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대 A교수 성폭력 사건 대응 투쟁의 기록
- 세 가지 시선
이물, 고슴도치뇽, 당근
글을 쓰려고 앉아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은 4월 2일, 5월 27일 같은 특정한 날짜나 시간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어떤 정서, 이 사건을 접하면서 가장 반복되어 이야기된 말들과 그것에 담겨있는 감정들이 머리를 맴돌았다.
기시감, 데자뷰. A교수 사건을 접한 학생들의 인상은 그런 것이었다. 지난 해 사회대 H교수 투쟁을 지나 온 서울대였기에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거듭 반복되는 성폭력이 어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교수-학생 권력 관계 속에서 구조적으로 일어나는 문제라고 분석했고,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머릿속이 조금 복잡했다. 우리는 정말 왜 이런 일이 반복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일까? 수많은 '알파벳' 뒤에 숨은 교수들을 우리들은 호명했고, 그러나 또다시 수많은 강단 앞에 선 교수들을 만나러 갔다. 그런 '몹쓸' 짓을 하는 교수들이 왜, 어떻게 그런 일을 벌이는지 분석하는 데에 우리는 단순하고 자극적인 범죄 서사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을까? 나는 교수들이 어떻게 집단을 형성하는지, 무엇을 하고 노는지, 공동체 윤리에 대한 고민과 실천을 어떻게 수행하는지, 학과 문화를 어떻게 주도하는지 여전히 잘 모른다. 풍문으로 들려오는 대학원생, 학부생의 경험담과 강의실에서의 수행을 거듭 비교하며 추측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정말 구조적인 문제라면 교수-학생 권력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해체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평소 마주치는 교수님들이 풍기는 불편함과 어려움 같은 것들을 우리는 감각하면서도, 그것을 마주보거나 맞서지는 못했다. 참 좋은 교수님도 많은데, 참 나쁜 교수님도 많구나. 그리하여 종국에는 이런 질문만 남고 만다. 아아 교수님, 당신은 왜 그러셨습니까?
놀랍게도 ‘어떤’ 학생들은 또다시 일어나 싸웠다. 하지만 나는 이 기시감들이 조금은 걱정이라고 생각했다. 싸움의 시작부터 피로를 느껴야 했지만, 그보다 다른 게 더 걱정이었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와중에, 우리는 그 일이 왜 계속 반복해서 일어나는지 다시 묻기를 어느새 멈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하게 늘 거기 있는 문제를 보는 것 마냥. 그러나 그것은 당연하지도, 늘 거기 있어서도 안 되는 것들이었다.
교수-학생 권력관계에 의해 일어난 권력형 성폭력. 우리는 이 명제를 얼마나 잘 해석하고 있을까. 교수-학생의 ‘권력’은, ‘성폭력’은, 어떻게 일어나고 해결될 수 있는가. 학생의 권리를 보장하는 교원징계규정 제정. 학생의 권리는 무엇이며, 징계규정은 ‘권력'과 ‘성폭력’을 해결하기 위한 선결, 혹은 충분조건인가.
우리는 이 글을 우리가 느끼는 기시감을 조금이나마 해석하기 위해 쓴다. 그리하여 그 기시감이 피로나 절망이 되지 않도록, 더 깊은 확신과 믿음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기록이라는 이름을 달았지만, 실은 자유롭고 무책임한 글의 형식을 가진 이유는 그만큼 글쓴이들이 자유롭고 무책임한 탓이다. 매일 매일이 급박하고 절실한 상황에서, 현장을 정확하고 빠르게 전달하는 날카로운 문장만을 좇다보면 무언가 놓칠 것만 같아서, 라는 변명을 덧붙여본다.
(+ 전체학생총회 당일과 전후로 이수빈 인문대 학생회장, 신귀혜 공명반 학생회장, 박성현 A특위 및 전체학생총회기획단원, 정주영 학우 외 익명의 학우들을 대면/서면으로 인터뷰했다. 이 글에 실린 인용은 모두 그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
#1 이물
나는 A교수 투쟁 조직(인문대 학생회나 A교수 사건대응을 위한 특별위원회 이하 A특위 등)에 직접 소속되지는 않은 제삼자이면서, 하필 학생 자치 경험은 좀 있어서 관심을 어느 정도 갖고 투쟁에 참여하는 주체이자, ‘당사자’로 호명된 인문대 학우 중 한 명이었다. 하는 일은 그렇게 많지 않으면서 할 말은 많은 귀찮은 포지션이랄까. 그래서 이 이야기는, 감각은 다소 대중적이라고 자부하고 입장은 투쟁적이라고 믿는 편향되고 아니꼬운 것들이다.
성폭력 사건이라는 것
내 인상에 남은 가장 오래된 시점의 장면은 피해자의 실명 대자보가 학내에 걸린 모습이다. 자보가 걸린 것은 2019년 2월 6일이었고, 나는 이를 아마 페이스북을 통해 가장 먼저 접했던 것 같다. 인문대 서어서문학과의 A교수가 꾸준히 피해자의 연구부터 사생활까지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려하고, 상습적 신체접촉을 비롯한 성폭력을 일삼았으며, 일련의 폭력을 거부하려 하면 졸업과 일자리를 걸고 협박했다는 내용이었다.(1)
피해자는 정직 3개월만을 선고한 인권센터의 결정을 비판하며, 더 이상의 피해자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며 그가 대학에서 사라지기를, 싸울 것을 선언하고 있었다. 여전히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낙인과 차별이 만연한 사회에서 본인의 이름을 걸고 싸우겠다는 피해자의 의지가 느껴져서 여전히 그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두 번째 장면은 3월 5일자 한겨레 기사였다.(2) 기사는 서어서문과의 문화가 평소에도 얼마나 위계적인지, 이번 사건에 대해 학과 교수들이 얼마나 미온적이고 나아가 피해자를 ‘학과를 음해하려는 세력’과 연관시키고 있는지 말해주었다. 인권센터 사건조사에 참여한 참고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서문과 교수들은 수시로 여학생들에게 성차별적 발언을 일삼았으며, 이를 양산하는 술자리를 두고 김창민 서문과 학과장은 ‘교실 밖에서 지혜가 왔다갔다’ 하는 자리였다고 언급했다. 그는 성차별적 발언은 농담이거나 반어적 표현이었고, 이 사건을 통해 ‘조력자 그룹’이 서문과를 음해하려고 하는 것 같다는 의구심이 든다고 말했다.
선명한 두 개의 장면은 사건의 구도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거듭되는 성폭력에 묵인하지 않고 싸움을 선택한 피해자, 그 목소리를 교수 집단 자신의 ‘무고함’과 피해자의 ‘불순함’으로 호도하려는 음모론의 대립. 언젠가부터 성폭력 사건은 경찰기관에 맡겨진 수사처럼 절차적 과정을 거치면 되는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그러나 성폭력을 발생시키는 젠더-권력이 존재하는 한, 그것은 언제나 첨예한 정치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성폭력을 양산/강화하는 공동체와 개인, 이에 맞서는 피해자와 연대라는 정치적 지형도가 흐릿하게나마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하지만 이를 선명하게 그려나가는 것은 모든 싸우는 사람들의 몫이다. 학생들의 반응은 복잡 미묘했다. 우리 학교에, 혹은 우리 과에 이런 나쁜 일이 있었다니, 하는 탄식과 야유가 개강의 설렘과 공존했던 3월의 어느 날들이 떠오른다. 종종 친구들은 A교수의 행위를 비웃고 욕했지만, 그 다음은 막연했다. 모두가 문제인 것 같다고는 생각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는 이상한 상황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투쟁의 시작과 그 방향
우리에게 어떤 선택지가 가능한지, 그 정치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은 결국 투쟁과 연대의 경험일 것이다. 사건이 공론화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3월 3일, A특위가 활동을 시작했다.
지난 사회대 H교수 투쟁의 기억과 경험(3) 덕분에 각 단위에서 사건 해결에 함께하거나 지지할 사람들은 꽤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 사건이 우선적으로 ‘인문대’의 일이었기에 인문대 단위의 주체성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는 시점이었음에도, 그간 학생회가 자주 사라지고 생기기를 반복한 인문대 학생사회가 대본부 투쟁을 완전히 주도하기는 좀 벅차보였다. 사건 초기 인문대 학생회가 사건 정리 카드뉴스를 제작, 배포하고 학생회장단이 입장문을 게시하는 등의 노력은 존재했지만, 단과대 운영위원회를 중심으로 꾸준한 투쟁 조직을 운영하는 것은 다소 무리였던 것 같다. 그렇게 생겨난 A특위는 기존 학생회 단위를 바탕으로 한 조직이기보다, 당장의 A교수 성폭력 사건을 해결하는 데 관심이 있는 학생들이 모인 것이 되었다.
상당히 빠른 시간 내에 투쟁 조직이 결성되고 대응을 시작한 것은 분명 긍정적이었지만, A특위는 태생적으로 자주 ‘정당성’이나 ‘대표성’ 문제를 지적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가지게 됐고, 동시에 투쟁의 의제와 방향을 대중 단위와 공유할 방안을 항상 고심해야 했다. 다시 말해 투쟁 의제가 학생들에게 다소 뜬금없다고 느껴지거나, 나도 모르게 어디선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 쉬운 조건이었다. 이런 난점은 이후 A교수 투쟁이 두 번의 총회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A특위는 활동 초기에는 A교수 사건 자체를 알리는 데에 집중했지만, 점차 요구의 핵심을 ‘파면’과 ‘교원징계규정’으로 강조했다. A교수를 파면할 것, 그리고 안전한 공동체를 위해 교원징계규정을 마련하고 그 안에 학생의 권리를 명시할 것.
“사실 전반부에는 A교수라는 사람이 있다라는 걸 알리는 게 가장 큰 문제였어요. (...) 두 번째는 제도적 측면으로 간 게 컸어요. 단식 이후로는 그게 컸는데. 기본적으로 학생이나 피해자가 제도적으로 보장받은 게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의식이었어요. 제도적으로 권리가 보장된다는 것, 명문화된다는 게 되게 중요하잖아요. 노동권이 헌법에 보장되어있는 것처럼, 학생의 권리라는 것이 피해자의 권리라는 것이 교원징계규정에 들어가야 어느 정도 우리가 권리를 보호받고 있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을 수 있다는 확신을 하고 넘어갈 거 같아서.” - 이수빈 인문대 학생회장 (인문계열 17학번)
교수의 성폭력이 많은 이들의 침묵 속에서 묻히거나, 늘 있는 그저 그런 사건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시되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를 갖는다. 여기 ‘여전히’ 성폭력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은 ‘언제나’ 문제라는 외침이며, 그에 대한 반성과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교수는 이 학교를 ‘떠나야’ 한다는 선언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들이 더 이상 막무가내로 버틸 수 없게 (강제로) 떠날 수 있는 제도적 경로를 마련하는 것, 그들을 떠나보내는 과정에서 학생의 권리가 있음을 분명히 선언하는 것 역시 의미가 있다. 당장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또 다른 피해자가 이처럼 지난한 싸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말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대학이라는 공동체를 안전하게 꾸려가는 데에 있어, 학생의 힘과 권리를 확인해나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폭력 사건의 근본적 해결책이 왜 ‘교원징계규정’으로 모여야만 했는지 따져볼 필요도 있었다. 성폭력이 애초에 일어나지 않으려면 더 많은 것이 필요할 것이다. 교원징계규정 자체는 성폭력이 왜 일어나는지를 겨냥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다. 법이 있고 처벌이 있다면 사람들이 눈치를 볼 것이고 교화될 것이라는 단순한 정치철학에 기대는 것이 아닌 한, 성폭력을 일으키는 관계와 권력, 공동체 문화 전반을 변형하고 바꿔내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권력형 성폭력’에 대한 지적이 담보해야하는, ‘권력’의 해체와 재구성은 어디에 있을까?
빨리 온 여름과 숨 막히는 시간들 –인문대 학생총회, 대표자 단식, 동맹휴업
그에 대한 뚜렷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로, 4월을 맞았다. 4월에는 인문대 학생총회가 있었다. 앞서 말했듯 거듭 대표성을 빌미로 학교와의 논의를 거부당하는 A특위 입장에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결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생각보다 더 꿈쩍 하지 않는 대학 본부, 거듭 비협조적으로 사건에 임하는 서어서문학과를 움직이게 하기 위해선 학우들의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저는 인문대 학생들이 기본적으로 지금 이 사건의 당사자라고 생각해요. 물론 서문과가 있지만 저는 인문대 학생회장이고, 학우들 사이의 여론은 어떻게 인문학 공동체에 이런 사람이 있냐는 거였고, 그런 저희의 의지를 학교에도 표명하고, A교수한테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너는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을 인문대학생이 직접 전달했다고 생각하고요. 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모아서 돌아오지 말라고 이야기를 한 거기 때문에.” - 이수빈 인문대 학생회장 (인문계열 17학번)
덕분에 4월 2일에는 (2012년 학과제 전환 대응 인문대 학생총회 이후) 거의 7, 8년만에 인문대 학생총회가 열렸다. 새터 이후로는 서로 얼굴 볼 일도 없던 인문대 학생들이 각자의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뜬금없는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인문대 학생총회가 ‘어떻게’ 열렸는지 잘 알지 못한다. 각자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다가, 한날한시에 광장에 나오기를 선택하기까지의 의지를 확인하는 방법이 내게는 없었다. 단위 대표자와 A특위의 홍보, 순회토론 덕에 총회가 성사될 수 있었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해방터를 지나가는 사람들, 함께 강의를 듣는 사람들 이상으로 인문대 공동체라 할 것이 이때까지 우리에게는 없었다. 그렇다고 총회의 결정 이후에 그 공동체가 완벽히 도래한 것 역시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나는 꽤 걱정이 되었다. 인문대 총회에서 서로를 확인했다면, 우리는 앞으로 서로 얼마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 간극을 좁혀가서 결국은 어떻게 공동의 문제의식을 성취해갈지 고민해야할 것이었다. 인문대 학생회가 총회를 준비하며 각 반을 돌며 순회토론을 진행했다지만 A교수 사건의 ‘성폭력’과 ‘교수 권력’에 대한 토론이 충분히 진행되었던 거 같지는 않다. 애초 제한적인 인원을 대상으로 한 일회성의 토론이 상시적 의사결정과 정보 공유의 통로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문대 학생총회가 적어도 논의의 시작이 되길 바랐다. 하지만 학교는 거듭 협상 테이블에 나오길 거부했고, A특위는 절박함으로 단식을 시작했다. 인문대 총회 다음 날 이수빈 인문대 학생회장이 단식을 시작했고, 그 뒤를 윤민정 A특위 공동대표와 신유림 서어서문과 학생회장이 이어나갔다. 4월 3일부터 단식을 넘겨받은 17일을 거쳐 27일까지, 무려 24일에 걸친 시간이었다.
“(전체학생총회를 선택한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는 거 같아요. 하나는 학교에 어떻게 계속 압박을 줄 것인가, 하는 문제고 두 번째는 어떻게 대표성을 표현할 것인가의 문제인데. A특위는 인학 중심으로 돌아가기도 했고 임의단체잖아요. 학우들이 만들라고 허락한 게 아니라, 사건대응을 하고 싶은 분들이 모여서 움직인 거라고 생각해요. 당사자성은 있지만.” (...) 단식을 한 이유는 학교에서 테이블에 나오라는 거였어요. 너희가 말을 듣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굶는다는 것을 밖에 보여주는 것이었고 그래서 학교가 테이블에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학교가 나와서 하는 말은 항상 총학생회가 와라, A특위가 뭐냐 너네와 대화하지 않겠다, 학우들의 전체의견이 맞냐 이런 이야기를 계속하거든요. 그런 부분을 보여주려는 것도 있었고. 단식으로 대화를 시작했으니 우리의 주장에 좀 더 대표성을 실어야겠다는 생각에. (총회 안건을) 총운위로 안올리고 학우들의 현장발의로 올린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이런 저희의 요구에 동의하신다면 총회에 함께해주세요, 라는.” - 이수빈 인문대 학생회장 (인문계열 17학번)
단식은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동조단식은 연일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식은 우리의 입을 스스로 닫게 한 효과도 있었다. 누군가의 희생 앞에 죄책감과 겸연쩍음, 지지와 기원 외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여지는 몇 가지 없었다. 또한 투쟁이 쉽게 타자화될 수 있었다. 대단한 몇몇이 A교수 파면을 위해 힘쓰고 있고, 나는 차마 그런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실은 그러고 싶지 않다는 상황이 연출되기 쉬웠다.
우리는 말하기보다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단식을 하는 사람, 그리고 수많은 동조단식자, 더 많은 단식하지 않는 사람, 들은 서로 이야기 나눌 수 없었는데, 그것은 일종의 죄책감이기도 하고, 긴장감이거나 진중함, 무안함과 머쓱함 같은 것들이었다.
앞선 인문대 학생회장의 인터뷰에서도 드러나듯, 단식은 길어지는 투쟁과 조용한 학내 분위기 속에서 요지부동한 학교를 움직이게 만들기 위해 부득이 선택한 전략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례를 무릅쓰고 말하면, 나는 우리의 힘이 학교에 가닿지 않는 이유를 우리의 논의와 결집 정도에서도 꾸준히 찾아야 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A교수 사건이 너무나 안타깝고 정말 그 교수가 파면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동의가 아니라,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심지어 교수를 비호하고 있는 이 썩어빠진 학교가 바뀌어야 한다는 치열함을 우리가 공감할 수 있다면, 아니 바로 그럴 때에야 학교는 움직이는 것 아닐까. 이 글의 시작에서 밝힌 선명한 대비를 더 부각해야 했던 것은 아닐까.
인문대 학생회장의 단식이 한창이던 4월 10일은 인문대 총회에서 결정한 동맹휴업의 날이었다. 문 앞에 붙은 동맹휴업 공지가 무색하게 곳곳의 강의실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동맹휴업으로 수업을 빠진 다음 날, 지난 시간 왜 결석했냐는 교수의 물음에 동맹휴업 때문이었다고 말한 나에게 돌아온 것은 묘한, 약간의 비웃음이 섞인 웃음이었다. 그 교수님은, 그리고 학교는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이어진 동맹휴업과 단식의 봄은 그래서 너무나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러워야하는 학교가 너무 조용했다. 조용한 속에 대표자들의 몸은 망가지고 있었고 본부는 반응하지 않았다. 성폭력을 저지른 A교수의 이름(알파벳)은 남았지만, 그가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는 말해지지 않았다. 그것을 비호하고 함께 수행했던 동료 교수들과 학과는 뒤로 물러나있었다. 우리는 또 다시, 사회대 H교수 투쟁이나 그 어떤 교수의 성폭력 사건처럼 이 사건도 끝나버리지 않을지, 그렇다면 정말 앞으로는 돌이키기 힘들지 않을지 두려워해야 했다.
총회를 향한 길
돌아보면 광장에는 언제나 기대 이상의 사람들이 모였었다. 하지만 그들은 일상 속에서 서로의 얼굴이나 생각을 확인할 길이 없었다. 더 큰 광장, 더 큰 총회에서 우리는 그것을 자연스레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일까?
몇 번의 단식과 면담 이후 A특위는 전체학생총회의 소집을 결의했다. 27일 총회 소집을 위한 연서를 시작했고, 하루 만에 1078명의 연서를 받아 총회를 소집할 요건을 충족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나는 이 폭발적인 관심이 분명 투쟁 주체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총회를 위한 A특위의 홍보, 의제 공론화의 노력은 다채로웠다. 당장 기억나는 것만 해도 행정관 벽면에 빔프로젝터를 쏴 요구안 알리기, 삐라 뿌리기, 점심시간 플래시몹, A교수 사건 모의고사 등이 있었다. 교원징계규정 개정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카드뉴스도 여러 번 제작해 배포했다.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학생들에게 더 쉽고, 다양하고, 선명하게 각인되도록 노력했던 것 같다. 다소 고전적인(?) 기자회견, 집회도 동시에 진행했다.
덕분에 당초 A특위가 목표로 했던 의제화도 어느 정도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건의 핵심은 교수-학생 간 성폭력, 갑질이 있었고 공론화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직 3개월이라는 가벼운 권고가 나왔다는 점, 학생이 피해자로써 얽혀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도에 참여할 수 없다는 점인 것 같아요. 학교라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요.” - 정주영 학우 (산업공학과 19학번)
하지만 여전히, 총회에 대한 기대 속에 우리에게 다시 물어야 할 질문들이 있었다. 우리는 얼마나 ‘성폭력’을 자각하고 있는지, ‘교수 권력’은 무엇인지, 그것을 규탄하는 ‘공동체’는 과연 누구인지.
총회, 단식, 그리고 더 큰 총회라는 긴박한 타임라인은 서로를 확인할 여유를 주지 않았다. 불안한 논의 기반 위에서 사건을 조준하기 위한 당위적 수사와 행위, 그 안에서 형성되는 도덕적 위계와 장벽들, 그리하여 결국 광장에 모였지만 연결되지 못하고 떠날 위기의 상황들.
물론 지금의 싸움이 앞선 질문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아주 많은 것을 해냈다. A교수 성폭력 사건을 문제제기한 피해자의 용기가, 이에 연대하여 투쟁을 수행한 주체들이 없었다면 이런 논의는 시작조차 될 수 없었다. 또한 그간 여성이라는 이유로, 학생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했던 사람들이, ‘성폭력이 문제’라고 외치는 것만으로도 ‘권력’의 비대칭적 지형을 자각하고 균열을 내는 시도이다. 그 노력을 수행하는 과정 속에서 ‘저항 공동체’가 자생적으로 형성될 수도 있었다.
시작부터 모든 걸 한 번에 성취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부족해 보이는 노력 속에도 핵심이 있다는 것을 안다. 다만 우리는 막연히 감각하고 있는 성폭력, 권력, 공동체를 구체화하고, 더 나은 방향을 치열하게 고민해가야 할 뿐이다.
“우리에게 당연하게 주어져야 하는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지를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이번 총회가 꼭 성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많이 떨리고, 아직까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서 조금은 불안하기도 합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 박성현 A특위, 전체학생총회 기획단원 (자유전공학부 19학번)
교수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가
사실 학생들이 투쟁을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교수들은 이렇다 할 행동을 하지 않았다. 학생들이 이렇게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음에도, 학교 당국과 교수들은 왜, 어떤 생각으로 버티고 있는 것일까?
다시 처음의 선명한 두 장면으로 되돌아가자. 성폭력을 고발하는 피해자를 두고, 교수 집단은 조력자 그룹 운운하며 학과가 음해당할 것을 걱정했다. 그들이 지키려는 학과 공동체, 혹은 ‘교권’은 기실 교수의 권리가 아니라 교수의 권위와 권력이다. 학벌과 능력주의 사회는 그들의 지적 권위에 사회경제적, 인격적, 정치적 권위를 부여한다. 현행 교육 체계는 교수에게 졸업장을 빌미로 학생에 대한 인신의 통제권을 허용한다. 성차별적 교육 기회와 학계 문화는 남성중심적 교수 사회를 유지, 강화하며 교수 집단의 놀이와 무리짓기에 여성혐오를 코드화한다.
“교수에 의한 인권침해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라는 말과 가장 유사하다고 생각해요. 여기저기서 풍문으로 목격담으로 주워듣는 것은 많지만 공론화되는 것은 새발의 피 정도이니까요. 그만큼 대학원/학계가 굉장히 위계적이고 성차별적이라는 이야기겠지요.
궁극적으로 안심하고 공부할 수 있는 학교, 부조리를 당당히 공론화할 수 있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번 총회에 상정된 제도개선뿐만 아니라 문화/관행까지 전부 뒤엎어야 한다고 봅니다. 관행을 만들어내는 권력은 여러가지 속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니까 결국은 여성주의 연령차별거부 등의 사회운동과도 뗄 수 없을 테니 학내외로 열심히 의제화하고 여러 운동세력들과 힘을 모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 신귀혜 공명반 학생회장 (국사학과 17학번)
사람 좋은 교수님을 떠올리기 전에, 우리는 교수의 전반적 탈권위화, 연구실 내 교수 권력의 해체, 남성중심적 교수 문화 타파를 위해 노력하는 교수가 있는지 떠올려야 할 것이다. 잘 떠오르지 않는 이유는, 그 권력들이 이미 아주 당연하게 자리 잡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더욱 더 말해내고 드러내야 한다.
#2 고슴도치뇽
작년에 이은 사회대 학생총회
5월 27일, 드디어 학생총회 당일이었다. 사회대 학생인 나는 6시에 열리는 사회대 학생총회에 먼저 갔다. 작년에 이어 사회대 학생총회의 안건으로 교수 성폭력 문제 해결 요구의 건이 올라왔다. 약간은 착잡했다. 우리는 작년 한 해 동안 사회학과 H교수 파면을 위해 싸웠다. 권력을 이용해서 갑질과 성폭력을 자행한 그에게 인권센터는 3개월 정직 선고를 내렸고, 우리는 천막 농성을 시작했다. 2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H교수 복귀반대선언도 하고, 20여 년 만에 단과대 학생총회를 열어서 권력형 성폭력/갑질 가해자 H교수 파면 요구의 건을 만장일치로 가결시켰다. H교수는 파면되지 않았고 징계위원회는 그에게 또다시 정직 3개월을 선고했지만 본부는 학생의견을 반영한 교원징계규정 신설을 약속했고 학부생-대학원생-인권센터-본부가 함께하는 인권연구팀이 꾸려졌다. 우리는 더디지만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또다시 같은 구호를 외쳐야 했다. 이번 총회의 1번 안건은 두 가지. 사회학과 H교수, 서어서문학과 A교수 파면과 학생참여 보장한 교원징계규정 제정이었다.
다만 그래도 나름의 희망이 있다고 느낀 것은 총회 안건의 미세한 차이였다. 작년의 우리는 교수-학생 간 권력 관계에 의한 성폭력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라고 본부에 요구했다면, 지금의 우리는 새로 만들어질 교원징계규정에 학생참여를 보장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징계위원회에 학생이 참여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 토론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권력형 성폭력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한 완전한 대책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학생 사회에서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한 선제적인 요구임은 확실하다. 안건은 재적 202명 중 찬성 194표, 압도적으로 가결되었다.
사회대에서 아크로폴리스로
우리는 다 같이 깃발을 들고 전체학생총회로 향했다. 총회 개회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사회대 대오를 큰 함성으로 맞이했다. 아크로폴리스에 모인 수많은 이들과 마주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모였다는 것에 벅찼다. 우리는 즐거웠다. 총회가 성사될 때까지 학생들은 희망을 노래했고 노래에 맞춰서 춤을 추었다.
7시 40분, 총회가 개회되었다. 많은 이들의 소망이 현실로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1800명이 넘는 학우들이 대학 내 권력형 성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였다. 우리가 모여 광장을 가득 메웠을 때의 벅참을 잊을 수 없다. A교수 투쟁이 길어지며 누군가는 무력감을, 누군가는 불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사람들은 각자의 일상을 살아갔다. 하지만 총회가 성사되는 순간,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느꼈다. 비록 그 존재들이 지속적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총회라는 자리에서만큼은 서로에게 의지했다. 혼자가 아니라고, 그 길을 함께하자고 말했다. ‘다시 만난 세계’를 부르는 학생들의 모습은 희망을 노래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각 단위의 깃발을 휘날리고 반의 구호를 고민했다. 서로의 외침은 서로의 가슴을 두드렸다. 많은 이들에게 총회는 분명 해방의 공간이었다.
총회 속의 사람들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다양한 참여자들을 만났다. 총회기획단으로 활동 중인 자율전공학부 19학번 박성현 씨는 “A특위 때부터 활동해온 사람으로서 우리의 노력이 헛되지 않았음을, 많은 학우분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가시적으로 증명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행사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것 같아요.”라며 총회가 성사된 소감을 이야기했다. 교육학과 학우 A 씨는 총회에 참여한 소감에 대해서 “많은 학생들이 힘을 모아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도 들고 직접 투표도 해보고 하니까 가슴 벅찬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공대 학우 B 씨는 “총회를 통해서 학생들의 말이 하나로 모이고 학교 측에 전달할 때 조금 더 공신력 있고 타당성 있게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학생 총회가 열렸을 때의 장점”이고, “지금까지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크게 반영되지 않았던 부분들이 총회를 통해서 더 반영되어서 앞으로 더 이상 피해자와 가해자가 등장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 날 총회에 올라온 논의안건은 세 가지였다. A교수 파면, 학생 인권 보장을 위한 제도적 개선, 요구안 실현을 위한 행동방안. 1안과 2안은 가결되었지만 3안은 의사정족수 미달로 의결되지 못하였으며, 9시 10분, 총회는 폐회했다. 총회가 끝난 후, 총학생회 운영위원회 논의를 통해 5월 30일 동맹휴업 및 거리행진이 후속 행동 방안으로 결정되었다. 인문대 학생회장 이수빈 씨는 “우선 30일에 있는 동맹휴업에 총력을 가할 것”이며, “지속성 있는 행동방안에 대해서도 A특위에서 논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후속 행동 방안이 결정되었기는 하지만 총회를 준비하는 이들은 총회 이후의 투쟁 방법에 대해 고민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자율전공학부 박성현 씨는 “총회라는 영향력 있는 방법 이후에 앞으로 어떻게 투쟁을 이어나가야할지 고민이 된다.”고 말했고, 공명반 학생회장 신귀혜 씨는 “총회 이후가 기말고사 기간이어서 얼마만큼의 동력이 나올지 잘 모르겠다.”며 우려를 표했다.
나의 존재가 하나의 가능성으로
이번 총회에서는 참신한 홍보 방안이 학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이스티 배부 사업, 각 단과대 맞춤형 플랑 등 총회 홍보를 위한 다양한 방안들이 많이 제시되었으며, 총회기획단은 학우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 노력 끝에, 총회는 성사되었고 많은 이들은 감격에 겨웠다. 총회는 학생사회 내에서 가장 큰 대표성을 가지는 의결기구이다. 학생사회의 총의를 모으고 행동 방안을 결정한다. 총회에 참석한 모든 이들은 한 명의 주체로서 표를 행사할 수 있고, 언제든지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모두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이다. 우리는 이렇게 민주주의를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만 아쉬웠던 부분도 있었다. 총회에 참여한 학우 A씨는 총회 개회시간이 두 시간 가량 늦어진 점이 아쉽다고 하였다. 과 카톡방에서 와달라고 요청하는 게 아니라 정말 참여할 의지가 있는 사람들이 모여 당당하게 의견을 표출하는 것이 총회의 참된 모습이라는 의견이었다.
발언에 대한 아쉬움을 표한 이들도 있었다. 총회에 참여한 학우 B씨는 “발언들이 생산적이고 실효성이 있다는 느낌보다는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내용을 반복한다거나 문제의식을 다시 짚는 내용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또한 학우 C씨는 “총회의 본래 의미가 사실 말 그대로 총의롤 모으는 것”이며 “발언도 많이 들어보고 집중력 있게 의제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정족수 채우는 것에만 집중하는 느낌”이 들었다며 더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어야 함을 지적했다.
안건에 대한 아쉬움도 있다. 한 참여자는 총회가 중도 폐회된 것에 아쉬움을 표하면서 “구체적인 안건 상정에 대한 소통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또한 “3번 안건의 총장 잔디 점거 안이 어정쩡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점거라는 것이 학교 행정을 방해하면서 뜻을 알리는 행위인데, 총장 잔디를 점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는 의견이었다.
우리는 계속 질문해야 한다
학우들은 더 활발한 토론을 원하고 있었다. 그들은 총회 성사를 넘어서, 여러 고민들이 교차되고 같이 대안을 상상하기를 소망했다. 우리는 교수 성폭력 사건에 대해서 더 질문해야 한다. 그들은 물론 학생의 인격을 모독했고 학문 공동체를 훼손했기에 합당한 징계를 받아야 한다. 다만 더 이상 권력형 성폭력이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성폭력 갑질 교수 파면보다 더 많은 것들을 논의해야 한다. 무엇이 교수의 권력을 만들었을까. 학문적 권위? 대학원생의 모호한 위치? 기업과 국가에서 사업을 따오는 관리자로서의 교수? 독점적인 논문 심사와 졸업 여부를 쥐고 있는 교수? 젠더권력? A교수 파면을 외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다시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교수의 권력을 만드는지를 묻고 그것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징계위 내 학생참여와 관련해서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더 토론되어야 한다. 교수-학생 권력관계로 일어난 사건에 대해 학생은 왜 징계의원으로 참여할까? 피해자가 학생이니까. 교수들로만 이루어진 징계위원회는 폐쇄적이니까. 직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하지만 학교에서 말하는 ‘전문성’에 대해서는? 본부는 항상 ‘전문성’ 이유를 들며 징계위원회 직접적인 학생 참여를 보류해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한다. 징계위원회 교수들이 갖고 있는 전문성은 무엇인가. 학생의 입장에서 전문성이란 무엇인가. 교수 사회 내의 ‘인권’과 학생 사회 내의 ‘인권’은 어떻게 다르며 학생 사회 내의 ‘인권’을 가장 잘 아는 이는 누구인가. 학생 사회 내의 성규범과 인권 침해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것이 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대변될 수 있는가. 인권이 존중되는 서울대학교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질문들에 답을 하며 우리는 징계위원회에 학생이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학생의 관점에서, 학생의 언어로 재구성해야 한다.
H교수 사건과 A교수 사건을 겪으며 서울대학교 내의 징계 결정 구조가 폐쇄적이고 비민주적이라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우리는 이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했고, 그 결과로 교원징계규정이 신설되었으며, 학생이 요구했던 피해자의 절차적 권리가 보장되었다. 또한 학부생-대학원생-인권센터-본부가 함께하는 인권연구팀이 꾸려져 ‘서울대학교 인권 개선 과제와 발전 방향: 학생 인권을 중심으로’라는 연구를 진행했다. 우리는 분명 변화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우리는 징계과정을 넘어 대학에서 학생이 평등한 주체로서 교육을 받기 위해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민주적인 학교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대학은 어떻게 운영되는지 우리는 알고 있나? 평등한 대학을 상상하며 지금의 대학에 계속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교육 목적, 교육 내용과 평가 방식, 교수-학생 문화, 생활공간, 대학 재정 운용 방식 등은 어떻게 결정되어야 할까?
#3 당근
내가 총회 이후 마주했던 최초의 장면은 총회 다음날 아크로폴리스에 나란히 놓여있던 우산이었다. 총회가 진행되던 시각에 비가 조금씩 오다 그쳐서, 많은 학생들이 우산을 들고 왔다가 두고 간 것 같았다. 총회 진행을 담당했던 친구가 우산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 기억나면 찾으러 오시겠지- 하고 예쁘게 정리해두었다고 했다.
어제의 흔적이 함께 썼던 우산으로 남아 있다는 게 든든하기도 하고 왠지 귀여워서 웃음이 설핏 나왔다. 기사를 쓰는 시점에서 총회 이후의 시간들을 정리하려다보니 계속 그 우산들이 떠올랐다. 눈물인지 웃음인지 모를 비를 맞으며 함께 했던 밤, 비에 젖어들고 싶지 않아 꺼내 썼던 우산, 어제의 그 우산이 햇볕 아래 가지런히 놓여있는 내일의 아크로 폴리스... 학생들은 어제의 그 우산을 떠올리고 다시 아크로에 돌아왔을까? 우산을 찾아갔을까? 그 우산은 햇볕에 보송보송 말라 있었을까? 아니면 햇볕이 미처 말리지 못한 부분에 물이 고여 퀴퀴한 냄새가 났을까? 이제 그 우산은 학교가 정리해 버렸나?
동맹휴업
동맹휴업은 총회 폐회 직후 아크로에서 열린 총학생회운영위원회를 통해 의결되었다. 동맹휴업은 총회 사흘 뒤인 목요일로 예정되었다.
총회가 끝나고 처음으로 어떤 행동을 보여주는 자리, 또 총회 한 번으로 학생들의 움직임이 끝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자리였기에, 그 날의 학교는 긴장감이 있어 보였다. 나는 학생들이 얼마나 모일지, 또 어떤 구호를 외치고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가 기대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다. 이 걱정은 동맹휴업 집회 5분 전 극대화 되었는데, 10분 전부터 찾아가 앉아있었는데 아무도 오지 않아서였다. 다행히 점차 사람들은 모였고, 대략 100여명 정도의 학생들이 동맹휴업 집회에 참여했고 서울대입구까지는 80명 정도 되는 학생들이 행진을 했었던 것 같다. (내가 대략적으로 세었던 것이라,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동맹휴업 집회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자신이 신입생이라고 한 학생의 발언이었다. 자신은 하루 수업을 빠지는 것이 참 쉽지 않았다고, 그래서 여기 있는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그렇지만 부당한 일에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잠깐이라도 왔다고. 그런 내용이었다. 이 발언을 듣고 동맹휴업은 총회가 우리에게 기억되는 방식, 남긴 것들을 다시금 확인하는 순간이구나, 싶었다. 이런 마음을 여러 차례 다시 확인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것이 총회 이후의 과제겠구나 싶기도 했다. 또 동맹휴업이 대부분의 낮 시간을 강의실에서 보내는 많은 학생들에게는 약간의 일탈과 해방감을 안겨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학교 건물들을 가로지르며 학생들이 불렀던 노래들 (이제는 대학 투쟁의 상징이 된,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와 ‘힘내’를 불렀다.), 어설프게 외쳤던 ‘8박자 구호’가 평소처럼 연구실과 강의실에서 시간을 보냈던 사람들에게까지 닿았기를 바라본다.
이후 서울대 입구까지의 행진은 솔직히 덥고 다리 아프다는 생각을 주로 하며 걸었고, 서울대 입구에서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같이 갔던 과 친구와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 공간을 행진과 구호로 어색하게 만드는 사람에서 다시 그 공간에서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기분이 좀 이상했다.
총회에 대한 구성원들의 지지와 연대는 동맹휴업이 아닌 다시 일상적 공간에서 느끼기도 했다. 총학생회로부터 메일을 받은 상당수의 교수님들이 휴강을 하거나, 출석체크를 하지 않거나 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의 의사를 존중해주셨다. 학생들의 움직임, 목소리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것 같은 다른 구성원들의 연대와 지지를 확인하는 것은 확실히 따뜻한 힘이 되는 것 같다.
또 동맹휴업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도 지지를 느꼈다. 신귀혜 씨(국사학과, 공명반 학생회장)는 동맹휴업에 대해 '사람들이 와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는 인상을 받았다'며, '(반에서도) 불참하는 사람들이 더 많기는 했지만, 불참 자체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 이후의 시간들...
그 이후의 일정 시간에 대해서는 개인적 기억은 거의 없다. 동맹휴업이라는 전술이 일회적이기도 했고, 그 이후 갑자기 찾아온 과제들, 시험들을 처리하느라 거의 한 달을 매일 도서관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도 그랬던 것 같다. 신귀혜 씨도 인터뷰에서 ‘총회와 동맹휴업 주간이 지나고 나니 시험기간이 닥치고, 종강하고 하니 분위기가 계속 이어지는 느낌은 아니었다’고 언급했다. 또 분위기가 단절된 것에 대해, ‘본부점거가 아닌 이상 일회적인 전술이라, 그 이후에 어떻게 할지를 총학에서 주도적으로 얘기를 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았다.’고 평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 가운데에서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소식들은 있다. 학생들이 총장이 참여하는 인문대 교수진 회의 장소 앞에서 피케팅을 진행하고, 총장에게 전체학생총회 결과지를 전달하자, 총장님이 ‘어 이거 봤는데...’라고 답해 분노를 샀다. 학교는 이전까지 학생들에게 ‘다른 학생들의 의견을 모아오라’고 했으면서, 정작 2000명의 학생들이 모여 전체학생총회를 열었는데도 공개적으로 입장을 전달하지도, 대표자 면담을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이미 봤다’는 답은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으면서 그저 무시하겠다는 것 아닌가? 아마도 이후 평의원회에서 통과될 교원 징계규정과 관련된 작업을 하고 있어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라, 사후적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통과된 징계규정은 여전히 학교 당국의 ‘선심’의 한계를 보여주었던 것 같다.
또 하나의 소식은 서울대민주화교수협의회의 교수님들이 본부에 입장을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학생들의 문제제기에 공감하며, 학생들이 공동체 문화를 회복하자고 먼저 손을 내밀었으므로 그에 책임을 느끼며, 1) 학교 의사결정과정에 학생을 포함한 구성원들이 참여할 수 있는 소통구조 2) 학생이 피해자인 경우 학생 대표가 징계위원회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와 절차 두 가지의 마련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어떤 스승들은 학생들의 목소리를 단지 치기어린 생각이 아닌, 진지한 요구와 문제제기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사실 이마저도 솔직히 늦었다고는 생각하긴 했다. 학생들은 몇 개월째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여러 명이 곡기를 끊기도 했다. 언론에서도 여러 번 심각하게 다루었는데도, 교수사회는 침묵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학생 2000여명이 모이고 행동을 이어나가자 이제는 교수 공동체도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하기는 어려우며, 문제의식에 통감하지 않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피해자의 귀환
그리고 방학을 앞두고, 피해자분이 돌아오셨다. 그러면서 국면이 확 달라졌다. 이수빈 씨(인문대 학생회장)는 피해자가 ‘학교가 자정할 줄 알고 학교(인권센터)에 신고’하였는데 그게 되지 않아 ‘검찰에 고소를 하고 법적 절차를 밟으려 하는 상황’이라 전했다. 따라서 학교에서 대응해왔던 학생들도, 피해자분의 귀국 이후 함께 기자회견 등을 통해 ‘이 사안을 사회에 알리고, 서울대가 자정이 안 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쌓’으려 했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에서는 학교를 제발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달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다. 교수들은 학업의 조건으로 학생들이 더 성실할 것을, 더 노력할 것을 말한다. 그러나 결국 학생들이 집중하기 어려운 것은 누구 때문인가?
학교 당국은 피해자가 돌아오자, 허둥지둥하며 뒤늦게 대응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이수빈 씨에 따르면 피해자가 귀국한 이후 가장 중요하게 ‘본부가 학생대표보다는 (피해 당사자와) 교섭을 많이 가지려 노력하고, 좀 더 이야기를 들어보려 노력’하고 있으며, ‘징계위원회에서 피해자가 한 번 진술할 수 있게 하겠다’는 취지의 답변도 보내왔다고 한다. 그럼에도 핵심적인 문제, 예를 들어 피해자에게 현재 인권센터 심의위원회 문서를 어떻게 판단했는지에 대해서는 거부하는 등의 한계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신귀혜 씨는 이 상황에 대해, ‘학생 천 명이 모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 반응이 없다가, 당사자가 와서야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학생을 학교에서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가 드러나서 무력감을 느꼈다’고 밝히기도 했다.
직접적 당사자가 아닌 이들에게, ‘네가 그 문제와 무슨 상관이 있냐’며 문제제기 하는 목소리를 막는 것은 참 어처구니가 없다. 총회에 참여했던 학생들은 당연히 이 사건의 피해자가 아니지만, 이 문제에 있어 누구보다 당사자인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적어도 학교 당국이 피해자의 등장에 여러 대응을 고민하는 모습은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 당국은 피해자의 존재를 부정하고 목소리를 의심하는 것이 더 이상 허용되지 않음을 인식한 것 같다. 적어도 학교 당국이 스스로를 해결의 주체로 인식하고 책임감을 느끼며, 공동체 문화 개선이든 어떤 것이든 재발방지를 위한 노력이 필요함을 통감했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존재는 절대 무시될 수 없고, 공동체 구성원 모두에게 피해 호소에 귀를 기울일 의무감이 있다는 것은 지금까지 싸워왔던 수많은 이들의 공이다. 미투를 통해, 그리고 그 이전부터 일상적이고 만연한 성폭력에 맞서 싸워왔던 여성들, 학교에서 권력형 성폭력에 대항하여 싸워온 많은 학생들의 공이다. 또 자신의 이름을 걸고 숨지 않고 당당하게 싸울 것을 선언한 피해당사자, 그리고 인문대 총회에 이어 학생총회까지 한 마음으로 움직인 학생들의 공이다.
학교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이 무렵 총장의 언론 인터뷰가 나왔다.(4) 총장에 도전한 이유, 취임 직후 당면했던 여러 상황이나 비전 등을 함께 묻는 인터뷰였고, 그 중 학생총회와 대응에 관해서 가장 먼저 다루어 졌다. 총장은 인터뷰에서 ‘답답하고 자괴감이 든다’며, 서울대가 공공적 목적을 가지는 기관인 만큼, 국민적 기대치를 인식하고 내부논리에만 함몰되지 않으며 문제해결을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성폭력 사안과 학생들의 요구에 있어서도 ‘피해자가 관련 정보 및 결과 확인 등을 요청하면 징계위 의결을 거쳐 고지하도록 추진 중’이라 밝혔는데, 특히 이에 대해서는 법적 논리로 반대하는 이들이 있지만 피해자의 알 권리라 여기기에 추진 중이라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치기도 했다. 또 서울대 공동체 전반에 인권 가치가 뿌리 내리도록, 강력한 처벌의 근거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인권규범을 제정, 선포하겠다고 밝혔다. 이 인터뷰를 읽으면서 총장으로 대표되는 학교 당국이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징계 과정에서 피해자의 권리에 있어서는, 내부의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돌파해나가겠다는 의지와 책임의식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총장은
‘학생들이 요구하는 학생대표는 법률상 불가능하다’며 선을 긋기도 했고, 이 지점은 여전히 대학 당국이 학생들이 타협할 수 없는, 혹은 하고 싶지 않은 부분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머지않아 평의원회에서 의결된 교원 징계규정안은 총장의 인터뷰 내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이수빈 씨는 교원 징계규정에 대해 ‘(피해자에 대한 정보 고지 등의 내용이) 피해자의 권리 부분에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징계위원회의 권한 하에 있’다는 것에 문제가 있다 밝혔다. 또한 결과를 알 수 있다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의 권리가 진술 방식이나 대리인 선임 절차 등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기술될 필요가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동시에, 학생이 피해자인 경우 학생의 권리에 대해서도 내용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도 문제라며, ‘앞으로 논의하겠다고는 하는데, (여전히) 학생들한테는 믿을 수 있는 약속이 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학교와 학생들의 온도차
총장의 인터뷰와 교원 징계규정안은 교원 징계규정을 명확히 하자, 또 서울대 인권 규범을 만들자며 같은 이야기를 했던 학교와 학생들이 갈라서는 지점을 보여준다.
학생들이 제대로 된 징계규정안을 마련하여 교수를 처벌하라고 요구한 것은 정직 12개월도 가능했으면 좋겠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또 권력형 성폭력 사안에서 징계 규정이 문제의 최종적 핵심에 있어서라 생각해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학생들은 교원 징계 규정안의 부재(학생의 징계 규정과는 대비되는)가 보여주는 교수권력과 불평등한 관계에 대한 문제제기를 해왔다. 다만 그 표현이 징계를 요구하고, 관련 규정에의 요구로 가장 먼저 드러났던 것은, 제대로 된 징계와 그를 위한 관련 규정 마련이 피해자 보호와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전부여서는 전혀 아니었다.
학생들이 정직 12개월이 아닌 파면을 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3개월을 쉬든, 12개월을 쉬든 교수가 자신의 학생에게 막강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고, 교수가 자신의 힘을 인식하는 이상 재발방지는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피해를 경험하는 학생들 중 정말 일부만이 모든 고난과 비난을 감수하면서 고발을 결심한다는 사실을, 교수들도 모를 수 없다. 따라서 결국에는 징계 규정을 잘 만드는 것으로 문제를 일단락하려 든다면, 학교 당국은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는 면죄부를 얻을 뿐이다.
이런 과정 속에서 대학 당국과 학생들의 대안과, 대안의 코드는 점차 차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대학은 관련 규정과 제도를 잘 만들고, 학교가 이 영역에서의 전문성을 갖추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즉 학교의 대안은 구성원들의 요구의 ‘제도화’이며, 그 코드는 ‘전문성’이다. 절차와 전문성을 강조하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는데, 우선 12개월 정직과 3개월 정직이 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언급했듯이,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를 제도화된 방침으로 해결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결국에는 교수들이 가진 권력 자체를 조금 내려놓고, 대학 공간을 좀 더 민주적으로 바꿔나가는 움직임으로부터 ‘자정’이 싹틀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전문성은 대학 당국이 인정한 주체, 내용, 방식에만 권위, 때로 집행 권력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이는 전문성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대학 당국이 판단하는 사람을 배제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징계위원회에 학생들이 전문성이 없으므로 참여할 수 없다는 것도 결국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때의 전문성이 사건에 대한 인권 가치를 기반으로 한 해석능력과 그에 적절한 판단과 대응을 고민할 수 있는 역량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전문성은 지금껏 징계위원회에 참여했던 교수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 같다. 어차피 모두가 전문성이 없다면, 같이 교육을 이수하고 연수를 듣는 식으로 함께 전문성을 구축하고 모두에게 참여의 기회를 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그리고 더 중요한 문제는, 애초에 상황을 적절하게 해석하고, 판단하는 지식과 역량을 가지기 위해서는 권력자의 시선에서는 보지 못하는 것들, 느끼지 못하는 것들을 몸소 느끼고 있는 이의 말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있다. 학생과 소외된 구성원들은 폭력과 인권침해를 몸소 경험하면서, 교수라면 인식하지 못했을 상황에 ‘이것은 문제다’라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안에서 전문성의 발휘는 약자들에 대한 청취를 핵심으로 한다.
이것이 바로 학생들이 징계위원회 학생참여를 요구하고, 학생이 직접 참여하여 학생 인권 보장을 위한 제도를 만들어 나가자고 한 이유다. 따라서 학생들의 코드인 민주성은 대학 당국이 바라는 전문성을 구축하기 위한 핵심 조건이라 할 수 있다. 민주성에 기반한 전문성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우리에게 공동으로 주어진 과제인 셈이다.
A교수 연구실을 학생 자치 공간으로!
여름 방학이 시작되고, 학생들은 A교수의 연구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학생들은 피해자가 고소까지 하는 동안 처분을 내리지 못하는 학교의 결정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학생들의 입장문에서 다음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지금 A교수 사무실은 빈 방입니다. A교수가 없기 때문에 그의 사무실을 학생공간으로 바꾸는 것은 누구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A교수 사무실 학생공간 전환은 누구의 업무 공간을 뺏는 일도, 행정적 불편을 야기하지도 않는 평화로운 의사 표현 방법입니다. … 징계위원회 내에서 의견을 표현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우리는 가장 평화롭게, 그럼에도 단호하게 우리의 의견을 표현할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서어서문학과 교수들과 학장단은 ‘연구실 점거는 반지성적’이라며 입장을 내놓았지만, 학생들의 입장을 듣고 보니 조금은 호들갑인 것 같았다. 학생들은 빈 방을 돌아가며 지켰고, 그곳에서 책을 읽고 담소를 나누었을 테다. 학생들의 일상적인 행동의 정치적 의미를 갖는 이유는, 그 공간이 바로 자신의 막대한 권력으로 성폭력과 인권침해를 일삼았던 교수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권력에 의해 가려지고, 사적 공간이라 가려지는 그 공간을 학생들이 물리적으로 점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권력에는 미세한 균열이 갔을 테다. 그리고 아마도 ‘반지성적’이라 말한 교수님들은 그 균열들이 두려웠던거 아닐까?
대학 바깥 세상에도 교수님들의 당혹스러운 입장문이 호들갑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학생들의 점거는 반지성적’이라 교수들이 입장을 냈다는 기사마다, 사람들은 ‘그럼 성폭력은 지성적인 행동인가요?’라는 댓글들이 수두룩했다.
나가며
사실 글을 써가고 다듬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사건들이 계속 생겨났다. 그래서 도통 언제 어디서 글을 맺어야 할지 고민하다 더 시간이 지나고, 다시 언제 글을 마무리해야 할지 고민하는 시간을 몇 차례 가졌다. 그러나 모든 내용을 담을 수 없고, 교지 출간을 무작정 미룰 수는 없기에, 급작스럽지만 여기서 멈춰본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즈음에는 학생들이 교수 연구실에서 나오게 되었다. 학교와 여러 차례 면담을 하고, 8월 말까지 징계 결과를 내놓을 것, 그리고 피해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내용, 징계위원 매뉴얼 제작, 징계위원회 운영 방침 개선을 포함한 사항을 합의하였다고 한다.
봄에서 여름까지, 어떤 사람은 불안한 기시감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무력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기시감에도, 이번에도 흐지부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도, 학생들은 총회에 모였고, 그것으로 끝나지도 않았다. 징계 규정과 관련한 사항은 시작이라고 위에서 말했다. 하지만 시작이 반이라고 하는데, 그 반을 학생들은 잘 해나가고 있다.
글을 급작스럽게 멈추는 다른 이유는 아직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징계위원회 결과도 멀었고, 학교의 공동체 문화를 바꾸고 인권 규범을 만드는 일, 또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대한 논의는 거의 시작하지 못 했다. 아직 무언가 더 평가를 하고 규정을 해버리기엔 우리에게 남은 날들이 더 많다고 생각해서, 다음의 기록을 기약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 많은 남은 날들에 지칠 때면, 우리가 고이 햇볕에 말려두었던 우산을 찾아가듯이, 펼쳐볼 수 있는 글들이 되기를 바라며 무책임한 기록을 여기서 마친다.
귀한 시간을 내어 인터뷰에 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1) 경향신문, ‘서울대 교수 성추행’…피해 학생이 기명 대자보로 비판,2019.2.8.
(2) 한겨레, 제자에게 “처녀는 부담되고 유부녀가 좋다”…밥 먹듯 성희롱한 서울대 교수들, 2019.3.4.
(3) 사회학과의 H교수는 지도 대학원생, 학부생, 학과 조교를 대상으로 한 상습적인 성희롱과 성추행, 폭언, 사적 업무지시로 2017년 3월, 인권센터에 고발됐으나 정직 3개월 만을 권고받았다. 이에 당초 문제를 제기한 사회학과 대학원생 대책위원회와 H교수 사건 해결을 위한 학생연대를 중심으로 한 학부생들이, 권고가 나온 2017년 6월 경부터 1년도 더 넘게 H교수 파면을 위한 투쟁을 이어나갔다.
(4) 김영희, “오세정 "신속·엄정한 비리 대응이 관건…강력한 인권규범 제정하겠다"”, 한겨례, 2019.06.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