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 2022 대학입시제도 개편안을 중심으로

딸기맥주

 

사진출처 : jtbc <스카이캐슬> 홈페이지



2019년 겨울, JTBC의 드라마 <스카이캐슬>"우리 예서, 서울의대 가야 돼",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어머님" 등의 유행어를 낳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서울의대'에 보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상류층 학부모들과 그에 맞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는) 서울의대 100% 합격률을 보장하는 입시 코디네이터가 나온다. 드라마는 매회 흥미진진했고, 입시경쟁으로 인한 청소년들의 불행을 그리며, 대학 학벌로 미래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했다. 작가는 <스카이캐슬>을 통해 지구는 둥근데 웬 피라미드냐며 피라미드 꼭대기에 닿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하며 불행한지를 말하고자 했던 것 같지만, 필자의 동생은 "저 드라마가 사교육을 더 조장할 것이다"라며 시청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으니, 실제로 입시 코디네이터 열풍이 불고, 각종 학원가에서 "전적으로 00학원을 믿으셔야 합니다"라는 유행어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현실의 청소년들은 드라마의 마지막 회처럼 쿨하게 명문고 집단 자퇴를 하고 행복을 찾아 배낭여행을 떠날 순 없기 때문이다. 입시경쟁에 매달리고 문제 하나 맞고 틀리는 것에 연연하며 짜증나 짜증난다고!”를 외치는 삶이 불행하다는 것을 몰라서 모두가 이러고 사는 것이 아니다. 평가에서의 등급이 대학을 결정하고, 노동시장에서의 내 등급을 결정하고, 받을 월급을 결정하고, 그렇게 내 삶을 옭아맨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사는 것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니들 위치야. 피라미드 어디에 있느냐라고. 밑바닥에 있으면 짓-눌리는 거고 정상에 있으면, 누리는 거야.”라는 말은 꼰대같은 아빠의 헛소리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렇다.

이번 호의 특집은 평가. 어딜가나 우리를 따라다니는 평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통제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보려고 했다. 중등교육에서의 평가, 대학에서의 학사관리엄정화와 대학 평가에 기반한 대학구조조정, 그리고 교사에 대한 평가까지. 그 중 첫 글인 중등교육의 평가에서는 내부 구성원들끼리 진행했던 세미나를 기반으로, 문재인 정부의 대학입시방안 개편과 평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했다.

 

 

 

Q. 자신의 학창시절, 시험과 수행평가에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노누 “한국지리 수행평가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제일 중요한 3학년 1학기 내신이었는데 제가 수행평가 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보는 도중에 여러 생각이 들면서 울어버렸어요. 행여나 1등급 하나라도 놓칠까 조마조마하던 때라서 머리도 하얘지고 무서웠거든요. 결국 100점 만점에 40점을 받았아요. 다른 친구들은 어려워도 70점대가 꽤 있었는데 말이에요. 다행히 기말고사로 만회했고 그게 정말 제 입시에 큰 영향을 미쳤나 싶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 끔찍했고 지금도 한국지리에 대해서는 약간 트라우마처럼 남아있어요.”

 

이물 "... 지구과학 수행평가 중에 주제발표를 하는 게 있었어요. 그런데 그 발표를 위해 스스로 실험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과한(?) 노력을 투자했던 기억이 나네요. 어렸을 때부터 과학고를 가고 싶다고 하면서 이런저런 과학 학원에 다녔던 터라 그런 열정이 나왔던 거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문과를 선택해 현재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여전히 과학에 대한 갈증이 많은데 문/이과가 구분된 이후로 접근성이 너무 높아진 거 같아 슬프네요."

 

익명이 “고등학교 1학년때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모의고사를 보고 나면 선생님들이 전교생의 점수랑 석차를 일렬로 나열한 표를 아이들한테 보여줬었던 게 기억이 나요. 전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못 봤네, 어떤 과목은 몇 등급이네, 이번 전교 1등은 누구네 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학교를 가기조차 무서웠어요. 그 땐 시험을 못 본 내 잘못이다라면서 저를 탓하고 수치스러워했죠..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들이 석차를 표로 만들고 아이들한테 보여주는 행위는 상당히 비인간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 표 안에서 우리들은 줄세워지고, 등급이나 석차로만 평가되고 분류되었던 건데..그래서 시험에 대한 두려움와 중압감은 더더욱 커졌던 기억이 남아요.”

 

딸기맥주 “저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끝나고 나서 서술형 평가 채점 결과를 보는 때가 제일 무서웠어요. 시험 본 날 채점했던 결과와 달라지기 일쑤였거든요. 영어에 s를 실수로 안 써서 그 문제 전체를 틀리기도 하고. 특히 어떤 과목은 딱 4명에게만 1등급을 줬는데, 그럴 때는 점수 1점 깎여서 5등이 되는 상상을 했어요. 어떤 친구들은 서술형 평가 결과를 보자마자 엉엉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나요. 아 그리고 수능, 저는 수능이 끝나고 나서 채점을 하기가 두려워서 5시간 동안 밖을 배회했어요. 눈앞이 캄캄하고 정말 끔찍하다고 느꼈어요.”

대부분의 교육저널 구성원들에게 평가의 경험은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비교적 평가에서의 승자라고도 불리는 서울대사람들임에도, 평가는 늘 무섭고 두려운 것으로 기억되었다. 크게는 수능에서부터, 중간·기말고사, 심지어는 내신 수행평가까지 말이다. 그 어떤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누구보다 못하고 잘했다는 비교에 괴로워하는 것이 학창시절의 일상이었다는 것에 모두 입을 모았다.

 

Q. 시험, 평가는 중요할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익명이 “시험이나 평가는 학생들 입장에서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것들임에 틀림없어요! 특히 우리나라 시험들은 고부담시험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그치만 요즘 임용고시 준비를 하면서 교육학을 공부하다가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시험이나 평가가 그 결과 자체가 아니라 학습 과정, 학생들의 성장, 목표 달성 여부로 초점을 옮겨간다면 시험에 대한 혐오감이 줄어들 것 같아요. 실제로도 저들이 더 중요하고요! 교사의 입장에서 학생 중심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선행지식, 목표달성 정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수업에 대한 성찰을 위해 학생들이 예상했던 목표를 얼만큼 달성했는지를 체크하는 것 역시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시험이랑 평가는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물론 평가 방식도 이에 따라 바뀌어야겠지만요!”

 

노누 “시험 평가가 중요하긴 한 것 같아요. 노력한 만큼에 대해서는 지표가 필요하고 그만큼 보상도 있으면 좋잖아요. 근데 그 평가가 담고 있는게 그 시험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상관 없는 것들 혹은 관계가 없는데 그렇게 보이는 것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 더 부담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험에서는 무엇보다 무엇을 평가하고 있는지 확실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물 "시험이나 평가는 학습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재학습의 방향을 알려주고 그것을 자극해주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학습자를 재단하고 학습의욕을 떨어트리기만 한다면 좋은 평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은 서열을 매기기 위해, 학습자를 평가 점수 바로 그곳에 정박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거 같습니다. "

 

당근 “평가가 중요한 이유는 학습상태를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운동을 하거나 건강증진을 꾀할 때 건강검진이나 인바디로 현 상태를 확인하고, 설문으로 원인을 파악하고, 의사나 전문가와의 면담을 통해서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찾는 것과 똑같은 것이죠. 학습 전에 진단평가를 하고, 학습 중간에는 형성평가를 하고, 마지막에는 학습 결과를 평가(용어가 기억이 안 나는군요)하며, 스스로의 상태와 어떻게 성장했는지,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다만 평가가 긍정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첫째, 평가가 학습 상태를 넘어 인격에 대한 평가가 되지 않고, 둘째, 수치화된 단순 정보를 넘어 구체적인 사례, 주관적인 분석과 장단점에 대한 균형 있는 기술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학창시절, 우리는 (물론 대학생이 된 지금도) “아 대체 시험은 왜 봐야 하는 거야!”하고 외치곤 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털어놓은 것처럼, 우리의 평가의 경험은 대체로 유쾌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평가 자체가 문제인 걸까? 교육저널 구성원들은 그건 아니다라고 답했다. 평가는 학습자의 성장을 점검하기 위해 필요하고 다음 단계의 배움을 위한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불행하게 했던 것들은 평가가 아니라, 오히려 평가가 평가답게 작용하지 못했던 상황들 때문이며 평가가 학습을 위한 긍정적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Q. 최근 모 고등학교의 시험지 유출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노누 “솔직히 처음 기사를 봤을 때 저는 친구들이랑 같은 학교 다녔던 애들이 불쌍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다시 시험을 봐야 하고 입시에 지장을 줄 게 뻔하니까요. 그 쌍둥이들이 피해자일 거라고 바로 생각은 못한 것이죠. 그래서 기사를 보고 우선 뒷통수가 맞는 기분이었고요 ㅎㅎ 반성을 잠시 하면서도 씁쓸했어요.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했냐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그렇게까지 하게 떠밀었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지. 이것이 바람직한지 먼저 질문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딸기맥주 “이 뉴스로 2018년이 한창 시끄러웠잖아요. 약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싶으면서도 일어날 일이 일어났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솔직히 시험 등급이 앞으로의 인생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 상황에서 양심이나 도덕을 먼저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냥 평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 준 사건이라고도 생각해요. 내가 얼마나 알고 있나, 어떤 지점에서 더 노력해야 할까 등의 생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냥 점수에 따른 선발, 배제와 소외만이 평가라는 걸.”

 

이물 "해당 시험에 대해서는 공정성을 해치는 윤리적 잘못을 했다고 생각해요. 같이 힘들어야만 했던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를 준 것이겠죠. 다만, 그 공정성이라는 것은 절대 철칙이 아니고, 모두가 강제 당한 시험이라는 룰 안에서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학생이 시험을 통해 차등적 성적을 부여받고, 그것으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 받는 사회가 아니었다면, 학생이 문제집 뒷면의 답지를 보든, 친구 것을 베껴 쓰든,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심지어 때로는 답지를 보거나 다른 답을 베껴쓰는 것이 학습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데요. 왜 우리는 그런 상황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언제까지 학생들은 강압적인 입시제도에 가만히 순응하며 남들 위에 서는 법을 배워야 하고, 모든 방식을 동원해서 서로의 아픔을 무시하고 찍어 누르며 살아남아야 할까요?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이 CCTV 뿐이라면 해결은 요원할 것 같습니다. "

 

세미나 때 본 기사에서, 한 청소년은 "쉽게 욕할 수 없을 거 같아요. 그 친구들을 그렇게 만든 게 있을 텐데, 그 위에 있는 구조라는 게 존재할 텐데, 그걸 이야기하지 않고 그 친구들을 함부로 욕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한테도 그런 유혹이 온다면 쉽게 뿌리치기 어려울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기사를 함께 보며, 교육저널 구성원들은 이 의견에 크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해당 사건의 당사자들을 비난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는 이번 사건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결국, 대학 서열화와 입시경쟁이 인간을 어떤 선택으로까지 밀어 넣는지를 직시하고, 이 근본 구조에 대해서 논해야 한다는 곳으로 의견이 수렴되었다.

 

Q. 대학입시제도 개편을 두고 일어났던 수능 비율 확대 vs 학종의 대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노누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수능이 공정한 평가제도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게다가 졸업 이후에 모의고사나 수능의 방향이나 난이도를 보면 무엇을 평가하고 싶은지 궁금할 정도로 문제가 난해해졌고 이걸로 학생들의 어떤 방향을 성장시키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비약하자면 한 줄로 세워서 엿가락 썰듯이 일정하게 잘라서 어느 대학은 앞에 선 학생을, 어떤 학생은 그 다음 학생 무리를 데려가는 식으로 입시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과연 대학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하고 원하는 인재상을 반영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고 학생부 종합전형이 바람직하냐고 한다면 그것도 폐해가 경험적으로도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근 “저는 둘 중 어느것도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시 비중 확대라는 주장이 어떤 심정에서 나왔는지에는 공감이 되었어요. 수능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외부에서 개입할 수 없는 객관적인 시험이니 공평하다는 것과 더불어, 오랫동안 시행되다 보니, 또 여러가지 방법론이나 정보가 (학종에 비해서는) 많이 공유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같아요. 반면 학종의 경우에는 학생부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자기소개서는 어떻게 쓰고 면접은 어떻게 대비하는지에 관한 정보가 계층별, 지역별로 굉장히 불균등하게 분포되어있고, 체감도도 굉장히 높은 것 같아요. 전형이 다양하다는 것 자체도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입시 정보에 대한 접근 장벽을 높이는 것 같기도 하구요. 하지만 한편 저는 수능 시험장에 갔을 때 오늘 하루로 지금까지의 삶이 결정된다는 중압감에 너무 힘들었고, 끝나고도 너무 허탈했는데, 하나의 획일화된 시험으로 한 사람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매우 부당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물 "수능과 학생부 종합 (수시)의 비율이 대입의 근본 해결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택하든 입시를 위한 도구적 평가가 될 뿐, 학생 자체를 제대로 평가하고 더 나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추동해주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학생부 종합전형입니다. 특정한 논리력과 사고력을 요구하는 수능과는 달리, 다양한 능력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종이 사실상 스펙을 많이 쌓아야하는 전형이 되고, 오히려 필요한 사교육이 늘어나 교육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지적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는 대학별 평가 기준이나 학교별 평가 과정을 통제하면 보완이 가능할 것입니다. 휘황찬란한 양적 지표에만 의존하는 것을 멈추고, 글쓰기, 책읽기, 연구 기획과 같은 기초 교양의 영역을 가르치는 과정을 보편화하고 이를 평가할 기준을 만든다면 대학 입시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다양화, 보편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2018, 문재인 정부가 ‘2022 대학입시제도 개편안을 논의하고 발표하면서 수시 vs 정시 비율, 수능 절대평가 여부 등이 큰 화제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교육부는 정시 수능 위주 전형 비율을 30% 이상으로 확대하도록 대학에 권고했고, 수능 평가 방식은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이러한 논의는 보통 수능이 낫냐 학종이 낫냐의 대결로 흘러간다. 그러나 교육저널 구성원들은 논의를 하면서 그나마 이 방식이 낫지만, 실상 어느 쪽에도 손을 들기 힘들다고 말했다.

 

수능의 경우는 보다 공정하다고 보통 여겨지지만, 결국 사교육의 수혜를 받은 이들에게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또한, 하루만에 치러지는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수험생들에게 주어지는 압박은 엄청나며, 학교는 획일화된 문제풀이 훈련공장으로 전락한다. 한편, 학생부 종합평가 전형은 과정 전체를 두루 본다는 점에서 보다 교육적일 것이라는 취지로 도입되었으나, 학생부를 작성하는 교사의 권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문제, 활동과 학생부 관리에 대한 정보 불평등의 문제 등이 발생하고 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낫냐의 논의로 흐르게 되면, 우리에게 대안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혹은 둘 중이 아니라도, 어떤 더 나은 취지의 대학입시제도 방법을 찾는다고 해도 결국은 비슷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대학이 계속 서열화되어 있고, 학벌이 여전히 삶을 결정하는 한, 어떤 평가도 공정하거나 평등해질 수 없으며 교육적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없다.

 

Q. 대학입시제도 개편안에서 2안이 주장했던 것이 수능 절대평가의 도입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지금도 영어와 한국사는 절대평가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절대평가로의 변화는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평가 방식은 무엇일까요?

 

익명이 “교육부가 수능 영어 절대 평가를 도입한 지 몇 년이 지났습니다. 상대평가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함이라는 취지를 내건 교육부는 학습 무의미한 경쟁과 학습 부담을 경감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저도 어느 정도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절대평가 방식에도 전혀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절대평가방식을 도입한 2018년도 수능 영어 1등급 비율은 10.03%이었는데, 이번 2019학년도 수능에서는 5.30%1등급 비율이 확 줄었습니다. 이렇게 1등급 비율이 널을 뛰는 원인에 대해 평가원은 난이도 조절 실패가 아니라 학생들의 학습 준비도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평가원의 이런 설명은 책임 회피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절대평가방식을 도입한 이상 매년 비슷한 난이도로 출제되지 않는다면 학생들에게 수능 영어는 운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점수 경쟁을 완화하고 학습 부담을 줄이겠다는 절대평가의 도입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상대평가방식을 적용했을 때 1등급 비율이 4%였는데 절대평가를 도입한 이후에도 5% 남짓한다는 것은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절대평가 방식을 도입하는 데에만 그치지 말고, 난이도 조정, 평가 내용, 최저 성취 기준을 선정하는 데 교육부와 평가원은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노누 “그렇다고 어떤 평가 방식이 가장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고 명쾌하게 내려진 답은 없습니다. 학생이 기울인 노력을 평가할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이 있으면 좋겠지만 말이죠. 우선 존재하는 대안은 절대평가인데 우선 학생들의 학업 부담은 확실히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만 절대평가 역시 점수대 기준끼리의 상대평가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명쾌하진 않은 것 같아요. 어떻게 하든 평가가 학생들의 부담을 아예 없앨 수 없다면 개선할 노력을 해야 하고 더 나은 방향을 끊임없이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생 스스로가 자신을 평가하는 방법도 좋다고 생각해요. 신뢰성은 떨어질지 몰라도 학생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꽤 잘 알고 있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딸기맥주 “저는 저 기사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더 이상 성적으로 줄 세우는 방식에 얽매여 다수 학생을 좌절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치열한 경쟁과 줄 세우는 학교 수업보다 다양한 소질과 적성, 배움이 실현되는 학교 수업이 가능해진다.’ 2안은 학교 수업을 문제풀이 시간으로 만드는 수능의 위상 강화를 경계한다. 수능 평가 방식을 전 과목 절대평가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라는 말이 크게 공감이 갔어요. 절대평가는 기본적으로 수업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능특강, 수능완성 문제 풀이가 아니라 토론이나, 활동을 해볼 수도 있고, 더 다양한 배움이 가능해질 거라고 믿어요.

다만, 현재의 절대평가처럼 여전히 결과의 서열화, 변별하고 가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절대평가가 운영된다면 그건 그냥 명칭만 바꾸는 꼼수에 불과하겠죠. 절대평가로의 전환이라는 의미는 서열체제 완화와 폐기라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방향으로의 전환이 이뤄지면서 결국에는 일상적 평가는 개개인의 기존 학습수준보다 어떤 부분이 나아졌는지, 어떤 부분의 이해가 부족한지 알 수 있도록 하는 개별평가가 되어야 하고, 대학입시는 성취기준을 기반으로 합격/불합격 정도를 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흔히 교육적 대안으로 많이 제시되는 것이 절대평가의 방식이다. 영어와 한국사에서 이미 도입이 되었고, 이 이후에 해당 과목들에 대한 학습 부담은 많이 완화되는 듯했다. 그러나 2019 수능에서 영어의 난이도가 매우 높아졌고, 사실상 상대평가 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래서인지 구성원들은 절대평가가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영향력을 기대하면서도, 지금 진행되는 방식이 과연 절대평가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논의를 하면서 점점 해결해야 할 질문이 명확해졌다. 학종과 수능의 대결도, 절대평가로의 이행도, ‘대학입시제도 개편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줄 수 없다면, 대체 무엇 때문인 걸까?

 

Q. 평가 방식의 변화만으로 달라지지 않는 것들? '대학입시제도 개편', 평가 방식의 변화는 생각만큼 많은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걸까?

 

이물 "대입이 인생의 경제적/문화적 수준을 한 번에 결정해버리는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지 않으면, 평가가 가진 잠재력은 이내 사그라들고 말 것입니다.

어떤 평가를 하든 당장의 학습이 아니라 학습이 가져올 외부적 결과에 더 큰 비중이 놓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거꾸로 학습은 소외되고, 경쟁은 과열되며, 평가는 차등화만을 목표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어떤 평가든 그것을 만든 사람이 가진 지향과 기준이 있습니다. 현대의 교육에 개입하는 강력한 주체는 국가와 기업입니다. 이들의 교육에 대한 개입을 견제하거나 통제하지 않으면, 각 주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만 학습자들의 지식이 인정받을 것입니다."

 

노누 “우선 지금까지 유지해온 평가방식을 바꾸는 게 대규모 일이고 바꿀만한 좋은 교육 방안이 나오지 않아서일까요? 저도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평가방식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무엇을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익명이 “대학입시제도를 바꾸어도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곳에 취직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좋은 대학교에 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경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상적인 얘기들을 하면서 교육 내, 학교 내에서의 이런저런 변화를 꾀하지만 결국 입시경쟁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고 변화는 지지부진하기 십상입니다. 사회가 이미 사람들을 줄 세우고, 착취하고, 경쟁을 유도하는데 입시제도를 개편하고 평가방식을 바꾸어도 변하지 않는 부분들은 계속되는 것 같아요.

관점을 넓히고 고개를 들어서 좀 더 멀리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누가 우리에게 경쟁을 요구하는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를 논의할 때이지 않은가요?”

 



당근 “교직 수업에서 가장 많이 하는 토론 중에 하나는 '입시 교육이라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교육적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인데요. 이 토론은 대개 먼저, 이런 저런 교육적 아이디어를 제안하기, 그리고 왜 그것이 입시경쟁의 현실 속에서 불가능한지로 반박하기, 다시 그 환경 속에서 그나마 나아질 수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 무엇을 할지, 이런 패턴으로 이야기가 돌고 돕니다. 저는 이런 토론을 여러 번 하면서 대안이 교육 내부에 있다고 보는 시선을 넘어, 입시경쟁을 유도하는 사회를 성찰하고 토론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경쟁은 교문 안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죠. 교육 무능론은 교육 만능론의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해서, 입시제도를 이렇게 저렇게 바꾸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넘어, 사회의 변화를 통해서 교육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잘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때 교육적 변화들이 제 성과를 더 잘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성원들은 다들 입시의 내부, 학교 내부만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오히려 입시가 왜 필요한지부터 물어야 한다. 모든 청소년들에게 대학은 디폴트값이다. 대학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어릴 적부터 좋은 대학에 가면 돈을 많이 벌고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말을 듣다가, 이제는 대학에 가야 돈을 벌 수라도 있다는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학입시는 생존권을 획득이라도 하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이 상태에서 대학 입시제도를 이렇게 저렇게 바꿔봤자 누구에게 생존권을 줄지, 누구에게서 박탈할지의 저울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생존권의 문제라니, 너무 비약이 심한 것 같다고? 특성화고 학생들이 현장실습을 하다가 다치고 죽는 사고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2017년 기준 20-30대 노동자 네 명 중 한 명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그들은 대부분 저임금을 받으며 고시원이나 원룸에서 살아간다. , 오류가 있다면 이젠 학벌도 제대로 된 생존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래서인지 주변 서울대생들의 진로는 고시, 공무원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상태에서의 평가가 교육의 일환이 되기란, 학교에서의 배움이 잘 이뤄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학생들은 생존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늘 불안에 떨 수밖에 없고, 교사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공부하라는 말만 반복하는 무력감을 겪는다. 이 상황 속에서도 그나마 이뤄지는 교육적인 시도는 눈물겨운 고군분투가 된다.

결국, 학교 안의 교육이 이뤄지기 위한 정말 최소한의 조건은 모두에게 생존권이 보장되는 학교 밖의 구조이다. 내가 느리게 배워도, 완벽하지 않아도, 성적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오지 않아도 내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없다면 배움은 불가능하고, 성장도, 평가도 무의미해질 뿐이다. 지금은 어떤가? <스카이캐슬>의 교수, 의사도 자녀에게 너의 미래를 책임져줄 수 없으니 네가 서울의대에 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세상이다. 이곳이 영영 나오지 못할 지옥불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학교의 경계를 넘어 구조의 직시, 그리고 학교 안팎의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누구도 일하다 죽지 않는, 수능 성적표를 유서로 남기지 않는, 어떤 직업을 택하든 생존의 불안정을 느끼지 않을 만큼 버는 세상에서, 교육은 비로소 제 역할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호를 펴내며

 

딸기맥주

 

안녕하세요, 교육저널의 편집장 딸기맥주입니다.

2019년 봄 호를 드디어 내게 되었네요. 원래는 2018년 겨울호로 내곤 하지만, 조금 늦어진 김에 산뜻한 봄 냄새를 담아 독자 여러분께 글을 보낼 수 있게 되어 기쁩니다.

이번 호의 제목은 <경계>입니다. 경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일종의 ''입니다. 너까지는 되고, 너부터는 안 된다는 명확한 선은 우리의 생 내내 '평가'를 통해 따라다닙니다. 학창시절의 1등급, 대학에서의 A+, 대학에 매겨지는 등급에 따라 정해지는 학과의 인원수, 교원평가에 따라 정해지는 좋은 교사와 나쁜 교사 - 우리는 선 안에 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야 합니다. 선 안에 들면 뭐가 좋아지는 지도 모르는 채로, 선 안에 들어야 살 수 있다는 압박 때문에 말입니다. 이 경계는 끊임없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너를 이기는 것이 내가 되는 법이라고 믿게 만들고, 선 안에 들지 못한 이들을 배제하고 소외시킵니다.

이 선은 점점 두꺼워져, 안과 밖을 나누는 벽이 되기도 합니다.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나라 밖에서 겨우겨우 살기 위해 온 이들에게 '불법난민'의 딱지를 붙이고, 이 안으로 절대 들여서는 안 된다고 외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미 이 땅 ''에 살고 있는 이들임에도, 피부색이 다르다거나, 사용해 온 언어가 다르다는 이유로 ''의 사람들이라며 차별받습니다. 이들과 함께하기 위한 교육은 현장에서 제대로 구현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벽은 권력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학생이 무슨 학교의 주인이냐"고 말하며, 이사회와 교수가 알아서 총장을 뽑고 대학을 운영할테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합니다. 그들만의 벽 뒤에서 학생에게 영향을 미칠 수많은 결정들이 이뤄집니다. 그리고 많은 학교들에서, 학생들의 용기 있는 성폭력 신고에도, 학교라는 벽 뒤에 숨어 교사의 권력은 유지됩니다.

이 경계 속에서 살아갈수록, 이 경계는 우리의 안전이나 보호를 위한 게 아님이 분명해집니다. 경계는 불안을, 소외를, 좌절을 줍니다. 언제 경계 밖으로 밀려나갈지 모르는 삶, 경계 위에 부유하던 우리가 깨닫게 되는 건, 우리는 갈라진 채로 살 수 없다는 것뿐입니다. 이 조각들을 이어붙여 경계가 없어질 때,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그래서, 우리 주변의 경계를 인식하는 일부터 시작해보려고 했습니다. 중등교육에서의 평가, 대학의 학사관리 엄정화, 대학구조조정, 교원평가를 다루며 우리가 밟고 있는 금이 어떻게 작용해왔는지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대학 현안으로 총장직선제 운동을 다루며, 결코 쉽지 않은 경계 허물기를 위해, 어떤 방법이 필요할지 나름의 분석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또한, 경계를 지우고, 무너뜨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으려고 했습니다. 중학생 난민 재심사 청원에 함께했던 선생님과 당사자, 그리고 다문화교육 연구자인 모경환 교수님을 만나, 차별과 혐오가 아닌 함께하기의 방법을 고민해보았습니다. 스쿨 미투 집회에 참여한 청소년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견고한 권력의 벽을 힘껏 무너뜨리는 그들의 용기와 요구에 함께하고자 했습니다.

이번 호의 주제들은 학교 안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학교 밖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평가, 다문화교육, 총장직선제, 스쿨미투는 학교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 때 비로소 제대로 이해될 수 있고, 제대로 해결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는, 그 방법론의 경계조차도 무너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번 호의 특집 인터뷰를 하면서 '중학생 난민 재심사 청원'의 주인공이었던 A를 만났습니다. A와 대화를 나누던 중, 제가 조심스럽게 "난민 지위 인정이 되어 너무 다행이지만, 여기도 한편에서는 살기 좋은 곳은 아니어서 걱정된다"는 말을 꺼냈습니다. A가 웃으며, '헬조선'이라고 끄덕였습니다. 이미 데뷔한 모델인 A, 어떤 디자이너들은 내 쇼에 선 것을 영광으로 알아라며 돈을 주지 않는 경우도 꽤 있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참 부끄러워졌습니다.

인터뷰를 곱씹으면서 김용균님을 떠올렸습니다. 김용균님은 저와 동갑인 노동자였습니다. 그가 왜 그런 위험에 노출되어야 했을까, 왜 비정규직이 되어야 했을까, 왜 나는 여기에서 이렇게 숨 쉴 수 있고 그는 죽어야 했을까, 그런 생각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경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사교육을 받고, 좋은 대학에 입학해서, 정규직 노동자가 되어서, 그랬다면. 경계는 누군가는 죽어도 되고 누군가는 살아남도록 작동합니다.

이 나라가 A가 떠나온 나라와 달랐으면 좋겠다, 아니 달라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피해서 온 땅에서 이들이 다시 죽어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일하다가 죽는 나라가 아니라, ”내 쇼에 선 것을 영광으로 알고 저임금을 견뎌내야 하는 나라가 아니라, 다른 인종이라고 차별당하는 나라가 아니라, 정말로 여기에 도착하길 잘 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땅이어야 한다고. 이대로라면 이 곳도 사람이 살 수 없어 도망치는 땅이 될 것입니다.

경계의 가장자리에서, 경계를 허무는 일을 함께합시다. 우리는 그렇게 연결될 때, 함께일 때 나 자신도 조각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이 땅의 아픔과 죽음을 덜기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번 호는 그래서, 그렇게 살아가자는 교육저널 구성원들의 다짐이자 여러분에게 건네는 제안이기도 합니다.

이번 호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함께 주제에 대해서 더 심도 있게 고민하고 생각을 나누기 위해 집필 전 내부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외부 홍보에 기대지 않고, 제대로 자치언론으로서의 기능을 하자는 다짐에 이르러 구성원들이 직접 편집을 해서 결과물을 내게 되었습니다. 시간도 그래서 좀 더 오래 걸렸고,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만큼 더 가치 있는 호가 되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독자 여러분들께도 구성원들의 고민이 잘 전달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번 호를 세상 밖으로 떠나보냅니다.

이번 호의 끝의 끝까지 고생해준 교육저널 구성원들, 언제나 글의 닿을 곳이 되어주시는 독자 여러분 정말 감사합니다.

 

 

p.s. 교육저널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어요! 학생회관 63619호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

디태치먼트(Detachment, 2011)

 

그래놀라

 

326일 교육 저널에서는 영화 상영회 및 집담회를 열었다. 교육에 대해 고민하는, 특히 교사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 디태치먼트(Detachment)’라는 영화를 보고 감상과 교육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공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는데 필자는 이 집담회에 참여한 후 교육 저널에 함께하게 되었다. 그만큼 특별한 경험이었고 학교 생활에 큰 영향을 준 영화였던 만큼 이에 대한 간단한 비평을 적어 이를 남기고자 한다.

애드리언 브로디’. 그는 내가 킹콩이란 영화에서 처음 본 배우였다. 길쭉한 코에 길쭉한 눈썹 그리고 길쭉한 얼굴까지 어딘가 사람을 빨아들이는 외모를 가진 그는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에게도 매우 신비롭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나른하면서도 슬퍼 보이는 눈이 인상 깊었다(오빠 김 묻었어요. 잘생김.). 그러나 금방 그를 잊어버렸고 대학에 들어와서야 디태치먼트라는 영화를 통해서 그를 기억해낼 수 있었다. 여전히 그는 얼굴이 길쭉하고 코도 눈썹도 길쭉하고 매력적이었다.


디태치먼트는 미국의 한 공립학교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주인공 헨리는 기간제교사로 새로운 학교에 부임하게 된다. 유난히 문제 학생들이 모인 학교에서 헨리의 적응은 쉽지만은 않지만, 그는 담담하게 그리고 익숙하다는 듯 학생들의 골탕에도 개의치 않아하며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낸다. 하지만 학생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고통받고 있었고 그건 학교의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비행이 일상이 되어버린 학생들 그리고 아이들의 문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무관심한 학부모들, 지쳐버린 교사들. 이 학교는 누구를 위한 학교인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무너져내려 버렸다. 불안정한 삶을 이어나가던 중 헨리는 우연히 에리카라는 소녀를 만난다. 교사로서의 사명심인지 단순히 불행한 상황의 어린 학생에 대한 동정심인지, 헨리는 보호가 필요한 상황인 에리카를 보살핀다. 학교 내에서도 그는 메레디스라는 특별한 학생과 조우한다.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꽃피우지 못하고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메레디스에게 헨리는 격려를 건넨다. 그럼에도 그가 막을 수 없는 일들은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영화는 헨리의 인터뷰 독백으로 마친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한동안 우울감에 침체되어 있었다. 교육에 대한 회의, 교사라는 직업의 무게감, 그리고 내가 과연 교사를 감당할 수 있을지에 대한 두려움. 복잡한 생각들이 떠오른 것은 무겁고 담담한 우울감 후에 밀려왔다. 그리고 나는 그 우울감이 좋아서 한 번 더 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 거리 두기, 무관심

어떤 학생이라도 헨리는 부드럽지만 따뜻하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 그건 그의 어린 시절 경험으로 얻은 이별에 대처하는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바로 언제나 이별을 할 수 있도록 미리 거리를 두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제목의 의미를 유추해보았다. Detachment란 격리, 거리를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헨리가 학생들과 그리고 흐릿하게 기억하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과 무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고 하는 모습을 영화에서 볼 수 있었다.

Detachment는 무관심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학부모 회의에 누구도 오지 않은 텅 빈 교실 장면이 떠올랐다. 자녀들이 어떤 환경에서 교육받는지 가르치는 책임자는 누군지 전혀 궁금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는 듯 아무도 오지 않은 텅 빈 교실을 꾸며 놓고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교사들의 모습이 쓸쓸했다. 가정은 교육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자 아이들이 세상이 안전한지 결정하는 태도, 즉 애착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인간은 가정과 부모와의 관계에서 안정과 사랑을 찾지 못한다면 세상이 매우 위험하고 불안정한 곳이라고 느끼며 적응적인 관계 맺기가 힘들어진다. 학교라는 곳 또한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보살핌과 안정, 미래를 위한 발판으로서 기능해야 하지만 어떠한 관심도 지지도 없는 상황인 아이들에게는 이마저도 가시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 문제는 학생뿐만 아니라 학생을 돌보아야 할 교사들의 상황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교사, 완벽한 척은 하지만 부부간 불화를 겪는 교장, 그리고 가정이 아주 오래전에 파괴된 헨리. 소외된 자들은 누구에게도 자신들끼리도 뭉치지 못하고 그저 서로를 무관심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외롭고 소외된 자들이 모인 학교에서 서로 어울리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과연 교사와 학생 사이의 거리는 좁을수록 좋은 것일까. 교사와 학생 사이 적절한 거리는 어느 정도일까. 영원히 풀리지 않은 고민 같지만 언젠가는 교육에 몸담고 있거나 연관이 있는 사람이라면 해야 할 고민이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할 때도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헨리가 거리를 두려고 한 이유는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교사로서 모든 학생을 제대로 보고, 또 자신을 의지하려고 하는 학생들에게서 스스로 물러남으로써 학생이 자기 자신을 제대로 바라보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을까.

 

# 우리 교육 현장의 Detachment

디태치먼트에서는 행복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은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고 학교의 모든 면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으며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교사들은 절망하며 결국 학생들을 향해 절규하고 울음을 쏟아냈다. 에리카와 메레디스 또한 자신에게 관심을 주고 보살핌을 준 어른인 헨리의 관심에 잠깐은 행복했지만 결국은 끝이 어떻게 되든 각자의 길을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영화 속 교사들도 불행한 가정, 학교의 위기, 학생과 학부모와의 갈등 등으로 바람 잘 날 없었고 주인공인 헨리는 늘 어딘가 불안해 보였다.

결말이 해피엔딩이라고 볼 수 있을지 없을지 잘 모르겠지만 근본적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없었고 누구 하나 상황이 더 좋아진 사람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흘러가고 그런 모습을 보여줄 뿐이었다. 영화 속 교육 현장은 우리나라 교육의 모습과는 조금 다른 형태긴 했지만 크게 달라 보이지도 않았다. 자녀 교육에 대한 것이라면 전국 방방곡곡을 돌고 한약을 지어 먹이며 학원을 태워가고 오기도 하지만 정작 아이가 어떤 것을 제일 좋아하는지 꿈은 무엇인지도 모르는 부모님들, 어떤 문제와 단원이 가장 많이 출제되는지 분석하고 어떤 대학이 가능한지 사람이 아니라 숫자를 다루는 교사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부유하는 학생들. 어느 한 사람도 진정으로 행복할 수 없는 우리나라 교육 상황도 서로가 격리되어 무관심하고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상태다. 그 이유는 현 교육 실태가 바람직한 인간 양성보다는 기능적인 인간의 생성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그렇기에 교육에서 학생들은 교육의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입시와 성공의 수단으로서 존재하게 되고 Detachment 즉 무관심 속에 방치되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학생에게 깊게 개입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꿰뚫어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교사의 능력과 개인의 인생을 바꾸어버릴 수 있는 교육의 무게를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였다. 많은 사람들은 관계로 인해 아파하고 삶을 망친다. 그 이유로 적절한 거리 두기가 지켜지지 않아서 그런 경우가 꽤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 가까이 있어도 외롭다고 느끼며 더 가까이 가려고하고 오히려 더 멀어지려고 한다. 정현종 시인은 이런 사람들의 관계를 섬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교사로서 그리고 그 이전에 인간으로서 사람들의 섬 속에서도 외롭지 않다고 느끼고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는 적절한 거리 두기와 무관심을 조절할 수 있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