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공정성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특히 뜨겁다. 입시 비리, 채용 비리 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사람들은 공정하지 못한 절차에 대해 분노했다. 국민권익위원회에 따르면 올해 전체 민원의 약 50%가 '2030세대' 민원이었고 그 중 대부분이 '교육, 시험, 채용 공정성'에 대한 내용이었다.[각주:1]


  사람들은 입시, 채용의 절차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만들어야 한다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절차의 공정성을 보장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에는 “절차의 공정성이 보장되면, 개인이 노력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라는 전제가 숨어 있다. 그러나 이는 한편으로 사회에 존재하는 구조적이고 체계적인 불평등을 무효화하는 것은 아닐까? 왜 사람들은 공정성이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을까? 그리고 정의는 공정성을 넘어 어떠한 영역을 포함해야 하는가?

 

1. 귀속주의 대안으로 등장한 학력주의

 

  공정성 담론이 대두된 사회적 배경을 파악하기 위해 과거 학력주의의 등장부터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학력주의는 개인을 평가할 때 형식적인 학력을 제일 중시하는 제도이다. 여기서 학력은 “학교 교육 등의 학습이나 훈련에 의하여 획득한 지적 적응능력[각주:2]”과 “학교를 다닌 이력[각주:3]” 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최근 들어 흔히 ‘sky 서성한 중경외시’처럼 대학 간의 서열을 나누고, 보편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명문대를 가야 한다고 여기는 풍조를 보면 학력주의는 두 번째 의미에 더 부합하는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학력주의는 주로 부정적으로 여겨진다. 학력주의는 과도한 입시 경쟁을 유발하는 주범이며, 개인의 능력, 노력, 실력 등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러한 학력주의가 사람들에게 신분에 상관없이 노력하면 계층 이동을 할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을 주었다.


  학력주의는 일종의 신분체계와 연결된 귀속주의에 대한 사회적 대안이었다. 청동기 시대에 최초로 계급이 만들어진 이후 갑오개혁 때까지 우리나라는 줄곧 신분제 사회였다. 혈통주의적 귀족 중심 사회를 바탕으로 부모의 신분은 자식에게 대물림되었고, 이러한 귀속적 요인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홍길동이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도술을 부려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신분제 사회에서는 아무리 개인이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어도 신분 상승에 큰 제약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 속에서 시험 제도의 등장은 하나의 희망이었다. 고려 시대에는 일종의 학력 인증 시험인 과거 제도를 도입하여 시험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신분제 등 귀속적인 요인을 벗어나 사회 이동을 할 수 있는 방법이 등장한 것이다. 결국, 학력주의는 개인의 능력과 성취에 따라 사회 이동을 통해 엘리트로 성장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다.[각주:4]


  이러한 풍조는 현대까지 계속 이어져 학력주의와 능력주의의 기초가 되었고, 사람들은 노력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최근에는 학력 취득에 따른 불평등 격차가 점차 심해지면서 학력주의가 과열되고 학력 인플레이션 현상이 심화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간의 소득 격차가 과도하게 벌어지는 등 불평등 격차가 심해지면서, 학력은 더욱 중요한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과거보다 대학에 입학하는 사람의 수가 증가하면서, 명문대 입학이 항상 성공을 보장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학력주의가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대학 간판은 성공하기 위한 기본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사회는 이른바 스펙 경쟁처럼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더불어, 이러한 학력주의는 과거에 능력, 노력, 실력과 같은 다른 요인보다 비교적 계량적이고 객관적이라고 여겨졌다. 2000년대 중반, 학력주의가 더욱 과열되면서 학력 위조가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 때, 특히 문화 예술계에서 유독 학력 위조 사건이 많이 발생하였다.[각주:5] 왜 하필 문화 예술계였을까? 예술 분야는 다른 분야보다 특히 더 객관적이고 계량적인 평가가 어렵다. 분야 자체에 표준화된 평가 기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19세기 후반 인상주의가 유행하였고, 이에 따라 모든 예술 작품을, 인상주의를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이 또한 공정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예술 분야에서는 개인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 따라서 실력 검증 시스템을 개발하는 대신 학력과 같은 간판을 더욱 중시하게 되었다. 반면, 현장에서 직접 보고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단순한 능력을 요구하는 분야에서는 학벌이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결국, 학력은 정량화되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에게 비교적 객관적인 평가 기준이라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이처럼 학력주의는 귀속적인 요인을 넘어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한 수단이자 객관적인 평가 기준의 기능을 했다. 그러나 학력주의가 점차 과열되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높은 학력이 언제나 탁월한 능력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학력과 실제 능력 사이에 큰 괴리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학력은 일단 취득하기만 하면 능력과는 상관없이 소유자에게 지속적으로 방대한 특권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불합리하다. 이에 점차 사람들은 학력이 아닌 능력으로 평가하는 사회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학력주의의 폐해 중 특히 학력과 능력 사이의 간극에 주목하여, 같은 원리에 대응하지만 학력주의보다 비교적 더 넓은 개념인 능력주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2. 학력주의를 포괄하는 능력주의의 등장

 

  최근에 tvn에서 방영한 ‘스타트업’이라는 드라마에서는 능력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극 중 한국의 실리콘밸리인 샌드박스 회사에서는 학력과 스펙을 제외한 시험으로 인재들을 선발한다. 극 중 고졸 출신인 서달미는 회사의 취지에 맞게 한 해의 대중의트랜드를 잘 분석하여 스타트업 대표로 뽑히게 된다. 스타트업 팀원들은 이러한 고졸 출신 대표를 불신했지만 그는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바탕으로 모두에게 인정받는다. 고졸 출신 사람도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람들이 학력주의를 넘어 능력주의를 갈망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하고,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게 하며, 능력에 따라 성과를 배분한다[각주:6]는 능력주의의 세 가지 명제를 충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귀속적인 요인과 학력을 넘어 자신의 뛰어난 능력과 노력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는 우리에게 매우 긍정적인 인상을 준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사람들은 능력주의를 맹신하고, 이것이 잘 실현되도록 절차적 공정성을 중시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현재 다양한 불평등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이유는 능력주의의 원칙 그 자체보다 그 원칙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하는 배경에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공평한 기회를 제공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믿는다. 즉 공정함이 곧 정의라고 여긴다. 얼핏 보기에 이러한 주장은 타당해 보인다.

 

- 능력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분명 능력주의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경쟁하고 노력해서 승리한 사람을 뽑는게 뭐가 문제야?’ 하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능력도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현실은 녹록지 않다. 사람들이 믿고 있는 능력주의마저 귀속주의와 학력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한다. 능력 또한 귀속적인 신분처럼 불평등한 배경의 산물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흔히 자격시험, 국가고시 같은 표준화 시험은 능력주의의 산물인 것처럼 보인다. 객관화되고 수량화된 평가 기준으로 개인의 능력을 평가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특정 집단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표준화 시험인 수능도 얼핏보면 능력주의의 산물로서 기회의 공정성을 잘 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잘사는 집 아이가 못사는 집 아이보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은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부모의 영향력은 경제적인 차원을 넘어 다양한 분야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저학위 노동자들은 일터에서 높은 수준의 지식을 요구받지 않아 학벌에 대한 관심이 적고, 중산층에 비해 계층 하강 위기 의식이 낮아 자녀 교육에 대한 열망이 낮다.[각주:7] 학업성적의 불평등에 대한 다양한 연구를 선도한 교육학자 콜먼은 학업성적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학교보다 가족이며, 가족에 의한 학업성적의 불평등은 학교에서 해결하기 어려움을 발견했다.[각주:8] 이후 콜먼의 후속 연구들은 가족의 높은 사회, 경제적 지위가 자녀가 양질의 문화자본과 사회자본을 축적하게 하고, 이것이 자녀의 학업 성취도를 높인다고 설명했다.[각주:9]  우리나라도 PISA 자료에 따르면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가 자녀의 학업 성취도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각주:10]


  결국, 사회적 우연성은 능력 취득의 과정에도 막대하고 방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사실상 사회적 이동이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능력주의 신화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도록 두 눈을 가려버린다. 불평등한 배경에서 입시 경쟁에 한 차례 패배한 사람들은 취업 경쟁에서도 불리하다. 반면 상위층의 사람들은 능력주의 시스템을 통해 자신들의 지위를 견고하게 하고 자녀에게 물려줄 방법을 찾는다.[각주:11]  표준화 시험은 능력에 따라 사람들을 선발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상위층 사람들을 유리하게 만든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여 능력은 현대판 귀족 신분처럼 또다시 공고한 계급의 대물림 수단이 된다. 


  한편 현재의 능력주의는 완벽하지 않고 따라서 기회를 평등하게 제공한다면 위의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한 기회 균등 전형의 공정성에 대해 논의하며, 이는 능력 이외의 것으로 지원자들을 평가하기 때문에 역차별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이와 연관 지을 수 있다. 다양한 문제의 발생 원인이 능력주의의 원칙 자체에 있기보다 이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배경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가족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차원을 포함하여 학업을 중시하는 가족의 분위기, 풍부한 관심과 자원, 영양 등을 모두 아우른 공평한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까? 더불어 천부적인 재능은 어떻게 볼 것인가? 어떻게 보면 사실 타고난 재능은 천부적 우연성에 따라 얻게 된 행운이다. 결국, 사실상 완벽한 능력주의는 불가능하다. 

- 더욱 좌절할 수 밖에 없는 패자 


  더불어 능력주의는 패자에게 더욱 가혹하다. 능력주의는 승자에게 마땅히 성공을 누릴 수 있는 힘을 준다. 분명 그들이 얻게 된 성취도 귀속적인 요인에 자유롭지 않았지만, 그들은 능력주의 신화에 눈이 멀어 오직 자신의 노력과 능력만으로 모든 것을 얻게 되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사고는 패자를 차별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사람들은 하위층 사람들이 가난한 이유는 마땅한 노력을 하지 않아서,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직업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비난한다. 즉, 능력주의는 구조적인 맥락은 무시한 채 모든 것을 전부 개인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다. 결국, 패자는 모든 책임을 떠안고 모멸감과 좌절감을 느낀다.


  한편 귀속주의 사회에서 하위층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가 온전히 자신의 탓이 아님을 안다. 반면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하위 계층 사람들이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사회적 맥락의 짐까지 짊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능력주의에서 불평등은 ‘능력’ 속에 숨어들어 사람들의 시선을 가려버린다는 점에서 더욱 위험하다. 이는 패자를 더욱 좌절하게 하며, 빈부격차와 양극화 문제를 더욱 심화시킨다. 절차적 공정성에만 집중하고, 승자가 패자를 업신여기고 차별하는 사회가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

 

- 사회적 이동이 가능한 사회 vs. 계층 간의 격차가 완화된 사회?


  마지막으로 능력주의는 ‘사회적 이동성’, 즉 계층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절차에만 초점을 맞춘다. 계층 간의 격차가 완화된 사회는 논외 대상이다. 예를 들어, 능력주의는 상위 계층과 하위층 간의 격차가 무한히 벌어진다고 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절차의 공정성이 보장되고 노력한다면 충분히 이 격차를 뛰어넘을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즉 능력주의는 불평등 그 자체보다 사회적 이동성에만 주목한다. 이러한 생각은 누군가는 분명 하위층에, 누군가는 상위층에 있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왜 소수만이 경쟁에서 살아남고 실패한 사람은 마땅히 차별받아야 하는가. 계층 간의 격차를 완화하라는 대신, 개인에게 노력해서 계층 상승을 하라는 요구는 수많은 ‘패자’들을 낳는다. 


  이처럼, 사회적 이동성에만 주목한 정책은 불평등을 직접 다루지 않아 계층 간의 격차와 양극화 문제를 간과한다는 한계를 갖는다. 실제로 스웨덴과 네덜란드에서는 교육 평등을 달성하기 위해 교육 기회 균형 제도를 마련했다. 그러나 사회경제적 출신 배경과 교육 성취의 연관성이 줄어들지 않아 다른 전략을 택했다. 사회보장체제를 통해 근본적으로 계층 간의 격차를 줄여 교육 평등에 한 발짝 다가간 것이다.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동성뿐만 아니라 격차 완화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3. 공정성을 넘어, 정의는 어떠한 영역을 포함해야 하는가?

 

  귀속주의의 대안으로 학력주의가 등장하고, 다시 학력주의를 포괄하는 능력주의가 등장하면서, 사람들은 누구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에 절차적 공정성을 곧 정의라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공정성을 강조하는 능력주의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를 안고 있다. 능력마저 귀속적인 요인에 자유롭지 못하며, 승자는 성공이 온전한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칭송받고 패자는 비난받기 때문이다. 더불어 능력주의는 계층 간의 이동 가능성에만 주목하여, 상층과 하층 계층 간의 격차가 점차 커지고 있는 현실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절차적 공정성만으로는 정의로운 사회를 보장하지 못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상층 계층이 되기 위해, 다른 사람과 끊임없이 경쟁하고 있는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내가 성취한 것은 온전한 나의 노력의 산물인가? 또 왜 누군가는 반드시 패자가 되어야 하는가? 우리가 학력주의 사회를 의심해왔듯이, 능력주의를 맹신하는 것은 위험하다. 절차의 공정성뿐만 아니라 사회에 내재된 불평등, 차별에 주목하여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꿈꿔야 한다. 공정성을 넘어 정의는 어떠한 영역을 포함해야 하는가? 목맬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마다의 공정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일치하긴 하는 것일까? 공정하지 못한 것이 정말 선발 과정뿐이었을까? 어쩌면 공정성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러셀

  1. 국민권익위원회, <‘교육·채용 등 불공정’ 청년의 목소리 들어 정책으로 실현한다>,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20.03.26., www.korea.kr/news/pressReleaseView.do?newsId=156382095 ,  2021.01.22. [본문으로]
  2. 표준 국어 대사전, <학력>, 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 2021.02.05. [본문으로]
  3. 표준 국어 대사전, <학력>, stdict.korean.go.kr/search/searchResult.do, 2021.02.05. [본문으로]
  4. 공석기, <학벌주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11, 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68931, 2020.12.26. [본문으로]
  5. 정진호, <[정진호]문화예술계 학력위조는 구조적 문제>, ≪아이뉴스≫, 2007.08.15., inews24.com/view/277644, 2021.02.05. [본문으로]
  6. 마이클 센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12.01., p.4 [본문으로]
  7. 신명호,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나? : 사회계층 간 학업성적의 격차와 양육관행」,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 2010, p. 50~58 [본문으로]
  8. 오성철 외 6인, <대한민국 교육 70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2015.12.19., p. 284~300 [본문으로]
  9. 상게 논문 [본문으로]
  10. 장상수, 「한국 사회의 계급 이동」, 『한국사회학』 32집 2호, 1998, p.367~393 [본문으로]
  11. 마이클 센델, <공정하다는 착각>, 와이즈베리, 2020.12.01, p.4 [본문으로]

 

1. 들어가며 : 다른 종류의 의문


  2020년 KBS 신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2020년 사회에서 필요한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 공정성이 20.2%로 1위로 꼽혔다.[각주:1]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의 시정 연설과 2020년 청년의 날 맞이 연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키워드 역시 ‘공정’이었다.[각주:2]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지표가 말해주듯, 확실히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 중심부에 있는 핵심 키워드는 ‘공정성’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공정성’이 크게 화제 되었던 맥락을 돌이켜보면 썩 유쾌한 기억들은 아니었던 듯하다. ‘공정성’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할 때마다 늘 사회적으로 큰 논란과 분열을 일으킨 사건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공정성에 관한 논란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에는 2019년의 ‘조국 사태’와 2020년의 ‘인국공 사태’가 크게 기여했다.

 

  두 사건은 각각 ‘대입’과 ‘취업’이라는 다른 의제를 다루고 있는 독립된 사건처럼 보이지만,사실 그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모두 특정 집단(대학 혹은 인천국제공항사)에 진입할 자격이 있는 누군가를 선발하는 절차에 존재하는 불공정성에 대한 논란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여론과 언론이 대입 수시 학생부 종합전형의 비리를 문제 삼고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며 ‘공정하지 못한’ 선발 과정을 비판했으며, 두 사태 전후로 ‘공정성’에 관한 첨예한 논쟁을 주고받는 소위 ‘공정성 담론’이 등장했다. 인재 선발 과정에 있어 현재의 절차가 공정한지, 어느 것이 더 공정한지에 대한 투쟁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물론 인재 선발 과정의 공정성이 중요한 가치인 것은 맞지만, 나는 여전히 많은 의문이 든다. 공정성 담론이 이제껏 이끌어왔던 ‘무엇이 더 공정한가?’를 넘어선 다른 종류의 의문들 말이다. 왜 공정성 논란이 촉발된 계기가 하필 ‘조국 사태’, ‘인국공 사태’였을까? 우리는 왜 이토록 공정성에 집착하는 수준으로 목맬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마다의 공정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일치하긴 하는 것일까? 공정하지 못한 것이 정말 선발 과정뿐이었을까? 어쩌면 공정성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이 글은 이러한 조금 다른 종류의 의문에서 출발한다. 공정성이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세태에서, 어쩌면 우리가 진정 고민해보아야 할 것은 ‘공정성’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결국 공정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단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결국 질문하고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공정성을 목놓아 외침으로써 우리가 궁극적으로 살아가고 싶은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2. 우리 사회의 ‘공정성 담론’


  런던 올림픽의 신아람 선수, 소치 올림픽의 김연아 선수 경기와 같이 스포츠는 종종 ‘불공정’ 심판 논란에 휩싸이곤 한다. 국무총리 산하의 ‘공정’거래위원회는 부당한 불공정 거래 행위를 규제하고 소비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공정성’은 특별히 어느 영역에만 한정된 가치가 아니다. 모든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가치이기 때문에 공정성이 논란이 되는 영역 역시 수없이 많다. 불공정 심판·불공정 거래·불공정 계약 등, 하다못해 가위바위보 승부조차도 불공정하다며 논란이 일 수 있을 정도로 ‘공정’의 영역은 광범위하다. 그렇다면 질문해볼 수 있지 않을까? 공정성이 개입되는 하고 많은 영역 중에, 왜 하필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만이 첨예한 ‘공정성 담론’을 등장시킬 정도로 논란이 되었을까?


# 왜 하필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인가? 

 

  ‘왜 하필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였는가?’를 질문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각 사건을 꿰뚫는 의제가 ‘대입’과 ‘취업’임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입과 취업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중요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연해 보이는 것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질문은 왜 조국 사태(대입)였느냐, 왜 인국공 사태(취업)였느냐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거나 정규직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입과 취업의 성공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결국 대입과 취업도 공정성과 마찬가지로 수단적 가치인 셈이니, 중요한 것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대입과 취업, 그리고 이것들의 공정성에 목매는가? 

 

# ‘대입’과 ‘취업’, 그리고 안정적인 생활  

 

2015년 2월, 취업난을 풍자하는 연세대 학위수여식의 현수막(출처: 한겨례, 사진에 연결된 링크)

  “연대 나오면 모하냐… 백순데…”

  2015년 2월 말, 연세대 졸업식 날 붙은 현수막이 화제가 되었다. 유머로 소비되었지만, 속뜻을 살펴보면 씁쓸하기 그지없다. 대학이 매우 중요한 한국 사회이지만 명문대를 나와도 취업을 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해당 현수막의 의미는 드라마 SKY캐슬에서 예서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대학이 ‘서울의대’였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의대와 같이 상대적으로 고소득이나 안정성을 보장받는 치대·한의대·교대 등이 입시에 선호되는 것은 대입 이후에도 취업이라는 중요한 관문이 있으며, 양자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수 학부나 과가 아니더라도, 소위 ‘명문대’라고 여겨지는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일수록 대기업과 전문직 취업률은 높아진다. 결국 ‘어떤 대학에 들어가느냐’가 중요한 이유는. ‘어떤 직장에 들어가느냐’를 결정짓기 때문인 것이다.

 

  수단은 다를 수 있어도, 모든 사람의 목적은 결국 같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누구나 경제적·사회적으로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안정된 의·식·주 생활이 보장된 조건 하에서 자신이 바라고 계획한 대로 삶을 영위하고 싶어 한다. 당장 끼니를 해결할 수 없거나 옷을 사 입을 수 없는 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이다. 또한 살고있는 집 혹은 직장에서 몇 년을 주기로 쫓겨나며 그럴 때마다 다른 집과 직장을 알아보아야 하는 생활을 원하는 자 역시 누구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계획한 대로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이 경제적 요소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 ‘취업’, 그 일자리를 보장해주는 대표적인 수단이 ‘대학’이다.

 

  불행한 점은 경쟁과 능력주의 담론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 특히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이 모두에게 허락되기 힘들다는 점에 있다. 누군가는 전월세 계약 기간이 끝나면 살던 집에서 나가야 하고, 누군가는 고용 기간이 끝나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거나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에 뛰어들어야 한다. 실제로 2019년 한국노동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상위 10% 집단이 전체 계층 소득의 절반 이상(50.6%)을 가져가고 소득불평등 악화속도도 매우 빨라지는 등 소득 양극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양상을 보여준다.[각주:3]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임금 격차도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각주:4]  점점 더 경쟁이 격화되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과 위계화가 존재하고 대학 서열이 이 위계화와 이어지는 사회에서, 모두가 원하는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자 거의 유일한 길은 결국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대기업 정규직)에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공정성이 논란이 된 것은 필연적으로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입’과 ‘취업’에 성공하는 것은 ‘안정적인 생활’이라는 목적을 이룩하는 가장 빠른 길이자 거의 유일한 길이기에, 우리 사회에서 ‘정도(正道)’라고 여겨진다.

# 우리가 공정성에 목매는 이유

 

  우리가 그 무엇보다도 공정성에 목매고 공정성이 가장 절박한 의제가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상황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대표적으로 입시와 취업)라도 ‘공정’해야 우리의 최종 목적인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공정성에 집착하고 절박해진다는 것은 안정적인 삶을 살기가 그만큼 힘들고 절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도의 공정성은 자본주의 치하 능력(노력)주의 담론과 맞물려 시너지를 일으킨다. 더 나은 삶을 보장해줄 수 있는 ‘제도’가 투명하고 공정하기만 하다면, 개인의 ‘노력’으로 못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능력(노력)주의 담론에 따라 개인 노력의 정당한 결과를 보장하기 위한 공정성이라는 가치는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그리고 공정성 담론, 특히 대입과 취업 제도에서의 공정성을 외치는 목소리는 다시 누구나 노력만 하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더 나아가서는 계층 상승을 할 수 있다는) 능력(노력)주의 담론을 생산한다. 

 

3. 공정성 담론의 한계 


  왜 하필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였는지, 왜 공정성에 그리도 목매는지에 대한 질문은 어느 정도 해결한 듯하다. 결국 대입과 취업,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목소리 뒤에는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절박한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대입과 취업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중요성이, 대입과 취업 제도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현 한국 사회 ‘공정성 담론’의 정당성을 바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목적이자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안정적인 생활’인데, 이것이 대입과 취업 제도의 절차의 공정성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공정성 담론의 한계는 명백히 드러난다. 

 

# ‘공정성’ = ‘특정 집단 진입 제도의 공정성’?

 

  앞서 이야기한 대로, 공정성은 가위바위보 게임 하나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 매우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가치이다. 그런데 현재의 공정성 담론을 살펴보면 공정성이 논란이 되는 영역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특정 집단 진입 제도’의 공정성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대입’과 ‘취업’을 다른 말로 바꿔보자. 대입과 취업은 각각 ‘입시(入試)’와 ‘입사(入社)’라는 말로도 부를 수 있다. 이 ‘들 입(入)’ 자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는 현재의 공정성 담론이 특정 집단(특히 상위권 대학과 정규직 일자리 같은 높은 집단)에 ‘진입(進入)’하기 위한 제도에 한정한 좁은 논의라는 점을 시사한다. 언론과 여론의 넘쳐흐르는 담론 속에서 무엇이 공정한지 평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오직 특정 집단 진입 절차였다. 정시/수시(학생부 종합전형) 논란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논의 모두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결국 상위권 대학과 정규직 직장에 진입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를 어떻게 더 ‘공정하게’ 선발할 것인가가 논의의 전부였던 것이다.


  현재의 공정성 담론이 내포하는 ‘공정성’이 매우 좁은 의미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면, 그 다음 단계를 반드시 성찰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사회의 공정성 담론이 이끄는 대로 특정 집단에 진입하기 위한 제도(대입·취업 제도)가 공정하기만 하면, 정말로 우리 사회는 ‘공정’해지는 것일까?


  ‘공정성’은 ‘공평하고 올바름’을 의미하며, 기본적으로 공익 혹은 공동선, 즉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고 평등하며 인간적 면모가 담보된 도덕·윤리의 영역과 밀접한 가치이다.[각주:5] 즉, 공정성이라는 가치가 그 값을 다하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고려해볼 때, 제도의 공정성을 논하려면 그에 앞서 그 제도에 모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사회 구조가 반드시 우선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애초에 제도에서 누군가가 배제되어 있었다면 제도가 아무리 공정한들 ‘구조적 불공정’이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특정 집단 진입 제도의 불공정성과 사회 구조의 불공정성 중, 둘 중 어느 것이 더 큰 불공정일까? 당연히 후자이다. 술래잡기 규칙이 아무리 공정한들, 다리를 다쳐 달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 더 큰 불공정


  그렇다. 문제는 ‘더 큰 불공정’이 존재한다는 것에 있다. 제도의 불공정보다 더 큰 ‘구조의 불공정’은 대입과 취업 현장에서 명백히 작용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대치동에서 현강을 들을 수 없는 학생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남들처럼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길 원하지만, 당장 대학에 진학할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되지 않아 특성화고에 진학해야만 하는 학생들이 있다. 남들처럼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고 싶지만, 대학을 가지 못해 질 낮은 당장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에 뛰어들어야 하는 청년들이 있다. 모두 사회가 인정하는 정도(正道)를 걸을 수 없는 사람들, 술래잡기 게임에서 다리를 다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대입 제도와 채용 과정을 공정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외딴 섬 이야기에 불과하다. 애초에 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제도가 아무리 공정한들 이때의 공정성은 모두가 아닌 제도에 편입될 수 있는 이들의 이익만을 위해 봉사하게 되는 셈이다.


  흘러넘쳤던 공정성 담론 속에서, 제도를 공정하게 만들어달라는 요구는 수없이 들렸다. 그러나 그 제도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역시 제도권 밖에서도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달라는 요구는 들어보지 못했다.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지 못할수록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에 뛰어들기 쉬워지고, 점점 더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고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제도권에 편입될 수 없는 이들이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만한 다른 길(수단)이 있느냐 하면, 역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나길 금수저가 아닌 이상, 좋은 대학-좋은 직장의 루트를 타는 것이 안정된 삶을 사는 유일무이한 길인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 더 큰 불공정을 은폐하는 공정성 담론

 

  더욱 문제적인 것은, 특정 집단 진입 제도에 한정한 좁은 의미의 공정성 담론이 이러한 ‘구조적 불공정’을 은폐하고 지워버린다는 것에 있다. 더 큰 불공정을 지적하지 않고 제도의 공정성만을 개선하라는 요구는 자연히 절차나 제도‘만’ 공정해지면 모든 것이 공평하고 정의로울 수 있다는 담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담론은 다시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낳는데, 첫째로, 그 ‘공정’한 제도를 통해 상위 집단에 진입하는 것만이 옳고 그렇지 못한 방법은 불공정하다는 인식이 팽배해진다. 이는 인천국제공항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정규직 신입사원 채용’이라는 ‘공정’한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며 뭇매를 맞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둘째로, 절차나 제도‘만’ 공정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담론은 모든 것은 개인의 노력 문제로 치환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개인이 불안정한 삶을 사는 이유는 그가 ‘노력’을 하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며, ‘노력’을 한 사람만이 상위 집단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된다는 논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노력’주의 담론은 공정성 담론을 공고히 떠받치고 있다.(출처: 중앙일보, 사진에 연결된 링크)


4. 공정성 담론을 강화하는 교육

 

  현재의 공정성 담론은 이렇듯 명백한 한계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적거나 무시되기 일쑤이다.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미 사회의 너무나도 많은 기제들이 협소한 의미의 공정성 담론을 유지·재생산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기제들이 있겠지만 다 다루기엔 페이지가 모자라니 생략하고, 한 가지에만 집중해보겠다. 이제껏 논의를 이끌어왔던 중요한 키워드인 ‘대입’과 ‘취업’ 양자를 잇는 연결고리는 들 입(入) 자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교육’이다. 


  교육의 본질은 물론 공정성 담론을 강화하고 기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교육 본연의 목표는 학습자를 가르치고 능동적인 배움을 실천하게 함으로써 개개인 내면의 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은 이 역할을 실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 입시(入試)와 입사(入社)를 위한 교육

 

  한국 사회에서 교육, 특히 중등교육이 지니는 가치는 명확하다. 바로 ‘대입’이다. ‘대입’은 대학 입시와 그를 둘러싼 전반적인 평가를 말하는 것이지만, 교육은 대학 입학을 넘어선 포괄적이고 능동적인 배움을 말한다. 이렇듯 각 단어의 뜻과 목표하는 바가 명백히 다르지만, 한국 사회에서 두 가지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듯하다. ‘국영수’가 주요 과목인 이유는 수능에 공통 과목이기 때문이고, 대입 전략의 변화는 중등 교육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며, 입시에 반영이 적은 영역은 실제 교육 현장에서 무시된다. 이렇듯 중등 교육은 대학이라는 집단(특히 상위권 대학) 진입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 이외의 가치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고등교육(대학)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중등교육의 목표가 ‘대입’이라면, 고등교육의 목표는 ‘취업’이다. 대학 공대 계열이나 문과의 경영/경제가 인기 학과로 취급되는 이유는 노동시장과의 연계성이 뛰어난, 다시 말해 취업이 잘되는 학과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대학은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는 인문계고나 직업 교육을 하는 특성화고와 같이 직접적으로 다음 집단 진입과 연계한 교육에 주력하지는 않는다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최근의 대학들이 학과 입학과 동시에 취업을 보장하는 계약학과를 신설하거나,[각주:6] 산학협력이나 창업 교육에 힘쓰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대학이 노동 시장의 인재를 키워내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고등교육 역시 ‘취업’을 위한 관문이자 수단적 가치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중등교육이든 고등교육이든 교육의 목적이 개인을 좋은 대학과 직장에 보내는 것으로 변질됨으로써, 교육은 (특정 집단에 진입하는) ‘제도’의 공정성에 대한 논거를 제공해준다. 제도를 이용하여 통과할 수 있는 사람, 즉 상위집단에 진입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가려내는 역할을 교육이 하기 때문이다. 중등/고등교육과정을 충실히 이행하여 입시/입사 과정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상위집단에 진입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가장 ‘공정’한 것으로 통용된다.

# 불공정한 것은 ‘대입’이 아니라 ‘교육’이다.

 

  이렇듯 교육이 특정 집단 진입의 자격과 공정성을 판가름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이용되는 상황 속에, 결국 더 큰 불공정은 가려진다. ‘대입’과 ‘취업’이 아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 자체의 공정성에 대한 물음은 뒷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시와 정시의 공정성 싸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논란은 밥 먹듯 이뤄지지만, 수능을 치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존재하는 불공정한 상황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를 문제 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제도 이전에 그 제도에 편입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불공정한 것은 대입·취업의 제도가 아닌 그들이 마음 놓고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여건이다. 결국 진정 불공정한 것은 제도보다 교육 그 자체, 더 나아가 사회 구조인 것이다.


  더 큰 불공정이 가려지고 다시 모든 것이 개인의 노력 문제로 치환되는 양상은 교육에서 특히 강하다. 2020학년도 수능 만점자 중에 백혈병의 아픔을 딛고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 학생의 사연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각주:7] 이 외에도 갖가지 고난을 딛고 대입이나 대기업 입사에 성공한 사람들이 큰 화젯거리가 되는 예는 수없이 많다. 교육은 비교적 누구나 받을 수 있는 평등한 것,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으로 인지되기 때문에 마치 누구든 ‘노력’만 한다면 교육을 통해 원하는 집단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노력을 들일 수조차 없는, 제도권 밖에 위치한 이들을 위한 길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의 취업 지원 정책도 대부분 대학을 다니고 있는 취업 준비생들을 위한 정책이며, 특성화고 졸업생이나 대학을 가지 않는 고졸 취업자들이 향할 곳은 결국 저임금·고위험의 열악한 여건의 비정규직 노동이다.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 자료에 따르면 20~34세 고졸 청년의 평균 임금(시간제 등 포함)은 184만 원으로 대졸 228만 원보다 44만 원이나 적었다.[각주:8]  

 

# 교육 현장에서 공정성 담론의 내면화


  또 다른 관점에서, 교육 현장에서의 경험들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은폐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공정성 담론을 내면화하게 만드는 데에 가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육 현장 자체가 공정성 담론을 내면화하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이다. 어느 인문계 고등학교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모아 놓은 ‘특별반’이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왜 모든 학생을 공평하게 대우하지 않고 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특별하게’ 대우해야 하는가? 그림을 잘 그리거나 게임을 잘하는 학생들을 모아 놓은 ‘특별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노력과 능력, 성적에 따라 서열을 부여하고 차별 대우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고, 이 능력 있는 사람들이 상위집단을 차지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믿는다. 왜 학생들이 장시간 공부 노동에 시달리는지, 무엇을 위해 서열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의식은 공정성 논리 하에 흐려진다. 중등교육 현장에서 이러한 논리들이 교묘하게 내면화되면, 비판의식은 흐려지고 익숙해진 매커니즘을 따라 결과적으로 사회 전반 어떤 영역에서든지 공정성 담론이 지배하게 된다. 마찬가지의 논리가 고등교육과 노동 시장에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취업 준비를 위해 많은 비용을 투자하고 노력한만큼 ‘정규직’이라는 보상을 받는 것, 그 노력을 투여하지 않고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는 논리가 학습된다. 인국공 보안요원들이 ‘노력하지 않은 채 혜택을 얻어가려는 무도한 사람들’로 간주되는 것이다.


5. 우리는 왜 그래야 하나요?

 

  공정성 담론이 더 큰 구조적 불공정을 가리고 여기에 교육 역시 기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착잡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차분히 생각을 가라앉히고 나면 의문들이 다시 떠오른다. 그렇다면 교육은 왜 그래야 하는가? 이 모든 현상들은 경쟁과 능력주의 담론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공정성 담론이 더 큰 구조적 불공정을 은폐한다면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하필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였던 이유, 우리가 그토록 대입과 취업, 공정성에 집착하는 이유 말이다. 

 

# ‘수단’이 아닌 ‘목적’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로부터 대입과 취업, 그로부터 공정성, 교육까지. 논의를 이끌어오면서 우리 모두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결국 앞서 나열한 것은 모두 ‘수단’이다. 대입과 취업, 공정성과 교육 모두 ‘더 나은 삶’,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이제껏 잊고 있었던 것은 목적이다. 우리는 어떤 삶을, 어떤 사회를 살고 싶은가 하는 것이다. 


  목적과 수단이 전치되는 상황 속에,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와 대입과 취업 제도를 공정하게 해달라는 요구와 같은 의미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양자는 명백히 다르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대입과 취업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편입될 수 없는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상위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서로를 밟고 경쟁하게 해달라는 요구는 더더욱 아니다.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정규직이 되지 못하면 사회에서 탈락되고 불안정한 삶을 사는 사회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지 먹고 입고 자는 것을 안정적으로 누릴 수 삶,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삶이다. 전월세 계약 기간이 끝나도 다른 집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지 않고, 고용 기간이 끝나도 다른 일자리를 찾고 노동한 만큼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삶. 그것이 우리 모두가 원하는 삶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조금만 생각을 비틀면 우리가 요구할 것은 제도의 공정성 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전혀 다른 요구를 할 수도 있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비정규직이어도 안정되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해 달라는 요구 말이다.

 

# 공정성 담론을 넘어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는 반문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사회주의 국가를 원하는 것인가요?” 경쟁과 능력주의를 통해 서로를 밟고 일어서고 그만큼 대우를 받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마치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모든 상황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 더 나은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핀란드·스웨덴 등 북유럽의 선진국들 역시 균등분배를 주창하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게 아니라 시장경제 체제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이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이 90%에 육박하는 반면 북유럽 나라들의 대학 진학률은 40%대이다. 이 나라들에서는 대학을 가고 싶은 사람‘만’ 가기 때문이다. 공부가 죽도록 싫지만, 취직과 경쟁 때문에 할 수 없이 대학에 가야 하는 한국 사회와는 대조적이다. 그렇기에 청소년들은 시험지옥에도, 입시 경쟁에도 시달리지 않는다. 이렇게 모두가 대학을 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굳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도 질 좋은 일자리를 가질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인간답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는 벽돌공의 수입이 대기업 정규직이나 대학교수와 큰 차이가 없다. 때문에 의사가 될 수 있을 만큼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스스로 벽돌공이 된다.[각주:9]


  과연 이런 나라들에서도 대입과 취업 제도의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매우 중요할까? 높은 확률로 아닐 것이다. 정시와 수시 공정성 싸움이 밥 먹듯 일어나고, 대기업 신입사원 공개 채용 제도를 통과하기 위해 수천, 수만 명이 목매는 사회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과연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사회인가.


  우리는 이러한 다른 종류의 사회에 대한 상상을 제약하는 공정성 담론에 더이상 얽매여서는 안된다. ‘수단’보다 ‘목적’에 집중하며, 다른 종류의 의문을 던지고 다른 방향으로 담론을 이끌어야 한다. 왜 우리는 상위집단에 진입해야만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가? 왜 대입과 취업에서의 공정성만 제도권 밖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가? 왜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서로를 밟고 일어서며 경쟁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해 좋은 직장에 취업해야 하는가? 왜 실패했을 때 책임과 위험성은 노력하지 않은 개인이 모두 떠안아야 하는가? 명문대를 나오지 않거나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 새로운 요구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요구를 할 필요가 있다. 이때 명심해야 할 것은 요구를 개개인에게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구조적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요구는 개인이 아닌 구조에 가해져야 한다. 


  물론 공정성 담론 이후 많은 이들이 국가에 제도를 공정하게 만들라는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이 논리 뒤에 내재되어 있는 보다 근원적인 요구는 제도는 ‘공정’하니 이 제도를 이용해 상위집단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는 개인들을 향한 요구이다. 결국 청소년들에게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라거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공개 채용 제도를 통과해 공정하게 입사하라는 요구가 가장 아래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적 모순이 존재한다면, 이를 해결할 책임은 결코 개개인에게만 있지 않다. 불공정한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임금 돈을 가진 자본(기업)과 집행력을 가진 국가도 함께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큰 힘을 가진 국가와 자본이 어쩌면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상상을 지운 채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가장 편한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설령 자본주의 아래 경쟁 논리와 능력주의 담론이 자연스럽다고 해도, 우리 사회가 수많은 구조적 불공정을 안고 있다면 우리 모두 이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다면 어떤 요구를 해야 하는가? 결국 수단이 아닌 ‘안정적인 삶’이라는 목적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해야 할 것은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한 ‘무능한’ 학생들을 비난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요구할 것은 그들에게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고 공개 채용을 하는 ‘공정한’ 제도를 통과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왜 대학에 가려고 하는지, 정규직이 되려고 하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제도를 공정하게 만들라는 요구 뒤에는 대학에 가지 않으면, 비정규직이면 살기 힘들다는 분노가 있었다. 설사 학생부종합전형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있었을지라도, 그 뒤에는 결국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의 절박한 열망이 있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는 것은 당연히 훌륭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 노력을 기울이기 힘든 제도권 밖의 사람들 역시 안정되고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를 해야 한다. 집을 살 만큼의 돈이 없어도 전월세 계약이 끝나고 쫓겨날 걱정을 하지 않는 사회,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도 먹고 자고 취미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생활이 보장되는 사회, 그에 따라 모두가 좋은 일자리를 위해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6. 나가며 : 가지 않은 길


  정시 수시 논란·정규직 비정규직 논란은 결국 공정성에 관한 소모적인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더 큰 구조적 불공정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는 허울뿐인 공정성 논란이었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제도권 밖의 사람들까지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는 비판은 상대적으로 많이 들리지 않았다. 다른 종류의 의문과 사회를 상상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가 공정성 담론을 넘어선 전혀 다른 종류의 의문을, 요구를, 교육을, 사회를 상상할 수 없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리에게는 대학에 가기 위해 장시간 공부 노동에 시달리는 고등학생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목매는 25만 명의 취준생들이 너무나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한국 사회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에, 이를 넘어선 사회에 대한 가능성과 상상을 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다.


  제약된 상상 속에 진정 불공정한 것은 가려지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문은 점점 더 좁아만 간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우리는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더 치열하게 경쟁하고, 서로를 밟고 일어서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제도권 밖에 위치한 약자들일수록 점점 더 사회적·경제적 안전망 밖으로 내몰린다.


  공정성에 대한 치열한 투쟁은, 이제 이러한 잔인한 사회를 살기 지쳤다는 새로운 투쟁으로 도약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지 않은 길’을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공정성 담론을 넘어선 사회, 전혀 다른 교육이 이루어지는 전혀 다른 사회 말이다. 직업이 서열화되어 있고 비정규직이 질 낮은 노동조건에 시달리지 않는 사회. 임금에 있어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사회. 그에 따라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고, 대학을 가고 싶은 사람만 가는 사회. 중등 교육 현장에서 대입이라는 한 가지 길이 아닌 교육 기회가 다양해지는 사회.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더라도, 약자까지도 안정되고 인간다움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오길 희망하며 이 글을 마친다.

 

 

 

 

BDUCK

  1. <[신년여론조사④] “공정과 안전”…2020 한국사회 핵심 가치>, news.kbs.co.kr/news/view.do?ncd=4354157 [본문으로]
  2. <문대통령, 공정만 37번 언급…분노한 청년민심 다독이기>, www.yna.co.kr/view/AKR20200919040100001 [본문으로]
  3. <[소득격차 확대]① 상위 10%가 싹쓸이…1980년대와 달라진 한국>, news.kbs.co.kr/news/view.do?ncd=4159214 [본문으로]
  4. <[소득격차 확대]⑨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인가>, news.kbs.co.kr/news/view.do?ncd=4189374  [본문으로]
  5. 이강빈, <민주시민의식으로서의 공정성에 관한 도덕교육적 의의 : 중등도덕교과교육을 중심으로>, 도덕윤리과교육연구, 제29호, 한국도덕윤리과교육학회, 2009 [본문으로]
  6. 최근 대학이 기업과 연계해 학생들에게 입학과 동시에 취업을 보장하는 ‘계약학과’를 신설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2021년 대입에서 고려대와 연세대는 SK하이닉스·삼성전자와 계약을 맺고 각각 ‘반도체공학과’, ‘시스템반도체공학과’라는 반도체 분야 계약학과를 신설하였다. [본문으로]
  7. <[단독]“고3 항암치료 고통… 환자돕는 의사 될래요”>, www.donga.com/news/People/article/all/20171225/87887947/1 [본문으로]
  8. <[잊혀진 청년들] 고졸, 임금 20만원 오를 때 대졸 50만원 훌쩍… 초과근로 비율은 더 높아>, www.hankookilbo.com/News/Read/201712020459627875 [본문으로]
  9. 하종강, <우리가 몰랐던 노동 이야기> [본문으로]

  대입과 취업에 관련된 정책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크게 들려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공정성을 요구하는 담론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살피고자 합니다. 공정함에 속아 다른 소중한 가치를 잊은 것은 아닌지. "공정 너머의 길"을 따라가며 함께 고민해봅시다.

 

<공정 너머의 길> 소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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