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공정 너머의 길①] 다른 종류의 의문, 가지 않은 길 - 공정성 담론을 넘어 -
1. 들어가며 : 다른 종류의 의문
2020년 KBS 신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2020년 사회에서 필요한 가장 핵심적인 가치’로 공정성이 20.2%로 1위로 꼽혔다. 2019년 문재인 대통령의 시정 연설과 2020년 청년의 날 맞이 연설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키워드 역시 ‘공정’이었다. 1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지표가 말해주듯, 확실히 최근 몇 년간 우리 사회 중심부에 있는 핵심 키워드는 ‘공정성’이었다. 2
그러나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 ‘공정성’이 크게 화제 되었던 맥락을 돌이켜보면 썩 유쾌한 기억들은 아니었던 듯하다. ‘공정성’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할 때마다 늘 사회적으로 큰 논란과 분열을 일으킨 사건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특히 공정성에 관한 논란이 본격적으로 대두된 것에는 2019년의 ‘조국 사태’와 2020년의 ‘인국공 사태’가 크게 기여했다.
두 사건은 각각 ‘대입’과 ‘취업’이라는 다른 의제를 다루고 있는 독립된 사건처럼 보이지만,사실 그 본질은 같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모두 특정 집단(대학 혹은 인천국제공항사)에 진입할 자격이 있는 누군가를 선발하는 절차에 존재하는 불공정성에 대한 논란이었기 때문이다.
수많은 여론과 언론이 대입 수시 학생부 종합전형의 비리를 문제 삼고 인천국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하며 ‘공정하지 못한’ 선발 과정을 비판했으며, 두 사태 전후로 ‘공정성’에 관한 첨예한 논쟁을 주고받는 소위 ‘공정성 담론’이 등장했다. 인재 선발 과정에 있어 현재의 절차가 공정한지, 어느 것이 더 공정한지에 대한 투쟁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
물론 인재 선발 과정의 공정성이 중요한 가치인 것은 맞지만, 나는 여전히 많은 의문이 든다. 공정성 담론이 이제껏 이끌어왔던 ‘무엇이 더 공정한가?’를 넘어선 다른 종류의 의문들 말이다. 왜 공정성 논란이 촉발된 계기가 하필 ‘조국 사태’, ‘인국공 사태’였을까? 우리는 왜 이토록 공정성에 집착하는 수준으로 목맬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저마다의 공정성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일치하긴 하는 것일까? 공정하지 못한 것이 정말 선발 과정뿐이었을까? 어쩌면 공정성 담론이 놓치고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이 글은 이러한 조금 다른 종류의 의문에서 출발한다. 공정성이 다른 모든 가치를 압도하는 세태에서, 어쩌면 우리가 진정 고민해보아야 할 것은 ‘공정성’ 그 자체가 아닐 수 있다. 결국 공정성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단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결국 질문하고 성찰해 보아야 할 것은 따로 있다. 공정성을 목놓아 외침으로써 우리가 궁극적으로 살아가고 싶은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그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2. 우리 사회의 ‘공정성 담론’
런던 올림픽의 신아람 선수, 소치 올림픽의 김연아 선수 경기와 같이 스포츠는 종종 ‘불공정’ 심판 논란에 휩싸이곤 한다. 국무총리 산하의 ‘공정’거래위원회는 부당한 불공정 거래 행위를 규제하고 소비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처럼, ‘공정성’은 특별히 어느 영역에만 한정된 가치가 아니다. 모든 영역에서 보편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가치이기 때문에 공정성이 논란이 되는 영역 역시 수없이 많다. 불공정 심판·불공정 거래·불공정 계약 등, 하다못해 가위바위보 승부조차도 불공정하다며 논란이 일 수 있을 정도로 ‘공정’의 영역은 광범위하다. 그렇다면 질문해볼 수 있지 않을까? 공정성이 개입되는 하고 많은 영역 중에, 왜 하필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만이 첨예한 ‘공정성 담론’을 등장시킬 정도로 논란이 되었을까?
# 왜 하필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인가?
‘왜 하필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였는가?’를 질문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일 수 있다. 각 사건을 꿰뚫는 의제가 ‘대입’과 ‘취업’임을 고려한다면 당연한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입과 취업이 한국 사회에서 갖는 중요성이 크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당연해 보이는 것을 파고 들어가는 것이다.
질문은 왜 조국 사태(대입)였느냐, 왜 인국공 사태(취업)였느냐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거나 정규직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입과 취업의 성공은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 맞다. 결국 대입과 취업도 공정성과 마찬가지로 수단적 가치인 셈이니, 중요한 것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대입과 취업, 그리고 이것들의 공정성에 목매는가?
# ‘대입’과 ‘취업’, 그리고 안정적인 생활
“연대 나오면 모하냐… 백순데…”
2015년 2월 말, 연세대 졸업식 날 붙은 현수막이 화제가 되었다. 유머로 소비되었지만, 속뜻을 살펴보면 씁쓸하기 그지없다. 대학이 매우 중요한 한국 사회이지만 명문대를 나와도 취업을 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해당 현수막의 의미는 드라마 SKY캐슬에서 예서가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대학이 ‘서울의대’였던 것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의대와 같이 상대적으로 고소득이나 안정성을 보장받는 치대·한의대·교대 등이 입시에 선호되는 것은 대입 이후에도 취업이라는 중요한 관문이 있으며, 양자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수 학부나 과가 아니더라도, 소위 ‘명문대’라고 여겨지는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일수록 대기업과 전문직 취업률은 높아진다. 결국 ‘어떤 대학에 들어가느냐’가 중요한 이유는. ‘어떤 직장에 들어가느냐’를 결정짓기 때문인 것이다.
수단은 다를 수 있어도, 모든 사람의 목적은 결국 같다고 할 수 있다. 바로 누구나 경제적·사회적으로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을 원한다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안정된 의·식·주 생활이 보장된 조건 하에서 자신이 바라고 계획한 대로 삶을 영위하고 싶어 한다. 당장 끼니를 해결할 수 없거나 옷을 사 입을 수 없는 생활을 원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을 것이다. 또한 살고있는 집 혹은 직장에서 몇 년을 주기로 쫓겨나며 그럴 때마다 다른 집과 직장을 알아보아야 하는 생활을 원하는 자 역시 누구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계획한 대로 안정적인 삶을 꾸려나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부분이다. 그리고 이 경제적 요소와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 ‘취업’, 그 일자리를 보장해주는 대표적인 수단이 ‘대학’이다.
불행한 점은 경쟁과 능력주의 담론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 특히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생활’이 모두에게 허락되기 힘들다는 점에 있다. 누군가는 전월세 계약 기간이 끝나면 살던 집에서 나가야 하고, 누군가는 고용 기간이 끝나면 다른 일자리를 알아보거나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에 뛰어들어야 한다. 실제로 2019년 한국노동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상위 10% 집단이 전체 계층 소득의 절반 이상(50.6%)을 가져가고 소득불평등 악화속도도 매우 빨라지는 등 소득 양극화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양상을 보여준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사이의 임금 격차도 OECD 국가 중 최고 수준이다. 3 4 점점 더 경쟁이 격화되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줄어들고 있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의 차별과 위계화가 존재하고 대학 서열이 이 위계화와 이어지는 사회에서, 모두가 원하는 ‘안정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자 거의 유일한 길은 결국 “좋은 대학을 나와서 좋은 직장(대기업 정규직)에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공정성이 논란이 된 것은 필연적으로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입’과 ‘취업’에 성공하는 것은 ‘안정적인 생활’이라는 목적을 이룩하는 가장 빠른 길이자 거의 유일한 길이기에, 우리 사회에서 ‘정도(正道)’라고 여겨진다.
# 우리가 공정성에 목매는 이유
우리가 그 무엇보다도 공정성에 목매고 공정성이 가장 절박한 의제가 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상황에서,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제도(대표적으로 입시와 취업)라도 ‘공정’해야 우리의 최종 목적인 ‘안정적인 삶’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공정성에 집착하고 절박해진다는 것은 안정적인 삶을 살기가 그만큼 힘들고 절박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도의 공정성은 자본주의 치하 능력(노력)주의 담론과 맞물려 시너지를 일으킨다. 더 나은 삶을 보장해줄 수 있는 ‘제도’가 투명하고 공정하기만 하다면, 개인의 ‘노력’으로 못할 것은 없기 때문이다. 능력(노력)주의 담론에 따라 개인 노력의 정당한 결과를 보장하기 위한 공정성이라는 가치는 무엇보다 중요해진다. 그리고 공정성 담론, 특히 대입과 취업 제도에서의 공정성을 외치는 목소리는 다시 누구나 노력만 하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다는(더 나아가서는 계층 상승을 할 수 있다는) 능력(노력)주의 담론을 생산한다.
3. 공정성 담론의 한계
왜 하필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였는지, 왜 공정성에 그리도 목매는지에 대한 질문은 어느 정도 해결한 듯하다. 결국 대입과 취업,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목소리 뒤에는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절박한 요구가 있었다. 그러나 대입과 취업이 우리 사회에서 가지는 중요성이, 대입과 취업 제도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현 한국 사회 ‘공정성 담론’의 정당성을 바로 보장해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결국 근본적인 목적이자 우리가 요구해야 할 것은 ‘안정적인 생활’인데, 이것이 대입과 취업 제도의 절차의 공정성만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공정성 담론의 한계는 명백히 드러난다.
# ‘공정성’ = ‘특정 집단 진입 제도의 공정성’?
앞서 이야기한 대로, 공정성은 가위바위보 게임 하나에까지 적용될 수 있는 매우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가치이다. 그런데 현재의 공정성 담론을 살펴보면 공정성이 논란이 되는 영역이 매우 한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특정 집단 진입 제도’의 공정성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대입’과 ‘취업’을 다른 말로 바꿔보자. 대입과 취업은 각각 ‘입시(入試)’와 ‘입사(入社)’라는 말로도 부를 수 있다. 이 ‘들 입(入)’ 자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는 현재의 공정성 담론이 특정 집단(특히 상위권 대학과 정규직 일자리 같은 높은 집단)에 ‘진입(進入)’하기 위한 제도에 한정한 좁은 논의라는 점을 시사한다. 언론과 여론의 넘쳐흐르는 담론 속에서 무엇이 공정한지 평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은 오직 특정 집단 진입 절차였다. 정시/수시(학생부 종합전형) 논란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논의 모두 이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결국 상위권 대학과 정규직 직장에 진입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누구이며, 그를 어떻게 더 ‘공정하게’ 선발할 것인가가 논의의 전부였던 것이다.
현재의 공정성 담론이 내포하는 ‘공정성’이 매우 좁은 의미라는 것을 인지하고 나면, 그 다음 단계를 반드시 성찰해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현재 한국 사회의 공정성 담론이 이끄는 대로 특정 집단에 진입하기 위한 제도(대입·취업 제도)가 공정하기만 하면, 정말로 우리 사회는 ‘공정’해지는 것일까?
‘공정성’은 ‘공평하고 올바름’을 의미하며, 기본적으로 공익 혹은 공동선, 즉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있고 평등하며 인간적 면모가 담보된 도덕·윤리의 영역과 밀접한 가치이다. 즉, 공정성이라는 가치가 그 값을 다하기 위해서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고려해볼 때, 제도의 공정성을 논하려면 그에 앞서 그 제도에 모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사회 구조가 반드시 우선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애초에 제도에서 누군가가 배제되어 있었다면 제도가 아무리 공정한들 ‘구조적 불공정’이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특정 집단 진입 제도의 불공정성과 사회 구조의 불공정성 중, 둘 중 어느 것이 더 큰 불공정일까? 당연히 후자이다. 술래잡기 규칙이 아무리 공정한들, 다리를 다쳐 달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5
# 더 큰 불공정
그렇다. 문제는 ‘더 큰 불공정’이 존재한다는 것에 있다. 제도의 불공정보다 더 큰 ‘구조의 불공정’은 대입과 취업 현장에서 명백히 작용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대치동에서 현강을 들을 수 없는 학생들이 존재한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남들처럼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길 원하지만, 당장 대학에 진학할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되지 않아 특성화고에 진학해야만 하는 학생들이 있다. 남들처럼 안정적인 일자리를 얻고 싶지만, 대학을 가지 못해 질 낮은 당장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에 뛰어들어야 하는 청년들이 있다. 모두 사회가 인정하는 정도(正道)를 걸을 수 없는 사람들, 술래잡기 게임에서 다리를 다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대입 제도와 채용 과정을 공정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외딴 섬 이야기에 불과하다. 애초에 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결국 제도가 아무리 공정한들 이때의 공정성은 모두가 아닌 제도에 편입될 수 있는 이들의 이익만을 위해 봉사하게 되는 셈이다.
흘러넘쳤던 공정성 담론 속에서, 제도를 공정하게 만들어달라는 요구는 수없이 들렸다. 그러나 그 제도에서 이탈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역시 제도권 밖에서도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해달라는 요구는 들어보지 못했다.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지 못할수록 비정규직 저임금 노동에 뛰어들기 쉬워지고, 점점 더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고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해서 제도권에 편입될 수 없는 이들이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 만한 다른 길(수단)이 있느냐 하면, 역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태어나길 금수저가 아닌 이상, 좋은 대학-좋은 직장의 루트를 타는 것이 안정된 삶을 사는 유일무이한 길인 것이 한국 사회의 현실이다.
# 더 큰 불공정을 은폐하는 공정성 담론
더욱 문제적인 것은, 특정 집단 진입 제도에 한정한 좁은 의미의 공정성 담론이 이러한 ‘구조적 불공정’을 은폐하고 지워버린다는 것에 있다. 더 큰 불공정을 지적하지 않고 제도의 공정성만을 개선하라는 요구는 자연히 절차나 제도‘만’ 공정해지면 모든 것이 공평하고 정의로울 수 있다는 담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담론은 다시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낳는데, 첫째로, 그 ‘공정’한 제도를 통해 상위 집단에 진입하는 것만이 옳고 그렇지 못한 방법은 불공정하다는 인식이 팽배해진다. 이는 인천국제공항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 ‘정규직 신입사원 채용’이라는 ‘공정’한 제도를 따르지 않았다며 뭇매를 맞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알 수 있다. 둘째로, 절차나 제도‘만’ 공정해지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담론은 모든 것은 개인의 노력 문제로 치환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개인이 불안정한 삶을 사는 이유는 그가 ‘노력’을 하지 않았기에 그런 것이며, ‘노력’을 한 사람만이 상위 집단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이 된다는 논리가 형성되는 것이다.
4. 공정성 담론을 강화하는 교육
현재의 공정성 담론은 이렇듯 명백한 한계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적하는 목소리는 적거나 무시되기 일쑤이다. 이러한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미 사회의 너무나도 많은 기제들이 협소한 의미의 공정성 담론을 유지·재생산하는 데에 이용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수많은 기제들이 있겠지만 다 다루기엔 페이지가 모자라니 생략하고, 한 가지에만 집중해보겠다. 이제껏 논의를 이끌어왔던 중요한 키워드인 ‘대입’과 ‘취업’ 양자를 잇는 연결고리는 들 입(入) 자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교육’이다.
교육의 본질은 물론 공정성 담론을 강화하고 기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교육 본연의 목표는 학습자를 가르치고 능동적인 배움을 실천하게 함으로써 개개인 내면의 질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은 이 역할을 실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가?
# 입시(入試)와 입사(入社)를 위한 교육
한국 사회에서 교육, 특히 중등교육이 지니는 가치는 명확하다. 바로 ‘대입’이다. ‘대입’은 대학 입시와 그를 둘러싼 전반적인 평가를 말하는 것이지만, 교육은 대학 입학을 넘어선 포괄적이고 능동적인 배움을 말한다. 이렇듯 각 단어의 뜻과 목표하는 바가 명백히 다르지만, 한국 사회에서 두 가지는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듯하다. ‘국영수’가 주요 과목인 이유는 수능에 공통 과목이기 때문이고, 대입 전략의 변화는 중등 교육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며, 입시에 반영이 적은 영역은 실제 교육 현장에서 무시된다. 이렇듯 중등 교육은 대학이라는 집단(특히 상위권 대학) 진입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것 이외의 가치는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고등교육(대학)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중등교육의 목표가 ‘대입’이라면, 고등교육의 목표는 ‘취업’이다. 대학 공대 계열이나 문과의 경영/경제가 인기 학과로 취급되는 이유는 노동시장과의 연계성이 뛰어난, 다시 말해 취업이 잘되는 학과이기 때문이다. 혹자는 대학은 입시 위주의 교육을 하는 인문계고나 직업 교육을 하는 특성화고와 같이 직접적으로 다음 집단 진입과 연계한 교육에 주력하지는 않는다고 반문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최근의 대학들이 학과 입학과 동시에 취업을 보장하는 계약학과를 신설하거나, 산학협력이나 창업 교육에 힘쓰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결국 대학이 노동 시장의 인재를 키워내는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처럼 고등교육 역시 ‘취업’을 위한 관문이자 수단적 가치의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6
중등교육이든 고등교육이든 교육의 목적이 개인을 좋은 대학과 직장에 보내는 것으로 변질됨으로써, 교육은 (특정 집단에 진입하는) ‘제도’의 공정성에 대한 논거를 제공해준다. 제도를 이용하여 통과할 수 있는 사람, 즉 상위집단에 진입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가려내는 역할을 교육이 하기 때문이다. 중등/고등교육과정을 충실히 이행하여 입시/입사 과정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 상위집단에 진입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가장 ‘공정’한 것으로 통용된다.
# 불공정한 것은 ‘대입’이 아니라 ‘교육’이다.
이렇듯 교육이 특정 집단 진입의 자격과 공정성을 판가름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이용되는 상황 속에, 결국 더 큰 불공정은 가려진다. ‘대입’과 ‘취업’이 아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교육’ 자체의 공정성에 대한 물음은 뒷전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수시와 정시의 공정성 싸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논란은 밥 먹듯 이뤄지지만, 수능을 치르기까지의 과정에서 존재하는 불공정한 상황이나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를 문제 삼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제도 이전에 그 제도에 편입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불공정한 것은 대입·취업의 제도가 아닌 그들이 마음 놓고 ‘교육’을 받을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여건이다. 결국 진정 불공정한 것은 제도보다 교육 그 자체, 더 나아가 사회 구조인 것이다.
더 큰 불공정이 가려지고 다시 모든 것이 개인의 노력 문제로 치환되는 양상은 교육에서 특히 강하다. 2020학년도 수능 만점자 중에 백혈병의 아픔을 딛고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 학생의 사연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외에도 갖가지 고난을 딛고 대입이나 대기업 입사에 성공한 사람들이 큰 화젯거리가 되는 예는 수없이 많다. 교육은 비교적 누구나 받을 수 있는 평등한 것,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으로 인지되기 때문에 마치 누구든 ‘노력’만 한다면 교육을 통해 원하는 집단에 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 형성되는 것이다. 7
이 과정에서 노력을 들일 수조차 없는, 제도권 밖에 위치한 이들을 위한 길은 보이지 않는다. 정부의 취업 지원 정책도 대부분 대학을 다니고 있는 취업 준비생들을 위한 정책이며, 특성화고 졸업생이나 대학을 가지 않는 고졸 취업자들이 향할 곳은 결국 저임금·고위험의 열악한 여건의 비정규직 노동이다.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 자료에 따르면 20~34세 고졸 청년의 평균 임금(시간제 등 포함)은 184만 원으로 대졸 228만 원보다 44만 원이나 적었다. 8
# 교육 현장에서 공정성 담론의 내면화
또 다른 관점에서, 교육 현장에서의 경험들은 어쩌면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은폐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공정성 담론을 내면화하게 만드는 데에 가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교육 현장 자체가 공정성 담론을 내면화하기에 매우 적합한 장소이다. 어느 인문계 고등학교나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모아 놓은 ‘특별반’이 존재한다. 생각해보면 이상하지 않은가? 왜 모든 학생을 공평하게 대우하지 않고 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을 ‘특별하게’ 대우해야 하는가? 그림을 잘 그리거나 게임을 잘하는 학생들을 모아 놓은 ‘특별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노력과 능력, 성적에 따라 서열을 부여하고 차별 대우하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고, 이 능력 있는 사람들이 상위집단을 차지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믿는다. 왜 학생들이 장시간 공부 노동에 시달리는지, 무엇을 위해 서열화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비판의식은 공정성 논리 하에 흐려진다. 중등교육 현장에서 이러한 논리들이 교묘하게 내면화되면, 비판의식은 흐려지고 익숙해진 매커니즘을 따라 결과적으로 사회 전반 어떤 영역에서든지 공정성 담론이 지배하게 된다. 마찬가지의 논리가 고등교육과 노동 시장에서도 적용되는 것이다. 취업 준비를 위해 많은 비용을 투자하고 노력한만큼 ‘정규직’이라는 보상을 받는 것, 그 노력을 투여하지 않고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는 논리가 학습된다. 인국공 보안요원들이 ‘노력하지 않은 채 혜택을 얻어가려는 무도한 사람들’로 간주되는 것이다.
5. 우리는 왜 그래야 하나요?
공정성 담론이 더 큰 구조적 불공정을 가리고 여기에 교육 역시 기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착잡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차분히 생각을 가라앉히고 나면 의문들이 다시 떠오른다. 그렇다면 교육은 왜 그래야 하는가? 이 모든 현상들은 경쟁과 능력주의 담론을 바탕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공정성 담론이 더 큰 구조적 불공정을 은폐한다면 과연 우리 사회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하필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였던 이유, 우리가 그토록 대입과 취업, 공정성에 집착하는 이유 말이다.
# ‘수단’이 아닌 ‘목적’
조국 사태와 인국공 사태로부터 대입과 취업, 그로부터 공정성, 교육까지. 논의를 이끌어오면서 우리 모두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는지 모른다. 결국 앞서 나열한 것은 모두 ‘수단’이다. 대입과 취업, 공정성과 교육 모두 ‘더 나은 삶’,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이제껏 잊고 있었던 것은 목적이다. 우리는 어떤 삶을, 어떤 사회를 살고 싶은가 하는 것이다.
목적과 수단이 전치되는 상황 속에,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와 대입과 취업 제도를 공정하게 해달라는 요구와 같은 의미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양자는 명백히 다르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은 대입과 취업 제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편입될 수 없는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상위집단에 들어가기 위해 서로를 밟고 경쟁하게 해달라는 요구는 더더욱 아니다. 상위권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정규직이 되지 못하면 사회에서 탈락되고 불안정한 삶을 사는 사회 또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지 먹고 입고 자는 것을 안정적으로 누릴 수 삶,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삶이다. 전월세 계약 기간이 끝나도 다른 집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지 않고, 고용 기간이 끝나도 다른 일자리를 찾고 노동한 만큼 보수를 받을 수 있는 삶. 그것이 우리 모두가 원하는 삶이다. 이 목적을 위해서, 조금만 생각을 비틀면 우리가 요구할 것은 제도의 공정성 개선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전혀 다른 요구를 할 수도 있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비정규직이어도 안정되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보장해 달라는 요구 말이다.
# 공정성 담론을 넘어
여기까지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는 반문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사회주의 국가를 원하는 것인가요?” 경쟁과 능력주의를 통해 서로를 밟고 일어서고 그만큼 대우를 받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마치 ‘어쩔 수 없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모든 상황은 어쩔 수 없는 것이며, 더 나은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핀란드·스웨덴 등 북유럽의 선진국들 역시 균등분배를 주창하는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게 아니라 시장경제 체제에 바탕을 두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이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이 90%에 육박하는 반면 북유럽 나라들의 대학 진학률은 40%대이다. 이 나라들에서는 대학을 가고 싶은 사람‘만’ 가기 때문이다. 공부가 죽도록 싫지만, 취직과 경쟁 때문에 할 수 없이 대학에 가야 하는 한국 사회와는 대조적이다. 그렇기에 청소년들은 시험지옥에도, 입시 경쟁에도 시달리지 않는다. 이렇게 모두가 대학을 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굳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도 질 좋은 일자리를 가질 수 있으며 그에 따라 인간답고 안정적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에서는 벽돌공의 수입이 대기업 정규직이나 대학교수와 큰 차이가 없다. 때문에 의사가 될 수 있을 만큼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스스로 벽돌공이 된다. 9
과연 이런 나라들에서도 대입과 취업 제도의 ‘공정성’에 대한 논란이 매우 중요할까? 높은 확률로 아닐 것이다. 정시와 수시 공정성 싸움이 밥 먹듯 일어나고, 대기업 신입사원 공개 채용 제도를 통과하기 위해 수천, 수만 명이 목매는 사회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과연 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사회인가.
우리는 이러한 다른 종류의 사회에 대한 상상을 제약하는 공정성 담론에 더이상 얽매여서는 안된다. ‘수단’보다 ‘목적’에 집중하며, 다른 종류의 의문을 던지고 다른 방향으로 담론을 이끌어야 한다. 왜 우리는 상위집단에 진입해야만 안정적으로 살 수 있는가? 왜 대입과 취업에서의 공정성만 제도권 밖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가? 왜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서로를 밟고 일어서며 경쟁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해 좋은 직장에 취업해야 하는가? 왜 실패했을 때 책임과 위험성은 노력하지 않은 개인이 모두 떠안아야 하는가? 명문대를 나오지 않거나 비정규직 노동자들까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 새로운 요구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지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우리는 새로운 종류의 요구를 할 필요가 있다. 이때 명심해야 할 것은 요구를 개개인에게 돌려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구조적 모순을 시정하기 위한 요구는 개인이 아닌 구조에 가해져야 한다.
물론 공정성 담론 이후 많은 이들이 국가에 제도를 공정하게 만들라는 요구를 하였다. 그러나 이 논리 뒤에 내재되어 있는 보다 근원적인 요구는 제도는 ‘공정’하니 이 제도를 이용해 상위집단으로 들어가도록 ‘노력’하라는 개인들을 향한 요구이다. 결국 청소년들에게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라거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공개 채용 제도를 통과해 공정하게 입사하라는 요구가 가장 아래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구조적 모순이 존재한다면, 이를 해결할 책임은 결코 개개인에게만 있지 않다. 불공정한 구조를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임금 돈을 가진 자본(기업)과 집행력을 가진 국가도 함께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큰 힘을 가진 국가와 자본이 어쩌면 더 나은 사회에 대한 상상을 지운 채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가장 편한 길’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의심해보아야 한다. 설령 자본주의 아래 경쟁 논리와 능력주의 담론이 자연스럽다고 해도, 우리 사회가 수많은 구조적 불공정을 안고 있다면 우리 모두 이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다면 어떤 요구를 해야 하는가? 결국 수단이 아닌 ‘안정적인 삶’이라는 목적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해야 할 것은 좋은 대학을 가지 못한 ‘무능한’ 학생들을 비난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요구할 것은 그들에게 상위권 대학에 입학하고 공개 채용을 하는 ‘공정한’ 제도를 통과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왜 대학에 가려고 하는지, 정규직이 되려고 하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제도를 공정하게 만들라는 요구 뒤에는 대학에 가지 않으면, 비정규직이면 살기 힘들다는 분노가 있었다. 설사 학생부종합전형과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있었을지라도, 그 뒤에는 결국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은 사람들의 절박한 열망이 있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는 것은 당연히 훌륭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 노력을 기울이기 힘든 제도권 밖의 사람들 역시 안정되고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달라는 요구를 해야 한다. 집을 살 만큼의 돈이 없어도 전월세 계약이 끝나고 쫓겨날 걱정을 하지 않는 사회, 비정규직 노동자가 되어도 먹고 자고 취미 생활을 할 수 있을 만큼의 생활이 보장되는 사회, 그에 따라 모두가 좋은 일자리를 위해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우리는 요구해야 한다.
6. 나가며 : 가지 않은 길
정시 수시 논란·정규직 비정규직 논란은 결국 공정성에 관한 소모적인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더 큰 구조적 불공정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것을 은폐하는 허울뿐인 공정성 논란이었기 때문이다. 대조적으로, 제도권 밖의 사람들까지 안정적인 삶을 누릴 수 있게 해달라는 비판은 상대적으로 많이 들리지 않았다. 다른 종류의 의문과 사회를 상상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는 말이다.
우리가 공정성 담론을 넘어선 전혀 다른 종류의 의문을, 요구를, 교육을, 사회를 상상할 수 없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우리에게는 대학에 가기 위해 장시간 공부 노동에 시달리는 고등학생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 목매는 25만 명의 취준생들이 너무나도 익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한국 사회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기에, 이를 넘어선 사회에 대한 가능성과 상상을 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했다.
제약된 상상 속에 진정 불공정한 것은 가려지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문은 점점 더 좁아만 간다.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지고 우리는 그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더 치열하게 경쟁하고, 서로를 밟고 일어서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제도권 밖에 위치한 약자들일수록 점점 더 사회적·경제적 안전망 밖으로 내몰린다.
공정성에 대한 치열한 투쟁은, 이제 이러한 잔인한 사회를 살기 지쳤다는 새로운 투쟁으로 도약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가지 않은 길’을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공정성 담론을 넘어선 사회, 전혀 다른 교육이 이루어지는 전혀 다른 사회 말이다. 직업이 서열화되어 있고 비정규직이 질 낮은 노동조건에 시달리지 않는 사회. 임금에 있어 정규직과 비정규직 차별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사회. 그에 따라 모두가 자신이 원하는 직업을 선택하고, 대학을 가고 싶은 사람만 가는 사회. 중등 교육 현장에서 대입이라는 한 가지 길이 아닌 교육 기회가 다양해지는 사회.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더라도, 약자까지도 안정되고 인간다움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오길 희망하며 이 글을 마친다.
BDUCK
- <[신년여론조사④] “공정과 안전”…2020 한국사회 핵심 가치>, news.kbs.co.kr/news/view.do?ncd=4354157 [본문으로]
- <문대통령, 공정만 37번 언급…분노한 청년민심 다독이기>, www.yna.co.kr/view/AKR20200919040100001 [본문으로]
- <[소득격차 확대]① 상위 10%가 싹쓸이…1980년대와 달라진 한국>, news.kbs.co.kr/news/view.do?ncd=4159214 [본문으로]
- <[소득격차 확대]⑨ 한번 비정규직은 영원한 비정규직인가>, news.kbs.co.kr/news/view.do?ncd=4189374 [본문으로]
- 이강빈, <민주시민의식으로서의 공정성에 관한 도덕교육적 의의 : 중등도덕교과교육을 중심으로>, 도덕윤리과교육연구, 제29호, 한국도덕윤리과교육학회, 2009 [본문으로]
- 최근 대학이 기업과 연계해 학생들에게 입학과 동시에 취업을 보장하는 ‘계약학과’를 신설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대표적으로 2021년 대입에서 고려대와 연세대는 SK하이닉스·삼성전자와 계약을 맺고 각각 ‘반도체공학과’, ‘시스템반도체공학과’라는 반도체 분야 계약학과를 신설하였다. [본문으로]
- <[단독]“고3 항암치료 고통… 환자돕는 의사 될래요”>, www.donga.com/news/People/article/all/20171225/87887947/1 [본문으로]
- <[잊혀진 청년들] 고졸, 임금 20만원 오를 때 대졸 50만원 훌쩍… 초과근로 비율은 더 높아>, www.hankookilbo.com/News/Read/201712020459627875 [본문으로]
- 하종강, <우리가 몰랐던 노동 이야기> [본문으로]