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학기에 인간과 동물이라는 교양 수업을 들었다. 수업을 들었던 이유는 인간-자연 혹은 인간-동물 관계가 현실에서 어떻게 얽혀있는지 공부하고 공존이 가능한 대안적인 관계를 상상해보고 싶어서였다. 수업 과제 중 에세이를 쓰는 과제가 있었는데, 주제는 ‘내가 기억하는 특별한 동물’이었다. 과제를 쓰기 위해 고민을 하던 중, 문득 기억에 남는 특별한 동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동물에 대한 피상적인 기억은 있다. 밥상 위에 올라온 고기, 산책할 때 보았던 목줄 채워진 강아지, sns에 올라오는 친구들의 반려묘,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아쿠아리움에서 보았던 돌고래 등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과제를 쓰면서 ‘우리가 과연 연결된 관계가 맞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상호 연결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말을 교과서에서, 뉴스에서 항상 보아왔다. 나와 너가 연결되어 있고, 나와 동물이 연결되어있고, 나와 자연이 연결되어있음을. 하지만 그 관계는? 우리는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끼고 있을까? 혹은 인지하고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의문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우리는 ‘우리의 관계를 인지할 수 있는 사회 속에 살고 있는가’, ‘관계의 연결성을 강조하는 교육을 받고 있는가’ 라는 의문도 들었다. 물론 환경교육이라는 이름 하에 어느 빙하조각에 겨우 매달려있는 북극곰과 죽어있는 새의 모습이 담긴 영상을 보거나 전세계 사람들이 모두 불을 끄면 지구의 온도가 몇 도 내려갈 수 있다는 수업을 받긴 했지만, 나의 선택이 타자에 미치는 영향을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교육 혹은 나의 삶과 타자의 삶 사이에 놓인 구조를 배울 수 있는 교육은 많이 없었다. 오히려 나의 경우, 공식적인 수업 시간보다 일상에서의 배움을 통해서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교육에서 인간과 자연(혹은 동물)의 연결된 관계를 어떻게 다루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안적인 교육 아이디어를 제안해보고 싶다. 단순히 죄책감과 동정심을 바탕으로 한 교육이 아니라, 나의 일상 속에서 우리의 관계를 인지하고 관계에 대한 책임을 갖는 교육. 윤리적으로 맞다 그르다를 판단하는 교육을 넘어서 주어진 현실 속에서 실천함과 동시에 현실 너머를 상상하는 교육. 그러한 교육들을 나의 경험을 중심으로 애기해보고자 한다.


교육과정 안에서 인간과 동물, 인간과 자연의 연결

 

  교육에서 우리의 연결을 어떻게 다루는지 살펴보자. 교육과정 내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련한 내용은 각 교과교육범위에 부분적으로 담겨있다. 특히 사회와 윤리 교과서에 관련 내용이 담겨 있다. 사회과 교과서에서는 사회 현상에 대한 통합적 관점의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각주:1] 통합사회 동아출판 교과서의 경우, 통합적 관점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주제 탐색 활동에 멧돼지 도심 출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만화 형태로 멧돼지 도심 출현 빈도가 증가한 까닭에 대하여 국립공원 관리 공단 직원, 담당 공무원, 생태학자, 환경 단체 회원의 의견을 묻고 있으며, 마지막 컷에는 “난 뭐, 내려오고 싶어서 내려오는 줄 알아?”라며 멧돼지의 입장(?)을 그리고 있다. 짧은 만화를 보고, 학생들에게 ‘멧돼지와 인간 중에 누가 피해자일까?’, ‘멧돼지와 인간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라고 질문을 던진다. 이는 사회현상을 바라볼 때 여러 주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시간적, 공간적, 사회적, 윤리적 관점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하나의 환경 문제가 결코 단선적인 원인과 방안으로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림1. 주제 탐색 활동_멧돼지 도심 출현 만화>


환경 문제는 인간 사회의 문제?


비인간동물의 입장에서 혹은 생태계 차원에서 환경 문제를 접근해보자!


  사회 교과서 2단원 [자연환경과 인간]에서는 자연환경이 인간의 생활 양식에 미치는 영향, 인간의 자연환경 활용 방법, 자연재해가 인간 생활에 미치는 긍·부정적인 영향, 자연을 바라보는 인간의 관점, 인간과 자연의 바람직한 관계,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과 실천 방안 등을 다루고 있다. 자연환경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아쉬운 점이 남는다. 주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비교적 인간중심적인 관점으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환경 문제 해결의 필요성으로 지구 온난화, 사막화, 열대림 파괴 등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물론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가 대기 오염 및 각종 폐기물과 폐수 등의 환경 문제를 발생시킨다는 내용이 교과서에 있으나, 이 역시 시민들의 건강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수준이라고만 서술되어 있다. 환경 문제 해결의 필요성을 논의할 때 인간중심적인 관점이 강조된다. 인류의 생존을 위해서, 혹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위해서 환경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 공동체의 범위를 ‘인간 사회’로 한정짓는 주장일 수 있다. 학습의 기본적인 자료가 될 수 있는 교과서에서 환경문제를 단순히 인류의 문제로서만 접근한다면 이는 더 넓은 범위의, 혹은 경계 없는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교과서에 환경의 변화를 인간이 아닌 동물의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는 내용이나 전체 생태계 차원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활동이 추가되면 좋을 듯하다. 예를 들면, 인간과 축산동물의 역사적 관계를 성찰하는 학습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인간 사회는 물리적 생존을 위해 전통사회부터 수렵과 채집을 해왔다. 생존을 위해 자연물을 이용했으나 자원을 제공해준 자연에 감사를 표하며 제사를 지내기도 하고 동물을 신으로 모시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고기는 ‘공장식 산업’의 형태로 생산된다. 이윤 논리 하에서 동물의 고통은 고려되지 않는다. 더 많은 닭가슴살과 닭다리를 생산하기 위하여 닭은 호르몬 주사를 맞고, 비대해진 몸을 버티지 못해 다리가 부러진다. 뒤돌아볼 수도 없는 좁은 공간에서 사육되는 닭들이 스트레스를 받아 서로 할퀴면 상품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부리와 발톱을 자른다. 알을 낳을 수 없는 수평아리는 비닐 속에서 생매장된다. 돼지의 경우, 모돈은 일생을 임신과 출산의 반복 속에서 보내다 죽으면 소시지가 된다. 출산을 너무 많이 한 탓에 생고기로 먹기엔 질기기 때문이다. 이 글의 목적은 공장식 축산업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기에 이만 줄이지만, 우리가 교과서에서 학습하는 인간과 자연(혹은 동물)의 관계는 극히 피상적이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우리가 왜 관계에 대한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한 다채로운 학습이 단순히 ‘환경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당위적이고 모호한 내용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대안적인 학습으로 공장식 축산업 구조 하에서 인간은 어떠한 방식으로 이익을 얻고, 동물은 어떠한 방식으로 삶을 빼앗기고 착취당하는지를 비롯해서 인간 생활 곳곳에 존재하는 비인간 생명체의 삶이 어떠한지, 우리는 이에 어떠한 관점과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등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림2. 주제 탐색 활동_‘자연물을 소송의 주체로 볼 수 있는가’ 만화>

  교과서에서도 흥미롭다고 생각한 내용이 있었는데 사회과 중 자연에 대한 인간의 다양한 관점을 탐구하는 단원에서의 주제 탐색 활동이었다. 해당 활동은 자연물을 소송의 주체로 볼 수 있는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경부 고속 철도에서 천성산을 관통하는 터널 건설 계획이 발표되었는데, 환경 단체는 천성산에 사는 도룡뇽을 원고로 내세워 정부 고속 철도 공사를 중지하는 가처분 소송을 하였다. 천성산은 22개의 습지와 12개의 계곡이 있으며, 1급수 환경 지표종인 꼬리치레도룡뇽의 대규모 서식지이기 때문에 생태적 가치가 높은 곳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터널을 뚫으면 천성산의 습지가 메말라 도룡뇽이 살 곳을 잃게 된다. 하지만 대법원은 고속 철도 터널 공사가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으며, ‘도룡뇽’은 사건을 수행할 당사자 능력이 없는 자연물이기 때문에 소송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룡뇽의 권리를 주장하는 환경 단체와 도룡뇽을 원고로 인정하지 않는 재판관 사이에는 어떤 시각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보고 도룡뇽을 원고로 인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작성해보는 활동[각주:2]이다. 관련해서 필자는 대법원이 무엇을 근거로 고속 철도 터널 공사가 환경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했는지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언급되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그것 역시 인간중심적인 시각에서 판단되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건을 수행할 당사자 능력이 있는 사람만이 소송의 주체가 될 수 있는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굉장히 새로운 자극을 줄 수 있는 교육이다. 이러한 활동은 인간에 의해서, 인간중심적으로 개발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비인간동물의 입장을 혹은 생태계 차원을 어떻게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반영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볼 수 있는 핵심적인 활동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이 단지 주제 탐색 활동에만 있는 것은 아쉬웠다. 시간 상 보통 이러한 활동을 하지 않고 넘어가거나 하더라도 10분 정도의 짧은 시간만을 할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제 탐색 활동처럼, 교육에서 환경 문제를 다룰 때 비단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다룰 것이 아니라 비인간동물과 자연과의 연결성 차원에서 고민하는 활동이 늘어난다면 ‘환경 문제’를 다룰 때 우리 공동체를 확장하여 보다 다채로운 학습이 가능할 것이다.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x


당위적인 내용의 나열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으로 현실에서 작동하는 ‘환경 정치’ 토론하기!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도 보다 다층적인 고민을 할 수 있도록 교과서에 관련 내용이 추가되어야 한다. 가령, 사회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세계 각국은 환경 관련 제도와 정책을 강화하고, 기업은 친환경 제품을 개발하고, 시민 사회는 정부의 환경 정책과 기업의 환경 윤리 준수 등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하고, 개인이나 가정에서는 생활 속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환경 보호를 실천하는 노력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당위적인 말의 나열보다 세계와 기업과 시민 사회, 개인의 실천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가능할지에 대해서 보다 치열하게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수업 시간에 토론을 통해 가능하겠지만, 사실 한정된 수업 시간 안에 심층적인 토론을 진행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교과서에 관련된 세밀한 내용이 실린다면 짧은 시간 안에 보다 풍부한 토론이 가능할 것이다. 가령, 범세계적인 환경 관련 제도와 정책에는 무엇이 있고 어떠한 내용이 담겨 있는지, 친환경 제품을 개발하는 기업은 어떤 기업이 있고, 국가는 친환경적인 시장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시민 사회는 어떠한 환경 정책에 어떠한 이유로 반대하고 있는지, 개인은 일상 속에서 어떠한 노력을 할 수 있고, 그러한 노력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등의 내용이 보다 현실적으로 담긴다면 학생들이 교과서를 보고도 환경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이고, 얼마나 사회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고, 내가 어떠한 실천을 해야 하는지를 보다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소제목에서는 이를 ‘환경 정치’라 이름했다.) 또한 환경 문제를 ‘환경 문제’라고 통틀어서 볼 것이 아니라 보다 세심하게 다룰 필요가 있다. 쓰레기, 폐수 등의 오염 물질 배출 또는 지구온난화 또는 사막화가 동물이나 생태계에 혹은 자연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일지 원인과 대상과 결과를 분석하며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이 인류의 생존에 영향을 미친다면 보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인류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추가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단순히 인류의 문제가 아니라 비인간동물의 입장에서 혹은 생태계 차원에서 환경 문제를 접근하는, 당위적인 내용의 서술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이 각 주체에게서 어떻게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고 그것은 왜 필요하고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보는 관점에서 교과서가 보완되어야 한다.

윤리적 성찰과 더불어 현실 속 인간과 자연(혹은 동물)의 연결 관계 살펴보기!


  생활과 윤리 교과서에서는 과학 기술, 동물 복제, 동물 실험, 육식 등의 문제를 윤리적 관점에서 접근한다.[각주:3] 원전 탐구에서 현대의 윤리 문제에 대한 피터 싱어의 성찰을 다루며 동물을 그저 우리가 먹을 고기를 생산하는 기계로만 대우해도 좋은지, 자전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데도 지구 온난화를 초래하는 자가용을 이용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관한 입장을 비교적 다양한 관점에서 서술하고(인간 중심주의, 동물 중심주의, 생명 중심주의, 생태 중심주의), 환경 문제에 대한 윤리적 쟁점을 다루며 비교적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하여 보다 윤리적으로, 보다 비인간동물과 생태계 차원을 고려하여 서술한다. 요나스의 책임윤리와 레건의 ‘삶의 주체’ 개념, 테일러의 ‘목적론적 삶의 중심’ 개념이 등장하여 왜 우리가 비인간동물의 삶을 고려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보다 심도 있게 생각할 기회를 마련한다. 또한 의식주 윤리와 윤리적 소비를 다루며 일상에서 환경 문제의 극복 방안을 실천하는 자세를 함양하도록 한다. 하지만 아쉽다고 생각한 부분은 인간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행위가 자연 혹은 동물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관계의 맥락에서 서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가령, 채식 위주의 식습관을 가져야 한다면 왜 우리가 채식을 해야 하는지, 우리의 육식과 동물의 삶이 어떠한 구조로 연결되어 있는지, 우리의 음식이 어떻게 밥상에 올라오는지에 대한 고민과 학습이 필요할 것이다. 에너지 절약을 습관화하며 친환경적 소비를 생활화하는 것 역시 왜 에너지를 절약해야 하는지, 에너지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에너지가 생산되는 구조를 친환경적으로 바꾸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의 관계와 구조에 대한 보다 심도있는 고민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바르고 고운 말을 합시다’와 같은 당위적인 명제에서 그칠 수 있다. 일상에서 분리수거를 잘 하자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많은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우리는 하루에 얼마나 쓰레기를 배출하는지, 우리가 분리수거한 쓰레기는 어떻게 재활용되는지, 어디로 가는지 등에 대한 고민과 학습이 진행된다면 학생들이 보다 적극적으로 환경 문제를 나의 문제로 인식하고 대안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도덕과 교육(생활과 윤리는 도덕과 교육의 일환이다.)의 목표와도 연결된다. 교육부에서 고시한 도덕과 교육과정에 따르면, 도덕과 교육의 총괄 목표는 ‘자신에서 타자, 사회와 공동체, 자연과 초월로 이어지는 각 영역의 핵심 가치를 내면화하여 인성의 기본 요소를 실천적으로 확립하는 것’[각주:4]이다. 나와 타자의 관계, 나와 자연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도덕과 교육에서 단순히 관계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서 현실 속 인간과 자연의 구체적인 관계의 맥락과 연결성에 대한 설명이 추가된다면 이는 오히려 윤리적 성찰을 바탕으로 관계에 대한 실천적 태도를 함양할 수 있는 좋은 교육이 될 것이다. 윤리적 성찰과 더불어 인간과 자연(혹은 동물)의 역사·정치·경제·사회·문화적 연결 관계를 톺아볼 때, 우리는 대안적인 인간-자연(동물) 관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와 자연(혹은 동물)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의 중요성


  앞서 환경 문제를 다룰 때, 인간중심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과 당위적 차원으로만 서술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히려 우리의 행위에 담긴 정치성을 통해서 나와 자연(동물)의 관계를 연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상품의 ‘생애’를 보는 과정이 필요하다. 내 밥상에 있는 고기가 어떠한 과정으로 식탁에 왔는지 상상하는 것. 내가 사용하는 전기가 어디서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어 내개 왔는지 상상하는 것. 그 길에 얽힌 사람과 자연을 떠올리는 것. 내가 사용하는 물건이 혹은 나의 행위가 무엇에 연결되어 있는지 관계망을 그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을 하지 않으면, 모든 것들은 분리되어 존재할 뿐이다. 닭은 그저 치킨으로, 페트병은 그저 페트병으로. 상품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와 처리되는 폐수와 그것이 여러 생물에게 미치는 영향은 그저 가려질 뿐이다.


  상품의 ‘생애’를 보는 과정은 나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차원에서 역시 중요하다. 인간과 자연의 연결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나의 행위가 환경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와 더불어 나의 행위는 어떠한 생산 양식과 사회 문화적 환경 속에서 행위되고 있는지를 고민할 수 있다. 그러한 환경 속에서 나는 능동적인 주체로서 어떠한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인간을 포함한 생태계 차원의 실질적인 대안 마련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가령, 플라스틱의 생애와 관련해서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고 유통되고 소비되고 버려지는지를 살펴보아야 ‘과도한 플라스틱 생산’과 관련한 정책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정책이 단순히 인간중심적인, 혹은 보여주기식 정책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플라스틱 생애의 전과정을, 인간의 생산과 소비 등이 자연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전과정을 톺아보아야 한다. 이러한 과정을 추적하여 어떠한 친환경 정책을 도입할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기업의 책무로도 단순히 친환경적 제품을 생산하는 것만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상품 생애의 전과정이 자연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자연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을 어떻게 최소화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상품의 생산 과정에서 인간과 인간 외 주체들의 삶을 어떻게 고려할 것인지, 상품 생산을 위해 사용하는 재료는 무엇을 쓸 것인지, 국가는 친환경적인 산업 구조 혹은 친환경적인 생활 방식 마련을 위해 어떠한 정책을 펼 것인지 등을 고민해야 한다. ‘환경에 대한 기업의 사회적 책무’는 상품의 생산, 유통, 소비, 폐기 등 전과정에서 고려되어야 하며, 이것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연결할 때 가능할 것이다.


  환경 문제를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파악할 때 우리는 환경 문제의 진정한 대안을 알 수 있다. 단순히 태양광 발전을 확대하자는 주장이 아니라, 어떠한 맥락에서 어떤 정도까지, 어디에 태양광 발전소를 짓자는 주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내가 먹는 어떤 것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나에게 오는지 살펴보자. 단순히 고기를 먹지 말자는 주장이 아니라, 고기가 어떻게 생산되고 축산업은 어떤 구조 속에 존재하며 그 안에서 인간과 비인간동물의 삶이 어떠한지 생태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살펴보고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 우리가 쓰는 전기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우리가 버린 플라스틱이 어디로 가는지 알아보자. 우리의 일상이 타자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아보며 ‘환경 문제’에 접근해보자.


교과과정을 넘어서 교육현장에서 나와 자연의 관계 맺기의 가능성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현장에서 나와 자연의 관계 맺기가 어떻게 가능할지 조심스레 제언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나는 ‘비건 실천’을 한지 1년 정도 되었다. (meat free Monday를 포함하면 1년 반 정도 지났다.) 재작년 가을에 ‘아무튼, 비건’이라는 책을 읽고 공장식 축산업의 실태를 알았다. 나는 책을 통해 고기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수많은 동물이 우리의 음식이 되기 위해 어떠한 고통을 겪고 있는지, 공장의 노동자들은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지, 그것은 우리의 건강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인간과 축산동물의 관계는 어떻게 단절되어 있는지 등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진실을 마주했다. 거대한 육식 산업 하에서 이윤 논리로 작동되는 공장을 지금 당장 멈출 수 있는 것인지 질문하기조차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했던 다짐은 무뎌지지 말자는 것이었다. 다른 존재의 고통을 상상하고, 그들의 고통이 우리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인지하는 것. 이것이 내가 책을 읽고 나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다짐이었다. 그렇게 meat free Monday를 시작했다. 비록 편의점에 있는 대부분의 식품(컵라면, 컵밥, 과자 등)에 쇠고기가 들어가고, 시간과 돈이 없을 때 그것을 먹는 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하지만, 불필요한 육식을 최대한 줄여보자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밥약’을 할 때는 비건 식당에 가서 비건 음식을 먹으며 동물권, 환경, 건강 등의 주제에 대해 이야기 나눴다.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관련 영화를 보고 함께 고민했다. 쇠고기 생산의 대표 주자인 패스트푸드점에 비건 버거가 도입되기를 열망하면서도 네슬레가 대체육 시장을 점령하는 것의 함의를 생각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비건 실천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한다. 밥상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고, 타자와의 관계성을 회복하는 것. 그리고 그 고민과 생각을 여러 차원에서 정치화하는 것. 이는 정부, 기업, 광고회사 등 여러 주체들의 공모와 공장처럼 굴러가는 축산업의 구조를 밝혀내고 식품 생산 체계의 대안을 상상하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소수자의 권리, 건강, 비인간동물, 환경 등 모든 의제를 아우르는 고민으로 확장될 수 있다.


급식도 배움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채식급식을 통해 음식의 생애를 상상하자!


  더 나은 인간과 동물(자연)의 관계를 상상하기 위해서 나는 채식급식이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급식 중 대부분의 반찬에는 아마 동물성 재료가 들어갈 것이다. ‘육식’급식이 일반적인 현실 속에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채식급식을 함으로써 비인간동물의 고통이 우리의 미각을 위해 필요한지, 우리는 어떠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는지, 대안적인 식단이 가능한지 등을 고민해볼 수 있다. 물론 단순히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대안적인 인간-동물(자연) 관계 상상하기’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채식급식은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어떻게 나의 식탁에 온 것인지 알고 먹자는 노력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나에게로 오는 과정에서 자연에 미치는 영향, 수많은 노동자의 존재, 동물의 고통을 고려하자는 것이며, 이러한 관계망 안에 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생명체의 존재를 고려하자는 것이다. 급식도 배움의 시간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전북교육청은 2011년부터 채식급식을 시작했다. 광주 풍령초등학교는 한 달에 한 번 ‘고기 없는 날’을 갖고 있는데, 80% 이상의 학생들과 90% 이상의 교사들이 만족했다.[각주:5] 채식급식은 채식에 대한 관심과 환경에 대한 깊은 고민으로 이어졌다. 이어 경남, 서울, 인천, 울산교육청도 채식급식을 도입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채식급식의 확대는 학생들이 만들어낸 변화이기도 한데, 작년에 울산여고 학생의 헌법소원이 있었다. 비건 실천을 하고 있는데 학교에서는 고기반찬이 제공되니까 채식급식의 선택지를 만들어 인권을 보장하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헌법소원 이후 국회 차원의 답사와 기후변화포럼 등 여러 단체의 현장 방문이 있었고 울산교육청은 ‘매일’ 채식급식의 선택지를 제공하겠다고 말했다. 이미 여러 학교에서 채식급식을 시행하며 급식 시간에서 식윤리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채식급식은 분명 다채로운 인간과 동물(자연)의 관계를 상상하는 대안적인 방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친환경적인 교육 현장 만들기!


  교육현장을 보다 친환경적으로 만들려는 노력 역시 다채로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상상하는 대안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 중 하나로 교내 태양광 발전소 설립을 상상해볼 수 있다. 재생가능에너지 사용의 필요성이 사회적으로 증대되면서 많은 교육현장에서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하였다. 학교 운영기금 중 일부를 투자하기도 하고, 학교 구성원과 주민들이 협동조합을 만들어 발전소를 설립하기도 했다. 서울시의 경우, 2016년까지 초·중·고교 및 대학교 328개 시설이 태양광 발전 시설을 설치했다.[각주:6] 비록 대부분 발전 설비 용량이 낮아 경제적으로 환경적 목적이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태양광 발전소를 교내에 설립하며 우리가 쓰는 전기가 어떻게 생산되는지 학습할 수 있고, 학생들이 협동조합에 가입하여 자치(스스로 통치하다)의 의미를 깨우칠 수 있다. 단순히 태양광 발전소를 설립하는 것을 넘어서 추가적인 배움이 가능한 프로그램이 필요할 것이다. 고등학교 때 ‘인문학 학당’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활동 일부로 ‘착한 전기는 가능하다’라는 책을 읽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전기가 생산되는 방식, 그것이 인간과 자연에 미치는 영향, 비합리적인 전기 생산을 통해 이윤을 탐하는 자들, 대안적인 전기 생산 방식 등에 대해서 처음으로 고민해보았다. 우리가 쓰고 있는 전기가 왜 ‘나쁜 전기’인지, ‘착한 전기’가 가능할 수는 없을지에 대한 구체적인 고민을 책을 읽으며 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움의 기회가 특별한 프로그램을 통해 산발적으로 마련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속에 자리할 수 있도록 교육 현장의 확장과 전환이 필요하다.


정치적이고 일상적인 의제에 대해 토론하기!


  교과서에서는 환경 문제 해결을 위한 방안을 개인적 차원, 사회적 차원, 지구적 차원 등 세 가지 측면으로 나눈다. 개인적 차원에서 에너지 소비를 줄이고, 사회적 차원에서 친환경 기술을 개발하고, 지구적 차원에서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지구촌 차원의 원칙과 실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단순히 당위적인 설명을 넘어서 보다 정치적이고 일상적인 의제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 에너지 소비를 왜 줄여야 하는지, 우리가 에너지 소비를 줄이면 그것은 현재의 ‘나쁜’ 에너지 생산 방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친환경 기술 개발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에너지가 어떻게 생산되고 어떻게 전달되는지 전혀 모르는데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하면 그러한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 기후 위기라는 사회적 문제 해결을 위해서 태양광 발전소 설립을 권고했는데, 도시에서 사용되는 전기를 어느 시골 마을이 감당해야 한다면, 혹은 사회적 필요가 아니라 기업의 이윤 추구를 위해서 지어진다면, 혹은 발전소를 짓는 과정에서 노동자의 안전 장치가 미비하고 고용이 불안정하다면 그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책임없는 당위적인 문장을 가르칠 게 아니라, 환경 관련 의제들에 대해서 보다 정치적이고 일상적으로 토론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을 단일한 두 주체로 상정하지 않을 것!


  인간과 자연의 대안적인 관계를 고민함에 있어서도, 그것이 단일한 두 주체의 분리된 관계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다양한 정치와 관계가 존재함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재생가능에너지 전환을 위한 에너지 정책이 동물의 권리와 생태계에 어떠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고민함과 동시에 그것이 사회적으로 필요한지, 도입하는 과정이 민주적으로 진행되었는지,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되었는지, 지역 주민들이 살아오면서 자연과 맺은 관계, 지식, 느끼는 감정이 존중되었는지 등을 고려해야 한다. 인간과 자연(동물)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다양한 문제를 고려할 수 있는, 그러한 배움의 공간이 필요하다. 이는 교내에 태양광 발전소를 설립하는 것뿐만 아니라 관련한 책을 읽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책 저자나 환경운동가의 강의를 듣거나, 에너지 발전소 현장에 직접 가보는 등 여러 배움의 형태로 가능할 것이다.


  두서 없는 글이었지만 정리하면 환경 문제를 다룰 때 단순히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 차원에서 혹은 도덕적·당위적 차원에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나의 행위와 나와 연결된 관계에 대한 책임을 느낄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교과서의 보완을 통해서도, 혹은 교육현장의 확장을 통해서도 가능할 것이다. 급식시간을, 학교의 곳곳을, 방과후 시간을 배움의 시간으로 만들자. 채식급식을 통해서, 태양광 발전소를 통해서, 학교 끝나고 같이 책을 읽고 영화를 보는 시간을 통해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해보자. 이러한 배움은 분명 보다 다채롭고 대안적인 인간-자연(동물) 관계를 상상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불어넣어줄 것이다. 우리의 고민이 담긴 실천이 나와 나의 주변과 더 나아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각주:7]

 

 

 

 

고슴도치뇽

  1. 위 글에서는 [2015 개정] 고등학교 통합사회 동아출판 교과서를 참고하였다. [본문으로]
  2. 육근록 외 6명, [고등학교 통합사회], 동아출판, 2018, 50쪽. [본문으로]
  3. 위 글에서는 [2015 개정]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미래엔 교과서를 참고하였다. [본문으로]
  4. 교육부 고시 제2015-74호 [별책 6] 도덕과 교육과정, 10쪽. [본문으로]
  5. 박선영, <[뉴스업]"채식급식 왜? 최고의 조기교육은 '미각' 교육">, 노컷뉴스, 2020.11.04., www.nocutnews.co.kr/news/5440983. [본문으로]
  6. 최홍식, <학교 옥상이 태양광발전소로 바뀌고 있다!>, 인더스트리뉴스, 2017.01.24., www.industry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673. [본문으로]
  7. 이 글의 많은 부분에서 필자가 인간과 동물 수업에서 과제로 냈던 글을 인용하였다. [본문으로]

출처 : 청소년 기후 행동

  <청소년 기후 행동의 2020 기후위기 대응 어워드>에서 교육청은 ‘기대이상(賞)’을 받았다. 수상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1. 11개 시/도 교육청의 ‘탈석탄 금고 선언’[각주:1] 2. 경남, 울산 교육청이 주도하는 채식급식 선택권 도입 3. 서울시 교육청의 생태전환교육 계획안이다.

 

  위와 같은 교육청의 변화에는 부족한 점이 많다. ‘탈석탄 금고 선언’이 과연 석탄 사업을 줄이는 실효적인 방안으로 작동할지 모호하고, 일부 교육청의 생태전환교육과 채식급식 선택권의 도입이 전국의 환경 교육을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러한 변화는 청소년 기후 행동의 이야기처럼 환영해야 하는 변화이다. 이 글에서는 마지막 수상 이유인 서울시 교육청의 생태전환교육 중장기계획안을 함께 읽으며 교육청의 변화가 정말 ‘기대이상(賞)’인지, 앞으로의 환경 교육에 우리는 무엇을 기대해야 할지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생태전환교육의 중심과제


  서울시 교육청의 생태전환교육 중장기계획은 학교 교육과정의 전환, 교육환경 구축, 생태전환 교육 추진체계 및 협력기반 확충이라는 세 개의 중점 과제를 중심으로 계획되어 있다.

 

서울시교육청 [생태전환교육 중장기('20~'24) 발전 계획]

  서울시 교육청이 현재 목표로 하는 변화의 내용으로 교육청의 행동이 기대 이상이라 보기는 힘들다. 교육과정 측면에서 생태전환교육의 연 2시간 이상 의무화는 세부적인 체계와 생태전환교육 교수자, 실효성 있는 가이드라인의 마련 없이는 이름만 있는 정책으로 끝나기 십상이다. 교과서 개발 역시 지금도 독도, 달서구처럼 많은 교과서들이 개발되었지만 쓰이지 못한 것을 고려한다면, 교육과정을 뒷받침 없이 새 교과서 개발만으로는 큰 변화를 만들기 어렵다.


  교육환경의 변화 역시 한계를 가지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환경교육을 공교육에 요구하는 이유는 환경에 대한 지식이 국민의 보편적인 지식이 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로 찾아가는 생태전환교육이나 소수의 탄소배출제로 학교, 생태전환학교, 생태전환실험교실(리빙랩), 청소년 생태전환활동 지원은 모두 의미 있는 지원이다. 그러나 이미 환경에 관심 있는 청소년, 몇 안 되는 탄소배출제로 학교의 학생을 이외의 넓은 범위의 학생에게 닿을 수 있는 방안은 아니다. 오히려 이전의 ‘국제 중점학교’, ‘SW 교육 선도학교’ 등 많은 학교들이 기존의 것과 큰 차이가 없는 교육과정을 운영하거나, 한두 개의 특별반에서만 다른 교육과정을 운영했던 것을 생각하면, 생태전환학교의 학생들조차 제대로 된 변화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또한, 탄소배출제로학교를 ‘환경친화적 생활 태도를 기르기 위해 자원과 에너지 절약을 생활화하고, 쓰레기를 감축하며, 친환경 교통을 이용하는 학교’로 명명한 이상 기존에 진행 중이던 쓰레기 적은 학교, 잔반 없는 날, 학생에게 책임을 전가하던 환경교육과 크게 다르지 않다. 생태전환교육 계획안의 다른 요소들 역시 도입, 수립, 확충, 지원 등 그 대상과 목표가 아직 명확하지 않고 한정된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이러한 한계는 생태전환교육이 1. 서울시 교육청으로 범위가 한정되어 있으며 2. 대부분 의무나 필수가 아닌 일부를 대상으로 진행되는 교육이며 3. 환경을 바라보는 교육의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문제점은 학생과 학부모의 선호에 의해 시범학교에서 시행되는 채식급식 선택권 도입 역시 동일하게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청소년 기후 행동이 준 ‘기대이상(賞)’이 교육청이 아닌 서울시 교육청 혹은 일부의 생태전환교육과 채식급식 선택권을 시행하는 일부 학교만 받아야 하는 상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한다.


  세 번째 문제를 살펴보자면 지금의 생태전환교육은 체험의 범위와 대상 학생은 늘어났으나 기존과 같은 방법의 환경교육을 고수하고 있다. 서울시 교육청이 연구하고 제시한 생태전환교육의 예시들은 농사 체험, 화단 가꾸기, 쓰레기 줄이기 등이다.[각주:2] 이는 농사꾼의 피땀이 어린 쌀알을 어떻게 남기냐던 잔반 없는 날 정책과 농촌체험의 일환인 고구마 캐기, 분리수거 교육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서울시 교육청이 제시하는 화단의 식물을 화분으로 옮겨 교실에 전시해두는 잘 된 생태전환교육의 예시는 생태계의 일부로서의 인간이 아닌 자연을 통제 아래에 두는 인간 중심 자연관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기존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교육의 양을 늘리는 것만으로 충분한 환경교육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의 환경 교육이 이대로 나아가도 괜찮은가.

2. 새로운 시각의 환경 교육


  흙을 만지고 자연을 체험해 보는 생태전환교육의 예시들은 길어야 6년의 유예밖에 없는 급박한 환경 문제 앞에서는 느리고 효과적이지 않은 교육으로 보인다. 교육과정 속에서 반복되던 수많은 쓰레기 섬의 이야기, 지구 온도가 몇도 올라가면 해수면이 몇cm 상승한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긴급함 없이 평소처럼 자연을 느껴보자 쓰레기를 줄여야 한다 물을 아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교육이 어느 정도 실효성을 가질 수 있을까.


  환경 문제는 당장의 실천을 요구하는 문제이다. 오히려 환경 교육을 한다고 나누어주는 손수건, 에코백, 텀블러 만드는 자원 하나 줄이는 것이 더 환경 보호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환경친화적으로 변화하기보다는 교실의 깨끗한 환경을 위해 밀대보다 물티슈를 선호하고 급식의 질이 개선되며 고기와 음식물 쓰레기, 일회용품의 이용이 늘고, 학생들의 체험을 위해 수많은 석유 화학품으로 만든 교구들이 도입되고 있는 지금은 흙을 만져볼 때가 아닌 당장의 자원 활용과 환경 교육을 그 밑바닥부터 바꾸어야 하는 시기이다.

 

# 학생들에게 이론만을 가르치고 죄책감을 심어주는 교육은 그 한계가 분명하다.

 

  학생들의 노력 여하와 관계없이 환경 보호는 실제와 교육의 괴리, 환경의 부족으로 좌절된다. 우리가 가르치는 환경을 지키는 방법은 실제로 실효성이 없는 경우가 많다. 환경 교육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이야기되는 분리수거 역시 그렇다. 많은 학교에서 분리수거함을 설치하지 않았고, 학생들의 분리수거 노력과 관계없이 모인 쓰레기를 다시 섞어서 배출한다. 이제 겨우 투명 페트병 분리배출을 시작한 상황에서 종이컵, 컵라면 용기와 같이 환경부가 분리배출 하라고 가르치는 많은 재활용 쓰레기들을 많은 부분 실제로 재활용되지 않는다. 국가가 재활용되었다고 표시한 양 역시 쓰레기를 태워 대기오염과 함께 에너지를 생산하는 SRF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학교 안에서 아무리 배운 내용을 실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더라도 시장의 변화 없이 학생들에게 환경보호의 책임을 맡길 수는 없다. 수도권을 제외하고는 광역시에서도 채식 식당은 찾아보기 힘들고, 제로웨이스트 상점은 서울 내에서도 손에 꼽는 수만큼만 존재한다. 소수의 환경친화적 기업의 제품을 사용하고자 택배를 시키면 이동과정에서 탄소를 배출하며 포장재와 테이프가 사용된다. 친환경 포장재를 사용한다는 기업을 선택적으로 사용하더라도 환경부가 제공하는 친환경이라는 마크와 달리 다른 포장재와 쓰레기 처리 과정에서 똑같이 처리되어 환경파괴를 일으킨다면 진정한 친환경 제품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이런 상황에서 학생들이 죄책감을 느낀다 하더라도 무엇을 할 수 있고, 어떤 변화를 낳을 수 있을까.


# 환경 교육은 학생이 환경을 바꾸고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 내는 힘을 길러주어야 한다.


  학교 내에서 수업하고 환경친화적인 삶을 산다고 하더라도 외부의 변화 없이는 어떠한 긍정적인 전환도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학생들보다 기업과 시장이 하는 환경파괴가 훨씬 심각함을 알고 있다. 현재의 국가 정책으로는 탄소 배출량을 정책에 맞추어 이상적으로 줄인다고 하더라도 1.5도의 목표가 아닌 3도의 상승을 예고할 뿐이다. 100개의 교실에서 플라스틱 통으로 업사이클링을 하는 것보다는 플라스틱 통을 사용하는 업체에 환경친화적인 재료로 바꾸라고 요구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학생 1,000명이 환경 다짐을 작성하는 것보다 한 기업에 환경 다짐을 요구하는 것이 더 영향력이 크다. 그렇다면 진정 환경을 위해 키워져야 할 학생은 자신뿐만이 아닌 학교, 지역사회, 기업, 국가를 향해 너도 친환경적으로 바뀌라고 요구하고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 학생, 외부를 변화시키는 학생이다. 


  나와 학교를 넘어선 변화를 요구하는 환경 교육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웃, 동물, 환경을 위한 변화를 청소년들이 스스로 생각해서 행하는 제인 구달의 뿌리와 새싹(Roots & Shoots) 환경 운동이 시작된 지는 이미 30년이 지났다. 이미 청소년 기후 행동으로 교육계의 변화를 이끌어 낸 청소년들은 행동하는 환경 교육을 받을 준비가 되었다. 더하기가 무엇인지 알아도 실제로 계산을 할 수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듯이 태양광 패널의 원리를 알고, 친환경 에너지 활용을 익혔더라도 실제로 이를 적용하지 않으면 교육은 의미를 잃어버린다. 우리에게는 자연과 친해지고, 지겨운 이야기를 반복하는 이론의 교육이 아닌 학교와 지역사회에 요구하고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낼 교육이 필요하다.

3. 생태전환교육의 희망


  다행히 서울시 교육청의 생태전환교육 중장기계획안의 연차별 과제 추진계획 중에는 희망을 걸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교육과정 전환계획 중 2022년의 ‘중교등학교에서 환경 필수선택과목지정’, 교육환경 구축 중 2024년의 ‘채식선택급식 전면 시행’, ‘청소년 생태전환 활동 지원’이다.


  환경을 필수과목으로 지정한다면 계획과 이름만 남고 사라진 과거의 많은 교육과 다르게 실제로 넓은 범위의 학생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수 있다. 아직 환경 과목이 어떤 내용을 포함할지 필수선택과목지정이 어느 정도 범위로 이루어질지, 필수선택과목의 배치는 어떻게 될지, 실제로 실행할 수 있는 정책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런데도 환경에 관한 지식이 지금 당장 학생들이 알아야 하는 지식, 정말 필요한 지식임을 인정하고, 모든 의무교육 대상자들에게 전달하려는 노력이기에 보편적 교육을 가능하게 한다. 다만, 교육 안의 내용 선정이 지금의 인간 중심적이고, 긴급하지 않고 학생에게만 책임을 물으며 미래를 희망차게 그리는 선에서 그치지 않도록, 선택 요소가 필수적인 지식을 제하지 않도록 구성할 필요가 있다.


  채식선택급식 전면 시행은 채식을(이) 친환경을 위한 길임을 교육청에서 인정하고, 학생을 자신의 음식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임을 인정하며, 채식의 중요성을 재고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이제껏 채식은 당연한 생태계의 순리를 거스르는 오만이나 동물의 입장에 과하게 공감하는 프로불편러들의 이야기로만 여겨지곤 했었다. 학교에서 급식에 선택권을 제시한다는 것은 채식이 동물권만이 아닌 환경의 문제에 관한 권할 수 있는 권리임을 학생들과 교직원을 포함한 모두에게 알려준다. 또한, 채식을 일상 속에서 접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육류 생산 과정, 메탄가스의 발생, 산림의 파괴와 같은 연결된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변화를 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여전히 채식 식단이 정해진 금액 안에서 양질의 단백질을 제공할 수 있을지, 선택권을 제공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학생들과 학부모가 정말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건강 상태를 고려하여 채식을 선택할 수 있을지, 선택이라는 이름 하에 음식물 쓰레기가 늘어나는 정책이 되지는 않을지 하는 여러 걱정거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모두가 채식을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 속에서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청소년 생태전환 활동 지원은 청소년이 주체적으로 환경과 관련된 행위를 하는 것을 증진한다는 부분에서 의미를 가진다.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생 본인이 다짐을 하고 쓰레기를 줄여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그렇기에 환경 교육은 주변을 바꾸고, 학교를 바꾸고, 지역사회와 국가를 바꿀 수 있는 학생의 역량을 길러주는 생태전환 활동이 필요하다. 학생들이 직접 마을의 식물 생태계 변화를 분석하고 유해 외래종을 제거하여 생태계를 원래의 상태로 돌려놓았던 뿌리와 새싹 활동이나, ‘쓰레기 없는 세상을 꿈꾸는 방’에서 시작하여 매일 유업이 제품의 빨대를 없애도록 만든 빨대 반환 운동 등이 학생들이 할 수 있는 좋은 생태전환 활동의 예시이다. 무엇을 생태전환 활동으로 정의할 것인지, 학생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보장해줄 것이며, 기존에 환경에 관심이 없던 학생들까지 활동하게 만들 유인책은 무엇을 제공할지 같이 아직 논의되지 않았고 합의가 필요한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환경과 관련하여 청소년이 선택하고 행위 할 수 있는 주체로 보고, 그 행위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활동 지원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어떤 환경 교육을 추구해야 할까. 청소년 기후 행동은 교육청에 꾸준히 탈석탄 금고를 요구했다. 이는 교육이 비단 학생들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사회의 변화를 이끌고 사회에 영향을 주며 함께 변화해야 함을 이야기한다. 앨빈 토플러는 '기업은 100마일, 시민단체는 90마일, … 학교는 10마일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환경에 대해 학교가 기업의 1/10의 속도로 변화한다면 우리는 지구를 돌이킬 수 없을 때가 되어야 환경의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환경의 필수과목화와 채식선택급식 전면 시행, 청소년 생태전환 활동 지원이라는 생태전환교육 계획들이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이 세 가지 부분에서 교육이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환경 교육은 기존의 교육을 조금 더 많이 조금 더 깊게 시행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사회보다 앞서 환경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고, 사회에 새로운 요구를 하고 변화를 이끌 학생들을 길러내야 한다.


  교육청의 행보가 ‘기대이상(賞)’을 받은 것은 사회의 변화와 함께했기 때문이다. 지난해의 탈석탄 금고 선언은 11개의 교육청만이 참여한 것이 아니라 전국 56개의 자치단체와 교육청이 함께 참여한 선언이었고, 그 덕분인지 지난해, 하나, 우리, 신한, KB, NH농협이 ESG 경영[각주:3] 을 선택하고 관련 조직을 신설하는 등 은행 정책에 변화를 주고 있다. 특히, 우리, 신한, 농협은 저탄소 정책에 동참하고자 하는 의사를 직접적으로 내비쳤으며, 하나는 상반기 탈석탄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KB는 탈석탄 금융을 선언했다.[각주:4]  교육에서 채식 선택을 권리로 인정하고 채식에 대한 인식이 변화된 덕분인지, 병무청은 올 2월부터 병역판정검사 시 신상명세서에 채식주의 여부를 표시할 예정이며, 이 경우 부대에서 입영자에게 채식주의 음식을 제공하도록 한다고 발표했다.[각주:5]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서울시 교육청은 의미 있는 한발을 떼었고, 2020년의 교육의 변화와 함께 사회의 변화는 조금씩 일어나고 있다. 서울시 교육청을 넘어 모든 교육의 변화를 위해 생태전환교육과 환경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참고자료]

강은지, <“수거된 페트병 재활용률 절반도 안 돼”>, 동아일보, 2019.02.20., www.donga.com/news/article/all/20190220/94200392/1
권상국, <중·고교생들 "학교 오면 분리수거 잘 안해요">, 부산일보, 2012.06.08., www.busan.com/view/busan/view.php?code=20120608000101
고유선, <서울 학교에 '채식 급식' 도입하고 환경문제 교육 강화한다>, 연합뉴스, 2020.06.17., www.yna.co.kr/view/AKR20200617052200530?input=1195m

이유주현, <학교 분리수거 ‘낙제점’>, 한겨레, 2005.07.19., www.hani.co.kr/arti/area/area_general/51284.html
서울특별시교육청, <푸른하늘의날 캠페인 - 나날이 변하는 지구의 일상, 자연생태계를 배우다!>, 2020.9.17., www.youtube.com/watch?v=x8UtFl7yqGU

최예린, <전국 56개 자치단체·교육청 ‘탈석탄 금고’ 선언>, 한겨레, 2020.09.08., www.hani.co.kr/arti/area/chungcheong/961270.html#csidx7507921c2ad129795d589ccc830a9c5.

김효인, <비닐 분리수거해도... 80%는 재활용 못하고 태워>, 조선일보, 2020.09.01., www.chosun.com/national/2020/09/01/MMXAD73KE5G3VFT4G4MJZOZHSM/
청소년기후행동, <전국시도교육청에게, 멸종위기 청소년들이 보내는 편지>, 청소년기후행동, 2020.06.25., www.ncge.or.kr/bbs/board.php?bo_table=pbs1&wr_id=88&page=5

로렌츠 크나우어, <제인 구달>, 오드, 2010.

 

 

 

 

채미

  1. 예산의 보관과 활용에서 석탄발전에 투자하지 않는 은행을 우대하겠다는 선언 [본문으로]
  2. 이성임, <[언북초] 생태교육 애란심기 행사 실시>, 서울특별시강남서초교육지원청, 2020.12.4., gnscedu.sen.go.kr/FUS/BO/110/BOV11.do?board_seq=45019

    윤신원, <‘고기 없는 날’을 이끈 학생들, 학생들을 바꾼 교육의 힘>, 서울시 교육청 생태전환교육 포럼, 2020.6.18.
    천주영, <현장연구팀 최종 연구 결과 보고서 : 지역사회와 연계한 생태전환교육 운영 방안 연구>,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 2020.12.31.
    강선일, <진정한 생태전환, 학교텃밭에서 시작된다>, 한국농정, 2021.1.1., www.ikp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42887 [본문으로]

  3. Environment, Social, Governance의 약자로 기업이 환경과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두고, 범과 윤리 준수하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목표로 경영을 함을 이야기한다. [본문으로]
  4. 김형일, <[K-Jump 2021] ESG경영 선택 아닌 필수...은행권, 조직 신설로 본격화>, 한스경제, 2021.1.1., www.sporbiz.co.kr/news/articleView.html?idxno=505879 [본문으로]
  5. 강중모, <軍 입영자, 신상명세서에 '채식주의자' 선택 가능>, 파이낸셜 뉴스, 2020.12.27., www.fnnews.com/news/202012271443330855 [본문으로]

  환경 교육의 필요성은 전혀 새로운 주제가 아닙니다. 1962년 《침묵의 봄》이 발표된 이후 세계적으로 환경에 대한 최소한의 지식과 관심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끝없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학교는 국어, 영어 등 다양한 과목에서 환경 문제를 다룹니다. 하지만 우리의 환경 교육이 과연 충분히 올바른 방향으로 생태계와 함께 사는 길을 이야기하고 있나요? 함께가 아닌 인류가 살아남는 길, 기업과 사회와는 관계없이 학생만이 하는 실천, 지금이 아닌 먼 훗날의 일만을 이야기하지는 않나요? 환경 교육에는 지금 당장 인간과 동물과 생태계가 함께 사는 또 다른 길이 필요합니다.

 

<함께 사는 길> 소개 이미지

 


1. 들어가며


  교육은 학습을 꿈꾸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 학습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학습은 그저 ‘교사가 가르친 내용을 학생 혼자 정리하고 공부하는 것’ 정도로 축소되어 생각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많은 고등학생이 경험하는 야간자율학습에서 학습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그리고 야자 시간에 학생들이 무엇을 하는지를 떠올려보면 쉽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습은 이렇게 좁게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학습이란, 그저 교육의 객체인 피교육인으로써 정해진 내용을 이해하려는 활동이 아니라 교육을 활용하는 배움의 주체로서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일상화된 ‘교육과 학습의 경도된 위치성’이 문제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왜곡된 학습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교육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교육과 학습의 차이는 학습인이라는 행위자의 주체성에 근간을 둔다. 교육은 교육인(주체)이 피교육인(객체 혹은 비非-주체)에게 행하는 것이고, 학습은 앞에서의 피교육인이 객체의 지위를 탈피하고 스스로 주체가 되어서 배움을 행하는 것이다. 둘은 명백히 다른 것이지만 괴리된 것은 아니다. 서로는 서로를 만들어내고 강화한다. 그러나 지금의 교육은 학습과 동위에 서지 않고, 위에 올라서서 학습을 관리·감독하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오히려 교육은 학습과 동등한 것에서 더 나아가 아래에서 학습을 받치고 선 모양새가 되어야 한다. 


  교육은, 교육을 학습에 활용하고자 하는 학습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도구적 기능을 수행해야 함과 동시에 피교육자로 하여금 어떠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배우고, 실천을 촉발함으로써 그가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목적론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어야 한다. 상술한 ‘교육이 학습을 꿈꾼’다는 것은 후자와 연결되는 것일 테다. 그러나 작금의 교육은 위의 역할을 경시한 채 국가 주도에 따라 도구적 기능만을 중점적으로 수행하기에 문제적이다. 이는 교육이라는 단어의 어원에서 알 수 있는 교육의 본래적 의미와도 멀어져 있다. 교육education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educo'는 ‘밖으로 꺼낸다’라는 뜻을 갖는다. 이는 피교육인의 선천적인(혹은 후천적인) 잠재 능력을 끄집어낼 수 있게끔 돕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자 본질이라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이에 반해 지금의 교육은 안에서 바깥으로 꺼내는 것이 아닌, 외부 지식(필요한지조차 불분명한)을 안으로 삽입하는 것에 불과한 행위를 관성적으로 반복할 뿐이다.


  이제 교육은 지금까지 무반성적으로 유지하고 있던 계급적 지위를 내려놓아야 한다. 이는 단순히 교육자 개인 차원에서 교권을 약화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아니라, 교육과 학습 간의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교육은 학생을 내려다보던 절대적 우위를 내려놓고, 학습자를 지탱하고 서 있는 아래의 위치로 겸허히 내려가야 한다. 따라서 교육은 학습을 꿈꾸며, 그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보조적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2. 한국 교육의 현주소


  지금 한국의 교육은 어디에 있는가? 대다수의 한국 학생들은 국가의 교육 기관이 편성한 교육과정에 따라 동일한 교재를 사용하며 같은 내용을 배운다. 그리고 그 내용은 실생활(예를 들어 공과세 납부하는 법이라든가)과 괴리되어있으며, 학생 개인의 인격적 성장 등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시험에 출제할 수 있는 내용을 가르치고, 그를 바탕으로 산출한 성적으로 학생을 선발할 뿐이다. 교육이 정말 이런 것에 불과한가? 우리가 막연하게 떠올려볼 수 있는, 스승과 제자 간의 유대와 그로부터 비롯되는 인간으로의 성장과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가? 지금의 교육은 어딘가 기형적이다. 결국 지금의 교육은 자신이 수행해야 하는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셈인데, 그 이유는 앞서 언급했듯이 ①교육이 도구적 기능만을 중점적으로 수행한다는 점에서 비롯되며, 더불어 ②그 내용 역시 국가에 의해 규정되고 강요됨으로써 학생 개개인에 맞추어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심화된다. 

2.1 ‘교육-학습의 패러다임 & 평가중심 교육관 & 관문 사회’의 연결고리

 

  지금의 평가 중심의 도구적 교육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계속해서 수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사회에서 교육은 학습에 대해 절대적 우위를 점한다. 이에 따라 교육인와 피교육인의 관계에서도 동등성이 보장되지 못하는 부차적인(그러나 매우 중요한) 문제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교육-학습의 권력적 관계는 근본적으로 평가 중심 교육관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는데, 교육이 학습을 평가하면서 학습은 교육에 종속되는 것이다. 낙오자를 필연적으로 생성하는 교육 아래 학습자들은 교육을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이러한 평가 중심의 교육관은 관문 사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예를 들어 명문 대학이나 로스쿨 등, 사회적으로 선망받는 특정 집단에의 진입은 시험이라는 관문에서 좋은 성적을 매김 받아야지만 가능하고, 이러한 시험 ‘교육>학습의 패러다임’-‘평가중심 교육관’-‘관문 사회’로 이어지는 관계는 서로를 강화한다. 선후 관계를 따져본다면 관문 사회가 평가 중심 교육을 유지시키는 원인이 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터인데, 흥미로운 점은 관문 사회가 형성된 배경에 다시금 평가 중심 교육을 놓아볼 수 있다는 점이다. 즉 평가 중심 교육이 다시금 관문 사회를 강화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서구 근대 국가들은 양질의 균일한 노동자(혹은 시민)를 양성해내기 위해 교원을 양성하고 일률적인 ‘근대’ 교육을 시행했다. 이와 같은 근대 교육은 일본을 통해 한국으로 유입되었는데, 당시 부국강병을 위해 서구 사회를 모방하고자 했던 일본이 메이지 유신 때의 저명한 교육자 후쿠자와 유키치가 그의 저서 <학문에의 권유>에서 주장한 바에 따라 국민교육을 시행하였고, 이후 대한제국 역시 일본을 모방해 ‘근대화’된 교육 제도를 정착시켰다. 이를 통해 기존의 개인의 수신修身을 기본으로 하는 공부를 탈피하고 근대적 국민국가의 ‘국민’을 양성하기 위한 국가 주도의 전국단위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지금의 교육부는 이러한 국민교육을 수행하기 위해 제도화된 교육을 학교에 지시하는 공간이며, 학교(혹은 교사 개인)는 교육의 동일한(*‘동등한’이 아니다) 질을 보장하고 수행해야만 하는 공간(혹은 직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기능주의적인 교육은 일종의 투자로서 이해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공교육은 국가 자본이 투입된 투자이며, 국가 유지와 존속에 필수적인 시민을 양성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자연히 교육의 내용 역시 국가의 관점이 견지된(최소한 국가에서 배워야 한다고 지정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더불어 이렇게 제도화된 교육은 전인격적 교육을 실현하기보다는 규정에 따르는 양적 교육을 시행할 수밖에 없는데, 이에 따라 교육의 목적론적 기능보다는 도구적 기능이 중시될 수밖에 없고, 규범보다는 기능이 강조되고, 교육은 학습에 앞서게 된다. 정리하자면 근대 교육의 도구적 성격으로 인해 교육이 본연의 목적을 잃고 국가적 목적에 따라 운영됨에 따라, 정작 배움에서 학생이 소외된 것이다.


  문제는 시대적 흐름이 바뀌고, 국가적 위기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국민교육을 시행했던 19세기~20세기 초중반을 지나 국가적 대치 상황이 상당히 약화된 현대 사회로 이행하면서 지금과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한국은 식민지 상황이 끝나고(더 나아가 전쟁과 개도국으로의 시기까지 끝나고) 이제 기존의 문제를 해결해볼 만한 여력이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국가 주도 교육 운영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교육은 사회 내에서 개인의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경쟁이 강화되는 문제 상황에도 불구하고, 더 나은(인간적인 혹은 교육 본연의 목적에 가까운) 방안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입시제도를 세부화하고 평가를 강화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경쟁과열 상황에 일조하고 있다. 즉 지금의 교육은 예전의 부국강병을 위한 도구적 기능을 넘어, 경쟁을 통해 우수한 잠재적 노동 인력을 키우고 선발할 수 있게끔 교육체제를 구상하여 시행하고, 입시를 위한 평가지표를 제공하는 기능까지 악착같이 수행하면서 강화된 도구성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대학은 공교육에서 제공하는 이러한 지표를 이용해 편리하게 학생들을 선발하고, 기업도 마찬가지로 대학 교육에서의 성적과 개인의 스펙 등을 고려해 사원을 선발한다. 이렇게 인간성을 버린 도구적 교육과 사회의 연결고리 안에서, 사람들은 경쟁자보다 더 나은 조건을 갖추려 노력하고, 교육의 평가 시스템은 점점 냉정하고 정교해지며, 사회의 관문은 점점 더 도달하기 어려운 것이 되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이 속에서 우리가 꿈꾸는, 학생을 위하고 학습을 꿈꾸는 교육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저 관문 사회가 만들어낸 평가 중심 교육 속에서 경쟁하고, 우리가 복속됨으로써 강화되는 평가 중심 교육이 다시 관문 사회를 강화하는 끊임없는 순환 고리를 망연히 지켜볼 뿐이다. 

2.2 공정성 담론과 교육


  위에서 언급한 문제의 요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많은 사람이 기초적인 교육 수준을 넘어 고등 교육을 받고 높은 경쟁력을 갖추어 경쟁하는 상황이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더 나은 일자리 등을 위해 경쟁력을 확보하려 하고, 점점 그 수가 많아짐에 따라 기업 등은 특정한 지표(이를테면 시험 점수 같은)를 이용하여 그들 중 일부를 선발한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현재의 공정성 담론이 형성된 배경을 파악해볼 수도 있을 듯하다.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던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공정함에 대한 감각은, 지금의 인국공 사태 등에서 촉발되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이전에는 공정함을 위반하는 특수한 사례에 대해 분노(주로 어떤 권력자 개인이 부정한 방법으로 지위를 꿰찬다거나)가 주된 것이었다면, 지금의 공정성 담론은 수치로 확인 가능한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신뢰(예를 들어 학종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정시만이 공정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례)를 바탕으로 인간의 자율성이 개입될 여지를 차단하고 모든 교육과 평가를 정량화된 시험을 시행함으로써 공정성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이는 공정이라는 가치를 그저 모두가 같은 시험을 치고 높은 점수를 얻은 사람이 통과하는 것으로만 파악함으로써 본래의 가치를 축소한다. 더불어 자신이 겪었던 관문을 다른 사람들도 통과해야만 한다는(나만큼의 노력을 저 사람도 기울여야 한다는) 의식 아래 그 밖의 방법은 모두 ‘정당하지 못한 것’ 내지는 부정의한 것, 그리하여 공정하지 않은 것으로 매도하는 경향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이렇게 발생한 공정성 담론의 문제는 현존하는 교육-학습 패러다임을 더욱더 공고히 한다는 점이다. 시험이 무엇보다 공정해야 한다는 요구는 시험이 출제되는 교육의 내용은 이미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을 가정하며, 나아가 시험이라는 형태를 가지고 있는 평가의 권위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교육에 있어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교육의 본질은 앞서 말했듯 학습을 보조하고 지원하여 학생이 원하는 삶의 길을 찾아갈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평가 중심의 도구적 교육은, 평가를 위해서 그 스스로가 객관적인 사실만을 교육할 수 있도록 제동이 걸린다는 점에서 살아있는 교육이 불가능해지는 문제가 있다. 우리가 국어 과목에서 시를 배울 때, 시를 감상하고 그것을 내 삶과 이어진 예술로 이해하거나 삶에서의 의미로 다가오게끔 하는 학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저 이미 정해진 상징과 정해진 스토리, 정해진 표현법을 교육하면 그것을 배우고 암기할 뿐인 죽은 학습이 행해진다. 그런데 사실 이는 평가 중심의 교육을 기획하고 주도하는 국가의 입장에서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지금과 같은 입시 시스템이 원래 있던 질서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데 있다. 지금 당장에는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안정성을 위한 전략적 선택이 될 수 있겠으나, 이는 시대가 변화할수록 효용이 떨어지는 낡은 관습이 될 뿐이다. 점차 학생 인구수가 줄어듦에 따라 경쟁을 통해 다수의 사람을 주류적 삶에 묶어두는 강제력이 더 이상 교육에서 작동할 수 없으며(대학 정원이 전체 학생 수보다 적어져서 마음만 있다면 모두 대학에 갈 수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기술 발전에 따라 성실함과 안정성보다는 창의력과 새로움이 요구되는 새로운 시대에 억압적인 기존의 질서를 더 견고하게 쌓아 올리는 것은 결국 자신을 가두는 덫이 될 것이다. 차라리 국가는 학습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을 제도화함으로써 각 개인이 자신의 능력을 키울 수 있게끔 하고, 이를 통해 사회의 다양성을 증진하고 국가 보존/발전에 기여하게끔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공교육은 사회의 구성원을 키워내는 것을 근본 목적으로 하여 각 개인이 자신에게 적합한 소양을 키우고 삶을 만들어갈 수 있도록 다양한 것들을 지원해야 한다. 개인의 자율적인 발전이 오히려 더 다채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는 힘이 될 것이며, 그 속에서 교육은 개인의 자율적인 발전을 지원하는 동시에 공동체의 가치와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할 것이다. 

3. 너머의 교육. 같이, 가치


  학습이 교육의 도움을 받아 각 개인에게 최선인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해서, 앞으로 교육은 어떤 형태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교육과 학습의 위상이 역전됨에 따라 각각에게 요구되는 역할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앞서 서문에서 말했듯이 교육은 그 스스로의 우위와 절대성을 내려놓고, 이제껏 허용하지 않았던 자율적 배움을 학습의 주체에게 허용하고 학습을 보조해야 한다. 밑에서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보기로 하자.


  학교 안에서의 학습을 상상해보자. 정규교과로 편성된 국영수를 넘어 배움을 확장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를 위해서는 경계를 허무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클래스101’과 같은 온라인 창작 클래스나, ‘리얼클래스’와 같이 실제 사용되는 언어를 현장감 있게 배울 수 있는 온라인 클래스 등 공교육 바깥의 여러 교육 플랫폼과 협업을 맺고, 그 사업체 내에서 학생들이 흥미가 있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해 학습하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서 공교육과 사교육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교원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이를 통해서 넓고 다양한 ‘접함’의 교육으로 확장을 도모해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동아리 활동 예산을 강사를 초빙하는 데 쓰게끔 지원할 수도 있을 것이며, 유명무실한 7교시 창체 교육 시간을 사회에서 특정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시간, 혹은 학생끼리 논의할 수 있는 시간으로 주어지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말뿐인 인권 교육이 아니라 실제 구호 단체에서 활동하시는 분을 초빙해 현장 실태를 눈으로 볼 수 있을 것이고, 혹은 아예 학교 밖을 벗어나 봉사활동을 하러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접함’을 경험한다. 접함은 몰랐던 것과의 연결점을 만들어줌으로써 내 눈 앞에 존재하던 삶을 너머 더 무궁무진한 것을 보고 체험하며 이야기하게 한다. 


  이 속에서 교사의 역할 또한 바뀔 수밖에 없다. 교사는 학생들과 전인격적 관계를 맺는 것을 기본으로 하여 배움터에서 ‘어른’으로 존재해야 한다. 교사는 기초적 단계의 필수적인 공교육을 시행하는 동시에 학생과의 여러 이야기를 통해서 개개인에게 필요한(그들이 원하는) 수업 혹은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조언한다. 특히 교사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어른으로 학생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데 (직업적)존재 이유를 두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배움을 보조하고 지원하는 데 목적이 있는 새로운 교사와 달리, 이 교사는 학교에 상주하며 학생과 관계를 맺고, 갈등상황이 발생했을 때 지도하는 등의 상호작용을 수행해야 한다. 무의미한 기존의 입시 수업이 점차 없어지면 교사의 역할도 그에 따라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확장해 학교 형태의 변화까지도 상상해볼 수 있다. 기존 반의 구성이 그저 개인의 성씨 등에 의해 무미건조하게 1반, 2반, 3반 등으로 이루어졌다면, 새로운 반은 개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사회반(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 과학반(과학 기술 등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 예술반(악기나 미술, 체육 등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 등 다양한 범주로 구성하고, 그 영역에 전문성을 갖춘 교사를 배치하는 식으로의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이는 이미 강원고등학교에서 시행되고 있는 시스템이기도 하다. 강원고에서는 멘토링시스템 동아리 학급제를 운영하며, 학년별로 반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동아리가 한 반이 되어 학교 생활을 한다. 학생들이 교사와 교과과정을 선택하며, 교실을 돌아가면서 수업을 듣는다. 더불어 학급 내에서 하루에 한 번씩 멘토링 시간을 가져 서로 가르쳐주고 배우는 시간이 주어진다. 

 

  기존의 반 구성에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과 달리, 공유하는 특성이 있는 새로운 반에서는 학생 간의 더 자유로운 상호작용이 이루어짐으로써 보다 자유롭고 적극적인 배움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때 관심사가 정해지지 않은 친구들을 위해 반 간의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 속에서 이뤄지는 배움은, 내용이 정해져 있는 교과를 가르치는 교육과 달리 내용이 무궁무진한 학습이 주가 되는 것을 꿈꿀 수 있을 것이다. 교육은 다양한 학습의 형태와 내용을 지원하며, 이것이 바로 평가와 공정성을 넘어선 새로운 교육의 가치로서 현현한다. 


  물론 내가 위에서 이야기한 것은 결코 정답이 아니다. 그러나 꿈꾸어야 할 가치를 마음껏 상상해보는 하나의 사례로 의미가 있다. 내가 위에서 논의한 가치를 정리하자면, 배움의 넓은 폭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지원으로서의 교육이다. 교육 인력과 학생의 선택폭, 자유도, 그리고 그를 둘러싼 문화 등의 사회적 기반까지, 학생이 주체로서 선택하고 그를 보조하고 지원하는 교육 말이다. ‘접함’을 통해 다양성을 증진하고 모두가 자신의 길을 가는, 그러면서도 모두가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교육을 꿈꾼다. 학교가 억압의 공간이 아니라 가능성의 공간이 되고, 학생들이 자기만의 배움을 좇고,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것으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결국에는 사회의 다양성을 증가하는 방향으로 이어져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가능성은 최대로 열리게 된다. 학교에서부터, 교육에서부터 이와 같은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면 분명히 사회로도 자유롭고 적극적인, 행복한 분위기가 확산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전인격적 교육과 다양한 학습은 지금과 같은 사회구조에서는 불가능하다. 그 이유는 가장 직접적으로는 교원당 맡아야 하는 아이의 수가 많아 학생 각각이 배우고자 하는 것을 이끌어내고 보조할 수 있는 교원의 능력이 부족할 뿐더러(이는 개인의 자질의 문제이기보다는 구조적 불가능성을 말한다)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고 있는 학벌주의와 그에 대한 견고한 믿음, 그에게 정당성을 부여하는 여러 사회적 의식과 욕망이 모두 뒤섞여 있다. 그 속에서 우리가 당장 보아야 하는 한 명의 아이, 한 명의 학생, 한 명의 사람은 잊히고 만다. 교육이 제대로 기능을 못하면 학습자가 겪는 내면의 흔들림, 희망과 욕망 그리고 절망은 눈앞에 채 드러나지도 못하고 죽는다. 우리는 그들의 아픔을 읽었으나 나의 문제가 아니기에 당장에 변화를 반기지 않으며, 누구나 겪은 것이라는 이유로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만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꾸물거리는 사이 너무나 많은 학생을, 많은 사람을 잃었다. 지금 당장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건 언제나 우리의 문제였고 또 언제든 다시 우리의 문제가 될 것이다. 교육은 학습을 꿈꾸어야 한다. 더 나아가, 교육은 삶을 꿈꾸어야 한다. 교육은 언제나 미래를 위한 것이다. 단순히 공정에 매몰되어 시험을 위한 지식을 넣어주는 게 아니라, 삶을 어떻게 살아갈지, 어떤 사람으로서 세상과 마주할지에 대한 고민의 장을 열어주는 역할이 바로 교육의 몫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교육을 향해 가는 불꽃이 되어야 한다.

 



 

darling

 

  대한민국은 학력주의 사회이다. 학력주의 사회란, 학력이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힘이 상대적으로 크다는 인식이 공유되는 사회로 정의된다. 학력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격렬한 입시경쟁이 일상화되며, 입학시험에 의해 획득된 학력은 개인의 속성이 되고 신분이 되어 사회생활의 구석구석까지 지배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학력이 사회계급을 결정한다고 여겨지는 사회에서, 높은 학벌이 계층이동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여기는 부모들과, 좋은 대학이 미래를 보장해준다고 세뇌받아 온 중·고등학생들이 대학 입시 제도에 지나치리만큼 거대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학입학전형은 크게 정시와 수시 두 가지로 구분된다. 대입 전형에서 정시와 수시의 비중은 2002학년도 약 7 대 3 에서 2020학년도 약 3 대 7 로 불과 18년 만에 수시 비중이 정시 비중을 완전히 역전했다. 그러나 최근 뉴스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사 자녀의 논문 공동저자 특혜 사례, 그리고 부정입학 사례는 수시 전형에 대한 사회적 신뢰를 심각하게 손상시키고 있다. 이에 대입에서 수시 비중을 축소하고 정시의 비중을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으며, 실제로 2021학년도 입학전형에서 정시 비중은 전년도보다 0.3%포인트 증가했다(박보라, 2019). 0.3%포인트는 미미한 수치일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정시 비중이 확대되어야 한다는 데에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것이 실제로 대입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만일 공정성에 대한 요구가 입시정책의 방향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라면, 이러한 변화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공정성은 분명 중요한 가치이다. 그러나 이것이 모든 분야의 본질적인 부분에 앞서 고려되어야 할 만큼 최우선의 가치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공정성이라는 가치를 명목으로 정시의 비중을 확대하고 수시의 비중을 축소하기에는 수시가 가지고 있는 교육적 가치가 크다. 교육적 본래적 가치를 경시한 채로 정시확대를 주장한다면 이는 교육의 수단적인 가치만을 강조하는 것일 뿐, 대한민국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이 글에서는 먼저 공정성 담론에 입각하여 정시와 수시를 살펴본 후, 입시제도에 대한 논의에서 공정성 담론이 놓치고 있는 점을 지적하며 대한민국의 대입 전형은 수시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하고자 한다.


1. 공정의 시각으로 본 정시와 수시[각주:1]

 

1) 정시는 공정한가?

 

  정시가 공정하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정시 확대에 찬성하는 사람들의 주된 근거는 정시가 수시에 비해 더 공정하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수시는 교수자 혹은 입학사정관에게 평가가 맡겨지기 때문에 평가과정이 투명하지 않고, 비교과 활동까지 고려하기 때문에 학교별 편차가 심해서 공정하지 않다. 반면 정시는 온전히 수능 점수에 입각한 정량적 평가로 이루어지며, 평가의 기준 또한 특정 주체에 맡겨져 있지 않기 때문에 공정하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타당한 이야기이다. 정시는 공정해 보이기 쉽다. 그러나 정시가 공정하다는 주장은 수능 시험 점수가 나온 이후의 상황에만 집중하고, 수능 점수를 받기 이전까지의 상황에서 발생하는 불공정한 요소들을 지목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최근 다수의 연구가 수능을 치르기까지의 과정은 결코 공정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기혜·최윤진(2016: 16쪽)에 따르면 부모의 교육수준 등 배경이 좋을수록 수시보다 정시를 통해 진학한 학생이 많았고, 특목고 출신 학생의 정시 진학률은 70.6%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문정주·최율(2019: 25쪽)의 논문에서는 사회적 상층일수록 학생부종합전형보다 정시전형을 선호한 것으로 나타나 학종을 '금수저 전형'으로 치부하는 비판적 담론과 배치된다고 분석하였다. 이는 높은 수능 점수를 받는 것이 학생 개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부모의 재력이나 교육수준 등의 영향을 강하게 받음을 보여준다. 굳이 이러한 학술논문이 아니더라도 수능을 준비하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 살아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대치동 일타 강사’의 현강을 듣고 양질의 자료를 얻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이 투자되어야 하는지. 이러한 영향을 무시하고 수능 이후의 상황만을 근거로 정시 전형의 공정함을 피력하는 것은 실질적인 기회의 공정성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이를 통해 수시가 더 공정하다는 결론을 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본 근거의 핵심은 정시를 지지하는 측의 거의 유일한 근거인 정시가 공정하다는 주장이 타당하지 않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학습의 기회와 양질의 자료 및 정보에 대한 접근이 불공정하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면한 채로 정시가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2) 주관적이면 불공정한가?


  평가는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당위적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평가는 정말 ‘객관적’일 수 있을까? 평가 과정에 사람이 개입하는 한 주관성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 뿐만 아니라 평가의 주관성은 사라져서도 안되는 것이다. 평가가 ‘절대’ 주관적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은 통념일 뿐이다.  


  모든 평가에는 기준이 있다. 이를 고려하여 평가의 주관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두 가지로 분류해볼 수 있다. 하나는 평가 기준에 입각한 주관성이고, 다른 하나는 임의적인 주관성이다. 수시에서 제기되는 공정성의 문제 중 하나는 입시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입학사정관 혹은 교수자의 주관적인 평가가 개입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가자의 주관성이 개입된다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러한 주관성이 ‘임의적인 주관성’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지원자의 학업성취 내용과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 등과 무관하게 흔히 말하는 학연, 지연, 혈연 이 쓰리(三) 연(緣)이 개입하는 경우는 분명 공정하지 않다. 그러나 기준에 입각한 주관성은 현실적이며, 바람직하기까지 하다. 학생부종합전형에서 입학사정관 혹은 교수자의 주관성이 개입되는 부분의 대표적인 사례는 면접이다. 십여분의 한정된 시간 동안 한 사람의 인생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평가하는 것이 가능할까? 절대 불가능하다. 아무리 객관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면접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오가는 이야기는 선택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평가자는 지원자의 대답에서 흥미가 가는 부분을 더욱 파고들어 질문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평가 기준과 무관한 주관성이 아니며 대학 혹은 교수가 바라는 인재상과 부합하는 지원자를 선발하기 위한 과정이다. 만일 평가 과정에서 일말의 주관성이 통제된다면 평가자가 쌓아온 노하우와 신뢰는 의미가 없을 것이며, 지원자를 선발해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기에 평가에 개입되는 모든 주관성이 불공정하다는 주장은 세심하지 못한 주장이며, 학생부종합전형에서 평가자의 주관성이 개입된다는 사실은 수시가 축소되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정시가 확보하지 못한 평가자의 주관성은 오히려 수시의 강점이 될 수 있다.


3) ‘더 공정하다’는 표현이 가능한가?

 

  ‘정시가 수시보다 더 공정하다’ 혹은 ‘정시만큼 공정한 대입제도는 없다’ 등의 표현에서 확인할 수 있듯, 공정성의 개념이 비교의 기준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그러나 공정성은 기회의 공정성인지 결과의 공정성인지, 어떤 부분에서의 공정성인지 등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추상적이고 다채로운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1번부터 100번까지의 체크리스트 문항에 답하여 더 높은 점수를 매길 수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필자는 정시가 공정하다는 것은 착각이며, 수시의 약점으로 여겨지는 평가자의 주관성은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를 통해 필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수시가 정시보다 ‘더 공정하다’는 것이 아니다. 정시와 수시의 공정성에 대한 판단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으며,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입시의 공정성에 대한 판단이 항상 옳은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공정성에 대한 논의만으로 대한민국의 입시제도의 변화 방향을 논의할 수는 없다. 대학 교육의 더욱 본질적인 속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2. 공정 너머의 교육


1) 대학의 목적


  대학이 존재하는 이유를 정의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대학 입시가 존재하는 이유는 대학에서 수학(修學)하기에 적합한 학생을 뽑기 위함이다. 계층이동의 사다리 역할이 대학입시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임을 간과할 수는 없으나, 이는 부가적인 목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떤 형태의 입시제도가 가장 적합한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대학에서 수학(修學)하기에 적합한 학생’을 가장 잘 선발하는 과정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대학에서 수학하기에 적합한 학생’이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학생을 의미하는 것인지, 그리고 대학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대학에서 수학하기에 적합한 학생’은 대학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학생을 의미할 수 있다. 이 역량은 단순히 대학에 입학해서 무사히 졸업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수업을 충실히 듣는 것이 있고, 나아가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끝까지 학업을 잘 마치는 것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학문간 융합이 중요시되고 요구되는 사회에서 대학은 이를 잘 수행할 역량을 갖춘 학생을 뽑아야 한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해내고, 이후 이들이 사회적 효용과 가치를 창출하도록 지원하는 것은 대학의 존재 이유이기도 하다. 


  전공 적합성은 이러한 역량을 판단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 학문 간 융합을 고민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효용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공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최근 학생부종합전형으로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이 다른 전형으로 입학한 학생들에 비해서 이러한 역량이 높음을 지지하는 연구결과가 나타나고 있다. 수시 학생부 종합 전형에서는 학생의 고등학교 생활기록부를 바탕으로 관심사를 파악하고, 학생이 자신의 관심분야에 대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각 모집단위에 적합한 인재를 선발할 수 있다. 김사훈(2018)의 연구에 따르면 전공적합성이 높은 집단, 전공 수업에 높은 만족도를 보이는 집단, 그리고 상급학교 진학 시 전공을 유지할 의향이 높은 집단 모두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입학한 학생이 가장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전공 수업이 학생의 적성과 소질에 부합하는가에 대해서 입학전형 간 유의미한 차이가 있었으며 특히 학생부종합 전형의 경우 전공 적성적합도가 67%로 집단평균인 58%를 상회했다(김사훈, 2018: 6쪽). 이는 입학전형에서 전공을 더 세밀하게 고려하는 전형이 대학 수업에서도 적합성과 만족도를 높이는 방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정시전형에 지원하는 학생들은 수능 점수를 가지고 각 학과별 커트라인에 맞추어 지원하는 경우가 많다. 매년 문과 수능 만점 학생은 서울대학교 경제·경영학과를 지원하고, 이과 수능 만점 학생은 서울대학교 의대를 지원하는 현상은 이를 방증한다. 


  대학이 어떤 학생을 뽑아야 하는지는 대학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좌우된다. 그리고 대학의 목적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가치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사회는 창의적인 인재를 요구하고, 대학은 이러한 인재를 양성해낼 의무가 있다. 이는 단지 학생의 취업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학생이 학문을 탐구하고, 습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대학은 학습능력을 보여주는 단일한 지표로 학생을 선발해야 할지, 아니면 학생의 탐구심과 성장과정, 그리고 인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선발해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2) 대한민국 교육의 방향성


  학력주의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입시제도의 변화는 곧 교육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입시제도를 정할 때 대한민국의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최근 교육부에서 박차를 가하는 교육 정책 중 하나가 바로 ‘고교학점제’이다. 고교학점제는 학생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실현하기 위한 일종의 제도적 장치로서, 학생에게 자율적 과목 선택권을 부여하고 과목을 이수하게 하여 누적 학점으로 졸업을 인정받는 제도이다(신윤범, 2020: 1쪽). 교육부 홈페이지에 따르면, 2021년까지는 학점제의 도입 기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연구·선도학교를 운영하며 2025년에는 전국 고등학교에 완성된 형태의 고교학점제를 본격 시행할 예정이다. 더불어, 교육부에서는 고교학점제가 필요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첫째, 학생 맞춤형 교육을 실현함으로써 학생의 학습 동기와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둘째, 자신의 진로를 개척하고 자기주도적으로 학습하는 미래 사회에 필요한 역량을 기른다. 셋째, 학생 개개인의 다양성을 지원하고, 학생들을 수직적으로 서열화하지 않는다(교육부, 2020). 이는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교육의 방향이 학생들을 수직적으로 서열화하는 교육방식에서 벗어나 개개인의 특성과 관심사를 존중하고, 학생들 스스로 진로를 탐색해나갈 수 있는 자기주도적인 학습 분위기를 마련하는 것임을 보여준다. 더불어 학교교육의 전 과정에서 2015 개정 교육과정이 기르고자 하는 학생들의 핵심 역량은 자기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 사고 역량, 심미적 감성 역량, 의사소통 역량, 공동체 역량으로 설계되어 있다(신윤범, 2020: 2쪽). 그렇다면 고교학점제가 나타내는 대한민국 교육의 방향성을 잘 반영하는 입시제도는 어떤 모형이어야 할까?


  정시에서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 탐구하는 것이나 다양한 학교 생활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수능 공부에만 집중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 정규 수업 시간에 수업을 하는 것보다 자습이 더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이는 고등학교 3학년 교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 정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경우에는 수업을 듣기를 소홀히 하고 EBS 등 수능연계문제집을 풀기에 바쁘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고 자습을 하는 것이 대학에 진학하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는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의도하는 역량을 증진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학습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수시 종합 전형과 같은 경우에는 학생의 전인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평가하기 때문에 학교생활에 충실히 임하며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주도적으로 학습하는 것이 유리하다.  발명에 관심이 많아 특허를 여러 개 갖고 있는 일반고 전교 30등 학생, 로봇 만들기에 푹 빠진 전문계고 학생이 KAIST에 합격해 화제가 된 사례는 이를 증명한다(이원진, 2020). 또한 학생부종합전형에서는 평가에 있어서 교과점수 뿐만 아니라 다양한 비교과활동이 중요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교사는 다양한 학습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데 힘쓰게 되고, 학생은 동아리 활동 및 독서활동에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단순히 문제를 푸는 능력뿐 아니라 사고하고 탐구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다. 따라서 수시는 21세기 대한민국이 추구해야 할 교육적 가치와 부합하는 방식이다. 


3. ‘수시’로 변화하는 대한민국 입시제도


  정시든 수시든 완벽한 대학 입시전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완벽한 입시제도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대한민국에 적합한 입시제도는 분명히 있다. 완벽하진 않더라도 더 적합한, 더 나은 대입 전형을 발견하고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필요하다. 필자는 무엇이 정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을 바탕으로 21세기 대한민국이 택해야 할 전형은 정시가 아닌 수시라고 주장한다. ‘더 공정한’ 제도를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점과 대학의 목적, 그리고 교육의 방향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보았을 때 수시를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 더 타당한 결론이라고 생각하는 바이다. 수시 전형이 여전히 많은 우려점과 부작용을 안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수시가 가진 교육적 가치가 크기 때문에 수시를 축소하는 것은 대학에나, 학생에게나, 국가에나 손해라고 하겠다. 따라서 대한민국의 대입 정책은 점진적으로 정시 비중을 축소하고 수시 비중을 늘리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하며, 추후 논의의 방향은 어떻게 하면 수시의 부작용을 줄이면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수시를 확대할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사훈, <대학 입학 전형에 따른 상급학교 전공 유지 의향, 전공 적합성, 전공 수업 만족도에 관한 연구>, 《예술인문사회융합멀티미디어논문지》 8(7), 인문사회과학기술융합학회, 2018, 225-233면. 

문정주·최율, <배제의 법칙으로서의 입시제도: 사회적 계층 수준에 따른 대학 입시제도 인식 분석>, 《한국사회학》 53(3), 한국사회학회, 2019, 175-215면.
신윤범, <한국의 고교학점제 정책 동향분석>, 《동북아시아문화학회 국제학술대회 발표자료집》,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20.7., 239-243면.
오성배, <대학생의 입학전형별 학업성취 및 학교생활 분석>, 《한국교육문제연구》 34(3), 중앙대학교 한국교육문제연구소, 2016, 157-175면.

 

 

 

 

a little philosopher

  1. 수시 전형은 대학이 학생을 선발하는 입학전형으로서, 학생부 교과 성적을 중심으로 평가하는 교과전형, 입학사정관 등이 참여하여 학생부 비교과를 중심으로 평가하는 종합 전형, 그리고 논술, 면접, 적성검사 등 대학별 고사로 이루어져 있는 전형을 의미한다. 이 중에서도 이 글에서 초점을 맞추어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종합 전형이다. 종합 전형에서는 비교과를 중심으로 교과, 자기소개서, 추천서, 면접 등을 통해 학생을 종합 평가하는 전형이기에 수능 점수만으로 학생을 선발하는 정시와 대비하여 수시의 특징을 나타내기에 적절하다고 평가하였다. [본문으로]

 

  올해 들어 공정성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특히 뜨겁다. 입시 비리, 채용 비리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사람들은 공정하지 못한 절차에 대해 분노했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전체 민원의 약 50%가 '2030세대' 민원이었고 그 중 대부분이 '교육, 시험, 채용 공정성'에 대한 내용이었다.[각주:1]


  사람들은 입시, 채용의 절차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만들어야 한다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절차의 공정성을 보장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는 “절차의 공정성이 보장되면, 개인이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라는 전제가 숨어 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사회에 존재하는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불평등을 무효화하는 것은 아닐까? 왜 사람들은 공정성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을까? 그리고 정의는 공정성을 넘어 어떠한 영역을 포함해야 하는가?

 

1. 귀속주의 대안으로 등장한 학력주의

 

  공정성 담론이 대두된 사회적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 과거 학력주의의 등장부터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학력주의는 개인을 평가할 때 형식적인 학력을 제일 중시하는 제도이다. 여기서 학력은 “학교 교육 등의 학습이나 훈련에 의하여 획득한 지적 적응능력[각주:2]”과 “학교를 다닌 이력[각주:3]” 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최근 들어 흔히 ‘sky 서성한 중경외시’처럼 대학 간의 서열을 나누고, 보편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문대를 가야 한다고 여기는 풍조를 보면 학력주의는 두 번째 의미에 더 부합하는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학력주의는 주로 부정적으로 여겨진다. 학력주의는 과도한 입시 경쟁을 유발하는 주범이며, 개인의 능력, 노력, 실력 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러한 학력주의가 사람들에게 신분에 상관없이 노력하면 계층 이동을 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주었다.


  학력주의는 일종의 신분체계와 연결된 귀속주의에 대한 사회적 대안이었다. 청동기 시대에 최초로 계급이 만들어진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우리나라는 줄곧 신분제 사회였다. 혈통주의적 귀족 중심 사회를 바탕으로 부모의 신분은 자식에게 대물림되었고, 이러한 귀속적 요인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홍길동이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도술을 부려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신분제 사회에서는 아무리 개인이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도 신분 상승에 큰 제약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시험 제도의 등장은 하나의 희망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일종의 학력 인증 시험인 과거 제도를 도입하여 시험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신분제 등 귀속적인 요인을 벗어나 사회 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등장한 것이다. 결국, 학력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성취에 따라 사회 이동을 통해 엘리트로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각주:4]


  이러한 풍조는 현대까지 계속 이어져 학력주의와 능력주의의 기초가 되었고, 사람들은 노력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최근에는 학력 취득에 따른 불평등 격차가 점차 심해지면서 학력주의가 과열되고 학력 인플레이션 현상이 심화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소득 격차가 과도하게 벌어지는 등 불평등 격차가 심해지면서, 학력은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보다 대학에 입학하는 사람의 수가 증가하면서, 명문대 입학이 항상 성공을 보장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학력주의가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대학 간판은 성공하기 위한 기본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사회는 이른바 스펙 경쟁처럼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학력주의는 과거에 능력, 노력, 실력과 같은 다른 요인보다 비교적 계량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여겨졌다. 2000년대 중반, 학력주의가 더욱 과열되면서 학력 위조가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 때, 특히 문화 예술계에서 유독 학력 위조 사건이 많이 발생하였다.[각주:5] 왜 하필 문화 예술계였을까? 예술 분야는 다른 분야보다 특히 더 객관적이고 계량적인 평가가 어렵다. 분야 자체에 표준화된 평가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19세기 후반 인상주의가 유행하였고, 이에 따라 모든 예술 작품을, 인상주의를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이 또한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예술 분야에서는 개인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따라서 실력 검증 시스템을 개발하는 대신 학력과 같은 간판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반면, 현장에서 직접 보고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단순한 능력을 요구하는 분야에서는 학벌이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결국, 학력은 정량화되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 기준이라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이처럼 학력주의는 귀속적인 요인을 넘어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한 수단이자 객관적인 평가 기준의 기능을 했다. 그러나 학력주의가 점차 과열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높은 학력이 언제나 탁월한 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력과 실제 능력 사이에 큰 괴리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학력은 일단 취득하기만 하면 능력과는 상관없이 소유자에게 지속적으로 방대한 특권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불합리하다. 이에 점차 사람들은 학력이 아닌 능력으로 평가하는 사회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학력주의의 폐해 중 특히 학력과 능력 사이의 간극에 주목하여, 같은 원리에 대응하지만 학력주의보다 비교적 더 넓은 개념인 능력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2. 학력주의를 포괄하는 능력주의의 등장

 

  최근에 tvn에서 방영한 ‘스타트업’이라는 드라마에서는 능력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극 중 한국의 실리콘밸리인 샌드박스 회사에서는 학력과 스펙을 제외한 시험으로 인재들을 선발한다. 극 중 고졸 출신인 서달미는 회사의 취지에 맞게 한 해의 대중의트랜드를 잘 분석하여 스타트업 대표로 뽑히게 된다. 스타트업 팀원들은 이러한 고졸 출신 대표를 불신했지만 그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모두에게 인정받는다. 고졸 출신 사람도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학력주의를 넘어 능력주의를 갈망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각주:6]는 능력주의의 세 가지 명제를 충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귀속적인 요인과 학력을 넘어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는 우리에게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준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사람들은 능력주의를 맹신하고, 이것이 잘 실현되도록 절차적 공정성을 중시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현재 다양한 불평등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이유는 능력주의의 원칙 그 자체보다 그 원칙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는 배경에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믿는다. 즉 공정함이 곧 정의라고 여긴다. 얼핏 보기에 이러한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 능력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분명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경쟁하고 노력해서 승리한 사람을 뽑는게 뭐가 문제야?’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사람들이 믿고 있는 능력주의마저 귀속주의와 학력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한다. 능력 또한 귀속적인 신분처럼 불평등한 배경의 산물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자격시험, 국가고시 같은 표준화 시험은 능력주의의 산물인 것처럼 보인다. 객관화되고 수량화된 평가 기준으로 개인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특정 집단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표준화 시험인 수능도 얼핏보면 능력주의의 산물로서 기회의 공정성을 잘 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잘사는 집 아이가 못사는 집 아이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부모의 영향력은 경제적인 차원을 넘어 다양한 분야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저학위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높은 수준의 지식을 요구받지 않아 학벌에 대한 관심이 적고, 중산층에 비해 계층 하강 위기 의식이 낮아 자녀 교육에 대한 열망이 낮다.[각주:7] 학업성적의 불평등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선도한 교육학자 콜먼은 학업성적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학교보다 가족이며, 가족에 의한 학업성적의 불평등은 학교에서 해결하기 어려움을 발견했다.[각주:8] 이후 콜먼의 후속 연구들은 가족의 높은 사회, 경제적 지위가 자녀가 양질의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을 축적하게 하고, 이것이 자녀의 학업 성취도를 높인다고 설명했다.[각주:9]  우리나라도 PISA 자료에 따르면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학업 성취도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각주:10]


  결국, 사회적 우연성은 능력 취득의 과정에도 막대하고 방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실상 사회적 이동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능력주의 신화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두 눈을 가려버린다. 불평등한 배경에서 입시 경쟁에 한 차례 패배한 사람들은 취업 경쟁에서도 불리하다. 반면 상위층의 사람들은 능력주의 시스템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견고하게 하고 자녀에게 물려줄 방법을 찾는다.[각주:11]  표준화 시험은 능력에 따라 사람들을 선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상위층 사람들을 유리하게 만든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여 능력은 현대판 귀족 신분처럼 또다시 공고한 계급의 대물림 수단이 된다. 


  한편 현재의 능력주의는 완벽하지 않고 따라서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한다면 위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한 기회 균등 전형의 공정성에 대해 논의하며, 이는 능력 이외의 것으로 지원자들을 평가하기 때문에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연관 지을 수 있다. 다양한 문제의 발생 원인이 능력주의의 원칙 자체에 있기보다 이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배경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차원을 포함하여 학업을 중시하는 가족의 분위기, 풍부한 관심과 자원, 영양 등을 모두 아우른 공평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까? 더불어 천부적인 재능은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보면 사실 타고난 재능은 천부적 우연성에 따라 얻게 된 행운이다. 결국, 사실상 완벽한 능력주의는 불가능하다. 

- 더욱 좌절할 수 밖에 없는 패자 


  더불어 능력주의는 패자에게 더욱 가혹하다.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마땅히 성공을 누릴 수 있는 힘을 준다. 분명 그들이 얻게 된 성취도 귀속적인 요인에 자유롭지 않았지만, 그들은 능력주의 신화에 눈이 멀어 오직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얻게 되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고는 패자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하위층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는 마땅한 노력을 하지 않아서,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직업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즉, 능력주의는 구조적인 맥락은 무시한 채 모든 것을 전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다. 결국, 패자는 모든 책임을 떠안고 모멸감과 좌절감을 느낀다.


  한편 귀속주의 사회에서 하위층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가 온전히 자신의 탓이 아님을 안다. 반면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하위 계층 사람들이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사회적 맥락의 짐까지 짊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능력주의에서 불평등은 ‘능력’ 속에 숨어들어 사람들의 시선을 가려버린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이는 패자를 더욱 좌절하게 하며, 빈부격차와 양극화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다. 절차적 공정성에만 집중하고, 승자가 패자를 업신여기고 차별하는 사회가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 사회적 이동이 가능한 사회 vs. 계층 간의 격차가 완화된 사회?


  마지막으로 능력주의는 ‘사회적 이동성’, 즉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절차에만 초점을 맞춘다. 계층 간의 격차가 완화된 사회는 논외 대상이다. 예를 들어, 능력주의는 상위 계층과 하위층 간의 격차가 무한히 벌어진다고 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절차의 공정성이 보장되고 노력한다면 충분히 이 격차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능력주의는 불평등 그 자체보다 사회적 이동성에만 주목한다. 이러한 생각은 누군가는 분명 하위층에, 누군가는 상위층에 있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왜 소수만이 경쟁에서 살아남고 실패한 사람은 마땅히 차별받아야 하는가. 계층 간의 격차를 완화하라는 대신, 개인에게 노력해서 계층 상승을 하라는 요구는 수많은 ‘패자’들을 낳는다. 


  이처럼, 사회적 이동성에만 주목한 정책은 불평등을 직접 다루지 않아 계층 간의 격차와 양극화 문제를 간과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실제로 스웨덴과 네덜란드에서는 교육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교육 기회 균형 제도를 마련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출신 배경과 교육 성취의 연관성이 줄어들지 않아 다른 전략을 택했다. 사회보장체제를 통해 근본적으로 계층 간의 격차를 줄여 교육 평등에 한 발짝 다가간 것이다.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동성뿐만 아니라 격차 완화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3. 공정성을 넘어, 정의는 어떠한 영역을 포함해야 하는가?

 

  귀속주의의 대안으로 학력주의가 등장하고, 다시 학력주의를 포괄하는 능력주의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누구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에 절차적 공정성을 곧 정의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공정성을 강조하는 능력주의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능력마저 귀속적인 요인에 자유롭지 못하며, 승자는 성공이 온전한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칭송받고 패자는 비난받기 때문이다. 더불어 능력주의는 계층 간의 이동 가능성에만 주목하여, 상층과 하층 계층 간의 격차가 점차 커지고 있는 현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절차적 공정성만으로는 정의로운 사회를 보장하지 못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상층 계층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경쟁하고 있는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내가 성취한 것은 온전한 나의 노력의 산물인가? 또 왜 누군가는 반드시 패자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학력주의 사회를 의심해왔듯이,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것은 위험하다. 절차의 공정성뿐만 아니라 사회에 내재된 불평등, 차별에 주목하여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꿈꿔야 한다. 공정성을 넘어 정의는 어떠한 영역을 포함해야 하는가? 목맬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마다의 공정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일치하긴 하는 것일까? 공정하지 못한 것이 정말 선발 과정뿐이었을까? 어쩌면 공정성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러셀

  1. 국민권익위원회, <‘교육·채용 등 불공정’ 청년의 목소리 들어 정책으로 실현한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20.03.26., www.korea.kr/news/pressReleaseView.do?newsId=156382095 ,  2021.01.22. [본문으로]
  2. 표준 국어 대사전, <학력>, 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 2021.02.05. [본문으로]
  3. 표준 국어 대사전, <학력>, 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 2021.02.05. [본문으로]
  4. 공석기, <학벌주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1, 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8931, 2020.12.26. [본문으로]
  5. 정진호, <[정진호]문화예술계 학력위조는 구조적 문제>, ≪아이뉴스≫, 2007.08.15., inews24.com/view/277644, 2021.02.05. [본문으로]
  6. 마이클 센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12.01., p.4 [본문으로]
  7. 신명호,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나? : 사회계층 간 학업성적의 격차와 양육관행」,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2010, p. 50~58 [본문으로]
  8. 오성철 외 6인, <대한민국 교육 70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12.19., p. 284~300 [본문으로]
  9. 상게 논문 [본문으로]
  10. 장상수, 「한국 사회의 계급 이동」, 『한국사회학』 32집 2호, 1998, p.367~393 [본문으로]
  11. 마이클 센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12.01, p.4 [본문으로]

 

1. 들어가며 : 다른 종류의 의문


  2020년 KBS 신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2020년 사회에서 필요한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 공정성이 20.2%로 1위로 꼽혔다.[각주:1]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의 시정 연설과 2020년 청년의 날 맞이 연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키워드 역시 ‘공정’이었다.[각주:2]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지표가 말해주듯, 확실히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 중심부에 있는 핵심 키워드는 ‘공정성’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공정성’이 크게 화제 되었던 맥락을 돌이켜보면 썩 유쾌한 기억들은 아니었던 듯하다. ‘공정성’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할 때마다 늘 사회적으로 큰 논란과 분열을 일으킨 사건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공정성에 관한 논란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에는 2019년의 ‘조국 사태’와 2020년의 ‘인국공 사태’가 크게 기여했다.

 

  두 사건은 각각 ‘대입’과 ‘취업’이라는 다른 의제를 다루고 있는 독립된 사건처럼 보이지만,사실 그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모두 특정 집단(대학 혹은 인천국제공항사)에 진입할 자격이 있는 누군가를 선발하는 절차에 존재하는 불공정성에 대한 논란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여론과 언론이 대입 수시 학생부 종합전형의 비리를 문제 삼고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며 ‘공정하지 못한’ 선발 과정을 비판했으며, 두 사태 전후로 ‘공정성’에 관한 첨예한 논쟁을 주고받는 소위 ‘공정성 담론’이 등장했다. 인재 선발 과정에 있어 현재의 절차가 공정한지, 어느 것이 더 공정한지에 대한 투쟁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물론 인재 선발 과정의 공정성이 중요한 가치인 것은 맞지만, 나는 여전히 많은 의문이 든다. 공정성 담론이 이제껏 이끌어왔던 ‘무엇이 더 공정한가?’를 넘어선 다른 종류의 의문들 말이다. 왜 공정성 논란이 촉발된 계기가 하필 ‘조국 사태’, ‘인국공 사태’였을까? 우리는 왜 이토록 공정성에 집착하는 수준으로 목맬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마다의 공정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일치하긴 하는 것일까? 공정하지 못한 것이 정말 선발 과정뿐이었을까? 어쩌면 공정성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이 글은 이러한 조금 다른 종류의 의문에서 출발한다. 공정성이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세태에서, 어쩌면 우리가 진정 고민해보아야 할 것은 ‘공정성’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결국 공정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단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결국 질문하고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공정성을 목놓아 외침으로써 우리가 궁극적으로 살아가고 싶은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2. 우리 사회의 ‘공정성 담론’


  런던 올림픽의 신아람 선수, 소치 올림픽의 김연아 선수 경기와 같이 스포츠는 종종 ‘불공정’ 심판 논란에 휩싸이곤 한다. 국무총리 산하의 ‘공정’거래위원회는 부당한 불공정 거래 행위를 규제하고 소비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공정성’은 특별히 어느 영역에만 한정된 가치가 아니다. 모든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가치이기 때문에 공정성이 논란이 되는 영역 역시 수없이 많다. 불공정 심판·불공정 거래·불공정 계약 등, 하다못해 가위바위보 승부조차도 불공정하다며 논란이 일 수 있을 정도로 ‘공정’의 영역은 광범위하다. 그렇다면 질문해볼 수 있지 않을까? 공정성이 개입되는 하고 많은 영역 중에, 왜 하필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만이 첨예한 ‘공정성 담론’을 등장시킬 정도로 논란이 되었을까?


# 왜 하필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인가? 

 

  ‘왜 하필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였는가?’를 질문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각 사건을 꿰뚫는 의제가 ‘대입’과 ‘취업’임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입과 취업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중요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연해 보이는 것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질문은 왜 조국 사태(대입)였느냐, 왜 인국공 사태(취업)였느냐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거나 정규직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입과 취업의 성공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결국 대입과 취업도 공정성과 마찬가지로 수단적 가치인 셈이니, 중요한 것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대입과 취업, 그리고 이것들의 공정성에 목매는가? 

 

# ‘대입’과 ‘취업’, 그리고 안정적인 생활  

 

2015년 2월, 취업난을 풍자하는 연세대 학위수여식의 현수막(출처: 한겨례, 사진에 연결된 링크)

  “연대 나오면 모하냐… 백순데…”

  2015년 2월 말, 연세대 졸업식 날 붙은 현수막이 화제가 되었다. 유머로 소비되었지만, 속뜻을 살펴보면 씁쓸하기 그지없다. 대학이 매우 중요한 한국 사회이지만 명문대를 나와도 취업을 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해당 현수막의 의미는 드라마 SKY캐슬에서 예서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대학이 ‘서울의대’였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의대와 같이 상대적으로 고소득이나 안정성을 보장받는 치대·한의대·교대 등이 입시에 선호되는 것은 대입 이후에도 취업이라는 중요한 관문이 있으며, 양자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수 학부나 과가 아니더라도, 소위 ‘명문대’라고 여겨지는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일수록 대기업과 전문직 취업률은 높아진다. 결국 ‘어떤 대학에 들어가느냐’가 중요한 이유는. ‘어떤 직장에 들어가느냐’를 결정짓기 때문인 것이다.

 

  수단은 다를 수 있어도, 모든 사람의 목적은 결국 같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누구나 경제적·사회적으로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안정된 의·식·주 생활이 보장된 조건 하에서 자신이 바라고 계획한 대로 삶을 영위하고 싶어 한다. 당장 끼니를 해결할 수 없거나 옷을 사 입을 수 없는 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이다. 또한 살고있는 집 혹은 직장에서 몇 년을 주기로 쫓겨나며 그럴 때마다 다른 집과 직장을 알아보아야 하는 생활을 원하는 자 역시 누구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계획한 대로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이 경제적 요소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 ‘취업’, 그 일자리를 보장해주는 대표적인 수단이 ‘대학’이다.

 

  불행한 점은 경쟁과 능력주의 담론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 특히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이 모두에게 허락되기 힘들다는 점에 있다. 누군가는 전월세 계약 기간이 끝나면 살던 집에서 나가야 하고, 누군가는 고용 기간이 끝나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거나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에 뛰어들어야 한다. 실제로 2019년 한국노동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상위 10% 집단이 전체 계층 소득의 절반 이상(50.6%)을 가져가고 소득불평등 악화속도도 매우 빨라지는 등 소득 양극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양상을 보여준다.[각주:3]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임금 격차도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각주:4]  점점 더 경쟁이 격화되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과 위계화가 존재하고 대학 서열이 이 위계화와 이어지는 사회에서, 모두가 원하는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자 거의 유일한 길은 결국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대기업 정규직)에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공정성이 논란이 된 것은 필연적으로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입’과 ‘취업’에 성공하는 것은 ‘안정적인 생활’이라는 목적을 이룩하는 가장 빠른 길이자 거의 유일한 길이기에, 우리 사회에서 ‘정도(正道)’라고 여겨진다.

# 우리가 공정성에 목매는 이유

 

  우리가 그 무엇보다도 공정성에 목매고 공정성이 가장 절박한 의제가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상황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대표적으로 입시와 취업)라도 ‘공정’해야 우리의 최종 목적인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공정성에 집착하고 절박해진다는 것은 안정적인 삶을 살기가 그만큼 힘들고 절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도의 공정성은 자본주의 치하 능력(노력)주의 담론과 맞물려 시너지를 일으킨다. 더 나은 삶을 보장해줄 수 있는 ‘제도’가 투명하고 공정하기만 하다면, 개인의 ‘노력’으로 못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능력(노력)주의 담론에 따라 개인 노력의 정당한 결과를 보장하기 위한 공정성이라는 가치는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그리고 공정성 담론, 특히 대입과 취업 제도에서의 공정성을 외치는 목소리는 다시 누구나 노력만 하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더 나아가서는 계층 상승을 할 수 있다는) 능력(노력)주의 담론을 생산한다. 

 

3. 공정성 담론의 한계 


  왜 하필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였는지, 왜 공정성에 그리도 목매는지에 대한 질문은 어느 정도 해결한 듯하다. 결국 대입과 취업,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목소리 뒤에는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절박한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대입과 취업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중요성이, 대입과 취업 제도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현 한국 사회 ‘공정성 담론’의 정당성을 바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목적이자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안정적인 생활’인데, 이것이 대입과 취업 제도의 절차의 공정성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공정성 담론의 한계는 명백히 드러난다. 

 

# ‘공정성’ = ‘특정 집단 진입 제도의 공정성’?

 

  앞서 이야기한 대로, 공정성은 가위바위보 게임 하나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 매우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가치이다. 그런데 현재의 공정성 담론을 살펴보면 공정성이 논란이 되는 영역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특정 집단 진입 제도’의 공정성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대입’과 ‘취업’을 다른 말로 바꿔보자. 대입과 취업은 각각 ‘입시(入試)’와 ‘입사(入社)’라는 말로도 부를 수 있다. 이 ‘들 입(入)’ 자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는 현재의 공정성 담론이 특정 집단(특히 상위권 대학과 정규직 일자리 같은 높은 집단)에 ‘진입(進入)’하기 위한 제도에 한정한 좁은 논의라는 점을 시사한다. 언론과 여론의 넘쳐흐르는 담론 속에서 무엇이 공정한지 평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오직 특정 집단 진입 절차였다. 정시/수시(학생부 종합전형) 논란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논의 모두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결국 상위권 대학과 정규직 직장에 진입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를 어떻게 더 ‘공정하게’ 선발할 것인가가 논의의 전부였던 것이다.


  현재의 공정성 담론이 내포하는 ‘공정성’이 매우 좁은 의미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면, 그 다음 단계를 반드시 성찰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사회의 공정성 담론이 이끄는 대로 특정 집단에 진입하기 위한 제도(대입·취업 제도)가 공정하기만 하면, 정말로 우리 사회는 ‘공정’해지는 것일까?


  ‘공정성’은 ‘공평하고 올바름’을 의미하며, 기본적으로 공익 혹은 공동선, 즉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고 평등하며 인간적 면모가 담보된 도덕·윤리의 영역과 밀접한 가치이다.[각주:5] 즉, 공정성이라는 가치가 그 값을 다하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고려해볼 때, 제도의 공정성을 논하려면 그에 앞서 그 제도에 모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사회 구조가 반드시 우선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애초에 제도에서 누군가가 배제되어 있었다면 제도가 아무리 공정한들 ‘구조적 불공정’이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특정 집단 진입 제도의 불공정성과 사회 구조의 불공정성 중, 둘 중 어느 것이 더 큰 불공정일까? 당연히 후자이다. 술래잡기 규칙이 아무리 공정한들, 다리를 다쳐 달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더 큰 불공정


  그렇다. 문제는 ‘더 큰 불공정’이 존재한다는 것에 있다. 제도의 불공정보다 더 큰 ‘구조의 불공정’은 대입과 취업 현장에서 명백히 작용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대치동에서 현강을 들을 수 없는 학생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남들처럼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길 원하지만, 당장 대학에 진학할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되지 않아 특성화고에 진학해야만 하는 학생들이 있다. 남들처럼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고 싶지만, 대학을 가지 못해 질 낮은 당장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에 뛰어들어야 하는 청년들이 있다. 모두 사회가 인정하는 정도(正道)를 걸을 수 없는 사람들, 술래잡기 게임에서 다리를 다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대입 제도와 채용 과정을 공정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외딴 섬 이야기에 불과하다. 애초에 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제도가 아무리 공정한들 이때의 공정성은 모두가 아닌 제도에 편입될 수 있는 이들의 이익만을 위해 봉사하게 되는 셈이다.


  흘러넘쳤던 공정성 담론 속에서, 제도를 공정하게 만들어달라는 요구는 수없이 들렸다. 그러나 그 제도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역시 제도권 밖에서도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달라는 요구는 들어보지 못했다.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지 못할수록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에 뛰어들기 쉬워지고, 점점 더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고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제도권에 편입될 수 없는 이들이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만한 다른 길(수단)이 있느냐 하면, 역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나길 금수저가 아닌 이상, 좋은 대학-좋은 직장의 루트를 타는 것이 안정된 삶을 사는 유일무이한 길인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 더 큰 불공정을 은폐하는 공정성 담론

 

  더욱 문제적인 것은, 특정 집단 진입 제도에 한정한 좁은 의미의 공정성 담론이 이러한 ‘구조적 불공정’을 은폐하고 지워버린다는 것에 있다. 더 큰 불공정을 지적하지 않고 제도의 공정성만을 개선하라는 요구는 자연히 절차나 제도‘만’ 공정해지면 모든 것이 공평하고 정의로울 수 있다는 담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담론은 다시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낳는데, 첫째로, 그 ‘공정’한 제도를 통해 상위 집단에 진입하는 것만이 옳고 그렇지 못한 방법은 불공정하다는 인식이 팽배해진다. 이는 인천국제공항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정규직 신입사원 채용’이라는 ‘공정’한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며 뭇매를 맞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둘째로, 절차나 제도‘만’ 공정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담론은 모든 것은 개인의 노력 문제로 치환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개인이 불안정한 삶을 사는 이유는 그가 ‘노력’을 하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며, ‘노력’을 한 사람만이 상위 집단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된다는 논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노력’주의 담론은 공정성 담론을 공고히 떠받치고 있다.(출처: 중앙일보, 사진에 연결된 링크)


4. 공정성 담론을 강화하는 교육

 

  현재의 공정성 담론은 이렇듯 명백한 한계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적거나 무시되기 일쑤이다.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미 사회의 너무나도 많은 기제들이 협소한 의미의 공정성 담론을 유지·재생산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기제들이 있겠지만 다 다루기엔 페이지가 모자라니 생략하고, 한 가지에만 집중해보겠다. 이제껏 논의를 이끌어왔던 중요한 키워드인 ‘대입’과 ‘취업’ 양자를 잇는 연결고리는 들 입(入) 자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교육’이다. 


  교육의 본질은 물론 공정성 담론을 강화하고 기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교육 본연의 목표는 학습자를 가르치고 능동적인 배움을 실천하게 함으로써 개개인 내면의 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은 이 역할을 실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 입시(入試)와 입사(入社)를 위한 교육

 

  한국 사회에서 교육, 특히 중등교육이 지니는 가치는 명확하다. 바로 ‘대입’이다. ‘대입’은 대학 입시와 그를 둘러싼 전반적인 평가를 말하는 것이지만, 교육은 대학 입학을 넘어선 포괄적이고 능동적인 배움을 말한다. 이렇듯 각 단어의 뜻과 목표하는 바가 명백히 다르지만, 한국 사회에서 두 가지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듯하다. ‘국영수’가 주요 과목인 이유는 수능에 공통 과목이기 때문이고, 대입 전략의 변화는 중등 교육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며, 입시에 반영이 적은 영역은 실제 교육 현장에서 무시된다. 이렇듯 중등 교육은 대학이라는 집단(특히 상위권 대학) 진입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 이외의 가치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고등교육(대학)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중등교육의 목표가 ‘대입’이라면, 고등교육의 목표는 ‘취업’이다. 대학 공대 계열이나 문과의 경영/경제가 인기 학과로 취급되는 이유는 노동시장과의 연계성이 뛰어난, 다시 말해 취업이 잘되는 학과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대학은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는 인문계고나 직업 교육을 하는 특성화고와 같이 직접적으로 다음 집단 진입과 연계한 교육에 주력하지는 않는다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최근의 대학들이 학과 입학과 동시에 취업을 보장하는 계약학과를 신설하거나,[각주:6] 산학협력이나 창업 교육에 힘쓰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대학이 노동 시장의 인재를 키워내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고등교육 역시 ‘취업’을 위한 관문이자 수단적 가치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중등교육이든 고등교육이든 교육의 목적이 개인을 좋은 대학과 직장에 보내는 것으로 변질됨으로써, 교육은 (특정 집단에 진입하는) ‘제도’의 공정성에 대한 논거를 제공해준다. 제도를 이용하여 통과할 수 있는 사람, 즉 상위집단에 진입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가려내는 역할을 교육이 하기 때문이다. 중등/고등교육과정을 충실히 이행하여 입시/입사 과정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상위집단에 진입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가장 ‘공정’한 것으로 통용된다.

# 불공정한 것은 ‘대입’이 아니라 ‘교육’이다.

 

  이렇듯 교육이 특정 집단 진입의 자격과 공정성을 판가름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이용되는 상황 속에, 결국 더 큰 불공정은 가려진다. ‘대입’과 ‘취업’이 아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 자체의 공정성에 대한 물음은 뒷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시와 정시의 공정성 싸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논란은 밥 먹듯 이뤄지지만, 수능을 치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존재하는 불공정한 상황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를 문제 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제도 이전에 그 제도에 편입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불공정한 것은 대입·취업의 제도가 아닌 그들이 마음 놓고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여건이다. 결국 진정 불공정한 것은 제도보다 교육 그 자체, 더 나아가 사회 구조인 것이다.


  더 큰 불공정이 가려지고 다시 모든 것이 개인의 노력 문제로 치환되는 양상은 교육에서 특히 강하다. 2020학년도 수능 만점자 중에 백혈병의 아픔을 딛고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 학생의 사연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각주:7] 이 외에도 갖가지 고난을 딛고 대입이나 대기업 입사에 성공한 사람들이 큰 화젯거리가 되는 예는 수없이 많다. 교육은 비교적 누구나 받을 수 있는 평등한 것,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으로 인지되기 때문에 마치 누구든 ‘노력’만 한다면 교육을 통해 원하는 집단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력을 들일 수조차 없는, 제도권 밖에 위치한 이들을 위한 길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의 취업 지원 정책도 대부분 대학을 다니고 있는 취업 준비생들을 위한 정책이며, 특성화고 졸업생이나 대학을 가지 않는 고졸 취업자들이 향할 곳은 결국 저임금·고위험의 열악한 여건의 비정규직 노동이다.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 자료에 따르면 20~34세 고졸 청년의 평균 임금(시간제 등 포함)은 184만 원으로 대졸 228만 원보다 44만 원이나 적었다.[각주:8]  

 

# 교육 현장에서 공정성 담론의 내면화


  또 다른 관점에서, 교육 현장에서의 경험들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은폐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공정성 담론을 내면화하게 만드는 데에 가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육 현장 자체가 공정성 담론을 내면화하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이다. 어느 인문계 고등학교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모아 놓은 ‘특별반’이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왜 모든 학생을 공평하게 대우하지 않고 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특별하게’ 대우해야 하는가? 그림을 잘 그리거나 게임을 잘하는 학생들을 모아 놓은 ‘특별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노력과 능력, 성적에 따라 서열을 부여하고 차별 대우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고, 이 능력 있는 사람들이 상위집단을 차지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믿는다. 왜 학생들이 장시간 공부 노동에 시달리는지, 무엇을 위해 서열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의식은 공정성 논리 하에 흐려진다. 중등교육 현장에서 이러한 논리들이 교묘하게 내면화되면, 비판의식은 흐려지고 익숙해진 매커니즘을 따라 결과적으로 사회 전반 어떤 영역에서든지 공정성 담론이 지배하게 된다. 마찬가지의 논리가 고등교육과 노동 시장에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취업 준비를 위해 많은 비용을 투자하고 노력한만큼 ‘정규직’이라는 보상을 받는 것, 그 노력을 투여하지 않고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는 논리가 학습된다. 인국공 보안요원들이 ‘노력하지 않은 채 혜택을 얻어가려는 무도한 사람들’로 간주되는 것이다.


5. 우리는 왜 그래야 하나요?

 

  공정성 담론이 더 큰 구조적 불공정을 가리고 여기에 교육 역시 기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착잡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차분히 생각을 가라앉히고 나면 의문들이 다시 떠오른다. 그렇다면 교육은 왜 그래야 하는가? 이 모든 현상들은 경쟁과 능력주의 담론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공정성 담론이 더 큰 구조적 불공정을 은폐한다면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하필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였던 이유, 우리가 그토록 대입과 취업, 공정성에 집착하는 이유 말이다. 

 

# ‘수단’이 아닌 ‘목적’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로부터 대입과 취업, 그로부터 공정성, 교육까지. 논의를 이끌어오면서 우리 모두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결국 앞서 나열한 것은 모두 ‘수단’이다. 대입과 취업, 공정성과 교육 모두 ‘더 나은 삶’,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이제껏 잊고 있었던 것은 목적이다. 우리는 어떤 삶을, 어떤 사회를 살고 싶은가 하는 것이다. 


  목적과 수단이 전치되는 상황 속에,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와 대입과 취업 제도를 공정하게 해달라는 요구와 같은 의미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양자는 명백히 다르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대입과 취업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편입될 수 없는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상위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서로를 밟고 경쟁하게 해달라는 요구는 더더욱 아니다.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정규직이 되지 못하면 사회에서 탈락되고 불안정한 삶을 사는 사회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지 먹고 입고 자는 것을 안정적으로 누릴 수 삶,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삶이다. 전월세 계약 기간이 끝나도 다른 집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지 않고, 고용 기간이 끝나도 다른 일자리를 찾고 노동한 만큼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삶. 그것이 우리 모두가 원하는 삶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조금만 생각을 비틀면 우리가 요구할 것은 제도의 공정성 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전혀 다른 요구를 할 수도 있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비정규직이어도 안정되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해 달라는 요구 말이다.

 

# 공정성 담론을 넘어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는 반문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사회주의 국가를 원하는 것인가요?” 경쟁과 능력주의를 통해 서로를 밟고 일어서고 그만큼 대우를 받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마치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모든 상황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 더 나은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핀란드·스웨덴 등 북유럽의 선진국들 역시 균등분배를 주창하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게 아니라 시장경제 체제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이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이 90%에 육박하는 반면 북유럽 나라들의 대학 진학률은 40%대이다. 이 나라들에서는 대학을 가고 싶은 사람‘만’ 가기 때문이다. 공부가 죽도록 싫지만, 취직과 경쟁 때문에 할 수 없이 대학에 가야 하는 한국 사회와는 대조적이다. 그렇기에 청소년들은 시험지옥에도, 입시 경쟁에도 시달리지 않는다. 이렇게 모두가 대학을 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굳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도 질 좋은 일자리를 가질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인간답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는 벽돌공의 수입이 대기업 정규직이나 대학교수와 큰 차이가 없다. 때문에 의사가 될 수 있을 만큼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스스로 벽돌공이 된다.[각주:9]


  과연 이런 나라들에서도 대입과 취업 제도의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매우 중요할까? 높은 확률로 아닐 것이다. 정시와 수시 공정성 싸움이 밥 먹듯 일어나고, 대기업 신입사원 공개 채용 제도를 통과하기 위해 수천, 수만 명이 목매는 사회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과연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사회인가.


  우리는 이러한 다른 종류의 사회에 대한 상상을 제약하는 공정성 담론에 더이상 얽매여서는 안된다. ‘수단’보다 ‘목적’에 집중하며, 다른 종류의 의문을 던지고 다른 방향으로 담론을 이끌어야 한다. 왜 우리는 상위집단에 진입해야만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가? 왜 대입과 취업에서의 공정성만 제도권 밖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가? 왜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서로를 밟고 일어서며 경쟁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해 좋은 직장에 취업해야 하는가? 왜 실패했을 때 책임과 위험성은 노력하지 않은 개인이 모두 떠안아야 하는가? 명문대를 나오지 않거나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 새로운 요구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요구를 할 필요가 있다. 이때 명심해야 할 것은 요구를 개개인에게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구조적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요구는 개인이 아닌 구조에 가해져야 한다. 


  물론 공정성 담론 이후 많은 이들이 국가에 제도를 공정하게 만들라는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이 논리 뒤에 내재되어 있는 보다 근원적인 요구는 제도는 ‘공정’하니 이 제도를 이용해 상위집단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는 개인들을 향한 요구이다. 결국 청소년들에게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라거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공개 채용 제도를 통과해 공정하게 입사하라는 요구가 가장 아래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적 모순이 존재한다면, 이를 해결할 책임은 결코 개개인에게만 있지 않다. 불공정한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임금 돈을 가진 자본(기업)과 집행력을 가진 국가도 함께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큰 힘을 가진 국가와 자본이 어쩌면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상상을 지운 채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가장 편한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설령 자본주의 아래 경쟁 논리와 능력주의 담론이 자연스럽다고 해도, 우리 사회가 수많은 구조적 불공정을 안고 있다면 우리 모두 이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다면 어떤 요구를 해야 하는가? 결국 수단이 아닌 ‘안정적인 삶’이라는 목적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해야 할 것은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한 ‘무능한’ 학생들을 비난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요구할 것은 그들에게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고 공개 채용을 하는 ‘공정한’ 제도를 통과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왜 대학에 가려고 하는지, 정규직이 되려고 하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제도를 공정하게 만들라는 요구 뒤에는 대학에 가지 않으면, 비정규직이면 살기 힘들다는 분노가 있었다. 설사 학생부종합전형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있었을지라도, 그 뒤에는 결국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의 절박한 열망이 있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는 것은 당연히 훌륭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 노력을 기울이기 힘든 제도권 밖의 사람들 역시 안정되고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를 해야 한다. 집을 살 만큼의 돈이 없어도 전월세 계약이 끝나고 쫓겨날 걱정을 하지 않는 사회,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도 먹고 자고 취미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생활이 보장되는 사회, 그에 따라 모두가 좋은 일자리를 위해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6. 나가며 : 가지 않은 길


  정시 수시 논란·정규직 비정규직 논란은 결국 공정성에 관한 소모적인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더 큰 구조적 불공정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는 허울뿐인 공정성 논란이었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제도권 밖의 사람들까지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는 비판은 상대적으로 많이 들리지 않았다. 다른 종류의 의문과 사회를 상상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가 공정성 담론을 넘어선 전혀 다른 종류의 의문을, 요구를, 교육을, 사회를 상상할 수 없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리에게는 대학에 가기 위해 장시간 공부 노동에 시달리는 고등학생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목매는 25만 명의 취준생들이 너무나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한국 사회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에, 이를 넘어선 사회에 대한 가능성과 상상을 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다.


  제약된 상상 속에 진정 불공정한 것은 가려지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문은 점점 더 좁아만 간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우리는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더 치열하게 경쟁하고, 서로를 밟고 일어서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제도권 밖에 위치한 약자들일수록 점점 더 사회적·경제적 안전망 밖으로 내몰린다.


  공정성에 대한 치열한 투쟁은, 이제 이러한 잔인한 사회를 살기 지쳤다는 새로운 투쟁으로 도약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지 않은 길’을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공정성 담론을 넘어선 사회, 전혀 다른 교육이 이루어지는 전혀 다른 사회 말이다. 직업이 서열화되어 있고 비정규직이 질 낮은 노동조건에 시달리지 않는 사회. 임금에 있어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사회. 그에 따라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고, 대학을 가고 싶은 사람만 가는 사회. 중등 교육 현장에서 대입이라는 한 가지 길이 아닌 교육 기회가 다양해지는 사회.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더라도, 약자까지도 안정되고 인간다움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오길 희망하며 이 글을 마친다.

 

 

 

 

BDUCK

  1. <[신년여론조사④] “공정과 안전”…2020 한국사회 핵심 가치>, news.kbs.co.kr/news/view.do?ncd=4354157 [본문으로]
  2. <문대통령, 공정만 37번 언급…분노한 청년민심 다독이기>, www.yna.co.kr/view/AKR20200919040100001 [본문으로]
  3. <[소득격차 확대]① 상위 10%가 싹쓸이…1980년대와 달라진 한국>, news.kbs.co.kr/news/view.do?ncd=4159214 [본문으로]
  4. <[소득격차 확대]⑨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인가>, news.kbs.co.kr/news/view.do?ncd=4189374  [본문으로]
  5. 이강빈, <민주시민의식으로서의 공정성에 관한 도덕교육적 의의 : 중등도덕교과교육을 중심으로>, 도덕윤리과교육연구, 제29호, 한국도덕윤리과교육학회, 2009 [본문으로]
  6. 최근 대학이 기업과 연계해 학생들에게 입학과 동시에 취업을 보장하는 ‘계약학과’를 신설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2021년 대입에서 고려대와 연세대는 SK하이닉스·삼성전자와 계약을 맺고 각각 ‘반도체공학과’, ‘시스템반도체공학과’라는 반도체 분야 계약학과를 신설하였다. [본문으로]
  7. <[단독]“고3 항암치료 고통… 환자돕는 의사 될래요”>, www.donga.com/news/People/article/all/20171225/87887947/1 [본문으로]
  8. <[잊혀진 청년들] 고졸, 임금 20만원 오를 때 대졸 50만원 훌쩍… 초과근로 비율은 더 높아>, www.hankookilbo.com/News/Read/201712020459627875 [본문으로]
  9. 하종강, <우리가 몰랐던 노동 이야기> [본문으로]

  대입과 취업에 관련된 정책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게 들려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정성을 요구하는 담론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피고자 합니다. 공정함에 속아 다른 소중한 가치를 잊은 것은 아닌지. "공정 너머의 길"을 따라가며 함께 고민해봅시다.

 

<공정 너머의 길> 소개 이미지

  우리는 늘 가던 길을 갑니다. 곳곳에는 불만이 터져 나오지만, 구조 자체를 의심하기보다, 늘 그랬듯 개인에게 더 노력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우리가 가던 길을 의심해보고, <또 다른 길>을 가보고자 합니다. 올해 공정성 담론이 화두 되었는데, 공정성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동안의 환경 교육은 잘 이루어졌나요? 대학에서 학생들은 어떻게 권리를 찾아야 할까요? 이번 호가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 때, 단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무턱대고 교육저널에 들어왔습니다. 정돈된 글을 쓰는 방법을 몰랐고, 새로운 주제에 대해 저만의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참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의견이든 존중해주고, 개인의 고민을 공동체가 함께 해결하려는 교육저널만의 분위기가 좋았습니다. 벌써, 교육저널에 들어온 지 1년이 흘렀고, 알게 모르게 조금은 발전한 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늘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들을 한 번 더 고민하게 되게 되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다른 부원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매주 세미나와 토론하는 시간을 통해, 모든 구성원의 생각이 담긴 교육저널의 시선이 만들어졌습니다. 이러한 시선이 여러분들께도 닿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이번 학기 교육저널은 편집장이 없는 체제로 운영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운영하는 방식으로 초반에는 혼란을 겪었지만, 모든 구성원의 노력으로 또 한 번 소중한 결과물을 낼 수 있었습니다. 교육저널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이번 호를 읽고 교육저널의 시선에 함께 해 주실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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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후기  (0) 2021.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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