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의 성과 성교육 : ‘누구’의 성인가?
BDUCK
# 들어가며 - 청소년에게 ‘성’이란?
“청소년에게 유해한 결과는 제외되었습니다. 만 19세 이상의 사용자는 성인인증을 통해 모든 결과를 볼 수 있습니다.”
필자가 ‘청소년과 성’을 주제로 교육저널에서 세미나를 준비할 때의 일이었다. 당시 필자는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은 만 18세였는데, 세미나 준비를 위해 성과 관련된 단어를 구글에 검색하기만 해도 위의 유해 차단 문구가 떠 몇 번이나 애를 먹어야 했다. 필자는 호기심에 ‘콘돔’, ‘성교육’ 등 성과 관련된 단어를 포함해 온갖 검색어를 입력해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성과 관련된 단어는 물론, ‘미인’, ‘코 교정’ 등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는 표제어까지 유해 검색결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닌가? 한 마디로 ‘원천차단’이었다. 구글뿐 아니라 네이버와 다음 등 다른 메이저 포털 사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포털 사이트는 성과 관련된 표제어를 청소년에게 유해한 결과라고 지정하고, 모든 검색 결과를 보려면 ‘성인’ 인증을 할 것을 요구한다. 성과 관련된 정보를 얻으려면 ‘성인’이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이며, 청소년들의 접근은 원천차단된다. 이 문구가 이번 논의의 시작점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해 검색결과 차단 문구에서 우리는 청소년에게 ‘성’이 어떠한 존재인지를 읽어낼 수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청소년’을, 또 ‘성’을 어떤 이미지로 그리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간단한 삼단 논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청소년은 유해한 결과를 접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성은 유해하다. 때문에 청소년은 성을 접해서는 안된다.
# 유해한 성, 소외되는 청소년
청소년들은 명백히 성에서 소외된다. 도입부에서 제기한 청소년 유해 검색 결과 차단 문구 외에도 우리 사회의 청소년의 성 소외를 보여주는 예시는 수없이 많다. 우리 사회에서 ‘성’은 금기의 존재로 간주되고 특히 그 대상이 청소년이라면 더욱 숨겨야 할 것이 되기 때문이다.
1. 청소년 구입 금지 물품 : 술, 담배, 그리고 ‘콘돔’?
우리나라는 청소년을 유해한 환경으로부터 보호ㆍ구제함으로써 청소년이 건전한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함을 목적으로 청소년 보호법을 시행하고 있다.(1) 때문에 청소년에게 유해하다고 생각되는 매체물이나 약물을 청소년이 접할 수 없도록 법적으로 규제한다. 대표적인 것이 술과 담배로 청소년에게 술과 담배를 팔면 판매자가 처벌을 받게 된다. 그런데 청소년이 살 수 없는, ‘유해’한 품목은 술과 담배 말고도 더 있다. 바로 ‘콘돔’이다.
지난 6월 5일 청주의 한 편의점에 종이 두 장이 붙었다. "만 19세 청소년에게는 절대 술, 담배, 콘돔을 판매하지 않겠다"는 경고문과 바로 옆에 "청소년 여러분 당당하게 콘돔을 구입하세요!"라고 반박하는 내용의 대자보다.(2) ‘콘돔’은 현행법상 성인용품으로 분류되지 않아 청소년의 구입을 제한할 어떠한 근거도 없다. 그러나 법리적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의 콘돔 구입에는 장애물과 장벽이 꽤 많다.
교육부·보건복지부·질병관리본부가 2018년 청소년 60,04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제14차(2018년) 청소년 건강행태조사 통계’에 따르면 성관계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청소년은 전체의 5.7%(3422명)였다. 성관계 시작 평균 연령은 만 13.6세로 조사됐다.그러나 청소년 성관계 경험자의 피임 실천율은 60퍼센트 정도에 불과했다.(3) 청소년들의 이른 성관계 연령과 피임 실천율이 말해주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절대 청소년이 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소년은 안전하게 성을 추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청소년이 안전하게 성을 추구할 수 없는 것에는 콘돔에의 접근성 제한의 영향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성년자가 책임질 수단을 막아버림으로써 우리 사회는 청소년을 성으로부터 소외시킨다.
콘돔을 살 수 있어도 특수형 콘돔은 살 수 없다는 것 역시 넌센스이다. 몇몇 판매자들은 구입을 제한하지만, 법리적으로 청소년이 일반형 콘돔을 사는 것은 문제가 없다. 그러나 여성가족부는 요철식 특수콘돔과 약물주입 콘돔(사정지연 콘돔)을 청소년 유해물건으로 지정하고 팔지 못하게 했다. 즉, 청소년은 콘돔을 살 수는 있어도 쾌락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청소년에게 콘돔을 팔지 않고, 팔더라도 특수형 콘돔을 팔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청소년을 무성적인 존재로 간주한다는 증거이다. 우리 사회는 청소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래, 백번 양보해서 섹스는 하게 해줄게. 대신 ‘즐겁게’ 섹스하는 건 안돼!”
2. sex toy = ‘성인’용품?
청소년에게 콘돔을 팔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콘돔이 ‘성인용품’이라는 인식이 만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성인용품’이라는 용어도 이상하지 않은가? 왜 ‘성인’ 용품인가?
자위행위를 포함한 성행위와 관련된 도구를 영어로는 sex toy라고 부른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성인’용품이다. 청소년 보호법에 의하면, 콘돔 정도를 제외하고는 자위기구와 러브젤 등의 성인용품은 청소년에게 판매할 수 없다. 때문에 ‘성인’용품이라는 단어는 매우 자연스러워 보인다. 성인용품은 청소년은 사용해서는 안 되는, 혹은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단정지어지는 것이다.
학교의 성교육은 청소년들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고 매우 강조한다. 하지만 어른들이 말하는 ‘성적 자기결정권’은 그저 수동적으로 자신의 몸을 지키는 맥락에 한정되어 있다. 정작 청소년들이 적극적으로 섹스를 하고 즐길 결정권은 부여하지 않는다. 성행위를 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은 성인들의 ‘특권’이고 성인용품은 성인들의 ‘전유물’이다. 또 중요한 것은 아무도 ‘성인’용품의 용어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성인’용품이란 용어는 청소년들이 성적 쾌락을 추구해서는 안된다는 우리 사회의 의식을 반영함과 동시에 나아가 이런 의식을 재생산한다.
3.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입니다.’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입니다’라는 문구를 본 보통 사람들의 1차적 반응은 무엇일까? 혹시 얼굴을 찌뿌리거나 불쾌해하는 것은 아닐까?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는 올해 <나는 섹스하는 청소년입니다>라는 제목의 강연을 추진하고 홍보했다. 이는 ‘포르노’나 ‘음란함’으로만 소비되어온 성 담론을 비판하고, 삶과 관계 맺으며 연속적으로 변모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성교육을 만들어가고자 기획한 강연이다. 그런데 이 강연을 두고 위티 대표 개인 연락처로 개인 및 단체의 수없이 많은 항의 전화와 문자가 이어졌다.
항의 문자가 가장 문제 삼는 것은 강연의 제목이다. ‘섹스하는 청소년’이 웬 말이냐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에게 청소년은 어른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이다. 청소년이 섹스를 하는 것은 청소년을 ‘망치는’ 길이며, 이를 가르치는 어른 역시 ‘개념 없는’ 어른이다. 이 항의 반응은 우리 사회가 청소년을, 또 성을 얼마나 보수적으로 규정하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예이다. 항의 문자를 보낸 자들은 제목을 이렇게 바꾸길 원하지 않을까? ‘나는 섹스하면 안 되는, 청소년입니다.’ 역설적으로 이런 격한 반응들 때문에 이 강연이 반드시 필요한 이유가 정당화될 수 있다. ‘나는 섹스합니다’라는 강연 제목부터 강연의 내용까지, 모든 것이 기존의 성담론과 청소년 담론에 정면적으로 맞서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티의 강연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반응인 항의 문자까지 포함하여 기존의 청소년 성 담론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 잘못된 성교육, 소외되는 청소년
청소년들의 성의 이미지를 규정하는 주체는 기득권 사회이고, 청소년들의 ‘성교육’을 담당하는 주체 역시 보수적인 우리 사회이다. 그러므로 청소년들이 ‘성’에서 소외되면 필연적으로 성교육에서도 소외될 수밖에 없다.
1. 비밀스럽고 비실용적인 성교육
사회에서 성교육을 ‘비밀’로 여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예시가 있다. 바로 넷플릭스 드라마 ‘오티스의 비밀상담소’이다. ‘오티스의 비밀상담소’는 성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오티스’에게 학우들이 성에 관한 상담을 하는 내용의 드라마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성적 내용을 담고 있어 성교육자료로도 활용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오티스의 비밀상담소’라는 한글 제목이다. 원제는 ‘sex education’으로, 우리말로 직역하면 ‘성교육’이다. 왜 성교육이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라는 이름으로 탈바꿈했는가? 알고 나면 너무도 이상한 이 제목은, 우리 사회가 성과 성교육을 ‘비밀’로 여긴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기존의 성교육이 성을 비밀스러운 것으로 접근하고 때문에 실용적이지 않다는 지적은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이는 성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기는 사회의 분위기와도 맞닿아있다. ‘성교육’에서 지겨울 정도로 등장하는 단골 소재는 난자와 정자 이야기, 임신과 출산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이다. 교육부는 2015년 배포한 ‘학교성교육표준안’은 기성세대가 청소년의 성을 바라보는 태도를 고스란히 드러냈다며 큰 비판을 받았다. 예컨대 여성의 성기를 내부기관만 설명해 성기를 생식기능에 한정하여 설명하고, 생식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성관계는 옳지 않은 것처럼 서술하는(4) 것이다. 성관계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생식뿐만이 아닌 쾌락 추구이지만 학교의 성교육은 이를 숨긴다. 또한 난자와 정자의 수정과정 등 지나치게 생식에 치중한 설명은 진부하고 실용적이지도 않다. 그나마 최근에는 콘돔의 실제 사용법 등 실용적인 성교육이 늘고 있는 추세지만, 아직까지 미비하다.
또한 생식에 관한 성교육을 한다 해도 진짜 필요한 내용은 가르치지 않는다. 예컨대 임신을 하고 나서 여성의 몸이 겪는 변화, 출산 과정과 주의해야 할 점은 임신을 대비해 꼭 알아야 할 정보임에도 불구하고 가르치지 않는다. 진정 생산적인 ‘교육’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이런 내용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이는 하기할 두 번째 문제점, 즉 여성 등 소수자의 입장에서 필요한 성교육이 부재하다는 점과도 맞닿아있다.
2. 소수자를 배제하는 성교육
비밀스럽고 비실용적인 성교육과 연관지어서, 이러한 문제가 일어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성교육 자체가 특정 집단 편향적인 시각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교육의 내용상 문제점으로 경시되어 왔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기존의 성교육에서 규정하는 ‘성’은, 남성 이성애자 중심의 편향적인 시선으로 소수자를 배제한다. 이러한 성교육이 큰 문제가 되는 이유는, 청소년이 소수자 당사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껏 계속 지적했지만, 우리가 ‘성교육’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는 임신과 출산, 성관계이다. 그리고 이는 전통적인 성교육의 내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도대체 왜 ‘성’은, ‘성교육’은 이런 내용만을 말해야 할까? 이는 ‘성’에 대한 고정적인 이미지가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포르노와 섹스를 연상한다. 무언가 정열적이고 부끄러운, 또 때론 폭력적인, 성행위와 관련된 것만을 연상한다. 그러나 이는 ‘성’의 전부가 아니다. 아니, ‘일부’일 뿐이다. 남성, 그 중에서도 남성 이성애자 중심의 편향적인 성이기 때문이다. 결국 비밀스럽고 비실용적인 성교육이 나타나는 이유가 이것이다.
현행 성교육은 명백히 소수자를 배제한다. 먼저 배제되는 소수자는 여성이다. 여성은 청소년만큼이나 성에 있어 수동적인 존재이다. 기존 남성 중심의 성은 폭력적인 포르노와 섹스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여성에게 진정 필요한 성교육의 내용이 될 수 없다. 앞서 지적한 임신 과정의 여성의 몸의 변화나 출산 과정이 성교육의 내용에 없는 이유도 이것이다. 임신과 출산을 다루는 내용일지라도 여성의 관점이 아닌 태아의 관점의 서술이 주였다. 여성에게 출산을 둘러싼 삶의 변화나 성병 등의 정보가 중요함에도 어떤 성교육도 이를 강조하지 않는다. 예컨대 성관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자궁경부암의 경우 예방접종과 질병에 관한 정보가 필요하지만, 어디서도 이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젠더 교육과 성차별적 관계에 대한 문제 또한 성교육 내용에 포함되지 않는다. 성은 생물학적 성(sex)과 성관계뿐만 아니라 gender도 포함한다. 하지만 올바른 젠더관념과 페미니즘 교육, 인권 교육은 기존의 성교육 내용에 포함되지 않는다.
또 다른 성교육에서 배제되는 소수자는 퀴어이다. 현행 성교육 내용은 철저히 ‘(시스젠더) 이성애자’ 중심이다. 기존의 전통적인 성교육에서 말하는 임신과 출산, 성관계 등 모든 내용의 전반은 철저히 퀴어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린다. 퀴어들의 입장에서 본 ‘성’의 이야기는 기존의 성교육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교과서는 여성과 남성과 두 가지 성만 다루며 이것이 영원히 바뀌지 않고 고정된 것처럼 서술한다. 이분법의 유일하고 항구적인 성만 나올 뿐 동성애자 뿐 아니라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젠더와 성애를 가지는 존재들은 무시된다. 하지만 퀴어의 성 역시 존중받아야 할 성이며 방식이 다를 뿐이라는 것이 필요하다. 소수자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멸시가 아닌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것이다. 현행 성교육이 바로 이러한 가장 무서운 성교육이다.
결국 성교육의 내용이 비밀스럽고 비실용적이라는 문제와 소수자를 배제한다는 문제 두 가지는 연결된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남성 이성애자 중심의 성편향적인 성교육은 여성과 퀴어를 소외시키며, 때문에 비밀스럽고 비실용적인 성교육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렇게 특정 집단 편향적인 성교육이 나타날수록 여성 청소년과 퀴어 청소년 등 소수자인 청소년만 더욱 설 자리가 없어진다.
3. 성교육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 청소년
한편으로 청소년의 성교육에는 내용상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성교육이 이루어지는 방식 역시 지적할 점이 있다. 바로 청소년은 성교육에 있어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기존의 성교육에서 청소년이 주체적으로 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기회는 전무하다. 그렇게 중요한 ‘입시’도 수동적인 주입식 교육인데, 입시에 필요도 없는 성교육이라면 어떠할까. 성교육 방식의 양상은 너무나도 뻔하다. 실제로 대다수의 학교의 성교육은 보건 시간에 끼어서 몇 시간만 하거나, 자율학습 시간에 강연으로 한 시간 때우는 식으로 진행된다. 성교육 전문 외부 강사를 초청한다고 해도 강의식 성교육이 주가 된다.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성을 이야기할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다.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성교육을 주장할 수도 없는 구조이다.
# 왜 청소년들은 소외되는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우리 사회는 청소년을 ‘성’과 ‘성교육’에서 소외시킨다. 청소년들이 올바른 성과 성교육을 접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청소년들은 소외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청소년’이기 때문에, 또 ‘성’이기 때문이다. 이는 결국 도입부에서 이야기한 삼단 논법의 두 전제이다. 첫 번째 전제는 ‘청소년은 유해한 결과를 접해서는 안된다’이고, 두 번째 전제는 ‘성은 유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두 전제 모두 틀렸다.
1. 보호담론
‘청소년은 유해한 결과를 접해서는 안된다’는 전제는 우리 사회의 청소년 보호담론과 연결된다. 앞서 살펴본 위티에 대한 항의 문자에서는 우리 사회가 청소년을 바라보는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누군가는 위티의 항의 문자는 극단적인 보수 세력의 의견 표출일 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어른들로부터 보호받아야 하는 미성년자’라는 청소년의 정의가 과연 보수집단만의 논리일까?
우리 사회는 기본적으로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본다. 물론 청소년이 성인에 비해 어느 정도 미성숙해 보호가 필요한 것은 맞다. 하지만 ‘보호’라는 좋은 포장지 속에 감추고 있는 것은 ‘통제’이다. 청소년의 성 소외의 기저에도 역시 이러한 비청소년 중심 사회가 행하는 보호라는 이름 하의 통제의 문제가 깔려있다. 청소년은 그들이 ‘청소년’이기 때문에 성에서 소외된다.
비청소년 중심의 기득권 사회는 청소년을 보호한답시고 그들을 사회의 일부분에서 ‘격리’시킨다. 노키즈존을 만들고, 청소년은 밤에 게임을 할 수 없게 하는 셧다운제를 시행하며, 유해한 검색 결과에서 차단시킨다. 이제껏 말해왔던 ‘성’과 ‘성교육’에서의 수많은 소외의 예시들 역시 이 보호담론에서 비롯된다. ‘보호’는 아주 그럴듯한 명분이 된다. “청소년은 성인에 비해 아직 판단력이 미숙하고, 경험이 부족하고, 그렇기 때문에 유해환경에 쉽게 물들 수 있고, 그러므로 사회는 약자인 청소년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논리는 흠잡을 데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보호’라는 말 속에는 결국 권력 관계가 존재한다. 보호자가 규정한 유해환경에서 피보호자를 원천차단, 격리함으로써 통제와 억압, 지배를 행하는 것이다.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동등한 주체로서의 권리를 행사하지 못한다면 이는 명백한 보호가 아닌 ‘박탈’이다. 또한 권리가 박탈된 채 성인들만 누릴 수 있는 것이라면 성을 추구할 권리는 성인들의 ‘전유물’이자 ‘특권’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청소년을 보호할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청소년들은 보호를 받더라도 객체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은 지배 관계 속에 종속된,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는 존재여서는 안된다. 청소년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방법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 청소년과 성인이 다름에도 동등하게 존중받을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결국 사회가 청소년들을 위해 결국 해야할 것은 단순한 ‘보호’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보호가 필요 없도록 불평등한 사회를 바꾸고 개선해 나아가는 것이 목적이 되어야 한다. 청소년들을 안전한 사회 속에 두고 싶다면 안전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한다. 성교육을 포함해 어떤 교육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선택할 기회들마저 박탈해서는 안된다. 청소년은 제대로 교육받고, 제대로 생각하며 또 제대로 선택할 수 있는 사회에서 살아야 한다.
2. 왜 성에서 ‘보호’되어야 하는가?
‘성은 유해하다’는 두 번째 전제에도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 성은 반드시 보호되어야 하는가? 보호담론 뿐 아닌 사회에서 전통적으로 성을 바라보는 시각이 결국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이다.
우리 사회에서 ‘성’이 가진 이미지는 곧 ‘섹스’이다. 성은 섹스와 동치된다. 그리고 이 섹스는 전통적 남성중심적 시각의 폭력적인 섹스의 이미지이다. 섹스와 성을 남성중심적인 자극적인 포르노와 혼동하다보니 성은 자연히 숨겨야 할 대상일 수밖에 없다. ‘성인 남성 이성애자’ 시각으로 바라본 ‘성’은 사회 구성원이 성을 수동적이고 낯부끄러운 것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이것이 결국 성교육의 내용 상의 문제의 원인이 된다. 비실용적이고 비밀스러운 성교육이 나오는 이유이자, 소수자를 배제하는 성교육이 나오는 이유이다.
보호의 논리는 성이 가진 전통적인 이미지를 고착화한다. 명시적인 성차별적 내용의 성교육, 비실용적인 성교육을 넘어 소수자를 배제하고 특정 집단 편향적인 사고방식을 사회에 주입한다. 보호의 논리는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청소년과 여성 등의 소수자를 객체로 만들고 남성중심적 권력과 사회를 공고화한다. 성을 금기시할수록 여전히 성의 주도권을 쥐는 계층은 기존의 기득권 계층인 이성애자 남성 계층일 수밖에 없다. 결국 ‘성은 유해해요!’ 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의 전통적 인식이자 이를 재생산함으로써 기득권 집단의 이익을 보장하는 수단인 것이다.
우리 사회는 성을 다르게 보고, 성교육을 다르게 할 필요가 있다. 성은 유해하기만 한 것이 아닌 포괄적 개념이기 때문에 절대 보호의 논리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 어쩌면 sex보다 더 중요한 gender와 성 소수자의 성은 기존의 성 담론에서 배제되기 일쑤였다. 그러나 사회의 젠더 인식과 젠더 갈등, 성소수자의 삶과 기존의 전통적인 성 담론에 대한 비판 역시 포괄적 ‘성’의 개념에 포함될 수 있다. 유네스코는 새로운 방식의 성교육을 포괄적 성교육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포괄적인 성교육에서는 ‘젠더교육’과 ‘인권교육’의 측면이 강조된다. 학생들은 스쿨미투 운동과 사회의 성 혐오범죄,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 등 젠더교육과 인권교육으로까지 확대된 성교육을 접해야 한다. 결국 소수자를 포용하고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방법은 이러한 체계적인 젠더교육과 인권교육의 성교육이 될 것이다.
# 나가며
보호 논리 하의 청소년의 성과 성교육을 통해 우리는 많은 통찰을 얻을 수 있다. 단순히 청소년에게 성을 금기시하고 성교육이 비실용적이라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 아니다. 청소년 성 소외 문제의 핵심은 사회의 전통적인 권력계층이 누구인지, 이들이 어떻게 성과 성교육에서까지 약한 집단을 배제하고 억압하는지와 연결되어 있다.
‘성인 이성애자 남성’ 중심적 시각의 성 속에서는 성 소외가 일어난다. 일련의 과정은 매우 자연스럽다. ‘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인 남성 이성애자 중심으로 바라본 이미지에 한정되어 있으며, 이러한 이미지의 고정은 비밀스럽고 비실용적인 성교육을 만든다. 시각의 한정은 보호라는 이름의 청소년 혐오와 소수자 배제를 덧씌운다. 결국 성에서 소외되고 피해를 보는 핵심 계층은 성인 이성애자 남성을 제외한 청소년들이 된다. 소수자를 배제하는 태도는 곧 청소년을 배제하는 태도이다. 청소년도 퀴어이며 여성일 수 있다는 청소년의 소수자성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결국 현행 성교육과 성을 바라보는 체제 하에서 가장 소외받는 것은 소수자 청소년들, 특히 퀴어인 여성 청소년이 될 수밖에 없다.
‘유해함으로부터의 보호’는 사회가 행해야 할 당위적 기능처럼 보이지만, 그 본질은 힘이 약한 소수자인 청소년일수록 사회로부터 격리시키고 소외시키는 것에 있다. 더 이상 전통적인 성과 성교육을 답습하며 이성애자 성인 남성 중심의 권력을 공고히하고 재생산하는 데 기여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회의 핵심 권력 계층이 누구인지, 이들의 논리가 어떻게 성을 통제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비판적인 성 담론을 수면 위로 이끌어내야 한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더 나은 성과 성교육을 꿈꾸어야 한다.
청소년이 주체적으로 성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젠더와 소수자들의 성 역시 성이라는 것이 주목 받을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대안적 성교육으로서 기존 성교육에 대한 비판적 논의까지 포함한 젠더교육과 인권교육을 하는 사회를 꿈꾼다. 이 과정에서 소수자가 배제되지 않기를, 청소년과 소수자가 성과 성교육의 주체로 설 수 있기를 꿈꾼다.
더 나은 성과 성교육 담론이 뒷받침된 사회는 어떠할까. 적어도 콘돔을 구입하지 못하는 청소년, 페미니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청소년,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성소수자 청소년은 현저히 적어질 것이다. 대신 여성과 성소수자의 성을 말하고, 데이트 폭력과 스쿨미투를 토론하는 청소년이 위치할 것이다.
(1) 청소년 보호법 제1장 제1조 목적
(2)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546455
(3) https://www.asiae.co.kr/article/2019030411380045071
(4)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8&aid=0004120681
'35호 - 계류중 > 기획 - 청소년 섹슈얼리티와 성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담] 우리의 성교육과 오티스의 Sex Education (0) | 2020.04.01 |
---|---|
[기획 - 청소년 섹슈얼리티와 성교육 ③] <성교육, 전체이용가> 방문기 (0) | 2020.03.30 |
[기획 - 청소년 섹슈얼리티와 성교육➁] 섹스는 알지만 하면 안 되는 청소년?! (0) | 2020.03.29 |
기획 - 청소년 섹슈얼리티와 성교육 소개글 (0) | 2020.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