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 2022 대학입시제도 개편안을 중심으로

딸기맥주

 

사진출처 : jtbc <스카이캐슬> 홈페이지



2019년 겨울, JTBC의 드라마 <스카이캐슬>"우리 예서, 서울의대 가야 돼",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어머님" 등의 유행어를 낳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서울의대'에 보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상류층 학부모들과 그에 맞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는) 서울의대 100% 합격률을 보장하는 입시 코디네이터가 나온다. 드라마는 매회 흥미진진했고, 입시경쟁으로 인한 청소년들의 불행을 그리며, 대학 학벌로 미래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했다. 작가는 <스카이캐슬>을 통해 지구는 둥근데 웬 피라미드냐며 피라미드 꼭대기에 닿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하며 불행한지를 말하고자 했던 것 같지만, 필자의 동생은 "저 드라마가 사교육을 더 조장할 것이다"라며 시청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으니, 실제로 입시 코디네이터 열풍이 불고, 각종 학원가에서 "전적으로 00학원을 믿으셔야 합니다"라는 유행어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현실의 청소년들은 드라마의 마지막 회처럼 쿨하게 명문고 집단 자퇴를 하고 행복을 찾아 배낭여행을 떠날 순 없기 때문이다. 입시경쟁에 매달리고 문제 하나 맞고 틀리는 것에 연연하며 짜증나 짜증난다고!”를 외치는 삶이 불행하다는 것을 몰라서 모두가 이러고 사는 것이 아니다. 평가에서의 등급이 대학을 결정하고, 노동시장에서의 내 등급을 결정하고, 받을 월급을 결정하고, 그렇게 내 삶을 옭아맨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사는 것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니들 위치야. 피라미드 어디에 있느냐라고. 밑바닥에 있으면 짓-눌리는 거고 정상에 있으면, 누리는 거야.”라는 말은 꼰대같은 아빠의 헛소리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렇다.

이번 호의 특집은 평가. 어딜가나 우리를 따라다니는 평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통제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보려고 했다. 중등교육에서의 평가, 대학에서의 학사관리엄정화와 대학 평가에 기반한 대학구조조정, 그리고 교사에 대한 평가까지. 그 중 첫 글인 중등교육의 평가에서는 내부 구성원들끼리 진행했던 세미나를 기반으로, 문재인 정부의 대학입시방안 개편과 평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했다.

 

 

 

Q. 자신의 학창시절, 시험과 수행평가에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노누 “한국지리 수행평가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제일 중요한 3학년 1학기 내신이었는데 제가 수행평가 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보는 도중에 여러 생각이 들면서 울어버렸어요. 행여나 1등급 하나라도 놓칠까 조마조마하던 때라서 머리도 하얘지고 무서웠거든요. 결국 100점 만점에 40점을 받았아요. 다른 친구들은 어려워도 70점대가 꽤 있었는데 말이에요. 다행히 기말고사로 만회했고 그게 정말 제 입시에 큰 영향을 미쳤나 싶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 끔찍했고 지금도 한국지리에 대해서는 약간 트라우마처럼 남아있어요.”

 

이물 "... 지구과학 수행평가 중에 주제발표를 하는 게 있었어요. 그런데 그 발표를 위해 스스로 실험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과한(?) 노력을 투자했던 기억이 나네요. 어렸을 때부터 과학고를 가고 싶다고 하면서 이런저런 과학 학원에 다녔던 터라 그런 열정이 나왔던 거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문과를 선택해 현재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여전히 과학에 대한 갈증이 많은데 문/이과가 구분된 이후로 접근성이 너무 높아진 거 같아 슬프네요."

 

익명이 “고등학교 1학년때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모의고사를 보고 나면 선생님들이 전교생의 점수랑 석차를 일렬로 나열한 표를 아이들한테 보여줬었던 게 기억이 나요. 전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못 봤네, 어떤 과목은 몇 등급이네, 이번 전교 1등은 누구네 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학교를 가기조차 무서웠어요. 그 땐 시험을 못 본 내 잘못이다라면서 저를 탓하고 수치스러워했죠..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들이 석차를 표로 만들고 아이들한테 보여주는 행위는 상당히 비인간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 표 안에서 우리들은 줄세워지고, 등급이나 석차로만 평가되고 분류되었던 건데..그래서 시험에 대한 두려움와 중압감은 더더욱 커졌던 기억이 남아요.”

 

딸기맥주 “저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끝나고 나서 서술형 평가 채점 결과를 보는 때가 제일 무서웠어요. 시험 본 날 채점했던 결과와 달라지기 일쑤였거든요. 영어에 s를 실수로 안 써서 그 문제 전체를 틀리기도 하고. 특히 어떤 과목은 딱 4명에게만 1등급을 줬는데, 그럴 때는 점수 1점 깎여서 5등이 되는 상상을 했어요. 어떤 친구들은 서술형 평가 결과를 보자마자 엉엉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나요. 아 그리고 수능, 저는 수능이 끝나고 나서 채점을 하기가 두려워서 5시간 동안 밖을 배회했어요. 눈앞이 캄캄하고 정말 끔찍하다고 느꼈어요.”

대부분의 교육저널 구성원들에게 평가의 경험은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비교적 평가에서의 승자라고도 불리는 서울대사람들임에도, 평가는 늘 무섭고 두려운 것으로 기억되었다. 크게는 수능에서부터, 중간·기말고사, 심지어는 내신 수행평가까지 말이다. 그 어떤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누구보다 못하고 잘했다는 비교에 괴로워하는 것이 학창시절의 일상이었다는 것에 모두 입을 모았다.

 

Q. 시험, 평가는 중요할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익명이 “시험이나 평가는 학생들 입장에서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것들임에 틀림없어요! 특히 우리나라 시험들은 고부담시험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그치만 요즘 임용고시 준비를 하면서 교육학을 공부하다가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시험이나 평가가 그 결과 자체가 아니라 학습 과정, 학생들의 성장, 목표 달성 여부로 초점을 옮겨간다면 시험에 대한 혐오감이 줄어들 것 같아요. 실제로도 저들이 더 중요하고요! 교사의 입장에서 학생 중심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선행지식, 목표달성 정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수업에 대한 성찰을 위해 학생들이 예상했던 목표를 얼만큼 달성했는지를 체크하는 것 역시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시험이랑 평가는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물론 평가 방식도 이에 따라 바뀌어야겠지만요!”

 

노누 “시험 평가가 중요하긴 한 것 같아요. 노력한 만큼에 대해서는 지표가 필요하고 그만큼 보상도 있으면 좋잖아요. 근데 그 평가가 담고 있는게 그 시험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상관 없는 것들 혹은 관계가 없는데 그렇게 보이는 것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 더 부담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험에서는 무엇보다 무엇을 평가하고 있는지 확실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물 "시험이나 평가는 학습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재학습의 방향을 알려주고 그것을 자극해주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학습자를 재단하고 학습의욕을 떨어트리기만 한다면 좋은 평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은 서열을 매기기 위해, 학습자를 평가 점수 바로 그곳에 정박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거 같습니다. "

 

당근 “평가가 중요한 이유는 학습상태를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운동을 하거나 건강증진을 꾀할 때 건강검진이나 인바디로 현 상태를 확인하고, 설문으로 원인을 파악하고, 의사나 전문가와의 면담을 통해서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찾는 것과 똑같은 것이죠. 학습 전에 진단평가를 하고, 학습 중간에는 형성평가를 하고, 마지막에는 학습 결과를 평가(용어가 기억이 안 나는군요)하며, 스스로의 상태와 어떻게 성장했는지,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다만 평가가 긍정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첫째, 평가가 학습 상태를 넘어 인격에 대한 평가가 되지 않고, 둘째, 수치화된 단순 정보를 넘어 구체적인 사례, 주관적인 분석과 장단점에 대한 균형 있는 기술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학창시절, 우리는 (물론 대학생이 된 지금도) “아 대체 시험은 왜 봐야 하는 거야!”하고 외치곤 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털어놓은 것처럼, 우리의 평가의 경험은 대체로 유쾌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평가 자체가 문제인 걸까? 교육저널 구성원들은 그건 아니다라고 답했다. 평가는 학습자의 성장을 점검하기 위해 필요하고 다음 단계의 배움을 위한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불행하게 했던 것들은 평가가 아니라, 오히려 평가가 평가답게 작용하지 못했던 상황들 때문이며 평가가 학습을 위한 긍정적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Q. 최근 모 고등학교의 시험지 유출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노누 “솔직히 처음 기사를 봤을 때 저는 친구들이랑 같은 학교 다녔던 애들이 불쌍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다시 시험을 봐야 하고 입시에 지장을 줄 게 뻔하니까요. 그 쌍둥이들이 피해자일 거라고 바로 생각은 못한 것이죠. 그래서 기사를 보고 우선 뒷통수가 맞는 기분이었고요 ㅎㅎ 반성을 잠시 하면서도 씁쓸했어요.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했냐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그렇게까지 하게 떠밀었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지. 이것이 바람직한지 먼저 질문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딸기맥주 “이 뉴스로 2018년이 한창 시끄러웠잖아요. 약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싶으면서도 일어날 일이 일어났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솔직히 시험 등급이 앞으로의 인생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 상황에서 양심이나 도덕을 먼저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냥 평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 준 사건이라고도 생각해요. 내가 얼마나 알고 있나, 어떤 지점에서 더 노력해야 할까 등의 생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냥 점수에 따른 선발, 배제와 소외만이 평가라는 걸.”

 

이물 "해당 시험에 대해서는 공정성을 해치는 윤리적 잘못을 했다고 생각해요. 같이 힘들어야만 했던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를 준 것이겠죠. 다만, 그 공정성이라는 것은 절대 철칙이 아니고, 모두가 강제 당한 시험이라는 룰 안에서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학생이 시험을 통해 차등적 성적을 부여받고, 그것으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 받는 사회가 아니었다면, 학생이 문제집 뒷면의 답지를 보든, 친구 것을 베껴 쓰든,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심지어 때로는 답지를 보거나 다른 답을 베껴쓰는 것이 학습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데요. 왜 우리는 그런 상황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언제까지 학생들은 강압적인 입시제도에 가만히 순응하며 남들 위에 서는 법을 배워야 하고, 모든 방식을 동원해서 서로의 아픔을 무시하고 찍어 누르며 살아남아야 할까요?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이 CCTV 뿐이라면 해결은 요원할 것 같습니다. "

 

세미나 때 본 기사에서, 한 청소년은 "쉽게 욕할 수 없을 거 같아요. 그 친구들을 그렇게 만든 게 있을 텐데, 그 위에 있는 구조라는 게 존재할 텐데, 그걸 이야기하지 않고 그 친구들을 함부로 욕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한테도 그런 유혹이 온다면 쉽게 뿌리치기 어려울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기사를 함께 보며, 교육저널 구성원들은 이 의견에 크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해당 사건의 당사자들을 비난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는 이번 사건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결국, 대학 서열화와 입시경쟁이 인간을 어떤 선택으로까지 밀어 넣는지를 직시하고, 이 근본 구조에 대해서 논해야 한다는 곳으로 의견이 수렴되었다.

 

Q. 대학입시제도 개편을 두고 일어났던 수능 비율 확대 vs 학종의 대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노누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수능이 공정한 평가제도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게다가 졸업 이후에 모의고사나 수능의 방향이나 난이도를 보면 무엇을 평가하고 싶은지 궁금할 정도로 문제가 난해해졌고 이걸로 학생들의 어떤 방향을 성장시키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비약하자면 한 줄로 세워서 엿가락 썰듯이 일정하게 잘라서 어느 대학은 앞에 선 학생을, 어떤 학생은 그 다음 학생 무리를 데려가는 식으로 입시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과연 대학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하고 원하는 인재상을 반영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고 학생부 종합전형이 바람직하냐고 한다면 그것도 폐해가 경험적으로도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근 “저는 둘 중 어느것도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시 비중 확대라는 주장이 어떤 심정에서 나왔는지에는 공감이 되었어요. 수능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외부에서 개입할 수 없는 객관적인 시험이니 공평하다는 것과 더불어, 오랫동안 시행되다 보니, 또 여러가지 방법론이나 정보가 (학종에 비해서는) 많이 공유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같아요. 반면 학종의 경우에는 학생부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자기소개서는 어떻게 쓰고 면접은 어떻게 대비하는지에 관한 정보가 계층별, 지역별로 굉장히 불균등하게 분포되어있고, 체감도도 굉장히 높은 것 같아요. 전형이 다양하다는 것 자체도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입시 정보에 대한 접근 장벽을 높이는 것 같기도 하구요. 하지만 한편 저는 수능 시험장에 갔을 때 오늘 하루로 지금까지의 삶이 결정된다는 중압감에 너무 힘들었고, 끝나고도 너무 허탈했는데, 하나의 획일화된 시험으로 한 사람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매우 부당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물 "수능과 학생부 종합 (수시)의 비율이 대입의 근본 해결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택하든 입시를 위한 도구적 평가가 될 뿐, 학생 자체를 제대로 평가하고 더 나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추동해주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학생부 종합전형입니다. 특정한 논리력과 사고력을 요구하는 수능과는 달리, 다양한 능력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종이 사실상 스펙을 많이 쌓아야하는 전형이 되고, 오히려 필요한 사교육이 늘어나 교육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지적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는 대학별 평가 기준이나 학교별 평가 과정을 통제하면 보완이 가능할 것입니다. 휘황찬란한 양적 지표에만 의존하는 것을 멈추고, 글쓰기, 책읽기, 연구 기획과 같은 기초 교양의 영역을 가르치는 과정을 보편화하고 이를 평가할 기준을 만든다면 대학 입시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다양화, 보편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2018, 문재인 정부가 ‘2022 대학입시제도 개편안을 논의하고 발표하면서 수시 vs 정시 비율, 수능 절대평가 여부 등이 큰 화제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교육부는 정시 수능 위주 전형 비율을 30% 이상으로 확대하도록 대학에 권고했고, 수능 평가 방식은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이러한 논의는 보통 수능이 낫냐 학종이 낫냐의 대결로 흘러간다. 그러나 교육저널 구성원들은 논의를 하면서 그나마 이 방식이 낫지만, 실상 어느 쪽에도 손을 들기 힘들다고 말했다.

 

수능의 경우는 보다 공정하다고 보통 여겨지지만, 결국 사교육의 수혜를 받은 이들에게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또한, 하루만에 치러지는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수험생들에게 주어지는 압박은 엄청나며, 학교는 획일화된 문제풀이 훈련공장으로 전락한다. 한편, 학생부 종합평가 전형은 과정 전체를 두루 본다는 점에서 보다 교육적일 것이라는 취지로 도입되었으나, 학생부를 작성하는 교사의 권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문제, 활동과 학생부 관리에 대한 정보 불평등의 문제 등이 발생하고 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낫냐의 논의로 흐르게 되면, 우리에게 대안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혹은 둘 중이 아니라도, 어떤 더 나은 취지의 대학입시제도 방법을 찾는다고 해도 결국은 비슷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대학이 계속 서열화되어 있고, 학벌이 여전히 삶을 결정하는 한, 어떤 평가도 공정하거나 평등해질 수 없으며 교육적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없다.

 

Q. 대학입시제도 개편안에서 2안이 주장했던 것이 수능 절대평가의 도입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지금도 영어와 한국사는 절대평가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절대평가로의 변화는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평가 방식은 무엇일까요?

 

익명이 “교육부가 수능 영어 절대 평가를 도입한 지 몇 년이 지났습니다. 상대평가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함이라는 취지를 내건 교육부는 학습 무의미한 경쟁과 학습 부담을 경감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저도 어느 정도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절대평가 방식에도 전혀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절대평가방식을 도입한 2018년도 수능 영어 1등급 비율은 10.03%이었는데, 이번 2019학년도 수능에서는 5.30%1등급 비율이 확 줄었습니다. 이렇게 1등급 비율이 널을 뛰는 원인에 대해 평가원은 난이도 조절 실패가 아니라 학생들의 학습 준비도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평가원의 이런 설명은 책임 회피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절대평가방식을 도입한 이상 매년 비슷한 난이도로 출제되지 않는다면 학생들에게 수능 영어는 운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점수 경쟁을 완화하고 학습 부담을 줄이겠다는 절대평가의 도입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상대평가방식을 적용했을 때 1등급 비율이 4%였는데 절대평가를 도입한 이후에도 5% 남짓한다는 것은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절대평가 방식을 도입하는 데에만 그치지 말고, 난이도 조정, 평가 내용, 최저 성취 기준을 선정하는 데 교육부와 평가원은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노누 “그렇다고 어떤 평가 방식이 가장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고 명쾌하게 내려진 답은 없습니다. 학생이 기울인 노력을 평가할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이 있으면 좋겠지만 말이죠. 우선 존재하는 대안은 절대평가인데 우선 학생들의 학업 부담은 확실히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만 절대평가 역시 점수대 기준끼리의 상대평가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명쾌하진 않은 것 같아요. 어떻게 하든 평가가 학생들의 부담을 아예 없앨 수 없다면 개선할 노력을 해야 하고 더 나은 방향을 끊임없이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생 스스로가 자신을 평가하는 방법도 좋다고 생각해요. 신뢰성은 떨어질지 몰라도 학생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꽤 잘 알고 있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딸기맥주 “저는 저 기사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더 이상 성적으로 줄 세우는 방식에 얽매여 다수 학생을 좌절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치열한 경쟁과 줄 세우는 학교 수업보다 다양한 소질과 적성, 배움이 실현되는 학교 수업이 가능해진다.’ 2안은 학교 수업을 문제풀이 시간으로 만드는 수능의 위상 강화를 경계한다. 수능 평가 방식을 전 과목 절대평가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라는 말이 크게 공감이 갔어요. 절대평가는 기본적으로 수업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능특강, 수능완성 문제 풀이가 아니라 토론이나, 활동을 해볼 수도 있고, 더 다양한 배움이 가능해질 거라고 믿어요.

다만, 현재의 절대평가처럼 여전히 결과의 서열화, 변별하고 가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절대평가가 운영된다면 그건 그냥 명칭만 바꾸는 꼼수에 불과하겠죠. 절대평가로의 전환이라는 의미는 서열체제 완화와 폐기라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방향으로의 전환이 이뤄지면서 결국에는 일상적 평가는 개개인의 기존 학습수준보다 어떤 부분이 나아졌는지, 어떤 부분의 이해가 부족한지 알 수 있도록 하는 개별평가가 되어야 하고, 대학입시는 성취기준을 기반으로 합격/불합격 정도를 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흔히 교육적 대안으로 많이 제시되는 것이 절대평가의 방식이다. 영어와 한국사에서 이미 도입이 되었고, 이 이후에 해당 과목들에 대한 학습 부담은 많이 완화되는 듯했다. 그러나 2019 수능에서 영어의 난이도가 매우 높아졌고, 사실상 상대평가 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래서인지 구성원들은 절대평가가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영향력을 기대하면서도, 지금 진행되는 방식이 과연 절대평가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논의를 하면서 점점 해결해야 할 질문이 명확해졌다. 학종과 수능의 대결도, 절대평가로의 이행도, ‘대학입시제도 개편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줄 수 없다면, 대체 무엇 때문인 걸까?

 

Q. 평가 방식의 변화만으로 달라지지 않는 것들? '대학입시제도 개편', 평가 방식의 변화는 생각만큼 많은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걸까?

 

이물 "대입이 인생의 경제적/문화적 수준을 한 번에 결정해버리는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지 않으면, 평가가 가진 잠재력은 이내 사그라들고 말 것입니다.

어떤 평가를 하든 당장의 학습이 아니라 학습이 가져올 외부적 결과에 더 큰 비중이 놓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거꾸로 학습은 소외되고, 경쟁은 과열되며, 평가는 차등화만을 목표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어떤 평가든 그것을 만든 사람이 가진 지향과 기준이 있습니다. 현대의 교육에 개입하는 강력한 주체는 국가와 기업입니다. 이들의 교육에 대한 개입을 견제하거나 통제하지 않으면, 각 주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만 학습자들의 지식이 인정받을 것입니다."

 

노누 “우선 지금까지 유지해온 평가방식을 바꾸는 게 대규모 일이고 바꿀만한 좋은 교육 방안이 나오지 않아서일까요? 저도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평가방식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무엇을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익명이 “대학입시제도를 바꾸어도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곳에 취직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좋은 대학교에 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경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상적인 얘기들을 하면서 교육 내, 학교 내에서의 이런저런 변화를 꾀하지만 결국 입시경쟁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고 변화는 지지부진하기 십상입니다. 사회가 이미 사람들을 줄 세우고, 착취하고, 경쟁을 유도하는데 입시제도를 개편하고 평가방식을 바꾸어도 변하지 않는 부분들은 계속되는 것 같아요.

관점을 넓히고 고개를 들어서 좀 더 멀리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누가 우리에게 경쟁을 요구하는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를 논의할 때이지 않은가요?”

 



당근 “교직 수업에서 가장 많이 하는 토론 중에 하나는 '입시 교육이라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교육적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인데요. 이 토론은 대개 먼저, 이런 저런 교육적 아이디어를 제안하기, 그리고 왜 그것이 입시경쟁의 현실 속에서 불가능한지로 반박하기, 다시 그 환경 속에서 그나마 나아질 수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 무엇을 할지, 이런 패턴으로 이야기가 돌고 돕니다. 저는 이런 토론을 여러 번 하면서 대안이 교육 내부에 있다고 보는 시선을 넘어, 입시경쟁을 유도하는 사회를 성찰하고 토론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경쟁은 교문 안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죠. 교육 무능론은 교육 만능론의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해서, 입시제도를 이렇게 저렇게 바꾸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넘어, 사회의 변화를 통해서 교육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잘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때 교육적 변화들이 제 성과를 더 잘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성원들은 다들 입시의 내부, 학교 내부만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오히려 입시가 왜 필요한지부터 물어야 한다. 모든 청소년들에게 대학은 디폴트값이다. 대학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어릴 적부터 좋은 대학에 가면 돈을 많이 벌고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말을 듣다가, 이제는 대학에 가야 돈을 벌 수라도 있다는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학입시는 생존권을 획득이라도 하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이 상태에서 대학 입시제도를 이렇게 저렇게 바꿔봤자 누구에게 생존권을 줄지, 누구에게서 박탈할지의 저울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생존권의 문제라니, 너무 비약이 심한 것 같다고? 특성화고 학생들이 현장실습을 하다가 다치고 죽는 사고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2017년 기준 20-30대 노동자 네 명 중 한 명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그들은 대부분 저임금을 받으며 고시원이나 원룸에서 살아간다. , 오류가 있다면 이젠 학벌도 제대로 된 생존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래서인지 주변 서울대생들의 진로는 고시, 공무원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상태에서의 평가가 교육의 일환이 되기란, 학교에서의 배움이 잘 이뤄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학생들은 생존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늘 불안에 떨 수밖에 없고, 교사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공부하라는 말만 반복하는 무력감을 겪는다. 이 상황 속에서도 그나마 이뤄지는 교육적인 시도는 눈물겨운 고군분투가 된다.

결국, 학교 안의 교육이 이뤄지기 위한 정말 최소한의 조건은 모두에게 생존권이 보장되는 학교 밖의 구조이다. 내가 느리게 배워도, 완벽하지 않아도, 성적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오지 않아도 내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없다면 배움은 불가능하고, 성장도, 평가도 무의미해질 뿐이다. 지금은 어떤가? <스카이캐슬>의 교수, 의사도 자녀에게 너의 미래를 책임져줄 수 없으니 네가 서울의대에 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세상이다. 이곳이 영영 나오지 못할 지옥불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학교의 경계를 넘어 구조의 직시, 그리고 학교 안팎의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누구도 일하다 죽지 않는, 수능 성적표를 유서로 남기지 않는, 어떤 직업을 택하든 생존의 불안정을 느끼지 않을 만큼 버는 세상에서, 교육은 비로소 제 역할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호를 펴내며

 

딸기맥주

 

안녕하세요, 교육저널의 편집장 딸기맥주입니다.

2019년 봄 호를 드디어 내게 되었네요. 원래는 2018년 겨울호로 내곤 하지만, 조금 늦어진 김에 산뜻한 봄 냄새를 담아 독자 여러분께 글을 보낼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이번 호의 제목은 <경계>입니다. 경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일종의 ''입니다. 너까지는 되고, 너부터는 안 된다는 명확한 선은 우리의 생 내내 '평가'를 통해 따라다닙니다. 학창시절의 1등급, 대학에서의 A+, 대학에 매겨지는 등급에 따라 정해지는 학과의 인원수, 교원평가에 따라 정해지는 좋은 교사와 나쁜 교사 - 우리는 선 안에 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야 합니다. 선 안에 들면 뭐가 좋아지는 지도 모르는 채로, 선 안에 들어야 살 수 있다는 압박 때문에 말입니다. 이 경계는 끊임없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너를 이기는 것이 내가 되는 법이라고 믿게 만들고, 선 안에 들지 못한 이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킵니다.

이 선은 점점 두꺼워져, 안과 밖을 나누는 벽이 되기도 합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나라 밖에서 겨우겨우 살기 위해 온 이들에게 '불법난민'의 딱지를 붙이고, 이 안으로 절대 들여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미 이 땅 ''에 살고 있는 이들임에도, 피부색이 다르다거나, 사용해 온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의 사람들이라며 차별받습니다. 이들과 함께하기 위한 교육은 현장에서 제대로 구현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벽은 권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학생이 무슨 학교의 주인이냐"고 말하며, 이사회와 교수가 알아서 총장을 뽑고 대학을 운영할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만의 벽 뒤에서 학생에게 영향을 미칠 수많은 결정들이 이뤄집니다. 그리고 많은 학교들에서, 학생들의 용기 있는 성폭력 신고에도, 학교라는 벽 뒤에 숨어 교사의 권력은 유지됩니다.

이 경계 속에서 살아갈수록, 이 경계는 우리의 안전이나 보호를 위한 게 아님이 분명해집니다. 경계는 불안을, 소외를, 좌절을 줍니다. 언제 경계 밖으로 밀려나갈지 모르는 삶, 경계 위에 부유하던 우리가 깨닫게 되는 건, 우리는 갈라진 채로 살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이 조각들을 이어붙여 경계가 없어질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그래서, 우리 주변의 경계를 인식하는 일부터 시작해보려고 했습니다. 중등교육에서의 평가, 대학의 학사관리 엄정화, 대학구조조정, 교원평가를 다루며 우리가 밟고 있는 금이 어떻게 작용해왔는지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대학 현안으로 총장직선제 운동을 다루며, 결코 쉽지 않은 경계 허물기를 위해, 어떤 방법이 필요할지 나름의 분석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또한, 경계를 지우고, 무너뜨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습니다. 중학생 난민 재심사 청원에 함께했던 선생님과 당사자, 그리고 다문화교육 연구자인 모경환 교수님을 만나, 차별과 혐오가 아닌 함께하기의 방법을 고민해보았습니다. 스쿨 미투 집회에 참여한 청소년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견고한 권력의 벽을 힘껏 무너뜨리는 그들의 용기와 요구에 함께하고자 했습니다.

이번 호의 주제들은 학교 안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학교 밖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평가, 다문화교육, 총장직선제, 스쿨미투는 학교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 때 비로소 제대로 이해될 수 있고, 제대로 해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그 방법론의 경계조차도 무너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호의 특집 인터뷰를 하면서 '중학생 난민 재심사 청원'의 주인공이었던 A를 만났습니다. A와 대화를 나누던 중, 제가 조심스럽게 "난민 지위 인정이 되어 너무 다행이지만, 여기도 한편에서는 살기 좋은 곳은 아니어서 걱정된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A가 웃으며, '헬조선'이라고 끄덕였습니다. 이미 데뷔한 모델인 A, 어떤 디자이너들은 내 쇼에 선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며 돈을 주지 않는 경우도 꽤 있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참 부끄러워졌습니다.

인터뷰를 곱씹으면서 김용균님을 떠올렸습니다. 김용균님은 저와 동갑인 노동자였습니다. 그가 왜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야 했을까, 왜 비정규직이 되어야 했을까, 왜 나는 여기에서 이렇게 숨 쉴 수 있고 그는 죽어야 했을까, 그런 생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경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사교육을 받고, 좋은 대학에 입학해서, 정규직 노동자가 되어서, 그랬다면. 경계는 누군가는 죽어도 되고 누군가는 살아남도록 작동합니다.

이 나라가 A가 떠나온 나라와 달랐으면 좋겠다, 아니 달라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피해서 온 땅에서 이들이 다시 죽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일하다가 죽는 나라가 아니라, ”내 쇼에 선 것을 영광으로 알고 저임금을 견뎌내야 하는 나라가 아니라, 다른 인종이라고 차별당하는 나라가 아니라, 정말로 여기에 도착하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땅이어야 한다고. 이대로라면 이 곳도 사람이 살 수 없어 도망치는 땅이 될 것입니다.

경계의 가장자리에서, 경계를 허무는 일을 함께합시다. 우리는 그렇게 연결될 때, 함께일 때 나 자신도 조각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이 땅의 아픔과 죽음을 덜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번 호는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자는 교육저널 구성원들의 다짐이자 여러분에게 건네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이번 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함께 주제에 대해서 더 심도 있게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기 위해 집필 전 내부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외부 홍보에 기대지 않고, 제대로 자치언론으로서의 기능을 하자는 다짐에 이르러 구성원들이 직접 편집을 해서 결과물을 내게 되었습니다. 시간도 그래서 좀 더 오래 걸렸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만큼 더 가치 있는 호가 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독자 여러분들께도 구성원들의 고민이 잘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번 호를 세상 밖으로 떠나보냅니다.

이번 호의 끝의 끝까지 고생해준 교육저널 구성원들, 언제나 글의 닿을 곳이 되어주시는 독자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p.s. 교육저널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어요! 학생회관 63619호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

디태치먼트(Detachment, 2011)

 

그래놀라

 

326일 교육 저널에서는 영화 상영회 및 집담회를 열었다. 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특히 교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디태치먼트(Detachment)’라는 영화를 보고 감상과 교육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필자는 이 집담회에 참여한 후 교육 저널에 함께하게 되었다. 그만큼 특별한 경험이었고 학교 생활에 큰 영향을 준 영화였던 만큼 이에 대한 간단한 비평을 적어 이를 남기고자 한다.

애드리언 브로디’. 그는 내가 킹콩이란 영화에서 처음 본 배우였다. 길쭉한 코에 길쭉한 눈썹 그리고 길쭉한 얼굴까지 어딘가 사람을 빨아들이는 외모를 가진 그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도 매우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나른하면서도 슬퍼 보이는 눈이 인상 깊었다(오빠 김 묻었어요. 잘생김.). 그러나 금방 그를 잊어버렸고 대학에 들어와서야 디태치먼트라는 영화를 통해서 그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여전히 그는 얼굴이 길쭉하고 코도 눈썹도 길쭉하고 매력적이었다.


디태치먼트는 미국의 한 공립학교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헨리는 기간제교사로 새로운 학교에 부임하게 된다. 유난히 문제 학생들이 모인 학교에서 헨리의 적응은 쉽지만은 않지만, 그는 담담하게 그리고 익숙하다는 듯 학생들의 골탕에도 개의치 않아하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낸다. 하지만 학생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그건 학교의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비행이 일상이 되어버린 학생들 그리고 아이들의 문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무관심한 학부모들, 지쳐버린 교사들. 이 학교는 누구를 위한 학교인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내려 버렸다. 불안정한 삶을 이어나가던 중 헨리는 우연히 에리카라는 소녀를 만난다. 교사로서의 사명심인지 단순히 불행한 상황의 어린 학생에 대한 동정심인지, 헨리는 보호가 필요한 상황인 에리카를 보살핀다. 학교 내에서도 그는 메레디스라는 특별한 학생과 조우한다.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꽃피우지 못하고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메레디스에게 헨리는 격려를 건넨다. 그럼에도 그가 막을 수 없는 일들은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영화는 헨리의 인터뷰 독백으로 마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동안 우울감에 침체되어 있었다. 교육에 대한 회의, 교사라는 직업의 무게감, 그리고 내가 과연 교사를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 복잡한 생각들이 떠오른 것은 무겁고 담담한 우울감 후에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그 우울감이 좋아서 한 번 더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 거리 두기, 무관심

어떤 학생이라도 헨리는 부드럽지만 따뜻하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그건 그의 어린 시절 경험으로 얻은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언제나 이별을 할 수 있도록 미리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제목의 의미를 유추해보았다. Detachment란 격리, 거리를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헨리가 학생들과 그리고 흐릿하게 기억하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과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하는 모습을 영화에서 볼 수 있었다.

Detachment는 무관심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학부모 회의에 누구도 오지 않은 텅 빈 교실 장면이 떠올랐다. 자녀들이 어떤 환경에서 교육받는지 가르치는 책임자는 누군지 전혀 궁금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듯 아무도 오지 않은 텅 빈 교실을 꾸며 놓고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교사들의 모습이 쓸쓸했다. 가정은 교육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자 아이들이 세상이 안전한지 결정하는 태도, 즉 애착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가정과 부모와의 관계에서 안정과 사랑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이 매우 위험하고 불안정한 곳이라고 느끼며 적응적인 관계 맺기가 힘들어진다. 학교라는 곳 또한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보살핌과 안정,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서 기능해야 하지만 어떠한 관심도 지지도 없는 상황인 아이들에게는 이마저도 가시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문제는 학생뿐만 아니라 학생을 돌보아야 할 교사들의 상황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교사, 완벽한 척은 하지만 부부간 불화를 겪는 교장, 그리고 가정이 아주 오래전에 파괴된 헨리. 소외된 자들은 누구에게도 자신들끼리도 뭉치지 못하고 그저 서로를 무관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외롭고 소외된 자들이 모인 학교에서 서로 어울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과연 교사와 학생 사이의 거리는 좁을수록 좋은 것일까. 교사와 학생 사이 적절한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영원히 풀리지 않은 고민 같지만 언젠가는 교육에 몸담고 있거나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면 해야 할 고민이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헨리가 거리를 두려고 한 이유는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교사로서 모든 학생을 제대로 보고, 또 자신을 의지하려고 하는 학생들에게서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학생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 우리 교육 현장의 Detachment

디태치먼트에서는 행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학교의 모든 면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으며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교사들은 절망하며 결국 학생들을 향해 절규하고 울음을 쏟아냈다. 에리카와 메레디스 또한 자신에게 관심을 주고 보살핌을 준 어른인 헨리의 관심에 잠깐은 행복했지만 결국은 끝이 어떻게 되든 각자의 길을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영화 속 교사들도 불행한 가정, 학교의 위기, 학생과 학부모와의 갈등 등으로 바람 잘 날 없었고 주인공인 헨리는 늘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결말이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없었고 누구 하나 상황이 더 좋아진 사람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고 그런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영화 속 교육 현장은 우리나라 교육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형태긴 했지만 크게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자녀 교육에 대한 것이라면 전국 방방곡곡을 돌고 한약을 지어 먹이며 학원을 태워가고 오기도 하지만 정작 아이가 어떤 것을 제일 좋아하는지 꿈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부모님들, 어떤 문제와 단원이 가장 많이 출제되는지 분석하고 어떤 대학이 가능한지 사람이 아니라 숫자를 다루는 교사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부유하는 학생들. 어느 한 사람도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는 우리나라 교육 상황도 서로가 격리되어 무관심하고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상태다. 그 이유는 현 교육 실태가 바람직한 인간 양성보다는 기능적인 인간의 생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교육에서 학생들은 교육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입시와 성공의 수단으로서 존재하게 되고 Detachment 즉 무관심 속에 방치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학생에게 깊게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꿰뚫어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교사의 능력과 개인의 인생을 바꾸어버릴 수 있는 교육의 무게를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였다. 많은 사람들은 관계로 인해 아파하고 삶을 망친다. 그 이유로 적절한 거리 두기가 지켜지지 않아서 그런 경우가 꽤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가까이 있어도 외롭다고 느끼며 더 가까이 가려고하고 오히려 더 멀어지려고 한다. 정현종 시인은 이런 사람들의 관계를 섬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교사로서 그리고 그 이전에 인간으로서 사람들의 섬 속에서도 외롭지 않다고 느끼고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는 적절한 거리 두기와 무관심을 조절할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교육권리운동’ - 대학과 교육의 정치

 

이물

 

0. 푸념

 

사실 내가 교육 문제에 관심 갖게 된 계기는 시흥캠퍼스였다. 교육이 일방적 가르침을 넘어 사회를 바꾸는 힘이자, 공동체의 윤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교육을 차별과 경쟁의 장으로 만들려는 힘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시흥캠퍼스를 산업 수요 대학 정책에 부합하는 기업친화적 연구/수익의 공간, 그 과정에 구성원과 교육이 배제되는 공간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는 내부적으로 두 가지 어려움에 직면했다. 하나는 본부와의 소통문제로 국한하려는 것이었고, 하나는 대학의 기업적 혁신에 동의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정치적 타협을 설득할 근거와, 기업적 대학을 비판할 대안을 명확히 갖지 못했고 헤맸다.

물론 시흥캠퍼스 투쟁이 내부적 어려움만으로 무너진 것은 아니다. 본부라는 실물적 위협과 통제가 어쩌면 핵심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흥캠퍼스를 평가하고, 다시 교육 투쟁을 상상할 때,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다시 시작해야할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각 대학에서는 교육 문제를 사고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이번 글에서는 서울대를 중심으로 수도권 각 대학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육권리운동을 조명하고자 한다. 각 대학 학생회에서 드러나는 요구안이 주장하는 바와 그 함의를 바탕으로 운동의 지향과 그 한계를 분석해볼 것이다. 다만 능력의 부족으로 운동 주체들의 전략이나 학생들이 이를 수용하는 역동적인 과정은 제한적으로 다룬다.

어쩌면 입만 살아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실천에 있어 어떤 가치를 왜실천하느냐를 항상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무책임한 글이 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우리의 가치를 상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1. ‘교육권리운동’, 교육투쟁의 그림자

 

교육투쟁이라는 것이 있었다’. 과거형으로 써야 할 만큼 지금은 대부분의 대학에서 힘을 잃었거나 자취를 감추었지만 말이다. 87년 민주화 이후, 대학생들은 세계화와 IMF 금융위기, 대학 등록금의 인상과 경쟁, 취업 위주 교육 과정에 맞닥뜨렸다. 이에 대학생들은 신자유주의교육 정책과 대학 상업/기업화 비판을 핵심으로 대학에서 본인들이 직접 경험하는 문제에 대해 주목하고 문제제기 하기 시작했다. 곧 교육투쟁은 민주적 대의를 넘어,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학생이 대학에서 겪는 경험과 계급적 조건을 바탕으로 투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교육투쟁은 점차 정체되었다.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경제위기의 심화와 취업난,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대학 정책, 학생운동의 쇠퇴 속에서 매년 초 등록금 산정에 대응하며 연례행사처럼 이뤄지던 교육투쟁은 개나리투쟁으로 불렸고, 이내 그 이름마저 잊혀졌다.

마지막 반등은 2011년 반값등록금 투쟁에서 나타났다. 등록금 문제가 갖는 보편성과 반값을 무조건적으로 요구하는 정치적 요청이 결합되었다. 학생들의 목소리는 대학을 넘어 광장으로 진출했고, 학생 단체는 물론이고 많은 시민단체와 정당의 호응을 받으며 사회문제로 확산됐다. 하지만 요구들은 기성정치의 복지와 인권으로 수렴되었고, 대학에서 정치적 의제가 지속하는 데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이후 대학생운동은 거시적 대학 비판이나 체제 비판보다 일상적인 불편, 교육환경을 개선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이는 거듭되는 교육투쟁의 실패에 대한 고민과 전략 변경으로 이해해야 한다. 학생들이 관심 갖지 않거나 꺼려할만한 정치적 구호를 접어두고, 학생들의 불편과 이익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요구안들을 찾자는 목소리가 생겨났고 그나마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 이 요구들을 지탱하는 근거로서 다소 의미가 추상적인 교육권이 제출되었다. 물론 이전부터 자본과 국가에 의해 교육권이 침해받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이제는 권리 자체가 요구의 전면으로 가시화된 것이다.

다음 장에서는 교육투쟁의 그림자인 교육권리운동의 현황을 분석한다. 정치적 기조가 후퇴했다고도 볼 수 있는 교육권리운동은 실제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가? 교육권 개념의 현황, 학생들이 이를 극복하고 만들어내려는 가능성, 전반적 한계와 대안은 무엇인지 고민해볼 것이다.

 

 

2. 교육권리운동의 현황 : 각 대학 학생회 요구안 분석

(2016년 서울대 총학생회, 2018년 서울대 사회대 학생회, 2017 성공회대 비상대책위원회, 2017 고려대 사범대 학생회, 2018년 고려대 총학생회)

 

1) 2016년 제58대 서울대학교 총학생회 교육권리운동

 

- 방식 : 2016520일 총학생회 및 단대 학생회가 참여한 교육권리운동본부 출범

- 문제의식 : ‘교육 공공성요청

 

부당해고 음대 강사 전원 복직 및 비정규교수 대책 논의기구 설치 (노동권)

법인화 전면 평가 및 국립대로서의 정체성 확보 (대학지배구조/의사결정구조)

코어 사업 등 교육부의 재정지원사업에 대한 구성원 의견 수렴반영 (대학재정지원사업/의사결정구조)

시흥캠퍼스 실시협약 중단 및 구성원과 전면 재논의 (캠퍼스/의사결정구조)

학생 의결권 확보 위한 평의원회 민주적 구성 및 총장직선제 실시 (의사결정구조)

학생들의 일상과 직결되는 교육환경 개선 (교육환경개선)

 

> 다른 교육권리운동에 비해 교육투쟁적 성격이 다분하다. 교육환경개선은 한 항목이며, 그 외 학내 노동권, 정부교육정책, 대학지배구조에 대한 요구를 담고 있다. 그러나 노동문제를 제외하고는 의사결정구조로 그 문제의식과 방법론이 제한되어 있다.

 

2) 2018년 제36대 서울대학교 사회대 학생회 교육권리운동

 

- 방식 : 사회대 학생회 주도, 기존의 교육환경개선협의회의 한계를 지적하며 교육권리운동출범. 510일 학생총회. (성사, 1번 안건으로 통과된 후 동맹휴업.)

- 문제의식 : ‘학생이 주인 되는 대학’, 법인화 지적 (민주주의), 공공성.

 

1624시간 개방 (교육환경개선 - 공간)

학생 자치공간 확보 (교육환경개선 - 공간)

수업 추가 개설 (교육환경개선 강의 개설)

차등등록금 문제 해결 (등록금)

갑질교수 H교수 파면 (인권)

 

> 핵심 요구안 몇 가지를 중심으로 학우들이 가장 핵심적으로 생각할만한 교육환경개선, 등록금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교육권에 대한 문제의식은 민주주의, 공공성으로 외화되고 있으나 다소 막연하며, 요구안은 단대 공동체 문제, 생활 밀착형으로 제시되고 있다. 다만 인권 문제로 제기된 갑질교수 H교수 파면이 눈에 띈다.

 

3) 2018년 제33대 성공회대학교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 교육권리운동 SKUCHANGE

 

- 방식 : 비대위 산하 스쿠체인지 기획단 중심. 326일 전체학생총회. (총회 정족수 미달로 무산. 2080명의 1/5416명 중 262명 출석.)

- 문제의식 : ‘학교의 주인은 학생

 

교육권 - 강의 의견수렴제, 성적산출근거시스템, 예체능 수업 및 교양의 다양화, 상대평가 폐지, 여성학연계전공, 재수강 학점 변경 (학사관리, 교육환경개선 강의개설)

학생복지시설 - 학생복지공간 확충, 학생식당 의견수렴제도, 생리공결제 증가, 학생회관 24시간 개방과 난방시설공사, 체육시설 확충, 학생참여예산 증액(교육환경개선 공간, 복지)

학내 거버넌스 - 총장직선제, 등심위 학생위원 확대, 평의원회 학생의원 확대, 학교 주요 회의록 속기요구, 실습비운영위원회 (의사결정구조)

학부별 요구안 (교육환경개선)

 

> 학부 요구안 수합, 교육환경개선 위주의 나열식 요구의 형태를 갖고 있다. 학내 거버넌스는 교육환경개선의 영역을 벗어난 요구지만, 역시 공동체적 권리 하에 국한되어 있다. 다만 학생참여예산, 등심위와 평의원회 학생위원이 눈에 띈다. 거버넌스 요구가 제도화 된 이후, 교육환경개선 요구안으로 포함되어 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4) 2018년 제50대 고려대학교 총학생회 교육권리찾기 운동 KUESTION

 

- 방식 : 총학생회 주도, 36일 시작. (고대는 매해 3월 교육권리찾기 운동을 진행함.) 2018년에는 월별 의제 제시, 동시다발적 운동. 단과대 및 독립학부 학생회 교육국 연석회의체 구성.

- 문제의식 : 교육환경 관련 불만과 피해사례 바탕 문제제기’. ‘교육권’,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바꾸는 학교 요구.

 

3: 2014년 폐지된 드롭제도 부활. (학사관리) -> 서명운동 4243

4: 총장직선제 이만 총총’ (의사결정구조) -> 총추위 시스템 자체보다 학생 전원 참여를 요청.

5: 학점이월제도 (학사관리)

그 외 학부별 요구안은 강의 개설, 공간문제 개선, 수업비 지원 등을 대체적으로 공유함.

 

> 교육권을 교육환경 관련 학생들의 불만과 피해, 그에 대한 문제제기로 이해하고 있다. 다만 총장직선제는 학내 거버넌스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학사관리 개선 요구는 불만 개선보다 제도에 문제제기하고 있는 것으로 특기할 만하다.

 

5) 2017년 제47대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학생회 교육권리찾기 운동 우산 프로젝트

 

- 방식 : 사범대 주도, 9월 시작. 과별 교육권 운동 주체 모집 - 교육권 의미화와 과거 사례 검토. 법률 규정과 현황 분석, 요구안 정리, 서명운동. 발언대 운영, 권리선언 기자회견.

- 문제의식 : ‘학문기관의 대학과 교육 받을 권리, 자유로운 지식접근권, 생활권으로서의 안전할 권리, 차별과 소외받지 않을 권리.

 

공간문제 : 자치공간 개선, 배리어프리, 체육생활관 보수 (교육환경개선 - 공간)

등록금 : 차등 등록금 개선

강의 개설 : 강의계획서 의무화, 학교현장실습생 통제 완화, 답사 문제 해결, 이중전공 문제 해결, 전임교원 확충 (교육환경개선)

차별과 혐오 문제 : 교원의 차별 혐오 발언 금지 및 규제 (인권)

 

> 다른 학생회들에 비해 교육권을 꽤 공들여 정의하고 있다. 학문기관으로서의 대학 속 지식권과 공동체 구성원의 생활권이 그것이다. 그러나 요구안은 교육환경 개선, 등록금 문제 등 여타 교육권리 운동과 유사하다.

 

- 요구안 분석

 

첫째로 대부분 교육권에 대한 문제의식의 부재와 정체 현상이 나타난다. 각 학생회들은 교육권이라는 단어를 공유하고 있음에도 그 정의는 모호하거나 조금씩 다르며, 과거 교육투쟁의 그것보다 훨씬 더 교육환경개선의 영역에 치우쳐 있다.

대학이 어떤 학문기관인지, 교육이 왜 권리로서 제출될 수 있으며 중요한지, 대학에게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때문에 교육권리는 정치적 정당성이 아니라 학생의 이익이라는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 기존 사회에 전제된 교육 수요자와 서비스 제공 관계에서, 또 헌법적 교육권의 제한된 범위에서 교육권이 제기되는 것이다.

 

둘째로 문제의식이 존재하더라도, 요구안과의 괴리가 나타난다. 2016-서울대나 2018-서울대 사회대의 경우 대학지배구조, 재정정책 등의 문제의식이 의사결정구조를 개선하는 방식으로 축소되거나 교육환경개선 요구로 집약되고 있다. 2018-고려대 사범는 지식접근권이라는 문제의식이 요구안에 구체적으로 반영되지 않았다. 또한 전반적으로 학생이 교육의 능동적 주체라고 천명되는 경우가 많은데, 정작 요구안은 교육 서비스의 요구(공간, 수업비, 강의개설 등)에 국한되고 제공자-요청자 구도를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 제한적이나마 문제의식과 요구안에서 정치적 가능성이 존재한다. 우선 모든 학생회가 직간접적으로 비민주적 대학 비판을 수행하고 있다. ‘총장 직선제키워드가 가장 많이 발견되며, 평의원회 구성 등이 추가적으로 눈에 띈다. 최근에는 전국대학학생회네트워크()’과 같이 총장 직선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대학 간 네트워크가 구축되는 학원 민주화가 사회적 의제가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민주화라기보다 간선제 내 지분율 향상이나 위원회의 위원 증대 등 제한적인 범위에서 이뤄지고 있고, 다양한 교육 투쟁 의제가 총장 선거, 거버넌스와 소통의 문제로 환원, 흡수되는 경향이 발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최근 교육권의 영역에 인권 사안도 포함되고 있다. 인권은 교육 공간에서 차별받지 않을 권리로 요청되며, 권력형 성폭력이나 남성중심적 문화의 문제로 확장하려는 양상을 갖는다. 2018-서울대 사회대의 H교수 파면과 2017-고려대 사범대의 교원 차별 금지 요구가 그것이다.

 

 

3. 문제제기 : 운동에서 교육권제출의 한계와 가능성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듯, 교육권은 교육투쟁이 밀려난 지점에서 당위적 호소력을 가진 근거로 제시되었다. 주체들은 문제제기의 정당성을 체제 분석보다 권리에서 찾았다. 그러나 현재 진행되는 교육권리운동의 양상을 살펴보면, 그마저도 권리라기보다 불만 해소 요청에 가깝게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대학 내에서 교육권 개념이 명확하지 않고 더 이상 토론되지 않는 상황은, 의도치 않게 교육권의 법적 직관에 호소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헌법에서 보장하는 학생을 피교육자로 대상화하며, 교육권이 경제적 조건과 충돌할 경우 후순위로 밀려날 수 있음을 전제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또한 문제의식이 결여된 채 나열된 요구안은 동일한 문제에 직면한다. ‘어느 정도가 교육권에 합당한 요구인가? 대학의 경영 사정을 고려해보았을 때 좀 양보해야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교육권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가 불편해 보이는 모든 문제를 요청할 수 있는가? 경제 상황에 밀려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의 문제임을 주장하기 위해선 대학과 교육이 겪고 있는 문제를 분석하고 비판하며, 이를 넘어선 교육이 왜 필요한지 설득해낼 필요가 있다. 하지만 현재 교육권리운동의 양상처럼 나열된 요구안은 당장의 민원, 복지 서비스 정도의 차이에 가까운 것이 많으며, 그 문제를 발생시키는 근간을 분석하지 않는다. 엄연히 말해 이것을 운동이라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때문에 우리에게는 정치적 구호가 필요하다. 교육권 개념은 더욱 구체적 분석과 대안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탈정치적인 것은 그 자체로 기존 사회를 답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에서 이는 교육 수요자와 공급자의 서비스 관계, 고등교육이 내포한 특권과 불평등에 해당한다. 결국 거칠게 보면 지금의 교육권리운동은 등록금을 낸 학생, 입시에서 승리해 대학에 온 학생, 학위를 따기 위해 더 치열하게 경쟁하려는 학생으로서의 이익을 요청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밥그릇 챙기기는 타 집단과의 연대를 저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결국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경쟁적 사회를 더욱 재생산하는 데 일조할 뿐이다.

나아가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도, 정치적 구호만이 담보할 수 있다. 대학 본부와의 소통, 타협 자체에서만 의미를 찾는다면 당장 각종 복지의 영역에서 소기의 성과를 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는 무언가 되고 있다는 착각을 주기 쉽다. 그러나 정작 최종 결정권이나 통제권은 없는 상태에서, 교육에 대한 비판의 기준이 와해된다면 학생들은 대학이나 교육에 점차 무비판적으로 대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교육권 논의가 정치적으로 확장되고 사회화될 가능성도 보인다. 교육권리운동을 수행하는 학생들이 어떤 목적과 전략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제한적 가능성들이 발견된다. 협소해 보이는 요구안 속에 어떻게 정치적 관점을 담을지 능동적으로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다만 의지적으로 운동의 주체들이 노력한다고 해서 가능성이 바로 운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제한적 가능성들을 어떻게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객관적 조건들을 바꾸는 노력이 필수적이다.

 

 

4. 2018-사회대 학생회의 사례

 

좀 더 생생한 목소리로 지금 학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육권리운동의 현황과 의미를 되짚어보기 위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앞서 살펴본 교육권리운동의 한계들에도 불구하고, 어떤 성과와 가능성이 남아있는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인터뷰 당시 사회대 학생회는 학장단과의 최종 교섭을 앞두고 있었고, 517일 최종 교섭 결과 161,2층의 24시간 개방, 우석경제관 학생자치공간을 위한 협의체 설치, 전공교과목 추가개설 논의 약속을 이끌어냈다.

 

Q. 사회대 학생회는 '교육권'을 어떤 개념으로 정의하고, 또 주장하고 있는가?

 

수환 : 학교에서 학생이 학생으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리의 총체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학생이) 왜 충분한 자치공간을 배정받지 못하고, 전공강의를 갖지 못했는지 (...) 대학사회와 한국사회의 신자유주의적 논리를 빼놓을 수 없다. 교육 공공성보다는 대학의 이윤논리, 시장화가 중심적으로 여겨지는 사회 권리 속에서 학생의 권리가 후퇴해왔고, 서울대의 경우 법인화 이후에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정 : (대학은) 교육이라는 공공재가 유통되는 곳이고 그것을 함께 형성하는 주체라는 의미에서 교육권을 생각할 수 잇다. (...) 한줄로 요약하면 교육상품의 소비자로서의 학생이 아니라 교육의 주체로서의 학생을 세우는 것이 교육권이라고 생각한다.

 

Q. 현재 제시하고 있는 요구안과 이에 담으려는 교육권의 의미는 무엇인가?

 

수환 : 학교가 학생들의 필요가 아닌 이윤논리에 따라 운영되고, 그에 따라 학생은 사소하게는 전공강의 수강부터, 크게는 공간배정의 문제에 있어서 철저하게 배제되어 왔거든요. 그래서 어떤 그런 부분에 대한 (...) 이윤논리 탓에 박탈되어온 학생들의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한 싸움이었다고 생각한다.

(요구안의 정치적 관점들은 잘 전달이 된 것 같은가?)

수환 : 이 시점에 실패, 성공을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어떤 정치적 요구든 즉자적 필요와 경제투쟁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겠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을 의미화하는 과정이 필요한 하다. 그런 과정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한다.

민정 : 더 중요한 작업은 그만큼 평가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첫발을 뗀 것인데, 학장단이랑 뭔가를 해서 얻어낸다고 했을 때 그것을 우리 공동체가 어떻게 지켜나가느냐가 중요하다.

 

Q. 어려운 점이나 한계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민정 : 제일 뼈저리게 느낀 한계는 구조적 부분이랑 연결된 지점일수록 더 큰 운동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 제기하는 문제의식에 비해 실제로 할 수 있는 투쟁의 귀결이 단과대 범위는 작을 수밖에 없다. 서울대학생들, 전체대학생들이 어떤 정치화된 요구를 할 수 있느냐의 여부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하면 전 서울대, 전국의 대학생으로 확대시켜나갈 수 있을 지가 고민될 거 같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운동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게 쉬운 과정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어떤 공론화 노력을 거쳤는가?)

수환 : 왜 총회 투쟁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데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사실 이번 총회에서 다룬 안건들이 그리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등록금 문제 해결이라든가 전공강의 확충이라든가. 사실 이런 요구안을 학생회 상층부만 요구할 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걸 수년간 확인했다. 이번에는 몇몇 간부들만 관심 갖는 문제가 아니라 사회대 전체 학우들의 문제로 확산시키고 스스로 행동방안 결정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Q. 사회대 교육권리운동의 성과, 다짐과 전망은?

 

수환 : (자주 반복되던) 후퇴를 막아내는 투쟁에서 나아가서, (이번 교육권리운동은)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나가는, 학생사회의 가능성을 확인한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들에 대해 정치적 질문을 던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공수업과 반방에 대해 불만만 가질 것이 아니라 왜 권리가 박탈되어왔는지 묻고 토론하는 것이 일상적으로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것들이 실질적 변화의 단초가 될 수 있도록 학생회가 해나가야 할 역할이 많은 것 같다.

민정 : 오늘날의 학생회가 현실에 찌눌려있는 상황인거 같다. 계속 대안을 상상했으면 좋겠다. 불가능은 없다는 생각으로 계속 대안을, 우리의 대안을 상상하고 만들어 갔으면 하는 생각이다.

 

 

5. 제언 : 다시 교육투쟁으로 돌아가면 되는 건가?

 

그렇다면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교육투쟁에서 교육권리운동으로의 변화에는 일련의 탈정치화와 학생운동의 쇠퇴라는 배경이 있는데, 이런 조건을 무시하고 좋은 말만 하는 건 안일하고 무책임한 생각이다. 때문에 왜 교육투쟁이 쇠퇴했고 이를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짧은 고민이라도 해보아야 한다.

나는 운동이 쇠퇴하는 주요한 원인에 이론의 설명력 약화, 이를 반영하는 요구안의 상실, 운동을 지탱하는 인적 네트워크나 자치기구의 약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문제는 학생자치단위 중심의 노력이 필요하겠으나 이 글에서 직접적으로 다룰 영역은 아니라 생략하고, 이론과 요구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첫째로 이론과 문제의식이 개선되어야 한다. 어긋난 문제의식과 대안의 부재는 호소력을 갖기 힘들기 때문이다. 고등교육기관이 팽창하면서 현실적으로 고등교육재정을 정부가 모두 담당하기 힘들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며, 자체적 생산기관이 아닌 대학의 재정의존은 역사적으로도 다소 필연적이다. 또 대학은 단순히 연구기관이 아니라 노동력을 위계화하고 노동시장에 공급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저항세력은 교육이 공공적으로 수행되어야 한다는 구호를 넘어 교육과 노동의 관계, 대학재정운영, 대학 내 지배구조, 연구 관행과 문화, 기업 및 지역사회와의 연계 방식에 대한 종합적 대안을 제출해야 한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저항세력의 대학 비판은 일종의 정체를 겪어왔다. 과거 민주노동당에서부터 논의되어오던 국립대학통합네트워크같은 대학 운영방식이나,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안 제정 노력 등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대안이 제출되지 않고 있으며, 막연한 국가의 책임이나 대학 본부의 책임이 반복해서 요청되고 있다. 물론 노동자 해고, 등록금 인상과 같은 대학기업화의 현실적인 단면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때로는 막아낼 수 있겠지만, 근본적 전망이 불투명한 이론은 대학 구조를 바꾸기에는 한계를 갖는다.

대학은 기존 사회에서 벗어난 도피처나 상아탑으로 요청될 수 없으며, 이런 생각은 현실을 가리고 대학의 본질을 왜곡하는 오류를 가져온다. 또한 대학 공동체 내에서만 교육 문제를 방어하며, 각자의 처지에서 각개 전투하는 양상으로 이어진다. 오히려 우리는 적극적으로 의존의 문제를 직시하면서 어떻게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학이 사회와 연관하고 사회를 비판할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둘째로 문제의식을 반영하는 요구안이 제출되어야 한다. 물론 요구안을 공동체가 어떻게 사유하느냐, 얻어낸 성과를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정치적 잠재력을 갖는다. 하지만 협소한 요구안에 의지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기만 해서는 잠재력을 확장시킬 수 없다.

요구안은 당장의 환경개선이 아니라 그것의 구조를 지적해야 하며,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동시에 이것이 공허한 지향이 되지 않으려면 현재 학생들의 상황을 명확히 대학 구조와 연결하고 가시화해내는, 계기적 사건을 마련해야 한다. 당장은 등록금 산정 체계(등록금), 서울대 내 연구비 산정 방식이나 고용체계(연구/노동), 학사관리제도(졸업요건, 평가방식) 등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환경개선의 요구안이 요청되더라도 그 실천과정이나 후속조치가 이 같은 구조적 문제제기를 향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당장의 공감을 얻어내면서도 대학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물론 대안은 요원하며, 계기가 될 만한 사건이 쉽게 찾아지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대학을 다시 사고하고, 우리의 것으로 전용, 활용할 것을 상상해야 한다. 이런 막막함에 직면할 때 항상 그런 생각을 한다. 전쟁기의 국가가 대학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현대 사회의 자본이 대학의 지식 생산을 독점하는데, 왜 우리라고 그러지 못할까? 터무니없는 자신감이겠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제나 어떻게가 문제지만.


많은 이들이 교육이 독자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지 질문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교육이 제도나 교육 내용 그 자체라면 이는 불투명하다. 그러나 그러한 제도와 교육내용, 나아가 교육현장을 바꾸려는 사람들의 정치는 그 자체로 변화의 시작이다. 교육은 외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것이다. 때문에 다시, 그런 사람들의 정치가 존재하는 자치기구와 공동체가 항상 요청된다.

취재 차 찾아갔던 사회대 총회는 모든 안건의 가결 이후 폭죽을 쏘는 것으로 마무리 됐다. 단단해 보이기만 하던 사회대 건물은 폭죽이 터지는 소음과 불빛에 흔들렸다. 그 아래 한껏 파장 분위기를 즐기는 사회대 학우들의 흥겨움에서 역동적 공동체의 실마리가 아직 존재함을 볼 수 있었다. 과장해서는 안 되겠지만 과소평가해서도 안 되는 것이 주변 사람들의 힘과 잠재력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이 글에서 다루지 못한 지점으로 결말을 맺는 우스운 상황이 됐지만, 사람들의 고민이 지치지 않고 계속될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 과정에서 이 글이 작은 도움이나마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참고문헌


- 서울대저널, “서울대학교 교육권리운동 기자회견 열려”, 2016.5.25.

(http://www.snujn.com/news/23400)

- 고려대학교 교육방송국, “다시 시작된 교육권리찾기운동변화된 점은?”, 2016.4.1.

(http://kubs.ac.kr/20122)

- 고려대학교 교육방송국, “사범대학 교육권리 찾기 위한 노력 우산 프로젝트기자회견 열려” 2017.11.7.

(http://kubs.ac.kr/19429)

- 나달숙, 교육권을 둘러싼 법적 논의와 한계성에 관한 연구, 법과인권교육연구6(2), 2013.


 

더 읽어보면 좋을 것들

 

- 고부응, 대학 자본주의와 대학 공공성의 소멸, 비평과 이론21(1), 2016.

- 김정인, 대학과 권력 : 한국 대학 100년의 역사, 휴머니스트, 2018.

 

 

청소년 참정권, 외않됀데?

딸기맥주

 

 청소년 참정권, 보다 구체적으로는 만18세 선거 연령 하향 조정에 대한 뉴스에는 늘 댓망진창이 벌어진다. 이 글에서는 실제 뉴스 기사에 달린 댓글들을 편집해서 이를 반박하는 형식으로 청소년 참정권에 대한 의견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Q1.

dfjd***

애들은 아직 어려서 논리고 뭐고 없는데, 사고도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애들한테 어떻게 한 나라의 정치를 맡기냐? 하여간 이 나라 미래가 어떻게 되려고 ㅉㅉ


A1.

edujournal

세 가지를 논리적으로 반박해보고자 한다. 첫째, “나이가 어리다 = 논리 체계가 없다고 말하는 당신의 논리 체계가 빈약하다. 청소년은 당신의 주장을 비판할 수 있을 만큼 사고력을 지니고 있고 자신의 논리 체계 하에서 판단하고 행동한다. 둘째, 놀랍게도 논리 체계와 사고라는 것은 나이가 든다고 알아서 발달되는 것이 아니며, 논리 체계가 완성된사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의 논리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정치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는 지능과 능력을 충족해야만 권리를 주는 시스템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자신의 삶을 위해 구성해나가는 것이다. 다양한 환경에 놓여있는, 다양한 요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가장 나은 삶을 위해 분투해가는 과정이 민주주의 정치이다. 그렇기에 민주주의에서 차별 금지라는 것이 원칙으로서 도출되고 합의되어 온 것이다. 만약 IQ150이 넘는 사람만 선거에 참여할 수 있게 한다고 하면, 그것을 아무도 민주주의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이 나라 미래가 어떻게 되려고 그러냐고 물으신다면 민주주의에 더 가까워지겠죠.”라고 대답할 밖에.

 

Q2.

kdg5****

본인 판단 없이 타인 영향으로 투표할 듯? 부모가 하라는 대로 찍던가 선생님이 말하는 거 따라가겠지. 내 맘대로 인물 보고 관상보고 찍겠지.


A2.

edujournal

자 먼저 청소년이 모두 관상을 볼 줄 아는 것은 아니라는 것부터 밝혀둔다. 청소년들이 타인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근거로 청소년 참정권을 반대하고 있는데, 인간의 정치적 입장은 언제나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인간의 삶은 정치의 연속이고, 정치는 곧 상호 설득과 투쟁의 과정이다. 그렇기에 개인은 언제나 다른 이들을 설득하는 한편, 자신도 설득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따라서 타인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의 판단이 확고한 사람이라기 보단 고집이 센 사람일 확률이 높다.

 

물론 청소년에게 있어서 부모와 교사는 많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인 것은 분명하지만, 결국 결정은 청소년 개개인의 몫이다. 선생님이나 부모의 말이 설득력이 있으면 영향을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자신의 의견을 구성해가는 참고사항으로 삼을 것이다. 청소년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판단 기준에 따라서 자신들이 옳다고 판단하는 방향,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는 정책에 투표할 것이다. 여성들에게 투표권이 주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차피 남편 따라서 투표한다, 감정적으로 판단한다.” 등의 말들. 언제나 박탈당한 이들이 권리를 찾으려 할 때, 이미 권리를 가진 자들은 그들을 평가절하하고, 절대 자신과 동등한 위치에서 바라보지 않지만 그것은 대체로 사실과 거리가 멀다.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교사, 부모 청소년 사이에 권력관계가 작동하기도 하며, 이 사회에서 청소년이 순응하며 살아오도록 통제 당해왔기 때문에 학교와 가정에서의 변화 역시 필요하다. 자식이라는, 제자라는 이유로 청소년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며 정견을 강요해서는 안 될 것이다. 물론 이 변화는 청소년이 동등한 시민으로서 참정권을 지니게 될 때 더 의식적으로 촉진될 것임은 명백하다.

 

Q3.

holo****

야 청소년에게 선거권을 주면 무슨 일이 벌어질 거 같냐? 막 시험 없애자고 하는 거 아님? 교육내용을 지들 맘대로 하자고 하면 어떡함?


A3.

edujournal

시험 없어진다니 개꿀. 교육감 등의 선거에서 청소년 참정권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제기되어왔다. 청소년은 교육의 소비자도, ‘피교육자도 아니다. 교육과정의 가장 중요한 참여자로서, 자신의 일상에 해당하는 교육 제도, 교육 내용 등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은 그들의 당연한 권리이다. 단언컨대, ‘교육전문가들의 진단과 대안보다 청소년들의 시각과 목소리가 훨씬 정확할 것이다. 교육을 향유하고 교육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존재로서, 그들은 누구보다 현재 학교교육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고 누구보다 변화의 방향을 잘 제시할 수 있다.

 

시험을 없애자고 하지 않을까?”라는 우려들이 있는데, 왜 이러한 논의를 꺼내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현재의 교육체제만이 정답이라는 시각 또한 편협한 비청소년의 생각일지 모른다. 더 나은 교육현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청소년들이 모든 것에 대해 열어놓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이 열려야 한다. 이것이 바로 참정권의 핵심이다. 참정권은 단지 투표할 권리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2등시민이라는 취급, ‘어리고 모자라며 완성되지 못한 존재로서의 낙인을 뛰어넘어 말하고, 토론하고, 요구할 권리를 포함한다. 청소년은 학교라는 감옥에 갇혀 12년을 복무해야 하는 죄수가 아니라 감옥을 부수고 배움터를 세워내는 능동적 존재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청소년의 목소리를 헛소리취급하지 않고 청소년을 그들 삶의 현장에서의 전문가로서 인정하는 일이다.

 

Q4.

illu****

청소년한테 참정권 주면 지들이 어른하고 똑같은 줄 알고 기어오를 걸? 난 그 꼴은 못 본다~ 청소년 인권이다 뭐다 하면서 체벌하지 말라고 하는 것도 어이없는데 투표권까지 줘봐. 학교도 가정도 난리난다~~

 

A4.

edujournal

청소년은 맞아야 안 기어오른다고 말하는 당신은 노예는 때려야 주인한테 안 대든다”, “여자는 삼일에 한 번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말에도 동의할 것이라는 건 잘 알겠다. 바로 당신같은 인간들로부터 사람의 권리를 지켜내기 위해, 그리고 당신같은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청소년 참정권이 필요한 것이다.

 

청소년 참정권을 외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구호가 있다. “청소년 참정권은 인권이다.”, “청소년 참정권은 생존권이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청소년들은 이 구호를 외치며, 지속적으로 체벌, ‘용모단속, 언어적 폭력, 어른들의 갑질’, 청소년 노동 임금체불 등으로 인해 억압받아왔던 자신들의 경험을 드러내왔다. 인간이 억압된 상황에 지속해서 놓여있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발화할 권리이며, 그 발화가 공동체에 균열을 내고 공동체의 질서를 바꿀 권리이다. 그것이 바로 참정권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기본적인 권리마저 부정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청소년들은 인간으로 살기 위해우리에게도 참정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삭발을 하고, 천막 농성을 하고, 시위를 하다가 끌려가면서, 그들은 외친다. 폭력을 감내하지 않아도 되는, 외모가 학생답지않아도 되는, 당당하게 노동하는, 평등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살고 싶다.

 

Q5.

dofo****

선거연령 18세는 좀 그렇다 고등학생 신분에 정치참여는 찬성할 수 없다. 눈 앞에 대학 입시가 안보이는가?

 

A5.

edujournal

당신 눈 앞의 청소년들은 입시 공부 기계인가? 청소년들은 기계도, A-B-C 등급이 매겨져야 하는 고깃덩어리도 아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간이다. 입시가 코 앞인데 무슨 정치냐고 말하는 것은, 너를 인간으로서 취급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또한 입시제도로 인해, 성적을 비관하며 자살하는 청소년들이 매년 증가하는 이 곳에서 너희는 공부만 해야 하니 귀 막고 입 닫고 있어. 너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청소년의 삶을 절망과 죽음으로 계속해서 내모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죽고 싶지 않아서, 살고 싶어서 정치 참여권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이것은 비유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Q6.

uihh****

어느정도는 동의해. 근데 우리나라 교육이 주입식인 건 사실이잖아. 그런 주입식 교육에 12년 동안 익숙해져 온 청소년들이 어떻게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 있겠어?


A6.

edujournal

주입식 교육에 대한 비판은 중요하다. 하지만 이와 같은 논리라면 한국의 모든 사람들은 주입식 교육의 피해자이기 때문에 아무도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청소년과 비청소년이 모두 주입식 교육을 당해왔다는 것, 이로 인해 주체적인 판단이 방해받아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은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 순응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판을 깨뜨리고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도 진실이다. 6월 혁명의 주체였던 청소년을, 그리고 작년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던 청소년들을 생각해보면 명료하다.

어른들은 청소년과 자신을 매우 엄격하게 구분하는데, 객관적으로 봤을 때, 별로 다르지 않다. ‘어른들은 청소년만큼이나 잘 속고, 거짓과 진실을 잘 구분하지 못하고 루머와 가십을 사실이라고 믿기도 한다. 나이 몇 살 더 먹었다고 해서 청소년에 비해 자신들이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라고 주장할 수 있는 하등의 근거가 없다. 청소년들은 말한다. “우리도 생각이 있고 우리도 판단력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더 많이 서로를 선동하고 또 선동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정치의 핵심이다. 선동 당할테니 정치참여권을 줄 수 없다는 것은 정치에 대한 무지일 뿐이다.

 

Q7.

giga****

아니 의무를 지켜야 권리를 주지? 군대도 안 가고 세금도 안내면서 하라는 것만 많아. 하라는 공부나 해라 지 밥벌이도 못하는 것들이.


A7.

edujournal

사실부터 정정하자면 만 18세는 납세의 의무도 진다. “사회시간에 공부 제대로 안 하셨군요.” 그리고 가장 왜곡되어 있는 개념이 의무를 지켜야 권리가 성립한다는 것인데 권리는 조건부가 아니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이 권리이다.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행복추구권을 떠올려보면, 어떤 의무를 지켜야만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국방의 의무를, 납세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권리가 제한되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Q8.

goun****

아니 근데 열여덟살이 시간이 어딨어. 신문이나 뉴스 볼 시간도 없을텐데. 어차피 입시공부 때문에 바빠서 선거 때 관심도 없다가 아무나 찍지 않을까?


A8.

edujournal

일리 있는 말이다. 하지만 이런 질문을 먼저 던지고 싶다. ‘성인들은 일상 때문에 바빠서 어떻게 선거 때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가? 아침 9시까지 출근해서 퇴근도 못하고 야근도 특근도 하는 일상을 사는 것은 어른들도 마찬가지임을 알고 있다. 비청소년도 똑같이 아무나 찍으면서 말이 많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건 아니다.

 

바쁘고 정신없는 일상 속에서도 정치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아야 한다고 모두가 말하는 이유는, 정치는 일상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난하고 모순적인 일상을 바꾸고자 시도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며, 정치의 일부인 선거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숨가쁜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바탕으로 더 나은 삶을, 더 나은 매일 매일을 위해서 정치에 참여한다. 그러나 청소년과 비청소년 모두 매일의 일상을 살아감에도, 19세 이상에게만 제한적으로 그 일상을 바꿀 권리가 더 주어져있다는 것은 차별적인 일 아닌가?

 

Q9.

jijj****

고딩들한테 투표권 준다고? 학교가 정치판이 되면 어떡함?


A9.

edujournal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보다 본질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 교육공간은 정치가 배제된 공간을 말하는가? 그런 공간일 때만 교육이 가능한가? 교육이란 대체 무엇인가? 브라질의 교육자 파울루 프레이리는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을 주입하는 은행 저금식교육을 비판하면서 학생과 교사가 대화와 탐구를 통해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는 문제제기식교육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리고 단순히 머리로만 아는 지식에서 그치지 않고 삶과 현실을 바꿔내는 프락시스’,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결국, 교육이라는 것은 학생에게 지적 만족을 주는 것을 넘어서,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의 진실을 마주할 수 있도록 돕고 자신의 삶의 문제를 바꿔낼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선택의 문제이기도 하다. 어떤 관점으로 세상을 볼 것인지, 무엇이 문제라고 제기할 것인지, 무엇이 필요하다고 요구할 것인지. 선택할 힘을 기르는 것, 그리고 가능한 그 선택이 진실에 가깝도록 하는 일이 교육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교육은 정치다. 끊임없이 어느 편에 설 것인지 고민하게 하는 것,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기르는 것이 교육이고 그것은 정치와 다르지 않다. 학교가 교육공간이 되고자 한다면, 그곳은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공간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학교는 더더욱 정치판이 되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학교는 침묵과 통제의 공간이었다. 수많은 반교육적 행위들이 교육으로 둔갑했다. 이 속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불만을 표현하는 학생들의 외침은 정치적이라는 프레임으로 억압당해왔다. 두발 규제, 복장 단속 등이 인권침해라고 1인 시위를 하고 자보를 적으면 학교에서 정치적인 행위를 한다며, 다른 학생들을 선동한다며 문제학생으로 낙인찍혔다. 실제로 많은 고등학교들에서 학생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제한 규정을 가지고 있다. 울산 지역의 한 일반계 공립고등학교의 생활규정에는 정치에 관여하여 행동을 한 학생은 퇴학까지 가능하다는 내용마저 있다고 한다.

 

청소년 참정권은 이 침묵의 학교에 균열을 내는 시작이 될 것이다. 청소년은 정치의 주체라는 말이 힘을 가지게 될 때, 학교에서는 어떤 학생도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처벌받지 않게 될 것이다. 학생회의 공약은 학부모와 교사의 감시를 받지 않을 것이고, 청소년들은 자신들의 의지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청소년 참정권 실현은 교육기관을 무너뜨리는 공격이 아니라 학교를 비로소 교육의 장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발걸음이 될 것이다.

 

 

 

선거연령 하향을 위한 국회 앞 농성 참여자 인터뷰

 

인터뷰어: 당근

인터뷰이: 상헌

 


지난 달, 청소년 참정권 쟁취를 위해 국회 앞에서 천막을 치고 농성을 이어갔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담아보고자 서면으로 인터뷰를 진행했습니다.

 


#1 천막 농성을 하며

 

Q. 천막 농성에 참여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지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부패한 박근혜정권의 퇴진과 세상의 교체를 위해서 청소년들도 광장에 서있었지만, 학교의 선생님들이 역설하는 학업에 지장이 있을 것이다라는 주장은 이미 그렇지 않음이 드러났지만, 아직도 많은 청소년들이 교복화장두발규제를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촛불의 열기와 적폐청산으로 대표되는 요구 또한 학교의 담장을 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요, 그렇기 때문에 국회 앞 천막농성에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Q. 천막 농성을 하면서 어려웠던 점이 있었나요?

A. 천막에 있다 보면 종종 지나가는 비청소년들이 어린것들이 뭘 알면서 이러냐는 말을 하는 걸 듣곤 합니다. 악의를 가진 사람들이 내뱉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마음의 상처로 남는다는 점이 가장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Q. 그 중 가장 기분이 나빴거나 어이없었던 말이 있나요?

A. ‘저것들은 전교조한테 선동당한 것들이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가 있었습니다. 가장 흔하게 듣기도 한 전형적인 색깔론, 배후세력 프레임을 씌우려는 말이잖아요, 당장 제가 다니는 학교에는 전교조에 소속된 선생님들이 한분도 안 계시는데 그런 말을 들으면 황당했었습니다.

 

Q. 자유한국당을 대상으로 기습 퍼포먼스을 계획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A. 선거연령 하향 과정에서 가장 크게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자유한국당입니다. 국회 방문 시 선거연령 하향에 동의한 자유한국당 의원들도 일부 있었지만, 아직 홍준표를 위시한 많은 의원들이 어린 게 뭘 아냐면서 반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판식 당일의 기습시위는 자유한국당의 태도를 고발하며 선거연령 하향이슈를 다시금 환기하는 역할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2 참정권 확대를 위하여

 

Q. 만약 선거연령을 하향 관련 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킨다면, 그 이후의 참정권 확대를 위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A. 일단 18세로 선거연령이 하향된다고 해도, 앞으로도 계속적인 선거연령 하향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적 성숙함은 결코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디까지 내릴지는 충분한 고민과 토론이 있어야겠지만요. 그리고 단지 선거날 청소년도 투표소에서 도장 찍는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투표참여와 더불어 청소년이 직접적으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수단을 찾아가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참정권 확대를 위한 움직임에서 연대할 수 있는 다른 주체들이 있다면 누구라고 생각하시나요?

A.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고, 저는 모든 사람들과 연대할 수 있고, 연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청소년들만이 아니라 비청소년들이 청소년의 정치참여를 보장하라는 요구에 함께할 수도 있듯이 가능한 한 많은 계층의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연대가 있어야 운동의 힘을 얻으니까요.

 

#3 청소년이 주체로 서기 위하여

 

Q. 청소년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 혹은 편견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그에 대해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주세요.

A.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청소년들을 오로지 뭘 모르는 어린애들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번 농성을 진행하면서도 인터넷상에서 많이 들은 말인데요, 이것이 바로 편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청소년들은 결코 뭘 모르는 어린애들이 아니라 동등한 시민이라는 점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Q. 청소년이 이 사회에서 주체로 서기 위해서, 참정권 획득 이외에도 어떤 과제가 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나요?

A. 단지 참정권의 보장범위 확대로 그치지 않고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린것들이 뭘 아냐는 식으로 청소년들을 자신들보다 무지하고, ‘더러운 어른들 정치판에 왜 끼어드려 하느냐는 말처럼 청소년들은 순결해야 한다는 시선으로 청소년들을 바라본다면 청소년들에게 참정권이 있어도 과연 그 권리들을 제대로 누릴 수 있을까요?

 

#4 개인적인 질문

 

Q. 청소년 운동 혹은 청소년 참정권에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나요?

A. 청소년 참정권에 관한 요구들은 예전부터 들어왔던 요구들이지만, 본격적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지난 5월 대선에 즈음이었습니다. 광장의 힘으로 만들어낸 대선이었지만 그 광장에 있던 청소년들은 빠진 채로 대선이 치뤄지는 것을 보고서 본격적으로 청소년 참정권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Q. 농성 때문에 가족이나 교사 등과 갈등을 겪었던 적은 없나요?

A. 농성과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 집에서는 제가 (청소년운동을 포함한)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눈치를 주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제가 일정들을 적어두는 다이어리를 카메라로 몰래 찍거나 집회소식을 보도하는 기사에서 제가 나온 것들을 찾아보거나, 제가 주로 이용하는 페이스북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기위해 집에서 페이스북 가계정을 생성한 뒤 저를 검색하는 행동들을 한 것들을 들 수 있겠는데, 이것도 제가 모르게 몰래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정보를 흘려가면서 저 스스로 자기검열을 하게 만드는 식으로 제 활동에 대해서 압박을 넣었습니다. 이런 부분에서 많이 부모님과의 갈등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고, 현재에는 무엇을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무슨 제약을 느끼고 있나요? 어려움이 있다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나요?

A. 앞으로도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 보장과 청소년들을 향한 혐오의 시선들을 타파하고 싶고, 청소년운동 뿐만이 아닌 모든 의제에서 제 나름대로의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사실 청소년들의 삶이 학교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교육현장만이 아닌 노동현장, 일상에 모두 있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나 맞닥뜨리는 어려움은 머리 속에서 제가 원하는 이상에 대해서 그림이 안 그려지고 그것을 말로도 풀어낼 언어가 없다는 것인데, 이것은 계속 운동 현장에서 주변 사람들과 고민하고 대화하면서 지식을 쌓아가야 하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렇게 지식이 쌓여가다 보면 제가 나아가고 싶은 방향도 명확해지고 목적의식 또한 선명해지지 않을까요?

청소년 참정권 논쟁 - 잠깐 발 담갔다 빼보기

뚱인데요



1. 보편적 인식

입법자는 우리의 현실상 19세 미만의 미성년자의 경우, 아직 정치적·사회적 시각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거나,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현실적으로 부모나 교사 등 보호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독자적인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신체적 자율성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고, 선거권 연령을 19세 이상으로 정한 것이다.’

중등교육을 마치는 연령인 18세부터 19세의 사람은 취업문제나 교육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정보통신, 특히 인터넷의 발달에 가장 친숙한 세대로서 정치적·사회적 판단능력이 크게 성숙하게 되므로 독자적인 정치적 판단능력을 갖추었다고 보아야 한다. (중략) 병역법이나 근로기준법 등 다른 법령들에서도 18세 이상의 국민은 국가와 사회의 형성에 참여할 수 있는 정신적육체적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인정하고 있고, 18세를 기준으로 선거권 연령을 정하고 있는 다른 많은 국가들을 살펴보아도 우리나라의 18세 국민이 다른 국가의 같은 연령에 비하여 정치적 판단능력이 미흡하다고 볼 수는 없다.’

 

판결문의 결정요지에서 알 수 있듯이, 헌재가 대변하는 대한민국의 보편적 인식은 '19세 미만은 정치활동을 하기엔 미성숙한 세대'이다. 물론 이를 증명하는 실물 증거는 미약하나, 이는 반대 의견에도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이므로 까놓고 말해서 특정 세대의 정치적 성숙함을 판단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뇌피셜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이런 상반된 인식이 한 판결문 안에 실릴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한 번 생각해보자. 한 사람의 생애에서 '겨우 한 살을 더 먹었다고' 의식이 확 성장하는 경우는 얼마나 존재할까? 물론 대부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정치의식의 성장을 담보해주진 않는다. 오히려 바쁜 세상에 치여 정치에 관심을 쏟을 틈마저 사라지기도 하거니와 개인의 생애주기에 있어 늘 발전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런 개인간의 차이가 참정권에서 반영되진 않는다. 아니, 반영되어서도 안된다. 하지만 부정확한 기준에 의거해 시민에게 가장 중요한 권리 중 하나인 참정권의 부여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 할 수밖에 없다.

 

한편 선거 가능 연령과 관련된 주제가 뜰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19세도 낮다. 더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한민국의 시민의식이 20대조차 제대로 된 정치판단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관심도 없는 주제에 자극적인 기사 하나만 뜨면 바로 선동되는 사람들한테 어떻게 맡기냐.’ ‘저런 사람과 내가 같은 한 표라니 좀 그렇네.’ 대충 뭐 이런 반응들인데, 물론 대한민국의 시민의식이 선진국보다 훨씬 딸린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는 사실이나, 윗세대라고 해서 20대보다 더 이성적으로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가? 글쎄다. 그럼 전부 의식수준이 낮으니 역시 대한민국은 아직 민주주의를 하기엔 부족하니 과거의 현명한 지도자들을 본받아 엘리트주의로 회귀해야 하는 걸까? 당연히 아니다. 저렇게 말하면서 선민사상 내뿜는 사람들도 막상 따지고 들어가면 알맹이 없는 건 매한가지일 확률이 크다는 건 잠깐 무시하더라도 유독 그런 비난이 ‘20대 초반에게만 집중된다는 건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리고 보통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갓 20대 초반을 넘겼거나 비슷한 연배라는 것 또한 그렇다. 원래 사람은 1년 전의 자신을 가장 부끄러워한다고 했었나...

  

2. 참정권이 왜 필요한데?

이런 논의를 하기 전에 우선 이 질문부터 던지고 시작해보자. '참정권을 왜 줘야 하는 건데?'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답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제도가 당연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우선 시민이 직접 자신들의 지도자를 뽑는 제도가 정착된 것이 - 특히 한국은 - 인류사에 비하면 그렇게 깊은 역사도 아니거니와, 초창기엔 이 시민마저 부유층, 백인, 남성등으로 한정되었었다. 당장 민주정의 가장 오래된 형태라 하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미성년자, 외국인, 노예, 여성이 아닌 성인 남성에게만 참정권을 보장했으며, 근대로 넘어와서 이를 타파하는 운동은 서프러제트처럼 큰 사회적 변혁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백래시 논리는 늘 하나의 지점으로 귀결되었다. ‘그런 의식수준의 계층에게 어떻게 정치를 맡기느냐.’ 결국은 또 의식수준이다. 앞서 잠시 주석으로 언급했던 시험으로 참정권을 갈라야 한다.’는 주장도 결국은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정치는 똑똑한 사람만 하는 거였나?

 

근본적으로 '의식수준에 따라 정치활동을 제약한다.‘는 발상에 의구심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정치는 개인의 지적 우월함을 뽐내는 무대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를 요구하는 광장이다. 비정규직은 참정권이 있기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정규직화 및 정규직에 상응하는 대우를 요구할 수 있고, 청년들은 참정권이 있기에 청년 정책을, 노인들도 참정권이 있기에 노인 복지를 요구할 수 있다. 이는 참정권이 인권의 영역에 있기 때문인데, 실제로 참정권 운동은 항상 근본적인 인권 향상 운동과 연계되어오지 않았는가? 결국 참정권 그 자체가 인권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완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이제야 보편타당해졌다. 적어도 말로는 그렇다. 참정권은 이를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도구 중 하나라는 점에서, 결국 참정권은 그깟 의식수준 따위가 아닌 절실한 필요에 의해 부여되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따져야 하는 건 참정권의 부여가 그들의 필요를 해결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느냐.’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모두를 위해 가장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민주주의의 이상향은 어디인가이다.

 

3. 청소년 참정권 그 자체의 의미

실제 판단력이 어떻든 간에, 대한민국 법은 특정 연령이상의 국민을 정치 참여의 주체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국민은 정치 참여의 주체로 인정받기 시작함으로써 정치 참여의 자격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낙인효과에 대해 아마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회가 누군가를 일탈자로 인식함으로써 그 사람은 실제로 일탈자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말썽꾸러기로, 거짓말쟁이로, 전과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그 틀 안에서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정치를 하기엔 미숙한 존재로 낙인찍힌 학생들은 그 틀에 맞춰서 성장할 가능성 역시 크다. 그러니까 그 틀을 완전히 뒤집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아예 없애는 것도 괜찮겠다.

 

이는 학교 현장에서 더 건전한 토론이 활성화되는 것도 기대해볼 수 있다. 정치가 터부시된 교실에서 온라인 커뮤니티의 사상이 일부 학생들을 중심으로 알음알음 퍼지던 게 그동안의 교실 현장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교실 안에서부터 시작하는 정치를 만들어보자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교실은 더욱 정치적이어야 한다 이 말이다. 정치적 발언이 터부시되거나 혹은 교사 한 명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교실이 아니라, 모두가 매 시간마다 끊임없이 고민하는 교실을 만들어 놓아야 맨날 서로 그렇게 까기만 하는 입시 위주 교육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해결될 기미가 보일 거 아닌가.

 

4. 마무리하며

대학교에서 새내기 맞이를 준비하면서 끊임없이 되뇌이는 원칙이 하나 있다. '새내기의 주체성을 무시하지 말자.' 즉 새내기를 어린 존재, 단순히 고등학교라는 좁은 세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대해 배워야 할 맑은 영혼정도로 간주해선 절대 안되며 오히려 동등한 주체로 대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자리로 새맞이를 구성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는 선후배간 위계질서를 타파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원래 그렇게 생각하던 새내기가 있었다면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혹여 늘 배우는 존재로만 머물러 있었던 몇몇 새내기가 있었다면 거기서 깨어나라고 외치기 위함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뭘 배운다고 정치를 한다고 그러냐.’고 묻는 사람들은 그 손가락을 학생이 아닌 학교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딱 봐도 학교가 애들에게 가르치는 게 없어 보이면 학교를 바꿔야지 왜 학생을 그 틀에 맞추려고 하는가. 교육이 발전할 때까지 학생들 보고 기다리라고 할 수도 없는 법이다. 오히려 교육을 가장 필요로 하는학생이 교육을 바꿀 수 있는 학교를 만들어보자. 그게 더 효율적인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문화비평즐거운 나의 집”(공지영)

말차라떼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관념 중에 하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이다. 정상가족이라는 말이 존재한다는 것은 비정상가족에 대한 관념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것이 정상가족이고 어떤 것이 비정상가족인가? 흔히 엄마와 아빠, 자녀가 기본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정상가족이라고 한다. ··고등학교에서는 새 학기 첫 날에 항상 적어서 내는 나를 소개합니다종이가 있다. 여기에는 부모님의 직업은 무엇인지, 가족 구성원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 등이 적혀져 있다. 이 종이를 바탕으로 담임교사는 학생과 상담을 진행하게 된다. 한부모 가족, 이혼 가족, 재혼 가족, 조손 가족, 심지어는 다문화 가족까지 결손가족혹은 비정상가족으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결손가족으로 분류된 이들은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은 정상가족의 틀에서 벗어난 이들에 대한 차별의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손 가족의 학생이 문제를 일으키거나 저조한 성적을 보일 경우 엄마(또는 아빠)가 없어서 그래”, “가정교육이 문제여서 그렇지라고 단정 짓기 태반이며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기 일쑤다. 비정상가족은 덜 행복할 것이며, 불행을 겪기 쉽고, 어딘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과 편견은 너무나도 비일비재하다. 본인의 가족을 비정상가족이라고 지칭하는 사회적 시선 속에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

즐거운 나의 집에서 위녕의 가족은 평범하지 않다. 위녕은 엄마와 두 명의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데 세 남매의 성은 모두 각각 다르다. 위녕의 어머니는 두 번 재혼 하고 세 번 이혼을 해서 홀로 세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이 가족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공중파 드라마의 전형적인 클리셰는 이복형제 사이의 다툼, 새엄마 혹은 새아빠와 자녀의 갈등이다. 재혼 가정에서 부모나 자녀 중 한명은 소외되어 있으며 괴롭힘을 당하고, 이복형제끼리는 항상 서로를 시기, 질투하며 계략에 빠뜨리려고 하는 내용들은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현실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위녕의 가족은 이런 클리셰를 타파한다. 성이 다른 세 남매는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위녕과 동생들은 서로를 챙기고 따르며 잘 지내지만 시시껄렁한 일로 다투기도 한다. 위녕의 어머니는 어느 누구를 편애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며 항상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말을 해준다.

행복하고 문제없는 이 가정의 가장 큰 문제는 남들의 시선이다. 작가인 위녕의 어머니에게 늘 붙어 다니는 이혼녀 꼬리표, 남들의 불편한 시선, 수군수군대는 소리... 위녕의 어머니가 남에게 밉보일 때 항상 듣는 소리는 왜 이혼을 세 번씩이나 했는지 알 것 같다이다. 심하게는 위녕의 어머니같은 사람 때문에 우리 사회가 가정이 파괴되고 아이들이 잘못된다고까지 한다. 위녕과 세 아이들은 불쌍한 아이들이라며 동정을 받는다. 과연 누가 문제인가? 평범하지 않은 것이 마치 잘못인 것처럼 말하며 비난하는 사람들, 당사자의 상황을 알지도 못한 채 남발하는 동정인 척하는 위선은 안타깝게도 현실이다.

위녕의 어머니가 두 번씩이나 재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위녕 어머니의 첫 번째 남편이자 위녕의 아버지는 작가인 위녕 어머니에게 직장을 때려치고 육아와 살림에 전념하기를 강요했다. 두 번째 남편은 위녕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정상가족을 유지하려면 이 모든 고통과 상처를 감내해야 하는 것인가? 이렇게 유지되는 가정이 어떻게 정상일 수 있는가? 지금도 누군가는 자신의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갈등과 폭력을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족제도의 유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은 계속해서 묵인되어 왔고 가족제도를 해체시키는 이혼제도는 사회에서 부적절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낙인찍혀왔다. 이혼율이 증가하는 현상을 마치 우리 사회가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로 여기지만 정작 비정상가족에게 찍히는 낙인과 차별, 배제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남들의 시선을 잘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 의해 살아가는, 한 마디로 쿨한 성격을 지닌 위녕의 엄마조차도 성씨가 다른 세 아이를 키우면서 스스로에 대한 주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야말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저자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누군가 새로운 의미의 가족에 대해 작가 본인과 작가의 아이들의 이야기를 수필로 써달라고 요청한 것이 시작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가족의 의미도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저자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날 가족의 형태는 확실히 예전과는 다르게 다양해지고 있다. , 더 이상 이 다양한 가족들을 어떤 하나의 틀로 묶을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이를 하나의 틀로 억지로 맞추고 재단하려고 하다 보면 당연히 삐그덕거릴 수밖에 없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 가족이 남들의 기준으로 보면 뒤틀리고 부서진 것이라 해도, 설사 우리가 성이 모두 다르다 해도, 설사 우리가 어쩌면 피마저 다 다르다 해도, 나아가 우리가 피부색과 인종이 다르다 해도, 우리가 현재 서로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해도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가족이니까,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명사는 바로 사랑이니까 가족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야만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 구성원들을 연결하는 끈의 정체를 저자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랑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집필진 후기>

 

당근

교육저널에서 기자로 활동한 첫 학기인데, 처음에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어서 욕심을 많이 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저는 글을 많이 쓴 것도 아닌데) 쉽지가 않더라구요. 또 시간도 품도 꽤나 많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글도 처음에 고민했던 것만큼 잘 나온 것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조금은 확신이 없습니다. 페미니즘 교육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고 현장에 힘이 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막상 쓰면서는 제가 포착한 경향이 현장의 것인지, 현장 외부에서 논의를 하는 사람들의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힘든 현장에서 나름의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고 계신분들께 실례가 되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대학(이론)과 현장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니까 말이에요. 글이 나와서 평가를 받게되면 더 고민해볼 여지가 있겠지요.ㅎㅎ 개인적으로는 여러 피드백을 받고 저의 관점과 평가를 설득하며 고민을 키워나갔던 것이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남아있는 것이 기쁩니다! 이번 학기 제가 벌려 놓은 여러가지 일 중에 유일하게 남은 가시적 성과가 아닐까요...ㅎㅎ 방학동안 책도 읽고 충분히 쉬고, 다음호에서는 조금 더 성장한 고민과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이물

2주 동안 붙잡고 있던 내용을 다 지워버리기도 했고, 한 문장을 못 써서 다시 2주를 질질 끌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벼락치기처럼 써내버린 글들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여주고 그 관점을 제안하는 정도면 되지 않을까하여 자족하고 있네요. 또 어쩌면 당연한 소리를 했지만, 제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을 써내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고, 몇 년 만 지나도 그 직관이 역사적인 것, 쓰지 않았다면 사라질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힘을 냈습니다.

교육을 둘러싼 우리의 고민과 움직임이 죽었다고들 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치열함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언제쯤 제가 가진 교육에 대한 질문들에 답을 얼추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꾸준히 이어나가보려 합니다.

 

그래놀라

저는 이전까지 하던 동아리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끼면서 새로운 동아리를 해보자!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교육저널에 함께 하게되었습니다. 사실 글 쓰는 것에 별로 자신도 없었고 아는 것도 없었는데 교널 활동하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던것같아요!!(물론 여전히 부족하지만) 사람들도 전부 좋은 사람들이었고 또 인지하지 못했던 중요한 사실들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또 교육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진로 면에서도 더 생각할 폭도 넓어진것같습니다.

이번 학기에 교널에 들어간 것은 정말 운명이 아니었나 싶네용ㅎㅅㅎ 좋은 추억과 기회 주셔서 참 감사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울바

-(울트라바이올렛이라는 뜻)! 안녕하세요, 이번에 처음으로 교육저널과 함께하게 된 저는 울바입니다:) 진부한 말인지는 몰라도, 글 쓰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아는 것도 별로 없어서 남에게 보여줄 글은 더더욱 못쓴다고 스스로 생각하던 저였지만 한 학기 동안 글을 위해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조사하고, 글을 쓰고, 서로의 글을 읽고, 여러 번 글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걸 느끼고 생각하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하게 된 교육저널이지만 점점 중요한 부분이 되어갔고 이젠 제 생활에서 교널을 빼면 너무 허전한 지경이 되어버렸네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교육저널과 동료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저희 저널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도 제 사랑을 드립니다~!!

 

말차라떼

저에겐 이번 호가 2번째 교지인데 첫 번째에 쓴 글과 비교해보면 살짝 더 나아진 느낌이 들어서 뿌듯합니다. 이번 호의 글들은 평소 제가 관심이 있었고, 한 번쯤은 글로 남겨보고 싶었던 주제라서 다 쓰고 나니 보람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글쓰기는 항상 어렵습니다ㅠㅠ) 특히 이번 학기에 새로운 교육저널 멤버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교널 멤버들 앞에서는 비록 말 못했지만 다들 너무 좋아! 좋다구! 앞으로도 함께 모여서 회의하고 좋은 시간 가졌으면 좋겠는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교지를 한 번 펼쳐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는 마음을 전하며 이만 줄입니다~ :-)

 

뚱인데요

어쩌다 보니 세 학기나 함께하게 된 교널! 허나 내놓은 작품은 이번이 가장 초라한 거 같네요...패기롭던 새내기의 체력은 어디 가고 이젠 수업 한 번 출석하는 것도 벅찬 대2병 걸린 정든내기가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아 이것저것 다 손대다가 결국 제대로 남은 게 없는 학기지만, 그래도 함께하는 그 자체로 교널은 즐겁습니다 꺄아 :) (글쓸 때만 빼고 ㅠㅠ) 아무튼 이번엔 야심차게 준비했던 건 다 날라가버리고 조촐한 글 하나밖에 싣지 못했지만 다른 글들의 퀄리티 + 여러분의 아량을 믿고 저는 버스에 탑승...하겠습니다...여기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학 내 페미니즘의 오늘 페미니즘 생태계를 꿈꾸며

 

이물

 

1. 대학, 교육, 페미니즘

 

 ‘페미니즘 교육은 무엇인가? 그 목표는 정해진 페미니즘으로 학생을 훈육하고 계몽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현장에서의 페미니즘 윤리, 혹은 사회비판적 교육이라는 의미의 페미니즘 지식을 만들어가는 정치가 필요하다.

초중등교육에서의 페미니즘을 일방적 훈육으로만 사고할 때, 학생운동과 여성운동으로 상징되는 대학 내 페미니즘과는 그 괴리가 커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페미니즘 교육을 위한 페미니즘 정치를 사고할 때, 대학에서의 여성운동은 오히려 이것을 이미 상당부분 수행해왔다고 보아야한다.

 

교육은 기존 사회의 규범에 맞게 개인을 사회화하는 기능을 갖지만, 동시에 기존 사회를 비판하는 힘을 갖게도 한다. 사회 비판적 지식을 생산하려는 교육은, 사회 비판적 운동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그 자체로 운동이다. 야학과 노동운동의 관계, 대학과 학생운동의 관계가 이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 대학생들의 운동은 피교육자가 교육의 주체가 되는 경험이었다. 초중등교육의 교육할 내용, 교육하는 사람, 교육받는 사람은 교과서, 학교와 교사, 학생이다. 대학의 경우 교육 내용은 교과서에 비해 다양한 조건에 의해 정해진다. 한편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구분을 넘어 학생들은 학회를 꾸려 스스로 교육공동체를 만들고, 학생자치를 실현해왔다. 이처럼 대학에서는 교육되는 지식에 대해 많은 주체들이 경합하고 있다. 경합의 장은 사회 비판적 교육의 기능이 발현되는 데에 유리한 조건이 된다.

이런 조건 위에서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은 공동체의 페미니즘 윤리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여성주의 학회들과 여성학 강사와 조직들은 페미니즘 지식을 생산해왔다. 대학은 이미 페미니즘 교육의 정치를 수행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초중등교육에서 제기되는 페미니즘 교육 담론은 제도화나 교육과정 편성, 교사 중심 논의에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서 이루어졌던 지식에 대한 경합을 살펴보는 것이, 그러한 한계점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과정이 초중등교육에 아예 부재했던 것도 아니다. 이미 십대 청소년 활동가들과 정치조직이 존재하며, 역사적으로는 학생자치기구를 기반으로 한 고운(고등학교운동)’이 존재하기도 했다.

결국 일방적 교육을 넘어서는 페미니즘 교육의 정치를 지금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는 현재 대학의 페미니즘 정치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 와해된 대학 여성운동을 다시 생각하고, 초중등교육의 페미니즘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서울대의 페미니즘 학생 단체를 중심으로 이를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페미니즘 교육을 넘어, 사회 전반을 바꿔내려는 페미니즘의 흐름에서 대학의 의미를 다시 고민해보았으면 좋겠다.


 

2. 대학 내 페미니즘의 현황 서울대 학생 단체를 중심으로


1) 2016년 메갈리아와 강남역 살인사건을 전후하여

 

 ‘페미니즘 리부트’, ‘영영페미니스트, ‘뉴페미니스트’... 2016년 이후의 페미니즘을 일컬을 때 자주 언급되는 단어들이다. 지금의 페미니즘과 2010년대까지의 페미니즘에서 일종의 단절성과 차별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단절성이 객관적인지, 주체들이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인지는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그간 위기 담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이 2018년인 지금, 가장 뜨거운 화두로 변모한 것은 사실이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은폐되어 있던 여성억압을 폭발적으로 가시화했고, 강남역 살인사건은 사람들이 이를 실물화된 위협으로 느끼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역차별 논쟁과 페미니즘에 대한 낙인찍기도 심각해졌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쇠퇴기를 상징하는 신자유주의16년 이후의 여성혐오가 겹쳐있는 곳에 서 있다.

대학에서도 이런 양상이 펼쳐진다. 높아만 지는 취업에 의한 부담, 학생회 재선거와 무산 속에 반복되던 학생운동의 위기담론은 대학 내 여성운동에도 적용되었다. 이 위기가 정확히 왜 촉발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은 다양했지만, 실체 없이 담론만 반복되는 거 아니냐는 자조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현실이 됐다. 그러나 16년 이후 페미니즘은 주요 화두가 되고, 다양한 페미니즘 학회와 소모임, 관련한 단체 및 산하기구가 생겨나고 있다.

서울대의 경우, 주요 단체 중 16년 이전부터 존재한 단체에는 여성주의 학회 달’ (2013년에 지금과 같은 형태 갖춤) ‘학생 소수자 인권위원회’(2015년 설치)가 있다. 한편 16년 이후 지금, 여기 : 관악의 페미들’(20162학기), ‘경영대 여성주의 학회 여파’, ‘공과대학 페미니즘 동아리 공해’(20181학기) 등 단체, 소모임들이 생겨났다.

각 학생회 단위는 매년 새맞이나 선거 기조에서 페미니즘을 천명하고 공약을 제출해왔다. 올해 제36대 사회대 학생회는 학내 페미니즘 단체들과 3.8 여성의 날 행사를 공동주최했으며, 대학생 공동행동에 결합했다. 2017년 제38대 사범대 학생회는 학소위와 인권침해사안을 해결하고 강연회를 여는 등 자치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2016년 제33대 인문대 학생회 역시 X반 단체 카톡방 성폭력 사건을 총학생회, 학소위와 공동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생회들이 페미니즘 의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선도하는 입장이라기보다, 복지 사업 정도로 진행하거나 학소위를 보조하는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명확한 정치적 계보가 부재하고 해마다 지형이 바뀌는 최근의 학생회들을 학교 전체 단위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료와 섬세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는 페미니즘(혹은 젠더 문제)를 뚜렷하게 지적하고 있는 상설 단체들만을 다루려 한다.

  

2) 분석

 

- 다양한 형성배경과 위치

 

 총학생회 산하기구인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2015년 수리과학부 K교수 성폭력 사건 등을 계기로, 학생사회에서 인권 사안을 다룰 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총학생회 산하기구로 결성됐다. 그러나 15, 6년에는 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2대 학소위장의 한남논란과 사퇴로 그 힘을 잃기도 했다. 감사와 재정비를 거쳐 162학기부터 활동을 재개했고, 현재는 학내 인권 사안 해결을 주도하고 인권 강연을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6년 이전부터 활동했고, 뚜렷하게 이전 여성운동을 계승하려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이 유일하다. 달의 원형은 사회대 중심의 여성주의 교류 모임이었는데, 2012-13 ‘성폭력 대책위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학생사회 내의 페미니즘에 대한 이견이 표면화되자, 이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지금과 같이 학회의 형태를 구축하게 됐다.

페미니즘 모임인 지금, 여기 : 관악의 페미들의 경우, 20162학기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인권주간 부스에서 시작했다. 부스의 반응이 좋았고, 당시 페미니스트에 대한 낙인에 맞서 심리적 지지를 보낼 관계가 필요해 만들게 됐다고 한다.

단대 학생회를 중심으로, 최근 공과대학 페미니즘 동아리 공해경영대 여성주의 학회 여파가 형성됐다. 두 모임 모두 해당 단대에서 여성(및 인권)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이 크게 작용했다. 직접적으로는 공해의 경우 달에서 활동하던 학우가 주도해서 동아리를 만들었고, 여파의 경우 몇몇 학우가 진행하던 여성주의 스터디가 오픈 세미나 이후 확장되어 학회가 됐다.

 

- 공통된 분노, 다른 문제의식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각 단체들이 다른 조직적,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학소위를 제외하고 모든 단체들은 비공식적인 학회/소모임의 형태를 띠고 있다. 공해, 여파는 기존의 학생회 단위를 중심으로 여성주의 이론을 학습하고, 실천으로 이어가려는 목적을 갖는다. ‘은 명확히 학생회 단위에 구속되지는 않지만 체계화된 학회 운영을 지향하고 있으며,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넘어서 상호교차성,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등을 고민하는 정치적 관점을 갖고 있다. 여파와 공해 역시 신생 학회의 어려움을 고려하면서도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공해의 경우 과학기술의 객관성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에 관심이 있다.

반면 관악의 페미들의 경우 학회나 동아리의 정체성은 부재하며, 때문에 정치적 관점이 단일하지 않고 구성원별로 원하는 것이 각자 다르다. 기존 학생회 단위를 벗어나 전 관악을 대상으로 느슨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활동은 카톡방을 중심으로 사안별로 가능한 사람끼리 모이거나, 원하는 책이나 사업을 제안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관악의 페미들은 16년 이후 영영페미니즘들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존 제도(학생회 기구)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낮게 인식하고, 정치적 입장의 단일성보다는 유동적이고 느슨한 네트워크 기반 사안 중심의 활동이 그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는 이미 90년대 영페미니즘의 조직 방식이기도 했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는 각 대학과 기층 단위가 존재하고, 이 단위 간의 느슨한 연대체가 구성된 것이었던 반면, 최근의 경향은 가장 기본적인 단위조차 네트워크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반성폭력 운동이라는 고정적인 의제가 있었던 90년대에 비해 단체들이 직접 주도하는 주요 의제는 찾기 힘들다.

 

그런데 이때, ‘어떤페미니즘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 불과 2~3년 전에 비해 훨씬 많은 학우들이 페미니즘을 접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있다는 건 여성운동의 엄청난 성과이고, 다른 사람들이나 단체들만큼이나 달 역시 지금까지 여성억압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해온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이후를 물어야 합니다. 미투 운동의 엄청난 사회적 동력이 어디로 향해야 정말로 보편적인 여성해방을 성취할 수 있을지,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기존 급진 페미니즘의 실수는 물론이고 가면을 바꿔 쓰고 또 다시 나타날 똑같은 백래시를 피하면서 더 진보할 수 있을지, 이런 질문들을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각자가 원하는 바가 달라요. 학회나 이런 건 목적이 뚜렷하잖아요. (...) 관페는 목적성 있는 단체가 아니다 보니,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존재하고, 연대활동을 할때에 하는 사람만 하는? 그런 게 있어요. (...) 동아리는 구성원이니 행사에 참여해라 이렇게 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반면 이거는 아닌 거죠. 활동을 하고자 하는데 도와줄 사람은 도와 달라. 그게 어려움이 좀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 관악의 페미들

  

- 제도화와 정치성의 탈색

 

 그간 진행됐던 반성폭력 운동은, 각 대학들의 반성폭력 학칙이나 내규를 통해 제도화되었다, 서울대에서도 인권센터, 학소위가 그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162학기 이후 학소위 활동이 정상화되고부터는, 학내 인권침해사안의 해결은 거의 모두 학소위의 손을 거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여성운동의 정치적 관점을 확장하는 한계선을 긋기도 한다.

특히 반성폭력의 흐름에서, 제도화 이후 사건 해결 자체만 반복해서 진행되고,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고 공동체적으로 해결할 것인지의 논의는 축소되었다. 이는 성폭력의 개념을 정치적으로 재구성하고, 사건 해결 과정의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피해의 개념을 제시한 이전의 여성운동과는 대비되는 지점이다.

 

학소위는 지금 반성폭력 학칙 같은 뚜렷한 의제를 내지는 않지만, 성폭력 사건 접수를 해왔고, 공동체적 해결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온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학소위 2기에서 그런 일(2기 학소위장의 사퇴)이 벌어졌고, (...) 3기에서는 (여성 인권 문제제기를) 뚜렷하게 하지 못했죠. 반성지점이라고 생각하고, 4기에서 시도해보자 하고 있는데 (아직)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 학소위

 

학생회 기구로서의 역할과 학내 모임으로서의 역할은 다르고, 학생회 기구는 제도적인 것, 사건 접수, 학교 제도 차원에서의 접근이 진행된다면 모임은 문화적 변화를 촉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학소위

다른 사회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것을 인정해주는 사회가 있었고, 인정해주는 문화가 있어왔고. (...) 대학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관습을 갖고 이행해왔는지에 대해 잘못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발생한거다, 라고 원인을 밝히는 작업들을 같이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공대라는 단과대에서 이런 일들을 마주했을 때, 개별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어 사건처리만이 아니라 더 넓은 것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공해

 

학소위 인터뷰에서 언급된 것처럼 제도화된 기구가 사건해결을 맞는다면, 이에 대한 정치적 담론을 확장하는 것은 페미니즘 모임들의 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지금은 이러한 상호작용이 잘 수행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인권 침해 사안에 대한 문제제기는 반복되고 있지만, 학소위의 정제된 진상조사보고서 이후 이를 적극적으로 공론화하고 공동체적 페미니즘 윤리를 재구성하려는 학회/학생회 단위의 노력은 뚜렷하지 않다.

 

한편 페미니즘 지식을 생산하는 역할 역시 정체되어 있다. 언급했듯 관악의 페미들은 뚜렷한 정치적 지향이 있지 않다. 신생 단체인 공해와 여파는 물론이고, 달 역시 다양한 페미니즘 논의에서 이론을 어떻게 정립하고, 현실과 연결할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학소위의 경우 사건 해결만 해도 많은 공력이 들고, 산하기구로서의 정치적 부담 등으로 인해 여성 의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뭐가 될진 몰라도 모두가 같은 입장을 가질 수 없는 사안에 대해 여파가 입장을 취해야 할 때가 있을 거고, 그럼 밖에서 볼 때 우리가 정치적으로 어떤 위치에 서서 어떤 페미니즘을 지향하는지 알 수 있겠죠. 그러면 여파가 초기에 생각했던 것처럼 모두에게 열려 있는 대안적 공간으로 남기 힘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단순히 지적 만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참여와 실천의 학문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 여파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보편적으로 확고하게 정립되어있지 않다는 점은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합니다. (...) “여성주의를 공부하자고 하는 단체인데, 사실 여성주의를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어느 선 이상으로 넘어가면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되어버려요. (...) 일정 수준 페미니즘의 담론에 친숙해지는 과정은 필요하지만, 그 공부를 통해서 세미나 참여자들이 현실의 여성들과 연대하면서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면 머리 아픈 이론적인 학습 과정을 어느 정도는 우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 만성적 참여 부족과 사회적 낙인

 

 무엇보다, 모든 페미니즘 단체들은 만성적인 참여 부족을 어려움으로 꼽는다. 학소위의 경우 2주에 한 번 열리는 정기회의가 4, 5시간에 육박할 정도로 업무량이 많고, 진상조사 참여는 감정소모가 심한 일이기 때문에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지속가능성이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신생 단체인 여파, 공해는 물론 달도 새로운 학회원을 모집하는 것, 나아가 학회장이나 간사 등 중심 역할을 할 사람을 재생산하는 것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관악의 페미들 역시 느슨한 연대체의 형태가 갖는 재생산에서의 한계를 걱정하고 있다.

한편 소위 백래시(backlash)’라고 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 낙인도 만만치 않다. 특히 학소위는 2기 학소위장이 한남발언이 논란이 되어 사퇴했고, 당시 총학생회 디테일은 메테일’ (메갈리아+디테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관악의 페미들의 경우 동아리 가등록을 고민해보기도 했지만, 동아리 등록 시 메갈’, ‘워마드에 대한 사상검증을 요구받고 동아리 등록이 부결된 경험(국민대), 본부의 개입이나(한동대) 학생들의 반대로(서강대) 페미니즘 강연이 취소되는 등의 사례를 들며 걱정을 표했다. 서울대 커뮤니티의 역할을 하는 페이스북 대나무숲과 스누라이프에도 계속해서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글이 올라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 과정에서 현실적인 권한과 영향력을 고민하는 단위도 있다. 학소위는 타 대학의 총여학생회나 단대 학생회와 같은 선출 단위의 경우 학우들에 대한 정당성이나 예산 집행의 가능성이 있지만 학소위는 그에 제약이 있는 것이 고민지점이라고 말했다. 한편 관악의 페미들은 애초 뚜렷한 단위 기반이 없기 때문에 학우들에 대한 영향력과 권한이 부재한 것을 어려움으로 들었다.

 

이런 부담 속에서 명확한 정치적 관점을 견지하고, 체계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물리적,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앞서 언급한 정치성의 탈색이나 조직적 느슨함과 같은 상황의 원인이 이러한 어려움들에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 생각들이 만연해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별로야, 하고 인상비평으로 부정적인 의견을 표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단 말이죠. 수업시작하기 전이나, 관악 02 버스타고 올라가는 데 그런 느낌의 말을 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권유를 할 때, 페미니즘을 입에 담지 않고 그거’ ‘그 사람들이라고 칭하기도 했다더라고요. (...) 그럼 어떻게 인식을 바꿀 수 있을까. 페미니즘의 의미를 우리 것으로 되찾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하는 고민들이 있어요. (...) 불리한 전제를 그냥 놔두고 힘겹게 이어가는 게 아니라 그런 전제를 뒤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의 당위를 이야기하고 요구를 이야기하고 이런 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고민이 있습니다.“ - 공해

 

3) 종합

 

 지금의 대학 내 페미니즘은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90년대 영페미니즘의 유산인 반성폭력 운동의 정치적 힘은 제도화되고 정체되었다. 사회적 비난은 가중되고 있으며, 지향하는 조직형태가 체계적이든 느슨한 것이든, 지속가능한 조직 구성에 애를 먹고 있다. 또한 뚜렷한 문제의식과 이를 반영한 실천의제가 제출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자주 추상적 인권에 페미니즘이 편입될 것을 요구하는 비판에 직면한다.

그러나 분명히 달라진 것은, 적어도 16년 이후 이러한 어려움을 호소할 단체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 정도는 다르지만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페미니즘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한다. 경영대와 공과대학에서는 자신이 속한 단위에 대한 성찰이 생성 계기가 됐고, 달은 꾸준히 페미니즘 이론을 발굴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관악의 페미들은 척박한관악에도 페미니스트가 있다는 확인을 위해 만들어졌다. 학소위원들은 인권 사안의 해결을 위해 넘치는 업무를 감당하며, 3, 4기를 거치며 그 숫자는 늘어났다.

어쩌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지금, 그 문제의식을 담아낼 조직과 방향이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 대두됐다고 볼 수 있다.

  

3. 함께, 더 넓게 대안을 상상하기

 

 대안은 어디에 있는가? 인터뷰를 진행하며 느낀 것은 무엇보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여성운동가들 자신이 이미 그 실마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관악의 페미들은 조직의 중앙집권적 면모가 부족함에도, 기존의 학생회, 여성운동 단위를 완전히 벗어나 평범한사람들도 새로운 형태로 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학소위는 반성폭력, 페미니즘 담론을 확장하기 위한 내부세미나를 진행하고 인권 강연을 개최하는 노력을 하고 있고, 학소위가 넓은 범위의 인권을 담당하는 점이 오히려 다양한 억압들의 교차성을 다룰 가능성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달은 현실 여성들과의 연대가 이론적 난항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고, 여파는 공동체 내에서 존재감을 키워가고 더 크게 떠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공해는 신생 동아리인만큼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문화 비평 등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있다.

존재감 키우기, 새로운 사람들을 위한 진입장벽 낮추기, 다양한 억압을 함께 사고하기, 현실과 연대하기는 그 자체로 모두 옳은 지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처럼 분산된 고민들을 한 데 모으는 것이 이 글의 의무라면,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로 조직과 지향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한, 지속가능한 페미니즘 생태계를 상상해보고 싶다. 나는 적어도 페미니즘 단체의 기본 단위의 지향과 정체성은 체계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바탕으로 상시적이고 느슨한 전체 학교 단위의 페미니즘 단체 간 교류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 이는 상시적인 공동 업무 수행의 부담과 마찰을 피하면서도, 단체들 간의 논의를 자극해 그동안 약화되어 온 페미니즘들 간의 경합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학내에서 페미니즘의 존재감과 영향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는 90년대 영페미니스트들이 이미 시도한 방식이며, 서울대에도 관악여성주의자모임(관악여모)가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학소위라는 확실한 제도기구가 존재하며, 이는 얼마든지 유리한 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 생태계가 안정화되면 사회적 비난과 낙인에 대응하며 페미니즘을 생산적으로 성찰하는 심리적, 정치적 자원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회 단위와의 적극적 연대도 상상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내가 인터뷰를 진행한 주체들이 함께 이 이야기를 하면 훨씬 좋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이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둘째로 조금 벗어난 말일 수 있지만 페미니즘 교육이나 대학을 넘어서는 상상이 필요하다. 현재 대학 내 페미니즘의 실천은 대학이라는 공동체에 국한되는 성폭력 문제 해결과 복지, 혹은 실천과 괴리된 지식 생산에 머무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과거에는 사회적 반성폭력 운동으로의 확장이라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제도화된 이후 그 역할은 희미해졌다. 이는 대학 여성운동이 확장된 페미니즘적 관심을 수용하기보다 유리된 공간으로 분리, 축소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대학은 사회와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 집회에 참가하거나 지지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의제를 대학 내에서 발굴할 필요가 있다. 대학 구성원이 처한 성차별, 여성/성소수자 노동, 낙태, 학문의 젠더편향 등을 지적해나가야 한다. 이처럼 사회와 연관하는 과정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주체들의 자각과 확신, 지지의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며, 현실을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지식을 구성하고, 그 지식이 다시 힘 있는 페미니즘 운동을 조성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주제넘은 이야기였을까 걱정이 되고, 머리로는 알아도 이를 실현하는 것은 힘들고 지난한 과정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과 단체가 있으며, 또 늘어나고 있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이 대학에서 어려운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고, 당장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고, 바꾸어낼 실천 의제를 찾고, 함께할 사람을 조직하는 것은 분명 우리의 몫이다.

끝으로 인터뷰한 모든 단체가 입을 모아 했던 마지막 말을 남기려 한다.

세미나 많이 와주세요.” “더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항상 열려있습니다,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문헌

 

- 김보명, 1990년대 대학 반성폭력 운동의 여성주의 정치학, 페미니즘 연구8, 한국여성연구소, 2008.

 

더 읽어보면 좋은 것들

 

- 김영선, 한국 여성학 제도화의 궤적과 과제, 현상과 인식34(3), 2010.

- 이나영, 한국 여성학의 위치성 : 미완의 제도화와 기회구조의 변화, 한국여성학27(4), 2011.

- 이다혜, 대학 내 여성주의 운동과 정체성 형성 : 2010년대 대학생 활동가의 경험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여성학 전공, 2012.

- 한종태, 2000년대 중반 이후의 대학 내 여성주의 운동 연구 : 활동가들의 위기경험 분석을 중심으로,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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