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인간의 정신 활동과 그 결과물을 탐구하는 역사학으로서 ‘사상사(思想史)’는 20세기를 전후하여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기존의 정치사 중심의 역사 서술, 역사 연구의 전문화ㆍ분업화 경향, 역사학의 과학화에 대한 반발로서 등장한 사상사는 로빈슨(James Harvey Robinson, 1863-1936), 러브조이(Arthur O. Lovejoy, 1873-1962) 등의 학자들에 의하여 선양 발전되었다. 여기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사상사(思想史)’라고 하는 단어가 영어로 무엇인가 하는 일이다. 서구 학계에서 먼저 만들어진 단어임에도 이 단어는 오랫동안 통일된 명칭을 지니지 못하였고, ‘history of thought,’ ‘history of theory,’ ‘history of ideas,’ ‘intellectual history’ 등의 단어가 혼용되었다. 본고에서 필자는 ‘history of thought’라는 표현을 선호하여 논지를 전개하고자 하는데, 이 단어는 사상사가 가진 ‘보통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역사’라는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상사’는 무엇인가? 그리고 ‘사상’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유교 사상,’ ‘불교 사상’ 또는 ‘계몽사상’과 같은 어휘로 이 단어를 접한다. 고등학교 『윤리와 사상』 교과에서 ‘사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들 사상을 다루는 것 또한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사상사에 대하여 수정주의적 방법론을 제기한 스키너(Quentin Skinner, 1940-)는 사상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에 대하여 ‘과거의 생각들(past thoughts)’라는 간단명료한 그러나 광범위한 대답을 제시하였다. 그에 따르면 ‘과거의 생각들’을 연구하는 사상사는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포함된다.[각주:1]

 

(1) 과거의 위대한 종교와 철학에 대한 연구

(2) 하늘과 땅, 과거와 미래, 형이상학과 과학에 대한 ‘보통 사람’의 믿음

(3) 젊음과 늙음, 전쟁과 평화, 사랑과 증오, 기타 잡다한 것들에 대한 선인(先人)들의 태도

(4) 무엇을 먹어야 하는지, 입어야 하는지, 그리고 누구에게 존경을 표해야 하는지에 대한 선인들의 선입견

(5) 건강과 질병, 선(good)과 악(evil), 도덕과 정치, 탄생ㆍ성관계ㆍ죽음에 대한 억측

 

  즉 사상사란 인간의 정신 활동의 총화이며 인간 삶의 전체, 그리고 사회의 총체를 한데 얽어 매는 역할을 하고 있는 분야이다. 사상사는 단지 ‘공자의 사상,’ ‘맹자의 사상’이나 ‘플라톤의 사상,’ ‘칸트의 사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를 넘어 ‘보통 사람들’의 사상을 포함하는 것이 바로 사상사의 영역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상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대저술가들(grands écrivains)뿐만 아니라 2류ㆍ3류 저술가들(écrivains de second, de troisième ordre)에 주목하며, 궁극적으로는 보통 사람들의 믿음을 연구한다.[각주:2] 필자가 사상사라는 학문의 번역어로서 ‘history of thought’을 선호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이 단어가 보통 사람들의 생각을 연구하는 사상사의 특성을 가장 잘 설명해 주기 때문이다.

  본고는 먼저 사상사의 특징과 의의를 철학사와 비교하여 살펴보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교육에서 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를 논해 보고자 한다. 현재 고등학교 교육 과정에서 사상사는 ‘한국사’ 한 과목에서 제한적으로 활용되고 있다.[각주:3]물론 사상사는 역사학의 한 분야로서 시작한 학문 분야이지만 사상사를 연구할 수 있는 학문은 역사학에 그치지 않는다. 역사학, 종교학, 철학뿐만 아니라 고고학, 미술사학, 음악사학 역시 여기에 포함될 수 있다. 사상사는 사회의 특정 부분을 조각 내어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고, 역사학의 지나친 분업화와 전문화 경향에 비판적으로 서서 사상으로써 사회 전체를 조망하려는 특징을 지니고 있으므로 거의 모든 분야가 다 사상사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이런 점을 견지하며 사상사를 교육에 도입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봄으로써 본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2. 철학사와 사상사

 

1) 철학사의 한계점

 

  사상사란(정확히 말해 오늘날의 사상사란) 결국 한마디로 정의하여 “일반 지식과 사상, 그리고 신앙 세계의 역사”[각주:4]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사상사를 정리한 기념비적인 저서인 『중국사상사(中國思想史)』를 저술한 거자오광(葛兆光, 1950-)은 과거의 엘리트와 경전 위주의 서술을 비판하며 보편 대중의 사상사를 서술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가 보기에 철학사 중심 ‘사상사’[각주:5] 서술은 두 가지 가정에서 출발하고 있다. 첫째, 사상사는 엘리트 사상가와 경전으로 구성되며 그들의 사상이 전체 사상계의 정수이다. 둘째, 사상사는 사상가들을 시간 순서대로 배열한 것이며, 사상은 시간의 추이에 따라 끊임없이 발전한다.[각주:6]

  그러나 이는 몇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첫째, 전문 철학자들 내지 1류 철학자들의 생각과 일반 대중의 생각은 매우 다르다. 철학자의 사상이 일상 세게에서 반드시 중요한 작용을 일으키지는 않으며, 일상 세계는 늘 그들과 동떨어져 있다.[각주:7] 우리는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 BTS의 성공 요인이나 최근 대선에서 뽑아야 하는 사람, 촌각에 지나가는 젊음의 아쉬움,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지 심심한 철학적 주제에 대해 고민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가족 식사 자리에서 효(孝) 의무의 도덕적 근거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공리주의자에게 사랑과 우정이란 것이 가능할지를 토론한다고 가정해 보라! 즉 철학자들의 생각과 일반 대중의 생각은 지극히 다른데, 때로는 충돌하기도 한다. 도덕 철학자들이 의무론과 공리주의, 덕 윤리 중 어느 한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매우 치열하게 공격하고 있을 때, 의무론과 공리주의, 덕 윤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일반 사람들은 나름대로 퍽 도덕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 피터 싱어(Peter Singer, 1946-)가 아무리 공리주의를 옹호하고 채식주의를 옹호하여도, 일반 민중은 이에 그다지 관심을 비추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유교ㆍ불교ㆍ도교를 동양의 ‘삼교(三敎)’라고 부르면서 이들이 어떻게 대립하였는지에 주목한다. 특히 조선조 유학자들의 불교 비판이나 몇몇 불승들의 유ㆍ불 회통(儒佛會通) 시도는 오늘날의 철학자들에게 ‘조화 정신’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사례로서 연구된다. 그러나 사실 당대의 일반 민중들에게 이들 세 윤리 사상은 서로 배타적인 사상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최고위 엘리트 철학자들끼리 유교ㆍ불교ㆍ도교의 위치와 이론에 대하여 이리저리 다투고 있을 동안, 일반 민중은 그러한 공허한 철학 담론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그러한 종교를 ‘선택적으로’ 믿었다. 어제는 절에 가서 스님을 뵙고 시주하면서 가족의 안녕을 빌고, 오늘은 학교에 나아가 유교 경전을 탐독하며 내일은 도사를 찾아가 부적을 받아 태운 물을 마시는 일은 매우 일상적이었다. 이러한 점은 다음 그림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각주:8] 즉 엘리트들은 각자 자신의 종교만 옹호하고 타 종교에 적대적이지만, 일반인들은 그렇지 않고 머릿속에 삼교가 모두 공존할 수 있다.

 

<그림 1> 엘리트들과 일반인들의 머릿속에서 삼교

 

  둘째, 철학자들의 저술은 때때로 “소급의 필요성”이나 “가치의 추인(追認)”, “의미의 강조” 등에 의하여 사후에 숭앙받는다.[각주:9] 여기에 가장 잘 들어맞는 예시는 북송대(北宋) 도학(道學)의 계보 조작이리라 생각된다. 오랫동안 도학 즉 성리학의 계보는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저자 주돈이(周敦頤, 1017-1073)에서 시작하여 정호(程顥, 1032-1085)ㆍ정이(程頤, 1033-1107) 형제를 거쳐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1130-1200)에까지 이어져 내려왔다고 생각되었으며, 오늘날 성리학에 관련된 대부분의 철학 저술도 이러한 계보 위에 펼쳐져 있다. 그러나 이는 주희에 의해 조작된 계보이다. 주희는 도학을 집대성하면서 정호ㆍ정이 형제를 높이 받들었고, 그들의 전좌(前座) 역할로 주돈이를 배치하였다. 주희가 생각하기에 주돈이는 이정(二程) 형제(정호, 정이)의 최대 스승이었다. 주돈이가 이렇게 높이 평가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남긴 짧은 글인 『태극도설(太極圖說)』이 주희가 생각하는 우주의 모습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오묘하고 신비로운 도식과 해설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이 책은 맹자가 세상을 떠난 후 1,400년간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우주의 진리를 다시금 이 세상에 내놓은 것이었다. 이 탓에 도리어 주돈이 사상의 대부분이 담겨 있는 『통서(通書)』는 『태극도설』에 비해 뒤로 밀리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주돈이는 이정 형제를 그다지 오래 가르치지도 않았으며, 실제 주돈이의 사상이 이정 형제에게 미친 영향 또한 그다지 길지 않다. 이에 대해서는 고지마 쓰요시(小島毅, 1962-)가 잘 설명하고 있다.[각주:10]

 

2) 철학사를 넘어 사상사로

 

  철학사를 넘어 사상사로 간다는 것은 이제 엘리트 사상가들의 사상을 넘어 일반 대중들의 생각에 접근한다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해 케케묵은 논쟁거리 하나를 꺼내 보자. 불교는 종교인가? 부처는 신(神)인가? 이 물음에 대하여 승려를 포함한 여러 불교학자들은 다양한 대답을 내놓았고, 그중 하나가 ‘불교는 종교이지만 부처는 신이 아니다.’라는 대답이다. 그러나 과연 불교를 믿는 일반인들에게도 정녕 그러했는가? 루이스(Mark Edward Lewis, 1954-)는 불교가 중국에 처음 전래되었던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기의 불교사에 대해 서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비문(碑文)들은 인식이나 실재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인 사색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수도의 평범한 도시민들에게 불교가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준다. 즉 불교는 고통에 빠진 빠진 중생을 구제하고 축복받은 구원의 영역[피안(彼岸)]으로 인도하는 자비로운 신(meciful god)에 대한 경건한 믿음이었다. 대부분의 비문은 왕조릉 위한 형식적인 기도이지만, 주된 관심은 부모가 구원받고 극락(paradise)에 다시 태어나는 것이었다. …(중략)… 간단히 말해 보통 사람들(common people)에게 부처는 한대(漢代) 무덤 예술에서 서왕모(西王母)가 했던 고통받는 사람을 구제하는 자애로운 신(loving god)의 역할을 계속 수행하였던 것이다.[각주:11]

 

  불교가 전래되었을 때 민중에게 부처는 신과 같은 존재였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그러하다. 중국 그리고 한국의 수많은 민중은 죽은 부모가 염라대왕을 포함한 10명의 재판관, 즉 시왕(十王)에게 무사히 재판을 받고 극락에 태어나고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기를 기원하였다. 그리고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이런 재판에서 도탄에 빠진 민중을 구원해 주는 역할로서 등장한다. 과연 석가모니 부처는 신이 아닌가?

  부처가 신이 아니라는 주장의 근거는 여러 경전에서 숱하게 발견되며, 석가모니 자신 또한 자신을 신격화하지 말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하였다. 엘리트 불교 철학자들은 이를 지켜 석가모니를 신으로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일반 민중의 눈에 석가모니는 그저 “고통받는 사람을 구제하는 자애로운 신”의 모습일 뿐이었다. 마찬가지의 맥락에서, 동진(東晋) 조정에서 환현(桓玄, 369-404)과 혜원(慧遠, 334-417)이 ‘승려는 왕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언쟁을 벌이고 제(齊)ㆍ양(梁) 시기에 혜원의 제자들과 범진(范縝, 450-515)이 신멸(神滅)과 신불멸(神不滅)에 관한 논쟁으로 싸우고 있을 때, 민중들의 머릿속에서는 유교ㆍ불교ㆍ도교의 삼교가 한데 뒤섞여 공존하고 있었다. 다원주의라고 하기에는 아직 부족해 보이지만, 적어도 엘리트 사상가의 입장이 아니라 일반 민중의 입장에서 이들 종교는 서로 충돌하지 않았다. 결국 사상사라는 학문은 몇몇 특정 인물들의 생각을 집중 조명하는 것을 넘어, 당시 광범위한 일반 대중이 과연 무슨 생각을 지니고 있었을까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필자가 본고에서 지나치게 철학자들의 생각과 일반 대중의 생각을 유리하여 바라본 것에 대하여 일종의 성찰적 차원에서 한 가지 검토를 해봄으로써 해당 장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즉 철학자들의 생각은 일반 대중의 생각과 아주 동떨어진 것은 아니어서, 철학자들의 철학이 일정한 형태로 변주되어 대중의 생각에 안치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피터 레일톤(Peter Railton, 1950-)이나 피터 싱어 같은 공리주의자들의 철학은 우리의 머릿속과 아주 무관하지는 않다. 우리는 나름대로 사회 전체의 이익이 증진하는 대로 법률이 지정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는 그르다고 생각하며, 반대로 많은 쾌락을 산출하는 행위는 가치 있다고 여긴다. 철학적 사유는 나름대로 초보적인 형태로 변형되어 대중의 생각에 담긴다. 가령 많은 사람들은 민족주의의 여러 복잡한 관념을 머릿속에 그저 헝클어놓은 채 “북한은 우리 민족이 아니다.”라든지 “조선족은 우리 민족이 아니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이것은 그들의 머릿속에 분명 어떠한 민족주의적 철학 사상이 한켠에 자리 잡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그 형태가 세련되지(sophiscated) 못할 뿐이다.

  이런 면에서 흥미로운 연구 주제는 엘리트 철학자들의 생각이 어떻게 민중에게로 전파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미국 독립 혁명 이전에 무슨 일들이 있었길래,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무슨 일들이 벌어졌길래, 그들은 민중의 혁명을 이루어 냈는가? 계몽주의 철학자들의 고담준론(高談峻論)이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파리의 아녀자들과 빈민들에게 전달되었는가? 프랑스 혁명 당시 민중의 생각은 고상한 철학자들과 혁명가들의 생각과 매우 다를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떤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했고 함께 혁명에 참여했으리라. 서양에 대해 무지한 필자의 능력 부족을 피하기 위해 시선을 동양으로 돌려보면, 우리는 거기서 엘리트 철학자들의 사상이 일반 민중에게 전래되는 경로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불교 철학은 오늘날에도 종종 열리는 법회(法會)에서 스님들의 강연을 통해 평범한 불교 신자들에게 전파되었다. 이러한 법회에서 불교 경전의 가르침을 일반 대중에게 쉽게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변문(變文)’이다. 변문은 강연 내용, 강연 대상, 강연 지역에 따라 다양한 향태로 변주되었으며 불교 경전의 내용을 기반으로 하되 때로는 과감한 비약과 생략, 변주를 통해 ― 때로는 불교 교리에 반대되는 내용일지라도 이해에 도움이 된다면 추가하여 ― 불교 문헌을 알기 쉽게 대중에게 전달하고자 하였다. 이런 변문을 통해 우리는 ‘불교의 중국화’를 살펴볼 수 있다. 불교 경전을 쉽게 설명하고자 중국의 민속 신앙과 전통 풍습을 상당 부분 강연 내용에 포함하였던 것이다.[각주:12]

 

3. 사상사 교육의 의미: 사상사를 왜 교육해야 하는가?

 

  인민 대중의 생각이 진리인가? 여기에 긍정의 대답을 취하면 대중이 곧 진리라는 어색한 입장으로 귀결된다. 당연히 대중의 생각이 곧바로 진리일 수는 없으며, 실제로 대중의 생각이 곧 진리인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를 중국과 한국, 일본의 민중이 제아무리 신으로 숭배하였다고 한들 그것은 석가모니 본연의 입장이 아니며 석가모니는 그런 것을 원하지도 않았다. 즉 동아시아의 대중은 석가모니의 사상을 완전히 곡해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틀린’ 사상을 왜 배워야 하는가? 그리고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이러한 것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사상사 교육은 우리의 삶과 사상을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바라보게 한다. 『윤리와 사상』 교과서애서 학생들이 만나는 유교, 불교, 도가 사상은 따분하고 지루하며 복잡한 용어들의 향연이라고 할 수 있다. 천리(天理)니 인욕(人欲)이니 정혜(定慧)니 일심(一心)이니 하는 용어들을 들여보고 있노라면, 교과를 배우는 학습자의 흥미는 자연 떨어질 수밖에 없다. 불교 신자라고 할지라도 불교 윤리를 공부하다 보면 오히려 복잡한 교리 탓에 불교에 대해 싫증을 느끼고 마치 자신의 삶과 유리된 것으로 바라볼 수 있다. 우리가 오늘날까지도 현실에서 마주하는 윤리 사상들은 대체로 철학사보다는 사상사에 가깝다. 우리는 언제나 절에 가서 기와를 사서 소원을 적으며, 연등회(燃燈會)가 있는 날이면 친구 또는 연인과 함께 청계천에 나아가 연등을 구경하고 소원을 빈다. 도교나 민간 신앙의 경우 어떠한가? 때때로 사주를 보러 점집에 들르는 친구의 모습은 연초마다 쉽게 볼 수 있으며, 무당을 찾아가 소원을 빌고 한 해의 운세, 자녀의 학운을 묻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굿과 부적은 아직도 우리의 곁에 머물러 있지만 막상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런 면에서 사상사 교육은 우리의 현실과 유리되어 있지 않은, 생활 밀착형 교육이다.

  둘째, 사상사 교육은 사상을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와의 전체적인 관계 속에서 조망함으로써 사상과 다른 분야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를테면 이기론ㆍ심성론 같은 ‘철학사로서 유교’이 아니라 ‘사상사로서 유교’를 공부하면서 우리는 유교와 여타 분야의 관계를 깊이 조망할 수 있다. 전근대 사회에서 유교와 정치의 관계는 어떠하였는가? 복잡한 예법 논쟁으로서 현종조 예송 논쟁(禮訟論爭)이 지니는 정치적 의의는 무엇인가? 예송 논쟁은 단지 공리공담이 아니라 인조로부터 비롯한 효종(r. 1649-1659)ㆍ현종(r. 1659-1674)의 정통성 문제와 왕-사대부의 관계에 관한 매우 정치적인 문제였다. 조금 뒤 시기의 호락 논쟁은 어떠한가? 그것 또한 병자호란 이후 청(淸)을 바라보는 지식인의 태도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꼭 정치 분야가 아니더라도 사상사 교육은 다른 분야와 접목할 수 있다. 중세기 중국에서 불교가 경제적ㆍ사회적으로 지닌 지위는 무엇인가? 수많은 귀족과 황족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재산을 절에 바쳤는데, 과연 그들이 투철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인가? 한편으로 중국 불교의 수용은 문화사적인 부분에서도 매우 중요한 위치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불상 조각과 불교 회화 같은 불교 미술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불경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산스크리트어라는 새로운 언어를 접한 중국인들은 자연스레 자신들의 언어에 깊은 관심을 지니게 되었고, 중국어 연구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에 수많은 운서(韻書)들이 탄생하였으며, 이는 마침내 정형시의 일종으로서 근체시(近體詩)가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처럼 사상사 교육은 사상을 다른 분야와의 연결성 속에서 파악한다는 점에서, 역사의 다양한 분야에 대한 통합적 사고를 촉진할 수 있다.

 

4. 사상사 교육의 근변

 

  그렇다면 이제 사상사라는 학문, 그리고 사상사 교육은 어떤 것을 재료로 삼을 수 있는지, 사상사의 이웃에는 누가 자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상사는 이들의 연구 성과를 적절히 사용하여 연구를 진척할 수 있을 것이고, 사상사 교육 또한 이들 주변 교과와 협력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교육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두 명 이상의 교사가 서로 협력하여 수업할 수 있겠으며, 꼭 그렇지 않더라도 한 내용을 두 번 이상 다른 관점으로 배움으로써 학생은 사고의 지평을 넓힐 수 있을 것이다. 이하에서는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서 사상사와 그 근변의 학문들 간의 관계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교육에 활용할 수 있는지 주된 내용 요소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사상사와 철학(사)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본고에서 꾸준히 사상사와 대비하여 제시하였던 철학(사)이다. 고등학교 교과로 표현한다면 윤리 교과가 여기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실 철학사와 사상사는 그렇게까지 대립하는 지점에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필자는 사상사 교육이 ‘생활 밀착형’ 교육이 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철학사 교육이 그렇지 않은 듯이 표현하였지만, 철학사 교육 또한 그 자체로도 훌륭한 생활 밀착형 교육이 될 수 있다. 사실 교육이 생화과 밀착하냐 유리되냐는 교사가 어떻게 ‘교과의 심리화(psychologization of subject-matter)’를 잘 일으킬 수 있는지 그 역량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사를 배움으로써 우리는 스스로의 논리적ㆍ윤리적 사고력을 키울 수 있으며, 거기서도 나름의 실생활 적용을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공리주의에 대해 깊이 고민한 다음, 나의 소비 습관을 돌아보고 원조를 시작할 수도 있는 것이며, 사랑과 우정이 공리주의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깊이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처럼 철학사 역시 얼마든지 생활 밀착형 교육이 될 잠재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상사 교육과 철학사 교육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자. 엘리트 철학자들의 철학 또한 그들의 ‘생각’이고, 어떤 경로로든 간에 일반 대중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므로 사상사는 엘리트 철학자들의 사상을 완전히 배제하고서 서술될 수 없다. 동아시아의 민중이 불교를 어떻게 인식하였는지 연구하는 학자가 불교 철학의 주요 개념에 무지하다면 단 한 발자국도 연구를 진척할 수 없을 것이다. 더욱이 철학사의 전개 과정에 대해 사상사는 주의 깊게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각 시대마다 논의되었던 중요한 주제들이 다음 세대에서 일반 민중에게 전파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앞서 주희가 성리학의 계보를 조작했다고 했던 이야기를 다시 꺼내 보자. 설령 주희가 중국 도학의 계보를 조작하였다고 한들, 20세기가 되기까지 이루어진 모든 사람들의 생각은 그러한 계보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없었고 그것을 엄연한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사상사를 공부하는 사람은 늘 철학사와 사상사를 함께 두고 비교해 가면서 연구를 진척해야 한다. 우리가 철학사로부터 어떤 오해를 얻는지 그리고 진실은 무엇인지를 함께 신경 써야 한다는 것이다. 오해가 설령 진실이 아니더라도 그 자체로 몇백 년을 지속해 온 오해는 중요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것이 오해라는 점은 분명히 인지해야 한다.[각주:13] 사상사와 철학사가 어떤 관계를 지니는지에 대해서는 본고의 앞부분에서 이미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하므로 이만 지면을 줄인다.

 

2) 사상사와 고고학

 

  사상사는 반드시 문자 자료에만 의지할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는 고고학이 제공해 주는 방대한 양의 출토 자료가 있다. 우리는 이미 이러한 방대한 출토 문헌들을 역사 교과서에서 종종 마주하곤 하지만 그것이 지니는 깊은 사상사적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경우는 그다지 없다. 사상사는 그런 유물들이 도대체 과거 사람들의 어떤 생각을 반영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그림 2> 국보 제162호 무령왕릉 석수(石獸) <그림 3> 희평 원년 진숙경(陳叔敬) 진묘도병(鎭墓陶甁)

 

  <그림 2>[각주:14]는 우리나라 공주의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석수(石獸)이고, <그림 3>[각주:15]은 중국 시안(西安)에서 출토된 희평(熹平) 원년(172)에 사망한 진숙경(陳叔敬)의 묘에서 발견된 진묘도병(鎭墓陶甁)이다. 비록 생김새와 특징은 다르지만 두 유물은 모두 동일한 기능을 위하여 제작되었는데, 바로 ‘진묘(鎭墓)’이다. ‘무덤을 진압한다’는 뜻을 지닌 이 작업은 지하의 신들에게 사망자를 착오 없이 저승으로 이장할 것을 명령함과 동시에 형벌로 가득 찬 저승에서 사망자가 조금이라도 나은 처우를 받을 것, 그래서 무덤 밖으로 도망쳐 나오지 못하도록 할 것, 죽은 이와 산 사람의 경계가 뚜렷하게 잘 단속할 것 등을 부탁하는 것이다.[각주:16] 위생이 발달하지 못했던 고대에는 집안에서 사망자가 발생할 때 소위 ‘줄초상’이 나는 경우가 다소 있었는데, 고대 중국인들은 이를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끌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하였다. 즉 사람은 죽은 후에 지옥(地獄)에서 형벌을 받고 온갖 노동에 시달리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만 노동하는 이 비탄한 사후 세계의 현실에서 위안을 받고자 산 사람을 사후 세계로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앙을 ‘앙화(殃禍)’ 또는 간단히 말해 ‘앙(殃)’이라고 불렀는데, 진묘 작업은 이 앙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무덤을 지키는 지하의 신들에게 망자를 단단히 단속하여 지하의 지옥으로 안내하고 다시는 나오지 못하게 하는 작업이었다. 때로는 돌에 문서로 새겼으며, 때로는 질그릇 병[陶甁]에 글로 쓰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무령왕릉처럼 짐승을 조각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런 진묘 작업을 위해 병이나 돌에 새긴 글을 진묘문(鎭墓文)이라고 한다. 고고학 증거는 이렇게 2-6세기 동아시아의 보통 사람들이 믿었던 ‘생사관’을 ― 단순히 윤리 교과서에서 살펴보는 지리한 유교ㆍ불교ㆍ도가의 생사관이 아니라 ― 즉 보다 실질적인 생사관을 보여줄 수 있다.

 

  앞서 필자는 사상사 교육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의 영역과 연계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다. 진묘문은 도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바로 이 도교의 중요한 특징인 ‘문서 행정’이 진묘문에서도 드러난다. 고대 중국은 전근대 세계에서 유례없을 정도로 체계적인 관료제를 형성한 국가였고, 이러한 면모는 도교의 상장(上章) 의례 같은 곳에 반영되었다. 즉 하늘에 계신 옥황상제(玉皇上帝) 이하 여러 신하들에게 올리는 문서를, 마치 오늘날 우리가 주민센터에 가서 신고서를 작성하듯이 체계적으로 양식을 갖추어 작성한 후 하늘에 올려보낸 것이다. 진묘문에서는 그 대상이 하늘이 아니라 지신(地神)들이라고 하겠다. 죽은 자들의 세계에서도 관료 기구에 속해 있는 신들이 존재하며, 그들이 망자의 ‘부동산 매매’[각주:17], ‘전입 신고’[각주:18], ‘노역 부과’ 등을 주관한다. 즉 고대 중국의 정치ㆍ사회적 면모인 ‘문서 행정’이 사후 세계에 대한 그들의 관념에 반영된 것이다. 관료제가 발달하지 않았던 다른 지역의 생사관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는 부분이다.

 

3) 사상사와 미술사

 

  이번에는 미술사와 사상사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자. 우리는 철학 문헌, 역사 문헌, 출토 문헌뿐만 아니라 다양한 회화 자료를 통해서도 사상사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이미지를 활용한 사상사 수업이 이루어진다면, 학습자의 흥미는 더욱 증진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근대 일본에서 ‘미술(美術)’이라는 관념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사상사와의 연관 속에서 몇 가지 미술 작품들과 함께 살펴볼 수 있음을 보이고자 한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서양으로부터 유입된 ‘미술’ 개념은 일본의 미술가들을 자극하였고, 1877년 제1회 내국 권업 박람회(內國勸業博覽會)에서는 공부미술학교 학생들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양화(洋畫) 부문에서 최고상을 받은 화가가 바로 고세다 요시마쓰(五姓田義松, 1855-1915)이다. 그는 고메이 천황(孝明天皇, r. 1846-1867)의 초상을 수묵화 기법이 아니라 수채화로 그렸으며,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r. 1867-1912)의 호쿠리쿠(北陸)ㆍ도카이도(東海道) 순행에 따라가 41점을 풍경화를 그렸다. <그림 4>는 그가 그린 「고메이 천황초상(孝明天皇肖像)」이고, <그림 5>는 메이지 천황의 순행을 담은 그림인 「메이지 11년 호쿠리쿠ㆍ도카이도 순행도」이다.

  메이지 유신으로 ‘왕정복고(王政復古)’를 단행한 신정부는 이제 근대 국민 국가(nation state)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일본인들의 머릿속에서 ‘○○번(藩) 사람’이라는 의식을 지우고 ‘대일본제국 신민(국민)’이라는 인상을 남길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신정부의 각료들은 막부 시대에는 숨겨진 존재였던 천황을 시각화하겠다는 발상에 다다랐다. 그 방법은 천황의 순행과 초상화였다. 천황은 자신을 민중의 시선 앞에 드러냈고, 민중과 국토는 천황의 시선 앞에 놓였다.[각주:19] 고세다 요시마쓰는 천황을 제작함으로써 천황과 황실을 민중 앞에 가시적인 존재로 만들었으며, 메이지 천황의 순행에 동행하여 그림을 그렸다. 독특한 점은 41점 중 1점만이 풍경을 둘러보는 메이지 천황의 모습이고 나머지 40점은 모두 메이지 천황이 ‘둘러본’ 주변 풍경을 그렸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중에서도 천황이 직접 가지 못한 순행지 근처 명소가 포함되어 있기도 하였다. 고세다의 시선은 천황의 시선을 대리하였으며, 그는 서양 화법 ― 특히 원근법 ― 에 기초하여 이전의 일본 산수화와 달리 풍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천황의 시선이 닿은 민중과 국토를 질서정연하게 객체로서 표현하였다.[각주:20]

<그림 4> 五姓田義松, 「孝明天皇肖像」, 1878, 종이에 수채, 103.4×67.5cm, 궁내성 소장 <그림 5> 五姓田義松, 「明治十一年北陸東海道巡行圖」, 1878, 합판에 유채, 31.6×45cm, 궁내성 소장

 

  이렇듯 얼핏 그저 지나칠 수 있는 미술 작품에도 사상사는 담겨 있다. 그것을 그린 이도 어쨌든 한 명의 일반 사람이고 그의 생각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사상사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제국 시기 일본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소학교에서 불이 나 학생과 교사들이 모두 운동장으로 대피하였는데, 갑자기 교사 한 명이 천황의 어진(御眞)을 화재로부터 구해야 한다며 불타는 학교로 다시 들어갔다가 사망했다는 일화이다. 우리는 여기서 근대 일본 ‘신민’이 지녔던 사상, 그 때로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발로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어쩌면 위와 같은 미술 작품에서도 그런 면모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응향

 

  1. Quentin Skinner, “What is Intellectual History?,” In: What is History Today?, ed. Juliet Gardiner, Basingstoke; Macmillan Education, 1988, pp. 109-110. [본문으로]
  2. 차라순, 「사상사란 무엇인가」, 『韓國思想史學』 52, 2016, p. 13. [본문으로]
  3. ‘동아시아사’ 교과에서도 몇몇 부분에서 사상사의 서술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 비중이 한국사보다 크지 않으며, 몇몇 철학자들과 종교가들의 이름을 암기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다. [본문으로]
  4. 葛兆光, 이등연 외 옮김, 『중국사상사 1: 7세기 이전 중국의 지식과 사상, 그리고 신앙세계』, 서울: 도서출판 일빛, 2013, p. 29. [본문으로]
  5. ‘사상사’라고 따옴표를 치는 것은, 이 글에서 말하듯이 그리고 거자오광이 주장하듯이 사상사는 단지 철학사를 가리키는 용어가 이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까지는 ‘사상사’라는 이름을 달고서 철학사를 서술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표기한다. [본문으로]
  6. 상게서, p. 30. [본문으로]
  7. 상게서, pp. 31-32. [본문으로]
  8. 이 그림은 본래 동양사학과 조성우 교수님께서 수업에서 사용하신 그림이다. [본문으로]
  9. 상게서, p. 32. [본문으로]
  10. 小島毅, 『宋学の形成と展開』, 東京: 株式会社, 倉文社, 1999의 제3장 「道」 참조. 주돈이 외에 장재(張載) 역시 마찬가지의 사후 현창 과정을 거쳤다. [본문으로]
  11. Mark Edward Lewis, China Between Empires: the northern and southern dynastie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pp. 209-210. [본문으로]
  12. 정병윤, 「변문을 통해 본 불교경전의 문화적 변용과 해석」, 『中國學報』 70,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2017, p. 152. [본문으로]
  13. 가령 명ㆍ청대 신사(紳士) 계층의 사상을 연구하는 사람은 주희의 계보 조작이 엄연한 사실임을 분명히 인지해야 하겠으나 동시에 자신이 연구하는 시대인 명ㆍ청대에는 주희가 제시한 도학의 계보가 한치의 의심도 없이 진실로서 당대인들에게 수용되었음을 알아야 한다. 다소 비근한 예시를 들어보자면, 고대에 세상이 코끼리의 등에 올라타 있는 것과 같다는 고대인들의 생각을 연구함과 동시에 지구는 사실 둥글다는 사실을 까먹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본문으로]
  14.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국보 무령왕릉 석수(武寧王陵 石獸),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1113401620000&pageNo=1_1_2_0 (2022.02.22. 검색) [본문으로]

  15. 尹在碩, 「중국 고대 『死者의 書』와 漢代人의 來世觀 ― 鎭墓文을 중심으로」, 『中國史硏究』 90, 중국사학회, 2014, p. 53. [본문으로]
  16. 趙晟佑, 「後漢魏晋 鎭墓文의 종교적 특징과 道敎 ― 五石을 중심으로」, 『東洋史學硏究』 117, 동양사학회, 2011, p. 51. [본문으로]
  17. 죽은 자를 위해 무덤을 쓸 때 형식적으로 지전(紙錢)을 태우고 매지권(買地卷)을 사용하여 저승의 관리로부터 이 땅을 무덤을 위해 쓰기로 샀다는 의식을 치른다. 이 작업 자체는 진묘와는 큰 상관이 없다. 여하튼 무령왕릉에서도 해당 유물이 발견되었다. [본문으로]
  18. 아무개가 모월 모일 모시에 죽어 이제 명계(冥界)에 들어간다는 것을 필자가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본문으로]
  19. 오윤정, 「메이지미술과 일본의 ‘근대’ ― 메이지미술회를 중심으로」, 『일본비평』 19, 서울대학교 일본연구소, p. 135. [본문으로]
  20. 상게 논문, p. 136.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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