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만함을 예민함으로 바꾸는 일
이물
아,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힘이 들었습니다. 다른 대단한 이유가 아니라, 글을 못 쓰겠어서요. 교육저널을 하면서, 아니 학교를 다니면서 이렇게나 노트북의 흰 화면이 두려운 적이 없었습니다. 마감 기한은 거듭 미뤄져가고, 글을 더 진척시킬 아이디어는 없고, 그걸 떠올릴 의지는 더더욱 없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면 그나마 변명거리라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했으니 더 힘들었겠지요.
하고 싶은 말은 있는데 자신이 없어서 매번 도망쳤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없었던 이유는, 내가 말하고 싶은 그만큼, 책임을 질 수 있는 논리나 근거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만하다고나 할까요.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이유는 몰라. 이제까지 그렇게 오만하게 생각하며 학교를 다녀왔던 거 같은데, 이번 호를 준비하며 속된 말로 뽀록(?)이 나버렸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실례를 무릅쓰고 오만함을 몇 개 더 얹어보려 합니다. 교육이라는 것이, 백과사전처럼 온갖 정보와 지식을 축적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면 그런 오만함이 계속 필요할 것이라고요. 내가 어떤 곳에 서있어야 할지, 어떤 편파성과 당위를 떠올리고, 어떤 주장을 희망하면서, 그에 맞는 논리를 찾아갈지. 물론 그런 오만함이 현실을 왜곡하고 자신의 눈을 가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언제고 자신의 확신을 내려놓거나 교체할 수도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래서 배운다는 것은 그렇게 자신이 있어야할 위치를 감각하는 능력, 그 위치가 적절한지 거듭 돌이켜 해석하는 능력을 길러나가는 일, 오만함에 책임감과 논리를 얹어 예민함으로 바꿔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교육저널 편집위원들은 저보다 훨씬 더 그런 일을 잘 수행해주었습니다. 공교육-사교육의 대립을 비틀고, 정형화된 입시를 넘어선 교육이 가능한 시대를 다시 요청했습니다. 스펙화된 학생의 ‘아픔’을 건져 올려, 주사 몇 방이 아니라 다양한 몸과 경험으로, 우리 삶의 권리로 이해하려 했습니다. 학교 밖의 사람들을 만나 학교라는 제도의 이면, 그 안에서 우리의 삶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난민지위 인정 현황을 좇아가며, 공동체는 한 때의 사건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삶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되새겼습니다. 교수 성폭력 사건에서 ‘성폭력’과 ‘권력’이라는 익숙하지만 어려운 명제를 또렷이 기억하려했습니다. 모두 웬만한 예민함이 없으면 불가능한 작업이고, 우리에게 새롭지만 근본적이고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서 학교는, 건강한 삶은, 공동체는 어떠해야 하는가?
교육 현장과 교육 자체에 대한 우리의 작업이, 대학이나 학교 같은 다른 교육기관의 그것보다 더 오만할 수는 있어도, 덕분에 덜 예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교육’저널일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라고 감히 생각합니다. 이번 호를 읽는 여러분에게도 이 예민함들이 즐거운 긴장으로 가닿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실없는 소리가 제가 저지른 오만함에 조금이라도 면죄부를 얹어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두 감사했습니다.
2019.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