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pe Diem”

이 문구가 유행처럼 친구들 사이에서 번지던 때가 기억난다. 물론 이 문구를 좌우명 삼았던 필자의 고등학교 친구 중 누구도 온전히 현재를 즐기진 못한 것 같았지만 말이다. 사실 그것은 진짜 그렇게 살겠다는 다짐이기보다, 소망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들은 <죽은 시인의 사회> 속 주인공들과 같이 “카르페 디엠”을 주문처럼 외고 다녔다. 그 주문은 빡빡한 중고등학교 생활에서 잠시 일탈을 시도할 때 훌륭한 변명거리가 되었고, 그 덕에 우리는 치열한 경쟁의 연속이었던 학창시절을 아름답게 포장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유행의 시발점, <죽은 시인의 사회>는 어떤 교육을 통해서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지, 무엇이 학생들의 인간다운 삶을 망치는지 질문한다. 오래된 영화임에도 <죽은 시인의 사회>가 여전히 명작인 이유는 영화 속 학생들의 삶과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의 삶이 여전히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교육저널 편집위원 당근주스와 윤슬, 월영은 여전히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이 글은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 영화가 끝난 후 짧은 감상, 아쉬움들

 

월영: 감상을 이야기해볼까? 일단 나는 이 영화에 대해 반감 같은 게 있었거든. 굉장히 좋은 스승이 학생들을 계몽시키는 이야기인가, 생각했었어. 근데 영화 보니까 선생님이 하는 건 별로 없어보이는데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교육을 하는, 굉장히 철학적인 내용인 것 같더라고. 판에 박힌 내용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던 것 같네. 다들 이 영화 본 적 있어?

당근주스: 책을 봤는데, 윤슬 말대로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점이 특징적인 것 같아. 토드가 주인공인가 싶다가도, 오히려 닐이 주인공인 것 같기도 하고. 캐릭터별로 서사가 길었는데 영화에서는 좀 짧게 나온다는 점이 아쉽네. 하지만 감동 그 자체라서. 너무 좋았어..

윤슬: 나는 영화가 짧은 느낌인 것 같아. 너무 기대를 많이 해서 그런지. 막상 토드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없고 닐이 죽었을 때 울분을 토하는 장면이 감동적이긴 했는데. 주제는 명확한데 내용은 조금 부실하지 않았나 생각해.

월영: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 법한 게, 학생들이 갑자기 모임을 결성하는데 그 이전의 유대관계라든지 이런 것들이 안 나와 있어서 특히 그랬던 것 같아. 인물이 잘 안 외워진다고 영화 보면서도 계속 그랬잖아.

당근주스: 나는 눈에 광기로 구분했어. 찰리는 눈에 은은한 광기가 있거든. 그치만 캐릭터는 너무 구분 안 되게 닮긴 했어.

월영: 눈에 익기도 전에 이미 모임이 결성되고 이야기가 진전되고 있는 느낌.

윤슬: 모임에 대한 이야기와, 키팅 선생님의 영향력이 많이 드러났으면 좋겠는데, 수업을 특이하게 한다 이런 점만 잘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키팅 선생님의 영향력을 구체적으로 살펴봤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

월영: 한편으로는,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가 너무 대상화되고 있다는 생각도 했어. 남자 학생들은 그래도 성장이란 걸 하는데 여자 캐릭터들은 왜 등장하는지, 왜 저런 감정변화가 생겼는지도 종잡을 수가 없어서.

윤슬: 그리고 인종 문제도 생각해볼만한 것 같아. 이 영화에서 완벽하게 지워진 것 같은데, 유색인종은 한 명도 등장하질 않았잖아. 뭐, 시대적인 한계라면 한계겠지만.

 

#2. 키팅 선생님이 가르친 것

 

당근주스: 키팅 선생님이 토드에게 소리 지르게 시킨 거 말이야. 그거 나도 해본 적 있어. 수업시간에도 시키고, 면접 준비할 때도 시켰는데. 내가 못하겠다고 하니까 그만하셨는데.

윤슬: 대학 강의에서 그런 거 시키면 바로 드랍할 거야. 강의평에는 절대 듣지 마세요 이러고.

당근주스: 이어지는 씬이 너무 인상깊지 않았어? 시를 읊는 장면. 토드가 형 그늘에 위축되어 살아온 친구였잖아. 그런데 그 재능을 일깨워주는 게 너무 멋있었던 것 같아. 게다가 토드는 숨어서 잘해보려고 애쓰는데 키팅 선생님이 그걸 정확히 꿰뚫고 “난 너가 발표를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걸 알고 있어” 이러는 것도 굉장하고.

윤슬: 너무 소름돋잖아. 교수님이 그런 말 하면...

당근주스: (웃음) 발표를 자꾸 시키려고 합니다. 드랍하세요.

윤슬: 눈 마주치면 안 됨.

당근주스: 왼쪽 첫 번째 자리 앉으면 안 됨.

윤슬: 자리가 없으면 결석하세요.(웃음)

월영: 그런데 영화 보면서 키팅 선생님이 대체 무엇을 가르쳤던 걸까 싶었어. 다들 영화에서 기억에 남는 대사나 행동 말해줄 수 있어?

당근주스, 윤슬: “카르페 디엠”

윤슬: 그 말이 입에 잘 붙는 것 같아.

당근주스: 나는 삶을 가르쳤다고 생각했는데. 책임 있는 삶. 사릴 땐 사릴 줄 알아야하고, 나설 땐 나설 줄 알아야 하고. 주인공들이 힘 쓸 필요 없는 곳에도 힘을 쓰는데 나서서 말리고. 그러면서 하나씩 하나씩 가르쳐줬던 것 같아.

윤슬: 오히려 모르던 걸 가르쳤다기보다, 학생들이 알고 있는데... 시를 창작하는 것도, 발표하는 것도 부끄러워했잖아. 어떻게 보면 당연한 건데 부끄러워하고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걸 인식을 전환시킨 것 같아. 학생들도 마음 속으로는 다 알고 있었을 것 같아.

월영: 영화 초반에 학교 교훈을 네 단어로 읊는데, 학생들이 기숙사로 돌아오자마자 그 교훈을 비웃듯이 비슷하게 자신들만의 신조를 읊잖아.

당근주스: “전통, 명예, 규율, 최고”를 “익살, 공포, 타락, 배설”로. 그것도 참… 전통과 규율이라면 학교 선생님들이 굉장히 강조했던 점 같은데, 그러면서 애들 사춘기라고, 발랄함을 억제시키는 게 필요하다고 하잖아. 통제가 안 될 것 같으니까.

월영: 나는 처음 닐이 등장했을 때 아빠와 졸업앨범 편집하는 걸 두고 싸운 장면이 생각나는데. 그 이후에 인상깊었던 게, 아버지가 했던 말을 닐이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래, 그건 내가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거였어”라고 말한단 말이야. 아버지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본인의 생각으로 포장해왔던 거잖아. 키팅 선생님이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가르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 미래의 은행원, 미래의 의사 등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준 거 아닌가 싶네.

 

#3. 닐과 키팅 선생님, 토드

 

월영: 키팅 선생님이 모임에 대해서 전부 잊어버리고 불태워버리랬잖아. 그건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무슨 마음이었을까?

윤슬: 그 모임의 결말이 닐의 자살이라고 한다면, 키팅 선생님도 비슷한 일을 겪었을 수 있지 않을까? 뜻이 맞는 사람끼리 모였지만 안 좋은 결말을 맺었고, 그걸 알아서 학생들한테 권장할 수 없었던 것 아닐까?

당근주스: 나도 비슷하게 생각한 것 같아. 그런데 나는 장난 반 진담 반인 것 같았거든.

윤슬: 모임을 했을 때 안 좋은 일을 겪었기 때문에, 오히려 본인 수업을 그렇게 진행했던 것 같기도 해. 비밀리에 그런 생각을 하기보다 공적으로, 대놓고 하려고 했을 수 있을 수도. 선생이라는 이름을 달고 하는 게 안전하니까.

당근주스: 그리고 키팅 선생님이 닐 자리에 가서 시집을 꺼내서 우는 장면 있잖아. 나는 그때 선생님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해. 엄청난 회의감을 느꼈을 것 같은데. 사실 키팅 선생님이 학교에서 잘리는 것으로 나오지만, 이미 닐의 자리에서 울면서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윤슬: 죄책감 많이 느꼈을 것 같아.

당근주스: 또 의문이 드는 게, 닐이 거짓말하는 거 많이 티 나지 않았어? 아버지한테 연극 허락 받았다는 말 말이야. 키팅 선생님 눈 계속 피하면서 거짓말 하는 거 정말 티 많이 났던 것 같은데.

윤슬: 나는 진짜 잘 된 줄 알고. 아빠가 닐의 뒤통수를 친 건줄 알았어.

당근주스: 키팅 선생님도 닐의 표정에 의아해하다가 웃고 넘어가는 것 같았는데. 닐이 제일 성장을 많이 하면서도 부모님과 부딪히지 못한 게 참... 자신을 찾아 떠나긴 했지만 반대를 무릅쓰지 못하는 것이 많이 안타까웠어.

월영: 근데, 키팅 선생님이 토드에게서 시를 끌어내는 장면 있잖아. 그게 영화 후반부에 눈밭에서 울부짖는 장면과도 이어지는 것 같지 않아?

윤슬: 나는 그 울분을 표해내는 장면에서, 닐이랑 토드가 그렇게 친했나 싶었어.

당근주스: 이것도 영화의 한계일 수 있지. 사실 어떻게 친해졌는지 잘 모르겠잖아. 토드가 작년에도 선물 받은 필기구를 받았을 때 닐이 농담으로 기분을 풀어주긴 했지만.

윤슬: 닐은 주변 친구들과 더 친했는데... 토드가 제일 울분을 토하고... 룸메여서 그런가.

월영: 대사에 약간의 실마리가 있지 않은가 싶기도 한데. 아버지가 닐을 죽였다고 하잖아. 아버지를 상징적으로 이해해보면 안정적인 길을 강요하는 사람들일 수 있었겠다 싶고, 이 모든 학교와 기성세대가 닐을 죽였다는 폭로를 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고.

윤슬: 갑자기 생각난 건데, 토드가 울분을 토했던 게, 닐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아버지를 들먹였잖아. 그래서 미안한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한 번이라도 편을 들어줬으면 후회하지 않았을까.

당근주스: 그러게, 옆에서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하겠어, 아버지한테 허락은 받았어? 너 그거 위조라도 할 셈이야? 이렇게 떠들어대고.

윤슬: 내심 마음에 걸렸을 것 같아. 토드도 허탈하고, 미안하고...

당근주스: 맞네 맞네. 그런데 한편으로는 생일 선물로 작년과 똑같은 필기구 세트를 받아서 아쉬운데, 그 옆에서 시원하게 던져버리라고 말해줬던 것도 닐이었잖아. 닐이 모든 학생들을 이끌어주는 사람이었던 것 같기도 해.

월영: 닐이 죽고 키팅 선생님이 잘리고 하는 일 다음에 토드가 각성한 것 같았어. 아무도 말 안 하는데 툭 튀어나와서 말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잖아.

윤슬: 토드가 커서 키팅 선생님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당근주스: 지금 영화만 봐서는 미래를 구체적으로 그릴 수 없지만, 토드가 또 다른 키팅 선생님이 되어서 학생들을 그런 식으로 지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4. 닐의 죽음과 아버지, 그리고 책임

 

월영: 닐이 죽는 장면이 길게 나오잖아. 의식 같기도 한 행위를 하는데, 그 순간에 닐이 요정이 된 것 같았어.

당근주스: <한여름 밤의 꿈>의 한 장면 같지 않았어? 마지막 순간에 연극 하고 떠난 듯하기도 하고.

윤슬: 아빠와 이야기하는 장면도 마음 아팠는데. 아빠가 “너가 하고 싶은 일이 뭔데!”라고 윽박지르니까 힘이 삭 풀리고 눈에 초점이 풀린 것처럼 자리에 앉잖아. 그 표정이 굉장히 묘했어. 꼭 웃는 것 같지 않았어?

당근주스, 월영: 맞아, 웃었어!

윤슬: 그게 소름끼치는 거야. 체념을 넘어서 폭발한 느낌, 자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괜한 짓을 했고, 이래선 안 됐다, 이런 느낌이었어. 분노를 표하는 것보다 더 여운이 남는 마지막이었던 것 같아.

월영: 나는 닐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한 단계 성장했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서 미소를 띠었다는 생각을 했어. 그 끝이 죽음이라는 것은 무섭고 안타까운 일이긴 한데.

당근주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았는데. 키팅 선생님이 “사람은 누구나 죽으니까”라면서 하고 싶은 걸 하랬잖아. 찾는 건 성공했는데 결론이 좋지 않은. 말 안 해버릇 하면 말을 못하더라고. 부모님에 대해서도 똑같은 것 같아.

월영: 결국 닐이 죽은 후에 그 책임을 두고 갈등이 발생하는데, 그 책임은 다들 어느 정도 지분을 갖고 있을까?

당근주스: 아버지 100%.

윤슬: 카메론이 그랬잖아. 키팅 선생님이 그 모임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다면 닐은 의사가 되어야한다는 것을 인정했을 거라고. 한편으로는 맞는 이야기 같기도 한 거야. 모임이 시작되지 않았다면 그것 자체를 몰랐을 거고. 그렇게 생각하면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 건가. 어차피 닐이 선택한 것이니까 “그 사건이 없었다면” 이런 가정을 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지만.

당근주스: 언젠간 터질 시한폭탄 같은 거 아니었을까? 미해결된 문제가 남아서 의사가 되어서 터졌을 수도 있고. 닐의 선택이라고 해도 가혹하긴 하다.

윤슬: 키팅 선생님 말대로 아빠한테 말을 했어야하는 거 아닌가.

당근주스: 하지만 닐 입장도 이해가 가. 어렸을 때부터 본인의 이야기를 안 들어주는 아버지와 항상 같이 지냈을 텐데.

윤슬: 그 상황에 어떤 생각이었을까?

당근주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월영: 닐이 어떤 마음이었을까 생각해보면,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었을 것 같아. 키팅 선생님이 “의학과 법학이 삶의 필수 조건이면 시는 삶의 이유다” 이렇게 말하는 장면 있잖아. 그 삶의 이유란 게 닐의 연극과 연결될 수 있다면, 그 삶의 이유가 잃어버린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닐이 나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 선언해버린 게 아닐까 싶어.

윤슬: 키팅 선생님은 아버지께 터놓고 말하라고 했는데 닐은 더 쉬운 방법이 없겠냐고 되묻잖아. 닐은 그 방법을 선택지로 생각하지 않았던 거지. 방법은 없고, 그 방법을 시도할 수 없었던 자신도 초라했을 것 같아.

 

#5. 영화 속 문학 이야기

 

당근주스: 연극 끝날 때, 로빈의 독백이 꼭 아버지에게 하는 대사 같잖아. 그게 너무 안타깝긴 했어. 닐의 인생 같기도 하고.

월영: 처음 <한여름 밤의 꿈> 희곡 읽었을 때 묘했는데, 이 영화에서도 멍해지는 느낌이 었어.

당근주스: 딱 꿈 꾸는 느낌이었어.

월영: 극 내용을 생각해보면, 인간이라면 어떤 확신을 가질 수 있잖아. 나는 이 사람을 사랑한다, 나는 이 사람을 싫어한다, 이런 거. 그런데 숲이라는 공간에서 그것이 모두 허물어지는 거야. 정말 싫어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사랑하고,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싫어하는 거지. 나는 모든 것이 허무하고 허무한 느낌이었는데.

윤슬: 닐의 마지막이 당당하고 자신감 있었다면 그 멘트가 자신감 넘친다고 들릴 수도 있었을 것 같아. 하지만 닐의 입장도 굉장히 위축되어있었기 때문에... 만약에 닐이 연극을 하지 않고 의사의 길을 걸어갔으면 행복했을까?

당근주스: 잘 모르겠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마음 속에 남아있지 않았을까? 언젠가는 터졌을 것 같아.

월영: <한여름 밤의 꿈>이랑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이 극은 꼭 나중에도 계속 이어질 것 같잖아. 그런 것처럼 연극을 택했든 의사를 택했든 갈등은 계속해서 이어지지 않았을까? 영화 속에서 닐은 강제로 끊어진 것에 가까운 것 같지만.

당근주스: 시나리오 쓴 사람 천재인 것 같아. 영화 속 요소들이 정말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

월영: 문학을 중심에 놓아서 그런지 해석의 여지가 더 많아진 것 같아. 혹시 영화에서 ‘시’는 어떤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을까? 나는 키팅 선생님이 시를 배우는 이유를 설명할 때 “시가 아름다워서 배우는 게 아니라 인간이라서 시를 배우는 것”이라는 말이 기억에 남는데.

당근주스: 나는 개인적으로 시를 정말 좋아하는데, 사실 소설이 읽기는 더 편한 것 같거든. 근데도 시를 좋아하는 이유가, 내가 생각할 여지가 많아서 그런 것 같아. 공백을 내가 스스로 해석하고 채워넣을 수 있는 게 시가 가진 매력이 아닐까 싶어.

윤슬: 시라는 게 인간의 감수성을 일깨우는 것이잖아. 시를 배우면서 학생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알게 되고, 더 인간적인 삶을 살게 된 것 같기도 해. 비중은 작았지만, 녹스가 크리스한테 고백을 한 것도 시로 고백을 했잖아. 감정 표현에 키팅 선생님의 수업이 효과를 발휘했던 것 아닐까.

당근주스: 이렇게 한 번 하고 나면 또 다시 그런 시도를 하는 원동력이 된단 말이야. 한편으로는 키팅 선생님이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준 것 같아.

 

  미술관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미술관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미술관에서 ‘관람자’가 중요해지면서, 미술관에서의 교육, 학습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 되었다. 필자는 학과 특성상 미술관에서 진행하는 이러저러한 프로그램을 많이 접할 수 있었으나, 미술관에서의 교육, 학습이 전공자, 미술관에 꾸준히 관심 있는 일부 이외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느껴질지는 종잡을 수 없었다. 미술관의 입장에서는 미술관 교육/학습 모델이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지만, 미술관에 자주 찾아가는 사람은 정해져 있고, 그 교육 혜택 역시도 일반적인 교육에 비해서는 장벽이 높다.

 

  그리하여 필자는 역사를 좋아하는 중학생 사촌 동생 두 명이랑 미술관 교육을 주제로 이야기해 보았다. 이들은 미술사와 미술관에 흥미를 느끼고 있지만, 미술관 관람을 자주 해보지는 않은 학생이었다.

 

월영: 미술관에서 보는 것이 우리 생활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HY: 내 생각에는, 미술관에서 얻을 수 있는 건 어떤 정보잖아. 그런데 그 정보는 관심사가 같은 사람끼리 대화 소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다음에 비슷한 무언가를 봤을 때 먼저 아는 체 하면서 이야기 꺼낼 수도 있고.

휘영청: 미술관에서는 예술가 고유의 세계를 보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 의견을 들으면서 다양한 해석을 해볼 수도 있겠다.

 

  필자는 사촌 동생들과 전시를 보고 난 후에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의미 있는 학습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아울러 필자 입장에서는 이 대화는 관람자의 학습 경험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귀한 기회였다. 근래에 들어 미술관 교육/학습 모델 연구에 관람자의 역할을 중요시하여 관람자를 “더이상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의미를 형성하는 복합적인 존재”[각주:1]로 위치시키는 일이 잦다. 그러나 이때의 관람자는 어떤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을 대표하는 추상적인 존재로 남아있는 경우가 많고, 필자는 그 부분이 항상 아쉬웠다. 사촌 동생들이 미술관에서 학습하는 경험을 살펴보면서, 미술관과 관람자, 그리고 그들의 일상이 미술관 관람 경험과 맺는 관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아마도 이 인터뷰로 미술관 학습법에 대한 번듯한 결론을 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기획을 통해서 추상적으로만 그려지던 ‘미술관 관람자’가 미술관을 통해 어떤 결과물을 얻어가는지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1. 2022.01.14.(금) 경남도립미술관, HY와 월영은 <각인> 전을 보러 갔다.

 

  <각인> 전시는 경남도립미술관에서 ‘판화’를 주제로 현대 판화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고, 근현대 판화 작품을 아카이빙한 전시이다. 현대 판화 작가의 작품은 ‘국토’와 ‘인물’로 나누어서 전시되어있었고, 아카이빙 관은 따로 마련되어있었다. HY와 필자(월영)는 미리 전시를 둘러보고, 오후 2시에 현대 판화 작가를 위주로 도슨트의 작품 해설을 들었다. 도슨트 해설을 듣기 전 전시를 훑어보면서 각 작품에 대해 소소하게 감상평을 나눌 수 있었는데, 예컨대 이런 식이었다.

 

월영: 여기 구석에 조그맣게 사람 있는 거 보여?

HY: 어 진짜네! (작품을 보다가) 나 이 작품 좋다.

월영: 어, 왜?

HY: 여기 그려진 사람 시선으로 그림을 보게 되는데, 풍경이 꽤 좋은 것 같아.

 

  전시 캡션이 충분히 달려 있지 않아서, 도슨트의 설명을 통해 작품에 사용된 재료나 주제에 대해서 상세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필자나 HY나 굉장히 내성적인 성격이라 도슨트의 질문에도 쭈뼛대면서 아주 적극적인 태도로 임하지는 않았지만, 도슨트 해설에 상당히 만족했다. 그러나 해설만 들었을 때 몇몇 그림을 온전히 감상하지 않고 넘어가게 되는 점, 그림을 보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점은 여전히 아쉬웠다.

 

  전시 해설을 다 듣고 난 후, 미술관 옆 찻집에서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① 일상의 작은 파동: 미술관

 

  판화라는 장르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 보니, 전시를 보면서 이전까지 HY와 필자는 판화 작품에 대해서는 그것을 ‘작품’ 혹은 ‘예술’로도 인지하고 있지 않았단 사실을 알았다. 이것은 특히 아카이빙 전시관을 둘러보면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HY: (몽실언니를 가리키며) 나 이 책 읽어본 적 있어! 이 표지가 판화였구나.

 

  전시관을 나와서도 우리 주변에 판화가 어디에 있었을지도 한번 떠올려보았지만 뚜렷하게 생각나는 바는 없었다. 필자와 HY는 판화를 아예 보지 못했다기보다는 일상 속의 판화를 판화로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게 없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이 전시를 본 후 휘영청과 갔던 <로이 리히텐슈타인> 전시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일상적이고 평범한 것이라도 미술관 안에서는 특별한 것이 되는 듯했다.

 

  미술관 안에서 특별함을 얻는 것, 이 현상을 보며 미술관이라는 기관을 전시한 작품과 작가가 권력을 얻도록 돕는 공간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굳이 미술관의 권력을 인식하지 않는 관람자의 입장에서는, 미술관 안에서 어떤 이미지를 새삼스럽게 보는 것이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된다. 필자와 HY는 <각인> 전을 통해서 판화가 표현할 수 있는 이미지가 상당히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월영: 나는 판화라는 장르를 좁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 판을 깎아서 찍는 게 다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설명 들어보니까 꼭 그런 것도 아니었지.

HY: 그림 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폭이 훨씬 넓어진 것 같아.

월영: 제일 판화 같지 않다고 생각되는 작품이 있었어?

HY: 2층 ‘인물’ 테마의 관에 갔을 때 제일 처음 본 작품이 그랬던 것 같아. 불교 수인을 취하고 있는 게 판화 같지 않았어.

월영: 그렇지, 판을 찍어놓은 게 아니라 판을 직접 전시해놓은 것 같았지!

 

  이번 <각인> 전시에서 특징적이었던 부분은, 판화를 제작하는 방식이 굉장히 다양했다는 것이었다. 판화라는 장르가 가진 특성들, 예컨대 원본 판이 있다면 끊임없이 복제 가능하다는 등의 특성들에서 벗어난 작품들이 많았다. 판화 작품 자체가 다양하니까, HY와 필자는 그 과정에서 서로의 미감이 완전 다르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HY는 만화를 이어붙인 듯한 <갈라파고스>(윤여걸 작가)라는 작품과 강렬한 빨간색이 특징적인 정비파 작가의 판화를 좋아했고, 필자는 김준권 작가의 <산의 노래> 작품을 좋아했다.

 

HY: <갈라파고스>, 그 작품은 예뻤던 것 같아.

월영: 진짜?

HY: 그 작가님 작품이 두 점 더 있었잖아. 나머지 하나도 아름다웠다고 생각했어.

월영: 나는 그걸 독특하다고만 생각했는데!

HY: 색깔 때문인 것 같아. 하지만 내용은 예뻐 보이지 않고, 도슨트 분은 그 판화를 원초적인 성격인 것으로 설명하셨는데 딱 그래 보이긴 했어.

월영: 그 작품은 판화로 만화를 그리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거였지. 내용은 원초적인 성격이었지만 판화의 색채는 다채로웠던 기억이 나. 나는 그 작품은 별 생각 없이 지나쳤는데. 나는 1관에서 봤던 산이 중첩되어있던 산수화가 정말 예쁘다고 생각했거든.

HY: 그림 볼 때 당시에는 난폭해 보인다고 생각했는데, 예쁜 거 있었냐고 물어보니까 그게 생각났어.

월영: 사람마다 이렇게 미감이 다르구나.

 

  판화라는 장르도, 그 작품들도 많이 생소했던 만큼 HY와 월영은 이 전시를 통해서 다양한 표현방식, 판화로부터 표현될 수 있는 이미지와 그에 대한 각자의 취향을 새롭게 알 수 있었다. HY가 기대했던 대로, 전시를 보면서 일상에서는 쉽사리 찾기 힘들었던 새로운 대화 거리를 얻은 듯했다. 이후 HY와 필자는 <빛: 영국 테이트 미술관> 전시에서 18-19세기의 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의 판화를 보고, 그 판화의 표현 기법을 분석하면서 <각인> 전시에서 판화를 봤던 경험을 십분 활용했다.

 

② 자발적 학습의 장으로서 미술관 교육

 

  박물관교육학자 후퍼그린힐(Hooper-Greenhill)은 유물에 대한 감각적 해석 및 체험이 유물을 지적으로 깊이 있게 알게 하는 기초가 되고, 박물관을 통한 교육, 학습이 교과과정의 이해와도 연결된다고 주장했다. 마찬가지로 교육학자 존 듀이(John Dewey)는 박물관 교육이 학교와 사회에 유용하다고 생각했고, 박물관 교육이 교육적 환경 구성에서 통합적인 역할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각주:2] 그렇다면 정규교육과정이 어떤 주제에 대해서 충분히 다루고 있지 않을 때, 사회에서 그 주제가 논의되는 깊이를 포용하지 못할 때는 미술관에서 더 어떤 논의가 가능할까?

 

  <각인> 전시의 ‘국토’를 주제로 한 부분에서는 ‘통일’이라는 주제가 자주 등장했다. 하나의 국토를 회복하고픈 열망, 분단된 국토에 항시 도사리는 위험을 표현한 작품이 많이 있었다. 필자는 HY에게 그 작품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월영: 독수리 있던 그림 있잖아. 그 그림 보면서는 어떤 생각을 했어?

HY: 그 그림은 설명 듣기 전과 후가 많이 달랐어. 설명 듣기 전에는 독수리만 보였는데, 그 아래 백두산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말씀해주시니까 백두산도 중요한 주제로 보이더라고.

월영: 그 그림은 도슨트 설명에 따르면 통일에 대한 거였지, 이 주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HY: 나는 통일보다는 종전했으면 좋겠어.

 

필자가 중등교육을 받을 때에도 통일은 너무나도 당연했기 때문에, 지금도 역시 비슷하게 교육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월영: 요새 통일에 대해서도 많이 배워?

HY: 도덕에서 배웠어. 시험에서도 겨레말 큰사전, 언어 비교, 한국 말이랑 북한 말이랑 비교하는 것도 배우고.

월영: 통일은 꼭 해야 하는 것으로 배워?

HY: 해야 한다는 쪽이 더 강조되었던 것 같아. 어떤 이유에서 통일은 필요하다.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필요하다는 말이 기억에 남네.

 

  통일은 필자가 배우던 것과 HY가 배우던 것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육과정도 박물관 교육도 통일 문제를 깊이 있게 논의하기에는 어려워 보였다. 그렇다면 통일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이번 <각인> 전시를 통해서도 풍부하게 담지는 못할 것 같았다.

 

월영: 종전이 필요하지. 전쟁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을 우선 해소했으면 좋겠는 게 있지.

HY: 맞아. 그리고 통일이 갑자기 되면 많은 게 복잡해질 것 같아.

월영: 그렇지.

HY: 그러다 전쟁도 또 나면 어떡해.

 

  <각인> 전시에서 본 작품은 한반도를 통일된 형태로 보고 있었다. 도슨트의 해설 역시 그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만약 HY와 필자가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을까? 꼭 그렇다고 볼 수 없겠지만, 도슨트의 해설은 작품을 해석하는 데 기본적인 틀을 제시하고, 개별 관람자의 작품 해석은 도슨트의 설명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HY와 필자는 박물관 바깥에서 다시 전시를 되짚어 보면서 작품의 주제의식에 구체적인 의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즉, 전시와 작품을 관람자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미술관 도슨트를 듣는 것만으로 이루어지기 힘들 수 있다. HY와 필자는 이 이야기를 끝내며 작품의 주제의식이 지금의 한반도에 어떤 의미일 수 있는지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자리가 있다면 좋겠다는 의견을 나눴다.

 

  한편, 미술관의 전시, 도슨트 해설은 작품의 주제의식을 전하고 있으나, 그것으로 시험을 치거나 그것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필자와 HY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통일 교육의 취지와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설사 <각인> 전에서 전하려고 했던 내용과는 다를지라도) 이번 미술관 교육이 자발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미술관이 학교에서 접한 문제의식을 새롭게 발전시키는 중간 다리 역할을 하거나, 공교육의 정형화된 지식을 접하기 전 가볍게 본인의 관점을 형성하도록 돕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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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시간 동안 수다를 떨다 보니 금세 해가 지고 있었다. 필자도 한 전시를 주제로 이렇게 길게 이야기 나누어본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질문을 잘 던지는 것이 정말 어려웠다. 곧바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마구 던졌음에도 열심히 답해준 HY에게도 고마웠다.

 

  이런 인터뷰를 하고 보니, 미술관에서 전시를 본 후 관람객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주는 행사가 자주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술관은 오고 가는 것이 자유로운 공간이지만, 그만큼 미술관에서의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에 어렵다. 기껏해야 전시를 본 후 감상을 짧게 나누거나 SNS를 통해서 후기를 남기는 것에 그치는데, 이보다 더 적극적인 형태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면 각 전시에 대한 비평이 더욱 활발해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지금의 필자처럼 글을 쓴다는 인위적인 목적이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전시를 보고 이야기할 기회, 분위기가 더욱 필요하다.

 

 

2. 2022.01.17.(월) 한화 갤러리아 포레, 휘영청과 월영은 <로이 리히텐슈타인> 전을 보러 갔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전시는 한화 갤러리아 포레에서 현대 팝아트의 거장 리히텐슈타인을 단독으로 다룬 전시이다.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포스터를 사랑과 눈물, 붓자국, 거장에 대한 오마주, 기업과 협업한 사례 등 각기 다른 주제로 나누어 전시 공간을 구성했다. 필자와 휘영청은 미리 전시장을 둘러보았다. 전시장 한 면에 크게 쓰인 문구가 필자와 휘영청의 시선을 끌었다.

 

월영: “나는 항상 예술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를 알고 싶어했다.” 이 말 있잖아. 어떻게 생각해?

휘영청: 나도 이게 항상 의문이었어. 현대미술 보면 선 하나 그어놓고 작품이라는 것들 있잖아. 그렇게 치면 나도 예술가 될 수 있는 거 아닌가?

 

  나름의 의문을 품은 채로 월영과 휘영청은 전시장을 더 둘러보았다. 리히텐슈타인이 중국의 수묵산수화를 그의 특징적인 기법인 밴데이 점으로 재해석한 작품에 이르렀을 때 도슨트 시작 시간인 2시가 되었고, 휘영청과 월영은 서둘러 전시장 입구로 돌아갔다. 도슨트를 다 듣고난 후 다시 전시를 되짚어가며 꼼꼼히 못 본 작품들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① 학교 미술 교육이 채우지 못한 것

 

  리히텐슈타인 전 도슨트를 시작하기에 앞서 진행자는 “자유롭고 편하게 관람하라”라고 강조했다. 앞서 언급했던 문구에서도 드러나듯이 이 전시는 쉽고 재미있는 예술을 지향하고, 그럼으로써 예술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필자와 휘영청 역시 그러한 관점을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전시를 보게 되었다.

 

월영: 이 전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였어?

휘영청: 샴페인이었나, 와인이었나? 하여튼 리히텐슈타인이 디자인했던 그 술병이 기억나.

월영: 아 맞아, 그 병은 다른 작품과 달리 실생활에 쓰였던 거니까.

휘영청: 다른 거는 다 그림인데, 그건 물건이니까 훨씬 기억에 남았던 것 같아.

월영: 전시장 벽면에서 봤던 질문 있잖아. 예술은 어디까지 예술이고, 예술이 아니면 어디까지 예술이 아닌지. 방금 전 너가 언급한 게 그런 질문과 연결될 수 있겠다.

휘영청: 길거리 벽에 그리는 그림도 하고, 모래에 그리는 그림도 그림이니까.

 

  이 소재로도 재밌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휘영청과 현대미술에서 어떤 것이 중요할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어보았다. 필자와 휘영청은 전시가 던진 질문, “어디까지가 예술인가”를 생각해보며 현대미술이 어떻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것은 휘영청의 입장에서는 생소했던 아이디어였다. 휘영청이 받아왔던 미술 수업에서는 소묘, 수채화 같은 실기만 해왔고, 휘영청의 미술 선생님 취향이 이탈리아 르네상스여서 시험도 그 시기에만 치우쳐 있기 때문이었다.

 

월영: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 일반적인 만화랑 다르지 않을 수 있잖아.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 전시될 수 있고, 대단한 화가로 추앙받을 수 있다면 그 근거는 뭐라고 생각해?

휘영청: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이) 모작이 쉬울 것 같은데, 먼저 이걸 했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먼저 자신이 생각한 바를 그림으로 그려놓았다는 것이 큰 것 같아.

월영: 자기 아이디어를 회화로 구성해서 내놨다는 게 중요하다는 이야기이지? 다른 현대미술에도 적용될 수 있는 설명인 것 같아.

 

  휘영청은 이런 이야기를 재밌어하는 듯 보였는데,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했다. HY의 경우에는 미술 시간에 근현대 미술의 다양한 유파들의 그림을 자기 나름대로 재해석하는 시간을 자주 가졌다고 이야기한 적 있다. 필자가 고등학생일 때는 학교에서 빨간색을 그림에 많이 사용하면 높은 점수를 주는 독특한 미술 선생님이 계셔서 한창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미술 선생님의 성향에 따라서 교육의 내용이 한정된다는 사실이 휘영청과 이야기하는 내내 마음에 걸렸다.

 

  심지어 어떤 내용을 배우든 그 방식이 미술 실기여야 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았다. 필자와 휘영청, HY 모두 미술 시간에는 자신의 실기 작품을 만드느라 바빴고, 이론 공부는 특정 내용을 암기하라며 쪽지를 나눠준 후 형식적으로 필기 시험을 치는 데 그쳤다. 물론 실기를 통해 학생들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을 새롭게 터득할 수 있고, 이론으로 배운 내용을 실제로 표현하면서 미술 이론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론에 대한 논의 없이 오로지 실기만을 중심으로 하는 미술 수업은 미술에 대한 이해를 기술적인 차원에만 머무르게 한다.

 

  그리고 실기에 대한 평가는 학생 개인이 이미지를 얼마나 잘 표현하는지, 다시 말해 기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측정하는 정도에만 그치기 쉽다. 사전 인터뷰에서 휘영청은 미술 실기에는 자신이 없었고, 차라리 이론을 배우는 것이 흥미로웠다는 말을 한 적 있다. 어쩌면 예술가라고 볼 수 없는 시민은 필자와 휘영청처럼 전시를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방식으로 예술과 더 가까워질 것이다. 필자는 학교 미술 수업에서 이론을 더 자주 다루고, 이론과 작품을 두고 논쟁하는 자리가 마련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다.

 

  다음으로 필자와 휘영청은 리히텐슈타인 이전에 있었던 거장들의 작품을 리히텐슈타인 스타일로 재해석한 작품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휘영청: 리히텐슈타인은 자신이 재해석한 작품의 원작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고 도슨트가 알려줬잖아. 그렇게 하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이게 이 작품에서 따온 건지 저 작품에서 따온 건지. 그렇게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월영: 너가 말한 원작을 밝히지 않는다는 부분이 흥미롭긴 하다. 누구 작품인지 분명히 밝히지 않는 게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는 거잖아. 그렇다면 갑자기 궁금해지는 게 있는데, 왜 리히텐슈타인은 작품의 원작을 밝히지 않았을까? 뻔히 보이는 게 있는데도.

휘영청: 자기 작품만을 바라봐 주길 원한 건 아닐까? 원작을 밝히면 그것과 비교하게 되잖아.

월영: 이것도 본인의 작품이라는 것 자체를 봐 주길 바랬다. 그것도 재밌는 해석인 것 같네! 아까 전시장에서 네가 작품에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있는 것도 그것 자체가 작품이 될 수 있지 않겠냐는 말을 했잖아. 그것과도 통하는 면일 수 있겠고.

휘영청: 이름 자체로 포스터를 만들 수 있는 거니까!

 

  이전에 있었던 이미지를 재해석한 것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휘영청에게 현대미술을 학교 수업에서 어떻게 다룰 수 있을지 물어봤을 때 다시 화제가 되었다.

 

월영: 이런 미술이 있을 수 있단 걸 알았는데, 그렇다면 학교 미술 시간에 오늘 봤던 미술을다룬다면 어떻게 수업을 할 수 있을까?

휘영청: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은) 접근하기 쉬우니까, 따라 그리기도 쉽고. 자기만의 작품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월영: 오, 그렇지.

휘영청: 모나리자를 완벽하게 따라 그릴 수는 또 없잖아. 완벽하게 그릴 수 없겠지만 유사하게 그릴 수는 있지 않을까. 리히텐슈타인은 그리기 좀 쉬워 보였어. 아까 봤던 미국 국기는 선 그리고 원 그리면 되니까.

월영: 예전에 팝아트 할아버지 초상화 그려준다고 그런 식으로 그려본 적 있는데, 팝아트의 느낌이나 아이디어를 활용해보는 것도 팝아트를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재해석해보는 것일 수도 있겠다.

휘영청: 리히텐슈타인이 거장들의 작품을 재해석하듯이 나도 있던 그림을 내 방식대로 따라 그릴 수 있을 테니까.

 

  필자는 휘영청이 이 주제에 대해서 자기 의견을 열심히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고 학교 미술 교육 역시 학생에 맞춰서 다변화된다면 더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혹은, 미술관 관람이 학교 교육의 연장선에서 더 활발해진다면 미술관 학습 경험이 학교 미술 수업에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휘영청과 HY는 수학여행을 하며 국립중앙박물관을 간 적 있지만 관람 안내를 받지 못했고, 그 영향인지 많은 시간을 친구들과 다른 주제로 수다를 떠는 데 썼다고 한다. 미술 수업 시간을 통해서든 미술관 관람을 통해서든 작품에 대해서 자유롭게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면, 이들의 수다는 미술관과 훨씬 가까워질 수 있지 않을까?

 

② 서로 다른 지식들이 모이는 순간

 

  처음 인터뷰를 계획했을 때, 필자는 전시에서 동원할 수 있는 지식을 한정적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역사 교과에서는 미술이 문화사의 일부로만 의의를 갖고, 미술은 작품 그 자체에 대해서 다루기는 하지만 결국 실기가 위주가 된다. 필자는 전시를 본격적으로 보기에 앞서 이런 한계로 전시에 대해 충분히 대화할 수 없을까 걱정했으나, 인터뷰를 진행해오면서 그런 우려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다. 앞서 HY와 <각인> 전시를 보면서는 통일에 대해서 틀에서 벗어난 이야기해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로이 리히텐슈타인> 전을 휘영청과 함께 보면서는 다양한 배경 지식을 전시를 통해 종합해 볼 수 있었다.

 

  휘영청은 전시 전에도 리히텐슈타인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는데, 그것은 국어 교과의 지문 중 팝아트 거장들을 소개하는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내용을 제대로 기억하지는 못했지만 눈물 흘리는 여자 이미지와 리히텐슈타인을 기억하고 있었고, 전시장에 처음 들어섰을 때도 그런 종류의 이미지에 익숙한 편이었다. 휘영청은 미술 중에서도 이론을 좋아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이 이번 전시에서 화가가 보인 기법과 자신이 알고 있던 미술 이론을 비교해보았다.

 

월영: 오늘 도슨트 따라다니면서 들은 리히텐슈타인의 기법들 기억나?

휘영청: 점 찍는 거!

월영: 그렇지, 밴데이 기법! 아까 너가 점 크기나 모양 살펴봤던 거 있잖아. 이전에 유사한 것을 본 적이 있어?

휘영청: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봤던 것 같아.

월영: 오, 점묘화와도 비슷한 지점이 있지. 점묘화를 볼 때와 이 그림들을 볼 때는 어떤 차이가 있었어?

휘영청: 점묘화는 정리되어있지 않은 느낌이었는데, 리히텐슈타인은 정리되어있는 느낌이었어. 점을 모아서 이미지를 만드는 것과 이미 있는 이미지를 점으로 표현하는 것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고.

월영: 그치그치. 일정한 간격으로 줄세워져있는 게 리히텐슈타인 이미지의 차이인 것 같아.

 

  이러한 비교는 도슨트를 들을 때도, 전시 흐름만 봐서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필자는 휘영청의 대답을 들으며 아비 바르부르크(Aby Moritz Warburg)의 므네모시네(Mnemosyne)를 떠올렸다. 므네모시네는 서로 다른 시대에 나타나는 유사한 이미지를 모아놓은 패널이다. 이미지를 모아놓은 후 유사하게 나타나는 경향을 살펴보고, 그 원형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화하는지도 함께 살펴보는 것이다. 므네모시네는 아비 바르부르크 사후 미완으로 남았지만 그 아이디어의 특성상 므네모시네는 무한히 갱신될 수 있다.

 

  필자와 휘영청이 나눈 대화 역시 므네모시네의 아이디어와 연결되는 면이 있다. 미술 사조, 지역, 시대를 뛰어넘는 작품을 비교하는 것은 이미 미술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작업이다. 예컨대 이 전시 이후 HY와 필자가 함께 관람했던 <빛: 영국 테이트 미술관> 전시는 ‘빛’이라는 주제로 서로 다른 시대, 서로 다른 사조의 작품을 전시했다. 이러한 연결을 통해서 누군가는 익숙한 이미지에서 색다른 재미를 발견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새로운 비평 소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인상 깊은 작품을 골라보라고 했을 때 고른 작품들 역시 그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던 사실들과 연관된 작품이었다.

 

휘영청: 88올림픽 포스터 기억에 남는다. 우리나라랑 관련된 거니까, 아무래도. 아까 도슨트도 거기서 사진 제일 많이 찍어가는 곳이라고 했고, 내가 찍기도 했고.

월영: 어떤 느낌이었어? 멀리 있는 나라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열린 올림픽이랑 관련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던 것 같고.

휘영청: 88년도는 이미 한글이 많이 쓰이고 있을 때였을 텐데 왜 한자를 썼지? 하는 생각.

월영: 그렇지.

휘영청: 우리만의 언어가 있는데 왜 거기다 한자를 써놨는가.

월영: 그 사람들이 아시아면 다 같은 아시아라고 생각했던 거지.

휘영청: 인식을 좀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

 

  HY와 <각인> 전시를 보았을 때 통일 문제를 다루었던 것처럼, 휘영청 역시 <로이 리히텐슈타인> 전에서 의도하지는 않았을 생각을 이야기했다. 이런 아이디어는 휘영청이 국어나 역사를 배웠기 때문에 말할 수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미술관이 관람자의 자발성, 자율성을 어느 정도는 보장하는 공간이라 작품을 본 휘영청이 완전히 다른 곳에서 그만의 문제의식을 이끌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필자는 어쩌면 나중에 휘영청이 탈식민주의 이론을 접한다면 더 구체화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3. 나가며

 

  지금까지 사촌 두 명과 전시를 보고 이야기하며 필자가 느낀 것을 정리해보았다. 사촌들이 필자의 질문에 열심히 대답해주어 필자 역시 재밌게 글을 쓸 수 있었다. 사촌들에게도 이 경험이 썩 재밌었기를 바란다.

 

  필자가 이 글을 통해서 짚은 것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을 듯하다. 하나는 학교에서의 미술 교육이 실기 중심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은 미술에 흥미를 일으키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휘영청은 실기 수업을 썩 내켜 하지 않았고, HY 역시 본인의 실기 점수에 대해서는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처럼 전시를 보고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실기에서 성취감을 못 느끼는 것은 실기 창작물 평가가 학생 개인의 손재주를 가늠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고, 심지어 그 평가 기준이 상당히 주관적이라는 점에 있을 것이다. 실기 평가 위주로만 진행되는 학교 미술 교육은 일상에서 미술을 누리는 데는 효과적이지 않다. 필자는 학교 미술 수업에서 미술 이론과 작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도록 함으로써 실기 중심 교육의 난점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나머지 하나는 미술관에서의 자발적인 학습이 한 사람이 가진 관점과 다양한 지식을 한데 이끌어내고 융합하는 데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미술관에서도 전시를 통해 제시하는 메시지가 있고, 작품을 특정한 방향으로 보도록 유도하는 경향이 있다. 어쩌면 필자와 사촌들이 도슨트를 듣고 각자 감상문을 썼다면 이 글에서 다룬 이야기와는 다른 결의 이야기를 했을 수 있겠다. 하지만 사촌들은 그 시선을 그대로만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것은 미술관에서의 교육이 강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슨트의 설명을 이해하기는 했으나 사촌들은 그 위에 자신의 관점과 지식을 동원한 또 다른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냈고, 그것은 전시장 바깥에서 전시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는 미술관에서의 학습이 더욱 풍부해지기 위해서는 미술관 관람 이후 그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공론장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미술관에서 마련할 수도, 전시를 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글은 미술관에서 전시를 본 후 보람 있는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미술관 교육의 나름의 가능성을 확인한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월영

  1. 국성하, 박물관/미술관 체험활동의 새로운 시도: 어떻게 변화해야하는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청년 큐레이터 아카데미 2기 자료집 p. 117  [본문으로]
  2. 국성하, 박물관/미술관 체험활동의 새로운 시도: 어떻게 변화해야하는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청년 큐레이터 아카데미 2기 자료집 pp.112-113  [본문으로]

1. 서론

 

  인간의 정신 활동과 그 결과물을 탐구하는 역사학으로서 ‘사상사(思想史)’는 20세기를 전후하여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기존의 정치사 중심의 역사 서술, 역사 연구의 전문화ㆍ분업화 경향, 역사학의 과학화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한 사상사는 로빈슨(James Harvey Robinson, 1863-1936), 러브조이(Arthur O. Lovejoy, 1873-1962) 등의 학자들에 의하여 선양 발전되었다.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사상사(思想史)’라고 하는 단어가 영어로 무엇인가 하는 일이다. 서구 학계에서 먼저 만들어진 단어임에도 이 단어는 오랫동안 통일된 명칭을 지니지 못하였고, ‘history of thought,’ ‘history of theory,’ ‘history of ideas,’ ‘intellectual history’ 등의 단어가 혼용되었다. 본고에서 필자는 ‘history of thought’라는 표현을 선호하여 논지를 전개하고자 하는데, 이 단어는 사상사가 가진 ‘보통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역사’라는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상사’는 무엇인가? 그리고 ‘사상’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유교 사상,’ ‘불교 사상’ 또는 ‘계몽사상’과 같은 어휘로 이 단어를 접한다.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에서 ‘사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들 사상을 다루는 것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사상사에 대하여 수정주의적 방법론을 제기한 스키너(Quentin Skinner, 1940-)는 사상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과거의 생각들(past thoughts)’라는 간단명료한 그러나 광범위한 대답을 제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과거의 생각들’을 연구하는 사상사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포함된다.[각주:1]

 

(1) 과거의 위대한 종교와 철학에 대한 연구

(2) 하늘과 땅, 과거와 미래, 형이상학과 과학에 대한 ‘보통 사람’의 믿음

(3) 젊음과 늙음, 전쟁과 평화, 사랑과 증오, 기타 잡다한 것들에 대한 선인(先人)들의 태도

(4)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입어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존경을 표해야 하는지에 대한 선인들의 선입견

(5) 건강과 질병, 선(good)과 악(evil), 도덕과 정치, 탄생ㆍ성관계ㆍ죽음에 대한 억측

 

  즉 사상사란 인간의 정신 활동의 총화이며 인간 삶의 전체, 그리고 사회의 총체를 한데 얽어 매는 역할을 하고 있는 분야이다. 사상사는 단지 ‘공자의 사상,’ ‘맹자의 사상’이나 ‘플라톤의 사상,’ ‘칸트의 사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넘어 ‘보통 사람들’의 사상을 포함하는 것이 바로 사상사의 영역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저술가들(grands écrivains)뿐만 아니라 2류ㆍ3류 저술가들(écrivains de second, de troisième ordre)에 주목하며, 궁극적으로는 보통 사람들의 믿음을 연구한다.[각주:2] 필자가 사상사라는 학문의 번역어로서 ‘history of thought’을 선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연구하는 사상사의 특성을 가장 잘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본고는 먼저 사상사의 특징과 의의를 철학사와 비교하여 살펴보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교육에서 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를 논해 보고자 한다. 현재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사상사는 ‘한국사’ 한 과목에서 제한적으로 활용되고 있다.[각주:3]물론 사상사는 역사학의 한 분야로서 시작한 학문 분야이지만 사상사를 연구할 수 있는 학문은 역사학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학, 종교학, 철학뿐만 아니라 고고학, 미술사학, 음악사학 역시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사상사는 사회의 특정 부분을 조각 내어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역사학의 지나친 분업화와 전문화 경향에 비판적으로 서서 사상으로써 사회 전체를 조망하려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므로 거의 모든 분야가 다 사상사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을 견지하며 사상사를 교육에 도입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봄으로써 본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2. 철학사와 사상사

 

1) 철학사의 한계점

 

  사상사란(정확히 말해 오늘날의 사상사란) 결국 한마디로 정의하여 “일반 지식과 사상, 그리고 신앙 세계의 역사”[각주:4]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사상사를 정리한 기념비적인 저서인 『중국사상사(中國思想史)』를 저술한 거자오광(葛兆光, 1950-)은 과거의 엘리트와 경전 위주의 서술을 비판하며 보편 대중의 사상사를 서술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보기에 철학사 중심 ‘사상사’[각주:5] 서술은 두 가지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첫째, 사상사는 엘리트 사상가와 경전으로 구성되며 그들의 사상이 전체 사상계의 정수이다. 둘째, 사상사는 사상가들을 시간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며, 사상은 시간의 추이에 따라 끊임없이 발전한다.[각주:6]

  그러나 이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전문 철학자들 내지 1류 철학자들의 생각과 일반 대중의 생각은 매우 다르다. 철학자의 사상이 일상 세게에서 반드시 중요한 작용을 일으키지는 않으며, 일상 세계는 늘 그들과 동떨어져 있다.[각주:7] 우리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 BTS의 성공 요인이나 최근 대선에서 뽑아야 하는 사람, 촌각에 지나가는 젊음의 아쉬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심심한 철학적 주제에 대해 고민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 효(孝) 의무의 도덕적 근거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공리주의자에게 사랑과 우정이란 것이 가능할지를 토론한다고 가정해 보라! 즉 철학자들의 생각과 일반 대중의 생각은 지극히 다른데, 때로는 충돌하기도 한다. 도덕 철학자들이 의무론과 공리주의, 덕 윤리 중 어느 한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매우 치열하게 공격하고 있을 때, 의무론과 공리주의, 덕 윤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일반 사람들은 나름대로 퍽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 피터 싱어(Peter Singer, 1946-)가 아무리 공리주의를 옹호하고 채식주의를 옹호하여도, 일반 민중은 이에 그다지 관심을 비추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유교ㆍ불교ㆍ도교를 동양의 ‘삼교(三敎)’라고 부르면서 이들이 어떻게 대립하였는지에 주목한다. 특히 조선조 유학자들의 불교 비판이나 몇몇 불승들의 유ㆍ불 회통(儒佛會通) 시도는 오늘날의 철학자들에게 ‘조화 정신’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사례로서 연구된다. 그러나 사실 당대의 일반 민중들에게 이들 세 윤리 사상은 서로 배타적인 사상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최고위 엘리트 철학자들끼리 유교ㆍ불교ㆍ도교의 위치와 이론에 대하여 이리저리 다투고 있을 동안, 일반 민중은 그러한 공허한 철학 담론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그러한 종교를 ‘선택적으로’ 믿었다. 어제는 절에 가서 스님을 뵙고 시주하면서 가족의 안녕을 빌고, 오늘은 학교에 나아가 유교 경전을 탐독하며 내일은 도사를 찾아가 부적을 받아 태운 물을 마시는 일은 매우 일상적이었다. 이러한 점은 다음 그림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각주:8] 즉 엘리트들은 각자 자신의 종교만 옹호하고 타 종교에 적대적이지만, 일반인들은 그렇지 않고 머릿속에 삼교가 모두 공존할 수 있다.

 

<그림 1> 엘리트들과 일반인들의 머릿속에서 삼교

 

  둘째, 철학자들의 저술은 때때로 “소급의 필요성”이나 “가치의 추인(追認)”, “의미의 강조” 등에 의하여 사후에 숭앙받는다.[각주:9] 여기에 가장 잘 들어맞는 예시는 북송대(北宋) 도학(道學)의 계보 조작이리라 생각된다. 오랫동안 도학 즉 성리학의 계보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저자 주돈이(周敦頤, 1017-1073)에서 시작하여 정호(程顥, 1032-1085)ㆍ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거쳐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1130-1200)에까지 이어져 내려왔다고 생각되었으며, 오늘날 성리학에 관련된 대부분의 철학 저술도 이러한 계보 위에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는 주희에 의해 조작된 계보이다. 주희는 도학을 집대성하면서 정호ㆍ정이 형제를 높이 받들었고, 그들의 전좌(前座) 역할로 주돈이를 배치하였다. 주희가 생각하기에 주돈이는 이정(二程) 형제(정호, 정이)의 최대 스승이었다. 주돈이가 이렇게 높이 평가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긴 짧은 글인 『태극도설(太極圖說)』이 주희가 생각하는 우주의 모습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도식과 해설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 책은 맹자가 세상을 떠난 후 1,400년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우주의 진리를 다시금 이 세상에 내놓은 것이었다. 이 탓에 도리어 주돈이 사상의 대부분이 담겨 있는 『통서(通書)』는 『태극도설』에 비해 뒤로 밀리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주돈이는 이정 형제를 그다지 오래 가르치지도 않았으며, 실제 주돈이의 사상이 이정 형제에게 미친 영향 또한 그다지 길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고지마 쓰요시(小島毅, 1962-)가 잘 설명하고 있다.[각주:10]

 

2) 철학사를 넘어 사상사로

 

  철학사를 넘어 사상사로 간다는 것은 이제 엘리트 사상가들의 사상을 넘어 일반 대중들의 생각에 접근한다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케케묵은 논쟁거리 하나를 꺼내 보자. 불교는 종교인가? 부처는 신(神)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승려를 포함한 여러 불교학자들은 다양한 대답을 내놓았고, 그중 하나가 ‘불교는 종교이지만 부처는 신이 아니다.’라는 대답이다. 그러나 과연 불교를 믿는 일반인들에게도 정녕 그러했는가? 루이스(Mark Edward Lewis, 1954-)는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래되었던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의 불교사에 대해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비문(碑文)들은 인식이나 실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사색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수도의 평범한 도시민들에게 불교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준다. 즉 불교는 고통에 빠진 빠진 중생을 구제하고 축복받은 구원의 영역[피안(彼岸)]으로 인도하는 자비로운 신(meciful god)에 대한 경건한 믿음이었다. 대부분의 비문은 왕조릉 위한 형식적인 기도이지만, 주된 관심은 부모가 구원받고 극락(paradise)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다. …(중략)… 간단히 말해 보통 사람들(common people)에게 부처는 한대(漢代) 무덤 예술에서 서왕모(西王母)가 했던 고통받는 사람을 구제하는 자애로운 신(loving god)의 역할을 계속 수행하였던 것이다.[각주:11]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 민중에게 부처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러하다. 중국 그리고 한국의 수많은 민중은 죽은 부모가 염라대왕을 포함한 10명의 재판관, 즉 시왕(十王)에게 무사히 재판을 받고 극락에 태어나고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기를 기원하였다. 그리고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이런 재판에서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원해 주는 역할로서 등장한다. 과연 석가모니 부처는 신이 아닌가?

  부처가 신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는 여러 경전에서 숱하게 발견되며, 석가모니 자신 또한 자신을 신격화하지 말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였다. 엘리트 불교 철학자들은 이를 지켜 석가모니를 신으로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일반 민중의 눈에 석가모니는 그저 “고통받는 사람을 구제하는 자애로운 신”의 모습일 뿐이었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동진(東晋) 조정에서 환현(桓玄, 369-404)과 혜원(慧遠, 334-417)이 ‘승려는 왕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언쟁을 벌이고 제(齊)ㆍ양(梁) 시기에 혜원의 제자들과 범진(范縝, 450-515)이 신멸(神滅)과 신불멸(神不滅)에 관한 논쟁으로 싸우고 있을 때, 민중들의 머릿속에서는 유교ㆍ불교ㆍ도교의 삼교가 한데 뒤섞여 공존하고 있었다. 다원주의라고 하기에는 아직 부족해 보이지만, 적어도 엘리트 사상가의 입장이 아니라 일반 민중의 입장에서 이들 종교는 서로 충돌하지 않았다. 결국 사상사라는 학문은 몇몇 특정 인물들의 생각을 집중 조명하는 것을 넘어, 당시 광범위한 일반 대중이 과연 무슨 생각을 지니고 있었을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필자가 본고에서 지나치게 철학자들의 생각과 일반 대중의 생각을 유리하여 바라본 것에 대하여 일종의 성찰적 차원에서 한 가지 검토를 해봄으로써 해당 장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즉 철학자들의 생각은 일반 대중의 생각과 아주 동떨어진 것은 아니어서, 철학자들의 철학이 일정한 형태로 변주되어 대중의 생각에 안치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피터 레일톤(Peter Railton, 1950-)이나 피터 싱어 같은 공리주의자들의 철학은 우리의 머릿속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 우리는 나름대로 사회 전체의 이익이 증진하는 대로 법률이 지정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는 그르다고 생각하며, 반대로 많은 쾌락을 산출하는 행위는 가치 있다고 여긴다. 철학적 사유는 나름대로 초보적인 형태로 변형되어 대중의 생각에 담긴다. 가령 많은 사람들은 민족주의의 여러 복잡한 관념을 머릿속에 그저 헝클어놓은 채 “북한은 우리 민족이 아니다.”라든지 “조선족은 우리 민족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것은 그들의 머릿속에 분명 어떠한 민족주의적 철학 사상이 한켠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 형태가 세련되지(sophiscated) 못할 뿐이다.

  이런 면에서 흥미로운 연구 주제는 엘리트 철학자들의 생각이 어떻게 민중에게로 전파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미국 독립 혁명 이전에 무슨 일들이 있었길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무슨 일들이 벌어졌길래, 그들은 민중의 혁명을 이루어 냈는가?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고담준론(高談峻論)이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파리의 아녀자들과 빈민들에게 전달되었는가?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의 생각은 고상한 철학자들과 혁명가들의 생각과 매우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떤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했고 함께 혁명에 참여했으리라. 서양에 대해 무지한 필자의 능력 부족을 피하기 위해 시선을 동양으로 돌려보면, 우리는 거기서 엘리트 철학자들의 사상이 일반 민중에게 전래되는 경로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불교 철학은 오늘날에도 종종 열리는 법회(法會)에서 스님들의 강연을 통해 평범한 불교 신자들에게 전파되었다. 이러한 법회에서 불교 경전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에게 쉽게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변문(變文)’이다. 변문은 강연 내용, 강연 대상, 강연 지역에 따라 다양한 향태로 변주되었으며 불교 경전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되 때로는 과감한 비약과 생략, 변주를 통해 ― 때로는 불교 교리에 반대되는 내용일지라도 이해에 도움이 된다면 추가하여 ― 불교 문헌을 알기 쉽게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이런 변문을 통해 우리는 ‘불교의 중국화’를 살펴볼 수 있다. 불교 경전을 쉽게 설명하고자 중국의 민속 신앙과 전통 풍습을 상당 부분 강연 내용에 포함하였던 것이다.[각주:12]

 

3. 사상사 교육의 의미: 사상사를 왜 교육해야 하는가?

 

  인민 대중의 생각이 진리인가? 여기에 긍정의 대답을 취하면 대중이 곧 진리라는 어색한 입장으로 귀결된다. 당연히 대중의 생각이 곧바로 진리일 수는 없으며, 실제로 대중의 생각이 곧 진리인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를 중국과 한국, 일본의 민중이 제아무리 신으로 숭배하였다고 한들 그것은 석가모니 본연의 입장이 아니며 석가모니는 그런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즉 동아시아의 대중은 석가모니의 사상을 완전히 곡해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틀린’ 사상을 왜 배워야 하는가? 그리고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이러한 것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사상사 교육은 우리의 삶과 사상을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바라보게 한다. 『윤리와 사상』 교과서애서 학생들이 만나는 유교, 불교, 도가 사상은 따분하고 지루하며 복잡한 용어들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다. 천리(天理)니 인욕(人欲)이니 정혜(定慧)니 일심(一心)이니 하는 용어들을 들여보고 있노라면, 교과를 배우는 학습자의 흥미는 자연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불교 신자라고 할지라도 불교 윤리를 공부하다 보면 오히려 복잡한 교리 탓에 불교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마치 자신의 삶과 유리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도 현실에서 마주하는 윤리 사상들은 대체로 철학사보다는 사상사에 가깝다. 우리는 언제나 절에 가서 기와를 사서 소원을 적으며, 연등회(燃燈會)가 있는 날이면 친구 또는 연인과 함께 청계천에 나아가 연등을 구경하고 소원을 빈다. 도교나 민간 신앙의 경우 어떠한가? 때때로 사주를 보러 점집에 들르는 친구의 모습은 연초마다 쉽게 볼 수 있으며, 무당을 찾아가 소원을 빌고 한 해의 운세, 자녀의 학운을 묻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굿과 부적은 아직도 우리의 곁에 머물러 있지만 막상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런 면에서 사상사 교육은 우리의 현실과 유리되어 있지 않은, 생활 밀착형 교육이다.

  둘째, 사상사 교육은 사상을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와의 전체적인 관계 속에서 조망함으로써 사상과 다른 분야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를테면 이기론ㆍ심성론 같은 ‘철학사로서 유교’이 아니라 ‘사상사로서 유교’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유교와 여타 분야의 관계를 깊이 조망할 수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 유교와 정치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복잡한 예법 논쟁으로서 현종조 예송 논쟁(禮訟論爭)이 지니는 정치적 의의는 무엇인가? 예송 논쟁은 단지 공리공담이 아니라 인조로부터 비롯한 효종(r. 1649-1659)ㆍ현종(r. 1659-1674)의 정통성 문제와 왕-사대부의 관계에 관한 매우 정치적인 문제였다. 조금 뒤 시기의 호락 논쟁은 어떠한가? 그것 또한 병자호란 이후 청(淸)을 바라보는 지식인의 태도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꼭 정치 분야가 아니더라도 사상사 교육은 다른 분야와 접목할 수 있다. 중세기 중국에서 불교가 경제적ㆍ사회적으로 지닌 지위는 무엇인가? 수많은 귀족과 황족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재산을 절에 바쳤는데, 과연 그들이 투철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인가? 한편으로 중국 불교의 수용은 문화사적인 부분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불상 조각과 불교 회화 같은 불교 미술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불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산스크리트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접한 중국인들은 자연스레 자신들의 언어에 깊은 관심을 지니게 되었고, 중국어 연구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에 수많은 운서(韻書)들이 탄생하였으며, 이는 마침내 정형시의 일종으로서 근체시(近體詩)가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처럼 사상사 교육은 사상을 다른 분야와의 연결성 속에서 파악한다는 점에서, 역사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통합적 사고를 촉진할 수 있다.

 

4. 사상사 교육의 근변

 

  그렇다면 이제 사상사라는 학문, 그리고 사상사 교육은 어떤 것을 재료로 삼을 수 있는지, 사상사의 이웃에는 누가 자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상사는 이들의 연구 성과를 적절히 사용하여 연구를 진척할 수 있을 것이고, 사상사 교육 또한 이들 주변 교과와 협력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두 명 이상의 교사가 서로 협력하여 수업할 수 있겠으며, 꼭 그렇지 않더라도 한 내용을 두 번 이상 다른 관점으로 배움으로써 학생은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사상사와 그 근변의 학문들 간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교육에 활용할 수 있는지 주된 내용 요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사상사와 철학(사)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본고에서 꾸준히 사상사와 대비하여 제시하였던 철학(사)이다. 고등학교 교과로 표현한다면 윤리 교과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실 철학사와 사상사는 그렇게까지 대립하는 지점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필자는 사상사 교육이 ‘생활 밀착형’ 교육이 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철학사 교육이 그렇지 않은 듯이 표현하였지만, 철학사 교육 또한 그 자체로도 훌륭한 생활 밀착형 교육이 될 수 있다. 사실 교육이 생화과 밀착하냐 유리되냐는 교사가 어떻게 ‘교과의 심리화(psychologization of subject-matter)’를 잘 일으킬 수 있는지 그 역량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사를 배움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의 논리적ㆍ윤리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으며, 거기서도 나름의 실생활 적용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공리주의에 대해 깊이 고민한 다음, 나의 소비 습관을 돌아보고 원조를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며, 사랑과 우정이 공리주의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깊이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처럼 철학사 역시 얼마든지 생활 밀착형 교육이 될 잠재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상사 교육과 철학사 교육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자. 엘리트 철학자들의 철학 또한 그들의 ‘생각’이고, 어떤 경로로든 간에 일반 대중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므로 사상사는 엘리트 철학자들의 사상을 완전히 배제하고서 서술될 수 없다. 동아시아의 민중이 불교를 어떻게 인식하였는지 연구하는 학자가 불교 철학의 주요 개념에 무지하다면 단 한 발자국도 연구를 진척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철학사의 전개 과정에 대해 사상사는 주의 깊게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각 시대마다 논의되었던 중요한 주제들이 다음 세대에서 일반 민중에게 전파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서 주희가 성리학의 계보를 조작했다고 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보자. 설령 주희가 중국 도학의 계보를 조작하였다고 한들, 20세기가 되기까지 이루어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그러한 계보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없었고 그것을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사상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늘 철학사와 사상사를 함께 두고 비교해 가면서 연구를 진척해야 한다. 우리가 철학사로부터 어떤 오해를 얻는지 그리고 진실은 무엇인지를 함께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오해가 설령 진실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몇백 년을 지속해 온 오해는 중요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오해라는 점은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각주:13] 사상사와 철학사가 어떤 관계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본고의 앞부분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하므로 이만 지면을 줄인다.

 

2) 사상사와 고고학

 

  사상사는 반드시 문자 자료에만 의지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고고학이 제공해 주는 방대한 양의 출토 자료가 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방대한 출토 문헌들을 역사 교과서에서 종종 마주하곤 하지만 그것이 지니는 깊은 사상사적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경우는 그다지 없다. 사상사는 그런 유물들이 도대체 과거 사람들의 어떤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그림 2> 국보 제162호 무령왕릉 석수(石獸) <그림 3> 희평 원년 진숙경(陳叔敬) 진묘도병(鎭墓陶甁)

 

  <그림 2>[각주:14]는 우리나라 공주의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석수(石獸)이고, <그림 3>[각주:15]은 중국 시안(西安)에서 출토된 희평(熹平) 원년(172)에 사망한 진숙경(陳叔敬)의 묘에서 발견된 진묘도병(鎭墓陶甁)이다. 비록 생김새와 특징은 다르지만 두 유물은 모두 동일한 기능을 위하여 제작되었는데, 바로 ‘진묘(鎭墓)’이다. ‘무덤을 진압한다’는 뜻을 지닌 이 작업은 지하의 신들에게 사망자를 착오 없이 저승으로 이장할 것을 명령함과 동시에 형벌로 가득 찬 저승에서 사망자가 조금이라도 나은 처우를 받을 것, 그래서 무덤 밖으로 도망쳐 나오지 못하도록 할 것, 죽은 이와 산 사람의 경계가 뚜렷하게 잘 단속할 것 등을 부탁하는 것이다.[각주:16] 위생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는 집안에서 사망자가 발생할 때 소위 ‘줄초상’이 나는 경우가 다소 있었는데, 고대 중국인들은 이를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하였다. 즉 사람은 죽은 후에 지옥(地獄)에서 형벌을 받고 온갖 노동에 시달리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만 노동하는 이 비탄한 사후 세계의 현실에서 위안을 받고자 산 사람을 사후 세계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앙을 ‘앙화(殃禍)’ 또는 간단히 말해 ‘앙(殃)’이라고 불렀는데, 진묘 작업은 이 앙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무덤을 지키는 지하의 신들에게 망자를 단단히 단속하여 지하의 지옥으로 안내하고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하는 작업이었다. 때로는 돌에 문서로 새겼으며, 때로는 질그릇 병[陶甁]에 글로 쓰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무령왕릉처럼 짐승을 조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런 진묘 작업을 위해 병이나 돌에 새긴 글을 진묘문(鎭墓文)이라고 한다. 고고학 증거는 이렇게 2-6세기 동아시아의 보통 사람들이 믿었던 ‘생사관’을 ― 단순히 윤리 교과서에서 살펴보는 지리한 유교ㆍ불교ㆍ도가의 생사관이 아니라 ― 즉 보다 실질적인 생사관을 보여줄 수 있다.

 

  앞서 필자는 사상사 교육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의 영역과 연계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진묘문은 도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바로 이 도교의 중요한 특징인 ‘문서 행정’이 진묘문에서도 드러난다. 고대 중국은 전근대 세계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체계적인 관료제를 형성한 국가였고, 이러한 면모는 도교의 상장(上章) 의례 같은 곳에 반영되었다. 즉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玉皇上帝) 이하 여러 신하들에게 올리는 문서를, 마치 오늘날 우리가 주민센터에 가서 신고서를 작성하듯이 체계적으로 양식을 갖추어 작성한 후 하늘에 올려보낸 것이다. 진묘문에서는 그 대상이 하늘이 아니라 지신(地神)들이라고 하겠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도 관료 기구에 속해 있는 신들이 존재하며, 그들이 망자의 ‘부동산 매매’[각주:17], ‘전입 신고’[각주:18], ‘노역 부과’ 등을 주관한다. 즉 고대 중국의 정치ㆍ사회적 면모인 ‘문서 행정’이 사후 세계에 대한 그들의 관념에 반영된 것이다. 관료제가 발달하지 않았던 다른 지역의 생사관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3) 사상사와 미술사

 

  이번에는 미술사와 사상사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는 철학 문헌, 역사 문헌, 출토 문헌뿐만 아니라 다양한 회화 자료를 통해서도 사상사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이미지를 활용한 사상사 수업이 이루어진다면, 학습자의 흥미는 더욱 증진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근대 일본에서 ‘미술(美術)’이라는 관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사상사와의 연관 속에서 몇 가지 미술 작품들과 함께 살펴볼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서양으로부터 유입된 ‘미술’ 개념은 일본의 미술가들을 자극하였고, 1877년 제1회 내국 권업 박람회(內國勸業博覽會)에서는 공부미술학교 학생들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양화(洋畫) 부문에서 최고상을 받은 화가가 바로 고세다 요시마쓰(五姓田義松, 1855-1915)이다. 그는 고메이 천황(孝明天皇, r. 1846-1867)의 초상을 수묵화 기법이 아니라 수채화로 그렸으며,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r. 1867-1912)의 호쿠리쿠(北陸)ㆍ도카이도(東海道) 순행에 따라가 41점을 풍경화를 그렸다. <그림 4>는 그가 그린 「고메이 천황초상(孝明天皇肖像)」이고, <그림 5>는 메이지 천황의 순행을 담은 그림인 「메이지 11년 호쿠리쿠ㆍ도카이도 순행도」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복고(王政復古)’를 단행한 신정부는 이제 근대 국민 국가(nation state)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일본인들의 머릿속에서 ‘○○번(藩) 사람’이라는 의식을 지우고 ‘대일본제국 신민(국민)’이라는 인상을 남길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신정부의 각료들은 막부 시대에는 숨겨진 존재였던 천황을 시각화하겠다는 발상에 다다랐다. 그 방법은 천황의 순행과 초상화였다. 천황은 자신을 민중의 시선 앞에 드러냈고, 민중과 국토는 천황의 시선 앞에 놓였다.[각주:19] 고세다 요시마쓰는 천황을 제작함으로써 천황과 황실을 민중 앞에 가시적인 존재로 만들었으며, 메이지 천황의 순행에 동행하여 그림을 그렸다. 독특한 점은 41점 중 1점만이 풍경을 둘러보는 메이지 천황의 모습이고 나머지 40점은 모두 메이지 천황이 ‘둘러본’ 주변 풍경을 그렸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중에서도 천황이 직접 가지 못한 순행지 근처 명소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였다. 고세다의 시선은 천황의 시선을 대리하였으며, 그는 서양 화법 ― 특히 원근법 ― 에 기초하여 이전의 일본 산수화와 달리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천황의 시선이 닿은 민중과 국토를 질서정연하게 객체로서 표현하였다.[각주:20]

<그림 4> 五姓田義松, 「孝明天皇肖像」, 1878, 종이에 수채, 103.4×67.5cm, 궁내성 소장 <그림 5> 五姓田義松, 「明治十一年北陸東海道巡行圖」, 1878, 합판에 유채, 31.6×45cm, 궁내성 소장

 

  이렇듯 얼핏 그저 지나칠 수 있는 미술 작품에도 사상사는 담겨 있다. 그것을 그린 이도 어쨌든 한 명의 일반 사람이고 그의 생각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사상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제국 시기 일본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소학교에서 불이 나 학생과 교사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대피하였는데, 갑자기 교사 한 명이 천황의 어진(御眞)을 화재로부터 구해야 한다며 불타는 학교로 다시 들어갔다가 사망했다는 일화이다. 우리는 여기서 근대 일본 ‘신민’이 지녔던 사상, 그 때로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발로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어쩌면 위와 같은 미술 작품에서도 그런 면모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응향

 

  1. Quentin Skinner, “What is Intellectual History?,” In: What is History Today?, ed. Juliet Gardiner, Basingstoke; Macmillan Education, 1988, pp. 109-110. [본문으로]
  2. 차라순, 「사상사란 무엇인가」, 『韓國思想史學』 52, 2016, p. 13. [본문으로]
  3. ‘동아시아사’ 교과에서도 몇몇 부분에서 사상사의 서술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 비중이 한국사보다 크지 않으며, 몇몇 철학자들과 종교가들의 이름을 암기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본문으로]
  4. 葛兆光, 이등연 외 옮김, 『중국사상사 1: 7세기 이전 중국의 지식과 사상, 그리고 신앙세계』, 서울: 도서출판 일빛, 2013, p. 29. [본문으로]
  5. ‘사상사’라고 따옴표를 치는 것은, 이 글에서 말하듯이 그리고 거자오광이 주장하듯이 사상사는 단지 철학사를 가리키는 용어가 이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까지는 ‘사상사’라는 이름을 달고서 철학사를 서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표기한다. [본문으로]
  6. 상게서, p. 30. [본문으로]
  7. 상게서, pp. 31-32. [본문으로]
  8. 이 그림은 본래 동양사학과 조성우 교수님께서 수업에서 사용하신 그림이다. [본문으로]
  9. 상게서, p. 32. [본문으로]
  10. 小島毅, 『宋学の形成と展開』, 東京: 株式会社, 倉文社, 1999의 제3장 「道」 참조. 주돈이 외에 장재(張載) 역시 마찬가지의 사후 현창 과정을 거쳤다. [본문으로]
  11. Mark Edward Lewis, China Between Empires: the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pp. 209-210. [본문으로]
  12. 정병윤, 「변문을 통해 본 불교경전의 문화적 변용과 해석」, 『中國學報』 70,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2017, p. 152. [본문으로]
  13. 가령 명ㆍ청대 신사(紳士) 계층의 사상을 연구하는 사람은 주희의 계보 조작이 엄연한 사실임을 분명히 인지해야 하겠으나 동시에 자신이 연구하는 시대인 명ㆍ청대에는 주희가 제시한 도학의 계보가 한치의 의심도 없이 진실로서 당대인들에게 수용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다소 비근한 예시를 들어보자면, 고대에 세상이 코끼리의 등에 올라타 있는 것과 같다는 고대인들의 생각을 연구함과 동시에 지구는 사실 둥글다는 사실을 까먹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본문으로]
  14.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국보 무령왕릉 석수(武寧王陵 石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13401620000&pageNo=1_1_2_0 (2022.02.22. 검색) [본문으로]

  15. 尹在碩, 「중국 고대 『死者의 書』와 漢代人의 來世觀 ― 鎭墓文을 중심으로」, 『中國史硏究』 90, 중국사학회, 2014, p. 53. [본문으로]
  16. 趙晟佑, 「後漢魏晋 鎭墓文의 종교적 특징과 道敎 ― 五石을 중심으로」, 『東洋史學硏究』 117, 동양사학회, 2011, p. 51. [본문으로]
  17. 죽은 자를 위해 무덤을 쓸 때 형식적으로 지전(紙錢)을 태우고 매지권(買地卷)을 사용하여 저승의 관리로부터 이 땅을 무덤을 위해 쓰기로 샀다는 의식을 치른다. 이 작업 자체는 진묘와는 큰 상관이 없다. 여하튼 무령왕릉에서도 해당 유물이 발견되었다. [본문으로]
  18. 아무개가 모월 모일 모시에 죽어 이제 명계(冥界)에 들어간다는 것을 필자가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본문으로]
  19. 오윤정, 「메이지미술과 일본의 ‘근대’ ― 메이지미술회를 중심으로」, 『일본비평』 19,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p. 135. [본문으로]
  20. 상게 논문, p. 13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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