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영양제 중독, 보건의 속살을 드러내다
대학동데친인간
1. 학교, 영양제에 의존하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영양제는 내 생활의 한 축이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꼭 영양제를 하나 삼켰다. 영양제 통을 넣어두던 내 사물함에서는 비타민 B의 고약한 냄새가 났고 친구들끼리 어떤 영양제가 좋은지 정보를 교환하고 이번 약이 떨어지면 그 약을 사야지 다짐하기도 했다. 영양제를 아무리 먹어도 기력이 나지 않으면 수액을 맞고 기를 쓰고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지금 학교를 다니는 학생이라고 해서 이런 생활과 거리가 있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영양제(1)는 학생의 일상에 자리를 잡은 지 오래이다.
2. 왜 학교는 영양제에 의존하게 되었나?
2.1. 학생의 경우
영양제가 어떻게 학생의 필수품이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학생이 주로 시간을 보내게 되는 학교라는 공간을 이해해야 한다. 학교는 사회 전체에 팽배한 과로신화를 그대로 답습하고 재생산하는 공간이다. 현재 학교의 거의 모든 요소를 결정하는 입시 문화를 생각해보자. 이제는 유행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오래되고 널리 알려진 “4당5락”은 ‘네시간 자면 합격하고, 다섯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뜻이다. 통상 권장되는 수면시간의 반절만 휴식을 취하고 나머지 시간은 공부에 몰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단순 풍문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한국의 고등학생들 은 주중 평균 5.65시간 수면을 취한다.(2) 평균치의 맹점을 고려해보면 그보다 훨씬 적게 수면을 취하는 학생도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청소년 인권단체 아수나로가 2015년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고등학생은 하루에 평균 12시간 1분을 학교에서 보내는 것으로 나타났다.(3) 공부가 단순히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학습 노동’임을 생각할 때, 5시간 잠을 자고 학교에서 12시간을 보내는 한국의 학생들은 그 어떤 노동자 못지않게 일상적으로 과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2.2. 교사의 경우
학교의 또 다른 주축인 선생님에게 피로를 호소해도 소용은 없다. 교원단체 `실천교육교사모임`이 정리한 교사들의 행정업무 목록에 따르면 초·중·고 교사들이 처리해야 하는 연간 업무 목록은 227가지에 달하며, 교사들이 처리해야하는 행정업무 공문량은 하루 평균 20~30건 수준이다.(4) 올해 5월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교사의 32퍼센트가 ‘교직 생활에서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교육과 무관하고 과중한 잡무’를 꼽았다.(5) 통계자료로 교사의 과로가 잘 와닿지 않는다면 내가 만난 선생님들의 예시를 보자.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담임선생님의 책상에는 언제나 홍삼 팩이 있었고 다른 한 선생님은 수업 준비, 공문 처리, 교내행사 계획 등 과도한 업무 때문에 매일 세 시간의 수면을 취하고 수업을 하셨다. 그 분은 자조적인 말투로 말씀하곤 하셨다. “저는 오늘도 세 시간을 잤어요. 여러분은 이렇게 살지 마세요.” 그러나 그 공간 안에서 마음대로 “이렇게 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렇게 학교의 거의 모든 구성원이 과로를 내면화하고 과로신화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피로는 허락되지 않는다. 피로를 호소해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다 그렇게 공부하고 일하고 사는데 꾀병 부리지 말라는 말만 돌아올 뿐이다. 이제 학교는 과로신화를 내재하고 재생산하는 공간이 되었다.
3. 왜 영양제여야 하는가?
3.1. 건강은 이제 개인의 책임
학생이 피로한 것까지는 이해해도 왜 피로를 영양제로 해소하려는지가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이제 피로를 해소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것은 온전히 학생 개인의 몫이 되었고, 학생으로서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접근 가능한 수단이 영양제로 국한되어있다. 왜 학생의 건강 관리가 개인의 몫이 되었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범위를 조금 넓게 잡아 국가 차원의 보건정책의 흐름을 살펴봐야 한다. 『자본주의의 병적 징후들』에서 콜린 레이스는 보건과 국가의 관계를 분석하며 자본주의논리가 보건의료 분야에 침투한 결과 해당 분야는 민간 자본의 흐름에 흡수되었음을 지적한다. 19세기 영국에서 보건의학에 발달에 따라 사망률 혁명(사망률이 급격히 감소한 것을 말한다)이 일어난 이후 건강과 보건의료 분야는 국가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할 것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건강은 개인이 시장에서 제공하는 민간 의료상품, 의약품 등을 통해 유지하고 관리해야 하는 것이 된 것이다. 개인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문제는 등한시된다. 덩달아 건강관리를 잘 수행하면 ‘자기관리’에 성공한 것으로 칭하며 보상하지만 이에 실패하는 이는 기본적인 자기관리도 되지 않은 개인으로 치부해 탈락시키는 분위기도 조성되었다. 예를 들어 담배를 끊지 못해 호흡기 질환에 걸린 노동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현대 사회에서 그는 건강 유지에 필수적인 금연에 실패해 그에 걸맞는 결말을 맞은 개인으로 간주된다. ('보건소에서 금연 프로그램을 제공하는데도 계속 담배를 피우다니, 그것은 그의 잘못이다') 그러나 애초에 담배라도 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환경을 사회적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개선하고 그의 건강을 혼자 관리하지 않아도 되도록 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6)
건강 유지에 대한 이런 태도는 학생의 행실에 대한 보상과 처벌에서도 드러난다. 출결 기록이 입시 결과에 반영되는 학생부종합전형에 대해 한 입시 컨설팅 전문가는 이렇게 말한다. “병결이 너무 많아도 입시에서 불리하다.
공부를 위한 체력을 기르고 유지하는 것도 학생의 의무이기 때문이다.”(7) 이렇게 학생들은 두 가지의 양립 불가능한 목표를 수행할 것을 요구당한다. 턱없이 부족한 휴식을 취하며 과로를 반복하는 동시에 어느 정도의 성적을 유지하면서 이 생활을 계속할 수 있을 정도의 체력과 건강을 유지해야 한다. 적당히 수면을 취하고 영양을 섭취하는 건강한 ‘표준적’ 생활방식을 영위하는 인간으로서 산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이 간극을 메워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영양제이다.
3.2. 그 틈을 파고드는 영양제 산업
영양제 산업은 과로신화의 필수적인 부품 역할을 하는 동시에 과로신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보건의 사유화, 개인화에 의해 점차 개인의 책임이 되어가는 건강관리를 먹고 성장한다. 이는 영양제의 광고와 홍보 방식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대부분의 영양제 광고는 피로한 일상을 제시한 후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영양제를 제시한다. 여기서 문제는 피로가 무엇에서 비롯되는지, 그것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생각할 여유가 주어지지 않은 채 미봉책에 불과한 영양제를 궁극의 해결책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방영된 영양제 광고를 살펴보자. 옷가게에서 지나친 감정 노동을 하고 있는 서비스직 노동자는 접객을 하다 피로를 느끼며 “내 적성이 아닌가?”라고 자문한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활기찬 내레이션이 “적성에 안 맞는 게 아니라 피곤한 거에요!”라고 외친다.(8) 이 패턴은 같은 제품의 다른 광고에서도 계속된다. 피로를 유발하는 상황과 처지에 있는 다양한 인물들이 영양제를 먹으면 피로가 해결되고, 문제도 없을 거라는 식이다. 그러나 앞에서의 서비스직 노동자가 영양제를 먹고 피로를 일시적으로 해소한다고 해서 앞으로도 피로하지 않을 것이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과한 감정노동과 (아마도) 부족한 휴식이 계속되는데 개인이 영양제를 챙겨먹는 것 하나로 건강하고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을까? 영양제 산업은 더 깊고 근본적인 문제를 내포하는 우리의 건강과 피로의 문제를 아주 개인적이고 단순한 차원의 문제로 치환함으로써 성장한다.
3.3. 영양제를 위한 변명과 의외의 대안
지금까지 영양제에게 너무 불리한 논지를 펼친 게 아닌가 싶어진다. 그렇다면 영양제를 위해 최소한의 변명을 마련해보자. 가능한 변명은 영양제는 적어도 일시적인 피로 해결은, 약속한 것은 이루어줄 수 있다는 것 정도가 되겠다. 영양제와 같은 맥락에서 태어나 사실상 같은 역할을 하는 영양주사의 경우 약속하는 피로퇴치제와 광범위한 기력 회복제로서의 역할은 과장된 것으로 드러났다.
(전략) 하지만 효과에 대해서는 의료계 내에서도 평가가 마냥 좋지는 않다. 단시간 내 체내에 수액과 함께 영양분을 공급, 혈액순환을 원활하게 해 기운을 회복한 것처럼 느끼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김경수 서울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탈
수 증상이 있거나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노인환자 등에게는 일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지속적으로 수액주사를 맞은 이들의 건강과 삶의 질이 좋아졌다는 의학적 지표는 없다”고 말했다. “아무리 몸에 좋은 영양소를 체내에 투여해도 즉각적으로 효과가 발생하는 것은 없다”(박민선 서울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 “주사 그 자체보다 일정시간 긴장을 풀고 누워서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잠시나마 쌓였던 피로나 통증이 가시는 것”(홍성진 여의도성모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 등의 냉혹한 평가마저 나온다.(9)
영양제가 홍보된 만큼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해진 시점에서, 건강을 회복시키는 방법에 대한 실마리는 의외의 지점에서 등장한다. “일정시간 긴장을 풀고 누워서 휴식을 취했기 때문에 잠시나마 쌓였던 피로나 통증이 가시는 ”이라는 말을 보자. 이 말을 통해 충분한 휴식은 무엇보다도 강력한 피로 퇴치제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첨단 영양제로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내는 것보다는 충분한 영양 섭취와 휴식으로 매일의 생활을 확보해내는 것이 더 확실히 건강을 보장할 것이다.
4. 정말로 건강한 학교를 위하여
이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다시 개인의 기본 체력과 건강유지가 공공의 과제로 여겨져야 할 것이다.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노동시간이 보장되어야 하고, 소득이 낮은 사람은 영양이 없는 음식을 섭취하게 되는 식품산업의 구조도 바뀌어야 한다. 모두 광범위하고 긴 작업이 필요한 사안이다. 학교 내부에서 모두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학교와 그 구성원들이 진정한 건강이 무엇인지를, 그것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지를 생각하고 배우는 기회를 마련할 수는 있다. 현재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보건교육은 성교육, 전염병 예방교육 등에서 그치고 있으며 학교 보건정책도 전염병 예방과 비만예방 캠페인 정도에서 그친다. 몇몇 지자체에서 ‘건강 교실’ 운영을 논의하고 시범 운영하고 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적극적으로 건강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말로 건강을 원한다면 학교가 영양제를 입에 털어넣는 손을 멈추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건강인지 생각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1) 이 글에서는 영양제의 범주에 개인병원에서 홍보하는 ‘마늘주사’, ‘비타민주사’와 같은 영양주사도 포함시킨다, 수요를 발생시키는 기제가 일반의약품 형태의 영양제와 같은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2) 「고교생 57%가 하루 6시간도 못 자…장년기 고혈압·당뇨 위험」, 『중앙일보』 2017.09.19
(3) 아수나로, 『2015 대한민국 초·중·고교 학생 학습시간과 부담에 관한 실태조사』, 2015.
(4) 「우범지대까지 파악하라니…잡무 시달리는 교사들」, 『매일경제』, 2019.04.11.
(5) 「교사 87% "사기 떨어졌다"…최대 고충은 '학부모 민원'(종합)」, 『연합뉴스』, 2019.05.13.
(6) 콜린 레이스, 「건강, 보건의료 그리고 자본주의」, 『자본주의의 병적 징후들』, 후마니타스, 2018, pp.34-38.
(7) 「[김형일의 입시컨설팅(96)]-“대입은 전략이다” 학교생활기록부 ② –출결상황·수상경력」, 『미디어펜』, 2019.03.23.
(8) 「[아로나민 골드] 적성에 안 맞는게 아니라.. 혹시!?」, https://youtu.be/rIoa1nyAfaI
(9) 김치중, 「감기에도 숙취에도 수액주사 맞으라는 병원」, 『한국일보』, 2018.12.31.
'34호 - "학교를 안 갔어" (2019 여름호) > 기획 - 아파서 학교에 안 갔어 : 학교와 건강, 보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획 - 학교와 건강, 보건➁] 다양한 몸의 경험들이 공동체의 운영원리가 되는 공간을 꿈꾸며 -생리공결제 논의를 중심으로 (0) | 2019.09.24 |
---|---|
[기획 - 학교와 건강, 보건➀] 아파도 쉴 수 없는 학교 (0) | 2019.09.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