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증유(未曾有)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 유행으로 인해 세계는 팬데믹(pandemic)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2020년 한 해 전 세계는 전대미문의 비대면 시대를 보냈으며, 2021년 현재까지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2020년 2월 대구ㆍ경북 지역에서의 확산세로 인해 ‘심각’ 단계에 접어들었고, 3월에는 개학을 앞두고 역사상 유례없는 개학 연기를 세 차례나 겪었다. 그리고 마침내 3월 31일에 정부는 ‘초중고특 신학기 온라인 개학 실시(코로나 19)’라는 제목으로 ‘온라인 개학’이라는 용어를 공식 발표하였다.[각주:1]


  이러한 변화에서 날이 갈수록 디지털 미디어의 활용은 날로 중요해지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정보 사회에서 정보의 형평성과 정보 공유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학생과 시민들이 미디어와 정보에 접근하는 능력, 문자나 이미지 및 영상 등을 독해할 수 있는 능력, 정보를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 정보를 다양한 상황에 이용하고 다른 사람들과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이를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라고 한다.[각주:2]


  우리나라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현재 독립된 교과목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으며, 도서관과 같은 독립된 교육기관에서 이러한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경우도 찾기 힘든 실정이다. 각급 학교에서 사서 교사는 대체로 교과 수업을 담당하지 않으며, 다만 때때로 ‘도서관 이용 교육’이나 ‘독서 교육’과 같은 명목으로 학생들을 마주친다. 그마저도 국어 교사가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상황을 바탕으로 하여,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를 먼저 논해본 후, 현재 우리나라에서 그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고 사서 교사와의 관련성 속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향방을 살펴보겠다.

미디어 리터러시의 개념과 구성 요소

 

  본래 ‘리터러시(literacy)’라는 단어는 라틴어를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하던 단어로, ‘문해력(文解力)’이라고 한역하기도 한다. 굳이 라틴어였던 이유는 전근대 유럽 세계에서 지식인의 척도가 라틴어에 대한 문해력이었기 때문이다.[각주:3] 오늘날에 리터러시는 라틴어가 아니라 각국의 언어, 나아가 정보 사회에서의 ‘정보 매체에 사용된 언어’로 그 의미가 확장되고 있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 개념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다양한 설명이 있다. 이에 대하여 정현선 외 5인은 미디어 리터러시를 “정보·문화 콘텐츠에 대한 적절한 접근 및 비판적 이해, 미디어를를 활용한 정보ㆍ문화 생산 및 전달 능력, 미디어를 윤리적이고 책임 있게 이용하는 태도를 포함”[각주:4]한다고 정의하였다. 박주현ㆍ강봉숙은 미디어정보 리터러시를 “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능동적인 민주시민이 되기 위해 비판적으로 사고하고 층위가 다양한 미디어의 도구들을 활용하여 미디어의 환경을 이해하고 미디어 속 정보에 접속하고 정보를 이해하고 감상하고 평가하고 이용하고 창작하고 공유할 수 있는 지식, 스킬, 태도가 포함된 역량”이라고 정의하였다.[각주:5] 이러한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은 다음의 6가지를 포함한다.

  이 6가지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은 어느 하나만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의 학습 수준과 연령 정도에 따라 점진적으로 모두 추구되어야 한다. 미디어의 기술적 조작ㆍ사용법과 제작 방법에서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여도, 그가 미디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부적절한 언행을 남용하고 정보 수용에 있어 확증편향을 보인다면, 그는 올바른 미디어 리터러시를 지니지 못한 것이다. 더불어 이들 영역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어, 어느 한쪽 역량만을 콕 찝어 늘릴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미디어가 실어 나르는 쟁점들에 대한 비평 능력과 이를 통한 의사소통 능력은 ‘말하기’와 ‘쓰기’의 차원일 뿐이지 사실상 거의 유사한 능력이다. 더군다가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미디어에 대한 기술적 사용법의 숙지가 선행되어야 하므로, 미디어에 대한 접근/활용 능력은 이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역으로 어떤 사람이 미디어에 대해 접근/활용만 할 수 있지 그것에 대해 제대로 비평ㆍ의사소통할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면, 그는 마치 ‘실질적 문맹’ 상태에 있는 것과 같아서 우리는 그가 제대로 미디어에 대해 접근한다고 부르기 힘들 것이다. 그렇다면 이 6가지 역량은 우리나라 교육에서 제대로 반영되어 이루어지고 있는가? 그보다 먼저, 이들 역량을 교육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필요성


  ‘미디어 리터러시를 교육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다음의 두 가지로 구성된다. 첫째, 미디어 리터러시를 우리 교육에 포함해야 하는가? 둘째, 미디어 리터러시를 따로 독립된 교과목으로서 교육해야 하는가? 전자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정당성 자체에 관한 것이고, 후자는 미디어 리터러시가 교육에서 차지하는 위치, 다른 교과와의 연계 방법에 관한 것이다.


  미디어 리터러시를 교육에 포함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류 역사의 상당한 기간 동안 인쇄 매체는 정보를 습득할 수 있는 유일한 매체였다. 처음에는 비단에 글을 썼고, 후에는 종이에 글을 썼다. 활판 인쇄술이 개발된 이후 정보의 전파 속도는 날로 증가하였고, 신문이 대량으로 인쇄되며 언론이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매체의 발전은 정보화 이후의 매체 발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디지털 매체가 등장하면서 매체의 특성은 몰라보게 바뀌었다. 매체가 전달하는 정보의 양과 속도는 매우 크게 증가하였고, 이제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사건 발생 이후 즉시 파악할 수 있다. 1980년의 대한민국의 광주에서 군부는 단지 방송 송출을 막고 지역을 봉쇄함으로써 민주화 운동을 억제할 수 있었으나, 2011년의 튀니지에서는 혁명이 SNS의 바람을 타고 이슬람 문화권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변화에는 늘 명암이 있기 마련이다. 201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 사회에는 ‘가짜 뉴스(fake news)’라는 단어가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자극적인 거짓 정보를 여기저기 나르는 뉴스를 뜻하는 이 개념은 이른바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사람들을 현혹하는 거짓은 진실이 설 자리를 잃게 하고 사람들은 잘못된 정보를 진실로 받아들인다. 과거보다 더욱 빨라진 정보의 확산 속도로 인해 이러한 거짓 정보는 SNS의 바람을 타고 전국으로, 전 세계로 손쉽게 확산된다. 가짜 뉴스를 생산하는 이유는 자신의 주장이 정계에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라면 추악한 짓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일부 비양심적인 사람들의 정치적인 이유도 한 몫 하지만, 자극적인 정보를 확산함으로써 조회수를 늘리고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언론인들의 경제적인 이유도 존재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에 드는 정보만을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시민들의 확증편향은 가짜 뉴스를 더욱 부추긴다. 진실과 거짓이 한데 범람하는 ‘정보의 홍수’를 막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단연 정부에 의한 조직적인 언론 규제일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위협이 되는 가짜 뉴스의 남발을 마기 위해 정부의 언론 규제를 허용하자는 것은 도리어 민주주의에 또 다른 위협을 불러일으키고 말 것이다. 따라서 어떤 매체가 건전하고 정확한 정보원인지 가려내는 개인의 역량 강화가 요청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접근했을 때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원용진은 ‘가짜 뉴스’에 대항하는 ― 그리하여 시민들을 이로부터 ‘보호하는’ ― 프레임(frame)으로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설정하는 것의 문제점으로 다음을 제기한다. 첫째, 보호의 대상을 어린이나 청소년 등으로만 설정할 가능성이 크다. 둘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결과 ― ‘미디어의 폐해를 정확히 인지하자’ 따위의 ― 를 낳을 수 있다.[각주:6] 어떤 뉴스가 ‘진짜 뉴스’이고 어떤 뉴스가 ‘가짜’ 뉴스인지는 전문가조차 판별하기 어려운 문제이며 때로는 인식론적 문제를 수반하기도 한다. 물론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정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용한 것은 아니다. 정보 사회에서 건전한 시민으로 살기 위해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필수 조건이다. 다만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마치 언론의 모든 부정적인 면모를 단박에 일소해 주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인지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미디어의 특성에 대해 소개하면서, 미디어가 어떻게 사람을 속일 수 있는지, 가짜 뉴스는 왜 생기고 이로 인한 문제는 왜 발생하는지 등을 추가적으로 내용 요소에 포함할 필요성이 있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시하면서 앞서 제시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단지 초등 ― 중등 ― 고등의 학교교육의 틀 안에 제한하지 말고 평생교육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이미 학교를 졸업한 성인 계층의 경우, 학교교육을 중심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실시할 때 소외될 가능성이 크다. 만약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학교교육에만 한정한다면 교육받은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 사이의 갈등은 커질 것이고, 결국 부패 언론의 문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둘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한계를 인정하고 미디어 개혁 운동과 함께 연대해야 한다.[각주:7] 부패 언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지 시민들에게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을 길러라!’라고만 요구하는 것은 사태의 근본적 원인을 파악하지 못하고 시민들에게 문제의 책임 소지를 돌리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시민들이 가짜 뉴스로부터 해방될 권리, 진실을 알 권리가 있음을 스스로 인지하고 자신의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통해 대안 미디어를 구성하고 스스로 올바른 정보를 창출ㆍ전파하며, 나아가 정확한 정보를 생산할 것을 언론에 스스로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다른 언론 대상 시민 단체들의 활동과도 함께 연대해야 할 필요성을 지닌다.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보호주의적 시각에서 탈피하여 시민 스스로 미디어를 선택, 수용하고 올바르게 사용하는 능력을 함양하는 차원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각주:8]


  물론 학교 교육 차원에서와 평생 교육 차원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모두 서술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본서는 지면의 한계상 전자에 집중하여 서술하고, 후자에 관한 것은 후속 연구로 미루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아직 학교 교육에서 제대로 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평생 교육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내용을 개발하는 것에는 다소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우선 학교 도서관의 사서를 통한 학교 교육 체제에서의 미디어 리터러시에 관해 본서에서 다룬 후에, 학교 및 지역 도서관의 사서를 통한 평생 교육 체계에서의 미디어 리터러시에 관해 후서에서 다루어 보겠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과의 필요성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을 전후하여 교육학계에서 미디어 리터러시에 주목하기 시작하였으며, 다양한 교과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기르기 위한 연구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교과별로 최근의 대표적인 연구들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국어과의 박종임은 현행 국어과 교육과정에 담긴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 관련 내용들을 분석하여 현행 교육과정이 지나치게 ‘문자 언어 기반의 글 자료’를 대상으로 한정하고 있음을 밝히고 미디어 리터러시 관련 역량을 학년(군)별로 위게화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각주:9] 도덕과의 이석영은 뉴 미디어 알고리즘의 부정적 측면들인 ‘필터 버블(filter bubble)’,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effect)’,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 등을 제시하면서 고등학교 ‘생활과 윤리’ 교과에서 뉴 미디어 플랫폼의 알고리즘이 미디어 사용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각주:10] 사회과의 이희심은 텔레비전 뉴스를 소재로 뉴스 언어 기호 체계 알기, 기사 받아쓰기, 서사 구조 파악하기, 사실성 검토 및 의미 찾기, 카메라의 숏과 앵글 확인하기 등의 활동을 통하여 ‘게이트키핑(gatekeeping)’과 ‘프레이밍(framing)’, 뉴스에 담기는 이데올로기를 파악하는 방법을 교육하는 수업 모형을 개발하였다.[각주:11] 음악과의 오지향은 디지털 기술의 변화가 대중음악의 제작ㆍ배포 양식 및 음악 감상자들에게 미치는 역할을 분석하고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음악 교육에 접목하여 팟캐스팅, 필드 레코딩 등의 음악 제작 교육을 통해 학생이 스스로를 미디어 제작자로서 정체성 지울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각주:12]


  보다시피 다양한 교과목에서 많은 수의 연구자들이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현행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도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수수방관하고 있지 않다.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은 이렇듯이 교사의 역량에 따라 여러 교과목에서 다각도로 시행될 수 있는 현황이다. 그러나 나는 현행 체제를 넘어서 미디어 리터러시만을 따로 가르치는 교과목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각 교과별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각자 담당하다 보면, 학생은 통합적인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기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미디어 리터러시는 지식, 비평, 의사소통, 접근/활용, 구성/제작, 참여라는 6가지 역량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들 중 어느 하나의 역량만을 길렀다고 하여 그 사람이 참된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기른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각 과목에서 따로 따로 미디어 리터러시를 배우다 보면, 가령 도덕과에서는 윤리적인 ‘참여’ 능력만 기를 수 있고 사회과에서는 ‘비평’ 능력만 기를 수 있으며 음악과에서는 ‘접근/활용’ 능력만 기를 수 있을 것이다. 6가지 역량이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미디어 리터러시임을 고려할 때, 이러한 분절적 교육은 교육의 효율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물론 혹자는 각 교과 교사가 미디어 리터러시의 6가지 역량을 한꺼번에 향상하는 교육 내용을 구성할 수도 있지 않겠냐는 의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각 교과 교사는 우선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교과의 내용 요소와 주요 역량을 교육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고, 그런 상황에서 미디어 리터러시는 뒷전으로 물릴 수밖에 없다. 예컨대 사회과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담당한다면, 사회 교사는 사회과의 내용 요소와 사회과에서 주로 기르고자 하는 학생의 역량을 제쳐두고서 미디어 리터러시의 역량을 모두 골고루 향상하기 힘들고, 그것은 또한 바람직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각 교과 교사는 일차적으로 그리고 우선적으로 자신의 교과를 가르칠 책임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미디어 리터러시를 독자 교과로 편성한다면 미디어 리터러시를 학생들에게 책임 지고 가르칠 수 있는 하나의 전문 인력이 탄생하게 되는 셈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역량들을 모두 다루면서 체계적으로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을 함양하게 하는 독립적인 ‘미디어 리터러시’ 교과가 필요하다. 물론 이는 현재 여러 교과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삭제ㆍ폐기하고 모두 신설 과목으로 이관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과목에서 미디어 리터러시를 분절적으로 교육하는 현행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이를 유기적으로 통합할 수 있는 새로운 교과목을 만들어야 한다. 특히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학생들의 교과목 선택과 교육과정의 다양화가 추구되고 있는데, 이를 고려하여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공통 과목들(국어, 영어, 통합사회 등)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조금씩 기른 뒤, 2∼3학년 때 독립적인 과목을 선택함으로써 학생의 리터러시 역량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2∼3학년군의 여타 일반선택/진로선택 과목들에서도 조금씩 학습활동의 영역에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계발할 수 있는 활동들을 삽입한다면, ‘미디어 리터러시’를 독립 과목으로 배우고 있는 학생은 여러 과목에서 함께 미디어 리터러시 역량을 강화하여, 기존의 분절적ㆍ단편적인 지식 습득의 한계를 넘어서면서 또한 여타 과목과 융합하여 지식을 배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

 

[미디어 리터러시 ②] 미디어 리터러시 교과 개발의 필요성에 관한 소고 (2)

전편에서 이어집니다. https://edujournal2018.tistory.com/94?category=891830 [미디어 리터러시 ②] 미디어 리터러시 교과 개발의 필요성에 관한 소고 (1) 미증유(未曾有)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COVID-19) 유..

edujournal2018.tistory.com

 

정우맘 팽현숙

  1. 김상미, 「코로나19 관련 온라인 교육에 관한 국내 언론보도기사 분석」,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논문지』 21(6), 한국디지털콘텐츠학회, 2020, p.1092. [본문으로]
  2. 박주현ㆍ강봉숙, 「미디어정보리터러시 개념과 교육내용 개발」, 『한국도서관ㆍ정보학회지』 51(3), 한국도서관ㆍ정보학회, 2020, p.224. [본문으로]
  3. 서양에서 동아시아 세계를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의 경우 10세기 이후 동아시아 세계에 부상하는 ‘문인(文人)’ 세력을 ‘literatus’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 이들이 지닌 리터러시(literacy)는 라틴어가 아니라 한문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을 말할 것이다. [본문으로]
  4. 정현선ㆍ김아미ㆍ박유신ㆍ전경란ㆍ이지선ㆍ노자연, 「핵심역량 중심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내용 체계화 연구」, 『학습자중심교과교육연구』 16(11), 2016, p.233. [본문으로]
  5. 박주현ㆍ강봉숙, 앞의 글, p.244. [본문으로]
  6. 원용진, 「미디어 생태학적 관점에서 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한국언론학회 編,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서울: (주)도서출판 지금, p.34. [본문으로]
  7. ibid, p.36. [본문으로]
  8. 정현선ㆍ김아미ㆍ박유신ㆍ전경란ㆍ이지선ㆍ노자연, op.cit., p.230. [본문으로]
  9. 박종임, 「디지털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개선을 위한 국어과 교육과정 현황 분석」, 『청람어문교육』 81, 청람어문교육학회, 2021, p.32-33. [본문으로]
  10. 이석영, 「도덕과 교육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개선을 통한 도덕성 발달」, 2019년 한국윤리교육학회 추계학술대회, 한국윤리교육학회, 2019, p.119. [본문으로]
  11. 이희심, 「사회과에서의 미디어 리터러시 수업모형」, 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2013, pp.69-76. [본문으로]
  12. 오지향, 「음악교과에서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의 필요성과 역할 강화 방안」, 『미래음악교육연구』3(1), 미래음악교육학회, 2018, p.43. [본문으로]

SBS '그것이 알고 싶다' 화면 캡쳐, 시사인, '[말말말] “우리는 유튜브만 믿어! 유튜브가 진실이야!"

1. 우리는 유튜브만 믿어!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낀다.  스마트폰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지는 10년이 조금 넘었고, 유튜브나 페이스북 등의 SNS가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된 지는 더 짧다. 그렇지만 이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새로운 미디어가 제공하는 자극적인 정보를 판단할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순식간에 어마어마한 정보량에 휩쓸린 사람들은 그것에 적응할 새 없이 중독되어버렸다.


  애초에 사람들의 판단력이 미성숙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볼 수도 있겠다. 물론 옳은 설명일 수 있으나, 과거의 미디어와 지금의 미디어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새로운 미디어는 사용자에게 맞춤형 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유튜브는 사용자를 파악하고 사용자가 보고 싶어 할 만한 콘텐츠를 내놓는다. 우리는 신문사나 방송사의 정치 성향을 파악하고 언론에서 제공하는 정보들을 판단할 수 있으나, 새로운 미디어에서는 역으로 미디어가 사용자를 판단한다. 그것도 아주 세심하게, 맞춤으로. 예전에는 보고 싶지 않은 소식들도 강제로 들어야 했다면, 이제는 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본인이 애써 노력(?)해야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가끔 유튜브의 알고리즘이 미흡하여 꼴 보기도 싫은 콘텐츠를 소개해줄 수도 있겠지만.


  나와 다른 사람이 연결되는 것, 그것은 적당한 공통의 기반과 소통을 통해 가능하다. 공통의 기반을 발견하고 소통을 이어나가는 것은 쌍방이 노력을 해야 하고, 다들 알다시피 매우 어려운 일이다. SNS,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관계 맺음에 빠른 속도와 편리함을 주었지만, 관계 맺음의 내용에 대한 성찰은 부족하다. SNS가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은 광고이고, SNS를 운영하는 기업은 자본주의 체제에 종속되어있다. 사용자가 광고를 많이 보게 하는 것, SNS를 길게 사용하게 만드는 것만이 SNS가 잘 되는 길이므로 정보 제공도, 친구 추천도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을 보여준다. 결국 우리는 SNS상에서도 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고, 다른 영역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넉 달 전, 4월 24일 고(故) 손정민 군은 서울 반포한강공원에서 친구 A 씨와 술을 마시고 잠든 뒤 실종되었다. 며칠 후 그가 시신으로 나타나자 손정민 군의 아버지는 그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의혹을 제기했고, 용의자로 A 씨를 지목했다. 그러나 A 씨의 혐의점은 경찰 조사에서 밝혀지지 않았고, A 씨는 입장문을 밝힌 후 가짜뉴스와 악플에 대한 고소를 이어가고 있다. 여전히 이 사건에 조사할 것이 남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A 씨에 대한 의혹을 집요하게 생산하고 있기 때문이다.[각주:1]


  미리 말하지만 필자는 손정민 군의 사망은 안타까운 사고 그 이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필자의 판단으론, 고(故) 손정민 군의 사망을 '사건'으로 불러야 한다면 그 이름은 사망 그 자체에 붙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망 이후 몇몇 사람들의 편협한 사고가 만들어낸 마녀사냥, 악의적인 증거 날조, 선동에 붙어야 하는 이름이다. 아주 단순한 사고가 어마어마하게 몸집을 불려 대한민국의 여름을 떠들썩하게 만든 이 상황이야말로 당황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아주 안타까운 일이다. 주목을 받아야 할 억울한 죽음들이 잊혔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이슈를 판단하는 능력이 고작 이 정도였기 때문에, 언론과 미디어는 떠오르는 이슈에 목 빼고 동조하기 바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유튜브가 진실이 되어버린 이 상황에서, 일개 사용자인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지금부터 미디어 사용자가 생각해볼 수 있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2. '틀딱'과 '문맹'은 기술이 결정한다.


  필자와 필자의 외할아버지는 평소에 교류가 많고, 집도 가까워 5분 걸어가면 만날 수 있는 곳에 산다. 한번은 필자가 할아버지께 전화했는데, 두 통, 세 통을 해도 전화를 받지 않아 걱정했던 일이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할아버지는 필자의 집으로 찾아왔는데, 필자가 전화한 것을 전혀 모르는 눈치셨다. 그래서 "전화를 왜 안 받으셨냐" 여쭤보니, 전화음이 무음이 되어있어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근데 더 놀란 것은 무엇이었냐면, 그렇게 된 지 이틀이 지났는데 무음 해제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셨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의 할아버지는, 단순한 폴더폰을 계속 사용하시다가 비교적 최근에 스마트폰을 사용하게 되셨다. 작동법도 낯설고 외양이 훨씬 단순해진 스마트폰을 마주한 할아버지는 아주 기본적인 기능도 하나하나 배워서 알아야 했지만, 어디에서도 그것을 일일이 가르쳐주는 곳은 없었다. 할아버지 친구분들은 할아버지와 거의 비슷한 상황인 경우가 많았고, 가족들은 스마트폰에 익숙해진 지 한참 되어 할아버지의 불편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한참을 휴대폰 없이 다니셨고, 요새는 조금 익숙해지셔서 포털 사이트를 이용해서 검색까지 하실 줄 알게 되었다.

 

  정용찬 정보통신정책연구원 ICT통계정보연구실 데이터사이언스그룹장이 발표한 '호모 스마트포니쿠스(Homo Smartphonicus), 세대별 진화 속도' 보고서에 따르면 70대 이상 스마트폰 보유율은 2013년 3.6%에서 2018년 37.8%로 매우 증가했다.[각주:2] 그러나 스마트폰 보급률과는 별개로, 스마트폰의 기능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지는 미지수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60세 이상 노년층의 모바일 뱅킹 이용률은 5.5%에 불과하고, 카카오뱅크와 케이뱅크에 가입한 65세 이상 가입자 비중은 2019년 1월 기준 1%를 넘지 않았다.[각주:3] 이러한 불편함의 원인으로 스마트폰 사용환경이 고령자의 신체적/인지적 특징에 맞추어지지 않았단 사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한다고 생각해보자. 스마트폰 특성상 작은 화면을 손가락으로 섬세하게 조작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노인들의 경우 움직임이 둔해지고 지문이 닳아 조작이 힘들다. 여기에 노안으로 휴대폰의 글씨를 키우면 화면 안의 정보량이 적어지고, 한 번에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어진다. 온라인으로만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아지는데 노인들은 그러한 환경에 적응하기가 더 힘든 것이다. 아울러 '데이터', '와이파이' 같은 신조어는 영어에 기반을 두고 있어,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고령자들은 스마트폰을 사용하기 위해 언어 장벽을 넘어야 한다.


  복잡한 은행 업무를 비롯해 거의 모든 일을 인터넷과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게 되었지만, '모든 사람'이 그 혜택을 받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도구에 대한 이해와 사용 능력이 부족한 탓에, 노인들은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정보를 판단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스마트폰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다양하지 않아 특정 앱, 미디어에의 의존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프린스턴 대학과 뉴욕 대학의 공동 연구에 따르면, 2016년 미국 대선 기간 동안 전체 8.5%의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떠돌아다니는 가짜뉴스를 공유한 데 비해 65세 이상의 사람들은 11%가 가짜뉴스를 공유하는 데 참여했다.[각주:4]


  상황이 이러한데 미디어를 사용하지 못하거나 극단적인 방식으로 사용하고 있는 노인들에 대한 비방은 줄어들지 않는다. "집에서 편리하게 은행 업무를 다 할 수 있는데 왜 어르신들은 굳이 오프라인 은행을 찾아가냐"는 조소 섞인 비난, 나이 많은 극우 유튜버들을 보면서 틀딱이라고 비웃는 사람들. 이런 말들은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하는 수많은 이들을 폄하하고 배제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구나 답답함 없이 기기를 쓰고 싶지 않을까? 기기가 이미 사용자를 다양하게 규정하지 않는데, 약자 개개인에게 시대에 뒤떨어진다며 더 배울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수많은 틀딱과 디지털 문맹을 만들어낸 것은 미디어의 진보와 발전에서 약자를 배제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개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미디어의 진보와 발전에 약자의 목소리를 포함하는 것이다.

 

 

3. 그리고 가짜뉴스는 공격하기 쉬운 대상을 찾아낸다.


  앞에서 노인들의 이야기를 하긴 했으나, 사실 확증편향은 노인에게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노인들의 신체적/인지적 특성과 미디어 사용 환경이 잘 맞지 않아 그럴 위험이 더 크다는 것이지, SNS는 이미 그 자체로 사용자가 확증편향을 가지게 할 가능성이 크다. 


  생각해보자. SNS는 누구나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SNS 운영 수익은 어디에서 나올까? 누구나 아는 답이지만, SNS의 수익은 광고에서 나온다. SNS는 필연적으로 사용자가 광고를 많이 볼 수 있도록 오랜 시간 붙잡아놓아야 하고, 사용자 개인의 정보를 수집하여 맞춤 정보, 맞춤 광고를 적절하게 띄운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여기로 이끌었다'는 식의 농담은, 다시 생각해보면 유튜브가 당신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계속 붙잡아뒀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는 사이에 당신은 유튜브 프리미엄을 끊지 않은 이상 광고 한두 편을 더 볼 것이고, 또 다른 추천 영상에 이끌릴 것이고, 다시 광고를 보고... SNS는 이렇게 사람들을 끌어들여 쉽사리 빠져나가지 못하게 한다.[각주:5]


  SNS는, 특히 유튜브의 경우 사용자의 시선을 계속 붙잡아두기 위해서 더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영상을 추천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했던 프린스턴 대학과 뉴욕 대학의 공동연구에서도, 극성 트럼프 지지자(=힐러리 극성 반대자)일 경우 가짜뉴스를 퍼 나르는 빈도가 더 높았다. 최근 한국에서도 극우파 유튜브 발 가짜 뉴스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이를테면 "코로나 양성 확진자를 보건 당국이 허위로 양성하고 있다"라거나, "(코로나 확진자를 격리해놓는 것이) 정치적 탄압이 아니냐"라는 자극적인 주장을 펼치는 것이다.[각주:6] 서두에 다루었던 고 손정민 군의 사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발언들은 마치 사실인 양 포장되어 여기저기 퍼지고, 미디어를 편향적으로 접하는 사용자들에게 특히 큰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확증편향은 더 폭력적으로 사회의 어떤 면을 재생산한다.


  어떤 가짜뉴스는 이런 확증편향을 자극하여 조회수를 늘리기 위해 사회의 구조적인 차별, 뿌리 깊은 폭력성을 답습한다. 필자는 최근 동아일보, 세계일보 등에서 퍼뜨린 가짜뉴스에 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동아일보, '핫팬츠 女승객 쓰러졌는데 남성들 외면…3호선서 생긴 일 ‘시끌'


  이 기사 제목에서 사실인 것이 무엇일까? 사실인 것은 '3호선에서 여자 승객이 쓰러졌다'는 내용뿐이다. 이 여자 승객이 쓰러진 후 최초로 119에 신고한 신고자는 쓰러진 여자 승객이 핫팬츠 차림도 아니었고, 쓰러진 여자 승객을 도운 사람 중에는 남성도 있었다고 한다.[각주:7] 지하철에서 쓰러진 여성을 여러 시민이 도왔던 단순한 해프닝인데 언론은 성범죄 무고죄를 겨냥하면서 이것으로 성별 간 싸움을 붙인 것이다.


  이 가짜뉴스는 '보배드림' 커뮤니티 내 목격자의 글을 주류 언론사가 가져다 쓰면서 유포되었다. 여성과 남성을 대치시키고, 여성의 복장이 '핫팬츠'였다는 걸 꼭 언급하는 정성스러움에서 알 수 있듯이, 기사 제목은 반(反)페미 남성들의 분노에 불을 지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기사의 댓글난은 가짜뉴스임이 밝혀지기 전까지 '여자들 자업자득이다', '도와줬다가 성추행범으로 몰릴 바엔 (...) 사회가 이렇게 된 건 남자들 탓이 아니라 여자들이 만들었다는 걸 잊지 말자' 등과 같이 여성을 향한 비난과 매도로 가득 찼다.[각주:8]

 

  이 기사와 댓글에 성폭력 무고에 대한 두려움이 지나치게 드러나는 것 역시 확증편향이라고 볼 수 있다. 2019년 7월 19일 공개된 '검찰 사건 처리 통계로 본 성폭력 무고 사건 현황'에 따르면, 성폭력 무고죄로 고소된 사건 중 84.1%는 불기소되고, 기소된 사건 중에서도 15.5%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리고 성폭력 무고죄로 기소된 피의자 수는 556명으로, 성폭력 사건으로 기소된 피의자 수의 0.78%에 불과하다.[각주:9] 위의 '3호선 핫팬츠녀' 기사는 성폭력 무고에 대한 지나친 두려움을 겨냥하여 조회수를 뽑아냈고, 어떤 여성은 해명할 기회도 제때 얻지 못해 또다시 '핫팬츠녀'로 대상화되었다.


  이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떤 언론은 조회수를 올리기 위해 사실이 아닌 것도 사실인 양 작성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 중 미처 몰랐던 일, 알기 어려웠던 사실들을 언론을 통해 접하게 되는데,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면 즉시 구별해낼 수 있는가? 이 사건은 가짜뉴스가 올라온 다음 정황을 파악하고 오마이뉴스에서 팩트 체크 기사가 올라오기 전까지 날개 돋친 듯 퍼지고 있었다. 개인은 관심법을 사용하는 궁예가 아닌 이상 뉴스 한 편을 보고 사실과 거짓을 판단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뉴스를 보고 대화를 할 수 있는, 나와는 다른 사람들이다.

 


4. 그래서, 미디어 교육은?


필자는 '미디어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우고 싶지 않았다. 스마트폰, 언론, 미디어는 자본만을 좇을 경우 편향된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그 편향된 사람들을 자극하여 돈을 번다. 이런 언론과 미디어는 사람과 사람을 잇고 몇몇 사건들을 주목하여 드러내지만, 그 상세한 내용 - 누구와 누구를 잇는지, 이 사건을 발굴하는 것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 은 쉽게 간과한다. 일개 사용자인 우리는 어그로 끌려서 조회수에 기여하는 독자였다가, 기사 내용에 대해서 갑론을박을 펼칠 수 있는 비판적인 독자이기를 어쩔 수 없이 반복할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스마트폰과 미디어의 특성을 이해하고 그로부터 얻는 정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연습' 그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들은 개인의 역량 강화로만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도구에 대한 교육과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도록 다른 이들과 소통하는 교육이 동시에 이루어져야 하고, 이를 부추기는 미디어와 언론의 구조에 항의할 수 있도록 정치교육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도구 사용을 교육하는 동시에 도구 역시 바뀌어야하고,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을 함과 동시에 미디어와 언론을 시정해야한다. 

 

#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있지 않도록.


  디지털 기기와 그 속의 사람들은 '오프라인의 내가 살던 세계 많이 다른 세계'일 것이다. 사람들의 확증 편향은 이 세계를 '다양하게' 접하지 못하는 데서 생기는 문제이다. 디지털 기기 사용 방법은 여태껏 혼자서 익히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심각해져만 갔다.
필자는 도구에 대한 교육과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비판적으로 판단하는 교육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자면, 도구와 미디어를 제한적으로 사용하는 습관을 벗어나기 위해서 도구 사용 방법을 배우고, 타인과 소통하면서 본인의 확증편향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방식으로 도구와 미디어를 배우는 것은 특히 앞서 언급했던 노인들에게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교육 방향을 추상적으로 늘어놓았는데, 독일의 '뮌스터 벤노하우스'를 예시로 들면 구체화될 수 있을 것 같다. 뮌스터 벤노하우스는 노인들을 위한 시민 미디어센터이다. 이 기관에서는 노인층과 청년층이 함께하는 영상 프로젝트, 뉴미디어 시민TV 공동 제작 등 미디어의 생산에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각주:10] 이처럼 노인층과 같이 소외된 이들을 디지털 기기의 세계와 공론장에 동시에 끌어들이고, 시민의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돕는 활동이 있다면 노인은 더이상 가짜뉴스를 퍼나르고 선동하는 이들로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 거대한 흐름에 작은 것들이 압도되지 않도록.


  위에서 필자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한 교육안을 제시했지만, 이 교육을 받을 것인지 아닌지는 개인의 의지에 달려있다. 의지 있는 개인들이 쉽게 교육받을 수 있는 제도도 중요하지만, 의지 없는 개인들도 포용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필자 생각엔, 사회가 가짜뉴스로부터 개인들을 지키는 안전망이 되려면 사람들과 소통하고 본인의 의사를 정치적으로 표현할 역량을 갖춘 시민들이 필요하다. 


  최근 언론중재법 개정안이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법안은 가짜뉴스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징벌적 손해배상제), 가짜뉴스로 추정되는 뉴스를 노출되지 않도록 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열람차단 청구권).[각주:11] 그러나 이 법안의 위험성과 효용성을 고민해보면 여러 의문점이 생긴다. 우선 정부가 언론의 자유를 지나치게 침해할 수 있고, 언론의 권력 고발 기능을 제한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더군다나 이 법안은 유튜브, 페이스북 발 가짜뉴스는 대상으로 하고 있지 않다. 필자의 글에서도 다양한 사례를 언급했는데, 유튜브발 가짜뉴스가 활개를 쳐 혼란을 일으켰던 최근의 상황들을 생각해보면 이 법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의심스럽다. 다시 말해 가짜뉴스와 그로부터 비롯된 혼란은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언론중재법 개정으로는 막을 수 없고, 오히려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 결국, 나날이 빠르게 변화하는 미디어와 언론, 가짜뉴스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불명확하고 불완전하지만 이미 발빠르게 형성되어있는 무언가, 시민 사회의 비판적인 판단 능력이다. 더불어 아주 사소하지만 중요한 문제, 예컨대 노인들이 디지털 미디어에서 소외되는 현상에 대해 언론과 미디어에 개선을 요구하는 것 역시 시민 사회의 정치적 역량에 달린 것이다.


  이렇게 시민 사회가 미디어와 언론을 판단하고, 미디어와 언론에 대한 정치적 요구를 제기할 수 있으려면 정치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사실 이 정치교육이라 일컬은 것은 특별한 무언가는 아닐 것이다. 필자가 주장하는 것은 꼭 학교 교육에 한정된 것만도 아니다. 정부 기관에서는 문제 제기 통로를 더 열어놓고, 자료 공개를 더 적극적으로 하고, 일반 시민들이 모여 정치를 이야기할 공간, 공론장을 확대하는 것만으로도 시민들은 정치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조회수와 광고 재생 횟수로 전락하지 않고 시민으로서 미디어를 대해보자. 다른 이들과 소통하고 도구와 미디어를 구성하는 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럼으로써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시민 말이다.

 

월영

  1. 노경조, '[손정민 사건 3개월] 사망원인 대신 방송·유튜버 고소만 남아', 아주경제, 2021.07.28.(기사입력), 2021.08.18.(인용) [본문으로]
  2. 심윤지, '고령층 스마트폰 보유율 늘지만… 실제 활용까진 높은 '문턱'', 경향신문, 2019.09.13.(기사작성), 2021.08.18.(인용) [본문으로]
  3. 금준경, '노인을 위한 디지털은 없다', 미디어 오늘, 2019.05.12.(기사입력), 2021.08.18.(인용) [본문으로]
  4. James Devitt and B. Rose Kelly, 'Fake News Shared by Very Few, But Those Over 65 More Likely to Pass on Such Stories, New Study Finds', 2019.01.07.(기사입력), 2021.8.18.(인용) [본문으로]
  5. 제프 올로우스키, <소셜 딜레마>, 넷플릭스, 2020 [본문으로]
  6. 안윤학, ''가짜뉴스 진원지' 극우 유튜버..."확대 재생산 차단해야"', YTN, 2020.08.29.(기사입력), 2021.08.18.(인용) [본문으로]
  7. 김시연, '"지하철에서 쓰러진 여성 승객, 남성들도 도왔다"', 오마이뉴스, 2021.07.07.(기사입력), 2021.08.18.(인용) [본문으로]
  8. 언론인권센터, '젠더갈등에 불 붙인 '지하철' 기사... 분노 부른 취재방식', 오마이뉴스, 2021.07.07.(기사입력), 2021.08.18.(인용) [본문으로]
  9. 이정현, '"성폭력 범죄 통계 범주 세분화 작업 필요"', 법률신문 뉴스, 2019.07.19.(기사입력), 2021.08.18.(인용) [본문으로]
  10. 백진호, '노년층 미디어교육, 왜 필요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 100NEWS, 2020.10.27.(기사입력), 2021.08.18.(인용) [본문으로]
  11. 김동인, '누구를 위한 ‘언론중재법’이란 말입니까', 시사IN, 2021.08.28.(기사입력), 2021.09.01.(인용) [본문으로]

  코로나19가 장기화 되면서 이전과 다른 생활에 무력감을 느끼고, 지쳐갈 무렵입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코로나19 사태는 사회 곳곳에 존재하던 문제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었고, 심화시켰습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 속, 교육저널도 큰 정체기를 겪었습니다. 편집장이 없는 체제로 운영되어, 편집위원들이 서로 역할 분담을 하여 근근이 활동을 이어왔습니다. 매주 비대면 회의를 진행하며 상황에 잘 적응해나가는 것 같았지만, 무언가 대체할 수 없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번 38호 제목인 '혼란기(記)'는 혼란스러운 사회와 교육저널 상황을 잘 드러냅니다. 이번 호에는 미디어 리터러시와 교육 정책에 대한 고찰, 코로나 19 상황에서 대학교육에 대한 고민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습니다. 혼란스러운 시기 속 교육저널 구성원들의 고민이 여러분들께도 닿길 바랍니다. 


  그리고 비대면 상황 속에서, 교육저널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주신 편집위원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펜데믹 시에, 공동체가 유지되기 위한 구성원들의 노력을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이번 호를 읽고 교육저널의 시선에 함께 해 주실 독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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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후기  (0)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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