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교육은 학습을 꿈꾸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 학습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학습은 그저 ‘교사가 가르친 내용을 학생 혼자 정리하고 공부하는 것’ 정도로 축소되어 생각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많은 고등학생이 경험하는 야간자율학습에서 학습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야자 시간에 학생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떠올려보면 쉽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습은 이렇게 좁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학습이란, 그저 교육의 객체인 피교육인으로써 정해진 내용을 이해하려는 활동이 아니라 교육을 활용하는 배움의 주체로서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화된 ‘교육과 학습의 경도된 위치성’이 문제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왜곡된 학습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교육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육과 학습의 차이는 학습인이라는 행위자의 주체성에 근간을 둔다. 교육은 교육인(주체)이 피교육인(객체 혹은 비非-주체)에게 행하는 것이고, 학습은 앞에서의 피교육인이 객체의 지위를 탈피하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배움을 행하는 것이다. 둘은 명백히 다른 것이지만 괴리된 것은 아니다. 서로는 서로를 만들어내고 강화한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학습과 동위에 서지 않고, 위에 올라서서 학습을 관리·감독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오히려 교육은 학습과 동등한 것에서 더 나아가 아래에서 학습을 받치고 선 모양새가 되어야 한다. 


  교육은, 교육을 학습에 활용하고자 하는 학습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도구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과 동시에 피교육자로 하여금 어떠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실천을 촉발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목적론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상술한 ‘교육이 학습을 꿈꾼’다는 것은 후자와 연결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작금의 교육은 위의 역할을 경시한 채 국가 주도에 따라 도구적 기능만을 중점적으로 수행하기에 문제적이다. 이는 교육이라는 단어의 어원에서 알 수 있는 교육의 본래적 의미와도 멀어져 있다. 교육education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educo'는 ‘밖으로 꺼낸다’라는 뜻을 갖는다. 이는 피교육인의 선천적인(혹은 후천적인) 잠재 능력을 끄집어낼 수 있게끔 돕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자 본질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에 반해 지금의 교육은 안에서 바깥으로 꺼내는 것이 아닌, 외부 지식(필요한지조차 불분명한)을 안으로 삽입하는 것에 불과한 행위를 관성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이제 교육은 지금까지 무반성적으로 유지하고 있던 계급적 지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는 단순히 교육자 개인 차원에서 교권을 약화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육과 학습 간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교육은 학생을 내려다보던 절대적 우위를 내려놓고, 학습자를 지탱하고 서 있는 아래의 위치로 겸허히 내려가야 한다. 따라서 교육은 학습을 꿈꾸며, 그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보조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2. 한국 교육의 현주소


  지금 한국의 교육은 어디에 있는가? 대다수의 한국 학생들은 국가의 교육 기관이 편성한 교육과정에 따라 동일한 교재를 사용하며 같은 내용을 배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실생활(예를 들어 공과세 납부하는 법이라든가)과 괴리되어있으며, 학생 개인의 인격적 성장 등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시험에 출제할 수 있는 내용을 가르치고, 그를 바탕으로 산출한 성적으로 학생을 선발할 뿐이다. 교육이 정말 이런 것에 불과한가? 우리가 막연하게 떠올려볼 수 있는, 스승과 제자 간의 유대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으로의 성장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지금의 교육은 어딘가 기형적이다. 결국 지금의 교육은 자신이 수행해야 하는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인데,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①교육이 도구적 기능만을 중점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 비롯되며, 더불어 ②그 내용 역시 국가에 의해 규정되고 강요됨으로써 학생 개개인에 맞추어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화된다. 

2.1 ‘교육-학습의 패러다임 & 평가중심 교육관 & 관문 사회’의 연결고리

 

  지금의 평가 중심의 도구적 교육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계속해서 수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학습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점한다. 이에 따라 교육인와 피교육인의 관계에서도 동등성이 보장되지 못하는 부차적인(그러나 매우 중요한) 문제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교육-학습의 권력적 관계는 근본적으로 평가 중심 교육관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교육이 학습을 평가하면서 학습은 교육에 종속되는 것이다. 낙오자를 필연적으로 생성하는 교육 아래 학습자들은 교육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이러한 평가 중심의 교육관은 관문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어 명문 대학이나 로스쿨 등, 사회적으로 선망받는 특정 집단에의 진입은 시험이라는 관문에서 좋은 성적을 매김 받아야지만 가능하고, 이러한 시험 ‘교육>학습의 패러다임’-‘평가중심 교육관’-‘관문 사회’로 이어지는 관계는 서로를 강화한다. 선후 관계를 따져본다면 관문 사회가 평가 중심 교육을 유지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터인데, 흥미로운 점은 관문 사회가 형성된 배경에 다시금 평가 중심 교육을 놓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평가 중심 교육이 다시금 관문 사회를 강화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서구 근대 국가들은 양질의 균일한 노동자(혹은 시민)를 양성해내기 위해 교원을 양성하고 일률적인 ‘근대’ 교육을 시행했다. 이와 같은 근대 교육은 일본을 통해 한국으로 유입되었는데, 당시 부국강병을 위해 서구 사회를 모방하고자 했던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의 저명한 교육자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의 저서 <학문에의 권유>에서 주장한 바에 따라 국민교육을 시행하였고, 이후 대한제국 역시 일본을 모방해 ‘근대화’된 교육 제도를 정착시켰다. 이를 통해 기존의 개인의 수신修身을 기본으로 하는 공부를 탈피하고 근대적 국민국가의 ‘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국가 주도의 전국단위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지금의 교육부는 이러한 국민교육을 수행하기 위해 제도화된 교육을 학교에 지시하는 공간이며, 학교(혹은 교사 개인)는 교육의 동일한(*‘동등한’이 아니다) 질을 보장하고 수행해야만 하는 공간(혹은 직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주의적인 교육은 일종의 투자로서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공교육은 국가 자본이 투입된 투자이며, 국가 유지와 존속에 필수적인 시민을 양성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자연히 교육의 내용 역시 국가의 관점이 견지된(최소한 국가에서 배워야 한다고 지정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더불어 이렇게 제도화된 교육은 전인격적 교육을 실현하기보다는 규정에 따르는 양적 교육을 시행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따라 교육의 목적론적 기능보다는 도구적 기능이 중시될 수밖에 없고, 규범보다는 기능이 강조되고, 교육은 학습에 앞서게 된다. 정리하자면 근대 교육의 도구적 성격으로 인해 교육이 본연의 목적을 잃고 국가적 목적에 따라 운영됨에 따라, 정작 배움에서 학생이 소외된 것이다.


  문제는 시대적 흐름이 바뀌고, 국가적 위기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국민교육을 시행했던 19세기~20세기 초중반을 지나 국가적 대치 상황이 상당히 약화된 현대 사회로 이행하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한국은 식민지 상황이 끝나고(더 나아가 전쟁과 개도국으로의 시기까지 끝나고) 이제 기존의 문제를 해결해볼 만한 여력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국가 주도 교육 운영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교육은 사회 내에서 개인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경쟁이 강화되는 문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인간적인 혹은 교육 본연의 목적에 가까운) 방안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입시제도를 세부화하고 평가를 강화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경쟁과열 상황에 일조하고 있다. 즉 지금의 교육은 예전의 부국강병을 위한 도구적 기능을 넘어, 경쟁을 통해 우수한 잠재적 노동 인력을 키우고 선발할 수 있게끔 교육체제를 구상하여 시행하고, 입시를 위한 평가지표를 제공하는 기능까지 악착같이 수행하면서 강화된 도구성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대학은 공교육에서 제공하는 이러한 지표를 이용해 편리하게 학생들을 선발하고, 기업도 마찬가지로 대학 교육에서의 성적과 개인의 스펙 등을 고려해 사원을 선발한다. 이렇게 인간성을 버린 도구적 교육과 사회의 연결고리 안에서, 사람들은 경쟁자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갖추려 노력하고, 교육의 평가 시스템은 점점 냉정하고 정교해지며, 사회의 관문은 점점 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 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이 속에서 우리가 꿈꾸는, 학생을 위하고 학습을 꿈꾸는 교육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관문 사회가 만들어낸 평가 중심 교육 속에서 경쟁하고, 우리가 복속됨으로써 강화되는 평가 중심 교육이 다시 관문 사회를 강화하는 끊임없는 순환 고리를 망연히 지켜볼 뿐이다. 

2.2 공정성 담론과 교육


  위에서 언급한 문제의 요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많은 사람이 기초적인 교육 수준을 넘어 고등 교육을 받고 높은 경쟁력을 갖추어 경쟁하는 상황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더 나은 일자리 등을 위해 경쟁력을 확보하려 하고, 점점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기업 등은 특정한 지표(이를테면 시험 점수 같은)를 이용하여 그들 중 일부를 선발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현재의 공정성 담론이 형성된 배경을 파악해볼 수도 있을 듯하다.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공정함에 대한 감각은, 지금의 인국공 사태 등에서 촉발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전에는 공정함을 위반하는 특수한 사례에 대해 분노(주로 어떤 권력자 개인이 부정한 방법으로 지위를 꿰찬다거나)가 주된 것이었다면, 지금의 공정성 담론은 수치로 확인 가능한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예를 들어 학종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정시만이 공정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례)를 바탕으로 인간의 자율성이 개입될 여지를 차단하고 모든 교육과 평가를 정량화된 시험을 시행함으로써 공정성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이는 공정이라는 가치를 그저 모두가 같은 시험을 치고 높은 점수를 얻은 사람이 통과하는 것으로만 파악함으로써 본래의 가치를 축소한다. 더불어 자신이 겪었던 관문을 다른 사람들도 통과해야만 한다는(나만큼의 노력을 저 사람도 기울여야 한다는) 의식 아래 그 밖의 방법은 모두 ‘정당하지 못한 것’ 내지는 부정의한 것, 그리하여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발생한 공정성 담론의 문제는 현존하는 교육-학습 패러다임을 더욱더 공고히 한다는 점이다. 시험이 무엇보다 공정해야 한다는 요구는 시험이 출제되는 교육의 내용은 이미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가정하며, 나아가 시험이라는 형태를 가지고 있는 평가의 권위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교육에 있어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교육의 본질은 앞서 말했듯 학습을 보조하고 지원하여 학생이 원하는 삶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평가 중심의 도구적 교육은, 평가를 위해서 그 스스로가 객관적인 사실만을 교육할 수 있도록 제동이 걸린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교육이 불가능해지는 문제가 있다. 우리가 국어 과목에서 시를 배울 때, 시를 감상하고 그것을 내 삶과 이어진 예술로 이해하거나 삶에서의 의미로 다가오게끔 하는 학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이미 정해진 상징과 정해진 스토리, 정해진 표현법을 교육하면 그것을 배우고 암기할 뿐인 죽은 학습이 행해진다. 그런데 사실 이는 평가 중심의 교육을 기획하고 주도하는 국가의 입장에서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지금과 같은 입시 시스템이 원래 있던 질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데 있다. 지금 당장에는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안정성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 될 수 있겠으나, 이는 시대가 변화할수록 효용이 떨어지는 낡은 관습이 될 뿐이다. 점차 학생 인구수가 줄어듦에 따라 경쟁을 통해 다수의 사람을 주류적 삶에 묶어두는 강제력이 더 이상 교육에서 작동할 수 없으며(대학 정원이 전체 학생 수보다 적어져서 마음만 있다면 모두 대학에 갈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기술 발전에 따라 성실함과 안정성보다는 창의력과 새로움이 요구되는 새로운 시대에 억압적인 기존의 질서를 더 견고하게 쌓아 올리는 것은 결국 자신을 가두는 덫이 될 것이다. 차라리 국가는 학습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을 제도화함으로써 각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키울 수 있게끔 하고, 이를 통해 사회의 다양성을 증진하고 국가 보존/발전에 기여하게끔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공교육은 사회의 구성원을 키워내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하여 각 개인이 자신에게 적합한 소양을 키우고 삶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다양한 것들을 지원해야 한다. 개인의 자율적인 발전이 오히려 더 다채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는 힘이 될 것이며, 그 속에서 교육은 개인의 자율적인 발전을 지원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가치와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3. 너머의 교육. 같이, 가치


  학습이 교육의 도움을 받아 각 개인에게 최선인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 앞으로 교육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교육과 학습의 위상이 역전됨에 따라 각각에게 요구되는 역할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앞서 서문에서 말했듯이 교육은 그 스스로의 우위와 절대성을 내려놓고, 이제껏 허용하지 않았던 자율적 배움을 학습의 주체에게 허용하고 학습을 보조해야 한다. 밑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보기로 하자.


  학교 안에서의 학습을 상상해보자. 정규교과로 편성된 국영수를 넘어 배움을 확장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를 위해서는 경계를 허무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클래스101’과 같은 온라인 창작 클래스나, ‘리얼클래스’와 같이 실제 사용되는 언어를 현장감 있게 배울 수 있는 온라인 클래스 등 공교육 바깥의 여러 교육 플랫폼과 협업을 맺고, 그 사업체 내에서 학생들이 흥미가 있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해 학습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서 공교육과 사교육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교원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이를 통해서 넓고 다양한 ‘접함’의 교육으로 확장을 도모해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동아리 활동 예산을 강사를 초빙하는 데 쓰게끔 지원할 수도 있을 것이며, 유명무실한 7교시 창체 교육 시간을 사회에서 특정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 혹은 학생끼리 논의할 수 있는 시간으로 주어지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말뿐인 인권 교육이 아니라 실제 구호 단체에서 활동하시는 분을 초빙해 현장 실태를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혹은 아예 학교 밖을 벗어나 봉사활동을 하러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접함’을 경험한다. 접함은 몰랐던 것과의 연결점을 만들어줌으로써 내 눈 앞에 존재하던 삶을 너머 더 무궁무진한 것을 보고 체험하며 이야기하게 한다. 


  이 속에서 교사의 역할 또한 바뀔 수밖에 없다. 교사는 학생들과 전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배움터에서 ‘어른’으로 존재해야 한다. 교사는 기초적 단계의 필수적인 공교육을 시행하는 동시에 학생과의 여러 이야기를 통해서 개개인에게 필요한(그들이 원하는) 수업 혹은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조언한다. 특히 교사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어른으로 학생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직업적)존재 이유를 두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배움을 보조하고 지원하는 데 목적이 있는 새로운 교사와 달리, 이 교사는 학교에 상주하며 학생과 관계를 맺고, 갈등상황이 발생했을 때 지도하는 등의 상호작용을 수행해야 한다. 무의미한 기존의 입시 수업이 점차 없어지면 교사의 역할도 그에 따라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확장해 학교 형태의 변화까지도 상상해볼 수 있다. 기존 반의 구성이 그저 개인의 성씨 등에 의해 무미건조하게 1반, 2반, 3반 등으로 이루어졌다면, 새로운 반은 개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사회반(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 과학반(과학 기술 등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 예술반(악기나 미술, 체육 등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 등 다양한 범주로 구성하고, 그 영역에 전문성을 갖춘 교사를 배치하는 식으로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이는 이미 강원고등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강원고에서는 멘토링시스템 동아리 학급제를 운영하며, 학년별로 반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동아리가 한 반이 되어 학교 생활을 한다. 학생들이 교사와 교과과정을 선택하며, 교실을 돌아가면서 수업을 듣는다. 더불어 학급 내에서 하루에 한 번씩 멘토링 시간을 가져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는 시간이 주어진다. 

 

  기존의 반 구성에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과 달리, 공유하는 특성이 있는 새로운 반에서는 학생 간의 더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이루어짐으로써 보다 자유롭고 적극적인 배움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관심사가 정해지지 않은 친구들을 위해 반 간의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 속에서 이뤄지는 배움은, 내용이 정해져 있는 교과를 가르치는 교육과 달리 내용이 무궁무진한 학습이 주가 되는 것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은 다양한 학습의 형태와 내용을 지원하며, 이것이 바로 평가와 공정성을 넘어선 새로운 교육의 가치로서 현현한다. 


  물론 내가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결코 정답이 아니다. 그러나 꿈꾸어야 할 가치를 마음껏 상상해보는 하나의 사례로 의미가 있다. 내가 위에서 논의한 가치를 정리하자면, 배움의 넓은 폭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지원으로서의 교육이다. 교육 인력과 학생의 선택폭, 자유도, 그리고 그를 둘러싼 문화 등의 사회적 기반까지, 학생이 주체로서 선택하고 그를 보조하고 지원하는 교육 말이다. ‘접함’을 통해 다양성을 증진하고 모두가 자신의 길을 가는, 그러면서도 모두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교육을 꿈꾼다. 학교가 억압의 공간이 아니라 가능성의 공간이 되고, 학생들이 자기만의 배움을 좇고,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것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사회의 다양성을 증가하는 방향으로 이어져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최대로 열리게 된다. 학교에서부터, 교육에서부터 이와 같은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분명히 사회로도 자유롭고 적극적인, 행복한 분위기가 확산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전인격적 교육과 다양한 학습은 지금과 같은 사회구조에서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가장 직접적으로는 교원당 맡아야 하는 아이의 수가 많아 학생 각각이 배우고자 하는 것을 이끌어내고 보조할 수 있는 교원의 능력이 부족할 뿐더러(이는 개인의 자질의 문제이기보다는 구조적 불가능성을 말한다)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고 있는 학벌주의와 그에 대한 견고한 믿음, 그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여러 사회적 의식과 욕망이 모두 뒤섞여 있다. 그 속에서 우리가 당장 보아야 하는 한 명의 아이, 한 명의 학생, 한 명의 사람은 잊히고 만다. 교육이 제대로 기능을 못하면 학습자가 겪는 내면의 흔들림, 희망과 욕망 그리고 절망은 눈앞에 채 드러나지도 못하고 죽는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읽었으나 나의 문제가 아니기에 당장에 변화를 반기지 않으며, 누구나 겪은 것이라는 이유로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만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꾸물거리는 사이 너무나 많은 학생을, 많은 사람을 잃었다. 지금 당장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건 언제나 우리의 문제였고 또 언제든 다시 우리의 문제가 될 것이다. 교육은 학습을 꿈꾸어야 한다. 더 나아가, 교육은 삶을 꿈꾸어야 한다. 교육은 언제나 미래를 위한 것이다. 단순히 공정에 매몰되어 시험을 위한 지식을 넣어주는 게 아니라,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어떤 사람으로서 세상과 마주할지에 대한 고민의 장을 열어주는 역할이 바로 교육의 몫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교육을 향해 가는 불꽃이 되어야 한다.

 



 

darling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