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평등'은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충분조건일까?
조지프 피시킨, 『병목사회』 서평
아구몬
'기회의 평등'은 오늘날 가장 많이 호출되는 정치적 이상 중 하나일 것이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말 한 바 있다. 한편 최근 불거진 전 법무부장관 자녀의 각종 대입 부정 의혹은 많은 청년들로 하여금 울분을 토하게 했다. 유력한 부모의 밑에서 논문 등재, 인턴 경험, 표창장 등 대입과 취업 에서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주는 소위 ‘스펙’을 훨씬 수월하게 쌓을 수 있었다면 기회가 불평등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기회의 평등이 하나의 주목받는 이상이 된 이유는 이 개념이 흔히 상극으로 이해되는 자유와 평등을 교묘하게 조화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기회의 평등은 결과의 평등은 아니란 점에서 개인의 선택과 노력을 중시하는 한편, 순전한 운으로 인한 불평등은 해소하고자 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베짱이와 개미의 불평등은 인정하지만, 취약계층의 가난 세습은 인정하지 않고 사회이동성을 강조하는 개념인 것이다. 하지만 기회의 평등 개념이 정말로 정의로운 사회를 보장하는 요술방망이일까? 혹시 분배의 피라미드 구조는 지적하지 않고, 그 구조에서의 위치를 할당할 공정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개념 아닐까? 위 와 같은 물음에서 출발해 조지프 피시킨은 『병목사회』(유강은 역, 문예출판사. 2016)(1)에서 기회균등을 비판하고, ‘기회다원주의’라는 개념적 도구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의 여러 병목현상을 완화할 방법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기회균등은 애초에 달성 불가능한, 혹은 인간의 발달에 대해 오해하는 개념이다(1부 3장). 첫째로 가족의 문제는 기회균등의 실현을 가로막는다. 사회경제적 지위를 갖춘 부모는 자녀가 도전적인 커리어를 개발하려 할 때 금전적인 안전망을 제공해줄 수 있으며, 아무리 공정한 시합 규칙이 마련되어있더라도 이를 위한 준비를 철저히 시켜줄 수 있다. 또한 초기발달 단계의 자녀에게 더 폭넓은 언어 학습을 가능케 하며, 각종 인맥과 안전한 동네, 심지어는 교양있는 몸짓과 겉모습을 선물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의 자율성을 침해하고 공산사회처럼 공동육아를 하지 않는 이상, 공정한 시합 원리와 공정한 삶의 기회를 동시에 달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둘째로 인간의 어떤 특성은 유전적이거나 개인의 노력으로 인한 것으로, 다른 특성은 환경적인 것으로 분명하게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 발달과 성장은 반복적으로 환경과 역량, 목표 등이 상호작용하면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특히 조선시대의 어떤 영특한 사람이 물리학자가 되고자 하는 꿈을 꾸고 노력할 수는 없듯이, 노력과 목표는 서로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즉, 사람들의 노력은 그 환경에 크게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따라서 그는 기회 구조 자체를 살펴보고, 기회를 다원적으로 만들자고 주장한다(3부 1장). 단 하나의 가치 있는 커리어가 있고 이를 밟아나가기 위해서는 소수의 교육 기회(엘리트 대학)를 통과해야 하는 사회는 ‘병목사회’이고, 기회 구조 자체가 잘못된 사회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삶의 계획을 소수의 지위재(positional good)를 차지하기 위한 것으로만 수렴시키고 이를 위해서만 치열하게 경쟁하는 황량한 모습을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건강(예컨대, 미국의 건강보험 혜택은 수익성이 좋은 일자리를 갖춰야만 받을 수 있었다)과 가치있는 친밀한 관계 등 객관적으로 인간 행복에 기여하는 요소들을 달성하려면 위 좁은 통로를 통과해야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이런 병목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추구하는 목적과 그 목적을 달성할 방법을 다양하게 재구조화해야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병목을 완화하기 위해 인생 전반에 걸쳐 이를 통과할 우회로를 많이 만들어놓는다든지, 견해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이에 사람들이 폭넓게 노출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4부에서 그는 교육과 노동과 관련된 정책과 법의 영역에서의 전형적 병목들과, 어떻게 이를 해소할 수 있는지를 다룬다. 예컨대 미국은 상당한 돈이 없으면 비싼 의료비, 안전하지 않은 주거, 높은 교육비, 장기 실업시의 리스크 등으로 인해 행복의 기본형태 달성이 어렵다.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상당한 돈을 벌고자 하는 식으로 선호가 하나로 수렴하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의료보험-보육 등 다양한 종류의 사회보장이 필요하다. 인상적인 응용 사례 세 가지를 들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병목으로서의 대학이며, 직업 선택이 대학의 위신에 의존적이거나, 등록금이 비싸거나, 장학금이 업적기준으로 분배된다면 대학은 하나의 병목이 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대학 외적인 직업경로를 많이 만들고, 필요에 따른 장학금을 마련하며, 대학 입시와 관련해서는 비공식적 네트워크를 대체하기 위해 입시정보를 공개하거나 멘토링 통로를 확대하는 등의 방안이 필요하다. 둘째는 병목으로서의 성별이며, 전통적인 남성일자리(고된 업무로 여가시간이 부족한 일자리들)가 만연하다면 이는 각각의 성별에게 병목으로 작동한다. 남성은 완전한 부모의 역할에, 여성은 일자리에 진입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이런 이상적 노동자 상을 폐지할 정책들이 필요하다. 예컨대 직원당 고정비용은 줄이되 추가 노동 비용을 높임으로서 더 많은 직원들이 더 적은 시간 일하도록 하는 것, 유연한 근무시간과 재택근무를 널리 채택하는 것들이 일자리에서의 성별 병목 해소에 기여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최근 미국에서 제정되는 여러 차별금지법들을 검토한다. 고용주가 실직자, 전과자, 신용불량자를 제외한다는 공고를 못하게 하는 법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는 차별요소가 최종 결정에서 작용하는 것은 금지하지 못하지만, 초기에 일정한 장벽을 세우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에 병목의 해소에 기여한다.
정치철학이론은 항상 하나의 이상적 사회상을 염두에 둘 것이다. 피시킨이 그려내는 사회는 기존의 기회 평등 논의들과는 다른 그림을 그린다. 그의 그림은 피라미드 구조는 그대로 두고 사회적 이동성과 분배 정의를 강조하는 것(롤즈, 드워킨)이 아니고, 모든 이들에게 같은 액수의 종잣돈을 제공하는 것(방 파레이스 등의 기본소득론자들)도 아니다. 대신 피라미드 구조 자체를 허물어뜨리고 다원적 가치들의 그물망을 그려낸다. 즉, 개인들이 하나의 경쟁적 위치를 위해 경쟁하기보다는, 다양한 개별적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모습이고 이는 분명 매력적이다. 더불어 이 책은 ‘기회의 불평등을 넘어서기 위한 새로운 대안’(2)을 제시하기보다는 기회평등의 ‘보완책’을 제시하며, 자원의 분배와 관련된 문제는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보인다. 즉, 피시킨은 자원의 분배 문제가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지, 그것이 아예 의미 없음을 지적하는 아니다. 그럼에도 4부의 응용과 관련된 각종 공공정책의 소개는 정책적 사고에 필요한 ‘병목과 그 해소’라는 중요한 개념적 도구를 제시해준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근본적 정치철학 이론과 공적 정책 제안들 사이를 넘나드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1)원제는 Joseph Fishkin, Bottlenecks: A New Theory of Equal Opportunity. Oxford University Press. 2014.
(2) 출판사의 책 소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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