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 교육과 정치


교육과 정치는 분리될 수 있는가?


  교육, 특히 학교 교육과 관련해서 교육과 정치는 서로 분리된 영역으로 여겨졌다. 학생은 정치적 색깔에 물들면 안 되는 ‘순수한’ 존재여야 했고, 교사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 아래 어떠한 정치적 의견을 표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리고 교실은 ‘신성한 교육의 장(場)’이어야 하지, 정치와 같이 세속에 찌든 것들이 감히 비집고 들어올 수 없는 곳으로 여겨졌다.


  교실에서 ‘정치’란 꺼내서는 안 되는 단어였다. (그 이름을 불러선 안 돼!) 학생들이 정치적 이슈에 관해 토론할 수 있는 공론장은 사실상 부재했으며, 교사들은 정치적 이슈와 관련해서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교사들에게 ‘정치적 중립성’이란 정치와 관련된 문제에 관해서는 ‘입을 닫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일종의 ‘(교실에서의)정치 혐오’로 이어졌다.


  만 18세로 선거권이 하향된다고 했을 때, 가장 강력한 반대 논거 중 하나가 ‘교실의 정치화’에 대한 우려였다는 게 이를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 순수한 학생들이 정치에 물들 수 있고, 신성한 교육의 장이 정치에 오염될 수 있다는 논거다. 그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만 18세 선거권이 시행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이러한 우려는 여전했다. 인천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가 최근 발행한 '18세 선거권 도입에 따른 학생선거교육 방향 연구'에 수록된 조사 결과를 보면 '수업에서 사회문제를 다루게 될 때 염려되는 부분'에 관한 질문에 가장 많은 교사들이 '정치적 중립성의 부담'(평균 4.25/5점 만점)을 선택했다. 참고로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교사들이 선택한 답은 ‘학부모 민원 소지에 대한 우려(4.06)’이었다. 종합하자면, 교실은 여전히 정치화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이며. 교사들 사이에서는 만일 교실에 정치가 개입될 경우 이는 민원까지도 불러올 수 있는 일이라는 의식이 공유되고 있다.


  그런데 이 ‘교실의 정치화’라는 것이 정말 우려해야 하는 점인가? 교육과 정치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선 교육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자. 교육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교육을 하는가? 교육의 본질이나 목표 등에 대한 논의는 무궁무진해질 수 있지만, 대한민국의 교육기본법에 따르면 교육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각주:1]


  교육은 한 명의 인간의 인격과 생활 능력, 그리고 민주 시민성을 갖추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삶에서 국가, 더 나아가 인류에게 이바지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민주시민’, ‘민주국가’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민주’란 무엇인가? 민주란 ‘백성 민(民)’과 ‘주인 주(主)’, 즉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며,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 형태’다. 그렇다면 민주적인 시민을 길러내겠다는 교육의 목표는 그 자체로 굉장히 정치적인 목표이다. 정치가 특정 집단을 어떻게 이끌고 유지해 나갈지에 대한 문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국가는 국가라는 집단을 이끌고 유지하기 위해 교육을 수단으로 활용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교육은 그 본질부터 정치와 분리될 수 없으며, 국가는 교육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교과서를 발행하고 학교를 짓는다.


모든 교육은 정치적이다


  국가는 교육을 통해 국가 이데올로기나 정치 시스템을 가르친다. 따라서 교육과정은 곧 국가의 국민을 교육시키고자 하는 방향이며, 교육과정에 따른 대부분의 학교 교과는 국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교과 중 하나는 도덕과이다. 도덕과는 2015 개정 교육과정 총론에서 ‘도덕적인 인간’과 ‘정의로운 시민’이라는 중첩된 인간상을 지향점으로 삼는다고 밝히고 있다. 즉, 도덕과 교육과정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민주시민성의 함양이다. 그런데 민주시민성의 전제가 되는 민주주의는 하나의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가치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고 형성되어온 정치 체제이다. 그리고 이 정치 체제는 사회의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하며, 민주시민성 함양이라는 도덕과 교육과정의 목표는 이 이데올로기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배우는 ‘도덕’, ‘윤리’도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바뀌면 함께 바뀐다는 뜻인가? 그렇다. 실제로 도덕과는 과거 국민윤리교육에서 바뀐 바 있으며, 이는 시대의 변화를 그대로 따른 결과였다. 도덕과뿐만이 아니다. 국가 교육과정의 내용은 모두 100% 순수한 교육적 목표 아래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교육과정은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의 목표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정되고 걸러진 내용로 구성된다. 따라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바뀌면 교육과정도 바뀐다. 곧 국가의 사회적 권력이 교육에 작용하며, 국가가 원하는 형태의 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방안이 바로 교육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교과서용 정치’와 ‘정치용 교과서’로 나누어,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체제 아래 교과서를 중심으로 교육과 정치가 어떤 식으로 관련을 맺고, 교과서와 학교에서의 탈정치화 논의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교과서용 정치


  대한민국의 교육 체제 아래에서 12년 이상의 시간을 보낸, 혹은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사회과 과목 등을 통해 교실에서 정치를 배워본 적이 있을 것이다. 꼭 고등학생 때 ‘정치와 법’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중학교 ‘사회’ 과목 등에서 민주주의나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 이상씩은 다들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혹시 그때 교실에서 배운 정치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는가? 오래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무언가 ‘정치’, ‘민주주의’라는 개념어에 대한 추상적인 지식을 배웠던 기억은 어렴풋이 날 것이다. 그러나 아마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에 실시간으로 실릴만한 정치적 이슈나 비정규직 노동 문제와 같이 정치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현실의 정치를 피하고, 교과서용 정치를 가르치는 학교 현장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 중학교 교사의 칼럼을 일부 인용하자면, ‘시민혁명은 저 옛날 유럽에서 있었던 일이고, 민주주의는 저 고대 아테네의 정치이며, 여론정치, 시민참여정치는 추상적인 정치 모델 순서도의 한 칸일 뿐이다’.[각주:2]


  그렇다면 이러한 교과서용 정치가 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왜 지금도 교실 밖에서 수많은 정치적 의제들이 논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생동감을 잃고 죽어버린, 추상화된 정치만을 공부하는가?


  이는 결국 교과서가 정치적으로 중립이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교과서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정치적 중립이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 교과서 안에서 현실의 정치는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교실 밖의 생생한 정치, 예를 들어 페미니즘, 환경, 노동 등 생동하는 의제는 교과서의 논의 대상이 아니다. 왜? ‘정치적 사안’에는 얼마든지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의견’이 나올 가능성이 존재하는 사안은 교과서가 다룰 대상이 아니다. 자칫하면 교과서, 혹은 교과서가 교사나 학생들에 의해 활용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중립을 잃을, 혹은 잃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는 주제는 대체로 교육과정에서 배제되며,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없는 죽은 주제만이 교육과정에서 다루어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과서는 중립성을 획득하려 한다.


  아주 드물게, 교과서용 정치와 교실 밖 정치가 같은 사안을 다루기도 한다. 인공 임신 중절, 곧 ‘낙태’가 대표적이다. 교실 밖에서, ‘낙태죄’ 처벌 조항은 2019년 헌법재판소에서 헌법 불합치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2021년 1월 1일부터 그 효력을 잃었다. 그러나 이후 발의된 법안이 없어 낙태의 법적 공백이 지속되고 있다. 이에 낙태와 관련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으며, 낙태와 관련된 정치권의 논의 역시 시시각각 변화하며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낙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있는 정치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교실 안에서, 낙태를 다루는 ‘생활과 윤리’ 교과서는 이러한 살아있는 맥락은 모두 배제한 채 오로지 임신 중절에 대한 찬반 논거만을 나열하고 있다.[각주:3] 이는 교과서에서 ‘다른 의견’이 나오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또 살아있는 정치의 생명력을 빼앗음으로써 ‘교과서용 정치’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생활과 윤리 교과서는 단지 낙태에 대한 찬반 논거를 모두 다룬다는 사실로 인해 ‘정치적 중립’으로 포장된다.

2. 정치용 교과서


  그러나 교과서는 중립적이지 않다. 교과서는 ‘정치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 관련 논쟁은 지속되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한국사 국정 교과서 논란이다. 지난 박근혜 정권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며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고 주장하며 한국사 국정 교과서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혼이 담긴 한국사 국정 교과서는 탄핵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부에 의해 ‘독재를 미화’한다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정권이 바뀌자 이번에는 한국사 교과서가 ‘좌편향 교과서’라며, 교과서가 ‘정권 홍보 책자’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한국사 국정 교과서 논란이 좌편향 교과서 논란으로 이름만 바뀌어 이어지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뛰어난 어록. 국가가 교과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보여준다.

  교과서가 본질적으로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왜? 교과서를 누가 만드는지 생각해보자. 교육과정이 구성되고, 교과서가 만들어지고, 교육 정책이 결정되는 일은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지는가?


  교육의 주체에는 교육부와 같은 정치적인 기관도 있지만, 교사도 있고, 학생도 있고, 학부모도 있다. 그런데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에는 교육과 관련된 주체 중 극히 일부만의 생각을 담고 있다. 즉, 대다수 교사와 학생은 교육과정 구성에 참여할 수 없으며, 교육과정 및 정책은 교육부(라고 쓰고 아주 높으신 공무원분들이라고 읽는다.)나 교수들의 생각을 반영한다. 소위 말하는 사회의 ‘지배 계층’이자,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거의 완벽하게 소화하고 내재화한 이들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교육과정을 토대로 제작되는 교과서는 이 생각을 그대로 답습한다. 국가가 발행하는 국정 교과서뿐만 아니라 민간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검정 교과서 역시 국가의 심의 및 승인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학교로 간다. 따라서 국정 교과서나 검정 교과서나, 결국 국가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반영하며 만들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교과서는 국가의 시선으로 만들어진다.


  국가는 국가의 눈으로 교과서를 만든다. 교과서는 국가가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 보여주고 싶은 것 중 골라낼 것은 골라내어 철저한 체계를 만들고, 그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교과서를 통해 국민을 통제하고, 각 개인에게 국가 이데올로기를 주입함으로써 국가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길 바란다.


  대표적인 사례로 ‘저출산’을 보자. 사전적 의미로 저출산(低出産)은 사회의 합계출산율이 인구 대체수준을 밑도는 현상을 의미한다. 즉, 저출산이 계속되면 한 국가, 한 사회의 인구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교과서는 흔히 저출산을 ‘저출산 문제’라고 부르며 저출산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본다. 이를 잘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이번에는 도덕과 교과서도, 사회과 교과서도 아닌 기술가정 교과서다.[각주:4]

  위의 그림은 저출산 및 고령화가 개인이나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실업 증가 및 고용 불안, 경제 악화로 수입 감소, 국가 세입 감소로 인한 복지 혜택 감소와 같은 부정적인 영향들을 줄줄이 늘어놓고 있다. 이렇게 교과서는 저출산을 문제로 규정하며, 저출산이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만을 제시함으로써 저출산이 문제라고 인식하도록 하고, 저출산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과연 저출산이 무조건 나쁜 것인가? 위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개인이나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들도 진정 개인에게 미치는 악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까? 경제 악화로 수입 감소, 국가 세입 감소로 인한 복지 혜택 감소 등의 영향은 철저하게 국가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내용이다. 즉, 저출산 문제에 관해서 교과서는 오로지 국가의 관점으로만 이야기하고 있다.


  국가의 시선으로만 만들어진 교과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바라보지 못한다. 교과서는 저출산을 ‘문제’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저출산은 표면적인 결과일 뿐이다. 교과서는 그 이면의 저출산을 둘러싼 사회 구조에 대한 의문을 던지지는 못한다. 흔히 교과서는 저출산의 이유를 초혼 연령의 상승, 여성의 사회진출로 규정하고는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이를 적게 낳는, 아니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를 그것으로만 볼 순 없다.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혼자 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자 살기도 어려운 이유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턱없이 많은 업무 시간과 방 한 칸 마련하기도 어려운 집값, 자기 자신을 부양하기에도 부족한 임금 등…. 그리고 이들의 뒤에는 국가의 사회 구조와 (여성에게 특히 더 억압적인)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러나 국가는 권력 구조를 강화하고 기존의 억압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교육을 수단 삼아 사회 구조의 문제를 은폐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한다. 그래서 ‘결혼을 늦게 해서’ 혹은 ‘사회에 진출하기 때문에’ 저출산이라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식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이렇게 구조적인 문제를 은폐하는데 교과서가 수단으로 쓰인다.

교과서는 정치에서 자유로운가


  지금까지 살펴본바, 교과서를 ‘중립’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교과서는 중립처럼 보인다. 왜?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국정 교과서뿐 아니라, 검정 교과서도 결국 마찬가지이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정치적인 지향이 다를 수는 있어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국가 이데올로기를 정말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는 사람들의 손에서 교과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교과서는 객관적인 지식처럼 포장되어 학생들에게 전달되고, 학생들은 비판 없이 교과서에 주어진 지식을 암기하고, 시험을 본다. 즉, 국가는 국가의 시선이 가득 담긴 교과서를 중립이라고 포장하고, 정제된 지식의 형태로 학생들이 암기하도록 한다.


  그 결과, 학생들은 시의적절하고 그들의 삶에 가까운 정치적 지식과 정치적 역량을 기를 수 있는 내용보다는, 고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태동했느니 어쩌니 하는 지극히 정제된 지식을 외워서 시험을 본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 교육’으로 포장된다. 그런 정치 교육은 잘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우리 사회의 퀴어, 페미니즘 등 ‘살아있는’ 정치에 대해서는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교실에서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현실이다.


3. 나가며


교육과 학습


  ‘교육(education)’과 ‘학습(learning)’은 다르다. 교육은 교수자와 학습자의 관계가 전제되며,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학교에 가고 수업을 듣고 학위를 받고 이런 것들이 모두 교육의 영역에 포함된다. 따라서 교육은 언어의 형태로 정제된 지식을 다루며, 학습자가 지식을 주어진 대로 배우고 주어진 방식대로 사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교육은 정답이 이미 주어져 있는 상황에 유리하다. 반면, 학습은 학습자의 능동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반드시 교수자가 없더라도 언제 어느 환경에서든 가능하다. 그리고 학습자는 언어의 형태로 표현할 수 없는 정제되지 않은 지식을 습득하고, 각 학습자는 각자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자기만의 지식을 가진다. 즉, 학습은 곧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역량이나 기술을 형성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 필요하다.

정치는 학습이다


  지금까지의 우리는 ‘정치 교육’, ‘시민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정치를 교육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교육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도 찬성/반대를 나누어 정답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정치에는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는 문제에 정답을 내리려고 했기 때문에, 교육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는 학습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교육에서 학습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정치를 학습으로 바라본다면, 정치는 암기할 지식을 던져주는 방식으로 교육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과 같이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을 달달 외우는 것만으로는 실제 정치에 참여하기 위한 역량을 기를 수 없다. 따라서 학습자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한다. 어떤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는가? 자유롭게 토론하고, 비판하고, 의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사회 현상 이면의 구조를 볼 수 있는 환경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어떻게 할까?


  다시 교육 현장으로 돌아와, 우리에게는 자유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정치적 중립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정치를 터부시하지 말고, 교실의 정치화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도 더 과감하게 상상해보자. 이미 다 교육과정을 짜 놓고 교과서에 들어갈 지식을 정해둔 다음에 교육 관련 토론회에 학생 한두 명을 앉혀두고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했다’라며 끝나서는 안 된다. 교과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학생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건 어떨까? 학생도 교과서가 발행되기 전에 의견을 낼 수 있는 교육 주체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학생들이 교과서 제작 과정에 참여하는 길을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방안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도 중요하다. 첫째로, 교과서를 꼭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교과서는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지식의 총체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국가의 시선에 의해 골라진 지식이며, 교과서의 구성에는 국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 따라서 교과서를 비판하는 것도 자유로워야 한다. 또한, 교과서를 절대적인 지식의 잣대로 생각하지 말고, 교과서를 도구로 생각하여 교실의 교육 주체들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자. 즉, 교육의 목표가 꼭 교과서 안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 나아가, 교과서가 꼭 있어야 할까? 교과서는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중립적인 ‘척’하기 위해 오랜 기간 심의와 수정을 거친다. 그렇기에 교과서는 필연적으로 빠른 현실의 정치적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교육 주체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꼭 교과서만을 가지고 수업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문이나 기사를 보고 토론하는 것도 좋을 것이고,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가져와서 선정한 주제로 토론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조금 더 열려 있어 보면, 인터넷 기사 댓글, 트위터 등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핫한 주제들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주제에 관한 교과서의 서술과 SNS 등의 서술을 비교하는 활동은 교과서만 보았을 땐 결코 얻을 수 없는 통찰을 가져다줄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주제 그 자체가 아니라, 주제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이면의 구조를 인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사가 꼭 가르치는 역할이어야 할까? 아니다. 정치적 이슈는 하루가 다르게 새롭게 생겨나고, 사라지고, 바뀐다. 따라서 교사라고 해서 모든 정치적 주제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며, 교사보다 학생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교실에서 다룰 주제는 매일 변화하는데 교사도 함께 배우는 건 어떨까? 학생이 교사를 가르치고, 교사는 학생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가능하다. 교사도 학생들과 똑같은 한 명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견지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학생들이 선택한 주제에 관한 토론을 할 때 교사가 꼭 토론의 진행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 교사도 학생과 똑같은 한 명의 시민으로서 교실에서 학생의 발제를 듣고, 학생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주장을 제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학생도 교사와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교사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학생은 자유롭게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는 교실 분위기에서 교사의 말을 ‘단지 교사라는 이유로’ 곧이곧대로 수용하는 대신, 비판적인 시각으로 한 번 더 생각하는 역량을 기를 수 있다. 비판하는 연습은 곧 비판적 사고 역량으로 이어진다.


  앞으로의 교육 현장에서 정치는 교육의 대상이 아니어야 한다. 정치는 고대 아테네를 벗어나 우리 곁의 살아있는 의제로 다가가야 하며, 교실 환경은 학습자에게 정치 지식이 아닌 정치적 역량을 길러주어야 한다. 이때, 교사를 포함한 모든 교육 주체는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토론하고 이야기해야 하며, 청소년 역시 교사와 동등한 한 명의 시민으로서 주체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학습자들은 교과서용 정치, 정치용 교과서에 매몰되지 않는 비판적인 사고능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며, 자기 주변의 정치적 의제에 관심을 두고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주체적인 시민으로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정치는 학습되어야 한다.

 

 

 

 

ALee

  1. 교육기본법 제1장 제2조(교육이념) [본문으로]
  2. 권재원 풍성중학교 교사, 아이들에게 ‘교과서용 정치’만 가르칠 건가?, 프레시안, 2014.03.10. 수정, 2020.12.24. 접속, www.pressian.com/pages/articles/115033 [본문으로]
  3. 미래엔, 생활과 윤리 Ⅱ. 생명과 윤리 [본문으로]
  4. 두산동아, 중 기술가정② 교과서 3단원 01. 저출산 · 고령 사회와 일 · 가정 양립 [본문으로]

'37호 - 또 다른 길 > 후속보도' 카테고리의 다른 글

[후속보도②] 촉법소년 엘레지(élégie)  (0) 2021.04.03
후속보도  (0) 2021.04.02

  저번 호 기획 [청소년의 정치 참여]의 고민을 이어, 이번 호에서는 후속보도로 ‘교과서와 정치의 관계’와 ‘촉법소년과 소년법’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 ‘교과서용 정치, 정치용 교과서’ 보도에서는 교육과 정치의 관계, 교과서에 담긴 정치의 모습, 정치를 위한 교과서의 모습을 통해 교육과 학습의 차이가 무엇인지와 청소년들이 정치를 배우기 위한 올바른 방향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촉법소년 엘레지’ 보도에서는 다른 비행소년과 구분되는 촉법소년의 법적 특징, 그들의 비행이 불러일으킨 형사책임 연령 하향 문제와 소년법 폐지 문제, 보호 처분의 타당성 문제, 그리고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해결책을 그려보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이번 호 후속보도를 통해 우리는 각 문제에 대한 청소년들의 적극적 참여와 이에 대한 보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자 합니다.

 

<후속보도> 소개 이미지


1. 들어가며


  학내에 인권헌장 바람이 불고 있다.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 오랜만에 찾은 학교에는 곳곳에 인권헌장과 관련된 대자보들이 어지러이 게재되어 있었다. ‘탈동성애자의 발언을 차별 행위, 혐오 표현으로 규정해 자유를 박탈하는 서울대 인권 헌장에 반대한다.’, ‘지극히 불명확한 개념, ‘성적지향’이 차별금지사유에 포함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등[각주:1], 중앙도서관을 거쳐 사범대를 향하는 동안 여러 대자보를 보며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다 사범대 앞에서 이질적이게도 반듯하게 붙어있는, ‘인권헌장의 제정이 성도착증을 허용할 것이라는’[각주:2] 대자보를 보고 말았다. 그리고 슬프게도 맘카페에서 동성애가 에이즈 발병의 원인이라고 말하던 한 사람이 생각났다. “당신의 아이가 동성애자면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신의 아이가 에이즈를 퍼뜨리고 있어요!”. 공포와 두려움으로 무장했던 그 발언들이 지금 내 눈앞에, ‘교육’을 이야기하는 사범대학 근처 게시판에 큼지막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너무나도 모순적인 상황이다. 나는 사회에 만연해있는 부조리와 차별을 함께 이야기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대학교에서 현실에 안주하는 방법이 아닌 현실에 부딪치는 용기를 얻고 싶었다. 그러나 이렇게나 많은 혐오가 자유와 이성과 진리라는 이름으로 대학교 게시판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10월 16일에 열린 ‘서울대 인권 헌장 및 대학원생 인권 지침 제정 공청회’에는 공격적인 댓글들이 달렸고 성 소수자 동아리 대표는 아웃팅 등 다양한 위험에 노출될 것을 고려해 전체동아리대표자협의회에 참가하지 못했다.[각주:3] 학내의 혐오는 대자보에서 그치지 않고 혐오 행동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나는 손발이 차가워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대자보를 몇 번이고 읽었다. 서울대학교에는 내 손발을 얼린 겨울바람보다 더 싸늘한 혐오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2. 인권헌장 반대 성명문은 혐오 표현이다.


  “서울대학교는 인권헌장 제정 추진을 즉각 중단하라!”[각주:4] 2020년 10월 15일, 서울대학교기독교총동문회, 동성애합법화반대전국교수연합, 진정한평등을바라며나쁜차별금지법을반대하는전국연합, 복음법률가회는 인권헌장 반대 성명문을 발표했다. 이 성명문은 인권헌장 제3조 차별금지와 평등권을 문제 삼고 있으며 이 안에서도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성명문의 두 번째 주장인 ‘인권헌장은 서울대학교에 동성애/젠더 이데올로기 독재를 가져온다’는 부분은 법적/과학적인(논리적으로 보일 뿐이지만) 근거가 바탕이 되었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정당한 혐오’, ‘혐오할 자유’를 논하고 있다. 이 부분을 요약하자면, 크게 세 가지로 주장으로 나눌 수 있다. 1) 우리나라 최고법원인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동성 간 성행위는 비정상적인 성적 교섭행위로서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에 반하는 성적 만족 행위’로 판단해 왔기에 동성간 성행위는 부도덕하다. 2) 동성애 유전자가 없다는 연구 논문들이 있기에 동성애는 바꿀 수 없는 존재 내지 상태가 아니므로 바꿔야 하는 것이 맞다. 3) 우리는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지 동성애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반대 성명문을 읽으며 이 세 가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1)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에 반하는 동성애는 무슨 의미일까? 2) 동성애 유전자가 없다는 것이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하는가. 3) 과연 동성애가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인가?

 

1) ‘선량함’을 내세워 혐오를 말하다.

 

  우선, 나는 이 성명문을 읽으며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내용이 군형법, 그리고 추행과 관련이 높다는 논의를 차치하고서도 결국 반대 성명문이 동성애를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과 반대되는 악랄한 무언가로 바라보고 있음이 분명하기에 나는 그렇다면 선량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보고자 한다. ‘이성애’는 선량한가? 맞다, 아니다를 대답하기 전에 우리는 이 질문이 매우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컨대, 남성과 여성이 성행위를 하는 사실을 우리는 선량하다고 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성애라는 사랑의 형태를 선함과 악함이라는 가치판단으로 바라보는 것이 괴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이 성행위를 할 때, 여성이 원치 않음에도 남성이 강제로 성행위를 이어갈 경우, 이것은 선하지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성애 또한 악함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우리는 이성애가 선이고 동성애가 악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선악의 판단은 그 하위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 내용은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추행을 막기 위한 법의 내용이나 그러한 맥락을 차치하고서라도, 동성애는 선량하지 못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문장은 성립될 수 없다. 그들은 동성애를 ‘악하고 음란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핵심은 모든 이성애가 성행위로 이어지지 않듯이 모든 동성애도 성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며 결국 이성애든 동성애든 모두 서로 합의 가능한 성인이 ‘친밀한 관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각주:5] 강조하건대, 동성애를 단순히 성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행위로 바라보는 그들의 혐오는 근절되어야 할 것이다.


  동성 간 성행위가 일반인들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한다는 이야기 또한 사실 여부를 떠나 동성애가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에 반한다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다수가 흑인을 혐오한다고 흑인을 혐오하는 행위를 정상적인 행위로 보지 않듯, 혐오감이 곧 악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혐오를 고찰하는 태도이다. 성명문에도 드러나듯 이러한 혐오감을 내세워서 자신의 차별적 시선을 정당화하고 선량한 것이라고 치부하려는 태도가 인권헌장이 필요한 이유를 방증하는 것이다. 

 

2) ‘동성애 유전자’를 내세워 비정상으로 낙인찍다.

 

  두 번째로 동성애 유전자가 없다는 것이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하는지 의문이다. 그들은 왜 동성애를 말할 때 동성애 유전자와 함께 말하는가? 우선 동성애 유전자, 이성애 유전자 등. ‘~에 대한 유전자’를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다. 성향 및 행동은 하나의 특질을 가진 유전자만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닌 환경적, 유전적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여 도출된다. 단순히 동성애 유전자가 있다 혹은 없다의 차원으로 국한해 논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논의는 불필요한 논의이다. “어째서 이러한 유전학적 내용과 동성애를 결부시키는가?”의 문제부터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성애를 말할 때, 이성애 유전자의 유무 등 ‘부연설명’을 하지 않는다. 예컨대,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사랑할 때 “나는 내 유전학적 정보에 의거하여 여자인 너를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필연적이야.” 라고 말하며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내면 혹은 외면 그 밖의 여러 요인들, 그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세계를 보며 사랑에 빠진다. 다른 것은 ‘성별’뿐인데 이곳에 ‘유전자’의 논의를 결부시키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혹여 동성애 유전자가 없다는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동성애가 비정상적임을 함축하지 않는다.


  이 주장의 핵심은 결국 과학적으로 보이는 근거를 가져와 동성애가 비정상임을 밝히는 것에 있다. 한 인간의 성향을 결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가 동성애에 대해 다루고 있지 않다고 말하며 동성애를 혐오하는 행위가 정당함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나아가 탈동성애라는 용어를 통해서 동성애에서 벗어날 수 있고 벗어나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를 주도했던 가나 박사 또한 “다른 많은 행동과 마찬가지로 동성 간 성적 행동은 유전적 혹은 비유전적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동성애 성향이 유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할 수도 없고, 비유전적 요소, 즉 사회적·환경적 요인에 영향을 받아 결정된다고만 볼 수도 없다.”[각주:6]고 밝혔다. 그 누구도 성 정체성을 강요하고 벗어나라고 말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이 주장이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 기저에 존재하는 혐오를 마치 이성처럼 보이는 가면을 써 감추려는 시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3) 동성애는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세 번째는 “‘행위 비난’을 ‘행위자 비난’과 동일시하는 서울대학교 인권헌장은 보편적 헌법 이론과 부합하지 않으며, 동성애/젠더 이데올로기의 전체주의적 독재를 초래한다.”는 주장과 관련한 의문이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행위자 비난은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흔히 게이라는 말을 비속어처럼 사용하고 동성애자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고 있는 현 상황을 행위자가 아닌 행위만을 비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나아가 우리는 동성애를 비난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며 논지를 전개하는 것도 동의하지 않는다. ‘행위 비난’과 ‘행위자 비난’을 구분하라고 하지만, 엄연히 ‘동성애 비난’과 ‘동성애자 비난’ 모두 혐오 표출이며 근절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즉, 행위와 행위자 비난을 구분하라는 이 내용 속에 숨겨진 것은 ‘특정인을 비난하지 않을테니[각주:7] 나는 자유롭게 혐오하겠다’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동성애가 비정상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규탄하는 이유는 발언에 깔린 폭력적이고 혐오적인 시선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행위 비난과 행위자 비난을 분리하는 차원으로 국한시킬 수 없다. 행위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에[각주:8] 정당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차별적 시선을 정당화하려는 발언이기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절대적인 잣대로 동성애를 비판하는 표현을 강제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인권헌장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며, 그들이 하는 것은 비판이라기보다 비난이며 혐오이다. 그들이 존재를 부정하는 혐오를 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러한 혐오를 규탄하고 근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사상이나 견해가 옳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자유민주체제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하며, 따라서 동성애를 혐오하는 자신들의 발언도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절대적인 잣대가 없다는 것이 가치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절대적인 옳음이든 사회에서 구성된 옳음이든 옳음과 가치를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즉, 상황과 맥락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차원을 넘어 우리는 사회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며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는 행동, 남을 배려하는 행동 등, 우리는 내가 속한 이 공동체 내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옳음과 가치에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단순히 절대적인 잣대를 말할 수 없으니 옳음과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는 행위는 우리가 더이상 사회의 방향에 대해, 사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뜻과 같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상처받고 상처 주는 사회를 허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들의 혐오 표현을 나아가 그 혐오를 표출하는 행동을 묵인하는 학교를 마땅하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소위 <팩트체크> 기사로 그들의 비논리를 드러내고 퀴어문화축제에서 폭언과 난동을 일삼는 행위를 규탄해도 여전히 우리는 사회에서 당당히 우리의 성 정체성을 말하기 어렵고 누군가는 폭력적인 시선과 억압에 몸부림치고 있다. 그 사회의 일원인 서울대학교 또한 굵은 글씨로 혐오 표현이 쓰여 있는 것을 버젓이 이성적인 성명문이라고 게시하고, 그것을 통해 누군가가 받을 상처는 고려하지 않으며, ‘비정상’으로 아무렇지 않게 낙인찍고, 그것을 스스로 정당하다고 말하기 위해 논리 아닌 논리를 만들고 있다. 절대적인 잣대이든 상대적인 잣대이든, 핵심은 그들의 혐오 표현이 근절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우리는 더이상 학교 안에서 혐오적 시선이 표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표현에 책임을 진다는 것


  부당한 일에 왜 분노하는가. 혐오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 입어도 그 행위를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인가. 표현의 자유가 혐오의 자유를 함축한다고 말할 수 없다. 즉, 표현의 자유란 어떤 발언이나 어떤 행동 등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 모든 표현이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우리의 표현에 책임을 져야 한다. 동성애와 성전환이 옳으며 가치 있다는 것을 강요하고 있다는 발언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동성애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동성애 혐오를 강요하고 싶기에 차별과 혐오를 멈춰달라는 목소리를 하나의 강요로써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성적지향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우리는 이런 혐오를 근절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학내[각주:9]에선 지속적으로 이러한 혐오 표현이 표출되었다. 위 세 가지 주장은 형태만 바뀌었을 뿐, 동성애가 에이즈를 발병시킨다거나 성도착증이라거나 정상적인 가족 정의에 맞지 않다는 등의 주장과 그 결을 같이 한다. 핵심은 이 모든 주장과 근거가 결국 보다 수월하게 혐오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나아가 그 어떤 주장과 근거도 혐오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체성’을 부정하고 비정상으로 낙인찍고 혐오를 조장하는 이 모든 행위에 대해 우리는 규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연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길목에 인권헌장 반대 성명문을 첨삭한 대자보가 게시되었다(이은혜 기자, 위 기사.)

  인권헌장 반대 성명문이 하나의 혐오 표현임은 명백하다. 정당한 혐오와 정당한 차별을 시도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공포에 호소하며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혐오의 목소리가 학내에 마치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인권헌장이 필요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한편, 인권헌장이 비단 성적지향 및 성별 정체성만을 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특정 단체의 혐오로 인해 논의의 장이 축소되어 버렸다. 그렇기에 우리는 논의의 장을 확장하여 인권헌장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학내에 인권헌장 제정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권헌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3. 인권헌장을 향한 학내의 목소리


  인권헌장을 향한 목소리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동성애 혐오뿐만 아니라 학내에선 무수히 많은 인권침해상황이 발생해 왔다.


  H교수 사태는 우리의 공동체가 얼마나 인권침해에 취약한지 보여주고 있다. H교수는 성희롱을 자행하고 자택의 곰팡이 제거와 양복 수선을 지시하며, 학생의 인건비를 갈취하기도 했다.[각주:10] 2016년 11월 사회학과 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이 ‘대책위원회’를 결성한 이후 많은 학생들이 H교수 운동에 동참했고 모든 사실관계가 인정되었으나 돌아온 것은 ‘해임’이 아닌 ‘정직 3개월’이었다. 2018년 7월 20일 <H교수 사건 대응을 위한 학생모임> 페이스북에는 비록 징계위가 ‘정직 3개월’을 선고하였지만 H교수 사건을 예방할 수 있는 구조적인 개선을 만들어나가게 되었음을 발표했다. 


  우리의 학교는 안전하지 않았다. 인권침해의 사실관계가 밝혀진 교수는 당당히 학교에 들어와서 연구를 할 수 있고 피해자는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학교에 내던져진 것이나 다름없다. H교수뿐만이 아니다. 이 끔찍한 일은 또다시 발생한다. H에서 A로 알파벳이 바뀐 것뿐이었다. 서어서문학과의 A교수는 피해자에게 원치 않는 접촉을 시도했고 졸업을 빌미 삼아 협박했다. 이런 악질적인 행위에도 인권센터는 3개월의 정직 처분을 결정했다. H교수 때와 마찬가지의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2019년 8월 31일, 마침내 교원징계위원회에서 A교수의 해임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파면이 아니라 해임이었지만 우리는 H교수와 A교수 사건을 겪으며 학내가 인권무법지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인권수호를 위한 바탕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H교수와 A교수 이후 우리 학내는 안전해졌는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음대 B교수, C교수의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B교수는 피해 학생의 숙소에 강제 침입하였고 수차례의 원치 않는 신체접촉 등의 가해를 저질렀으며 C교수는 피해자를 데려다준다며, 차에 태운 후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수차례 신체를 접촉하는 성폭력 가해를 저질렀다. 심지어 절망적이게도 학교는 C교수의 징계위를 피해자 몰래 시도하다 적발되었다. A교수 사건 당시 서울대학교 당국은 학생들이 A교수 연구실 학생공간 전환을 해제하는 조건으로 “앞으로 피해자에게 징계위에서 가질 수 있는 권한에 대한 공문을 발송하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피해자를 배제하고 가해자의 의견만을 참고하려고 했던 징계위의 시도는 약속을 이행하는 태도라고 보기엔 어려웠다.[각주:11] 학생들은 다시 연대했다. 2020년 11월 11일 보라색 우산 집회는 학내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권력형 성폭력 사건을 규탄하고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한 학생들의 노력이었다. H교수와 A교수의 파면을 외친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참담한 심정으로 이번엔 보라색 우산을 높이 든 것이다. 


  비단 권력형 성폭력 사건뿐만 아니다. 2019년 8월 9일 청소노동자 A씨가 휴게실에서 사망했다. 그 휴게실은 교도소 독방 1.9평보다 작은 1.06평밖에 되지 않았고, 그 방에는 에어컨도, 창문도 없었다.[각주:12] 휴게실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리만큼 비참했던 이 공간에서 A씨는 사망했다. “지병이 있었다더라.”, “환경 때문이 아니다.” 등 무수한 말들이 이 사건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지만 서울대학교 노동자는 안전한 환경을 보장받았는가, 적절한 휴게시간을 받았는가의 질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학교는 노동자에게 또한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인간이 반드시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를 인권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학내에선 인권은 보장되고 있는가. 우리의 대학에선 건조한 언어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건조한 언어들, 진실로 보호받지 못하는 우리의 인권을 향해 학생들은 연대하고 더욱더 목소리를 높였다. 2020년 9월 28일 서울대학교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 페이스북에는 인권헌장 제정을 촉구하는 카드뉴스가 게시되었고 인권헌장 릴레이 홍보사업 ‘인권열차’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동아리와 단과대, 학생들이 연대해가는 과정 속에서도 혐오세력은 ‘진정한 인권’이라는 혐오를 이야기하였고 그럴수록 우리의 연대는 더욱 단단해지고 인권헌장에 대한 열망은 깊어져 갔다. 학생들은 “서울대에 평등을 허하라!”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연대하며 혐오 표현에 대해 규탄했다. 학내 892개, 외부연대 94개의 연대가 인권열차의 길을 만들며 서울대학교가 더이상 혐오와 배제를 당연히 여기지 않기를 촉구했다. 알파벳 교수들, 아니 훨씬 더 오래전부터 발생해왔고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인권침해에 대해 우리는 이제 눈을 감지 않으려고 한다. 2020년 12월 27일, <그저 혐오하겠다는, 부끄러운 선언을>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대자보에서 우리는 더 나은 공동체를 말한다.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소명적 지성과 뜨거운 양심의 소리가 밝혀낼 시대를 들여다보자. 분명 그 시대의 교정은 누구도 자신됨으로 가해받지 않는, 평등하고 안전하기에 자유롭고 발전하는 공동체 모습을 띄고 있으리라.”[각주:13]

 

서울대학교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 - 인권열차 -

  수많은 집회와 투쟁과 눈물과 상처는 언제쯤 그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H와 A와 B와 C를 보며 다음은 어떤 알파벳이 우리의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지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봐야만 하는 것인가. 모든 알파벳이 채워질 때 비로소 변화가 찾아올 것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와 약속이다. 더이상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와 우리 공동체 내 인권을 존중하는 문화를 위한 약속이다.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인권헌장이다. 인권헌장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평등을 당연히 말할 수 있는 학교가 될 수 있도록, 서울대가 평등을 허할 수 있도록, 인권헌장에 대한 우리들의 연대는 지금까지 그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4. 인권헌장 제정을 촉구하며


  인권헌장의 조항을 읽다 보면 문득 하나둘씩 학내에서 일어났던 아픔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것은 내 친구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일면식 없는 먼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는 인권헌장 제9조 2항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학업·연구 및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언행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가진다.”, 제10조 성적자기결정권,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동의하지 않은 성적 언행으로 인하여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를 보고 권력형 성폭력 사건들이 생각났으며, 제8조 1항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안전하고 건강한 대학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가 있다.”, 2항 “서울대학교는 구성원이 대학생활 전반을 안전하고 건강하게 영위할 수 있는 대학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를 보고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서 끝끝내 일하셨던 서울대학교 노동자가 떠올랐다. 인권헌장에는 우리의 아픔이 새겨져 있다. 이 조항들이 만들어지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아파하고 슬퍼하였는가. 우리의 상처가 문서화될 때까지 우리는 얼마나 고통받았는가. 또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상처받고 분노하였는가.


  학내의 많은 구성원들이 인권이 존중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싸워왔지만, 우리의 공동체는 아직 인권침해상황에 매우 취약하다. 기존의 인권가이드라인이 실효성 측면에서 부재한 것도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스스로가 인권을 위한 책임에 대해 소홀히 한 경향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마땅히 지켜져야 하는 인권이란 아무런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학내의 우리 모두가 인권을 수호하려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인권의 존중이 이루어지는 안전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권헌장의 제1조 (목적)에서는 서울대학교와 그 구성원의 인권 책무를 확립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즉, 인권헌장은 인권가이드라인의 실효성 측면을 보완하여 학내의 인권침해사례에 보다 책임을 갖고 접근하겠다는 의지의 선포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다시 목청 높여 인권헌장을 부르짖어야 할 때다. 누군가의 상처를 당연시하고 방기하는 언행에 책임을 이야기할 때다. 인권헌장은 과거 우리 공동체가 경험했던 아픔을 기록함과 더불어 우리가 만들어나갈 공동체에 대해서도 표명한다. 우리가 원하는 학교는 혐오가 만연한 학교인가. 성적자기결정권이 침해받는 학교인가. 안전한 환경을 보장받지 못하는 학교인가. 우리가 지향하는 공동체는 누군가의 상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서로가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줄 수 있는, 각자가 자유와 권리의 가치를 알기에 책임에서 회피하지 않는, 사랑으로 가득 찬 공동체일 것이다. 우리의 공동체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인권헌장에서 뒷걸음질 치기에는 우리는 더이상 발 디딜 틈조차 남아있지 않다.  

 

 

 

 

펭로시

  1. 더 자세한 내용은 이은혜 기자, <반동성애 진영, 이제는 서울대 인권 헌장도 반대…좌표 찍고 온라인 공청회 난입해 댓글 테러>, 뉴스앤조이, 2020-10-20, 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1605 [본문으로]
  2. [국가 인권위원회] 성적지향을 인정하면 성도착증을 인정하게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 자료를 참조; humanrights.go.kr/site/program/board/basicboard/view?currentpage=1&menuid=001002002001&pagesize=10&boardtypeid=13&boardid=7604898 [본문으로]
  3. 이은혜 기자, 위 기사. [본문으로]
  4. [동성애, 동성혼 반대 국민연합] blog.naver.com/nahs114/222117089208 [본문으로]
  5. [국가인권위원회] 성도착증과 성적지향의 차이점: humanrights.go.kr/site/program/board/basicboard/view?currentpage=1&menuid=001002002001&pagesize=10&boardtypeid=13&boardid=7604898 [본문으로]
  6. 이은혜, 위 기사. [본문으로]
  7. 과연 그런가? [본문으로]
  8. 즉, 행위의 실천자인 행위자(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를 배제한 행위만을 비난하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본문으로]
  9. 넓게는 사회. [본문으로]
  10. 김일환, <‘H교수 운동’,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서울대저널, 2018-06-07; www.snujn.com/index.php?mid=news&category=117&document_srl=38586 [본문으로]
  11. 음대 교수 사건 대응을 위한 특별위원회 11.11 보라색 우산 집회 홍보 카드뉴스 [본문으로]
  12. 중앙집행위원회 인권연대국 정기인권 카드뉴스 04 [서울대학교 학내 노동권] [본문으로]
  13. [Facebook] 서울대학교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 참고 [본문으로]

 

1. 들어가면서


  코로나19가 한국에 상륙한 지 8개월이 지난 2020년 9월 초, 서울대학교는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을 지급했다. 지급대상은 등록금 본인 부담금이 발생한 자, 지급 금액은 등록금 본인부담금에 비례하여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장학금을 지급하게 된 배경에는 1학기 내내 있었던 등록금 반환 운동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전국대학생네트워크는 설문조사를 통해 상반기 등록금 반환이 필요하다는 공통의 의견을 이끌어냈고, 서울대학교에서도 등록금심의위원회에 비공식적으로 학생위원이 참여하여 등록금 반환 논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코로나19 특별장학금을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보기엔 아쉬움이 있다. 우선 반환 형식이 ‘장학금’이 되면서, 등록금 반환 논의는 ‘코로나19라는 특수 상황에 따른 조치’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려워졌다. 코로나 시국은 1년 넘게 이어졌고 장기적인 피해가 충분히 예상되는데, 그 이후 대학 교육 부담을 가계와 사회가 어떻게 나누어져야 하는지는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또한, 지급 금액 역시 정확히 어떤 부분에 대한 환불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실습수업이 있는 음/미대 학생들의 경우 다른 단과대 학생보다 더 많은 금액을 돌려받았지만, 애초에 등록금 중 실습비로 얼마나 더 내는지 알 수 없어서 돌려받은 금액도 합당한지 판단하기 어렵다. 즉, 등록금을 더 많이 내야 했던 이유도, 더 많이 돌려받아야 하는 이유도 소명되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장학금의 지급 이유인 ‘학업 고충 경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온라인 비대면 수업이 시행되면서, 에브리타임과 같은 학내 커뮤니티에는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 발생한 각종 웃지 못할 사건들이 제보되었다. 마이크를 끄지 않고 화장실을 간 학생, 판서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수업 등 모두가 혼란스러운 시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장소가 제한되고 사람들이 모이기가 어려워지면서 수업 외에 코로나19 이전에 할 수 있었던 여러 활동에도 제약이 생겼다. 이전과 비교했을 때 이러한 불편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왜 이 불편함이 하필이면 등록금 반환 요구로 이어졌을까? 생각해보면 이러한 문제는 등록금을 반환받을 학생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불편함을 등록금 단 5~6% 반환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운동은 ‘공정한’ 등록금을 책정하는 데 집중하면서 그 바깥 논의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린 것은 아닌가?


  최근 다시 대학 등록금 인상이 거론되고 있는 상황은 예상 못 했던 바가 아니다. 대학은 코로나19로 예정에 없던 지출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그 부담을 등록금으로 덜려고 한다. 필자는 이에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과 등록금의 의미를 성찰해보려고 한다. 필자는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에 대해 교육저널 편집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 지급에 내포된 허점들을 살펴보고, 부족하게나마 더 나은 논의를 위한 기반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2. 이 장학금은 어디에 쓰이는 장학금인고?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먼저 등록금 본인부담금이 발생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등록금 본인부담금에 비례하여 ‘긴급학업장려금’을 지급한다. 두 번째로, 한국장학재단 학자금지원구간 8구간 이하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1인당 50,000원을 일괄지급하는 ‘긴급구호장학금’이 있다. 이 장학금은 긴급학업장려금과 중복수혜가 가능하다.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이 지급된 맥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장학금 지급 공지에 나와 있는 ‘학업 고충 경감’이고, 또 다른 하나는 2020년 1학기 있었던 ‘등록금 반환 운동의 결과’이다. 후자의 맥락은 공지나 안내에 직접 드러나 있지 않지만, 장학금 지급 논의가 등록금심의위원회 학생들의 등심위 개최 요구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등록금 반환 운동과의 연결성을 떼놓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더불어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 중 긴급학업장려금은 학생이 등록금을 낸 것에 비례하여 장학금을 지급하는 형식으로, 등록금 일부를 돌려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각각의 맥락에서 장학금을 살펴보았을 때, 이 장학금의 의미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필자는 이 장학금의 목적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임을 먼저 짚고 싶다. 우선 ‘학업 고충 경감’이라는 장학금의 목적이 학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교육저널 소속 학생 인터뷰에서는 ‘학업 고충 경감’이라는 장학금의 목적에 이의가 계속 제기되었다.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에서 1번은 등록금을 낸 만큼 돌려주는 것이고, 2번, 긴급구호장학금은 소득분위 8분위 이하인 학생에게 주어지는 장학금이잖아요. 그런데 1인당 5만 원씩을 그냥 일괄적으로 지원했는데 고충 경감 비용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것 같아요.

 

  모든 사람에게 보장된 게 아니라 신청한 사람만 받을 수 있는 것도 문제적인 것 같고, 국가장학금 받은 사람은 신청 대상이 아닌 것도 문제적인 것 같아요. (...) 등록금을 더 냈다고 고충이 더한 것도 아니고, 등록금 감면이 재정적으로 힘든 가정이 고충을 더 많이 겪었을 수도 있는데. 낸 거에 비례해서 준다는 게...


  위에서 설명한 장학금 지급 방식에 따르면 긴급구호장학금을 받지 못하는 9, 10분위 학생들을 제외하고 8분위에서 1분위로 갈수록 지원받는 장학금의 액수가 적어진다. 음/미대를 제외하고도 단과대별로 등록금 액수에는 차이가 있어서 구체적인 액수를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긴급학업장려금은 냈던 등록금의 5~6%, 8분위 이하부터 주어지는 긴급구호장학금은 50,000원 일괄 지급이므로 8분위부터 소득분위가 낮아질수록 적은 액수를 받으리란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소득 분위가 낮을수록 경제적, 사회적 여건이 어려우리란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조치가 학업 고충 경감이라는 목적에 맞게 분배된 것인지 의문스럽다.


  또한 장학금 형식으로 등록금이 반환이 이루어졌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물론 장학금 신청 절차가 까다롭지 않아 지급 방식이 높은 장벽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지원이 아니라 학생이 직접 장학금 신청을 해야 장학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지원이 필요한 이들에게 장학금이 지급되지 않을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등록금을 낸 학생 전원에게 등록금을 반환하려는 의도가 충분히 반영되려면, 학교 측에서 무차별적으로, 전부 일정 금액을 돌려주는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시기가 맞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특별장학금으로 책정한 금액을 학기 등록금에서 제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예외들을 따로 보완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장학금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학생 개인이 져야 하는 책임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경남대학교에서는 10만 원은 학업장려금으로 현금 지급하고, 2학기 등록 시 10만 원을 뺀 차액을 등록금으로 납부하는 방식으로 등록금을 반환한 바 있다.[각주:1] 


  결정적으로, 낸 등록금에 비해 장학금으로 지급된 금액이 많지 않다는 점도 짚을 수 있다. 학교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면서 발생한 피해,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면서 생긴 애꿎은 지출을 고려하면 학교에서 장학금으로 지급된 금액은 턱없이 부족하다.

3. 학교의 재정에 관여할 수 있는 권리


  그렇다면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의 ‘등록금 반환’이라는 목적을 살펴보자. 등록금 반환 운동에서 화두가 되었던 것은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등록금은 똑같이 낸다는 점’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구체적인 반환 금액을 제시하기 어려웠는데, 이것은 학생들이 비대면 수업을 하면서 무엇을 할 수 없게 되었는지, 그에 따라 학교에서 기존의 예산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등의 정보에 원천적으로 차단되어있어 발생한 문제이다. 분명히 비대면 수업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은 많은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등록금이 줄어들지 않은 구체적인 근거를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애초에 등록금 책정에 있어 전반적인 합의가 부족하므로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이 무엇을 보상하는 장학금인지 알기 어렵다. 서울대학교 홈페이지 자료실에 공개된 2020년 등록금심의위원회(이하 등심위) 회의록에 나타난 학교와 학생 측의 입장을 살펴보면, 학교 측은 학교 운영에 있어 적자가 발생하는 것을 근거로 등록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학생 측은 등심위 이전에 이러한 적자가 발생한 예결산 안조차 제대로 검토할 수 없다. 단과대학에 학생회가 직접 예결산 안을 요구하면 본부에 요청하라 하고, 본부에 예결산 안을 요구하면 단과대학의 자율성 침해를 이유로 꺼리기 때문이다.[각주:2] 학생들은 학교 재정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구성원의 권리–재정 운영과 집행에 목소리를 낼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사실 ‘등록금을 반환하라’ 이상의 구체적인 요구를 하지 못한 까닭 역시 대학 재정의 불투명성에서 기반한 것일 수 있다. 학생은 학교 재정 관련 정보에 상당 부분 차단되어있어 학교에서 예산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도 알기 어렵고, 학교에 예산 사용 방향을 제안하기도 어렵다.


  이렇게 장학금이 무엇에 대한 보상인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기 때문인지, 장학금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인터뷰이에게 질문했을 때 나온 답변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장학금 자체에 대해서는 ‘금전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에 대한 구호’ ‘적응하기 힘든 상황에 대한 위로’, ‘종합대학으로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기회에 대한 보상’이라는 이해가, 지급 배경에 대해서는 ‘코로나19로 발생한 잉여 재정을 다시 반환하는 차원’, ‘(조금이라도 돈을 줌으로써) 등록금 반환 논의를 무마하기 위한 시도’ 등의 해석이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차원의 해석이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에 부합하는 상황은 한편으로는 ‘등록금과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에 대한 합의가 부족하다’는 결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당장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등록금 책정과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이다. 학생 측에 공개된 자료만으로 학생들은 자신의 학습권이 얼마나 침해당했고, 등록금에서 어떤 부분을 돌려받아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다. 즉, 이 장학금을 받는다고 해서 학생은 “등록금 ATM이 아니”[각주:3]라고 주장했던 배경은 바뀌지 않는다. ATM으로만 남지 않으려면,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낸 등록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하고, 학교의 구성원으로서 재정의 사용에 대해서도 합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4. 코로나19 특별 장학금, 그 바깥의 문제


  등록금에 관한 의사결정 과정과는 별개로,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이 보완해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등록금 반환은 중요한 의제이지만, 이 의제만으로 2020년 1학기에 학생들이 직면한 위협에 대처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앞서 ‘2. 이 장학금은 어디에 쓰이는 장학금인고?’의 말미에 언급되었듯이 낸 등록금에 비해서 장학금의 액수가 적기도 하고, 학생들이 겪는 학업 고충의 문제는 학생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등록금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개인이 아닌 대학 공동체 안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앞서 긴급학업장려금의 지급 방식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은 등록금을 낸 만큼 비례하여 지급하고, 직접 신청한 학생만 받을 수 있었다. 신청 방법이 아주 까다로운 것은 아니지만, 학교 측에서 적극적으로 등록금을 돌려주려는 모양새는 아니었던 것이다. 한 인터뷰이는 낸 등록금에 비례해서 지급된 장학금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또 다른 의문점을 제기했다.


  비대면수업을 함으로써 수업을 받기 어려운 학생들이 있었을 텐데, 집에서 줌으로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공간 확보가 안 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학생들을 위해서 비대면 수업을 지원해줄 공간이나 이런 걸 마련해줘야 하는데, 공지도 제대로 안 되었고 늦게 마련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낸 등록금에 비례하여 지급된 긴급학업장려금과 5만 원씩 지급되는 긴급구호장학금으로 보완하기 힘든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소득분위에 따라 등록금을 내는 액수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공간이나 기기가 마련되지 않아 학업에 장애가 생기는 이들은 등록금을 덜 낸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지급하게 된 까닭은 등록금 반환 논의에 따라 일괄적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일정 금액을 반환해야 했기 때문일 수 있지만, 장학금의 학업 고충 경감 목적과 실효성을 따져보면 분배 방식과 지급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아울러 비대면 수업으로 수업의 질이 저하되었다는 불평은 나오는데, 수업의 질을 어떻게 향상할 것인가를 말하는 목소리는 너무 적다.


  장학금에 대한 논의는 활발했는데, 수업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한지 논의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특별위원회 같은 것을 마련해서 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해서, 실질적인 변화를 마련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수업의 질과 관련된 논의가 진척되지 않는 까닭을 생각해보면, 학생들과 교수자의 의사소통이 쉽지 않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단순히 비대면 강의로 전환된 상황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비대면 강의로 인한 불편함, 시험 방식, 과제 부담 과중 등 학생들의 불만은 학생회 설문 조사를 통해서 표출되었을 뿐, 수업 중에 수강생들에 의해 직접 전달되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코로나 이전부터 교수와 학생의 권력 차이, 강의 평가 제도의 부실 등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즉각적인 피드백이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즉, 원래도 있었던 문제들이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되면서 또 다른 피해를 만들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수업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32억 원이라는 거금을 투여했지만 정작 학생 개인에게는 음/미대 기준 낸 등록금의 15~16%, 나머지 단과대 학생들에게는 낸 등록금의 5~6% 정도만 반환되었다. 인문대 학부생이고 소득분위 10분위인 필자 기준으로는 142,000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 금액은 필자가 등록금으로 내야 했던 비용과 비대면으로 전환되면서 지불해야 했던 부차적인 비용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금액이 적은 것도 문제지만, 개개인에게 전달된 이 장학금으로는 온라인 비대면 학교생활의 질적인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도 큰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한 인터뷰이는 금전적인 지원이 다른 방식으로도 이루어져야 함을 지적했다.


  특별장학금이 개인에게 주어지고 있는데, 동아리 차원에서 총학생회에서 운영비가 남아서 동아리실을 꾸미는 지원금으로 지원을 해줬잖아요. 그런 식으로 동아리 활동도 많이 죽어가고 있으니까, 기프티콘이라도 해서, 동아리별로 온라인 모임을 장려하는 식으로 지원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금전적으로든, 활동을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든, 동아리, 학생회 등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원이 있다면 학교 내 여러 집단에 속해있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5. 대학 교육은 누가, 어떻게 부담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때


  비록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이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어내기에 금액이 너무 적고 방식에 한계가 있더라도, 코로나19로 인한 고통을 학생과 분담하겠다는 의미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무기력감이 있었어요. 누구의 탓이 아니다 보니, 감수 해야 할 몫인 것 같고, 내가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 같아요. 학교에서 이걸 해결해줄 수는 없겠지만, 간접적인 방식으로 지원해주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독감 주사를 학교 보건소에서 지원해줬는데, 이 시국에 우리의 건강을 신경 써주고 있구나, 간접적으로도 관심을 표현해주는 것 같아서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대학이 코로나19 시국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음에도 장학금을 지급한 것은 대학이 사회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장학금은 비록 학부생들에게 굉장히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 지난 학기 동안 학생들이 받았을 고통을 학교도 같이 부담하겠다는, 복지 차원에서의 장학금이라는 공통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필자는 등록금 반환 의제만 지나치게 대표된 상황을 문제시했지만, 등록금이 가장 긴급하게, 제일 먼저 논의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개인에게 지워지는 등록금 부담이 너무 큰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2017년을 기준으로 고등교육에 정부/민간 투자의 상대적 비율을 살펴보면, OECD 평균이 ‘68.2(정부):28.6(민간)’인 반면, 한국은 ‘38.1(정부):61.9(민간)’으로 민간의 투자 비중이 큰 편이다. GDP 대비 고등교육의 민간 재원 비율은 1.0%로 OECD 평균 0.4%를 훨씬 넘는다.[각주:4]


  코로나 이전에도 등록금 부담이 컸다는 배경을 고려하면, 등록금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코로나19로 인한 전방위적 피해 속에서 ‘학생 개인과 학생이 속해있는 가정에 주어지는 등록금 부담이 지나치다’는 불만의 표시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한 인터뷰이는 대학 교육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이상적으로는 대학교육도 초중고처럼 사회에서 부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당위성도 분명히 있어요. 실제로 그런 게 합의가 많이 되어있다고 생각하고요.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 대학이 작동하지만, 이상적으로나마 추구하는 대학의 목적은 사회 발전, 비판적 지식인 양성 이런 게 있을 텐데, 그러한 대학의 존재 이유나 목적을 따져본다면 초중고보다 더 국가에서 책임지고 감시하고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들을) 양성할 필요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의 대학은 학벌과 취업으로 이어진다. 2019년 대한민국 청년층(25~34세)의 고등교육 이수율은 69.8%로 OECD 국가 중 2위를 차지했다.[각주:5] 많은 부담을 지면서도 고등교육을 이수하려는 이유는 대학 졸업장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일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격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대학은 단순한 인력 양성소가 아니다. 대학은 지식을 생산하는 기관으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많은 대학 구성원들이 시국선언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의 정당성을 강화했듯이, 대학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공동체이다. 대학은 그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공동체이고, 사회 역시 대학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대학에 역할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적인 측면으로든 이상적인 측면으로든 한국에서 대학이 가지는 의미와 대학의 존재 이유, 등록금 부담 주체는 새롭게 고민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은 사회 전반에 걸친 고통에 대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마리일 수 있다. 이번에 서울대학교가 특별장학금을 지급한 것으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은 대학 등록금이 대학 구성원들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등록금은 가정에서부터 국가까지 여러 공동체가 함께 얽힌 일이고, 그 공동체들이 같이 고민해야 할 일이다.

6.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은 어디로 가야 할까?


  그렇다면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은 2학기에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1학기의 혼란스러웠던 상황은 지났지만 2학기가 된 후에도 코로나19는 잠잠해지지 않았고, 그에 따른 학부생들의 부담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2021년 등심위에서 등록금 인상이 언급된 것을 살펴보면 이 상황에 다시 등록금 반환을 요구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번 등심위에서도 작년, 2020년 등심위와 많이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학교 측은 산학협력단 및 발전기금으로부터의 전입금이 감소한다는 사실과 양극화 심화를 완화할 소득재분배가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등록금 인상을 요구했다. 정작 학생 측은 전입금 감소에 대한 명확한 자료를 볼 수 없었고, 학교 측에서 주장하는 소득재분배는 등록금을 인상하지 않았을 때와 비교하면 효과적이지 않다. 더불어 피해의 강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코로나19는 사회 전체에 광범위한 피해를 줬다. 마찬가지로 힘든 시간을 겪었을 소득 분위가 높은 가정이 무리 없이 인상된 등록금을 부담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2020년 1학기 뜨겁게 타올랐던 등록금 반환 운동은 특별장학금으로 어느 정도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얼마나 효능감 있었을까? 이 시점에서 할 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여전히 등록금이 어떻게 책정되고 사용되는지 모르고, 좋지 못한 교육환경과 코로나19라는 재난의 이중고를 겪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등록금과 대학 교육의 질을 비교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코로나19가 드러낸 대학에서의 불평등과 대학 구성원으로서 학생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 항상 필요했던 것이지만, 이번을 기회로 사회 속 대학의 역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월영

  1. '경남대, 사립대 첫 등록금 반환 결정', 도영진, 경남신문, 2020.08.03.(기사입력), 2021.02.24.(기사인용), 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330982. [본문으로]
  2. 서울대학교 2020 등록금심의위원회 회의록 1~3차, 서울대학교-대학소개-자료실, www.snu.ac.kr/about/downloads?md=v&bbsidx=125915 [본문으로]
  3. '"학생은 등록금 ATM 아냐" 들불처럼 번지는 등록금 반환 요구', 김선호, 연합뉴스, 2020.05.06.(기사입력), 2021.02.24.(기사인용), www.yna.co.kr/view/AKR20200506144800051 [본문으로]
  4. '등록금에 허리휘네... 민간 부담 대학 교육비, OECD보다 30%p 높아', 김수현, 2020.09.08.(기사입력), 2020.02.24.(기사인용), www.yna.co.kr/view/AKR20200908069500530 [본문으로]
  5. '한국 OECD 국가 중 청년 대학 진학률 2위', 전유진, 중도일보, 2020.09.09.(기사입력), 2021.02.24.(기사인용), www.joongdo.co.kr/web/view.php?key=20200909010003028 [본문으로]

  코로나로 인적 끊긴 대학에도 어김없이 시끄러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번 [대학현안]은 코로나19 특별장학금과 인권헌장을 둘러싼 논의를 분석하고, 이를 교육저널의 시선으로 풀어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당연함을 위한 행진> 소개 이미지

 

  이번 학기에 인간과 동물이라는 교양 수업을 들었다. 수업을 들었던 이유는 인간-자연 혹은 인간-동물 관계가 현실에서 어떻게 얽혀있는지 공부하고 공존이 가능한 대안적인 관계를 상상해보고 싶어서였다. 수업 과제 중 에세이를 쓰는 과제가 있었는데, 주제는 ‘내가 기억하는 특별한 동물’이었다. 과제를 쓰기 위해 고민을 하던 중, 문득 기억에 남는 특별한 동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물에 대한 피상적인 기억은 있다. 밥상 위에 올라온 고기, 산책할 때 보았던 목줄 채워진 강아지, sns에 올라오는 친구들의 반려묘,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아쿠아리움에서 보았던 돌고래 등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과제를 쓰면서 ‘우리가 과연 연결된 관계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상호 연결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말을 교과서에서, 뉴스에서 항상 보아왔다. 나와 너가 연결되어 있고, 나와 동물이 연결되어있고, 나와 자연이 연결되어있음을. 하지만 그 관계는? 우리는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끼고 있을까? 혹은 인지하고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인지할 수 있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가’, ‘관계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고 있는가’ 라는 의문도 들었다. 물론 환경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어느 빙하조각에 겨우 매달려있는 북극곰과 죽어있는 새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거나 전세계 사람들이 모두 불을 끄면 지구의 온도가 몇 도 내려갈 수 있다는 수업을 받긴 했지만, 나의 선택이 타자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교육 혹은 나의 삶과 타자의 삶 사이에 놓인 구조를 배울 수 있는 교육은 많이 없었다. 오히려 나의 경우, 공식적인 수업 시간보다 일상에서의 배움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교육에서 인간과 자연(혹은 동물)의 연결된 관계를 어떻게 다루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안적인 교육 아이디어를 제안해보고 싶다. 단순히 죄책감과 동정심을 바탕으로 한 교육이 아니라, 나의 일상 속에서 우리의 관계를 인지하고 관계에 대한 책임을 갖는 교육. 윤리적으로 맞다 그르다를 판단하는 교육을 넘어서 주어진 현실 속에서 실천함과 동시에 현실 너머를 상상하는 교육. 그러한 교육들을 나의 경험을 중심으로 애기해보고자 한다.


교육과정 안에서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의 연결

 

  교육에서 우리의 연결을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자. 교육과정 내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련한 내용은 각 교과교육범위에 부분적으로 담겨있다. 특히 사회와 윤리 교과서에 관련 내용이 담겨 있다. 사회과 교과서에서는 사회 현상에 대한 통합적 관점의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각주:1] 통합사회 동아출판 교과서의 경우, 통합적 관점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주제 탐색 활동에 멧돼지 도심 출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만화 형태로 멧돼지 도심 출현 빈도가 증가한 까닭에 대하여 국립공원 관리 공단 직원, 담당 공무원, 생태학자, 환경 단체 회원의 의견을 묻고 있으며, 마지막 컷에는 “난 뭐, 내려오고 싶어서 내려오는 줄 알아?”라며 멧돼지의 입장(?)을 그리고 있다. 짧은 만화를 보고, 학생들에게 ‘멧돼지와 인간 중에 누가 피해자일까?’, ‘멧돼지와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는 사회현상을 바라볼 때 여러 주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시간적, 공간적, 사회적, 윤리적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나의 환경 문제가 결코 단선적인 원인과 방안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림1. 주제 탐색 활동_멧돼지 도심 출현 만화>


환경 문제는 인간 사회의 문제?


비인간동물의 입장에서 혹은 생태계 차원에서 환경 문제를 접근해보자!


  사회 교과서 2단원 [자연환경과 인간]에서는 자연환경이 인간의 생활 양식에 미치는 영향, 인간의 자연환경 활용 방법, 자연재해가 인간 생활에 미치는 긍·부정적인 영향,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 인간과 자연의 바람직한 관계,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과 실천 방안 등을 다루고 있다. 자연환경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아쉬운 점이 남는다. 주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비교적 인간중심적인 관점으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환경 문제 해결의 필요성으로 지구 온난화, 사막화, 열대림 파괴 등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물론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가 대기 오염 및 각종 폐기물과 폐수 등의 환경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있으나, 이 역시 시민들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수준이라고만 서술되어 있다. 환경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논의할 때 인간중심적인 관점이 강조된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혹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위해서 환경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 공동체의 범위를 ‘인간 사회’로 한정짓는 주장일 수 있다. 학습의 기본적인 자료가 될 수 있는 교과서에서 환경문제를 단순히 인류의 문제로서만 접근한다면 이는 더 넓은 범위의, 혹은 경계 없는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교과서에 환경의 변화를 인간이 아닌 동물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는 내용이나 전체 생태계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활동이 추가되면 좋을 듯하다. 예를 들면, 인간과 축산동물의 역사적 관계를 성찰하는 학습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 사회는 물리적 생존을 위해 전통사회부터 수렵과 채집을 해왔다. 생존을 위해 자연물을 이용했으나 자원을 제공해준 자연에 감사를 표하며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동물을 신으로 모시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고기는 ‘공장식 산업’의 형태로 생산된다. 이윤 논리 하에서 동물의 고통은 고려되지 않는다. 더 많은 닭가슴살과 닭다리를 생산하기 위하여 닭은 호르몬 주사를 맞고, 비대해진 몸을 버티지 못해 다리가 부러진다. 뒤돌아볼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사육되는 닭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 할퀴면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부리와 발톱을 자른다. 알을 낳을 수 없는 수평아리는 비닐 속에서 생매장된다. 돼지의 경우, 모돈은 일생을 임신과 출산의 반복 속에서 보내다 죽으면 소시지가 된다. 출산을 너무 많이 한 탓에 생고기로 먹기엔 질기기 때문이다. 이 글의 목적은 공장식 축산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만 줄이지만, 우리가 교과서에서 학습하는 인간과 자연(혹은 동물)의 관계는 극히 피상적이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우리가 왜 관계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다채로운 학습이 단순히 ‘환경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적이고 모호한 내용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대안적인 학습으로 공장식 축산업 구조 하에서 인간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익을 얻고, 동물은 어떠한 방식으로 삶을 빼앗기고 착취당하는지를 비롯해서 인간 생활 곳곳에 존재하는 비인간 생명체의 삶이 어떠한지, 우리는 이에 어떠한 관점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림2. 주제 탐색 활동_‘자연물을 소송의 주체로 볼 수 있는가’ 만화>

  교과서에서도 흥미롭다고 생각한 내용이 있었는데 사회과 중 자연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관점을 탐구하는 단원에서의 주제 탐색 활동이었다. 해당 활동은 자연물을 소송의 주체로 볼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경부 고속 철도에서 천성산을 관통하는 터널 건설 계획이 발표되었는데, 환경 단체는 천성산에 사는 도룡뇽을 원고로 내세워 정부 고속 철도 공사를 중지하는 가처분 소송을 하였다. 천성산은 22개의 습지와 12개의 계곡이 있으며, 1급수 환경 지표종인 꼬리치레도룡뇽의 대규모 서식지이기 때문에 생태적 가치가 높은 곳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터널을 뚫으면 천성산의 습지가 메말라 도룡뇽이 살 곳을 잃게 된다. 하지만 대법원은 고속 철도 터널 공사가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도룡뇽’은 사건을 수행할 당사자 능력이 없는 자연물이기 때문에 소송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룡뇽의 권리를 주장하는 환경 단체와 도룡뇽을 원고로 인정하지 않는 재판관 사이에는 어떤 시각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보고 도룡뇽을 원고로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작성해보는 활동[각주:2]이다. 관련해서 필자는 대법원이 무엇을 근거로 고속 철도 터널 공사가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언급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그것 역시 인간중심적인 시각에서 판단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을 수행할 당사자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소송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굉장히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교육이다. 이러한 활동은 인간에 의해서, 인간중심적으로 개발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비인간동물의 입장을 혹은 생태계 차원을 어떻게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반영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핵심적인 활동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이 단지 주제 탐색 활동에만 있는 것은 아쉬웠다. 시간 상 보통 이러한 활동을 하지 않고 넘어가거나 하더라도 10분 정도의 짧은 시간만을 할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 탐색 활동처럼, 교육에서 환경 문제를 다룰 때 비단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다룰 것이 아니라 비인간동물과 자연과의 연결성 차원에서 고민하는 활동이 늘어난다면 ‘환경 문제’를 다룰 때 우리 공동체를 확장하여 보다 다채로운 학습이 가능할 것이다.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x


당위적인 내용의 나열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작동하는 ‘환경 정치’ 토론하기!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도 보다 다층적인 고민을 할 수 있도록 교과서에 관련 내용이 추가되어야 한다. 가령, 사회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세계 각국은 환경 관련 제도와 정책을 강화하고, 기업은 친환경 제품을 개발하고, 시민 사회는 정부의 환경 정책과 기업의 환경 윤리 준수 등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개인이나 가정에서는 생활 속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환경 보호를 실천하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적인 말의 나열보다 세계와 기업과 시민 사회, 개인의 실천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 보다 치열하게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수업 시간에 토론을 통해 가능하겠지만, 사실 한정된 수업 시간 안에 심층적인 토론을 진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교과서에 관련된 세밀한 내용이 실린다면 짧은 시간 안에 보다 풍부한 토론이 가능할 것이다. 가령, 범세계적인 환경 관련 제도와 정책에는 무엇이 있고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는지, 친환경 제품을 개발하는 기업은 어떤 기업이 있고, 국가는 친환경적인 시장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시민 사회는 어떠한 환경 정책에 어떠한 이유로 반대하고 있는지, 개인은 일상 속에서 어떠한 노력을 할 수 있고, 그러한 노력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등의 내용이 보다 현실적으로 담긴다면 학생들이 교과서를 보고도 환경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이고, 얼마나 사회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고, 내가 어떠한 실천을 해야 하는지를 보다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소제목에서는 이를 ‘환경 정치’라 이름했다.) 또한 환경 문제를 ‘환경 문제’라고 통틀어서 볼 것이 아니라 보다 세심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쓰레기, 폐수 등의 오염 물질 배출 또는 지구온난화 또는 사막화가 동물이나 생태계에 혹은 자연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일지 원인과 대상과 결과를 분석하며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인류의 생존에 영향을 미친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인류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추가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단순히 인류의 문제가 아니라 비인간동물의 입장에서 혹은 생태계 차원에서 환경 문제를 접근하는, 당위적인 내용의 서술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이 각 주체에게서 어떻게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은 왜 필요하고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는 관점에서 교과서가 보완되어야 한다.

윤리적 성찰과 더불어 현실 속 인간과 자연(혹은 동물)의 연결 관계 살펴보기!


  생활과 윤리 교과서에서는 과학 기술, 동물 복제, 동물 실험, 육식 등의 문제를 윤리적 관점에서 접근한다.[각주:3] 원전 탐구에서 현대의 윤리 문제에 대한 피터 싱어의 성찰을 다루며 동물을 그저 우리가 먹을 고기를 생산하는 기계로만 대우해도 좋은지,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데도 지구 온난화를 초래하는 자가용을 이용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입장을 비교적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하고(인간 중심주의, 동물 중심주의, 생명 중심주의, 생태 중심주의), 환경 문제에 대한 윤리적 쟁점을 다루며 비교적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하여 보다 윤리적으로, 보다 비인간동물과 생태계 차원을 고려하여 서술한다. 요나스의 책임윤리와 레건의 ‘삶의 주체’ 개념, 테일러의 ‘목적론적 삶의 중심’ 개념이 등장하여 왜 우리가 비인간동물의 삶을 고려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보다 심도 있게 생각할 기회를 마련한다. 또한 의식주 윤리와 윤리적 소비를 다루며 일상에서 환경 문제의 극복 방안을 실천하는 자세를 함양하도록 한다. 하지만 아쉽다고 생각한 부분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행위가 자연 혹은 동물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관계의 맥락에서 서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가령, 채식 위주의 식습관을 가져야 한다면 왜 우리가 채식을 해야 하는지, 우리의 육식과 동물의 삶이 어떠한 구조로 연결되어 있는지, 우리의 음식이 어떻게 밥상에 올라오는지에 대한 고민과 학습이 필요할 것이다. 에너지 절약을 습관화하며 친환경적 소비를 생활화하는 것 역시 왜 에너지를 절약해야 하는지, 에너지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에너지가 생산되는 구조를 친환경적으로 바꾸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의 관계와 구조에 대한 보다 심도있는 고민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바르고 고운 말을 합시다’와 같은 당위적인 명제에서 그칠 수 있다. 일상에서 분리수거를 잘 하자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많은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쓰레기를 배출하는지, 우리가 분리수거한 쓰레기는 어떻게 재활용되는지, 어디로 가는지 등에 대한 고민과 학습이 진행된다면 학생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환경 문제를 나의 문제로 인식하고 대안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도덕과 교육(생활과 윤리는 도덕과 교육의 일환이다.)의 목표와도 연결된다. 교육부에서 고시한 도덕과 교육과정에 따르면, 도덕과 교육의 총괄 목표는 ‘자신에서 타자, 사회와 공동체, 자연과 초월로 이어지는 각 영역의 핵심 가치를 내면화하여 인성의 기본 요소를 실천적으로 확립하는 것’[각주:4]이다. 나와 타자의 관계, 나와 자연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도덕과 교육에서 단순히 관계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 현실 속 인간과 자연의 구체적인 관계의 맥락과 연결성에 대한 설명이 추가된다면 이는 오히려 윤리적 성찰을 바탕으로 관계에 대한 실천적 태도를 함양할 수 있는 좋은 교육이 될 것이다. 윤리적 성찰과 더불어 인간과 자연(혹은 동물)의 역사·정치·경제·사회·문화적 연결 관계를 톺아볼 때, 우리는 대안적인 인간-자연(동물) 관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자연(혹은 동물)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


  앞서 환경 문제를 다룰 때, 인간중심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과 당위적 차원으로만 서술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히려 우리의 행위에 담긴 정치성을 통해서 나와 자연(동물)의 관계를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상품의 ‘생애’를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 밥상에 있는 고기가 어떠한 과정으로 식탁에 왔는지 상상하는 것. 내가 사용하는 전기가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어 내개 왔는지 상상하는 것. 그 길에 얽힌 사람과 자연을 떠올리는 것. 내가 사용하는 물건이 혹은 나의 행위가 무엇에 연결되어 있는지 관계망을 그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하지 않으면, 모든 것들은 분리되어 존재할 뿐이다. 닭은 그저 치킨으로, 페트병은 그저 페트병으로. 상품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와 처리되는 폐수와 그것이 여러 생물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저 가려질 뿐이다.


  상품의 ‘생애’를 보는 과정은 나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차원에서 역시 중요하다. 인간과 자연의 연결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나의 행위가 환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와 더불어 나의 행위는 어떠한 생산 양식과 사회 문화적 환경 속에서 행위되고 있는지를 고민할 수 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나는 능동적인 주체로서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 차원의 실질적인 대안 마련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가령, 플라스틱의 생애와 관련해서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고 버려지는지를 살펴보아야 ‘과도한 플라스틱 생산’과 관련한 정책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책이 단순히 인간중심적인, 혹은 보여주기식 정책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플라스틱 생애의 전과정을, 인간의 생산과 소비 등이 자연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전과정을 톺아보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추적하여 어떠한 친환경 정책을 도입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기업의 책무로도 단순히 친환경적 제품을 생산하는 것만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상품 생애의 전과정이 자연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자연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상품의 생산 과정에서 인간과 인간 외 주체들의 삶을 어떻게 고려할 것인지, 상품 생산을 위해 사용하는 재료는 무엇을 쓸 것인지, 국가는 친환경적인 산업 구조 혹은 친환경적인 생활 방식 마련을 위해 어떠한 정책을 펼 것인지 등을 고민해야 한다. ‘환경에 대한 기업의 사회적 책무’는 상품의 생산, 유통, 소비, 폐기 등 전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하며, 이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연결할 때 가능할 것이다.


  환경 문제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할 때 우리는 환경 문제의 진정한 대안을 알 수 있다. 단순히 태양광 발전을 확대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어떠한 맥락에서 어떤 정도까지, 어디에 태양광 발전소를 짓자는 주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가 먹는 어떤 것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나에게 오는지 살펴보자. 단순히 고기를 먹지 말자는 주장이 아니라, 고기가 어떻게 생산되고 축산업은 어떤 구조 속에 존재하며 그 안에서 인간과 비인간동물의 삶이 어떠한지 생태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우리가 쓰는 전기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보자. 우리의 일상이 타자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아보며 ‘환경 문제’에 접근해보자.


교과과정을 넘어서 교육현장에서 나와 자연의 관계 맺기의 가능성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현장에서 나와 자연의 관계 맺기가 어떻게 가능할지 조심스레 제언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나는 ‘비건 실천’을 한지 1년 정도 되었다. (meat free Monday를 포함하면 1년 반 정도 지났다.) 재작년 가을에 ‘아무튼, 비건’이라는 책을 읽고 공장식 축산업의 실태를 알았다. 나는 책을 통해 고기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수많은 동물이 우리의 음식이 되기 위해 어떠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공장의 노동자들은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의 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인간과 축산동물의 관계는 어떻게 단절되어 있는지 등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진실을 마주했다. 거대한 육식 산업 하에서 이윤 논리로 작동되는 공장을 지금 당장 멈출 수 있는 것인지 질문하기조차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했던 다짐은 무뎌지지 말자는 것이었다. 다른 존재의 고통을 상상하고, 그들의 고통이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인지하는 것. 이것이 내가 책을 읽고 나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다짐이었다. 그렇게 meat free Monday를 시작했다. 비록 편의점에 있는 대부분의 식품(컵라면, 컵밥, 과자 등)에 쇠고기가 들어가고, 시간과 돈이 없을 때 그것을 먹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지만, 불필요한 육식을 최대한 줄여보자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밥약’을 할 때는 비건 식당에 가서 비건 음식을 먹으며 동물권, 환경, 건강 등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관련 영화를 보고 함께 고민했다. 쇠고기 생산의 대표 주자인 패스트푸드점에 비건 버거가 도입되기를 열망하면서도 네슬레가 대체육 시장을 점령하는 것의 함의를 생각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비건 실천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밥상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고, 타자와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그 고민과 생각을 여러 차원에서 정치화하는 것. 이는 정부, 기업, 광고회사 등 여러 주체들의 공모와 공장처럼 굴러가는 축산업의 구조를 밝혀내고 식품 생산 체계의 대안을 상상하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소수자의 권리, 건강, 비인간동물, 환경 등 모든 의제를 아우르는 고민으로 확장될 수 있다.


급식도 배움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채식급식을 통해 음식의 생애를 상상하자!


  더 나은 인간과 동물(자연)의 관계를 상상하기 위해서 나는 채식급식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급식 중 대부분의 반찬에는 아마 동물성 재료가 들어갈 것이다. ‘육식’급식이 일반적인 현실 속에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채식급식을 함으로써 비인간동물의 고통이 우리의 미각을 위해 필요한지, 우리는 어떠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지, 대안적인 식단이 가능한지 등을 고민해볼 수 있다. 물론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대안적인 인간-동물(자연) 관계 상상하기’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채식급식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떻게 나의 식탁에 온 것인지 알고 먹자는 노력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나에게로 오는 과정에서 자연에 미치는 영향, 수많은 노동자의 존재, 동물의 고통을 고려하자는 것이며, 이러한 관계망 안에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생명체의 존재를 고려하자는 것이다. 급식도 배움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전북교육청은 2011년부터 채식급식을 시작했다. 광주 풍령초등학교는 한 달에 한 번 ‘고기 없는 날’을 갖고 있는데, 80% 이상의 학생들과 90% 이상의 교사들이 만족했다.[각주:5] 채식급식은 채식에 대한 관심과 환경에 대한 깊은 고민으로 이어졌다. 이어 경남, 서울, 인천, 울산교육청도 채식급식을 도입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채식급식의 확대는 학생들이 만들어낸 변화이기도 한데, 작년에 울산여고 학생의 헌법소원이 있었다. 비건 실천을 하고 있는데 학교에서는 고기반찬이 제공되니까 채식급식의 선택지를 만들어 인권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헌법소원 이후 국회 차원의 답사와 기후변화포럼 등 여러 단체의 현장 방문이 있었고 울산교육청은 ‘매일’ 채식급식의 선택지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이미 여러 학교에서 채식급식을 시행하며 급식 시간에서 식윤리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채식급식은 분명 다채로운 인간과 동물(자연)의 관계를 상상하는 대안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친환경적인 교육 현장 만들기!


  교육현장을 보다 친환경적으로 만들려는 노력 역시 다채로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상상하는 대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중 하나로 교내 태양광 발전소 설립을 상상해볼 수 있다. 재생가능에너지 사용의 필요성이 사회적으로 증대되면서 많은 교육현장에서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하였다. 학교 운영기금 중 일부를 투자하기도 하고, 학교 구성원과 주민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발전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서울시의 경우, 2016년까지 초·중·고교 및 대학교 328개 시설이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했다.[각주:6] 비록 대부분 발전 설비 용량이 낮아 경제적으로 환경적 목적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태양광 발전소를 교내에 설립하며 우리가 쓰는 전기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학습할 수 있고, 학생들이 협동조합에 가입하여 자치(스스로 통치하다)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다. 단순히 태양광 발전소를 설립하는 것을 넘어서 추가적인 배움이 가능한 프로그램이 필요할 것이다. 고등학교 때 ‘인문학 학당’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활동 일부로 ‘착한 전기는 가능하다’라는 책을 읽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전기가 생산되는 방식, 그것이 인간과 자연에 미치는 영향, 비합리적인 전기 생산을 통해 이윤을 탐하는 자들, 대안적인 전기 생산 방식 등에 대해서 처음으로 고민해보았다. 우리가 쓰고 있는 전기가 왜 ‘나쁜 전기’인지, ‘착한 전기’가 가능할 수는 없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을 책을 읽으며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움의 기회가 특별한 프로그램을 통해 산발적으로 마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 자리할 수 있도록 교육 현장의 확장과 전환이 필요하다.


정치적이고 일상적인 의제에 대해 토론하기!


  교과서에서는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개인적 차원, 사회적 차원, 지구적 차원 등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눈다. 개인적 차원에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사회적 차원에서 친환경 기술을 개발하고, 지구적 차원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지구촌 차원의 원칙과 실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단순히 당위적인 설명을 넘어서 보다 정치적이고 일상적인 의제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 에너지 소비를 왜 줄여야 하는지, 우리가 에너지 소비를 줄이면 그것은 현재의 ‘나쁜’ 에너지 생산 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친환경 기술 개발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에너지가 어떻게 생산되고 어떻게 전달되는지 전혀 모르는데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러한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기후 위기라는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 태양광 발전소 설립을 권고했는데, 도시에서 사용되는 전기를 어느 시골 마을이 감당해야 한다면, 혹은 사회적 필요가 아니라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해서 지어진다면, 혹은 발전소를 짓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안전 장치가 미비하고 고용이 불안정하다면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책임없는 당위적인 문장을 가르칠 게 아니라, 환경 관련 의제들에 대해서 보다 정치적이고 일상적으로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을 단일한 두 주체로 상정하지 않을 것!


  인간과 자연의 대안적인 관계를 고민함에 있어서도, 그것이 단일한 두 주체의 분리된 관계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다양한 정치와 관계가 존재함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재생가능에너지 전환을 위한 에너지 정책이 동물의 권리와 생태계에 어떠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고민함과 동시에 그것이 사회적으로 필요한지, 도입하는 과정이 민주적으로 진행되었는지,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었는지, 지역 주민들이 살아오면서 자연과 맺은 관계, 지식, 느끼는 감정이 존중되었는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 인간과 자연(동물)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다양한 문제를 고려할 수 있는, 그러한 배움의 공간이 필요하다. 이는 교내에 태양광 발전소를 설립하는 것뿐만 아니라 관련한 책을 읽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책 저자나 환경운동가의 강의를 듣거나, 에너지 발전소 현장에 직접 가보는 등 여러 배움의 형태로 가능할 것이다.


  두서 없는 글이었지만 정리하면 환경 문제를 다룰 때 단순히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 차원에서 혹은 도덕적·당위적 차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와 나와 연결된 관계에 대한 책임을 느낄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과서의 보완을 통해서도, 혹은 교육현장의 확장을 통해서도 가능할 것이다. 급식시간을, 학교의 곳곳을, 방과후 시간을 배움의 시간으로 만들자. 채식급식을 통해서, 태양광 발전소를 통해서, 학교 끝나고 같이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시간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해보자. 이러한 배움은 분명 보다 다채롭고 대안적인 인간-자연(동물) 관계를 상상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불어넣어줄 것이다. 우리의 고민이 담긴 실천이 나와 나의 주변과 더 나아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각주:7]

 

 

 

 

고슴도치뇽

  1. 위 글에서는 [2015 개정] 고등학교 통합사회 동아출판 교과서를 참고하였다. [본문으로]
  2. 육근록 외 6명, [고등학교 통합사회], 동아출판, 2018, 50쪽. [본문으로]
  3. 위 글에서는 [2015 개정]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미래엔 교과서를 참고하였다. [본문으로]
  4. 교육부 고시 제2015-74호 [별책 6] 도덕과 교육과정, 10쪽. [본문으로]
  5. 박선영, <[뉴스업]"채식급식 왜? 최고의 조기교육은 '미각' 교육">, 노컷뉴스, 2020.11.04., www.nocutnews.co.kr/news/5440983. [본문으로]
  6. 최홍식, <학교 옥상이 태양광발전소로 바뀌고 있다!>, 인더스트리뉴스, 2017.01.24., www.industr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73. [본문으로]
  7. 이 글의 많은 부분에서 필자가 인간과 동물 수업에서 과제로 냈던 글을 인용하였다. [본문으로]

출처 : 청소년 기후 행동

  <청소년 기후 행동의 2020 기후위기 대응 어워드>에서 교육청은 ‘기대이상(賞)’을 받았다. 수상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1. 11개 시/도 교육청의 ‘탈석탄 금고 선언’[각주:1] 2. 경남, 울산 교육청이 주도하는 채식급식 선택권 도입 3. 서울시 교육청의 생태전환교육 계획안이다.

 

  위와 같은 교육청의 변화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탈석탄 금고 선언’이 과연 석탄 사업을 줄이는 실효적인 방안으로 작동할지 모호하고, 일부 교육청의 생태전환교육과 채식급식 선택권의 도입이 전국의 환경 교육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러한 변화는 청소년 기후 행동의 이야기처럼 환영해야 하는 변화이다. 이 글에서는 마지막 수상 이유인 서울시 교육청의 생태전환교육 중장기계획안을 함께 읽으며 교육청의 변화가 정말 ‘기대이상(賞)’인지, 앞으로의 환경 교육에 우리는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생태전환교육의 중심과제


  서울시 교육청의 생태전환교육 중장기계획은 학교 교육과정의 전환, 교육환경 구축, 생태전환 교육 추진체계 및 협력기반 확충이라는 세 개의 중점 과제를 중심으로 계획되어 있다.

 

서울시교육청 [생태전환교육 중장기('20~'24) 발전 계획]

  서울시 교육청이 현재 목표로 하는 변화의 내용으로 교육청의 행동이 기대 이상이라 보기는 힘들다. 교육과정 측면에서 생태전환교육의 연 2시간 이상 의무화는 세부적인 체계와 생태전환교육 교수자, 실효성 있는 가이드라인의 마련 없이는 이름만 있는 정책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교과서 개발 역시 지금도 독도, 달서구처럼 많은 교과서들이 개발되었지만 쓰이지 못한 것을 고려한다면, 교육과정을 뒷받침 없이 새 교과서 개발만으로는 큰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


  교육환경의 변화 역시 한계를 가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환경교육을 공교육에 요구하는 이유는 환경에 대한 지식이 국민의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로 찾아가는 생태전환교육이나 소수의 탄소배출제로 학교, 생태전환학교, 생태전환실험교실(리빙랩), 청소년 생태전환활동 지원은 모두 의미 있는 지원이다. 그러나 이미 환경에 관심 있는 청소년, 몇 안 되는 탄소배출제로 학교의 학생을 이외의 넓은 범위의 학생에게 닿을 수 있는 방안은 아니다. 오히려 이전의 ‘국제 중점학교’, ‘SW 교육 선도학교’ 등 많은 학교들이 기존의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교육과정을 운영하거나, 한두 개의 특별반에서만 다른 교육과정을 운영했던 것을 생각하면, 생태전환학교의 학생들조차 제대로 된 변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탄소배출제로학교를 ‘환경친화적 생활 태도를 기르기 위해 자원과 에너지 절약을 생활화하고, 쓰레기를 감축하며, 친환경 교통을 이용하는 학교’로 명명한 이상 기존에 진행 중이던 쓰레기 적은 학교, 잔반 없는 날, 학생에게 책임을 전가하던 환경교육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태전환교육 계획안의 다른 요소들 역시 도입, 수립, 확충, 지원 등 그 대상과 목표가 아직 명확하지 않고 한정된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한계는 생태전환교육이 1. 서울시 교육청으로 범위가 한정되어 있으며 2. 대부분 의무나 필수가 아닌 일부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교육이며 3. 환경을 바라보는 교육의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점은 학생과 학부모의 선호에 의해 시범학교에서 시행되는 채식급식 선택권 도입 역시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청소년 기후 행동이 준 ‘기대이상(賞)’이 교육청이 아닌 서울시 교육청 혹은 일부의 생태전환교육과 채식급식 선택권을 시행하는 일부 학교만 받아야 하는 상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세 번째 문제를 살펴보자면 지금의 생태전환교육은 체험의 범위와 대상 학생은 늘어났으나 기존과 같은 방법의 환경교육을 고수하고 있다. 서울시 교육청이 연구하고 제시한 생태전환교육의 예시들은 농사 체험, 화단 가꾸기, 쓰레기 줄이기 등이다.[각주:2] 이는 농사꾼의 피땀이 어린 쌀알을 어떻게 남기냐던 잔반 없는 날 정책과 농촌체험의 일환인 고구마 캐기, 분리수거 교육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서울시 교육청이 제시하는 화단의 식물을 화분으로 옮겨 교실에 전시해두는 잘 된 생태전환교육의 예시는 생태계의 일부로서의 인간이 아닌 자연을 통제 아래에 두는 인간 중심 자연관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기존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교육의 양을 늘리는 것만으로 충분한 환경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의 환경 교육이 이대로 나아가도 괜찮은가.

2. 새로운 시각의 환경 교육


  흙을 만지고 자연을 체험해 보는 생태전환교육의 예시들은 길어야 6년의 유예밖에 없는 급박한 환경 문제 앞에서는 느리고 효과적이지 않은 교육으로 보인다. 교육과정 속에서 반복되던 수많은 쓰레기 섬의 이야기, 지구 온도가 몇도 올라가면 해수면이 몇cm 상승한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긴급함 없이 평소처럼 자연을 느껴보자 쓰레기를 줄여야 한다 물을 아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교육이 어느 정도 실효성을 가질 수 있을까.


  환경 문제는 당장의 실천을 요구하는 문제이다. 오히려 환경 교육을 한다고 나누어주는 손수건, 에코백, 텀블러 만드는 자원 하나 줄이는 것이 더 환경 보호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환경친화적으로 변화하기보다는 교실의 깨끗한 환경을 위해 밀대보다 물티슈를 선호하고 급식의 질이 개선되며 고기와 음식물 쓰레기, 일회용품의 이용이 늘고, 학생들의 체험을 위해 수많은 석유 화학품으로 만든 교구들이 도입되고 있는 지금은 흙을 만져볼 때가 아닌 당장의 자원 활용과 환경 교육을 그 밑바닥부터 바꾸어야 하는 시기이다.

 

# 학생들에게 이론만을 가르치고 죄책감을 심어주는 교육은 그 한계가 분명하다.

 

  학생들의 노력 여하와 관계없이 환경 보호는 실제와 교육의 괴리, 환경의 부족으로 좌절된다. 우리가 가르치는 환경을 지키는 방법은 실제로 실효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 환경 교육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이야기되는 분리수거 역시 그렇다. 많은 학교에서 분리수거함을 설치하지 않았고, 학생들의 분리수거 노력과 관계없이 모인 쓰레기를 다시 섞어서 배출한다. 이제 겨우 투명 페트병 분리배출을 시작한 상황에서 종이컵, 컵라면 용기와 같이 환경부가 분리배출 하라고 가르치는 많은 재활용 쓰레기들을 많은 부분 실제로 재활용되지 않는다. 국가가 재활용되었다고 표시한 양 역시 쓰레기를 태워 대기오염과 함께 에너지를 생산하는 SRF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학교 안에서 아무리 배운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더라도 시장의 변화 없이 학생들에게 환경보호의 책임을 맡길 수는 없다. 수도권을 제외하고는 광역시에서도 채식 식당은 찾아보기 힘들고, 제로웨이스트 상점은 서울 내에서도 손에 꼽는 수만큼만 존재한다. 소수의 환경친화적 기업의 제품을 사용하고자 택배를 시키면 이동과정에서 탄소를 배출하며 포장재와 테이프가 사용된다. 친환경 포장재를 사용한다는 기업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더라도 환경부가 제공하는 친환경이라는 마크와 달리 다른 포장재와 쓰레기 처리 과정에서 똑같이 처리되어 환경파괴를 일으킨다면 진정한 친환경 제품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죄책감을 느낀다 하더라도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변화를 낳을 수 있을까.


# 환경 교육은 학생이 환경을 바꾸고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학교 내에서 수업하고 환경친화적인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외부의 변화 없이는 어떠한 긍정적인 전환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학생들보다 기업과 시장이 하는 환경파괴가 훨씬 심각함을 알고 있다. 현재의 국가 정책으로는 탄소 배출량을 정책에 맞추어 이상적으로 줄인다고 하더라도 1.5도의 목표가 아닌 3도의 상승을 예고할 뿐이다. 100개의 교실에서 플라스틱 통으로 업사이클링을 하는 것보다는 플라스틱 통을 사용하는 업체에 환경친화적인 재료로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학생 1,000명이 환경 다짐을 작성하는 것보다 한 기업에 환경 다짐을 요구하는 것이 더 영향력이 크다. 그렇다면 진정 환경을 위해 키워져야 할 학생은 자신뿐만이 아닌 학교, 지역사회, 기업, 국가를 향해 너도 친환경적으로 바뀌라고 요구하고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학생, 외부를 변화시키는 학생이다. 


  나와 학교를 넘어선 변화를 요구하는 환경 교육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웃, 동물, 환경을 위한 변화를 청소년들이 스스로 생각해서 행하는 제인 구달의 뿌리와 새싹(Roots & Shoots) 환경 운동이 시작된 지는 이미 30년이 지났다. 이미 청소년 기후 행동으로 교육계의 변화를 이끌어 낸 청소년들은 행동하는 환경 교육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 더하기가 무엇인지 알아도 실제로 계산을 할 수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듯이 태양광 패널의 원리를 알고, 친환경 에너지 활용을 익혔더라도 실제로 이를 적용하지 않으면 교육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우리에게는 자연과 친해지고, 지겨운 이야기를 반복하는 이론의 교육이 아닌 학교와 지역사회에 요구하고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교육이 필요하다.

3. 생태전환교육의 희망


  다행히 서울시 교육청의 생태전환교육 중장기계획안의 연차별 과제 추진계획 중에는 희망을 걸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교육과정 전환계획 중 2022년의 ‘중교등학교에서 환경 필수선택과목지정’, 교육환경 구축 중 2024년의 ‘채식선택급식 전면 시행’, ‘청소년 생태전환 활동 지원’이다.


  환경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한다면 계획과 이름만 남고 사라진 과거의 많은 교육과 다르게 실제로 넓은 범위의 학생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아직 환경 과목이 어떤 내용을 포함할지 필수선택과목지정이 어느 정도 범위로 이루어질지, 필수선택과목의 배치는 어떻게 될지,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정책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도 환경에 관한 지식이 지금 당장 학생들이 알아야 하는 지식, 정말 필요한 지식임을 인정하고, 모든 의무교육 대상자들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이기에 보편적 교육을 가능하게 한다. 다만, 교육 안의 내용 선정이 지금의 인간 중심적이고, 긴급하지 않고 학생에게만 책임을 물으며 미래를 희망차게 그리는 선에서 그치지 않도록, 선택 요소가 필수적인 지식을 제하지 않도록 구성할 필요가 있다.


  채식선택급식 전면 시행은 채식을(이) 친환경을 위한 길임을 교육청에서 인정하고, 학생을 자신의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임을 인정하며, 채식의 중요성을 재고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이제껏 채식은 당연한 생태계의 순리를 거스르는 오만이나 동물의 입장에 과하게 공감하는 프로불편러들의 이야기로만 여겨지곤 했었다. 학교에서 급식에 선택권을 제시한다는 것은 채식이 동물권만이 아닌 환경의 문제에 관한 권할 수 있는 권리임을 학생들과 교직원을 포함한 모두에게 알려준다. 또한, 채식을 일상 속에서 접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육류 생산 과정, 메탄가스의 발생, 산림의 파괴와 같은 연결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변화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여전히 채식 식단이 정해진 금액 안에서 양질의 단백질을 제공할 수 있을지, 선택권을 제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학생들과 학부모가 정말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채식을 선택할 수 있을지, 선택이라는 이름 하에 음식물 쓰레기가 늘어나는 정책이 되지는 않을지 하는 여러 걱정거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모두가 채식을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청소년 생태전환 활동 지원은 청소년이 주체적으로 환경과 관련된 행위를 하는 것을 증진한다는 부분에서 의미를 가진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생 본인이 다짐을 하고 쓰레기를 줄여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렇기에 환경 교육은 주변을 바꾸고, 학교를 바꾸고, 지역사회와 국가를 바꿀 수 있는 학생의 역량을 길러주는 생태전환 활동이 필요하다. 학생들이 직접 마을의 식물 생태계 변화를 분석하고 유해 외래종을 제거하여 생태계를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았던 뿌리와 새싹 활동이나, ‘쓰레기 없는 세상을 꿈꾸는 방’에서 시작하여 매일 유업이 제품의 빨대를 없애도록 만든 빨대 반환 운동 등이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좋은 생태전환 활동의 예시이다. 무엇을 생태전환 활동으로 정의할 것인지, 학생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보장해줄 것이며, 기존에 환경에 관심이 없던 학생들까지 활동하게 만들 유인책은 무엇을 제공할지 같이 아직 논의되지 않았고 합의가 필요한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환경과 관련하여 청소년이 선택하고 행위 할 수 있는 주체로 보고, 그 행위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활동 지원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어떤 환경 교육을 추구해야 할까. 청소년 기후 행동은 교육청에 꾸준히 탈석탄 금고를 요구했다. 이는 교육이 비단 학생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사회의 변화를 이끌고 사회에 영향을 주며 함께 변화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앨빈 토플러는 '기업은 100마일, 시민단체는 90마일, … 학교는 10마일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환경에 대해 학교가 기업의 1/10의 속도로 변화한다면 우리는 지구를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되어야 환경의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환경의 필수과목화와 채식선택급식 전면 시행, 청소년 생태전환 활동 지원이라는 생태전환교육 계획들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이 세 가지 부분에서 교육이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환경 교육은 기존의 교육을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깊게 시행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보다 앞서 환경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고, 사회에 새로운 요구를 하고 변화를 이끌 학생들을 길러내야 한다.


  교육청의 행보가 ‘기대이상(賞)’을 받은 것은 사회의 변화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지난해의 탈석탄 금고 선언은 11개의 교육청만이 참여한 것이 아니라 전국 56개의 자치단체와 교육청이 함께 참여한 선언이었고, 그 덕분인지 지난해, 하나, 우리, 신한, KB, NH농협이 ESG 경영[각주:3] 을 선택하고 관련 조직을 신설하는 등 은행 정책에 변화를 주고 있다. 특히, 우리, 신한, 농협은 저탄소 정책에 동참하고자 하는 의사를 직접적으로 내비쳤으며, 하나는 상반기 탈석탄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KB는 탈석탄 금융을 선언했다.[각주:4]  교육에서 채식 선택을 권리로 인정하고 채식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덕분인지, 병무청은 올 2월부터 병역판정검사 시 신상명세서에 채식주의 여부를 표시할 예정이며, 이 경우 부대에서 입영자에게 채식주의 음식을 제공하도록 한다고 발표했다.[각주:5]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서울시 교육청은 의미 있는 한발을 떼었고, 2020년의 교육의 변화와 함께 사회의 변화는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서울시 교육청을 넘어 모든 교육의 변화를 위해 생태전환교육과 환경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참고자료]

강은지, <“수거된 페트병 재활용률 절반도 안 돼”>, 동아일보, 2019.02.20., www.donga.com/news/article/all/20190220/94200392/1
권상국, <중·고교생들 "학교 오면 분리수거 잘 안해요">, 부산일보, 2012.06.08., 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20608000101
고유선, <서울 학교에 '채식 급식' 도입하고 환경문제 교육 강화한다>, 연합뉴스, 2020.06.17., www.yna.co.kr/view/AKR20200617052200530?input=1195m

이유주현, <학교 분리수거 ‘낙제점’>, 한겨레, 2005.07.19., 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51284.html
서울특별시교육청, <푸른하늘의날 캠페인 - 나날이 변하는 지구의 일상, 자연생태계를 배우다!>, 2020.9.17., www.youtube.com/watch?v=x8UtFl7yqGU

최예린, <전국 56개 자치단체·교육청 ‘탈석탄 금고’ 선언>, 한겨레, 2020.09.08., www.hani.co.kr/arti/area/chungcheong/961270.html#csidx7507921c2ad129795d589ccc830a9c5.

김효인, <비닐 분리수거해도... 80%는 재활용 못하고 태워>, 조선일보, 2020.09.01., www.chosun.com/national/2020/09/01/MMXAD73KE5G3VFT4G4MJZOZHSM/
청소년기후행동, <전국시도교육청에게, 멸종위기 청소년들이 보내는 편지>, 청소년기후행동, 2020.06.25., www.ncge.or.kr/bbs/board.php?bo_table=pbs1&wr_id=88&page=5

로렌츠 크나우어, <제인 구달>, 오드, 2010.

 

 

 

 

채미

  1. 예산의 보관과 활용에서 석탄발전에 투자하지 않는 은행을 우대하겠다는 선언 [본문으로]
  2. 이성임, <[언북초] 생태교육 애란심기 행사 실시>, 서울특별시강남서초교육지원청, 2020.12.4., gnscedu.sen.go.kr/FUS/BO/110/BOV11.do?board_seq=45019

    윤신원, <‘고기 없는 날’을 이끈 학생들, 학생들을 바꾼 교육의 힘>, 서울시 교육청 생태전환교육 포럼, 2020.6.18.
    천주영, <현장연구팀 최종 연구 결과 보고서 : 지역사회와 연계한 생태전환교육 운영 방안 연구>,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 2020.12.31.
    강선일, <진정한 생태전환, 학교텃밭에서 시작된다>, 한국농정, 2021.1.1., 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2887 [본문으로]

  3. Environment, Social, Governance의 약자로 기업이 환경과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두고, 범과 윤리 준수하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목표로 경영을 함을 이야기한다. [본문으로]
  4. 김형일, <[K-Jump 2021] ESG경영 선택 아닌 필수...은행권, 조직 신설로 본격화>, 한스경제, 2021.1.1., www.sporbiz.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5879 [본문으로]
  5. 강중모, <軍 입영자, 신상명세서에 '채식주의자' 선택 가능>, 파이낸셜 뉴스, 2020.12.27., www.fnnews.com/news/202012271443330855 [본문으로]

  환경 교육의 필요성은 전혀 새로운 주제가 아닙니다. 1962년 《침묵의 봄》이 발표된 이후 세계적으로 환경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끝없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학교는 국어, 영어 등 다양한 과목에서 환경 문제를 다룹니다. 하지만 우리의 환경 교육이 과연 충분히 올바른 방향으로 생태계와 함께 사는 길을 이야기하고 있나요? 함께가 아닌 인류가 살아남는 길, 기업과 사회와는 관계없이 학생만이 하는 실천, 지금이 아닌 먼 훗날의 일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나요? 환경 교육에는 지금 당장 인간과 동물과 생태계가 함께 사는 또 다른 길이 필요합니다.

 

<함께 사는 길> 소개 이미지

 


1. 들어가며


  교육은 학습을 꿈꾸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 학습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학습은 그저 ‘교사가 가르친 내용을 학생 혼자 정리하고 공부하는 것’ 정도로 축소되어 생각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많은 고등학생이 경험하는 야간자율학습에서 학습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야자 시간에 학생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떠올려보면 쉽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습은 이렇게 좁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학습이란, 그저 교육의 객체인 피교육인으로써 정해진 내용을 이해하려는 활동이 아니라 교육을 활용하는 배움의 주체로서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화된 ‘교육과 학습의 경도된 위치성’이 문제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왜곡된 학습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교육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육과 학습의 차이는 학습인이라는 행위자의 주체성에 근간을 둔다. 교육은 교육인(주체)이 피교육인(객체 혹은 비非-주체)에게 행하는 것이고, 학습은 앞에서의 피교육인이 객체의 지위를 탈피하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배움을 행하는 것이다. 둘은 명백히 다른 것이지만 괴리된 것은 아니다. 서로는 서로를 만들어내고 강화한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학습과 동위에 서지 않고, 위에 올라서서 학습을 관리·감독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오히려 교육은 학습과 동등한 것에서 더 나아가 아래에서 학습을 받치고 선 모양새가 되어야 한다. 


  교육은, 교육을 학습에 활용하고자 하는 학습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도구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과 동시에 피교육자로 하여금 어떠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실천을 촉발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목적론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상술한 ‘교육이 학습을 꿈꾼’다는 것은 후자와 연결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작금의 교육은 위의 역할을 경시한 채 국가 주도에 따라 도구적 기능만을 중점적으로 수행하기에 문제적이다. 이는 교육이라는 단어의 어원에서 알 수 있는 교육의 본래적 의미와도 멀어져 있다. 교육education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educo'는 ‘밖으로 꺼낸다’라는 뜻을 갖는다. 이는 피교육인의 선천적인(혹은 후천적인) 잠재 능력을 끄집어낼 수 있게끔 돕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자 본질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에 반해 지금의 교육은 안에서 바깥으로 꺼내는 것이 아닌, 외부 지식(필요한지조차 불분명한)을 안으로 삽입하는 것에 불과한 행위를 관성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이제 교육은 지금까지 무반성적으로 유지하고 있던 계급적 지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는 단순히 교육자 개인 차원에서 교권을 약화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육과 학습 간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교육은 학생을 내려다보던 절대적 우위를 내려놓고, 학습자를 지탱하고 서 있는 아래의 위치로 겸허히 내려가야 한다. 따라서 교육은 학습을 꿈꾸며, 그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보조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2. 한국 교육의 현주소


  지금 한국의 교육은 어디에 있는가? 대다수의 한국 학생들은 국가의 교육 기관이 편성한 교육과정에 따라 동일한 교재를 사용하며 같은 내용을 배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실생활(예를 들어 공과세 납부하는 법이라든가)과 괴리되어있으며, 학생 개인의 인격적 성장 등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시험에 출제할 수 있는 내용을 가르치고, 그를 바탕으로 산출한 성적으로 학생을 선발할 뿐이다. 교육이 정말 이런 것에 불과한가? 우리가 막연하게 떠올려볼 수 있는, 스승과 제자 간의 유대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으로의 성장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지금의 교육은 어딘가 기형적이다. 결국 지금의 교육은 자신이 수행해야 하는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인데,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①교육이 도구적 기능만을 중점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 비롯되며, 더불어 ②그 내용 역시 국가에 의해 규정되고 강요됨으로써 학생 개개인에 맞추어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화된다. 

2.1 ‘교육-학습의 패러다임 & 평가중심 교육관 & 관문 사회’의 연결고리

 

  지금의 평가 중심의 도구적 교육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계속해서 수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학습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점한다. 이에 따라 교육인와 피교육인의 관계에서도 동등성이 보장되지 못하는 부차적인(그러나 매우 중요한) 문제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교육-학습의 권력적 관계는 근본적으로 평가 중심 교육관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교육이 학습을 평가하면서 학습은 교육에 종속되는 것이다. 낙오자를 필연적으로 생성하는 교육 아래 학습자들은 교육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이러한 평가 중심의 교육관은 관문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어 명문 대학이나 로스쿨 등, 사회적으로 선망받는 특정 집단에의 진입은 시험이라는 관문에서 좋은 성적을 매김 받아야지만 가능하고, 이러한 시험 ‘교육>학습의 패러다임’-‘평가중심 교육관’-‘관문 사회’로 이어지는 관계는 서로를 강화한다. 선후 관계를 따져본다면 관문 사회가 평가 중심 교육을 유지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터인데, 흥미로운 점은 관문 사회가 형성된 배경에 다시금 평가 중심 교육을 놓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평가 중심 교육이 다시금 관문 사회를 강화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서구 근대 국가들은 양질의 균일한 노동자(혹은 시민)를 양성해내기 위해 교원을 양성하고 일률적인 ‘근대’ 교육을 시행했다. 이와 같은 근대 교육은 일본을 통해 한국으로 유입되었는데, 당시 부국강병을 위해 서구 사회를 모방하고자 했던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의 저명한 교육자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의 저서 <학문에의 권유>에서 주장한 바에 따라 국민교육을 시행하였고, 이후 대한제국 역시 일본을 모방해 ‘근대화’된 교육 제도를 정착시켰다. 이를 통해 기존의 개인의 수신修身을 기본으로 하는 공부를 탈피하고 근대적 국민국가의 ‘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국가 주도의 전국단위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지금의 교육부는 이러한 국민교육을 수행하기 위해 제도화된 교육을 학교에 지시하는 공간이며, 학교(혹은 교사 개인)는 교육의 동일한(*‘동등한’이 아니다) 질을 보장하고 수행해야만 하는 공간(혹은 직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주의적인 교육은 일종의 투자로서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공교육은 국가 자본이 투입된 투자이며, 국가 유지와 존속에 필수적인 시민을 양성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자연히 교육의 내용 역시 국가의 관점이 견지된(최소한 국가에서 배워야 한다고 지정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더불어 이렇게 제도화된 교육은 전인격적 교육을 실현하기보다는 규정에 따르는 양적 교육을 시행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따라 교육의 목적론적 기능보다는 도구적 기능이 중시될 수밖에 없고, 규범보다는 기능이 강조되고, 교육은 학습에 앞서게 된다. 정리하자면 근대 교육의 도구적 성격으로 인해 교육이 본연의 목적을 잃고 국가적 목적에 따라 운영됨에 따라, 정작 배움에서 학생이 소외된 것이다.


  문제는 시대적 흐름이 바뀌고, 국가적 위기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국민교육을 시행했던 19세기~20세기 초중반을 지나 국가적 대치 상황이 상당히 약화된 현대 사회로 이행하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한국은 식민지 상황이 끝나고(더 나아가 전쟁과 개도국으로의 시기까지 끝나고) 이제 기존의 문제를 해결해볼 만한 여력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국가 주도 교육 운영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교육은 사회 내에서 개인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경쟁이 강화되는 문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인간적인 혹은 교육 본연의 목적에 가까운) 방안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입시제도를 세부화하고 평가를 강화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경쟁과열 상황에 일조하고 있다. 즉 지금의 교육은 예전의 부국강병을 위한 도구적 기능을 넘어, 경쟁을 통해 우수한 잠재적 노동 인력을 키우고 선발할 수 있게끔 교육체제를 구상하여 시행하고, 입시를 위한 평가지표를 제공하는 기능까지 악착같이 수행하면서 강화된 도구성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대학은 공교육에서 제공하는 이러한 지표를 이용해 편리하게 학생들을 선발하고, 기업도 마찬가지로 대학 교육에서의 성적과 개인의 스펙 등을 고려해 사원을 선발한다. 이렇게 인간성을 버린 도구적 교육과 사회의 연결고리 안에서, 사람들은 경쟁자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갖추려 노력하고, 교육의 평가 시스템은 점점 냉정하고 정교해지며, 사회의 관문은 점점 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 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이 속에서 우리가 꿈꾸는, 학생을 위하고 학습을 꿈꾸는 교육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관문 사회가 만들어낸 평가 중심 교육 속에서 경쟁하고, 우리가 복속됨으로써 강화되는 평가 중심 교육이 다시 관문 사회를 강화하는 끊임없는 순환 고리를 망연히 지켜볼 뿐이다. 

2.2 공정성 담론과 교육


  위에서 언급한 문제의 요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많은 사람이 기초적인 교육 수준을 넘어 고등 교육을 받고 높은 경쟁력을 갖추어 경쟁하는 상황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더 나은 일자리 등을 위해 경쟁력을 확보하려 하고, 점점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기업 등은 특정한 지표(이를테면 시험 점수 같은)를 이용하여 그들 중 일부를 선발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현재의 공정성 담론이 형성된 배경을 파악해볼 수도 있을 듯하다.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공정함에 대한 감각은, 지금의 인국공 사태 등에서 촉발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전에는 공정함을 위반하는 특수한 사례에 대해 분노(주로 어떤 권력자 개인이 부정한 방법으로 지위를 꿰찬다거나)가 주된 것이었다면, 지금의 공정성 담론은 수치로 확인 가능한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예를 들어 학종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정시만이 공정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례)를 바탕으로 인간의 자율성이 개입될 여지를 차단하고 모든 교육과 평가를 정량화된 시험을 시행함으로써 공정성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이는 공정이라는 가치를 그저 모두가 같은 시험을 치고 높은 점수를 얻은 사람이 통과하는 것으로만 파악함으로써 본래의 가치를 축소한다. 더불어 자신이 겪었던 관문을 다른 사람들도 통과해야만 한다는(나만큼의 노력을 저 사람도 기울여야 한다는) 의식 아래 그 밖의 방법은 모두 ‘정당하지 못한 것’ 내지는 부정의한 것, 그리하여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발생한 공정성 담론의 문제는 현존하는 교육-학습 패러다임을 더욱더 공고히 한다는 점이다. 시험이 무엇보다 공정해야 한다는 요구는 시험이 출제되는 교육의 내용은 이미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가정하며, 나아가 시험이라는 형태를 가지고 있는 평가의 권위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교육에 있어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교육의 본질은 앞서 말했듯 학습을 보조하고 지원하여 학생이 원하는 삶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평가 중심의 도구적 교육은, 평가를 위해서 그 스스로가 객관적인 사실만을 교육할 수 있도록 제동이 걸린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교육이 불가능해지는 문제가 있다. 우리가 국어 과목에서 시를 배울 때, 시를 감상하고 그것을 내 삶과 이어진 예술로 이해하거나 삶에서의 의미로 다가오게끔 하는 학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이미 정해진 상징과 정해진 스토리, 정해진 표현법을 교육하면 그것을 배우고 암기할 뿐인 죽은 학습이 행해진다. 그런데 사실 이는 평가 중심의 교육을 기획하고 주도하는 국가의 입장에서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지금과 같은 입시 시스템이 원래 있던 질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데 있다. 지금 당장에는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안정성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 될 수 있겠으나, 이는 시대가 변화할수록 효용이 떨어지는 낡은 관습이 될 뿐이다. 점차 학생 인구수가 줄어듦에 따라 경쟁을 통해 다수의 사람을 주류적 삶에 묶어두는 강제력이 더 이상 교육에서 작동할 수 없으며(대학 정원이 전체 학생 수보다 적어져서 마음만 있다면 모두 대학에 갈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기술 발전에 따라 성실함과 안정성보다는 창의력과 새로움이 요구되는 새로운 시대에 억압적인 기존의 질서를 더 견고하게 쌓아 올리는 것은 결국 자신을 가두는 덫이 될 것이다. 차라리 국가는 학습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을 제도화함으로써 각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키울 수 있게끔 하고, 이를 통해 사회의 다양성을 증진하고 국가 보존/발전에 기여하게끔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공교육은 사회의 구성원을 키워내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하여 각 개인이 자신에게 적합한 소양을 키우고 삶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다양한 것들을 지원해야 한다. 개인의 자율적인 발전이 오히려 더 다채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는 힘이 될 것이며, 그 속에서 교육은 개인의 자율적인 발전을 지원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가치와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3. 너머의 교육. 같이, 가치


  학습이 교육의 도움을 받아 각 개인에게 최선인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 앞으로 교육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교육과 학습의 위상이 역전됨에 따라 각각에게 요구되는 역할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앞서 서문에서 말했듯이 교육은 그 스스로의 우위와 절대성을 내려놓고, 이제껏 허용하지 않았던 자율적 배움을 학습의 주체에게 허용하고 학습을 보조해야 한다. 밑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보기로 하자.


  학교 안에서의 학습을 상상해보자. 정규교과로 편성된 국영수를 넘어 배움을 확장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를 위해서는 경계를 허무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클래스101’과 같은 온라인 창작 클래스나, ‘리얼클래스’와 같이 실제 사용되는 언어를 현장감 있게 배울 수 있는 온라인 클래스 등 공교육 바깥의 여러 교육 플랫폼과 협업을 맺고, 그 사업체 내에서 학생들이 흥미가 있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해 학습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서 공교육과 사교육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교원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이를 통해서 넓고 다양한 ‘접함’의 교육으로 확장을 도모해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동아리 활동 예산을 강사를 초빙하는 데 쓰게끔 지원할 수도 있을 것이며, 유명무실한 7교시 창체 교육 시간을 사회에서 특정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 혹은 학생끼리 논의할 수 있는 시간으로 주어지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말뿐인 인권 교육이 아니라 실제 구호 단체에서 활동하시는 분을 초빙해 현장 실태를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혹은 아예 학교 밖을 벗어나 봉사활동을 하러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접함’을 경험한다. 접함은 몰랐던 것과의 연결점을 만들어줌으로써 내 눈 앞에 존재하던 삶을 너머 더 무궁무진한 것을 보고 체험하며 이야기하게 한다. 


  이 속에서 교사의 역할 또한 바뀔 수밖에 없다. 교사는 학생들과 전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배움터에서 ‘어른’으로 존재해야 한다. 교사는 기초적 단계의 필수적인 공교육을 시행하는 동시에 학생과의 여러 이야기를 통해서 개개인에게 필요한(그들이 원하는) 수업 혹은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조언한다. 특히 교사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어른으로 학생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직업적)존재 이유를 두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배움을 보조하고 지원하는 데 목적이 있는 새로운 교사와 달리, 이 교사는 학교에 상주하며 학생과 관계를 맺고, 갈등상황이 발생했을 때 지도하는 등의 상호작용을 수행해야 한다. 무의미한 기존의 입시 수업이 점차 없어지면 교사의 역할도 그에 따라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확장해 학교 형태의 변화까지도 상상해볼 수 있다. 기존 반의 구성이 그저 개인의 성씨 등에 의해 무미건조하게 1반, 2반, 3반 등으로 이루어졌다면, 새로운 반은 개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사회반(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 과학반(과학 기술 등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 예술반(악기나 미술, 체육 등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 등 다양한 범주로 구성하고, 그 영역에 전문성을 갖춘 교사를 배치하는 식으로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이는 이미 강원고등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강원고에서는 멘토링시스템 동아리 학급제를 운영하며, 학년별로 반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동아리가 한 반이 되어 학교 생활을 한다. 학생들이 교사와 교과과정을 선택하며, 교실을 돌아가면서 수업을 듣는다. 더불어 학급 내에서 하루에 한 번씩 멘토링 시간을 가져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는 시간이 주어진다. 

 

  기존의 반 구성에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과 달리, 공유하는 특성이 있는 새로운 반에서는 학생 간의 더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이루어짐으로써 보다 자유롭고 적극적인 배움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관심사가 정해지지 않은 친구들을 위해 반 간의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 속에서 이뤄지는 배움은, 내용이 정해져 있는 교과를 가르치는 교육과 달리 내용이 무궁무진한 학습이 주가 되는 것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은 다양한 학습의 형태와 내용을 지원하며, 이것이 바로 평가와 공정성을 넘어선 새로운 교육의 가치로서 현현한다. 


  물론 내가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결코 정답이 아니다. 그러나 꿈꾸어야 할 가치를 마음껏 상상해보는 하나의 사례로 의미가 있다. 내가 위에서 논의한 가치를 정리하자면, 배움의 넓은 폭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지원으로서의 교육이다. 교육 인력과 학생의 선택폭, 자유도, 그리고 그를 둘러싼 문화 등의 사회적 기반까지, 학생이 주체로서 선택하고 그를 보조하고 지원하는 교육 말이다. ‘접함’을 통해 다양성을 증진하고 모두가 자신의 길을 가는, 그러면서도 모두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교육을 꿈꾼다. 학교가 억압의 공간이 아니라 가능성의 공간이 되고, 학생들이 자기만의 배움을 좇고,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것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사회의 다양성을 증가하는 방향으로 이어져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최대로 열리게 된다. 학교에서부터, 교육에서부터 이와 같은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분명히 사회로도 자유롭고 적극적인, 행복한 분위기가 확산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전인격적 교육과 다양한 학습은 지금과 같은 사회구조에서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가장 직접적으로는 교원당 맡아야 하는 아이의 수가 많아 학생 각각이 배우고자 하는 것을 이끌어내고 보조할 수 있는 교원의 능력이 부족할 뿐더러(이는 개인의 자질의 문제이기보다는 구조적 불가능성을 말한다)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고 있는 학벌주의와 그에 대한 견고한 믿음, 그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여러 사회적 의식과 욕망이 모두 뒤섞여 있다. 그 속에서 우리가 당장 보아야 하는 한 명의 아이, 한 명의 학생, 한 명의 사람은 잊히고 만다. 교육이 제대로 기능을 못하면 학습자가 겪는 내면의 흔들림, 희망과 욕망 그리고 절망은 눈앞에 채 드러나지도 못하고 죽는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읽었으나 나의 문제가 아니기에 당장에 변화를 반기지 않으며, 누구나 겪은 것이라는 이유로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만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꾸물거리는 사이 너무나 많은 학생을, 많은 사람을 잃었다. 지금 당장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건 언제나 우리의 문제였고 또 언제든 다시 우리의 문제가 될 것이다. 교육은 학습을 꿈꾸어야 한다. 더 나아가, 교육은 삶을 꿈꾸어야 한다. 교육은 언제나 미래를 위한 것이다. 단순히 공정에 매몰되어 시험을 위한 지식을 넣어주는 게 아니라,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어떤 사람으로서 세상과 마주할지에 대한 고민의 장을 열어주는 역할이 바로 교육의 몫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교육을 향해 가는 불꽃이 되어야 한다.

 



 

darling

 

  대한민국은 학력주의 사회이다. 학력주의 사회란, 학력이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힘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인식이 공유되는 사회로 정의된다. 학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격렬한 입시경쟁이 일상화되며, 입학시험에 의해 획득된 학력은 개인의 속성이 되고 신분이 되어 사회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지배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학력이 사회계급을 결정한다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높은 학벌이 계층이동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여기는 부모들과, 좋은 대학이 미래를 보장해준다고 세뇌받아 온 중·고등학생들이 대학 입시 제도에 지나치리만큼 거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학입학전형은 크게 정시와 수시 두 가지로 구분된다. 대입 전형에서 정시와 수시의 비중은 2002학년도 약 7 대 3 에서 2020학년도 약 3 대 7 로 불과 18년 만에 수시 비중이 정시 비중을 완전히 역전했다. 그러나 최근 뉴스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사 자녀의 논문 공동저자 특혜 사례, 그리고 부정입학 사례는 수시 전형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있다. 이에 대입에서 수시 비중을 축소하고 정시의 비중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며, 실제로 2021학년도 입학전형에서 정시 비중은 전년도보다 0.3%포인트 증가했다(박보라, 2019). 0.3%포인트는 미미한 수치일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정시 비중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데에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것이 실제로 대입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만일 공정성에 대한 요구가 입시정책의 방향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라면,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공정성은 분명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분야의 본질적인 부분에 앞서 고려되어야 할 만큼 최우선의 가치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정성이라는 가치를 명목으로 정시의 비중을 확대하고 수시의 비중을 축소하기에는 수시가 가지고 있는 교육적 가치가 크다. 교육적 본래적 가치를 경시한 채로 정시확대를 주장한다면 이는 교육의 수단적인 가치만을 강조하는 것일 뿐, 대한민국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이 글에서는 먼저 공정성 담론에 입각하여 정시와 수시를 살펴본 후, 입시제도에 대한 논의에서 공정성 담론이 놓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대한민국의 대입 전형은 수시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하고자 한다.


1. 공정의 시각으로 본 정시와 수시[각주:1]

 

1) 정시는 공정한가?

 

  정시가 공정하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정시 확대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주된 근거는 정시가 수시에 비해 더 공정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수시는 교수자 혹은 입학사정관에게 평가가 맡겨지기 때문에 평가과정이 투명하지 않고, 비교과 활동까지 고려하기 때문에 학교별 편차가 심해서 공정하지 않다. 반면 정시는 온전히 수능 점수에 입각한 정량적 평가로 이루어지며, 평가의 기준 또한 특정 주체에 맡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공정하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타당한 이야기이다. 정시는 공정해 보이기 쉽다. 그러나 정시가 공정하다는 주장은 수능 시험 점수가 나온 이후의 상황에만 집중하고, 수능 점수를 받기 이전까지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불공정한 요소들을 지목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최근 다수의 연구가 수능을 치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공정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기혜·최윤진(2016: 16쪽)에 따르면 부모의 교육수준 등 배경이 좋을수록 수시보다 정시를 통해 진학한 학생이 많았고, 특목고 출신 학생의 정시 진학률은 70.6%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문정주·최율(2019: 25쪽)의 논문에서는 사회적 상층일수록 학생부종합전형보다 정시전형을 선호한 것으로 나타나 학종을 '금수저 전형'으로 치부하는 비판적 담론과 배치된다고 분석하였다. 이는 높은 수능 점수를 받는 것이 학생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부모의 재력이나 교육수준 등의 영향을 강하게 받음을 보여준다. 굳이 이러한 학술논문이 아니더라도 수능을 준비하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살아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대치동 일타 강사’의 현강을 듣고 양질의 자료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이 투자되어야 하는지. 이러한 영향을 무시하고 수능 이후의 상황만을 근거로 정시 전형의 공정함을 피력하는 것은 실질적인 기회의 공정성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통해 수시가 더 공정하다는 결론을 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본 근거의 핵심은 정시를 지지하는 측의 거의 유일한 근거인 정시가 공정하다는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학습의 기회와 양질의 자료 및 정보에 대한 접근이 불공정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면한 채로 정시가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2) 주관적이면 불공정한가?


  평가는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가는 정말 ‘객관적’일 수 있을까? 평가 과정에 사람이 개입하는 한 주관성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평가의 주관성은 사라져서도 안되는 것이다. 평가가 ‘절대’ 주관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통념일 뿐이다.  


  모든 평가에는 기준이 있다. 이를 고려하여 평가의 주관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두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하나는 평가 기준에 입각한 주관성이고, 다른 하나는 임의적인 주관성이다. 수시에서 제기되는 공정성의 문제 중 하나는 입시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입학사정관 혹은 교수자의 주관적인 평가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가자의 주관성이 개입된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주관성이 ‘임의적인 주관성’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지원자의 학업성취 내용과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 등과 무관하게 흔히 말하는 학연, 지연, 혈연 이 쓰리(三) 연(緣)이 개입하는 경우는 분명 공정하지 않다. 그러나 기준에 입각한 주관성은 현실적이며, 바람직하기까지 하다. 학생부종합전형에서 입학사정관 혹은 교수자의 주관성이 개입되는 부분의 대표적인 사례는 면접이다. 십여분의 한정된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평가하는 것이 가능할까? 절대 불가능하다. 아무리 객관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면접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오가는 이야기는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평가자는 지원자의 대답에서 흥미가 가는 부분을 더욱 파고들어 질문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평가 기준과 무관한 주관성이 아니며 대학 혹은 교수가 바라는 인재상과 부합하는 지원자를 선발하기 위한 과정이다. 만일 평가 과정에서 일말의 주관성이 통제된다면 평가자가 쌓아온 노하우와 신뢰는 의미가 없을 것이며, 지원자를 선발해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평가에 개입되는 모든 주관성이 불공정하다는 주장은 세심하지 못한 주장이며, 학생부종합전형에서 평가자의 주관성이 개입된다는 사실은 수시가 축소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정시가 확보하지 못한 평가자의 주관성은 오히려 수시의 강점이 될 수 있다.


3) ‘더 공정하다’는 표현이 가능한가?

 

  ‘정시가 수시보다 더 공정하다’ 혹은 ‘정시만큼 공정한 대입제도는 없다’ 등의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듯, 공정성의 개념이 비교의 기준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그러나 공정성은 기회의 공정성인지 결과의 공정성인지, 어떤 부분에서의 공정성인지 등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추상적이고 다채로운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1번부터 100번까지의 체크리스트 문항에 답하여 더 높은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필자는 정시가 공정하다는 것은 착각이며, 수시의 약점으로 여겨지는 평가자의 주관성은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수시가 정시보다 ‘더 공정하다’는 것이 아니다. 정시와 수시의 공정성에 대한 판단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입시의 공정성에 대한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공정성에 대한 논의만으로 대한민국의 입시제도의 변화 방향을 논의할 수는 없다. 대학 교육의 더욱 본질적인 속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2. 공정 너머의 교육


1) 대학의 목적


  대학이 존재하는 이유를 정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학 입시가 존재하는 이유는 대학에서 수학(修學)하기에 적합한 학생을 뽑기 위함이다. 계층이동의 사다리 역할이 대학입시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임을 간과할 수는 없으나, 이는 부가적인 목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의 입시제도가 가장 적합한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대학에서 수학(修學)하기에 적합한 학생’을 가장 잘 선발하는 과정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대학에서 수학하기에 적합한 학생’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학생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리고 대학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대학에서 수학하기에 적합한 학생’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학생을 의미할 수 있다. 이 역량은 단순히 대학에 입학해서 무사히 졸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수업을 충실히 듣는 것이 있고, 나아가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끝까지 학업을 잘 마치는 것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학문간 융합이 중요시되고 요구되는 사회에서 대학은 이를 잘 수행할 역량을 갖춘 학생을 뽑아야 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해내고, 이후 이들이 사회적 효용과 가치를 창출하도록 지원하는 것은 대학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전공 적합성은 이러한 역량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학문 간 융합을 고민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효용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공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다른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에 비해서 이러한 역량이 높음을 지지하는 연구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수시 학생부 종합 전형에서는 학생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바탕으로 관심사를 파악하고, 학생이 자신의 관심분야에 대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각 모집단위에 적합한 인재를 선발할 수 있다. 김사훈(2018)의 연구에 따르면 전공적합성이 높은 집단, 전공 수업에 높은 만족도를 보이는 집단, 그리고 상급학교 진학 시 전공을 유지할 의향이 높은 집단 모두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이 가장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전공 수업이 학생의 적성과 소질에 부합하는가에 대해서 입학전형 간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으며 특히 학생부종합 전형의 경우 전공 적성적합도가 67%로 집단평균인 58%를 상회했다(김사훈, 2018: 6쪽). 이는 입학전형에서 전공을 더 세밀하게 고려하는 전형이 대학 수업에서도 적합성과 만족도를 높이는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정시전형에 지원하는 학생들은 수능 점수를 가지고 각 학과별 커트라인에 맞추어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매년 문과 수능 만점 학생은 서울대학교 경제·경영학과를 지원하고, 이과 수능 만점 학생은 서울대학교 의대를 지원하는 현상은 이를 방증한다. 


  대학이 어떤 학생을 뽑아야 하는지는 대학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좌우된다. 그리고 대학의 목적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가치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사회는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하고, 대학은 이러한 인재를 양성해낼 의무가 있다. 이는 단지 학생의 취업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학생이 학문을 탐구하고,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대학은 학습능력을 보여주는 단일한 지표로 학생을 선발해야 할지, 아니면 학생의 탐구심과 성장과정, 그리고 인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선발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2) 대한민국 교육의 방향성


  학력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입시제도의 변화는 곧 교육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입시제도를 정할 때 대한민국의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최근 교육부에서 박차를 가하는 교육 정책 중 하나가 바로 ‘고교학점제’이다. 고교학점제는 학생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실현하기 위한 일종의 제도적 장치로서, 학생에게 자율적 과목 선택권을 부여하고 과목을 이수하게 하여 누적 학점으로 졸업을 인정받는 제도이다(신윤범, 2020: 1쪽). 교육부 홈페이지에 따르면, 2021년까지는 학점제의 도입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연구·선도학교를 운영하며 2025년에는 전국 고등학교에 완성된 형태의 고교학점제를 본격 시행할 예정이다. 더불어, 교육부에서는 고교학점제가 필요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학생 맞춤형 교육을 실현함으로써 학생의 학습 동기와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둘째, 자신의 진로를 개척하고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하는 미래 사회에 필요한 역량을 기른다. 셋째, 학생 개개인의 다양성을 지원하고, 학생들을 수직적으로 서열화하지 않는다(교육부, 2020). 이는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교육의 방향이 학생들을 수직적으로 서열화하는 교육방식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특성과 관심사를 존중하고, 학생들 스스로 진로를 탐색해나갈 수 있는 자기주도적인 학습 분위기를 마련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더불어 학교교육의 전 과정에서 2015 개정 교육과정이 기르고자 하는 학생들의 핵심 역량은 자기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 사고 역량, 심미적 감성 역량, 의사소통 역량, 공동체 역량으로 설계되어 있다(신윤범, 2020: 2쪽). 그렇다면 고교학점제가 나타내는 대한민국 교육의 방향성을 잘 반영하는 입시제도는 어떤 모형이어야 할까?


  정시에서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나 다양한 학교 생활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수능 공부에만 집중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 정규 수업 시간에 수업을 하는 것보다 자습이 더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는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정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수업을 듣기를 소홀히 하고 EBS 등 수능연계문제집을 풀기에 바쁘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자습을 하는 것이 대학에 진학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의도하는 역량을 증진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학습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수시 종합 전형과 같은 경우에는 학생의 전인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평가하기 때문에 학교생활에 충실히 임하며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주도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유리하다.  발명에 관심이 많아 특허를 여러 개 갖고 있는 일반고 전교 30등 학생, 로봇 만들기에 푹 빠진 전문계고 학생이 KAIST에 합격해 화제가 된 사례는 이를 증명한다(이원진, 2020). 또한 학생부종합전형에서는 평가에 있어서 교과점수 뿐만 아니라 다양한 비교과활동이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교사는 다양한 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힘쓰게 되고, 학생은 동아리 활동 및 독서활동에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단순히 문제를 푸는 능력뿐 아니라 사고하고 탐구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따라서 수시는 21세기 대한민국이 추구해야 할 교육적 가치와 부합하는 방식이다. 


3. ‘수시’로 변화하는 대한민국 입시제도


  정시든 수시든 완벽한 대학 입시전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완벽한 입시제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한민국에 적합한 입시제도는 분명히 있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더 적합한, 더 나은 대입 전형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필자는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21세기 대한민국이 택해야 할 전형은 정시가 아닌 수시라고 주장한다. ‘더 공정한’ 제도를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점과 대학의 목적, 그리고 교육의 방향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았을 때 수시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 더 타당한 결론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수시 전형이 여전히 많은 우려점과 부작용을 안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수시가 가진 교육적 가치가 크기 때문에 수시를 축소하는 것은 대학에나, 학생에게나, 국가에나 손해라고 하겠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대입 정책은 점진적으로 정시 비중을 축소하고 수시 비중을 늘리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하며, 추후 논의의 방향은 어떻게 하면 수시의 부작용을 줄이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수시를 확대할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사훈, <대학 입학 전형에 따른 상급학교 전공 유지 의향, 전공 적합성, 전공 수업 만족도에 관한 연구>, 《예술인문사회융합멀티미디어논문지》 8(7), 인문사회과학기술융합학회, 2018, 225-233면. 

문정주·최율, <배제의 법칙으로서의 입시제도: 사회적 계층 수준에 따른 대학 입시제도 인식 분석>, 《한국사회학》 53(3), 한국사회학회, 2019, 175-215면.
신윤범, <한국의 고교학점제 정책 동향분석>, 《동북아시아문화학회 국제학술대회 발표자료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20.7., 239-243면.
오성배, <대학생의 입학전형별 학업성취 및 학교생활 분석>, 《한국교육문제연구》 34(3), 중앙대학교 한국교육문제연구소, 2016, 157-175면.

 

 

 

 

a little philosopher

  1. 수시 전형은 대학이 학생을 선발하는 입학전형으로서, 학생부 교과 성적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교과전형, 입학사정관 등이 참여하여 학생부 비교과를 중심으로 평가하는 종합 전형, 그리고 논술, 면접, 적성검사 등 대학별 고사로 이루어져 있는 전형을 의미한다. 이 중에서도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종합 전형이다. 종합 전형에서는 비교과를 중심으로 교과, 자기소개서, 추천서, 면접 등을 통해 학생을 종합 평가하는 전형이기에 수능 점수만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정시와 대비하여 수시의 특징을 나타내기에 적절하다고 평가하였다. [본문으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