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엾은 내 인권규범, 옥천허브에 갇혔네
인권 가이드라인의 지난한 역사와 그 함의

존 캘리포니아 롤즈

 


인권이 실현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행위가 허용되는지, 어떤 행위를 용납될 수 없는지를 규정하는 규칙을 제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교내에서도 이를 위한 노력이 산발적이나마 이루어져왔다. 2019년 11월 24일 인권센터 주최로 열린 서울대학교 인권규범 제정에 대한 토론회에서 공개된 인권규범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인권규범의 제정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반가운 소식이지만 세상의 빛을 보기 전까지 인권규범이 걸어온 길은 험난함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과정은 교내 인권 논의와 실천이 어떻게 이루어져왔는지, 누구의 목소리로 어떤 형태를 띠었는지, 앞으로는 어떤 영향을 가질 수 있을지를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그 지난한 역사와 모습을 되짚어본다.

 

 

1. 인권 가이드라인의 등장 - 13년 인권센터의 서울대 인권 가이드라인

 

인권 가이드라인은 2016년 총학생회(회장 김보미)의 주도로 ‘인권 가이드라인’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1) 그러나 인권 가이드라인 제정이 처음부터 학생사회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최초의 인권 가이드라인은 2013년 인권센터 주도로 이루어졌다. 2012년 여름 ‘서울대 대학원 성폭력 사건’(2)을 계기로 대학원생 인권침해의 심각성이 문제로 떠올랐고, 가을에 진행된 인권센터의 설문조사에서 각종 피해실상이 드러나(3) 인권센터의 주도로 인권 가이드라인 제정이 결정되었다.

13년 10월 ‘서울대 인권 가이드라인 제정을 위한 토론회’에서 인권센터가 작성한 가이드라인의 초안이 공개됐다.(4) 초안은 교원과 학생, 직원, 외부 인권전문가, 인권센터장 등 총 10명으로 구성된 검토회의에서 만들어졌는데, 자기결정권,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차별받지 않을 권리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현재는 인권센터에도 13년 당시의 초안은 남아있지 않지만 당시 기사로 대강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특기할 만한 점이 몇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가족생활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는 조항이 있다는 점이다. 이는 가정이 있는 기혼자 대학원생과 학부생을 고려해 만들어진 조항으로 대학원생의 인권침해 피해 방지를 위해 만들어진 안건의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두 번째로 “정기적으로 인권 교육을 받는다(제17조)”는 내용에서 이 인권 가이드라인이 실제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할 권한과 역량이 있는 학교 당국의 주도로, 혹은 그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기관에서 만들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5) 그리고 이는 이후 교내 인권정책에서 의무화된 인권센터 주관 인권/성평등교육으로 이어졌다(마이스누 포털에 접속하면 팝업창으로 뜨는 바로 그 교육이다). 그러나 이렇게 논의된 인권 가이드라인은 그 주체, 적용 범위 등을 두고 논의가 계속되다 본부 회의에서 반려되어 결국에는 공식적으로 제정되지 못했다.


2. 인권 가이드라인, 학생에 의해 제정되다 - 16년 9월 학생사회 인권 가이드라인

 

인권 가이드라인은 흐지부지 없는 일이 되었지만 인권침해는 휴가도 가지 않고 휴식기도 가지지 않고 성실히 이루어지는 법이다. 14년에는 수리과학부 K교수가 학생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혐의로 구속 기소되었고,(6) 15년에는 경영대 P교수가 성추행 가해 사실로 인해 파면되었다.(7)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학생사회는 각종 인권침해를 예방하고 피해를 구제할 수단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16년 3월에는 김보미 당시 총학생회장의 주도로 인권 가이드라인의 제정 주체가 학생이 되었다. 인권 가이드라인 제정에 학생이 참여해도 여전히 결정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이전의 인권센터 주도 인권 가이드라인은 태생적인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인권 가이드라인 제정을 위한 특별위원회가 구성되고 제정 주체가 학생이 되면서 기존의 인권 가이드라인과 방향성에 있어 차이점을 두려는 시도가 있었다. 당시 열린 토론회에서 김보미 전 총학생회장은 피해 구제 수단과 처벌에 대한 내용을 포함할 계획임을 밝혔다.(8) 단순한 지침서를 떠나 피해를 구제하고 필요할 경우 처벌에 대해서도 지침이 될 수 있는, 실질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인권 가이드라인을 만들고자 한 것이다.

 

학생이 주도했기에 가능했던 인권 가이드라인

 

16년 9월 25일 총학생회 전체학생대표자회의에서 인권 가이드라인이 채택됐다. 해당 안을 15년 2월 인권센터 운영위원회에서 다루어진 논의안과 비교해보면 크게 두 가지의 의미있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제13조 [노동과 업무에 관한 권리]로, 15년의 인권센터 논의안에도 있었던 항목이지만 둘을 비교해보면 큰 차이점이 보인다.

 

15년 논의안
제10조 [근로의 권리]
구성원은 근로, 교육 및 연 활동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합당한 대우를 받는다.


16년 제정안
제13조 [노동과 업무에 관한 권리]
①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국내법이 보장하며 세계인권선언이 권장하는 노동의 권리를 가진다.
② 강의·연구지원 조교, 연구원 및 장학금 수령에 따른 반대급부로 특정한 근무의 의무를 갖는 이를 포함해 학내에서 교육 및 연구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근무시간·근무기간·업무유형·수당·수당지급 시기와 같이 근무조건을 구성하는 핵심정보를 사전에 서면으로 통보받을 권리를 가진다.

③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사적업무강요를 비롯해 사전에 동의하지 않은 업무·심부름에 대한 지시 및 요구를 거부할 권리가 있으며, 이에 따른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

인권센터 논의안에서는 근로에 따른 합당할 대우를 받을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대학원생 노동권 보호를 위한 조항으로 보인다). 16년 학생사회 제정안은 이를 확장해 단순한 대우의 권리뿐만 아니라 노동의 권리를 포괄적으로 보장할 것을 명시했으며, 용어도 근로가 아닌 노동으로 바꾸었다. 다음은 제13조에 대한 해설문의 일부이다.(9)

 
‘근로’는 고용인 입장의 표현인데 반해, ‘노동’은 피고용인 입장에서의 표현이다. 인권 가이드 라인은 피고용인이 인권을 보장받아야 하는 하나의 주체라는 점에서 ‘근로’가 아닌 ‘노동’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중략) 제13조는 노동의 종류와 고용 형태를 막론하고 서울대학교 내의 노동의 주체로서 모든 구성원이 가지는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즉, 위에 언급한 노동의 주체들은 모두 제13조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 (중략) 인권가이드라인의 다른 조항들도 마찬가지지만, 제13조에 포함된 권리들은 단순히 이름뿐인 권리가 아니라 실제로 학내 노동의 주체들을 보호하는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노동 기준을 준수하는 것에서만 그치지 않고, 노동과 관련된 국내의 법률들과 국제 협약들이 제정된 목적을 고려하여 구성원이 노동의 주체로서 가지는 권리들을 학내에서 적극적으로 실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러한 노력을 이행할 책임은 노동자를 고용하는 부속기관, 단과대학, 연구소의 인사권자, 교원, 학내 입점 업체의 사업주, 서울대학교와 계약을 맺은 용역업체,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서울대학교 측에 있다.

 

이러한 내용의 변화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등 교내의 다양한 노동 문제의 해결을 위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학생사회가 주체가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번째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제16조 [문제제기를 할 권리]이다. 이는 15년 인권센터 운영위원회 논의안에는 없었던 항목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6조 (문제제기를 할 권리)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당사자 혹은 제3자로서 본 문서에 기술된 권리의 침해 및 기타 부당한 처우를 인지했을 때, 여기에 대하여 사회적/공적으로 문제 제기 할 권리를 가진다.
문제제기를 한 당사자는 문제 제기 자체로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으며, 서울대학교 및 다른 구성원은 이러한 권리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할 의무를 지닌다.
문제제기 당사자가 공적 처리과정을 이용할 경우, 그는 자신의 권리를 보장 받기 위해 필요한 모든 정보를 적절한 절차에 따라 제출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불합리한 피해를 받지 않도록 신상정보를 보호받을 권리를 가진다.

 

이 항목은 문제제기를 할 권리가 교내 각종 가이드라인과 규범 중에서 처음으로 성문화된 경우이며, 16년 인권 가이드라인 제정안의 성격을 명확히 보여준다. 16년 인권 가이드라인은 학생사회, 학교 공동체 내에서 인권침해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그 사후처리 과정에서 행사되어야 하는 권리와 보호받아야 하는 사항을 공식적으로 기록한 문서였다. 매우 당연한 것이지만 어디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계속 의심당하고 묵살되었던 권리를 문서로 기록해 ‘조용히 있지 왜 굳이 나서서 문제를 만드느냐’는 시비에 대꾸할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해당 제정안이 목표로 하는 인권침해사항에 대한 해결의 방향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다음은 제16조에 대한 해설이다. “제20조 1항은 구성원이 인권을 침해당한 경우 자치조직, 소속 부서, 인권센터 등에 구제조치를 요청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인권 침해의 구제 수단은 될 수 있어도 공론화를 통한 비슷한 종류의 사건 재발 방지, 공동체적 문제 해결 등의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는 미흡하다.” 기존의 사건 해결이 제도에 의존하는 사후처리적 성격을 띠었지만, 학생사회에서는 공동체 차원에서 자율적으로 인권을 실현하는 공동체를 구현하는 것 자체가 목표임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인권 가이드라인이 공식적으로 표방하는 방향성이기도 했다. 해설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인권센터의 해결 과정에 사법적 처리가 존재하며, 인권 가이드라인은 사법적 효력 보다는 공론화, 공동체적 해결 등 사회적 대응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공동체적 해결은 사회대 학생회의 반성폭력 회칙에서 언급된 개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3년 9월 개정된 사회과학대학 학생회 반성폭력학생회칙에서는 성폭력 사건의 공동체적 해결을 “사건이 일어났을 때 피해자의 권리와 삶이 훼손되는 것을 최소화하고, 공동체가 성폭력을 용인하지 않음을 확인하며, 재발을 막기 위한 변화를 도모함”으로 규정한다.(10) 단순히 가해자 한 명을 처벌하는 것으로 마무리짓지 않고 공동체의 문화와 구조의 차원에서 책임을 묻고 이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다. 16년 인권 가이드라인
은 이와 마찬가지로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단순히 개인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학생사회의 차원에서 서울대학교를 인권이 존중되고 실현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16년 10월 본부에 제정안을 전달해 인권 가이드라인을 확정해야 했지만 시흥캠퍼스 사태로 인해 인권 가이드라인은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논의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채 그대로 남게 되었다. 이후 인권 가이드라인은 갈 곳을 잃었고 교내 구성원의 인권도 마찬가지였다. 18년 H교수 사건은 3개월 정직으로 끝났고, 19년 서어서문학과 A교수 사건 해결을 요구하는 과정에서 학생사회의 의견이 반영될 길이 없어 연구실의 학생공간 전환 등의 방법을 동원해야 했다. 다시 인권 가이드라인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3. 인권 가이드라인, 인권 ‘규범’으로 부활하다 - 19년 11월 인권헌장


더 이상 학생이 주도가 아닌 인권규범, 아쉬운 면을 보이다

 

2019년 3월, 인권 가이드라인이 인권센터 주도로 다시 제정된다는 계획이 발표되고 11월에 인권센터 주최 토론회에서 ‘인권 규범’의 초안이 공개됐다. 이 초안을 작성한 서울대학교 인권헌장 제정에 관한 연구팀은 교수 네 명, 인권센터 전문위원 한 명, 총학생회장과 대학원 총학생회 대표, 대학원생 세 명 총 열 명으로 이루어져있다. 인권센터에서 제공받은 20년 1월 8일자 수정안(내부 논의용이며, 1월 30일에 수정안을 발전시킨 서울대학교 인권헌장(안)을 수록한 보고서가 발간될 예정이다)을 16년 학생사회 제정안과 비교해봤을 때 큰 틀은 비슷하지만 크게 두 가지의 차이점이 눈에 띄었다. 첫 번째로 16년 제정안의 제13조 [노동과 업무에 관한 권리]가 20년 1월 수정안에서는 제7조 [연구, 교육, 직무 수행 조건에
대한 권리]로 축소되었다. 다음은 제7조의 전문이다.

 

제7조 [연구, 교육, 직무 수행 조건에 대한 권리]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인간의 존엄이 존중되는 조건에서 연구, 교육 및 직무를 수행할 권리를 가진다.

서울대학교는 안전하고 건강한 환경, 정당한 보수, 적절한 휴게시간·휴일·휴가, 임신·출산·육아에 대한 적절한 지원, 장애에 대한 편의 등을 보장하여야 한다.

 

15년 논의안의 제10조 [근로의 권리]에서 근로에 대한 정당한 보수에 대한 권리만 명시되어 있던 것과는 달리 적절한 휴가와 출산, 육아에 대한 지원 등으로 확대된 점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 하지만 16년 제정안에 비하면 아쉬운 부분이 있다. 해당 항목에 대해 연구책임자 송지우 교수에게 문의한 결과 다음과 같은 답변을 얻을 수 있었다.

 

“노동권을 다루는 핵심 조항은 7조입니다. 물론 다른 조항-가령 건강권, 집회와 결사의 자유 등-도 노동자를 포함한 모든 구성원의 권리를 차원에서 유관하겠습니다.”(11)

 

두 번째로, 16년도 제정안의 제16조 [문제제기를 할 권리]가 20년도 인권헌장 수정안에서는 삭제되어있다. 16년도 제정안의 제16조가 제20조 [인권침해의 예방 및 구제]의 “1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본 문서에 기술된 권리를 침해당했을 시 자치조직, 소속부서 등의 유관기관 또는 인권센터에 구제조치를 요청할 수 있다.” 항목에서 파생되어 공동체적 해결을 강조하기 위해 제정되었음을 고려했을 때, 이와 같은 변화는 “문제제기를 할 권리”가 20년 1월 수정안의 제18조의 내용과 겹친다는 판단 하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기존의 “문제제기를 할 권리”가 인권 가이드라인(또는 헌장)에 있어 필수적인 조항은 아니었으나, 즉 이 권리가 따로 명시되지 않아도 피해에 대한 구제와 해결이 가능하지만 인권이 실현되는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음을 생각하면 매우 아쉬운 일이다.

 

다음은 20년 1월 수정안 제18조의 전문이다.
제18조 (침해와 구제)
서울대학교 구성원은 이 헌장에 규정된 권리가 침해되었을 때 이에 대해 효과적인 구제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서울대학교는 이 헌장에 규정된 권리의 침해가 발생하였을 때 효과적인 구제를 제공하는 절차를 확립·시행하여야 한다.
서울대학교는 제2항의 절차에서 사안 당사자의 알 권리와 참여권을 보장하고 사안 관련자의 인격을 존중하여야 한다.

④서울대학교는 인권침해의 구제절차 등에 관한 정보를 구성원에게 알기 쉽게 제공하여야한다.

 

정리해보자면, 비록 대학본부에 직속되지 않고 자율성을 가진 기관인 인권센터에서 주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학생사회가 온전히 주도권을 가지지 못한 만큼 내용의 급진성 측면에서 20년 1월 인권헌장 수정안은 아쉬운 모습을 보인다.

 

 

인권 ‘규범’으로의 변화 -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19년 11월 15일 열린 서울대학교 인권규범 제정에 관한 연구발표와 토론회. 출처 : 서울대학교인권센터홈페이지

그러나 그 어떤 조항보다도 눈에 띠는 변화는 인권 “규범”이라는 이름이다. 기존의 인권 가이드라인은 규칙이나 규범이라기보다는 느슨한 의미의 지침에 가까운 의미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인권센터의 해결 과정에 사법적 처리가 존재하며, 인권 가이드라인은 사법적 효력 보다는 공론화, 공동체적 해결 등 사회적 대응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라는 해설문에서 볼 수 있듯 인권 가이드라인으로 실제 처벌을 규정하거나 사법적 효력을 가져 규범의 역할을 하는 것보다는 인권 가이드라인의 내용으로 공동체 차원에서 인권 존중이 이루어지는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것에 방점을 두었다. 이러한 인권 가이드라인의 이름이 인권 규범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비록 그 내용에 큰 차이가 없더라도 이제는 구속력과 실효성을 가지는 방향성을 추구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이런 변화의 이유는 인권센터에서 구성원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설문조사에서 구성원의 요구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은 무엇보다도 인권규범이 강제력이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인권규범이 공식적인 학내 규범으로 통과됐을 때 그 실효성 보장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묻는 질문에 54%가 인권규범을 학칙으로 제정하는 것을 강제하는 ‘인권규범의 구속력 강화’를, 53.1%가 ‘인권규범 위반 시 제재 및 권리구제 규정의 명문화’를 선택했다.(12)

 

인권 가이드라인에서 인권규범으로의 변화를 모두가 반긴 것은 아니었다. 토론회에서 한 참가자는 “‘헌장’이 부정적인 인상을 준다”고 지적하며 “대학의 가장 큰 가치는 자유, 창의, 상상이며 인권 규범이 대학 사회에서 후진적인 것일 수 있음을 주장”하고, “더불어 서구 대학에서 상위규범인 헌장을 제정하지 않은 것을 보면, 이 규범이 스스로에 올무가 되는 규범일 수 있음을 우려”했다.(13) 


이 발언이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는 논외로 하고, 인권규범의 존재가 과연 자율이라는 가치와 양립 불가능한지를 검토해보자. 이 질문에 대해 인권헌장 제정 연구책임자 송지우 교수(정치외교학부)는 “자유의 중요성이 규범에 반영되었으며, 헌장이 실현하고자 하는 이상은 모두의 평등한 자유와 양립 가능한 최대한의 자유로, 특별히 급진적이지 않은 칸트적 자유”라고 답했다. 자율, 특히 대학이라는 공간에서의 자율은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칸트의 자율 개념을 짚어보자.

 

자율은 마음대로 하고 싶은 것을 모두 하는 것이 아니며 일정한 가치관과 판단에 따라 행동의 규칙을 정하고 그것을 따르는 일이다. 인권이라는 가치에 입각해 행동과 일의 규칙을 정하고 그것에 따른다면, 즉 인권규범을 제정해 이를 준수한다면 질문에서 말하는 자율을 최대로 실현하는 셈이다. 인권규범은 공동체적 해결, 자율적 해결을 위한 밑바탕을 마련하는 작업의 일환이다. 인권규범도 없는 백지 상태에서 기존의 피해와 인권침해가 계속된다면 이것이 과연 대학의 자율이 실현되는 광경일까.

 


현재 가능한 인권규범의 역할 - 실효성 있는 기준으로서

 

앞에서 언급한 토론회에서의 질문 내용에서 볼 수 있듯, 인권헌장을 둘러싼 논의에서는 인권규범이 마치 ‘인권독재’의 시작인 것 마냥 그려진다. (당장 인권헌장에 대한 대학신문 기사에 달린 댓글만 봐도 보수 기독교 세력이 동성애 독재의 출현을 두려워하는 광경을 구경할 수 있다.) 인권헌장의 제정을 찬성하는 측에서도 인권헌장에 대해 마치 법이나 학칙과도 같은 구속력을 기대하는 경우가 꽤 있다. 그러나 인권규범이 법은 아니다. 기존의 학칙, 헌장과 비슷한 구속력을 공식적으로 가지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을 것이다. 수강하는 데 한 시간이 걸리는 온라인 강의 하나(위에서 언급한 인권센터 주관 인권/성평등교육)를 의무화하는 데도 3년이 넘는 시간이 걸리고 있다. 인권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공식적인 구속력을 가진 규범으로 만들기에는 또 엄청난 시간과 자원이 소진될 것이다. 인권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말이다.


지금으로서 인권헌장에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실효성 있는 가이드라인의 역할이다. 최근 인권침해 가해자들에 대해 용납하기 어려운 수준의 가벼운 처벌이 내려졌을 때, 그 (표면상의) 이유는 대부분의 경우 관련 규정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인권헌장이 그 관련 규정이 될 수 있다. 인권헌장제정 이후 인권침해사건이 발생했을 경우 그 해결과 가해자 처벌 과정에서 인권규범이 기준이 되어 그 결과가 문서로 남고, 이 선례를 바탕으로 추후 사건에 대해서도 인권규범이 해결의 기준이 되는 것이 현재 가능한 인권헌장의 역할이다. 결과적으로 인권헌장의 내용이 공동체의 기준이 되기를, 인권을 말할 때면 언제나 물고 늘어지는 그 ‘합의’의 내용이 되는 것이 인권헌장의 바람직한 활용 방안이다.

 

인권헌장은 학생의 의견이 거의 반영되지 못하는 학칙, 서울대 헌장 등에서 고려하지 않는 권력과 차별의 문제를 인지하고 이를 시정할 것을 성문화한 거의 최초이자 유일한 문서이다. 잠시 세계인권선언의 성격을 생각해보자. 세계인권선언은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 않으며 그 내용을 어겼다고 해서 이것 하나에 근거해 누군가가 사람을 잡으러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계인권선언은 세계 모든 곳에서 인권침해를 예방할 때에 근거가 된다. 그 자체로 절대적인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에 권리를 보호하는 보편적인 근거가 되어준다. 세계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로 대접받아야하는지, 세계가 인간의 삶에 있어 어떤 공간이 되어야 하는지를 규정한 문서이기 때문이다. 인권헌장은 서울대학교의 세계인권선언이다. 인권헌장은 서울대학교를 어떤 학교로 만들어갈지, 어떤 공간이 되어야할지를 이야기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조이자 방향성의 제시이다. 이것도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과연 이 공간을 학교라고 불러도 될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1) “대학 내에서 학생들이 마주하는 불합리한 상황에 대해 학생사회의 공론화가 필요하다”,「인권 가이드라인 제정 주체 학생사회로 넘어와」, 『대학신문』, 2016.03.20. 
(2) 석사과정 재학생 A씨가 박사과정 선배 B씨를 성폭력 혐의로 고소했으나 B씨가 2심에서 무죄 선고를 받은 사건 
(3) 「서울대 총학 "'대학원 성폭력', 학교가 해결하라"」, 『머니투데이』, 2012.09.25 
(4) 「인권 가이드라인, 베일을 벗다」, 『대학신문』, 2013.10.13. 
(5) 이 조항의 제정에는 여성가족부의 '2012년 대학 성희롱 예방 교육실시 현황' 자료에서 서울대의 성희롱 예방교육 이수율이 29.1%를 기록하고, ‘2013년 대학 성희롱 방지 조치’ 자료에서도 성희롱 예방교육 이수율이 전국 416개 대학 중 400위를 기록한 것이 영향을 준 듯 하다. 
「"대학 교직원 절반 이상 성희롱 예방교육 안받아"」, 『뉴스1』, 2013.08.09 
「서울대, 성희롱 예방교육 이수율 416개 대학 중 400등」, 『한겨레신문』, 2014.12.01 

(6) 「'상습 강제추행'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 구속기소」, 『연합뉴스』, 2014.12.22 
(7) 「서울대, 경영대 성추행 교수 파면」, 『국민일보』, 2015.06.09 
(8) 「인권 가이드라인 제정 주체 학생사회로 넘어와」, 『대학신문』, 2016.03.20 

(9) 「인권 가이드라인 전문 및 해설서」, 『대학신문』, 2016.09.25. 

(10)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학생회 반성폭력학생회칙」, 2013.09.27. 개정, http://so.jinbo.net/document_srl=111549 

(11) 회신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권리의 차원에서 유관하겠습니다”의 오기로 보인다. 

(12) 「인권규범 설문조사, 전체 결과는?」, 『대학신문』, 2016.09.25. 
(13) 김현우, 「[후기] 서울대학교 인권규범 제정에 관한 연구 발표와 토론회」, 서울대학교 인권센터 홈페이지

http://hrc.snu.ac.kr/board/news/view/3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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