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법과 청소년 참정권, 그리고 청소년 혐오

 

고슴도치뇽, BDUCK, 취한다

 

흔히 청소년 참정권과 소년법은 양립 불가능한 것으로 그려진다. 청소년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청소년 참정권 논의와 청소년을 보호의 대상으로 상정하는 소년법 논의가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과연 두 가지는 모순되는 것일까, 혹은 별개의 문제일까? 청소년은 과연 둘 사이 어디쯤에 위치하는 존재일까? 교육저널 역시 이번 호를 발간하기 위한 세미나 과정에서 같은 의문점에 부딪혔다. 때문에 청소년인권운동연대 활동가 난다님이 쓰신 글 [각주:1] 을 읽고 교육저널의 시선으로 소년법과 청소년 참정권 문제를 정리하는 대담을 나누어보았다.

 

'미성년자'는 처벌을 안 받는다?

 

 

“'요즘 청소년들의 범죄가 심각해지고 있는데 그에 비해 처벌은 받지 않는다'라는 게 사회의 인식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청소년은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을 받지 않을까?”

 

사건에서 피의자가 14세 이상 19세 미만일 경우, '소년법'의 절차가 적용되는지 일반 형사 절차가 적용되는지는 검찰, 법원 등 수사 및 재판 기관이 판단한다. 실제로 20186월 일어나 주목을 받았던 '관악산 집단 폭행 사건'의 가해자들도 일반 형사 절차를 적용받고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 보호 관찰 처분이나 보호 시설 감호의 경우에도 보호 관찰소에 출석해야 하거나 교육 등을 이수해야 한다는 점 또는 거주의 자유나 생활에 통제를 받는단 점에서 강제성을 띠고 있다. () 10세 이상이면 역시 '소년법'상 보호 처분 등 징벌적 성격의 처벌을 받는다.”

 

어떤 언론 기사에서도 '무서운 40', '점점 흉포해지는 40대 범죄'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는다. 청소년 중 누군가가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마치 청소년 집단 전체의 속성인 것처럼 환원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청소년 범죄를 더 과장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 청소년의 범죄/일탈 행위가 특히 문제시되는 까닭은 "청소년은 순수/순진해야 하는데, 청소년은 어떠어떠해야 하는데" 같은 청소년에 대한 고정관념이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처럼 왜곡된 인식은, "애들이라고 봐주고 있다, 처벌도 제대로 안 받는다"라며 청소년 집단을 혐오하는 또 다른 왜곡을 낳는다.”

 

 

고슴도치뇽 : 우리가 이번에 청소년의 정치참여에 관한 글을 썼는데, 대담으로는 소년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봤으면 해. 요새 청소년의 범죄가 많이 늘어나고 있는데 그에 비해 처벌 수위가 너무 낮다는 얘기가 나오고, 소년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올라오고 있잖아. 이 글을 보면 미성년자가 결코 처벌을 안 받는 게 아니라는 내용이 나와 있어. 실제로 청소년들의 폭행 사건에서 가해자들이 일반 형사 절차를 적용받고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례도 등장하고. 그리고 누군가는 소년원이나 보호관찰처분이 주어지는 것이 청소년이기 때문에 약한 처벌을 받는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는 신체의 자유와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법적 형식적 절차가 다른 것이며, 더 낮은 수위의 처벌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주고 있어. 또 청소년 범죄가 날이 갈수록 심해진다는 보도들이 일종의 청소년 혐오, 낙인찍기를 반영한다는 내용이 있어. 사실 연령대별 범죄율을 살펴봤을 때 범죄율이 가장 높은 것이 10대가 아님에도 언론에서는 강력범죄를 많이 하는 청소년이라고 보도를 하잖아. 너희는 어떻게 생각해?

 

BDUCK : 난 이 마지막 문단에 너무 공감하는 게, 결국 사회든 언론이든 소년법 논의를 이끌어가면서 청소년들은 이런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면서 처벌도 안 받는다~’ 이런 식으로 말하잖아. 사실 이런 말의 기저에는 청소년 혐오가 깔려 있는데 마지막 문단에서 이를 잘 지적하고 있어서 좋았어. ‘청소년 혐오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한 사람들이 많을 텐데, 이때 혐오여성혐오혐오처럼 단순히 hate의 개념이 아니잖아. 청소년을 급식충이라고 비하하는 것뿐 아니라 청소년을 순수하고 순진한, ‘어른의 보호가 필요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런 청소년의 이미지를 숭배하면서도 그렇지 않은 청소년은 어린애답지 않고 문란하다고 낙인찍는 것 등등 이런 게 다 청소년 혐오거든. 그러니까 언론에서 감히 어떻게’, ‘어린애들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흉악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느냐는 식으로 보도하는 이유도 결국 그 기저에 깔린 청소년 혐오를 보여주는 것이지. 그래서 소년법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갈 때 사회 기저에 깔린 청소년 혐오에 대한 관점을 지우지 않으면 결코 생산적인 논의를 할 수 없고, 진정으로 청소년을 위한 논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해.

 

취한다 : 이 글에서 청소년에 범죄에 대해서 잔인한 십대’, ‘무서운 십대라는 말이 등장할 수 있는 이유를 우리 사회에 청소년은 순진해야 한다.’와 같은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머리를 한 대 맞는 기분이었어. ‘소름끼치는 십대의 잔혹함등의 문구를 사용하고 있는 기사의 제목에서 우리 사회에서 십대를 바라보고 있는 관점을 이해해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뭔가 생각의 전환을 하게 되는 계기였어.

 

BDUCK : 생각의 전환이라고 했는데, 진짜 맞아. 진짜 소년법에 대해서 생산적인 논의를 이끌어가야 하는, 전문가들이 토론하는 과정에서조차도 기저에 깔린 청소년은 순진하고, 미성숙하다는 사고방식이 투영되어 있거든. 유튜브 같은 데서 소년법 토론 영상을 보거나 소년법을 다룬 글만 봐도 그게 보여. 예를 들어 처벌수위에 관련해서 소년법 폐지 반대를 말하는 쪽은 요즘 애들이 아직 미성숙해서 그렇지 폐지하면 안 된다고 하는 반면, 소년법 폐지를 찬성하는 쪽은 소년범죄 사례들을 말하면서 이것은 성인의 행각으로 볼 수밖에 없는, 잔인한 범죄라고 주장하잖아. 그런데 양쪽의 주장 모두 결국엔 청소년 혐오가 깔려 있는 거지. 청소년은 미성숙하고 순수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논의에도 사회의 청소년 혐오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기 때문에 소년법 논의는 결국 청소년이 소외되는 거지. 누구보다 청소년이 중심이 되어야 할 문제에서 막상 청소년이 배제되어 있는 거야.

 

고슴도치뇽 : 전문가들이 토론하는 영상은 많이 보이는데 정작 청소년들이 이 문제에 대해서 얘기할 수 있는 기회는 많이 없었던 것 같아. 이런 점이 전문가들이 어떻게 청소년들이 범죄에 연루되지 않게 할 것인가,’ 그러기 위한 효과적인 방안을 고민하는 데에 그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청소년 논의에 한정되는 부분과 범죄라는 넓은 부분의 논의가 있을 텐데, 애초에 범죄가 왜 발생했을까에 대한 고민도 부족한 것 같아. 꼭 청소년에 한정된 얘기는 아닐 수도 있지만 이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일상을 보내고 있고, 어떤 생각을 하면서 범죄적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고민 없이, 범죄의 책임을 청소년 개인에게 돌리고 단순히 청소년들이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방식의 논의만 흘러간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리고 대부분의 기존 영상에서 청소년의 흉악한 범죄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에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 혹은 청소년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아직 교화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이분법적 논의만 진행되고 있잖아. 이런 이분법적 논의 기저에 깔린 것이 청소년들은 순수해야 하는데 너무 많이 흉악한 범죄에 노출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교화를 받아야 되는데 그것이 강한 처벌로 가능할 것이냐 체계적인 교육으로 가능할 것이냐 두 가지로 나뉘는 것 같아.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어떻게 표상되고 있는지, 청소년 혐오가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고.

 

BDUCK : 맞아. 성인들을 수감하는 교도소를 포함해서 모든 교도소는 결국 교화의 기능을 갖고 있는데, 유독 청소년만 교화를 엄청나게 강조하잖아. 결국, 사회가 청소년을 바라보는 시선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지.

 

참정권을 바라면 소년법 폐지하라고?

 

이는 마치 여성 인권 보장을 요구했더니 '그럴 거면 여자도 군대 가라'라고

하는 이야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참정권 등 인권이 무언가 대가를 치러야만 보장받을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타당하지 않다. () ”권리에는 의무가 따른다. 그러므로 일단 의무를 다하라"는 말은 전통적으로 인권을 억압하는 논리로 활용되어 왔다. () 청소년을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존중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며, 청소년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여러 사회 문제 및 정책에 영향을 받는 당사자로서, 이 사회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낼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청소년 참정권 보장의 핵심이다.“

 

한편 '소년법' 등을 비롯하여 청소년 범죄에 대한 대응 문제는 어떻게 사회 전체의 범죄를 줄이고 범죄의 재발을 방지할 것인가 하는 논의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소년법'에 대한 논의를 할 때에는 소년범을 어떻게 대하고 청소년들이 일으키는 범죄를 어떻게 하면 줄일 수 있고 재발을 방지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 것이다.”

 

그 대가로 권리를 부여할 수 있다, 아니다 하는 식의 이야기로 접근할 일은 더욱 아니다. 그렇기에 청소년 참정권을 보장하려면 소년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말이 되지 않는다.”

 

BDUCK : 두 번째, ‘참정권을 바라면 소년법 폐지하라고?’ 이 문단에서는 크게 말하면 권리와 의무의 관계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어. 이 글의 도입부에서 청소년 인권을 주장하면 소년법도 폐지하라는 주장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잖아. 여기서 이 주장이 왜 말이 안 되는지 본격적으로 설명하고 있어. 참정권은 권리, 인권의 영역이고, 소년법은 범죄에 대한 대응 논리인데, 이 둘을 연관 짓는 것은 여성의 인권보장을 요구했더니 그럼 여자도 군대 가라라는 방식의 논리랑 비슷하다고 얘기하고 있어. 참정권은 어떤 행동을 해야지만 획득하는 권리가 아니라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천부인권인데, 소년법을 폐지해야지 참정권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마치 인권이 책임과 의무의 대가인 것처럼 얘기하는 게 문제라는 거지. 글쓴이는 이때 참정권과 소년법은 별개의 논의라고 주장하고 있어. 참정권은 결국 천부인권의 영역이고, 소년법은 사회 전체의 범죄를 예방하고,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에 인권문제와 결부될 게 아니라는 거지. 별개의 논의인 참정권과 소년법 두 개를 엮으면서, 그리고 기저에 청소년 혐오가 존재하면서 참정권을 얻었으면 소년법을 폐지하라는 논의로 이어지는 것이 얼마나 문제인지 얘기하는 거지.

 

취한다 : 나도 이번에 촉법소년이라는 개념도 처음 들었는데, 그럴 수 있었던 이유가 참정권 연령이 낮아지면서 분명히 이런 얘기가 나왔다고 생각해. 그리고 이 맥락에서 중학교 때 경험한 것이 생각나는데, 교복 규정이나 머리 규정으로 선생님이랑 학생들 간의 마찰이 엄청 심했는데 그때 어떤 부장 선생님이 권리에는 의무가 항상 따른다. 너희들이 권리를 말하려면 학생으로서 의무를 먼저 잘 지켜야지라고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났어. 그 때는 그런가?’ 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인권으로서 주어지는 권리들에도 의무가 따라와야 한다는 것은 인권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반영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런데 그런 생각들이 아직까지도 발목을 잡고 있는 게 많다고 생각했어. 참정권을 얘기했더니 소년법 얘기가 따라오면서 사실 소년법 논의에서 중요한 것들을 오히려 흐리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아.

 

고슴도치뇽 : 나는 어떤 사회를 살아가는 한 개인이면 그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의무가 모두 있다고 생각해. 참정권은 비단 권리일 뿐 아니라 의무이기도 하고. 왜냐하면 참정권이 자신의 의견을 사회에 피력하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서 의견을 개진하고, 그것이 반영되고 그런 정치적인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권리잖아. 그거는 권리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 그 권한을 타인에게 위임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의 권리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지 고민하고, 공동체 내에서 차별과 혐오가 존재하지 않는지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 공동체 안에 속해 있는 개인들의 의무라는 생각도 들어.

그리고 이런 권리와 의무를 누가 규정하는지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몇 달 전에 인국공 정규직화 논란이 있었잖아. 그거 보면서 든 생각인데, 우리는 기나긴 교과 중심의 교육과정 입시를 거쳐서 더 높은 대학에 가고 사람들은 정규직으로 일하기 위해서 당연히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말하잖아. 그 노력의 방식과 정도를 결코 청소년들이 규정한 것이 아닌데. 경쟁에서 이기고 누군가를 차별하지 않으면 이제 더 이상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얻을 수 없는 사회에서 청소년들이 그걸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 같아서. 이제까지는 우리 공동체 안에서 청소년들이 어떠한 권리를 가져야 하고, 우리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어떤 의무를 다해야 하는지를 논의할 자리가 적었고, 그러한 목소리들이 잘 반영이 안 됐던 것 같아. 단순히 비청소년의 시선에서 청소년의 권리와 의무를 재단해버리고.

 

청소년 참정권 보장되니까 소년법 폐지하라는 주장이 있잖아. 그런데 솔직히 나는 청소년 참정권이 보장된 거라고 생각을 안 해ㅎㅎ 원래 만19세 이상만 투표를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이 만18세로 내려간 건 맞는데. 그 과정에서 물론 청소년의 주체성을 이야기하면서 논의가 진행된 것도 있지만 성인 중에서 아직 투표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모든 성인이 투표를 하기 위해서 연령을 조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낮춰진 것도 있잖아. 사실 여전히 사회에서 이야기되는 청소년에 대한 혐오가 존재하고. 투표권만 일부 청소년에게 보장이 된 것이지, 청소년이 정당에 가입해서 활동하거나, 선거 운동을 하는 것, 후보에 나가는 것 등 제도정치에서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막혀있을 뿐만 아니라, 제도정치 말고도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청소년이 정치할 권리는 여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것 같아. 예를 들어서 학교에서 통제당하거나 입시 때문에 교과 과정 외에 다른 부분에 관심을 쏟을 기회가 적다거나. 그래서 18세 투표권이 주어졌다는 이유만으로 소년법 폐지 논의를 끌고 가는 게 너무 한계적이고.

한편으로는 소년법 폐지라는 게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이냐에 따라서 무게가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고 생각해. 정말로 청소년들이 비청소년들과 차이 없이 제도정치에 개입할 수 있고, 일상의 순간들에서 목소리를 내면서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변화를 만들 수 있고, 비청소년과 동등한 주체로서 대우받는다면 소년법이 있을 이유가 크게 없다고 충분히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물론 아직 그 사회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하기 어렵지만ㅎㅎ 지금은 청소년 혐오도 심하고 청소년들이 동등한 권리를 누리는 것을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데 겨우 18세 투표권을 부여받았다는 이유로 갑자기 청소년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에 있어서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

 

취한다 : 맞아. 나도 너 말을 들으니까 공감이 되는 부분이 있어. 너가 말해준 부분뿐만 아니라 이번에 참정권 연령을 낮출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가 OECD 국가 중에 우리나라가 참정권 제한연령이 가장 높고,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는 비율이 가장 높다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인데 사실 이 또한 선진국의 성인 연령의 기준을 따라간 것이잖아. 그리고 소년법이라는 것이 처음 등장한 이유를 생각해보아도 청소년들이 우리 사회에서 책임을 스스로 질 수 없도록 억압하고 있는 부분이 엄청 많잖아. 예를 들어, 정말 많은 시간을 학교라는 공간에서 보내고 있고, 머리도 옷도 자기가 선택을 하지 못하는데, 청소년들이 악의적이든 우발적이든 저지른 범죄 행위에 대해서 청소년의 책임을 어느 정도로 할 수 있겠는지에 대한 질문이 소년법의 필요성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해. 그런데 사실 이런 부분이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잖아. 이번 참정권 연령 하향이 청소년의 권한을 어마무시하게 확대한 것이 아닌데, 이런 식으로 논의가 넘어가는 게 우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BDUCK : ‘참정권 얻을 거면 소년법 폐지하라? 근데 이 말을 가만 살펴보면 웃긴 게, 그렇게 말할 거면 이 말을 뒤집어서 '소년법 폐지하려면 청소년 인권 보장부터 해라'라고 말할 수도 있는 거잖아. 여기서는 참정권으로 대표되지만 소년법 폐지를 주장하는 사람 중에, 청소년이 얼마나 많은 부분에서 권리를 제한당하고 있는지를 진정으로 생각해 본 사람이 있는지 정말 궁금해. 참정권을 비롯해서 청소년들이 많은 부분에서 권리가 제약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잖아. 그런 것들을 해결하고 청소년 문제를 담론하면서 청소년 혐오가 해체된 사회에서나 소년법 폐지를 진정으로 논의할 수 있는 것 아닐까.

 

'소년법', 문제는 있지만

 

만약 '소년법'을 개정해야 한다면, 주목받지 않는 현행 '소년법'의 다른 문제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소년법'에서는 소년보호사건의 대상자가 되는 '우범소년'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집단적으로 몰려다니며 주위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성벽이 있는 자, 정당한 이유 없이 가출하는 자 등". 남에게 해를 입히거나 형사적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닌 청소년조차도 '보호 처분'이란 이름으로 사실상의 처벌을 받는 것이 가능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청소년들은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을 받지 않으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다양한 오해를 받고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청소년들은 권리를 누리고 주장할 자격이 없다는 인식까지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받지 않는 특권을 누리는데 거기다 인권 보장까지 요구하는 '특권층 청소년' 같은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취한다 : 이제 드디어 마지막 문단이야. 마지막에는 소년법에 대해 논의하는 방식이 참정권을 이야기하다가 소년법으로 온다는 것이 실제로 소년법에서 개정이 필요한 부분들, 중요한 논의들을 보이지 않게 하고, 소년법 논의를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오히려 소년법에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은 실제로 소년법에 보호처분이 효과가 있는지, 재범방지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등 개선이 필요한 부분들에 대한 논의가 있고 또 지나치게 비합리적인 조항들도 있는 게 그런 조항에 대한 폐지는 논쟁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어. 그런 부분으로 예를 들어 우범소년과 관련된 조항이 있는데 이는 남에게 해를 가하지 않아도 집단적으로 몰려다녀서 다른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거나 정당한 이유 없이 가출한 자는 처벌을 받을 수 있다는 조항이야.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어.

 

고슴도치뇽 : 이 글을 읽으면서 조항이 너무 모호하다는 생각을 했어. 맥락을 고려하지 않는 느낌. 정당한 이유 없이 가출한다는 것이 예를 들어 그 집에서 사는 청소년이 가족이라는 친밀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방식의 폭력에 노출되고 그것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가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법적으로 봤을 때 양육자가 직접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사람의 가출이 정당한 이유로 취급받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우범소년의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잖아. 조항이 너무 모호해. 그리고 이런 조항의 뒷면에는 청소년의 삶의 맥락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고.

청소년 범죄뿐만 아니라 모든 범죄를 다룰 때에 있어서 범죄가 일어나는 사회적 맥락을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예로 청소년 사이에서 성폭력이 일어나고 있다면 그 기저에는 청소년들이 일상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내는데 학교에서는 어떤 성폭력들이 발생하고 있는지, 왜 발생하는지, 청소년들이 유튜브를 많이 본다면 그 유튜브에는 어떤 내용들이 담겨있는지 등 범죄가 발생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고, 그것과 함께 소년법 문제가 얘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다시 정리하면 소년법에 대한 개정이 물론 필요하고. 학교 안에서 학교폭력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지, 교실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 사회에서 성차별이 어떻게 발생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고려와 같이 가야 한다는 생각이야.

 

취한다 : .. 조금 확대해서 이야기해보자면, 나는 개인적으로 청소년들이 지금 성장하고 있는 교육환경 자체가 이미 폭력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해. 예를 들어, 서열화, 경쟁 등이 학교교육의 주를 이루고 있잖아. 그러니까 청소년들이 문화를 형성하는 환경 자체가 폭력적이고, 서열화 되어 있고, 경쟁적이기 때문에 그들이 문화를 만들어가는 방식에서 폭력이 등장한다면 이것을 반드시 청소년의 문제로 생각할 수 있을까? 그래서 청소년을 교화하면 그러면 문제가 해소될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교육환경이 바뀌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다음 세대의 청소년들이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문화를 만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래서 청소년 범죄를 이야기할 때 청소년들이 자라고 있는 환경을 본질적으로 검토해봐야 한다고 생각해.

 

고슴도치뇽 : 기사에 대한 생각을 이렇게 나누어봤는데 추가적으로 쟁점이 되는 부분이나 이야기해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

 

BDUCK : 권리와 의무의 관계 부분에서, 글쓴이는 별개의 문제라고 하지만 우리가 얘기할 때 결국에는 참정권이라는 인권의 문제와 소년법이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 참정권을 보장하는 것은 청소년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쪽이고, 소년법은 그래도 청소년을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보니까 둘은 상충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 지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러니까 둘이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아닌지가 궁금해.

 

취한다 : 약간 대응되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예를 들어, 청소년이 정치적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범죄에 있어서도 동일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대응되지는 않지만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비슷한 방향으로 두 가지가 변화하고 역행하고 할 수는 있다고 생각해. 청소년이라는 개념이 예를 들어 교육에서만 학생으로서 구분되고, 다른 사회적 조건에서는 비 청소년과의 구분이 없다면 범죄에 대한 처벌에 있어서도 비청소년과 구분될 것이 없고, 정치적 권리에서도 비 청소년과 구분될 것이 없어지지 않을까.

 

BDUCK : 실제로 두 개가 별개의 문제인지, 아니면 엮인 문제인가는 잘 모르겠는데, 두 개를 꿰뚫는 것은 결국 청소년이 미성숙하다는 전제라고 생각해. 참정권 논의에서 청소년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정치할 능력이 안 된다라고 얘기하는 것이나, 소년법 논의에서 청소년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범죄를 저질렀을 때 비청소년과 동일하게 처벌할 수는 없고, 교화에 더 힘을 쏟고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얘기하는 것, 결국 두 가지의 전제는 청소년의 미성숙함이잖아. 이렇게 생각하면 참정권과 소년법 두 논의가 연결된다면 연결되는 것 같기도 한데, 아직 명확한 해답은 못 내리겠어. 그런데 확실한 건 청소년이 미성숙하다고 단정 짓고 이를 전제로 까는 건 정말 문제라고 생각해.

 

고슴도치뇽 : 나는 크게 두 가지 생각이 들었어. 하나는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이냐가 중요한 것 같아. 청소년의 주체성과 보호를 말할 때 있어서, 청소년이 왜 보호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소년법이 존재하는 이유도, 만약 우리 사회가 청소년 혐오가 심하지 않고, 청소년과 비청소년에게 동등한 권리와 책임이 주어진다면 소년법이 지금과 같은 무게를 같지 않을 것 같아. 그리고 소년법뿐만 아니라 n번방 사건 이후에 의제강간연령 상향하면서도 뭔가 여러 고민이 있었는데, 그 때 의제강간연령을 상향해야 한다고 말하는 페미니스트들과 그것을 조심스럽게 바라봐야 한다는 페미니스트 간의 입장이 둘 다 이해가 되었거든. 왜냐하면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을 상향해야 한다고 얘기했던 비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이것이 보호의 테두리라는 얘기를 많이 했는데, 결국, 청소년들이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우리 사회에서 나이로 인한 차별과 강간문화가 심각하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보호를 받아야 하는 환경에 놓이는 것이잖아. 비슷한 맥락으로 청소년 참정권 얘기가 나올 때마다 청소년에게 정치교육을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는데, 나는 그 말도 잘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게 청소년이 미성숙하기 때문에 정치교육이 필요하기보다는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의 정치활동을 억압해왔고, 그렇기 때문에 일상에서 정치를 경험할 기회가 없었고, 권리를 더 잘 실현하기 위해서 정치교육이 일부 필요하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물론, 정치교육을 함에 있어서 일상의 정치화가 동반이 되어야 하겠지만. 그래서 나는 그 사회에서 청소년 보호가 논의되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에 이미 너무 강한 청소년 혐오가 존재하고 청소년들이 의견을 당당하게 피력할 수 없어서 라는 생각이 들었어.

 

두 번째는 보호라는 것을 청소년에만 한정짓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냥 우리 모두는 주체적인 존재이지만 사회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잖아. 그래서 생각난 것 중에 하나가 예전에 어느 수업에서 특성화고 실습생들의 문제를 다루면서 어떤 학생이 자신의 동생이 특성화고에 가는 것이 너무 무서울 것 같다고 말씀하셨어. 이유로는 실습에서 노동환경이 안전하지 않고, 노동권이 보장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었는데 그 말에 공감이 되면서도 그 문제가 비단 특성화고 실습생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우리 사회에서 누구도, 어떤 노동자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고, 심한 노동 강도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론은 청소년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회는 그 사회를 살아가는 그 누구도 잘 보호하지 못할 것 같다는 거야. 우리 모두가 주체성을 가진 존재이면서도 사회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하는 존재인 만큼 주체성과 보호가 결코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럼 후기를 나눠볼까?

 

고슴도치뇽 : 사실 나 지금 계속 말을 하면서도 긴가민가하면서 말을 했는데 이렇게라도 말을 하면서 생각이 정리가 된 것 같아.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의 주체성과 소년법 문제를 다룰 때에 있어서 좀 더 넓은 논의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BDUCK : 나도 비슷한 의견인데, 내가 이번 대담을 준비하고 자료조사 하면서 청소년의 주체성관점이 들어간 소년법 논의 자체가 별로 없어서 힘들었거든. 대담하면서도 계속 말했지만, 이렇게 자료가 부재한 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청소년 문제와 청소년의 지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보여준다고 생각해. 아직 비청소년과 청소년이 똑같은 권리를 가진 사회가 오지는 않았잖아. 그래서 그 사회가 오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청소년이 비청소년과 동등한 지위에 서는 쪽으로 사회의 방향이 향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로 두고 소년법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이야.

 

취한다 : 나는 청소년뿐만 아니라 모든 범죄와 처벌 방법에 있어서 처벌은 정확하고 정당하게 받아야 하지만, 또 중요한 것이 무기징역이 아닌 이상 사회로 돌아오는 것이 허용된 사람들은 다시 사회에 돌아와서 사회에 올바른 방향으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과정이 처벌의 전체 과정에 꼭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래서 청소년만이 처벌에 있어서 교화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해. 그런데 최근에 뉴스에서 잔혹한 청소년 범죄 사건들이 터졌을 때 나도 이거는 마땅하게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항상 그런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촉법소년 연령 때문에 범죄 형량이 약화될 수 있다여서 그건 정말 문제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이 기사를 읽으면서 그런 부분에 대한 오해가 풀릴 수 있었던 것 같아. 그리고 청소년에 대한 편견과 청소년 범죄에 대한 오해들이 청소년권리에 대한 논의들과 청소년 범죄에 대한 궁극적 문제 해결 등을 왜곡시키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여러모로 몰랐던 것들도 알게 되고 많은 부분에서 인식의 전환을 얻게 해준 기사였던 것 같아.

 

이상 청소년 참정권과 소년법의 관계와 둘의 한계, 그 기저에 깔린 사회의 청소년 혐오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까지 교육저널의 시선으로 대담을 나누어봤다. 입시 위주 교육의 한계, 분절적 나이 설정의 한계, 청소년 개개인의 맥락적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다는 점 등, 소년법도 청소년 참정권도 모두 불완전하고 보완이 필요하다. 그러나 소년법과 청소년 참정권 자체의 한계도 있지만, 더욱이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청소년 혐오가 존재하고 이것이 청소년 참정권과 소년법 논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왔다는 사실이다. 사회의 기저에 깔린 청소년 혐오와 나이주의 권력으로 인해 청소년 관련 논의들은 그 본질이 흐려지고, 소년법과 청소년 참정권 논의 역시 방향이 한정되게 흘러왔다. 이제 청소년 혐오의 한계를 넘어선 담론이 필요하다. 청소년 또한 분명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주체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청소년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이에 따라 청소년들과 함께 새로운 방향으로 소년법과 청소년 참정권 논의를 진행해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훗날 청소년이 비청소년과 동등한 지위로 서는 때엔 소년법과 청소년 참정권 논의가 전혀 다른 방향과 관계로 흘러갈 것이다. 그러한 날이 오길 바라며 이번 대담을 마친다.

 

  1. 난다 청소년인권운동연대 활동가, <청소년이라 '처벌 안 받는다'는 오해>, 프레시안, 2019.02.15.,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28837?no=228837&utm_source=naver&utm_medium=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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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 선거권, 그 이후를 꿈꾸다

 

고슴도치뇽

 

20191227일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선거연령이 만 19세에서 만 18세로 하향되었다. ‘18세 선거권도입으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전보다 많은 청소년들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선거연령 하향은 200519세 선거권이 도입된 이후, 15년 만의 변화다. 이 글에서는 ‘18세 선거권이 어떻게 도입될 수 있었는지, ‘18세 선거권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18세 선거권을 청소년 참정권 보장의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을지, 청소년 참정권 보장을 위하여 ‘18세 선거권이후 남아있는 과제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고민들을 풀어나가려 한다.

 

청소년들의 꾸준한 외침이 얻어낸 결실

 

18세 선거권은 그냥 도입된 것이 아니다. 도입 마련까지 청소년들이 스스로 참정권을 요구해온 역사가 있었다. 2002, 청소년모임 낮추자18세 선거권을 주장하며 모의투표 캠페인을 진행했다. 명동 거리에서 시작했으나, 이는 곧 전국 단위로 확대되었으며 여러 교육·시민사회 단체들이 참여했다. 이러한 운동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정치권에서도 선거연령을 하향하려는 시도를 보였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 정치개혁추진위원회가 마련한 선거법 개정안에 선거권 연령 18세 하향과 관련한 내용이 있었고, 민주노동당에서는 ‘18세 정치적 성년선포식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2004년 총선을 앞두고, 선거연령을 내려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만 20세 이상의 국민만 투표권을 부여받았다. 이후 선거연령을 19세로 하향할 것이냐, 18세로 하향할 것이냐와 같은 이분법적 논쟁이 지속되었다. 이러한 논쟁 속에서 청소년들은 만 19세 이상만 투표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는 19세 이상의 국민만 성숙한 시민이며 성숙한 시민만이 투표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공고히 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18세 선거권을 지지하면서도 청소년의 참정권을 몇 살부터 선거권을 부여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로 한정지어서는 안 될 것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하지만 결국 2005년에 선거연령은 만 20세에서 만 19세로 하향되었다.

청소년들은 그 이후에도 주체적으로 목소리를 내왔다. 2008년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는 기호 0번 청소년 교육감 후보 운동등의 활동을 전개하며 청소년의 참정권을 주장함과 동시에 청소년이 교육의 주체임을 강조했다. 2012,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는 청소년의 정치적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에 대한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청소년들은 학생들이 대상이 되는 사안에서조차 의사표시가 불가능했다. 2012년 제정된 서울시 학생인권조례 주민 발의가 있었을 때도 청소년들은 서명을 할 수 없었다. 또한 청소년의 제한된 권리를 문제제기할 때에도 장벽이 있었다. 헌법 소원을 청구할 때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청소년들의 권리 주장은 지속되었으나, 헌법소원을 제기한 지 1년이 지나도 재판과정에는 진전이 없었다. 청소년들은 2012년 총선에서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러다 2013, 국가인권위원회가 선거권 연령을 하향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했다. 하지만 2014, 헌법재판소가 선거 연령과 관련된 법률에 대하여 합헌 결정을 내리며 18세 선거권은 또 한 번 좌절되었다. 헌법재판소는 우리의 현실상 19세 미만의 미성년자의 경우 아직 정치적·사회적 시각을 형성하는 과정에 있거나 독자적인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적·신체적 자율성을 충분히 갖췄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각주:1]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2014, 참사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회와 청소년에 순종을 요구하는 교육에 대한 청소년들의 불신은 더욱 커져갔다. 청소년들은 ‘1618 선거권을 위한 시민연대등을 꾸려 지방선거 청소년 모의투표를 진행하며 꾸준히 청소년의 참정권을 외쳤다. 2016,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연령을 낮추는 개정의견을 국회에 제출했다.

청소년의 참정권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청소년들은 계속해서 목소리를 냈다. 여러 청소년 운동 단체들은 모여서 <청소년 참정권 집중 활동 기획을 위한 간담회>를 진행하였다. 2017촛불시국에는 청소년들이 광장에 나와 18세 선거권을 외쳤다. 청소년 역시 정치 사안에 개입할 주체이며, 더욱 주체적으로 행동하기 위하여 18세 선거권을 비롯한 청소년의 정치할 권리가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세 선거권 그 이상을 논하다 : 청소년 참정권 보장을 위한 입법과제 토론회> 등의 국회 토론회를 열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청소년 참정권 확보를 목표로 하는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를 설립했다. 2018년에는 18세 선거권을 위한 국회 앞 천막농성을 진행했다. 청소년들의 지난한 외침 끝에, 2019년 비로소 18세 선거권이 현실화되었다. 정치적 주체로 인정받고 싶다는 청소년들의 외침에 사회가 응답한 것이다. 이후 여러 청소년단체들은 <18세 선거권, 끝이 아닌 시작이다! - 보다 완전한 청소년 참정권 보장을 요구하는 청소년단체 기자회견>을 진행하며, 청소년의 참정권 보장을 위한 여러 과제들이 남아있고 그것을 위해 계속해서 목소리 낼 것을 약속했다.

 

18세 선거권으로 투표할 수 있게 된 이들의 목소리

 

청소년들은 정치에 관심 없다.” “투표를 하기에 청소년들은 미성숙하다.” 청소년의 참정권 획득에 발목을 잡는 주장들이었다. 이러한 주장들이 정말 사실일지, 이런 주장에 대해 청소년 당사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듣기 위해서 선거연령 하향으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던 청소년 두 명을 만나보았다.

 

현예준 님은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그는 투표하기 전,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에게 투표하기 위하여 후보들의 공약집을 읽고 유세 현장에도 들러봤다. 투표를 처음 해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냐는 질문에 그는 투표가 정말 체계적인 절차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절감했던 것 같다.”고 답했다. 그는 특히나 이번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는 코로나19로 인하여 철저히 관리 감독이 진행된 점을 언급했다. 사람들 간의 거리를 유지하고, 비닐장갑을 끼고 투표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그는 선거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정치적 효능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답했다. “제 한 표 한 표로 인해서 후보자가 당선되고 낙선된다는 것 자체가 저 개인이나 저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힘을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다만 그는 제 투표가 부족한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이뤄졌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면서 정치에 대한 교육이 확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교에서 법과 정치라는 사회 과목 이외에 정치 선거나 투표 절차 등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18세 선거권 이후, 청소년의 참정권을 위하여 무엇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국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고, 어떤 법안들이 의결되고 있고, 정부가 어떤 정책을 시행하려고 하는지, 어떤 행정 명령을 하려고 하며 그런 것들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 조금 더 체계적으로 현안을 논의하는 시간이 학교에 부여가 된다면 학생 개인의 정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고쳐지고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기대합니다.”라고 답했다.

 

변현준 님 역시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여했다. 그는 두 달 동안 거의 매일 선거와 관련된 기사를 보았지만, 후보자들의 공약집을 읽지 않았다. 지역구 선거에는 지지하는 정당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주체적으로 정치할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올해 정당에 들어갔다.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선거운동에 활발히 참여했는데, 선거운동을 하면서 드디어 내가 정치적 주체가 되었구나.”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고 했다. 반면, 투표 행위에서는 비교적 정치적 효능감을 느끼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청소년의 참정권에 대해서 그는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은 삶의 주체가 아니라 유예된 존재로 간주된다는 생각을 되게 많이 합니다. 지금 내가 내 삶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는 나중에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지금 당장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많이 박탈당하는 것 같은데요. 그런 삶의 권리에는 정말 많은 것이 있겠지만, 그 중 하나에 참정권이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18세 선거권 이후 남아있는 과제에 대해서는 선거연령 하향, 정당 가입 연령 제한 폐지 등이 더 필요하며, 뿐만 아니라 참정권이 결코 좁은 의미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에만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청소년들이 삶의 현장에서 정치적 주체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여건이 갖춰지고, 청소년들의 삶 자체가 경쟁의 강박에만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여건이 되고, 그를 위한 교육들이 병행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물론 두 명의 청소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모든 청소년의 의견을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청소년 역시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피력할 수 있고, 정치적 주체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청소년들은 저마다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들을 고민했다. 그러한 방안들은 투표를 했을 때 느꼈던 감정, 일상을 보내는 학교에서의 경험, 청소년의 참정권에 대한 생각 등을 통하여 도출되었다. 청소년 역시 비청소년과 다르지 않은 사고하는 시민임을 보여준다.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투표 X, 선거운동 X, 정당 활동 X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18세 이상 청소년에게 보장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한계적이다. 그렇다면 18세 미만의 청소년은 투표권을 보장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인가? 여전히 시민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인가? 선거연령이 하향되면서 선거운동 연령도 하향되었다. 하지만 가능한 선거운동의 범위는 매우 좁으며, 여전히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없다. 올해 2,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선거연령 확대로 인한 학교의 정치화와 교육 현장이 우려된다며 국회에 입법 보완을 요구했다. 현재 학교에서 가능한 선거운동의 범위는 학생 사이의 단순한 의견 교환, sns 활용 선거운동, 정당 가입, 정치자금 기부 등이다. 선거운동 목적의 모임이나 집회 개최, 단체 차원의지지 선언, 후보자 등을 초청하여 토론회를 진행하는 것 등이 금지된다. 이는 학교의 정치화를 최소화하려는 법 조항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는 청소년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자를 알리는 것은 당연히 인정되어야 한다. 그 사람을 지지하고 말고는 다른 학우들의 몫이다. 오히려 선거와 관련한 여러 집회가 열리는 것은 청소년들이 이 사회의 시민으로서 정치할 권리를 성실히 실현시킨다는 증거일 것이다. 토론회를 진행하기 위해 친구들과 모여 후보자의 공약을 알아보고 공약의 의미, 효과, 한계 등에 대해 질의하고 학생들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이 다름 아닌 시민교육에 참여하는 하나의 형태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여전히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 없다. 최근, 정당 비례대표 선거운동에 청소년이 참여했다는 이유로 정당의 위원장이 검찰에 기소된 사건이 있었다. 청소년 활동가들은 이에 대한 탄원서를 작성하며 청소년이라는 이유로 정치 활동을 억압받는 현실에 저항했다. 선거운동에 참여한 청소년 활동가는 자신의 선거운동이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비청소년에 의한 강요나 강압의 가능성이 있을 수 있지 않느냐는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비청소년과 청소년의 권력 관계를 해소시키기 위한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지, 청소년의 정치적 자유를 금지하는 형태로 대응이 진행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정당 활동의 자유도 보장받지 못한다. 정당법 제22조 제1항 본문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권이 있는 자는 공무원 그 밖에 그 신분을 이유로 정당가입이나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다른 법령의 규정에 불구하고 누구든지 정당의 발기인 및 당원이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말은, 선거권이 없는 18세 미만의 청소년들은 정당가입 및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 1, 정의당에서는 위 조항이 위헌이라고 문제를 제기하며 헌법소원심판청구서를 제출했다. 기자회견에서 심상정 대표는 스웨덴·독일·프랑스·영국 등 민주주의와 복지가 잘 실현된 유럽 선진국들의 경우 정당가입 연령을 국가가 금지하지 않고 정당이 자율적으로 정하도록 해 청소년의 정당 활동을 적극 보장하고 있다핀란드의 경우는 만 13세부터 18세까지 청소년의회를 법적기구로 두고 있다. 독일의 고등학교는 직접 자신이 원하는 정당의 강령을 만드는 교육과정도 있다고 말했다. [각주:2] 청소년의 정당 활동을 보장하는 것은 청소년의 정치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교육적 차원에서도 정치란 무엇인지, 자신이 원하는 사회의 모습은 무엇인지, 그러한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지 등에 대한 고민을 확장할 수 있는 민주시민을 양성하는 교육을 실현하는 것이다.

 

청소년을 말하는 정치 X, 청소년이 말하는 정치 O

 

청소년은 선거운동, 정당가입 및 활동의 자유를 넘어 적극적으로 제도정치에 개입할 권리를 부정 당한다. 현재 공직선거법상 ‘25세 이상의 국민만이 국회의원, 지방의회의원, 지자체장에 출마할 수 있다. [각주:3] 청소년의 정치 참여가 금지되어있는 현실 속에서 청소년 인권에 대하여 발화하는 정치인은 극히 일부다. 발화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은 비청소년의 시선에서 한계적으로만 발화된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청소년 혐오[각주:4] 를 담고 있거나 청소년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청소년 혐오를 강화시킨다. 혹은 다른 중요한 사안들이 우선되어야하기 때문에 청소년 인권에 관련한 문제는 뒤로 밀려난다. 청소년들은 청소년을 말하는 정치가 아니라, 청소년이 말하는 정치를 원한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이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인권을 발화하고 자신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실현시키는 것 말이다. 사회에서 청소년을 수동적인 객체로 상정하고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서 정치사회적 사안에 목소리를 내는 것 말이다. 노동현장에서 발생하는 청소년 인권침해 사안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 입시교육에 대한 대안과 대학을 진학하지 않은 이들의 삶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지, 청소년이 대상이 되는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 어떤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지를 말하는 것은 청소년들의 몫이다. 그렇기에 청소년들은 끊임없이 발화해왔다.

21대 총선을 맞아, 특성화고생 권리 연합회는 주요정당 10곳에 정책협약 제안서를 보냈다. 고졸노동자를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고졸청년특별법, 고졸학력을 이유로 임금과 진급 차별을 금지하는 고졸차별금지법, 특성화고 학생이 참여하는 직업교육정책 개혁 추진 기구를 만드는데 노력할 것을 10개 정당에 제안했다. 그러한 협약을 얼마나 잘 지킬 수 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적어도 각 정당은 청소년들의 이러한 목소리에 대한 대답을 주어야 했다. 시민들을 대신해서 정치를 하겠다고 나선 이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10개의 메일에 대해서 단지 3개 정당에서만 답이 왔다. 특성화고생들의 권리를 책임지라는 청소년들의 꾸준한 외침에 대해서는 교육청도, 노동부도, 정치권도 저마다의 이유를 말하며 책임을 회피해왔다.

작년 조국 사태 이후에는 공정성이라는 키워드가 한국 사회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다. 당시 기회의 차별을 문제 삼으며 공정하게 경쟁할 권리를 이야기하는 일부 청년들이 있었다. 그와 동시에, 많은 청소년들이 교육의 의미는 무엇일까’, ‘교육이 왜 경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할까의문을 제기했다. 청소년들은 교사, 학부모 단체와 함께 공정한 입시제도란 가능한가? 우리는 교육에서 차별과 경쟁이 사라지길 바란다!’ 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언론에서 공정성을 요구하는 일부 대학생들의 모습만을 보도하고, 기존 교육 과정에 문제를 제기하는, 대학을 거부하는 청소년들의 외침은 주목하지 않았다. 교육부는 청년들의 외침에 응답이라도 하듯, ‘서울 16개 대학 정시 비율 40% 이상을 권고했다. 많은 청소년들의 요구를 왜곡시켜 해석한 것이다. 물론 청소년 역시 단일한 존재가 아니며, 각자 삶의 맥락과 위치에 따라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교육부의 이러한 권고안은 교육부를 비롯한 정치권과 기존 언론이 청소년 중에서도 일부 명망 있는청년들의 외침에만 주목하고, 다른 청소년들의 외침을 소외시키고 그것에 귀 기울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n번방 사건 이후, 아동·청소년이 성착취 사건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법무부는 의제강간연령을 13세에서 16세로 상향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많은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이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이 법안은 16세 이하의 미성년자와 성인이 성관계를 했을 경우, 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해당 성인을 처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동·청소년이 계속해서 성착취 사건에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한 법무부의 고민, 관련 부처들과 다양한 페미니스트들의 고민이 있었겠지만,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은 비청소년과 청소년의 성적 관계를 일괄적으로 차단하는 법 개정이 오히려 청소년의 성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지 않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청소년의 권리를 제한할 것이 아니라, 청소년의 사회경제적 권리를 보장하고, 재판 과정에서 청소년과 비청소년 사이의 권력관계가 반영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 있는 재판부를 배당하는 시스템을 만들라고 요구했다. 확실히 아쉬웠던 점은, n번방 이후의 과제를 이야기하는 많은 토론회가 있었지만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이 의견을 발화할 기회는 상대적으로 없었다는 점이다.

참 어려운 일이다. 청소년이 말하는 정치가 꼭 모든 청소년의 인권을 보장하는 정치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짚어둘 점은 이제까지 청소년들의 현실은 비청소년의 입장에서 해석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청소년들의 권리와 자유를 축소시켰다는 점이다. 이제 우리는 청소년들이 더 자유로이 의견을 말하고, 정치적 과정에 개입할 수 있는 사회로 향해야 한다.

 

미성숙한 청소년

 

청소년들의 정치할 권리를 억압하는 사고방식 아래에는 뿌리 깊은 나이주의가 깔려있다. 나이가 어리면 미성숙하다는 편견 말이다. 애초에 몇 살부터 선거권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논의가 왜 중요한 것인가. 이러한 논의 자체가 청소년이 정치적 주체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논의이다. 비청소년에 의해 정치적 영향을 받기 쉽기 때문에 청소년의 참정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모두는 일상을 살아가며 누군가에게 정치적 영향을 받는다. 직접적으로 가족이나 친구에 의해서 받기도 하고, 대중매체에 의해서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러한 사회적 관계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고 능력을 어떻게 향상시킬 수 있을지, 타인과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어떠한 긍정적인 작동이 가능할지를 논의해야 한다. 그것은 청소년의 참정권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청소년의 정치활동을 활성화할 때, 나이로 인한 차별을 무너뜨릴 때 가능하다.

청소년의 참정권 보장 논의가 있을 때 항상 나오는 이야기가 정치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물론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정치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국가는 어떻게 운영되고, 우리의 의견은 어떤 통로를 통하여 반영되고, 매일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인지하는 것은 사회구성원으로서의 권리이기도 하지만 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정치교육이 필요하다는 주장에는 함정이 존재한다. 청소년의 참정권 보장 논의에서 나오는 정치교육의 맥락은 결국 정치교육을 통해 정치를 잘 아는성숙한 시민이 되어야 선거권 획득이 의미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청소년이 미성숙하기 때문에 정치교육이 필요하다고 논할 것이 아니라, 청소년 역시 비청소년과 같은 정치적 주체이기 때문에 일상에서 정치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해야 한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일상에서 경험한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바탕으로, 어떤 문제들이 발생하고 있는지 고민하고 대안을 상상하는 차원에서 말이다.

몇 살부터 선거권을 부여해야 하는가논의는 미성숙함과 성숙함을 구분 지으면서 성숙한 사람만이 권리를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능력주의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권리가 개인적인 노력을 통하여 획득되어야 하는 것인가. 정치를 모르는 이들은 투표조차 하면 안 되는 것인가. 정치를 모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투표권을 얻을 수 있는 성숙함의 정도는 누가 규정하는 것인가. 권리는 사회적으로 평등하게 보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숙함과 노력의 정도를 정하고 그것에 알맞은 사람에게 권리를 부여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람이 권리를 어떻게 더 잘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논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우리 사회에서 성숙하다는 것은 어른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숙함의 사전적 의미 역시 몸과 마음이 자라서 어른스럽게 되다이다. 애초에 누군가를 미성숙하다고 규정해버리는 것 자체가 결국 우리 모두는 성숙해져야 한다는 편견을 반영한다. 성숙함과 어른스러움이 같은 의미인 사회에서, 비청소년은 성숙함과 미성숙함의 기준을 자의적으로 결정하고, 최종 목표인 성숙함을 위하여 여러 방식으로 청소년을 통제한다. 규칙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겠다. 우리 사회에서 성숙함이란 철이 드는 것이다. 철이 드는 것은 자신이 속한 공간의 부당함이나 자신의 권리 침해에 아무 말 하지 말고, 이 사회에 잘 적응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규칙에 순응해야 한다. 성숙해지기 위해서.

 

청소년의 정치 참여, 그리고 공부

 

청소년 참정권을 억압하는 요인인 청소년에 대한 편견과 관련하여 조금 더 언급해보려 한다.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규정해버리는 편견 이외에도 흥미로운 점은 청소년의 정치 참여를 공부와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은 학생으로 한정되며, 청소년의 정치 참여는 공부와 연관 지어 설명된다.

 

학생이 공부해야지 왜 집회를 나오냐

 

학생의 본분은 공부일까. 공부라면 그 공부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교과 교육을 성실히 이수하여 평가에서 높은 점수를 획득하는 것? 그 공부에서 나의 삶을 고민하고 사회에 의견을 피력할 권리는 사라진다. 청소년은 의견을 낼 수 없다. 의견은 성인이 되어서도 낼 수 있으니, 지금은 공부를 해야 한다. 청소년은 유예된 존재일 뿐이다. 지금 당장 권리를 주장해서는 안 된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지금의 권리를 박탈당해야 한다.

또한, 교육은 일상에서의 정치적 경험과 분리된다. 교육과 정치를 분리시키는 것은 교육이 고정된 교과서로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내포한다. 하지만 정치교육이라는 것이 별건가. 일상에서 나의 현실과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여러 문제들을 고민하고, 그것에 의견을 내고, 대안을 상상하는 것이 일상에서 정치교육을 실현하는 것이다. 오히려 집회에 나오는 청소년들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너는 공부도 잘하는 애가 왜 그런 걸 하니?” vs “너는 공부도 못하면서 왜 그런 걸 하니

 

청소년이 정치에 참여하면 그저 참여하는 것인데, 그것을 공부를 얼마나 잘하느냐와 연결 짓는다. 그리고 그 청소년이 우리 사회에서 요구하는 공부를 얼마만큼 잘하느냐에 따라 맞는 이유를 붙여 청소년의 정치활동을 비판한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도, 공부를 못 하는 아이도 정치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 공부를 잘하면 더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하여 공부에 집중해야 하고, 공부를 못 하면 대학이라도 가기 위하여 공부를 해야 한다. 정치활동은 공부에 걸림돌이 되는, 쓸모없는 일이다.

 

학생들이 거리에 나왔다!!!”

 

청소년들의 집회 참여를 옹호하는 여러 언론이 있지만, 그것을 보도하는 시각에서 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상정하기도 한다. 페미니즘, 노동, 환경 등 여러 의제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는 다른 비청소년들의 집회와 달리, 청소년들의 집회를 더욱 강조하며 공부해야 하는데 사회에 참여하는 대견하고 기특한 존재로 표상하는 것이다. 이는 청소년을 동등한 정치적 주체로 사고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학생들은 입시에 관련된 문제에만 목소리를 낸다.”

 

입시와 관련하여 의견을 피력하는 청소년들을 이기적이라고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또한 입시를 넘어서 더 폭넓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훈수를 놓는 어른들이 있다. 하지만 입시에 관심을 갖는 게 뭐 어때서? 우리 사회에서 입시는 청소년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이 바람직하냐에 대한 판단과 별개로, 입시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청소년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이 민주시민교육의 기본 목표가 아닌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인지하고, 자신의 행복과 사회의 발전을 위해 이바지하는 사람 말이다. 또한 입시와 관련하여 청소년들의 의견은 존중되어야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작년 조국 사태 이후 더 나은 교육을 요구하는 청소년들의 외침이 있었다. 하지만 정부는 고작 서울 몇 개 대학에 대하여 정시 비중 확대를 권고하는 수준에서 많은 청소년들의 외침을 무마시켰다. 이는 청소년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이다.

또한 청소년들은 입시를 비롯한 다양한 사회 의제에 대하여 목소리를 내고 있다. 작년에는 청소년들의 기후위기행동이 있었다. 기후위기에 대한 청소년들의 행동은 인간과 환경 사이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교육방식을 창조해내는 하나의 실천이다. 이들은 과도한 이산화탄소 배출의 원인이 되는 공장식 축산업에 문제를 제기했다. 기후 변화를 막고 비인간동물과의 관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채식을 실천했다. 직접 문제를 정의하고 일상 속에서 실천할 때 배움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청소년 페미니스트들의 움직임도 활발하다. 전국 각지에서 청소년 페미니즘 동아리,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들의 활동이 계속되고 있다. 대구 청소년 페미니스트 모임 어린보라에서는 [을들의 당나귀 귀: 페미니스트를 위한 대중문화 실전 가이드] 등 여러 페미니즘 서적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썼고,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는 작년 콘돔 전시회를 열며 청소년의 성적 권리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청소년들은 자신의 관계 속에서 여러 의제들에 대해 고민했다. 교사의 개입 없이도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사회에서 청소년들은 미성숙하고 어리숙하며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표상되고, 보호는 그들을 통제하며 이루어졌다. 하지만 청소년들은 이러한 편견을 완전히 부수고, 스스로 행동하고 참여하는 배움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용기를, 상상을, 실천을 배워야 한다.

 

한 표를 보장받는 것의 의미는? 그것이 참정권을 보장받는 것인가?

 

투표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었다고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제도 정치 자체의 한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실의 제도 정치는 국민의 의견이 수렴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나의 의견이 후보자를 통하여 피력되는 것이 아니라, 후보자 중 나의 의견과 그나마 일치하는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내가 투표한 후보자가 나의 모든 의견을 반영하지 않는다. 어떤 의제에 대해서 동의해도, 어떤 의제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다른 후보자들이 너무 최악이기 때문에 차악을 택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우리 정치에서는? 내가 이 후보자를 완전히 지지하든, 후보자의 일부 정책만 지지하든, 후보자를 지지하지 않지만 어쩔 수 없어서 투표를 했든, 모두 후보자에 대한 한 표로만 나타난다.

게다가 거대 양당의 독점 속에서 그들이 대변하지 못하는 자들의 의견은 모두 소외될 뿐이다. 거대 양당을 지지하지 않았던 소수는 투표권을 부여받았다고 해도 의견이 반영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후보자의 공약을 지지하여 투표했는데, 공약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태반이다. 문재인 대통령만 봐도 그렇다. ILO 핵심협약 비준이 공약이었으나, 취임 이후에는 노사정 사회적 합의를 통해 비준하겠다고 교묘하게 말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ILO 핵심협약을 비준한다는 이유로, 경영계와 합의하기 위한 얼마나 많은 악법들이 통과되겠는가. 탄력근로제 확대를 비롯하여 ILO 핵심협약 비준을 무력화시키는 수많은 시도들이 진행되고 있다. 대통령 선거 때 화제가 되었던 공약 - 2020 최저임금 1만원은 이미 오래전에 폐기되었으며, 내년에는 최저임금 130원 인상이라는 역대 최저 인상률이 확정되었다.

제도 정치의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제도 정치로는 우리의 의견을 완벽히 개진할 수 없다. 그것을 넘어서 청소년을 비롯한 시민들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될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18세 선거권, 그 이후를 꿈꾸다

 

참정권의 의미 확장이 필요하다. 단순히 투표할 수 있는 권리를 넘어서 제도 정치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할 권리, 사회에 의견을 피력하고 일상 속 정치 활동의 자유를 보장받을 권리, 사회 구성원으로서 동등하게 대우받을 권리가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 청소년들이 일상의 많은 시간을 보내는 학교에서부터 정치 참여는 소외된다. 청소년들은 학교 운영에 개입할 수 없다. 일상에서 정치를 경험할 수 있는 순간들이 있지만, 그것들은 입시 하에서 불필요한 것이 되어버린다. 학생들이 내 삶의 불편함을 말하고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토론할 수 있는 학급회의, 대의원회의, 운영위원회 등이 운영되지만, 그것의 의미와 필요성이 논의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간 채우기 용으로 형식적으로 이루어지며, 다루는 의제들도 제한적이다. 마지막으로 18세 선거권 이후 우리에게 남은 과제를 고민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청소년 참정권 운동은 청소년들의 꾸준한 외침을 통하여 진행되어왔다. 청소년들의 권리를 박탈하는 사회에서 끊임없이 지금의 권리를 주장한 그들이야말로 일상에서 교육을 실현하는 모습과 청소년의 정치적 주체성을 보여준다. 청소년들은 18세 선거권 너머를 요구한다. 한계적인 투표권 보장을 넘어서, 청소년의 정치적 주체성 실현을 위하여 교실의 정치화, 일상의 정치화를 요구한다. 교실의 정치화를 시작으로, 청소년의 정치 활동을 확대해나가자. 학급 또는 자신이 속한 공동체 내에서 일상의 불편함을 인지하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시간을 갖자.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서로를 존중하는 관계를 어떻게 맺을 수 있는지 이야기하자.

학교 내에서는 학생회가 실용적 업무를 하는 기관을 넘어 정치조직으로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 운영, 재정 운용, 교육 과정 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어야 한다. 학생회장만이 형식적으로 참관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 사회 내의 담론이 형성될 수 있는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학급회의가 잘 진행된다면 그것이 하나의 창구가 될 수 있겠다. 학생들은 학급회의를 통해서 두발규제, 교육권 침해 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교과과정의 변화 역시 필요하다. 일방적인 정보 전달 교육을 넘어서 사회의 여러 현상들에 대해 주체적으로 탐구하는 교육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교육과정은 더욱 정치적이어야 한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라는 추상적인 말로 포장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배제와 차별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지,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위해서 어떠한 사회적 조건이 만들어져야 할지를 논의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정치는 단순히 교과 시간을 통해서 교육될 수 없다. 일상 속에서 정치가 가능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정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나 역시도 그랬다. 강의실 안에서 구조화된 지식을 접했을 때가 아니라, 일상 속의 경험을 통해 지식을 나의 것으로 만들었을 때 배움을 느꼈다. 사회에서 매일 일어나는 일들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공부할 때, 마음이 맞는 친구들과 직접 문제를 정의하고 서로의 질문에 답해줄 때,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고민할 때, 나의 의견을 사회에 피력하기 위해 거리로 나갔을 때, 공부했던 내용들이 나에게로 가깝게 다가왔다. 일상의 정치화를 긍정한다. 일상에서, 나의 삶에서, 내가 속한 공간에서 나의 권리와 의무를 실천할 때, 교사는 권리와 의무를 가르칠 필요가 없다. 이미 우리는 고민하고 경험함으로써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지 느꼈기 때문이다. 교사의 옳은가르침을 받지 않더라도, 교과서에 나오는 멋진 말들을 나 스스로 의미화하기 때문이다. 청소년의 정치활동을 긍정한다. 더 많은 청소년들이 투표권을 부여받고, 정당에 가입해서 활동하고, 선거운동을 하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후보로 출마할 수 있어야 한다. 청소년들이 자신의 교육에 개입할 수 있는 결정권이 보장되어야 한다. 가령, 수업 일수, 교육 내용, 교육 방식, 방학 기간 등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집에서, 학교에서, 거리에서, 일터에서, 일상의 모든 순간에서 내 삶의 주체로서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매일매일 발생하는 사회의 여러 현상에 대하여 청소년들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하며, 우리는 동등한 주체로서 그들의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한다.

학교를 넘어서는 교육에 대한 문제제기가 필요하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일상의 대부분을 통제당하며,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부정당하고, 경쟁을 통해 평가받는다. 학습 시간은 수면 시간을 줄일 정도로 과도하고, 학생들의 쉴 권리는 보장되지 않는다. 학생들은 공부하기 위해 외적, 내적 가꿈을 포기해야 하며, 내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답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 이러한 통제와 억압, 경쟁과 차별은 교육의 의미를 희미하게 한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배움과 가르침이 존재하는데, 교육의 결과를 통해 인간의 자격을 나누고 그 자격 조건 안에 들게 하기 위해 인간다운 대접을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의 목적을 전도시킬 뿐만 아니라, 청소년 혐오를 강화시키는 하나의 요인이 된다. [각주:5] 학생들은 미성숙하기 때문에 보호받아야 하고, 학생들은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정치 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편견 말이다.

이는 비단 교육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논리이기도 하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노동하지만, 어떤 노동을 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자격을 나눈다. 인간답게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서는 경쟁에서 이기고 누군가를 차별하며 인간다움을 포기해야 한다. 청소년 참정권 논의는 입시교육, 대학서열화와 대학이 당연한 사회, 얼마나 공부를 잘하는 지가 곧 개인의 등급이 되는 사회, 모두가 노력하지만 성공한 사람의 노력만이 인정되는 사회, 아무런 승자도 존재하지 않는 사회 등 사회 전반에 대한 고민과 연결된다. 인간의 자격을 구분하며 권리를 부정하는 사회가 아닌, 권리가 모든 이에게 사회적으로 보장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청소년은 미성숙한 존재가 아니다. 이제는 그들의 정치적 주체성을 인정해야 한다. 교실의 정치화, 일상의 정치화는 자신이 속한 공간에서부터 의견을 피력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일 것이다. 또한, 일상의 정치화를 통해서 청소년과 비청소년의 권력 관계를 해소시킬 수 있다. 청소년을 유예된 존재가 아니라 이 사회를 살아가는, 비청소년과 다르지 않은 시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성인 중에 투표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기에 모든 성인이 투표할 수 있도록 18세 선거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담론을 넘어서, 청소년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더 나은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18세 선거권, 그 이후를 꿈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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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선, [학생인권의 눈으로 본 학교의 풍경], 교육공동체벗,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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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7년도 청소년 참정권 집중 활동 기획을 위한 간담회 토론자료(교육공동체 나다, 노원지역청소년인권동아리 화야, 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어린이책시민연대, 인권교육센터 들,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서울지부)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페이스북 페이지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 페이스북 페이지

특성화고 권리 연합회 페이스북 페이지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페이스북 페이지

어린보라: 대구 청소년 페미니스트 모임 페이스북 페이지

위티 WeTee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페이스북 페이지

  1. 장은교, <헌재 “18세는 정치적 판단능력 미약해선거권 제한 합헌>, 경향신문, 2014.04.29.,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4291341481&code=940301. [본문으로]
  2. 신진호, <정의당 18세 미만 미성년자 정당 가입 금지 부당헌법소원 청구>, 서울신문, 2020.01.09.,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109500121&wlog_tag3=naver. [본문으로]
  3. 이슬비, <[단독] 통합당, 국회의원 출마 연령 2521세로 추진>, 조선일보, 2020.06.26.,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6/26/2020062601777.html  [본문으로]
  4. 청소년 혐오란 청소년을 비하, 경멸하고 공포스러운 타자로 간주하는 문화를 말한다. 청소년 혐오는 아동과 청소년에 대한 고정관념을 기반으로 하며, 거대 미디어가 아동과 청소년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을 통해 강화된다. 급식충, 등골브레이커, 2병 등 청소년 혐오어가 우리 사회에 존재하며, 청소년이 저지른 범죄에는 유독 나이를 강조한다. 필자는 청소년 혐오를 포괄적으로 해석했다. 청소년을 미성숙한, 순수한 존재로 상정하는 것 역시 청소년 혐오에 해당된다쥬리/십대섹슈얼리티인권모임 활동가, <우리 사회의 청소년혐오>, 미디어스, 2016.07.02.,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093. [본문으로]
  5. 조영선, [학생인권의 눈으로 본 학교의 풍경], 교육공동체벗, 2020, 11.  [본문으로]

교육현장과 정치적 중립성의 민낯. ‘미성숙성숙사이의 저울질

 

말하는 감자, 말하는 고구마

 

 

바뀐 법과 정체된 교육

 

2020,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선거권이 만 18세에게까지 확장되었다. 지금까지 논의만 되었던 선거 연령 하향이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청소년은 성인들의 보호만 받으며 일정 기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닌, 사회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정치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주체가 된 것이다. 하지만 현재 교육현장을 둘러봐도 대외적으로 바뀐 부분은 명시된 법을 제외하고는 찾아볼 수 없다. 투표하는 주체가 늘어났고 그중에는 416일 이전 출생자인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도 있으나 그들을 위한 별도의 교육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선거법의 개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육기본법에서 명시된 정치적 중립성의 개념이 지켜진다는 사실과 연관이 있다. 교육기본법 제16조에서는 교육은 교육 본래의 목적에 따라 그 기능을 다하도록 운영되어야 하며, 정치적ㆍ파당적 또는 개인적 편견을 전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서는 아니 된다.’[각주:1]라는 내용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는 선거 연령이 하향되었으나 여전히 학교 내의 정치적 의견표출이 제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선거 연령이 하향됐으나 이를 둘러싼 정치적 중립성의 개념은 여전한 것일까? 청소년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질 수 있고, 그들에게 정치란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학교에서 변화를 보여야 하지 않을까? 더 나아가 정치적 중립성은 교사들의 정치적 권리까지 침해하고 있지 않은가? 왜 학교는 교사의 정치적 권리의 침해 가능성을 두고도 정치적 중립성을 엄격하게 지키라고 하는가?

 

정치적 중립의 모순

 

위 질문에 대한 답을 알기 위해선 우선 정치적 중립성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를 알아봐야 한다. 교육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인간을 목적에 맞도록 개조할 수 있는 교육과정의 형성을 막기 위해 생겨났다. 배소연(2020)헌법상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에 관한 연구에서 본래 헌법이 보장하는 교육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이 자본주의 산업화로 인해 표준화된 대량 인력 양성을 중심으로 하던 시대에 국가의 교육권이 무제한 강화되며 교육이 국가발전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인간 또한 도구화되는 부작용에 대한 반성을 통해 나타났다고 한다. 국가 권력이 교육 영역에서 부당하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행위를 막기 위해 나타난 개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으로 보았을 때,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이 생긴 데에 정치적 영향력의 제한이라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잘 지켜지고 있는지 그 실효성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 과연, 교육에서의 정치적 중립성개념은 교육 영역에서 국가 권력의 정치적 영향력을 줄이는 데에 일조하는가?

교육에서의 국가 정치 권력의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교과서이다. 하지만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교육에서 가장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교과서에서도 특정한 정치적 견해가 등장할 수밖에 없다. 교과서의 정치적 견해와 관련하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게 이슈가 되었던 사건은 바로 박근혜 정부의 한국사 국정 교과서 사태였다. 현재의 한국사 교과서는 국정 교과서가 아닌 검정 교과서 제도이다. 검정 교과서 제도는 일반 출판사에서 연구하고 개발한 교과용 도서의 교과서 적합 여부를 검정하여 심사하는 제도이다. 현재 한국사 검정 교과서 제도에 따라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은 한 권이 아닌 다양한 교과서로 검정 교과서 제도 아래의 학생들은 학교마다 다른 교과서로 수업을 받을 수 있다. 이에 비해, 국정 교과서 제도는 정부 자체에서 교과서를 만드는 TF를 결성하여 교과서를 연구하고 개발하는 제도이다. 박근혜 정부에서 이와 같은 국정 교과서를 새롭게 도입하고자 했던 시도는 큰 국가적 논란으로 연결되었다. 박근혜 정부를 포함하여 국정 교과서를 지지하는 세력들이 대부분 박정희의 독재 정부를 포함하여 국정 교과서를 통해 특정 당파의 의견을 편파적으로 제시할 수 있다는 문제였다. 당시 박근혜 정부에서는 국정 교과서에 대해 역사를 올바르게 학생들에게 가르침으로써 역사교육을 정상화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러한 정부의 발언은 역설적으로 얼마나 국정화 교과서가 정치적인 전략인지를 알 수 있게끔 한다. 박근혜 정부가 국정화 교과서를 주장하기 10여 년 전 참여정부 대에는 역사를 정권이 재단해서는 안 되며 국민과 역사학자가 판단해야 한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 국정화 교과서의 제작자 입장의 역사는 올바른 역사이지만, 직접 국정화 교과서를 제작하지 않는 입장에서 국정화는 정권의 재단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국정 교과서 사태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지 3일 만에 종결되었다, 이러한 국정 교과서 사태는 이것이 얼마나 정치적인 요소인지, 더 나아가 국가에서 교육을 단일적으로 관리하는 것이 얼마나 정치적인 행위인지를 알 수 있게끔 한다.

그렇다면, 국정화 교과서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가? 국정화 교과서는 교육에서 정부가 개입하는 행위가 다분히 정치적임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정부에서 독점하여 교과서를 제작하는 행위만으로 큰 논란이 발생하며, 다분히 정치적인 행위라고 보여질 수 있는 사안이라면 하물며 정부에서 만들어내는 교육과정은 과연 정치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아무리 정치적 중립성을 염두에 둔다 한들, 결국 교육과정마저도 정부의 부처 기관인 교육부 아래에서 만들어지는 요소이며,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에 따라 중요하게 가르쳐야 할 부분이 결정되고,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비롯한 각종 시험에서 무조건 나올 수 있는 부분들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이처럼 무엇이 중요한가?’를 지정하는 과정, 더 나아가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를 지정하는 과정은 결국 필연적으로 정치적인 편향성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정권에서는 대북 정책에 대하여 북한과의 갈등을 더욱 강조하여 가르치고 이를 시험에 출제할 수도 있지만, 어떤 정권에서는 이에 대해 북한과의 협력과정을 강조하여 시험에 출제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육과정의 수립 과정에서, 결국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은 허상에 가깝다. 그리고 교육과정이 처음부터 중립성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에서 교사의 중립성 또한 현실적으로 허무맹랑한 개념이 되고 만다. 교육과정과 교과서가 편향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교육과정을 대변하고 근거를 들어 설명해야 하는 교사는 특정 사안에 대해 어떠한 의견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의견을 드러낼 수 없다. 결국, 교사가 편향적인 교육과정을 성실하게 대변해야 하며, 편향적인 교육과정을 거부할 때 헌법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을 어기게 되는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 때에 교사가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고자 하는 태도는 진정한 정치적 중립이 아닌 편향적인 교육과정을 그대로 전달하는 단순한 기계적 중립에 불과하며 결국 어떤 입장을 강화하고 견지하는 결과를 낳는다.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 학생과 교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학교에서 생활하는 학생들과 교사들은 정치적 중립성에 대해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을까. 학생들은 법에서 명시한 정치적 중립성이 지켜지는 걸 반대할지, 교사들도 정치적 중립성의 개념을 교사의 자율성 침해로 여기는지를 알아보고자 인터뷰를 진행해 봤다. 인터뷰는 같은 학교 소속인 학생 두 명과 교사 두 명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질문의 내용과 그에 따른 답변을 교사와 학생으로 분류해 간략히 정리해봤다.

 

1. 교육기본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정치적 중립성은 어떤 맥락에서 발생한 논의인가? 어째서 교사가 정치적 의견을 표출하면 안 되는 걸까?

 

학생: ‘정치적 중립성은 국가 권력의 교육 지배가 문제되면서 교육의 자주성 실현을 위해 논의된 문제임. 애초에 정치와 교육은 서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데 특정 관점에 편중된 의견이 학생들에게 노출되면 미성숙한학생들이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위험성이 커서 정치적 중립성 개념이 도입된 듯함.

교사: 일반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교육이 사회 미치는 영향력을 고려한다면 편향된 교육이 피교육자의 정치적 지향성을 결정하는 자유를 침해할 가능성이 다분함. 특히 학생들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주체가 교사이기에 교사가 정치적 편향성을 내비치지 않도록 국가에서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함.

-> 학생과 교사 모두 학생의 배움 과정에 있어 교사의 역할을 강조했다. 특히 다방면의 사고 성장과 균형감 있는 시각이 필요로 하는 청소년 시기에 교사에게서 받는 가치관 형성 영향이 크기 때문에 이를 정치적 중립성이 발생한 근본으로 고려하고 있다. 이는 청소년이 미성숙하다는 전제와도 연관이 있어 보인다.

 

2. 교사의 완전한 정치적인 중립이 가능한 것인가?

 

학생: (두 학생의 의견이 달랐는데 정치적 중립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학생은 정치적 중립이 무조건적으로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를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개념으로 생각한 거 같다.)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개인마다 다르게 정의내릴 수 있어 어렵다고 생각한다. / 학교에서 객관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학생들이 주관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도와준다면 그 맥락에서 정치적 중립성이 지켜지는 거 아닐까?

교사: 교사가 정치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명시적으로 표출하지 않는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사도 인간이고 학생들과의 상호작용이 기계적일 수 없기에 '완전한' 중립은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교사도 자신이 피교육자로서 자라온 과정이 있고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주체이기에 표면적으로 중립으로 보일지라도 잠재적 교육과정 측면에서 교사가 중립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 의견이 조금씩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보면 교사라는 직책이 어느 정도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는 직업이라 본 데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물론 교사도 정치라는 분야에 대한 개인의 의견과 가치관을 가질 순 있지만 그래도 1번 질문에서 나온 답과 비슷하게 학생에게 영향을 직접적으로 주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볼 땐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라는 의견이 대다수였다. (이는 현재 법에서 명시하고 있는 정치적 중립성과 같다.)

 

3. 정치적 중립성은 현대 교육현장에서 어떻게 이용되는 개념인가? 대부분 어느 정도를 정치적 중립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학생: 자신의 정치적 입장만을 강조하지 않고 학생들에게 정치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선에서 정치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교사에게 요구되는 정치적 중립성은 학생들에게 특정 정당을 비판하고 배제하는 것을 금한다기보다는 정치적 교육 자체로부터 자유로운 데에 의의를 두는 거 같다.

교사: 가장 쉽게 생각하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않는 선에서 교육현장의 정치적 중립이 현재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만약 페이스북이나 인스타 등의 SNS에서 대통령의 페이지를 팔로우한다면 정치적 중립을 어긴 것으로 봐야 하는 것인가? 혹은 어떤 정부 정책에 관한 내 비판적인 생각을 내 SNS에 올렸다면 정치적 중립을 위배했다고 볼 것인가? 결국 교실 내에서 좌우 혹은 찬반이 갈리는 사안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으로 정치적 중립을 지키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학생들의 가치관 확립과 더 넓은 식견을 기르기 위해서는 아예 특정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보다는 균형감 있게 사건에 대해서 다양한 방면을 언급하며 서로 의견을 표현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정치적 질문에 대해서 답변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답변에 대해서 아이들의 궁금증에 대해서 다양한 방면의 의견을 근거를 들어 설명해주는 것이 균형감 있는 아이들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 본 질문에서는 답변에서의 학생과 교사의 차이를 띠었다. 학생은 현대 교육현장에서 정치적 중립성이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이나 정치적 개념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 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간단하게 대답한 한편, 교사들은 현재 교육현장에서 활용되는 정치적 중립성과 실제로 실행되었으면 하는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개념도 제시했다. 만약 학생들을 위한 교육을 이루고 싶다면 정치적 개념에 침묵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해당 정치적 사안에 대해 학생들에게 자세히 설명해 학생들이 뭔가를 제대로 알고 자신의 의견이나 가치관 확립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더 낫다는 것이다. , 현재 교육현장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논란이 될 만한 사건이나 개념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는 기계적 중립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교사들 또한 이 개념이 과연 교육현장에서 올바른 개념인가 하는 의문을 지니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4. 정치적 중립성과 청소년의 미성숙담론은 어떤 관계 아래에 있는가?

 

학생: 정치적 중립성과 청소년의 미성숙담론은 유기적 연대 관계 아래에 있다고 본다. ‘나이가 어리기때문에, 또는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누군가의 보호교육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는 미성숙담론에 근거하여 정치적 중립성이 제기된다고 본다.

교사: 대학교수와 교사 간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차이나는 점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될 듯하다. 정치적 자유가 허용되는 교수는 스무살 넘은 성인을 교육하는 것이고 정치적 중립이 요구되는 교사는 청소년을 교육하는 것이니까. 청소년은 아직 정체성 확립 단계이고 '미성숙' 하기에 국가나 사회가 교육을 주입시켜 청소년들이 치우친 가치판단을 하지 않도록 하려는 듯하다. 근데 이때 미성숙하다는 것은 생각도 없고 뛰어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며, 학생들을 내부의 능력을 스스로 발현시킬 수 있는 대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결론은 학생들이 정치적인 생각이 없거나 표현할 능력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만큼 아이들은 표현의 어색함이나 아직 자신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기에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하는 개념으로 국가에서 지정한 거 같다.

-> 본 질문에서 내리고 있는 교사와 학생이 내린 미성숙의 정의는 차이를 보였다. 예상과 다르게 오히려 학생은 청소년이 나이가 어리다는 점에서 미성숙을 강조했고, 교사는 미성숙을 자신의 의견을 확립하거나 표출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단계라고 정의했다는 점에서 학생들 본인보다 더 청소년의 역량을 높이 평가한 것 같았다. 이러한 상황은 학생들은 사실 그들 사이에서 정치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학생들이 적극적인 논의나 자신의 의견을 확립할 충분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미성숙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학생들 자신은 그저 그것이 나이가 어리기때문이라고 치부한 것으로 보인다. 충분한 정보나 교육 없이 이루어지는 논의는 얕게 진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5. 교사의 정치적 자유가 허용된다면, 어떤 선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

 

학생: 가장 중요하게도 교사의 말을 듣고 가치관에 변화를 끼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그들의 주관적 개입이 드러나지 않는 사실을 말하거나, 학생들이 스스로 정치적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입장을 정립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학생들과 함께 있는 공간이 아닌 학교 밖에선 정치적 활동이나 시국선언을 할 수 있는 자유 정도는 보장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교사: 과도한 정치적 의견 표출은 교육현장에서 지양되어야 한다 생각한다. 교실 내, 수업 시간 속에서는 어쨌든 수업 목표가 분명해야 하니까 그 점에 집중하는 것이 서로에게 가장 좋을 듯. 다만 정치적인 가치 판단을 앞서는 인본적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사안이라면 교육현장에서 함께 논의해도 좋지 않을까? 교사가 특정 정치 성향을 표출하는 차원이 아닌 학생들에게 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고 능력을 길러줄 수 있는 차원에서 정치적 논의의 자유가 허용된다면 좋겠다. 예를 들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다가 아니라 이런 생각도 내 개인적인 견해에서는 해봤다 하지만, 다른 의견도 있을 수 있다또한 이 관점은 맞고 틀리고의 관점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등의 언급이 필요할 거 같다.

-> 학생과 교사 모두 어느 정도 정치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한다는 입장에 동의했다. 과도한 정치적 의견 표출이나 아니면 편향성을 드러내지 않는 선에서 학생과 교사가 타협을 보고 논의하는 것도 교육적으로 오히려 좋다는 게 양측의 생각인데 이는 현재 법에서 명시한 암묵적 중립성과 확실한 차이를 보인다.

 

6. 학생의 정치 교육을 위해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은 지켜져야 하는 개념인가?

 

학생: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은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의 사고방식은 아직 미성숙한 단계이며 대부분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학교라는 제한된 공동체 안에서 교사들이 제공하는 정보의 진위여부를 파악하기 어렵고, 이는 곧 그들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교사라는 직위가 가지고 있는 특수한 직위와 사회적 파장을 고려했을 때, 교사의 정치적인 발언은 일반 시민보다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사: 우선 표면적으로는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교사가 노력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교육이라는 것이 광범위하게는 삶의 과정이고 연속선상이므로 정치를 배제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겠지만 학생들에게 스스로의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합리적인 판단 능력을 기르게 해 주는 게 정치 교육의 목적이라면 교사에게 중립성은 요구된다 생각한다. 물론 이때 정치적 중립성은 아이들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생각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그리고 다른 관점도 언급한다는 의미에서의 중립성이다. 교육에서 중요한 점은 미성숙한 학생들을 성장시킨다는 것보단, 이미 무엇인가 이룬 큰 꿈을 갖고 있는 학생들의 내면을 겉으로 서로 협력하여 이끌어 낸다는 관점, 즉 발현시켜 준다는 관점에서 접근하면 정치적 문제든 어떤 교육의 문제든 해결되리라 생각한다.

-> , 학생과 교사 모두 답변에서 명시한 중립성은 현재 교육현장에서 지켜지는 중립성과 달리 침묵이 아닌 단순한 자신의 편향적이고 과도한 의견표출의 지양일 뿐이었다. 현재 학교에서는 정치적으로 논란이 될 만한 사안을 일절 언급하지 않도록 하는 기계적 중립에서 벗어나 학생들에게 여러 관점과 사태 자체를 명확하게 알려 주는 게 더 좋은 해결의 창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인터뷰 결과 답변들에서 반복되는 두 가지 점을 발견했다.

 

1) 학생들은 미성숙하기 때문에(미성숙은 단순히 나이가 어려서일 수도 있지만, 교육과정에 의해 많은 정치적 경험이 존재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교사의 의견에 영향을 너무 많이 받을 수 있다. 그러니 학생들 앞에서 명시적, 편향적 정치적 의견표출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2) 그래도 완전한 암묵이 아니라 정치적 사안과 논란 등에 대한 정보를 학생들에게 제공해줘 보다 더 넓은 식견과 가치관을 가지는 걸 도와야 한다.

 

첫 번째에서 논의된 미성숙은 4번에서 제시했듯이 학생과 교사가 정의에 있어서 차이를 보인다. 학생과 교사 둘 다 청소년들의 미성숙함을 강조하며 교사가 학생들의 가치관 형성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때 미성숙개념이 어떤 범위 내에서 해석될지는 다를 수 있다. 학생들의 의견대로 나이 개념을 적용해 성인과 차별성을 둔다는 점에서 청소년들이 미성숙하다라고 정의하면 이는 청소년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나이라는 기준에만 의거한 제한적 정의일 뿐이다.

사실 미성숙하다라는 단어를 누구에게 붙일 것인가는 논란의 여지가 될 수 있다. ‘청소년이 미성숙하다.’라는 말이 나온 이유는, 나이가 어려도 많은 경험을 통해 성숙하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나이가 많아도 미성숙한 사람이 있기에 어떤 사람이 성숙했는지의 기준을 세우기 어려워 나이라는 하나의 인위적인 지표를 만들고 이에 따라 구분짓기가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때 미성숙의 정의를 4번에 나왔듯 생각도 없고 뛰어나지 않다는 게 아닌 스스로 내부의 능력을 발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대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에게는 많은 경험이 허용되지 않으며 일방적인 교육과정이 지정되어 있는데, 이는 청소년이 상대적으로 성숙하기에는 너무나도 미흡하거나 부족한 과정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정한 교육과정을 통해 성숙한 학생문화를 이룩하기 위해서 학생들을 제대로 교육하고, 이를 위한 정치 교육의 기본적 환경을 마련하여 학생들이 성인 못지 않은 성숙함을 갖추도록 해야 한다. 제대로 된 정치 교육 없이 학생들을 미성숙하다.’라고 정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제대로 된 정치 교육이나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실제 교육현장에서 적용할 기회를 마련해 주는 조치가 필요하다.

또한, 인터뷰에서 제시된 정치적 중립성 개념은 현실에 적용되는 것과 정작 학생과 교사가 원하는 것의 내용이 다르다. 학생과 교사 모두 교사가 직접적으로 표출하진 않더라도 논란이 될 만한 사안 혹은 정치에 대해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게 교육적으로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직접 교육현장에 있는 당사자들이 원하는 것과 법적으로 명시한 정치적 중립성의 개념은 서로 다름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 올해 법 개정으로 인해 선거에 참여하게 된 몇몇 학생들도 제대로 된 정치 교육이나 선거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투표하게 되어 학생들이 불만을 표했고, 법 개정이 최근에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학생들에게 무조건적 침묵으로 대응하기보단 제대로 된 실질적 교육을 해 주는 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뭔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논란을 회피하거나 침묵으로 대응하기보단 오히려 맞서서 알려주는 게 제대로 된 교육을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 인터뷰의 결과와 학교에서의 맥락으로 보건대, 교육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을 견지하는 내용은 청소년의 미성숙함이 존재한다고는 하지만, 과연 그 미성숙함에 따라 어떤 기준으로 아이들을 교육해야 하는지, 그리고 미성숙하다는 이유로 교육과정의 일방적 전달과 기계적 중립으로 교육과정을 구성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지에 대한 재고도 존재하지 않은 채 하나의 통일된 기준도 없이 저마다의 생각이 난립하는 정치적 중립성개념의 모순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교사들은 저마다 교육과정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에 대한 통일되지 않은 생각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 교육과정에 대한 기계적 중립을 지키는 교사가 있는 반면, 적당히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서 교육과정 밖의 내용을 설명하고 아이들과 소통함으로써 새로운 교육과정의 지평을 만들어내는 교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또한 정치적 중립성에서 거리가 먼 교사들의 행위라고 할 수 있으나, 정치적 중립성 개념의 모순을 생각한다면 어떤 교사도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 안에서 행동할 수 없다. 하지만, 이처럼 다양한 가치를 제공하는 새로운 교육과정의 지평은 결국 헌법에서의 정치적 중립성개념에 의해 제한되고 마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교육현장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그 자체로 모순된 개념인 데에 더하여 아이들의 새로운 교육과정으로써의 경험마저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교육 현장에서의 정치적 중립성개념은 학생들의 넓은 교육과정 경험을 막는 역할로 작용하고 있다. 2017년 실제로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의 수업에서 초등학교 교사가 퀴어퍼레이드의 시민 행진 영상을 보여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전학연(전국학부모교육시미단체연합)에서는 교사의 행위를 비난하고 파면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실제 본 교사가 근무하던 학교 앞에서는 교육현장이 동성애 교육장이 되었다.’라는 내용의 전단지를 배포했으며, 본 교사를 동성애를 옹호하고 남성혐오를 가르치는 수준 이하의 교사라고 맹비난했다고 한다. 이러한 학부모들의 행태로 교사는 학부모들을 고소하기에 이르렀으며, 결국 법원은 학부모 측에 3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교사에게도 성 정체성이 확립되지 않은 초등학생에게 퀴어문화 축제 영상을 보여주는 것은 학부모들에게 큰 걱정을 끼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는 결국 법원에서 공식적으로 퀴어 문화를 보여주는 것 자체만으로 교육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처럼 정치적 중립성은 결국 교육과정 외의 내용을 교사에게 가르치지 못하게 하는 기제로써 작용한다. 이는 더 나아가 사회적으로 합의되지 않은 문제에 대해서 교육에서의 언급을 아예 금지하게 된다. 교육과정은 아무리 전문가들이 교육내용을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지 않은 내용이라면 교육하지 않아야 한다는, 부단히도 보수적인 구성방침을 따르고 있다. 이러한 교육의 방침은 현재 논란이 되는 성교육 표준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김대유(2010)은 성교육 표준안에서는 사회적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여 사회적 충돌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성교육 표준안에서 양성평등, 성 소수자, 성행위, 자위행위와 같은 내용 체계를 모조리 삭제하였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교육과정은 결국 기계적 중립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회적으로 충돌을 빚을 내용을 모조리 삭제함으로써 대한민국 내의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를 교육과정으로 편입하고 그들의 편을 드는, 전혀 중립적이지 않은 결과를 낫게 되었다. 과연 교육에서의 중립성은 어떤 개념이며, 과연 이러한 허울뿐인 중립 속에서 교육에서 과연 중립을 주장하는 것이 합당한 논의인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결론: 학생들을 위한 교육은 무엇인가?

 

결국, 헌법상으로 명시된 것처럼 보이는 교육 내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사회적 역사적 맥락을 고려해 볼 때 사실상 허구적이라고 볼 수 있다. 법적으로 정치와 교육이 상호 연관되어 영향을 미친다는 점과 학생들이 교사의 정치적 의견에 휩쓸릴 수 있음을 근거로 들어 정치적 사안을 언급하지 않으려 하지만, 이는 완전한 중립이라기보다는 기계적 중립이요 의견묵살에 가깝다. 사회가 정치와 이미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는 점과 완전한 중립은 불가능하다는 특징을 고려할 때 교육체제 내의 정치적 중립은 본인들의 편의와 자의에 의한 조정으로 보인다.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근거로 가장 많이 언급된 청소년의 미성숙함 또한 학교 내에서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기 위한 근거로 들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청소년은 해당 글 본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여러 경험과 배운 내용을 토대로 사고력을 스스로 확장할 수 있는 능동적인 존재이고, 이때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과 가치관이 청소년에게 어느 정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사회와 밀접하게 붙어서 작용하는 게 정치이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거나 현재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사안을 함께 다루면서 다양한 의견들을 접하는 과정이 오히려 사고 확장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경험을 쌓기 힘든 교육과정을 비판하고 청소년들에게 그 정치의 영역을 확장하는 논의를 진행하기는커녕, 청소년들이 미성숙하다.’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의 교육현장에서 정치성을 제거하고, 그들에게 주어진 정치적 영역의 능력까지 의심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상황에서 결국 헌법에서의 정치적 중립성은 기계적인 차원에 머물게 될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든 간에 정치와 교육의 자연스러운 맞물림을 억제하는 방해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차라리 교육 측면과 정치가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인정하고 이를 맞물린 교육을 활용해 청소년들이 주체적이고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정치 분야에서도 활용할 수 있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교사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앞 인터뷰에서 교사는 청소년들이 미성숙하고 영향을 쉽게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청소년은 능동적으로 자신의 사고나 의견을 표현할 수 있는 주체라는 점을 교사가 인지해야 한다. 또한 교사가 청소년이 미성숙하다고 생각해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려고 한다 하더라도 결국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허구성을 띄고 있기에 교사의 의견이 어떤 방식으로든 개입될 수밖에 없다. 이에 교사는 청소년들에게 정치적 사안을 가르칠 때 교사의 강압이 느껴지지 않게 청소년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이때 정치적으로 서로 다른 입장을 전혀 공개하지 않으며 침묵으로 일관하는 중립이 아닌, 청소년이 자신의 주체적 사고와 정치 의견을 표출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게 정치적 사안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며 꾸준히 질문을 하는 역할을 지켜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교사도 청소년들을 위한 실질적 교육을 가르칠 수 있고, 학생들 또한 정치 분야에 대해 원하는 논의와 토론을 진행시킬 수 있다. 현재 교육은 정치적 중립성이란 개념의 허구성을 깨닫고 이를 무리하게 지키기보단 교육을 어떻게 현실적으로 바꿀 수 있는지, 사회적 문제를 어떻게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지를 논의해야 한다.

  1. 교육기본법 제16  [본문으로]

정치하는 청소년을 위하여

 

펭로시

헌법재판소가 올해 2020년 4월 23일 재판관 6:3의 의견으로, 초중등학교의 교육공무원이 정치 단체의 결성에 관여하거나 이에 가입하는 행위를 금지한 국가공무원법과 초중등교육법이 헌법을 위반했다는 결정을 선고했다. 2014년 헌법재판소가 국가공무원법 제65조 제1항 중, “국가공무원법 제2조 제2항 제2호의 교육공무원 가운데 초중등교육법 제19조 제1항 교원은 그 밖의 정치단체 결성에 관여하거나 이에 가입할 수 없다.” 라는 조항을 합헌 결정한 것과는 확실히 달라진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2014년과 2020년에 걸쳐 헌법재판소가 태도를 변경한 근간에는 ‘교사의 정치적 중립’, 나아가 ‘공무원의 정치참여’에 대한 여론의 변화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009년 6월 1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1만 6172명이 ‘6월 민주 항쟁의 소중한 가치가 더 이상 짓밟혀서는 안 된다’는 제1차 시국 선언을 발표한 이후부터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교사의 정치적 중립’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공식적으로 혹은 비공식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일례로 올해 헌법재판소에서 국가공무원법 65조 1항 등이 위헌 결정되었지만, 공무원과 초중등 교원 등은 정당의 발기인이나 당원이 될 수 없다고 규정하는 정당법은 합헌 결정 [각주:1] 되었는데, 이에 한 쪽은 아직까지 교사의 완전한 정치적 자유가 보장되지 못했다는 우려를 표하기도 하고, 또 다른 한 쪽은 헌법재판소의 국가공무원법 65조 1항 등의 위헌 결정 그 자체에 대해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은 올해부터 실시되는 만 18세 선거권과 맞물려 그 논의가 더욱 과열되고 있는 추세이다. 교사와 학생의 정치 참여는 지금까지 학교 내에서의 ‘정치’를 배제해왔던 학교와 사회 입장에선 놀랍고도 당황스러운 일일 것이다. 필자는 <정치하는 청소년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이후 이어질 교사의 정치적 중립에 관한 인터뷰와 만 18세 선거권 논평을 보다 독자가 관심을 갖고 읽을 수 있도록 미국, 일본, 한국의 법제 비교를 토대로 ‘정치적 중립’에 관해 논의해보려고 한다.

 

우리나라 국가공무원법은 광복 후 일본공무원법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일본공무원법은 미국 해치법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해치법(The Hatch Act)은 1938년 민주당이 고용촉진부(Work Progress Administration) 공무원을 중간선거(midterms) 때 동원했다는 의혹이 불거지며 뉴멕시코를 대표하는 민주당 보수파 칼 해치 상원의원이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을 강제하는 법안을 발의하여 FDR에서 1939년 조인된 것으로, 대통령이나 부통령처럼 명시적으로 정치적 역할을 하지 않는 연방정부 구성원들이 정치적 활동에 관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각주:2] 이와 같이 엽관주의 [각주:3] 를 배제하려는 해치법의 의도는 일본공무원법에 고스란히 녹아들게 되었고, 일본공무원법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국가공무원법도 해치법의 기본 의도를 따르게 되었다. 이렇듯 한국, 미국, 일본의 국가공무원법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고 할 수 있으며 미국과 일본의 국가공무원법을 둘러싼 논의와 방향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정치사회가 현재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1) 교사의 정치적 중립과 그 방향

 

미국에서 공무원은 시민으로서 수정헌법 제1조에 규정된 ‘종교, 언론, 출판, 평화적 집회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 제한은 고용인인 정부에 대해 피고용인으로서의 관계에 의해 규율된다. 따라서 교원의 표현은 형사 처분이 아닌 교육위원회에 의한 징계 처분으로 제한될 수 있다. 이때의 제한은 일반적으로 정부의 공공서비스 수행이라는 이익과 공무원의 표현의 자유의 이익을 비교형량하여 정부 이익이 더 클 때 정당화된다. (●●●) 1993년 개정 해치법에서는 제한되는 일부활동 [각주:4] 을 제외하고, 정치적 활동이나 선전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있음을 규정하였다. (●●●) 미국에서 교원의 학교 안에서의 표현을 직접적으로 보장하기 시작한 판례는 Tinker v. Des Moines Independent Community School District(1969년)판결이다.

 

수정헌법 제1조의 권리는 학교라는 환경에서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적용되는 특성을 갖는다. 학생과 교사 모두의 언론과 표현의 자유라는 헌법적 권리는 교문을 들어서면서 포기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표현에 대한 주의 금지가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소수의 관점을 대했을 때의 불편함과 불쾌감 이상의 조건이 필요하다. 검은 완장 착용은 학교 운영을 방해하거나 다른 사람의 학업을 방해하지 않았다. [각주:5] [각주:6]


해당 판결은 정치적 의견을 나타내는 상징을 부착한 학생이 정학당한 사건에 대한 판결로, 미국 연방대법원은 학교 안이라고 해서 학생의 헌법상 표현의 자유가 제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한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표현을 제한할 때에는 불편함과 불쾌감 이상의 조건이 필요하며, 물리적으로 학교운영을 방해하거나 다른 사람의 권리와 충돌하는 경우 등이 그 조건에 해당한다. 또한 학교에서 표현의 자유는 교사와 학생 모두에게 적용됨을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학교 안에서 교원의 정치적 표현은 시민의 헌법상 권리로 보장되며, 그에 대한 제한은 학생 교육이라는 공교육의 목적을 수행하는데 직접적으로 방해가 되는 경우에 한해서 가능하다. [각주:7]

 

 

[각주:8] ">
 [The Hatch Act-Permitted and Prohibited Activities for Most Federal Employees] [각주:9]

                 


위의 표는 개정 해치법의 허용과 금지조항의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이처럼 미국은 공무원이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여 정치적인 행위를 하는 것은 금지하지만 개인의 정치적 표현에 대해서는 관대한 입장을 취한다. 그러나 한국은 헌법 제7조의 제1항,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대한 봉사자이며, 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와 “공무원의 신분과 정치적 중립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된다.”에 의거하여 공무원의 직무에 초점을 맞춰 정치적 표현과 행위에 있어서 포괄적으로 규제한다. 홍정림(2015)는 이와 같은 차이가 미국은 시민의 권리로서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지만, 한국은 교원의 표현의 자유가 헌법상 시민의 권리로 보장되기보다 교원의 지위에 있다는 이유로 제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한국의 헌법재판소가 공무원의 의무를 직무의 내•외를 불문하고 공무원이라는 신분을 보유하는 한 당연히 부담해야 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기 때문에 교원의 표현에 대해 직무 내•외를 구분하여 제한의 범위를 달리 적용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각주:10]


물론 우리나라의 국가공무원법이 미국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이 둘의 명시적 표기가 유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직무행위 중에는 정치적 활동에 관여할 수 없다.’는 미국의 개정 해치법 내용은 우리나라에도 해당되는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정치적 주제에 관해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데 반해, 우리나라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맥락을 달리한다. 이와 같은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미국의 국가공무원법이 정치적 행동에 있어 공무원의 지위 남용에 경각심을 갖고 시민의 권리를 일부 제한하는 것이라면 한국의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이라는 직책의 중함을 인지하고 그 사회적 파급력을 우려하여 포괄적으로 제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적 표현에 대해서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수밖에 없다. 홍정림(2015)이 제시한 세월호 관련 교사선언에 관해서도, 미국은 이를 인터넷 매체를 통해 각자의 의사를 표현한 개인적 의사표현이 집합적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보겠지만, 한국은 사회적 파급력을 고려하여 더 엄중히 사안을 고려할 것이다. [각주:11]

위에서도 강조했듯이 우리나라의 국가공무원법은 ‘포괄적’으로 제한하기 때문에 교사의 정치적 표현이 과도하게 제한되는 측면이 있다. 필자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교사와 정치적 논의를 할 수 없었다. 교사와 정치적 논의를 한다는 것은 매우 ‘이상하고’, ‘예외적인’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교사는 학생에게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말할 수 없었고 학생 또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수 없었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교사가 학교 안에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시 학생들의 정치적 성향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본다. 그러나 과연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것만으로 학생들의 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지는 의문이다. 오히려 필자가 우려하는 점은 학교에서 ‘정치’에 관해 논의하는 것을 마치 이상하고 예외적인 것으로 치부해버리면서 학생들을 정치와 유리시키는 것이다.

서울 영등포여고 교사인 조영선(2020)은 ‘교사가 무조건 찍으라고 해서 투표하는 18세가 얼마나 있을까? 학생들은 교사뿐 아니라 친구 등 누구의 말도 참고할 권리가 있다.’ [각주:12] 고 밝히며 학생들은 교사의 말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존재가 아님을 강조한다. 아주 어린 아이도 자신의 호오를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할 때 교사의 발언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학생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는 또한 ‘교사의 선거 개입’이 걱정된다면, 오히려 학생들에게 교사 의견을 눈앞에서 되받아칠 수 있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각주:13]
교사의 정치적 중립을 옹호하는 측면에서 우려하는 것처럼, 교사의 정치적 표현을 보장하는 것이 학생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강요하는 것으로 이행된다면 그것은 큰 문제일 테지만, 조영선(2020)이 주장하는 것처럼 교사의 발언에 비판할 수 있는 학교 환경이 조성된다면 충분히 해결 가능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결국 교사의 정치적 중립만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민주시민교육이 달성되기 어렵고 교사의 정치적 중립을 넘어서 교실의 정치화까지 실현되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다.

 

2) 교실의 정치화를 통한 민주시민교육

 

우리는 앞서 미국의 국가공무원법과 한국의 국가공무원법을 비교하여 ‘교사의 정치적 중립’에 관해 숙고해보았다. 그리고 민주시민교육을 위해선 교사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교실의 정치화까지 바라보아야 함을 파악했다. 필자는 교실의 정치화를 능동적으로 주도한 일본의 사례를 소개하기에 앞서, 미국 해치법의 영향을 받은 일본 국가공무원법에 관해 일본 내에서 어떠한 비평이 있었는지 제시하려고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일본의 방향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앞으로 한국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할지 고민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의 국가공무원법은 미국의 점령정치 때, GHQ [각주:14] 의 압력으로 법령이 생성되었다. GHQ의 압력에 인사원은 저항을 통해 GHQ의 최초 요구에서 한 걸음 물러나게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현재의 현행법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렇게 GHQ의 압력으로 인해 제정된 법은 헌법 21조에 따른 표현의 자유 보장의 중대한 위반과 본래 법률에 규정되어야 할 처벌을 행정입법인 인사원 규칙에 맡긴다고 하는 헌법 31조의 위반을 더불어 공무원의 인권 제한을 법률이 아닌 인사원 규칙에 포괄적으로 맡긴다는 헌법 31조의 위반(백지위임)의 이중 삼중의 위헌 소지가 크다 [각주:15]
고 센슈대학교수인 하레야마 카즈호(2013)는 역설한다. 즉, 미국에서 일본의 국가공무원법에 영향을 끼친 해치법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1993년 개정 해치법을 시행한 것처럼 일본에서도 국가공무원법에 대해 꾸준히 문제제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에 관하여 일본 법률은 <행정의 중립적 운영 확보와 이와 관련한 국민의 신뢰 유지>를 명시하여 정치적 행위금지의 목적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직결시켜 그 결과로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행위를 금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는 논리로 되어있다. 즉, 공무원의 정치활동 자유를 인정하면 필연적으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이 상실되어 <행정의 중립적 운영 확보와 이와 관련한 국민의 신뢰 유지>가 근본부터 흔들린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으로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성> 그 자체의 유지를 정치적 행위의 금지 목적으로 하는 한 금지되는 정치적 행위는 가능한 한 광범위한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된다. [각주:16]


하레야마 카즈호(2013)는 표현의 자유로서 보장되어야 할 정치적 행위와는 별개로 법에 의해 금지•제한되어야할 공무원의 정치적 행위에 있어선 어떤 부분을 생각할 수 있는지, 또 그 행위는 어떤 이유에 근거하여 어느 정도의 제약을 받아야하는 것인지가 남겨진 문제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 공무원의 정치적 활동이 금지•제한되어야 할 행위는, <행정의 중립적 운영의 확보>를 실질적으로 해친다고 인정되는 행위, 구체적으로 직무상의 지위나 권한을 이용하여 행하는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에 대해선 징계처분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형벌의 대상이 되는 것(가령, 국가공무원법•지방공무원법상의 제한은 아니지만, 공무원의 지위를 이용한 선거운동에 대한 처벌을 정한 공직선거법 239조의 2 제2항) 등을 지적한다. 최종적으로 그는 금지되고 제한되어야 할 정치적 행위의 유형과 이에 대한 제약의 내용 및 정도를 구체적으로 채워 나가는 것이 과제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고 밝히며, 공무원이 시민으로서 행하는 정치적 행위는 표현의 자유로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고 마무리한다. [각주:17]

이처럼 일본 내에서 국가공무원법에 의거한 정치적 중립에 대해 비판적 의견이 제시되는 가운데, 2015년 일본 정부는 우리나라에서 우려하는 교실의 정치화를 실현한다. 

 

이번 법 개정으로 고등학생도 유권자 자격을 갖게 됩니다. 실제 선거와 동일한 시기에 실제와 비슷한 투표용지를 사용해 투표해봅시다. 대표자를 뽑는 활동을 통해, 민주 정치가 우리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위의 내용은 2015년 일본 정부가 만들어 전국 고등학교에 보낸 선거교육 부교재에 나온 ‘모의선거’ 관련 내용이다. [각주:18]


우리나라에 입장에서 바라보면, 학교에서 ‘선거교육’을 한다는 것은 그 단어 자체로 생소할 것이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 ‘만 18세 선거권’, 이 모두를 통괄하는 하나의 주제는 바로 ‘교실의 정치화’와 관련된 것인데, 학교에서 ‘선거교육’을 하는 것은 정치를 교실 속으로 끌고 들어오겠다는 말과 다름없으며, 이는 교실의 정치화를 실현하겠다는 입장으로 비춰질 수 있다. 교실의 정치화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교사의 특정 정치적 사상이 학생들에게 주입될 수 있고 나아가 교실 정치장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그들에게 정치화된 교실은 하나의 싸움터이며 이념의 대립으로 교육의 원활한 진행에 방해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고선규 와세다 대학 시스템경쟁연구소 연구위원(53, 전 도호쿠대 교수)은 현시대의 학생들은 가치판단이 명확하고 가치 기준 또한 충분히 형성되어 있으며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이 어른들보다 낫기 때문에 교사의 사상 주입에 휘둘리는 사태는 거의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강조한다. [각주:19]

 

[일본 정부가 만든 선거교육 교재 표지] “우리가 열어가는 일본의 미래: 유권자로서 필요한 능력을 기르기 위하여”


일본에서 진행하고 있는 모의선거는 현실의 정치를 반영한다. 실제 정책과 정당을 모의선거에서 활용하여 선거 토론회를 진행한다. 학생들은 선거 포스터를 만들고 정견발표도 하며 정책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한다. 심지어 오이타현 교육청 안내문을 보면 정치인을 부를 수도 있다. [각주:20]
일본에서 모의선거를 진행하는 이유는 우리나라가 교실의 정치화를 우려하는 것처럼 편파적인 정치적 사고를 가진 학생들을 양성하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그들의 계기는 학생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주권자로서의 인식을 공고히 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만들고자 함이다.

서울휘봉초등학교 수석교사인 설진성(2019)은 교사가 정치적 기본권을 가진다면 민주시민 육성이라는 자신의 본분을 보다 충실히 이행할 수 있다고 본다. 정치문화 안에서 이방인처럼 그 존재가 사라진 교사는 민주시민교육이 요구하는 사회민감성과 민주적 의사결정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각주:21]
교사는 시의적인 정치적 논쟁들을 수업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학생들이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상호적 논의가 가능한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러한 환경이 조성되면 학생은 민주시민으로서 정치참여의 중요성을 깨닫고 다양한 정치적 의견을 접하면서 사고의 폭을 넓혀 정치 사안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함양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교사와 학생의 자유로운 정치적 발언을 보장한 교실의 정치화가 실현될 때, 우리는 진정한 민주시민교육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3) 마치며

 

교사의 정치적 중립은 가능한가? 나아가, 교실의 정치적 중립은 가능한가? 정영태(2010)는 정치적 자유권을 제한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한가에 대한 원초적인 의문을 제시하며, 조국(2012)은 오히려 교원들의 정치적 성향을 허용하여 능동적인 시민성을 발휘하게 할 때, 비로소 그때 교육의 정치적 중립도 유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노순일(2013)은 ‘학생 미성숙론’을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학생의 존엄과 가치를 부정하는 순종적인 신민을 양성하는 가치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역설했다. [각주:22]
교실 안에서 교사와 학생의 정치적 표현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해야 할지를 차치하고 교실이, 학교가 정치와 유리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는 ‘학생 미성숙론’과 ‘학생의 정치도구화’를 내세워 교실의 정치화를 우려할 수 있지만 사실 완전한 ‘정치적 중립’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정영태(2010)가 정치적 자유권을 제한하는 데 의문을 표한 것도 이러한 맥락이다. 일례로. 한국사 시간에 다룬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학생이 숙고하고 ‘마리몬드’ 회사를 알게 되어 위안부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SNS에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표현하고 운동하는 사례를 들 수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학생의 정치도구화가 발생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교실의 정치화가 교실을 각축장으로 만들 것이라는 우려에 필자는 미지근한 입장을 취한다. 이는 곧 정치가 아무 의미 없는 싸움이라고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교육의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가 교육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개인의 지적수준을 높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민주시민을 양성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우리가 정치가 더러운 것이고 서로 헐뜯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국민을 속이는 집단이 주도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더라도 결국 사회에 살고 있는 것만으로 우리는 정치적이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 양성하고 싶은 국민은 사회의 부조리에 순응하는 국민이 아닌, 민주적인 토론을 바탕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해결하려하는 국민일 것이다. 필자는 오히려 학생들과 교사에게 어떠한 정치적 표현도 허용하지 않는 것은 결국 정치는 더러운 것이니 가까이 가지 않아야 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국민으로서 우리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할 줄 알아야 하며 정치를 더러운 것이 아닌 민주주의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우리 삶 그 자체로 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붕당 정치의 폐해처럼 자신의 집단적 이익만을 주장하는 상황은 오히려 사람들이 다양한 정치적 발언을 접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매체에서 주어지는 자료만 받아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학교에서 정당연설회를 개최해보자는 한 교사의 발언 [각주:23] 은 눈여겨볼만 하다.

 


<참고자료>

1. 서강영, 『SNS를 통한 교사의 정치참활동에 대한 탐색적 연구』, 한국교원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9.

2. 설진성, 『민주시민교육과 교사의 태도』, 「교과교육235호」,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 2019;
http://webzine-serii.re.kr/민주시민교육과-교사의-태도/

3. 임수정 기자, <헌법재판소 “교원 정치단체 결성, 가입 금지 조항은 위헌”>, 2020-04-23;
https://www.yna.co.kr/view/AKR20200423131600004?input=1195m

4. 윤근혁 기자, <일본 문부성도 하는 ‘학생 모의선거’ 반대? 어이없다“>, 2020-01-13.;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252966

5. 조영선, <교실의 정치화가 걱정되신다고요?>, 2020-03-0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371

6. 홍정림, 『교원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과 그 한계-미국과 한국의 법제 비교 연구-』, 한국교원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5.

7. Jaime Fuller, , 2014-07-18;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the-fix/wp/2014/07/17/do-you-work-in-government-have-you-violated-the-hatch-act-lets-investigate/

8. [The Hatch Act_Permitted and Prohibited Activities for Most Federal Employees];
https://osc.gov/Documents/Outreach%20and%20Training/Posters/The%20Hatch%20Act%20and%20Most%20Federal%20Employees%20Poster.pdf

9.晴山一穂,『公務員の政治的行為の制限―国公法違反事件最高裁二判決の考察―』,自治総研通巻416号, 2013.

 

 

  1. 임수정 기자, <헌법재판소 “교원 정치단체 결성, 가입 금지 조항은 위헌”>, 2020-04-23; https://www.yna.co.kr/view/AKR20200423131600004?input=1195m [본문으로]
  2. Jaime Fuller, , 2014-07-18; https://www.washingtonpost.com/news/the-fix/wp/2014/07/17/do-you-work-in-government-have-you-violated-the-hatch-act-lets-investigate/ [본문으로]
  3.  [네이버 국어사전] 선거에 의하여 정권을 잡은 사람이나 정당이 선거에서 공을 세운 사람을 관직에 임명하는 정치적 방침; https://ko.dict.naver.com/#/entry/koko/d2025e7f0a694b809513fc010c25e423 [본문으로]
  4. ① 선거에 개입할 목적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자신의 권한 또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② 정치현금을 권유 또는 수령하는 것, ③ 정당을 대표하여 공직후보에 입후보하는 것 등. [본문으로]
  5. Tinker v. Des Moines Independent Community School District, 393 U.S, 503. [본문으로]
  6. 홍정림, 『교원의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한과 그 한계-미국과 한국의 법제 비교 연구-』, 한국교원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5, pp.97-104. [본문으로]
  7. Loc.cit. [본문으로]
  8. &amp;nbsp;더 자세한 정보는 다음 문서를 참조.&amp;nbsp;;https://osc.gov/Documents/Outreach%20and%20Training/Posters/The%20Hatch%20Act%20and%20Most%20Federal%20Employees%20Poster.pdf&amp;nbsp; [본문으로]
  9.  더 자세한 정보는 다음 문서를 참조. ;https://osc.gov/Documents/Outreach%20and%20Training/Posters/The%20Hatch%20Act%20and%20Most%20Federal%20Employees%20Poster.pdf  [본문으로]
  10. 홍정림, ibid., p.109. [본문으로]
  11.  홍정림, idid., p.110. [본문으로]
  12. 조영선, <교실의 정치화가 걱정되신다고요?>, 2020-03-05;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371 [본문으로]
  13. Loc.cit. [본문으로]
  14. 연합국(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 [본문으로]
  15. 晴山一穂,『公務員の政治的行為の制限―国公法違反事件最高裁二判決の考察―』,自治総研通巻416号, 2013, p.4. [본문으로]
  16. ibid., pp.7-8. [본문으로]
  17. ibid., pp.23-24. [본문으로]
  18. 윤근혁 기자, <일본 문부성도 하는 ‘학생 모의선거’ 반대? 어이없다“>, 2020-01-13.; https://n.news.naver.com/article/047/0002252966 [본문으로]
  19. 위 기사. [본문으로]
  20. 위 기사. [본문으로]
  21. 설진성, 『민주시민교육과 교사의 태도』, 「교과교육235호」,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 2019; http://webzine-serii.re.kr/민주시민교육과-교사의-태도/ [본문으로]
  22. 서강영, 『SNS를 통한 교사의 정치참활동에 대한 탐색적 연구』, 한국교원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9, pp.20-21. [본문으로]
  23. 조영선, 위 기사. [본문으로]

작년 말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선거연령이 만 18세로 하향되었습니다. 18세 선거권 도입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선거권을 갖기에 청소년은 미성숙하다.', '정치교육을 통하여 청소년의 사고 능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교육 현장에서 정치적 중립성이 지켜져야 한다.' 등 청소년의 정치적 주체성과 관련된 많은 논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번 호에서 이러한 주장들이 청소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우리 사회에서 청소년의 정치할 권리가 얼마나 보장되고 있는지 이야기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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