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내 페미니즘의 오늘 – 페미니즘 생태계를 꿈꾸며
이물
1. 대학, 교육, 페미니즘
‘페미니즘 교육’은 무엇인가? 그 목표는 정해진 페미니즘으로 학생을 훈육하고 계몽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현장에서의 페미니즘 윤리, 혹은 사회비판적 교육이라는 의미의 페미니즘 지식을 만들어가는 정치가 필요하다.
초중등교육에서의 페미니즘을 일방적 훈육으로만 사고할 때, 학생운동과 여성운동으로 상징되는 대학 내 페미니즘과는 그 괴리가 커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페미니즘 교육’을 위한 페미니즘 정치를 사고할 때, 대학에서의 여성운동은 오히려 이것을 이미 상당부분 수행해왔다고 보아야한다.
교육은 기존 사회의 규범에 맞게 개인을 사회화하는 기능을 갖지만, 동시에 기존 사회를 비판하는 힘을 갖게도 한다. 사회 비판적 지식을 생산하려는 교육은, 사회 비판적 운동과 깊은 관계를 가지며 그 자체로 운동이다. 야학과 노동운동의 관계, 대학과 학생운동의 관계가 이를 잘 보여준다.
나아가 대학생들의 운동은 피교육자가 교육의 주체가 되는 경험이었다. 초중등교육의 교육할 내용, 교육하는 사람, 교육받는 사람은 교과서, 학교와 교사, 학생이다. 대학의 경우 교육 내용은 교과서에 비해 다양한 조건에 의해 정해진다. 한편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구분을 넘어 학생들은 학회를 꾸려 스스로 교육공동체를 만들고, 학생자치를 실현해왔다. 이처럼 대학에서는 교육되는 지식에 대해 많은 주체들이 경합하고 있다. 경합의 장은 사회 비판적 교육의 기능이 발현되는 데에 유리한 조건이 된다.
이런 조건 위에서 대학 내 반성폭력 운동은 공동체의 페미니즘 윤리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여성주의 학회들과 여성학 강사와 조직들은 페미니즘 지식을 생산해왔다. 대학은 이미 페미니즘 교육의 정치를 수행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 초중등교육에서 제기되는 페미니즘 교육 담론은 제도화나 교육과정 편성, 교사 중심 논의에 국한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대학에서 이루어졌던 지식에 대한 경합을 살펴보는 것이, 그러한 한계점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러한 과정이 초중등교육에 아예 부재했던 것도 아니다. 이미 십대 청소년 활동가들과 정치조직이 존재하며, 역사적으로는 학생자치기구를 기반으로 한 ‘고운(고등학교운동)’이 존재하기도 했다.
결국 일방적 교육을 넘어서는 페미니즘 교육의 정치를 지금 다시 생각하기 위해서는 현재 대학의 페미니즘 정치에 대해 돌아볼 필요가 있다. 와해된 대학 여성운동을 다시 생각하고, 초중등교육의 페미니즘을 새롭게 만들어가는 것은 따로 떨어질 수 없다. 이 글에서는 서울대의 페미니즘 학생 단체를 중심으로 이를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페미니즘 ‘교육’을 넘어, 사회 전반을 바꿔내려는 ‘페미니즘’의 흐름에서 대학의 의미를 다시 고민해보았으면 좋겠다.
2. 대학 내 페미니즘의 현황 – 서울대 학생 단체를 중심으로
1) 2016년 메갈리아와 강남역 살인사건을 전후하여
‘페미니즘 리부트’, ‘영영페미니스트’, ‘뉴페미니스트’... 2016년 이후의 페미니즘을 일컬을 때 자주 언급되는 단어들이다. 지금의 페미니즘과 2010년대까지의 페미니즘에서 일종의 단절성과 차별성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단절성이 객관적인지, 주체들이 의식적으로 만들어낸 것인지는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그간 위기 담론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여성운동과 페미니즘이 2018년인 지금, 가장 뜨거운 화두로 변모한 것은 사실이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은폐되어 있던 여성억압을 폭발적으로 가시화했고, 강남역 살인사건은 사람들이 이를 실물화된 위협으로 느끼고 행동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역차별 논쟁과 페미니즘에 대한 낙인찍기도 심각해졌다. 지금의 페미니즘은 쇠퇴기를 상징하는 ‘신자유주의’와 16년 이후의 ‘여성혐오’가 겹쳐있는 곳에 서 있다.
대학에서도 이런 양상이 펼쳐진다. 높아만 지는 취업에 의한 부담, 학생회 재선거와 무산 속에 반복되던 학생운동의 ‘위기’ 담론은 대학 내 여성운동에도 적용되었다. 이 위기가 정확히 왜 촉발되었는지에 대한 분석은 다양했지만, 실체 없이 담론만 반복되는 거 아니냐는 자조에도 불구하고 위기는 현실이 됐다. 그러나 16년 이후 페미니즘은 주요 화두가 되고, 다양한 페미니즘 학회와 소모임, 관련한 단체 및 산하기구가 생겨나고 있다.
서울대의 경우, 주요 단체 중 16년 이전부터 존재한 단체에는 ‘여성주의 학회 달’ (2013년에 지금과 같은 형태 갖춤) ‘학생 소수자 인권위원회’(2015년 설치)가 있다. 한편 16년 이후 ‘지금, 여기 : 관악의 페미들’(2016년 2학기), ‘경영대 여성주의 학회 여파’, ‘공과대학 페미니즘 동아리 공해’(2018년 1학기) 등 단체, 소모임들이 생겨났다.
각 학생회 단위는 매년 새맞이나 선거 기조에서 페미니즘을 천명하고 공약을 제출해왔다. 올해 제36대 사회대 학생회는 학내 페미니즘 단체들과 3.8 여성의 날 행사를 공동주최했으며, 대학생 공동행동에 결합했다. 2017년 제38대 사범대 학생회는 학소위와 인권침해사안을 해결하고 강연회를 여는 등 자치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2016년 제33대 인문대 학생회 역시 X반 단체 카톡방 성폭력 사건을 총학생회, 학소위와 공동으로 대응했다. 그러나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학생회들이 페미니즘 의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선도하는 입장이라기보다, 복지 사업 정도로 진행하거나 학소위를 보조하는 역할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명확한 정치적 계보가 부재하고 해마다 지형이 바뀌는 최근의 학생회들을 학교 전체 단위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자료와 섬세한 분석이 필요할 것이다. 때문에 여기서는 페미니즘(혹은 젠더 문제)를 뚜렷하게 지적하고 있는 상설 단체들만을 다루려 한다.
2) 분석
- 다양한 형성배경과 위치
총학생회 산하기구인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는 2015년 수리과학부 K교수 성폭력 사건 등을 계기로, 학생사회에서 인권 사안을 다룰 기구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총학생회 산하기구로 결성됐다. 그러나 15, 6년에는 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했고, 2대 학소위장의 ‘한남’ 논란과 사퇴로 그 힘을 잃기도 했다. 감사와 재정비를 거쳐 16년 2학기부터 활동을 재개했고, 현재는 학내 인권 사안 해결을 주도하고 인권 강연을 여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16년 이전부터 활동했고, 뚜렷하게 이전 여성운동을 계승하려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관악 여성주의 학회 달’이 유일하다. 달의 원형은 사회대 중심의 여성주의 교류 모임이었는데, 2012-13 ‘성폭력 대책위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학생사회 내의 페미니즘에 대한 이견이 표면화되자, 이를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지금과 같이 학회의 형태를 구축하게 됐다.
페미니즘 모임인 ‘지금, 여기 : 관악의 페미들’의 경우, 2016년 2학기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인권주간 부스에서 시작했다. 부스의 반응이 좋았고, 당시 페미니스트에 대한 낙인에 맞서 심리적 지지를 보낼 관계가 필요해 만들게 됐다고 한다.
단대 학생회를 중심으로, 최근 ‘공과대학 페미니즘 동아리 공해’와 ‘경영대 여성주의 학회 여파’가 형성됐다. 두 모임 모두 해당 단대에서 여성(및 인권)에 대한 의식이 부족하다는 문제의식이 크게 작용했다. 직접적으로는 공해의 경우 달에서 활동하던 학우가 주도해서 동아리를 만들었고, 여파의 경우 몇몇 학우가 진행하던 여성주의 스터디가 오픈 세미나 이후 확장되어 학회가 됐다.
- 공통된 분노, 다른 문제의식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은 각 단체들이 다른 조직적, 정치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이다. 학소위를 제외하고 모든 단체들은 비공식적인 학회/소모임의 형태를 띠고 있다. 공해, 여파는 기존의 학생회 단위를 중심으로 여성주의 이론을 학습하고, 실천으로 이어가려는 목적을 갖는다. ‘달’은 명확히 학생회 단위에 구속되지는 않지만 체계화된 학회 운영을 지향하고 있으며, 급진주의 페미니즘을 넘어서 상호교차성,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등을 고민하는 정치적 관점을 갖고 있다. 여파와 공해 역시 신생 학회의 어려움을 고려하면서도 체계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으며, 공해의 경우 과학기술의 객관성에 대한 페미니즘적 비판에 관심이 있다.
반면 관악의 페미들의 경우 학회나 동아리의 정체성은 부재하며, 때문에 정치적 관점이 단일하지 않고 구성원별로 원하는 것이 각자 다르다. 기존 학생회 단위를 벗어나 전 관악을 대상으로 느슨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활동은 카톡방을 중심으로 사안별로 가능한 사람끼리 모이거나, 원하는 책이나 사업을 제안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관악의 페미들은 16년 이후 ‘영영페미니즘’들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기존 제도(학생회 기구)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낮게 인식하고, 정치적 입장의 단일성보다는 유동적이고 느슨한 네트워크 기반 사안 중심의 활동이 그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는 이미 90년대 ‘영페미니즘’의 조직 방식이기도 했다. 차이가 있다면 당시는 각 대학과 기층 단위가 존재하고, 이 단위 간의 느슨한 연대체가 구성된 것이었던 반면, 최근의 경향은 가장 기본적인 단위조차 네트워크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반성폭력 운동이라는 고정적인 의제가 있었던 90년대에 비해 단체들이 직접 주도하는 주요 의제는 찾기 힘들다.
“그런데 이때, ‘어떤’ 페미니즘을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 불과 2~3년 전에 비해 훨씬 많은 학우들이 페미니즘을 접하고 페미니즘에 대해 의견을 낼 수 있다는 건 여성운동의 엄청난 성과이고, 다른 사람들이나 단체들만큼이나 달 역시 지금까지 여성억압을 철폐하기 위해 노력해온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 이후를 물어야 합니다. 미투 운동의 엄청난 사회적 동력이 어디로 향해야 정말로 보편적인 여성해방을 성취할 수 있을지,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기존 급진 페미니즘의 실수는 물론이고 가면을 바꿔 쓰고 또 다시 나타날 똑같은 백래시를 피하면서 더 진보할 수 있을지, 이런 질문들을 제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달
“각자가 원하는 바가 달라요. 학회나 이런 건 목적이 뚜렷하잖아요. (...) 관페는 목적성 있는 단체가 아니다 보니, 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과 아닌 사람이 존재하고, 연대활동을 할때에 하는 사람만 하는? 그런 게 있어요. (...) 동아리는 구성원이니 행사에 참여해라 이렇게 강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반면 이거는 아닌 거죠. 활동을 하고자 하는데 도와줄 사람은 도와 달라. 그게 어려움이 좀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 관악의 페미들
- 제도화와 정치성의 탈색
그간 진행됐던 반성폭력 운동은, 각 대학들의 반성폭력 학칙이나 내규를 통해 제도화되었다, 서울대에서도 인권센터, 학소위가 그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특히 16년 2학기 이후 학소위 활동이 정상화되고부터는, 학내 인권침해사안의 해결은 거의 모두 학소위의 손을 거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여성운동의 정치적 관점을 확장하는 한계선을 긋기도 한다.
특히 반성폭력의 흐름에서, 제도화 이후 사건 해결 자체만 반복해서 진행되고, 사건을 어떻게 규정하고 공동체적으로 해결할 것인지의 논의는 축소되었다. 이는 성폭력의 개념을 정치적으로 재구성하고, 사건 해결 과정의 피해자 중심주의와 2차 가해/피해의 개념을 제시한 이전의 여성운동과는 대비되는 지점이다.
“학소위는 지금 반성폭력 학칙 같은 뚜렷한 의제를 내지는 않지만, 성폭력 사건 접수를 해왔고, 공동체적 해결에 대한 논의를 이끌어 온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사실 학소위 2기에서 그런 일(2기 학소위장의 사퇴)이 벌어졌고, (...) 3기에서는 (여성 인권 문제제기를) 뚜렷하게 하지 못했죠. 반성지점이라고 생각하고, 4기에서 시도해보자 하고 있는데 (아직) 전면에 내세우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 학소위
“학생회 기구로서의 역할과 학내 모임으로서의 역할은 다르고, 학생회 기구는 제도적인 것, 사건 접수, 학교 제도 차원에서의 접근이 진행된다면 모임은 문화적 변화를 촉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 학소위
“다른 사회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것을 인정해주는 사회가 있었고, 인정해주는 문화가 있어왔고. (...) 대학에서 권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관습을 갖고 이행해왔는지에 대해 잘못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이 발생한거다, 라고 원인을 밝히는 작업들을 같이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공대라는 단과대에서 이런 일들을 마주했을 때, 개별 사건을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있어 사건처리만이 아니라 더 넓은 것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 공해
학소위 인터뷰에서 언급된 것처럼 제도화된 기구가 사건해결을 맞는다면, 이에 대한 정치적 담론을 확장하는 것은 페미니즘 모임들의 역할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다만 지금은 이러한 상호작용이 잘 수행되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인권 침해 사안에 대한 문제제기는 반복되고 있지만, 학소위의 정제된 진상조사보고서 이후 이를 적극적으로 공론화하고 공동체적 페미니즘 윤리를 재구성하려는 학회/학생회 단위의 노력은 뚜렷하지 않다.
한편 페미니즘 지식을 생산하는 역할 역시 정체되어 있다. 언급했듯 관악의 페미들은 뚜렷한 정치적 지향이 있지 않다. 신생 단체인 공해와 여파는 물론이고, 달 역시 다양한 페미니즘 논의에서 이론을 어떻게 정립하고, 현실과 연결할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학소위의 경우 사건 해결만 해도 많은 공력이 들고, 산하기구로서의 정치적 부담 등으로 인해 여성 의제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뭐가 될진 몰라도 모두가 같은 입장을 가질 수 없는 사안에 대해 여파가 입장을 취해야 할 때가 있을 거고, 그럼 밖에서 볼 때 우리가 정치적으로 어떤 위치에 서서 어떤 페미니즘을 지향하는지 알 수 있겠죠. 그러면 여파가 초기에 생각했던 것처럼 ‘모두에게 열려 있는 대안적 공간’으로 남기 힘들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단순히 지적 만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참여와 실천의 학문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 여파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보편적으로 확고하게 정립되어있지 않다는 점은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합니다. (...) “여성주의를 공부하자”고 하는 단체인데, 사실 여성주의를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어느 선 이상으로 넘어가면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가 되어버려요. (...) 일정 수준 페미니즘의 담론에 친숙해지는 과정은 필요하지만, 그 공부를 통해서 세미나 참여자들이 현실의 여성들과 연대하면서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면 머리 아픈 이론적인 학습 과정을 어느 정도는 우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달
- 만성적 참여 부족과 사회적 낙인
무엇보다, 모든 페미니즘 단체들은 만성적인 참여 부족을 어려움으로 꼽는다. 학소위의 경우 2주에 한 번 열리는 정기회의가 4, 5시간에 육박할 정도로 업무량이 많고, 진상조사 참여는 감정소모가 심한 일이기 때문에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지속가능성이 걱정이라고 털어놨다. 신생 단체인 여파, 공해는 물론 달도 새로운 학회원을 모집하는 것, 나아가 학회장이나 간사 등 중심 역할을 할 사람을 재생산하는 것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관악의 페미들 역시 느슨한 연대체의 형태가 갖는 재생산에서의 한계를 걱정하고 있다.
한편 소위 ‘백래시(backlash)’라고 하는, 페미니즘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 낙인도 만만치 않다. 특히 학소위는 2기 학소위장이 ‘한남’ 발언이 논란이 되어 사퇴했고, 당시 총학생회 디테일은 ‘메테일’ (메갈리아+디테일)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관악의 페미들의 경우 동아리 가등록을 고민해보기도 했지만, 동아리 등록 시 ‘메갈’, ‘워마드’에 대한 사상검증을 요구받고 동아리 등록이 부결된 경험(국민대)나, 본부의 개입이나(한동대) 학생들의 반대로(서강대) 페미니즘 강연이 취소되는 등의 사례를 들며 걱정을 표했다. 서울대 커뮤니티의 역할을 하는 페이스북 대나무숲과 스누라이프에도 계속해서 페미니즘을 비난하는 글이 올라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 과정에서 현실적인 권한과 영향력을 고민하는 단위도 있다. 학소위는 타 대학의 총여학생회나 단대 학생회와 같은 선출 단위의 경우 학우들에 대한 정당성이나 예산 집행의 가능성이 있지만 학소위는 그에 제약이 있는 것이 고민지점이라고 말했다. 한편 관악의 페미들은 애초 뚜렷한 단위 기반이 없기 때문에 학우들에 대한 영향력과 권한이 부재한 것을 어려움으로 들었다.
이런 부담 속에서 명확한 정치적 관점을 견지하고, 체계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물리적, 심리적으로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때문에 앞서 언급한 정치성의 탈색이나 조직적 느슨함과 같은 상황의 원인이 이러한 어려움들에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페미니즘 자체에 대한 사람들의 부정적 생각들이 만연해 있습니다. 페미니즘이 별로야, 하고 인상비평으로 부정적인 의견을 표하는 것을 공개적으로 하는 경우도 많이 있단 말이죠. 수업시작하기 전이나, 관악 02 버스타고 올라가는 데 그런 느낌의 말을 한다거나. 다른 사람에게 권유를 할 때, 페미니즘을 입에 담지 않고 ‘그거’ ‘그 사람들’이라고 칭하기도 했다더라고요. (...) 그럼 어떻게 인식을 바꿀 수 있을까. 페미니즘의 의미를 우리 것으로 되찾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할까하는 고민들이 있어요. (...) 불리한 전제를 그냥 놔두고 힘겹게 이어가는 게 아니라 그런 전제를 뒤바꿀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의 당위를 이야기하고 요구를 이야기하고 이런 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고민이 있습니다.“ - 공해
3) 종합
지금의 대학 내 페미니즘은 다양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90년대 ‘영페미니즘’의 유산인 반성폭력 운동의 정치적 힘은 제도화되고 정체되었다. 사회적 비난은 가중되고 있으며, 지향하는 조직형태가 체계적이든 느슨한 것이든, 지속가능한 조직 구성에 애를 먹고 있다. 또한 뚜렷한 문제의식과 이를 반영한 실천의제가 제출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자주 추상적 인권에 페미니즘이 편입될 것을 요구하는 비판에 직면한다.
그러나 분명히 달라진 것은, 적어도 16년 이후 이러한 어려움을 호소할 단체들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은 그 정도는 다르지만 공동체와 사회에 대한 페미니즘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데에 동의한다. 경영대와 공과대학에서는 자신이 속한 단위에 대한 성찰이 생성 계기가 됐고, 달은 꾸준히 페미니즘 이론을 발굴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관악의 페미들은 “척박한” 관악에도 페미니스트가 있다는 확인을 위해 만들어졌다. 학소위원들은 인권 사안의 해결을 위해 넘치는 업무를 감당하며, 3기, 4기를 거치며 그 숫자는 늘어났다.
어쩌면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과 문제의식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지금, 그 문제의식을 담아낼 조직과 방향이 가장 중요한 지점으로 대두됐다고 볼 수 있다.
3. 함께, 더 넓게 대안을 상상하기
대안은 어디에 있는가? 인터뷰를 진행하며 느낀 것은 무엇보다, 현장에서 활동하는 여성운동가들 자신이 이미 그 실마리를 갖고 있다는 점이었다. 관악의 페미들은 조직의 중앙집권적 면모가 부족함에도, 기존의 학생회, 여성운동 단위를 완전히 벗어나 ‘평범한’ 사람들도 새로운 형태로 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학소위는 반성폭력, 페미니즘 담론을 확장하기 위한 내부세미나를 진행하고 인권 강연을 개최하는 노력을 하고 있고, 학소위가 넓은 범위의 인권을 담당하는 점이 오히려 다양한 억압들의 교차성을 다룰 가능성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달은 현실 여성들과의 연대가 이론적 난항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고, 여파는 공동체 내에서 존재감을 키워가고 더 크게 떠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공해는 신생 동아리인만큼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문화 비평 등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 있다.
존재감 키우기, 새로운 사람들을 위한 진입장벽 낮추기, 다양한 억압을 함께 사고하기, 현실과 연대하기는 그 자체로 모두 옳은 지향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처럼 분산된 고민들을 한 데 모으는 것이 이 글의 의무라면,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가능할 것이다.
첫째로 조직과 지향의 부재를 해결하기 위한, 지속가능한 페미니즘 ‘생태계’를 상상해보고 싶다. 나는 적어도 페미니즘 단체의 기본 단위의 지향과 정체성은 체계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바탕으로 상시적이고 느슨한 전체 학교 단위의 페미니즘 단체 간 교류가 형성될 필요가 있다. 이는 상시적인 공동 업무 수행의 부담과 마찰을 피하면서도, 단체들 간의 논의를 자극해 그동안 약화되어 온 페미니즘들 간의 경합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학내에서 페미니즘의 존재감과 영향력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이는 90년대 ‘영페미니스트’들이 이미 시도한 방식이며, 서울대에도 관악여성주의자모임(관악여모)가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은 학소위라는 확실한 제도기구가 존재하며, 이는 얼마든지 유리한 점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 생태계가 안정화되면 사회적 비난과 낙인에 대응하며 페미니즘을 생산적으로 성찰하는 심리적, 정치적 자원을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회 단위와의 적극적 연대도 상상해볼 수 있다. 무엇보다 내가 인터뷰를 진행한 주체들이 함께 이 이야기를 하면 훨씬 좋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생각이라고 이해해주면 좋겠다.
둘째로 조금 벗어난 말일 수 있지만 ‘페미니즘 교육’이나 ‘대학’을 넘어서는 상상이 필요하다. 현재 대학 내 페미니즘의 실천은 대학이라는 공동체에 국한되는 성폭력 문제 해결과 복지, 혹은 실천과 괴리된 지식 생산에 머무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과거에는 사회적 반성폭력 운동으로의 확장이라는 역할을 수행했지만, 제도화된 이후 그 역할은 희미해졌다. 이는 대학 여성운동이 확장된 페미니즘적 관심을 수용하기보다 유리된 공간으로 분리, 축소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대학은 사회와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 집회에 참가하거나 지지하는 것을 넘어, 사회적 의제를 대학 내에서 발굴할 필요가 있다. 대학 구성원이 처한 성차별, 여성/성소수자 노동, 낙태, 학문의 젠더편향 등을 지적해나가야 한다. 이처럼 사회와 연관하는 과정은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주체들의 자각과 확신, 지지의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을 것이며, 현실을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하는 지식을 구성하고, 그 지식이 다시 힘 있는 페미니즘 운동을 조성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주제넘은 이야기였을까 걱정이 되고, 머리로는 알아도 이를 실현하는 것은 힘들고 지난한 과정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들과 단체가 있으며, 또 늘어나고 있는 것을 기억하자. 또한 이 대학에서 어려운 페미니즘 이론을 공부하고, 당장 우리의 현실에 적용하고, 바꾸어낼 실천 의제를 찾고, 함께할 사람을 조직하는 것은 분명 우리의 몫이다.
끝으로 인터뷰한 모든 단체가 입을 모아 했던 마지막 말을 남기려 한다.
“세미나 많이 와주세요.” “더 많이 들어왔으면 좋겠어요.” “항상 열려있습니다,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문헌
- 김보명, 「1990년대 대학 반성폭력 운동의 여성주의 정치학」, 『페미니즘 연구』 8, 한국여성연구소, 2008.
더 읽어보면 좋은 것들
- 김영선, 「한국 여성학 제도화의 궤적과 과제」, 『현상과 인식』 34(3), 2010.
- 이나영, 「한국 ‘여성학’의 위치성 : 미완의 제도화와 기회구조의 변화」, 『한국여성학』 27(4), 2011.
- 이다혜, 「대학 내 여성주의 운동과 정체성 형성 : 2010년대 대학생 활동가의 경험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여성학 전공, 2012.
- 한종태, 「2000년대 중반 이후의 대학 내 여성주의 운동 연구 : 활동가들의 ‘위기’경험 분석을 중심으로」, 성공회대학교 NGO대학원,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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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학교와 페미니즘②] 지금, 여기서 학교를 바꾸는 사람들 (0) | 2018.08.22 |
[기획 - 학교와 페미니즘①] 성차별 가르치는 학교 : 지금, 여기의 현주성차별 가르치는 학교 : 지금, 여기의 현주소 ① 그래놀라소 (0) | 2018.08.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