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며

- 외롭지 않게, 아프지 않게

딸기맥주

 

 

얼마 전, 스물네 살의 비정규직 노동자는 일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는 나와 같은 나이였다. 그는 석탄운송설비 컨베이어벨트 사이에 말려 들어가 몸이 잘렸다고, 여섯 시간 동안 그 상태로 방치되어 있어야 했다고 했다. 1년 전에는 제주도에서 특성화고 현장실습을 하던 청소년 노동자도 음료공장의 컨베이어벨트에 목이 끼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2년 전에는 구의역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비정규직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죽음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슬퍼하고, 아파하고, 추모한다. 그러다가 또 다시,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댓글에는 그런 글들이 달린다. “학창시절에 공부를 안 해놓고, 노력도 안했으면서” “노력해서 좋은 대학 나온 내가 똑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냐는 말들은 순식간에 많은 공감과 추천을 받고, ‘가장 인기 많은 댓글이 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이런 죽음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안타까워한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면, 정규직 되기에 실패하면 그것은 곧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사람들이 되고, 제발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 외치면, “경쟁에서 승리한 나와 패배한 너는 같은 사람일 수 없다는 말이 돌아오는 사회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썩은 동아줄을 받아 안고 오늘 떨어질지 내일 떨어질지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향해, ‘그럴 만 하지’, ‘그래도 돼라고 말하는 역할을 대학 입시가, 정규직-비정규직 차별이 담당하고 있다. 경쟁과 평가, 서열화의 결과가 죽음과 생존을 가르는 시대가 되었다.

학교교육으로 인해 악순환의 고리는 점점 강화된다. 이 시대의 학교는 진실을 위해 복무하지 못한다. 차별을 정당화하고, 죽지 않기 위해 열심히 하라고 채찍질하며, 경쟁에서의 승리가 앞으로의 인생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강조한다. 교사들은 모든 학생들이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면서, 누군가가 위로 올라가면 누군가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알면서도 하면 된다”, “더 노력해라라는 말만 반복할 수밖엔 없다. 교육과 성장은 없고, 평가 그리고 높은 평가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내뱉는 주술만이 존재할 뿐이다.

경쟁에서 승리한이들은 그러면, 잘 살아가고 있는가? 살아남은 이들은 행복한가? 살아남은 이들 앞에 놓여있는 것은 그냥 조금 덜 썩은 동아줄일 뿐이다. 끝이 어딘지 모르는 동아줄을 부둥켜안고 버티다가, 실패하면 떨어지는 삶, 너무 힘들어서 그냥 놓아버리는 삶이 우리 앞에 있다. ‘꿈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대기업 사원들이나, 공무원들의 과로사나 자살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숱한 평가의 문들을 운 좋게 통과해 온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위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잡아야만 하는 동아줄뿐이다. 그래도 썩은 동아줄보다는 낫지 않냐고, 내가 노력해서 이 정도 동아줄을 잡은 것이라고 위안해야 겨우 버틸 수 있는 삶만이 놓여있다.

그러니까 묻고 싶은 것이다. 이 죽음의 시대에 우리가 겪고 있는 경쟁이라는 것은, 평가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다른 사람의 죽음에 눈 감고, 그러다가 다시 어떤 식으로든 비참한 죽음을 맞는 존재인가? 아리스토텔레스 삼단 논법식의,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외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말은 그래서 틀렸다. 경쟁에 내맡겨지는 사람들 중,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결론은, 그래서 어차피 인생은 고통이니 받아들이자는 체념이 아니라, 인간은 고통 받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항변이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은 없앨 수 없는 숙명이 아니고, 모두가 겪고 있는 이 만들어진 고통의 원인을 함께 걷어내자는 저항이다. 죽음의 행렬을 멈추고 인간이 살 수 있는 땅을 만들자는, 아직 구현되지 않아 결코 진부할 수 없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그러려면, 이 동아줄의 끝이 어디인지, 이 동아줄의 끝을 잡고 우리를 가지고 노는 이들은 누구인지 직시해야 한다. 줄을 끌어내리고, 모두가 안간힘을 써서 올라가지 않고도 이 땅 위에서 살아남을 수 있고, 살아남는 것을 넘어 잘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

그 시작은 경쟁과 평가, 서열화와 차별에 대한 반대일 것이다. 학교에서의 경쟁 완화, 대학 구조조정 반대와 대학 서열화와 입시경쟁의 폐기, 비정규직을 없애는 것 모두가 하나로 연결된 우리의 과제이다. 이 과정 속에서 비로소 우리가 이 지면을 빌어 말하고자 하는 교육이라는 것도,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스물네 살 청년노동자 김용균과 이 글을 쓰는 스물네 살의 대학생 나는 다르지만, 그래서 감히 나는 너다라고 말하는 것이 죄스럽지만, “외롭지 않게, 아프지 않게, 함께하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을 외롭지 않게, 아프지 않게 하는 일은 나를, 그리고 수많은 너를, 우리를 외롭지 않게, 아프지 않게 하는 길임을 안다.



평가 대상으로서의 교사

- 교원성과급제와 교원평가제를 중심으로

익명이

 

 

들어가며

 

학교 내의, 학교 간의 경쟁을 교사는 피해갈 수 있는가? 교원성과급제, 교원평가제와 같은 제도들은 교사를 평가의 대상으로 세우고 임금 격차를 늘리며 경쟁을 유도하고 있다. 기간제 교사와 정규직 교사의 갈등, 기간제 교사의 처우 문제 역시 무한경쟁장인 학교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학교는 어떻게 경쟁의 장이 되었으며 왜 교사들은 평가와 경쟁에 속박되어있는가?

90년대 말 우리나라는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경제구조의 변화를 겪게 된다. IMF 금융위기로 인해 고용시장을 개방하라는 서구의 압력을 받고 우리나라에는 신자유주의가 도입되었다. 서구 중심의 세계질서에 비자발적으로 편입되면서 우리나라는 신자유주의화가 이루어지고 현재 노동시장, 경제 분야, 교육, 공공영역 등 다양한 영역에 시장의 논리가 적용되고 있다. 신자유주의라는 이데올로기는 경쟁을 통해 소비자의 선택을 받은 대상만 살아남게 하며, 소비자의 선택의 폭을 넓혀 끊임없는 경쟁을 유도한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흐름에 따라 우리나라의 교육도 시장화가 되고 있다. 전 이명박, 박근혜 정권이 외고, 마이스터고, 자사고 등 학교의 다양화 정책을 추진한 것은 바로 이 흐름에 따른 것이다. 학교를 다양화함으로써 교육에서의 소비자인 학생과 학부모의 선택의 폭을 넓혀 교육의 질을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이 정책의 전제는 학교에 자율성을 부여하고 알아서 경쟁하게 만들 때 교육의 서비스가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더 이상 교육에 대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지만, 일정한 표준을 정해서 표준에 미치지 못하면 불이익을 주는 주체로 행위 한다. 국가수준학업성취도평가를 실시하여 학교의 학업성취도 수준에 미치지 못한 학교에 불이익을 주는 것이 그 예시이다.

 

 

 

 

교원 성과급제

 

교원성과급제에서도 이것이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나라의 교원성과급제는 20011월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교원성과급은 교사 개인이 수행한 업무수행 결과, 성과 등 산출차원 요소에 기초한 보수이다. 성과급 도입이 발표되자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의 교원단체들은 성과급이 교직의 특수성에 비추어볼 때 적합하지 않다는 점, 객관적이고 공정한 평가체계가 미비하다는 점, 교직사회의 갈등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 등의 이유로 교원성과급도입을 전면적으로 거부하였다. 교육부는 교직단체, 시도교육청, 중앙인사위원회와 수차례의 협의를 거쳤으나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하다가 8개월이 지난 20019월 성과급을 교원복지차원에서 시행하기로 함에 따라 외형적으로 마무리되었다.[각주:1]

그러나 초기의 협상결과와는 달리 교육부는 차등지급 비율을 점진적으로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해왔다.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성과급은 2001년의 지급방식에 따라 90%를 균등지급하고 나머지 10%를 차등지급하는 형태를 유지하였지만 이후 차등지급 비율을 200620%, 200830%, 200930%~50%, 201050%~100%로 확대되었다. 2010년부터 개인단위 성과급이 학교 내 교사 간 협력을 저해하는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도입되었지만 이것마저 폐지되어 개인성과급으로 단일화되었다. 이에 따라 S 등급을 받은 교사와 B 등급을 받은 교사 보수의 차액이 168~240만에 이른다.[각주:2]

 

B등급 교사들이 겪는 상처와 좌절은 막대하다. 자기 비하가 조직에 대한 실망으로 이어지면서 불신의 벽을 쌓게 되고, 업무에 대한 기획, 도전, 헌신을 꺼리게 된다. 하위 등급을 받은 교사는 계속 같은 등급을 받는 경우가 많아 정신적 공황 상태로 이어지고, S등급을 받은 교사도 괜히 움츠러든다.

교원성과급 차등 지급의 기준 또한 논쟁거리이다. 학교마다 평가 기준은 다르지만 대부분 정량적 기준을 적용하므로 교사 개인별 수업시간, 수상실적, 연수시간, 담당 업무 등의 비율을 우선하여 좋은 평가 등급이 매겨진다. 학생들이 고민하는 대인관계 지도나 인성 지도, 교육활동의 결과인 학생들의 교육적 성취나 발달 수준 등은 교육의 특성상 측정이 불가해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다. 학생들 한 명, 한 명을 신경 써주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교사들도 성과를 내지 못하면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식의 평가 기준은 교사의 역량을 평가하기 위한 기준으로서의 신뢰도와 타당성이 떨어진다. 좋은 교사의 기준이 좋은 성과, 좋은 입시 결과를 내는 것이라면 결국 교원성과급제는 좋은 학교와 교사, 학생들을 줄 세우는 과열 경쟁의 장에 기름을 붓는 것밖에 되지 못한다. 또한 애초에 교원성과급제가 도입된 취지를 보면 사교육에 짓눌린 공교육의 위상을 회복하기 위해 교사들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보고, 그 추진 동력으로 보상을 전제로 한 상대평가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공교육의 위기를 교사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전제부터 재고할 필요가 있다.

 

교원평가제

 

교원성과급제와 더불어 교사의 수업 및 생활지도 능력을 신장하기 위해 2005년부터 시범 교원능력개발평가 제도(교원평가제)가 혁신적 정책으로 도입되었다. 교원평가제의 핵심 내용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 교원평가제 실시 목적은 학업성취도 향상을 위한 교사의 수업 전문성 신장이다. 둘째,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교장, 교감, 동료교사, 학부모, 학생 등이 모두 참여하는 다면평가 형식이다. 교장, 교감도 평가 대상에 포함된다. 셋째, 평가 결과 우수교원에게는 해외연수 등 인센티브를 주고 능력개발 희망 교원(지도력부족 교원)의 경우는 능력향상 연수과정’(나머지 공부)를 실시한다.

교원평가제는 학생과 학부모의 의견 창구가 생겼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교원평가제는 교원성과급제와 마찬가지로 교육에 대한 투자 대신 경쟁 체제를 도입해 교원 통제를 강화하려는 것이며 그 실효성 역시 신뢰하기 힘들다. 교육 활동은 일반 기업의 업무와 같이 단기적으로 그 효과를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때문에 어떤 방법, 어떤 항목으로 평가를 하더라도 극히 부분적일 뿐 총체적이고 합리적인 평가는 불가능하다. 수업에 대한 평가를 무엇을 기준으로 할 것인지, 어떤 방식으로 평가할 것인지는 합의되기 어렵다. 또 일반 기업의 업무 성과와 달리 교육적 성과는 단기간에 평가하기도 어렵다. 이처럼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연 1회 공개 수업으로 적격, 부적격 교원을 가려낸다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교사의 자질을 학원처럼 교수-학습 방법에서만 찾는 것 역시 합리적이라고 보기 어렵다.

뿐만 아니라 교원평가제를 실시하려는 의도와 배경을 살펴보면 교육정책의 실패를 교원들에게 전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교원평가제 도입의 근거는 실추된 공교육의 신뢰를 높이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생님들이 스스로 신뢰를 지키는 일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공교육이 위기에 이르게 된 데 있어서 교사 개인에게 그 책임을 온전히 돌릴 수 있는가? 학벌숭상주의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기반하여 과열 입시경쟁 체제를 공고히 하고 과도한 사교육비 지출을 조장하는 데 정부가 그 역할을 해오지는 않았는가? 교육에 효율과 성과 등 계량화된 경쟁 기제를 도입해서 질적 제고를 꾀하겠다는 발상은 교육을 시장화하고 기업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작년 11월 전교조 경남지부에서는 현장 교사들 1321명이 동료 교원 평가 불참 선언에 참여했다. 이들은 교사들끼리 동료에게 점수를 매기며, 서로 눈치보고 갈등하게 하는 것은 누구를 이롭게 하기 위한 것인가?”, “학생도 학부모도 교사도 모두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단지 그것은 관료들에게 유용한 통제의 도구이자 권력으로 작동할 뿐이었다는 말을 전했다. 또한 점수를 매겨 개개인을 고립시키는 평가가 아니라, 학교 공동체가 공동사고를 통해 집단적으로 성찰하는 피드백을 통해 학교 교육의 질은 높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지금껏 교원의 지도능력 및 전문성 강화를 통한 학교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실시하는 교원성과급제 및 교원평가제는 그 목적을 상실한 채 교사와 교사, 교사와 학생, 교사와 학부모 사이 위화감을 조성해왔다. 뿐만 아니라 동료를 경쟁자로 만들고 국가정책과 교육현장 관리자에 순종을 강요하는 도구로만 기능하고 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교사 평가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우선 학교는 소통협력 공동체라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교원에 대한 평가는 학교가 교육공동체로서 기능할 때 원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학교 공동체가 공동체적 사고를 통해 집단적으로 성찰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을 때 학교 교육의 질이 높아지고 교사의 전문성이 신장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교원평가의 문항을 현실에 맞게 개선할 필요가 있으며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하다. 가령, 교실환경을 개선하고, 교사의 처우를 개선하며, 학부모와의 교육 여건 및 상호작용 통로를 확충하는 등의 노력이 요구된다.

교사 공동체를 활성화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지금까지의 교원에 대한 평가가 동료를 경쟁자로 만들고 경쟁적인 분위기를 유도했다면, 앞으로의 교원평가는 교사 간 네트워크 구축을 통해 동료의 수업을 모니터링하고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서로가 평가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상호평가의 주체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나가며

 

현 정부는 공직 사회에 강요됐던 성과 중심 정책을 폐기하겠다고 약속한바 있다. 그러나 정부는 성과급을 유지하고 차등지급률만 축소했다. 지급률 축소도 딱 이명박 정부 수준으로 돌아간 것이다. 게다가 박근혜 정부가 교사 통제를 위해 핵심으로 추진했던 교원업적평가도 유지했다. 실망스러운 현 정부의 태도에 대응하여 전교조 지도부는 성과급제 폐지 청와대 청원 운동을 벌이고, 성과급 균등분배를 확대할 계획이다.

정부가 계속해서 교원성과급제를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교원성과급제를 통해 정부가 교사를 경쟁시키고 통제하며 전교조를 약화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이기 때문이다.

교사에 대한 경쟁적인 조건은 입시를 부추기기도 하고 입시가 바뀌지 않는 한 교사의 지위도 바뀌지 않는다. 이러한 악순환과 딜레마가 계속 되면서 학생과 교사들은 그 굴레 안에서 착취당하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학교라는 공간은 어떻게 황폐화되어가고 있는가? 학교의 주인이라고 간주된(?) 학생과 교사들은 사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승리하기 위해 객체화된다. 학생들이 처음 사회와 관계 맺는 공간은 학교이고, 몇 십 년 동안의 교사의 직장으로서의 공간, 생활공간 역시 학교이다. 그러나 학교라는 공간은 이들에게 경쟁의 기억을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학생과 교사 모두 학교에서 사회화하고 잘 살아남으려면 경쟁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사회가 이들에게 원하는 것이며, 우리는 그 틀에 맞춰서 정형화되고 사회가 원하는 인간상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이런 암담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투쟁하는 사람들은 남아있다. 많은 교사들이 균등분배와 명단 공개에 참가해 성과급 차등지급을 무력화하고 성과급제 폐지를 정부에 주창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교조가 실시한 설문 조사(33132)에 따르면, 90.9퍼센트가 전교조가 추진하는 차등성과급 균등분배에 참가하겠다고 응답했다. 이는 성과급에 대한 교사들의 불만이 매우 광범위함을 보여준다. 지난해에도 성과급 균등분배에 전년보다 많은 87085명이 참가했다. 정부가 징계와 금전적 불이익을 들이대며 협박하는 상황에서 많은 교사들이 이에 굴하지 않고 균등분배에 참가한 것은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며 우리를 고무적으로 만든다.

우리가 서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이 쪽일 것이다. 경쟁을 완화시키고 착취를 반대하고 학교를 학교답게 만들자는 목소리를 함께하는 사람들과 연대하여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 결국 우리의 몫이 되어야 할 것이다.

 

  1. 곽경련, 이쌍철, 「교원 성과상여금 평가 특징 분석」, 한국교원교육연구 제 31권, 2014, pp.274-275. [본문으로]
  2. 위의 글. [본문으로]






A학점이 받고 싶지만 자퇴는 하고 싶어

- 학사관리엄정화와 대학의 평가

이물

 

먼 훗날 우리는 우리의 대학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까? 동아리, 학생회, 대외활동처럼 의미 있는경험 속에 대학의 낭만을 투사할 테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받아든 성적표를 무시하지는 못할 거 같다. 신입생 때 들었던 글쓰기 교양에서 받은 낮은 성적이 실없는 농담거리로 활용되긴 해도, 숱한 강의를 들어가며 쌓아온 학점을 보면 복잡한 감정이 든다. A를 받았을 때 남몰래 느꼈던 만족감과 왠지 모를 으쓱함, BC로 범벅된 성적표가 나의 부족함과 불성실함을 보여주는 것 같은 머쓱함이 그것이다. 학점에 신경 쓰지 말자며 자신을 다독이면서도, 친구들과 나를 비교하며 작아지고, 졸업 후의 막연한 미래에 시달리기를 반복한다.

우리는 평가 받기를 계속해 왔다. 벚꽃 피는 계절과 낙엽 지는 계절에는 항상 시험이 뒤따라왔다. 어쩌면 학생다움은 공부하는 행위보다 평가받는 처지에 묶여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취업 과정에서, 현장에서 끊임없이 평가를 요구받는 모든 이들이 평생 학생인 것인지도. 우린 이미 바람직한 평생교육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대학에서의 평가는 학점’, 더 광범위하게는 졸업요건, 수강신청조건 등을 포함하는 학사관리라는 말로 압축된다. 수학능력에 대한 평가를 넘어, 졸업이라는 인증(평가)를 위해 수행해야 하는 의무와 규칙이 규정된다. 강의실 안팎에서 겪는 우리의 경험은 수치화되고 관리된다. 입학에서 졸업까지, 성적 장학금에서 학사 경고까지 길이와 높이를 갖고 유동한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라는 말, 그렇지만 성적이 좋으면 선택권이 늘어난다는 말은 참 익숙하다. 그래서 평가는 좋다는 걸까, 나쁘다는 걸까? 무슨 말을 들어도 미심쩍은 상황에서 졸업과 취업은 다가온다. 그렇게 삶은 계속되므로, 열심히 평가받을 수밖에.

 

 

학사관리는 무엇인가?

 

학사는 말 그대로 대학의 일이겠지만, 주로 대학의 교육과 관련된 업무 일체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서울대학교 학사과 담당업무를 보면, ‘학적관리, 수업 및 성적관리, 수강신청 관리, 증명발급, 학력조회, 졸업 및 학위수여 관리가 있다. 대학은 행정을 통한 학생 관리, 학생들은 이 조건에 맞는 자기-관리를 수행해야 한다.

대학의 학사관리는 사실상 광의의 평가/인증제 역할이다. 학생의 의무와 조건을 규정하고, 평가를 거쳐서, 졸업이라는 인증을 향해 가는 과정을 조절하는 것이다. 그 방식은 다양하다. 학사경고, 학생징계와 퇴학은 배제의 논리로, 학점 취득 기준과 전공 의무 규정은 승인의 논리로, 성적 평가와 차등적 복지는 능력주의의 논리로 학생을 관리한다.

이 중에서도 성적 평가는 핵심적이다. 대학은 매 강의의 성취도를 구분된 등급으로 평가받고, 그에 따른 차등적 기회 (장학, 교환학생, 취업, 대학원/유학 등)를 부여한다. 성적 평가는 다른 학사관리와 달리 매 강의, 매 학기마다 이루어지기에 상시적 주의와 노력을 요한다. 또한 학교 기능의 핵심이라고 여겨지는 교육에 대한 학생의 자격을 평가하는 상징성을 갖는다.

 



학사관리의 기능은 대학 교육의 기능에 대응한다. 대학은 교육/지식기관으로서 지식을 공유하고 학습하는 장이다. 때문에 학사관리는 명목상 학생이 대학을 거치며 학문을 성공적으로 습득할 수 있도록 의무를 부여하고, 행위를 자극하는 역할을 한다. 한편으로 대학은 노동시장의 인력 수급 역할도 하는데, 이 경우 학사관리는 학생 구분과 변별을 담당한다.

대학의 보편화와 기업화 과정을 거치며, 현대 사회의 대학에서는 인력 수급의 기능이 지배적 자리를 차지하고 지식의 공유화 학습은 예외적인 것으로 밀려났다. , 전자가 구조적이라면 후자는 학생이나 교수자의 의지에 의해 규정되는 실정이다. 그에 따라 학사관리(평가)의 기능 역시 학생을 변별하고 노동시장에 인증하는 것이 지배적이며, 예외적/의지적으로 학습을 자극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때 변별으로서의 평가는 학생의 역량을 파악하여 사회의 각 부문에 적절히 배치하고, 정해진 자원을 차등적으로 분배하기 위해 사용된다고 정당화된다. 그리고 경쟁과 공정성이 강조된다.

지식의 습득을 자극하는 평가와 노동시장 변별의 평가는 분리되는가? 때론 그렇지만 때론 그렇지 않다. 변화하는 노동시장의 요구와 학문 기관인 대학에서의 역량 강화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위적으로든 우연적으로든 일치하는 때도 있기 때문이다. 혹은 지식의 공유화 학습은 대학 본연의 선한 기능이고, 노동시장 인력 수급의 기능은 변질된 나쁜 기능이기만 한가? 그렇지 않다. 지식은 그것의 실천방식, 노동과정과 꾸준히 상호작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대학과 대학의 평가 기능이 갖는 문제를 말하자면, 첫째로 두 분야의 균형을 잃고 지식의 공유/학습에서의 기능을 사실상 완전히 소멸해가고 있으며, 둘째로 인력 수급 기능이 현실 노동시장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불안정한 노동시장과 자본의 경향을 그대로 답습하고 재생산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때문에 우리는 진리의 상아탑을 건설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노동의 균형적 상호관계를 확립해 나갈 수 있는 대학과 대학의 평가를 상상해야 한다.

 

학사관리엄정화의 역사와 배경

 

학사관리엄정화는 말 그대로 학사관리를 엄정하게, 더 까다롭게 한다는 의미다. 명분상 학생들의 학업 태도를 갖추고 성취를 늘리기 위해서, 혹은 평가에서의 엄밀성과 공정성을 도모하기 위해서라고 주장된다. 그 결과 학생들은 더 많은 의무, 경쟁에 노출된다.

신군부 정권에서 도입된 졸업정원제는 신입생을 졸업정원보다 30퍼센트 더 뽑는 제도였다. 그러나 교육의 양적, 질적 향상을 위한 국가 지원이 결여된 정원제는 학생의 단순 팽창만을 의미했고, 학생 간 경쟁의 과열과 수많은 낙오자(중도수료자)를 낳았다. 한편 군사정권 기간 동안 학사관리 엄정화는 학원 안정화의 수단으로 자주 사용되었는데, 노태우 정부 하 대교협이 199196일 발표한 학원 안정화 대책[각주:1]에는 학사제적제 부활, 학사유급제 부활, 학생회 등의 건전화를 위한 학칙 제정이 학사 관리 엄정의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다. 과장을 덧붙여 말하면, 데모 대신 학과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의미였다. 국가는 학생들을 경쟁과 엄정한 학칙 속으로 몰아넣고, 그들을 저항의 주체가 아닌 평가의 대상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다.

이후 5.31 교육개혁과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 속에서 학사관리 엄정화는 대학 간 경쟁을 떠받치는 한 축이자, 취업을 위해 경쟁하는 학생을 만들어내는 도구가 되었다. 1994년부터 대학종합평가인정제가 시행되고, 이것이 국가의 선택적 대학재정지원과 연계되었다. 평가 항목 중 핵심을 차지하는 교육의 가치는 수월성, 효율성 등이었다.[각주:2]

결국 학생들이 수월한성과를 내세우는 것이 대학 간 경쟁의 우위를 점하기 위한 중요한 자원이 된 것이다. 이에 더해, 대학이 본격적으로 기업화, 시장화되고 대학 간 경쟁과 기업의 지원이 절실해진 이후로는 취업률이 대학 평가 지표의 핵심이 되었다. 이에 대학들은 수월성 교육이라는 이름하에 더 까다롭고 경쟁적인 교육 환경을 조성해 나갔고, 기업의 요구와 인재상에 따라 교과과정과 교육 내용을 혁신하는 데에 주력했다. 이제 학사관리는 힘들더라도 열심히 수행해야 하는 의무이자 덕목이 되었다. 심해지는 취업난, 대학 교육의 상품화 속에 대학 교육은 개인의 취업을 위한 투자로 이해된다. 국가, 기업의 재정지원을 바라는 대학이 이를 적극적으로 조장할 뿐 아니라, 취업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나서서 해야 하는 처지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 앞에는 높은 졸업 요건, 학사경고/유급제 강화, 학점 경쟁과 차등적 복지지원, 출결 시스템 강화, 학생회 약화와 담임교수제, 각종 취업과 인턴십 프로그램의 남발 등이 놓여있다. 이에 대항하는 학생들의 흐름도 존재했다. 상대평가를 비롯한 여러 학사관리 엄정화 정책을 철폐하라는 요구가 산발적으로 일어나 때로는 성공했다가깝게는 일방적 학과제 전환 대응(2012년 서울대학교 인문대 학생총회 요구안)으로 기존의 반 체제를 유지한 사례 역시 일방적 학사관리와 공동체 파괴에 대한 저항으로 읽어낼 수 있다. 그러나 일련의 노력은 단기적 성과를 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학사관리와 평가의 다른 방식을 제안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평가의 구성과 구성 권력

 

앞에서 언급했듯, 역사 속의 학사관리 엄정화는 학생들을 피교육자에 정박시키고, 한편으로는 산업시장이 요구하는 역할로 길러내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평가자체의 특성이라기보다, 평가를 구성한 대학, 혹은 대학 교육에 영향을 주는 대학-자본-국가의 산물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평가의 구성방식이 적절한지, 어떻게 재구성될 수 있는지를 논의해야 한다.

지금의 평가 방식은 노동시장 인력 수급이라는 목적을 위해, 학생들을 선별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특징을 갖는다. 또한, 평가 방식의 결정권이 독점되고 있다. 직접적 결정권은 교수자에게 있고, 실질적 결정권은 대학 교육의 흐름을 주도하는 대학, 자본, 국가에 있다.

 

1) 공정성 신화와 순응적 객체 생성

첫째로 학사관리, 혹은 평가는 절대로 완벽하게 공정할 수 없다. 오히려 앞에서 살펴보았듯 모든 평가는 명확한 의도 아래 만들어진다. 평가 기준은 넓게는 국가의 학원 안정화와 자본의 인력 수급, 대학의 생존 경쟁 속에서 형성되며, 작게는 강의실 내 교수의 판단과 관점에 따라 정해진다. 곧 평가는 목적에 맞게 구성되는 것이고, 우리는 평가 기준 자체, 다시 말해 평가 목적의 타당성,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의 적합성을 따져야 한다. 전공강의의 학점을 잘 받은 학생은 해당 전공의 이해 능력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정확히 말해 해당 강의가 전공과 관련해 추구하는 목적, 요구하는 능력을 더욱 잘 수행한 것이다. 더 넓게는 대학이 조성한 경쟁적 환경에 잘 적응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이 맥락을 누락한다.

평가 방식을 독점한 결정권자들, 학사관리를 엄정화 하려는 이들은 이러한 누락을 적극적으로 장려한다. 평가 기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고, 평가의 결과가 곧 정당하고 공정한 우열을 의미해야 평가(학원 안정화, 학생 간 변별)의 목적이 잘 실현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학생들은 평가가 지향하고 있는 가치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고, 순응적 객체가 되어간다. 이에 의문을 던지기 위해서 우리는 평가의 기준을 평가해야 한다.

 

2) 교육 의미의 제한, 역량과 평가 지표의 괴리

둘째로 학사관리가 노동시장 인력 수급의 기능에 국한되면서, 교육의 의미가 경쟁의 우위에 서는 것으로 제한된다. 기실 대다수 대학생의 수강 이유는 높은(혹은 적절한) 학점을 얻고 졸업해서 취업의 경로로 진행하기 위해서다. 혹은 적어도 그 경로에서 낙오되지는 않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학사관리가 학생을 적극적으로 취업을 위한 경쟁의 영역으로 내몰기도 하고 (상대 평가 강화, 취업 교육 강제 등), 학생이 이를 체화해 그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교육을 도외시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강의실의 교육은 쪼그라드는데, 강의 내용보다 학점 자체에 집중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 때 평가는 피드백을 통해 재학습을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종료와 인증의 기능만 수행한다. 나아가 그렇게 받은 점수가 곧 자신의 성취 지표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교육 내용에 집중할 수 없고, 재학습을 자극하지 않는 평가구조는 개인의 실제 역량과 평가 지표가 괴리될 우려를 낳으며, 결과적으로 오히려 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 쉽다. 애초 학점을 받기 어려워 보이는 수업은 기피하여 교육 기회를 사전에 차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기도 한다.




3) 노동시장의 불평등 재생산

셋째로 학사관리 엄정화는 노동시장의 불평등을 적극 재생산, 강화한다. 사회의 일자리나 학습 기회는 모두에게 열려있지 않으며, 차별과 불평등이 산재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경쟁 속에서 소수에게만 양질의 일자리를 허용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주장에 자주 직면한다. 그리고 그 주장을 정당화하는 제1원리가 교육이다. 각자의 교육과정 속에서 우수한 능력을 인증 받은 사람들에게 그만큼의 대우를 해주는 것은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학사관리가 엄정해질수록, ‘승리자를 차등적으로 승인할 근거는 강력해진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애초 그 평가 기준이 불평등한 노동시장의 원리(와 조응하는 대학서열체제, 대학/학과 선별적 재정지원, 기업친화적 학습 내용, 경쟁적 학습문화)하에 구성되었다는 것, 그조차도 역량과 지표의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 괴리가 해소되더라도 각 평가지표들이 개인 역량의 절대적 판단 기준이 아니라는 것은 무시된다. 나아가서는 노동시장 자체에 대한 비판 능력도 상실하기 쉽다. 우리는 언제나 평가받는 대상일 따름이며, 평가받는 학생은 평가자의 오류를 지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대학구조개혁평가는 대학이라는 기관을 매개로 교육의 기능을 통제하는 것이라면, 학사관리는 이와 조응해 대학 내 구성원의 삶과 가치관을 매개로 통제를 수행하고 있다.



'대학입시거부로 삶을 바꾸는 투명가방끈' 소속 13명이 수능 당일 대학잆기거부를 선언하는 모습이다. 이들은 무의미한 경쟁을 멈추자고 외쳤다.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



 

적절히 구성된 평가 상상하기

 

1) 평가의 목적지향 교육의 시작점이 되는 평가

애초에 학사관리를 단순히 엄정화하는 방식이 학생의 성취를 높여준다는 주장은 이상해 보인다. 처음 한 게임에서 엄청난 실력자를 만나, 기를 펴보지도 못하고 거듭해서 지면 영 흥미를 붙이지 못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학습에 있어서도 경쟁적으로 부담을 늘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적절한 성취 과제와 자신의 역량 성장에 대한 효용이 필요할 것이다. 레포트는 마감 기한 직전에 가장 잘 써진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그 말은 마감 직전의 극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학습에 영 흥미를 붙이지 못하는 현상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교육은 자기 성장만을 위한 것도, 취업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교육은 지식 습득을 통해 한 개인이 자아실현과 노동 수행을 동시에실현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는 것을 도모한다. 사회를 이해하고 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성장시키고, 그것의 실천방식인 노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평가가 교육의 도구라면, 어디까지나 이러한 교육의 목적을 자극해야 한다. 때문에 성취지표를 넘어, 학습 과정에서의 변화와 성취를 구체적으로 피드백 받고 재학습할 수 있도록 독려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자기 성장) 한편으로 현실 노동과 연결할 수 있는 역량을 동일한 잣대가 아닌, 다양한 관점에서 제안해줄 수 있어야 한다. (노동과의 연계)

무엇보다, 평가는 교육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어야 한다. 지식의 습득, 노동 역량의 계발을 위한 조건이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평가 방식만 개선된다면 밑 빠진 독이 될 수밖에 없다. 평가는 교육을 위한 충분한 조건이 갖춰진 위에서, 또 다른 교육의 길을 가리키는 수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2) 평가의 구성 주체와 방식 - 평가 구성의 민주화

평가의 가치지향만큼 중요한 것은, 평가를 누가’, ‘어떻게구성하는지다. 평가의 목적과 그것이 낳는 효과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이를 지적해야한다.

애당초 왜 차등적 학점을 부여하는가? 교육적 목적으로만 놓고 보면 해당 강의를 수강한 학생 각각에게 장문의 평가서를 첨부하면 될 것이다. 물론 성취의 지표화 자체는 필수적이기도 하다. 학습 내용과 성취를 다른 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공통의 언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평가지표는 소통을 위한 언어 이상이다. 일률적이고, 차등적인 지표들은 취업시장의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편 최근 들어 강의평가 방식을 상대평가에서 절대평가로 전환하는 대학이 늘고 있다. 학생들에게는 학업의 부담을 덜 수 있는 좋은 일일 것이다. 때문에 이를 지나친 차등적 평가와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읽어내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이는 절반만 맞는 이야기다. 절대평가 전환과 관련한 총장의 인터뷰를 보면,[각주:3] 취업 경쟁에서 이미 학점이 변별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내리는 결정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나쁘게 말하면 이제 취업 경쟁을 위해서는 학점만으로는 부족하고, 훨씬 많은 평가지표에서의 우위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결국 그 사람의 다양한 측면을 고려하는 종합적 평가가 될지, 전방위적인 생존 경쟁을 요청하는 평가가 될지는 교육을 조건 짓는 사회적 배경, 이와 조응하는 평가 구성의 목적과 권력에 의해 결정된다. 누가 절대평가로의 전환을 결정했는가? 취업 경쟁을 고려한 대학 본부와 총장이다. 때문에 이는 취업 시장의 상황이 바뀐다면 학생들의 의견이 어떻든 간에 언제든 갈아치워질 수 있는 결정이기도 하다.

 

평가를 시장에서의 경쟁적 자원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개선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으로 요청된다. 불안정하고 위계적인 노동시장,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교육 정책, 취업 중심의 기업화된 대학이 변화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평가의 범위를 넘어선다. 대신 이 글은 평가의 범위 내에서 평가 구성의 민주화를 요청한다.

평가 구성의 민주화는, 가장 기본적으로 평가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 교육과정에 관여하는 모두가 참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평가 내용, 평가 방식과 기준 등을 교수와 학생이 함께 토론하여 결정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춰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물론 교수자 고유의 권한인 평가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평가의 구성은 함께 하되, 평가의 부여는 교수의 권한으로 남겨놓기 때문이다. (물론 평가의 구성 과정에서, 평가의 일방적 부여 역시 자기비평 등의 방식으로 보완, 대체 하자는 논의도 가능할 것이다.) 교수자와 학습자가 함께 학습의 목표와 경로를 설정하고, 교수자는 충실하게 수업을 준비/관리하고, 학습자는 평가 결과에 따라 다음 학습을 준비하는 생태계가 필요하다.

넓게는 대학의 학사관리 규칙 전반을 대학 구성원이 함께 결정하는 것, 작게는 각 단과대학의 구성원이 졸업요건과 학과별 학사관리를 함께 결정하는 것, 더 작게는 학과별 강의 평가 기준을 구성하는 정기적 공론 체계를 형성하는 것이 그 실천태가 될 수 있다.

 

 

3) 저항 가능성 교육 공동체와 교육 주체의 형성

평가 구성의 민주화는 기존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물론 그것이 실현된다고 해도, 완전히 자율적으로 평가 구성을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현실적으로 취업이 필수적인 사회에서, 노동시장이나 기업이 원하는 능력이 아닌 영역을 무작정 평가에 포함시킨다면 구성원의 직접적인 피해와 고립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나 평가 구성이 민주화된다면 적어도 기존의 시장 중심적 평가를 그대로 재생산, 강화하지 않고 긴장관계를 형성할 여지가 있다.

긴장관계의 공동체와 주체의 형성에서 온다. 평가 구성에 구성원이 함께 개입할 수 있다면, 평가를 구성하는 권력은 대학 본부나 소수 교수가 아니라 대학/학과 공동체가 된다. 그동안 평가 권력은 대학이 시장과 산업의 수요, 정부의 대학재정지원, 위계적 교수 집단에 종속된 공동체로 기능하는 것을 강화하는 일종의 도구였다. 그러나 교육에 참여하는 구성원이 직접 평가를 구성하겠다고 나설 때에, 교육 공동체의 역할을 스스로 되묻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동시에, 학생이 평가를 받는 수동적 대상이 아니라 교육의 주체로 호명될 수 있게 된다. 좋은 평가를 위해 자신의 모습을 맞춰나가는 것에만 익숙했던, 나아가 시장의 경쟁적 자원을 얻고 우위에 서는 데에만 익숙했던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교육 방향을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될 수 있을 것이다. 서로를 평가의 대상으로 타자화하지 않고, 더 나은 학습을 위해 노력하는 존재로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교육 공동체와 교육 주체가 형성된다면, 대학이라는 교육 공동체가 사회와 구축할 수 있는 긴장관계는 무엇이며, 바람직한 평가와 교육은 무엇인지 본격적으로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는 지난한 과정이 되겠지만 말이다.

 

 

결론

 

대학 생활을 하다보면, 우리가 갖는 평가의 상상력이 대학수학능력시험에 멈춰있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시험을 치르고 나면 그 시험이 얼마나 공정했는지, 시험 문제 자체에 오류는 없었는지 따지는 것을 자주 본다. 그리고 표준점수와 등급을 따지듯 학점을 비교해가며 (진심이든 농담이든) 주요 이야깃거리고 활용하고는 한다. 그러나 평가 기준이나, 우리가 평가를 받아야하는 상황 자체가 적절했는지, 그 평가는 교육을 자극하고 돕는지를 고민하지는 않는다.

한편으로 현행의 평가제도가 학업 성취를 어느 정도 적절히 평가하고 있다는 의심쩍은 미련도 남을 것이다. 빈둥대는 학생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은 분명히 다르고, 학점은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당신이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았다면, 대개는 그 평가의 구성주체가 시키는 대로 잘해온 것이다. 그렇다면 그 구성 주체가 우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 기준에 따라 (교수자를 매개로, 혹은 정말 스스로, 대안 공동체에서) 스스로를 평가하고, 다양한 평가 기준을 바탕으로 나라는 사람의 노동역량을 계발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결국 학사관리는 학사자주관리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불안정노동과 취업 경쟁의 시대, 학점을 차등적으로 매기고 스펙을 쌓고 졸업장을 따야하는 이 굴레를 쉬이 벗어날 수는 없다. 창의적 평가방식이랍시고 하는 결정들도 결국에 어떤 방식으로든 경쟁 속에 편입되는 것을, 우리는 대학 입시 제도의 무수한 변화 속에서 이미 보아 왔다. 그렇기에 더더욱 형식을 벗어나 형식을 결정하는 권력과 사회적 배경에 집중할 것을 제안한다. 만족스럽지 않은 학점이 나왔을 때, 나의 게으름을 탓하거나, 교수자의 잘못된 결정에 컴플레인을 넣는 두 가지 선택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애초 누가 나에게 학점을 주게 했는지 상상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누군가 일방적으로 부여한 옆 친구의 학점을 우연히 전해 듣고 묘한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느끼기보다, 그 사람이 보여준 삶의 맥락을 파악하고 더 나은 노력을 자극하는 조언을 주고받는 것이 훨씬 바람직한 교육일 것이라 믿는다.

 

  1. 김정인, 『대학과 권력』, 휴머니스트, 2018, p.272. [본문으로]
  2. 위의 책, p.301. [본문으로]
  3. 안석배·김연주, “올해부터 出席체크, 학점 상대평가 없다”, 조선일보, 2015.3.16.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3/16/2015031600123.html?Dep0=twitter&d=2015031600123) [본문으로]



대학에서의 평가

- 대학구조개혁평가

노누

 

우리 학교를 규탄합니다.

 

조선대학교 학생들은 올해 여름방학의 끝을 맞이하면서 아쉬움뿐만 아니라 놀라움과 분노 그리고 억울함 등 여느 대학생들과는 다른 상황을 맞이해야 했을 것이다. 이는 방학의 끄트머리인 8월에 대학기본역량진단에서 역량강화학교'[각주:1]로 선정된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학교가 돈을 어디에 어떻게 썼는지 제대로 알 수도 없었고, 자신들도 모르는 불이익이 있지는 않은지, 등록금이 비싸지지 않을지 걱정한다. 믿고 등록한 학교에서는 눈앞에 떨어진 불똥에 총장이 사퇴하고 부랴부랴 예산을 줄이겠다고 방안을 내놓았지만, 학생들의 불안감과 불안정한 미래는 여전할 것이다.

이는 서울덕성여자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율개선등급을 탈락한 학교를 규탄하는 의미로 학생들은 개강일 날 검은 마스크를 착용한 후 수업을 수강했다. 이는 대학의 수준에 대해서 규탄하고 학교의 현재까지의 건실하지 못한 행정처리와 학교의 수준에 대해서 창피하다는 학생의 입장을 표명하면서 연대를 굳힌 의미다. 그러나 대학의 입장에서는 왜 자신들이 이러한 등급을 받은 건지 분명히 알 수 없다며 오히려 억울하다는 입장이다.

학교와 교육부의 입장이 어떻든 피해는 고스란히 학생과 인근 지역 경제로 향한다. 작년에 최하 등급을 받은 한중대학교는 유령 캠퍼스로 강원도 동해에 그대로 버려진 상태다. 인근 상가와 부동산 등 지역경제의 사면초가 분위기도 말할 것 없다.[각주:2] 대학도 교육부도 학생과 시민들까지 고통스러운 대학구조개혁평가는 결국 무엇을 위한 것일까.

 


대학구조조정

 

필자가 고등학교 3학년 때 학교 칠판 한쪽에 대학구조개혁평가 결과 대학의 등급들을 정리해 둔 커다란 표가 붙여져 있었다. 원서를 쓸 때 참고하라고 붙여놓은 자료이겠지만 친구들은 웃으면서 제일 밑에 있는 것이 네가 갈 대학이다.”, “제일 밑에 있는 대학에 원서 넣어야지. 여기는붙겠지.”, “입학하자마자 대학교가 사라지면 어쩌지..”라며 농담을 했었다.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들이 결코 웃어넘길 수 없는 것임을 그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 “대학구조개혁평가”. 개혁이라는 말이 거창하고 현재 대학의 존립에 큰 영향을 줄 것처럼 느껴지지만 실상을 과연 그러한지 의문이 든다.

대학구조조정은 신자유주의의 물결로 대한민국의 온갖 분야에 구조조정 바람이 일었던 1998, 김대중 정부까지 그 연원이 올라가지만, 이는 조직의 인력 규모의 축소에 목표를 둔 정책이었다. 현재의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은 2015년 박근혜 정부에서 대학구조개혁 평가란 이름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본다. 기업에서 효율과 최대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 기계적으로 시행하는 구조조정은 비용만 줄일 수 있다면 그게 대학이든 어디든 자행되는 그러한 것이었다.

고교졸업자 수는 2011년에 65만 명에서 지속적으로 감소하여 올해인 2018년에는 입학정원이 56만 명 이하일 것으로 예상이 되고 있다. 만약 정원이 그대로 유지가 된 상태라면 올해는 고교졸업자와 입학정원이 거의 비슷해지기는 시기로 학자들은 예측한다. 차후에는 계속 고교졸업자 수가 줄어들어 입학정원을 채우지 못하게 될 상황이 발생할 것이고 정부는 여기에 대비하기 위해서 정책을 시행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이러한 저출산에 따른 학령인구 감소에 대비하고 대학교육의 질적 하락을 예방하기 위한다는 명목 아래 대학구조개혁평가가 시행되었다. 2015년 대학구조개혁평가 기본계획안에 따르면 교육여건, 학사관리, 학생지원, 교육 성과, 중장기 발전계획, 교육과정, 특성화와 관련된 항목들을 기준으로 평가하고 전문대학은 일괄 평가로 진행을 한다. 이 평가에 따라 A~E까지 등급을 나누고 낙제점인 DE를 받은 대학은 정부 재정지원 사업에서 제외가 된다. 학자금대출이나 국가장학금에서도 혜택을 받지 못하게 되면서 결국 가장 크고 직접적인 피해는 학생들에게로 떠넘겨졌고 누구도 책임지지않는 현재와 같은 상황이 발생했다.

일정 수준에 들어가지 못하면 정원 감축에 정부 재정지원도 끊기는 듯 치명적인 영향을 받기에 현재 교육부는 대학 살생부로 불리고 있기도 하다. 살생. 그야말로 죽으라는 뜻인지 특히나 수도권을 벗어나 지방으로 갈수록 일어서지 못할 정도의 타격을 받는다. 당시 박근혜 정부는 2015년에서 2017년에 1주기, 2018년에서 2020년까지 2주기, 2021년에서 20233주기로 나누어 입학정원을 약 16만명 줄이겠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그러면서 대학 구조조정을 통해 수도권과 지방 대학 간의 격차를 완화하겠다는 추진 방향을 설정했지만 이에 무색하게도 1주기 구조조정 기간에 작년까지는 지방에서 전체 정원의 75% 감축이 이루어졌다.[각주:3] 지방대의 몰락을 막겠다면서 오히려 더 빠르게 몰락을 당겨온 것이다.

 

대학구조조정 현재는?

 

문재인 정부에 이르러 이러한 평가는 1주기의 대학구조개혁방안이 전체 대학을 서열화하고 지역의 경제나 재정지원 등과 관련된 고려가 적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교육 개선에 미흡했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2주기인 올해부터는 대학 기본역량진단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입학정원을 줄일 방법을 모색했다. 구체적으로는 평가 결과 상위 60% 대학은 자율개선대학’, 하위 40% 대학은 다시 2단계 평가를 통해서 역량강화대학재정지원대학으로 나뉜다. 자율개선대학은 정원 감축 권고도 하지 않고 일반재정지원사업을 통해 지원까지 해주지만 나머지 역량강화대학과 재정지원제한대학으로 선정이 되면 향후 3년간 2만 명의 정원 감축을 권고하며 재정지원, 국가장학금, 학자금대출 등이 제한된다. 어느 정도의 완화는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지만, 정책 이면에는 국가의 돈 안되는대학은 줄이고 지원금을 최대한 줄이기 위한 꼼수, ‘생산적이지 않은모든 것들을 줄이고자 하는 정부의 의도가 내재되어 있다. 실제로 작년에는 류장수 대학구조개혁위원장은 대학여량진단 정책 발표 후 “2만 명대에는 우리가 정부 정책에서 할 수 있지만 나머지 부분은 시장에 맡기자라고 말해 논란을 빚었다.[각주:4]

내년부터 덕성여자대학교, 조선대학교,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등 일반대학 67, 전문대학 49곳 등 116개의 대학에서 총 1만명의 정원 감축을 명했고 이 중에서도 일반대학 37, 전문학대 13, 50곳에 재정적인 지원을 제한한 상태다.

 

대학 구조조정의 형태 변화 (출처 : 이연희, '대학 기본 역량 진단' 확정 ... 자율개선대학 60% 내외' "한국대학신문" 2017.11.30)



1단계 정량지표로서 전임교원확보율, 교사확보율, 신입생 충원율, 재학생 충원율, 졸업생 취업률, 유지취업률 등을 평가하고 이를 충족시키 못하는 대학은 전공 교양 교육과정, 지역사회 협력 및 기여 대학운영 건전성 등 2단계 지표를 통해 한 번 더 걸러지게 된다. 획일적인 기준으로 각 이념과 가치들을 가진 대학들을 평가하고 이를 거부하거나 저항하면 재정 감축이라는 몽둥이를 휘두르는 폭력적인 방식에서 대학들은 어쩔 수 없이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평가에 맞춰 도태되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이제는 대학에서 인재 양성이나 어떠한 소명과 진리의 추구 등에 대해서 논해보고자 하면, 너나 잘 해보라는 식이거나 혹은 현실을 알기에 안타까움이 담긴 눈빛을 받게 될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시각. 이제는 그러한 시대가 되었다.

 

 

대학과 경쟁, 자본주의?

 

대학구조조정은 그 필요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비리나 부정이 판을 치는 부분을 찾아내어 근절해야 하며 줄어드는 학령인구에 대한 대학의 대처 또한 불가피하다. 별 의미 없이 몸짓만 불려나가면서 부실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지양되어야 할 것은 맞다. 그리고 일 처리가 정상적이지 않는 기관을 가려내고 평가를 통해 교육의 질을 높이려는 의도 자체도 부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에 대한 대응방법이 적절한지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마치 스포츠 경기와도 같이 대학의 순위를 측정하여 신나게 떠들어댄다. 무슨 노래 한 구절인 마냥 익숙한 서연고서성한중경외시...’는 한 번이라도 못 들어본 사람이 없고 사실상 절대적인 순위인 것처럼 여겨지고 있다. 블라인드 채용과 같이 출신 대학에 대해서 밝히지 않는 정책 등이 도입되기도 하지만, 집단 내에서 대학에 따른 편 가르기를 하거나 개인을 대할 때 그 대학의 누구가 되는 식으로 평가에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치는 학력주의는 이제 익숙하기까지 하다. 마치 출신대학이 신분인 마냥 사람에 대한 중요한 정체성으로서 여겨지고 대학의 순위가 세워지는 모습은 신분의 순위가 정해지는 것과 별 다를 바 없다. 결국 대학의 순위를 정해 놓고 밑에 가라 앉을 수록 도태되는 대학평가는 대학의 카스트제로 보인다.

대학의 순위를 따지는 것이 이전에는 수군수군하거나 카더라식으로 공식적인 자료나 정보로서 존재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예 드러내놓고 그 범위는 전국 단위 대부분의 학교로 넓혀서 측정되는 것이 되었다. 심지어 어떤 신문사나 저널에서 가십거리로 소비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주도해서 이를 시행하고 활용하고자 한다. 재밌는 것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소비하는 대학의 순위가 국가에서 정한 일정한 기준에 따른 평가 결과와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방으로 갈수록 수도권 대학보다 순위가 낮아졌고 국가에서 지원하는 수준도 이에 따라 달라졌다. 과연 이러한 결과가 우연인지 아니면 구조적으로 살아남는 대학만 지속적으로 살아남게 되는 벗어날 수 없는 환경이 지배적인 것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필 기준으로 입시 시즌인 현재 많은 수험생들이 수능을 끝내고 또 끝나지 않는 길을 걷고 있다. 면접과 실기 준비로 바쁜 학생들 혹은 눈물을 머금고 재수 학원을 알아보러 가는 학생들 등 사실상 누구보다 해방감을 맛보며 기쁠 시기에 오히려 누구보다 절망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얼마되지 않는 인생에 대한 회의를 느끼는 사람들이 수험생이다. 그들은 그러한 고통을 참으면서 찬란한 캠퍼스 라이프를 꿈꾼다. 한편 대학을 가도 취업이 불안하고 미래가 불안정하다는 현실을 일찍 받아들인 학생들은 바로 공무원 시험의 길로 가기도 한다.

뭐가 됐든 비교적 더 보장된 그리고 누구에게나 인정받을 수 있는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한정된 자리를 두고 싸움을 했다. 대학 중에서는 최대한 순위권 높은 대학에 지원하기 위해 달려왔다. 필자를 포함한 대다수의 학생들은 되든 안되든, 일단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 길에 목을 매달고, 그러다 보니 포기할 수 없게 되고 지금까지 버텨오지 않았는가. 이렇게 간절하게 경쟁에서 살아남은 학생들은 점점 더 상위권의 대학으로 몰리고, 경쟁에서 도태된 학생들은 남은 대학으로 발길을 향한다. 정부에서는 앞에서는 수능의 절대평가 등을 이야기하며 사교육을 줄이고 줄 세우는 교육을 지양하겠다는 입장을 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와 반하는 대학구조조정을 실시하고 있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학들은 점차 대학끼리의 생태계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순위권의 밑바닥을 차지하게 된다. 이미 만들어진 순위권에 국가는 더욱더 박차를 가해서 밑으로 떨어진 대학은 제거하고자 한다. 문제는 없어진 대학 위에 있던 대학들은 제거된 대학 다음으로 제거 대상이 된다. 결국 반복되는 이 대학의 살생에서 승자는 누구일지, 진정한 승자라는 것이 있을지, 과연 대학의 줄 세우기는 과연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일지 답답한 물음만 떠오른다.

이러한 악순환과 끊임없는 경쟁은 대학의 가지치기로는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함은 당연하고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결국 대학의 순위가 매겨지고 이 순위에 따라 사람들이 배치되는 사회 이면에는 사람을 줄 세워 평가하는 사회가 있다. 줄을 서지 않아도 먹고 살 길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면 밀어내기와 방어하기로 개인은 사회의 흐름에 복속될 수 밖에 없고 유지될 수 밖에 없다. 대학 평가라는 일차원적인 방식이 아니라 진정으로 대학이 각 이념에 맞는 방법으로 사회에 적응력있는 발전을 이룰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을 하고 환경을 조성해줄 수 있어야 한다. “파이프에서 새는 물이 파이프를 고칠 수는 없다.”

 

끝나지 않는 경쟁

 

학력주의, 학벌주의의 정점에 서 있는 서울대학교는 과연 이 대학의 카스트제도에서 안정적인 위치에 올라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현재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은 현재 미래가 보장되고 안정되었다고 느끼고 있는지 혹은 여전히 아등바등 불안에 떨며 성실함이라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있는가. 한국외대에서는 평가지표를 반영해 성적평가 기준을 소급 적용하고 이를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방식으로 진행해 대학구성원들의 원성을 샀다. 학생들은 점거 농성을 벌였고 본부를 상대로 성적평가제도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서를 제출했다. 경희대학교도 성적 평가를 앞두고 강좌당 학점 평균이 3.0 이하가 되도록 조정하게 명했으나 학생들의 반발에 철회했다.[각주:5] 서울대학교에서도 9월 초 성적처리규정 개정안을 두고 학생들의 반발이 있었다. 수업의 자율성을 침해하면서 학생들에게 학업 부담까지 부과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대학구조개혁평가는 대학구성원 중 누가 환영할지 알 수 없다. ‘명문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의 또 다른 경쟁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다.


  1. 대학 기본역량 평가 결과 60%에 들지 못한 대학. 자세한 내용은 뒤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철퇴' 피해 고스란히 학생 몫으로…대학평가 후폭풍, JTBC 뉴스, https://www.youtube.com/watch?v=NqiNd3dWYN0 [본문으로]
  3.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847696.html [본문으로]
  4. 임은희, 〈대학 기본역량 진단 전망과 시사점〉, 《대교연 보고서 통권 11호》, 2018, p. 4. [본문으로]
  5. 서어리, 〈대학 구조조정, 학생이 무슨 죄?〉, 《프레시안》, 2015.01.05. [본문으로]


평가,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 2022 대학입시제도 개편안을 중심으로

딸기맥주

 

사진출처 : jtbc <스카이캐슬> 홈페이지



2019년 겨울, JTBC의 드라마 <스카이캐슬>"우리 예서, 서울의대 가야 돼",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어머님" 등의 유행어를 낳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 드라마에서는 자신의 아이를 '서울의대'에 보내기 위해서는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상류층 학부모들과 그에 맞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살인까지 마다하지 않는) 서울의대 100% 합격률을 보장하는 입시 코디네이터가 나온다. 드라마는 매회 흥미진진했고, 입시경쟁으로 인한 청소년들의 불행을 그리며, 대학 학벌로 미래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사회에 대한 비판을 하기도 했다. 작가는 <스카이캐슬>을 통해 지구는 둥근데 웬 피라미드냐며 피라미드 꼭대기에 닿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삶이 얼마나 무의미하며 불행한지를 말하고자 했던 것 같지만, 필자의 동생은 "저 드라마가 사교육을 더 조장할 것이다"라며 시청을 거부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으니, 실제로 입시 코디네이터 열풍이 불고, 각종 학원가에서 "전적으로 00학원을 믿으셔야 합니다"라는 유행어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현실의 청소년들은 드라마의 마지막 회처럼 쿨하게 명문고 집단 자퇴를 하고 행복을 찾아 배낭여행을 떠날 순 없기 때문이다. 입시경쟁에 매달리고 문제 하나 맞고 틀리는 것에 연연하며 짜증나 짜증난다고!”를 외치는 삶이 불행하다는 것을 몰라서 모두가 이러고 사는 것이 아니다. 평가에서의 등급이 대학을 결정하고, 노동시장에서의 내 등급을 결정하고, 받을 월급을 결정하고, 그렇게 내 삶을 옭아맨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사는 것이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니들 위치야. 피라미드 어디에 있느냐라고. 밑바닥에 있으면 짓-눌리는 거고 정상에 있으면, 누리는 거야.”라는 말은 꼰대같은 아빠의 헛소리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서 그렇다.

이번 호의 특집은 평가. 어딜가나 우리를 따라다니는 평가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우리를 통제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보려고 했다. 중등교육에서의 평가, 대학에서의 학사관리엄정화와 대학 평가에 기반한 대학구조조정, 그리고 교사에 대한 평가까지. 그 중 첫 글인 중등교육의 평가에서는 내부 구성원들끼리 진행했던 세미나를 기반으로, 문재인 정부의 대학입시방안 개편과 평가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했다.

 

 

 

Q. 자신의 학창시절, 시험과 수행평가에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


노누 “한국지리 수행평가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제일 중요한 3학년 1학기 내신이었는데 제가 수행평가 시험이 너무 어려워서 보는 도중에 여러 생각이 들면서 울어버렸어요. 행여나 1등급 하나라도 놓칠까 조마조마하던 때라서 머리도 하얘지고 무서웠거든요. 결국 100점 만점에 40점을 받았아요. 다른 친구들은 어려워도 70점대가 꽤 있었는데 말이에요. 다행히 기말고사로 만회했고 그게 정말 제 입시에 큰 영향을 미쳤나 싶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 끔찍했고 지금도 한국지리에 대해서는 약간 트라우마처럼 남아있어요.”

 

이물 "... 지구과학 수행평가 중에 주제발표를 하는 게 있었어요. 그런데 그 발표를 위해 스스로 실험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과한(?) 노력을 투자했던 기억이 나네요. 어렸을 때부터 과학고를 가고 싶다고 하면서 이런저런 과학 학원에 다녔던 터라 그런 열정이 나왔던 거 같아요. 그렇지만 저는 문과를 선택해 현재 역사를 공부하고 있습니다...여전히 과학에 대한 갈증이 많은데 문/이과가 구분된 이후로 접근성이 너무 높아진 거 같아 슬프네요."

 

익명이 “고등학교 1학년때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모의고사를 보고 나면 선생님들이 전교생의 점수랑 석차를 일렬로 나열한 표를 아이들한테 보여줬었던 게 기억이 나요. 전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못 봤네, 어떤 과목은 몇 등급이네, 이번 전교 1등은 누구네 하는 소리를 들을 때면 학교를 가기조차 무서웠어요. 그 땐 시험을 못 본 내 잘못이다라면서 저를 탓하고 수치스러워했죠..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들이 석차를 표로 만들고 아이들한테 보여주는 행위는 상당히 비인간적이었던 것 같아요. 그 표 안에서 우리들은 줄세워지고, 등급이나 석차로만 평가되고 분류되었던 건데..그래서 시험에 대한 두려움와 중압감은 더더욱 커졌던 기억이 남아요.”

 

딸기맥주 “저는 중간고사, 기말고사 끝나고 나서 서술형 평가 채점 결과를 보는 때가 제일 무서웠어요. 시험 본 날 채점했던 결과와 달라지기 일쑤였거든요. 영어에 s를 실수로 안 써서 그 문제 전체를 틀리기도 하고. 특히 어떤 과목은 딱 4명에게만 1등급을 줬는데, 그럴 때는 점수 1점 깎여서 5등이 되는 상상을 했어요. 어떤 친구들은 서술형 평가 결과를 보자마자 엉엉 울음을 터뜨렸던 기억이 나요. 아 그리고 수능, 저는 수능이 끝나고 나서 채점을 하기가 두려워서 5시간 동안 밖을 배회했어요. 눈앞이 캄캄하고 정말 끔찍하다고 느꼈어요.”

대부분의 교육저널 구성원들에게 평가의 경험은 트라우마로 남아있었다. 비교적 평가에서의 승자라고도 불리는 서울대사람들임에도, 평가는 늘 무섭고 두려운 것으로 기억되었다. 크게는 수능에서부터, 중간·기말고사, 심지어는 내신 수행평가까지 말이다. 그 어떤 하나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누구보다 못하고 잘했다는 비교에 괴로워하는 것이 학창시절의 일상이었다는 것에 모두 입을 모았다.

 

Q. 시험, 평가는 중요할까? 어떤 의미를 가지는 걸까?


익명이 “시험이나 평가는 학생들 입장에서 부담스럽고 피하고 싶은 것들임에 틀림없어요! 특히 우리나라 시험들은 고부담시험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요. 그치만 요즘 임용고시 준비를 하면서 교육학을 공부하다가 생각이 조금 바뀌었어요. 시험이나 평가가 그 결과 자체가 아니라 학습 과정, 학생들의 성장, 목표 달성 여부로 초점을 옮겨간다면 시험에 대한 혐오감이 줄어들 것 같아요. 실제로도 저들이 더 중요하고요! 교사의 입장에서 학생 중심 수업을 하기 위해서는 학생들의 선행지식, 목표달성 정도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업이 끝난 후에도 수업에 대한 성찰을 위해 학생들이 예상했던 목표를 얼만큼 달성했는지를 체크하는 것 역시 필요할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시험이랑 평가는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해요. 물론 평가 방식도 이에 따라 바뀌어야겠지만요!”

 

노누 “시험 평가가 중요하긴 한 것 같아요. 노력한 만큼에 대해서는 지표가 필요하고 그만큼 보상도 있으면 좋잖아요. 근데 그 평가가 담고 있는게 그 시험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상관 없는 것들 혹은 관계가 없는데 그렇게 보이는 것들을 담고 있다고 생각해서 더 부담을 가지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시험에서는 무엇보다 무엇을 평가하고 있는지 확실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물 "시험이나 평가는 학습자의 상태를 파악하고 재학습의 방향을 알려주고 그것을 자극해주는 도구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학습자를 재단하고 학습의욕을 떨어트리기만 한다면 좋은 평가가 아니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은 서열을 매기기 위해, 학습자를 평가 점수 바로 그곳에 정박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거 같습니다. "

 

당근 “평가가 중요한 이유는 학습상태를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운동을 하거나 건강증진을 꾀할 때 건강검진이나 인바디로 현 상태를 확인하고, 설문으로 원인을 파악하고, 의사나 전문가와의 면담을 통해서 앞으로 나아갈 방법을 찾는 것과 똑같은 것이죠. 학습 전에 진단평가를 하고, 학습 중간에는 형성평가를 하고, 마지막에는 학습 결과를 평가(용어가 기억이 안 나는군요)하며, 스스로의 상태와 어떻게 성장했는지, 무엇이 달라졌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다만 평가가 긍정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첫째, 평가가 학습 상태를 넘어 인격에 대한 평가가 되지 않고, 둘째, 수치화된 단순 정보를 넘어 구체적인 사례, 주관적인 분석과 장단점에 대한 균형 있는 기술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학창시절, 우리는 (물론 대학생이 된 지금도) “아 대체 시험은 왜 봐야 하는 거야!”하고 외치곤 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털어놓은 것처럼, 우리의 평가의 경험은 대체로 유쾌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평가 자체가 문제인 걸까? 교육저널 구성원들은 그건 아니다라고 답했다. 평가는 학습자의 성장을 점검하기 위해 필요하고 다음 단계의 배움을 위한 기반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를 불행하게 했던 것들은 평가가 아니라, 오히려 평가가 평가답게 작용하지 못했던 상황들 때문이며 평가가 학습을 위한 긍정적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Q. 최근 모 고등학교의 시험지 유출 논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노누 “솔직히 처음 기사를 봤을 때 저는 친구들이랑 같은 학교 다녔던 애들이 불쌍하다고 생각을 했어요. 다시 시험을 봐야 하고 입시에 지장을 줄 게 뻔하니까요. 그 쌍둥이들이 피해자일 거라고 바로 생각은 못한 것이죠. 그래서 기사를 보고 우선 뒷통수가 맞는 기분이었고요 ㅎㅎ 반성을 잠시 하면서도 씁쓸했어요. 그렇게까지 했어야만 했냐는 질문을 던지기 전에 그렇게까지 하게 떠밀었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지. 이것이 바람직한지 먼저 질문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딸기맥주 “이 뉴스로 2018년이 한창 시끄러웠잖아요. 약간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싶으면서도 일어날 일이 일어났구나 하는 느낌이었어요. 솔직히 시험 등급이 앞으로의 인생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 상황에서 양심이나 도덕을 먼저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냥 평가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 준 사건이라고도 생각해요. 내가 얼마나 알고 있나, 어떤 지점에서 더 노력해야 할까 등의 생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냥 점수에 따른 선발, 배제와 소외만이 평가라는 걸.”

 

이물 "해당 시험에 대해서는 공정성을 해치는 윤리적 잘못을 했다고 생각해요. 같이 힘들어야만 했던 다른 친구들에게 피해를 준 것이겠죠. 다만, 그 공정성이라는 것은 절대 철칙이 아니고, 모두가 강제 당한 시험이라는 룰 안에서만 성립되는 것입니다. 만약 그 학생이 시험을 통해 차등적 성적을 부여받고, 그것으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 받는 사회가 아니었다면, 학생이 문제집 뒷면의 답지를 보든, 친구 것을 베껴 쓰든,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심지어 때로는 답지를 보거나 다른 답을 베껴쓰는 것이 학습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데요. 왜 우리는 그런 상황을 만들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요? 언제까지 학생들은 강압적인 입시제도에 가만히 순응하며 남들 위에 서는 법을 배워야 하고, 모든 방식을 동원해서 서로의 아픔을 무시하고 찍어 누르며 살아남아야 할까요?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이 CCTV 뿐이라면 해결은 요원할 것 같습니다. "

 

세미나 때 본 기사에서, 한 청소년은 "쉽게 욕할 수 없을 거 같아요. 그 친구들을 그렇게 만든 게 있을 텐데, 그 위에 있는 구조라는 게 존재할 텐데, 그걸 이야기하지 않고 그 친구들을 함부로 욕해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저한테도 그런 유혹이 온다면 쉽게 뿌리치기 어려울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기사를 함께 보며, 교육저널 구성원들은 이 의견에 크게 공감하는 모습을 보였다. 해당 사건의 당사자들을 비난하기보다, 오히려 우리는 이번 사건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결국, 대학 서열화와 입시경쟁이 인간을 어떤 선택으로까지 밀어 넣는지를 직시하고, 이 근본 구조에 대해서 논해야 한다는 곳으로 의견이 수렴되었다.

 

Q. 대학입시제도 개편을 두고 일어났던 수능 비율 확대 vs 학종의 대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노누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수능이 공정한 평가제도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게다가 졸업 이후에 모의고사나 수능의 방향이나 난이도를 보면 무엇을 평가하고 싶은지 궁금할 정도로 문제가 난해해졌고 이걸로 학생들의 어떤 방향을 성장시키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비약하자면 한 줄로 세워서 엿가락 썰듯이 일정하게 잘라서 어느 대학은 앞에 선 학생을, 어떤 학생은 그 다음 학생 무리를 데려가는 식으로 입시가 이루어지는 것인데 과연 대학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하고 원하는 인재상을 반영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고 학생부 종합전형이 바람직하냐고 한다면 그것도 폐해가 경험적으로도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당근 “저는 둘 중 어느것도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시 비중 확대라는 주장이 어떤 심정에서 나왔는지에는 공감이 되었어요. 수능은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외부에서 개입할 수 없는 객관적인 시험이니 공평하다는 것과 더불어, 오랫동안 시행되다 보니, 또 여러가지 방법론이나 정보가 (학종에 비해서는) 많이 공유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 같아요. 반면 학종의 경우에는 학생부 관리를 어떻게 하는지, 자기소개서는 어떻게 쓰고 면접은 어떻게 대비하는지에 관한 정보가 계층별, 지역별로 굉장히 불균등하게 분포되어있고, 체감도도 굉장히 높은 것 같아요. 전형이 다양하다는 것 자체도 많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입시 정보에 대한 접근 장벽을 높이는 것 같기도 하구요. 하지만 한편 저는 수능 시험장에 갔을 때 오늘 하루로 지금까지의 삶이 결정된다는 중압감에 너무 힘들었고, 끝나고도 너무 허탈했는데, 하나의 획일화된 시험으로 한 사람을 평가하는 것 자체가 매우 부당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이물 "수능과 학생부 종합 (수시)의 비율이 대입의 근본 해결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택하든 입시를 위한 도구적 평가가 될 뿐, 학생 자체를 제대로 평가하고 더 나은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추동해주지는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학생부 종합전형입니다. 특정한 논리력과 사고력을 요구하는 수능과는 달리, 다양한 능력을 검토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학종이 사실상 스펙을 많이 쌓아야하는 전형이 되고, 오히려 필요한 사교육이 늘어나 교육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지적도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이는 대학별 평가 기준이나 학교별 평가 과정을 통제하면 보완이 가능할 것입니다. 휘황찬란한 양적 지표에만 의존하는 것을 멈추고, 글쓰기, 책읽기, 연구 기획과 같은 기초 교양의 영역을 가르치는 과정을 보편화하고 이를 평가할 기준을 만든다면 대학 입시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다양화, 보편화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2018, 문재인 정부가 ‘2022 대학입시제도 개편안을 논의하고 발표하면서 수시 vs 정시 비율, 수능 절대평가 여부 등이 큰 화제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교육부는 정시 수능 위주 전형 비율을 30% 이상으로 확대하도록 대학에 권고했고, 수능 평가 방식은 현행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이러한 논의는 보통 수능이 낫냐 학종이 낫냐의 대결로 흘러간다. 그러나 교육저널 구성원들은 논의를 하면서 그나마 이 방식이 낫지만, 실상 어느 쪽에도 손을 들기 힘들다고 말했다.

 

수능의 경우는 보다 공정하다고 보통 여겨지지만, 결국 사교육의 수혜를 받은 이들에게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또한, 하루만에 치러지는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수험생들에게 주어지는 압박은 엄청나며, 학교는 획일화된 문제풀이 훈련공장으로 전락한다. 한편, 학생부 종합평가 전형은 과정 전체를 두루 본다는 점에서 보다 교육적일 것이라는 취지로 도입되었으나, 학생부를 작성하는 교사의 권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문제, 활동과 학생부 관리에 대한 정보 불평등의 문제 등이 발생하고 있다.

 

둘 중에 어느 것이 낫냐의 논의로 흐르게 되면, 우리에게 대안은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혹은 둘 중이 아니라도, 어떤 더 나은 취지의 대학입시제도 방법을 찾는다고 해도 결국은 비슷한 결과를 낳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대학이 계속 서열화되어 있고, 학벌이 여전히 삶을 결정하는 한, 어떤 평가도 공정하거나 평등해질 수 없으며 교육적인 방향으로 진행될 수 없다.

 

Q. 대학입시제도 개편안에서 2안이 주장했던 것이 수능 절대평가의 도입이었습니다. 한편으로 지금도 영어와 한국사는 절대평가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절대평가로의 변화는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가 바라는 평가 방식은 무엇일까요?

 

익명이 “교육부가 수능 영어 절대 평가를 도입한 지 몇 년이 지났습니다. 상대평가의 문제점을 해소하기 위함이라는 취지를 내건 교육부는 학습 무의미한 경쟁과 학습 부담을 경감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저도 어느 정도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절대평가 방식에도 전혀 결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처음 절대평가방식을 도입한 2018년도 수능 영어 1등급 비율은 10.03%이었는데, 이번 2019학년도 수능에서는 5.30%1등급 비율이 확 줄었습니다. 이렇게 1등급 비율이 널을 뛰는 원인에 대해 평가원은 난이도 조절 실패가 아니라 학생들의 학습 준비도 차이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평가원의 이런 설명은 책임 회피에 가깝다고 느껴집니다.

절대평가방식을 도입한 이상 매년 비슷한 난이도로 출제되지 않는다면 학생들에게 수능 영어는 운이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점수 경쟁을 완화하고 학습 부담을 줄이겠다는 절대평가의 도입 취지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상대평가방식을 적용했을 때 1등급 비율이 4%였는데 절대평가를 도입한 이후에도 5% 남짓한다는 것은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절대평가 방식을 도입하는 데에만 그치지 말고, 난이도 조정, 평가 내용, 최저 성취 기준을 선정하는 데 교육부와 평가원은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노누 “그렇다고 어떤 평가 방식이 가장 바람직한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고 명쾌하게 내려진 답은 없습니다. 학생이 기울인 노력을 평가할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이 있으면 좋겠지만 말이죠. 우선 존재하는 대안은 절대평가인데 우선 학생들의 학업 부담은 확실히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만 절대평가 역시 점수대 기준끼리의 상대평가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명쾌하진 않은 것 같아요. 어떻게 하든 평가가 학생들의 부담을 아예 없앨 수 없다면 개선할 노력을 해야 하고 더 나은 방향을 끊임없이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학생 스스로가 자신을 평가하는 방법도 좋다고 생각해요. 신뢰성은 떨어질지 몰라도 학생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꽤 잘 알고 있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딸기맥주 “저는 저 기사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더 이상 성적으로 줄 세우는 방식에 얽매여 다수 학생을 좌절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치열한 경쟁과 줄 세우는 학교 수업보다 다양한 소질과 적성, 배움이 실현되는 학교 수업이 가능해진다.’ 2안은 학교 수업을 문제풀이 시간으로 만드는 수능의 위상 강화를 경계한다. 수능 평가 방식을 전 과목 절대평가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라는 말이 크게 공감이 갔어요. 절대평가는 기본적으로 수업을 다르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능특강, 수능완성 문제 풀이가 아니라 토론이나, 활동을 해볼 수도 있고, 더 다양한 배움이 가능해질 거라고 믿어요.

다만, 현재의 절대평가처럼 여전히 결과의 서열화, 변별하고 가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절대평가가 운영된다면 그건 그냥 명칭만 바꾸는 꼼수에 불과하겠죠. 절대평가로의 전환이라는 의미는 서열체제 완화와 폐기라는 내용이 포함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방향으로의 전환이 이뤄지면서 결국에는 일상적 평가는 개개인의 기존 학습수준보다 어떤 부분이 나아졌는지, 어떤 부분의 이해가 부족한지 알 수 있도록 하는 개별평가가 되어야 하고, 대학입시는 성취기준을 기반으로 합격/불합격 정도를 정할 수 있는 방식으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흔히 교육적 대안으로 많이 제시되는 것이 절대평가의 방식이다. 영어와 한국사에서 이미 도입이 되었고, 이 이후에 해당 과목들에 대한 학습 부담은 많이 완화되는 듯했다. 그러나 2019 수능에서 영어의 난이도가 매우 높아졌고, 사실상 상대평가 시기와 큰 차이가 없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그래서인지 구성원들은 절대평가가 가져올 수 있는 긍정적 영향력을 기대하면서도, 지금 진행되는 방식이 과연 절대평가라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논의를 하면서 점점 해결해야 할 질문이 명확해졌다. 학종과 수능의 대결도, 절대평가로의 이행도, ‘대학입시제도 개편이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줄 수 없다면, 대체 무엇 때문인 걸까?

 

Q. 평가 방식의 변화만으로 달라지지 않는 것들? '대학입시제도 개편', 평가 방식의 변화는 생각만큼 많은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걸까?

 

이물 "대입이 인생의 경제적/문화적 수준을 한 번에 결정해버리는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지 않으면, 평가가 가진 잠재력은 이내 사그라들고 말 것입니다.

어떤 평가를 하든 당장의 학습이 아니라 학습이 가져올 외부적 결과에 더 큰 비중이 놓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에서 거꾸로 학습은 소외되고, 경쟁은 과열되며, 평가는 차등화만을 목표로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어떤 평가든 그것을 만든 사람이 가진 지향과 기준이 있습니다. 현대의 교육에 개입하는 강력한 주체는 국가와 기업입니다. 이들의 교육에 대한 개입을 견제하거나 통제하지 않으면, 각 주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만 학습자들의 지식이 인정받을 것입니다."

 

노누 “우선 지금까지 유지해온 평가방식을 바꾸는 게 대규모 일이고 바꿀만한 좋은 교육 방안이 나오지 않아서일까요? 저도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평가방식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무엇을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것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익명이 “대학입시제도를 바꾸어도 현실이 달라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곳에 취직을 해야 하고 그러려면 좋은 대학교에 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쉬운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경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어요. 이상적인 얘기들을 하면서 교육 내, 학교 내에서의 이런저런 변화를 꾀하지만 결국 입시경쟁이라는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고 변화는 지지부진하기 십상입니다. 사회가 이미 사람들을 줄 세우고, 착취하고, 경쟁을 유도하는데 입시제도를 개편하고 평가방식을 바꾸어도 변하지 않는 부분들은 계속되는 것 같아요.

관점을 넓히고 고개를 들어서 좀 더 멀리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젠 누가 우리에게 경쟁을 요구하는지,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를 논의할 때이지 않은가요?”

 



당근 “교직 수업에서 가장 많이 하는 토론 중에 하나는 '입시 교육이라는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하면 교육적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인데요. 이 토론은 대개 먼저, 이런 저런 교육적 아이디어를 제안하기, 그리고 왜 그것이 입시경쟁의 현실 속에서 불가능한지로 반박하기, 다시 그 환경 속에서 그나마 나아질 수 있기 위해서는 최소한 무엇을 할지, 이런 패턴으로 이야기가 돌고 돕니다. 저는 이런 토론을 여러 번 하면서 대안이 교육 내부에 있다고 보는 시선을 넘어, 입시경쟁을 유도하는 사회를 성찰하고 토론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경쟁은 교문 안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이죠. 교육 무능론은 교육 만능론의 다른 얼굴이라고 생각해서, 입시제도를 이렇게 저렇게 바꾸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넘어, 사회의 변화를 통해서 교육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몫을 잘 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이때 교육적 변화들이 제 성과를 더 잘 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성원들은 다들 입시의 내부, 학교 내부만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오히려 입시가 왜 필요한지부터 물어야 한다. 모든 청소년들에게 대학은 디폴트값이다. 대학이 뭐하는 곳인지도 모르는 어릴 적부터 좋은 대학에 가면 돈을 많이 벌고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말을 듣다가, 이제는 대학에 가야 돈을 벌 수라도 있다는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학입시는 생존권을 획득이라도 하기 위한 투쟁인 것이다. 이 상태에서 대학 입시제도를 이렇게 저렇게 바꿔봤자 누구에게 생존권을 줄지, 누구에게서 박탈할지의 저울이 달라지는 것뿐이다.

생존권의 문제라니, 너무 비약이 심한 것 같다고? 특성화고 학생들이 현장실습을 하다가 다치고 죽는 사고는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2017년 기준 20-30대 노동자 네 명 중 한 명은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그들은 대부분 저임금을 받으며 고시원이나 원룸에서 살아간다. , 오류가 있다면 이젠 학벌도 제대로 된 생존을 보장해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뿐이다. 그래서인지 주변 서울대생들의 진로는 고시, 공무원시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상태에서의 평가가 교육의 일환이 되기란, 학교에서의 배움이 잘 이뤄지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학생들은 생존이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늘 불안에 떨 수밖에 없고, 교사는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공부하라는 말만 반복하는 무력감을 겪는다. 이 상황 속에서도 그나마 이뤄지는 교육적인 시도는 눈물겨운 고군분투가 된다.

결국, 학교 안의 교육이 이뤄지기 위한 정말 최소한의 조건은 모두에게 생존권이 보장되는 학교 밖의 구조이다. 내가 느리게 배워도, 완벽하지 않아도, 성적이 상대적으로 높게 나오지 않아도 내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없다면 배움은 불가능하고, 성장도, 평가도 무의미해질 뿐이다. 지금은 어떤가? <스카이캐슬>의 교수, 의사도 자녀에게 너의 미래를 책임져줄 수 없으니 네가 서울의대에 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세상이다. 이곳이 영영 나오지 못할 지옥불이 되지 않기 위해서, 학교의 경계를 넘어 구조의 직시, 그리고 학교 안팎의 총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누구도 일하다 죽지 않는, 수능 성적표를 유서로 남기지 않는, 어떤 직업을 택하든 생존의 불안정을 느끼지 않을 만큼 버는 세상에서, 교육은 비로소 제 역할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