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학교에 간다. 학창 시절 공부가 하기 싫어 왜 학교에 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불평을 하곤 했지만, 학교에 가지 않는 삶은 상상해본 적이 없다. 홈스쿨링 등 일부 학생들이 학교에 가지 않기도 하지만, 아직은 학교에 가는 것이 더 보편적이다. 학교라는 배움의 공간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지만, 지금처럼 학교를 국가가 차지하기까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공교육이 자리 잡기까지

 

(1) 공교육의 역사

 

  근대 초기에 교육은 국가가 담당하지 않았다. 주로 가족 내에서 어른들이 자제들을 교육하는 방식이거나 스승이 소수 제자를 두고 교육하는 형태였다. 스승은 본인이 알고 있는 지식을 비밀리에 제자에게 전달했다. 이렇게 소수에게만 교육이 이루어진 이유는 신분제 때문이었다. 안다는 것이 권력이었고 교육을 통해 신분 세습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높은 신분의 사람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공교육은 서구에서 근대화와 산업화를 거치며 자리 잡았다. 산업화로 절대 왕정과 절대 계급이 붕괴하고, 자본을 가진 시민계급이 들어섰다. 자본을 가진 시민이 계급제에 반발하고 시민계급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해 민주주의, 자본주의 체제가 성립했다.[각주:1]  자연스레 일부 귀족만 받을 수 있던 교육의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가야 한다며 공교육이 등장했다. 대한민국도 개화기에 이 영향을 받아 일부 개화파가 공교육을 제도로 시행하려 했는데, 일제 강점기를 맞이하면서 강제적으로 공교육이 시작되었다. 제국주의 시절 다른 나라들이 그러했듯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위해 향교를 없애고 국가 교육기관인 보통학교, 중학교, 경성대학을 만들었다. 학교의 목적을 “충량한 황국 국민을 양성한다”라고 세울 정도로 교육기관의 목적은 오로지 조선의 식민지화였다.[각주:2]이 당시 주로 내세우던 교육령에는 항상 “일본어 습득”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배우는 과목 역시 일본어, 일본 역사, 일본 지리 교과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각주:3]

 

  해방 이후에도 일제 강점기와 비슷하게 공교육은 국가를 위한 제도였다. 해방 이후 교육의 목표가 홍익인간 양성으로 바뀌었지만, 홍익인간을 양성하기보다는 반공에 관련된 내용이나, 경제성장에 대해 우호적인 생각을 심어주는 내용을 더 많이 가르쳤다.[각주:4] 일제 강점기와 별반 다를 것 없이 국가가 교육을 주도하고 특정한 이념을 주입하는 국가주의교육 방식이 그대로 유지된 것이다. 

 

(2) 공교육의 문제점

 

  이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면서 특정 이념을 주입하는 교육 내용은 점차 사라졌지만, 국가가 모든 학생을 교육하는 공교육제도는 유지되고 있다. 이런 공교육제도의 필요성에 대해 아직 여러 의견이 존재한다. 공교육제도는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악용되기도 하였지만, 모든 사람의 평등성을 보장하기 위해 나온 체제로, 현재에는 보편성, 평등성, 의무성, 무상성, 전문성 등의 원칙을 유지하려 하고 있다.[각주:5] 하지만, 공교육이 그 원칙을 잘 담을 수 있는 최선의 제도인지에 대해서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에는 신분제도가 없어도 소득이 적은 사람에게는 제약이 따르고, 직업에 따른 사회적 지위도 존재한다. 우리나라는 1980년대에는 교육을 통해 소득과 지위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은 공교육을 통해서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대학 진학률이 73.7%일 정도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이 많아져 대학에 진학해도 취업하기 어려운데다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공교육만으로는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나 소득을 가질 확률이 큰 명문대에 진학하기 어렵다.[각주:6] 이런 상황에서 공교육은 계급상승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개인의 탓으로 돌리게 하기도 한다. 사회가 출세의 기회를 공평하게 모두에게 주었는데도 개인의 실력이 모자라 그것을 활용 못 했다고 판단하게 하기 때문이다.[각주:7]

 

  위처럼 공교육의 본래 목적이 퇴색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공교육 체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공교육 체제로는 평등성과 같은 본래의 공교육 원칙들을 이루기는 어렵지만,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위해 최소한으로 필요한 것들이 있고, 이를 국가가 책임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국가의 교육을 통해 모든 사람이 공평한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모든 사람이 사람으로 잘 살기 위한 기본적인 것들을 보장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사람으로 ‘잘’산다는 것에 대하여 사람마다 ‘잘’의 기준은 천차만별이겠지만, 나는 ‘잘’에 ‘기본’의 의미를 두고 싶다. 사람으로 잘 살아간다는 것은 기본적인 생활이 가능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 살기 위해 어떤 기본적인 것들이 필요할까? 학교에서는 이 기본적인 것들을 위해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해서 역사적으로 크게 교과, 사회, 학습자 이 세 가지의 관점으로 논의해왔다.[각주:8] 먼저 오래전부터, 학교에서는 교과를 가르쳐야 한다는 관점이 있었다. 여기서 교과는 인간이 배워야 하는 불변의 진리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 당시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던 과학적 지식이나 인류의 문화유산, 인문학적 교과 등이 해당한다. 오로지 교과를 가르치고 신분을 세습하는 것이 중요해 지식의 습득만을 강조했으며, 학습자의 요구나 심리를 무시하고, 교과의 논리적인 체계만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후 브루너의 “교과의 구조” 개념이 도입되면서 교과가 아니라 학문으로 관심이 이동한다. 교과보다는 교과에 담긴 학문적인 핵심 개념이나 원리 등이 중요하며, 학문을 대표하는 지식의 구조나 지식을 창출해내는 탐구 과정을 교육해야 한다는 것이다.[각주:9] 이는 잘못된 결과를 야기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주입식 교육이 자리 잡게 되었으며, 주입식 교육이 교과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어지지도 않았다는 문제가 생겼다.

 

  사회를 중심으로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도 있었다. 주로 공리주의자이거나 극단의 사회적 효용 주의자들에 의한 관점이었다. 공리주의자들은 교육을 사회의 기본적인 생활을 위한 준비로 보았다.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은 학생들이 생활할 때 필요한 것으로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극단적 사회적 효용 주의자들은 국가주의적 입장에서 교육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교육은 사회가 개인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는 입장이었다. 이는 제국주의에서 잘못된 교육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교육 내용을 학습자의 입장으로 보는 관점이 있었다. 진보주의 교육 운동과 심리학의 발달로 인해 죤 듀이를 중심으로 아동의 마음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이 영향으로 아동의 흥미와 관심에 따라 가르칠 내용을 구성해야 한다는 입장이 나타났으며, 국가의 필요나 지식의 전달보다는 아동이 흥미를 보이는 내용만을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부터 학습이 일어날 때 아동의 생각 변화나, 아동의 개별적인 학습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는 세 가지의 요소들을 극단적으로 따로 보는 것이 아니라 종합적으로 봐야 하며, 교과와 사회, 학습자 모두 고려해 교육적 내용을 구성해야 한다. 학문적인 의미도 있으면서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것을 가르쳐야 하며, 아동의 흥미도 고려해 가르치는 내용을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는 국어, 영어, 수학 과목을 기본 과목으로 두고 가르치고 있다. 국가가 선정한 이 기본 과목들은 위의 세 가지의 요소를 모두 만족하는 과목이어야 하는데 과연 그럴까? 각각의 과목이 학문적인 의미도 있고, 사회의 요구도 담고, 아동의 흥미도 유발하는 과목인지 살펴보려 한다.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1) 학문

 

  학문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은 지식의 구조가 잘 짜여 있다는 것이다. 지식의 구조는 지식의 체계를 말하며, 지식의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지식을 말한다. 지식의 구조는 인류의 공통된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게 만들어 사회를 보는 안목을 길러준다.[각주:10] 현재 교육과정에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지식 체계가 깊어지는 것이 지식의 구조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국어와 수학은 지식의 구조가 잘 짜여 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배우는 내용이 깊어지고, 전 내용을 학습해야 다음에 배우는 내용을 학습할 수 있다. 영어는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지식의 구조가 잡혔는지 아닌지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현 교육과정에서 영어 과목은 국어처럼 어법이나, 문학 작품에 대한 해석을 깊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문단을 독해하고 듣고 쓰는 등의 단순한 활동만 있다. 배우는 내용이 깊어지기보다는 반복 위주의 내용이기 때문에 이런 관점에서 영어는 지식의 구조가 잘 짜여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언어를 익히는 것을 영어 과목의 목표로 두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더 많은 단어와 표현을 배우기 때문에 점차 배우는 내용이 깊어진다고도 볼 수 있다.

 

  국어와 수학, 영어 과목 속 지식의 구조가 잘 짜여 있다고 하더라도, 왜 하필이면 국어와 영어 수학일까? 다른 과목을 지식의 구조를 잘 잡아서 가르치면 안 되는 것일까? 나는 국어와 영어, 수학이 지식의 구조를 배울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과목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의 구조는 학문에 기반을 두어 만들어진다. 학문은 ‘정당화될 수 있는 지식의 체계’ 또는 ‘진리를, 혹은 정당화될 수 있는 지식을 찾는 탐구 활동’을 말한다.[각주:11] 정당화될 수 있는 지식이려면 꽤 오랜 시간 어떤 근거를 기반으로 탐구가 이루어진 지식이어야 하며, 대부분의 곳에서 필요로 하는 지식이어야 한다. 학문은 언어로 전달, 축적되기 때문에 학문과 지식의 구조를 배우기 위해선 국어 학습이 필수적이며, 수학 역시 아주 오래전부터 탐구해오던 과목이기 때문에 지식의 구조를 만들 만큼의 지식이 축적되어 있다. 하지만 꼭 지식의 구조가 잘 만들어진 과목을 배워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국어와 영어, 수학이라는 학문을 지식의 구조를 기반으로 배우면 기본적인 학습 능력이 향상될 수는 있겠다. 하지만 현대에는 굉장히 빠르게 지식이 변하기 때문에 심화한 내용을 배우기보다는 기본이 되는 내용을 다양하게 배우는 것이 더 도움을 줄 수도 있다.

 

(2) 사회의요구

 

  국어, 영어, 수학 과목은 사회의 요구에 적합한 과목인지 살펴보기 위해선 사회의 요구가 어디까지인지를 먼저 정해야 한다. 사회의 요구를 생활로 본다면, 국어, 영어, 수학 과목보다는 가정이나 기술 같은 실제 생활에서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물론 국어, 영어, 수학 과목도 일상생활을 하려면 어느 정도 필요하긴 하지만, 사람이 단순히 생존만 하기 위해서는 고등학생 때 배우는 고등 개념은 필요가 없다. 하지만 사회의 요구를 사회에 적응하는 것으로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회에 적응한다는 것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직업을 가지고 경제적인 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대부분 대학에 진학해 직업인에게 필요한 전문적인 지식을 배운다. 대학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는 학문을 공부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학문을 배우기 위해선 국어 능력과 수학 능력, 영어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학교에서 국어, 영어, 수학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꼭 대학에서 학문을 배워야만 직업을 갖는 것은 아닐 것이다. 대학에서 전공대로 취업하지 않는 경우도 많고, 대학에 가지 않고도 직업을 가질 수 있다. 또한,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이 세 가지 과목만 기반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직업이 있고, 필요로 하는 기본역량이 직업마다 다르다. 대학에 가지 않고도, 꼭 국어, 영어, 수학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사회에 적응할 수 있다.

 

(3) 학습자

 

  가르치는 내용이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려면 배우는 내용이 실생활과 깊은 연관이 있는 등 재미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학생이 같은 과목에 흥미를 갖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성향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흥미 있는 내용만 가르치게 되면, 학생들이 실제로 학습하는 양이 매우 적어져 배우는 내용이 없을 수도 있다. 또한, 사실상 학생들의 흥미 유발은 가르치는 내용보다는 가르치는 방식이 더 상관있으며, 가르치는 내용은 아이들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

 

  학교에서 중점적으로 배우는 국어, 영어, 수학 과목은 오히려 아이들의 흥미를 떨어뜨릴 수 있는 과목이다. 현 교육과정에서 국어, 영어, 수학은 배우는 내용이 정말 많고 어렵기 때문이다. 어떤 과목에 흥미를 느끼려면 개념을 이해하는 게 우선인데, 내용이 어렵다 보니 수업에서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고, 개념을 이해하더라도 이해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아이들의 인지 수준보다 배우는 내용이 많아 과목에 흥미를 느끼기도 전에 질려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래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국어와 영어, 수학이 사람이 잘 살기 위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도움을 주긴 하지만, 국어와 영어, 수학 과목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단지 국어와 영어, 수학 과목이 학문을 공부하기에 비교적 적절한 과목이고, 일부는 사회로 적응도 도와주는 부분이 있어 학교에서는 제일 나은 선택으로 이 과목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도 많이 달라졌고, 학생들의 요구도 다양해졌기 때문에, 학교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지금처럼 국어, 영어, 수학만을 중심으로 교육하는 것이 옳은지에 관해 고민이 필요해 보인다.

 

나가며

 

  공교육은 모든 사람의 평등이라는 이상에서 출발했다. 중간에 제국주의 국가가 악용하는 등 공교육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이용되기도 했지만, 어찌 되었든 사람이 사람으로 잘 살기 위해서 공교육은 필요하다. 이렇게 되면 국가가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지가 중요해진다.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지에 대한 정답은 없지만, 나는 모든 사람이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내용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재에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국어, 영어, 수학 과목을 기본으로 가르치고 배우는데 이 과목들이 다른 과목들보다 비교적 오래되었고, 대학에서 배울 다른 지식에 기반이 되는 학문이기 때문에 이를 가르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국어, 영어, 수학만 배워서 잘 살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단순히 사회에 적응해서 도태되지 않고 잘 생존하는 게 사람으로 잘 사는 것인지, 국어, 영어, 수학 위주로 배우는 것이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는 제일 나은 방법인지는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일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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