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chter
처음에는 ‘교육’이라는 다소 막연한 글자에 꽂혀 들어오게 되었어요. 하지만 직관에 의존했던 그 충동적인 선택을 지금 돌이켜보면, 후회하지 않는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교육저널에서 한 학기 동안 구성원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세상에 대한 저의 좁디좁았던 시선을 넓힐 수 있었어요. 다만, 거의 비대면으로 진행되고 편집장이 없는 학기라 그런지 때때로 제가 이 공동체에 제대로 안착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어요. 그럴 때마다 저를 예쁜 말과 싱그러운 미소로 이끌어주신 모든 편집위원들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요. 그리고 시간 내어 제 글을 읽으실 모든 독자님들께 미리 감사의 말을 전하고, 다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시면 좋겠어요. 이번 기사를 구름판으로 삼아, 언젠가는 꼭 넓어진 시선과 성숙해진 생각을 더 나은 글로 공유하는 도약을 이루어보겠습니다! 한 학기 고생한 나 자신, 편집위원들, 그리고 독자님들 모두 사랑합니다♥

펭로시
안녕하세요? 펭로시입니다. 이것으로 두 번째 글도 마무리되었네요! 저번보다 더 성숙한 펭로시가 된 것일까요?:)

저는 이번 글을 쓰면서 많이 분노하고, 많이 슬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초안 때 격정적인 감정이 날것 그대로 글에 담겨 버려서 제 글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세심하게 접근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들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지금의 글은 이런 고민을 교육저널 분들과 함께 나누고 생각하며 발전시킨 것입니다. 저는 저의 고민의 흔적, 나아가 교육저널 모두의 고민의 흔적이 독자 분들에게 진실하게 전달되었으면 해요.

더 ‘세심한’ 펭로시가 되려 노력했지만, 아직 미숙한지라 표현에 있어, 내용에 있어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앞으로 누군가에게 용기와 의지를 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감히 생각하며 제 후기를 마무리 지으려고 합니다.
이번 호까지 열심히 함께한 교육저널 분들과 귀중한 시간 할애하시어 이번 호를 읽어주신 독자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교육저널 짱! 

러셀
안녕하세요! 러셀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UP 애니메이션이라서,  영화 속에 나오는 모험가 아이 이름으로 필명을 정하게 되었습니다! 러셀이 칼 할아버지가 매 순간 소소한 행복을 느끼게 해준 것처럼 저도 누군가에게 그러한 존재가 되고 싶네요~ :)
벌써 교육저널을 함께 한 지 1년이 지났습니다. 이렇게 또 한 권의 교지가 완성되었다는 게 정말 뿌듯하네요. 사실 매주 회의를 하면서 하기 싫었던 날도 있고, 너무 어려워서 글을 그만 쓰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그치만 항상 자기 글인 것처럼 피드백해주시고 함께 고민해주신 여러분 덕분에 무사히 글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너무 감사합니다. 그리고 부족한 제 글을 읽어주신 독자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교육저널 파이팅!
 
darling
와아 정말 길었던 교지 만들기 대장정이 드디어 마무리되었네요! 바쁜 와중에도 모두가 시간을 내어 주에 한 번씩, 짧지 않은 시간들을 꾸준히 함께 할 수 있어 이렇게 막바지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기쁜 시간들이었습니다:) 
책을 마치면서,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어온 우리의 고민들이 책 한 권을 완성시킴으로써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넓고 깊은 생각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되기를 바라봅니다. 긴 시간 공들여 진정성 있는 글을 써나가던 것, 그 속에 자신의 생각을 보다 잘 담아내려고 애를 쓰던 것,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던 것 모두가 훗날 제 청춘의 기억 중 한 장면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널의 모임을 마친 어느 밤, 학교의 길을 걸으며 새카만 하늘 아래 반짝거리던 별을 보았던 기억처럼요. 소중한 기억과 멋진 교지를 함께 만든 편집위원 분들께 애정을 담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더 멋진 내일을 살아가는 교육저널이 되어봅시다! 모두 감사해요:D

a little philosopher
교육을 생각하는 것은 이상을 그리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답은 없고 상상만 있는 것이 교육인 것 같습니다. 일 학년 때 교직수업을 들으면서 풀어내지 못했던 궁금증과 이야기를 교육저널에서 마음껏 나눌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앞으로 미숙한 저의 상상에 교육저널 분들의 피드백이 더해지면서 조금은 현실적인 감각이 생기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ALee
안녕하세요, 아리(ALee)입니다! 교육저널과 함께 한 1년이 이렇게 마무리가 되어가네요. 그 동안 교육저널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글을 읽으며, 좋(아지고 싶)은 글을 써왔습니다. 그리고 아마 이번 학기가 제가 교육저널과 함께 하는 마지막 학기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그 동안 교육저널이라는 인간답고 따스한 공동체에 속해있을 수 있어서 진심으로 행복했습니다. 
평소 글을 쓰는 게 익숙지 않았던 터라 매번 기사를 쓰기에 앞서 ‘기사를 쓰기 위해 고민하는 시간’을 다른 편집위원들에 비해 오래 가져갔었습니다. 그럼에도 어찌저찌 이렇게 교육저널에 글을 실을 수 있었던 건 교육저널의 다른 편집위원들이 차근히 기다려주시고, 또 제가 글의 갈피를 잡지 못해 헤멜 때 손을 내밀어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편집장이 없던 체제였던만큼 모든 편집위원들의 도움으로 이렇게 하나의 교지가 나올 수 있게 된 것 같아서, 그리고 저 역시도 한 편의 글을 실을 수 있던 것 같아서 모든 편집위원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지난 교육저널 <수면 아래>에서 경험을 바탕으로 한 르포 기사를 쓰고, 이번 학기에는 조금 저의 생각을 깊고 날카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습니다. (물론 저의 부족한 어휘력으로는 ‘똑똑한 글을 쓰고 싶다!’정도로밖에 표현되지 않았지만요..^^) 어쨌든 이번 글을 통해 교육과 교과서, 배움과 학습, 정치와 교육 전반에 대해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나름대로 정리한 것 같아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대학에서 4년….이 아니라 이제 5년 째네요. 어쨌든 대학에서 5년을 보내며 가장 가족같았던 공동체를 되돌아보면 아마 교육저널이 아닐까 싶습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적당한 선을 지키되 서로를 따스하게 보듬어주는 공동체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동체는 전 편집장님들을 포함한 모든 편집위원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죠. 그렇기 때문에 꼭 글을 쓰는 것이 아니더라도, 교육저널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했다는 것 자체가 저를 성장시키는 경험이었습니다.
앞으로 제가 교육저널을 나가게 되며 언제 다시 만나게 될 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는 마스크 없이! 만나서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그 날까지 저는 교육저널을 추억하며 지낼게요 :)

BDUCK
코로나가 시작된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는데요, 그 말은 교육저널이 비대면 회의 체제를 도입한 지도 1년이 되었다는 말과 같겠네요.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주변에 가장 많이 들려오는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망한(?) 이야기들인 것 같습니다. 어디 학생회가 망했다… 어디 동아리가 활동 중지다 등등... 교육저널 역시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모든 회의를 비대면으로 진행해야 했고, 심지어 편집캠프조차도 집합금지 조치를 준수하기 위해 동방에 4명까지밖에 못 모였으니까요. 게다가 교육저널 창간 이래로 처음 맞는 ‘편집장 없는 체제’는 모든 이에게 낯설고 당혹스러웠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난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살아남은(?) 교육저널이 참 대단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는 바꿔 말하면 이 ‘살아남음’을 위해 교육저널 구성원들이 부단히 힘을 써줬다는 이야기가 되겠죠. 짧은 글쓰기부터 세미나, 힘겨운 글쓰기와 피드백 시간을 거쳐 편집캠프까지 쉼없이 달려와준 모든 교육저널 편집위원께 감사하다는 말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대학생활 2년을 함께한 교육저널은 그 어떤 공동체보다 애착이 가는 공동체입니다. 때문에 편집장은 없지만 편집장 만큼이나 애정을 쏟고, 교육저널을 지키기 위해, 모든 구성원을 존중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제 노력을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이 공동체가 37호가 아닌 370호(너무 갔나?)를 낼 때까지 존속했으면 좋겠는 바람입니다ㅎㅎ이제 곧 3학년이 되고 더 알고 배우고 싶은 게 많은 지라 교널을 곧 떠나야하는데, 시원하면서도 섭섭하네요. 저를 누구보다 성장하게 해줬으며 저와 함께 자란 이 공동체를, 저는 아마 오래도록 추억할 것 같습니다. 

채미
교육저널의 가장 좋은 점은 다양한 교육을 접하고 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교육저널 활동을 통해 민주시민교육, 페미니즘 교육에 대한 교과서와 지도서를 살펴보고 저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더 깊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어렴풋하게만 알고 있던 환경 교육에 대해 여러 계획안과 실제 시행되고 있는 다양한 단체의 환경 교육을 검토하고 정리하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비록 교육계에게는 암울한 한해였지만 여전히 다양한 교육들이 새로 태어나고 논의되고 발전하고 있숩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새로운 교육들이 어두운 상황에서의 단순히 허황된 소리가 아닌 희망을 구체화하는 새로운 노력으로 보고 많은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함께 더 다양한 교육을 탐구해보고 싶습니다.

고슴도치뇽
교육저널과 함께한 4학기가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이번 학기는 유난히 교육저널에 함께하는 게 버거웠던 것 같아요. 글 쓰는 게 어렵다기 보다는 구성원으로서 애정과 책임을 갖는 게 어려웠어요. 편집장이 없는 체제 속에서 매주 회의를 진행하는 시간 이외의 순간들에 교육저널이 어떤 공간인지,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지, 더 나은 교지를 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치열하게 고민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저의 발화권력을 인지하지 못하고 항상 성급해하고 답답해했던 지난 시간들을 반성합니다. 그래도 편집위원들에게 함께했던 한 학기가 따뜻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기를 바랍니다. 교육저널과 함께했던 2년 동안 많이 웃고, 많이 배우고, 많이 성장한 것 같아요. 제가 이렇게 따뜻한 공동체를 만나서 행복할 수 있었던 만큼, 이 공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도 소중한 공간으로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앞으로도 교육저널이 모든 구성원을 존중하는 따뜻한 공간으로, 현재의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치열하게 고민하고 토론하는 공간으로 유지되고 발전했으면 좋겠어요. 여러모로 힘든 시기에 끝까지 놓지 않고 열심히 참여해준 모든 편집위원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다들 정말로 수고하셨어요!
 
월영
안녕하세요! 월영입니다. 2020-2학기 교육저널에 들어왔는데, 금새 한 학기가 지나버렸네요. 예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교육저널을 챙겨보고 있었는데, 이렇게 멋진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글을 쓸 수 있어서 행복했어요. 코로나 시국에 온라인으로만 사람들을 만나는 건 너무 힘든 일이었지만 피곤한 와중에도 서로를 위해주는 교육저널 구성원들이 너무 따뜻했습니다. 그래서 저도 힘내서 이것 저것 해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번 교육저널을 읽을 분들도 저희와 연결될 수 있으면 좋겠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면 좋겠어요. 다들 너무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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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를 펴내며  (0) 2021.03.22

[대담] 비대면 교육, 어떠셨나요? (1) 을 보려면? ⇒ edujournal2018.tistory.com/89

 


# 비대면 교육이기에 가능한 것이 있다면?


우정: 지금까지 너무 비대면 욕만 한 것 같아서(웃음), 남은 시간 동안은 비대면의 장점과 발전 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펭로시: CG를 잘 활용하면 양질의 수업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중학교 때 들었던 인강에서 선생님이 CG를 쓰셨는데 해풍, 육풍 관련한 내용을 설명하셨어요. 선생님이 실제 바닷가에 있는 것처럼 표현하시면서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머리카락이 날리는 CG를 넣으며 수업하셨어요. 비대면이니까 이런 CG를 수업에 녹이면 학생들이 재밌게 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정: 두 가지 사례가 생각나요. 하나는 영어 연극 수업을 제가 들었었는데 CG 얘기하니까 생각이 난 게, 제가 수녀 역할을 맡아서 뒷 배경을 성당의 고해성사실로 설정하고 목폴라에다가 검정색 반팔 뒤집어 쓰고 연기를 했었거든요! 그게 대면이었으면 불가능했을 거예요. 일단 배경화면도 불가능했을 것이고 옷도 그렇게 하면 다 티가 났을 거예요. 비대면이었기에 창의력을 발휘해서 연극을 진행한 것이 생각이 났고요. 

 

두 번째는 비대면이 되면서 1:1 맞춤 상담이 훨씬 자유롭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영어 수업 들었던 것 중 또 하나가 학술작문 수업이었는데, 그게 개별로 글을 쓰면 교수님이 계속 피드백을 주셔야 하는 수업이에요. 그런데 그게 만일 대면이었다면 한 명씩 앞에 나가서 피드백 받는 동안 다른 학생들은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고 이런 식으로 했을 것 같은데 비대면이었기에 소회의실을 교수님께서 만들어주시고, 소회의실 내에서는 각자 서로의 글에 대해 피드백을 하고, 그동안 교수님이 피드백을 해줄 사람만 본 세션에 남아서 피드백이 이루어졌어요.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한 것 같아요! 또 비대면이었기 때문에 구글 클래스 룸을 이용해서 수업을 하다 보니 동영상을 올리고 댓글을 달고 이런 것도 자유자재로 가능했던 것 같아서. 수업 시간에 미처 다루지 못했던 부분은 교수님이 실시간 스트리밍 동영상을 녹화하셔서 구글 클래스룸에 올려주시고 댓글로도 피드백을 달아주시고 이런 식으로 했었거든요. 뭔가 1:1로 피드백을 받고 교수님과 소통하는 것은 오히려 비대면에서 좋아진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월영: 저같은 경우에는, 음, 이건 학과 특성이긴 한데 그림 같은 것을 많이 보거든요 슬라이드에 그림이 있고 교수님께서 설명하시는게 수업의 주된 형식인데 사실 오프라인에서 들으면 PPT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분들은 저게 대체 뭐지 하면서 흐린 눈 하고 보거나 아니면 화질이 안 좋아서 전달이 어려운 상황이 있었는데 비대면 수업으로 하니까 PPT가 바로 나한테 뜨잖아요. 심지어 그림을 자기 마음대로 확대해서 교수님께서 설명하시는 부분을 정확하게 볼 수 있고 그런 점은 좋았던 것 같아요. 


러셀: 저는 미디어 활용능력이라고 해야 하나요? 기술활용능력 이런게 굉장히 능통해진 것 같은게 교수님들도 그렇지만 저희들도 동영상 촬영도 직접 해봐야 하고 좀 더 이용해봐야 하고...... 이런 기회들이 많아서 그런 것들을 더 잘 다룰 수 있게 된 것 같고 요즘 초등학생들이 코딩 수업을 듣잖아요. 제 생각에는 만약 이렇게 비대면 수업의 장점이 부각되면 초등학생들이 나중에 학교에서는 줌을 어떻게 하면 잘 사용할 수 있을지 줌으로 발표를 잘하는 방법 손들기 기능! 이런 거에 대해서도 배우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고슴도치뇽: 사실 저는 마음 깊은 곳에 기술의 발전에 대한 약간의 거부감이 있어요. 기술 발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고 물론 일정 정도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기술 발전이 필요한데 우리 사회에서 많은 경우 누군가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기술이 발전하는 게 아니라 특정 집단의 이윤 추구를 위해 기술이 발전하잖아요. 또 기술이 발달했을 때 그 기술을 구매할 수 있는 사람들은 삶의 질이 올라가겠지만 그럴 수 없는 사람들은 더 사회에서 소외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그럼에도 비대면이 되어 좋았다고 생각하는 점은 좋은 강의들을 특정 공간이 아닌 공간에서도 들을 수 있다는 점이에요. 서울대에서도 연구발표회나 토론회가 많이 열리는데 이제 해외에 있는 분을 초청할 수도 있고 그것을 신청하면 멀리서도 들을 수 있잖아요. 여러 활동 단체들에서 마련하는 좋은 프로그램도 이전에는 서울에서 많이 진행되다 보니까 서울에 거주하는 사람들만 주로 참여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온라인이니까 지역을 넘어서 참여할 수 있어서 그 점은 좋은 것 같아요.


우정: 저도 생각이 났는데 채팅 기능도 온라인 교육의 특징인 것 같아요. 소심한 사람은 평소에 대면 수업할 때도 손을 들고 말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리고 비대면 교육에서도 마이크를 켜고 말하기 힘든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성격적으로. 그런데 채팅 기능이 있다 보니까 비밀채팅으로 교수자님께 질문을 드릴 수도 있고 교수자님께서 뭘 물어보셨을 때 채팅을 이용해서 활발하고 간단하게 답변을 쳐서 올릴 수 있고? 그런 것들이 좀 더 내성적인 사람들에게 오히려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더 좋은 수단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든 것 같아요. 


고슴도치뇽: 그거 되게 좋은 것 같아요!!


월영: 비대면 교육의 좋은 점을 말하는 것이랑 조금 다를 수 있는데, 아까 고슴도치뇽님이 말씀하신 부분에 공감이 많이 되었어요. 왜냐하면 저는 할아버지 생각이 되게 많이 났거든요. 할아버지 가게에 가끔씩 요금표나 이런저런 안내 문구같은 게 인쇄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그런 작업을 항상 저에게 맡기셨단 말이에요. 심지어 할아버지께서 가끔씩 핸드폰을 들고 오셔서 이거 대체 뭐냐하고 물어보시면 제가 다 알려줘야 하는 거예요. 저는 한창 제 일이 바쁘다고 느껴질 때는 살짝 귀찮기도 했는데 사실 그런 식으로 기술 자체에 적응을 못 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잖아요. 너무 빠르게 변하니까. 할아버지 옆에는 제가 있으니까 제가 할아버지께 가르쳐드릴 수 있는 거잖아요.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그것을 사용하실 수 있는 것이고. 그런 것처럼 기술의 발전을 숭상하지만 말고 그것을 대체 어떻게 적용할지, 뻔한 이야기이긴 하지만(웃음), 아니면 어떻게 사람들이 배우게 할지 이것이 중요한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정: 진짜 이 시간에 우리가 좋다고 이야기했던 것들을 나중에 이것을 어떻게 발전시킬지 고민해보면 좋을 것 같아요. 지금은 물론 막연한 생각이긴 하지만!

 


# 비대면 교육, 어디로 가야하나?


러셀: 하나고에서는 온라인 교육의 가장 큰 원칙을 ‘소외된 학생이 없어야한다’라는 점을 정했어요. 또 이와 관련해서 단순히 스마트 기기나 학습기구를 지원할 뿐만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발언권과 참정권이 동등하게 제공될 수 있는지 이런 부분에 초점을 맞춰서 이야기를 하고 고민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학교에서는 학생과 교사 간의 소통을 중요시 해서 구글닥스를 이용한다든지 혹은 온라인 플랫폼같은 것을 두어서 학생과 교사 간의 소통을 진행해서 어떻게 하면 원활히 비대면 수업을 진행할 수 있을지 의견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또 다음 슬라이드에선 줌 회의의 다양한 기능을 활용하고 온라인이라는 특성을 활용해서 온라인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게임? 같은 것을 수업에 도입하여 학생들이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학교 생활 관리도 온라인으로 진행하여서 학생들이 비대면 수업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주도적으로 모든 것을 하지 않고 교사가 개입하여 도움을 줄 수 있게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하나고에서만 있었던 일이고 이러한 과정을 과연 모든 학교에서 실행할 수 있을지 혹은 이러한 방향이 또 오직 맞는 방향만은 아니니까 어떻게 하면 비대면 수업 과정에서 다양한 기술을 활용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출처: <행복한 교육> vol.460, 교육부, 2020년 11월(사진을 클릭하면 링크로 연결)

우정: 이 자료는 교육부 자료집이에요. 정확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지만, 최근에 교육부에서 만든 자료집인데 원격수업의 질 향상을 위해서 대학과 정부에서 이런 차원의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되어있던 표인데요. 이걸 제가 가져온 이유는 여기 보시면, ‘질 관리체제 구축’, ‘대학의 노력’ 부분에 원격수업관리위원회 운영 학생참여 이렇게 되어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은 학생이 참여해서 원격수업의 질 혹은 운영이 잘 되고 있는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기구라는 것이겠죠? 우리가 이전에 코로나19 상황에서 등록금 이야기만 나오고 수업의 질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학생들이 직접 참여해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문제제기했었던 것이 기억나서 가져와 봤어요. 학생참여위원회 같은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봐도 좋을 것 같아요. 두 번째 부분은 “공간혁신이 필요하다”인데요, 앞으로 원격 수업이 확대된다면 대학의 건물도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사범대 같은 경우에는 이번에 1층 라운지 쪽에 스마트 교육센터 같은 공간을 만든다고 이름 공모하고 그랬었거든요. 그게 아직 안 만들어진 것 같긴 한데 그런 식으로 온라인 교육을 학생들이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 공간 그런 곳이 마련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고요.

 

출처: <행복한 교육> vol.460, 교육부, 2020년 11월(사진을 클릭하면 링크로 연결)

우정: 자료집의 마지막 부분에는 코로나 이후 미래교육전환을 위한 10대 과제를 제시하고 있었어요. 그 중에서 인상 깊었던 것만 몇 개 가져왔는데 과제 2같은 경우에는 새로운 교원제도 논의추진이라고 해서 교사 1인당 감당하는 학생 수를 줄일 수 있는 방안을 찾아봐야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그리고 과제 7부분에서 고등직업교육 내실화 이 부분에서는 마지막에 VR이나 AR 콘텐츠 등을 활용해서 비대면 실습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부분이 인상깊어서 가져왔어요. 비대면에서 새롭게 직업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 같아서 가져와 봤습니다.

출처: '"비대면 수업, 홀로그램·가상현실 이용" - 포스트 코로나, 비대면 온라인 교육 한계 극복해야', 김은영, The Science Times, 2020.09.01. (사진을 클릭하면 링크로 연결)

펭로시: 저는 교육공학적인 기술과 원격수업이 접목된 사례를 가져와 봤는데 한양대학교에서 텔레프레전스라고 킹스맨에서 나왔듯이 홀로그램을 활용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고 하더라고요. 원격수업을 할 때 실제 교수님의 키와 모습을 재현해서 저와 교수님이 한자리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는 그런 기술을 바탕으로 수업을 진행한다고 밝히고 있었어요. 한양대에서는 텔레프레전스 기술을 통해서 원격수업을 진행하려고 했고 또 연세대학교에서는 원격조교를 도입하여 우리가 비대면 상황에서 겪을 수 있는 문제들이나 도움이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고 합니다.

출처: '[트랜D]비대면시대는 새로운 교육의 출발점', 중앙일보, 2021.03.26(수정) (사진을 클릭하면 링크로 연결)

우정: 테크놀로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조직문화가 있어야 한다는 기사 또한 가지고 와봤습니다. 자, 그럼 비대면 교육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할까요?


러셀: 저는 우선 우정님이 마지막에 가져온 ‘테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조직 문화’ 그 부분이 굉장히 인상깊었던 게 코로나가 점점 완화되면서 대면 교육을 하게 되었는데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어요. 왜냐하면 오늘도 의논을 했지만 비대면 교육을 직접 경험하면서 다양한 장점들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런데 당연한 듯이 비대면을 하지 않고 코로나가 완화되면 무조건 대면으로 돌아가야한다는 것이 기본 전제인 것 같아서. 혼합을 한다든지 아니면 비대면 교육을 어떻게 하면 좀 더 잘할 수 있을까 이런 부분에 대한 고민이 아예 없었던 것 같아서 저도 여기 나와 있는 것처럼 기술이 있다면 이것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이러한 부분에 대한 충분한 고려나 사고같은 것이 필요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펭로시: 저도 말씀을 드리자면, 확실히 러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비대면 교육은 마이너스(-)이고 따라서 우리는 코로나 시국을 극복해서 플러스(+)인 대면 상황으로 돌아가야한다는 논의가 조금 많은 것 같은데 사실 아까도 같이 논의해보았듯이 비대면 교육에서도 확실히 장점들이 많고 더 과감하게 시도할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을 것 같다고 생각을 해요. CG도 그렇고 아까 고슴도치뇽님께서도 말씀해주셨듯이 지역을 넘나들 수 있는? 제 경험을 말씀드리자면, 수업 시간에 일본 학교랑 교류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일본 학교 학생들이랑 같이 이야기를 하고 같이 토론을 했던 것이 인상적이었어서 이런 부분들을 함께 수업에서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까 강원도 기숙학교 다니는 친구 인터뷰했던 것도 보면 ‘풀면학, 풀자습’만 시키고 공부할 시간이 너무 많아지고 그런 부분들이 왜 생기나 하고 봤더니 제 생각엔 우리가 학교라는 공간에서 대면교육을 할 때에도 수업에 대한 고찰이나 학습에 대한 고찰이 많이 없었다고 생각을 해요. 학교 내에서 성적을 최우선적으로 여긴다든지, 내신을 따는 것을 중요시한다든지 학생과 선생님들이 내신, 혹은 생기부를 작성하는데 목매거나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비대면 교육이 더 과감하고 더 획기적인 시도로 이루어지려면 우리가 엄청 많은 시도를 해봐야하고 비대면 교육에서 다양한 기술이나 아니면 체험이나 이런 것을 도입을 해야 할 텐데 결국 학교의 시선이 내신, 성적, 학생들의 진학같은 것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으면 비대면 교육은 정체될 수밖에 없어요. 국가에서 말하는 것처럼 마이너스(-)인 비대면 교육이고 플러스(+)인 대면 교육으로 어떻게 가야할까, 그런데 이것은 또 대면 교육으로 돌아가더라도 이런 고민이 하나도 없었기에 그냥 또다시 성적 산출이고 또 다시 줄세우기이고 약간 이런 식으로 간다고 생각을 했어요. 많은 학생들이 비대면 학교 수업을 소위 인터넷 강의? 수능을 위한 정보전달식의 수업? 정도로만 여기는 것도 이런 부분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비대면 교육이 어디로 가야하나를 논의하려면 우리가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는지를 많이 고민하고 성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이번 대담을 통해서 들었던 것 같아요.


월영: 저는 하나고 관련 기사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다니던 고등학교에 적용하려면 얼마 정도의 시간과 재화가 투자되어야 할까 하는(웃음), 엄청 암울한 생각이 들었는데 힘들 것 같은 거예요. 저희 학교에서 2018년에 미투 사건이 있었는데 사실 그 전에 어떤 상황이었냐면 취약한 건물을 허물고 새 건물을 지어야 했어요. 이거에 관련해서 교육청에서 지원금이 나오기로 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미투가 발생한 이후에 지원금이 끊겼다고 하더라고요. 이런 학교에까지 지원금을 주면 안 된다? 이런 생각이 작동한 것 같기도 하고 이 학교는 좋지 않은 학교다? 이런 사고가 작동한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실망을 되게 많이 했었거든요. 이 자료 보면서 저는 기술이 발전하면 뭐하나~ 하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했어요. 어차피 지원금이 나오고 안나오고... 이런 것이 다른 것에 달려있을 수도 있는데... 그런 암울한 생각이 들었어요. 


고슴도치뇽: 제 생각을 이야기해보면 저도 앞으로 비대면 상황에서 있었던 장점들을 살리는 것은 필요한 것 같아요. 지역을 넘어서 좋은 학습프로그램을 공유한다든가 아니면 수업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시각자료들을 활용한다든가 이런 것들은 앞으로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런데 제가 학교 다니면서 느꼈던 것은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 수업에 대해서 규칙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나 생각이 나는 건 마이크랑 화면 켜는 것 등 관련해서! 수업마다 규칙이 다 다르고 학생들도 생각이 다 다르잖아요. 사실 이것에 대해서 친구랑 이야기해본 적이 있었는데요. 제가 들었던 수업에서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화면도 끄고 마이크도 끄고 있었어요. 그런데 교수님이 “우리 수업은 아무래도 방대한 범위의 지식 전달이 필요해서 교수자가 일방적으로 강의를 하긴 하지만 강의가 교수자의 일방적인 정보 전달로만 완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여러분이 가능하다면 화면과 마이크를 켜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꺼진 화면을 보는 것이 제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것 같아요. 일상적인 소음 정도는 괜찮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거의 매 수업 시간마다 호소를 하셨어요. 근데 저는 교수님의 마음이 되게 이해가 가더라고요. 교수님이 저렇게 호소를 하시고 학생도 수업을 만들어가는 구성원이니까 학생들이 조금 더 적극성을 보여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제 친구는 다르게 생각하더라고요. 수업에 참여한다는 책임감에 대해서 각자 생각하는 범위가 다른 것 같다고 말했어요. 친구 말에도 공감이 되더라고요. 수업의 질을 위해서 그리고 수업이 단순히 교수자 한 명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확실히 더 많은 수업 참여자들이 마이크와 화면을 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또 한편으로는 수업을 구성해나가는 일원으로서 책임감의 범위라든지 화면으로 나의 사적 공간을 공유하는 것에 대한 부담이라든지 그런 것들도 걸려있어서 항상 수업 시작하기 전에 이런 것들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우리가 수업에서 어디까지 협의를 할 것인지 조정을 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느껴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우정님이 보여주신 자료 관련해서도 얘기해보고 싶은 게 있었는데요. 교육부의 공간혁신이라는 말이 있었잖아요. 그 말을 경계해서 보아야 할 것 같아요. 캠퍼스의 공간과 시설의 내부 구조를 원격교육에 적합하게 재구성해야 한다고 노란 줄이 쳐져 있는데, 물론 저도 이게 어떻게 바뀐다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온라인 교육을 들을 수 있고 비대면 실습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 이유로 원격교육에 적합하지 않은 동아리방이나 학생자치공간이나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디지털 센터로 대체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고 생각해서요. 이 자료가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이런 맥락으로 공간 혁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서 앞으로 우리 캠퍼스의 시설이 바뀔 때 그게 조금 어떻게 바뀌는지 더 예민하고 자세하게 고민을 해봐야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고요. 그리고 한편으로는 캠퍼스 공간과 시설이 원격교육에 적합하게 재구성될 때 오히려 학생들이 더 개인화되고 점점 공동체가 해체되는 방향으로 캠퍼스가 재구성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또 원격교육에 맞는 대학이라는 이유로 앞으로 캠퍼스 없는 대학이 많아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우려도 조금 들고요. 그래서 대학뿐만 아니라 모든 시설이 기술혁신과 접목될 때 그게 어떻게 접목되는지 자세히 봐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한다고 답은 못 내리겠지만 대학이 원격교육에 맞는 공간이 되는 것에 대해서 조금 자세히 톺아보아야 할 것 같아요.


우정: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을 짚어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그런 것이 되려면 학생비대면교육위원회 이런 것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야 학생들의 의견도 반영이 되겠죠!


월영: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해요. 작년 1월에 처음 코로나 터졌을 때는 학생회나 아니면 학생자치활동 이런 것들을 해내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해보니 할 수 있는 것들이 꽤 많긴 하더라고요. 다양한 기술들을 이용하면. 그런데 그 와중에도 대면으로밖에 할 수 없는 지점에 대한 비판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비판들도 절충해나가면서 나름 잘했다고 보는 편이지만 여전히 20학번 분들이랑은 유대관계를 거의 쌓지 못한 채로... 기술을 수용하는데 있어서 열린 마음을 갖는 것도 필요하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민을 많이 해야겠지만 무조건 무턱대고 받아들이자는 소리는 아니고 고민을 많이 하면서 최악의 상황까지 생각을 하면서 논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대담을 마무리하며


우정: 이렇게 소중하고 다양한 의견들을 나눠보았는데, 오늘 대담이 어땠는지 각자 소감을 나눠볼게요. 우선 저는 저번 세미나에서 대학 등록금 반환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수업 질에 대한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문제의식이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그래서 비대면 교육을 대담 주제로 건의하게 되었는데, 해결책이 없는 문제인 만큼 명확한 해결책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앞으로 고민할 때 꺼내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 많아서 너무 좋았습니다. 


고슴도치뇽: 저도 좋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난 1년을 잘 정리한 것 같아요!


펭로시: 저 혼자만 생각했을 때에는 막연했는데, 대담을 통해 생각이 구체적으로 정리된 것 같아요. 또, 제가 교사가 돼서 비대면 수업을 하게 될 수 있을 텐데, 여기서 나온 이야기를 직접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월영: 저는 마지막쯤 기술발전과 관련된 이야기가 가장 인상 깊어요. 최근에 '지민의 탄생'이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어요. 이 책에서는 기술의 다양한 활용방안과 지식의 가치 중립성의 허상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서 과학이나 기술이 진입장벽을 더 높게 쌓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전달할 때 지식을 알기 쉽게 가공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저도 많이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직도 조금 막막하지만. 오늘 이야기를 나누면서 깊게 고민할 수 있어 좋았어요!


러쉘: 저도 미래의 교사를 꿈꾸는 사람으로서, 오늘 회의가 다양한 생각할 지점을 던져주는 것 같아 너무 소중하고 유익했습니다!

 

우정, 러셀, 펭로시, 고슴도치뇽, 월영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19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 2020학년도 2학기도 대부분 비대면 수업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에 지난 호 <특집-코로나19와 교육>의 고민 지점을 이어, 비대면 교육의 한계와 앞으로의 교육 방향을 고민하는 대담을 나누어보았습니다.


# 당신이 경험한 비대면 교육, 어떠셨나요?


우정: 처음에는 간단하게 여러분이 경험한 비대면 교육이 어땠는지에 대해 이야기 나눠봅시다. 웃겼던 점, 힘들었던 점, 좋았던 점 등 자유롭게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주세요.  

 


- 비대면 교육에서 있었던 ‘웃긴썰’


우정: 우선 저는 이번에 영어 연극 수업을 비대면으로 들었어요. 원래는 대면으로 2인 1팀으로 무대에서 연극을 해야 했었죠. 남자와 여자가 싸우는 장면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물을 뿌리는 장면을 Zoom에서 연기해야 했는데, 여자 역할의 분은 자신의 노트북 카메라에 물을 뿌리고 남자 역할의 분은 동시에 스스로 얼굴에 물을 뿌리셔서 리얼하게 해당 장면을 구현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러셀: 저도 Zoom 사용에 서툴러서 있었던 웃긴 경험이 있었어요. 친구들과 개별적으로 Zoom 모임을 하면서 사용자 이름을 ‘고구마 먹는 000’ 이런 식으로 바꿔두었는데, 다음 날 그대로 교양 수업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되었어요. 엄청 민망했어요.
펭로시: 저는 Zoom으로 발표를 하던 중에 서버에 튕겨서 조원들에게 미안하고 민망했던 경험이 있었어요. 와이파이 문제가 해결되고 곧바로 다시 들어가자, 교수님은 저를 애타게 찾고 있었고 저희 조 다른 분이 저 대신 발표를 하겠다고 말하고 계시더라고요. 정말 죄송했던 기억이 나네요.


고슴도치뇽: 너무 당황스러웠을 것 같아요. 저도 작년 1학기 때 서버가 튕겼어요. 사실 저는 수업할 때 교수님의 모든 말을 다 들으려 하는 편인데, 수업을 아예 1시간 넘게 통으로 못 들어서 화가 나더라고요.


월영: 저는 일부러 실수할까봐 줌 채팅 대신 카톡을 쓰는 등 조심했어요. 그런데 딱 한 번 헤드셋으로 수업을 듣는데 벗어두어서, 수업이 시작한 줄 몰랐던 경험이 있어요. 10분 정도 수업에 늦어 섬뜩했던 기억이 있네요.

 

<한 고등학생의 비대면 교육 경험 내용 인터뷰>

펭로시: 이 자료는 제가 저번 학기에 교육 경영 수업을 들을 때 사촌 동생을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원래 학교는 학사 일정이 정해져 있고 이에 따라 운영이 되는데, 코로나 이후에 정책이 계속 바뀌면서 일정이 누락되고 갑자기 바뀐 경우가 많았다고 해요. 실제로 사촌 동생 학교에서는 코로나 19로 지정된 날짜에 체육대회를 하는 것이 불가하니까, 갑자기 문화제를 준비하라고 요구했다고 이후에 또 다시 코로나가 심해지니까 점심시간에만 축소해서 진행한다고 번복하여 학생들이 많이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대면 수업 때는 선생님이 교실에 와서 출석체크를 하고 학생들과 상호작용이 가능하지만, 원격 수업 때는 그렇지 못했다고 해요. 수업을 다 듣고 문제를 푸는 형식으로 출석체크를 대신했는데, 문제 난이도가 너무 쉬워 대부분이 학생들이 수업을 안듣고 문제만 풀어서 제출했다고 해요. 수업에 있어서도, 판서가 안 보이는 등 진행에 문제가 생겼을 때 학생들이 마이크를 켜고 말하기 주저해 바로 개선되지 않았다고 해요. 이처럼 원격 수업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우정: 저는 자료의 마지막 말에 공감했어요. 기술에 익숙한 사람도 있지만. 원격 수업을 코로나 시대의 임시방편으로만 여기는 분들도 많았던 것 같아요. 임시방편이든 아니든 현재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 다양한 기술을 잘 활용해야 하는데, 이를 꺼려하고 노력하지 않는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교사들이 기술을 수용하려 태도를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펭로시: 저는 자료에서 비대면 수업 때 마이크를 켜는 것이 어렵다는 점에 공감했어요. 마이크를 켜는 것이 마치 대면 수업 때 강의실 한가운데에 가서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으며 말하는 것 같았어요. 


고슴도치뇽: 대부분 수업에서 작은 생활 소음이 나도 ‘00님 마이크 꺼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요. 이해가 되면서도, 온라인 강의가 되면서 모든 생활 소음이 차단되고 교수님 말만 들려야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마 이런 방식이 그동안 듣던 인강과 비슷해서 그런 것 같아요.


월영: 이 점이 아직 온라인 기술의 한계인 것 같아요. ZOOM에서는 동시적으로 소통할 수 없고 조금 뒤에 말이 도달해요. 예를 들어, 언어 수업에서 선생님이 말을 따라 해보라고 하면 각자의 말이 씹히고 중첩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어요. 소통이 완벽히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이 한계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는 오직 대면만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고슴도치뇽: 혹시 교수님이 조금 천천히 말할 수는 없나요?


월영: 각자 소리가 도달하는 시간이 달라서 계산하기 힘들 것 같아요. 


고슴도치뇽: 아. 저도 그러한 점은 한계라고 생각해요. 근데 지난 학기에 수업 시연하는 수업을 들었는데 학생들에게 학습 목표를 읽게 하자 모두 마이크를 켜고 각자의 목소리와 속도로 따라 읽는 게 좋았어요. 한편으로는 재밌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펭로시: ZOOM에서도 음성 중첩이 되도록 한다든지, 대면 수업처럼 각자의 목소리가 적당한 크기로 동시에 들릴 수 있도록 하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요. 


월영: 이와 관련해서 조매력 유튜버가 떠올랐어요. 싱크룸을 활용해서 합주를 하는데, 줌과 다르게 완전 동시적으로 다양한 소리가 나는 게 가능했어요. 


우정: ZOOM도 점점 발전하니까 마이크 중첩을 해결해달라고 건의해 봐도 좋을 것 같네요. 이 부분은 이 정도로 정리하고 넘어가 봅시다. 

 

 

# 비대면 교육, 실컷 욕해봅시다!


우정: 이미 앞에서 조금 이야기가 나온 것 같은데, 비대면 교육의 한계점에 대해 더 자세히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 비대면 교육 상황에서 심화된 불평등


러셀: 저는 비대면 수업으로 인한 다양한 문제점이 있을 텐데 그중에서도 학습 불평등과 관련된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프레시안 기사[각주:1]에 따르면 비대면 교육으로 학습 격차가 커진 이유는 학생의 자기 주도적 학습 능력 차이, 학부모의 학습 보조 여부, 학생과 교사 간 소통의 한계, 학생의 사교육 수강 여부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요인 중 대부분은 부모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학습 불평등 외에도 비대면 교육으로 급식을 먹지 않게 되면서 식습관 격차가 커지는 등 학습 외 불평등도 심화되었다고 합니다. 


우정: 비대면 교육으로 학교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드니까, 남는 시간에 경제적 여건이 되는 경우 학원이나 더 좋은 교육 기관에 갈 수 있으니까 학습 불평등이 더 심화되는 것 같아요. 또, 학교의 역할을 모두 가족 내에서 부담하게 되면서, 돌봄이 가능한 가정이냐 아니냐에 따라 급식처럼 학습 외 불평등이 발생하는 것 같아요. 막연히 가족의 영향력을 줄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어려운 것 같네요. 


고슴도치뇽: 저는 공공기관이 어느 정도의 역할을 하는 사회인지에 따라, 학습 불평등과 학습 외 불평등의 정도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우리 사회에서 공공시설이 부족하잖아요. 소수의 관리자가 많은 사람을 담당하고 돌보는 경우가 많아서 더 밀집시설이 되는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모든 사회에서 공공시설의 중요성이 똑같지 않잖아요. 어떤 사회에서는 수많은 기업이나 가게들이 문을 닫더라도 공공시설만큼은 최후의 보루로서 존재하죠. 하지만 우리 사회는 공공시설이 그 어느 시설보다 더 빨리 운영이 중단되는 것 같아요. 이런 공공시설이 사람들이 밥을 먹고, 관계를 맺고, 사회를 살아가는 과정에서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 같아요. 코로나 상황에서도 많은 인력과 자원을 지원해서 혹은 어느 시설보다 빨리 칸막이를 설치해서 급식 배식이 되도록 하고 전자기기와 공간을 마련하여 집에서 학습을 할 수 없는 학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겠죠. 결국은 공공시설의 역할을 강화하는 게 불평등을 해소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정: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공공시설을 확대한다고 해서, 코로나 때문에 단체 이용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은데, 이때는 어떻게 돌봄을 위탁할 수 있을까요?


고슴도치뇽: 직접적으로 한 장소에 모이는 것은 어렵겠지만,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는 여러 장치를 마련할 수 있겠죠. 제 친구 중 노인 복지관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 몸이 떨어져 있어도 서로의 외로움과 일상을 공유하기 위한 여러 사업을 고민하는 것 같더라고요. 사람이 오지 않는 복지관이 어떻게 운영이 되는지 영상을 제작하고 전화로 어르신들이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지 여쭙기도 하고요. 급식의 경우도 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 모이는 것은 안 되겠지만, 시간을 나눠 방역수칙을 지킨다면 청소년들이 공공시설에서 밥을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더 많은 고민과 체계적인 운영, 금액 지원이 있다면요. 결국은 우리 사회가 어느 것에 초점을 두고 코로나 사태를 대응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공공기관에 사람이 많이 모인다고 문을 닫아버리는 쉬운 선택을 하기보다, 다른 곳들은 다 문을 닫아도 공공시설만큼은 필수로 운영되는 시설로 지정을 할 것인지 고민하는 사회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월영: 누군가는 어쩔 수 없이 모여야 한다는 사실과 공공기관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뉴스에서 실행 방침들을 살펴보면 사람들을 모이지 않게 하는 것이 주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안타깝게 느껴져요. 어쩔 수 없이 모일 수밖에 없는 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대책은 따로 마련되지 않았잖아요. 


펭로시: 고슴도치뇽님과 월영님 의견에 정말 동의를 합니다. 공공기관은 일단 문을 닫고 나서, 고민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호에서 비행인 님이 쓴 글[각주:2] 중 코로나로 도서관이 문을 닫았는데, 학교에서는 책읽기 수업이 많아 비상이 걸렸다는 내용이 떠올랐어요. 온라인으로 읽을 수 있는 플랫폼처럼 다른 대안이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공기관은 일단 문을 닫는 것 같아요. 문을 닫는 게 필수불가결할 지라도 적어도 문을 닫음으로써 발생하는 영향력에 대해서 계속 숙고하고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부 방침은 일단 문을 닫고 모이지 않으면 해결될 수 있다고 단편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비대면 교육 상황에서 의사결정 방식의 문제점


월영: 저는 펭로시님이 조사해오신 인터뷰에서 ‘교육청에서 지침이 내려오고 학교에서 하면 학생들은 이를 따라야 한다’라는 부분에서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서로 의사소통을 하여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의견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일직선으로 의견이 하달되는 것이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정: 어쩔 수 없다는 말로 많은 게 없어지는 기분이 들어요. 당연히 전염병 상황에선 서로 떨어져야 하고, 머리를 맞댈 수 없고, 하달식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수 있지만 그 이후에 얼마든지 대안적인 방안들이 마련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줌으로 모여 앞으로 어떻게 하면 더 소통이 잘되는 학급을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단지 행정명령이 내려왔으니까 따라야지 정도에서 멈추고, 더 이상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아 아쉬운 것 같아요. 


펭로시: 맞아요. 이와 관련해서, 지난 호에서 비행인님이 쓴 인터뷰 중 어떤 학생이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해서 수행평가를 보지 못했는데 점수를 아예 받지 못했다는 내용이 떠올랐어요. 학교 지침을 찾아보니 이와 관련된 부분은 아예 가이드라인이 없었어요. 지침이 추상적이라서, 맥락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하나도 적용할 수 없었어요. 아까 계속 하달식 전달 이야기가 나왔는데 하달식 전달은 추상적이고 두루뭉술한 정책일 뿐 구체적인 상황에서 적용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저는 한 가지 대안으로서, 하나의 플랫폼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하나의 플랫폼에서, 학생 교사 그리고 다양한 일반인들이 자기의 경험을 공유하여 가이드라인을 함께 만들어가면 어떨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해서 비대면 수업이 진행된다면, 하달식이 아니라 수혜자와 공식기관이 상호작용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고슴도치뇽: 학생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학교가 너무 별로네요. 코로나 검사를 받아서 수행평가를 못 봤더라도 충분히 대체과제를 마련해서 학습 내용을 평가할 수 있었을 텐데, 생각을 못 했거나 모종의 이유로 하지 않았다는 게 학생의 입장에서는 정말 부당하게 느껴졌을 것 같아요.


우정: 방역을 지키기 위해 받은 불이익이 하나씩 쌓이면 과연 코로나 검사를 받을 사람이 있을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코로나 방역을 위해서도 한 명 한 명의 일상을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비대면 교육 상황에도 여전한 학교폭력 문제와 해결방법


우정: 이는 비대면 교육으로 학생들 간의 소통이 어렵고 서로 마주칠 기회가 없으니까 애초에 갈등할 상황이 없었다는 내용입니다. 이에 올해 학교 폭력이 많이 줄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이버 폭력은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오프라인 학교 공간에서 일어나는 폭력사건은 비교적 교사가 상황을 파악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온라인의 경우 카톡, SNS 등으로 따돌림이 이루어지면, 교사가 어떻게 중재를 할 수 있을지 고민입니다. 이런 경우에 교사는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눠보면 좋을 것 같아요.

출처: '온라인으로 옮긴 학폭 '비대면 교육의 그늘', 이성희, 경향신문, 2021.01.21.(기사입력) (사진을 클릭하면 링크로 연결)

고슴도치뇽: 너무 어려운 문제예요. 저는 코로나19가 장기화되면서 학교 폭력뿐만 아니라 가정폭력이 늘었다는 기사도 봤어요. 코로나 상황에서 여러 폭력이 특수하게 일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는 그 이전부터 우리 사회에 계속 내재해왔던 문화, 생활양식과 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해요. 학교 폭력 관련해서는, 올해 다들 일 년 동안 정신없이 새로운 환경에서 교과 수업을 진행하고 평가하기 바빠서 반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관계를 맺거나 규칙을 만드는 등의 노력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 같아요. 실제로 교사 브이로그를 보면 학생들 결석하면 전화하고, 과제를 제출하지 않으면 또다시 전화하는 등 일상이 전화더라고요. 올해부터라도 개인화된 사람들이 각자 파편화된 공간에서 수업을 듣는 것이 아니라, 반이라는 공동체를 결속하기 위한 방법이나 서로를 온라인상에서도 존중하기 위한 방법 등에 대해 고민했으면 좋겠어요. 


러셀: 고슴도치뇽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보통 대면 수업을 위해 학교에 가면 쉬는 시간이 있고 친구들과 소통할 시간이 존재하는 데, 비대면 수업에는 쉬는 시간이 없었어요. 학생들끼리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도 문제인 것 같아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생들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보다, 이미 알고 있던 친구들과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대다수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학급 회의를 줌으로 하는 등 학생들끼리 서로를 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비대면에서도 많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우정: 비대면 상황에서 학생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선 담임 선생님의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담임 선생님이 소회의실을 열어주는 등 다양한 기회를 마련되기 위해선 교사의 의지와 열정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월영: 저는 처음에 이 자료를 읽었을 때, 학교가 개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은 이러한 제 생각에 스스로 조금 실망했어요. 비대면 상황 속 폭력도 학교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공간이 온라인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건드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됐다고 다시 생각했어요. 학교는 계속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기관으로 남아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정: 서로 소통이 어려워지는 만큼 보완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구글 폼 링크를 주고 어려움을 묻거나, 조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소회의실을 열어두고 학생들끼리의 시간을 마련하고 각 소회의실에 방문하여 분위기를 살피는 등의 노력이 사이버 폭력 문제를 조금은 예방할 수 있지 않을까요?


고슴도치뇽: 저는 학교마다 상담 교사가 있고, 대학에서도 상담 기관이 존재하고 이 시스템이 잘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도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꼭 학교 폭력이 아니더라도, 비대면 상황에서 어떻게 상담이 가능하고, 정서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등을 공적인 정보로 알린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사람이 이를 이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정: 일단 여기서 마무리 짓고, 대면만이 할 수 있는 교육의 역할이 있다면 비대면 교육이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이야기 나눠봐도 좋을 것 같아요. 

 


# 대면 교육에서만 가능한 것이 있을까?


- 학교 공동체에 대한 신뢰


우정: 저는 아까 인터뷰 자료 중에서 “풀면학, 풀자습. 그래서 스트레스가 엄청 쌓여있다”라는 부분이 너무 안쓰럽고 공감이 되었어요. 제가 고등학교를 다녔을 때는 수학여행도 있고 당연히 모든 고등학교에 있겠지만(웃음) 동아리 발표회도 있고 큰 행사들이 몇 개 있었는데, 코로나 때문에 그게 다 취소되면서 지금 고등학생 친구들은 그것을 하나도 즐기지 못한 상태로 2년 내내 그냥 풀면학, 풀자습인 거예요. 그런 후배들이 너무 안쓰럽더라고요. 그래서 학교 대나무숲에 학교가 우리를 신경쓰기는 하는 거냐 하며 시끄러웠던 적이 있거든요. 그걸 보면서 우리는 행사들이 노는 것이라고 생각을 보통 하지만 결국은 이게 하나하나 모여서 학교 공동체에 대한 애정을 만드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즉, 학교에 대한 신뢰가 있어야 공부할 의지도 생기고 그러는데 그런 게 없어지는 것 같아서 학교와 학생들이 파편화되는 느낌이에요. 

 


- 일상 속에서의 배움


고슴도치뇽: 확실히 비대면 교육으로 대체될 수 없는 만남 속에서 교육의 중요한 역할이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면, 특히나 어린 아이들의 경우에는 젓가락질하는 법이라든지, 아니면 친구랑 싸웠을 때 갈등을 해결하는 법이라든지... 이런 건 대면으로 누군가를 만나고 함께하는 공간에서, 일상 속에서 배움이 가능한데 그런 것들이 확실히 비대면에서 조금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약간 슬픈데, 사실 저는 앞으로 원격소통방식이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소통 방식이 될 것 같아요. 일단 우리 일상에서 시간을 절약할 수 있잖아요. 물론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 시간을 틈틈이 쪼개면서 할 일을 만드는 것이겠지요. 가령 대면이었을 때는 학교 끝나고 하나의 일정만 잡을 수 있었는데, 비대면이 되니까 일정이 끝도 없이 늘어나더라고요! 이전에는 오후 7시~10시 정도 하나의 활동을 하고 뒷풀이를 갔다면 이제는 6시~8시 책모임, 8시~10시 세미나, 10시~12시 회의 이런 느낌이요... 시간을 틈틈이 쪼개가면서 하는게 우리를 더 피로하게 만들겠지만 그게 더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우리를 더 갈아 넣게 만들고 많은 회사에서도 주된 사용방식이 될 것 같아요. 그리고 아까 제가 말했듯이 더 잡담할 새가 없어지니까 회의가 빡빡하게 진행되고 원격소통 속에서 회사는 더 이상 이 사람이 업무할 공간과 자재들을 제공해줄 필요가 없잖아요. 일하는 사람이 알아서 공간을 마련하고 회의 자료를 복사해야 되겠죠. 하지만 배움이 일어나는 공간뿐만 아니라 많은 공간에서도 대면에서만 할 수 있는 것들이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의 성장에서 필수적인 것들 혹은 다른 사람과 살아가는 관계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들이 저는 대면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하는데 비대면으로 대체될 때 앞으로 더 그런 것들이 더 희미해져갈 것 같아요.

 


- 일상적인 여유


펭로시: 저 고슴도치뇽님의 말씀을 듣고 갑자기 생각난 건데 비대면 되면서 많이 슬펐던 게 저희가 대면일 때는 예컨대 사범대에서 수업을 듣고 2시간 붕 뜨면 제가 칵테일 만드는 동아리에 들어가 있었는데 ‘아! 칵테일 만들면서 시간 보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학교를 거닐던 기억이 가끔씩 나는 거예요. 그 당시엔 이동시간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돌이켜보면 그 비었던 두 시간 동안 내가 걸어 다닌 것이나 아니면 걸어 다니면서 봤던 가로등 하나가 엄청 예뻐서 거기에서 사진 찍고 동아리 들어가서 사람들이랑 얘기하면서 칵테일 마시고 수업 시간 다 되었을 때 다시 일어나서 다른 동으로 향하는 그 순간들이 엄청 소중했었는데 비대면으로 바뀌면서 2시간 동안 텀이 비면 일단 침대에 누워서 핸드폰을 켜는 거예요. 그리고 그 핸드폰을 보다가 시간이 되면 ‘수업 들어야겠다!’ 하면서 다시 일어나서 제 방의 컴퓨터 앞에 앉는데 그러면 제가 대면 수업 때 느꼈던, 학교를 거닐면서 느꼈던 것을 하나도 안 느껴지고 감동이라고 해야 할까요, 비대면 수업이 되면서 대면 수업 때 느꼈던 감동이나 여유가 없어진 것 같아서 그 부분이 저는 좀 많이 슬펐어요. 

 


- 행정 절차의 명료성


월영: 저 같은 경우에는 반에서 학생회장 투표를 해야 했거든요. 학생회칙에 명시된 투표 방식을 따라야 하는데, 오프라인으로 하면 아주 쉬워질 일들이 온라인으로 하니까 너무 어려웠어요. 결국 어째서든 하기는 했는데 비대면으로 하게 된다면 자원이나 혹은 충분한 서비스 제공, 능력?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에겐 진짜 치명적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대담] 비대면 교육, 어떠셨나요? (2) 에서 계속... edujournal2018.tistory.com/90

 

우정, 러셀, 펭로시, 고슴도치뇽, 월영

 

  1. 이상구, <코로나19, 교육 불평등의 불편한 현실을 드러내다>, <<프레시안>>, 2020.10.05., 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0100511524581920#0DKU 2021.02.19. [본문으로]
  2. 비행인, <코로나로 비춰본 교정 2020–교육 당사자 인터뷰>, 2020.09.07., edujournal2018.tistory.com/61?category=801777 [본문으로]


<숏 텀 12 (2013)> 

 

줄거리: 그레이스와 그녀의 남자친구 메이슨은 문제 청소년을 단기 위탁하는 청소년 보호기관 ‘숏 텀 12’의 상담사로 일하고 있다. 그레이스는 상당수가 우울증과 자살 충동을 겪는 숏 텀 12의 아이들에게 정서적 안정감과 용기를 주려고 노력한다. 일터에서는 무한한 애정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그레이스지만, 퇴근 후에는 그녀 자신도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힘든 나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숏 텀 12에 매우 까다롭고 공격적인 소 소녀 제이든이 들어오고, 그레이스는 그녀가 자신과 같은 상처를 겪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아버지의 학대로부터 제이든을 구출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 그레이스는 드디어 자신의 내면과 직면할 용기를 얻고, 두 사람은 눈부신 도약을 시작한다.[각주:1]

 


 

  교육저널에서 ‘청소년’은 빠질 수 없는 주제 중 하나이다. 우리는 기사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우리의 목소리로 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을 좀 더 깊게 이해하고 더욱 나은 글을 쓰기 위해 우리는 다양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청소년’들을 보고 느낄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이번 교육저널 영화제에서는 청소년 보호기관에 위탁된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숏 텀 12’를 함께 감상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진영: 영화 잘 보셨죠?


일동: 네!

 


# 각자 인상 깊었던 장면


우정 : 가정폭력 상황에 놓인 제이든의 고충이 나오는 장면에서 ‘가정폭력을 어떻게 하면 근절할 수 있을까’하는 고민의 필요성을 좀 더 느꼈던 것 같아요. 최근 정인이 사건 등도 그렇고 너무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어요.


아리 : 저는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장면이 크게 두 가지가 생각나요. 하나는 그레이스가 제이든과 같이 제이든 아빠 집에 가서 차로 부시는 장면이 생각났어요. 처음에 그레이스가 제이든 아빠 집에 가는 거 보고 '저길 왜 가지? 지나치게 제이든의 상황에 몰입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조금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둘 다 아버지로 인한 상처가 있는 건 똑같은데, 제이든이 집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그레이스가 무기를 들고 들어갔잖아요. 그럼 이건 제이든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이든 아빠에게 자기 아빠를 투영해서 보복하겠다는 느낌이 있었던 것 같아요. 실제로도 제이든을 찾기보다 아빠 앞에서 서 있었잖아요. 아이를 구한다기보다 자기한테 깊이 투영한 나머지 보복하려고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 순간 제이든이 나왔어요. 제이든이 나와서 둘 다 이전에 위탁소에서 인형을 가지고 놀았을 때처럼 같이 야구 방망이로 제이든 아빠 대신 제이든 아빠가 타는 차를 부시는 걸로 신나게 마무리가 되어서, 제이든이 그레이스를 만난 게 제이든에게도 잘 된 일이지만 그레이스에게도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서로가 서로를 건져주는 사이. 그게 첫 번째로 인상 깊었습니다.


두 번째는 그 바로 직전에 위탁소장인 잭과 위탁소 직원 그레이스가 말다툼하는 장면이었어요. 잭이 '나는 너 나이보다 더 오랜 시간 동안 아이들 봤는데 성범죄자 부모를 고발하지 못 하는 사례가 너무 많다'고 하는데 너무 화가 났던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애를 데려간 게 맞는 일이냐 하면, 화가 나는 동시에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는 법이 있고 규칙이 있는데 피해 당사자인 아이가 나는 피해를 봤다고 얘기하지 않으면 못 데려가는 게 법이면 법을 바꿔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흘러갔던 것 같아요. 분노가 분노로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어요. 당장의 상황에도 화나지만 그런 규칙과 법의 존재에 대한 분노도 생겼던 것 같아요.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잖아요. 어떤 사건이 있을 때 피해 당사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2차 피해도 많이 일어나고, 하, 화납니다. 분노로 끝났어요.


현도 : 그레이스가 자기 아버지가 출소한다는 걸 들은 이후 감정의 혼란을 겪었잖아요. 제이든 아빠 앞에서 야구 방망이 들고 선 장면에서 ‘정말 죽이겠구나.’ 생각했어요.


정민 : 한국영화였으면 '아악, 치지 마. 너도 감옥 가!'라는 생각을 했을 것 같아서 공감돼요. 잭이 그렇게 얘기한 다음에, 그레이스가 화나서 조명을 뽑아가요. 그러더니 밖에서 아무도 다치지 않게 바닥에 던지는데, 놀랐어요. 처음엔 어른이라서 그런 건가 해서 생각했는데, 그 건물이라는 게, 그레이스가 엄청나게 애정을 붓는 아이들이 살아가는 공간이니까 밖으로 나가서 공간을 해치지 않게 조명을 던지는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게 아닌가 생각해요.


남자친구와 말다툼을 하고 나서 제이든의 집으로 자전거를 타고 찾아가는데, 배경 음악이 위태롭지 않고 너무 멋져요. 너무 단단해 보이고. 싸울 때는 금방 무너질 것처럼.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런 것 같아요. 금방 쓰러질 것처럼 위태롭다가 금방 풀리고 다시 단단해지는 장면의 연속이죠. 앞의 장면들은 아이들을 그렇게 표현했다면 그 장면에서는 보호자 어른 선생님인 그레이스를 그렇게 연출해서 좋았어요. 마치 오버랩 되는 느낌이었어요.


현도 : 정말 공감해요. 그레이스가 자전거를 타거나 잡고 서 있을 때 굉장히 굳세 보인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엄청나게 튼튼한 사람 같고, 히어로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런 걸 의도한 건가 싶었고요. 정민님이 이 부분을 말씀해주셔서 공감되네요.


진영 : 너무 신기한 게, 어떻게 하나의 영화를 봤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이렇게 다르죠? 한 장면이라고 하더라도 각자 기억에 남는 포인트가 다른 게 정말 신기해요.


저는 제이든이 그레이스한테 '니나 동화'를 설명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그 장면이 그레이스에 대한 신뢰가 쌓였음을 보여주는 장면인 것 같아서 굉장히 인상 깊었어요. 결국, 나를 믿어주는 한 사람,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굉장히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두 번째 장면은 제이든이 그레이스한테 그렇게 신뢰를 줄 수 있었던 이유와 관련 있는데, 그레이스가 잭한테 가서 “왜 아빠에게 학대받고 있는 제이든을 부모네 집으로 보내?”하면서 화내죠. 그때 말했던 것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잭이 “동화 얘기를 들려줬다고 그러는 거야?”라고 하니까 “아이는 아이의 시선에서 아이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이야기를 한 것이다.”라고 말해요. 그레이스가 제이든의 시선에서 이해해주려고 계속 노력했기 때문에 제이든이 신뢰를 줄 수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해요.


우정님이 아까 가정폭력 근절 얘기를 했지만, 가정 폭력 상황을 파악하는 데서 피해자가 모든 사실을 일일이 설명하지 못한다면 그게 피해로 인정되지 않는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또 그 장면에서 잭의 말 중에 생각이 나는 건 “그런 건 상담사가 하는 거다. 너는 시설 관리 직원일 뿐이다.” 이 부분이에요. 상담사와 시설 관리직의 업무가 구분되는 건 필요하겠지만, 오히려 시설관리직 직원들이 아이들과 일상을 함께하고 그 안에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인데, 업무를 구분 지음과 동시에 시설 관리직 업무 외에 다른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식으로 되는 것 같아서 되게 생각이 나요.


정민 : 2학기 말쯤에 정말 고민을 많이 했던 게 '대상화'예요. 우리가 이걸 말할 때 좋은 어조로 말하지 않죠. 말 그대로 타자를 내 인식 세계에 들여오기 위해서는 대상화가 필수적인데 이걸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진영의 말을 들으며 '마주 봄'과 '같이 봄'이 떠올랐어요. 대상화는 보통 일상에서 만나지 않는 경우가 많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밥 먹고 얘기하는 사람은 대상화를 하지 않아요.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서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그레이스와 같이 마주 보고 있는데, 그래서 갈등이 깊어지는 게 연출이 되다가도 화해하는 장면이 인상 깊어요. 연인으로서 무책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행동이긴 한데, 화해하는 장면에서 힐끔 보고, 담요 벌려주고, 쏙 들어가요. 그리고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눕죠. 


우정 : 잭과 그레이스가 말다툼하는 장면에서, 누구를 응원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현실에서 아이들을 잘 알고 공감해주는 사람은 그레이스였는데, 사실 잭도 그만큼의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생각을 많이 했을 테고 그 결과가 규칙을 따르는 것이었을 거예요. 잭에게도 잭의 맥락이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음으로는 그레이스를 응원하지만 ‘뭐가 맞는 걸까?’ 하는 생각은 들었어요. 교사가 되어서도 비슷한 일이 많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어두운 길을 혼자 걷는 학생이 있을 때 교사가 어느 정도까지 개입할 수 있을까요? 직접 발로 뛰면서 쫓아가는 게 맞을까, 교사의 바운더리 안에서 편안하면서도 지킬 건 지키는 삶이 맞을까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교사로서 마주칠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싶어요.


아리 : 정민님 말씀처럼 연출과 관련해서, 영화에서 전반적으로 핸드헬드가 두드러졌어요. 자연스러우면서도 흔들리면서 현장감이 느껴지는 장면이 많았어요. 이 영화의 전반적인 것과 같이 흘러가요. 화면이 조금씩 흔들리는데 이 영화에서 흔들리지 않는 인물들이 없죠. 그런데 인물들이 다 흔들리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도움이 되어 주고 위안이 되어 주면서 희망을 품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요. 연출도 이런 인물들의 상황과 감정 상태와도 같이 가는 것 같아요. 위탁소에서 탈주하는 새미를 잡으려고 가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까지도 많이 흔들리죠. 그게 어떻게 보면 영화에서 보여주는 장면은 여기까지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 흔들리면서도 동시에 평범한 일상을 잘 영위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앞으로 위탁소에 새로운 누군가가 들어오면 또 혼란도 있고 하겠지만 결국에는 잘 풀리고 다들 평범하게 살아가지 않을까 합니다.


진영 : 잭의 입장이 이해가 간다는 말에 대해서는, 저도 아직 관료제적인 곳에서 일해본 적이 없어서 저는 만일 그 상황이었다면 좀 더 그레이스의 입장일 것 같아요. 관계라는 것은 어느 순간에 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서로 교류하면서 만들어지는 것이고, '시설관리직원'은 현장에서 아이들과 일상을 함께하며 느끼는 감각이나 생각이 있을 것인데, 그런 것들을 좀 더 존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시설의 장인 잭도 충분히 대안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었을 것 같아요. 그레이스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같이 얘기를 해보거나 위탁소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하는 등 충분히 장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들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보면 법에 순응하고 직원의 태도에 공감을 해주지 못한 것 같아서 저는 조금 아쉬웠어요. 그레이스와 같은 위치에 있을 때 나를 위해서도, 나와 함께하는 이 공간과 아이들을 위해서도 내가 소진되면 안 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선을 두는 것은 필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노력을 제한하거나 힘이 풀리게 하는 그런 태도는 바람직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 위탁소라는 공간은 어떤 곳일까?


현도 : 위탁소라는 공간을 다들 어떻게 보셨는지 궁금해요. 저는 보면서 진짜 감옥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문을 전부 열어 두어야 하고 가위 등의 물품들도 모두 가져서는 안 되고. 뒷장면이 되게 처음 장면과 같은 상황이잖아요. 그런데 ‘이게 이렇게 희망적으로 연출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이 공간 속에서 어떻게 희망을 찾아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마커스가 메이슨 옆에 앉아서 랩 하는 장면 있잖아요. 거기서 메이슨이 여기에 대해서 더는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고 반응할 때 혼란스러웠어요. ‘결국, 어쩔 수 없는 건가?’ 싶었고, 여기서 어떻게 희망을 찾아야 하는지 혼란스러웠어요. 위탁소라는 공간에 대한 다른 분들의 생각이 궁금해요. 


정민 : 현도님이 언급한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는 ‘뭐라고 얘기해줘야 할지 모르겠다.’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처음에는 현도님과 엄청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위탁소 벽이 눈에 들어오는데 깨끗해 보이지 않는 느낌의 벽. 교널 동방 느낌의 벽. 그게 그런 식으로 생각하다가, ‘그래도 괜찮지 않나?’ 하고 들었던 생각이, 시설은 좀 그럴 수 있겠지만, 그 안에서 있는 그들만의 유대 관계가 있고 그게 너무 좋아요. 처음에 울고불고 난리 치죠. 마커스가 색종이를 들고 와서 다 같이 편지 쓰고 그림을 그려서 주는 데 그것을 순순히 따르고 너의 친구 00이가, 행복한 하루 되길 바라 이런 식으로 하는 애정들이 너무 좋았어요. 위탁소라는 공간 자체가 엄청 긍정적인 공간 자체는 아닐지라도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관계는 충분히 긍정적으로 볼만한 함의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진영 : 저도 정민님과 비슷해요. 처음 몇 십분 동안은 되게 무섭고, 별로고, 문제가 많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현도님이 말한 것처럼 칼 같은 위험하다고 생각되는 물건들을 다 뺏기죠. 가장 싫었던 건, 문을 잠글 수 없는 공간이라는 거예요. 문을 잠그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모든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과 맥이 일치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누군가의 자유를 박탈하는 공간이고, 더 나은 일상을 위해서 이를 개선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은 여전히 드는데 또 한편으로는 그 공간을 완전히 문제없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게 위탁소라는 공간을 낭만화하고 다가가기 어렵게 한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물론 자유를 박탈당하고 순응하며 살아야 한다는 건 아닌데, 그것 역시 공동체이기 때문에 원하든 원하지 않든 관계가 만들어졌고 긍정적으로 작동하는 관계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에서도 자기가 만든 노래나 동화를 들려주고 생일 파티도 하고 편지도 쓰는 그런 것들이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내가 공동체 안에 속해있음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던 것 같아요. 실제 위탁소에서 그런 좋은 어른을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없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맺어지는 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부분이 있지 않을까요?


아리 : 정민님과 진영님이 얘기한 것처럼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이 공간이 그리 좋은 공간이 아닐지라도 마커스가 생일을 축하해주고, 생일이라고 컵케이크를 만들어서 나눠주고, 촛불을 부는 등 소소한 행복이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중간에 어떤 친구의 부모님이 찾아오셔서 그 아이는 위탁소에서 나갈 수 있었는데, 그 장면에서 아이가 문을 딱 여는데 밖이 너무 환했고 햇빛이 들어왔어요. 여기에서는 다들 음침한 분위기에서 TV 보고 있고, 멍 때리고 있는데, 그 친구가 부모님과 나갈 때 빛이 들어오는 게 대비되어서 햇빛 있는 밖과 격리되어서 우리끼리 고립되어서 우리의 삶을 영위해나가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뒷장면에서 메이슨도 사실은 엄청 대규모 입양 가정의 일원이었고 메이슨의 양부모는 많은 수의 아이들을 입양해서 또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는데, 이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메이슨은 양부모가 계시고 양자식들이 있어서 하나의 진짜 가족이라는 안정적인 공동체가 되었고, 그게 위탁소에서 똑같이 적용되어서 그레이스와 메이슨이라는 어른들을 중심으로 여러 명의 아이들과 함께 메이슨네 가족과 비슷한 끈끈한 유대 관계로 이어진 가족이 형성되는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또 하나는 메이슨이 여기서는 아빠지만 사실은 양아들이었던 것처럼 여기에 있는 아이들도 어떻게 보면 가정 폭력의 피해자인데, 사실 메이슨도 양아들이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정상 가족에서 벗어난 형태였고 그레이스도 학대를 겪은 사람이었죠. 메이슨네 가족이 어딘가 조금 결핍이 있지만 그 사람들끼리 모여서 가족이 된 것처럼, 모두가 각자의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함께 모여서 서로의 아픔을 치유해주고 보듬어주는 진짜 연대를 이루는 것이 행복한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근데 가족이라는 게 장소에만 국한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위탁소는 가족이 머무르는 곳일 뿐이지 하나의 엄청 나쁜 곳이라는 느낌까지는 들지 않았던 것 같아요.


현도 : 맨 마지막 장면에서 햇살이 비치는데 그게 아리님께서 말씀하신 ‘빛’이 들어와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루이스는 어떤 사람일까


정민 : 저는 좀 궁금했던 게 루이스의 에피소드가 나올 것 같았는데 안 나오더라고요. 너무 억울할 것 같아요. 매일 오해받고, 싸우고. 그 친구를 어떤 포지션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아리 : 루이스가 진짜로 위탁소에 있는 가장 평범한 애가 아닐까 싶어요. 현실적으로 아이 한 명 한 명의 상황을 다 알지 못하는데, 당사자가 스스로 이야기 하지 않으면 그 아이에 대해서 아는 게 없고 아이가 보인 정황만으로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죠. 지금 우리가 루이스에 대해서 하고 있는 게 딱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엄청 극적인 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극적인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위탁소에 있다는 것 자체가 얘도 어떤 아픔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높은데, 얘가 보여주지 않으면 알 수 없다는 것이 꽤 현실적인 것 같아요.


현도 : 아리님 말씀 들으면서 생각난 것이 루이스는 매번 침대에 있잖아요. 그레이스가 물총 쏘면서 깨울 때 물총 못 쏜다고 놀리거나, 마커스가 자기 방 앞에서 자해를 했는데도 모르잖아요. 아리님이 말하신 전형성에 맞는 친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 아는 것처럼 하면서 자기 세상에 틀어박혀서 지내고자 하는 그런 친구 같아요. 



# 새로운 직원, 네이트는 어떤 사람일까


우정 : 복잡한 인물, 선한 마음으로 도움을 주고자 왔지만 아이들을 타자화하고 아이들을 시혜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 같아요. 도우려고 하지만 여전히 넘지 못하는 벽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만약 위탁소라는 곳에서 봉사활동을 한다면 나는 아마 네이트와 같은 인물이었을 것 같아요. 네이트가 복잡하면서도 안쓰럽고 그러네요. 


아리 : 저는 네이트가 되게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불우한 아이들과'라고 말한 것도 인상 깊은 장면이었어요. 왜 말을 그렇게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어요. 우정님의 생각처럼 이곳에 일을 하러 왔다는 것이 아이들에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온 것이겠죠. 그런데 네이트가 하는 일은 수동적인 행동이었어요. 그러나 후반부에서 청소기로 소파를 청소하다가 뭔가를 발견하고 주머니에 넣잖아요. 그런데 알고 보니 새미에게 인형을 주는 것이었어요. 이걸 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한 걸 수도 있겠지만, 처음에는 아이들을 불우한 소년들 정도로 바라보고 시혜적으로 바라보던 사람이 어느 순간 그들을 이해하고 한 명의 인격체로 보고 아이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보고, 저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고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었고 표현하는 법을 몰랐다가 그 방법을 알게 되었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아요. 진영이 이야기해준 그레이스와 제이든의 관계에서처럼 아이들의 소통방식을 이해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요?


정민 : ‘불우’에 대해 들으면서 생각난 것이, 우리는 매번 동등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의 인식 속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혹은 결핍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봉사활동을 하는 것이잖아요. 동등한 위치에 있는 타자의 집에 가서 갑자기 도와드리겠다고 하지는 않으니까요. 정말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고민이 돼요. 교과서적으로 말해보자면 나와는 다른 맥락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일 텐데. 그런데 여기에서 고민을 그만두어도 될지는 의문이에요.


현도 : 네이트가 처음에 되게 자기 말이 많은 사람 같았어요. 본인에게 묻는 질문이 아닌데도 본인이 답을 할 만큼 자기 입장/생각을 상황에 관계없이 말을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인형을 전해주는 장면에서 모든 것이 전달되었던 것 같아요. 그 장면에서 마음이 찡했어요. ‘이 사람도 되게 많이 변했구나. 말을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치 그레이스가 제이든의 이야기를 듣는 방법을 알았던 것처럼. 


제가 사실 장애를 가졌던 적이 있어요. 다리가 아파서 휠체어를 탔어요. 그때 진짜 싫었던 것이 휠체어 끌어주겠다는 사람이었어요.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긴 한데, (도움이 되었는지 여부와 상관 없이)[각주:2] 도와준답시고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는 것이 싫었거든요. 



# 기타


현도 : 그레이스의 아버지가 등장할 줄 알았는데 하지 않았어요. 그레이스의 인생에서 아버지는 다신 대면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고, 그냥 없어도 되는 사람이었죠. 그런 맥락이라면 영화에서 잘 넘겼다고 생각했어요.


아리 : 만약 한국 영화였으면 카페 같은 곳에서 아버지랑 만나는 등 클리셰 같은 장면이 등장했을 것 같은데, 이 영화에서는 깔끔하게 아버지가 끔찍한 사람이지만 더 이상 그레이스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으로 끝난 것이 좋았어요. 그리고 위탁소라는 장소에 대한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제가 학생 인권 연구 프로젝트할 때 탈가정 청소년에 대해서 연구했어요. 쉼터에서 머무는 청소년들과 연구를 조금 진행했는데, 위탁소나 쉼터에 있는 아이들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을 것이고 각자의 상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식에는 불량하고 허용되지 않은 것들을 마음대로 하는 아이들이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 같이 생각나기도 했었어요. 세상에는 바꾸어나가야 할 것이 정말 많다는 생각을 했어요. 



# 마무리


진영 : 저는 사실 처음에 이 영화를 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위탁소라는 공간이 너무 멀고 어렵게 느껴져서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에요. 어떤 문제를 접하면 ‘완벽한’ 해답을 내리고 싶어 하는 좋지 못한 습관과도 약간 관련이 있는데요. 아니나 다를까, 영화가 시작했는데 이 위탁소라는 공간이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처럼 그려지지만, 그 안에서는 자유를 박탈하고, 그 안의 직원들의 약간의 폭력적인 모습(정서적으로 학대하는 모습 등)도 보면서, 처음에는 ‘아, 역시 그런 게 문제야. 뭔가 [불량] 청소년에 대한 소외적인 시선과 그들을 존중하지 않는 비청소년, 사회의 주류적인 시선과 문화가 문제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여전히 그 점에 개선되어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을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는 위탁소라는 공간이 조금 더 가깝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해요. 여기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이고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간이고, 일방적으로 청소년들이 도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다른 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냥 관계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혹은 내가 사랑 받고 있는 존재임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게 필요하고 그런 관계가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아요. 


현도 : 저는 이런 시간을 좋아하는 이유가 제가 못 보거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되게 많이 짚는 다는 것이에요. 이런 시간도 너무 재미있었고 이걸로 이 영화에 대해서 조금 더 많은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정리가 되지 않았지만 다음에 만나면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리 : 저는 진영이 얘기했던 거에 공감하면서 시작할게요. 저도 약간 처음에 인상 깊은 장면 말할 때 조금 분노가 있었어요. 영화를 보면서 그 안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감정적으로 반응하면서 보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교육저널 분들과 이야기하면서 더 깊고 다양한 시각에서 위탁소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잭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아서 좋았어요. 영화제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또 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민 : 아리님이 마지막에 말씀하셨던 게 좋았어요. 영화제 계속하면 좋을 것 같아요. 영화에서 너무 많은 얘기가 압축적으로 나와요. 중간에 그레이스가 상담하는 부분도 몇 초 나오죠. 그렇게 짧게짧게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나왔던 것이, 처음 볼 땐 그런 게 너무 많이 나오니까 ‘영화로서는 과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아까 아리님이 루이스가 위탁소에 사는 아이들의 전형이지 않을까 하는 말을 했는데, 이 영화에서 너무 많은 장면들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시 영화는 같이 봐야 한다는 게 맞는 듯해요. 다른 분들의 얘기를 들으면서 ‘아, 이게 이런 걸 수도 있구나.’ 생각하는 게 좋아서 너무 즐거웠어요.


우정 : 저도 영화를 보면서 하나의 장면에 대해서도 깊이 얘기하고 생각지 못했던 부분들을 생각할 수 있게 되어 좋았어요. 위탁소라는 공간은 양육과 교육의 문제이기도 하니까 우리 동아리에 던져주는 문제의식이 있는 것 같아요. 다음에 추후 기사를 쓰면서 꺼내 봐도 좋을 것 같아요.

진영, 아리, 지윤, 채미, 현도, 우정, 정민

  1. 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80390#none. [본문으로]
  2. 발언자 요청으로 수정됨. (2021.04.04.) [본문으로]

 

1. 소년들은 어쩌다 도마 위에 올랐나?


# 촉법소년은 누구인가?


  촉법소년들의 행동은 곧잘 언론을 통해 알려지고, 그때마다 사회적 공분을 사는 경우가 많다. 최근 경기 의정부 경전철 등에서 노인의 목을 조르고 폭행한 중학생도, 지난해 온라인 직거래 장터에 ‘장애인을 판다’는 글을 올린 10대 소년의 이야기도[각주:1] 우리에게 생소한 이야기가 아니다. 촉법소년은 왜 항상 우리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그들의 연령과 연령에 따른 처벌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소년법 제4조에서는 비행소년을 우범소년, 촉법소년, 범죄소년으로 구분하고 있다. 우범소년이란 ‘만 10세 이상 만 19세 미만’으로서 형사법령을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보호자의 정당한 지시에 따르지 않고 가까운 장래에 위반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청소년, 촉법소년이란 ‘만 10세 이상 14세 미만자’로서 형사법령을 위반하였으나 형사책임이 없는 청소년, 범죄소년이란 ‘만 14세 이상 만 19세 미만자’로서 형사법령을 위반하고 형사책임도 있는 청소년을 의미한다. 즉, 쉽게 이야기해서 우범소년은 형사법령을 위반하지 않고 형사책임도 없는 소년이며, 촉법소년은 형사법령을 위반하였으나 형사책임이 없는 소년, 범죄소년은 형사법령을 위반하였으며 형사책임도 있는 소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형사법령을 위반하지 않았으니 책임도 없는 소년(우범소년)과 형사법령을 위반하였으니 형사책임이 있는 소년(범죄소년)에 대한 처분은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범죄소년과 같이 형사법령을 위반하여 범죄 자체에는 차이가 없음에도 형사책임이 없는 촉법소년은 선뜻 이해하기가 힘들다. 특히 그 책임의 기준을 ‘만 14세’로 무 자르듯 잘라 놓았고, 그 점을 교묘하게 악용하는 청소년의 사례가 언론을 통해 집중 보도 되면서 이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점차 커지게 되었다.

  물론 이 기사에서 ‘악랄한 범죄를 저지른’ 촉법소년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법이 제시한 일정한 기준에 자신들이 부합하는지도 계산할 줄 아는 이들의 행동을 ‘무지에서 비롯된 범죄’라고 애써 포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이들을 향한 사람들의 다소 편향된 시선과 그 속에서 놓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우리가 과연 촉법소년들을 떳떳하게 책망할 수 있을 만큼 튼튼한 제도와 건강한 관점을 가졌는지 말이다. 우리의 현실을 알고 나면 촉법소년들을 향한 무분별한 비난의 에너지는 혹 힘을 합쳐 상황을 개선해보고자 하는 의지의 에너지로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2. 도마 위의 ‘뜨거운 감자’


  촉법소년들로부터 비롯된 논쟁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형사책임 연령을 만 14살보다 더 하향하자는 주장과 아예 소년법 자체를 폐지하자는 주장이다. 지금부터 각 주장에 대해 조금 더 알아보고, 그 주장들이 간과하고 있는 점을 짚어보자.


# 형사책임 연령 하향 문제


  현행법상 ‘만 14세 미만인 자’는 형사미성년자로서 그들의 행위는 불가벌로 규정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은 중범죄를 저질러도 소년법에 의한 보호처분의 대상이 될 뿐 형사상 처벌 대상은 되지 않는다.


  그럼 왜 하필 만 14세가 기준일까? 1912년부터 시행된 조선형사령에 따라 일본 형법이 한반도에서도 효력을 가지게 되면서 14세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하는 형사미성년의 연령이 우리 사회에도 정착되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형법이 제정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형법상 형사미성년의 연령은 14세 미만으로 규정되고 있다(형법 제9조). 일본이 소년법에서 14세를 기준으로 하게 된 배경에는 러일전쟁이라는 전시상황 및 종전 직후의 증가한 소년범죄가 있었다. 다시 말해, 모든 소년범죄를 처벌할 수 없었던 현실적 사정이 형사미성년의 연령 기준을 상향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에도 1912년부터 시행된 법이 한국전쟁 전후의 불안정한 사회적 현실과 맞물려 별다른 논의 없이 그대로 두었다.[각주:2]


  그렇다면 우리나라와 일본만 그런 것일까? 우선, UN 아동인권위원회는 ‘아동의 연령과 함께 사회 복귀 및 사회에서 맡게 될 건설적 역할의 가치를 고려하는 등 아동에게 인간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의식을 높일 수 있는 방식으로 처우 받을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UN 아동 권리협약 제 40조에 따라 형법 위반능력이 없다고 추정되는 최저연령의 설정을 촉구하였다. 또한 각 당사국에 대해 형사책임 연령을 12세 이하로 낮추지 말고, 최저 형사책임 연령을 지나치게 낮게 정하지 아니하며, 기존의 낮은 형사책임 연령은 국제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수준으로 상향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년사법 운영에 관한 유엔 최저 기준규칙 제4조 역시 “소년의 형사책임 연령이라고 하는 개념을 인정하고 있는 법 제도에 있어서 그 개시 연령은 정서적·정신적·지적 성숙에 관한 사실을 고려하여 너무 낮은 연령으로 정해져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세계 여러 나라들이 저마다 유지하고 있는 형사책임 최저연령은 각국의 역사적·문화적 기반에 따라 달리 설정되어 있고, 그 연령의 범주는 우리나라보다 낮은 7세부터 우리나라보다 높은 18세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은 국가들이 우리와 같이 만 14세(40개국)에 기준을 두고 있다는 점[각주:3]과 아동인권위원회 등의 권고에 따라 형사책임 연령 기준이 상향되는 국가들이 늘고 있다는 점은 지속해서 형사책임 연령을 낮추자는 주장이 나오는 우리나라에서 눈여겨볼 만 하다.


  어떻게든 형사책임 연령을 낮추고자 하는 사람들은 UN의 권고 연령인 만 12세까지라도 낮추고자 하며, 그 이유로는 주로 소년범죄의 증가, 흉포화, 저연령화를 든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그다지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검찰청의 범죄분석[각주:4]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8년까지 소년 형법 범죄는 지속적해서 감소[각주:5](2009년 81,378명 → 2018년 54,205명)하였으며, 특히 그토록 형사책임 연령에 포함하고 싶어 하는 10세~13세의 범죄율은 전체 소년범죄의 0.1%~0.3%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강력범죄의 경우에도 10세~13세가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소년범의 0.1%~0.5%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이들의 ‘수가 적기’ 때문에 형사책임 연령을 낮출 필요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형사책임 연령을 낮추는 ‘법 개정’까지 하려는 측에서는 적어도 적절한 통계자료를 가지고 근거를 드는 것이 바람직한 논의의 자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며, 소수의 충격적인 범죄만을 가지고 촉법소년에 대한 성급한 일반화를 하여 자극적인 여론을 만드는 것은 대중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만들 수 있다. 특히, 그 대상이 스스로를 방어하고 변론하기 어려운 청소년이라는 것을 볼 때, 어른들의 다소 무책임한 입법은 그저 사회를 폭력과 자극의 악순환으로 내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또한, 책임능력의 유무를 정하는 기준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생물·심리·문화적 요인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상대적으로 정해질 수 있는 등 아직도 모호한 부분이 많기 때문에 무작정 형사책임 연령을 낮추려고 하는 것은 섣부른 판단이라 느껴진다. 비슷한 예로, 2007년 소년법을 개정하면서 촉법 연령이 기존의 만 12~14세에서 10~14세로 하한 연령이 낮추어진 적이 있었다. 그러나 개정 후 소년부 실무를 담당하는 법관으로부터 연령만 낮추었을 뿐 이들에 대한 처우와 관련하여 추가적인 대책이 마련되지 않았던 것이 지적되었다.[각주:6] 이처럼 단순히 형벌권을 강화하는 방안은 이들에게 적절한 처벌도 되지 않고 교화·선도의 여지도 줄어들 수 있다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 소년법 폐지론자들의 이야기


  한편 조금 더 극단적으로, 아예 소년법을 폐지하고 성인과 동등한 선에서 소년들을 심판받게 하자는 주장도 있다. 이는 UN 아동 권리위원회의 권고나 청소년에 대한 다이버전 및 회복적 정의를 실현하려는 국제적인 흐름에 반한다는 점뿐만 아니라, 민주주의나 법치주의적 관점과도 다소 어긋나는 선택지이다. 호통 판사로도 유명한 부산가정법원 소년부 천종호 부장판사는 “소년법 폐지·개정을 통해 형벌에 있어서 성인과 동등한 취급을 하고자 한다면 우선 민주주의에서 핵심 권리인 참정권부터 성인과 동등하게 주어야 한다. 그런데 현행 공직선거법은 미성년자에 대해 선거권을 비롯한 참정권을 제약하기 때문에 미성년자는 법적으로 선거권을 행사하여 소년법의 폐지나 의사 형성에 참여할 수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년법의 폐지나 개정을 강행하는 것은 민주주의나 법치주의에 위반될 소지가 크다.”라고 말하며 이 논의에 핵심 당사자인 미성년자들의 참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각주:7] 또한, 성인과는 다르게 참정권 등의 핵심적인 권리가 제약받고 있는 미성년자들에게는 소년법이 오히려 이들을 보호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3. 뜨거운 감자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쓸모없는 장갑은 왜 탓하지 않는가?


# 감자를 잡기에는 장갑이 너무 작고 얇다 : 보호 처분의 타당성·효과에 대한 문제제기


  흔히 촉법소년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이들이 아예 아무 처벌을 받지 않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엄연히 소년재판을 받고 죄질이나 반성 여부 등에 따라 1호부터 10호까지의 보호처분 중 하나 또는 병합된 처분을 받게 된다. 소년법 제1조에 따르면 “이 법은 반사회성이 있는 소년의 환경조정과 품행 교정을 위한 보호처분 등의 필요한 조치를 하고, 형사처분에 관한 특별조치를 함으로써 소년이 건전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이 보호처분은 과연 지금까지 그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을까?

 

<표 : 소년법 제 32조에 따른 보호처분 종류>

  앞서 보았듯 소년범죄가 실질적으로 증가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소년범죄의 재범죄화율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10년간 소년 전과자 비율은 32.2~42.3%나 되며, 그중 전과 6범 이상이 3.8%에서 8.7%까지 증가한 것[각주:8]은 소년범에 대한 처분과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의문을 품게 한다. 다만, 이 통계자료의 경우 형사처벌을 받은 소년범이 포함되어 있어, 우리는 보호처분을 받은 소년범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자료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2009년부터 10년간 소년 보호 관찰대상자들의 보호관찰 경력을 통계 내 본 결과, 처음 보호관찰을 받은 소년의 비율은 2009년 66.1%에서 매년 지속해서 감소하여 2015년 이후에는 50% 이하로 하락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이미 1회 이상의 보호관찰을 받은 소년들이 다시 보호 관찰대상자가 되는 비율이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각주:9] 이때의 보호관찰은 협의의 보호관찰 이외에 사회봉사명령·수강명령 대상자를 포함한 인원이다.


  더불어 소년원 퇴원자의 1년 이내 재입원율도 개선되지 않고 있다.이와 같은 자료들은 결국 보호처분이 실질적으로 소년범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 아닐까? 보호처분의 실상을 알아가다 보면 촉법소년들이 빠진 악순환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근래에 가장 이슈가 되었던 보호처분 중 하나가 바로 6호 처분이다. 이는 6호 시설인 살레시오 청소년센터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 때문이다. 아이들은 야간 생활 지도원에 의해 성추행을 당했고, ‘혐의없음’으로 결론이 났지만 가혹행위와 약물 강제투여의 의혹도 있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밝혀진 6호 시설의 전반적인 환경은 소년들이 긍정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해 나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이들에 대한 부당대우뿐만 아니라 잘 되지도 않는 국가에서의 비용지원과 인정되지 않는 학력 때문에 아이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소년범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미래를 제대로 그려나갈 수 없었다.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을 한 소년들을 안일하게 민간 기관에 위탁하는 것 그 자체로도 문제가 있다고 본다. 아이들을 민간에 위탁, 아니 방임하는 것은 국가로서 그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민간이 소년원을 운영하게 하는 민영소년원이 추진되는 것은 실로 걱정부터 앞선다.)


  하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운영되는 소년원의 경우에도 위와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우리나라 소년원의 경우, 여자아이들이 가는 소년원 2곳을 포함해 전국에 단 10곳뿐이라 소년원 과수용 문제[각주:10]는 꾸준히 제기되어 오고 있었다.[각주:11] 그리고 이들을 관리하는 인력은 턱없이 부족하여 관찰관 1명당 관리하는 소년범의 수가 123명에 달하는데, 이는 다른 OECD 국가보다 4배가 넘는 수라고 한다.[각주:12]


  소년원의 교육은 어떨까? 대전소년원에서의 생활을 체험한 한 르포[각주:13]에 의하면 이곳에서 생활하는 소년들은 군대와 비슷한 관리를 받고, 여전히 그들 안에서의 서열과 그에 따른 생존기가 있었으며,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름뿐인 수업이 존재했다. 자유시간에 누울 수도 없고, 혼자만의 생각과 감정을 그리는 일기장을 의무로 쓰고 검사 맡아야 했고, 30분 정도의 체육 시간이 유일하게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시간이었으며, 정신교육의 명목으로 고사성어와 음악이 나오는 라디오를 들어야 했다. 이것이 과연 소년범의 성장과 교화를 바라는 시설이 제공할 수 있는 최선의 하루일까? 이들이 살아가는 24시간 속에는 과연 진정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며 미래를 그릴 수 있는 순간이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이들에게 갱생의 여지조차 주지 않은 채 응보적 잣대를 들이민 것은 아닐까?

4. 감자의 온도와 우리의 손에 맞는 장갑을 끼자


# 언제까지 뜨거운 감자의 탓만 할 것인가


  소년법은 청소년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제정되었음에도 지금까지는 어른들의 입맛대로 굴러가는 경우뿐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른들은 소년들에게 손가락질한다. 따지고 보면, 소년법을 만든 것도, 우범소년·촉법소년·범죄소년을 구분 짓고 형사처벌여부를 정한 것도, 보호처분의 종류를 규정하고 운영한 것도 모두 어른들인데 희한하게도 모든 화살은 소년들을 향한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이전에도 말했지만, 어른들은 손가락질하고 비난할 수 있어도 소년들에게는 변명하거나 반박할 수 있는 힘조차 없다. 소년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소년들이 법적·도덕적으로 지탄받을 행동을 했다고 해서 어른들이 만든 시스템의 잘못된 점이나 빈틈까지 소년들에게 책임 전가를 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태도이다. 더하여, 그 시스템은 자신들을 더 나은 환경에 갈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아니고, 평균적인 삶을 살 수 있게조차 하지 않는다. 그들의 눈에 그 모든 과정은 자신들을 ‘도우려는’ 목적보다는 어떻게든 ‘낙인찍으려’ 안달 나 있는 하이에나처럼 보일 것이다.

# 몇 가지의 대안, 그리고 아직은 그리지 못한 해결책


  법학적·실무적 지식이 그다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다 할 대안을 제시하기는 참으로 힘들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사를 쓰며 떠오르는 아이디어 몇 개는 활자를 통해 공유하고자 한다. 이런 생각의 씨앗들이 모여 가까운 미래에는 아이들을 위한 좋은 법안이 탄생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우선, ‘보호처분’이라는 용어의 개정이 필요할 것이다. 소년법을 잘 모르는 대중에게는 이 처분이 단순히 촉법소년을 ‘감싼다’는 의미로 다가갈 수 있고, 자연스레 거부감이 생길 수 있다. 처분의 한 역할 중에는 소년을 보호하는 것도 물론 있겠지만, 그들의 품행을 교정하고 건전한 성장을 돕는다는 의미가 강조되는 용어의 사용이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는 방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정말 당연하겠지만, 보호처분의 내실화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특히, 민간 위탁 보호처분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고려해보는 것이 필요하며, 만약 필요하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학교에 버금가는 엄격한 가이드라인이 제시되기를 바란다. 소년원의 경우에도 ‘성인 교정시설’과 같이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을 ‘통제’하기보다는 ‘기숙 학교’의 모습과 가까운 형태로 아이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아가 아이들이 미래를 그리는 것을 돕는 전문인력이 확충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회적 분위기 또한 중요하다. 흔히 ‘소년의 범죄가 진화했다’고 표현하는데, 사실 이들의 범죄는 대부분 어른을 보고 모방한 경우가 많다. 이들의 범죄 형태를 보고 행위자를 비난하는 일차원적 시각에서 벗어나서 그런 환경이 조성된 사회 전체를 조망하고 반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폭력을 무조건 ‘엄벌주의’라는 또 다른 폭력으로 해결하기보다는, 피해자의 회복과 가해 소년의 교화에 초점을 맞추어 모두가 바람직한 사회적 구성원으로 어울릴 수 있도록 법을 적용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논의의 과정에 청소년들이 반드시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촉법소년과 소년법 등의 문제를 모두 성인의 시각에서만 바라보았다. 또래의 입장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또 다른 통찰을 줄 것이다. 필자가 이 글에서 그리지 못한 해결책 중 몇몇은 이들과의 대화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미성년자를 ‘미성숙’으로 정의하고 논의의 장에서 배제한다면 결국 진짜 ‘미성숙’한 것은 그들이 아닌 우리 사회가 될 것이다.


# 봄, 그리고 꽃샘추위


  인간의 나이를 계절로 환산해보자. 백세시대임을 감안하고 나이를 4개의 계절로 나누면 1~25세까지는 만물이 소생하는 봄, 26~50세까지는 뜨겁고 찬란한 여름, 51~75세까지는 시원하면서도 은은한 가을, 76~100세는 춥지만 포근한 겨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 논의했던 촉법소년들은 어느 계절을 걷고 있을까? 만 10세 이상 14세 미만의 이 소년들은 봄의 길을 걷고 있으며, 생각해보면 그들은 아직 한 계절도 다 지내보지 않은 어린 나이다. 해마다 계절이 똑같이 반복되지는 않듯, 다른 10대들과 함께 봄을 걷고 있어도 촉법소년들에게 봄은 유난히도 혹독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들은 꽃샘추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봄이지만 혹독한 겨울을 맛보는 기분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을 수 있다. 이불 하나만 덮어주면 좋으련만, 그들에게 따뜻한 이불을 덮어주는 이는 아직 몇 없어 보인다.

 

 

 

 

Dichter

  1. 노인 목 조른 중학생 처벌 불가···분노 부른 '촉법소년' 면죄부, (news.joins.com/article/23977206) [본문으로]
  2. 이덕인(2012), “형사책임연령 하향에 대한 비판적 고찰: 형사미성년과 촉법소년을 중심으로”, 형사정책연구, 한국형사정책연구원, 17면. [본문으로]
  3. 이덕인(2012), “형사책임연령 하향에 대한 비판적 고찰: 형사미성년과 촉법소년을 중심으로”, 형사정책연구 제23권 제1호, 한국형사정책연구원, 25-26면. [본문으로]
  4. 법무연수원(2020), 2019 범죄백서, 540면. [본문으로]
  5. 다만, 2018년의 경우 소년범죄자 집계 시 14세 미만 피의자를 제외하고 작성되었다. 하지만 2018년의 자료를 제외하고 보면, 2012년과 2013년을 빼고는 2017년까지 해마다 소년범죄자가 4000~10,000명씩 감소하였다. [본문으로]
  6. 한숙희(2009), “촉법소년 연령인하에 따른 가정법원의 역할과 과제”, 형사정책연구 제19권 제2호, 67면. [본문으로]
  7. “소년법 폐지 논란과 관련하여”, (brunch.co.kr/@seungkivincent/2) [본문으로]
  8. 법무연수원(2020), 2019 범죄백서, 505면. [본문으로]
  9. 법무연수원(2020), 2019 범죄백서, 592면. [본문으로]
  10. 2017년 기준, 정원이 1250명이지만 평균 1612명이 수용되어 수용률이 129%에 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성인 교정시설에 수용된 사람들이 115.4% 과밀수용된 것과 비교했을 때 소년원이 훨씬 열악한 환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11. 소년원 과밀수용 '심각'… "민영소년원이 대안될 수도" (n.news.naver.com/article/022/0003307428) [본문으로]
  12. [소년법 동상이몽②] 소년원 처분 충분할까?…이수정·천종호에 묻다 (news.kbs.co.kr/news/view.do?ncd=4447772) [본문으로]
  13. 소년원 직접 체험한 기자, 바닥에 누웠다가...(mnews.joins.com/article/7744033#home)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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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속보도①] 교과서용 정치, 정치용 교과서  (0) 2021.04.02
후속보도  (0) 2021.04.02

0. 들어가며 – 교육과 정치


교육과 정치는 분리될 수 있는가?


  교육, 특히 학교 교육과 관련해서 교육과 정치는 서로 분리된 영역으로 여겨졌다. 학생은 정치적 색깔에 물들면 안 되는 ‘순수한’ 존재여야 했고, 교사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이름 아래 어떠한 정치적 의견을 표해서는 안 되는 존재였다. 그리고 교실은 ‘신성한 교육의 장(場)’이어야 하지, 정치와 같이 세속에 찌든 것들이 감히 비집고 들어올 수 없는 곳으로 여겨졌다.


  교실에서 ‘정치’란 꺼내서는 안 되는 단어였다. (그 이름을 불러선 안 돼!) 학생들이 정치적 이슈에 관해 토론할 수 있는 공론장은 사실상 부재했으며, 교사들은 정치적 이슈와 관련해서는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교사들에게 ‘정치적 중립성’이란 정치와 관련된 문제에 관해서는 ‘입을 닫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일종의 ‘(교실에서의)정치 혐오’로 이어졌다.


  만 18세로 선거권이 하향된다고 했을 때, 가장 강력한 반대 논거 중 하나가 ‘교실의 정치화’에 대한 우려였다는 게 이를 잘 보여준다. 다시 말해 순수한 학생들이 정치에 물들 수 있고, 신성한 교육의 장이 정치에 오염될 수 있다는 논거다. 그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만 18세 선거권이 시행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이러한 우려는 여전했다. 인천시교육청 교육정책연구소가 최근 발행한 '18세 선거권 도입에 따른 학생선거교육 방향 연구'에 수록된 조사 결과를 보면 '수업에서 사회문제를 다루게 될 때 염려되는 부분'에 관한 질문에 가장 많은 교사들이 '정치적 중립성의 부담'(평균 4.25/5점 만점)을 선택했다. 참고로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교사들이 선택한 답은 ‘학부모 민원 소지에 대한 우려(4.06)’이었다. 종합하자면, 교실은 여전히 정치화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이며. 교사들 사이에서는 만일 교실에 정치가 개입될 경우 이는 민원까지도 불러올 수 있는 일이라는 의식이 공유되고 있다.


  그런데 이 ‘교실의 정치화’라는 것이 정말 우려해야 하는 점인가? 교육과 정치는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선 교육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자. 교육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교육을 하는가? 교육의 본질이나 목표 등에 대한 논의는 무궁무진해질 수 있지만, 대한민국의 교육기본법에 따르면 교육의 목표는 다음과 같다.


  “교육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陶冶)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공영(人類共榮)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에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각주:1]


  교육은 한 명의 인간의 인격과 생활 능력, 그리고 민주 시민성을 갖추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삶에서 국가, 더 나아가 인류에게 이바지하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민주시민’, ‘민주국가’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민주’란 무엇인가? 민주란 ‘백성 민(民)’과 ‘주인 주(主)’, 즉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며, 국민이 권력을 가지고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 형태’다. 그렇다면 민주적인 시민을 길러내겠다는 교육의 목표는 그 자체로 굉장히 정치적인 목표이다. 정치가 특정 집단을 어떻게 이끌고 유지해 나갈지에 대한 문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국가는 국가라는 집단을 이끌고 유지하기 위해 교육을 수단으로 활용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교육은 그 본질부터 정치와 분리될 수 없으며, 국가는 교육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교과서를 발행하고 학교를 짓는다.


모든 교육은 정치적이다


  국가는 교육을 통해 국가 이데올로기나 정치 시스템을 가르친다. 따라서 교육과정은 곧 국가의 국민을 교육시키고자 하는 방향이며, 교육과정에 따른 대부분의 학교 교과는 국가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교과 중 하나는 도덕과이다. 도덕과는 2015 개정 교육과정 총론에서 ‘도덕적인 인간’과 ‘정의로운 시민’이라는 중첩된 인간상을 지향점으로 삼는다고 밝히고 있다. 즉, 도덕과 교육과정의 주된 목표 중 하나는 민주시민성의 함양이다. 그런데 민주시민성의 전제가 되는 민주주의는 하나의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가치가 아니라, 역사적 맥락 속에서 구성되고 형성되어온 정치 체제이다. 그리고 이 정치 체제는 사회의 이데올로기로서 작동하며, 민주시민성 함양이라는 도덕과 교육과정의 목표는 이 이데올로기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배우는 ‘도덕’, ‘윤리’도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바뀌면 함께 바뀐다는 뜻인가? 그렇다. 실제로 도덕과는 과거 국민윤리교육에서 바뀐 바 있으며, 이는 시대의 변화를 그대로 따른 결과였다. 도덕과뿐만이 아니다. 국가 교육과정의 내용은 모두 100% 순수한 교육적 목표 아래 구성되지 않는다. 오히려 교육과정은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의 목표에 의해 의도적으로 선정되고 걸러진 내용로 구성된다. 따라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바뀌면 교육과정도 바뀐다. 곧 국가의 사회적 권력이 교육에 작용하며, 국가가 원하는 형태의 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방안이 바로 교육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는 ‘교과서용 정치’와 ‘정치용 교과서’로 나누어, 현재 대한민국의 교육체제 아래 교과서를 중심으로 교육과 정치가 어떤 식으로 관련을 맺고, 교과서와 학교에서의 탈정치화 논의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교과서용 정치


  대한민국의 교육 체제 아래에서 12년 이상의 시간을 보낸, 혹은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사회과 과목 등을 통해 교실에서 정치를 배워본 적이 있을 것이다. 꼭 고등학생 때 ‘정치와 법’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중학교 ‘사회’ 과목 등에서 민주주의나 정치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 이상씩은 다들 들어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혹시 그때 교실에서 배운 정치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는가? 오래되어 잘 기억이 나지 않더라도, 무언가 ‘정치’, ‘민주주의’라는 개념어에 대한 추상적인 지식을 배웠던 기억은 어렴풋이 날 것이다. 그러나 아마 신문이나 인터넷 뉴스에 실시간으로 실릴만한 정치적 이슈나 비정규직 노동 문제와 같이 정치적으로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는 현실의 정치를 피하고, 교과서용 정치를 가르치는 학교 현장의 실태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 중학교 교사의 칼럼을 일부 인용하자면, ‘시민혁명은 저 옛날 유럽에서 있었던 일이고, 민주주의는 저 고대 아테네의 정치이며, 여론정치, 시민참여정치는 추상적인 정치 모델 순서도의 한 칸일 뿐이다’.[각주:2]


  그렇다면 이러한 교과서용 정치가 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왜 지금도 교실 밖에서 수많은 정치적 의제들이 논의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생동감을 잃고 죽어버린, 추상화된 정치만을 공부하는가?


  이는 결국 교과서가 정치적으로 중립이어야 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교과서는 정치적 중립이라는 보이지 않는 감옥(?)에 갇힌다. 그리고 정치적 중립이라는 것을 지키기 위해, 교과서 안에서 현실의 정치는 완전히 제거되어야 한다. 교실 밖의 생생한 정치, 예를 들어 페미니즘, 환경, 노동 등 생동하는 의제는 교과서의 논의 대상이 아니다. 왜? ‘정치적 사안’에는 얼마든지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의견’이 나올 가능성이 존재하는 사안은 교과서가 다룰 대상이 아니다. 자칫하면 교과서, 혹은 교과서가 교사나 학생들에 의해 활용되는 과정에서 정치적 중립을 잃을, 혹은 잃는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는 주제는 대체로 교육과정에서 배제되며,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없는 죽은 주제만이 교육과정에서 다루어진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과서는 중립성을 획득하려 한다.


  아주 드물게, 교과서용 정치와 교실 밖 정치가 같은 사안을 다루기도 한다. 인공 임신 중절, 곧 ‘낙태’가 대표적이다. 교실 밖에서, ‘낙태죄’ 처벌 조항은 2019년 헌법재판소에서 헌법 불합치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2021년 1월 1일부터 그 효력을 잃었다. 그러나 이후 발의된 법안이 없어 낙태의 법적 공백이 지속되고 있다. 이에 낙태와 관련된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으며, 낙태와 관련된 정치권의 논의 역시 시시각각 변화하며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낙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있는 정치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교실 안에서, 낙태를 다루는 ‘생활과 윤리’ 교과서는 이러한 살아있는 맥락은 모두 배제한 채 오로지 임신 중절에 대한 찬반 논거만을 나열하고 있다.[각주:3] 이는 교과서에서 ‘다른 의견’이 나오는 것을 억제함으로써, 또 살아있는 정치의 생명력을 빼앗음으로써 ‘교과서용 정치’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생활과 윤리 교과서는 단지 낙태에 대한 찬반 논거를 모두 다룬다는 사실로 인해 ‘정치적 중립’으로 포장된다.

2. 정치용 교과서


  그러나 교과서는 중립적이지 않다. 교과서는 ‘정치적’이다. 우리나라에서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교과서 관련 논쟁은 지속되어 왔다.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한국사 국정 교과서 논란이다. 지난 박근혜 정권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며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된다(!)’고 주장하며 한국사 국정 교과서를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그러나 박근혜 전 대통령의 혼이 담긴 한국사 국정 교과서는 탄핵 이후 들어선 문재인 정부에 의해 ‘독재를 미화’한다며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정권이 바뀌자 이번에는 한국사 교과서가 ‘좌편향 교과서’라며, 교과서가 ‘정권 홍보 책자’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한국사 국정 교과서 논란이 좌편향 교과서 논란으로 이름만 바뀌어 이어지는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뛰어난 어록. 국가가 교과서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잘 보여준다.

  교과서가 본질적으로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왜? 교과서를 누가 만드는지 생각해보자. 교육과정이 구성되고, 교과서가 만들어지고, 교육 정책이 결정되는 일은 누구의 손에서 이루어지는가?


  교육의 주체에는 교육부와 같은 정치적인 기관도 있지만, 교사도 있고, 학생도 있고, 학부모도 있다. 그런데 교육과정을 구성하고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에는 교육과 관련된 주체 중 극히 일부만의 생각을 담고 있다. 즉, 대다수 교사와 학생은 교육과정 구성에 참여할 수 없으며, 교육과정 및 정책은 교육부(라고 쓰고 아주 높으신 공무원분들이라고 읽는다.)나 교수들의 생각을 반영한다. 소위 말하는 사회의 ‘지배 계층’이자,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거의 완벽하게 소화하고 내재화한 이들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이다. 교육과정을 토대로 제작되는 교과서는 이 생각을 그대로 답습한다. 국가가 발행하는 국정 교과서뿐만 아니라 민간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검정 교과서 역시 국가의 심의 및 승인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학교로 간다. 따라서 국정 교과서나 검정 교과서나, 결국 국가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반영하며 만들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교과서는 국가의 시선으로 만들어진다.


  국가는 국가의 눈으로 교과서를 만든다. 교과서는 국가가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 보여주고 싶은 것 중 골라낼 것은 골라내어 철저한 체계를 만들고, 그것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리고 국가는 교과서를 통해 국민을 통제하고, 각 개인에게 국가 이데올로기를 주입함으로써 국가에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하길 바란다.


  대표적인 사례로 ‘저출산’을 보자. 사전적 의미로 저출산(低出産)은 사회의 합계출산율이 인구 대체수준을 밑도는 현상을 의미한다. 즉, 저출산이 계속되면 한 국가, 한 사회의 인구가 줄어드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의 교과서는 흔히 저출산을 ‘저출산 문제’라고 부르며 저출산을 해결해야 하는 ‘문제’로 본다. 이를 잘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를 살펴보자. 이번에는 도덕과 교과서도, 사회과 교과서도 아닌 기술가정 교과서다.[각주:4]

  위의 그림은 저출산 및 고령화가 개인이나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실업 증가 및 고용 불안, 경제 악화로 수입 감소, 국가 세입 감소로 인한 복지 혜택 감소와 같은 부정적인 영향들을 줄줄이 늘어놓고 있다. 이렇게 교과서는 저출산을 문제로 규정하며, 저출산이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인 영향만을 제시함으로써 저출산이 문제라고 인식하도록 하고, 저출산이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과연 저출산이 무조건 나쁜 것인가? 위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개인이나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들도 진정 개인에게 미치는 악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까? 경제 악화로 수입 감소, 국가 세입 감소로 인한 복지 혜택 감소 등의 영향은 철저하게 국가의 관점에서‘만’ 바라본 내용이다. 즉, 저출산 문제에 관해서 교과서는 오로지 국가의 관점으로만 이야기하고 있다.


  국가의 시선으로만 만들어진 교과서는 근본적인 문제를 바라보지 못한다. 교과서는 저출산을 ‘문제’라고 규정하고 있지만, 저출산은 표면적인 결과일 뿐이다. 교과서는 그 이면의 저출산을 둘러싼 사회 구조에 대한 의문을 던지지는 못한다. 흔히 교과서는 저출산의 이유를 초혼 연령의 상승, 여성의 사회진출로 규정하고는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아이를 적게 낳는, 아니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를 그것으로만 볼 순 없다.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혼자 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자 살기도 어려운 이유는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이어진다. 턱없이 많은 업무 시간과 방 한 칸 마련하기도 어려운 집값, 자기 자신을 부양하기에도 부족한 임금 등…. 그리고 이들의 뒤에는 국가의 사회 구조와 (여성에게 특히 더 억압적인)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있다.


  그러나 국가는 권력 구조를 강화하고 기존의 억압적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교육을 수단 삼아 사회 구조의 문제를 은폐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로 축소한다. 그래서 ‘결혼을 늦게 해서’ 혹은 ‘사회에 진출하기 때문에’ 저출산이라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식으로 국가가 책임져야 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이렇게 구조적인 문제를 은폐하는데 교과서가 수단으로 쓰인다.

교과서는 정치에서 자유로운가


  지금까지 살펴본바, 교과서를 ‘중립’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교과서는 중립처럼 보인다. 왜? ‘교과서’이기 때문이다. 국정 교과서뿐 아니라, 검정 교과서도 결국 마찬가지이다. 좌파니 우파니 하는 정치적인 지향이 다를 수는 있어도, 거시적인 관점에서 국가 이데올로기를 정말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는 사람들의 손에서 교과서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 교과서는 객관적인 지식처럼 포장되어 학생들에게 전달되고, 학생들은 비판 없이 교과서에 주어진 지식을 암기하고, 시험을 본다. 즉, 국가는 국가의 시선이 가득 담긴 교과서를 중립이라고 포장하고, 정제된 지식의 형태로 학생들이 암기하도록 한다.


  그 결과, 학생들은 시의적절하고 그들의 삶에 가까운 정치적 지식과 정치적 역량을 기를 수 있는 내용보다는, 고대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태동했느니 어쩌니 하는 지극히 정제된 지식을 외워서 시험을 본다. 그리고 이것은 ‘정치 교육’으로 포장된다. 그런 정치 교육은 잘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면서 정작 우리 사회의 퀴어, 페미니즘 등 ‘살아있는’ 정치에 대해서는 정치적 중립을 이유로 교실에서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 현실이다.


3. 나가며


교육과 학습


  ‘교육(education)’과 ‘학습(learning)’은 다르다. 교육은 교수자와 학습자의 관계가 전제되며, 수동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학교에 가고 수업을 듣고 학위를 받고 이런 것들이 모두 교육의 영역에 포함된다. 따라서 교육은 언어의 형태로 정제된 지식을 다루며, 학습자가 지식을 주어진 대로 배우고 주어진 방식대로 사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교육은 정답이 이미 주어져 있는 상황에 유리하다. 반면, 학습은 학습자의 능동적인 행위이다. 따라서 반드시 교수자가 없더라도 언제 어느 환경에서든 가능하다. 그리고 학습자는 언어의 형태로 표현할 수 없는 정제되지 않은 지식을 습득하고, 각 학습자는 각자의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자기만의 지식을 가진다. 즉, 학습은 곧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역량이나 기술을 형성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정답이 정해지지 않은 상황에 필요하다.

정치는 학습이다


  지금까지의 우리는 ‘정치 교육’, ‘시민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정치를 교육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교육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서도 찬성/반대를 나누어 정답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정치에는 정답이 없다. 정답이 없는 문제에 정답을 내리려고 했기 때문에, 교육과 정치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정치는 학습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는 교육에서 학습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 정치를 학습으로 바라본다면, 정치는 암기할 지식을 던져주는 방식으로 교육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과 같이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지식을 달달 외우는 것만으로는 실제 정치에 참여하기 위한 역량을 기를 수 없다. 따라서 학습자들이 스스로 학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한다. 어떤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는가? 자유롭게 토론하고, 비판하고, 의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사회 현상 이면의 구조를 볼 수 있는 환경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방식이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어떻게 할까?


  다시 교육 현장으로 돌아와, 우리에게는 자유로운 상상이 필요하다. ‘정치적 중립성’을 해친다는 이유로 정치를 터부시하지 말고, 교실의 정치화를 두려워하지 말자. 그리고 교과서를 만드는 과정도 더 과감하게 상상해보자. 이미 다 교육과정을 짜 놓고 교과서에 들어갈 지식을 정해둔 다음에 교육 관련 토론회에 학생 한두 명을 앉혀두고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했다’라며 끝나서는 안 된다. 교과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부터 학생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건 어떨까? 학생도 교과서가 발행되기 전에 의견을 낼 수 있는 교육 주체가 될 수 있지 않은가? 따라서 학생들이 교과서 제작 과정에 참여하는 길을 제도적으로 마련하는 방안도 상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도 중요하다. 첫째로, 교과서를 꼭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 교과서는 절대적이고 선험적인 지식의 총체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국가의 시선에 의해 골라진 지식이며, 교과서의 구성에는 국가의 의도가 숨어 있다. 따라서 교과서를 비판하는 것도 자유로워야 한다. 또한, 교과서를 절대적인 지식의 잣대로 생각하지 말고, 교과서를 도구로 생각하여 교실의 교육 주체들이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하자. 즉, 교육의 목표가 꼭 교과서 안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 나아가, 교과서가 꼭 있어야 할까? 교과서는 국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중립적인 ‘척’하기 위해 오랜 기간 심의와 수정을 거친다. 그렇기에 교과서는 필연적으로 빠른 현실의 정치적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다. 그렇다면 교육 주체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꼭 교과서만을 가지고 수업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신문이나 기사를 보고 토론하는 것도 좋을 것이고,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가져와서 선정한 주제로 토론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조금 더 열려 있어 보면, 인터넷 기사 댓글, 트위터 등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핫한 주제들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주제에 관한 교과서의 서술과 SNS 등의 서술을 비교하는 활동은 교과서만 보았을 땐 결코 얻을 수 없는 통찰을 가져다줄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주제 그 자체가 아니라, 주제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하고 그 과정에서 이면의 구조를 인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사가 꼭 가르치는 역할이어야 할까? 아니다. 정치적 이슈는 하루가 다르게 새롭게 생겨나고, 사라지고, 바뀐다. 따라서 교사라고 해서 모든 정치적 주제를 알고 있는 것도 아니며, 교사보다 학생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다. 교실에서 다룰 주제는 매일 변화하는데 교사도 함께 배우는 건 어떨까? 학생이 교사를 가르치고, 교사는 학생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가능하다. 교사도 학생들과 똑같은 한 명의 시민이라는 사실을 견지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학생들이 선택한 주제에 관한 토론을 할 때 교사가 꼭 토론의 진행자여야 할 필요는 없다. 교사도 학생과 똑같은 한 명의 시민으로서 교실에서 학생의 발제를 듣고, 학생의 의견을 듣고, 자신의 주장을 제시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학생도 교사와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교사의 주장에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학생은 자유롭게 의견 교환이 이루어지는 교실 분위기에서 교사의 말을 ‘단지 교사라는 이유로’ 곧이곧대로 수용하는 대신, 비판적인 시각으로 한 번 더 생각하는 역량을 기를 수 있다. 비판하는 연습은 곧 비판적 사고 역량으로 이어진다.


  앞으로의 교육 현장에서 정치는 교육의 대상이 아니어야 한다. 정치는 고대 아테네를 벗어나 우리 곁의 살아있는 의제로 다가가야 하며, 교실 환경은 학습자에게 정치 지식이 아닌 정치적 역량을 길러주어야 한다. 이때, 교사를 포함한 모든 교육 주체는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토론하고 이야기해야 하며, 청소년 역시 교사와 동등한 한 명의 시민으로서 주체성을 존중받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학습자들은 교과서용 정치, 정치용 교과서에 매몰되지 않는 비판적인 사고능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며, 자기 주변의 정치적 의제에 관심을 두고 적극 참여할 수 있는 주체적인 시민으로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정치는 학습되어야 한다.

 

 

 

 

ALee

  1. 교육기본법 제1장 제2조(교육이념) [본문으로]
  2. 권재원 풍성중학교 교사, 아이들에게 ‘교과서용 정치’만 가르칠 건가?, 프레시안, 2014.03.10. 수정, 2020.12.24. 접속, www.pressian.com/pages/articles/115033 [본문으로]
  3. 미래엔, 생활과 윤리 Ⅱ. 생명과 윤리 [본문으로]
  4. 두산동아, 중 기술가정② 교과서 3단원 01. 저출산 · 고령 사회와 일 · 가정 양립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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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번 호 기획 [청소년의 정치 참여]의 고민을 이어, 이번 호에서는 후속보도로 ‘교과서와 정치의 관계’와 ‘촉법소년과 소년법’에 관한 이야기를 담아보았습니다. ‘교과서용 정치, 정치용 교과서’ 보도에서는 교육과 정치의 관계, 교과서에 담긴 정치의 모습, 정치를 위한 교과서의 모습을 통해 교육과 학습의 차이가 무엇인지와 청소년들이 정치를 배우기 위한 올바른 방향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촉법소년 엘레지’ 보도에서는 다른 비행소년과 구분되는 촉법소년의 법적 특징, 그들의 비행이 불러일으킨 형사책임 연령 하향 문제와 소년법 폐지 문제, 보호 처분의 타당성 문제, 그리고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해결책을 그려보았습니다. 궁극적으로 이번 호 후속보도를 통해 우리는 각 문제에 대한 청소년들의 적극적 참여와 이에 대한 보장이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자 합니다.

 

<후속보도> 소개 이미지


1. 들어가며


  학내에 인권헌장 바람이 불고 있다.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 오랜만에 찾은 학교에는 곳곳에 인권헌장과 관련된 대자보들이 어지러이 게재되어 있었다. ‘탈동성애자의 발언을 차별 행위, 혐오 표현으로 규정해 자유를 박탈하는 서울대 인권 헌장에 반대한다.’, ‘지극히 불명확한 개념, ‘성적지향’이 차별금지사유에 포함되는 것을 반대합니다.’ 등[각주:1], 중앙도서관을 거쳐 사범대를 향하는 동안 여러 대자보를 보며 점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러다 사범대 앞에서 이질적이게도 반듯하게 붙어있는, ‘인권헌장의 제정이 성도착증을 허용할 것이라는’[각주:2] 대자보를 보고 말았다. 그리고 슬프게도 맘카페에서 동성애가 에이즈 발병의 원인이라고 말하던 한 사람이 생각났다. “당신의 아이가 동성애자면 괜찮으시겠습니까?”, “당신의 아이가 에이즈를 퍼뜨리고 있어요!”. 공포와 두려움으로 무장했던 그 발언들이 지금 내 눈앞에, ‘교육’을 이야기하는 사범대학 근처 게시판에 큼지막한 글씨로 쓰여 있었다. 너무나도 모순적인 상황이다. 나는 사회에 만연해있는 부조리와 차별을 함께 이야기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대학교에서 현실에 안주하는 방법이 아닌 현실에 부딪치는 용기를 얻고 싶었다. 그러나 이렇게나 많은 혐오가 자유와 이성과 진리라는 이름으로 대학교 게시판의 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다. 10월 16일에 열린 ‘서울대 인권 헌장 및 대학원생 인권 지침 제정 공청회’에는 공격적인 댓글들이 달렸고 성 소수자 동아리 대표는 아웃팅 등 다양한 위험에 노출될 것을 고려해 전체동아리대표자협의회에 참가하지 못했다.[각주:3] 학내의 혐오는 대자보에서 그치지 않고 혐오 행동으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나는 손발이 차가워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대자보를 몇 번이고 읽었다. 서울대학교에는 내 손발을 얼린 겨울바람보다 더 싸늘한 혐오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2. 인권헌장 반대 성명문은 혐오 표현이다.


  “서울대학교는 인권헌장 제정 추진을 즉각 중단하라!”[각주:4] 2020년 10월 15일, 서울대학교기독교총동문회, 동성애합법화반대전국교수연합, 진정한평등을바라며나쁜차별금지법을반대하는전국연합, 복음법률가회는 인권헌장 반대 성명문을 발표했다. 이 성명문은 인권헌장 제3조 차별금지와 평등권을 문제 삼고 있으며 이 안에서도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 부분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성명문의 두 번째 주장인 ‘인권헌장은 서울대학교에 동성애/젠더 이데올로기 독재를 가져온다’는 부분은 법적/과학적인(논리적으로 보일 뿐이지만) 근거가 바탕이 되었기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으며 ‘정당한 혐오’, ‘혐오할 자유’를 논하고 있다. 이 부분을 요약하자면, 크게 세 가지로 주장으로 나눌 수 있다. 1) 우리나라 최고법원인 대법원과 헌법재판소가 ‘동성 간 성행위는 비정상적인 성적 교섭행위로서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에 반하는 성적 만족 행위’로 판단해 왔기에 동성간 성행위는 부도덕하다. 2) 동성애 유전자가 없다는 연구 논문들이 있기에 동성애는 바꿀 수 없는 존재 내지 상태가 아니므로 바꿔야 하는 것이 맞다. 3) 우리는 동성애가 잘못되었다는 것이지 동성애자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반대 성명문을 읽으며 이 세 가지 주장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들었다. 1)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에 반하는 동성애는 무슨 의미일까? 2) 동성애 유전자가 없다는 것이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하는가. 3) 과연 동성애가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인가?

 

1) ‘선량함’을 내세워 혐오를 말하다.

 

  우선, 나는 이 성명문을 읽으며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내용이 군형법, 그리고 추행과 관련이 높다는 논의를 차치하고서도 결국 반대 성명문이 동성애를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과 반대되는 악랄한 무언가로 바라보고 있음이 분명하기에 나는 그렇다면 선량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보고자 한다. ‘이성애’는 선량한가? 맞다, 아니다를 대답하기 전에 우리는 이 질문이 매우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컨대, 남성과 여성이 성행위를 하는 사실을 우리는 선량하다고 하지 않는다. 애초에 이성애라는 사랑의 형태를 선함과 악함이라는 가치판단으로 바라보는 것이 괴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이 성행위를 할 때, 여성이 원치 않음에도 남성이 강제로 성행위를 이어갈 경우, 이것은 선하지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성애 또한 악함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우리는 이성애가 선이고 동성애가 악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선악의 판단은 그 하위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 내용은 군대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추행을 막기 위한 법의 내용이나 그러한 맥락을 차치하고서라도, 동성애는 선량하지 못한 것이라고 단정하는 문장은 성립될 수 없다. 그들은 동성애를 ‘악하고 음란한’ 것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핵심은 모든 이성애가 성행위로 이어지지 않듯이 모든 동성애도 성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며 결국 이성애든 동성애든 모두 서로 합의 가능한 성인이 ‘친밀한 관계’를 추구한다는 것이다.[각주:5] 강조하건대, 동성애를 단순히 성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행위로 바라보는 그들의 혐오는 근절되어야 할 것이다.


  동성 간 성행위가 일반인들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한다는 이야기 또한 사실 여부를 떠나 동성애가 선량한 성적 도덕 관념에 반한다는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다수가 흑인을 혐오한다고 흑인을 혐오하는 행위를 정상적인 행위로 보지 않듯, 혐오감이 곧 악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혐오를 고찰하는 태도이다. 성명문에도 드러나듯 이러한 혐오감을 내세워서 자신의 차별적 시선을 정당화하고 선량한 것이라고 치부하려는 태도가 인권헌장이 필요한 이유를 방증하는 것이다. 

 

2) ‘동성애 유전자’를 내세워 비정상으로 낙인찍다.

 

  두 번째로 동성애 유전자가 없다는 것이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하는지 의문이다. 그들은 왜 동성애를 말할 때 동성애 유전자와 함께 말하는가? 우선 동성애 유전자, 이성애 유전자 등. ‘~에 대한 유전자’를 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다. 성향 및 행동은 하나의 특질을 가진 유전자만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닌 환경적, 유전적 등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하여 도출된다. 단순히 동성애 유전자가 있다 혹은 없다의 차원으로 국한해 논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논의는 불필요한 논의이다. “어째서 이러한 유전학적 내용과 동성애를 결부시키는가?”의 문제부터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성애를 말할 때, 이성애 유전자의 유무 등 ‘부연설명’을 하지 않는다. 예컨대, 드라마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사랑할 때 “나는 내 유전학적 정보에 의거하여 여자인 너를 사랑하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럽고 필연적이야.” 라고 말하며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의 내면 혹은 외면 그 밖의 여러 요인들, 그 사람을 구성하고 있는 세계를 보며 사랑에 빠진다. 다른 것은 ‘성별’뿐인데 이곳에 ‘유전자’의 논의를 결부시키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혹여 동성애 유전자가 없다는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동성애가 비정상적임을 함축하지 않는다.


  이 주장의 핵심은 결국 과학적으로 보이는 근거를 가져와 동성애가 비정상임을 밝히는 것에 있다. 한 인간의 성향을 결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가 동성애에 대해 다루고 있지 않다고 말하며 동성애를 혐오하는 행위가 정당함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나아가 탈동성애라는 용어를 통해서 동성애에서 벗어날 수 있고 벗어나야 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연구를 주도했던 가나 박사 또한 “다른 많은 행동과 마찬가지로 동성 간 성적 행동은 유전적 혹은 비유전적 요소에 영향을 받는다. 동성애 성향이 유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할 수도 없고, 비유전적 요소, 즉 사회적·환경적 요인에 영향을 받아 결정된다고만 볼 수도 없다.”[각주:6]고 밝혔다. 그 누구도 성 정체성을 강요하고 벗어나라고 말할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이 주장이 동성애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그 기저에 존재하는 혐오를 마치 이성처럼 보이는 가면을 써 감추려는 시도임을 확인할 수 있다. 


3) 동성애는 비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세 번째는 “‘행위 비난’을 ‘행위자 비난’과 동일시하는 서울대학교 인권헌장은 보편적 헌법 이론과 부합하지 않으며, 동성애/젠더 이데올로기의 전체주의적 독재를 초래한다.”는 주장과 관련한 의문이다. 과연 우리 사회에서 행위자 비난은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흔히 게이라는 말을 비속어처럼 사용하고 동성애자에게 폭언과 폭행을 일삼고 있는 현 상황을 행위자가 아닌 행위만을 비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가. 나아가 우리는 동성애를 비난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바라보며 논지를 전개하는 것도 동의하지 않는다. ‘행위 비난’과 ‘행위자 비난’을 구분하라고 하지만, 엄연히 ‘동성애 비난’과 ‘동성애자 비난’ 모두 혐오 표출이며 근절되어야 마땅한 것이다. 즉, 행위와 행위자 비난을 구분하라는 이 내용 속에 숨겨진 것은 ‘특정인을 비난하지 않을테니[각주:7] 나는 자유롭게 혐오하겠다’라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우리가 동성애가 비정상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규탄하는 이유는 발언에 깔린 폭력적이고 혐오적인 시선 때문이다. 우리는 이를 행위 비난과 행위자 비난을 분리하는 차원으로 국한시킬 수 없다. 행위자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를 비난하는 것이기 때문에[각주:8] 정당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차별적 시선을 정당화하려는 발언이기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절대적인 잣대로 동성애를 비판하는 표현을 강제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인권헌장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며, 그들이 하는 것은 비판이라기보다 비난이며 혐오이다. 그들이 존재를 부정하는 혐오를 하고 있기에 우리는 이러한 혐오를 규탄하고 근절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어떠한 사상이나 견해가 옳고 가치 있는 것인지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잣대가 자유민주체제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고 강조하며, 따라서 동성애를 혐오하는 자신들의 발언도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절대적인 잣대가 없다는 것이 가치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것이 절대적인 옳음이든 사회에서 구성된 옳음이든 옳음과 가치를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즉, 상황과 맥락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혹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차원을 넘어 우리는 사회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살아가며 올바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타인에게 상처 주지 않는 행동, 남을 배려하는 행동 등, 우리는 내가 속한 이 공동체 내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해 옳음과 가치에 고군분투하는 것이다. 단순히 절대적인 잣대를 말할 수 없으니 옳음과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멈추는 행위는 우리가 더이상 사회의 방향에 대해, 사람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겠다는 뜻과 같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이상으로 상처받고 상처 주는 사회를 허용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들의 혐오 표현을 나아가 그 혐오를 표출하는 행동을 묵인하는 학교를 마땅하다고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소위 <팩트체크> 기사로 그들의 비논리를 드러내고 퀴어문화축제에서 폭언과 난동을 일삼는 행위를 규탄해도 여전히 우리는 사회에서 당당히 우리의 성 정체성을 말하기 어렵고 누군가는 폭력적인 시선과 억압에 몸부림치고 있다. 그 사회의 일원인 서울대학교 또한 굵은 글씨로 혐오 표현이 쓰여 있는 것을 버젓이 이성적인 성명문이라고 게시하고, 그것을 통해 누군가가 받을 상처는 고려하지 않으며, ‘비정상’으로 아무렇지 않게 낙인찍고, 그것을 스스로 정당하다고 말하기 위해 논리 아닌 논리를 만들고 있다. 절대적인 잣대이든 상대적인 잣대이든, 핵심은 그들의 혐오 표현이 근절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우리는 더이상 학교 안에서 혐오적 시선이 표출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4) 표현에 책임을 진다는 것


  부당한 일에 왜 분노하는가. 혐오로 인해 누군가가 상처 입어도 그 행위를 그르다고 말할 수 없는 사회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인가. 표현의 자유가 혐오의 자유를 함축한다고 말할 수 없다. 즉, 표현의 자유란 어떤 발언이나 어떤 행동 등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 모든 표현이 무조건 옳은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우리의 표현에 책임을 져야 한다. 동성애와 성전환이 옳으며 가치 있다는 것을 강요하고 있다는 발언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동성애를 어떤 시선으로 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들이 동성애 혐오를 강요하고 싶기에 차별과 혐오를 멈춰달라는 목소리를 하나의 강요로써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성적지향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태도는 옳지 못하다. 우리는 이런 혐오를 근절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학내[각주:9]에선 지속적으로 이러한 혐오 표현이 표출되었다. 위 세 가지 주장은 형태만 바뀌었을 뿐, 동성애가 에이즈를 발병시킨다거나 성도착증이라거나 정상적인 가족 정의에 맞지 않다는 등의 주장과 그 결을 같이 한다. 핵심은 이 모든 주장과 근거가 결국 보다 수월하게 혐오를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나아가 그 어떤 주장과 근거도 혐오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체성’을 부정하고 비정상으로 낙인찍고 혐오를 조장하는 이 모든 행위에 대해 우리는 규탄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연대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길목에 인권헌장 반대 성명문을 첨삭한 대자보가 게시되었다(이은혜 기자, 위 기사.)

  인권헌장 반대 성명문이 하나의 혐오 표현임은 명백하다. 정당한 혐오와 정당한 차별을 시도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공포에 호소하며 혐오를 부추기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혐오의 목소리가 학내에 마치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표출되고 있다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인권헌장이 필요하다는 방증일 것이다. 한편, 인권헌장이 비단 성적지향 및 성별 정체성만을 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님에도 특정 단체의 혐오로 인해 논의의 장이 축소되어 버렸다. 그렇기에 우리는 논의의 장을 확장하여 인권헌장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학내에 인권헌장 제정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인권헌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3. 인권헌장을 향한 학내의 목소리


  인권헌장을 향한 목소리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동성애 혐오뿐만 아니라 학내에선 무수히 많은 인권침해상황이 발생해 왔다.


  H교수 사태는 우리의 공동체가 얼마나 인권침해에 취약한지 보여주고 있다. H교수는 성희롱을 자행하고 자택의 곰팡이 제거와 양복 수선을 지시하며, 학생의 인건비를 갈취하기도 했다.[각주:10] 2016년 11월 사회학과 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이 ‘대책위원회’를 결성한 이후 많은 학생들이 H교수 운동에 동참했고 모든 사실관계가 인정되었으나 돌아온 것은 ‘해임’이 아닌 ‘정직 3개월’이었다. 2018년 7월 20일 <H교수 사건 대응을 위한 학생모임> 페이스북에는 비록 징계위가 ‘정직 3개월’을 선고하였지만 H교수 사건을 예방할 수 있는 구조적인 개선을 만들어나가게 되었음을 발표했다. 


  우리의 학교는 안전하지 않았다. 인권침해의 사실관계가 밝혀진 교수는 당당히 학교에 들어와서 연구를 할 수 있고 피해자는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학교에 내던져진 것이나 다름없다. H교수뿐만이 아니다. 이 끔찍한 일은 또다시 발생한다. H에서 A로 알파벳이 바뀐 것뿐이었다. 서어서문학과의 A교수는 피해자에게 원치 않는 접촉을 시도했고 졸업을 빌미 삼아 협박했다. 이런 악질적인 행위에도 인권센터는 3개월의 정직 처분을 결정했다. H교수 때와 마찬가지의 길고 긴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2019년 8월 31일, 마침내 교원징계위원회에서 A교수의 해임을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파면이 아니라 해임이었지만 우리는 H교수와 A교수 사건을 겪으며 학내가 인권무법지대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인권수호를 위한 바탕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였다. 


  H교수와 A교수 이후 우리 학내는 안전해졌는가. 1년도 채 되지 않아 음대 B교수, C교수의 성폭력 사건이 발생했다. B교수는 피해 학생의 숙소에 강제 침입하였고 수차례의 원치 않는 신체접촉 등의 가해를 저질렀으며 C교수는 피해자를 데려다준다며, 차에 태운 후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수차례 신체를 접촉하는 성폭력 가해를 저질렀다. 심지어 절망적이게도 학교는 C교수의 징계위를 피해자 몰래 시도하다 적발되었다. A교수 사건 당시 서울대학교 당국은 학생들이 A교수 연구실 학생공간 전환을 해제하는 조건으로 “앞으로 피해자에게 징계위에서 가질 수 있는 권한에 대한 공문을 발송하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피해자를 배제하고 가해자의 의견만을 참고하려고 했던 징계위의 시도는 약속을 이행하는 태도라고 보기엔 어려웠다.[각주:11] 학생들은 다시 연대했다. 2020년 11월 11일 보라색 우산 집회는 학내에서 끊임없이 발생하는 권력형 성폭력 사건을 규탄하고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학교를 만들기 위한 학생들의 노력이었다. H교수와 A교수의 파면을 외친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참담한 심정으로 이번엔 보라색 우산을 높이 든 것이다. 


  비단 권력형 성폭력 사건뿐만 아니다. 2019년 8월 9일 청소노동자 A씨가 휴게실에서 사망했다. 그 휴게실은 교도소 독방 1.9평보다 작은 1.06평밖에 되지 않았고, 그 방에는 에어컨도, 창문도 없었다.[각주:12] 휴게실이라는 단어가 무색하리만큼 비참했던 이 공간에서 A씨는 사망했다. “지병이 있었다더라.”, “환경 때문이 아니다.” 등 무수한 말들이 이 사건을 중심으로 모여들었지만 서울대학교 노동자는 안전한 환경을 보장받았는가, 적절한 휴게시간을 받았는가의 질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학교는 노동자에게 또한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인간이 반드시 보장받아야 할 기본적인 권리와 자유를 인권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학내에선 인권은 보장되고 있는가. 우리의 대학에선 건조한 언어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 건조한 언어들, 진실로 보호받지 못하는 우리의 인권을 향해 학생들은 연대하고 더욱더 목소리를 높였다. 2020년 9월 28일 서울대학교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 페이스북에는 인권헌장 제정을 촉구하는 카드뉴스가 게시되었고 인권헌장 릴레이 홍보사업 ‘인권열차’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동아리와 단과대, 학생들이 연대해가는 과정 속에서도 혐오세력은 ‘진정한 인권’이라는 혐오를 이야기하였고 그럴수록 우리의 연대는 더욱 단단해지고 인권헌장에 대한 열망은 깊어져 갔다. 학생들은 “서울대에 평등을 허하라!”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연대하며 혐오 표현에 대해 규탄했다. 학내 892개, 외부연대 94개의 연대가 인권열차의 길을 만들며 서울대학교가 더이상 혐오와 배제를 당연히 여기지 않기를 촉구했다. 알파벳 교수들, 아니 훨씬 더 오래전부터 발생해왔고 지금도 발생하고 있는 인권침해에 대해 우리는 이제 눈을 감지 않으려고 한다. 2020년 12월 27일, <그저 혐오하겠다는, 부끄러운 선언을>이라는 제목으로 게재된 대자보에서 우리는 더 나은 공동체를 말한다.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소명적 지성과 뜨거운 양심의 소리가 밝혀낼 시대를 들여다보자. 분명 그 시대의 교정은 누구도 자신됨으로 가해받지 않는, 평등하고 안전하기에 자유롭고 발전하는 공동체 모습을 띄고 있으리라.”[각주:13]

 

서울대학교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 - 인권열차 -

  수많은 집회와 투쟁과 눈물과 상처는 언제쯤 그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H와 A와 B와 C를 보며 다음은 어떤 알파벳이 우리의 학교를 떠들썩하게 만들지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봐야만 하는 것인가. 모든 알파벳이 채워질 때 비로소 변화가 찾아올 것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지와 약속이다. 더이상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게 하겠다는 의지와 우리 공동체 내 인권을 존중하는 문화를 위한 약속이다. 그리고 그 첫 단추는 인권헌장이다. 인권헌장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평등을 당연히 말할 수 있는 학교가 될 수 있도록, 서울대가 평등을 허할 수 있도록, 인권헌장에 대한 우리들의 연대는 지금까지 그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4. 인권헌장 제정을 촉구하며


  인권헌장의 조항을 읽다 보면 문득 하나둘씩 학내에서 일어났던 아픔의 기억들이 떠오른다. 그것은 내 친구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일면식 없는 먼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나는 인권헌장 제9조 2항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지위 또는 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하여 다른 사람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학업·연구 및 근무환경을 악화시키는 언행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가진다.”, 제10조 성적자기결정권,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동의하지 않은 성적 언행으로 인하여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받지 않을 권리를 가진다.”를 보고 권력형 성폭력 사건들이 생각났으며, 제8조 1항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신체적·정신적으로 안전하고 건강한 대학 환경에서 생활할 권리가 있다.”, 2항 “서울대학교는 구성원이 대학생활 전반을 안전하고 건강하게 영위할 수 있는 대학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를 보고 안전하지 못한 환경에서 끝끝내 일하셨던 서울대학교 노동자가 떠올랐다. 인권헌장에는 우리의 아픔이 새겨져 있다. 이 조항들이 만들어지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아파하고 슬퍼하였는가. 우리의 상처가 문서화될 때까지 우리는 얼마나 고통받았는가. 또 이 과정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상처받고 분노하였는가.


  학내의 많은 구성원들이 인권이 존중받을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싸워왔지만, 우리의 공동체는 아직 인권침해상황에 매우 취약하다. 기존의 인권가이드라인이 실효성 측면에서 부재한 것도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지만, 우리 스스로가 인권을 위한 책임에 대해 소홀히 한 경향도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마땅히 지켜져야 하는 인권이란 아무런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학내의 우리 모두가 인권을 수호하려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인권의 존중이 이루어지는 안전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권헌장의 제1조 (목적)에서는 서울대학교와 그 구성원의 인권 책무를 확립한다고 명기하고 있다. 즉, 인권헌장은 인권가이드라인의 실효성 측면을 보완하여 학내의 인권침해사례에 보다 책임을 갖고 접근하겠다는 의지의 선포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다시 목청 높여 인권헌장을 부르짖어야 할 때다. 누군가의 상처를 당연시하고 방기하는 언행에 책임을 이야기할 때다. 인권헌장은 과거 우리 공동체가 경험했던 아픔을 기록함과 더불어 우리가 만들어나갈 공동체에 대해서도 표명한다. 우리가 원하는 학교는 혐오가 만연한 학교인가. 성적자기결정권이 침해받는 학교인가. 안전한 환경을 보장받지 못하는 학교인가. 우리가 지향하는 공동체는 누군가의 상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서로가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 안아줄 수 있는, 각자가 자유와 권리의 가치를 알기에 책임에서 회피하지 않는, 사랑으로 가득 찬 공동체일 것이다. 우리의 공동체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인권헌장에서 뒷걸음질 치기에는 우리는 더이상 발 디딜 틈조차 남아있지 않다.  

 

 

 

 

펭로시

  1. 더 자세한 내용은 이은혜 기자, <반동성애 진영, 이제는 서울대 인권 헌장도 반대…좌표 찍고 온라인 공청회 난입해 댓글 테러>, 뉴스앤조이, 2020-10-20, 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1605 [본문으로]
  2. [국가 인권위원회] 성적지향을 인정하면 성도착증을 인정하게 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 자료를 참조; humanrights.go.kr/site/program/board/basicboard/view?currentpage=1&menuid=001002002001&pagesize=10&boardtypeid=13&boardid=7604898 [본문으로]
  3. 이은혜 기자, 위 기사. [본문으로]
  4. [동성애, 동성혼 반대 국민연합] blog.naver.com/nahs114/222117089208 [본문으로]
  5. [국가인권위원회] 성도착증과 성적지향의 차이점: humanrights.go.kr/site/program/board/basicboard/view?currentpage=1&menuid=001002002001&pagesize=10&boardtypeid=13&boardid=7604898 [본문으로]
  6. 이은혜, 위 기사. [본문으로]
  7. 과연 그런가? [본문으로]
  8. 즉, 행위의 실천자인 행위자(사람)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자를 배제한 행위만을 비난하기 때문에 정당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본문으로]
  9. 넓게는 사회. [본문으로]
  10. 김일환, <‘H교수 운동’, 끝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다>, 서울대저널, 2018-06-07; www.snujn.com/index.php?mid=news&category=117&document_srl=38586 [본문으로]
  11. 음대 교수 사건 대응을 위한 특별위원회 11.11 보라색 우산 집회 홍보 카드뉴스 [본문으로]
  12. 중앙집행위원회 인권연대국 정기인권 카드뉴스 04 [서울대학교 학내 노동권] [본문으로]
  13. [Facebook] 서울대학교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 참고 [본문으로]

 

1. 들어가면서


  코로나19가 한국에 상륙한 지 8개월이 지난 2020년 9월 초, 서울대학교는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을 지급했다. 지급대상은 등록금 본인 부담금이 발생한 자, 지급 금액은 등록금 본인부담금에 비례하여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장학금을 지급하게 된 배경에는 1학기 내내 있었던 등록금 반환 운동의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전국대학생네트워크는 설문조사를 통해 상반기 등록금 반환이 필요하다는 공통의 의견을 이끌어냈고, 서울대학교에서도 등록금심의위원회에 비공식적으로 학생위원이 참여하여 등록금 반환 논의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코로나19 특별장학금을 마냥 긍정적으로 바라보기엔 아쉬움이 있다. 우선 반환 형식이 ‘장학금’이 되면서, 등록금 반환 논의는 ‘코로나19라는 특수 상황에 따른 조치’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어려워졌다. 코로나 시국은 1년 넘게 이어졌고 장기적인 피해가 충분히 예상되는데, 그 이후 대학 교육 부담을 가계와 사회가 어떻게 나누어져야 하는지는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또한, 지급 금액 역시 정확히 어떤 부분에 대한 환불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실습수업이 있는 음/미대 학생들의 경우 다른 단과대 학생보다 더 많은 금액을 돌려받았지만, 애초에 등록금 중 실습비로 얼마나 더 내는지 알 수 없어서 돌려받은 금액도 합당한지 판단하기 어렵다. 즉, 등록금을 더 많이 내야 했던 이유도, 더 많이 돌려받아야 하는 이유도 소명되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장학금의 지급 이유인 ‘학업 고충 경감’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온라인 비대면 수업이 시행되면서, 에브리타임과 같은 학내 커뮤니티에는 비대면 수업으로 인해 발생한 각종 웃지 못할 사건들이 제보되었다. 마이크를 끄지 않고 화장실을 간 학생, 판서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수업 등 모두가 혼란스러운 시기가 이어졌다. 그리고 장소가 제한되고 사람들이 모이기가 어려워지면서 수업 외에 코로나19 이전에 할 수 있었던 여러 활동에도 제약이 생겼다. 이전과 비교했을 때 이러한 불편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왜 이 불편함이 하필이면 등록금 반환 요구로 이어졌을까? 생각해보면 이러한 문제는 등록금을 반환받을 학생 개인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불편함을 등록금 단 5~6% 반환으로 해결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 운동은 ‘공정한’ 등록금을 책정하는 데 집중하면서 그 바깥 논의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린 것은 아닌가?


  최근 다시 대학 등록금 인상이 거론되고 있는 상황은 예상 못 했던 바가 아니다. 대학은 코로나19로 예정에 없던 지출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그 부담을 등록금으로 덜려고 한다. 필자는 이에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과 등록금의 의미를 성찰해보려고 한다. 필자는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에 대해 교육저널 편집위원들과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이를 바탕으로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 지급에 내포된 허점들을 살펴보고, 부족하게나마 더 나은 논의를 위한 기반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2. 이 장학금은 어디에 쓰이는 장학금인고?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먼저 등록금 본인부담금이 발생한 학생들을 대상으로, 등록금 본인부담금에 비례하여 ‘긴급학업장려금’을 지급한다. 두 번째로, 한국장학재단 학자금지원구간 8구간 이하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1인당 50,000원을 일괄지급하는 ‘긴급구호장학금’이 있다. 이 장학금은 긴급학업장려금과 중복수혜가 가능하다.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이 지급된 맥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장학금 지급 공지에 나와 있는 ‘학업 고충 경감’이고, 또 다른 하나는 2020년 1학기 있었던 ‘등록금 반환 운동의 결과’이다. 후자의 맥락은 공지나 안내에 직접 드러나 있지 않지만, 장학금 지급 논의가 등록금심의위원회 학생들의 등심위 개최 요구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등록금 반환 운동과의 연결성을 떼놓고 볼 수 없을 것이다. 더불어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 중 긴급학업장려금은 학생이 등록금을 낸 것에 비례하여 장학금을 지급하는 형식으로, 등록금 일부를 돌려준다는 의미가 강하다.


  하지만 각각의 맥락에서 장학금을 살펴보았을 때, 이 장학금의 의미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필자는 이 장학금의 목적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임을 먼저 짚고 싶다. 우선 ‘학업 고충 경감’이라는 장학금의 목적이 학생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 교육저널 소속 학생 인터뷰에서는 ‘학업 고충 경감’이라는 장학금의 목적에 이의가 계속 제기되었다.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에서 1번은 등록금을 낸 만큼 돌려주는 것이고, 2번, 긴급구호장학금은 소득분위 8분위 이하인 학생에게 주어지는 장학금이잖아요. 그런데 1인당 5만 원씩을 그냥 일괄적으로 지원했는데 고충 경감 비용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것 같아요.

 

  모든 사람에게 보장된 게 아니라 신청한 사람만 받을 수 있는 것도 문제적인 것 같고, 국가장학금 받은 사람은 신청 대상이 아닌 것도 문제적인 것 같아요. (...) 등록금을 더 냈다고 고충이 더한 것도 아니고, 등록금 감면이 재정적으로 힘든 가정이 고충을 더 많이 겪었을 수도 있는데. 낸 거에 비례해서 준다는 게...


  위에서 설명한 장학금 지급 방식에 따르면 긴급구호장학금을 받지 못하는 9, 10분위 학생들을 제외하고 8분위에서 1분위로 갈수록 지원받는 장학금의 액수가 적어진다. 음/미대를 제외하고도 단과대별로 등록금 액수에는 차이가 있어서 구체적인 액수를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긴급학업장려금은 냈던 등록금의 5~6%, 8분위 이하부터 주어지는 긴급구호장학금은 50,000원 일괄 지급이므로 8분위부터 소득분위가 낮아질수록 적은 액수를 받으리란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소득 분위가 낮을수록 경제적, 사회적 여건이 어려우리란 점을 생각하면, 이러한 조치가 학업 고충 경감이라는 목적에 맞게 분배된 것인지 의문스럽다.


  또한 장학금 형식으로 등록금이 반환이 이루어졌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물론 장학금 신청 절차가 까다롭지 않아 지급 방식이 높은 장벽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무조건적인 지원이 아니라 학생이 직접 장학금 신청을 해야 장학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지원이 필요한 이들에게 장학금이 지급되지 않을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등록금을 낸 학생 전원에게 등록금을 반환하려는 의도가 충분히 반영되려면, 학교 측에서 무차별적으로, 전부 일정 금액을 돌려주는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 시기가 맞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특별장학금으로 책정한 금액을 학기 등록금에서 제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예외들을 따로 보완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장학금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학생 개인이 져야 하는 책임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경남대학교에서는 10만 원은 학업장려금으로 현금 지급하고, 2학기 등록 시 10만 원을 뺀 차액을 등록금으로 납부하는 방식으로 등록금을 반환한 바 있다.[각주:1] 


  결정적으로, 낸 등록금에 비해 장학금으로 지급된 금액이 많지 않다는 점도 짚을 수 있다. 학교 시설을 사용하지 못하면서 발생한 피해,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면서 생긴 애꿎은 지출을 고려하면 학교에서 장학금으로 지급된 금액은 턱없이 부족하다.

3. 학교의 재정에 관여할 수 있는 권리


  그렇다면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의 ‘등록금 반환’이라는 목적을 살펴보자. 등록금 반환 운동에서 화두가 되었던 것은 ‘비대면 수업이 진행되고 있음에도 등록금은 똑같이 낸다는 점’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구체적인 반환 금액을 제시하기 어려웠는데, 이것은 학생들이 비대면 수업을 하면서 무엇을 할 수 없게 되었는지, 그에 따라 학교에서 기존의 예산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등의 정보에 원천적으로 차단되어있어 발생한 문제이다. 분명히 비대면 수업을 진행하면서 학생들은 많은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등록금이 줄어들지 않은 구체적인 근거를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애초에 등록금 책정에 있어 전반적인 합의가 부족하므로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이 무엇을 보상하는 장학금인지 알기 어렵다. 서울대학교 홈페이지 자료실에 공개된 2020년 등록금심의위원회(이하 등심위) 회의록에 나타난 학교와 학생 측의 입장을 살펴보면, 학교 측은 학교 운영에 있어 적자가 발생하는 것을 근거로 등록금 인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학생 측은 등심위 이전에 이러한 적자가 발생한 예결산 안조차 제대로 검토할 수 없다. 단과대학에 학생회가 직접 예결산 안을 요구하면 본부에 요청하라 하고, 본부에 예결산 안을 요구하면 단과대학의 자율성 침해를 이유로 꺼리기 때문이다.[각주:2] 학생들은 학교 재정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음에도, 구성원의 권리–재정 운영과 집행에 목소리를 낼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다. 사실 ‘등록금을 반환하라’ 이상의 구체적인 요구를 하지 못한 까닭 역시 대학 재정의 불투명성에서 기반한 것일 수 있다. 학생은 학교 재정 관련 정보에 상당 부분 차단되어있어 학교에서 예산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도 알기 어렵고, 학교에 예산 사용 방향을 제안하기도 어렵다.


  이렇게 장학금이 무엇에 대한 보상인지 구체적으로 알기는 어렵기 때문인지, 장학금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했는지 인터뷰이에게 질문했을 때 나온 답변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장학금 자체에 대해서는 ‘금전적 어려움을 겪는 학생에 대한 구호’ ‘적응하기 힘든 상황에 대한 위로’, ‘종합대학으로서 누릴 수 있는 다양한 기회에 대한 보상’이라는 이해가, 지급 배경에 대해서는 ‘코로나19로 발생한 잉여 재정을 다시 반환하는 차원’, ‘(조금이라도 돈을 줌으로써) 등록금 반환 논의를 무마하기 위한 시도’ 등의 해석이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차원의 해석이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에 부합하는 상황은 한편으로는 ‘등록금과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에 대한 합의가 부족하다’는 결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당장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등록금 책정과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이다. 학생 측에 공개된 자료만으로 학생들은 자신의 학습권이 얼마나 침해당했고, 등록금에서 어떤 부분을 돌려받아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상황이다. 즉, 이 장학금을 받는다고 해서 학생은 “등록금 ATM이 아니”[각주:3]라고 주장했던 배경은 바뀌지 않는다. ATM으로만 남지 않으려면,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낸 등록금이 어떻게 사용되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하고, 학교의 구성원으로서 재정의 사용에 대해서도 합의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4. 코로나19 특별 장학금, 그 바깥의 문제


  등록금에 관한 의사결정 과정과는 별개로,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이 보완해주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다. 등록금 반환은 중요한 의제이지만, 이 의제만으로 2020년 1학기에 학생들이 직면한 위협에 대처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앞서 ‘2. 이 장학금은 어디에 쓰이는 장학금인고?’의 말미에 언급되었듯이 낸 등록금에 비해서 장학금의 액수가 적기도 하고, 학생들이 겪는 학업 고충의 문제는 학생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등록금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개인이 아닌 대학 공동체 안에서 해답을 찾아야 하는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앞서 긴급학업장려금의 지급 방식에서 알 수 있듯이, 이번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은 등록금을 낸 만큼 비례하여 지급하고, 직접 신청한 학생만 받을 수 있었다. 신청 방법이 아주 까다로운 것은 아니지만, 학교 측에서 적극적으로 등록금을 돌려주려는 모양새는 아니었던 것이다. 한 인터뷰이는 낸 등록금에 비례해서 지급된 장학금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또 다른 의문점을 제기했다.


  비대면수업을 함으로써 수업을 받기 어려운 학생들이 있었을 텐데, 집에서 줌으로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공간 확보가 안 되는 사람이 있잖아요. 그런 학생들을 위해서 비대면 수업을 지원해줄 공간이나 이런 걸 마련해줘야 하는데, 공지도 제대로 안 되었고 늦게 마련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낸 등록금에 비례하여 지급된 긴급학업장려금과 5만 원씩 지급되는 긴급구호장학금으로 보완하기 힘든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소득분위에 따라 등록금을 내는 액수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고려했을 때, 공간이나 기기가 마련되지 않아 학업에 장애가 생기는 이들은 등록금을 덜 낸 이들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지급하게 된 까닭은 등록금 반환 논의에 따라 일괄적으로 모든 학생들에게 일정 금액을 반환해야 했기 때문일 수 있지만, 장학금의 학업 고충 경감 목적과 실효성을 따져보면 분배 방식과 지급 방식에는 문제가 있다.


  아울러 비대면 수업으로 수업의 질이 저하되었다는 불평은 나오는데, 수업의 질을 어떻게 향상할 것인가를 말하는 목소리는 너무 적다.


  장학금에 대한 논의는 활발했는데, 수업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한지 논의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특별위원회 같은 것을 마련해서 학생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해서, 실질적인 변화를 마련할 수 있는 창구를 마련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수업의 질과 관련된 논의가 진척되지 않는 까닭을 생각해보면, 학생들과 교수자의 의사소통이 쉽지 않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의사소통의 어려움은 단순히 비대면 강의로 전환된 상황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비대면 강의로 인한 불편함, 시험 방식, 과제 부담 과중 등 학생들의 불만은 학생회 설문 조사를 통해서 표출되었을 뿐, 수업 중에 수강생들에 의해 직접 전달되기는 여전히 어려웠다. 코로나 이전부터 교수와 학생의 권력 차이, 강의 평가 제도의 부실 등 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즉각적인 피드백이 어려운 상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즉, 원래도 있었던 문제들이 비대면 수업으로 전환되면서 또 다른 피해를 만들어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수업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32억 원이라는 거금을 투여했지만 정작 학생 개인에게는 음/미대 기준 낸 등록금의 15~16%, 나머지 단과대 학생들에게는 낸 등록금의 5~6% 정도만 반환되었다. 인문대 학부생이고 소득분위 10분위인 필자 기준으로는 142,000원을 받을 수 있었다. 이 금액은 필자가 등록금으로 내야 했던 비용과 비대면으로 전환되면서 지불해야 했던 부차적인 비용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금액이 적은 것도 문제지만, 개개인에게 전달된 이 장학금으로는 온라인 비대면 학교생활의 질적인 문제를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도 큰 문제이다. 이에 대해서 한 인터뷰이는 금전적인 지원이 다른 방식으로도 이루어져야 함을 지적했다.


  특별장학금이 개인에게 주어지고 있는데, 동아리 차원에서 총학생회에서 운영비가 남아서 동아리실을 꾸미는 지원금으로 지원을 해줬잖아요. 그런 식으로 동아리 활동도 많이 죽어가고 있으니까, 기프티콘이라도 해서, 동아리별로 온라인 모임을 장려하는 식으로 지원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금전적으로든, 활동을 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든, 동아리, 학생회 등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지원이 있다면 학교 내 여러 집단에 속해있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5. 대학 교육은 누가, 어떻게 부담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할 때


  비록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이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어내기에 금액이 너무 적고 방식에 한계가 있더라도, 코로나19로 인한 고통을 학생과 분담하겠다는 의미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무기력감이 있었어요. 누구의 탓이 아니다 보니, 감수 해야 할 몫인 것 같고, 내가 해결해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 같아요. 학교에서 이걸 해결해줄 수는 없겠지만, 간접적인 방식으로 지원해주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독감 주사를 학교 보건소에서 지원해줬는데, 이 시국에 우리의 건강을 신경 써주고 있구나, 간접적으로도 관심을 표현해주는 것 같아서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대학이 코로나19 시국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음에도 장학금을 지급한 것은 대학이 사회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장학금은 비록 학부생들에게 굉장히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는 했지만, 지난 학기 동안 학생들이 받았을 고통을 학교도 같이 부담하겠다는, 복지 차원에서의 장학금이라는 공통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필자는 등록금 반환 의제만 지나치게 대표된 상황을 문제시했지만, 등록금이 가장 긴급하게, 제일 먼저 논의될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개인에게 지워지는 등록금 부담이 너무 큰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2017년을 기준으로 고등교육에 정부/민간 투자의 상대적 비율을 살펴보면, OECD 평균이 ‘68.2(정부):28.6(민간)’인 반면, 한국은 ‘38.1(정부):61.9(민간)’으로 민간의 투자 비중이 큰 편이다. GDP 대비 고등교육의 민간 재원 비율은 1.0%로 OECD 평균 0.4%를 훨씬 넘는다.[각주:4]


  코로나 이전에도 등록금 부담이 컸다는 배경을 고려하면, 등록금 반환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코로나19로 인한 전방위적 피해 속에서 ‘학생 개인과 학생이 속해있는 가정에 주어지는 등록금 부담이 지나치다’는 불만의 표시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하여 한 인터뷰이는 대학 교육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이상적으로는 대학교육도 초중고처럼 사회에서 부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당위성도 분명히 있어요. 실제로 그런 게 합의가 많이 되어있다고 생각하고요.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의 지위 향상을 위해서 대학이 작동하지만, 이상적으로나마 추구하는 대학의 목적은 사회 발전, 비판적 지식인 양성 이런 게 있을 텐데, 그러한 대학의 존재 이유나 목적을 따져본다면 초중고보다 더 국가에서 책임지고 감시하고 (고등교육을 받는 학생들을) 양성할 필요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의 대학은 학벌과 취업으로 이어진다. 2019년 대한민국 청년층(25~34세)의 고등교육 이수율은 69.8%로 OECD 국가 중 2위를 차지했다.[각주:5] 많은 부담을 지면서도 고등교육을 이수하려는 이유는 대학 졸업장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일하기 위해 꼭 필요한 자격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대학은 단순한 인력 양성소가 아니다. 대학은 지식을 생산하는 기관으로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다.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에 많은 대학 구성원들이 시국선언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의 정당성을 강화했듯이, 대학은 한국 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강력한 공동체이다. 대학은 그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하는 공동체이고, 사회 역시 대학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대학에 역할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적인 측면으로든 이상적인 측면으로든 한국에서 대학이 가지는 의미와 대학의 존재 이유, 등록금 부담 주체는 새롭게 고민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은 사회 전반에 걸친 고통에 대학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마리일 수 있다. 이번에 서울대학교가 특별장학금을 지급한 것으로부터 알 수 있는 사실은 대학 등록금이 대학 구성원들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등록금은 가정에서부터 국가까지 여러 공동체가 함께 얽힌 일이고, 그 공동체들이 같이 고민해야 할 일이다.

6.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은 어디로 가야 할까?


  그렇다면 코로나19 학부생 특별장학금은 2학기에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1학기의 혼란스러웠던 상황은 지났지만 2학기가 된 후에도 코로나19는 잠잠해지지 않았고, 그에 따른 학부생들의 부담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2021년 등심위에서 등록금 인상이 언급된 것을 살펴보면 이 상황에 다시 등록금 반환을 요구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이번 등심위에서도 작년, 2020년 등심위와 많이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학교 측은 산학협력단 및 발전기금으로부터의 전입금이 감소한다는 사실과 양극화 심화를 완화할 소득재분배가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등록금 인상을 요구했다. 정작 학생 측은 전입금 감소에 대한 명확한 자료를 볼 수 없었고, 학교 측에서 주장하는 소득재분배는 등록금을 인상하지 않았을 때와 비교하면 효과적이지 않다. 더불어 피해의 강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코로나19는 사회 전체에 광범위한 피해를 줬다. 마찬가지로 힘든 시간을 겪었을 소득 분위가 높은 가정이 무리 없이 인상된 등록금을 부담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


  2020년 1학기 뜨겁게 타올랐던 등록금 반환 운동은 특별장학금으로 어느 정도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얼마나 효능감 있었을까? 이 시점에서 할 말을 잃어버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여전히 등록금이 어떻게 책정되고 사용되는지 모르고, 좋지 못한 교육환경과 코로나19라는 재난의 이중고를 겪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등록금과 대학 교육의 질을 비교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코로나19가 드러낸 대학에서의 불평등과 대학 구성원으로서 학생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무엇보다 항상 필요했던 것이지만, 이번을 기회로 사회 속 대학의 역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월영

  1. '경남대, 사립대 첫 등록금 반환 결정', 도영진, 경남신문, 2020.08.03.(기사입력), 2021.02.24.(기사인용), 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330982. [본문으로]
  2. 서울대학교 2020 등록금심의위원회 회의록 1~3차, 서울대학교-대학소개-자료실, www.snu.ac.kr/about/downloads?md=v&bbsidx=125915 [본문으로]
  3. '"학생은 등록금 ATM 아냐" 들불처럼 번지는 등록금 반환 요구', 김선호, 연합뉴스, 2020.05.06.(기사입력), 2021.02.24.(기사인용), www.yna.co.kr/view/AKR20200506144800051 [본문으로]
  4. '등록금에 허리휘네... 민간 부담 대학 교육비, OECD보다 30%p 높아', 김수현, 2020.09.08.(기사입력), 2020.02.24.(기사인용), www.yna.co.kr/view/AKR20200908069500530 [본문으로]
  5. '한국 OECD 국가 중 청년 대학 진학률 2위', 전유진, 중도일보, 2020.09.09.(기사입력), 2021.02.24.(기사인용), www.joongdo.co.kr/web/view.php?key=20200909010003028 [본문으로]

  코로나로 인적 끊긴 대학에도 어김없이 시끄러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번 [대학현안]은 코로나19 특별장학금과 인권헌장을 둘러싼 논의를 분석하고, 이를 교육저널의 시선으로 풀어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권리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장이 되었으면 합니다.

 

<당연함을 위한 행진> 소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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