교사로서의 사명심인지 단순히 불행한 상황의 어린 학생에 대한 동정심인지, 헨리는 보호가 필요한 상황인 에리카를 보살핀다. 학교 내에서도 그는 메레디스라는 특별한 학생과 조우한다.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꽃피우지 못하고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메레디스에게 헨리는 격려를 건넨다. 그럼에도 그가 막을 수 없는 일들은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영화는 헨리의 인터뷰 독백으로 마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동안 우울감에 침체되어 있었다. 교육에 대한 회의, 교사라는 직업의 무게감, 그리고 내가 과연 교사를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 복잡한 생각들이 떠오른 것은 무겁고 담담한 우울감 후에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그 우울감이 좋아서 한 번 더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 거리 두기, 무관심
어떤 학생이라도 헨리는 부드럽지만 따뜻하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그건 그의 어린 시절 경험으로 얻은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언제나 이별을 할 수 있도록 미리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제목의 의미를 유추해보았다. Detachment란 격리, 거리를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헨리가 학생들과 그리고 흐릿하게 기억하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과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하는 모습을 영화에서 볼 수 있었다.
Detachment는 무관심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학부모 회의에 누구도 오지 않은 텅 빈 교실 장면이 떠올랐다. 자녀들이 어떤 환경에서 교육받는지 가르치는 책임자는 누군지 전혀 궁금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듯 아무도 오지 않은 텅 빈 교실을 꾸며 놓고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교사들의 모습이 쓸쓸했다. 가정은 교육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자 아이들이 세상이 안전한지 결정하는 태도, 즉 애착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가정과 부모와의 관계에서 안정과 사랑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이 매우 위험하고 불안정한 곳이라고 느끼며 적응적인 관계 맺기가 힘들어진다. 학교라는 곳 또한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보살핌과 안정,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서 기능해야 하지만 어떠한 관심도 지지도 없는 상황인 아이들에게는 이마저도 가시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문제는 학생뿐만 아니라 학생을 돌보아야 할 교사들의 상황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교사, 완벽한 척은 하지만 부부간 불화를 겪는 교장, 그리고 가정이 아주 오래전에 파괴된 헨리. 소외된 자들은 누구에게도 자신들끼리도 뭉치지 못하고 그저 서로를 무관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외롭고 소외된 자들이 모인 학교에서 서로 어울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과연 교사와 학생 사이의 거리는 좁을수록 좋은 것일까. 교사와 학생 사이 적절한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영원히 풀리지 않은 고민 같지만 언젠가는 교육에 몸담고 있거나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면 해야 할 고민이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헨리가 거리를 두려고 한 이유는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교사로서 모든 학생을 제대로 보고, 또 자신을 의지하려고 하는 학생들에게서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학생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 우리 교육 현장의 Detachment
디태치먼트에서는 행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학교의 모든 면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으며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교사들은 절망하며 결국 학생들을 향해 절규하고 울음을 쏟아냈다. 에리카와 메레디스 또한 자신에게 관심을 주고 보살핌을 준 어른인 헨리의 관심에 잠깐은 행복했지만 결국은 끝이 어떻게 되든 각자의 길을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영화 속 교사들도 불행한 가정, 학교의 위기, 학생과 학부모와의 갈등 등으로 바람 잘 날 없었고 주인공인 헨리는 늘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결말이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없었고 누구 하나 상황이 더 좋아진 사람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고 그런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영화 속 교육 현장은 우리나라 교육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형태긴 했지만 크게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자녀 교육에 대한 것이라면 전국 방방곡곡을 돌고 한약을 지어 먹이며 학원을 태워가고 오기도 하지만 정작 아이가 어떤 것을 제일 좋아하는지 꿈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부모님들, 어떤 문제와 단원이 가장 많이 출제되는지 분석하고 어떤 대학이 가능한지 사람이 아니라 숫자를 다루는 교사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부유하는 학생들. 어느 한 사람도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는 우리나라 교육 상황도 서로가 격리되어 무관심하고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상태다. 그 이유는 현 교육 실태가 바람직한 인간 양성보다는 기능적인 인간의 생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교육에서 학생들은 교육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입시와 성공의 수단으로서 존재하게 되고 Detachment 즉 무관심 속에 방치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학생에게 깊게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꿰뚫어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교사의 능력과 개인의 인생을 바꾸어버릴 수 있는 ‘교육의 무게’를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였다. 많은 사람들은 관계로 인해 아파하고 삶을 망친다. 그 이유로 적절한 거리 두기가 지켜지지 않아서 그런 경우가 꽤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가까이 있어도 외롭다고 느끼며 더 가까이 가려고하고 오히려 더 멀어지려고 한다. 정현종 시인은 이런 사람들의 관계를 섬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교사로서 그리고 그 이전에 인간으로서 사람들의 섬 속에서도 외롭지 않다고 느끼고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는 적절한 거리 두기와 무관심을 조절할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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