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민과 함께 살아가기
- 'ㅇ'중학교 난민 지위 인정 청원운동을 기억하며
딸기맥주
“과연 대한민국이 난민을 받아줘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시길 바랍니다. 자국민의 치안과 안전, 불법체류 외 다른 사회문제를 먼저 챙겨주시기를 부탁드리고, 난민 입국 허가에 대한 재고와 심사기준에 대한 전반적인 제도에 해서 폐지 또는 개헌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난민 신청 허가를 폐지하자는 청와대 국민 청원의 일부
“정의가 있다면, 우리 국민 마음속에 정의가 남아있다면 제 친구를 굽어 살펴줄 것이라 믿습니다. 부디 제 친구가 난민이 되어 이란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제 친구의 안전을 지켜주십시오. 간절히 호소합니다.”
- 동급생인 이란 난민의 공정한 난민 재심사를 요구하는 청원의 일부
(사진출처 : 청와대 국민 청원)
지난 2018년 여름, 청와대 국민 청원 게시판에 두 개의 청원이 올라왔다. 한 청원은 제주도에 입국한 예멘 난민을 비롯한 난민들이 계속 한국에 있어서는 안된다며, 난민법을 폐지하자는 청원이었고 이 청원은 금세 7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동의를 표했다. 이후에 줄줄이 “‘불법’, ‘가짜’, ‘예비범죄자’ 난민을 즉각 추방하라”, “다문화는 실패했다 자국민을 먼저 생각하라” 등등의 글이 줄줄이 이어졌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다른 한 청원은 자신의 친구가 난민 인정을 받을 수 있도록 공정한 재심사가 필요하다는 한 중학생의 글이었다. 이 청원은 SNS로 확산되면서 앞선 청원과 상반되는 논조로 눈길을 끌었다. 난민과 다문화에 반대한다며 70만 명이 청원하는, 난민 추방이 해답이라고 다수가 언성을 높이는 이 나라에서 청소년들이 직접 자신의 난민 친구를 위해 국민 청원을 올리고, 피켓을 만들어 집회를 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이 친구를 돕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일은 이례적이기에 많은 이들로 하여금 어떻게 저런 일이 가능할 수 있는지를 궁금하게 여기도록 했다.
최근 한 다문화 가정의 학생이 피부색이 다르고 얼굴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집단 따돌림을 당했고, 결국 중학생들의 집단 폭행으로 인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특수한 사건이 아니라,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난민, 타문화에 대한 차별과 배제, 부재하고 부족한 다문화 교육으로 인해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건들 중 일부일 뿐이다. 실제로 오인수 이화여대 교수의 ‘다문화가정 학생의 학교 괴롭힘 피해 경험과 심리문제의 관계’ 논문에 따르면 당시 설문에 참가했던 760명의 다문화가정 학생 중 34.6%가 괴롭힘을 당한 적이 있다고 답했고, 왕따 등 관계적 괴롭힘을 경험한 비중은 18%로 일반 학생들의 응답보다 훨씬 높았다.
그렇기에, 난민 인정 재심사 청원을 한 ‘ㅇ’ 중학교 학생들이 이 폐허 위에서 어떻게 혐오와 차별이 아니라, 우정과 정의를 애기할 수 있게 되었는지 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아주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다. ‘품 안에 들어온 생명은 함부로 버리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마음에 품고, 어떻게 다르게 생겼든 어떤 종교를 믿든 함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어떻게 자리잡을 수 있는지, 그런 교육이 가능한지 인터뷰를 통해 알아보고 싶었다.
겨울 방학 직전 즈음해서 찾아간 ‘ㅇ’ 중학교 3학년 층의 복도에는 명랑한 웃음소리와 소란이 가득했다. 어떤 교실에서는 트와이스의 노래가 흘러나오기도 했고, 전반적으로 중학교 생활이 끝나가고 긴장이 풀린 채 편안히 쉬거나, 노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복도를 걸어 도착한 교무실에서는 학생들의 졸업을 위한 마무리 작업에 한창인 선생님들을 볼 수 있었다. 그 곳에서, 학생들과 난민 재심사 청원운동을 함께 벌인 오현록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금방 회의가 있으시다며 당사자인 A를 만날 수 있게 해주셨고, A와의 대화를 먼저 나누게 되었다.
A는 여러 번의 인터뷰 경험 때문인지 능숙하게 나를 맞아주었고, 오히려 초보 인터뷰어인 나와의 대화를 이끌어주었다. 딱딱한 인터뷰가 아니라 일종의 편한 대화를 나누자는 제안을 했고,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 꽤 긴 시간 동안 기대보다 더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함께 살기 위해서, 함께 만들어낸 변화
재심사 청원 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의 과정을 먼저 듣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A가 난민 지위 인정에 대한 고민을 안고 지냈던 게 2년이 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학교 들어오면서부터 내내 있던 문제였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말해도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게,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했다”며, 그 동안에는 혼자서만 계속 생각하고, 불안해했다고 말했다. 난민 지위 인정 이후, A는 “친구들에게 살기가 없어졌다는 말을 듣는다”고 전했다. 그 전에는 너무 불안하고, 무서워서 자기도 모르게 눈에 살기가 생겼었다고, 그래서 친구들이 자신을 좀 무서워하기도 했다는 A의 말을 들으며 난민 지위 인정이 얼마나 절박하고 또 필요한 일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ㅇ' 중학교 학생들이 동급생인 이란 난민 청소년의 난민 지위 인정을 요구하며 서울남부출입국에서 집회를 열었다. 이날, A는 재심사 요청서를 냈다. (사진출처 : 연합뉴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출국기일이 다가왔고, 용기를 내서 오현록 선생님께 말씀을 드리게 되었다고 했다. 선생님이 각 반을 돌아다니시면서 A의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고, 함께 할 사람들은 교무실로 오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기대가 없었다고 말했다. “애들이 선생님이 설명할 때 듣는둥 마는둥 하는 것 같고, 뭘 종이에 쓰는데 문제 풀고 숙제하나보다 했죠. 실망하지도 않았고, 그치 그냥 도와줄 수가 없는 문제인 거지 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 날 교무실에는 80-90명 정도의 친구들이 오가면서 이렇게 하면 어떠냐, 이런 방법도 있지 않을까요, 뭐라도 같이 하겠다는 이야기를 선생님께 전했고, 어떤 친구는 어쩌면 좋냐고 펑펑 울면서 찾아오기도 했다. A는 아직까지도 그게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제가 그만큼 잘 살았는지 반성도 했고, 제가 뭐라고….” 이야기하면 도움을 줄 사람들이 있고, 함께하면 뭔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전했다.
청원 과정에서 학교 내에서 상처받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없었냐는 질문에, A는 그런 일은 없었다고 했다. 자기 앞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은 전혀 없었다고. 다만 댓글들이 조금 신경 쓰였다고 했다. 난민 재심사 청원 관련 기사 댓글에 “(난민이) 그렇게 좋으면 너네가 데리고 살든가”같은 말들이 달렸다고. 놀라웠던 것은 그 이후에 친구들의 대응이었는데, 다른 학교 친구들까지 연합해서 일종의 ‘선플부대’ 카톡방을 만들고, A가 그런 댓글을 접하지 않을 수 있도록 기사가 올라가자마자 제일 먼저 댓글을 달고, 공감버튼을 눌러 상단에 선플이 먼저 뜨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너무 유쾌하고 멋진 대응이라서 필자는 한참을 웃었다. A는 친구들에게 “표창장을 주고 싶어요”라고 했다. 학생들이 A와 함께하고, 돕겠다는 마음 하나로 얼마나 자발적으로 나섰는지, 얼마나 일상적으로 고민하고 행동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어려움 : 아버지의 난민 지위 불인정
한편, 안 좋은 소식도 있었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A는 아버지가 최근 난민 인정 심사에서 탈락한 것이 지금의 가장 힘든 일이라고 전했다. “재심사 기회가 한 번 남아있는데, 그것 때문에 많이 우울하고 불안하고 그래요.” 아버지가 자신보다도 더 한국에 많이 오갔고, 충분히 인정될 만한 상황인데도 탈락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내내 밝던 A의 얼굴이 바로 어두워졌다. A와 그의 아버지는 기독교로 개종했다는 이유로 한국에 온 난민으로, 이란에 돌아가면 최악의 경우 사형에 처해지게 된다.
이 충격적인 소식은 다시 한 번 한국이 얼마나 난민에게 가혹한 나라인지, 살고자 하는 사람을 사지로 내모는 난민정책을 펼치고 있는지를 알게 했다. 실제로 최근에는 제주 예멘 난민 신청자 480여명 가운데 단 2명만 인정을 받았다. 인정률이 0.4%인 것이다. 이러한 난민 정책은 다시 ‘가짜’난민, ‘불법’난민 등 난민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고,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낙인찍는 악순환을 만들게 된다. 다시 알지 못하는 타자를 차별하고, 혐오하고, 자국민중심주의를 강화하며 이 땅에 함께 사는, 다른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배제하게 만든다. 현재 나타나는 다문화 가정 출신 청소년들에 대한 차별처럼, 결국 나쁜 정책을 통해 만들어진 사회적 분위기는 교육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또한 교육이 이에 대한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오히려 부정적 사회구조는 교육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기도 한다. 학교 밖의 일이라고 여겨지는 국가 정책의 문제가, 전혀 밖의 일일 수 없으며 학교 교육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하나의 고리인 것이다.
A는 그래도, 이 학교에서의 마지막 1년을 통해 혼자가 아니라 함께일 때 할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되었다고 말했다. 곧 진학할 고등학교에 대한 걱정이 많지만, 이 학교에서의 날들이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고 웃었다. A는 인터뷰를 마친 후 모델 학원에 간다고 했다. A는 이미 데뷔한 모델로, “가끔 다른 학교 친구들이 ”모델 걔 아니야?“하면서 알아보기도 해요.”라며 장난스럽게 인기를 자랑하기도 했다.
A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모델 한현민 씨와 같은 무대에 서는 게 꿈이라고 말한 바도 있다. 그가 이 땅에서 꿈을 꿀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그가 그의 친구들과, 우리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쪽에서는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 이 나라에서, 더욱이 ‘눈 색깔이 다르고 얼굴 색깔이 다른 사람들’에게 더 차별적이고 가혹한 이 나라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결국 이 한 번의 마법같은 일이,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아야만 하겠다고, 혼자가 아니라 함께라서 만들어낼 수 있었던 변화가 앞으로도 계속, 쭉, 이어져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A에게 응원한다고 말하며,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내 자리에서 언제나 함께하겠다고 덧붙이며 인터뷰를 마쳤다.
학생들을 믿고 맡기기 :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
'ㅇ'중학교 오현록 선생님
A와 인사를 나눈 후, 막 회의가 끝난 교무실에서 오현록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A에게 오현록 선생님이 평소에 어떠신지 여쭤봤을 때 A는 수업 할 땐 정말 잘 가르쳐주시고 평소에는 웃기고 재미있는 선생님이라고 했다. “제가 말을 잘 못해서….”라고 말씀하시면서도, 학생들 이야기가 나올 때는 정말 열심히, 자랑스럽게 이것저것 말씀하시는 모습을 보며 영락없는 선생님이시구나, 싶었다.
첫 질문으로 A의 난민 재심사 청원 및 인정 이후 달라진 것이 있는지 여쭤보았다. 선생님은 그 이후로 3학년 진학지도로 인해 너무 바빠서 자신은 달라진 게 없고, 달라진 게 있다면 재심사 청원 과정에 함께했던 학생들이라고 답하셨다. 과정을 겪으면서 나중에 인권단체에 들어가서 일을 하겠다는 학생, 언론 쪽으로 가고 싶다는 학생이 생겼다면서, 이 시간들을 통해서 학생들의 인식이 좀 더 깨이게 된 것이 달라진 점이라면 달라진 점이라고. “아무래도 제가 교사다보니 이 학생들을 잘 다듬어서 좋은 사람들이 될 수 있게끔 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통해 제자들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A와의 인터뷰에서 A는 자신보다 자신을 도와주고 함께했던 학생회 친구들이 더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다고 했는데, 과연 그랬다. 학생들은 인권강연에 강사로 참여하기도 하고, 기독교 단체의 총회에 참석해 10분여간 기독교인들의 난민혐오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한편에는 학생들이 이런 저런 활동을 하는 데에 있어서는 선생님의 노력도 함께했다. 난민환영행사가 열렸던 날, 1시간 전에 미리 공감의 황필규 변호사님께 부탁해서 학생들과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 정우성씨를 만나고, 난민 정책까지 심도 있게 살펴보는 공부도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봤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학생들이 장차 커서… 인권 단체같은 데서는 저보고도 해달라 그러는데 제가 누차 하는 얘기가 저는 교사입니다, 이렇게 하고 마는데 그 정도가 이제 (제가 학생들과 함께 준비하고 노력했던 것들 아닐까)” 결국 학생들이 성장하고, 미래에 자신의 역할이 무엇일지 고민하고 결심하기까지는 함께하신 선생님의 노력도 한몫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필자의 머릿속에는 사실 난민 재심사 청원을 하기 이전의 과정과 청원 과정에서의 피케팅, 집회 등의 활동 정도만 있었다. 이후에 어떤 후속조치가 있었으리라고는 딱히 상상도 해보지 못했고, 관심도 갖지 않았는데 오히려 선생님과 학생들이 이후의 활동들을 고민하고, 준비한 것이 학생들의 성장에 많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생각이 그제서야 들었다. 학생들은 이 과정들을 통해서 A라는 자신의 친구를 지키고 싶은 절박한 마음에서 나아가, 한국의 난민 정책에 대해 공부하고 비판하며 전체 난민의 인권에 관심을 가지고, 더 나아가 난민 뿐 아니라 소수자와 약자의 위치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끊임없이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은 학생들과 ‘일을 나누는 것’이구나, 싶었다. 교사가 전면에 나서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게 아니라, 동료로서의 학생들을 믿고, 그들이 경험 속에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오히려 가장 어렵고, 그래서 가장 교육적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박한 전략의 승리
이후에는 많은 이들이 궁금해 했던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난민 재심사 청원 운동이 벌어지고 언론에 알려지면서, 내 주변의 사람들은 다들 학교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 놀라워했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대체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주체로 여겨지지 않고, 때때로 교사나 학교 역시 학생들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독려하기 보다는 막아서는 데에 바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이런 악조건과 상황에서 드물게 빛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께 이 전반적인 운동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쳐왔는지를 질문했다.
“처음에 패소하고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방법이 없는 줄 알았어요. 처음에는 로펌을 생각했는데 대법원에서 끝났으면 끝이 아니냐고 했죠. 이후에 인권센터 쪽을 알아봤는데, 재신청할 수 있는 제도가 있다고 해서 A와 함께 찾아갔습니다.” 재심사 제도를 알고 난 이후에는 시험기간이라 학생들과 바로 함께할 수는 없었고, 나름의 계획만 혼자서 짜고 시험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고 하셨다. 이후에는 학부모 총회처럼, A의 반 학부모들, 학교 운영위원, 학부모회 임원들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현실적으로 학부모들이 반대하면 학생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다행히 학부모님들도 뜻에 함께해주셨고, 반대 목소리가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어요.”
이후에는 국민 청원 준비에 들어갔다. “시험 끝난 날 1반에 제일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소송자료를 읽어서 올 수 있냐고 했죠. 2000페이지가 넘거든요 그게, 그 전날까지 2-3시간 잔 애가 못 놀러가고 그걸 읽고 왔어요. 그러면 한 번 써가지고 와 볼 수 있냐, 해서 제가 손을 조금 보고 청원을 올렸습니다.” 청원을 올리기 전에 기자들에게 보도자료를 보내고, 공론화 작업을 하는 것은 선생님의 몫이었다. 이렇게 학생들과 선생님의 합작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난민 심사의 불공정함이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국민청원을 올린 이후에도 이 합작은 계속되었다. 선생님들은 교실을 돌며 A의 상황과 난민 심사의 불공정함을 학생들이 알 수 있도록 설명했고,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모았다. 돌아다니며 이야기할 때 특별히 신경 쓰신 지점이 있는지 물었을 때, 심사 판결의 부당성과 반난민 논리의 비판에 초점을 두었다고 했다. “초반에는 난민 반대논리에 대해 얘기하면서, 인간의 도덕적 책무라고 해야 할까, 롤즈의 정의론 같은 것도 얘기하면서 닥치는 대로 얘기를 했죠.” 이러한 방식으로 학생들은 난민 심사가 어떤 지점에서 구체적으로 잘못되었는지, 왜 어떤 사람들은 난민이 될 수밖에 없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한편, 학생회장은 학생회 회의를 소집해서 논의를 이어갔고, 학생회 임원들이 앞장서서 활동에 함께했다. 학생들과 선생님은 언론 작업을 하면서 시위 준비를 하는 바쁜 나날들이 이어졌다. “맨날 짜장면 먹고 교무실에서 쓰러지고 저녁 늦게서야 퇴근했어요.”
그렇게 지내다가 방학식날 학생들과, 학부모들과 함께 서울남부출입국 외국인 사무소로 피켓시위를 갔다. 이 날 학생들이 든 피켓의 문구는 많은 이들의 마음을 울렸다. “제 친구와 함께 공부하고 싶어요”, “이란에서 온 제 친구를 도와주세요”, “친구의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편견에 가려진 진실을 봐주세요” 등의 피켓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시위를 진행했다. 시위가 끝나고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건넸다던, "오늘 우리가 한 일은 한국 인권역사에 작은 디딤돌이 될 것“이라는 말처럼 많은 이들의 기억에 오래 남을 장면이었다. 그렇지만 시위 이후 보도는 계속되었지만 청원의 숫자는 올라가지 않았다. 난민 반대 청원은 70만이 넘었는데, 재심사 청원은 3만이었다. “결과적으로는 3대 70이 된 거죠.”
여러 모로 악조건은 존재했다. 학교나 교육청의 압박이나 침묵 역시 영향을 미쳤다. 초반에는 학교가 크게 신경쓰지 않은 채 선생님에게 일임했다가, 나중에 청원이 올라가고 언론의 취재가 이어지자 학교차원에서 막았다. 이 때문에 여론화가 가장 필요할 때 언론 취재는 딱 이틀밖에 하지 못했다고 선생님은 아쉬워하셨다. 이런 학교분위기가 있다보니 선생님들도 영향을 받아 학생들에게 위험하지 않을까 염려하게 되었고, 학생들도 흔들리고 위축되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한편으로 교육청은 초반에는 굉장히 우호적이었지만, 반대 측에서 “교육청이 중립을 지켜야지 그러면 되느냐” 식의 민원을 넣은 후 교육감 면담 등이 계속해서 늦어졌다고 했다.
방학 이후에는 사회적인 압박을 넣어야 한다는 판단을 했고, 염수환 추기경의 도움으로 국가인권위원회, 국무총리, 법무부 장관, 유엔난민기구 등에 서한을 보냈다. 서한을 보낸 후에는 2차 시위 계획을 세우며 방학을 보냈다. 마지막 시위라는 판단에 날짜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법무부에서 심사를 당긴다고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많지 않은 인원이지만, 개천절에 청와대로 가서 기자회견을 하고 릴레이 1인 시위를 진행하고 청와대에 서한을 전달했다. 그로부터 이틀 뒤, 심사가 이뤄지고 인정 결정이 났다.
"귀한 목숨이 심사관의 손에 달려 있다. 부끄럽지 않은 결정으로 아시아 최초 난민법 제정 국가라는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지켜 달라. 인권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국가가 되게 해 달라"는 학생들의 바람이 일궈낸 결과였다.
특별하지 않아서 특별하다는 것
여전히 이 치열한 과정을 들으면서도 궁금했던 건, “왜 다를까? 무엇이 다르게 만들었을까?”였다.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청소년들에게는 유튜브에서 쏟아내는 난민에 대한 가짜 뉴스가, 난민 혐오가 더 내면화하기 쉬웠을텐데, 이 운동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나는 인터뷰 과정에서 어쩌면 이 학교만의 특별한 무언가를 알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 질문을 드렸을 때, 선생님은 허허 웃으며 “우리 애들도 똑같은 애들이에요.”라고 답했다. “운이 좋았던 건, A가 초등학교 때부터 애들과 친구죠. 그러니까 애들은 그런 친구를 보낸다는 것에 대해서 견딜 수 없어 했던 거구요. 두 번째로는 판결 심사 과정의 부당성에 대해서 함께 느끼고, 일단 그게 컸죠 초반의 동력에. 그 외에 남들 학교와 얼마나 뭐 (다를까요)”라는 대답은 처음에는 필자를 좀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그렇지만 곱씹을수록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옆에서 함께 웃고, 떠들고, 장난치던 사람을 지켜내겠다는 마음, ‘친구’를 돕겠다는 특별할 것 없는 우정이 실은 가장 특별한 힘을 지닌 것이라고.
이를 선생님은 ‘경험’의 차이라고 다른 기고문에서 밝힌 바 있는데, 그 글을 인용해보고자 한다. “경험의 차이다. 아이라서 특별히 순진해서 혹은 아이라서 특별히 무지해서가 아니고 함께 생활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총 9년을 겪으면서 아이들은 그 중동에서 온 이란인 아이를 친구로 받아들였다. 함께 장난치고 먹고 때론 싸우기도 하면서 그 아이를 자신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사람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기에 아이들은 친구의 아픔에 공분했고 친구에게 찍힌 낙인을 지우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싸우고 있는 것이다. 몸이 부서져라 학교를 돌며 잠을 자지 않고 악플들과 전쟁을 치르며.”
필자는 이 특별하지 않음에서 의외로 용기를 얻었다. 언제나 특별하고 빛나는 일을 하는 것은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그렇다면 언제든 어디서든 이런 일들은 계속해서 만들어질 거라는 희망을 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고민도 생겼다.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 속에서도 누군가는 소외되고, 누군가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차이를 넘고 편견을 넘어 친구로 만나기 위해서, 서로를 환대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학교의 안과 밖, 그 경계를 부수기
좀 더 나아가, 선생님께 결국 이 ‘다름’에 대한 차별을 학교에서 어떻게 없애갈 수 있을지 조언을 구해보고자 했다. 결국 난민 혐오의 논리는 다양성에 대한 거부, ‘타자’로 상정되는 이들에 대한 배제와 편견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점에서, 이에 맞서 싸운 이번 사건의 성과는 기억되고, 확장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다문화 교육의 측면에 있어서 어떤 시사점이 있을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이번의 일이 그저 기적이나 특별함으로 기억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지, 특히 다문화 가정 학생들에 대한 차별이 일상적으로 존재하는 현재의 학교는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를 질문해보았다.
선생님은 포괄적인 필자의 질문에 다소 당황하시면서도, 학교 안에서만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지점을 분명히 하셨다. “난민뿐 아니라 다문화 역시 근본적으로는 주변부를 쉽게 배제하고, 계층 간의 차이가 심각한 경제적인 구조와 문화풍토 속에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극복되는 것이 다문화를 포함하여 난민문제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회적인 갈등이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토양이 되는 길이라고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학교 내의 차별은 분명 심각하게 고려되고, 해결되어야 할 문제이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은 현상이라는 지점을 지적하셨다고 필자는 판단했다.
“학교에서 할 수 있는 노력도 있겠지만, 학교 밖의 문제가 영향을 많이 미치고, 사회 바깥의 차별·배제 권력구조가 해소되지 않으면 어렵습니다. 학교 내 프로그램 교육으로 가능한지, 이미 그런 게 인성, 정체성, 사고구조에 다 스며들어있는데 우리 교사, 학교 이런 존재들이 뭘 할 수 있나 싶습니다.”
결국 차별이라는 현상이 어디에서나 비슷한 양태로 존재하고, 되풀이되는 이유는 근본적인 원인은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백인은 언제나 환영받지만 난민과 ‘가난하고, 못 사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은 멸시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난민, 이주 노동자 등을 비난하고 배제하는 논리 역시 경제논리와 연결되어 있는데 그들은 “‘자국민’의 일자리를 빼앗아가고, 자국민에게 돌아갈 세금을 빼앗아가는 존재”라고 여겨진다. 누구도 제대로 된 삶을 보장받지 못하는 사회에서 차별과 혐오는 더더욱 자라나기 마련이며, 인식의 변화를 넘어서 삶의 토대의 변화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인터뷰를 통해서, 필자가 인터뷰를 기획할 때 다소 편협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학교 안의 프로그램, 학교 안의 다른 시도가 어떻게 가능할지만 관심을 가졌는데, 오히려 경계를 부수는 것이 핵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건이 기적이나, 특별함으로 남지 않기 위해서는 학교 안의 변화만큼, 혹은 그보다 더 전체 사회의 구조 및 문화의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이주 노동자들에 대한 제대로 된 권리 보장,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의 요구는 실질적으로 인식을 바꿔놓을 것이고, 학교 안의 차별을 완화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할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학교 밖의 변화는 분명 학교 안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다.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경험을 통해 학교 안에서 변화의 씨앗은 만들어질 수 있고, 학생들과 교사들이 동료로서 학교를 바꿀 때, 세상도 바뀔 수 있다. 그래서 학교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는 이번 사건을 기억함으로써 가능할 것이다.
‘이름은 잊혀지고 사건은 기억되어야 합니다’
글을 마치며, 다른 말을 덧붙이기보다는 난민 인정 이후 ‘ㅇ’ 중학교 학생회에서 낸 입장문을 인용하고자 한다. 나는 이 글을 통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배웠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친구가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고 일상으로 돌아가 편안한 삶을 누리기를 소망합니다. 이란 친구뿐 아니라 그를 돕는 우리 학생들 모두 같은 이유로 잊혀지기를 원합니다. 다만, 여전히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많은 사람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그러나 이번 일련의 과정은 기억되어야 합니다. 이제 시작인 난민 인권운동의 작은 이정표인 탓에, 팍팍하고 각박한 우리 사회에 던지는 사회적 약자를 위한 위대한 첫 발자국인 탓에, 여전히 세상의 어둠 속에서 빛을 찾고 있는 이름 없는 사람들이 의지할 희망의 한 사례가 되는 탓에.”
(* 인터뷰를 함께해주신 A 학생과 오현록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