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는 알지만 하면 안 되는 청소년?!

로운맘



페미니스트 ‘선생님’보다 페미니스트 ‘동료’가 필요합니다.


2년 전 여름, 서울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만으로 학교에는 수많은 민원이 쇄도하고, 그 교사를 향한 악의적 공격이 퍼부어졌다. 이 사건 이후로 페미니즘 운동 진영에서는 ‘#우리에게는_페미니스트_선생님이_필요합니다’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다. 많은 사람이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을 자각하면서 이를 가르칠 수 있는 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의 입장은 조금 달랐다.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WeTee)는 <우리는 페미니스트 동료가 필요합니다>라는 논평을 작성하면서 페미니즘 교육의 필요성이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필요하다.”로 귀결되는 것에 의혹을 제기했다.


“페미니스트 선생님이 늘어나는 것만으로 페미니즘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페미니스트 선생님’만으로 학생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인권침해와 폭력이 해결될 수 있을까? ... (학생은) 교사에게 구원받는 대상이자 교육을 통해 바뀌어야 할 존재라는 생각을 넘어 학생이 페미니즘 교육을 요구하는 주체로 인식될 수 없는 걸까?”


이들은 일방적인 가르침을 전달하는 페미니스트 ‘교사’를 양성하는 것을 넘어서서 평등하게 페미니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페미니스트 ‘동료’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페미니스트 ‘교사’와 ‘동료’의 차이는 무엇일까? 왜 청소년들은 ‘교사’가 아니라 ‘동료’가 필요하다고 요구하는 것일까?

 


청소년의 섹스에 대한 페미니스트 진영 내부의 입장 차이


페미니스트 ‘교사’와 ‘동료’의 차이의 핵심은 권력 관계에 있는 듯하다. 더 정확히는 나이에서 생기는 권력과 위계이다. ‘교사’는 ‘동료’보다 학생들에게 더 권위적인 존재이며 평등한 관계에 서기 힘든 존재다. 바로 이것이 청소년들이 학교현장에 페미니스트 교육을 도입하자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그 방식은 페미니스트 ‘교사’보다는 ‘동료’로서 청소년들과 함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다. 학생들 역시 페미니즘 교육의 주체로 함께 설 수 있는 학교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위계를 허물고 서로가 서로에게 배울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며, 학교 내의 다양한 권력 관계를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바꾸지 않는 이상 페미니즘 교육은 없다고 말한다. 이들의 발화에서 페미니즘 운동과 교육에 있어서 청소년들이 성인과 동등한 위치에서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읽을 수 있다.

 

페미니즘 교육과 결을 같이 하는 성교육에 있어서도 청소년과 성인 사이에 이와 비슷한 긴장이 나타난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현재의 성 편향적이고 왜곡된 성인식을 담고 있는 성교육을 비판하며 대안적 성교육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위티(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는 지금까지의 성교육이 청소년의 성을 터부시하고, 보호라는 이름 아래 청소년들의 성을 억압하고 통제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입니다’라는 새로운 성교육 강연을 주최했다. 강연에서는 섹스는 ‘음란한 것’, ‘청소년이 접해서는 안 될 것’이라는 통념을 부수고, 포르노적 통념도, 어른들만의 전유물도 아닌 섹스에 대한 이야기, 성적 존재로서의 청소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 강연을 주최하자 위티는 몇몇 보수단체들에 의한 악의적인 민원과 비난에 시달렸다. 해당 강연이 ‘음란’함을 조장한다며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연사를 모욕하는 등 테러에 가까운 무분별한 비난에 대해 위티는 엄격하게 대응하겠다며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보수단체들만이 위티의 강연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일부 SNS의 페미니즘 진영에서도 위티의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입니다’ 강연에 대해 비판을 가하며 섹스를 ‘하는’ 청소년이 아니라 섹스를 ‘아는’ 청소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말인 즉슨 섹스를 하기 전에 섹스가 무엇인지, 섹스를 ‘함’에 있어서 뒤따라오는 여러 위험성과 문제들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입니다’라는 말에는 ‘청소년은 당연히 섹스해도 된다’는 의미가 포함되지만 이러한 말만으로 청소년의 섹스에 대한 여러 문제가 간편화될 수 없다. 또한 그렇게 되는 것은 굉장히 불편하고 위험한 일이다. 청소년의 무분별한 섹스를 허용하고 방임하게 되면 임신에 대한 위험 부담의 증가, 각종 낙인, 성병 등 여성에게 편향적으로 부과되는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청소년의 섹스는 법적으로도,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그런 말로 청소년을 성적으로 대상화하고 착취하는 성인들의 비윤리성까지 덮어버릴 수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청소년의 섹스를 무조건적으로 허용하기보다 섹스와 관련된 전반적인 지식과 실질적 문제들을 모두 아는 것이 먼저라는 주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필자 주변의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성인 여성들에게 “청소년의 섹스를 허용해야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을 때 다소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청소년은 아직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섹스를 허용한다면 성병, 임신 부담, 낙인 등에 대한 여러 문제를 충분히 숙고하고 고려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한 청소년들은 숙박업소 출입이 금지되어 있고, 학교에는 섹스에 대한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성교육이 부재한 상황이며 청소년 콘돔 구입이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음에도 이에 어려움을 겪는 등의 청소년이 안전하고 건강한 섹스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있지 않은 점을 근거로 들어 청소년의 섹스를 허용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한다. 현실적으로도 생각해보면 여성 청소년은 나이가 많은 성인 남성과 섹스하는 경우가 많은데 둘 사이에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젠더 권력뿐만 아니라 청소년과 성인 사이의 나이 권력도 작용한다. 두 가지 중첩된 권력 관계 속에서 사실상 청소년은 불리한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다.

 

신체적 성숙이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청소년기에 섹스를 하면 그 위험성이 더 크다는 지적도 있다. 뿐만 아니라 섹스를 자주 하면 질염에 걸릴 확률이 더 높아지며 이는 자칫 골반염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 청소년은 섹스를 하면 안 된다는 주장도 나온다. 실제로 존재하는 생물학적, 신체적 위험성 때문에 청소년의 섹스는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청소년들에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을 고려해볼 때 청소년이 안전하고 건강한 섹스를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가지며, 따라서 청소년의 섹스를 금지하는 것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차선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인 여성이라고 해서 현재 안전하고 건강한 섹스를 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 여성도 똑같이 성병, 임신 가능성, 여러 질병의 위험 부담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들 중 대부분 역시 학교에서 기존의 성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섹스와 관련된 전반적인 성 지식을 모두가 충분히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19살까지의 여성은 섹스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지만 1년이 지난 후에는 잘 알게 되는 것도 아니며, 20살이 된 여성은 안전하고 건강하고 자유롭게 섹스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성인 여성들도 남성과의 섹스에서 불평등한 젠더 권력이 작용하며 각종 위험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더욱이 신체적 성숙이 이루어지기 전의 섹스가 신체적으로 위험하다는 주장은 그 근거를 찾기 힘들뿐더러, 신체적 성숙 정도도 개인차가 크며, 일괄적으로 나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왜 청소년들에게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일까? 이런 차이가 ‘나이’에서 오는 것이라면 이러한 긴장은 나이주의적인 현상의 일종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인과 청소년 사이의 나이 차에 따라서 각각 다른 사회적 규범 및 역할을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이주의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나이가 많고 적음이라는 임의적인 요소가 불합리한 차별의 근거가 되는 데에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청소년의 섹스에 대한 두 입장 차이에서 나이주의적인 긴장이 발생하고 있지 않은지, 청소년들의 섹스를 바라보는 성인들에게 청소년은 비청소년보다 사고방식이나 믿음, 행동이 미성숙할 것이라는 의식이 한 편으로 자리잡고 있는지 다시금 돌아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의 섹스에 신체적, 생물학적 위험성의 문제가 바로 원천 금지로 이어져서도 안 되며 실질적으로 금지될 수도 없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성에 대해 청소년과 더불어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청소년이 섹스를 하는 존재, 문제를 인식하고 고민하고 해결해나갈 수 있는 자율적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나이주의를 극복하고 청소년의 성을 이해하기


청소년 성범죄를 다루는 데 있어서 언론은 계속해서 ‘어리고 잘 모르는 순진한 청소년들을 상대로 한 끔찍한 범죄’, ‘무력한 피해자’라는 전형적인 구도를 형성한다.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입니다’라는 문구를 본 사람들의 거센 항의는 남성중심적이고 폭력적, 자극적인 ‘포르노적 섹스’를 떠올렸기 때문이 크다. 많은 사람이 섹스에 대한 성 편향적이고 왜곡된 의식을 바탕으로 청소년들은 ‘그런’ 섹스를 하기엔 너무나 어리고 미성숙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청소년들의 성관계는 이미 중학생 나이대부터 이뤄지고 있다. 교육부 ·보건복지부·질병관리본부가 2018년 청소년 6만 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제14차 2018년 청소년 건강행태조사 통계에 따르면 성관계 시작 평균 연령은 만 13.6세였다. 성관계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청소년은 전체의 5.7%였다. 이미 우리 일상 속에서 섹스하는 청소년의 존재는 당연하고 명백하다. 무턱대고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청소년의 섹스를 금기시하고 터부시하는 것은 오히려 현존하는 섹스하는 청소년들이 처한 어려움을 가리게 된다. 대안이 항상 현실을 고려하여 상황과 맥락에 맞게 제시되어야 한다면 우리는 섹스를 하기 전에 먼저 알라는 말 대신, 이미 존재하고 있는 문제들을 정확히 직시하고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앞으로의 대안적 성교육을 논할 때도 앞서 섹스를 ‘하는’ 청소년이 대신 섹스를 ‘아는’ 청소년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기존의 성교육 역시 ‘아는’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은가? 남성의 신체, 여성의 신체가 어떻게 생겼고, 2차 성징은 무엇이며, 아이는 어떻게 생겨난다는 식의 성교육은 이미 너무 많이 해왔으며 무용하다. 이제는 성적인 존재인 청소년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논의해야 할 때이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대안적 성교육은 이런 것이어야 한다.


현 시점에서 우리는 청소년들의 성에 대해 안전하게 말할 수 있는 권리, 자신의 욕망과 감각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주체로 서는 청소년을 꿈꿔야 한다. 섹스에 대한 통념을 바꾸고 청소년들이 건강하고 안전한 섹스를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노력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청소년들이 성적 주체로 서서 스스로 원하는 바와 원하지 않는 바를 명확하게 알아차리게 하고 성적 자기 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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