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버나움 (2018)>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 출생기록조차 없이 살아온 
  어쩌면 12살 소년 '자인'으로부터
 
  칼로 사람을 찌르고 교도소에 갇힌 12살 소년 자인은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 신분증도 없고, 출생증명서도 없어서 언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 자인. 법정에 선 자인에게 왜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는지 판사가 묻자 자인이 대답한다. ‘태어나게 했으니까요. 이 끔찍한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게 그들이니까요.’ 올해 칸영화제에서 큰 화제를 모으며 심사위원대상을 거머쥔 나딘 라바키의 <가버나움>이 담아낸 베이루트와 그곳 사람들의 모습은 참담하다. 몇 명인지 알 수 없는 아이들이 뒤엉켜 사는 혼란스런 집안모습에서 시작해 강한 자들만이 살아남는 비열한 거리에 내몰린 갈 곳 없는 아이들의 모습은 지옥도를 보는 듯 절망적이다. 아이가 부모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다는 파격적인 스토리지만, 영화는 법정드라마를 따라 가기 보다는 희망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온기 있는 카메라로 담아낸다.(...)[각주:1]

 


  교육은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라는 말이 있다. 미래를 더욱 찬란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교육이므로, 교육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빛나는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가버나움>의 주인공들에게 그러한 미래는 아득한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가버나움’은 예수가 몇 차례 기적을 일으켰음에도 회개하지 못하는 주민들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은 곳이다. 예수는 가버나움 사람들이 구원받는 미래는 없을 것이라 예언했다. 타인으로부터 이런 저주를 받은 사람들, 앞으로의 삶에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을 것임을 선포당한 아이들에게, 교육은 어떻게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교육저널의 편집위원 월영과 러셀은 <가버나움>을 보고 세계 저편의 아이들과 교육,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불안한 환경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논하는 - 교육 받을 권리가 있는 아이로부터, 새로운 미래를 그릴 수 있길 바라며...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1) 인상깊은 대화, 장면은 무엇인가요?


월영: 자인이 딸을 임신한 엄마에게 ‘엄마는 감정도 없냐’는 식으로 말했던 게 기억에 남아요. 영화에서 자인의 부모는 자식을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행복하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지도 않고, 굉장히 처참한 환경에서 살아가게 하는데 왜 또 태어나게 하냐는.. 정말 무서운 비난이었던 것 같아요. 한편으로 이걸 비유적으로 이해해보면 한국의 출산율 문제와도 연결지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출산 지도를 만들거나, 직장 내에서 미혼 여성들을 조사하는 행태들이 아이들의 행복에는 아무 관심도 없으면서 낳기만 하는 부모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네요.


러셀: 오 저도 공감해요. 저는 특히 엄마가 딸 이름을 사하라로 짓는다고 말했을 때 자인처럼 분노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저는 마지막 장면에서 자인이 신분증 사진을 찍을 때 미소를 보였던 것이 제일 인상깊었어요. 그 장면을 보면서 이 때까지 자인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자인도 겨우 12살밖에 안되는 아이였는데 생존하기 위해 주스를 팔고, 요나스를 책임지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고 많이 안타까웠어요.


월영: 그렇죠, 오히려 20대인 저보다 훨씬 세상의 풍파를 많이 맞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미 혼자서 살아가는 데에는 도가 튼.. 저는 가끔씩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다”, 이런 생각을 했었는데, 자인이라는 친구는 정말 ‘태어났으니까 사는’ 그런 아이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 아마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최초로 그렇게 활짝 웃었던 것 같은데, 찡하더라고요. 

 

<가버나움>의 한 장면, (김지미, '<가버나움>, 베이루트의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한계', 씨네21, 2019.02.13.)

  
2) 자인의 부모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싶은가?


월영: 저는 앞 질문에서 했던 이야기에 이어서, 본인의 삶을 반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래 세대에게 좋지 못한 환경을 대물림해주는 기성세대를 대표한다고 생각해요. 반대로 라힐은 아이를 행복하게 키울 의지가 있고, 좋은 삶을 선물해주려고 노력한다는 점에서 (좋은 환경을 제공해주지 못하는 부모인 건 마찬가지지만) 자인의 부모와는 또 다른 것 같아요.


러셀: 저도 자인의 부모가 너무 무책임하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있는 아이들도 다 책임지지 못하는 상황에서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또 아이가 생겼다고 했을 때, 저도 자인처럼 절망했던 거 같아요. 자인을 출생신고도 하지 않았고 길거리에 주스를 팔게하고 여동생 사하르를 결혼시키는 장면을 보고 암울했어요. 어떻게 보면 아이들을 방치하고 책임지지 못하는 것 또한 학대의 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한편 자인의 부모에 대해서도 실망했지만 국가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할 거 같아요.

 


3) 이 영화는 실제로 난민들을 캐스팅해서 촬영했다. 이 영화는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했는데, 실제 배우들이 출생 등록이 되어있지 않아 영화제 전에 급하게 신분증을 발급하여 참석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영화 속 아이들과 비슷한 삶을 사는 아이들이 많다. 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월영: 상상하기 싫어요.. 영화 보면서도 좀 괴로웠거든요. 이것보다 더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아이들, 어른들도 있겠죠? 


러셀: 이 사실을 알고 예전에 읽었던 ‘공간의 힘’이라는 책이 떠올랐어요.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국가 간의 이동이 비교적 자유로워져,  공간이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이 점점 줄어들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 책에서는 세계는 여전히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환경적으로 불공평하며, 이러한 불평등한 공간이 사람의 운명에 강력한 힘을 행사하고 있다고 했어요. 도시화된 중심부와 달리 주변부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러한 공간에 태어난 것이 단순한 우연이며, 그들의 선택이 아닌데 국적에 따라 삶의 좌지우지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했어요. 영화 속 자인의 삶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영화 속 아이들과 비슷한 삶을 사는 아이들을 보며 공간적 불평등과 난민 문제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월영: 이미 태어나본 우리 입장에서는, 정말 우연하게 이런 환경에 태어난 거잖아요? 어느 개인의 입장이라도 다 비슷할 것 같아요. 그런데 내가 태어났더니 국적도 없고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없다고.. 영화에서도 그런 표현 많이 나오잖아요. 그 인신매매상이 “너가 사람이라는 증거를 가져와”라고 했는데, 결국 자인은 본인이 사람이라는 증거를 가져오는 데 실패하기도 하고. 이런 삶이 어떤 것일지…


러셀: 맞아요.. 그래서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사실에 더 먹먹한 거 같아요.



4) 영화에서 자인은 본인의 부모들을 고소하는 형태로 묵었던 갈등을 풀어낸다. 이러한 해소의 의미, 혹은 한계라고 생각되는 것을 이야기해보자.


월영: 저는 처음엔 기성세대를 완전히 파괴해버리는 방식으로 갈등을 풀어내려나 싶었어요. 재판 끝에서도 자인은 엄마에게서 아이가 새로 태어나는 걸 재앙처럼 생각하잖아요. 결국 꿈도 희망도 없다는 결론인가?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기도 한 게.. 이 고소가 방송을 타면서 자인의 이야기가 유명해졌고, 그걸 계기로 라힐이랑 요나스는 만날 수 있었잖아요. 저는 차라리 거기서 또 다른 희망, 또 다른 이야기가 시작되는 건 아닌가 생각했어요. 


러셀 : 저도 월영님 생각에 공감했어요! 과연 이 영화는 해피엔딩일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원래는 자인이 출생 신고증이 없어서 다른 나라로 떠나지 못했는데, 방송을 타면서 자인과 같이 어렵고 힘든 삶을 살지만 신분증이 없어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잖아요. 사람들에게 이와 같은 문제의식이 공유되고, 가혹한 삶을 사는 아이들을 보호해야한다는 담론이 생기면 어느정도 해피엔딩이 아닐까 생각했던거 같아요. 


월영: 아, 러셀님 말씀 듣고 떠올린 건데, 한편으로는 자인이 방송을 타고 신분증을 만드는 게, 자인이 사람으로 인정받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이제 사람들은 자인이라는 아이가 있다는 걸 어떻게든 알게 되었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 영화로 다른 아이들도 사람이 될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요? 이미 사람으로 태어난 마당에 모순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어쩌면 이미 사람인 사람들이 받아들여야하는 것일 수도 있죠. 자인이 고소장 보낸 것처럼요.


러셀: 아 맞아요. 자인의 여동생 사하라가 아파서 병원에 갔을 때 신분증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한다는 장면도 떠오르는 거 같아요. 월영님 말씀처럼 인간으로 당연히 누려야할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사각지대 속 그들도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가 되겠죠?

 

<가버나움>의 한 장면, (피링스[brunch 블로그], '영화 <가버나움>', 2019.07.26., https://brunch.co.kr/@pirings/3)

 

5) 영화 제목이 가버나움인 이유가 무엇일까? (가버나움 재단)


월영:  가버나움이 약간… 어떠한 희망도 없는 땅이더라고요…? 영화 내용이랑 정말 맞다고 생각해요. 근데 정말 예수는 그 가버나움이라는 지역에 대해 그런 무자비한 예언을 했을까 의문이기도 해요. 물론 성경이나 기독교를 공부해보지는 않았지만… 자인이 처한 환경을 가버나움으로 비유할 수 있겠지만, 결국 아무런 희망도 없이 끝났다고 할 수 있을까요?


러셀 : 음.. 자인과 아이들은 가혹한 삶을 살았지만, 그러한 삶이 알려졌다는 점에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거 같아요. 영화 내용을 현실로 확장하면,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수상하고 실제 난민 소년과 불법체류자를 캐스팅하여 촬영한 것이 유명해지면서, 사람들이 현실에도 영화와 비슷한 삶을 사는 아이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되었잖아요. 사람들이 가혹한 삶을 사는 아이들과 난민의 삶을 알고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어느정도 희망적인 거 같아요. 실제 가버나움 영화 제작진은 ‘가버나움’ 재단을 설립하여 영화에 출연한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고 해요.


월영: 좀 다른 관점에서, 이건 좀 불경한 생각일 수도 있는데요. 가버나움도 결국 ‘예수’의 저주를 받은 거잖아요. 근데 예수가 먼 미래의 가버나움 사람들까지도 함부로 평가할 자격(?)이 있나 생각하면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자인은 본인의 삶을 규정해놓은 부모를 고소하고 본인의 존재 이유를 찾았으니까, 어떻게 보면 예수가 가버나움 지역에 내렸다던 그 저주에 반기를 든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요. 그러니까 가버나움은 다시 새로운 의미로, 더 나은 삶을 찾는 난민 어린이들을 지원하는 장소로 바뀔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러셀, 월영

  1. 김영우/2018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가버나움> Daum 영화 소개에서 발췌,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121059)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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