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교육, 전체이용가> 방문기
넓고 다채로운 성교육 고민하기

 

당근

 

2019년 하반기에는 더 나은 성교육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의 네트워크인 위티에서는 청소년과 섹스를 주제로 강연을 열고, 콘돔과 청소년 섹슈얼리티에 대한 선입견을 다루는 행사와 전시를 기획했다. 경향신문에서는 <성교육, 이젠 젠더교육이다>라는 제목으로 독일, 멕시코, 스웨덴, 아이슬란드, 미국, 한국의 성교육을 소개하는 연재기사가 기획되었다. 그리고 초등젠더교육 연구회인 아웃박스에서도 초등학교에서 할 수 있고, 꼭 필요한 성교육을 고민하며 성교육 페스티벌을 열었다.

 

2019년 11월 1일, 서울교대에서 열린 <성교육, 전체이용가> 페스티벌에서 이미 반 발짝 앞서 좋은 성교육을 실행하고 고민하시는 분들을 통해 더 나은 성교육에 대한 고민을 확장시켜볼 수 있었다.


#부스1 '딱따구리는 편견을 뚫지!' - 우따따

(우따따 부스의 그림책 큐레이션 및 워크북) 
우따따는 가정에서 교육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성평등한 그림책을 고르고, 함께 할 수 있는 교육자료를 제공하는 그림책 정기구독 서비스다. 등장인물의 설정이나 묘사, 대사가 성차별적인지, 또 성별고정관념을 반영하지는 않는지, 여성 주인공은 충분히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지, 남성주인공은 단순한 묘사나 설정만을 하지 않는지, 또 성평등 이외에 다루는 내용이 흥미로운지 등의 기준을 바탕으로 큐레이션 도서를 선정한다.(1) 

 

이날 부스에서는 여러 교과목별 한 성평등 퀴즈를 진행하고, 아웃박스와 함께 제작한 교과별 그림책 연계 활동안을 나눠주었다. 나는 도덕을 풀었는데, 퀴즈를 풀며 선의와 올바른 행동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또 특히 나이권력이 존재하는 학생들과의 관계에서 칭찬이 학생들을 평가하고 옥죄는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떠올리는 시간이었다.

 

교과 연계 그림책 활용지는 성교육/성평등/성별고정관념에 관해 읽을 수 있는 책과 독후활동으로 할 수 있는 활동을 제안한 내용이었다. 국어부터 체육, 미술까지 다양한 교과에서 다양한 주제로 젠더/성교육을 할 수 있는 아이디어가 담겨 있었고, 나를 이해하고 돌아보는 활동,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의 기대와 편견을 고민하는 활동, 새로운 지식을 재미있게 정리하는 활동, 주어진 자료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활동까지 많은 영역의 성장을 다루고 있어 무척 흥미로웠다. 무엇보다 재미있게 학생들에게 다가가서 성교육/성평등 교육을 할 수 있는 사례를 발견할 수 있어 좋았다.

 

(우따따와 아웃박스가 함께 만든 활용안의 일부로, 아래 링크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출처 : 우따따 공식 블로그, https://blog.naver.com/woodpecker_official/221707710000)

#부스2 '또래 성폭력 속 교사의 역할' - 고양파주여성민우회
고양파주여성민우회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여성의 인권이 존중되는 사회, 생태 사회와 더불어 사는 지역공동체를 지향하는 단체다. 여성주의로 만들어가는 민주주의, 여성주의 교육 프로그램 운영, 성폭력을 뿌리 뽑기 위한 활동 및 피해자 지원 등의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다.(2)

이날 부스에서는 또래 성폭력, 즉 교실에서 아동 간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교사는 어떻게 대처를 할 수 있을지를 다루고 있었다. 나는 ‘내 학급의 학생이 점심시간에 성기모양에 대한 성희롱을 했을 때’라는 상황을 가정하여 교사로서의 개입을 고민하게 되었다. 일단 당황했는데, 정신없을 점심시간 교실 속 그 대화를 들었다면 단번에 그 언행이 성희롱인지 판단하고, 어떤 대응을 할지 결정해서 개입하는 과정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발언을 한 학생, 또 그 말을 들은 학생을 따로 만나서 이야기하고 교실 전체에 공유해야겠다고 일단 답했던 것 같은데, 그 상황에서 단호하게 그 발언이 잘못인지 알려줘야 하는지, 따로 만나서는 어떤 이야기를 할지, 또 학생이 자신의 발언내용을 인정하지 않는 등의 상황에서는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지 당혹스러웠다. 그래서 일단 어떤 일이 발생한 이후에 그에 맞추어 대응하는 일보다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시작 시점에서 성교육을 하고, 우리 학급 공동체의 규칙을 마련해가는 작업이 꼭 필요하겠다 싶었다.


정리하자면 이 부스는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여성주의의 성폭력 대응 기조 혹은 반성폭력운동의 기조가 교실 공간에서도 적용될 수 있고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스쿨 미투 이후에도 학교의 성폭력 및 인권침해에 대응하는 프로세스가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교육공동체에서 여성주의를 기조로 성폭력 교육과 성폭력 해결의 기준을 마련하고 제공하는 일이 시급해보였다. 더불어 성폭력을 다루는 교육을 강간(성폭력의 가장 협소한 규정인)과 낯선 타인 중심에서 공동체의 문제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점도 지금 당장에 가장 필요한 교육으로 보였다. 그리고 부스에서의 경험처럼, 교사가 되기 전에 구체적인 사례들로 생각하고, 당황해보고, 대응을 연습할 기회가 주어질 필요를 많이 느꼈다.

 


#부스3 ‘선생님 성이 뭐에요?’ ‘예민함을 가르칩니다’ - 아웃박스
아웃박스는 학생들의 젠더감수성을 길러주기 위한 수업을 연구하는 초등교사연구회로, 2017년 고정관념을 깬다는 의미를 담아 만들어졌다. 여러 가지 성교육을 포함하여, 여러 교과와 수학여행 등의 학교 상황과 연계한, 수업자료를 연구하고 제작, 공유하고 있고, 교사들을 대상으로 성평등 교육 연수를 실시하거나 강연을 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3)


부스에서는 아이들이 성에 관한 질문을 했을 때 어떻게 답할지를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앞선 부스에서와 마찬가지로 미리 어떤 질문이 던져질지 당황하는 경험이 매우 필요했다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지침이나 자료만큼이나, 성교육과 성평등에 관한 교육적 상황을 함께 공유하고 고민할 수 있는 교사 공동체의 존재가 소중하다고 느꼈다.

 

 

각각 <집안일은 누구의 일일까요?> <노래 속 성차별> <월경을 월경이라 말하지 못하고>를 주제로 하는 수업지도  안이다. 출처 : <성교육, 전체이용가> 아웃박스 부스

 


재밌었던 것은 젠더와 성평등을 다루는 수업 지도안 예시였는데, 일상생활과 세상을 돌아보고 당연하게 여겼던 것에 질문하는 수업들이었다. 집안일을 누가 하는지 등 일상을 돌아보고, 캐릭터의 성역할에 대해 다루는 등 대중매체 속 세상에 질문하는 내용의 수업들은 비판적 접근에 대해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미디어 리터러시를 기를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또 성인지적 감각을 다루는 것을 넘어, 학생들의 생활세계와 수업을 연결한며 삶과 교육을 연결 짓는 방법도 무척 흥미로웠다.

 


#인터뷰1 - 탁틴내일 활동가 강덕임님

 

■ 탁틴내일 청소년 성문화센터를 소개해주세요.


‘사단법인 탁틴내일’이라는 단체에 청소년 성문화센터가 위탁되어 운영되고 있습니다. 탁틴내일은 설립된 지 20년이 넘은 민간단체로, 주로 아동, 청소년, 여성의 인권에 관한 활동을 하는 단체입니다. 활동을 하면서, 성에 관한 부분들이 가장 취약하다는 것을 느껴, 성과 관련된 내용, 예를 들어 성폭력, 성 인권, 성교육, 성 착취 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 탁틴내일 청소년 성문화센터에서 실시하고 있는 이동형 성교육은 무엇인가요?


성교육이라고 하면 보통 교실이나 정해진 장소에 강사가 찾아가서 하는 형태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동형 성교육, 버스형 성교육에서는 45인승 대형버스가 학교나 지정된 장소에 찾아가는 교육입니다. 버스는 개조되어서 의자를 다 걷어내고 성과 관련한 컨텐츠로 내부가 꾸며져 있고, 아동·청소년들이 그 버스에 탑승하여 교육을 받는 식입니다.

(이동형 성교육 버스 내부 사진, 출처 : 탁틴내일 홈페이지 http://www.tacteen.net

■ 이동형 성교육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요?


아동·청소년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보니, 도시에 있는 아동·청소년은 성교육 기회가 많은데, 그에 비해 지방이나 도서·산간 같은 곳은 성교육이 너무 취약한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더라고요. 그래서 후원을 받고 버스를 지원받기도 해서, 대략 2000년대 초반부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버스를 현재 2대 운영하고 있고, 경기지역에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청소년 성문화센터에서도 버스에 강사가 탑승하여 학생들이 이동하기 어려운 곳에 직접 찾아가서 교육을 하는 형태로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취약한 지역의 학생들에게도 널리 교육을 하고자 하는 취지인 것이지요.

(움직이는 성문화센터 사업 소개, 출처 : 탁틴내일 홈페이지 http://www.tacteen.net)

■ 이동형 성교육을 하시면서 내용면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거나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나중에 기회가 있어서 탑승해보시면 알겠지만, 서로 어울림에 대해 이야기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성교육에서 중요한 것은 지식전달이 아니고, 함께, 더불어 살기 때문에 성교육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교육 마지막에 '별보기 체험'이라는 체험하는 코너가 있는데요, 천장에서 별이 나오는 코너인데,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고, 빛나기도 하고 빛나지 않을 수도 있고 모양도 모두 다르다, 하지만 서로 어울려 살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아름다운 것이고, 서로 모두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이런 메시지를 주면서 마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터뷰2 - 아웃박스 소속 교사분들


■ ‘성교육, 전체이용가’를 기획하게 된 고민이나 계기는 무엇일까요?


성교육이 항상 학교 현장에서 꼭 필요하고 중요한 문제인데, 성교육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우고 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현장에 나가면 학생들은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다양한 질문을 물어보는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가 쉽지 않아서 곤란함을 겪는 경우도 많고, 중요한 문제인데 어디서 터놓고 이야기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경험을 미리 교대생들이 해보면 좋겠다 싶어 기획을 하게 되었습니다.

■ 현장교사들이 학생들의 질문을 접할 때 무엇을 먼저 고려하면 도움이 될까요?


아무래도 학생들의 특성이겠죠. 저희는 교실에서 수십 명의 학생들을 만나고 있고, 어떤 학년은 이렇다 말하기 힘들 정도로 학생들 개개인은 너무나 다양합니다. 매년, 모든 반 학생들이 다 다르니까요. 그래서 자기반 학생들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고려하는 것이 제일 중요해보입니다.

 

■ 현재 학교에서 성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요?

 

현재 교사들이 성교육을 할 때 따라야 할 성교육 표준안이 잠정 폐기된 수준인데, 제대로 다시 만들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교사들도 성교육을 할 때 어떤 지침을 기준으로, 어디까지 지도해야 할지 고민이 큽니다. 교육부가 '이 정도는 해도 된다'는 지침을 만들어주면, 교육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해 어렵습니다. 교육대학교도 마찬가지 일 것 같습니다. 교육부와 여성가족부에서 성교육 표준안에 대해 논의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성교육, 전체 이용가’에서 다양한 내용의 부스를 돌아보며, 성교육을 당장 학교 현장에서 학생들의 호기심에 답하는 것부터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성을 이해하는 것, 그리고 교육공동체를 더 성평등하고 안전한 곳으로 꾸려가는 것까지 다양한 면으로 확장시켜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성교육은 일부 교과나 특수한 시간으로 한정짓지 않고, 일상과 지식을 넘나들며, 다양한 교과에서 성평등과 인권이 라는 관점을 바탕으로 실시할 수 있는 생활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성교육은 일상과 지식의 경계를 허물지 않으면 좋은 교육이 될 수 없는 교육이기에, 성교육을 고민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에서 더 좋은 교육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일상에 당장,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는 교육을 넘어, 일상과 배움을 통합하는 교육, 지식이 삶의 언어가 되고 삶이 지식의 맥락이 되는 교육은 분명 성교육으로부터도 출발할 수 있다.

 

 

 

취재에 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1)우따따 공식 블로그 https://blog.naver.com/woodpecker_official

(2) 고양파주여성민우회 홈페이지 http://goyang.womenlink.or.kr/2013/ 

(3) 아웃박스 공식 블로그, blog.naver.com/gdgamsung 

섹스는 알지만 하면 안 되는 청소년?!

로운맘



페미니스트 ‘선생님’보다 페미니스트 ‘동료’가 필요합니다.


2년 전 여름,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만으로 학교에는 수많은 민원이 쇄도하고, 그 교사를 향한 악의적 공격이 퍼부어졌다. 이 사건 이후로 페미니즘 운동 진영에서는 ‘#우리에게는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이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자각하면서 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WeTee)는 <우리는 페미니스트 동료가 필요합니다>라는 논평을 작성하면서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이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하다.”로 귀결되는 것에 의혹을 제기했다.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늘어나는 것만으로 페미니즘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 선생님’만으로 학생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인권침해와 폭력이 해결될 수 있을까? ... (학생은) 교사에게 구원받는 대상이자 교육을 통해 바뀌어야 할 존재라는 생각을 넘어 학생이 페미니즘 교육을 요구하는 주체로 인식될 수 없는 걸까?”


이들은 일방적인 가르침을 전달하는 페미니스트 ‘교사’를 양성하는 것을 넘어서서 평등하게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페미니스트 ‘동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페미니스트 ‘교사’와 ‘동료’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 청소년들은 ‘교사’가 아니라 ‘동료’가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것일까?

 


청소년의 섹스에 대한 페미니스트 진영 내부의 입장 차이


페미니스트 ‘교사’와 ‘동료’의 차이의 핵심은 권력 관계에 있는 듯하다. 더 정확히는 나이에서 생기는 권력과 위계이다. ‘교사’는 ‘동료’보다 학생들에게 더 권위적인 존재이며 평등한 관계에 서기 힘든 존재다. 바로 이것이 청소년들이 학교현장에 페미니스트 교육을 도입하자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 방식은 페미니스트 ‘교사’보다는 ‘동료’로서 청소년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학생들 역시 페미니즘 교육의 주체로 함께 설 수 있는 학교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위계를 허물고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며, 학교 내의 다양한 권력 관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지 않는 이상 페미니즘 교육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의 발화에서 페미니즘 운동과 교육에 있어서 청소년들이 성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읽을 수 있다.

 

페미니즘 교육과 결을 같이 하는 성교육에 있어서도 청소년과 성인 사이에 이와 비슷한 긴장이 나타난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현재의 성 편향적이고 왜곡된 성인식을 담고 있는 성교육을 비판하며 대안적 성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위티(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는 지금까지의 성교육이 청소년의 성을 터부시하고, 보호라는 이름 아래 청소년들의 성을 억압하고 통제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입니다’라는 새로운 성교육 강연을 주최했다. 강연에서는 섹스는 ‘음란한 것’, ‘청소년이 접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통념을 부수고, 포르노적 통념도, 어른들만의 전유물도 아닌 섹스에 대한 이야기, 성적 존재로서의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 강연을 주최하자 위티는 몇몇 보수단체들에 의한 악의적인 민원과 비난에 시달렸다. 해당 강연이 ‘음란’함을 조장한다며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연사를 모욕하는 등 테러에 가까운 무분별한 비난에 대해 위티는 엄격하게 대응하겠다며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보수단체들만이 위티의 강연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일부 SNS의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위티의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입니다’ 강연에 대해 비판을 가하며 섹스를 ‘하는’ 청소년이 아니라 섹스를 ‘아는’ 청소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인 즉슨 섹스를 하기 전에 섹스가 무엇인지, 섹스를 ‘함’에 있어서 뒤따라오는 여러 위험성과 문제들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입니다’라는 말에는 ‘청소년은 당연히 섹스해도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지만 이러한 말만으로 청소년의 섹스에 대한 여러 문제가 간편화될 수 없다.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은 굉장히 불편하고 위험한 일이다. 청소년의 무분별한 섹스를 허용하고 방임하게 되면 임신에 대한 위험 부담의 증가, 각종 낙인, 성병 등 여성에게 편향적으로 부과되는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청소년의 섹스는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런 말로 청소년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착취하는 성인들의 비윤리성까지 덮어버릴 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청소년의 섹스를 무조건적으로 허용하기보다 섹스와 관련된 전반적인 지식과 실질적 문제들을 모두 아는 것이 먼저라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 주변의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성인 여성들에게 “청소년의 섹스를 허용해야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다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청소년은 아직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섹스를 허용한다면 성병, 임신 부담, 낙인 등에 대한 여러 문제를 충분히 숙고하고 고려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한 청소년들은 숙박업소 출입이 금지되어 있고, 학교에는 섹스에 대한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성교육이 부재한 상황이며 청소년 콘돔 구입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이에 어려움을 겪는 등의 청소년이 안전하고 건강한 섹스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있지 않은 점을 근거로 들어 청소년의 섹스를 허용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한다. 현실적으로도 생각해보면 여성 청소년은 나이가 많은 성인 남성과 섹스하는 경우가 많은데 둘 사이에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젠더 권력뿐만 아니라 청소년과 성인 사이의 나이 권력도 작용한다. 두 가지 중첩된 권력 관계 속에서 사실상 청소년은 불리한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신체적 성숙이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청소년기에 섹스를 하면 그 위험성이 더 크다는 지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섹스를 자주 하면 질염에 걸릴 확률이 더 높아지며 이는 자칫 골반염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청소년은 섹스를 하면 안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로 존재하는 생물학적, 신체적 위험성 때문에 청소년의 섹스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청소년들에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고려해볼 때 청소년이 안전하고 건강한 섹스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가지며, 따라서 청소년의 섹스를 금지하는 것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차선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인 여성이라고 해서 현재 안전하고 건강한 섹스를 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 여성도 똑같이 성병, 임신 가능성, 여러 질병의 위험 부담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들 중 대부분 역시 학교에서 기존의 성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섹스와 관련된 전반적인 성 지식을 모두가 충분히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19살까지의 여성은 섹스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지만 1년이 지난 후에는 잘 알게 되는 것도 아니며, 20살이 된 여성은 안전하고 건강하고 자유롭게 섹스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성인 여성들도 남성과의 섹스에서 불평등한 젠더 권력이 작용하며 각종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더욱이 신체적 성숙이 이루어지기 전의 섹스가 신체적으로 위험하다는 주장은 그 근거를 찾기 힘들뿐더러, 신체적 성숙 정도도 개인차가 크며, 일괄적으로 나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왜 청소년들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일까? 이런 차이가 ‘나이’에서 오는 것이라면 이러한 긴장은 나이주의적인 현상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인과 청소년 사이의 나이 차에 따라서 각각 다른 사회적 규범 및 역할을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주의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나이가 많고 적음이라는 임의적인 요소가 불합리한 차별의 근거가 되는 데에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청소년의 섹스에 대한 두 입장 차이에서 나이주의적인 긴장이 발생하고 있지 않은지, 청소년들의 섹스를 바라보는 성인들에게 청소년은 비청소년보다 사고방식이나 믿음, 행동이 미성숙할 것이라는 의식이 한 편으로 자리잡고 있는지 다시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의 섹스에 신체적, 생물학적 위험성의 문제가 바로 원천 금지로 이어져서도 안 되며 실질적으로 금지될 수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성에 대해 청소년과 더불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청소년이 섹스를 하는 존재, 문제를 인식하고 고민하고 해결해나갈 수 있는 자율적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이주의를 극복하고 청소년의 성을 이해하기


청소년 성범죄를 다루는 데 있어서 언론은 계속해서 ‘어리고 잘 모르는 순진한 청소년들을 상대로 한 끔찍한 범죄’, ‘무력한 피해자’라는 전형적인 구도를 형성한다.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입니다’라는 문구를 본 사람들의 거센 항의는 남성중심적이고 폭력적, 자극적인 ‘포르노적 섹스’를 떠올렸기 때문이 크다. 많은 사람이 섹스에 대한 성 편향적이고 왜곡된 의식을 바탕으로 청소년들은 ‘그런’ 섹스를 하기엔 너무나 어리고 미성숙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성관계는 이미 중학생 나이대부터 이뤄지고 있다. 교육부 ·보건복지부·질병관리본부가 2018년 청소년 6만 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제14차 2018년 청소년 건강행태조사 통계에 따르면 성관계 시작 평균 연령은 만 13.6세였다. 성관계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청소년은 전체의 5.7%였다. 이미 우리 일상 속에서 섹스하는 청소년의 존재는 당연하고 명백하다. 무턱대고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청소년의 섹스를 금기시하고 터부시하는 것은 오히려 현존하는 섹스하는 청소년들이 처한 어려움을 가리게 된다. 대안이 항상 현실을 고려하여 상황과 맥락에 맞게 제시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섹스를 하기 전에 먼저 알라는 말 대신,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문제들을 정확히 직시하고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의 대안적 성교육을 논할 때도 앞서 섹스를 ‘하는’ 청소년이 대신 섹스를 ‘아는’ 청소년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기존의 성교육 역시 ‘아는’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은가? 남성의 신체, 여성의 신체가 어떻게 생겼고, 2차 성징은 무엇이며, 아이는 어떻게 생겨난다는 식의 성교육은 이미 너무 많이 해왔으며 무용하다. 이제는 성적인 존재인 청소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논의해야 할 때이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대안적 성교육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


현 시점에서 우리는 청소년들의 성에 대해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권리, 자신의 욕망과 감각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주체로 서는 청소년을 꿈꿔야 한다. 섹스에 대한 통념을 바꾸고 청소년들이 건강하고 안전한 섹스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청소년들이 성적 주체로 서서 스스로 원하는 바와 원하지 않는 바를 명확하게 알아차리게 하고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청소년의 성과 성교육 : ‘누구의 성인가?

 

BDUCK

 

# 들어가며 - 청소년에게 이란?

 

청소년에게 유해한 결과는 제외되었습니다. 19세 이상의 사용자는 성인인증을 통해 모든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필자가 청소년과 성을 주제로 교육저널에서 세미나를 준비할 때의 일이었다. 당시 필자는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은 만 18세였는데, 세미나 준비를 위해 성과 관련된 단어를 구글에 검색하기만 해도 위의 유해 차단 문구가 떠 몇 번이나 애를 먹어야 했다. 필자는 호기심에 콘돔’, ‘성교육등 성과 관련된 단어를 포함해 온갖 검색어를 입력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성과 관련된 단어는 물론, ‘미인’, ‘코 교정등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표제어까지 유해 검색결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닌가? 한 마디로 원천차단이었다. 구글뿐 아니라 네이버와 다음 등 다른 메이저 포털 사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포털 사이트는 성과 관련된 표제어를 청소년에게 유해한 결과라고 지정하고, 모든 검색 결과를 보려면 성인인증을 할 것을 요구한다. 성과 관련된 정보를 얻으려면 성인이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이며, 청소년들의 접근은 원천차단된다. 이 문구가 이번 논의의 시작점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해 검색결과 차단 문구에서 우리는 청소년에게 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읽어낼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청소년, 을 어떤 이미지로 그리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간단한 삼단 논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청소년은 유해한 결과를 접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성은 유해하다. 때문에 청소년은 성을 접해서는 안된다.

 

구글의 청소년 유해 검색어 차단 문구

 

 

# 유해한 성, 소외되는 청소년

청소년들은 명백히 성에서 소외된다. 도입부에서 제기한 청소년 유해 검색 결과 차단 문구 외에도 우리 사회의 청소년의 성 소외를 보여주는 예시는 수없이 많다. 우리 사회에서 은 금기의 존재로 간주되고 특히 그 대상이 청소년이라면 더욱 숨겨야 할 것이 되기 때문이다.

 

1. 청소년 구입 금지 물품 : , 담배, 그리고 콘돔’?

우리나라는 청소년을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보호ㆍ구제함으로써 청소년이 건전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함을 목적으로 청소년 보호법을 시행하고 있다.(1) 때문에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생각되는 매체물이나 약물을 청소년이 접할 수 없도록 법적으로 규제한다. 대표적인 것이 술과 담배로 청소년에게 술과 담배를 팔면 판매자가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청소년이 살 수 없는, ‘유해한 품목은 술과 담배 말고도 더 있다. 바로 콘돔이다.

 

지난 65일 청주의 한 편의점에 종이 두 장이 붙었다. "19세 청소년에게는 절대 술, 담배, 콘돔을 판매하지 않겠다"는 경고문과 바로 옆에 "청소년 여러분 당당하게 콘돔을 구입하세요!"라고 반박하는 내용의 대자보다.(2)콘돔은 현행법상 성인용품으로 분류되지 않아 청소년의 구입을 제한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러나 법리적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의 콘돔 구입에는 장애물과 장벽이 꽤 많다.

 

청소년에게 콘돔을 팔지 않는다는 대자보와 이를 반박하는 대자보

교육부·보건복지부·질병관리본부가 2018년 청소년 60,0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14(2018) 청소년 건강행태조사 통계에 따르면 성관계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청소년은 전체의 5.7%(3422)였다. 성관계 시작 평균 연령은 만 13.6세로 조사됐다.그러나 청소년 성관계 경험자의 피임 실천율은 6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3) 청소년들의 이른 성관계 연령과 피임 실천율이 말해주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절대 청소년이 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은 안전하게 성을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이 안전하게 성을 추구할 수 없는 것에는 콘돔에의 접근성 제한의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성년자가 책임질 수단을 막아버림으로써 우리 사회는 청소년을 성으로부터 소외시킨다.

콘돔을 살 수 있어도 특수형 콘돔은 살 수 없다는 것 역시 넌센스이다. 몇몇 판매자들은 구입을 제한하지만, 법리적으로 청소년이 일반형 콘돔을 사는 것은 문제가 없다. 그러나 여성가족부는 요철식 특수콘돔과 약물주입 콘돔(사정지연 콘돔)을 청소년 유해물건으로 지정하고 팔지 못하게 했다. , 청소년은 콘돔을 살 수는 있어도 쾌락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청소년에게 콘돔을 팔지 않고, 팔더라도 특수형 콘돔을 팔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청소년을 무성적인 존재로 간주한다는 증거이다. 우리 사회는 청소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섹스는 하게 해줄게. 대신 즐겁게섹스하는 건 안돼!”

 

2. sex toy = ‘성인용품?

청소년에게 콘돔을 팔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콘돔이 성인용품이라는 인식이 만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성인용품이라는 용어도 이상하지 않은가? 성인용품인가?

자위행위를 포함한 성행위와 관련된 도구를 영어로는 sex toy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성인용품이다. 청소년 보호법에 의하면, 콘돔 정도를 제외하고는 자위기구와 러브젤 등의 성인용품은 청소년에게 판매할 수 없다. 때문에 성인용품이라는 단어는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성인용품은 청소년은 사용해서는 안 되는, 혹은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단정지어지는 것이다.

학교의 성교육은 청소년들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매우 강조한다. 하지만 어른들이 말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은 그저 수동적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는 맥락에 한정되어 있다. 정작 청소년들이 적극적으로 섹스를 하고 즐길 결정권은 부여하지 않는다. 성행위를 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은 성인들의 특권이고 성인용품은 성인들의 전유물이다. 또 중요한 것은 아무도 성인용품의 용어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인용품이란 용어는 청소년들이 성적 쾌락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우리 사회의 의식을 반영함과 동시에 나아가 이런 의식을 재생산한다.

 

3.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입니다.’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입니다라는 문구를 본 보통 사람들의 1차적 반응은 무엇일까? 혹시 얼굴을 찌뿌리거나 불쾌해하는 것은 아닐까?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는 올해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입니다>라는 제목의 강연을 추진하고 홍보했다. 이는 포르노음란함으로만 소비되어온 성 담론을 비판하고, 삶과 관계 맺으며 연속적으로 변모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성교육을 만들어가고자 기획한 강연이다. 그런데 이 강연을 두고 위티 대표 개인 연락처로 개인 및 단체의 수없이 많은 항의 전화와 문자가 이어졌다.

 

출처 : 위티 홈페이지

항의 문자가 가장 문제 삼는 것은 강연의 제목이다. ‘섹스하는 청소년이 웬 말이냐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에게 청소년은 어른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존재이다. 청소년이 섹스를 하는 것은 청소년을 망치는길이며, 이를 가르치는 어른 역시 개념 없는어른이다. 이 항의 반응은 우리 사회가 청소년을, 또 성을 얼마나 보수적으로 규정하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예이다. 항의 문자를 보낸 자들은 제목을 이렇게 바꾸길 원하지 않을까? ‘나는 섹스하면 안 되는, 청소년입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격한 반응들 때문에 이 강연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정당화될 수 있다. ‘나는 섹스합니다라는 강연 제목부터 강연의 내용까지, 모든 것이 기존의 성담론과 청소년 담론에 정면적으로 맞서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티의 강연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반응인 항의 문자까지 포함하여 기존의 청소년 성 담론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 잘못된 성교육, 소외되는 청소년

청소년들의 성의 이미지를 규정하는 주체는 기득권 사회이고, 청소년들의 성교육을 담당하는 주체 역시 보수적인 우리 사회이다. 그러므로 청소년들이 에서 소외되면 필연적으로 성교육에서도 소외될 수밖에 없다.

 

1. 비밀스럽고 비실용적인 성교육

사회에서 성교육을 비밀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시가 있다. 바로 넷플릭스 드라마 오티스의 비밀상담소이다. ‘오티스의 비밀상담소는 성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오티스에게 학우들이 성에 관한 상담을 하는 내용의 드라마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적 내용을 담고 있어 성교육자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오티스의 비밀상담소라는 한글 제목이다. 원제는 ‘sex education’으로, 우리말로 직역하면 성교육이다. 왜 성교육이 오티스의 비밀상담소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했는가? 알고 나면 너무도 이상한 이 제목은, 우리 사회가 성과 성교육을 비밀로 여긴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기존의 성교육이 성을 비밀스러운 것으로 접근하고 때문에 실용적이지 않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이는 성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는 사회의 분위기와도 맞닿아있다. ‘성교육에서 지겨울 정도로 등장하는 단골 소재는 난자와 정자 이야기, 임신과 출산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이다. 교육부는 2015년 배포한 학교성교육표준안은 기성세대가 청소년의 성을 바라보는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냈다며 큰 비판을 받았다. 예컨대 여성의 성기를 내부기관만 설명해 성기를 생식기능에 한정하여 설명하고, 생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성관계는 옳지 않은 것처럼 서술하는(4) 것이다. 성관계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생식뿐만이 아닌 쾌락 추구이지만 학교의 성교육은 이를 숨긴다. 또한 난자와 정자의 수정과정 등 지나치게 생식에 치중한 설명은 진부하고 실용적이지도 않다. 그나마 최근에는 콘돔의 실제 사용법 등 실용적인 성교육이 늘고 있는 추세지만, 아직까지 미비하다.

또한 생식에 관한 성교육을 한다 해도 진짜 필요한 내용은 가르치지 않는다. 예컨대 임신을 하고 나서 여성의 몸이 겪는 변화, 출산 과정과 주의해야 할 점은 임신을 대비해 꼭 알아야 할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가르치지 않는다. 진정 생산적인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이런 내용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이는 하기할 두 번째 문제점, 즉 여성 등 소수자의 입장에서 필요한 성교육이 부재하다는 점과도 맞닿아있다.

 

2. 소수자를 배제하는 성교육

비밀스럽고 비실용적인 성교육과 연관지어서, 이러한 문제가 일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성교육 자체가 특정 집단 편향적인 시각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교육의 내용상 문제점으로 경시되어 왔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기존의 성교육에서 규정하는 , 남성 이성애자 중심의 편향적인 시선으로 소수자를 배제한다. 이러한 성교육이 큰 문제가 되는 이유는, 청소년이 소수자 당사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계속 지적했지만, 우리가 성교육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임신과 출산, 성관계이다. 그리고 이는 전통적인 성교육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대체 왜 , ‘성교육은 이런 내용만을 말해야 할까? 이는 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가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포르노와 섹스를 연상한다. 무언가 정열적이고 부끄러운, 또 때론 폭력적인, 성행위와 관련된 것만을 연상한다. 그러나 이는 의 전부가 아니다. 아니, ‘일부일 뿐이다. 남성, 그 중에서도 남성 이성애자 중심의 편향적인 성이기 때문이다. 결국 비밀스럽고 비실용적인 성교육이 나타나는 이유가 이것이다.

현행 성교육은 명백히 소수자를 배제한다. 먼저 배제되는 소수자는 여성이다. 여성은 청소년만큼이나 성에 있어 수동적인 존재이다. 기존 남성 중심의 성은 폭력적인 포르노와 섹스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여성에게 진정 필요한 성교육의 내용이 될 수 없다. 앞서 지적한 임신 과정의 여성의 몸의 변화나 출산 과정이 성교육의 내용에 없는 이유도 이것이다. 임신과 출산을 다루는 내용일지라도 여성의 관점이 아닌 태아의 관점의 서술이 주였다. 여성에게 출산을 둘러싼 삶의 변화나 성병 등의 정보가 중요함에도 어떤 성교육도 이를 강조하지 않는다. 예컨대 성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궁경부암의 경우 예방접종과 질병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지만, 어디서도 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젠더 교육과 성차별적 관계에 대한 문제 또한 성교육 내용에 포함되지 않는다. 성은 생물학적 성(sex)과 성관계뿐만 아니라 gender도 포함한다. 하지만 올바른 젠더관념과 페미니즘 교육, 인권 교육은 기존의 성교육 내용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 다른 성교육에서 배제되는 소수자는 퀴어이다. 현행 성교육 내용은 철저히 ‘(시스젠더) 이성애자중심이다. 기존의 전통적인 성교육에서 말하는 임신과 출산, 성관계 등 모든 내용의 전반은 철저히 퀴어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린다. 퀴어들의 입장에서 본 의 이야기는 기존의 성교육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교과서는 여성과 남성과 두 가지 성만 다루며 이것이 영원히 바뀌지 않고 고정된 것처럼 서술한다. 이분법의 유일하고 항구적인 성만 나올 뿐 동성애자 뿐 아니라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젠더와 성애를 가지는 존재들은 무시된다. 하지만 퀴어의 성 역시 존중받아야 할 성이며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소수자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멸시가 아닌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현행 성교육이 바로 이러한 가장 무서운 성교육이다.

결국 성교육의 내용이 비밀스럽고 비실용적이라는 문제와 소수자를 배제한다는 문제 두 가지는 연결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남성 이성애자 중심의 성편향적인 성교육은 여성과 퀴어를 소외시키며, 때문에 비밀스럽고 비실용적인 성교육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특정 집단 편향적인 성교육이 나타날수록 여성 청소년과 퀴어 청소년 등 소수자인 청소년만 더욱 설 자리가 없어진다.

 

3. 성교육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청소년

한편으로 청소년의 성교육에는 내용상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교육이 이루어지는 방식 역시 지적할 점이 있다. 바로 청소년은 성교육에 있어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성교육에서 청소년이 주체적으로 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기회는 전무하다. 그렇게 중요한 입시도 수동적인 주입식 교육인데, 입시에 필요도 없는 성교육이라면 어떠할까. 성교육 방식의 양상은 너무나도 뻔하다. 실제로 대다수의 학교의 성교육은 보건 시간에 끼어서 몇 시간만 하거나, 자율학습 시간에 강연으로 한 시간 때우는 식으로 진행된다. 성교육 전문 외부 강사를 초청한다고 해도 강의식 성교육이 주가 된다.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성을 이야기할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성교육을 주장할 수도 없는 구조이다.

 

 

# 왜 청소년들은 소외되는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사회는 청소년을 성교육에서 소외시킨다. 청소년들이 올바른 성과 성교육을 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청소년들은 소외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청소년이기 때문에, 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도입부에서 이야기한 삼단 논법의 두 전제이다. 첫 번째 전제는 청소년은 유해한 결과를 접해서는 안된다이고, 두 번째 전제는 성은 유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전제 모두 틀렸다.

 

1. 보호담론

청소년은 유해한 결과를 접해서는 안된다는 전제는 우리 사회의 청소년 보호담론과 연결된다. 앞서 살펴본 위티에 대한 항의 문자에서는 우리 사회가 청소년을 바라보는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누군가는 위티의 항의 문자는 극단적인 보수 세력의 의견 표출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어른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미성년자라는 청소년의 정의가 과연 보수집단만의 논리일까?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본다. 물론 청소년이 성인에 비해 어느 정도 미성숙해 보호가 필요한 것은 맞다. 하지만 보호라는 좋은 포장지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은 통제이다. 청소년의 성 소외의 기저에도 역시 이러한 비청소년 중심 사회가 행하는 보호라는 이름 하의 통제의 문제가 깔려있다. 청소년은 그들이 청소년이기 때문에 성에서 소외된다.

비청소년 중심의 기득권 사회는 청소년을 보호한답시고 그들을 사회의 일부분에서 격리시킨다. 노키즈존을 만들고, 청소년은 밤에 게임을 할 수 없게 하는 셧다운제를 시행하며, 유해한 검색 결과에서 차단시킨다. 이제껏 말해왔던 성교육에서의 수많은 소외의 예시들 역시 이 보호담론에서 비롯된다. ‘보호는 아주 그럴듯한 명분이 된다. “청소년은 성인에 비해 아직 판단력이 미숙하고, 경험이 부족하고, 그렇기 때문에 유해환경에 쉽게 물들 수 있고, 그러므로 사회는 약자인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는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보호라는 말 속에는 결국 권력 관계가 존재한다. 보호자가 규정한 유해환경에서 피보호자를 원천차단, 격리함으로써 통제와 억압, 지배를 행하는 것이다.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동등한 주체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다면 이는 명백한 보호가 아닌 박탈이다. 또한 권리가 박탈된 채 성인들만 누릴 수 있는 것이라면 성을 추구할 권리는 성인들의 전유물이자 특권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청소년을 보호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청소년들은 보호를 받더라도 객체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은 지배 관계 속에 종속된,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는 존재여서는 안된다. 청소년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 청소년과 성인이 다름에도 동등하게 존중받을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결국 사회가 청소년들을 위해 결국 해야할 것은 단순한 보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보호가 필요 없도록 불평등한 사회를 바꾸고 개선해 나아가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청소년들을 안전한 사회 속에 두고 싶다면 안전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한다. 성교육을 포함해 어떤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선택할 기회들마저 박탈해서는 안된다. 청소년은 제대로 교육받고, 제대로 생각하며 또 제대로 선택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

 

2. 왜 성에서 보호되어야 하는가?

성은 유해하다는 두 번째 전제에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 성은 반드시 보호되어야 하는가? 보호담론 뿐 아닌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결국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 가진 이미지는 곧 섹스이다. 성은 섹스와 동치된다. 그리고 이 섹스는 전통적 남성중심적 시각의 폭력적인 섹스의 이미지이다. 섹스와 성을 남성중심적인 자극적인 포르노와 혼동하다보니 성은 자연히 숨겨야 할 대상일 수밖에 없다. ‘성인 남성 이성애자시각으로 바라본 은 사회 구성원이 성을 수동적이고 낯부끄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것이 결국 성교육의 내용 상의 문제의 원인이 된다. 비실용적이고 비밀스러운 성교육이 나오는 이유이자, 소수자를 배제하는 성교육이 나오는 이유이다.

보호의 논리는 성이 가진 전통적인 이미지를 고착화한다. 명시적인 성차별적 내용의 성교육, 비실용적인 성교육을 넘어 소수자를 배제하고 특정 집단 편향적인 사고방식을 사회에 주입한다. 보호의 논리는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청소년과 여성 등의 소수자를 객체로 만들고 남성중심적 권력과 사회를 공고화한다. 성을 금기시할수록 여전히 성의 주도권을 쥐는 계층은 기존의 기득권 계층인 이성애자 남성 계층일 수밖에 없다. 결국 성은 유해해요!’ 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의 전통적 인식이자 이를 재생산함으로써 기득권 집단의 이익을 보장하는 수단인 것이다.

우리 사회는 성을 다르게 보고, 성교육을 다르게 할 필요가 있다. 성은 유해하기만 한 것이 아닌 포괄적 개념이기 때문에 절대 보호의 논리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어쩌면 sex보다 더 중요한 gender와 성 소수자의 성은 기존의 성 담론에서 배제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사회의 젠더 인식과 젠더 갈등, 성소수자의 삶과 기존의 전통적인 성 담론에 대한 비판 역시 포괄적 의 개념에 포함될 수 있다. 유네스코는 새로운 방식의 성교육을 포괄적 성교육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포괄적인 성교육에서는 젠더교육인권교육의 측면이 강조된다. 학생들은 스쿨미투 운동과 사회의 성 혐오범죄,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 등 젠더교육과 인권교육으로까지 확대된 성교육을 접해야 한다. 결국 소수자를 포용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방법은 이러한 체계적인 젠더교육과 인권교육의 성교육이 될 것이다.

 

 

# 나가며

보호 논리 하의 청소년의 성과 성교육을 통해 우리는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단순히 청소년에게 성을 금기시하고 성교육이 비실용적이라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청소년 성 소외 문제의 핵심은 사회의 전통적인 권력계층이 누구인지, 이들이 어떻게 성과 성교육에서까지 약한 집단을 배제하고 억압하는지와 연결되어 있다.

성인 이성애자 남성중심적 시각의 성 속에서는 성 소외가 일어난다. 일련의 과정은 매우 자연스럽다. ‘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인 남성 이성애자 중심으로 바라본 이미지에 한정되어 있으며, 이러한 이미지의 고정은 비밀스럽고 비실용적인 성교육을 만든다. 시각의 한정은 보호라는 이름의 청소년 혐오와 소수자 배제를 덧씌운다. 결국 성에서 소외되고 피해를 보는 핵심 계층은 성인 이성애자 남성을 제외한 청소년들이 된다. 소수자를 배제하는 태도는 곧 청소년을 배제하는 태도이다. 청소년도 퀴어이며 여성일 수 있다는 청소년의 소수자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결국 현행 성교육과 성을 바라보는 체제 하에서 가장 소외받는 것은 소수자 청소년들, 특히 퀴어인 여성 청소년이 될 수밖에 없다.

유해함으로부터의 보호는 사회가 행해야 할 당위적 기능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힘이 약한 소수자인 청소년일수록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소외시키는 것에 있다. 더 이상 전통적인 성과 성교육을 답습하며 이성애자 성인 남성 중심의 권력을 공고히하고 재생산하는 데 기여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회의 핵심 권력 계층이 누구인지, 이들의 논리가 어떻게 성을 통제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비판적인 성 담론을 수면 위로 이끌어내야 한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더 나은 성과 성교육을 꿈꾸어야 한다.

청소년이 주체적으로 성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젠더와 소수자들의 성 역시 성이라는 것이 주목 받을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대안적 성교육으로서 기존 성교육에 대한 비판적 논의까지 포함한 젠더교육과 인권교육을 하는 사회를 꿈꾼다. 이 과정에서 소수자가 배제되지 않기를, 청소년과 소수자가 성과 성교육의 주체로 설 수 있기를 꿈꾼다.

더 나은 성과 성교육 담론이 뒷받침된 사회는 어떠할까. 적어도 콘돔을 구입하지 못하는 청소년,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청소년,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성소수자 청소년은 현저히 적어질 것이다. 대신 여성과 성소수자의 성을 말하고, 데이트 폭력과 스쿨미투를 토론하는 청소년이 위치할 것이다.

 

 


(1) 청소년 보호법 제1장 제1조 목적

(2)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46455

(3) https://www.asiae.co.kr/article/2019030411380045071

(4)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8&aid=0004120681

속표지 사진을 찍기 위해 중앙도서관 CU에서 위 콘돔을 샀을 때, 2001년 미만 출생자에게는 판매금지 품목이라는 기계음이 흘러나왔습니다. 이러한 기계음이 우리 고민의 시작점입니다. 청소년의 성은 위계관계 속에서 '계류중'입니다. 청소년은 그저 교육의 대상이자 객체에 머물러있으며, 성의 의미를 통제하는 것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이상 젠더와 나이 권력을 가진 자들이 만들어낸 성을 답습하며 계류중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청소년의 성(sexuality)과 성교육이 어때야 하는지를 고민하고 대안적인 성교육을 꿈꿔보았습니다.

 

 

노동이 존중받는 대학을 위하여

 

고슴도치뇽


불 켜진 샤 뒤에는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빛나는 서울대 뒤에는 무엇이 숨어있을까.

넓은 캠퍼스 안에는 그 존재를 인정받으려는 학내 노동자들의 치열한 투쟁이 있었다.

 

 

서울대 노동자의 1년을 돌아보며
-도서관 난방 파업부터 생협 파업, 기전노조 투쟁까지-


2019년 서울대 노동자들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지난 겨울 기계전기 노동자들의 난방 중단 파업을 시작으로, 글로벌사회공헌단·언어교육원 한국어강사들의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투쟁,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열악한 휴게 공간이 드러났던 청소노동자 사망 사건, 저임금 고강도 노동을 버텨냈던 생협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 자유롭게 노동조합활동 할 권리를 외쳤던 기계전기·청소경비 노동자들의 단식·삭발 투쟁까지. 그들은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일해야 했고, 본부의 노조 탄압을 견뎌야 했고, 투쟁을 할 때는 사회의 눈초리를 이겨내야 했다. 그들의 1년이 어땠는지 다시 기억해보자.

 

2019년 2월, 기계전기 노동자들의 파업

무기계약직 전환 1년이 지난 당시, 기계전기·청소경비 노동자들은 여전히 2017년 임금을 받고 있었 다. 임금 조건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계속 요구안을 양보해왔다. 최후에는 제조업 직종 종사자들의 평균 임금, 각종 상여금 지급, 차별 없는 복지조건 등 최소한의 생존권 보장을 위한 것들만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이를 거절했다. 학교는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섭에서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며 책임을 회피했다. 노동자들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었고, 최후의 보루로 파업을 택했다. 행정관, 도서관 등의 건물에 난방 작동을 중단하고 점거에 돌입했다. ‘도서관 난방 파업’은 곧 사회적인 논쟁을 불러왔다. 학문의 발전과 후속 세대 양성을 위한 대학 도서관의 난방을 꺼버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의견과 파업은 법이 보장하는 노동자의 권리라는 의견 등 사람들은 저마다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도서관 난방 파업’으로 인해서 대학 내 노동이 가시화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공간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알지 못했다. 파업은 기계전기 노동자들에 시중노임단가 수준 임금 인상, 청소경비 노동자들에 상여금 지급이 약속되며 마무리되었다.

 

2019년 3월, 글로벌사회공헌단 노동자와 언어교육원 한국어강사들의 투쟁

글로벌사회공헌단(이하 글사공) 노동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가이드 라인’에 따라 정규직 전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2년 이상 지속이 예상되는 직군임에도 불구하고 학교는 글사공 활동이 일시적인 업무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할 수 없다고 말했다. 글사공은 지속가능한 봉사를 위해 설립된 기관으로, 노동자들은 매년 해외봉사, 멘토링 등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준비한다. 다른 대학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글사공 운영이 지속가능하도록 힘쓰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이하 언교원) 강사들 역시 정부의 가이드라인에 따라서 정규직 전환되어야 했다. 하지만 학교는 이들이 노동자가 아닌 시간강사이기 때문에 노동법 적용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그렇다고 이들이 시간강사의 대우를 보장받은 것은 아니다. 언교원 강사들이 받는 시간당 임금은 학부 시간강사 임금의 절반 수준이었다.) 언교원 강사들은 교육부, 법무부 등에 가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인받고자 했고, 고용노동부는 그들을 노동자로 인정했다.

두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학교는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전환 대상을 자의적으로 좁혀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을 심화시켰다. 이에 노동자들은 학생들과 함께 학내 행진, 시민 사회 연대 기자회견 등을 진행하며 무기계약직 전환과 처우개선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의 꾸준한 투쟁의 결과, 언교원 한국어강사들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었다.

 

2019년 8월, 서울대학교 청소 노동자 사망 사건

지난 8월, 302동에서 근무하던 청소노동자가 휴게실에서 잠시 쉬다가 사망했다. 그가 생을 마감한 휴게실은 1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에어컨도 창문도 없으며, 환기도 되지 않는, 계단 아래에 마련된 작은 지하 공간. 이 청소노동자의 사망에 대한 여러 언론의 보도는 여러 대학과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청소노동자들의 휴게 공간에 대한 문제제기로 확장되었다. 학생들은 청소노동자의 죽음을 추모하는 추모공간을 설치하고, 청소노동자 처우 개선을 위한 서명 운동을 벌였다. 고용노동부는 서울대에 노동자 휴게공간 개선을 권고했으며, 서울대는 노후한 공간은 폐쇄하고, 대체 공간을 확보할 것이며, 환기시설을 개선한다고 답하였다.


2019년 9월, 생활협동조합 노동자들의 파업

생활협동조합(이하 생협) 노동자들이 30년 만에 파업에 돌입했다. 그들의 요구는 기본급 인상, 호봉체계 개선, 휴게시설 및 근무환경 개선이었다. 생협 노동자들은 뼈주사를 맞으며 강도 높은 노동을 감당하는데, 초봉은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으며, 호봉체계는 10년을 일해도 월 200만월을 겨우 받는 정도로 정해져 있었다. 솥단지가 펄펄 끓는 주방에는 에어컨 하나가 없었으며, 휴게실도 좁아 노동자들은 식당 홀에 나와 휴식을 취했다. 샤워시설도 없어서 온몸이 땀으로 젖은 채 퇴근했다. 그들은 이러한 현실을 바꾸고자 파업에 나섰지만, 학교는 계약직과 수습 조리사에게 대체 근무를 서게 하는 등 파업의 효과를 무력화하며 상황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 파업은 12일간 계속되었으며, 노동자들은 파업가를 부르며 캠퍼스 곳곳을 행진했다. 학생들은 #당신의노동은나의일상, #서울대생협노동자파업지지 등의 해시태그 릴레이를 하며 응원메시지를 전달했다. 생협은 최저임금을 약간 상회하는 수준으로 1호봉 기본급을 인상했으며, 노동자들의 휴게시간 1시간 보장을 인정하기로 했다.


2019년 10월, 청소경비·기계전기 노동자들의 단식·삭발 투쟁

2018년, 본부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만든 노동조합을 교섭 대상으로 인정하지 않으며 지방노동위원회, 중앙노동위원회 등에 소송을 제기했다. 서울행정법원은 교섭창구 단일화를 강제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며 노동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2019년 올해, 본부는 또다시 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를 억압했다. 본부는 노조 전임자의 임금 지급을 중단했으며, 교섭에서 근무시간 중 조합 활동 금지, 노조 간부 회의시간 단축과 같은 안을 제시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이 민주적으로 노조를 결성하고 자유롭게 노조 활동을 할 권리를 억압하는 본부에 맞서 단식·삭발 투쟁을 진행했다. 법인 직원들과의 명절상여금 차별 철폐, 휴게 공간 개선 등도 함께 요구했다. 결국 본부는 청소경비, 기계전기 노동자들에게 명절휴가비를 연 100만원 지급하며, 조합원 교육시간을 연 6시간을 허용하기로 약속했다.(1)

 

 

학문이 신성화되는 대학

 

대학에서는 학문의 이름으로 많은 것들이 억압된다. 가령, 교수의 노동은 핵심노동이지만, 학생과 노동자의 노동은 비핵심노동이다. 대학의 주요 기능, 지식 생산과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교수의 노동은 신성화되지만, 그 기능을 뒷받침해주는 다른 것들은 희생의 대상이다. 특히나 교육과 연구가 신성화되고, 학벌사회의 최정점에 있는 서울대에서는 그 모순이 심화된다. 지난 겨울, 기계전기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한 사회의 반응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국가와 사회를 책임질 인재를 양성하는 곳에서 학생을 인질로 잡고 파업을 할 수 있느냐고 말했다. 이 파업은 분명 ‘서울대’였기 때문에 사회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만약, 도서관 난방 파업이 어느 이름 모르는 대학에서 일어났다면 사회의 반응은 어땠을까. 물론 한국사회에서 파업에 대한 인식 자체가 부정적이기 때문에 그 대학에서도 역시 노동자들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서울대에서만큼 도서관이라는 장소가 ‘위대한 공부’를 하는 곳으로 신성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진리를 추구하는 서울대에서 (교수자가 아닌) 노동자들의 삶은 비가시화된다. 교수를 위한 연구 공간과 교육이 이루어지는 강의실 등 대학의 핵심 공간이라고 생각되는 것들과 달리, 노동자 휴게공간은 대학에 꼭 필요한 공간이 아니다. 생협 사측과 면담을 하거나 노사 교섭에서 나왔던 본부 직원들의 발언을 들어보면, “대학에 그런 공간이 필요해?”와 같은 논리로 일관할 때가 종종 있다. 공부는 길바닥에서 하면 안 되는데 노동자들은 길바닥에서 쉬어도 되는 것이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약자들을 밟고 일어서고 불의를 모른 척하며 세계를 선도할 인재가 되라고 말한다.(2)

 
이런 대학에서 제대로 된 배움은 불가능하며, 배움은 일상과 단절된다. 학문이 신성화되는 대학에서는 강의실에서의 배움만, 교수의 지식만이 진정한 지식이 된다. 학생들은 자신만의 문제의식을 발전시키기는 커녕, 기계처럼 교수의 강의를 받아 적는다. 이는 사회는 물론이고 나와 나의 일상에 대해 고민하지 못하게 만든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성찰이 없는 대학에서 학문은 현실과는 유리된, 고고한 지식이 되며, 이는 노동을 소외시킨다. 지난 난방 파업 때 사회학과의 어떤 교수는 말했다. 대학에서 파업을 하는 것은 곧 응급실을 폐쇄하는 것이며, 학업과 연구에 직결되는 시설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변화의 방향을 분석하고 대안적인 지식을 마련해야 하는 사회학 교수의 이러한 발언에서 학문을 현실과 유리된 것으로 보는 생각이 단적으로 드러난다. 대학은 학문을 사회에 어떻게 적용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는 커녕, 학문을 공동체 안에서 약자를 소외시키는 것에 이용한다. 학문이 신성화되는 대학에서 ‘우리는 왜 학문을 하는가’, ‘대학의 사회적 역할은 무엇인가’와 같은 질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학은 존재의 이유를 고민하지 못한 채 학문 발전과 후속 세대 양성을 위해 존재하며, 나라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구성원의 권리가 유보되는 공간이다.

 

 

기업화되는 대학

 

한국 대학의 기업화는 1995년 김영삼 정부 시절 5·31 교육개혁안 이후로 본격화되었다. 대학정원 자율화, 국립대학 민영화, 총장직선제 폐지, 등록금 자율화, 대학평가 등의 교육 정책이 제시(3)되었고, ‘자율화’라는 이름 아래 기업 경영의 논리가 대학에 잠식했다. 교육은 상품이 되고 대학은 상품 판매를 위한 매장이 되었다.(4) 기업화되는 대학에서 배움은 사라진다. 교수-학생 학문공동체가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하며 지식을 생산해내는 공간이 아닌, 300명의 학생들이 교육의 소비자로서 한 강의실에서 교수의 강의를 듣고 그것을 받아 적는 공간이 되었다. 기업화되는 대학에서 지식의 속성은 왜곡된다. 대학은 기업의 후원을 받거나 기업과 연계하여 학과를 개설하는 등 기업을 위한 인재를 양성한다. 대학의 지식은 기업을 위한 상품이 되며, 효율성을 추구하지 않는 학문은 도태된다. 대학은 기업자본을 위한 이윤을 추구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대학은 식당, 문구점 등의 시설에서 수익 사업을 벌이는 것을 시작으로, 캠퍼스를 확장하거나 유학생을 유치하며 재원을 얻는다. 그러한 재원은 온전히 대학 구성원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대학 내 의사결정과 재정 운용은 이사회에 의해 이루어지며, 대학 구성원들은 결정 과정에서 소외된다.

 

대학 기업화는 대학노동시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학이 효율성을 추구하는 모습은 대학노동시장의 변화 과정에서도 볼 수 있다. 일반 산업분야보다는 구조조정이 낮은 강도로 진행되었지만, 1980년대 말 부터, 대학 노동자들은 외주·용역화 되었다. 1989년 ‘고용직공무원규정’이 개정되며, ‘고용직공무원’인 대학 경비노동자들은 ‘기능직공무원’으로 통폐합되었다. 국가공무원법의 대상인 정규직 노동자는 줄어들었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확대되었다. 1993년 5·31 교육개혁 당시, 대학은 대학의 경쟁력 강화를 위한 교원의 확보와 동시에 긴축재정을 요구받았다. 교원의 확보는 필연적으로 지출의 증가를 가져오는데, 동시에 긴축재정을 요구하면서 대학 내 노동자에 대한 인건비가 절감됐다. 1998년 외환위기 이후, 정리해고제가 조기실시 되고 근로자 파견보호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다. 비정규직은 급속하게 증가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사무직 노동자들도 구조조정의 대상이 되었다. 대학은 노동자들에게 조기퇴직을 제안하였으며, 노골적으로 경비절감을 이야기했다. 노동자들은 비용계산단위에 불과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대학에 무인시스템이 도입되었다. 여러 대학에서는 이를 이유로 더 이상 노동력이 필요 없다며 노동자들을 해고했다. 경비직이라는 직군 자체는 여러 대학에서 사라져가고 있으며, 식당, 카페 노동자들도 키오스크 도입으로 인해 인원 감축의 대상이 되었다.(5)

 
대학이 지출을 줄여야 할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노동자의 임금을 삭감하는 것이다. 올해 12월, 생협 사측은 30년 만의 대규모 파업으로 얻어낸 기본급 인상을 무력화하려는 시도를 했다. 식당 운영을 축소하며 노동자들의 추가 수당 지급을 중단했다. 식당 운영 축소는 학생들의 교육권, 생활권에 직결되는 문제이다. 대학은 학내 구성원의 생활권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특히나 학내 구성원의 복지를 위해 설립된 비영리조직인 생협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어 학생의 생활권이 침해되고 노동자의 열악한 노동 환경이 개선되지 못한다면, 학교는 학생 복지와 노동자 인권을 위해 생협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업화된 대학에서, 대학은 학내 구성원의 인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것은 수익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업화된 대학에서는 학내에 외주업체가 무분별하게 입점한다. 학교는 외주업체 입점을 허용하며 그들에게서 임대료를 받는다. 외주업체는 기본적으로 학내 구성원의 복지를 위해 설립된 조직이 아닌, 이윤 추구를 위해 운영되는 기업이다. 외주업체 입점은 자연스레 학내 생활물가 인상으로 이어진다. 이런 대학에서 학생 복지를 운운하는 생협이 설 공간은 더욱 줄어들며, 생협의 재정 적자의 원인은 노동자들에게 전가된다. 작년 12월, 식대 조정과 관련하여 이사회에서 심의된 안건을 보면, 이러한 상황이 보다 명확히 드러난다. 생협은 식대를 조정하는 사유로 ‘2016년 이후 최저임금 상승으로 인한 인건비 비용 증가, 정규직 확대 등 직원의 고용 구조 변화 및 임금인상 폭 증가, 주 52시간 근로제 시행 및 직원의 노동환경개선 요구 확대’ 등을 제시했다. 이는 생협이 적자의 원인을 노동자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기업화된 대학에서는 기업의 논리가 작동된다. 노동자들의 현재 노동환경은 어떠한지, 그것이 어떻게 개선되어야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윤을 추구하는 공간에서 학내 구성원의 인권은 고려되지 않으며, 노동자는 그저 가장 먼저 착취당할 비용에 불과하다.

 

노동자와 학생의 관계가 단절된 대학

 

노동자와 학생이 손을 잡고 대학과 사회를 바꾸는 ‘노학연대’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노학연대는 80년대 민주화운동 속에나 존재했던, 역사 속의 언어가 되었다. 신자유주의가 심화된 대학에서 ‘연대’는 어려워졌다. 학생들은 졸업을 위해 각자 시간표를 선택하고, 대학은 미래를 위해 다니는 하나의 공간으로서만 기능한다. 개인화된 학생 사회에서 대학의 역할, 운영방식, 학내 구성원의 권리에 대한 문제제기는 부재하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의 경험은 더욱 어려워진다.

 

지난 겨울 난방파업 때, 파업에 대한 총학생회의 대응은 대학 내에서 노동자와 학생의 관계가 단절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노조가 도서관 난방을 중단하자, 총학생회는 ‘학생이 따뜻한 공간에서 공부할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하며, 파업 대상에서 중앙도서관 본관 및 관정관을 제외해달라고 노조에 요청했다. 이러한 초기 대응은 곧 사회적 논란으로 번졌고, 총학생회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입장문을 게시했다. 입장문의 요지는 이러했다. “노조의 정당한 파업권을 존중하나 도서관과 같이 학생들의 학업과 연구에 직결되는 시설에서 발생하는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며, 노조에 도서관을 파업 대상 시설 에서 제외해줄 것을 다시 한 번 요청한다.” 파업에 대한 책임이 노조에 전가되는 현상 속에서, 학생이 따뜻한 도서관에서 공부할 권리와 노동자가 존엄하게 일할 수 있는 권리는 대립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부가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개선책을 마련하지 않고 교섭에 불성실하게 임해서 파업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노조에 해결을 요구했다.


학생들에게는 분명 따뜻한 공간에서 공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하지만 그러한 권리에 대한 책임은 학교에게 있으며, 그 권리를 위해서 다른 대학 구성원의 권리가 유보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난방파업 당시 학생과 노동자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았다면, 학생은 대학에서 노동자의 존재와 위치를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며, 파업에 있어서도 본부에 적극적인 해결을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에서의 노동은 학생들의 일상에서 가려져있었다. 학생들은 대학의 노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지 못했으며, 자신들이 편안히 누려오던 일상이 깨짐으로 인해서 노동자의 존재를 인지했다.

 

파업에 대한 비난의 화살이 노동자들을 겨눌 때, 대학 본부는 책임을 회피한다. 파업은 사업장의 운영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키는 행위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며, 학생을 비롯한 학내 구성원들에 상당한 피해를 입힌다. 하지만 학생의 교육환경과 노동자의 처우를 책임져야 하는 대학 본부는 상황 해결을 위한 노력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가 파업을 철회해야 상황이 해결되는 것처럼 안내하며 대학 내의 노동을 더욱 소외시킨다.

 

 

노학연대의 복원으로 일상에서 배움을 실천하자

 

노동이 소외되지 않는 대학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학 내 노학연대를 복원하는 것이 하나의 가능성이 될 수 있다. 노학연대가 80년대만큼 활발하지 못하지만 지금도 그것을 실현해내려 각자의 위치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이 있다. 2018년, 많은 대학에서 청소노동자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홍익대·고려대 등의 대학에서 청소노동자 인원 감축을 시도했으며, 동국대에서는 퇴직자 자리를 근로장학생으로 대체하려 했다. 이에 대해서 많은 학생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알리고 인력 충원을 촉구하는 서명을 받으며 투쟁에 연대했다. 노동자와 학생들의 강한 반발로 여러 대학에서는 청소노동자 구조조정 실시 계획을 철회했다. 서울대에서도 노동자들의 투쟁에 학생들은 여러 방법으로 연대해왔다. 같은 공동체를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서, 노동이 존중받는 대학을 위하여 함께 싸웠다.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한 서명 운동을 받거나,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하여 해시태그 릴레이를 하거나, 노동자들과 함께 학내 행진을 하며 노동 없는 대학은 없다고 외쳤다. 그들의 노동이 우리의 일상을 만들며, 노동자 인권과 학생 인권은 결코 대립되는 것이 아님을 말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대학을 하나의 공동체로 복원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개인들이 각자의 삶을 사는 대학에서는 누구의 인권도 존중받지 못한다. 학내 생활 물가는 더욱 올라갈 것이며, 이윤 논리에 적합하지 않은 학문은 더욱 배제될 것이다. 또한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학문이 신성화되고, 대학이 기업화되고, 학생과 노동자의 관계가 단절되는 흐름 속에서 대학 구성원 내의 약자인 노동자들은 더욱 소외될 것이다. 연대의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노동자들과 직접적으로 함께 투쟁할 수도 있고, 노동자들의 현실을 공론화하는 활동을 기획할 수도 있고, 반이라는 공간 안에서 노동 문제를 계속 이야기해볼 수도 있다. 대학에서 노동이 소외되는 현실을 글로 써볼 수도 있겠다. 지금 작성하는 이 글도 연대의 가치를 실천하고자 하는 하나의 노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대학에서의 배움이 일상과 단절된다고 이야기했다. 배움은 누군가의 지식을 전달받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 지식을 강의실이라는 공간에 맞게 구조화한다고 해서, 그 지식이 모두 나의 것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문제를 직접 정의하고, 동료들과 함께 질문하고 공부하며 문제의식을 심화시키고, 그것을 일상에서 실천할 때, 진정 배움이 나의 것이 된다. 또한 이러한 배움은 현실과 유리된 지식을 기계적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이며,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를 상상하게 한다. 노학연대를 복원하는 것은 대학에 공동체성을 불어넣음과 동시에, 대학의 역할을 질문하는 것이다. 대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우리는 왜 학문을 하는지를 질문하며 주체적인 시민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노동이 존중받는 대학을 위하여,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진정한 배움을 시작해야 한다.(6)

 


(1)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여러 정보를 참고하였다. 

(2) 교육사회 수업에서 에세이로 썼던 ‘나는 대학에서 무엇을 배웠나’ 글을 인용하였다.
(3) 고부응, <한국 대학의 기업화>, 《역사비평》, 2010.08, p16~42.
 

(4) 고부응, 《대학의 기업화》, 한울, 2018, p158. 
(5) 김광민, <한국대학노동시장의 외주·용역화에 관한 연구 –경비직 노동자를 중심으로->, 2009, p12~23. 

(6) 이 글의 많은 부분에서 필자가 교육사회 수업에서 과제로 냈던 글을 인용하였다.

우리 삶의 노동
삶을 지탱해주는 이들의 목소리 찾기

 

아무

 

1. 우리 삶의 곳곳 : 대학생 잉명이의 하루

 

승차 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셔틀버스 대신 임차버스가 증차되었고 이에 기존 셔틀버스 노동자들의 노동 강도는 점차 증가되었다.
2019년 9월 생협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 및 처우 개선 등을 요구하는 파업이 있었다.
매일 아침 청소 노동자들의 손길이 닿지 않은 강의실이 없다. 수업에 적절한 온도와 습도 등을 조절해주시는 기계실 노동자들의 노동 또한 대학 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이다.
값싼 가격의 학식을 먹을 수 있는 조건의 이면에 저임금으로 권리를 찾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있다.

 

 

 

2. 노동을 바라보지 않던 시선

 

2019년 2월 당시 기숙사에 살고 있던 나는 고시 공부를 하던 룸메이트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어느 날 매일 밤 12시는 넘어야 들어오던 룸메이트가 해가 떠 있는데 다시 들어오던 날이 있었다. 도서관 난방 파업으로 히터가 나오지 않아 너무 추워서 공부할 수가 없다면서, 기숙사로 돌아온 룸메이트는 다시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공간이 추워도 공부를 그만둘 수 없는 학생들은 입김을 내쉬면서 자리를 지켰고 몇몇은 지키던 자리를 떠났다. 학생을 볼모로 파업을 하냐는 거센 비판의 목소리와 오죽하면 난방 파업을 하겠냐며 노동자들의 처지를 한탄하는 의견이 대립하면서 학교 커뮤니티와 학생 사회는 논쟁을 벌였다. 심지어 학교를 넘어 이를 다룬 인터넷 기사의 댓글들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2019년 2월 7일 서울일반노동조합 서울대 기계 전기 분회는 건물 난방을 차단하는 파업에 나섰다. 노 조는 행정관과 도서관 등 3개의 건물 기계실에 들어가 난방 장치를 끄고 무기한 점거 농성을 시작했고 이에 서울대 총학생회는 노조의 정당한 파업권을 존중한다는 의견을 표함과 동시에 도서관은 파업 대상 시설에서 제외시켜 달라는 요청을 보냈다. 또한 학생회는 학생의 권리 보호를 위해 힘쓰겠다며 핫팩을 배부하기도 하고 전열 기구를 설치하기에 나섰다. 이러나 저러나 난방 파업과 관련한 찬반은 학교 안과 밖에서 첨예하게 대립하며, 대학 내 존재하는 노동자의 역할과 영향력이 얼마나 컸으며, 역설적으로 무 시되어 왔는지 알 수 있었다.

 

청소 업무나 식당 업무 등은 비교적 학생들과의 직접적인 상호작용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이에 반해 가시적이지 않으며 학생이나 교직원과의 교류가 적은 건물, 기계, 비품, 전기 등의 업무를 맡던 노동자 들은 학생들이 머무는 강의실과 시설들의 곳곳을 비추었지만, 정작 투명 인간처럼 받아야 할 대우를 받 지 못했다. 희망을 가지고 있던 정규직 전환에 대한 본부의 말장난, 파업에 대한 학생과 사회의 시선, 끝없는 기다림 끝에 반복되는 좌절들을 경험했을 여러 노동자들이 우리와 함께 이 캠퍼스에 있었다. 여러모로 부끄럽지만 도서관에 갈 일이 별로 없었던 나는 이 사건이 있었을 당시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나 스스로를 격리시킴으로써 책임을 피했다. 머리 아픈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기도 했지만 정말 내 자신이 이 일과는 상관없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 지내던 룸메이트가 더 오래 방에 있는 것 이외에는 크게 나의 삶에 변화한 게 없다는 경솔한 생각으로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나 이외에도 많은 학우들은 도서관 파업과 노동자들의 권리를 위한 외침이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다고 여겼을 것 같다. 그러나 이런 무관심하고 스스로를 “문제”에서 배제시키는 태도가 현재의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미뤄온 본부의 태도를 방치했으며, 대체 가능한 이름 없는 노동자 1인의 현재와 같은 처지를 만들어왔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이런 식으로 대체되어 왔는가.

 

이를 보여주듯 도서관 난방 파업에 대한 학생들의 태도가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사람이기에 예상치 못 한 피해를 입는 것에 대해 불쾌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당장 자신이 앞둔 취업과 고시 준비에 영향을 받음으로써, 학생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은 변함없다. 또한 이 투쟁에서 진정으로 주목됐어야 할 부분인 노동의 환경에 대한 성찰과 공허한 약속이었던 임금 문제, 본부의 책임 회피보다 노동권과 학습권의 대립에 대해 주로 논의가 집중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사건은 비가시화되던 노동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서울대학교의 상징적인 의미에서 기인한 것인지 유독 다른 파업들에 비해 도서관 난방 파업 사태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파급력이 높았고, 이에 대해 학생의 취업난을 고려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행위라는 거센 비판과 노동자의 열악했던 환경에 분노하고 파업을 지지하는 목소리가 충돌이 명시적으로 드러났다.

 

그동안 있는 듯 없는 듯 우리 삶의 보이지 않던 부분을 책임지고 있던 노동의 가치들은 파업을 시작으로 점차 가시화되기 시작했으며 대학 내 노동의 무게와 이들의 빈자리를 느낄 수 있었다. 누군가가 일을 맡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의 일상이 멈춰버리는 짧은 경험으로 우리는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회피해왔던 노동과 노동자들의 외침을 인식할 수 있었다. 도서관이든 강의실이든 앉아 공부하는 사람들의 노동과 그들의 몸을 덥히는 전기와 기계, 건물 등을 관리하는 이들의 노동의 값어치를 어떻게 누가 어떤 잣대로 평가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눈과 귀를 모을 수 있던 이 시작은 앞으로 노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모이게 되는 중요한 시점으로 회자될 것이다.


 
3. 학생과 노동의 관계

학교를 오며 가며 지나는 노동자와 학생의 물리적 거리는 학생과 학생의 거리만큼 가깝다고 볼 수 있으나 심리적 거리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여전히 노동 문제에 대한 해결을 촉구하는 투쟁은 큰 진전 없이 지속되어 왔다. 그러던 중 2019년 8월에는 공대 301동에서 한 평도 되지 않는 작은 방에서 노동자 1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9월에는 생협 노동자들이 노동 환경에 대한 울분을 참지 못하고 봇물터지듯 목소리를 냈다. 이에 파업을 지지하던 학생 사회의 반응과 생협 노동자의 노동 환경에 대해서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반성의 의견이 눈에 띄었다. 노동자들은 식당을 멈추고 나와 식사를 준비하는 대신 천막을 치고 부침개를 만들어 팔았고 학생들은 직접 응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들을 위해 이름을 걸고 ‘당신의 노동은 우리의 일상입니다.’라는 메시지로 함께한 학생들이 있었다.

 

생협 파업과 관련해서 생각나는 일이 있다. 파업 당시는 축제 기간이었고, 나는 축제가 있는 총장 잔디 쪽으로 가던 중 맛있는 냄새에 부침개를 사먹으러 천막으로 갔다. 부침개를 부치던 분들께 상투적인 응원의 몇 마디를 전했을 뿐인데 그분들은 웃으시면서 부침개를 몇 장이나 더 얹어주셨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셨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불편하고 오히려 학생으로서 더 죄송한 마음이 들어서 부침개를 맛있게 먹을 수 없을 것 같았다(맛있게 먹긴 했다.). 누군가의 일상에 작은 구멍이 생긴 후에야 우리는 그 구멍을 채우던 사람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역할을 떠올리기 시작한다.

 

전혀 나와 상관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자리가 비면 누구보다 눈에 띌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노동자들의 노동이 멈추면 학교가 멈춘다. 여러 시설의 전기와 난방 문제가 있다면 해결하는데 매우 오래 걸릴 것이며 깨끗한 수업 환경을 늘 유지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수요가 매우 높지만 셔틀버스가 적어져서 교통에 더욱 불편을 겪을 수도 있으며 혹은 아예 운영이 중단될 수도 있다. 이밖에 식사나 음료 등 다른 것들을 이용할 수는 있더라도 비싼 가격으로 많은 것을 대체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학교 구성원들이 누려온 값싼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주머니를 줄이면서 나온 것이다. 노동에 대한 각자의 생각은 다를 수 있으나 대개 학생 사회에서 노동자들을 대해 온 냉담한 태도는 사측이 그들을 약자로 만들기 위한 좋은 조건을 마련해주었다. 과연 학생과 노동자의 관계는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과 없으면 조금 불편한 서비스를 공급하는 사람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일까.


기숙사 사생인 나는 가장 가까운 노동자인 기숙사를 청소해주시는 서명옥님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었다. 평소에 거의 만나지 못하거나 만나도 어색하게 고개만 수그리면서 지나가는 사이였지만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청소 노동자분들이 생각하는 노동 현장에 대해 들어볼 수 있었다. 늘 일을 하면서 학생들을 만나는데 학생들과 어떻게 지내시는지, 학생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 여쭤보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다 딸들 같다. 나이대가 딸 같고 대강 얼굴을 알아서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 집 딸 저기 있네, 우리집 딸 저기 있네요’라며 농담한다. 우리 사이에서 다 딸로 통한다. 인사도 하고 학생들이 착하다. 아줌마 수다스럽게 안 해서 그렇지. 그래도 그중에 말걸고 그러면 불편한 사람들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조용히만 해주고 그런다.”


스브스 뉴스 인터뷰 중 한 조리원분은 학생들에게 계속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어서 돌아가서 밥해주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그들에게는 학생들이 얼굴을 익혀가며 만나는 직장의 딸, 아들과 겹쳐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그들은 어떠한가. 가족까지는 아니라도 동등한 학내 구성원으로서 일상을 함께하는 이웃으로 그들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절실한 때라고 생각한다.



4. 나가며

노동에 대해 학생들의 냉담한 반응이 있었던 한편, 어떤 학생들은 파업을 지지하거나 공감해주었으며, 노동을 일상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의 일상을 이루는 수많은 것들 가운데 들어가는 노동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며 우리의 삶과 유리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동안 무심하고 행동력이 없었던 필자 스스로를 돌아보면서 글을 이어나가기 부끄러워질 때도 많았다. 학생과 노동자의 관계를 회복하고 같은 학내 구성원으로서 동등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바로 제시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매우 힘든 것일지도 모른다. 명확한 답이 없는, 공허한 외침만을 부르짖는 것 이상으로 노동에 대한 진정한 성찰과 변화를 이끌어내는 방법이나 현상을 꿰뚫는 통찰력있는 답을 알지 못하기에, 이 글에서 내놓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실천하고자 한 작은 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학생 식당에서 배식받을 때나 매점에서 직원분들을 만날 때 감사하다는 인사를 반드시 하려고 한다. 평소에 교내 신문을 읽고 노동과 관련된 기사가 나오면 읽어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파업 이후 생협의 식당 운영 시간 축소와 임금 삭감에 반대하는 서명을 하고 앞으로도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에 작은 지지라도 보낼 수 있는 일이라면 관심을 가지기로 스스로 다짐했다. 누구는 이에 대해서 실천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것이 없는 것에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학내 구성원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거창한 인식개선과 교육이나 변화나 행동을 이루기 이전에 갖추어져야 할 조건이다. 학교의 일상을 이루어주는 그들의 노동이 정당 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라며 진정으로 학교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함께 지켜볼 책임감을 느낀다.

이번 호 대학 현안에는 대학 내의 노동 문제를 담았습니다.

 

<우리 삶의 노동>에서는 우리의 일상을 일구는 대학 내의 노동을 조망하려 합니다. 노동자들의 노동은 대학 곳곳을 비추지만,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학생들의 무관심과 냉담한 태도였습니다. 학생과 노동자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은 무엇일까요.

 

<노동이 존중받는 대학을 위하여>에서는 서울대 노동자들의 1년 동안 투쟁을 돌아보고, 대학 안에서 노동이 어떻게 소외되는지를 분석하려 했습니다. 학문이 신성화되고, 대학이 기업화되는 현상과 노동이 소외되는 현상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대학은 지식을 생산하는 공간입니다. 하지만 대학의 주요 기능을 뒷받침해주는 대학 내의 노동은 주요 의제에서 밀려납니다. 대학 정책에서도 항상 밀려나는 노동 문제를 글로 써내면서 우리는 ‘계류중’을 넘어 앞으로 나아가려 합니다.

 

이번호를 고민하기 시작했을 때는 뜨거웠던 지난 여름의 열기가 다 가시기 전이었습니다.

일본에게 다시는 당해주지 않겠다는 결의를 담은 단호한 불매운동, 이번에는 정말 해내야 한다는 검찰개혁이라는 대의, 전 법무부장관의 이름으로 대변되는 불공정에 대한 분노 등등. 중요한 정치적 요구와 얽힌 감정들이 계속 계속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파도를 잘 타기만 하면 되었던 걸까요, 그 흐름에 휩쓸리지조차 못한,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있는 '사소한' 문제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번호에서는 이렇게 오랜 시간 계류(繫留)중인 이야기들을 다뤄보았습니다. 대학에서의 인권은 왜 자꾸 제자리에 멈춰있는지, 너도나도 문제라고 말하는 성교육을 누구의 관점에서 살펴볼 것인지, 특성화고 현장실습의 문제에 대해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오늘의 일상을 이루는 노동을 왜 대학은 외면해왔는지. 지난 여름의 열기와는 다른, 새로운 계절의 색다른 온도로 살펴봐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번호를 처음 준비하면서는 나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세상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달하겠다 다짐했습니다. 취재를 준비하면서는 나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 큰 용기와 성의를 요구하는 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면서는 세상의 이야기를 해석하고 이야기를 내놓을 만큼의 통찰도, 식견도 없는데 싶어 무척 두려웠습니다. 저의 결과물 앞에서는 많이 부끄럽습니다.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세상을 한겹, 또 한겹 이해하고, 덜 오만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겠죠. 독자 여러분께서도 그 과정에 함께 하신다는 마음으로 너그럽고도 날카롭게 살펴봐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한 학기동안 욕심은 많고, 체력은 안 좋은 나쁜 편집장이었는데, 편집위원 친구들은 각자의 진심과 고민으로 다채롭고 반짝이는 글, 그리고 교지를 완성해주었습니다. 많이 자랑스럽고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초보 편집장의 고민을 들어주고 값진 조언을 건네준 전 편집장들, 이물과 딸기맥주에게도 감사함을 전합니다.

 

2월의 초입, 봄을 기다리며

편집장 당근 드림.

 

맑은 날의 편집실

34호 집필 후기 (2019 여름)

 

피스타치오

안녕하세요 이번에도 교육저널이 나왔네요(_)

이번 학기에 제가 감당할 수 없는 욕심으로 많은 것들을 허겁지겁했던 한 학기였습니다. 글을 마무리할 수 있을지 어떨지 걱정을 많이했는데 부족하게라도 어떻게든 글을 내긴 냈습니다. 회의랑 편집도 함께 하기로 했는데 못하게 돼서 교육저널 여러분들께도 미안하단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ㅠ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충직하게 학교 담장을 벗어난적이 없었는데 이번 인터뷰를 통해 학교를 박차고 나온 청소년 분들을 만났습니다. 대화를 하면서 제가 배우고 스스로가 부끄러워지는 시간을 보냈는데 오히려 제 글에는 그래서 더 이런 느낌이 들어가지 않은것같아서 아쉽네요. 그래도 이번 호를 읽는 분들이 학교를 나가는 것이 탈락이나 포기가 아닌 또 다른 선택이라는 것을 생각해주셨으면 합니다. 부족한 글 함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유한량

안녕하세요, 편집 후기를 쓰다니! 열심히 글을 적었던 지난 시간들이 생각이 나네요. 사교육에 관련된 글을 적다보니, 사교육에 관련된 얘기가 대학교를 오기 위해 저를 거쳐갔던 수많은 학원들과 과외쌤들이 생각나더라고요. 사교육은 비단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제 글이 여러분들과 같이 문제 의식을 공유하게 도와주는, 그런 역할을 해 주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입니다.

열심히 적는다고는 했지만, 부족하고 미숙한 실력 탓에 지방과 수도권의 사교육, 저소득층 학생들의 사교육에 대해 다루지 못한 것은 너무 아쉽습니다. 그럼에도 부족하고 미숙하지만 열심히 적었습니다. 하나의 글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준 교육저널 분들께 감사한 마음뿐이에요. 제 글 또한 읽어주신 여러분들께도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되세요.

 

BDUCK

안녕하세요, 교육저널 편집위원 BDUCK입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교육저널호가 나오는 군요. 편집후기를 쓰니 지난 학기동안 나눴던 세미나와 제가 글을 쓴 과정이 스쳐지나가네요ㅠㅠ 교육저널 신입회원(?)으로 걱정이 많았지만 다른 훌륭한 회원들과 함께여서 무사히 적응하고 많은 걸 배울 수 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쓴 글이 실린 책이 나온다는 게 정말 뿌듯해요. 이런 감정을 알게 해준 교육저널에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평소 청소년인권에 관심이 많았는데, 교육저널에서 제 관심분야에 관해 세미나를 하고 글을 쓸 수 있어서 너무너무 좋았어요. 정말 글 쓰는 과정이 힘들지 않고 행복했습니다♡♡ 제 할 일은 여기서 끝이지만, 글은 쓰는 사람도 있지만 읽어주는 사람이 있어야 비로소 완성되니까요. 많이 읽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가입 원하시는 분들은 언제든지 환영이니 교널 방 문을 두드려주세요~~(틈새홍보) 감사합니다!

 

에나

안녕하세요. 교육저널이 나오는 과정에 처음으로 함께 하게 되어 기쁘고도 신기한 마음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더 열심히 하지 못한 것 같아 마음 한켠에 계속 아쉬움이 남아 있었는데, 편집 후기를 쓰려고 하니 그 아쉬움 더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교육 저널에서 좋은 사람들과 고민을 나누고 함께 이야기할 수 있어 좋았고, 부족한 글이나마 준비하고 완성하면서 즐거웠습니다. 여러분들이 읽어주시면서 그 이야기들을 더 확장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 같습니다.

 

고슴도치뇽

안녕하세용 고슴도치뇽입니다 저는 이번에 교육저널에 들어와서 처음 글을 썼는데요! 저는 사실 글 쓰는 게 조금은 힘들었던 것 같아요ㅠㅠ 아무래도 교널이 추구하는 글은 현상 그 자체를 즉시 설명하는 글보다 조금은 멀리 떨어져서 현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교육과 사회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남기는 글이잖아요. 저도 그런 글을 써보고 싶었는데 참 쉽지가 않더라구여...ㅎㅎ 그래도 교널은 저에게 정말 편안한 공간이었어요. 서로의 말을 진지하게 귀담아듣고, 그 생각들이 모여서 하나의 글이 되고, 더 나은 교육을 같이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었달까유>< 글 쓰는거는 되게 힘들었는데 다 쓰고 나니까 미화되는 것 같네여... 하지만 교널을 하면서 정말루정말루 행복했어요 기사를 읽으며 각자의 고민들을 이야기했던 날들도, 햇살이 슬쩍 들어오는 나른한 오후에 아무말을 하다가 낮잠을 자던 날들도, 머리를 맞대고 글을 쓰며 진지하게 대안을 고민해보는 날들도 저에게는 너무 소중해씁니다 이런 일상을 만들어주신 교육저널 분들께 정말 감사드립니당 저희의 열정과 고뇌와 소망이 담겨있는 글이니 독자 여러분들도 꼭 읽어주시구 각자 생각을 정리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네유 감사합니당

 

대학동데친인간

안녕하세요. 제 첫 교육저널이네요! 기획부터 편집까지 얼떨결에 전 과정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웃고 떠들고 때로는 이야기하던(그리고 무엇보다 낮잠도 자던) 편집실에서의 시간이 모두 소중했습니다.

데친 채소같이 흐물거리는 사람으로서 학교와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항상 교실에서 골골대고 병든 닭처럼 졸던 경험을 그냥 워낙에 비실대서~로 어물쩍 넘어가지 않고 자세히 살펴보면서 이해할 수 있어 다행입니다. 내가 건강관리를 못해서 그렇다고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제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거든요. 여러분도 저희의 글과 함께 몸과 보건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음 좋겠습니다.

표지 사진을 제가 찍어서 정말 자랑스럽네요! 쯔쯔가무시와 풀독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드러누워준 우리 모델들(당근, 이물, 고슴도치뇽)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우리 교육저널의 모든 편집위원에게도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여러분이 최고에요!

 

당근

안녕하세요 당근입니다. 사실 아직 글을 다 완성을 못 하고, 편집도 막 하는 중이라 후기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이번호를 만들면서는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습니다. 글에 담는 고민도 한층 심화시키고 싶었고, 전체 구성의 완성도에 대한 욕심도 많았습니다. 글을 두 개 맡으면서 또 카타르시스도 쓰고 싶었습니다. 매일 경제에서 딴지를 걸고 넘어진 '르포'에 대해서도 훌륭한 비평도 하고 싶었지요. 그런데 욕심이 너무 많아서 그랬는지, 정작 글을 쓰는 순간이 여느때보다 고통스럽더라구요. 그래서 편집을 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글을 다 내놓지 못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글을 쓰면서 성실하고 차분하게 세상을 담고, 이야기를 듣고, 거기에 저만의 필터를 더해 글을 쓰려 했건만, 욕심을 내니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조바심이 넘치는 나의 고민과 잡담만 가득 차는 것만 같더라구요. 다음 호에서는 욕심은 좀 버리고, 있는 그자체로 빛나고 또 불온한 세상의 이야기를 더 담아보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또 새로 필진으로 참여하게 된 친구들과 회의를 하고 세미나를 하고 글을 쓰는 경험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각자의 고민과 단어가 빛나는 글을 읽는 동안 엄청 신이 나기도 했어요. 맨날 글은 늦게 쓰면서 피드백만 많이 해댄 것 같아서 미안하고, 함께 해줘서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한 학기동안 수고해준 이물 편집장님께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며, 얼른 마무리하러 가보겠습니다!

(여름 편집 캠프의 막바지에서 씀!)

인문대 A교수 성폭력 사건 대응 투쟁의 기록

- 세 가지 시선

 

이물, 고슴도치뇽, 당근

 

 

글을 쓰려고 앉아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42, 527일 같은 특정한 날짜나 시간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떤 정서, 이 사건을 접하면서 가장 반복되어 이야기된 말들과 그것에 담겨있는 감정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기시감, 데자뷰. A교수 사건을 접한 학생들의 인상은 그런 것이었다. 지난 해 사회대 H교수 투쟁을 지나 온 서울대였기에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거듭 반복되는 성폭력이 어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수-학생 권력 관계 속에서 구조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라고 분석했고,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머릿속이 조금 복잡했다. 우리는 정말 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수많은 '알파벳' 뒤에 숨은 교수들을 우리들은 호명했고, 그러나 또다시 수많은 강단 앞에 선 교수들을 만나러 갔다. 그런 '몹쓸' 짓을 하는 교수들이 왜,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이는지 분석하는 데에 우리는 단순하고 자극적인 범죄 서사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을까? 나는 교수들이 어떻게 집단을 형성하는지, 무엇을 하고 노는지, 공동체 윤리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어떻게 수행하는지, 학과 문화를 어떻게 주도하는지 여전히 잘 모른다. 풍문으로 들려오는 대학원생, 학부생의 경험담과 강의실에서의 수행을 거듭 비교하며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정말 구조적인 문제라면 교수-학생 권력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해체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평소 마주치는 교수님들이 풍기는 불편함과 어려움 같은 것들을 우리는 감각하면서도, 그것을 마주보거나 맞서지는 못했다. 참 좋은 교수님도 많은데, 참 나쁜 교수님도 많구나. 그리하여 종국에는 이런 질문만 남고 만다. 아아 교수님, 당신은 왜 그러셨습니까?

 

놀랍게도 어떤학생들은 또다시 일어나 싸웠다. 하지만 나는 이 기시감들이 조금은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싸움의 시작부터 피로를 느껴야 했지만, 그보다 다른 게 더 걱정이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와중에, 우리는 그 일이 왜 계속 반복해서 일어나는지 다시 묻기를 어느새 멈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 늘 거기 있는 문제를 보는 것 마냥. 그러나 그것은 당연하지도, 늘 거기 있어서도 안 되는 것들이었다.

 

교수-학생 권력관계에 의해 일어난 권력형 성폭력. 우리는 이 명제를 얼마나 잘 해석하고 있을까. 교수-학생의 권력, ‘성폭력, 어떻게 일어나고 해결될 수 있는가. 학생의 권리를 보장하는 교원징계규정 제정. 학생의 권리는 무엇이며, 징계규정은 권력'성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선결, 혹은 충분조건인가.

 

우리는 이 글을 우리가 느끼는 기시감을 조금이나마 해석하기 위해 쓴다. 그리하여 그 기시감이 피로나 절망이 되지 않도록, 더 깊은 확신과 믿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기록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실은 자유롭고 무책임한 글의 형식을 가진 이유는 그만큼 글쓴이들이 자유롭고 무책임한 탓이다. 매일 매일이 급박하고 절실한 상황에서, 현장을 정확하고 빠르게 전달하는 날카로운 문장만을 좇다보면 무언가 놓칠 것만 같아서, 라는 변명을 덧붙여본다.

 

(+ 전체학생총회 당일과 전후로 이수빈 인문대 학생회장, 신귀혜 공명반 학생회장, 박성현 A특위 및 전체학생총회기획단원, 정주영 학우 외 익명의 학우들을 대면/서면으로 인터뷰했다. 이 글에 실린 인용은 모두 그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

 

#1 이물

 

나는 A교수 투쟁 조직(인문대 학생회나 A교수 사건대응을 위한 특별위원회 이하 A특위 등)에 직접 소속되지는 않은 제삼자이면서, 하필 학생 자치 경험은 좀 있어서 관심을 어느 정도 갖고 투쟁에 참여하는 주체이자, ‘당사자로 호명된 인문대 학우 중 한 명이었다. 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으면서 할 말은 많은 귀찮은 포지션이랄까. 그래서 이 이야기는, 감각은 다소 대중적이라고 자부하고 입장은 투쟁적이라고 믿는 편향되고 아니꼬운 것들이다.

 

성폭력 사건이라는 것

 

내 인상에 남은 가장 오래된 시점의 장면은 피해자의 실명 대자보가 학내에 걸린 모습이다. 자보가 걸린 것은 201926일이었고, 나는 이를 아마 페이스북을 통해 가장 먼저 접했던 것 같다. 인문대 서어서문학과의 A교수가 꾸준히 피해자의 연구부터 사생활까지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하고, 상습적 신체접촉을 비롯한 성폭력을 일삼았으며, 일련의 폭력을 거부하려 하면 졸업과 일자리를 걸고 협박했다는 내용이었다.(1)

피해자는 정직 3개월만을 선고한 인권센터의 결정을 비판하며, 더 이상의 피해자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며 그가 대학에서 사라지기를, 싸울 것을 선언하고 있었다.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본인의 이름을 걸고 싸우겠다는 피해자의 의지가 느껴져서 여전히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두 번째 장면은 35일자 한겨레 기사였다.(2)  기사는 서어서문과의 문화가 평소에도 얼마나 위계적인지, 이번 사건에 대해 학과 교수들이 얼마나 미온적이고 나아가 피해자를 학과를 음해하려는 세력과 연관시키고 있는지 말해주었다. 인권센터 사건조사에 참여한 참고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서문과 교수들은 수시로 여학생들에게 성차별적 발언을 일삼았으며, 이를 양산하는 술자리를 두고 김창민 서문과 학과장은 교실 밖에서 지혜가 왔다갔다하는 자리였다고 언급했다. 그는 성차별적 발언은 농담이거나 반어적 표현이었고, 이 사건을 통해 조력자 그룹이 서문과를 음해하려고 하는 것 같다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선명한 두 개의 장면은 사건의 구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거듭되는 성폭력에 묵인하지 않고 싸움을 선택한 피해자, 그 목소리를 교수 집단 자신의 무고함과 피해자의 불순함으로 호도하려는 음모론의 대립. 언젠가부터 성폭력 사건은 경찰기관에 맡겨진 수사처럼 절차적 과정을 거치면 되는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성폭력을 발생시키는 젠더-권력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언제나 첨예한 정치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성폭력을 양산/강화하는 공동체와 개인, 이에 맞서는 피해자와 연대라는 정치적 지형도가 흐릿하게나마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를 선명하게 그려나가는 것은 모든 싸우는 사람들의 몫이다. 학생들의 반응은 복잡 미묘했다. 우리 학교에, 혹은 우리 과에 이런 나쁜 일이 있었다니, 하는 탄식과 야유가 개강의 설렘과 공존했던 3월의 어느 날들이 떠오른다. 종종 친구들은 A교수의 행위를 비웃고 욕했지만, 그 다음은 막연했다. 모두가 문제인 것 같다고는 생각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는 이상한 상황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투쟁의 시작과 그 방향

 

우리에게 어떤 선택지가 가능한지, 그 정치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결국 투쟁과 연대의 경험일 것이다. 사건이 공론화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3, A특위가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사회대 H교수 투쟁의 기억과 경험(3) 덕분에 각 단위에서 사건 해결에 함께하거나 지지할 사람들은 꽤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우선적으로 인문대의 일이었기에 인문대 단위의 주체성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었음에도, 그간 학생회가 자주 사라지고 생기기를 반복한 인문대 학생사회가 대본부 투쟁을 완전히 주도하기는 좀 벅차보였다. 사건 초기 인문대 학생회가 사건 정리 카드뉴스를 제작, 배포하고 학생회장단이 입장문을 게시하는 등의 노력은 존재했지만, 단과대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꾸준한 투쟁 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다소 무리였던 것 같다. 그렇게 생겨난 A특위는 기존 학생회 단위를 바탕으로 한 조직이기보다, 당장의 A교수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데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모인 것이 되었다.

 

상당히 빠른 시간 내에 투쟁 조직이 결성되고 대응을 시작한 것은 분명 긍정적이었지만, A특위는 태생적으로 자주 정당성이나 대표성문제를 지적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가지게 됐고, 동시에 투쟁의 의제와 방향을 대중 단위와 공유할 방안을 항상 고심해야 했다. 다시 말해 투쟁 의제가 학생들에게 다소 뜬금없다고 느껴지거나, 나도 모르게 어디선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쉬운 조건이었다. 이런 난점은 이후 A교수 투쟁이 두 번의 총회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A특위는 활동 초기에는 A교수 사건 자체를 알리는 데에 집중했지만, 점차 요구의 핵심을 파면교원징계규정으로 강조했다. A교수를 파면할 것, 그리고 안전한 공동체를 위해 교원징계규정을 마련하고 그 안에 학생의 권리를 명시할 것.

 

사실 전반부에는 A교수라는 사람이 있다라는 걸 알리는 게 가장 큰 문제였어요. (...) 두 번째는 제도적 측면으로 간 게 컸어요. 단식 이후로는 그게 컸는데. 기본적으로 학생이나 피해자가 제도적으로 보장받은 게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의식이었어요. 제도적으로 권리가 보장된다는 것, 명문화된다는 게 되게 중요하잖아요. 노동권이 헌법에 보장되어있는 것처럼, 학생의 권리라는 것이 피해자의 권리라는 것이 교원징계규정에 들어가야 어느 정도 우리가 권리를 보호받고 있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을 수 있다는 확신을 하고 넘어갈 거 같아서.” - 이수빈 인문대 학생회장 (인문계열 17학번)

 

교수의 성폭력이 많은 이들의 침묵 속에서 묻히거나, 늘 있는 그저 그런 사건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시되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갖는다. 여기 여전히성폭력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은 언제나문제라는 외침이며, 그에 대한 반성과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교수는 이 학교를 떠나야한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들이 더 이상 막무가내로 버틸 수 없게 (강제로) 떠날 수 있는 제도적 경로를 마련하는 것, 그들을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학생의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선언하는 것 역시 의미가 있다. 당장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또 다른 피해자가 이처럼 지난한 싸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말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대학이라는 공동체를 안전하게 꾸려가는 데에 있어, 학생의 힘과 권리를 확인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폭력 사건의 근본적 해결책이 왜 교원징계규정으로 모여야만 했는지 따져볼 필요도 있었다. 성폭력이 애초에 일어나지 않으려면 더 많은 것이 필요할 것이다. 교원징계규정 자체는 성폭력이 왜 일어나는지를 겨냥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다. 법이 있고 처벌이 있다면 사람들이 눈치를 볼 것이고 교화될 것이라는 단순한 정치철학에 기대는 것이 아닌 한, 성폭력을 일으키는 관계와 권력, 공동체 문화 전반을 변형하고 바꿔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지적이 담보해야하는, ‘권력의 해체와 재구성은 어디에 있을까?

 

 

빨리 온 여름과 숨 막히는 시간들 인문대 학생총회, 대표자 단식, 동맹휴업

 

그에 대한 뚜렷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로, 4월을 맞았다. 4월에는 인문대 학생총회가 있었다. 앞서 말했듯 거듭 대표성을 빌미로 학교와의 논의를 거부당하는 A특위 입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결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생각보다 더 꿈쩍 하지 않는 대학 본부, 거듭 비협조적으로 사건에 임하는 서어서문학과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선 학우들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저는 인문대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지금 이 사건의 당사자라고 생각해요. 물론 서문과가 있지만 저는 인문대 학생회장이고, 학우들 사이의 여론은 어떻게 인문학 공동체에 이런 사람이 있냐는 거였고, 그런 저희의 의지를 학교에도 표명하고, A교수한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인문대학생이 직접 전달했다고 생각하고요. 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모아서 돌아오지 말라고 이야기를 한 거기 때문에.” - 이수빈 인문대 학생회장 (인문계열 17학번)

 

덕분에 42일에는 (2012년 학과제 전환 대응 인문대 학생총회 이후) 거의 7, 8년만에 인문대 학생총회가 열렸다. 새터 이후로는 서로 얼굴 볼 일도 없던 인문대 학생들이 각자의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뜬금없는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인문대 학생총회가 어떻게열렸는지 잘 알지 못한다.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다가, 한날한시에 광장에 나오기를 선택하기까지의 의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내게는 없었다. 단위 대표자와 A특위의 홍보, 순회토론 덕에 총회가 성사될 수 있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해방터를 지나가는 사람들, 함께 강의를 듣는 사람들 이상으로 인문대 공동체라 할 것이 이때까지 우리에게는 없었다. 그렇다고 총회의 결정 이후에 그 공동체가 완벽히 도래한 것 역시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나는 꽤 걱정이 되었다. 인문대 총회에서 서로를 확인했다면, 우리는 앞으로 서로 얼마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간극을 좁혀가서 결국은 어떻게 공동의 문제의식을 성취해갈지 고민해야할 것이었다. 인문대 학생회가 총회를 준비하며 각 반을 돌며 순회토론을 진행했다지만 A교수 사건의 성폭력교수 권력에 대한 토론이 충분히 진행되었던 거 같지는 않다. 애초 제한적인 인원을 대상으로 한 일회성의 토론이 상시적 의사결정과 정보 공유의 통로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문대 학생총회가 적어도 논의의 시작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학교는 거듭 협상 테이블에 나오길 거부했고, A특위는 절박함으로 단식을 시작했다. 인문대 총회 다음 날 이수빈 인문대 학생회장이 단식을 시작했고, 그 뒤를 윤민정 A특위 공동대표와 신유림 서어서문과 학생회장이 이어나갔다. 43일부터 단식을 넘겨받은 17일을 거쳐 27일까지, 무려 24일에 걸친 시간이었다.

 

“(전체학생총회를 선택한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는 거 같아요. 하나는 학교에 어떻게 계속 압박을 줄 것인가, 하는 문제고 두 번째는 어떻게 대표성을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인데. A특위는 인학 중심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임의단체잖아요. 학우들이 만들라고 허락한 게 아니라, 사건대응을 하고 싶은 분들이 모여서 움직인 거라고 생각해요. 당사자성은 있지만.” (...) 단식을 한 이유는 학교에서 테이블에 나오라는 거였어요. 너희가 말을 듣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굶는다는 것을 밖에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래서 학교가 테이블에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학교가 나와서 하는 말은 항상 총학생회가 와라, A특위가 뭐냐 너네와 대화하지 않겠다, 학우들의 전체의견이 맞냐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거든요. 그런 부분을 보여주려는 것도 있었고. 단식으로 대화를 시작했으니 우리의 주장에 좀 더 대표성을 실어야겠다는 생각에. (총회 안건을) 총운위로 안올리고 학우들의 현장발의로 올린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이런 저희의 요구에 동의하신다면 총회에 함께해주세요, 라는.” - 이수빈 인문대 학생회장 (인문계열 17학번)

 

단식은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동조단식은 연일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식은 우리의 입을 스스로 닫게 한 효과도 있었다. 누군가의 희생 앞에 죄책감과 겸연쩍음, 지지와 기원 외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몇 가지 없었다. 또한 투쟁이 쉽게 타자화될 수 있었다. 대단한 몇몇이 A교수 파면을 위해 힘쓰고 있고, 나는 차마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실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상황이 연출되기 쉬웠다.

우리는 말하기보다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단식을 하는 사람, 그리고 수많은 동조단식자, 더 많은 단식하지 않는 사람, 들은 서로 이야기 나눌 수 없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죄책감이기도 하고, 긴장감이거나 진중함, 무안함과 머쓱함 같은 것들이었다.

앞선 인문대 학생회장의 인터뷰에서도 드러나듯, 단식은 길어지는 투쟁과 조용한 학내 분위기 속에서 요지부동한 학교를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 부득이 선택한 전략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례를 무릅쓰고 말하면, 나는 우리의 힘이 학교에 가닿지 않는 이유를 우리의 논의와 결집 정도에서도 꾸준히 찾아야 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A교수 사건이 너무나 안타깝고 정말 그 교수가 파면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동의가 아니라,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심지어 교수를 비호하고 있는 이 썩어빠진 학교가 바뀌어야 한다는 치열함을 우리가 공감할 수 있다면, 아니 바로 그럴 때에야 학교는 움직이는 것 아닐까. 이 글의 시작에서 밝힌 선명한 대비를 더 부각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인문대 학생회장의 단식이 한창이던 410일은 인문대 총회에서 결정한 동맹휴업의 날이었다. 문 앞에 붙은 동맹휴업 공지가 무색하게 곳곳의 강의실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동맹휴업으로 수업을 빠진 다음 날, 지난 시간 왜 결석했냐는 교수의 물음에 동맹휴업 때문이었다고 말한 나에게 돌아온 것은 묘한, 약간의 비웃음이 섞인 웃음이었다. 그 교수님은, 그리고 학교는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어진 동맹휴업과 단식의 봄은 그래서 너무나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러워야하는 학교가 너무 조용했다. 조용한 속에 대표자들의 몸은 망가지고 있었고 본부는 반응하지 않았다. 성폭력을 저지른 A교수의 이름(알파벳)은 남았지만, 그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말해지지 않았다. 그것을 비호하고 함께 수행했던 동료 교수들과 학과는 뒤로 물러나있었다. 우리는 또 다시, 사회대 H교수 투쟁이나 그 어떤 교수의 성폭력 사건처럼 이 사건도 끝나버리지 않을지, 그렇다면 정말 앞으로는 돌이키기 힘들지 않을지 두려워해야 했다.

 

총회를 향한 길

 

돌아보면 광장에는 언제나 기대 이상의 사람들이 모였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상 속에서 서로의 얼굴이나 생각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더 큰 광장, 더 큰 총회에서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레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일까?

몇 번의 단식과 면담 이후 A특위는 전체학생총회의 소집을 결의했다. 27일 총회 소집을 위한 연서를 시작했고, 하루 만에 1078명의 연서를 받아 총회를 소집할 요건을 충족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나는 이 폭발적인 관심이 분명 투쟁 주체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총회를 위한 A특위의 홍보, 의제 공론화의 노력은 다채로웠다. 당장 기억나는 것만 해도 행정관 벽면에 빔프로젝터를 쏴 요구안 알리기, 삐라 뿌리기, 점심시간 플래시몹, A교수 사건 모의고사 등이 있었다. 교원징계규정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카드뉴스도 여러 번 제작해 배포했다.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학생들에게 더 쉽고, 다양하고, 선명하게 각인되도록 노력했던 것 같다. 다소 고전적인(?) 기자회견, 집회도 동시에 진행했다.

덕분에 당초 A특위가 목표로 했던 의제화도 어느 정도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건의 핵심은 교수-학생 간 성폭력, 갑질이 있었고 공론화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직 3개월이라는 가벼운 권고가 나왔다는 점, 학생이 피해자로써 얽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인 것 같아요. 학교라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요.” - 정주영 학우 (산업공학과 19학번)

 

하지만 여전히, 총회에 대한 기대 속에 우리에게 다시 물어야 할 질문들이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성폭력을 자각하고 있는지, ‘교수 권력은 무엇인지, 그것을 규탄하는 공동체는 과연 누구인지.

총회, 단식, 그리고 더 큰 총회라는 긴박한 타임라인은 서로를 확인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불안한 논의 기반 위에서 사건을 조준하기 위한 당위적 수사와 행위, 그 안에서 형성되는 도덕적 위계와 장벽들, 그리하여 결국 광장에 모였지만 연결되지 못하고 떠날 위기의 상황들.

물론 지금의 싸움이 앞선 질문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아주 많은 것을 해냈다. A교수 성폭력 사건을 문제제기한 피해자의 용기가, 이에 연대하여 투쟁을 수행한 주체들이 없었다면 이런 논의는 시작조차 될 수 없었다. 또한 그간 여성이라는 이유로, 학생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했던 사람들이, ‘성폭력이 문제라고 외치는 것만으로도 권력의 비대칭적 지형을 자각하고 균열을 내는 시도이다. 그 노력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저항 공동체가 자생적으로 형성될 수도 있었다.

시작부터 모든 걸 한 번에 성취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부족해 보이는 노력 속에도 핵심이 있다는 것을 안다. 다만 우리는 막연히 감각하고 있는 성폭력, 권력, 공동체를 구체화하고, 더 나은 방향을 치열하게 고민해가야 할 뿐이다.

 

우리에게 당연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이번 총회가 꼭 성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많이 떨리고, 아직까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서 조금은 불안하기도 합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 박성현 A특위, 전체학생총회 기획단원 (자유전공학부 19학번)

 

교수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사실 학생들이 투쟁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교수들은 이렇다 할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이렇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음에도, 학교 당국과 교수들은 왜, 어떤 생각으로 버티고 있는 것일까?

다시 처음의 선명한 두 장면으로 되돌아가자. 성폭력을 고발하는 피해자를 두고, 교수 집단은 조력자 그룹 운운하며 학과가 음해당할 것을 걱정했다. 그들이 지키려는 학과 공동체, 혹은 교권은 기실 교수의 권리가 아니라 교수의 권위와 권력이다. 학벌과 능력주의 사회는 그들의 지적 권위에 사회경제적, 인격적, 정치적 권위를 부여한다. 현행 교육 체계는 교수에게 졸업장을 빌미로 학생에 대한 인신의 통제권을 허용한다. 성차별적 교육 기회와 학계 문화는 남성중심적 교수 사회를 유지, 강화하며 교수 집단의 놀이와 무리짓기에 여성혐오를 코드화한다.

 

교수에 의한 인권침해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라는 말과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해요. 여기저기서 풍문으로 목격담으로 주워듣는 것은 많지만 공론화되는 것은 새발의 피 정도이니까요. 그만큼 대학원/학계가 굉장히 위계적이고 성차별적이라는 이야기겠지요.

궁극적으로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는 학교, 부조리를 당당히 공론화할 수 있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총회에 상정된 제도개선뿐만 아니라 문화/관행까지 전부 뒤엎어야 한다고 봅니다. 관행을 만들어내는 권력은 여러가지 속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니까 결국은 여성주의 연령차별거부 등의 사회운동과도 뗄 수 없을 테니 학내외로 열심히 의제화하고 여러 운동세력들과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 신귀혜 공명반 학생회장 (국사학과 17학번)

 

사람 좋은 교수님을 떠올리기 전에, 우리는 교수의 전반적 탈권위화, 연구실 내 교수 권력의 해체, 남성중심적 교수 문화 타파를 위해 노력하는 교수가 있는지 떠올려야 할 것이다. 잘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그 권력들이 이미 아주 당연하게 자리 잡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더욱 더 말해내고 드러내야 한다.

 

 

#2 고슴도치뇽

 

작년에 이은 사회대 학생총회

 

527, 드디어 학생총회 당일이었다. 사회대 학생인 나는 6시에 열리는 사회대 학생총회에 먼저 갔다. 작년에 이어 사회대 학생총회의 안건으로 교수 성폭력 문제 해결 요구의 건이 올라왔다. 약간은 착잡했다. 우리는 작년 한 해 동안 사회학과 H교수 파면을 위해 싸웠다. 권력을 이용해서 갑질과 성폭력을 자행한 그에게 인권센터는 3개월 정직 선고를 내렸고, 우리는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2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H교수 복귀반대선언도 하고, 20여 년 만에 단과대 학생총회를 열어서 권력형 성폭력/갑질 가해자 H교수 파면 요구의 건을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 H교수는 파면되지 않았고 징계위원회는 그에게 또다시 정직 3개월을 선고했지만 본부는 학생의견을 반영한 교원징계규정 신설을 약속했고 학부생-대학원생-인권센터-본부가 함께하는 인권연구팀이 꾸려졌다. 우리는 더디지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같은 구호를 외쳐야 했다. 이번 총회의 1번 안건은 두 가지. 사회학과 H교수, 서어서문학과 A교수 파면과 학생참여 보장한 교원징계규정 제정이었다.

다만 그래도 나름의 희망이 있다고 느낀 것은 총회 안건의 미세한 차이였다. 작년의 우리는 교수-학생 간 권력 관계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본부에 요구했다면, 지금의 우리는 새로 만들어질 교원징계규정에 학생참여를 보장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징계위원회에 학생이 참여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토론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권력형 성폭력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한 완전한 대책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학생 사회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한 선제적인 요구임은 확실하다. 안건은 재적 202명 중 찬성 194, 압도적으로 가결되었다.

 

사회대에서 아크로폴리스로

 

우리는 다 같이 깃발을 들고 전체학생총회로 향했다. 총회 개회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사회대 대오를 큰 함성으로 맞이했다. 아크로폴리스에 모인 수많은 이들과 마주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에 벅찼다. 우리는 즐거웠다. 총회가 성사될 때까지 학생들은 희망을 노래했고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었다.

740, 총회가 개회되었다. 많은 이들의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1800명이 넘는 학우들이 대학 내 권력형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다. 우리가 모여 광장을 가득 메웠을 때의 벅참을 잊을 수 없다. A교수 투쟁이 길어지며 누군가는 무력감을, 누군가는 불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을 살아갔다. 하지만 총회가 성사되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느꼈다. 비록 그 존재들이 지속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총회라는 자리에서만큼은 서로에게 의지했다. 혼자가 아니라고, 그 길을 함께하자고 말했다.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는 학생들의 모습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각 단위의 깃발을 휘날리고 반의 구호를 고민했다. 서로의 외침은 서로의 가슴을 두드렸다. 많은 이들에게 총회는 분명 해방의 공간이었다.

 

총회 속의 사람들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다양한 참여자들을 만났다. 총회기획단으로 활동 중인 자율전공학부 19학번 박성현 씨는 “A특위 때부터 활동해온 사람으로서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많은 학우분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행사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것 같아요.”라며 총회가 성사된 소감을 이야기했다. 교육학과 학우 A 씨는 총회에 참여한 소감에 대해서 많은 학생들이 힘을 모아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 직접 투표도 해보고 하니까 가슴 벅찬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공대 학우 B 씨는 총회를 통해서 학생들의 말이 하나로 모이고 학교 측에 전달할 때 조금 더 공신력 있고 타당성 있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학생 총회가 열렸을 때의 장점이고, “지금까지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크게 반영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총회를 통해서 더 반영되어서 앞으로 더 이상 피해자와 가해자가 등장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날 총회에 올라온 논의안건은 세 가지였다. A교수 파면, 학생 인권 보장을 위한 제도적 개선, 요구안 실현을 위한 행동방안. 1안과 2안은 가결되었지만 3안은 의사정족수 미달로 의결되지 못하였으며, 910, 총회는 폐회했다. 총회가 끝난 후, 총학생회 운영위원회 논의를 통해 530일 동맹휴업 및 거리행진이 후속 행동 방안으로 결정되었다. 인문대 학생회장 이수빈 씨는 우선 30일에 있는 동맹휴업에 총력을 가할 것이며, “지속성 있는 행동방안에 대해서도 A특위에서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후속 행동 방안이 결정되었기는 하지만 총회를 준비하는 이들은 총회 이후의 투쟁 방법에 대해 고민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자율전공학부 박성현 씨는 총회라는 영향력 있는 방법 이후에 앞으로 어떻게 투쟁을 이어나가야할지 고민이 된다.”고 말했고, 공명반 학생회장 신귀혜 씨는 총회 이후가 기말고사 기간이어서 얼마만큼의 동력이 나올지 잘 모르겠다.”며 우려를 표했다.

 

나의 존재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번 총회에서는 참신한 홍보 방안이 학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이스티 배부 사업, 각 단과대 맞춤형 플랑 등 총회 홍보를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많이 제시되었으며, 총회기획단은 학우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노력 끝에, 총회는 성사되었고 많은 이들은 감격에 겨웠다. 총회는 학생사회 내에서 가장 큰 대표성을 가지는 의결기구이다. 학생사회의 총의를 모으고 행동 방안을 결정한다. 총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한 명의 주체로서 표를 행사할 수 있고, 언제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이렇게 민주주의를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아쉬웠던 부분도 있었다. 총회에 참여한 학우 A씨는 총회 개회시간이 두 시간 가량 늦어진 점이 아쉽다고 하였다. 과 카톡방에서 와달라고 요청하는 게 아니라 정말 참여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당당하게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 총회의 참된 모습이라는 의견이었다.

발언에 대한 아쉬움을 표한 이들도 있었다. 총회에 참여한 학우 B씨는 발언들이 생산적이고 실효성이 있다는 느낌보다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을 반복한다거나 문제의식을 다시 짚는 내용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또한 학우 C씨는 총회의 본래 의미가 사실 말 그대로 총의롤 모으는 것이며 발언도 많이 들어보고 집중력 있게 의제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정족수 채우는 것에만 집중하는 느낌이 들었다며 더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어야 함을 지적했다.

안건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한 참여자는 총회가 중도 폐회된 것에 아쉬움을 표하면서 구체적인 안건 상정에 대한 소통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3번 안건의 총장 잔디 점거 안이 어정쩡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점거라는 것이 학교 행정을 방해하면서 뜻을 알리는 행위인데, 총장 잔디를 점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의견이었다.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한다

 

학우들은 더 활발한 토론을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총회 성사를 넘어서, 여러 고민들이 교차되고 같이 대안을 상상하기를 소망했다. 우리는 교수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더 질문해야 한다. 그들은 물론 학생의 인격을 모독했고 학문 공동체를 훼손했기에 합당한 징계를 받아야 한다. 다만 더 이상 권력형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성폭력 갑질 교수 파면보다 더 많은 것들을 논의해야 한다. 무엇이 교수의 권력을 만들었을까. 학문적 권위? 대학원생의 모호한 위치? 기업과 국가에서 사업을 따오는 관리자로서의 교수? 독점적인 논문 심사와 졸업 여부를 쥐고 있는 교수? 젠더권력? A교수 파면을 외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교수의 권력을 만드는지를 묻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징계위 내 학생참여와 관련해서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더 토론되어야 한다. 교수-학생 권력관계로 일어난 사건에 대해 학생은 왜 징계의원으로 참여할까? 피해자가 학생이니까. 교수들로만 이루어진 징계위원회는 폐쇄적이니까. 직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 말하는 전문성에 대해서는? 본부는 항상 전문성이유를 들며 징계위원회 직접적인 학생 참여를 보류해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한다. 징계위원회 교수들이 갖고 있는 전문성은 무엇인가. 학생의 입장에서 전문성이란 무엇인가. 교수 사회 내의 인권과 학생 사회 내의 인권은 어떻게 다르며 학생 사회 내의 인권을 가장 잘 아는 이는 누구인가. 학생 사회 내의 성규범과 인권 침해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것이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대변될 수 있는가. 인권이 존중되는 서울대학교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답을 하며 우리는 징계위원회에 학생이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학생의 관점에서, 학생의 언어로 재구성해야 한다.

H교수 사건과 A교수 사건을 겪으며 서울대학교 내의 징계 결정 구조가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우리는 이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했고, 그 결과로 교원징계규정이 신설되었으며, 학생이 요구했던 피해자의 절차적 권리가 보장되었다. 또한 학부생-대학원생-인권센터-본부가 함께하는 인권연구팀이 꾸려져 서울대학교 인권 개선 과제와 발전 방향: 학생 인권을 중심으로라는 연구를 진행했다. 우리는 분명 변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는 징계과정을 넘어 대학에서 학생이 평등한 주체로서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민주적인 학교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대학은 어떻게 운영되는지 우리는 알고 있나? 평등한 대학을 상상하며 지금의 대학에 계속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교육 목적, 교육 내용과 평가 방식, 교수-학생 문화, 생활공간, 대학 재정 운용 방식 등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할까?

 

#3 당근

 

내가 총회 이후 마주했던 최초의 장면은 총회 다음날 아크로폴리스에 나란히 놓여있던 우산이었다. 총회가 진행되던 시각에 비가 조금씩 오다 그쳐서, 많은 학생들이 우산을 들고 왔다가 두고 간 것 같았다. 총회 진행을 담당했던 친구가 우산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기억나면 찾으러 오시겠지- 하고 예쁘게 정리해두었다고 했다.

어제의 흔적이 함께 썼던 우산으로 남아 있다는 게 든든하기도 하고 왠지 귀여워서 웃음이 설핏 나왔다. 기사를 쓰는 시점에서 총회 이후의 시간들을 정리하려다보니 계속 그 우산들이 떠올랐다. 눈물인지 웃음인지 모를 비를 맞으며 함께 했던 밤, 비에 젖어들고 싶지 않아 꺼내 썼던 우산, 어제의 그 우산이 햇볕 아래 가지런히 놓여있는 내일의 아크로 폴리스... 학생들은 어제의 그 우산을 떠올리고 다시 아크로에 돌아왔을까? 우산을 찾아갔을까? 그 우산은 햇볕에 보송보송 말라 있었을까? 아니면 햇볕이 미처 말리지 못한 부분에 물이 고여 퀴퀴한 냄새가 났을까? 이제 그 우산은 학교가 정리해 버렸나?

 

동맹휴업

 

동맹휴업은 총회 폐회 직후 아크로에서 열린 총학생회운영위원회를 통해 의결되었다. 동맹휴업은 총회 사흘 뒤인 목요일로 예정되었다.

총회가 끝나고 처음으로 어떤 행동을 보여주는 자리, 또 총회 한 번으로 학생들의 움직임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자리였기에, 그 날의 학교는 긴장감이 있어 보였다. 나는 학생들이 얼마나 모일지, 또 어떤 구호를 외치고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가 기대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이 걱정은 동맹휴업 집회 5분 전 극대화 되었는데, 10분 전부터 찾아가 앉아있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아서였다. 다행히 점차 사람들은 모였고, 대략 100여명 정도의 학생들이 동맹휴업 집회에 참여했고 서울대입구까지는 8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행진을 했었던 것 같다. (내가 대략적으로 세었던 것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동맹휴업 집회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자신이 신입생이라고 한 학생의 발언이었다. 자신은 하루 수업을 빠지는 것이 참 쉽지 않았다고, 그래서 여기 있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그렇지만 부당한 일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잠깐이라도 왔다고. 그런 내용이었다. 이 발언을 듣고 동맹휴업은 총회가 우리에게 기억되는 방식, 남긴 것들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구나, 싶었다. 이런 마음을 여러 차례 다시 확인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총회 이후의 과제겠구나 싶기도 했다. 또 동맹휴업이 대부분의 낮 시간을 강의실에서 보내는 많은 학생들에게는 약간의 일탈과 해방감을 안겨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 건물들을 가로지르며 학생들이 불렀던 노래들 (이제는 대학 투쟁의 상징이 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힘내를 불렀다.), 어설프게 외쳤던 ‘8박자 구호가 평소처럼 연구실과 강의실에서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에게까지 닿았기를 바라본다.

이후 서울대 입구까지의 행진은 솔직히 덥고 다리 아프다는 생각을 주로 하며 걸었고, 서울대 입구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같이 갔던 과 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 공간을 행진과 구호로 어색하게 만드는 사람에서 다시 그 공간에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 좀 이상했다.

 

총회에 대한 구성원들의 지지와 연대는 동맹휴업이 아닌 다시 일상적 공간에서 느끼기도 했다. 총학생회로부터 메일을 받은 상당수의 교수님들이 휴강을 하거나, 출석체크를 하지 않거나 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의 의사를 존중해주셨다. 학생들의 움직임, 목소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 다른 구성원들의 연대와 지지를 확인하는 것은 확실히 따뜻한 힘이 되는 것 같다.

또 동맹휴업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도 지지를 느꼈다. 신귀혜 씨(국사학과, 공명반 학생회장)는 동맹휴업에 대해 '사람들이 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는 인상을 받았다', '(반에서도) 불참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는 했지만, 불참 자체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 이후의 시간들...

 

그 이후의 일정 시간에 대해서는 개인적 기억은 거의 없다. 동맹휴업이라는 전술이 일회적이기도 했고, 그 이후 갑자기 찾아온 과제들, 시험들을 처리하느라 거의 한 달을 매일 도서관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신귀혜 씨도 인터뷰에서 총회와 동맹휴업 주간이 지나고 나니 시험기간이 닥치고, 종강하고 하니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는 느낌은 아니었다고 언급했다. 또 분위기가 단절된 것에 대해, ‘본부점거가 아닌 이상 일회적인 전술이라, 그 이후에 어떻게 할지를 총학에서 주도적으로 얘기를 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았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 가운데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소식들은 있다. 학생들이 총장이 참여하는 인문대 교수진 회의 장소 앞에서 피케팅을 진행하고, 총장에게 전체학생총회 결과지를 전달하자, 총장님이 어 이거 봤는데...’라고 답해 분노를 샀다. 학교는 이전까지 학생들에게 다른 학생들의 의견을 모아오라고 했으면서, 정작 20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전체학생총회를 열었는데도 공개적으로 입장을 전달하지도, 대표자 면담을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이미 봤다는 답은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으면서 그저 무시하겠다는 것 아닌가? 아마도 이후 평의원회에서 통과될 교원 징계규정과 관련된 작업을 하고 있어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라, 사후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통과된 징계규정은 여전히 학교 당국의 선심의 한계를 보여주었던 것 같다.

또 하나의 소식은 서울대민주화교수협의회의 교수님들이 본부에 입장을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학생들의 문제제기에 공감하며, 학생들이 공동체 문화를 회복하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으므로 그에 책임을 느끼며, 1) 학교 의사결정과정에 학생을 포함한 구성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소통구조 2) 학생이 피해자인 경우 학생 대표가 징계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와 절차 두 가지의 마련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떤 스승들은 학생들의 목소리를 단지 치기어린 생각이 아닌, 진지한 요구와 문제제기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사실 이마저도 솔직히 늦었다고는 생각하긴 했다. 학생들은 몇 개월째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여러 명이 곡기를 끊기도 했다. 언론에서도 여러 번 심각하게 다루었는데도, 교수사회는 침묵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 2000여명이 모이고 행동을 이어나가자 이제는 교수 공동체도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하기는 어려우며, 문제의식에 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피해자의 귀환

 

그리고 방학을 앞두고, 피해자분이 돌아오셨다. 그러면서 국면이 확 달라졌다. 이수빈 씨(인문대 학생회장)는 피해자가 학교가 자정할 줄 알고 학교(인권센터)에 신고하였는데 그게 되지 않아 검찰에 고소를 하고 법적 절차를 밟으려 하는 상황이라 전했다. 따라서 학교에서 대응해왔던 학생들도, 피해자분의 귀국 이후 함께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 사안을 사회에 알리고, 서울대가 자정이 안 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쌓으려 했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에서는 학교를 제발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달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교수들은 학업의 조건으로 학생들이 더 성실할 것을, 더 노력할 것을 말한다. 그러나 결국 학생들이 집중하기 어려운 것은 누구 때문인가?

 

학교 당국은 피해자가 돌아오자, 허둥지둥하며 뒤늦게 대응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수빈 씨에 따르면 피해자가 귀국한 이후 가장 중요하게 본부가 학생대표보다는 (피해 당사자와) 교섭을 많이 가지려 노력하고,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려 노력하고 있으며, ‘징계위원회에서 피해자가 한 번 진술할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의 답변도 보내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핵심적인 문제, 예를 들어 피해자에게 현재 인권센터 심의위원회 문서를 어떻게 판단했는지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등의 한계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신귀혜 씨는 이 상황에 대해, ‘학생 천 명이 모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 반응이 없다가, 당사자가 와서야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학생을 학교에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가 드러나서 무력감을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직접적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게, ‘네가 그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냐며 문제제기 하는 목소리를 막는 것은 참 어처구니가 없다. 총회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당연히 이 사건의 피해자가 아니지만, 이 문제에 있어 누구보다 당사자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적어도 학교 당국이 피해자의 등장에 여러 대응을 고민하는 모습은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 당국은 피해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목소리를 의심하는 것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음을 인식한 것 같다. 적어도 학교 당국이 스스로를 해결의 주체로 인식하고 책임감을 느끼며, 공동체 문화 개선이든 어떤 것이든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통감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존재는 절대 무시될 수 없고,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피해 호소에 귀를 기울일 의무감이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싸워왔던 수많은 이들의 공이다. 미투를 통해, 그리고 그 이전부터 일상적이고 만연한 성폭력에 맞서 싸워왔던 여성들, 학교에서 권력형 성폭력에 대항하여 싸워온 많은 학생들의 공이다. 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숨지 않고 당당하게 싸울 것을 선언한 피해당사자, 그리고 인문대 총회에 이어 학생총회까지 한 마음으로 움직인 학생들의 공이다.

 

학교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 무렵 총장의 언론 인터뷰가 나왔다.(4) 총장에 도전한 이유, 취임 직후 당면했던 여러 상황이나 비전 등을 함께 묻는 인터뷰였고, 그 중 학생총회와 대응에 관해서 가장 먼저 다루어 졌다. 총장은 인터뷰에서 답답하고 자괴감이 든다, 서울대가 공공적 목적을 가지는 기관인 만큼, 국민적 기대치를 인식하고 내부논리에만 함몰되지 않으며 문제해결을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성폭력 사안과 학생들의 요구에 있어서도 피해자가 관련 정보 및 결과 확인 등을 요청하면 징계위 의결을 거쳐 고지하도록 추진 중이라 밝혔는데, 특히 이에 대해서는 법적 논리로 반대하는 이들이 있지만 피해자의 알 권리라 여기기에 추진 중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또 서울대 공동체 전반에 인권 가치가 뿌리 내리도록, 강력한 처벌의 근거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인권규범을 제정, 선포하겠다고 밝혔다. 이 인터뷰를 읽으면서 총장으로 대표되는 학교 당국이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징계 과정에서 피해자의 권리에 있어서는, 내부의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돌파해나가겠다는 의지와 책임의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총장은

 

학생들이 요구하는 학생대표는 법률상 불가능하다며 선을 긋기도 했고, 이 지점은 여전히 대학 당국이 학생들이 타협할 수 없는, 혹은 하고 싶지 않은 부분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머지않아 평의원회에서 의결된 교원 징계규정안은 총장의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이수빈 씨는 교원 징계규정에 대해 ‘(피해자에 대한 정보 고지 등의 내용이) 피해자의 권리 부분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징계위원회의 권한 하에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밝혔다. 또한 결과를 알 수 있다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권리가 진술 방식이나 대리인 선임 절차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기술될 필요가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동시에, 학생이 피해자인 경우 학생의 권리에 대해서도 내용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도 문제라며, ‘앞으로 논의하겠다고는 하는데, (여전히) 학생들한테는 믿을 수 있는 약속이 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학교와 학생들의 온도차

 

총장의 인터뷰와 교원 징계규정안은 교원 징계규정을 명확히 하자, 또 서울대 인권 규범을 만들자며 같은 이야기를 했던 학교와 학생들이 갈라서는 지점을 보여준다.

학생들이 제대로 된 징계규정안을 마련하여 교수를 처벌하라고 요구한 것은 정직 12개월도 가능했으면 좋겠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또 권력형 성폭력 사안에서 징계 규정이 문제의 최종적 핵심에 있어서라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학생들은 교원 징계 규정안의 부재(학생의 징계 규정과는 대비되는)가 보여주는 교수권력과 불평등한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왔다. 다만 그 표현이 징계를 요구하고, 관련 규정에의 요구로 가장 먼저 드러났던 것은, 제대로 된 징계와 그를 위한 관련 규정 마련이 피해자 보호와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여서는 전혀 아니었다.

학생들이 정직 12개월이 아닌 파면을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3개월을 쉬든, 12개월을 쉬든 교수가 자신의 학생에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교수가 자신의 힘을 인식하는 이상 재발방지는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를 경험하는 학생들 중 정말 일부만이 모든 고난과 비난을 감수하면서 고발을 결심한다는 사실을, 교수들도 모를 수 없다. 따라서 결국에는 징계 규정을 잘 만드는 것으로 문제를 일단락하려 든다면, 학교 당국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는 면죄부를 얻을 뿐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대학 당국과 학생들의 대안과, 대안의 코드는 점차 차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은 관련 규정과 제도를 잘 만들고, 학교가 이 영역에서의 전문성을 갖추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즉 학교의 대안은 구성원들의 요구의 제도화이며, 그 코드는 전문성이다. 절차와 전문성을 강조하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는데, 우선 12개월 정직과 3개월 정직이 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언급했듯이,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를 제도화된 방침으로 해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에는 교수들이 가진 권력 자체를 조금 내려놓고, 대학 공간을 좀 더 민주적으로 바꿔나가는 움직임으로부터 자정이 싹틀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전문성은 대학 당국이 인정한 주체, 내용, 방식에만 권위, 때로 집행 권력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는 전문성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대학 당국이 판단하는 사람을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징계위원회에 학생들이 전문성이 없으므로 참여할 수 없다는 것도 결국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때의 전문성이 사건에 대한 인권 가치를 기반으로 한 해석능력과 그에 적절한 판단과 대응을 고민할 수 있는 역량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전문성은 지금껏 징계위원회에 참여했던 교수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모두가 전문성이 없다면, 같이 교육을 이수하고 연수를 듣는 식으로 함께 전문성을 구축하고 모두에게 참여의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는, 애초에 상황을 적절하게 해석하고, 판단하는 지식과 역량을 가지기 위해서는 권력자의 시선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들,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몸소 느끼고 있는 이의 말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있다. 학생과 소외된 구성원들은 폭력과 인권침해를 몸소 경험하면서, 교수라면 인식하지 못했을 상황에 이것은 문제다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안에서 전문성의 발휘는 약자들에 대한 청취를 핵심으로 한다.

이것이 바로 학생들이 징계위원회 학생참여를 요구하고, 학생이 직접 참여하여 학생 인권 보장을 위한 제도를 만들어 나가자고 한 이유다. 따라서 학생들의 코드인 민주성은 대학 당국이 바라는 전문성을 구축하기 위한 핵심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민주성에 기반한 전문성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공동으로 주어진 과제인 셈이다.

 

A교수 연구실을 학생 자치 공간으로!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학생들은 A교수의 연구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학생들은 피해자가 고소까지 하는 동안 처분을 내리지 못하는 학교의 결정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학생들의 입장문에서 다음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지금 A교수 사무실은 빈 방입니다. A교수가 없기 때문에 그의 사무실을 학생공간으로 바꾸는 것은 누구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A교수 사무실 학생공간 전환은 누구의 업무 공간을 뺏는 일도, 행정적 불편을 야기하지도 않는 평화로운 의사 표현 방법입니다. 징계위원회 내에서 의견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가장 평화롭게, 그럼에도 단호하게 우리의 의견을 표현할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서어서문학과 교수들과 학장단은 연구실 점거는 반지성적이라며 입장을 내놓았지만, 학생들의 입장을 듣고 보니 조금은 호들갑인 것 같았다. 학생들은 빈 방을 돌아가며 지켰고, 그곳에서 책을 읽고 담소를 나누었을 테다. 학생들의 일상적인 행동의 정치적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 공간이 바로 자신의 막대한 권력으로 성폭력과 인권침해를 일삼았던 교수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권력에 의해 가려지고, 사적 공간이라 가려지는 그 공간을 학생들이 물리적으로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권력에는 미세한 균열이 갔을 테다. 그리고 아마도 반지성적이라 말한 교수님들은 그 균열들이 두려웠던거 아닐까?

대학 바깥 세상에도 교수님들의 당혹스러운 입장문이 호들갑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학생들의 점거는 반지성적이라 교수들이 입장을 냈다는 기사마다, 사람들은 그럼 성폭력은 지성적인 행동인가요?’라는 댓글들이 수두룩했다.

 

나가며

 

사실 글을 써가고 다듬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사건들이 계속 생겨났다. 그래서 도통 언제 어디서 글을 맺어야 할지 고민하다 더 시간이 지나고, 다시 언제 글을 마무리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몇 차례 가졌다. 그러나 모든 내용을 담을 수 없고, 교지 출간을 무작정 미룰 수는 없기에, 급작스럽지만 여기서 멈춰본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즈음에는 학생들이 교수 연구실에서 나오게 되었다. 학교와 여러 차례 면담을 하고, 8월 말까지 징계 결과를 내놓을 것, 그리고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 징계위원 매뉴얼 제작, 징계위원회 운영 방침 개선을 포함한 사항을 합의하였다고 한다.

봄에서 여름까지, 어떤 사람은 불안한 기시감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기시감에도, 이번에도 흐지부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도, 학생들은 총회에 모였고, 그것으로 끝나지도 않았다. 징계 규정과 관련한 사항은 시작이라고 위에서 말했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데, 그 반을 학생들은 잘 해나가고 있다.

글을 급작스럽게 멈추는 다른 이유는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징계위원회 결과도 멀었고, 학교의 공동체 문화를 바꾸고 인권 규범을 만드는 일, 또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대한 논의는 거의 시작하지 못 했다. 아직 무언가 더 평가를 하고 규정을 해버리기엔 우리에게 남은 날들이 더 많다고 생각해서, 다음의 기록을 기약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 많은 남은 날들에 지칠 때면, 우리가 고이 햇볕에 말려두었던 우산을 찾아가듯이, 펼쳐볼 수 있는 글들이 되기를 바라며 무책임한 기록을 여기서 마친다.

 

 

귀한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1) 경향신문, ‘서울대 교수 성추행’…피해 학생이 기명 대자보로 비판,2019.2.8.
(2) 한겨레, 제자에게 “처녀는 부담되고 유부녀가 좋다”…밥 먹듯 성희롱한 서울대 교수들, 2019.3.4.
(3) 사회학과의 H교수는 지도 대학원생, 학부생, 학과 조교를 대상으로 한 상습적인 성희롱과 성추행, 폭언, 사적 업무지시로 2017년 3월, 인권센터에 고발됐으나 정직 3개월 만을 권고받았다. 이에 당초 문제를 제기한 사회학과 대학원생 대책위원회와 H교수 사건 해결을 위한 학생연대를 중심으로 한 학부생들이, 권고가 나온 2017년 6월 경부터 1년도 더 넘게 H교수 파면을 위한 투쟁을 이어나갔다. 
(4) 김영희, “오세정 "신속·엄정한 비리 대응이 관건…강력한 인권규범 제정하겠다"”, 한겨례, 2019.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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