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참정권 논쟁 - 잠깐 발 담갔다 빼보기

뚱인데요



1. 보편적 인식

입법자는 우리의 현실상 19세 미만의 미성년자의 경우, 아직 정치적·사회적 시각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거나,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현실적으로 부모나 교사 등 보호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독자적인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신체적 자율성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고, 선거권 연령을 19세 이상으로 정한 것이다.’

중등교육을 마치는 연령인 18세부터 19세의 사람은 취업문제나 교육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정보통신, 특히 인터넷의 발달에 가장 친숙한 세대로서 정치적·사회적 판단능력이 크게 성숙하게 되므로 독자적인 정치적 판단능력을 갖추었다고 보아야 한다. (중략) 병역법이나 근로기준법 등 다른 법령들에서도 18세 이상의 국민은 국가와 사회의 형성에 참여할 수 있는 정신적육체적 수준에 도달하였음을 인정하고 있고, 18세를 기준으로 선거권 연령을 정하고 있는 다른 많은 국가들을 살펴보아도 우리나라의 18세 국민이 다른 국가의 같은 연령에 비하여 정치적 판단능력이 미흡하다고 볼 수는 없다.’

 

판결문의 결정요지에서 알 수 있듯이, 헌재가 대변하는 대한민국의 보편적 인식은 '19세 미만은 정치활동을 하기엔 미성숙한 세대'이다. 물론 이를 증명하는 실물 증거는 미약하나, 이는 반대 의견에도 적용될 수 있는 비판이므로 까놓고 말해서 특정 세대의 정치적 성숙함을 판단하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뇌피셜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 이런 상반된 인식이 한 판결문 안에 실릴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한 번 생각해보자. 한 사람의 생애에서 '겨우 한 살을 더 먹었다고' 의식이 확 성장하는 경우는 얼마나 존재할까? 물론 대부분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는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지만, 그것이 정치의식의 성장을 담보해주진 않는다. 오히려 바쁜 세상에 치여 정치에 관심을 쏟을 틈마저 사라지기도 하거니와 개인의 생애주기에 있어 늘 발전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런 개인간의 차이가 참정권에서 반영되진 않는다. 아니, 반영되어서도 안된다. 하지만 부정확한 기준에 의거해 시민에게 가장 중요한 권리 중 하나인 참정권의 부여 여부를 결정짓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 할 수밖에 없다.

 

한편 선거 가능 연령과 관련된 주제가 뜰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19세도 낮다. 더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대한민국의 시민의식이 20대조차 제대로 된 정치판단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세상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관심도 없는 주제에 자극적인 기사 하나만 뜨면 바로 선동되는 사람들한테 어떻게 맡기냐.’ ‘저런 사람과 내가 같은 한 표라니 좀 그렇네.’ 대충 뭐 이런 반응들인데, 물론 대한민국의 시민의식이 선진국보다 훨씬 딸린다는 것은 나도 인정하는 사실이나, 윗세대라고 해서 20대보다 더 이성적으로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가? 글쎄다. 그럼 전부 의식수준이 낮으니 역시 대한민국은 아직 민주주의를 하기엔 부족하니 과거의 현명한 지도자들을 본받아 엘리트주의로 회귀해야 하는 걸까? 당연히 아니다. 저렇게 말하면서 선민사상 내뿜는 사람들도 막상 따지고 들어가면 알맹이 없는 건 매한가지일 확률이 크다는 건 잠깐 무시하더라도 유독 그런 비난이 ‘20대 초반에게만 집중된다는 건 흥미로운 사실이다. 그리고 보통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갓 20대 초반을 넘겼거나 비슷한 연배라는 것 또한 그렇다. 원래 사람은 1년 전의 자신을 가장 부끄러워한다고 했었나...

  

2. 참정권이 왜 필요한데?

이런 논의를 하기 전에 우선 이 질문부터 던지고 시작해보자. '참정권을 왜 줘야 하는 건데?'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답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제도가 당연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우선 시민이 직접 자신들의 지도자를 뽑는 제도가 정착된 것이 - 특히 한국은 - 인류사에 비하면 그렇게 깊은 역사도 아니거니와, 초창기엔 이 시민마저 부유층, 백인, 남성등으로 한정되었었다. 당장 민주정의 가장 오래된 형태라 하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의 민주주의도 미성년자, 외국인, 노예, 여성이 아닌 성인 남성에게만 참정권을 보장했으며, 근대로 넘어와서 이를 타파하는 운동은 서프러제트처럼 큰 사회적 변혁이 있어야 가능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백래시 논리는 늘 하나의 지점으로 귀결되었다. ‘그런 의식수준의 계층에게 어떻게 정치를 맡기느냐.’ 결국은 또 의식수준이다. 앞서 잠시 주석으로 언급했던 시험으로 참정권을 갈라야 한다.’는 주장도 결국은 이와 궤를 같이 한다. 정치는 똑똑한 사람만 하는 거였나?

 

근본적으로 '의식수준에 따라 정치활동을 제약한다.‘는 발상에 의구심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정치는 개인의 지적 우월함을 뽐내는 무대가 아니라 서로의 필요를 요구하는 광장이다. 비정규직은 참정권이 있기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정규직화 및 정규직에 상응하는 대우를 요구할 수 있고, 청년들은 참정권이 있기에 청년 정책을, 노인들도 참정권이 있기에 노인 복지를 요구할 수 있다. 이는 참정권이 인권의 영역에 있기 때문인데, 실제로 참정권 운동은 항상 근본적인 인권 향상 운동과 연계되어오지 않았는가? 결국 참정권 그 자체가 인권의 확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완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은 이제야 보편타당해졌다. 적어도 말로는 그렇다. 참정권은 이를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가장 근본적인 도구 중 하나라는 점에서, 결국 참정권은 그깟 의식수준 따위가 아닌 절실한 필요에 의해 부여되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따져야 하는 건 참정권의 부여가 그들의 필요를 해결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느냐.’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모두를 위해 가장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민주주의의 이상향은 어디인가이다.

 

3. 청소년 참정권 그 자체의 의미

실제 판단력이 어떻든 간에, 대한민국 법은 특정 연령이상의 국민을 정치 참여의 주체로 인정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국민은 정치 참여의 주체로 인정받기 시작함으로써 정치 참여의 자격을 갖추기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낙인효과에 대해 아마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회가 누군가를 일탈자로 인식함으로써 그 사람은 실제로 일탈자가 되기 시작한다는 것인데, 말썽꾸러기로, 거짓말쟁이로, 전과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그 틀 안에서 굳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정치를 하기엔 미숙한 존재로 낙인찍힌 학생들은 그 틀에 맞춰서 성장할 가능성 역시 크다. 그러니까 그 틀을 완전히 뒤집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보자. 아예 없애는 것도 괜찮겠다.

 

이는 학교 현장에서 더 건전한 토론이 활성화되는 것도 기대해볼 수 있다. 정치가 터부시된 교실에서 온라인 커뮤니티의 사상이 일부 학생들을 중심으로 알음알음 퍼지던 게 그동안의 교실 현장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교실 안에서부터 시작하는 정치를 만들어보자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러기 위해서라도 교실은 더욱 정치적이어야 한다 이 말이다. 정치적 발언이 터부시되거나 혹은 교사 한 명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교실이 아니라, 모두가 매 시간마다 끊임없이 고민하는 교실을 만들어 놓아야 맨날 서로 그렇게 까기만 하는 입시 위주 교육이니 뭐니 하는 것들도 해결될 기미가 보일 거 아닌가.

 

4. 마무리하며

대학교에서 새내기 맞이를 준비하면서 끊임없이 되뇌이는 원칙이 하나 있다. '새내기의 주체성을 무시하지 말자.' 즉 새내기를 어린 존재, 단순히 고등학교라는 좁은 세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에 대해 배워야 할 맑은 영혼정도로 간주해선 절대 안되며 오히려 동등한 주체로 대하며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는 자리로 새맞이를 구성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이는 선후배간 위계질서를 타파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원래 그렇게 생각하던 새내기가 있었다면 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혹여 늘 배우는 존재로만 머물러 있었던 몇몇 새내기가 있었다면 거기서 깨어나라고 외치기 위함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뭘 배운다고 정치를 한다고 그러냐.’고 묻는 사람들은 그 손가락을 학생이 아닌 학교로 돌리는 것이 마땅하다. 딱 봐도 학교가 애들에게 가르치는 게 없어 보이면 학교를 바꿔야지 왜 학생을 그 틀에 맞추려고 하는가. 교육이 발전할 때까지 학생들 보고 기다리라고 할 수도 없는 법이다. 오히려 교육을 가장 필요로 하는학생이 교육을 바꿀 수 있는 학교를 만들어보자. 그게 더 효율적인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문화비평즐거운 나의 집”(공지영)

말차라떼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관념 중에 하나는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이다. 정상가족이라는 말이 존재한다는 것은 비정상가족에 대한 관념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어떤 것이 정상가족이고 어떤 것이 비정상가족인가? 흔히 엄마와 아빠, 자녀가 기본 구성원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정상가족이라고 한다. ··고등학교에서는 새 학기 첫 날에 항상 적어서 내는 나를 소개합니다종이가 있다. 여기에는 부모님의 직업은 무엇인지, 가족 구성원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내용 등이 적혀져 있다. 이 종이를 바탕으로 담임교사는 학생과 상담을 진행하게 된다. 한부모 가족, 이혼 가족, 재혼 가족, 조손 가족, 심지어는 다문화 가족까지 결손가족혹은 비정상가족으로 분류된다. 그렇다면 결손가족으로 분류된 이들은 어떤 취급을 받게 되는가?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은 정상가족의 틀에서 벗어난 이들에 대한 차별의 기제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손 가족의 학생이 문제를 일으키거나 저조한 성적을 보일 경우 엄마(또는 아빠)가 없어서 그래”, “가정교육이 문제여서 그렇지라고 단정 짓기 태반이며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기 일쑤다. 비정상가족은 덜 행복할 것이며, 불행을 겪기 쉽고, 어딘가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과 편견은 너무나도 비일비재하다. 본인의 가족을 비정상가족이라고 지칭하는 사회적 시선 속에 이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

즐거운 나의 집에서 위녕의 가족은 평범하지 않다. 위녕은 엄마와 두 명의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는데 세 남매의 성은 모두 각각 다르다. 위녕의 어머니는 두 번 재혼 하고 세 번 이혼을 해서 홀로 세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다. 이 가족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공중파 드라마의 전형적인 클리셰는 이복형제 사이의 다툼, 새엄마 혹은 새아빠와 자녀의 갈등이다. 재혼 가정에서 부모나 자녀 중 한명은 소외되어 있으며 괴롭힘을 당하고, 이복형제끼리는 항상 서로를 시기, 질투하며 계략에 빠뜨리려고 하는 내용들은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현실에서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위녕의 가족은 이런 클리셰를 타파한다. 성이 다른 세 남매는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위녕과 동생들은 서로를 챙기고 따르며 잘 지내지만 시시껄렁한 일로 다투기도 한다. 위녕의 어머니는 어느 누구를 편애하지 않고 똑같이 사랑한다고 하며 항상 아이들에게 너희들이 있어서 행복하다는 말을 해준다.

행복하고 문제없는 이 가정의 가장 큰 문제는 남들의 시선이다. 작가인 위녕의 어머니에게 늘 붙어 다니는 이혼녀 꼬리표, 남들의 불편한 시선, 수군수군대는 소리... 위녕의 어머니가 남에게 밉보일 때 항상 듣는 소리는 왜 이혼을 세 번씩이나 했는지 알 것 같다이다. 심하게는 위녕의 어머니같은 사람 때문에 우리 사회가 가정이 파괴되고 아이들이 잘못된다고까지 한다. 위녕과 세 아이들은 불쌍한 아이들이라며 동정을 받는다. 과연 누가 문제인가? 평범하지 않은 것이 마치 잘못인 것처럼 말하며 비난하는 사람들, 당사자의 상황을 알지도 못한 채 남발하는 동정인 척하는 위선은 안타깝게도 현실이다.

위녕의 어머니가 두 번씩이나 재혼을 해서 아이를 낳은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위녕 어머니의 첫 번째 남편이자 위녕의 아버지는 작가인 위녕 어머니에게 직장을 때려치고 육아와 살림에 전념하기를 강요했다. 두 번째 남편은 위녕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둘렀다. 정상가족을 유지하려면 이 모든 고통과 상처를 감내해야 하는 것인가? 이렇게 유지되는 가정이 어떻게 정상일 수 있는가? 지금도 누군가는 자신의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갈등과 폭력을 참고 있을지도 모른다. 가족제도의 유지를 위해 개인의 희생은 계속해서 묵인되어 왔고 가족제도를 해체시키는 이혼제도는 사회에서 부적절하고 부정적인 것으로 낙인찍혀왔다. 이혼율이 증가하는 현상을 마치 우리 사회가 무너지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해결해야 할 중대한 문제로 여기지만 정작 비정상가족에게 찍히는 낙인과 차별, 배제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남들의 시선을 잘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신념에 의해 살아가는, 한 마디로 쿨한 성격을 지닌 위녕의 엄마조차도 성씨가 다른 세 아이를 키우면서 스스로에 대한 주눅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사회적 분위기야말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저자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는 누군가 새로운 의미의 가족에 대해 작가 본인과 작가의 아이들의 이야기를 수필로 써달라고 요청한 것이 시작이었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가족의 의미도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저자는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오늘날 가족의 형태는 확실히 예전과는 다르게 다양해지고 있다. , 더 이상 이 다양한 가족들을 어떤 하나의 틀로 묶을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이를 하나의 틀로 억지로 맞추고 재단하려고 하다 보면 당연히 삐그덕거릴 수밖에 없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 가족이 남들의 기준으로 보면 뒤틀리고 부서진 것이라 해도, 설사 우리가 성이 모두 다르다 해도, 설사 우리가 어쩌면 피마저 다 다르다 해도, 나아가 우리가 피부색과 인종이 다르다 해도, 우리가 현재 서로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해도 사랑이 있으면 우리는 가족이니까,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름에 가장 어울리는 명사는 바로 사랑이니까 가족이라는 것은 누군가의 인정을 받아야만 형성되고 유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족 구성원들을 연결하는 끈의 정체를 저자는 사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사랑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집필진 후기>

 

당근

교육저널에서 기자로 활동한 첫 학기인데, 처음에는 이것저것 해보고 싶어서 욕심을 많이 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저는 글을 많이 쓴 것도 아닌데) 쉽지가 않더라구요. 또 시간도 품도 꽤나 많이 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글도 처음에 고민했던 것만큼 잘 나온 것인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조금은 확신이 없습니다. 페미니즘 교육에 대해 정당한 평가를 내리고 현장에 힘이 되고 도움이 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막상 쓰면서는 제가 포착한 경향이 현장의 것인지, 현장 외부에서 논의를 하는 사람들의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고, 힘든 현장에서 나름의 최선의 방법을 선택하고 계신분들께 실례가 되는 말이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대학(이론)과 현장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니까 말이에요. 글이 나와서 평가를 받게되면 더 고민해볼 여지가 있겠지요.ㅎㅎ 개인적으로는 여러 피드백을 받고 저의 관점과 평가를 설득하며 고민을 키워나갔던 것이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남아있는 것이 기쁩니다! 이번 학기 제가 벌려 놓은 여러가지 일 중에 유일하게 남은 가시적 성과가 아닐까요...ㅎㅎ 방학동안 책도 읽고 충분히 쉬고, 다음호에서는 조금 더 성장한 고민과 글로 찾아뵙겠습니다.

 

이물

2주 동안 붙잡고 있던 내용을 다 지워버리기도 했고, 한 문장을 못 써서 다시 2주를 질질 끌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벼락치기처럼 써내버린 글들이 썩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지금의 상황을 보여주고 그 관점을 제안하는 정도면 되지 않을까하여 자족하고 있네요. 또 어쩌면 당연한 소리를 했지만, 제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을 써내는 것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고, 몇 년 만 지나도 그 직관이 역사적인 것, 쓰지 않았다면 사라질 것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힘을 냈습니다.

교육을 둘러싼 우리의 고민과 움직임이 죽었다고들 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치열함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언제쯤 제가 가진 교육에 대한 질문들에 답을 얼추 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꾸준히 이어나가보려 합니다.

 

그래놀라

저는 이전까지 하던 동아리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끼면서 새로운 동아리를 해보자!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교육저널에 함께 하게되었습니다. 사실 글 쓰는 것에 별로 자신도 없었고 아는 것도 없었는데 교널 활동하면서 많이 배울 수 있었던것같아요!!(물론 여전히 부족하지만) 사람들도 전부 좋은 사람들이었고 또 인지하지 못했던 중요한 사실들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또 교육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진로 면에서도 더 생각할 폭도 넓어진것같습니다.

이번 학기에 교널에 들어간 것은 정말 운명이 아니었나 싶네용ㅎㅅㅎ 좋은 추억과 기회 주셔서 참 감사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울바

-(울트라바이올렛이라는 뜻)! 안녕하세요, 이번에 처음으로 교육저널과 함께하게 된 저는 울바입니다:) 진부한 말인지는 몰라도, 글 쓰는 걸 좋아하지도 않고, 아는 것도 별로 없어서 남에게 보여줄 글은 더더욱 못쓴다고 스스로 생각하던 저였지만 한 학기 동안 글을 위해 여러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고, 조사하고, 글을 쓰고, 서로의 글을 읽고, 여러 번 글을 수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걸 느끼고 생각하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함께하게 된 교육저널이지만 점점 중요한 부분이 되어갔고 이젠 제 생활에서 교널을 빼면 너무 허전한 지경이 되어버렸네요!><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교육저널과 동료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저희 저널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도 제 사랑을 드립니다~!!

 

말차라떼

저에겐 이번 호가 2번째 교지인데 첫 번째에 쓴 글과 비교해보면 살짝 더 나아진 느낌이 들어서 뿌듯합니다. 이번 호의 글들은 평소 제가 관심이 있었고, 한 번쯤은 글로 남겨보고 싶었던 주제라서 다 쓰고 나니 보람이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물론 글쓰기는 항상 어렵습니다ㅠㅠ) 특히 이번 학기에 새로운 교육저널 멤버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교널 멤버들 앞에서는 비록 말 못했지만 다들 너무 좋아! 좋다구! 앞으로도 함께 모여서 회의하고 좋은 시간 가졌으면 좋겠는 마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교지를 한 번 펼쳐보기라도 했으면 좋겠는 마음을 전하며 이만 줄입니다~ :-)

 

뚱인데요

어쩌다 보니 세 학기나 함께하게 된 교널! 허나 내놓은 작품은 이번이 가장 초라한 거 같네요...패기롭던 새내기의 체력은 어디 가고 이젠 수업 한 번 출석하는 것도 벅찬 대2병 걸린 정든내기가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아 이것저것 다 손대다가 결국 제대로 남은 게 없는 학기지만, 그래도 함께하는 그 자체로 교널은 즐겁습니다 꺄아 :) (글쓸 때만 빼고 ㅠㅠ) 아무튼 이번엔 야심차게 준비했던 건 다 날라가버리고 조촐한 글 하나밖에 싣지 못했지만 다른 글들의 퀄리티 + 여러분의 아량을 믿고 저는 버스에 탑승...하겠습니다...여기까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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