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현장과 정치적 중립성의 민낯. ‘미성숙’과 ‘성숙’ 사이의 저울질
말하는 감자, 말하는 고구마
바뀐 법과 정체된 교육
2020년,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선거권이 만 18세에게까지 확장되었다. 지금까지 논의만 되었던 선거 연령 하향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청소년은 성인들의 보호만 받으며 일정 기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닌, 사회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주체가 된 것이다. 하지만 현재 교육현장을 둘러봐도 대외적으로 바뀐 부분은 명시된 법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 투표하는 주체가 늘어났고 그중에는 4월 16일 이전 출생자인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도 있으나 그들을 위한 별도의 교육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선거법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육기본법에서 명시된 ‘정치적 중립성’의 개념이 지켜진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교육기본법 제1장 6조에서는 ‘교육은 교육 본래의 목적에 따라 그 기능을 다하도록 운영되어야 하며, 정치적ㆍ파당적 또는 개인적 편견을 전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서는 아니 된다.’ 1라는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는 선거 연령이 하향되었으나 여전히 학교 내의 정치적 의견표출이 제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선거 연령이 하향됐으나 이를 둘러싼 ‘정치적 중립성’의 개념은 여전한 것일까? 청소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그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학교에서 변화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정치적 중립성’은 교사들의 정치적 권리까지 침해하고 있지 않은가? 왜 학교는 교사의 정치적 권리의 침해 가능성을 두고도 ‘정치적 중립성’을 엄격하게 지키라고 하는가?
정치적 중립의 모순
위 질문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선 우선 정치적 중립성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를 알아봐야 한다. 교육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인간을 목적에 맞도록 개조할 수 있는 교육과정의 형성’을 막기 위해 생겨났다. 배소연(2020)은 ‘헌법상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에 관한 연구’에서 본래 헌법이 보장하는 교육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이 자본주의 산업화로 인해 표준화된 대량 인력 양성을 중심으로 하던 시대에 국가의 교육권이 무제한 강화되며 교육이 국가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인간 또한 도구화되는 부작용에 대한 반성을 통해 나타났다고 한다. 국가 권력이 교육 영역에서 부당하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나타난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보았을 때,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이 생긴 데에 정치적 영향력의 제한이라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는지 그 실효성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과연, 교육에서의 ‘정치적 중립성’ 개념은 교육 영역에서 국가 권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줄이는 데에 일조하는가?
교육에서의 국가 정치 권력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교과서이다. 하지만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교육에서 가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교과서에서도 특정한 정치적 견해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교과서의 정치적 견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이슈가 되었던 사건은 바로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국정 교과서 사태였다.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는 국정 교과서가 아닌 검정 교과서 제도이다. 검정 교과서 제도는 일반 출판사에서 연구하고 개발한 교과용 도서의 교과서 적합 여부를 검정하여 심사하는 제도이다. 현재 한국사 검정 교과서 제도에 따라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은 한 권이 아닌 다양한 교과서로 검정 교과서 제도 아래의 학생들은 학교마다 다른 교과서로 수업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비해, 국정 교과서 제도는 정부 자체에서 교과서를 만드는 TF를 결성하여 교과서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제도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이와 같은 국정 교과서를 새롭게 도입하고자 했던 시도는 큰 국가적 논란으로 연결되었다. 박근혜 정부를 포함하여 국정 교과서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대부분 박정희의 독재 정부를 포함하여 국정 교과서를 통해 특정 당파의 의견을 편파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문제였다. 당시 박근혜 정부에서는 국정 교과서에 대해 ‘역사를 올바르게 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역사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정부의 발언은 역설적으로 얼마나 국정화 교과서가 정치적인 전략인지를 알 수 있게끔 한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화 교과서를 주장하기 10여 년 전 참여정부 대에는 ‘역사를 정권이 재단해서는 안 되며 국민과 역사학자가 판단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즉, 국정화 교과서의 제작자 입장의 역사는 ‘올바른 역사’이지만, 직접 국정화 교과서를 제작하지 않는 입장에서 국정화는 ‘정권의 재단’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국정 교과서 사태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3일 만에 종결되었다, 이러한 국정 교과서 사태는 이것이 얼마나 정치적인 요소인지, 더 나아가 국가에서 교육을 단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정치적인 행위인지를 알 수 있게끔 한다.
그렇다면, 국정화 교과서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국정화 교과서는 교육에서 정부가 개입하는 행위가 다분히 정치적임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정부에서 독점하여 교과서를 제작하는 행위만으로 큰 논란이 발생하며, 다분히 정치적인 행위라고 보여질 수 있는 사안이라면 하물며 정부에서 만들어내는 교육과정은 과연 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아무리 정치적 중립성을 염두에 둔다 한들, 결국 교육과정마저도 정부의 부처 기관인 교육부 아래에서 만들어지는 요소이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부분이 결정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비롯한 각종 시험에서 무조건 나올 수 있는 부분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처럼 ‘무엇이 중요한가?’를 지정하는 과정, 더 나아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를 지정하는 과정은 결국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편향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정권에서는 대북 정책에 대하여 북한과의 갈등을 더욱 강조하여 가르치고 이를 시험에 출제할 수도 있지만, 어떤 정권에서는 이에 대해 북한과의 협력과정을 강조하여 시험에 출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과정의 수립 과정에서, 결국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은 허상에 가깝다. 그리고 교육과정이 처음부터 중립성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교사의 중립성 또한 현실적으로 허무맹랑한 개념이 되고 만다. 교육과정과 교과서가 편향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교육과정을 대변하고 근거를 들어 설명해야 하는 교사는 특정 사안에 대해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의견을 드러낼 수 없다. 결국, 교사가 편향적인 교육과정을 성실하게 대변해야 하며, 편향적인 교육과정을 거부할 때 헌법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을 어기게 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때에 교사가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고자 하는 태도는 진정한 정치적 중립이 아닌 편향적인 교육과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단순한 기계적 중립에 불과하며 결국 어떤 입장을 강화하고 견지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 학생과 교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학교에서 생활하는 학생들과 교사들은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을까. 학생들은 법에서 명시한 정치적 중립성이 지켜지는 걸 반대할지, 교사들도 정치적 중립성의 개념을 교사의 자율성 침해로 여기는지를 알아보고자 인터뷰를 진행해 봤다. 인터뷰는 같은 학교 소속인 학생 두 명과 교사 두 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질문의 내용과 그에 따른 답변을 교사와 학생으로 분류해 간략히 정리해봤다.
1. 교육기본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정치적 중립성’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한 논의인가? 어째서 교사가 정치적 의견을 표출하면 안 되는 걸까?
학생: ‘정치적 중립성’은 국가 권력의 교육 지배가 문제되면서 교육의 자주성 실현을 위해 논의된 문제임. 애초에 정치와 교육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데 특정 관점에 편중된 의견이 학생들에게 노출되면 ‘미성숙한’ 학생들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위험성이 커서 정치적 중립성 개념이 도입된 듯함.
교사: 일반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교육이 사회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편향된 교육이 피교육자의 정치적 지향성을 결정하는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다분함. 특히 학생들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주체가 교사이기에 교사가 정치적 편향성을 내비치지 않도록 국가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함.
-> 학생과 교사 모두 학생의 배움 과정에 있어 교사의 역할을 강조했다. 특히 다방면의 사고 성장과 균형감 있는 시각이 필요로 하는 청소년 시기에 교사에게서 받는 가치관 형성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이를 정치적 중립성이 발생한 근본으로 고려하고 있다. 이는 청소년이 미성숙하다는 전제와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2. 교사의 완전한 정치적인 중립이 가능한 것인가?
학생: (두 학생의 의견이 달랐는데 정치적 중립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학생은 정치적 중립이 무조건적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개념으로 생각한 거 같다.)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개인마다 다르게 정의내릴 수 있어 어렵다고 생각한다. / 학교에서 객관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학생들이 주관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그 맥락에서 정치적 중립성이 지켜지는 거 아닐까?
교사: 교사가 정치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명시적으로 ‘표출’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사도 인간이고 학생들과의 상호작용이 기계적일 수 없기에 '완전한' 중립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사도 자신이 피교육자로서 자라온 과정이 있고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주체이기에 표면적으로 중립으로 보일지라도 잠재적 교육과정 측면에서 교사가 중립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의견이 조금씩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교사라는 직책이 어느 정도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직업이라 본 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물론 교사도 정치라는 분야에 대한 개인의 의견과 가치관을 가질 순 있지만 그래도 1번 질문에서 나온 답과 비슷하게 학생에게 영향을 직접적으로 주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볼 땐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이는 현재 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정치적 중립성과 같다.)
3. 정치적 중립성은 현대 교육현장에서 어떻게 이용되는 개념인가? 대부분 어느 정도를 ‘정치적 중립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학생: 자신의 정치적 입장만을 강조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정치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선에서 정치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교사에게 요구되는 정치적 중립성은 학생들에게 특정 정당을 비판하고 배제하는 것을 금한다기보다는 정치적 교육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데에 의의를 두는 거 같다.
교사: 가장 쉽게 생각하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선에서 교육현장의 정치적 중립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만약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등의 SNS에서 대통령의 페이지를 팔로우한다면 정치적 중립을 어긴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인가? 혹은 어떤 정부 정책에 관한 내 비판적인 생각을 내 SNS에 올렸다면 정치적 중립을 위배했다고 볼 것인가? 결국 교실 내에서 좌우 혹은 찬반이 갈리는 사안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으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학생들의 가치관 확립과 더 넓은 식견을 기르기 위해서는 아예 특정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보다는 균형감 있게 사건에 대해서 다양한 방면을 언급하며 서로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정치적 질문에 대해서 답변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답변에 대해서 아이들의 궁금증에 대해서 다양한 방면의 의견을 근거를 들어 설명해주는 것이 균형감 있는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 본 질문에서는 답변에서의 학생과 교사의 차이를 띠었다. 학생은 현대 교육현장에서 정치적 중립성이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이나 정치적 개념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간단하게 대답한 한편, 교사들은 현재 교육현장에서 활용되는 정치적 중립성과 실제로 실행되었으면 하는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개념도 제시했다. 만약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이루고 싶다면 정치적 개념에 침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해당 정치적 사안에 대해 학생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학생들이 뭔가를 제대로 알고 자신의 의견이나 가치관 확립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즉, 현재 교육현장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이나 개념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 ‘기계적 중립’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교사들 또한 이 개념이 과연 교육현장에서 올바른 개념인가 하는 의문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4. 정치적 중립성과 청소년의 ‘미성숙’ 담론은 어떤 관계 아래에 있는가?
학생: 정치적 중립성과 청소년의 ‘미성숙’ 담론은 유기적 연대 관계 아래에 있다고 본다.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또는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보호’와 ‘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 ‘미성숙’ 담론에 근거하여 정치적 중립성이 제기된다고 본다.
교사: 대학교수와 교사 간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차이나는 점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될 듯하다.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는 교수는 스무살 넘은 성인을 교육하는 것이고 정치적 중립이 요구되는 교사는 청소년을 교육하는 것이니까. 청소년은 아직 정체성 확립 단계이고 '미성숙' 하기에 국가나 사회가 교육을 주입시켜 청소년들이 치우친 가치판단을 하지 않도록 하려는 듯하다. 근데 이때 미성숙하다는 것은 생각도 없고 뛰어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며, 학생들을 내부의 능력을 스스로 발현시킬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결론은 학생들이 정치적인 생각이 없거나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아이들은 표현의 어색함이나 아직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기에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하는 개념으로 국가에서 지정한 거 같다.
-> 본 질문에서 내리고 있는 교사와 학생이 내린 ‘미성숙’의 정의는 차이를 보였다. 예상과 다르게 오히려 학생은 청소년이 나이가 어리다는 점에서 ‘미성숙’을 강조했고, 교사는 미성숙을 자신의 의견을 확립하거나 표출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단계라고 정의했다는 점에서 학생들 본인보다 더 청소년의 역량을 높이 평가한 것 같았다. 이러한 상황은 학생들은 사실 그들 사이에서 정치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학생들이 적극적인 논의나 자신의 의견을 확립할 충분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미성숙’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학생들 자신은 그저 그것이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라고 치부한 것으로 보인다. 충분한 정보나 교육 없이 이루어지는 논의는 얕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5. 교사의 정치적 자유가 허용된다면, 어떤 선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
학생: 가장 중요하게도 교사의 말을 듣고 가치관에 변화를 끼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그들의 주관적 개입이 드러나지 않는 사실을 말하거나, 학생들이 스스로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입장을 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학생들과 함께 있는 공간이 아닌 학교 밖에선 정치적 활동이나 시국선언을 할 수 있는 자유 정도는 보장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교사: 과도한 정치적 의견 표출은 교육현장에서 지양되어야 한다 생각한다. 교실 내, 수업 시간 속에서는 어쨌든 수업 목표가 분명해야 하니까 그 점에 집중하는 것이 서로에게 가장 좋을 듯. 다만 정치적인 가치 판단을 앞서는 인본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사안이라면 교육현장에서 함께 논의해도 좋지 않을까? 교사가 특정 정치 성향을 표출하는 차원이 아닌 학생들에게 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 능력을 길러줄 수 있는 차원에서 정치적 논의의 자유가 허용된다면 좋겠다.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다’가 아니라 ‘이런 생각도 내 개인적인 견해에서는 해봤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다’ 또한 ‘이 관점은 맞고 틀리고의 관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등의 언급이 필요할 거 같다.
-> 학생과 교사 모두 어느 정도 정치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입장에 동의했다. 과도한 정치적 의견 표출이나 아니면 편향성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학생과 교사가 타협을 보고 논의하는 것도 교육적으로 오히려 좋다는 게 양측의 생각인데 이는 현재 법에서 명시한 암묵적 중립성과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6. 학생의 정치 교육을 위해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은 지켜져야 하는 개념인가?
학생: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사고방식은 아직 미성숙한 단계이며 대부분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학교라는 제한된 공동체 안에서 교사들이 제공하는 정보의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어렵고, 이는 곧 그들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사라는 직위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직위와 사회적 파장을 고려했을 때, 교사의 정치적인 발언은 일반 시민보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사: 우선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교사가 노력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교육이라는 것이 광범위하게는 삶의 과정이고 연속선상이므로 정치를 배제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겠지만 학생들에게 스스로의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합리적인 판단 능력을 기르게 해 주는 게 정치 교육의 목적이라면 교사에게 중립성은 요구된다 생각한다. 물론 이때 정치적 중립성은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생각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그리고 다른 관점도 언급한다는 의미에서의 중립성이다. 교육에서 중요한 점은 미성숙한 학생들을 성장시킨다는 것보단, 이미 무엇인가 이룬 큰 꿈을 갖고 있는 학생들의 내면을 겉으로 서로 협력하여 이끌어 낸다는 관점, 즉 발현시켜 준다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정치적 문제든 어떤 교육의 문제든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 즉, 학생과 교사 모두 답변에서 명시한 중립성은 현재 교육현장에서 지켜지는 중립성과 달리 침묵이 아닌 단순한 ‘자신의 편향적이고 과도한 의견표출의 지양’일 뿐이었다. 현재 학교에서는 정치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사안을 일절 언급하지 않도록 하는 기계적 중립에서 벗어나 학생들에게 여러 관점과 사태 자체를 명확하게 알려 주는 게 더 좋은 해결의 창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 결과 답변들에서 반복되는 두 가지 점을 발견했다.
1) 학생들은 미성숙하기 때문에(미성숙은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일 수도 있지만, 교육과정에 의해 많은 정치적 경험이 존재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교사의 의견에 영향을 너무 많이 받을 수 있다. 그러니 학생들 앞에서 명시적, 편향적 정치적 의견표출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2) 그래도 완전한 암묵이 아니라 정치적 사안과 논란 등에 대한 정보를 학생들에게 제공해줘 보다 더 넓은 식견과 가치관을 가지는 걸 도와야 한다.
첫 번째에서 논의된 미성숙은 4번에서 제시했듯이 학생과 교사가 정의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학생과 교사 둘 다 청소년들의 미성숙함을 강조하며 교사가 학생들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 ‘미성숙’ 개념이 어떤 범위 내에서 해석될지는 다를 수 있다. 학생들의 의견대로 나이 개념을 적용해 성인과 차별성을 둔다는 점에서 청소년들이 ‘미성숙하다’라고 정의하면 이는 청소년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나이라는 기준에만 의거한 제한적 정의일 뿐이다.
사실 ‘미성숙하다’라는 단어를 누구에게 붙일 것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될 수 있다. ‘청소년이 미성숙하다.’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나이가 어려도 많은 경험을 통해 성숙하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나이가 많아도 미성숙한 사람이 있기에 어떤 사람이 성숙했는지의 기준을 세우기 어려워 ‘나이’라는 하나의 인위적인 지표를 만들고 이에 따라 구분짓기가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때 ‘미성숙’의 정의를 4번에 나왔듯 ‘생각도 없고 뛰어나지 않다는 게 아닌 스스로 내부의 능력을 발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대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에게는 많은 경험이 허용되지 않으며 일방적인 교육과정이 지정되어 있는데, 이는 청소년이 상대적으로 ‘성숙’하기에는 너무나도 미흡하거나 부족한 과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정한 ‘교육과정’을 통해 ‘성숙한 학생문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학생들을 제대로 교육하고, 이를 위한 정치 교육의 기본적 환경을 마련하여 학생들이 성인 못지 않은 ‘성숙함’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제대로 된 정치 교육 없이 학생들을 ‘미성숙하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제대로 된 정치 교육이나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실제 교육현장에서 적용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조치가 필요하다.
또한, 인터뷰에서 제시된 정치적 중립성 개념은 현실에 적용되는 것과 정작 학생과 교사가 원하는 것의 내용이 다르다. 학생과 교사 모두 교사가 직접적으로 표출하진 않더라도 논란이 될 만한 사안 혹은 정치에 대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게 교육적으로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직접 교육현장에 있는 당사자들이 원하는 것과 법적으로 명시한 정치적 중립성의 개념은 서로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올해 법 개정으로 인해 선거에 참여하게 된 몇몇 학생들도 제대로 된 정치 교육이나 선거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투표하게 되어 학생들이 불만을 표했고, 법 개정이 최근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학생들에게 무조건적 침묵으로 대응하기보단 제대로 된 실질적 교육을 해 주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뭔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논란을 회피하거나 침묵으로 대응하기보단 오히려 맞서서 알려주는 게 제대로 된 교육을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인터뷰의 결과와 학교에서의 맥락으로 보건대, 교육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을 견지하는 내용은 청소년의 미성숙함이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 미성숙함에 따라 어떤 기준으로 아이들을 교육해야 하는지, 그리고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교육과정의 일방적 전달과 기계적 중립으로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에 대한 재고도 존재하지 않은 채 하나의 통일된 기준도 없이 저마다의 생각이 난립하는 ‘정치적 중립성’ 개념의 모순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교사들은 저마다 교육과정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통일되지 않은 생각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교육과정에 대한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교사가 있는 반면, 적당히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교육과정 밖의 내용을 설명하고 아이들과 소통함으로써 새로운 교육과정의 지평을 만들어내는 교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정치적 중립성에서 거리가 먼 교사들의 행위라고 할 수 있으나, 정치적 중립성 개념의 모순을 생각한다면 어떤 교사도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 안에서 행동할 수 없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가치를 제공하는 새로운 교육과정의 지평은 결국 헌법에서의 ‘정치적 중립성’ 개념에 의해 제한되고 마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교육현장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그 자체로 모순된 개념인 데에 더하여 아이들의 새로운 교육과정으로써의 경험마저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교육 현장에서의 ‘정치적 중립성’ 개념은 학생들의 넓은 교육과정 경험을 막는 역할로 작용하고 있다. 2017년 실제로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의 수업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퀴어퍼레이드의 시민 행진 영상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전학연(전국학부모교육시미단체연합)에서는 교사의 행위를 비난하고 파면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실제 본 교사가 근무하던 학교 앞에서는 ‘교육현장이 동성애 교육장이 되었다.’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배포했으며, 본 교사를 ‘동성애를 옹호하고 남성혐오를 가르치는 수준 이하의 교사’라고 맹비난했다고 한다. 이러한 학부모들의 행태로 교사는 학부모들을 고소하기에 이르렀으며, 결국 법원은 학부모 측에 3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교사에게도 성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초등학생에게 퀴어문화 축제 영상을 보여주는 것은 학부모들에게 큰 걱정을 끼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결국 법원에서 공식적으로 퀴어 문화를 보여주는 것 자체만으로 교육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정치적 중립성은 결국 교육과정 외의 내용을 교사에게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기제로써 작용한다. 이는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교육에서의 언급을 아예 금지하게 된다. 교육과정은 아무리 전문가들이 교육내용을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지 않은 내용이라면 교육하지 않아야 한다는, 부단히도 보수적인 구성방침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교육의 방침은 현재 논란이 되는 성교육 표준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김대유(2010)은 성교육 표준안에서는 사회적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여 사회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성교육 표준안에서 양성평등, 성 소수자, 성행위, 자위행위와 같은 내용 체계를 모조리 삭제하였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결국 기계적 중립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회적으로 충돌을 빚을 내용을 모조리 삭제함으로써 대한민국 내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를 교육과정으로 편입하고 그들의 편을 드는, 전혀 중립적이지 않은 결과를 낫게 되었다. 과연 교육에서의 중립성은 어떤 개념이며, 과연 이러한 허울뿐인 중립 속에서 교육에서 과연 중립을 주장하는 것이 합당한 논의인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결론: 학생들을 위한 교육은 무엇인가?
결국, 헌법상으로 명시된 것처럼 보이는 교육 내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볼 때 사실상 허구적이라고 볼 수 있다. 법적으로 정치와 교육이 상호 연관되어 영향을 미친다는 점과 학생들이 교사의 정치적 의견에 휩쓸릴 수 있음을 근거로 들어 정치적 사안을 언급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는 완전한 중립이라기보다는 기계적 중립이요 의견묵살에 가깝다. 사회가 정치와 이미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는 점과 완전한 중립은 불가능하다는 특징을 고려할 때 교육체제 내의 정치적 중립은 본인들의 편의와 자의에 의한 조정으로 보인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근거로 가장 많이 언급된 청소년의 미성숙함 또한 학교 내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기 위한 근거로 들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청소년은 해당 글 본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러 경험과 배운 내용을 토대로 사고력을 스스로 확장할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이고, 이때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가치관이 청소년에게 어느 정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회와 밀접하게 붙어서 작용하는 게 정치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거나 현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을 함께 다루면서 다양한 의견들을 접하는 과정이 오히려 사고 확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경험을 쌓기 힘든 교육과정을 비판하고 청소년들에게 그 정치의 영역을 확장하는 논의를 진행하기는커녕, 청소년들이 ‘미성숙하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교육현장에서 정치성을 제거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정치적 영역의 능력까지 의심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헌법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기계적인 차원에 머물게 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정치와 교육의 자연스러운 맞물림을 억제하는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차라리 교육 측면과 정치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맞물린 교육을 활용해 청소년들이 주체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정치 분야에서도 활용할 수 있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교사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앞 인터뷰에서 교사는 청소년들이 미성숙하고 영향을 쉽게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청소년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사고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주체라는 점을 교사가 인지해야 한다. 또한 교사가 청소년이 미성숙하다고 생각해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려고 한다 하더라도 결국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성을 띄고 있기에 교사의 의견이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될 수밖에 없다. 이에 교사는 청소년들에게 정치적 사안을 가르칠 때 교사의 강압이 느껴지지 않게 청소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이때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입장을 전혀 공개하지 않으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중립이 아닌, 청소년이 자신의 주체적 사고와 정치 의견을 표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게 정치적 사안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며 꾸준히 질문을 하는 역할을 지켜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교사도 청소년들을 위한 실질적 교육을 가르칠 수 있고, 학생들 또한 정치 분야에 대해 원하는 논의와 토론을 진행시킬 수 있다. 현재 교육은 정치적 중립성이란 개념의 허구성을 깨닫고 이를 무리하게 지키기보단 교육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지를 논의해야 한다.
- 교육기본법 제1장 6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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