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여름, 필자는 계절학기를 들었다. ‘학생자율연구’라는, 학부생이 스스로 연구를 기획하고 진행하는 수업이었다. 거의 모든 글쓰기가 그렇듯이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은 어떤 때는 고통스러웠다가, 어떤 때는 즐거웠다. 필자는 조울증 환자처럼 기뻤다가 슬펐다가 하면서, 9 to 6로 일하는 직장인같이 과방에 출근했다.(출근 시간이 오후 1시, 퇴근 시간이 오후 10시쯤이란 점에서 좀 달랐다.) 학생자율연구는 완전히 자발적으로 시작한 자율학습이라, 이거 너무 힘들다 싶어도 탓할 대상이 딱히 없었다. 스스로 시작한 일이고(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가끔 가다가는 아주 재미있었기 때문에 필자는 군말 없이 아주 성실하게 자율학습을 진행했다.

 

  그렇게 착실히 연구를 진행하던 어느 순간, 내 자율학습이 내가 갖춘 유리한 조건들 속에서 가능했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일단 학생자율연구 수업에서는 학생에게는 최대 50만 원까지 연구비를 지원한다. 그리고 대학에 소속된 대학원생 조교님과 대학 교수님을 섭외하도록 해서, 연구 진행과 관련해서 충분한 피드백을 받게 해준다. 그리고 필자는 서울대 도서관에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고, 원하는 책들을 아주 쉽게 구할 수 있으며, 도서관에서 구독하는 논문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심지어 신분증만 제출하면 (필자의 연구와 관련된) 북한 자료들도 자유롭게 열람, 복사가 가능했다.

 

  대학이라는 소속이 필자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건 외부로 나갔을 때 훨씬 잘 느껴졌다. 연구 중 가끔 국립중앙도서관 북한자료센터에서 자료를 찾던 일도 있었다. 별건 아닐지 모르겠지만, 북한자료센터에서 서명하라고 건네주는 서류에 필자는 ‘서울대학교’ 소속임이 분명히 드러나 있었다. 북한 자료를 다룰 때마다 필자는 어쩐지 많이 긴장했는데, 서울대학교 소속이라는 것이 명시되어있을 때마다 조금 안심이 되었다. 연구 목적으로 자료를 이용한다는 명분이 필자의 소속으로 충분히 증명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일까.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중앙도서관 옥상정원을 올라가면, 이 학교가 얼마나 거대한지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다. 필자는 대학이라는 이 거대한 공간 속에서, 스스로 아주 고생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나름 편하고 즐겁게 공부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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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공고함이 두렵게도 느껴진다. 필자는 이 대학을 벗어났을 때 필자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어쩌면 대학을 벗어나 취업을 해야 하는 많은 학우가 이런 걱정을 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많은 학우가 대학 바깥에서 어떤 일을 꾸민다. 그리고 바깥에서 활동하는 와중에 자신의 ‘대학’과 마주하는 경험을할 것이다. 필자가 북한자료센터에서 그랬듯이.

 

  대학이라는 울타리 바깥을 인식하는 것은, 역으로 대학이라는 높은 울타리를 성찰해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본 기사에서 필자는 대학 바깥과 대학 안이 어떻게 다른지, 대학 바깥과 대학 안이 어떻게 얽히는지, 대학 바깥에서는 어떤 학습이 가능한지 생각해보려고 한다.

 

 

유형(有形)의 공간과 견고한 제도: ‘안정감’과 ‘단절’ 사이에서

 

  서울대학교는 관악캠퍼스 부지만 해도 100만㎡로, 관악구 소재 서림동(신림2동)보다도 큰 면적을 차지한다.[각주:1] 이런 넓은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떤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사람이 모일 수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 안에 있는 수많은 과방, 동아리방에서, 또는 관정관의 세미나실이나 교실에서 우리는 약간은 비슷하면서도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여기서 모든 수업이 비대면으로 이루어지던 지난 2년의 기억을 떠올려보자. 필자는 비대면 강의가 매우 편리하고, 공간적인 제약을 없애준다는 점에서 비대면 강의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비대면으로 수업이 이루어지던 많은 날을 지방 본가에서 보냈고, 아주 편하게 생활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비대면으로 하는 상황에서는 일상적인 대화를 할 동기나 선후배도 사라졌고, 그것으로부터 출발하는 무언가들(ex. 농담같이 동아리와 같은 활동 제안하기, 시험공부 및 고민 상담, 각종 밥약이나 모임)도 사라졌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필자는 대학을 가지 않고 대안대학 등에서 학습을 이어온 인터뷰이 홍차의 말에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었다. [각주:2] 


홍차: 대학 안 가니까 친구 만나는 거에서 뜻밖에 많이 무너졌어요. (...) 대학 다니면 저절로 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대학 바깥에서도 대학 다니는 사람들만큼 살 수는 있지만 두세 배의 에너지를 써야 하잖아요. 학교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유지할 수 있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게 아쉽습니다.


  전기정보공학부 소속인 인터뷰이 오비도비는 학교에서의 학습에 한계를 느끼고 실제로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일을 하고 싶어 학외 활동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오비도비는 학외 활동을 하면서 대학 내 경험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고 말해주었다.

 

오비도비: 한 달 즈음 지나고 보니 학교생활이 그리워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 학교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그 순간들이 정말로 소중한 순간들이었음을 깨달았어요.

 

  또한 이렇게 교수와 학생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학내의 활동과 모임은 대학 바깥으로 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학내의 강의와 포럼, 학생회와 동아리, 각종 세미나를 발판삼아 또다른 학습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대안 정치이론이나 현장에 관심이 있어 그러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학외 연구 공동체를 찾은 피망의 경우에도, 대학 내 경험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피망: 애초에 학외에 연구공동체가 있다고 인지할 수 있었던 이유, 그리고 그 논의들에 흥미를 느낄 수 있었던 이유는 대학 내에서의 강의나 학생회/학회 활동 덕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터뷰이 홍차도 대학을 가지 않았을 때 아쉬웠던 점으로 대학이라는 제도의 이점을 지적했다.

 

홍차: 아무래도 (대학에) 체계적인 커리큘럼이 있고, 그것에 대한 엄청난 지식을 쌓은 전문가 교수 집단이 있고, 그것에 관심을 두는 동료가 있는데 그런 환경이 필요하지 않았나 생각했었습니다.

 

  대학은 학생 개개인의 안정적인 일상이자, 어느 순간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낼 수도 있는 공간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대학에 재학 중인 필자는 매 순간 느끼기 힘든 것이다. 어쩌면 필자와 같은 많은 대학생 역시 이러한 이점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울러 대학을 유지할 수 있는 제도 역시 대학생의 학습을 돕는다. 대학생에게는 대학이라는 시설을 유지하기 위한 지원금, 대학생 개개인에게 주어지는 여러 장학금이 매우 당연하다.[각주:3]  최근 들어 변화했다고는 하지만 한국 사회는 대학이 입시의 최종 목표로 여겨졌고, 좋은 대학을 가야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다수가 공유하는 상식이었다. 그러나 대학은 한편으로는 연구를 통해 지식을 생산하는 기관이며, 사람들은 대학에서 사회에 이바지할 인재를 양성해낼 것임을 믿는다. 이러한 근거로 대학에 지원금을 주는 이유, 대학생에게 장학금을 주는 이유가 마련된다.

 

  그러나 대학만이 연구를 하고 지식을 생산하며, 사회에 이바지할만한 인재를 양성해내는가? 필자는 대학이 언제나 그러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 대학만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않는다. 요시미 순야의 『대학이란 무엇인가』에 따르면, 대학은 중세시대 그 원형이 처음 탄생했으나 인쇄술의 발달이나 국민국가의 발전 등으로 부침을 겪고 형태가 바뀌어 왔으며, 근래에 들어서도 국민국가의 쇠퇴, 자본주의
화로 말미암아 대학의 의미는 변화하고 있다.[각주:4]  이러한 지적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대학이라는 제도는 역사성을 가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의 대학들을 유일무이한 고등교육기관으로 여기기보다 그 제도의 변화 가능성을 인지해야 하며, 대학이 사회가 기대하는 역할을충분히 하고 있는지 성찰해야 한다.

 

  그렇다면 소위 ‘대한민국 최고 대학’이라는 서울대는 사회에 이바지할만한 지식 생산, 인재 양성이란 기대에 훌륭하게 부응하고 있을까? 그런 판단을 하기 이전에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많은 이들이 서울대학생들이 사회에 나가서는 정말 큰 일을 하리라 기대하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필자는 오직 서울대에만 그런 기대를 걸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서울대학교는 지식을 생산하는 데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 생산에 참여하는 구성원은 점점 경제적으로 비슷한 이해관계를 맺은 이들로 채워지고 있으며,[각주:5]  서울이라는 대도시에 있다는 지리적 특성을 고려했을 때 서울을 벗어난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쉽다. 이러한 집단이 생산하는 지식, 길러 내는 인재는 본인과 다른 사회 구성원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 불가능한 것은 아니겠지만, 필자는 여전히 대학에서 생산하는 지식이 사회 구성원들을 얼마나 다양하게 대변하는지, 그들에게 얼마나 쓸모가 있는지 알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인터뷰이 피망은 걱정을 표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피망: 한편으로는 서울대학교가 학술적 장에서 기준이나 표준이 된다고 은연중에 생각하게 되면, 굳이 학교 밖을 돌아볼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현실적으로 소위 권위자인 교수님들이 학교 안에 계시고, 웬만한 큰 학술포럼도 학교에서 열리니까요. 충실하게 학부, 대학원 과정을따라가다 보면 권위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학술적 장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것 같다는 걱정이 들때가 많습니다. (...) 최소한의 성찰성을 갖기 위해서라도, 대학은 대학 밖과 연결될 때만 대학의 기능을 충실히 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결국 이는 대학을 벗어난 다른 학습의 가능성을 키움으로써 더욱 다양한 지식이 만들어질 수 있도록 촉구해야 하는 문제이거나, 대학이 학내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문제이다. 필자는 그 두 가지 가능성을, 필요성과 실현 방안의 측면에서 피상적으로나마 살펴보려고 한다.

 

 

대학 바깥으로 나아갈 필요성


대학 바깥에서 인터뷰이들은 어떠한 경험을 했을까? 대학생의 입장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아무래도 ‘서울대’라는 집단 외의 사람들을 만난다는 점일 것이다. 인터뷰이 피망은 학외 연구 공동체를 찾았던 계기로도, 학외 연구 공동체에서 얻은 유의미한 경험으로도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는 것’을 짚었다.


피망: 학과 수업에서 대안 정치이론이나 현장과 관련된 내용을 공부할 기회가 있기는 하지만, 현재 논의되고 있는 최신이론 혹은 현장과 연결된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지는 않습니다. (...) (제도 밖의) 연구 공동체의 분위기는 대학과 어떻게 다른지, 같은 문제의식을 느꼈을 거라고 기대되는 사람들은 누가 있는지 확인하러 가는 것도 있습니다. 그들과의 관계와 교류를 기대하면서요. (...) 무엇보다도 다양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이 보는 다른 시선을 느낄 수 있는 게 가장 소중했던 것 같습니다. 비슷한 혹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인지하고 지형도를 그려 나가는 것이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학내에도 충분히 다양한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굳이 학외에서 그러한 다양성을 찾아야 하느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서울대, 대학생이라는 정체성은 생각보다 색이 뚜렷해서, 그런 정체성에서 조금 벗어났을 뿐인데도 다른 무언가가 보이기도 한다.

 

  일례로 필자는 2019년 1학기 휴학 신청 후 ‘봉천동’을 주제로 전시를 꾸리는 팀에 소속되어 작가로 활동했다.[각주:6]  본격적으로 전시를 기획하기 전에, 필자는 동네 이곳저곳을 나름대로 잘 안다고 생각했다. 이미 봉천동에 살고 있었기도 했고, 여기저기 쏘다니는 것을 좋아해 동네를 나름 잘 파악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일의 환한 대낮에 (대학생이면 갈 이유가 없는) 사람이 북적북적한 봉천 시장을 돌아봤을 때, 봉천동 골목마다 숨어있는 무당집이나 언덕 중턱의 대한성공회 봉천동 나눔의 집을 찾아갔을 때, 필자는 그제야 봉천동에 거주하는 대학생이 아닌 이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필자는 봉천동이라는 공간에 속해있으면서도 그 공간을 대학생으로서만 살고 있었던 것이고, 나의 시선으로 내 거주 지역을 알아가는 일은 유예하고 있던 것이었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는 대학 바깥에서도 살아간다. 대학에서의 학습이 우리의 삶과 유리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전반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인터뷰이 홍차의 응답에서 그러한 학습의 가능성을 떠올려볼 수 있었다.

 

홍차: 20대 때는 원래 관심 있었던 것을 더 깊게 파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기능적인 부분을 채우는 것, 이 세 개를 채우려고 노력했었고요. 그래서 사회과학과 관련된 공부를 하는 한편에 라퍼커션이라고 브라질 퍼커션 그룹이 있는데 그런 데 참여한다든지, 아니면 친구들과 강사를 모셔서 요리나 영상편집을 배운다든지 하는 것들을 균형 있게 유지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아요. (...) 사실 아직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자기가 성인 되기 전에 어느 정도 주체성을 갖고 정보를 가졌다고생각이 들면, 근데 이제 한 분야를 깊게 파고 싶고 그것을 통해 이루고 싶은 게 있지 않다면, 대학을 안 가는 게 훨씬 더 경험을 다양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대학도 서울이 아니면 누릴 수 있는 것들이 적어지잖아요. 설령 서울에 있는 대학이어도 지역적으로 한계가 생기는데, 저는 그렇지않음으로써 예컨대 성수동이라는 곳에 살면서 그 지역이 가진 콘텐츠를 흡수할 수 있었고, 연희동도 마찬가지였고, 그런 자유도가 있었던 것 같아요.

 

  한편 인터뷰이 홍차는 원래 관심 있었던 것을 더 깊게 파는 것, 예컨대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데 있어 대학을 거치지 않은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나 필자는 내심 인터뷰이 홍차의 학습 경험을 선망했다. 필자는 주로 제도 속에 있으면서 주어진 과정을 착실히 이행하는 학생이었으므로, 아주 긴 시간을 “이 공부를 정말 하고 싶은 게 맞는지”를 고민하면서
보냈기 때문이다. 오비도비의 경우에도 필자와 비슷한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학외에서 그러한 고민에 대한 답을 찾아가고 있었다.


  오비도비: 언제부터인가 배움이 아닌 학점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공학이라는 학문에서 공부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 대학교에서 배우는 이론들이 분명히 필요하단 걸 알지만, 그동안 눈에 보이는 프로젝트를 많이 해왔던 저에겐 실제 공학적 결과물과는 거리가 먼 이론에만 거의 모든 힘과 시간을 쏟아야 하는 것이 스트레스였고, 그러면서 즐겁게 해왔던 공작 활동들조차 이전만큼 즐겁지 않게 되었습니다. (...) 제게 인턴은 학교 바깥에서, 학교 생활을 하면서 가졌던 질문들에 대해 나름의 답을 얻고자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대학 바깥에서의 학습을 통해 대학생은 대학에서 학습한 내용을 조금은 다른 시선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대학은 학외의 연구 공동체, 혹은 그와 비슷한 집단을 통해서 그 자신의 위치를 재발견하고, 대학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대학은 대학 외부의 연구 공동체, 대안대학, 그 외 다양한 기관들 속에서 대학의 위치를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대학 스스로 그러한 고민을 계속 이어나가게끔, 대학과는 다른 성격을 가졌거나, 대학을 비판 할 수 있는 대안적인 고등교육기관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 대학에서, 대학 바깥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들


  대학의 바깥과 안을 연결하기 전에, 왜 ‘학부생이’ 대학과 바깥이 연결되는 것을 고민하고 있는지에 대한 보강이 필요해 보인다. 잠시 서론에서 잠시 언급했던 중앙도서관 옥상정원으로 돌아가 보자.

 

  필자는 외할아버지를 모시고 필자가 다니는 대학을 구경시켜 드린 적이 있다. 당시 옥상정원에 할아버지를 모시고 갔는데, 애초에 서울도 자주 와보지 않으셨던 할아버지께서는 대학이 이렇게 크다는 사실에 많이 놀라셨다. 이게 다 어떻게 운영되는 거냐면서 넋을 잃고 대학을 바라보시던 할아버지는 “이 학교 다니는 학생들은 꼭 좋은 일을 해야겠구나”라고 말씀하셨다. 필자는 (아까도 말했듯이) 서울대생에게 주어지는 헌신적인 운명(?) 같은 것들이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만, 학부생 역시 대학의 역할과 본인의 위치에 대해서는 성찰이 필요하다고생각해왔다. 그러나 학부생이 대학의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학부생으로서 대학은,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공간이다. 많은 학부생에게 대학은 대학 이후의 더 나은 삶을 위한 관문이며, 돈을 낸 만큼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교육기관이다. 지식을 생산하는 것은 학부생의 일상과는 동떨어진 듯 보이지만, 학부생에 대한 교육은 애초에 지식을 생산하는 교수진과 대학원생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어떤 학부생은 이미 학부에서부터, 혹은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지식 생산에 동참하게 된다. 학부생은 대학에 길게 머무르지 않고, 매번 누군가가 영영 떠나고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온다. 대학에 대해서 성찰하자고 하는 것은 학부생의 몫이 아닌 것만 같기도 하다.

 

  그래서 필자는 학부생에게 마냥 ‘대학의 사회적 책임’ 운운하며, 대학에서의 지식 생산과 학습에 외부인을 끌어들이자고 주장하기는 망설여진다. 학부생의 위치가 이렇게 애매해진 것은 애초에 기존의 대학, 대학 구성원들이 그러한 성찰을 해오지 않은 결과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대학을 운영하는 데에는 거대한 권력과 자본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러한 권력과 자본은 학생 개인에게서 걷어가는 등록금을 넘어선 무언가일 것이다. 우리가 발딛고 있는 대학이 학생 개인과 1:1 관계를 맺고 있는 교육기관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면, 학생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 구성원들과 관계를 맺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면 대학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고민해봐야 할 당위성은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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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필자는 1) 대학이 외부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다양한 논의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과 2) 대학 외부의 연구 공동체와 대안대학에 대한 지원이 필요함을 주장하려 한다.

 

  우선, 대학은 외부자를 대학 내의 지식 생산 과정에 들이고, 대학의 민주성 확대를 고민해야 한다. 물론 지금의 대학이 외부와 연결되어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대학이라는 공간은 상당히 폐쇄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듯 보인다. 코로나 19를 겪으며 필자가 속한 인문대는 점점 학내 구성원만 들어올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했다. 예전에는 모두에게 열렸던 문이 이제는 학생증을 찍어야만 열리는 문이 되었고,[각주:7]인문대학교 신양관 라운지나 자습 공간에도 학생증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더욱이 주말에는 학생증을 가진 학생들만이 공간을 사용할 수 있는데, 그래서 학부생이 주도하여 외부인들까지 참여하는 행사를 열기란 쉽지 않았다.[각주:8] 러나 앞서 서울대학교가 여러 사회 구성원들과 연결되어있고, 그들 덕분에 존재하고 있음을 생각했을 때 이러한 맹목적인 차단은 정당한가?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외부인에게 학교를 어느 정도 개방하는 것은 학교 구성원의 이권과 침해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생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학교 구성원들이 학교를 자주 사용하는 시간은 대부분 주중 낮인데, 주말에 신청을 받거나 허락을 받아서 학교를 사용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외부인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확대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외부인이 대학에 포섭되는 것, 혹은 대학의 지식 생산에 참여하는 것 역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각주:9] 한편, 데리다는 ‘무조건성’이 사실 존재하지 않음을 지적하는데, 윤동구는 이를 고민해야만 대학 내에서 진정한 자율성 또는 자발성을 대학 내부에서 미력하게나마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 주장한다. [각주:10]  그럼으로써 “대학이 대학 바깥의 주권을 개념적 차원에서 해체, 곧 탈구축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을 때, 이후에도 자신의 주권을 주장하며” 살아남을 수 있음을 주장한다. [각주:11]  필자는 자크 데리다의 논의에서 대체 가능할 대한민국 대학의 모습, 더 자세하게는 프린터 하나 제대로 못 다루는 대학생을 비난하는 누군가, 대학이 취업 기관 이상의 역할을 하느냐는 비난, 대학의 지식이 우리의 삶에 쓸모가 있느냐는 의문을 떠올렸다. 하지만 대학은 여전히 지식을 생산하고, 세상을 해석하는 데 있어 유용한 제도이다. 그렇다면 대학의 쓸모를 부정하는 대신 다른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 대학이 지식 생산이나 교육에 있어 그 외부를 대학에 끌어들이고, 참여시킴으로써 비로소 대학의 역할을 반추하고, 사회 ‘속’에서 역할을 종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대학 내에서 성찰이 필요한 일 외에도, 필자는 대학 바깥의 가능성을 키우는 것이 중요함을 짚고 싶다. 앞서 언급되었듯이 지금의 ‘대학’은 구체적인 정치, 경제, 지리적 조건들 속에서 가능한 것이다. 대학이 미처 발견하지 못하는 곳에서도 학습하고 지식을 생산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대학의 것만큼 가치 있을 수 있다. 아울러 대안적인 형태의 연구 공동체, 교육기관은 대학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 그 역할을 돌아보게 하면서) 더 나은 교육/지식 생태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제도 속에서 별다른 풍파 없이 살아온 만큼, 대학 바깥의 가능성을 어떻게 키울 수 있는지 막연했다. 따라서 그 방안에 대한 이야기는 홍차의 답변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홍차: 장학금이 안 되니까 사실 좋은 교육이 정말 많았는데 돈 없어서 못 들은 것들이 많아요. 저는 비대학 관련 제도 개선 이야기할 때 항상 기금 마련이 우선시 되어야 한다, 비대학 청년을 위한 장학금 같은 게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하는 편입니다. (...) 그리고 대안대학에서 일관되게 느낀 것은 돈이 정말 부족하고, 각자가 가진 강사진이나 네트워크, 커리큘럼이 너무 좋은데 너무 한 쪽으로만 치우쳐져 있는 것. (...) 교환학생, 학점교류와 같은 방식으로 타개될 수 있는 것들이 너무 많거든요. 마지막으로 비대학을 선택하면 그때부터 자기가 일상적으로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없어지거든요. 그러한 결핍들이 있는데, 그런 공간을 마련함으로써 사람들이 모이고, 대안대학들도 모이면 그 안에서 비대학을 선택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 충분히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런 것들이 전혀 안 되고 있죠.

 

인터뷰이 홍차는 이 문제에 대해서 대학 바깥에서 학습하는 비대학 청년들을 위한 장학금 마련, 대안학교에 대한 지원 및 네트워크, 비대학 청년들을 위한 공간 마련 등을 말해주었다. 홍차에 따르면 이러한 제안은 이전에도 꾸준히 있었나 충분히 공론화되지 못했다고 한다.

 

 

나가면서


지금까지 대학 안과 바깥의 학습이 필요한 이유에 대해서 정리하고, 대학과 대학 바깥에 어떤 것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필자 나름의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인터뷰이 세 분의 이야기, 그리고 2019년 한참 외부활동을 열심히 했던 필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오랫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던 주제의 글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학교 안을 좀체 벗어나지 않아 이 글을 쓰기 여러모로 부족했던 필자의 도움 요청에 흔쾌히 응해준 인터뷰이 홍차, 오비도비, 피망 세 분께 정말 감사드린다. 그리고 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고,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쓴 피드백을 아끼지 않았던 편집위원들 덕분이다. 이런 편집위원들을 만나 필자로선 정말 행운이었다.

 

  어쩌면 오래전부터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왔던 것 같다. 글을 쓰면 쓸수록, 2019년 휴학하고 대학 바깥에서 어떤 일을 꾸미던 필자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 글을 통해서 2019년쯤부터 지금까지 필자의 생각 한 꼭지가 부족하게나마 정리된 것이다. 사실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필자는 여전히 대학이 비판적인 지식공동체여야 한다는 관점에서 글을 썼다. 대학 내외부를 막론하고 비판적이기를 멈추면, 대학은 고리타분한 지식공동체가 되거나 자본주의화와 인간소외에 영합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이미 그 둘다 대학의 모습일 수도 있을 것 같다. 필자는 그런 대학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 글을 써보았다.

  서론에서는 학생자율연구를 수강하면서 느낀 감상을 말했다면, 결론에서는 학생자율연구를 수강했던 이유에 대해 말하려 한다. 사실 아주 단순한 이유인데, 필자는 스스로 대학원을 진학하기에 적합한지 생각해보려 학생자율연구 수강을 선택했다. 그렇다! 앞으로 필자는 대학원에 진학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더욱 자주 학교 안에만 머무를 것 같다! 학교에 유폐되기(?) 쉬운 그 직전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라 생각한다.

 

  이제 필자는 학교를 좀 더 자주 벗어나는 궁리를 하고 있다. 한 학기만을 남겨둔 학부 시기도, 대학원 시기도 그렇게 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월영

  1. 신현, 「SNU 공간 파헤치기」, 『대학신문』, 2010.04.03.(기사입력), 2022.08.22.(기사인용),
    http://www.snu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091.
    [본문으로]
  2. 대안대학은 제도권 대학 교육과 차별된 대안적인 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대학으로, ‘지식순환협동조합(지순협)’, ‘신촌대학’, ‘파주 타이포그라피 학교(파티)’ 등이 있다. [본문으로]
  3. 물론 대학에 주어지는 지원금과 대학생에게 주어지는 장학금이란 대학별로, 지역별로 다르며, 이러한 문제는 대학 서열화와 지역 격차 문제를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대학이 고등 교육 기관으로서 막강한 지지를 받고 있고, 그 외의 대안에 대해서는 지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려고 한다. [본문으로]
  4. 요시미 순야, 『대학이란 무엇인가』, 서재길 역, 글항아리, 2014. [본문으로]
  5. 대학이라는 집단 구성원, 특히 서울대와 같은 상위권 대학의 집단 구성원일 경우 고소득자의 자녀일 가능성이 높은데, 이로 보아 대학에서 만나는 사람의 경우 어느 정도는 경제적으로 비슷한 이해관계를 맺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기사에서는 고소득 가구 자녀의 비중이 해를 거듭하며 점차 증가했다는 사실 역시 지적한다. 최원형,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신입생 55%가 고소득 가구 자녀」, 『한겨례』, 2020.10.12.(기사입력), 2022.08.25.(기사 인용). [본문으로]
  6. 여기에서 필자가 상당히 고학번인 것이 보일 테지만.. 적당히 눈감아달라는 심심한 부탁을 남긴다. [본문으로]
  7. 코로나 유행 당시에는 거의 모든 문이, 지금은 (필자가 아는 바로는) 7동 뒤편의 자동문이 그렇다. [본문으로]
  8. 필자는 신입생 환영회나, 학외 동아리의 세미나를 주말에 개최하려 할 때 이러한 불편들을 겪은 적이 있다. 기억이 많이 흐릿하지만, 당시에 경비 문제로 공간 이용이 불가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본문으로]
  9. 외부자가 대학의 지식 생산에 개입하는 것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대학의 기업화’가 문제 시 되고 있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러나 필자는 기업이 대학에 침투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그래서 ‘기업화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 아래 학문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것에는 회의적이다. “그렇다면 대학이 어때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지만, 필자가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대학이 ‘대학의 기업화’라는 화두에 대해 적극적으로 논의하지 않는 데 있다. 필자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러한 논의는 학생회를 비롯한 학부생들 사이의 논의에서 그친 것으로 보인다.[/footnote]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모든 종류의 경제적 합목적성이나 이해관심에 봉사하는 모든 연구기관과 구별되는 대학을 상상하며, 대학을 “모든 것을 공적으로 말할 권리”를 감당하는 ‘무조건성’의 공간이 되어 모든 것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footnote]요시미 순야, 앞의 책, p.297; 윤동구, 「대학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 – 자크 데리다와 ‘제도-번역’의 책임」, 연세대학교 비교문학협동과정 박사문, 2016, pp.108-131. [본문으로]
  10. 윤동구, 앞의 논문, pp.111-112. [본문으로]
  11. 윤동구, 앞의 논문, pp.108-131.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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